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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역린(1) (10/25)

제 4장. 역린

(1)

선배는 결국 로스쿨 입학시험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희윤이 나를 카페로 불러내어 알려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리트 모의고사 점수가 나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집안에서도 막상 로스쿨 붙으면 좋다꾸나 하고 받아 줄 게 뻔하고.”

“……다행이네요.”

희윤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 그 말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일이니까. 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한 씨 되게 착하네요. 난 지금 되게 배 아픈데. 걔 혼자 이 지옥을 탈출한다고 생각하니까.”

“별로 안 착한데요.”

내가 착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선배를 대하는 나의 태도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희윤은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씩 웃었다.

“그날 화해는 못 한 거죠, 결국?”

“눈치가 빠르시네요.”

“둘이 화해를 했으면 지금 내 앞에 서한 씨가 앉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장시현 그 자식도 요새 저기압이어서 말도 못 붙일 정도로 사납게 굴고.”

“…….”

나는 희윤과 선배 사이를 종잡을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둘은 아주 각별한 사이 같다가도 어느 때 보면 아주 차가운 남 같았다.

“선배랑 다시 사귀실 거예요?”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는 나조차도 놀랐다. 이걸 진짜로 물어볼 생각은 없었는데.

희윤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노코멘트 해도 돼요?”

“왜요?”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장시현이 알게 되면 나중에 지랄할 것 같아서요.”

지랄하는 선배……. 역시나 상상 불가.

나는 희윤이 좋았다. 감정적으로 좋다기보단 객관적으로 나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찡그리는 법 없이 잘 웃어서 선량한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선배랑 다시 잘된다고 해도…….

“걔 요새 매일 중앙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우연인 척 가서 마주쳐 봐요.”

“…….”

상념에 잠겨 있던 내게 희윤이 다시 한번 힌트를 던져 주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요?”

“이제 안 찾아가려고요.”

이유라든지 동기라든지 과정이라든지,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선배의 어떤 결심을 흔들리게 하고, 그것이 그의 미래에 지장을 준다면 그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확 말해 버릴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네.”

“…….”

“걔 그대로 내버려 둬서 그 갑갑한 집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면 보고 싶어도 못 봐요. 부모가 붙여 주는 예쁜 여자랑 선봐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럴 텐데.”

희윤이 자꾸 아픈 데를 찔렀다. 마치 다 아는 사람처럼.

나는 애써 웃었다.

“그게 선배 선택이라면 존중해요.”

어차피 그와 내가 특별했던 적도 없으니.

그의 말마따나 입술이 몇 번 닿은 것은 별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게는 첫 경험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니었으니 수많은 경험 중 한 번이었을 뿐일 테고.

희윤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데없이 착하다니까. 장시현 취향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만 일어날까요? 오후에 수업이 있어서.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테이블을 정리하려고 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놓쳤는데 강의실까지 뛰어가도 겨우 지각을 면할 듯했다.

희윤과 나의 빈 컵을 양손에 챙겨 들고 일어서는데 내 쪽으로 누군가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확인했다.

“……연서 누나?”

전전 여친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나는 물벼락을 맞았다. 셔츠 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차가운 음료와 얼음에 그대로 얼어 버렸다.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아주 기분 더러웠다.

“더러운 걸레 새끼.”

“…….”

“내가 내 눈에 띄지 말랬지? 근데 네가 감히 다른 여자랑 여기를 와?”

놀란 희윤이 토끼 눈을 한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그것도 달짝지근한 향의 시럽이 함유된. 바닐라 향 같았다. 연서 누나가 바닐라 라떼만 마시긴 했었지.

“안녕, 누나.”

“뭐 이런……!”

나는 말없이 손에 쥔 컵들을 바로 앞의 트레이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휴지를 뽑아서 셔츠를 대충 닦으며 말했다.

“미안. 앞으로 여기 안 올게. 누나 여기 자주 오는 거 몰랐네.”

“너 가관이더라, 진짜. 나랑 헤어진 날 클럽 가서 원나잇 해 놓고, 그다음 주부터 혜주 언니랑 사귀었더라?”

대학가 소문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나는 반박할 의지를 상실하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끄트머리에 맺힌 커피를 조금이나마 털어냈다.

“이번엔 또 새 여자니?”

나는 오해를 받은 당사자인 희윤이 항변을 할까 싶어서 걱정을 했는데 희윤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그저 가만히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입꼬리를 위로 올린 채로.

“그래서, 나한테 이러니까 속은 좀 풀렸어?”

“…….”

“왜 아깝게 이렇게까지 해.”

나는 카운터로 향해 주문을 받는 직원을 불렀다. 죄송한데 제가 커피를 쏟았거든요. 저 자리예요. 네, 정말 죄송합니다. 직원은 아이스버킷 챌린지라도 한 것처럼 커피를 뒤집어쓴 내 몰골을 보고 어버버 말을 더듬다가 알았다며 가 보셔도 된다고 대답해 주었다. 자리로 돌아오자 연서 누나는 나를 아주 미친놈 보듯이 봤다.

“살다 살다 너 같은 애는 처음이야.”

처음보다는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 톤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얼음 섞인 음료를 들이부은 사람도 누나가 처음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공연히 더 화를 살 것이 분명했으므로.

“똑바로 살아, 서한.”

연수 누나는 그 말을 남기고 제 친구와 함께 사라졌다. 내게 남은 것은 카페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악 어린 시선과 나를 보고 웃고 있는 희윤뿐이었다.

“……가요, 그만.”

희윤은 박수를 세 번 쳤다. 대단하다는 듯이.

“와아, 나 이런 거 드라마에서만 봤는데. 완전 강 건너 불구경.”

“…….”

이 상황이 막장이라는 건 짚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데 희윤은 얄밉게도 웃었다.

“괜찮아요? 옷 다 젖었다.”

“괜찮아요. 일단 수업 들어가야 돼서, 이따 끝나고 저녁에 집에 가서 씻어야죠.”

“그 꼴을 하고 학교를 간다고요?”

“어떡해요. 지금 가도 지각인데. 출석은 해야 돼요.”

희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내내 싱글거렸다.

“근데 서한 씨 어지간히 화끈하게 살았나 봐요. 장난 아니던데.”

한숨이 나왔다. 변명을 해야 할 타이밍인 것 같긴 한데 다 귀찮았다.

“말했잖아요. 저 안 착하다고.”

희윤은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게 착하고 안 착하고의 기준이에요? 귀엽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내게 연분홍빛 손수건 하나를 건넸다.

“쓰고 돌려줘요.”

거절할까 했으나 아직도 셔츠 아래의 맨살이 축축한 것이 느껴졌으므로 말없이 받아 들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까지 희윤과 함께 걸었다. 헤어지기 직전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내일 장시현 만나면 얘기해 줘야지. 다음에 또 봐요.”

“그러지……!”

그러지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는 그대로 신난 발걸음으로 뛰어가 버렸다.

희윤의 뒷모습을 보고 온몸에 긴장이 풀려 몸이 축축 처졌으나 나는 빠른 걸음으로 화학관으로 향했다.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힐끔거리는 익숙한 시선들은 오늘따라 유독 짙었고 충분히 그럴 만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정처 없이 걸었다. 걷다 보니 이곳이 내 자취방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곤 눈앞에 보이는 건물에 내 미련한 발을 탓했다. 중앙 도서관. 불이 환하게 켜진 건물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정신 차리자. 여긴 왜 온 거야. 집에 가서 당장 씻고 감기약을 먹어도 모자랄 판에.

그런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나는 그냥 기다리고 싶었다.

저 도서관 창문 사이로 보이는 빛들이 하나둘씩 잠식되고, 그러고 나면 곧 그가 술집으로 알바를 가야 할 시간이니까.

그를 좋아하지 않겠다 다짐한다고 해서 많은 것이 변하는 게 아니었다. 일상은 똑같았다. 내가 부질없는 연애질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제외하곤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마음을 먹었으면 뭐라도 달라져야지. 하다못해 발걸음이라도 가볍게 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뒤를 돌았다. 정말 집으로 갈 생각으로.

하지만 그동안 몇백 번을 인문관 앞에서 서성거렸음에도 단 한 번도 마주칠 수 없었던 얼굴이 3미터 전방에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떤 마음으로도 발걸음을 재촉할 수 없었다.

선배였다. 분명히.

그 또한 걸음을 멈춘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두꺼운 문제집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로스쿨과 관련된 책인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는 흐릿하게 번지는 바닐라 향기에 그제야 내 꼴이 엉망일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원래 같았으면 차갑게 나를 스쳐 갔을 선배가 눈썹을 찌푸리고 나를 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에게 추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바람이 뻣뻣해진 앞머리를 가를 때마다 얼굴을 가릴 것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더 숙였다. 시야에 그의 단화가 점점 가까워졌다. 몸을 움츠리고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잔잔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몰골이 왜 그래.”

나는 멈칫하고야 말았다.

“무슨 일 있었어?”

그런 다정한 음성은 반칙처럼 느껴졌다. 제 앞에 알짱거리지 말라고 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와 있었던 일은 별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물어보는 건 잔인한 일이 아닌가.

“실수로 뭘 좀 쏟았어요.”

“또 누가?”

내가 쏟았다는 뜻으로 이야기를 한 건데 선배는 너무나 쉽게 진실을 간파해냈다. 나는 솟구쳐 오르는 설움을 누르느라 계속해서 침을 삼켜냈다.

“괜찮니?”

하지만 선배가 그렇게 묻는 순간 그 노력이 부질없게도 눈물 한 방울이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그런 꼴까지 보이고 싶지는 않아 그를 스쳐 지났다. 그가 뒤를 돌아봐도 소용이 없도록 빠르게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재생되었다. 괜찮니? 한아. 괜찮니? 괜찮니? 괜찮니……?

그의 그 무분별한 다정함이 너무 좋았다.

              ***

감기에 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감기약을 먹고도 몸이 뻐근했으나 과제 폭탄을 맞은 대학생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은 없었다.

며칠 내내 미열과 기침이 안 떨어져 골골거렸다. 때때로 기침을 쏟아내는 몸으로 도서관에 가기에는 눈치가 보여 빈 강의실에서 과제를 하는데 누군가 내 책상 위에 편의점 쌍화차를 탁, 소리가 나게 올렸다. 나는 문제를 풀다 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은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

“너도 만만치 않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내 눈엔 은지의 얼굴도 제법 상해 있었기에. 은지가 허탈하게 웃었다.

“원인 제공자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신선하네요.”

내가 뭐 그렇게 큰 원인 제공을 했다고. 자기 마음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조금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내 바로 앞의 의자를 빼서 앉으려는 은지를 보고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야, 좀 떨어져.”

은지의 얼굴이 흠칫 떨렸다. 나는 한숨과 함께 변명하듯 말했다.

“감기 옮아.”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해요? 사람 설레게.”

“…….”

“왜 꼭 띠껍게 말하고 나서 행동은 그렇게 자상해요? 바람둥이의 표본처럼 말이에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과묵하게 했다.

“내 고백 생각은 해 봤어요?”

나는 그제야 나를 괴롭히던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려 은지를 바라보았다.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한 칸을 떨어져서 앉은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저 진짜 진심인데, 안 그래 보여요?”

“그래 보여.”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보자 늦은 오후의 햇빛이 점차 붉은 빛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좋아해요. 오빠의 그런 자상함을.”

“…….”

“지금처럼 싸가지 없는 것조차 좋아질 만큼이요.”

그런 순간이 있다. 없는 감정이 일렁이는 순간, 마음을 온통 다른 데 빼앗겨 있어도 나를 감싸는 손길에 온기를 느끼는 순간이.

선배가 아니었다면 이 애와 사귀게 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때론 누군가 나를 깊이 생각해 준단 것만으로 따뜻해지기도 하니까.

“정리하는 게 좋겠다, 은지야.”

전 여자 친구들이 헤어지고서 한결같이 묻는 것이 있다. 나를 좋아하긴 했냐고. 절대로 내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 같던 혜주 누나마저 비슷한 것을 물었다.

좋아하긴 했냐고?

나는 그들에게 의지했다. 지지대 없이는 올곧게 자라지 못하는 식물처럼 그들에게 기대어 계절을 버텼다. 그러니 연애의 감정이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한들 어떻게 함부로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 그만큼, 그만큼만을 좋아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큰 기만 같았기에 나는 항상 입을 닫았고 배로 욕을 먹는 쪽을 택했다.

“네 마음이 유별나게 부담스럽거나 싫어서가 아니야.”

그러므로 선배와의 관계가 일그러지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히 은지에게 의지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제각각 다 다르지만 결국 비슷한 온도로 귀결되듯이.

“이젠 여자 안 만나려고.”

은지에겐 다행인 일이다. 나는 식물처럼 여자들의 애정을 빨아먹으니까.

“내가 연애 대상으로 좋은 남자가 아니란 건 봐서 알 것 아냐.”

“알죠.”

은지는 억지로 웃지 않았다. 웃기지 않으면 웃지 않는 그런 애였다.

“원래 남을 짝사랑시키는 남자들은 연애 대상으로 좋지 않아요.”

“…….”

“그것도 모를 만큼 눈치가 개똥이거나, 알면서도 선 긋지 않고 사실은 즐기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거나.”

“…….”

“셋 다 별로잖아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수긍했다.

“공부 조금만 하고 집 가서 푹 쉬어요. 감기 얼른 낫게.”

“그러고 싶은데 과제 때문에.”

은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을 털어내듯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맞다, 우리 분리 공정 팀플로 퀴즈 과제 나왔던데.”

“그거 내가 해서 제출했어. 어젯밤에. 네 이름 안 뺐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왜요?”

“내가 너보다 똑똑하니까.”

기함하는 은지의 표정을 보고 눈을 접어 웃었다.

“1학년은 가서 연애나 해.”

“…….”

“누가 나하고 관계에 대해서 물어보면 내가 고백했는데 네가 찼다고 하고. 이유는 대충 갖다 붙여.”

은지는 나를 잠시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람둥이처럼 굴지 말라니까요.”

“…….”

“짝사랑하는 사람은 다 알면서도 설레니까.”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다시 과제에 집중하자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문이 닫히고 나는 그제야 빈 강의실을 돌아보았다.

‘원래 남을 짝사랑시키는 남자들은 연애 대상으로 좋지 않아요.’

‘그것도 모를 만큼 눈치가 개똥이거나, 알면서도 선 긋지 않고 사실은 즐기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거나.’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문창과의 첫사랑이라던, 수많은 짝사랑을 받으며 살아 온 선배는 어느 쪽일까.

나처럼 마지막이라면, 그러니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면 슬플 것 같았다. 그럼 너무 사슬처럼 연결된 짝사랑 묶음 같은 꼴 아닌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희윤도 선배를 좋아하는 거였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매듭을 지어 줘야 이 연쇄적인 외로움이 끝나는 거라면, 선배가 그것을 쟁취하기를 바랐다.

한 시간이면 끝낼 과제를 세 시간이 넘도록 질질 끌며 나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남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남자라서 안 된다던, 그렇게 현실적이고 현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남자를.

              ***

감기가 나을 때까지 일주일 정도 농구부 활동을 쉰 탓에 몸이 잘 안 풀려 스트레칭 과정부터 고생을 했다. 한두 시간 만에 나가떨어져 스탠드에서 헉헉거리며 선배들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운동 후에는 반팔도 덥게 느껴질 만큼 날씨가 따뜻해져 있었다.

새내기 매니저 하나가 내게 뛰어와 이온 음료를 건네주었다.

“고마워.”

나는 매니저들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늘 보던 익숙한 얼굴이 없었다.

“은지는?”

“안 나왔어요.”

매니저는 약간은 나를 경계하는 태도였다. MT 같은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 친해지질 못했으니까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알았어.”

“탈퇴하겠다고 하던데…….”

예상치 못한 말에 이온 음료를 들어 올리던 손이 멈췄다.

“저번 주에 브릿지에서 다 같이 술 먹었는데 탈퇴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하아. 한숨이 나왔다. 왜 하필 또 브릿지야.

“걔가 원래 자기는 농구 같은 거 관심도 없었다고 앞으로 안 나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민재 오빠가 달래고.”

전혀 몰랐다. 민재 형이나 은지나 그 후로 따로 연락한 적이 없었으니.

“그리고 중간에 거기 알바생이 그 둘한테 나가라고 해서, 분위기가 좀…….”

“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매니저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개의치 않고 그를 독촉했다.

“뭔 소리야?”

“근데 저희도 잘 몰라요. 다들 취하기도 했고, 상황도 이상했고, 그 알바생분이 그러는 것도 처음 봤고…….”

“그 잘생긴 알바생 말하는 거 맞아?”

“네, 네. 키 엄청 크고 원래는 되게 잘 웃으시고.”

선배가 맞았다. 다른 날에 거기서 일하는 놈들은 다 못생겼다.

“원래 농구부 회식 거기로 가면 서비스 많이 주잖아요. 그날은 하나도 안 줬어요.”

“둘이서 뭐라고 했길래 선배가 그랬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무슨 상황이었는지.”

“…….”

“근데…….”

매니저가 잠시 뜸을 들였다.

“중간중간에 오빠 이름이 좀 나와 가지고…….”

매니저는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제가 말실수를 할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던데.”

“…….”

“괜찮아. 말해 봐.”

“오빠 그…… 과에서 부르는…… 별명 있잖아요.”

“뭐, 걸레?”

매니저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내 별명 알고 있는 게 뭐가 어때서. 표정만 보면 하늘이라도 무너진 줄 알겠다.

“민재 오빠가 걔 달랜다고 막, 음, 그랬는데, 그 알바생이 그거 듣고 표정이 싹 굳어 가지고.”

“…….”

“앞으로 거기 못 갈 거 같아요.”

민재 형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그걸 네 입으로 말해 보라고 했다간 내 앞의 매니저가 울기라도 할 것 같았기에 참았다. 대충 예상이 안 가는 바도 아니었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선배의 태도였다. 이상하게 선배는 그 말에 과민 반응을 했다. 자기한테 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말인데.

“너희가 좀 놀랐겠네.”

매니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저희끼리 엄청 찬양했었거든요, 그분.”

“…….”

“다정하시고, 또 과도 멋지고.”

“…….”

“근데 저희 찍혀서 이제 문전 박대 당하면 어떡하냐고…….”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하는 것에 비하면 실로 귀여운 고민이었다. 부럽기도 했고.

“친하신 것 같은데 말 좀 잘해 주세요.”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아 입꼬리가 쑥 내려가 버렸다.

“……미안하게 됐네. 별로 안 친해서.”

갑작스럽게 차가워진 나의 대답에 매니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머리가 아팠다. 상상하지 않으려고 해도 나를 괴롭히는 그의 목소리.

‘뭐라더라. 네가 걸레란 걸 사람들이 다 알아? 듣자 듣자 하니까. 그딴 말을 듣고도 웃어 줄 마음이 생겼니?’

왜 그렇게 말해요. 신경 쓰는 것처럼. 나한테는 흔들리는 것도 안 된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내 일에 신경을 써. 남이 나를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이라고.

나까지 그런 내 별명이 신경 쓰이잖아.

              ***

집에 돌아가는 길에 희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손수건이 생각났다. 카페에서 그가 빌려주었던. 그날 선배를 마주치는 바람에 그딴 것은 까맣게 잊었었다.

“여보세요?”

-서한 씨!

희윤의 주변이 시끄러웠다.

-내 손수건 언제 돌려줘요? 그거 나한테 중요한 건데.

“내일 수업 몇 시에 끝나세요? 제가 인문관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희윤이 뭐라고 대답을 했는데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아, 씨. 얘들아, 좀 조용히 해 봐! 서한 씨, 문자로 시간표 보낸다구요!

모르겠다. 내일 다시 연락해야지. 네, 네, 대충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였다. 멀리서 희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이는 언제 온대?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

-아니, 이따 걔네 집 잠깐 가기로 했어.

나도 모르게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희윤의 입에서 나오는 ‘시현이’라는 호칭이 굉장히 낯설고…… 두려웠다.

질투할 입장도 못 되는 내가 가지기에는 버거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악몽을 꿨다.

그 꿈에서 선배와 희윤이 재결합을 했다.

그들은 선배의 집에 있었다. 선배는 희윤에게 믹스 커피를 건넸고 둘은 지난 이야기를 나누다가 키스를 했다. 희윤이 특유의 나긋나긋함으로 선배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 애기 같은 앤 누구야?’

‘누구?’

선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보다 아아, 하며 픽 웃었다.

‘설마 한이?’

‘감정이 철철 흘러넘치는 눈으로 너를 보던데?’

‘그런 모습이 귀엽기는 하지.’

‘…….’

‘그런데 남자애잖아.’

선배는 나른하게 웃으며 희윤의 한쪽 볼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안 되지.’

둘은 다시 키스했다. 희윤이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서랍을 열었다. 콘돔을 꺼내는 손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원래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보고 싶었어, 희윤아.’

선배의 음성이 절절했다.

‘너밖에 없었어.’

‘…….’

‘다른 사람이랑 잘 때도 네 생각만 했어.’

내게 하던 것처럼 희윤에게 키스하는 선배는 비로소 완전해 보였다.

“허억.”

꿈에서 깨어난 나는 거칠게 얼굴부터 문질렀다. 물기가 묻어 나왔다. 왜. 고작 이런 꿈으로 울고 있는 거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부터 했다. 머릿속을 빙빙 도는 꿈의 잔영들을 모조리 떨쳐 버리기 위해 애썼다.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따사로운 햇살이 방을 가득 비추었다. 오후까지 잔 것이다. 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문자함엔 희윤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희윤은 자신의 시간표와 함께 3시쯤 인문관으로 오라는 말을 전했다.

지금은 2시 반. 나는 당장 희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생생한 꿈 직후에는 감정이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 문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핸드폰을 던져둔 채로 슬리퍼에 발을 구겨 넣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물고 니코틴을 흡입하자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담배를 몇 개비 연달아 피우고 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 문자함을 열어 보았다. 희윤의 시간표를 확인하니 3시부터 4시 사이가 비어 있고 4시부터 7시까지 다시 수업이 있었다. 내 수업도 6시쯤 끝나니 7시 전에 인문관에 가서 손수건을 돌려주면 되겠다.

희윤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택배로 물건만을 보내는 방식은 무례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런 걸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선배의 전 여자 친구이고, 내게 선배에 대해서 많이 알려 주기도 했으니 나 또한 그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주는 게 맞다.

그러고 보면 희윤은 내게 잘해 줘야 할 의무가 조금도 없음에도 이상하게 내게 친절했다. 구김살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선배처럼 조금의 약점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인물.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내가 자신의 전 남자 친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 기절할 게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미묘하고도 이상한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 그를 속이고 있다는.

어쩌면 모든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희윤은 나를 탓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선배의 마음을 가진 쪽은 그쪽일 테니까. 그리고 그편이 나를 더 비참하게 할 테니까.

나는 햇살 같던 희윤의 웃는 모습을 상상하다 비슷하게 웃어 보려고 노력했으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어색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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