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과거 농구부 에이스였던 아무개가 제대해서 환영회를 한댔나. 아무튼 내가 절대로 선호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자리였다. 민재 형이 아니었다면 얼굴을 비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주말인데 할 일도 없는 거 아니냐며 선배 노릇을 하라는 성가신 요구에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술자리에 나갔다.
“한아, 살 빠졌어? 며칠 전에 운동할 때보다 좀 마른 것 같은데?”
“그래요? 밥 챙겨 먹기가 귀찮아서…….”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답하자 농구부 선배들은 어서 와서 앉으라며 접시 위에 안주를 퍼 담아 주었다. 일본식과 한국식이 오묘하게 섞인 안주 구성이었다.
나는 밥을 먹으러 온 사람처럼 파전과 해물탕만 깨작거렸다. 남자들의 대화에 쉽게 끼지 못하는 성향 탓에 뒷담화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다. ‘내숭을 피운다.’는 것이 그 뒷담화의 골자였다.
그래도 그나마 농구부 선배들은 나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졌는지 내가 구석에서 안주를 먹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는 이따금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만 두어 번 끄덕거리며 안주를 해치웠다.
솔직히 선배가 일하는 그곳의 음식보다 수백 배 정도는 낫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는데 알바생이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내가 앉아 있는 뒤쪽 테이블의 ‘예약석’ 푯말을 치웠다. 나는 멍하니 술집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농구부 테이블의 옆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손짓했다.
“시현 선배! 여기!”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벼운 가디건 차림의 선배가 나의 바로 뒷자리 의자를 스윽 끌어당겼다.
“……장시현?”
사람들과 신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민재 형이 그의 얼굴을 확인한 듯 말을 뚝 끊더니 먼저 말을 걸었고, 선배가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이 내게는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느릿하게 자각되었다.
“어, 민재야. 이렇게 보네.”
“뭐야, 과 사람들?”
선배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긴 농구부.”
“알아, 이제 대충 얼굴도 외우겠다.”
선배의 시선이 좌중을 쓱 훑더니 내게로 닿았다. 나는 그 눈길을 피할 겨를도 없었다.
“한이도 있었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뒤를 돌아 의자에 착석했다. 내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몸의 모든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뒤 테이블의 대화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이 과제 지옥이 이제 시작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선배, 나는 가끔 한글이란 걸 보고 있으면 헛구역질 날 때도 있다니까.”
“야, 여기까지 와서 우울한 얘기 할래?”
“그래, 윤 교수님 과제 끝낸 기념으로 모인 건데. 술이나 처먹자.”
정작 선배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냥 술잔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하아. 알코올의 유독함에 한숨을 뱉는 목소리들 중 어느 것이 선배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씨발. 내일 1교시 가기 존나 싫다. 발제 시간마다 다들 눈에 불을 켜. 100분 토론 온 줄 알았어.”
“그러니까 그거 듣지 말라니까. 멀쩡하던 애들도 그 수업만 들어가면 정신 이상자처럼 군다고.”
“원래 그랬던 애들이 그걸 들으면서 본성을 깨우치는 게 아니고?”
문창과 사람들도 욕을 하는구나. 신기하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선배를 불렀다.
“시현 선배, 근데 선배 무슨 일 있었어?”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굽히고 있던 등을 꼿꼿하게 폈다.
“응?”
“선배 글, 뭔가 달라졌던데.”
“그래?”
선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림이 낮은 웃음소리를 듣자 등 뒤로 소름이 끼쳤다.
“아, 나도 아까 읽는데 느껴지더라. 선배가 원래 글을 그렇게 썼던가? 싶은 부분들이 있었어.”
“그 현소이 김 교수님이 작년에 선배 글 존나게 깠었잖아.”
선배가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 그때 절필할 뻔했잖아.”
다정다감한 목소리. 대외적인 선배의 모습이었다. 나는 말없이 내 앞의 술을 들이켰다. 앞에 있던 농구부 형들이 건배도 안 하고 먹냐며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땐 김 교수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거든요? 글이 죽어 있다는 게. 왜냐면 촌년 글빨인 내가 보기에 선배 글은 감각이 살아 있단 말이야.”
“…….”
“근데 오늘 선배 거 읽으니까 대비적으로 좀 와닿던데.”
“…….”
“김 교수님 솔직히 글 보는 눈 하나는 좋은 거 같아.”
“그럼. 해먹은 세월이 얼만데.”
이번엔 선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야, 근데 우리는 왜 맨날 술 처먹으러 와서 결국 또 글 얘기로 귀결되냐? 지겹다, 지겨워.”
“숙명이야. 그냥 받아들여요.”
“하루 온종일 앉아서 내 글 쓰고 지우고 남의 글 읽고 품평하고, 그거 말고 하는 거 없잖아, 다들. 나 방학에 딱 2주일 책 끊었거든? 근데 진짜 살 것 같더라.”
다들 불평불만을 토해내는데, 선배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욕망을 참기 위해 나는 술을 마셨다.
“아무튼, 시현 선배 대체 뭘 어쨌길래 글이 변했냐구. 나도 좀 해 보게 공유해 봐.”
“글쎄.”
“와, 저, 저, 여우처럼 웃는 거 봐.”
“진짜 뭐 안 했어. 나 일주일 내내 일하느라 바쁜 거 너네도 알잖아. 방금도 카페에서 일하다 왔는데.”
“그럼, 뭐, 딱 하나잖아. 연애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가 말끝을 흐렸다.
“연애? 글쎄, 딱히…….”
“딱히? 그건 온전한 부정이 아니잖아!”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연애 같은 거 안 해. 이렇게 여지없이 문 닫아 줘?”
“어우, 능구렁이 같아. 그렇게 웃지 마.”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그걸 인지하자마자 어깨를 늘어트리며 몸에 힘을 풀고자 애를 썼다.
“야, 연애를 해서 글이 그만큼 바뀌면 나는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다짜고짜 키스도 할 수 있어.”
“그건 그렇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지, 글이란 게.”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는 다시금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나는 알 것 같은데. 선배 글이 변한 이유.”
“뭘?”
“희윤 선배 돌아왔다며.”
심장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선배는 알고 있었지?”
“…….”
“알고 있었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다들 한 마디씩을 보태며 웅성거림을 형성했다.
진짜? 이미 학기 시작했잖아. 언제 왔는데? 학교 다니고 있었던 거야?
“연락은 왔었지.”
그 말을 듣는데,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그것 때문은 아니야.”
에이, 거짓말.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 또한 믿지 않았으니까.
“근데 시현 선배, 좀 미안한데.”
“응?”
“사실은 여기로 불렀거든.”
“누굴.”
“희윤 선배.”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짜증 나기 시작했다. 나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면 목소리들은 더더욱 또렷해졌다.
“멕일라고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선배 온단 말 없었잖아. 선배 오늘 일하느라 안 올 줄 알고 불렀지.”
선배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널찍한 등만을 보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선배 오자마자 말하고 싶었는데 틈이 안 나더라고. 미안.”
“…….”
“아마 곧 도착할 거야.”
이름 모를 선배의 후배는 선배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자리를 먼저 뜰 기회. 옛 연인과의 조우를 미룰 기회.
“그래?”
하지만 선배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랜만에 얼굴 보겠네.”
그가 그토록 태연한 이유를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민재 형이 따라 주는 술을 원샷 했다.
선배는 도망가지 않으니 내가 도망가야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선배의 그 대단한 첫사랑을 마주할 준비도,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도.
아마 그 꼴은 영영 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민재 형, 저 이제 슬슬 가 볼게요.”
“왜. 내일 일요일이잖아. 약속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더 있다 가. 이따 OB 선배님들 오신대.”
나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집에 꿀단지 묻어 놨어?”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그 지긋지긋한 레퍼토리. 여자 친구 만나러 가기로 했어? 어쩌고저쩌고…….
“집에 갈래요…….”
손을 뒤로 더듬어 외투를 잡았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취해서 생각 정리가 잘되지 않았다. 집에 가서 자고 다음 날 불필요한 생각들을 가지치기하고 나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내가 헛손질을 하는 것을 본 민재 형이 키득거렸다.
“뭐야, 이 새끼. 취했네. 화장실 좀 갔다 와.”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정면으로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쨍 하는 종소리가 내 귀엔 쨍그랑, 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키가 제법 큰 여자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뒤 테이블의 사람들이 그를 반기기 전에 알고 말았다.
희윤. 그 여자였다.
***
그 여자, 희윤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달랐다. 너무 달라서 도대체 어떻게 내가 한눈에 그가 그라는 것을 알아보았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엄청나게 예쁘지, 장시현 전 여친.’
그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뻤다. 내가 생각하는 그 방향이 아니었을 뿐.
‘청순한데 도도하고. 성격도 좋아. 하도 잘 웃어 줘서 이상한 남자 새끼도 많이 꼬였었고.’
청순하고 도도한 얼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상상했던 것은 긴 생머리에 고양이 눈 따위였다. 하지만 희윤은 나의 비좁은 상상력의 문을 단박에 깨부쉈다.
정확히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였다. 짧고 검은 칼 단발머리, 그것과 대비적으로 순해 보이는 눈매, 얇고 기다란 입술 선.
“희윤 선배!”
저를 부르는 이를 향해 시크하게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보이는 여유.
시원시원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민재 형의 말이 마저 떠올랐다.
‘그러다가 둘이 사귀고부턴 날파리 꼬이는 게 싹 없어졌잖아. 저들도 아는 거지. 장시현 정도 돼야 넘볼 수 있는 여자라는 걸.’
“선배 어쩜 이렇게 그대로야? 하나도 안 늙었어?”
“김지환, 죽을래? 1년밖에 안 지났거든?”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를 쫓았다. 그는 종업원에게 능숙한 영어로 “Excuse me.” 하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저기요, 했다. 종업원은 빠르게 간이 의자와 빈 컵, 접시 등을 가져다주었고 그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 환하게 웃었다.
희윤은 웃는 얼굴이 꼭 태양 같은 여자였다.
“……장시현, 하이.”
선배를 발견한 그가 잠시 선배를 바라보다 픽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들의 재회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선배는 여유로웠다.
“한…… 3년 됐나? 더 잘생겨졌다. 잘 지냈나 봐?”
“보시다시피.”
선배와 희윤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주변인들을 긴장시켜 놓고 저들은 만사태평해 보였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숨이 막혀 괴로웠다.
“서한, 어디 가!”
“잠깐, 화장실에요…….”
나는 그 순간 뒤를 돌아보는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그 무감한 눈동자를 보자니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입을 막고 술집을 뛰쳐나갔다.
구역질이 올라온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했다. 다만 악질적인 그 감각만이 지속되며 나를 괴롭혔다.
찬바람을 맞으니까 술이 조금 깨는 것도 같았고, 취기보다 더한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도 했다.
쿨함 그 자체였다. 열렬했을 첫사랑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고 한 치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그런 얼굴로 잘생겨졌다며 칭찬을 하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던 일을 희윤과 선배는 자연스럽게 행했다. 차가운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밖에서 서성거리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돌아간 술자리는 여전히 화끈하고 시끌벅적했다. 나의 테이블이나 옆 테이블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선배의 위치부터 살폈다. 선배는 자리를 옮겨 있었다. 내게서 가장 먼 자리로. 우리 테이블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로.
“야, 한아. 괜찮냐? 얼굴 빨개.”
“은지 왔는데, 인사했어?”
은지가 누구더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기억해냈다. 안녕, 은지야. 어색한 내 인사말에 그가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내외해요, 오빠?”
“너네 둘, 뭐가 있긴 있는 거지?”
“있긴 뭐가 있어요, 형.”
은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을 하길 바랐으나 그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비스듬히 웃고만 있었다.
“같이 서 봐. 그림 한번 보게.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이미 저 좋을 대로 믿고 있는 인간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상대해 봤자 내 입만 아프다.
“은지는 한이 어디가 마음에 드는데?”
“잘생겼잖아요.”
“그러고 보니 둘이 같은 학과 아냐?”
“하여튼 서한 대단한 거 알아줘야 돼. 남자만 득시글거리는 운동 동아리에서도 여자를 만나네. 쟤네 과 애들은 어떻게 쟤만 보면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냐?”
은근히 이죽거리는 형들의 화법에는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이 떠들게 놔두고 원래 나의 자리였던 선배 테이블의 뒷자리로 돌아와 그들의 대화를 다시금 엿들었다.
그들도 제법 취했는지 말소리가 커져서 대화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다.
“씨발, 재능이 없어. 재능이.”
다짜고짜 귀 안으로 박히듯이 들어오는 첫 마디가 취기 섞인 욕설이라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씨발, 고등학교 다닐 적엔 백일장이란 백일장은 다 휩쓸었단 말이야? 나는 내가 존나 잘 쓴다고 믿고 대학에 왔는데, 와 보니까 내 재능 존나 애매해. 좆나 애매하다고, 씨이발! 어흐흑.”
어우, 진상은 여기나 저기나 하는 짓이 비슷하구나. 나는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다가 문득 선배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고개를 돌려 그를 살폈을 때,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무표정했다. 그 무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우리 테이블에서 하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한이는 진짜 여자 없이 못 사나 봐? 언제 헤어졌다고 벌써 또.”
“야야, 질투하지 말고 냅 둬. 봄이잖아. 꽃도 필락 말락, 날씨도 좋은데 연애해야지.”
여기도 형들 목소리가 어지간히 컸다. 하나, 둘, 다섯……. 테이블 위의 소주병 개수를 세다 포기하고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댔다.
어질어질한데, 사람들 말소리는 너무 잘 들려서 탈이었다.
“희윤 선배, 근데 선배 어디 있다가 왔어?”
“나?”
높고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멀리서 들어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천진한 목소리.
“그냥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 버렸잖아. 어디 간단 말도 없고, SNS 다 탈퇴하고.”
“그랬지.”
“어디로 갔었는데?”
“네덜란드.”
“네덜란드?”
“응, 네덜란드.”
네덜란드. 네덜란드라는 나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떠올려 본다. 정말 몇 개 되지 않는다. 반도체 제조업의 수익이 큰 경제 강국. 튤립이 유명하고…… 그 정도.
“왜 하필 네덜란드데?”
“자유의 나라잖아.”
“…….”
“아무도 나 모르는 데서 남의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내가 한국어로 무슨 말을 해도 다 못 알아듣고. 한국어로 욕 실컷 하고 왔지. 덕분에 한국어 감 떨어져서 글 못 쓰고 있긴 하지만.”
“와, 지긋지긋한 한글 안 봐도 된다는 게 제일 부럽다.”
귓가가 멍멍했다. 남들이 하는 말이 다 평평하고 잔잔하게 들렸다. 아무리 그들이 악을 쓰고 우는소리를 해도.
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였을 뿐인데.
“좋았겠네.”
아무것도 아닌 네 글자였을 뿐인데, 왜 나는 첫 음을 듣는 순간 선배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 버릴까. 내겐 그의 목소리만이 유일하게 입체적이었다.
“좋더라.”
둘은 대수롭지 않게 그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럼 둘은 계속 연락하고 있었던 거야?”
희윤이 웃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한국 들어오기 일주일 전에 내가 카톡 되살려서 장시현한테 연락했었지.”
아아. 의미 없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희윤은 그 미묘한 공기를 놓치지 않았다.
“너네, 나랑 장시현 때문에 불편하구나?”
희윤이 웃으며 물었다. 그 앞의 후배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냐, 선배. 그런 게 아니라…… 여기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처음 보는 애들도 많고, 둘 다 워낙 유명하니까.”
“그래, 시현 선배 군대 가고부터는 선배만 있었고, 선배가 갑자기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부터는 시현 선배가 복학했잖아. 그러니까 1, 2학년 애들은 잘 모르지.”
희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별것도 아닌 걸 구구절절 설명하는 후배가 재밌다는 듯이.
“너희 눈치 보여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그가 키득거렸다.
“잠깐 빠져 줄게. 편하게 얘기들하고 있어.”
“뭐야, 어디 가. 둘이 회포라도 풀게?”
휘익. 누군가 야유하듯 휘파람을 불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을 때, 선배가 내 옆을 지나가 문 쪽으로 걷고 있었다.
희윤과 함께였다.
그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며 상황을 자각했다. 희윤이 선배를 데리고 나가고 있었다. 선배가…… 제 첫사랑과 단둘이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선배가 없는 테이블의 대화는 들어도 듣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한 귀로 들어온 요란한 소음들이 그대로 반대쪽 귀로 흘러나갔다.
나는 술집 창문의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오로지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눈을 뗄 수 없던 선배의 옆모습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그들을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선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참다못한 나는 막무가내로 술집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인지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별자리가 저 혼자 빙빙 돌았다.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군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을 즈음이었다.
“오빠.”
나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나의 또 다른 연적, 은지였다.
“괜찮아요? 왜 이렇게 취할 때까지 마셔요, 맨날.”
“……그냥 술이 약한 거야.”
“그래 보여요. ‘수리 야칸 거아.’ 방금 그렇게 말한 거 알아요?”
“몰라. 너 왜 여기 있어?”
“농구부 매니저니까요.”
“그랬나…….”
나는 술집 바로 앞 문턱에 주저앉았다. 은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휴, 진상.”
“야.”
생각보다 말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네?”
“마음 접어.”
짜증 난다. 왜 다 이 모양이지. 선배는 왜 이렇게 잘나서 당신 좋단 사람이 이렇게 많지. 근데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지.
마구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데도 눈앞이 선명해지질 않았다.
“무슨 마음이요?”
“너, 누구 좋아하는 마음, 그거 접으라고.”
“왜요?”
“짜증 나니까.”
“인성 실화예요, 진짜?”
은지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으며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다 관둬. 좋아하지 말라고.”
“내가 누굴 좋아하는 줄 알고 관두래?”
“……선배한테 관심 있다며.”
머리가 무거워 고개가 절로 툭툭 떨어졌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 말하는 거예요?”
5미터?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멀리, 건물을 허물고 시멘트만 남은 공터에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배와 그 여자.
“저게 그 장시현 첫사랑?”
“야, 너 버릇없게…….”
“다시 만난대요?”
그건 생각도 안 해 본 문제였는데. 은지의 그 말 때문에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은지를 노려보자 억울하다는 듯이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거 아님 다 끝난 남녀 둘이 저 으슥한 데서 뭐 하는 건데요?”
희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비흡연자인 선배는 벽돌 무더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희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희윤은 이따금씩 그토록 무해하게 웃었고 선배 또한 한쪽 입꼬리를 올려 화답하곤 했다.
내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를 찾아갔을 때 담배를 피우던 내 앞에 앉아 웃었던 것처럼.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고, 선배도 나를 피하지 않았다. 선배의 시선이 다른 곳에 고정된 것을 본 희윤 또한 말을 하다 말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둘 사이의 빈 공간을 노려보았다.
“오빠, 눈알 빠지겠어요.”
“…….”
“흑역사 만들지 말고, 일단 집에 가요. 오빠 지갑이랑 핸드폰 챙겨 왔어요.”
은지가 내 팔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도 선배는 내게서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선배의 표정을 살피던 희윤이 피식 웃었다. 희윤의 입 모양이 뭐라 뭐라 변했고, 그 말을 들은 선배의 미간이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그 또한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 일련의 과정들을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를 또렷하게 쳐다보며 그쪽으로 걷자 그의 표정이 점차 묘해졌다.
둘의 대화를 엿듣고 싶지 않았으나 나는 본능적으로 선배의 음성을 감지하고 말았다.
“좋다고 갈 땐 언제고 빈손으로 돌아왔어, 추하게.”
“뭐? 추해? 장시현, 내가 추하다고? 너 진짜 웃긴다.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 되냐?”
희윤이 큰 소리로 웃었다. 둘 사이에는 차마 끼어들 수 없는 기류가 있었다. 오래되었으나 낡지 않았고 선이 다르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서로 닮은.
선배는 희윤 앞에서 편안하고 진실해 보였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꺼내어 보여 주는 중이었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알 수 있었다. 평소의 내가 알던 그와, 잠자리에서의 처음 보았던 그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성공을 갈망하는 멍청한 장시현이라고 했던가.
희윤의 앞에서 선배는 그저 온전한 장시현이라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모습도 보여 주었겠지.
괜히 자학적인 생각이 들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다. 내 팔을 잡은 은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그래도 나는 결혼은 너랑 할 생각이었는데.”
마지막으로 들린 희윤의 그 고백에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희윤아, 꿈 깨.”
선배는 단호하게 그의 프러포즈를 거절했다.
하지만 나는 그 내막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퉁이를 돌고서야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잦아들었다. 나는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오빠, 괜찮아요?”
은지의 걱정 어린 물음마저 먹먹한 귓가에는 잘 인식되지 않았다.
“난 집에 알아서 갈 테니까 너도 이만 가.”
잡고 있던 팔을 놓아 버렸다. 은지가 나를 뒤에서 붙잡았다.
“오빠, 혼자 삽질하지 말고 집 가서 씻고 자요, 알았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야.”
“네.”
“나한테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마.”
“…….”
“나는 너 달갑지 않아.”
술김에 하는 말은 항상 솔직해진다. 덤으로 뾰족해지고.
한번 입이 트이니 말이 쏟아져 나왔다.
“솔직히 너한테서 내가 무슨 이득을 볼지 모르겠어. 나한테 관계는 기브 앤 테이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근데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거라곤 지저분한 소문 말고는 없어. 내가 너한테 줄 것도 그것 말곤 없고. 근데 왜 이렇게 사람 귀찮게 해.”
“취하니까 진짜 솔직하네.”
“우리는 서로한테 마이너스야. 내가 너를 선배랑 연결시켜 줄 일도 없어.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고. 그러니까 에너지 낭비 하지 말고, 너 그냥 잘생긴 스무 살 만나. 너한텐 그게 잘 어울려.”
“오빠.”
은지가 씩 웃었다.
“나한테 뭐가 잘 어울리는지는 내가 판단해요.”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오빠한테 내가 무슨 이득이 될지는 좀 생각해 볼게요. 분명히 있을 거예요.”
“…….”
“하다못해 이렇게 나한테 화풀이라도 하잖아요?”
내 말문을 막아 놓고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새삼 오빠 인성 진짜 나쁜 거 같아요.”
집 가서 술이나 깨세요. 오빠 지금 발음 다 꼬여서 엉망이니까. 그 뒤로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듣지도 못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가로등도 깜빡거리고 별들은 빙빙 돌고 나는 울적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집 안까지 들어가지도 못했다. 공동 현관 앞에서 엎어진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가물가물 감겨 오는 눈꺼풀을 참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망할 놈의 술기운…….
***
“……아, 한아, 서한!”
나를 부드럽게 뒤흔드는 감각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눈앞에 서 있는 선배를 보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선배?”
무슨 이런 꿈을 꿔, 싶었으나 눈을 아무리 비벼 봐도 눈앞의 선배는 그대로였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다가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일어섰다. 나는 도무지 내 눈을 믿을 수 없어서 허벅지를 꽉 꼬집어 보았다. 아아. 내가 신음하자 별짓을 다 한다는 듯 선배의 눈썹 모양이 조금 변했다.
“여기서 뭐 해, 한아.”
나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고 내가 술에 취해 엎어진 곳이 내 집 앞이 아니라 선배의 집 앞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나는 딱딱한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보기보다 술버릇이 못됐네.”
“선배…….”
“이런 데서 자면 입 돌아가. 아직 쌀쌀한데 겁도 없이.”
“죄송해요.”
선배 앞에만 서면 내가 민낯으로 서 있는 것 같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를 하게 된다.
“뭐가 죄송한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선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들어가, 한아.”
선배는 혼자였다. 기막히게도 나는 그것에 의해 안도감을 느꼈다. 그가 희윤과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자조했다.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가려고 했으나 나는 그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의 앞을 막아서자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 있니?”
할 말은 없었다. 하고 싶은 말만 가득할 뿐이었다.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구분조차 안 되는 선을 들쑥날쑥하게 넘는 말들.
“선배 원래 남자랑도 자요……?”
“…….”
“원래, 원래 그러는 거예요?”
사실은 그것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봤던 그 콘돔은 누구랑 쓴 거냐고. 희윤이 한국에 돌아왔다는 것을 정말 미리 알고 있었냐고. 그럼 오늘 이전에 그를 따로 만난 적이 있었냐고.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내가 물어볼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이 아닌 것 같았다.
“한아.”
선배가 후우, 한숨을 내쉬곤 나를 불렀다. 생각해 보니 그도 술을 마셨을 텐데 그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혹은 내가 아직 술이 깨지 않아 잘 구분을 못 하는 걸 수도.
“그날 일은 나도 후회하고 있어.”
그는 내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말을 꺼내 놓았다. 후회하고 있다고. 머리가 쨍하고 아프기 시작했다.
“사전에 확실한 합의 없이 맺은 관계는 네가 처음이었고, 원래는 그렇게 충동적이지 않아. 그래서 네가 하고픈 대로 해 주겠다고 한 거였고.”
“…….”
“아무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날 내가 너를 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선배는 고개를 돌리며 더운 숨을 뱉어냈다. 여러 감정이 뭉친 듯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피곤해질 줄 알았는데도…….”
그가 덩어리진 뒷말을 차분하게 삼켜냈다. 나는 그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불안했다. 선배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늘 당혹스럽고 나를 정지시키니까. 그는 늘 나보다 두 뼘이나 더 앞서 있었다. 나는 시간이 지나고야 그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로 인해 피곤해졌다고 말했다. 아니, 나로 인해 피곤해질 것이라는 걸 진작 알았다고 했다.
“저 때문에 안 피곤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많이 귀찮게 안 할게요. 별거 아닌 것처럼 대해 주셨으면…….”
“아니.”
“…….”
“너 참 대단해, 한아.”
나는 그의 맥락을 쫓아갈 수가 없어 눈만 깜빡였다.
“그렇게 뻔한 수법에도 넘어가게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뻔한 수법…….
“네가 어떤 앤지 뻔히 알겠는데, 아는 사람들까지도 홀리게 만들 정도로 너 보통 아니야. 나만 해도 네 인생에 훈수를 둬 놓고 보기 좋게 네게 놀아났잖아.”
“선배.”
“꼭 금기 같은 애야, 너는.”
“…….”
“한 번 깨면 돌이키기 어려워.”
서늘한 바람이 그로부터 내게로 불었다. 그의 말 또한 날카롭게 나를 스쳤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그날 같은 일 다시는 없을 거야.”
“선배.”
그가 지금 하는 말이 더 이상 나와는 엮이지 않겠다는 말 같아서 두려웠다.
“너 하던 대로 그냥 살아.”
“…….”
“나도 더 이상 네 모호함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울컥 올라오는 감정으로 목 부근이 뜨거워졌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으로 그를 더듬었다.
“선배, 그럼…….”
“…….”
“옛날처럼이라도……. 여자 친구랑 헤어지면 연락은, 그건 해도 되는 거죠.”
“…….”
선배의 시선이 따갑게 나를 지나갔다. 질린다는 듯한 얼굴에 덜컥 겁이 났다.
“그 정돈 해도 되는 거죠, 선배.”
“……그래. 그렇게 해.”
그의 경멸 어린 대답을 듣고도 나는 안도했다. 그를 볼 수 있다. 헤어지면 된다. 헤어지고 찾아가면 예전처럼이라도 지낼 수 있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한아.”
“네, 네.”
“네 불분명한 모든 것들 중에…….”
“…….”
“그 표정이 사람을 제일 헷갈리게 해.”
“…….”
“알고 있니?”
여전히 멍한 얼굴인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선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발을 뗄 수가 없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선배에게 옷을 빌리지 말았어야 했나. 내가 적이 얼마나 많은 인간인지 스스로 알면서 그가 일하는 곳에서 얼쩡거리다 그에게 피해를 입힌 순간을 후회해야 하나.
그에게 입 맞추었던 그 순간을 후회해야 한다면 그건 너무 비참할 것만 같아서…….
선배는 ‘그날’을 후회한다고 말했지만, 내겐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나는 후회할 수 있는 날이 없었다.
그로부터 상처를 받은 오늘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