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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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라리 상사병이든 열병이든 거하게 앓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듯도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몸은 너무도 건강했다. 원래 잔병치레가 없는 편이기도 했고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과제를 보니 아플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주 콜록거리며 쉬지도 못하고 과제를 휘갈겼던 기억이 떠오르자 아팠으면 좋겠다는 일말의 바람마저 쏙 들어갔다.

나는 그의 동선을 피해 다녔다. 그가 일하는 술집과 카페 쪽으로는 등교도 하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지인이 있는 농구부는 과제와 시험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생각보다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그를 피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에게 그저 좋은 후배로 남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그래서 시간을 돌린다면 그와 육체적으로 얽히지는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와 잠을 자고 난 후부터는 뭘 해도 그런 쪽으로 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희윤과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외설적인 상상을 했고 그런 나 스스로에게 경악했다.

어쨌든 나의 짝사랑은 그토록 허무하게 끝나 버렸고, 덕분에 약 1년 만에 유의미한 연애 공백기를 가지는 중이었다. 은지는 더 이상 나를 귀찮게 굴지 않았고 전 여자 친구들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취업 스터디에서 고백을 한 번 더 받았지만 좋은 말로 돌려 거절했다.

외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의무적인 연락도 할 필요 없고 게임도 마음껏 할 수 있고.

핸드폰을 꺼 두고 과제와 게임만을 하며 며칠을 폐인처럼 지내던 나는 빨래를 하기 위해 옷을 뒤지다 희윤의 손수건을 발견해내고 아연실색했다. 맞다, 이거 돌려주러 갔었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켜자 희윤에게서 다수의 문자가 와 있었다.

[서한 씨, 무슨 일 있어요?]

[그럼 제 손수건은요?]

[Hello?]

[Nobody there?]

나는 문자창을 위로 올려서 희윤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두 시간 뒤 그의 수업이 끝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문자를 입력했다.

[오늘 가져다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답은 오지 않았다. 나는 내 멋대로 그것이 수긍의 뜻이리라 짐작했다.

기대한 적도 없으나 당연하게도 선배에게선 한 통의 연락도 없었다.

인문관은 한낮인데도 참 조용했다. 아니, 학교 전체가 조용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의아해져 이마를 긁적거렸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는 동안 단 한 명의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말이 안 된다 싶어 날짜를 확인한 나는 학교 홈페이지까지 들어가서야 오늘이 우리 학교의 개교기념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미친놈. 스스로를 향한 욕이 튀어나왔다.

나는 한숨을 쉬고 텅텅 비어 있는 강의실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나는 원래 오늘 수업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긴 매 학기 몇백만 원씩 무자비하게 뜯어 가는 학교의 개교기념일 따위 알 게 뭐람.

다시 게임이나 하러 가려고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반대쪽 강의실에서 희미한 음성이 새어 나와 나는 발길을 멈추었다.

“언니, 시현 선배랑 무슨 사이예요?”

작은 음성인데도 선배의 이름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심장이 정지하는 기분. 나는 한 발자국 그 강의실 쪽으로 가까워졌다.

“음, 이런 짓은 안 하는 사이?”

희윤의…… 목소리였다.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딛자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럼 왜…….”

한 발자국 더.

“걱정하지 마.”

마침내 반쯤 열린 문 앞에 선 나는 미친 듯이 떨리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떠는 거야.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는 사람처럼…….

“맹세컨대 단 1초도 장시현 좋아한 적 없으니까.”

희윤은 창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머리가 긴 여자가 있었다. 지난날 카페에서 봤었던 그 여자인 듯했다.

“걔도 그럴걸?”

강의실 안으로 햇살이 공격적으로 밀고 들어와서 희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였다. 목소리, 말투, 모든 것이 희윤이었다.

“난 너 같은 스타일이 좋더라.”

희윤이 손을 뻗어 여자의 긴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예쁘다구, 너.”

멍하니 내 눈 앞에 펼쳐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가 보는 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냥 보고만 있었다.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상태로.

바람에 하늘거리는 긴 머리칼.

살랑거리는 원피스.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여자를 만지는 손길과…….

서서히 맞닿는, 립스틱을 칠한 붉은 입술들.

콰당탕. 영화 같던 둘의 키스가 멈추었던 것은 내가 핸드폰을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긴 머리의 여자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핸드폰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희윤과 눈이 마주쳤다.

“……예진아, 뒤돌아보지 마.”

내가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여자의 고개를 제 쪽으로 고정시켜 놓은 성큼성큼 희윤이 내게로 걸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 내 코앞까지 온 그는 내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한 손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뭐야?”

꿈이라면 이쯤 깨는 게 맞는데 희윤의 손에 의해 당겨진 뒷목 부근에서 뻐근한 통증이 느껴져서 나는 강제로 현실을 자각당했다.

“너 뭐냐고, 이 새끼야.”

나는 희윤에게 쌍둥이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고야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희윤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입꼬리가 낯설었다. 내가 그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생소한 얼굴이었다.

“어디서부터 봤어?”

너무 자연스럽게 반말을 내뱉는 공격적인 태도에 혀가 얼어붙었다. 나는 여러 번 침을 삼키고 겨우 말했다.

“……손수건 돌려 드리려고 왔어요.”

주머니에서 보드라운 것을 꺼내 내밀자 희윤의 얼굴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거칠게 내 손에서 제 것을 낚아채 갔다.

“연락도 드렸었는데요.”

희윤은 나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낸 그가 사실 관계를 대조해 보고 차가운 숨을 토해냈다.

“쟤 얼굴 봤어?”

“네.”

솔직하게 대답하자 그가 기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봤는데 못 봤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메두사도 아니고.

“내 말 잘 들어.”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나를 씹어먹을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소문내면 가만 안 둬.”

“…….”

“죽여 버릴 줄 알아.”

살기가 느껴졌지만 전 여자 친구들이 가끔 내게 하는 말이어서 큰 감흥은 없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뭘 소문내지 말란 건진 모르겠지만 남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희윤이 잡고 있던 내 멱살을 놓으며 나를 밀쳤다.

“꺼져.”

희윤의 맨 얼굴을 보고 나는 깨달았다.

‘속지 마요.’

‘다 내숭이에요, 그거. 걔가 그렇게 웃는 건 자기 약점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니까요.’

언젠가 선배에 대해서 알려 주었던 그의 그 말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는 것.

나는 돌아서는 희윤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요.”

희윤이 날카로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

“선배 좋아한 적 없다는 말 무슨 뜻이냐고요.”

태연하게 말했지만 주머니에 감춘 손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희윤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헛웃음을 터트리는 그 찰나의 시간이 내게는 영원 같았다.

진실을 코앞에 두고 나는 전율했다. 두려움인지 아득함인지 모를 감정이 나를 거칠게 쓸고 지나갔다.

“무슨 뜻이겠어요?”

불유쾌한 미소를 보인 희윤은 조금 진정이 됐는지 다시 내게 말을 높였다.

“걔랑 나는 처음부터 그런 관계였다고요. 서로 이용만 하는.”

“…….”

“이래도 못 알아들으면 그쪽 진짜 등신이야, 알아?”

희윤이 바닥에 떨어진 내 핸드폰을 발로 밀었다. 그러고는 쾅, 강의실 문을 닫아 버렸다. 사나운 바람이 나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바닥을 구르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 떠오른 날짜와 시간을 보고도 나는 이것이 현실 너머의 어떤 공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모든 것이 아득해졌다.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해도 누군가 사고 회로를 끊어 놓은 것처럼 머리가 멍멍했다.

나는 대화 곳곳에 숨겨져 있었을 ‘맥락’을 잡기 위해 애를 썼으나 그동안 희윤과 나누었던 대화마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낮의 미친놈처럼 거리를 횡보했다. 비틀거리며 여러 번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났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사고가 돌아왔다. 처음부터 되짚어 보기로 한다. 그래, 처음부터. 천천히. 처음부터.

희윤이 여자와 키스를 했다.

선배를 단 한 순간도 좋아한 적이 없다고 했다.

서로 이용하는 사이였다고 했다.

원래 알고 있던 단어가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잡힐 듯 말 듯 진실이 어른거렸다. 머릿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그것을 짓뭉개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고, 서로가 필요했을 뿐이야. 서로의 흠이 필요해서.’

선배에게 처음 입 맞추었던 날 내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서로의 흠이 필요했던 사이. 그것은 서로 이용하는 사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인 걸까.

네덜란드에서 돌아왔다는 희윤의 말을 떠올린다. 사랑이 끝나서 돌아왔다고. 자유의 나라여서 좋았다고…….

먼지투성이가 된 핸드폰을 들어 네덜란드를 검색한다. 한참을 스크롤을 내려 마침내 주목할 만한 게시 글을 찾아냈다.

‘자유의 나라, 네덜란드.’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눈이 체할 듯이 다급했다.

‘이민자들에 대한 관용 정책, 마약 합법화, 동성애 합법화 등의 정책이 네덜란드를 강소국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손발과 머리에 피가 차게 식어 가는 기분.

멍하니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한아?”

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혜주 누나였다.

“누나.”

“여기서 뭐 해.”

“…….”

“왜 가만 서 있어. 바보같이. 무슨 일 있어?”

“…….”

“한아, 얼굴이 왜…….”

아.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혜주 누나는 당황한 듯 가방에서 티슈를 꺼냈다.

“한아, 왜 그래, 응? 누나 걱정되게…….”

“누나…….”

내가 왜 몰랐을까.

“우리랑 같았던 거야.”

나도 열 번이나 한 짓이면서 왜 몰랐을까.

“딱 우리만큼 특별했던 거야.”

왜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을까. 선배와 희윤이 그토록 겹쳐 보였음에도 한순간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남자잖아.’

거대한 사기극을 앞에 두고 나는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고작 네 글자의 진실에 이렇게나 큰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고꾸라지며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린 입술로 그 잔인한 진실을 소리 내어 보았다.

위.

장.

연.

애.

‘한아, 가장 흠이 있는 건 나야.’

그들은 약점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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