제 2장. 이탈, 혹은 일탈
(1)
선배의 집은 딱 선배가 살 법한 집이었다. 많지 않은 가구 수, 적당한 넓이, 상당한 내공이 묻어 있는 공간이었다.
“좀 좁지?”
선배는 그렇게 말했으나 혼자 사는 대학생의 자취방치고는 상당히 큰 크기였다. 선배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믹스 커피밖에 없네.”
“괜찮아요.”
말하고 보니 나도 헷갈렸다. 믹스 커피도 괜찮다는 뜻인지, 커피를 안 줘도 된다는 뜻인지.
하지만 선배는 전자로 알아들었는지 다시 묻지 않고 그저 무심히 커피믹스 봉지를 찢었다.
“맞은 덴 좀 괜찮아?”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 좀 추했죠, 어제?”
끓어오르는 전기포트의 전원을 끈 선배가 나를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그렇더라.”
“…….”
내심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랐던 나는 그의 솔직함에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런 일, 여러 번 당해 본 건 아니지?”
“……그건 아니에요. 뺨은 몇 번 맞아 봤지만.”
선배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며 나는 커피를 홀짝였다. 달짝지근하고 미끈미끈한 식감의 믹스커피가 입천장부터 목구멍까지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그래도 어제 걔는,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고민 끝에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걔가 저번에 농구부 회식 때 선배 보고 반했대서, 저보고 소개 좀 시켜 달래서 데려갔던 거예요.”
“…….”
하지만 선배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오해했네.”
“…….”
“그래서 진짜 나한테 다리 놔 주려고 했니?”
“…….”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리자 선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짓 하지 마. 여자 소개받은 적도 없고, 받을 생각도 없어.”
나는 가끔씩 하지 말아야 될 말을 한다.
“희윤이라는 사람 때문에요?”
“…….”
인간은 원래 그런 실수를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난번 선배에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선배는 그저 웃어넘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웃지 않았다. 묘한 무표정으로 나를 직시했다.
“한아.”
“……네.”
나도 모르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나왔다.
“신 같은 거, 믿니?”
“…….”
“그 중에서도 전도의 의무가 있는 종교 같은 걸 믿어?”
뜬금없는 소리에 긴장하고 있던 몸에 힘이 풀렸다. 나는 허탈하게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작문 과제 같은 거 있어?”
“아뇨.”
“그럼, 급전 필요하니?”
“그런 거 왜 물어봐요, 선배. 다 아니에요.”
“그럼 궁금한 게 뭐야, 한아.”
다시금 사람을 바짝 얼게 하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 톤 하나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또다시 튀어 오르기를 반복했다.
“왜 자꾸 나를 떠봐.”
손에 쥐고 있던 컵 안의 커피가 미세하게 파도를 쳤다.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따가운 눈 맞춤이 이어졌다. 나는 더듬거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선배가…… 매일 그렇게 얘기하니까. 제대로 된 연애를 하라고.”
“…….”
“근데 선배도…… 선배 연애 이야기해 준 적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가 없잖아.
“죽도록 사랑했어요, 그 여자?”
그러니까 내가 계속 그 여자랑 당신 생각만 하잖아.
선배는 별안간 작게 웃었다. 그런 걸 묻는 내가 어리다는 듯이, 혹은 어리석다는 듯이.
“나랑 희윤이는.”
방지 턱을 넘는 승용차처럼 가슴이 덜컹거렸다. 몇 번을 상상해도 온전히 와닿지 않는 일. 선배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렇게 뻔한 사이는 아니었지.”
“…….”
죽도록 사랑하는 것은 뻔한 일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런 사이가 아니었어.”
“…….”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고,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야. 서로의 흠이 필요해서.”
“…….”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랑이 이토록 낭만적으로 보이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들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선배의 눈빛이 종종 우수에 젖어 있기 때문일까.
“한아, 나를 네 이상향으로 생각하지 마.”
“…….”
“나는 그다지 좋은 본보기가 아니야.”
나는 뒤이어 나올 말이 두려웠다. ‘이젠 여자 친구와 헤어져도 나를 찾아오지 마.’ 선배가 그렇게 이야기해 버릴까 봐.
“갈래요.”
테이블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이거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죠?”
내가 먹었던 믹스 커피 봉지 정도는 버려야 할 것 같아 쓰레기를 한 손에 모아 그러쥐었다. 선배가 손짓으로 구석에 있는 휴지통을 알려 주었다.
나는 그 안에서 보면 안 될 것을 보았다.
***
엘리베이터가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갔다. 순식간에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으나 나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차라리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지하 저 밑으로 푹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팠다.
콘돔.
휴지통에 그것이 있었다.
이미 쓰고 버려진 콘돔.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 주저앉았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배웅하던 선배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든 것은 미지수였고 나는 암흑 속에서 경우의 수들을 되짚었다.
단 가지 용도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물건인 그것을 선배가 어디에 썼을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다른 답을 찾을 수 없어 괴로웠다.
선배가 내게 했던 말들이 실처럼 엉키고, 저들끼리 달라붙어 녹아 버렸다. 눈을 떠 보니 내가 선배의 집이 있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빴다.
“한아. 왜 돌아왔어.”
너무나 태연한 선배를 보는 순간 나는 그에게로 무너지고 싶었다. 발밑에 그어 놓은 선을 훌쩍 넘어 버리고 싶었다.
“선배. 저, 저 진짜…….”
“…….”
“저 진짜 쓰레기인 것 같아요…….”
나는 뒤꿈치를 들어 올려 그에게 입 맞췄다. 그와의 키스에선 싸구려 커피 맛이 났다. 달짝지근하고 끈적거렸다. 그조차도 황홀해 그의 혀를 씹을 뻔했다.
선배는 나를 현관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자 내가 먼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한아.”
선배가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미묘하게 차가운 얼굴로.
“이제 여자로는 만족이 안 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선배의 팔을 붙잡았으나 그는 나를 부드럽게 뿌리쳤다.
“선배, 그런 게 아니라…….”
그는 대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내 얼굴을 단단히 붙잡고 다시 나의 입 안을 탐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나는 이게 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아, 하아. 숨결의 끝에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흘리고 다녀.”
“…….”
“사람 헷갈리게.”
신발을 어떻게 벗었는지도 모르겠다. 선배는 나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눈앞에 보이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몸이 떨려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고는 그저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 먼저 어떠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아는 선배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알면 얼마나 알았던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계속 아무것도 아니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원래 시험지를 오래 숨기지 못하는 아이였다.
3일을 내리 버티다 결국 제 입으로 성적을 고해바쳤던 그 옛날처럼, 나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다시 입을 맞추었다.
선배는 다소 거친 손길로 내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겼다. 나 또한 그의 셔츠 단추를 풀고 싶었지만 땀이 찬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가 나의 웃옷을 벗겨내고 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을 때 나는 이러다 심장 마비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허리 들어 봐.”
선배는 능숙했다. 내 허벅지를 벌리고 그 사이로 들어온 그는 이미 알몸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그는 나를 벗기고, 스스로의 옷까지 벗은 것이다.
그는 내 머리 양옆으로 손을 짚고 고개를 숙여 내게 키스했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칼날 같은 콧대 위로 그는 선명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기 없는 무표정.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선배는 어딘가 나를 시험하는 듯한 태도였다.
“한아, 눈 감아.”
그러면서 목소리는 소름이 돋게 다정했다.
나야말로 그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가까워지고 가까워져도, 그는 먼 행성처럼, 거리를 유지하는 달처럼 아득했다.
“안 감아도 상관은 없는데, 내가 지금 웃을 자신이 없어서.”
나는 고분고분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떨리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내가 얌전하게 눈을 감자마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가 입술로 부드럽게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베어 물었다.
“아…….”
남자와는커녕 여자와도 관계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선배가 쥐고 흔드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의 손이 반쯤 발기한 나의 좆 위로 올라왔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떠 버렸다. 눈을 뜨지 말라더니, 나와 눈이 마주친 선배는 그저 내게 입 맞추어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나의 것을 쓸어 올렸다. 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덜덜 떨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진짜 헷갈리네.”
“흐읏.”
“한아.”
“아흐, 네?”
“여자를 열 명이나 사귀었다면서, 여기는 왜 이렇게 핑크빛이야?”
얼굴이 달아올랐다. 선배가 귀두를 강하게 문질렀고 나는 손목이 꺾일 정도로 거세게 시트를 쥐었다.
“그만, 흐으, 그만 만져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좆질 한번 제대로 못 해 본 애기처럼.”
선배가 이런 말을 하다니.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바짝 올라붙은 좆이 묽은 액을 뱉어냈다.
좋은데, 좋아서 죽고 싶었다.
“아, 할, 것, 같, 흐으읏.”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배 손안의 좆이 제멋대로 사정액을 쏘았다. 나는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바닥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동안 선배가 휴지를 뽑아 왔다. 그가 반쯤 몸을 일으킨 내 어깨에 입을 맞추며 조용히 말했다.
“한아, 도망치려면 지금 가.”
“…….”
“여자랑 할 때랑 달라. 지금 가면 책임 같은 거, 안 물어.”
옷까지 다 벗겨 놓고 이제 와서 선심을 쓰는 게 웃겼다. 게다가 선배는 남자랑 많이 해 봤다는 뜻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애써 쿨한 척을 하고 싶었다.
“저도 이런 거 좋아해요.”
코앞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그래?”
주욱. 그가 양손으로 내 벌어진 허벅지를 잡아끌었다. 속절없이 그의 쪽으로 끌려가며 몸이 침대 위로 다시 무너졌다.
한 번도 침범당한 적 없는 구멍 위로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구멍을 천천히 문지르다가 안을 열고 들어왔다. 처음으로 당해 보는 침입은 그다지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선배의 입술이 천천히 몸을 타고 내려왔다.
“읏.”
유두 위로 그의 혀가 닿는 순간 찌릿하게 전기가 튀었다.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틈을 타 그가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선배가 콘돔을 찢었다. 그는 내 것을 애무했던 손으로 제 좆을 몇 번 쓸어서 세웠다. 그리고 그것에 콘돔을 씌웠다.
“선배, 흣, 안 들어갈 거 같은데…….”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내 귓불을 빨면서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힘 빼면 들어가.”
“아아!”
눈물이 핑 돌았다. 몸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선배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아프니?”
눈물이 뚝 떨어졌다.
“네에, 네…….”
선배가 입술로 그것을 훑어갔다. 나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남자랑…… 처음이란 말이에요…….”
그 말에 선배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가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럼 어딜 더 빨아 줘야 할까.”
외설적인 말에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허벅지를 손으로 벌리고 몸을 숙였다.
“아, 잠깐……!”
투정을 부리지 말 걸 그랬다. 뜨거운 입김이 오므라든 구멍 위로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낯설고 무서웠다.
“으흣…….”
뭉툭하고 물컹한 것이 안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갔다. 한참의 애무 끝에 선배의 성기 앞부분이 다시 구멍 위에 닿았을 때, 구멍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아아!”
하지만 겉이 조금 녹진해졌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비좁은 안이 찢어지는 감각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응, 괜찮아. 한아.”
선배는 다시 마른 유두 위로 입을 맞추었다. 삽입은 진중하고 느렸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흐읏, 흐으.”
“꼭 애기처럼 우네.”
입술과 뺨, 목덜미로 잔잔한 입맞춤이 떨어졌다. 거의 다 들어갔어. 나를 달래는 목소리에 외려 경악스러웠다. 아직도 끝이 아니라니.
비좁은 것을 넘어서서 버거웠다. 하지만 라텍스로 덮인 귀두가 내벽을 가르며 들어올 때 느껴지던 미약한 쾌락, 눈앞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기어이 끝까지 밀어 넣은 선배는 잠깐 숨을 골랐다.
“한이는…… 원래 이런 식으로 여자 꼬시고 그래?”
“아, 아아, 선배, 아파요.”
깊이 박혀 있는 좆이 얕게 처박히면서 계속 비좁은 안을 억지로 열었다. 왈칵 울음이 터졌다.
“원래, 흐읏, 이렇게, 안, 꼬셔요, 흑.”
“아니.”
선배가 잠시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이번에는 봐주는 것 없이 꽉 밀고 들어왔다. 내장이 일그러지는 느낌. 귓바퀴를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너 분명히 이렇게 꼬시는 거야.”
“흐으윽.”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사람 헷갈리게 해 놓고.”
“아흐읏, 윽.”
한 마디 한 마디를 끊을 때마다 좆이 끝까지 틀어박혔다. 두꺼운 귀두가 전립선을 스칠 때마다 나는 흠칫흠칫 몸을 떨며 울었다.
“사실은 다 알고 있지, 너.”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보이는 선배의 얼굴은 빗금이 가득했다. 눈이 마주치자 흥분한 듯 숨을 짧게 내쉰 그가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렸다.
“너, 네가 잘생긴 것도 알잖아. 인기 많은 것도 알고. 너 없는 자리에선 다들 네 얘기 한단 것도 알고.”
좁은 안이 완전히 벌어지는 듯했다. 선배는 내 둔부를 잡아 양옆으로 벌렸다. 그게 더 박기 편한 모양이었다. 버거워하는 나를 달래듯이 허벅지를 토닥거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에 힘이 풀렸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나를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놀았다.
“하던 대로 백치인 척, 그렇게 여자나 꼬시면서 살지.”
“흐읏, 흐.”
“뭐가 아쉬워서, 자꾸, 사람을, 긁어대.”
단단한 손바닥 위로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짓씹듯이 말하는 선배가 낯설고 무서웠다. 그의 것을 꽉 조이며 느끼는 나의 몸이 무서웠다.
내가 대답 없이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자 양쪽 눈 위를 누르는 압박이 사라졌다. 대신 부드러운 것이 소름 끼치도록 끈적하게 그 자리를 대체했다. 선배의 혀였다. 그가 나의 눈자위를 핥고 있었다.
콱. 얕게 허릿짓을 하다가 마침내 끝의 끝까지 처박은 그가 내 눈물선을 핥으며 사정했다.
부어오른 입구로 선배의 좆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그가 콘돔을 벗기고 있었다.
“선배…….”
쉰 듯한 목소리로 선배를 불렀으나 그는 그저 말없이 새 콘돔을 뜯었다. 몸을 일으키자 느껴지는 내 숨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또 해요?”
“싫어?”
선배가 한 손으로 수음을 하여 좆을 다시 세운 뒤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내 손에 포장지를 찢은 콘돔을 들려 주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속의 콘돔을 꺼냈다.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세웠잖아, 너.”
콘돔 사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써 보는 것이 처음이라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나는 우뚝 서 있는 선배의 좆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더듬더듬 귀두 끄트머리에 콘돔을 걸쳐 놓았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선배는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잡고 그것을 씌우는 걸 도와주었다.
“흐읏.”
그가 올라붙은 내 좆을 가벼운 손길로 지분거렸다. 나는 그가 다시금 내 다리를 잡아 벌리고 구멍 위를 윤활유가 묻은 콘돔으로 문지르는 것에 그저 무기력했다.
나는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선배의 눈에는 혼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시켰던 대로 그저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 내가 정말로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거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게 된 후 그가 혹시나 부담스러워할까 싶어서.
다시금 다물린 구멍 사이를 가르며 좆이 들어오는 것과 그의 혀로 입이 틀어막히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그 후로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그가 나를 편하게 잡아먹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
천장의 모양새는 모든 집이 다 비슷할 텐데 나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그것이 내 집의 천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낯선 이불의 촉각.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뻐근한 통증과 함께 기억의 편린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막판에는 그에게 매달려서 애처럼 울었다. 세 번째 콘돔을 바꿨을 때부턴 아프다고 할 때마다 그는 달래듯이 내게 키스했다. 그래서 나는 아프지 않았는데도 아프다고 했고, 선배는 속았는지 속아 주었는지 알 수 없는 태도로 입 맞추어 주었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게 진짜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곳이 선배의 집이 아니었다면, 100퍼센트 꿈일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상황이 현실성 없고 아득했다.
나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침대 아래의 속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경직에 떨리는 손으로 옷가지까지 말끔하게 입고 나서야 주변을 조금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선배는 어디로 갔는지 방 안에는 나뿐이었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한 손으로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을 더듬으며 걸었다.
아침 햇살 아래에서 본 선배의 공간은 미니멀리즘을 지양하는 사람의 것처럼 단정하고 담백했다.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으레 선물을 받곤 하는 불필요하고 조잡한 인테리어 용품이 하나도 없었다.
작은 액자조차 없이 하얀 벽에는 못질을 한 자국조차 없었고 책상 위에는 깔끔한 디자인의 작은 서랍 옆에 노트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남의 집을 마음대로 뒤져서는 안 된다는 게 상식이라는 것쯤은 알았지만 나는 책상 위의 서랍을 열어 보고 싶어졌다. 선배가 담아 놓고 사는 것들이 궁금했다. 계산기라든가 비타민이라든가 모자라든가 하는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나의 집과는 다르게 선배는 겉으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손끝에 닿는 딱딱한 감각이 이질적이었다. 그냥 서랍일 뿐인데. 별것도 아닌데.
첫 번째 서랍에는 비싸 보이는 만년필과 깎아 쓰는 연필 등이 빼곡했다. 색이 연한 색연필 몇 자루도. 그제야 나는 그가 문창과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겼다.
처음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두 번째 칸에 들어 있는 것은 첫눈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생소한 것들이었다.
폴라로이드 사진들.
그가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기에 나는 천천히 그 사진들을 모두 밖으로 꺼냈다. 대부분 풍경 사진들이었다. 길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라든가, 텅텅 비어 있는 한낮의 강의실이라든가, 이따금씩 멀리 가서 찍어 왔을 게 분명한 바다 사진도.
그 모든 것들 위에는 수려한 글씨체로 당시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그 날짜들을 다시 확인해 보고 그것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보았다.
5년 전 여름 선배는 바다에 갔다. 가을엔 책을 읽었나 보다. 서른 권은 족히 넘어 보이는 책을 쌓아 놓은 사진이 있었다. 4년 전 봄에는 떨어진 꽃잎을 찍어 두었고 그해 겨울엔 밟혀서 검게 색이 변한 눈길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선배의 모든 사진은 그때 멈추었다. 4년 전 겨울. 선배가 군대를 가기 직전에.
나는 차마 배열하지 못한 마지막 한 장의 사진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유일하게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사진이었다. 유일하게 선배의 모습이 나온 것이었고.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선배. 머리도 더 길고, 더 앳되고, 어쩌면 더 외로워 보이고…….
사진 속의 선배는 인상을 더더욱 차갑게 만드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려지지 않는 준수함이 있었다. 그는 입술로 연필 끄트머리를 물고 있었다. 사진이 찍히는 줄도 몰랐을 것이 분명한 시선 처리. 골몰하고 있는 눈썹. 단단히 맞물려 있는 입술.
그리고 마침내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린 나는 울렁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성공을 갈망하는 멍청한 장시현에게.’
나머지 사진들에 적혀 있는 날 티가 나는 글씨체와는, 누가 봐도 공통점을 찾아낼 수 없는 동글동글하고 새초롬한 글씨체로, 누가 봐도 타인에게 선물 받은 게 분명한 그런 멘트가 적혀 있었다.
성공을 갈망하는, 장시현에게…….
선배가 그런 것, 그러니까…… 성공 같은 것을 바라는구나.
누군가의 눈에 그가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 자괴감이 들도록 만들었다. 나는 한 번도 그의 그런 모습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으니까. 기회가 있었다고 한들 나의 무딘 섬세함으로는 확인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불 주위를 서성거리는 날벌레처럼 나는 폴라로이드 사진의 뒷면을 돌려 보았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는 건 불길로 뛰어들고 난 후에야 알았다. 시커먼 글씨들이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애쓰지 말고 같이 실패하자.
실패하고, 포기하고, 요절내 버리자.’
꾹꾹 눌러 쓴 글씨를 나도 모르게 더듬어 보았다. 혹시 아직까지 자국이 남아 있을까 싶어서.
‘사랑만도 못한 성공 따위야.’
생각도 말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그 글귀를 읽고 알게 되었다. 생각의 문이 턱 막혀 버렸다.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고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선배의 가장 가운데 부분을 들여다보았는데, 이상하게 그는 한참을 더 멀어져 있었다.
암기에 취약한 나조차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말이었다. 사진들을 고르게 정리해서 다시 서랍 속으로 집어넣는데 머릿속에서 계속 알 수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랑만도 못한 성공 따위야.’
누구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인지, 이게 대체 어떤 무의식에 있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망상을 떨쳐내려 애를 썼다. 어차피 무언가를 상상하는 일은 내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고 나는 어떤 생각에 깊이 매몰되는 것을 기피하는 성향이었다. 탁, 서랍을 닫음과 동시에 복잡한 생각 덩어리들을 단숨에 잘라냈다.
손이 절로 그 아래 마지막 서랍으로 향했다. 이제는 단순한 궁금증이라기보다 어떠한 의무감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마지막 서랍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영영 알아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불분명한 것과 고통스러운 것 중 후자가 낫다고 여겼다.
하지만 마지막 서랍을 열자마자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그 안에 든 것 중 하나를 꺼냈다.
콘돔이었다. 어제 쓰레기통에서 봤던 것과, 내 손에 쥐여 주며 그의 것에 씌우게 했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콘돔.
서랍 바닥을 꽉 채우며,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콘돔 박스들이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다.
단순한 나는 그를 더더욱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론 내릴 수가 없었다.
전 여자 친구가 준 사진 한 장을 몇 년이 넘도록 가지고 있으면서, 그 바로 밑에는 언제든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단을 보관하고 있다. 평소에 보여 주는 모습은 한없이 단정하고 어른스럽지만 어제 잠자리에서 내게 속삭였던 말은 전에 없이 적나라했다.
그 간극이 나를 좌절하게 했다.
‘성공을 갈망하는 멍청한 장시현’이라는 말은 상당히 무게감 있게 내 머리를 내리쳤다. 그토록 친숙하고 애정 넘치게 그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였을지는…… 당사자에게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다.
그냥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카메라가 인물을 담는 각도, 흔들림 하나 없던 고민 한번 없이 적었을 게 분명한 글씨체, 그 뒷면의 역설적인 메시지.
‘희윤’이라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새삼스럽지 않았다. 선배 같은 남자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늘 내게 ‘제대로 된 연애’를 하라고 말하는 그라면, 그런 사진쯤이야 충분히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을 테지.
그런 거라면 왜 나와 잤을까.
내가 특별해서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은 쓰레기통에 있는 콘돔을 보고 나서였으니까.
하룻밤 상대였던 걸까.
쓰레기통 속의 콘돔을 썼을 그 누군가와 같은…… 그냥 하룻밤 원나잇 상대.
그렇게 생각했는데도 이상하게 슬프다거나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과거의 인연에 얽매여 전전긍긍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겨졌다.
선배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까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끔 만든다.
삑삑삑삑. 밖에서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콘돔을 손에 쥔 채로 굳어 버렸다.
“한아, 일어났어?”
손에 검은 비닐 봉투를 들고 돌아온 그가 나를 부를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급하게 그것을 다시 서랍 속에 넣고 서랍 문을 닫았다.
콰당탕. 조잡한 소리가 낯부끄러웠다.
“왜 그렇게 놀라.”
내가 제집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뭐 좀 먹을래?”
그가 비닐 봉투에서 사 온 것들을 꺼내 놓았다. 나는 멍하니 두유 같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어디 갔다…… 왔어요?”
“편의점. 그 전에 헬스장 들렀다가.”
체력도 좋았다. 이 아침 댓바람부터…….
“벌써 12시야, 한아.”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혹은 내가 표정 관리를 못 한 것인지 선배가 부드러운 어조로 반박했다. 나는 그의 말에 1시 수업에 갈 수 있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미련 없이 그 가능성을 날려 버렸다. 결석 점수 한 번이야 시험으로 메우면 그만이다.
선배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허리를 강타하는 통증만 아니었다면 나도 그렇게 믿고 말았을 정도로 태연하게.
나는 말없이 그가 주는 음식들을 받아먹었다. 이따금씩 음식을 씹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치를 보았으나 그는 더럽지도 않은 집 안을 말끔하게 정리해 놓고 있었다.
그에게 특별히 묻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초조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혀를 내어 입술을 연신 핥았다.
“그래서…….”
선배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떻게 하고 싶어, 한이는?”
그러나 마치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처럼.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돌처럼 굳어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로 그제야 시선이 와 닿았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고 싶냐고?
선배는 항상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만 묻는다.
“나는 한이한테 맞춰 주고 싶은데.”
“…….”
“한이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차라리 내가 먼저 물어볼 걸 그랬다. 그럼 선택권을 넘길 수라도 있었을 테니까.
나는 한참을 침묵했으나 선배의 인내심은 나의 예상보다 더 길었다. 그의 검은 눈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혔다.
나는 결국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제.”
“응.”
“저기서…… 콘돔을 발견했어요.”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더듬거리듯이 말하자 선배가 당혹스럽다는 듯이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
“그냥 저도 모르게 그랬어요. 죄송해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말을 했다. 뜬금없는 사과에 나조차도 당황했다. 그와 내가 잔 것이 내가 죄송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죄송한 건 아니고, 그러니까.”
“…….”
하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몰라요. 저도 모르겠다구요.”
나 또한 이런 상황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다지 진취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그냥 남들이 다 하길래 공부를 했고, 그나마 그것에 재능이 있어 잘 풀렸고, 내가 좋다는 사람과만 연애를 했다. 나는 격렬히 무언가를 원한 적이 없다.
‘성공을 갈망했다’는, 선배와는 다르게.
선배와의 관계는 지금이 딱 좋았다. 더럽게 바쁜 선배를 유리창 너머로 훔쳐보고, 이따금 그가 일하는 곳에 가서 얼굴을 보고,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그 핑계 하나로 겨우겨우 만남을 가지고.
딱히 그와 뭘 어쩌고 싶은 게 아니었단 말이다.
물론 섹스까지 해 놓고 관계가 전과 같기를 바라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토록 노련하던 선배와는 다르게 나는 이 모든 게 처음이었고,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다그치려는 거 아니야, 한아.”
“…….”
“그러니까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 하지 말아.”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내가 그의 앞에서 어떤 표정을 하는지 늘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안 울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이따금 그의 다정함이 지나치다고 느껴졌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다정할 필요가 있나. 그래 봤자 남인데.
하지만 그는 필요한 순간에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었다.
그런 기반이 있기에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던 거다. 타인에게.
“너도 모르게 그랬다는 말은 실수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맞니?”
“…….”
우물쭈물하는 나를 보고 선배가 픽 웃었다.
“혼내려고 묻는 거 아니라니까.”
내가 또 그런 얼굴을 했나 보다. 울 것 같은 표정을.
나는 선배만큼 언어 사용 능력이 뛰어나지 않는데, 맨날 문창과 사람들을 보는 선배는 본인의 특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실수’라는 단어가 어떤 범위까지 포용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머뭇거렸다.
“한아, 보통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상황 정리, 혹은 입장 표명이라는 걸 해.”
“…….”
“네 입장이 궁금할 뿐이야.”
그는 덤덤했다.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본 사람 같았다. 나는 어젯밤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버려진 콘돔 하나에 퓨즈가 끊어진 것처럼 이성을 잃었던 나와, 이제 여자는 시시하냐며 묻던 선배의 차가운 음성.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것을 했다. 나에겐 처음이었지만, 선배에겐 처음이 아니었던.
어떻게 하고 싶냐고?
이제 와서 그런 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그럼 나는.
“저는…… 그냥 아무래도 괜찮아요.”
“…….”
고작 잠자리 한 번으로 모든 걸 수포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선배도 알잖아요. 저 가벼운 애라는 거.”
“…….”
당신을 잃을 순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잖아.
“저 쿨한 거 좋아해요. 이기적인 것도.”
“…….”
당신한테 이게 별일이 아니라면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마 그의 눈을 볼 수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가 쓸쓸하고 냉랭했다.
“할 말 끝났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선배를 바라보았다. 일말의 웃음기가 말소된 차갑고 미끈한 얼굴. 선배가 이런 인상이었던가.
“……네.”
“네 말 무슨 뜻인지 알았어.”
인내하듯이 절제하면서도 친절한, 이상한 목소리였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한아.”
“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용건 끝났으면 이만 내 집에서 나가 줘.”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수업을 가기에 넉넉한 시간이 남았지만 나는 학교 대신 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옷도 벗지 못한 채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용건 끝났으면 이만 내 집에서 나가 줘.’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 친절히 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내가 문밖으로 발을 내딛는 것을 보고 차갑게 문을 닫아 버렸을 뿐이다.
그의 태도를 보고서야 알았던 것 같다. 내가 했던 말을 그가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그리고 그가 원나잇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의 말 한마디에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러 보았다. 심장이 뛰는 게 선연히 느껴졌다.
내가 다르게 대답했으면 어땠을까.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를 바보로 만드는 생각인 듯하여 머릿속에서 작위적으로 끊어냈다.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것을, 직접 봤으니까.
선배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흔한 키스 마크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들이 모두 생생히 기억났다.
밤마다 반쯤 기울어 있는 침대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 이후로 일주일, 나는 일상으로 돌아가 학교에 나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인문관 주변을 서성거렸다. 차마 그가 일하는 곳에 찾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쿨하고 이기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은 나였기에.
하지만 우연으로라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관계였다.
이런 점이 참 싫었다. 기약이 없다는 것.
그와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
분명히 이름도, 얼굴도, 전화번호도 아는 사이인데, 아득히 멀기만 하다는 것.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일주일 하고도 사흘이 더 흐른 후, 어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술집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