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래서 우선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아 보기로 한다.
때마침 민재 형으로부터 SOS를 받았다. 총학 일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거절하고도 남았을 일이지만 나는 자발로 학교의 노예가 되기를 택했다.
해야 할 일은 대단치 않았다. 학교에선 학과별로 졸업생의 강연을 듣게 해 주는 행사를 준비해 주었는데 그 행사의 진행 요원으로 투입되었다. 심리학과, 경제학과, 의예과, 컴퓨터 공학과까지 다양한 과 강연에 들어갔다.
사실 졸업생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밥이나 얻어먹고 졸곤 했다. 그래도 시간을 죽이기엔 적합한 일이었다.
남는 시간엔 PC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했다. 게임은 시간을 빠르게 하는 치트 키였다. 나는 원래도 결코 낮지 않았던 티어를 세 단계나 올렸고 가끔 팀으로 만나는 것들의 수준이 한심해 현타가 왔다.
그럼에도 아침에 눈을 떠서 세수를 하기 전, 밥알을 씹을 때, 노을이 지는 하굣길에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의 생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반듯한 미소와 수많은 상념을 달고 있는 눈꼬리와…… 능숙하고도 조마조마했던 입맞춤.
그럼 나는 속절없이 쓰라린 숨을 여러 번 나누어 내쉬었다. 언젠가 괜찮아지길,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면서.
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감정은 무거워지기만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
혜주 누나는 지나치게 나를 걱정했다. 사귈 때는 내가 아프든 말든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헤어지고서 그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생과일주스 먹을래?”
“어? 어.”
누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몫으로 키위 주스를 주문했다. 내가 오렌지와 토마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도 한 잔이요.”
나는 ‘바닐라’라는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었다. 혜주 누나도…… 바닐라 라떼를 좋아했었나? 아님 매일 바닐라 라떼만 먹던 게 연서 누나가 아니라 혜주 누나였나? 설마 누나도 내게 ‘바닐라 라떼 챌린지’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여자 친구들과 사귈 때 늘 그랬듯이 누나의 앞에 티슈 한 장을 깔아 주고 입술이 닿는 빨대의 끝부분 비닐을 남겨 둔 채 누나의 커피 위에 꽂아 주었다. 컵홀더가 필요할 것 같아 카운터에 가서 가져오자 누나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나는 손이 없니?”
그가 한숨과 함께 물었다.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어 웃으며 누나의 커피에 조심조심 컵홀더를 씌워 주었다.
“언제는 나보고 말 잘 들어서 좋다며.”
“종노릇 하란 뜻은 아니었어.”
누나는 천천히 바닐라 라떼를 저었다. 선명한 금으로 나누어져 있던 커피와 우유가 부드럽게 섞여갔다.
“한아, 그날은…….”
나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일 얘기하지 말자.”
“…….”
“좀…… 쪽팔려서.”
그리고 그날 일을 얘기하면 선배가 떠오르니까. 어물쩍 말을 넘기려는 나를 보고 혜주 누나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울었잖아, 너.”
나는 이따금 누나가 집요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너는 환승 이별, 양다리부터 쓰리썸까지 별의별 소문을 다 가지고 있지만.”
고상한 누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적나라해서 나는 얼굴에 빗금을 그었다.
“네가 울었다는 소문은 한 번도 못 들어 봤어.”
“…….”
나의 곤란한 표정을 못 본 것인지 보고도 신경 안 쓴 것인지 그는 계속 그날 일을 이야기했다. 아마 후자일 것이다.
“원래 그런 건 소문 안 나, 누나.”
“…….”
“원래 말도 안 되고 자극적인 것만 다 소문나는 거야……. 내가 클럽에서 원나잇 한 다음에 누나랑 사귀었다, 뭐 이런 것만.”
누나처럼 남한테 관심 없는 여자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수십 수백 개의 헛소문 중 내가 울었다는 것이 포함이 되지 않은 것은 아무도 내가 우는 것 따위를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한텐 그게 제일 말도 안 되고 자극적인 일이었어.”
“…….”
뜨거운 고백을 받은 것처럼 목구멍이 달아올랐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고르고 골라 최상의 조건의 여자 친구를 선택했다고 믿었는데 결국 같은 패턴이라니. 쿨하고 이기적인 누나가 내게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는 직설적이 되기를 택했고 누나도 더 말을 돌리지 않았다.
“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문제라면 얘기해 줬으면 해.”
“예컨대?”
“집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법률적인 문제로 트러블이 있거나, 아니, 다 됐고.”
“…….”
“돈이 필요한 일이라면 말하라는 뜻이야.”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누나가 며칠 내내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 낸 결론은 그것인가 보다. 내게 돈이 필요하다.
“그런 일 아냐.”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리고 누나, 전 애인에 대한 예우치고는 좀 과하다.”
설사 내가 정말로 돈이 필요했대도 누나에게 손을 벌릴 리가 없지 않은가.
“내 자존심을 뭐로 생각하는 거야.”
누나가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네 자존심, 그런 거 좀 구겨도 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왔다.
“나도 그 대단한 자존심 버리고 지금 네 앞에 있잖니.”
“…….”
“네가 나한테 돈을 얼마를 빌려도 내 자존심이 더 많이 상할 테니까.”
“…….”
“너는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돼.”
고작 두 달 사귄 것으로 내게 왜 이렇게 진지한지 모르겠다. 분명히 처음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지만 정말 돈 문제 아니야.”
누나는 진위 여부를 판단하듯이 내 눈을 들여다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조금 웃자 그가 왜 웃냐고 물었다. 돈 문제라고 생각한 게 우습다고 답하자 누나도 나를 따라 웃었다.
누나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더니 가 봐야겠다고 이야기했고 나도 짐을 챙겨 다시 학교로 향했다. 오늘은 ‘문창과’의 졸업생 초청 행사가 있었다.
***
평소와 다르게 행사 준비를 하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고 총학 임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심기가 어지러운 상태였다. 곧 행사가 시작되면 문창과 학생들이 이 홀로 들어올 것이고, 그럼 선배랑 마주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인사해야 자연스러울지, 혹은 인사하지 않는 편이 자연스러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도망칠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나는 의자를 다섯 개씩 겹쳐 안고 홀로 들어서는 민재 형에게 뛰어가듯 다가갔다.
“형.”
“어어, 한아. 마이크 테스트 했어?”
“네.”
“그럼 이거, 마저 좀 깔아 줘. 창고에서 더 가져와야 돼.”
총학에서 보는 민재 형은 늘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일이 너무 많았다. 나는 군말 없이 그가 내려놓은 의자를 끌어안듯이 들어 올렸다.
“형, 오늘 시현 선배 온대요?”
입 안에 가시가 돋친 듯이 까끌거렸다. 민재 형은 어, 잠깐만, 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마 안 올걸? 명단에 없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몸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의자를 턱 내려놓았다. 가장 위에 있던 의자가 쿠당탕 굴러떨어졌다. 묘한 기분이었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복잡 미묘하게 섞여 나를 감쌌다. 민재 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한아, 그렇다고 의자를 던져 버리면 어떡해.”
“……죄송해요.”
주섬주섬 바닥에 누워 있는 의자를 다시 일으키자 민재 형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다시금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유 모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의자를 일자로 배치했다.
졸업생으로는 당연히 소설가나 시인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게임 시나리오 작가와 기자가 왔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게임 회사였다. 나는 문창과 학생인 척 그 틈에 섞여 강연을 들었다. 정작 문창과 학생들은 큰 관심이 없는 듯 저들끼리 소곤댔다.
“언어학 과제 제출했어?”
“아니, 나 공모전 때문에 바빠서 아직 시작도 못 했잖아.”
“아, 그 양 교수님 과제로 내 주신?”
“응. 막판에 휘갈겨 써서 내가 뭐라고 적었는지도 기억 안 나. 교수님한테 제출할 땐 좀 다듬어서 내려고.”
큰 목소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대화는 선명하다 못해 도드라졌다.
“시현 선배도 이번에 냈으려나.”
내가 꼭 자석처럼 ‘그’에 관한 이야기에 이끌리기 때문일까, 하고 생각했다.
“냈을걸, 과젠데. 선배가 독서회에 가지고 나왔는데 좋더라고.”
“글쎄, 모르는 일이지. 휴학계 낸다는 소문 있잖아.”
더 이상 강연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이제 와서? 학기 시작한 지 한 달이나 됐는데?”
“4학년이잖아.”
나는 하얗게 떨리는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반대쪽 손으로 그것을 붙잡았다. 그만 좀 반응해. 하지만 나에게 선배는 무조건 반사 같은 존재였다. 학습의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신체의 일부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런가.”
“선배는 좀 아깝긴 하다. 나름 문예지 등단도 했고 공연도 올렸고…….”
“…….”
“그래도 요새 글만 써서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살길 찾는 거지.”
그들은 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눈치를 보며 뒤늦게 입단속을 했다. 내가 행사 스태프로서 소음 때문에 눈치를 주었다고 느낀 듯했다.
휴학. 머리가 멍해졌다.
‘도망을 갈 거면 제대로 가, 한아.’
‘제대로 꺼지라고.’
내게 그렇게 말해 놓고 그야말로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범람하는 감정으로부터, 그에 부수되는 혼란으로부터.
혹은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인 나로부터.
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강연이 끝나고 주어진 인터미션 때 나는 흡연 구역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희윤이었다. 그는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물고 머리를 쓸어 넘기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찾는데 휠 돌리는 소리와 함께 담배에 불이 붙었다. 나는 급하게 연기를 빨아들이다 잠시 사레가 들렸다.
“……여긴 어쩐 일로?”
잠시 머뭇거리던 희윤이 먼저 말을 붙여 왔다.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이상한 말이었다. 나는 덤덤히 대답했다.
“민재 형 총학 일 도와주고 있어서요.”
“아, 나는 조금 늦어서…… 2부부터 들으려고.”
묻지도 않은 것을 대답한 희윤이 다시 한 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턱 밑에서 댕강 잘린 머리카락들이 자기주장을 하며 하늘하늘 흔들렸다.
“좀 미안하게 생각해요.”
희윤이 먼저 내게 사과했다.
“내가 예민하게 군 거 인정해요.”
“…….”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일에 워낙 민감해서, 당황하기도 했고. 애초에 그런 일이 걱정돼서 장시현이랑도 사귄 거였으니까.”
희윤답지 않게 횡설수설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경 안 써요.”
“……왜요?”
“뭐가요?”
“왜 남의 감정을 신경 안 써요?”
내가 답하지 못하자 희윤이 “탓하거나 따지는 건 아니고요.” 하고 덧붙였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써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남의 감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그가 말했듯이 나를 탓하거나 따지려는 투는 아니었다. 조용하고 진실한 물음이었을 뿐이다.
“그럼 서한 씨 당신 감정은요?”
희윤은 이런 면마저 선배와 비슷한 듯했다. 가면을 벗고 나서는 거침이 없었다.
“동경이든 애정이든 혹은 연민이든, 누군가에게 품은 마음이 나의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그런 경험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나요?”
“…….”
“그래서 종국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완전히 다른 색의 감정으로 뒤엉켜 버리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나는 그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로 희윤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담배 연기를 길고 가늘게 뽑아냈다.
“주제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까지 장시현이 서한 씨에게 그렇게 방어적으로 구는 게 걔의 인색한 성향이나 강압적인 집안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선배의 이름을 들으니 다시금 속이 울렁거렸다. 요 며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던 이름이었으므로.
“그럼 왜 그런 것 같은데요?”
물음표 직전의 순간이 가볍게 떨렸다. 희윤이 툭 손가락으로 다 피운 담배를 튕겼다.
“서한 씨가 누굴 좋아한다는 것에 너무 두려움이 없으니까요.”
“…….”
“그러니까 자신의 것은 조금도 내주지 않고, 내 진심만 갈취해 갈 것 같다고요.”
선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내가 직관적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고. 그럼 그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내가 그의 무언가를 갈취해 가는 것 같다고.
“장시현은 나보다 더 그걸 더 선명하게 느꼈을 거예요. 그러니까…….”
온몸이 근질거렸다. 손톱을 세워서 미친 듯이 긁고 싶어지는 감각이었다.
희윤은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멈추었다. 모든 것이 무용하다는 듯이.
“어차피 이젠 다 틀린 일이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었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처럼 그 거지 같은 차를 끌고 다니는 걸 볼 때마다 아주 그냥…… 백미러를 걷어차 주고 싶으니까 말이에요.”
설마 그 차가 선배의 애스턴 마틴을 말하는 거라면, 그 차는 절대로 거지 같지도 않고, 거지가 탈 수도 없고, 정말로 백미러를 걷어찬다면 아주 곤란해질 거라는 경고를 해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좀 절망적인 상황이에요.”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희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얌전히 반문했다.
“왜요?”
“이쪽 세계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하나둘 떠나는 걸 봤으니까.”
이쪽 세계라면 어느 쪽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동성연애를 하는 쪽?
“자기 자신을 끝없이 부정하는 길이에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거고.”
“…….”
“그리고 하필 그게 장시현이라면 너무 잘 버틸 것만 같아서.”
“…….”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나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희윤이 기막혀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웃겨서 웃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뭘 알고 끄덕이는 거예요? 나는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한 번도 뭔가를 안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
멍하니 그가 사는 건물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1층부터 천천히 층수를 셌다. 그의 집엔 불이 꺼져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학교 주변을 돌아다닐 때마다 늘 생각해 왔다. 이 길에서 그를 마주치면 어떤 표정으로 지나쳐야 할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그 고민만 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그 반대를 물어본 적은 없었다.
영영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래도 괜찮을까.
그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희망 없이도 괜찮을까. 그런다면 모든 길이 내게는 의미를 잃을 것만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까.
때로 사람들은 내게 ‘잘못 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혜주 누나도, 은지도, 희윤도, 선배까지도 그랬다. 나는 그런 말들을 아니꼽게 듣지 않았다. 아니, 아니꼽게조차 듣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든 말들은 그저 내게 ‘남의 가치관’으로 입력되어 머릿속에서 쓰레기처럼 처리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살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잘못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 같은 법치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일들은 늘 기준점이 다른 거니까. 내가 남들과는 특별히 다르게 두드러지는, 예를 들면 사이코패스 같은 그런 기준점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유희처럼 짝사랑을 즐겼다는 것이다. 선배를 좋아함에 있어 신실했던 적 없다. 진심이었으나 믿을 만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경미한 호기심과 흐릿한 호감이었던 것이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거대한 덩어리가 될 때까지, 나는 그저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아직까지도 나의 마음이 호기심과 호감, 그 정도라고 믿으며. 그 정도로도 충분하리라 여기면서.
하지만 나는 결국 또 그에게 오고야 말았다.
완벽한 나의 자의로.
참회의 의미같이 가벼운 봄비가 내렸다. 빳빳하던 옷에 얼룩이 지기 시작하더니 어깨부터 서서히 젖어들었다. 비의 형태는 가느다랗고 보드라웠으나 내게로 내린 이후로는 차갑게 내 몸을 식혔다.
그렇게 선배를 기다리면서 흠뻑 젖었다. 슬리퍼를 신고 있기에 망정이었다. 아니었다면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어간 물들이 끔찍했을 테니까.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는데도 선배는 오지 않았다. 이따금 그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나를 미친놈처럼 보고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어쩌면 그냥 집에서 불을 켜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가 올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운명처럼 나를 마주치게 되리라. 행운이든 악몽이든 그로서는 비껴갈 수 없는 인연으로.
빗물이 콧대를 타고 눈으로, 입으로 들어가 눈이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감고 손으로 거세게 문지르며 빗물을 털어냈다. 어둠 속에서 눈앞으로 전기가 찌릿찌릿했다.
다시 게슴츠레 눈을 반쯤 떴을 때 나는 멀리 서 있는 선배를 보았다. 한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한 채 나를 보고 있는 그를.
빗물인지 뭔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 또한 벌써 어깨가 젖어 있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나는 그에게 고백했다.
“선배.”
그의 숨소리가 눅눅한 공기 중에서 다소 거친 질감으로 전해졌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지도, 찾아오지도 않겠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
“선배를 이해할 수 없지만.”
“…….”
“그래도 사랑해요.”
그의 동공이 미칠 듯이 떨리고 있었다. 혹은 그 안에 담긴 내가 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한다구요.”
“…….”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그를 사랑한다는 말 대신 했던 모든 행동들이 무색하게도 나는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와의 거리를 내 손으로 허물었다.
근지점을 돌파해서 충돌까지. 수십만 킬로미터에서 0미터까지.
***
선배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온통 젖은 나 때문에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틀어쥔 손목이 뻐근하게 아려 왔다.
“선배.”
나의 부름에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누가 이딴 짓 하래.”
그가 입 안에서 욕설을 짓씹었다. 하지만 내게까지 닿지는 않을 세기였다. 그저 그의 입 모양과 주름진 미간을 보고 추측해 보았을 뿐이다.
“누가 그렇게 청승맞게 기다리래. 이제 이 집에 내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
“그리고 누가 그딴 식으로…….”
그가 화를 억누르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는 계속해서 참는 얼굴이었다.
“그딴 식으로 고백하래.”
냉랭하게 끊어 말한 그가 서랍을 열어 깨끗한 수건 두 장을 꺼내 왔다.
“옷 벗어.”
“…….”
“벗고 씻어.”
그는 내게 그 수건을 안겨 주고는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여전히 이마에 짙은 주름을 잡은 채였다.
“약이라도 좀 사 올 테니까.”
그가 나의 손목을 놓음과 동시에 내가 그를 붙잡았다. 깊이 파인 그의 미간 골을 보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피하기만 해요?”
“…….”
“사랑한다니까요.”
“…….”
“싫으면 싫다고, 부담스러우면 부담스럽다고 말해요.”
그를 욕실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 버렸다. 그대로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와 나의 옷 모두 순식간에 척척하게 젖어 버렸다. 내가 선배까지 젖게 만든 것이다. 나처럼.
“싫어요?”
쫄딱 젖어 반쯤 투명해진 셔츠 아래로 그의 흉부가 크게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쏟아지는 물줄기를 가르며 내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왔다.
“……그래.”
그의 숨결이 습한 형태로 닿았다.
“싫어.”
“…….”
그의 손길이 다급하게 내 바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점차 따뜻해졌다.
“싫어서 미치겠어.”
나는 얼굴 위로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고개를 젖혔다. 좁은 욕실 안에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푹 젖어 달라붙은 바지와 속옷을 억지로 끌어 내렸다. 그의 입 안으로 귀두가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나는 크게 신음했다.
“거짓말…….”
싫은 사람이 이렇게 다급할 리가 없잖아. 꼭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사람처럼 나를 볼 리가 없잖아.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네가 연애를 영 헛으로 한 건 아니구나.”
“…….”
“맞아, 거짓말이야.”
“흐읏!”
그가 목구멍 깊이까지 내 좆을 빨아들였다. 축축하고 물컹한 것이 강한 압력으로 좆을 죄어 왔다. 나는 그의 셔츠 어깻죽지를 쥐어뜯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 덕분에 신음 소리를 감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넓게 펼친 혀로 좆 아랫부분을 강하게 문지르며 자극했다. 그가 혀의 각도를 바꿀 때마다, 혀를 뾰족하게, 혹은 둥글게 말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더운 수증기가 욕실을 가득 채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선, 선배, 이제, 그만…….”
그가 내 좆을 뿌리까지 삼키고 목구멍을 꽈악 조이는 순간 나는 그의 셔츠를 붙잡은 채로 사정했다. 사정하는 내내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얼른 좆을 빼내려고 했는데 내 엉덩이를 붙잡은 그가 집요하게 양 볼을 이용해 귀두를 쭉쭉 빨아댔다. 그의 볼이 홀쭉해질 때마다 나는 그의 입 안에 정액을 쏘았다.
하아, 하아……. 밭은 숨을 내쉬느라 벌어진 입 안으로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더운물이 밀려들어 왔다. 나는 그걸 뱉어낼 힘도 없이 꿀꺽꿀꺽 삼켰다.
선배의 손가락이 더 밑을 파고들었다. 바지를 거칠게 끌어 내리며 엉덩이 골을 쓰는 손길에 발을 차례대로 들어 올려 쉽게 옷을 벗길 수 있게 도왔다. 끙끙거리며 티셔츠를 벗어내자 그의 혀가 복부부터 가슴, 쇄골까지 천천히 타고 올라왔다.
쏟아지는 물줄기 탓에 한쪽 눈을 찌푸린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다시 좆이 서는 것 같았다.
“아아…….”
빡빡한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이질감을 참았다. 내 목덜미에 떨어져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를 본 그가 인상을 강하게 찌푸렸다.
지익. 물소리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가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그가 내 쇄골에 입을 맞추며 자신의 좆을 내 아래에 가져다 댔다.
“선배, 읏, 답답해요. 좀 나가서…….”
그가 나를 벽으로 가두고 내 다리를 벌렸다. 벌어진 골 사이로 그의 좆이 느리게 비벼졌다. 나는 숨을 잘 쉴 수 없어 헐떡거리며 그를 밀어냈다.
“잠깐만요, 물 때문에. 허억.”
목을 잡고 콜록거리자 그가 거친 손길로 샤워기를 꺼 버렸다.
“됐지, 이제.”
짐승처럼 으르렁거린 그가 혀로 쇄골을 핥아댔다. 나는 아래로 느껴지는 묵직한 기둥에 아연해졌다. 마침내 그의 좆이 구멍 안을 가르고 들어오려는 듯 뭉툭한 귀두가 느껴졌다.
“아흣!”
뒷벽에 머리를 쿵 박았다. 아래가 찢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힘 풀어. 빨아 줄 여유 없으니까.”
그가 외설적인 말과 함께 허리를 조금 더 들이밀었다. 나는 그의 축축한 셔츠 위로 손톱을 직각으로 세웠다.
“아프, 아파요…….”
내 말에 긁힌 목소리로 신음한 그가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제 허리를 감게 했다. 자동으로 구멍이 조금 더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가 강하게 삽입했다.
“아아!”
한쪽 다리로 버티는 게 힘들어 몸이 무너질 것 같을 때에 그가 터질 듯한 가슴 근육을 이용해 강한 압박으로 나를 짓눌렀다. 나는 그와 벽 사이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장기 중 하나가, 아마도 심장이 뭉개지고 말 것이다.
샤워기 소리가 없어지자 나의 신음 소리가 더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되돌아오는 축축한 메아리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허리, 더 세게 감아.”
그의 허리를 감은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가 양손으로 내 엉덩이를 벌리며 기어이 끝까지 좆을 밀어 넣었다. 배 속이 꽉 찬 느낌에 차가운 타일 위로 뺨을 비비며 신음했다.
그는 처음부터 묵직하게 움직였다. 그가 위로 나를 쳐올릴 때마다 발뒤꿈치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했다. 구멍 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흐읏, 흐으으.”
나는 그의 젖은 셔츠 위로 이마를 가져대 댔다. 그의 피부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라 천 너머로도 느껴졌다. 그의 혀가 달아오른 귓바퀴를 따라 진득하게 움직였다. 콱, 그의 좆이 다시금 거세게 박혔다. 뱃속을 간지럽히는 쾌감이 지독하게 나를 쫓아왔다.
“너 때문에.”
“으응, 흣.”
“뭘 결정할 수가 없어.”
그의 축축한 음성이 소름 끼치는 감각으로 귓바퀴를 타고 고막까지 들어왔다. 그가 다시 미끄러져 들어올 때 나는 허벅지 힘으로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는 무리 없이 나를 안은 채로 계속 허리를 쳐올렸다.
“글도, 공모전도.”
그의 목소리가 탁하고 거칠었다.
“휴학도, 아무것도…….”
그가 깊이 박아 넣을 때마다 엉덩이를 얻어맞는 것만 같았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집요하던 움직임이 마침내 뚝 멈추고 그가 급하게 좆을 빼냈다. 손으로 제 좆을 두어 번 쓸어 올린 그가 그대로 파정했다. 불투명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치골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선배가 허벅지 안쪽에 좆을 비벼 가며 젖은 숨을 내쉬다가 내 목덜미에 키스했다. 내 좆이 반쯤 서 있는 것을 본 혀를 세워 목덜미를 꾹꾹 누르며 속삭였다.
“한아, 내 옷 좀 벗겨 봐.”
“…….”
“나가서 마저 하게.”
그의 손가락이 다시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긴 삽입으로 벌어졌던 걸 유지시키기 위함인 듯했다. 나는 낮게 신음하며 그의 셔츠 단추 위에 손을 가져갔다.
“아흣!”
그가 내벽을 꾹꾹 짓누를 때마다 손에 힘이 빠졌다. 단추 하나를 푸는 데도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내 좀스러운 움직임이 답답했는지 그가 나머지 손으로 제 셔츠를 확 뜯어 버렸다.
젖은 채로 다리의 윤곽을 그대로 나타내는 바지를 손쉽게 벗어 버린 그가 욕실 문을 열었다. 허물처럼 옷가지들을 바닥에 내팽개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침대 위로 눕자 그와 나의 머리와 몸 전체에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시트가 걱정돼 미간을 구겼지만 그는 그저 내게 입 맞췄다. 야한 맛이 났다. 혀를 빠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여러 번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몸이 늘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농밀한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등줄기에 긴장감이 서렸다. 꼬리뼈부터 전기가 찌르르 흘렀다.
선배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가 거슬리는 듯 한쪽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갈래갈래 뭉친 머리카락이 뒤로 넘겨지며 드러난 물기에 젖은 이마는 조각품처럼 입체적이었다.
“다시 말해 봐.”
“하아, 하아, 네?”
내가 숨을 몰아쉬며 되묻자 그가 입술을 바짝 붙여서 내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의 혀가 내 얼굴 위에서 진득하게 미끄러졌다.
“나를 사랑한다며.”
“…….”
“다시 말해 보라고, 그렇게.”
그는 사납고도 음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다르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가 상체를 가깝게 붙여왔다. 물기가 말라 가는 살결이 차지게 달라붙었다.
“네 고백에는 내 노력을 전부 수포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으니까…….”
나는 이따금 그가 서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콘돔을 박스째로 쌓아 두는 남자가 서툴다니. 나를 이렇게 노련하게 손안에 쥐고 흔들면서, 서투르다니.
나더러 다시 고백을 하라고 종용해 놓고 그는 다 잊은 것처럼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듯이 내 입을 입맞춤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다시 산소 부족에 시달리느라 그의 얼굴이 어떠한지 볼 겨를이 없었다.
허벅지 위로 그의 것이 다시 단단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비벼졌다. 그가 말라 가는 구멍을 억지로 다시 벌렸다. 역시나 입술이 집요하게 따라오며 내 신음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
또 혼자였다.
선배의 집에서 홀로 눈을 뜬 나는 블라인드 사이로 끊겨서 들어오는 햇빛이 낯설어 눈을 여러 번 깜박거렸다. 오늘도 허리가 끊어져 나갈 것 같아 일어나 앉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윽.”
다리 사이를 더듬다가 부어오른 입구를 만지자마자 튀어나오는 신음 소리를 참기 위해 입술을 세게 깨물어야 했다. 얼마나 박아댔는지 손가락만 스쳤는데도 입구 전체가 화끈거렸다.
단순히 그곳만 아픈 게 아니었다. 어젯밤 선배가 미친 듯이 빨아댔던 좆마저도 부어오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혀로 하는 건 뭐든 잘했다. 키스도, 애무도, 펠라티오까지도.
손을 더듬어 가며 얇은 이불로 애벌레처럼 몸을 감싸고 몸을 일으켰다. 옷을 찾으러 욕실로 들어갔으나 이미 욕실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방 반대편의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원형 창문 안으로 내 옷가지가 빙빙 돌아가고 있는 걸 본 나는 난감함에 머리를 짚었다.
그럼 난 뭘 입어야 하지.
아니, 그것보다. 지금 여기서 나가야 되는 건가.
‘용건 끝났으면 이만 내 집에서 나가 줘.’
지난번에 선배는 나와 섹스를 한 후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게 오늘도 적용되는 사항인지는 모르겠다. 그날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짝사랑 상대라는 선배는 그런 고백쯤이야 많이 받아 봤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어제의 모든 순간이 특별한 것이었으니까.
몸을 감싼 이불이 자꾸 흘러내려서 발 보폭을 줄여 걷는데 도어락 비밀번호가 입력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툭 한쪽 손을 놓쳐 버렸고 나체가 반쯤 드러난 채로 선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
“…….”
품이 큰 후드를 뒤집어쓴 선배는 손에 뭘 가득 안고 있었다. 지난번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봉투들이었다. 그의 시선이 여유롭게 나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다 벗고 거기서 뭐 하니?”
그가 비에 젖은 습기 찬 공기를 집 안으로 몰고 들어왔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음성은 상쾌하게 들렸다.
“밖에 아직도 비 와요?”
“응.”
“……우산 없는데.”
“어디 가려고.”
“네?”
“비 맞아 가면서 사 왔는데.”
내 앞에 비닐 봉투를 늘어놓는 그는 정말 머리 끄트머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나는 하반신만 겨우 가린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봉투 매듭을 풀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예요?”
그가 주방에서 밥상을 들고 와 펼쳤다. 나는 멍하니 봉투 속의 음식을 바라보았다. 뚜껑이 꽉 닫힌 플라스틱 용기는 그 자체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선배는 대충 손으로 머리카락에 붙은 빗방울을 털어내고 거침없이 뚜껑을 열었다.
칼국수였다. 파전도 함께.
“후문 앞에 칼국숫집 알아?”
어젯밤과는 다르게 다소 누그러진 톤으로 그가 물었다. 묻는 말의 끝 음이 다정하게 들렸다.
“알아요. 교수님들 회식 많이 하시는 곳.”
“옛날에 거기서 일했었어. 그래서 지금 가도 항상 잘 챙겨 주시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무젓가락을 꺼내 뜯었다. 반을 쪼갠 후 잔가시를 털어내고 선배의 앞에 조심스럽게 먼저 놓아주자 그가 내 손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 해서.”
“누가. 네 전 애인이?”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선배는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자꾸 다른 데서 배운 걸 나한테 써먹네.”
농담조였으나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그와 마주 앉아서 첫 끼를 함께 먹는 것이 마냥 좋다거나 설레지만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긴장되면서도 간질간질하고, 한편으로는 아득하기도 했다.
“희윤이한테 대충 어떻게 된 이야긴지 들었어.”
“…….”
면을 건져 먹다 말고 체할 것 같아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네가 상처받았을 거라고 이야기하던데.”
“…….”
“상처받았니?”
곧게 뻗은 선배의 입술 선을 보며 천천히 물었다.
“왜 자꾸 다 알면서 물어봐요.”
“…….”
“선배와 희윤 씨의 관계를 상상했던 내가 너무 바보 같고, 그래서 배신감이 들었다는 거. 그래 놓고도 선배가 좋아서…… 여기까지 쫓아와서.”
“…….”
“그런 거 다 알면서 왜.”
나는 조금은 원망스러운 시선을 그에게 보냈으나 그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줄은 몰랐어.”
“…….”
“그런 고백은 처음 들어 봐서.”
나는 의심하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선배 고백 많이 받아 봤을 거 아니에요.”
하지만 의외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한아, 나는 관심 없는 사람한테 여지 안 줘.”
“…….”
“고백까지 상황을 끌고 오지도 않고.”
단호하게 떨어지는 말이었다.
“네겐 그런 상황이 일상적인 일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야.”
“…….”
“나를 맴도는 너를 보면서 나는 혼란스러웠다가, 헷갈렸다가, 네가 괘씸했다가.”
“…….”
“그러다 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처음 들어 본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신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그동안은 사랑한단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처럼.
“내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거짓말.”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뱉어내고 말았다. 어젯밤 욕실에서 내가 싫다는 그의 말을 반박했던 것처럼. 그가 픽 웃었다.
“이번에는 거짓말 아닌데.”
“…….”
“연애 같은 거 해 본 적 없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그동안은 섹스만 했어요?”
선배는 유유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아 미간에 잡은 주름을 풀 수 없었다.
“희윤 씨랑은 왜 사귄다고 하고 다닌 건데요? 연애를 할 것도 아니면.”
“사귄다고 하고 다닌 적은 없어. 저들끼리 오해한 거고 걔랑 내가 그걸 이용한 건 맞지만. 우리 소문이 지나치게 낭만적이긴 했나 보네. 네가 그렇게 굳게 믿을 만큼.”
그랬다. 뭐, 학관 앞에서 키스를 했다고? 서로에 대한 글을 적어서 과제로 냈다고? 그런 뜬소문들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진실을 알게 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여자 다섯과 원나잇을 했다는 내 소문만큼이나 터무니없었다.
“희윤이는 나랑 놀랄 만큼 비슷했어. 통하는 구석이 많았지.”
선배가 양반다리를 한 무릎 위로 팔꿈치를 올리며 턱을 괴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꼬리가 날카로웠지만 시선이 따뜻했다.
“피차 소문으로 귀찮은 건 질색이고 무형의 관념 따위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었으니까. 무엇보다 걔는 여자를 너무 좋아했고 나는 남자한테만 꼴렸고.”
그의 나긋한 음성은 마치 회고록 같았다. 홀린 듯이 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걔랑 연인의 탈을 뒤집어쓴 덕분에 사람들 눈을 피해서 멋대로 살았어. 방탕하게 밤을 보내고 치열하게 낮을 견디면서. 그러다…….”
“…….”
“그냥 어느 순간 다 그만두고 싶더라.”
선배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덜컹거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너 때문에 다 엉망이야. 집 안 꼴도, 마음속도.”
“…….”
“너를 외면하려고 했어. 그건 내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 그런데…….”
선배가 시선으로 나를 더듬었다. 그의 눈빛이 닿는 곳마다 원격으로 조종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너랑 있으면 내가 꼭 미끼를 문 물고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게 무슨…….”
“너한테 완전히 낚여 버린 것 같다고.”
그의 솔직한 진심은 추상적이고 어려웠다. 골똘히 고민하는 나를 두고 그가 턱을 괴고 있던 팔을 가볍게 털어내며 웃었다.
“그래서 나한텐 네 고백 아주 발칙하고…….”
“…….”
“아주 특별해.”
추상적이고 어려운 말들 끝에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사랑한다는 말이 특별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특별한 거잖아요.
***
선배는 내게 자취방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가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싸구려 섬유 유연제 향이 나는 그의 셔츠를 입고 그와 함께 밥도 먹고 잠도 잤다.
그는 집에서도 요리를 못했다.
“선배……, 조미료 상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유통 기한 다 안 지났어.”
“대체 뭘 얼마나 넣으면 국이 이렇게 비려요?”
나의 비난에 그가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먹을 만한데 왜 그래.”
선배는 참 다른 의미로 서민적이었다.
“혀에 문제 있는 게 분명해.”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가 조금 웃었다.
“확인해 볼래?”
턱이 위로 끌어올려졌다. 그와 입술이 부딪히고 그의 혀가 부드럽게 입술 안쪽 점막을 쓸었다. 내 혀를 실컷 농락하다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떨어짐이 아쉬워 바람이 새는 소리가 났다. 그가 손등으로 제 젖은 입술을 대충 닦아내며 눈웃음을 지었다.
“미각엔 문제없는 것 같은데.”
소름 돋는 그의 뻔뻔함에 닭살이 일어난 팔을 쓱쓱 문질렀다. 선배의 입술이 다시 가까워졌다. 내가 멍하니 입술을 조금 벌리자 그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조르는 거야, 한아?”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입꼬리부터 입술의 가장 통통한 부분을 머금는 그의 움직임이 부드러워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고 했다.
드르륵. 진동이 울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그의 핸드폰이었다. 선배가 혀끝으로 장난을 치다가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핸드폰을 들어 올려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가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며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다시 키스가 깊어지려는 찰나 진동이 또 시작되었다. 하아. 입술을 떼어낸 그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한아.”
미간에 주름을 잡은 그가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왜.”
어렴풋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나는 한껏 권태로워진 선배의 표정을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아직.”
선배가 얕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네가 그걸 왜 묻는데. 너는 어차피 그 공모전 참가도 안 했잖아. ……교수님은 내가 따로 찾아뵐 테니까 신경 꺼.”
“…….”
“신경 끄라고. 못 알아들어?”
선배는 상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툭 끊었다.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진 그가 짜증스럽게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덤덤히 물었다.
“누구예요?”
“희윤이.”
선배의 숨소리는 금방 차분해졌다. 그는 꿈틀거리는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다.
“뭐라고 하는데요?”
선배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긋한 시선 끝에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
그는 단단하게 잡아챈 내 손목을 제 쪽으로 끌어갔다. 내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그가 더운 숨을 토해냈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입술이 천천히 손목을 타고 내려왔다. 뜨거운 입술이 손목 안쪽을 빨아들였다. 그의 섹슈얼한 분위기에 다시 끌려가기 전에 흐름을 끊어냈다.
“휴학…… 할 거예요?”
“…….”
“로스쿨 준비하려고요?”
그의 입술이 멈추었다. 그가 내 팔에 얼굴을 묻은 채로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서 내 팔을 빼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기다려 주었다. 웃음기가 싹 지워진 얼굴로 그가 답했다.
“원래는 휴학도 하고, 글도 그만두고, 로스쿨도 가려고 했는데.”
“…….”
“네가 나를 사랑한다며, 한아.”
“……네.”
“그럼 어디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되는지 사실 잘 모르겠네.”
그의 음성은 잔잔했다. 파도가 없는 강처럼 한쪽으로만 흘렀다. 나는 그에게 해답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가 명확하게 답을 찾기를 바랐다.
“선배는 어떻게 살고 싶은데요?”
나는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글 쓰는 거, 좋아요?”
선배는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몇 번 매만지다가 이내 조금 웃었다.
“좋아.”
“…….”
“하지만 그뿐이야.”
“…….”
“내 재능이 모자랐는지 노력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계를 느끼고 있어. 인문학적인 측면이든, 내 생활적인 측면이든.”
선배는 더할 나위 없이 진솔한 말과 함께 나를 직시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글은 포기할 수 있는 영역이야. 그러니까 휴학을 결심했던 거고. 학기를 맞춰서 리트 준비를 하려고 했어.”
“…….”
“그런데 너는.”
선배가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너는 그런 영역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내가 자의로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니고…….”
“…….”
“내가 너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겠어, 한아.”
등줄기가 짜릿하게 떨렸다. 선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전율케 했다. 나는 그에게 정답을 찾아 주겠다는 소명 의식을 금세 잊어버렸다. 더 이상 그에게 무엇을 따져 물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저에 관한 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선배가 계속 글을 쓰고 싶은지 아닌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말을 하는 내게 그는 직선으로 다가와 입 맞추었다.
“이젠 너를…….”
그가 정염에 젖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중으로 미룰 수가 없다니까, 한아.”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억지로 내 눈을 감게 하는 그는 사랑한다는 나의 한 마디에 넋을 빼놓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나는 이대로 온전한 해피 엔딩을 맞이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마냥 그가 좋아져 버리고…….
선배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그의 장래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으나 그는 무신경하게 굴었다. 내 질문에는 성실하게 답을 해 주었지만 자신의 장래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사람처럼 보였다. ‘글쎄, 휴학할지 말지 사다리 타기라도 할까?’ 하는 답을 받고서 나는 채근하기를 멈추었다.
그는 여전히 애스턴 마틴을 타고 다녔고 여전히 술집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글을 쓰는 대신 내 옆에서 로스쿨 시험 준비를 했고 공부가 끝나면 나와 섹스를 했다. 그 이상한 모순들 사이에서 그는 한없이 자연스러웠다.
나는 선배가 브릿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월요일과 화요일, 수요일엔 그를 위해 가벼운 야식을 사다 두든지 만들어 두었다. 그가 새벽이 되어 가게 문을 닫고서야 겨우 밥을 먹을 시간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에 비해 보면 못하는 편도 아니었기에 자신감 있게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집 안에 만두 냄새가 퍼졌다. 시중에 파는 사골 육수에 레트로트 식품으로 나온 만두와 간단한 야채만 넣어서 만둣국을 끓였다.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덮은 채로 시간을 확인했다. 선배가 곧 돌아올 시간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선배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참지 못하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문을 열어젖히자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내가 물어야 할 것을 남자가 먼저 물었다.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쪽은 누구신데요.”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진한 눈썹을 구기며 고개를 빼 호수를 다시 확인하곤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사 오셨나요?”
“아니요.”
학생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빳빳한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범접할 수 없는 귀티를 풍겼다.
“장시현 씨 집, 아닌가요.”
“…….”
곧바로 대답을 내어놓지 못한 까닭은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내가 바짝 언 표정으로 입을 닫자 남자의 시선이 조금 짙어졌다. 그가 칼날 같은 눈빛으로 나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시현이 친구?”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남자는 다시 물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후배예요.”
“아아.”
남자가 나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시금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성함이?”
“……서한입니다. 외자요.”
“시현이랑 같은 학교예요?”
“네.”
“문창?”
“아니요. 화학 공학과요.”
내가 그의 같은 과 동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남자의 얼굴에 경계심이 약간 걷혔다. 그렇다고 나를 대단히 환대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시현이는 어디 있어요?”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아. 남자가 한숨인지 깨달음인지 모를 말을 뱉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천천히 이마를 문질렀다.
“아직도…… 계속 하고 있나 보네요. 그 아르바이트.”
“…….”
남자의 못마땅한 듯 구겨지는 표정을 보자 나는 나의 실수로 선배를 곤란하게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곧 올 거예요.”
“그래요. 기다리죠.”
그 남자를 집 안으로 들여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어렴풋이 그가 누구일지는 짐작해 볼 수 있었지만 선배와 어느 정도의 사이일지는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도 없는 남의 집에서 뭐 하고 있었어요?”
“…….”
“이 늦은 시간에?”
적의가 느껴지는 투는 아니었지만 나는 대단히 압박을 느꼈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둘러댔다.
“수업 관련해서 뭘 좀 물어보기로 해서요.”
“…….”
남자는 더 캐묻지 않았다. 아니, 캐물을 수 없었다.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만 듣고도 선배가 돌아왔음을 알았다.
“……형.”
선배가 인상을 강하게 찌푸리며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본의 아니게 내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받았다. 남자는 선배의 친형이었다.
모태 신앙에 강압적인 집안에서 올곧게 자라 검사가 되었다던 친형.
선배는 무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친형제의 조우는 한없이 건조했다.
“뭐야, 연락도 없이.”
“했었어.”
선배가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한숨과 함께 다시 바지 주머니에 그것을 밀어 넣은 그가 뻐근한 듯 목을 돌렸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이렇게 함부로 쳐들어와?”
“아직 안 들어갔고.”
선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마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남자는 집에 쳐들어온 적이 없다. 정중히 초인종을 눌렀고 내가 나왔을 뿐이다.
“……뭘 또 해 놨어, 한아.”
나는 이 상황에 선배가 제 형이 아닌 내게 말을 걸었다는 게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복도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던데.”
“그냥, 뭐.”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친형으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할까 봐 두려운데 선배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말씀 나누세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들어가 있어. 괜찮아.”
선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여자 친구가 아까부터 언제 오냐고 난리예요.”
“…….”
선배는 엉성한 변명을 하는 나를 가만히 직시했다. 나는 그가 또 이상한 대답으로 분위기를 흐리기 전에 먼저 다시 그의 자취방 안으로 들어가 겉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다음에 다 같이 봐요. 제 여자 친구랑.”
선배의 착잡한 얼굴을 지나쳐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 소리가 들리고 둘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직 휴학 신청 안 했다며.”
“…….”
“아버지 걱정하셔.”
“집어치워, 그딴 가증스러운 소리.”
“장시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그제야 떨리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손을 맞잡아 그 떨림을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다리에 자꾸 힘이 풀려 집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학교 앞 벤치에 주저앉았다. 최선을 다했으나 들켰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남의 집에서 요리를 해 놓고 있는 것,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 아닌가.
들켰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현실은 싸늘하고 거대했다.
선배의 친형이라는 그 남자는 선배의 차가운 면만 모아 놓은 인간 같았다. 말투에서 숨길 수 없던 무뚝뚝함이 묻어 나왔다. 나를 훑어보던 무심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이 자꾸 생각났다.
고개를 숙인 채로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나는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키며 핸드폰에 뜬 선배의 이름을 확인했다.
“여보세요.”
-집이니?
“아뇨, 아직 밖이요.”
선배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다정한 말투였으나 나는 그것이 외려 더 불안했다. 불편함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라났다.
-다시 올래?
“…….”
-할 말도 있고.
혀를 깨물 뻔했다. 할 말이 있다고. 그건 왠지 나를 비관적으로 만드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요?”
선배의 숨소리는 차분했다.
-글쎄, 우선.
“…….”
-네가 언제 나 몰래 열한 번째 여자 친구를 만들었는지부터.
그는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 안에서 혀를 여러 번 굴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갈게요.”
-그래.
전화가 끊어지고 속에서 불안감과 용기가 얼마나 싸워댔는지 모른다. 그 고뇌는 선배의 집에 발을 들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헐렁한 티셔츠를 걸치고 숟가락으로 내가 끓여 놓은 만둣국을 그릇에 옮겨 담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목이 꽉 막힌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선배.”
“응, 잠깐만.”
선배가 만둣국 두 그릇을 차린 상을 중앙에 내려놓았다.
“좀 식었지만 그래도 먹자.”
나는 느릿느릿 외투를 벗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만둣국은 식은 정도가 아니라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도 맛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나는 입맛이 돋지 않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할 말이 뭔데요?”
선배는 한입에 만두를 다 넣고 천천히 씹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일을 끝마치고 돌아와 겨우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밥 마저 먹고 얘기해요.”
내키지 않았지만 숟가락을 들어 만두를 건져 먹었다. 분명히 아까 간을 볼 때까지만 해도 맛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쩐지 씁쓸한 맛이 났다.
“한아.”
고개를 들었을 때 선배는 미약하게 웃고 있었다.
“너 지금 처형 기다리는 반란군 같은 얼굴 하고 있어.”
“…….”
“처형 같은 거 없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뜻이야.”
그 말을 듣자 무언가 얹혀 있는 것 같던 속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저는 원래 매는 빨리 맞자 주의라서요.”
퉁명스러운 말에 선배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선배는 인내심이 좋으니까 마지막 순서에 매를 맞아도 상관없겠지만요.”
“아니.”
“…….”
“나는 왜 내가 매를 맞아야 되는지 골몰하는 성격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선배는 기어이 그릇을 다 비우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에야 조금 여유로워진 표정을 했다. 차근차근 상을 접어서 넣어 두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올라올래?”
“…….”
선배가 제 무릎 위를 툭툭 쳤다. 나는 문득 문창과 과방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심장 박동이 불안함을 안고 솟구쳤다.
“싫어요. 또 나한테 창피나 주려고…….”
선배의 눈꼬리가 확 내려갔다. 그가 나를 꼬드기는 사람처럼 눈웃음을 쳤다.
“안 그럴게.”
그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 옆에 앉았다. 그가 휴학도 하고 글도 그만두고 이제 나도 그만 만나겠다고 하면 표정 관리가 어려울 것 같았다. 선배는 나의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아까 왜 도망갔어.”
내 어깨 위에 제 턱을 올려놓은 그가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형이 좀 무섭게 생겼나.”
“…….”
“모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무례하게 굴 사람은 아닌데, 네가 겁에 질린 얼굴이어서 놀랐잖아.”
나는 실없이 조금 웃었다.
“무섭게 생기시진 않았던데요.”
“…….”
“선배랑 닮았어요.”
“그런 말 종종 들었어. 어릴 때부터.”
“아까는 도망간 게 아니라, 그분이 뭐라고 하셔서 그런 게 아니라, 선배가 저한테.”
“응.”
“너무 다정하게 그러니까, 그분이 눈치를 챌까 봐 그런 거고, 그리고 저도 말할 게 있는데 제가 그분한테 실수로 선배 아르바이트 갔다고…….”
“한아.”
그가 나의 성급한 변명을 끊었다. 귓가에 대고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맥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네.”
목소리가 떨렸다. 나의 긴장을 감지했는지 선배가 조금 웃었다.
“나랑 사귈래?”
그가 단단하게 손가락을 얽어 왔다. 그의 손가락과 나의 손가락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침묵하자 그가 내게 짧게 입 맞추었다.
“아까 너 불렀다던 여자 친구랑은 헤어져. 헤어지고 나랑 사귀자.”
장난스러운 말에 맥이 탁 풀렸다. 할 말이 있다는 게 이거였을까. 그가 이제 나를 버리겠다고 할까 봐 괜히 혼자 애가 닳았다는 생각에 허탈해졌다. 나의 손등을 쓰다듬는 그의 엄지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냥 둘러대려고 한 말이라는 거 알잖아요.”
“…….”
“혜주 누나 이후론 여자 안 만났어요.”
그가 소리를 내서 웃을 때마다 목덜미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알아. 이제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뜻이야. 여자 친구 대신 남자 친구 있다고 해.”
“…….”
“너 아무나랑 연애하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한아, 나랑도 사귀자.”
간지러운 키스가 뒷목에 닿았다. 나는 그가 어쩌려고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휴학은 어쩌려는지, 아르바이트는 어쩌려는지, 애스턴 마틴은 또 어쩌려고. 난감해하는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자 그가 단숨에 나를 침대에 눕혔다. 그의 눈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내가 단숨에 뒤바뀐 자세에 멍하니 그를 보자 선배는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켜 셔츠를 훌렁 벗어 던졌다. 부풀어 오른 상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사귀자니까.”
그가 옷 위로 잇자국을 남겼다. 나를 잘근잘근 씹어대며 거친 숨소리를 내는 그를 꽉 끌어안자 손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촌스러워요, 선배.”
내가 슬며시 웃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키스했다. 잡아먹히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요새 누가 그렇게 고백해요.”
키스로 인해 내 말에도 숨소리가 섞였다. 헐떡거리는 나를 보며 그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데?”
“……그냥.”
“…….”
“그냥 사귀는 거예요. 그런 말 없이.”
나는 그의 어깨를 조금 가까이 끌어당겼다. 손을 미끄러트려 그의 등허리를 더듬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우리가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
나를 만지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그가 뜨거운 열기를 쏟아냈다.
“너는 진짜.”
그가 다급하게 내 옷을 벗겨냈다.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입술이 급하게 부딪히며 이빨이 맞닿았다. 그가 내 셔츠를 말아 올리다 손을 헛디디고 짜증스럽게 입술을 떼어냈다. 그가 목구멍에서 긁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강하게 깨물었다. 미간을 구기며 신음하자 뻣뻣한 천 위로 축축한 그의 혀가 느껴졌다.
“매 순간 내게 필요한 말만을 들고 와서 사람 혼을 빼놓고…….”
한참을 내 어깨 위를 핥다가 나를 올려본 그의 눈이 붉었다.
“매번 나의 비겁함을 부끄럽게 해.”
용기를 내서 내게 고백을 해 놓고 뭐가 비겁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내가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한 적은 없으니…….
그저 그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부끄럽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눈가를 구기며 웃자 그가 내 턱을 단단히 쥐고 눈 주변을 핥아댔다. 간지럽다고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으나 나를 애무하는 그의 표정이 사납고 우울해 보여 그럴 수가 없었다.
***
나는 선배가 집안의 지원을 받지 않고 학비에 월세에 생활비까지 스스로 해결하며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부지런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와는 다르게 선배는 내가 그의 집에서 눈을 뜰 때 완벽하게 75퍼센트의 확률로 부재중이었고 나머지 25퍼센트의 경우에도 집안일을 하고 있거나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로써 전자의 확률을 대략 77퍼센트라고 계산하며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수업까지 딱 씻고 나갈 만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곧 중간고사 기간인데 준비를 해 놓은 게 별로 없어 걱정이었다. 출석과 과제만 꾸역꾸역해서 내고 있었다. 원래도 그다지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이번 학기 학점은 유독 걱정이 되었다.
복잡한 생각들을 하며 학교 홈페이지에서 시험 일정들을 확인하다가 핸드폰을 놓쳤다. 손에서 떨어진 핸드폰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갔다. 나는 한숨과 함께 무릎을 대고 앉아 침대 밑에 손을 밀어 넣어 바닥을 더듬거렸다.
얇은 끈이 손에 잡혔다. 별생각 없이 잡히는 것을 끌어냈다. 당연히 놓친 핸드폰은 아니었다. 부피가 큰 종이 상자의 옆에 달려 있던 손잡이 끈이었다.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이런 게 침대 밑에 숨겨져 있다는 점이 아니라 먼지가 하나도 묻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박스는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당장 어제 먼지를 털어낸 것처럼 손에 묻어 나오는 찝찝함이 전혀 없었다.
문득 그와 처음 잤던 날 그의 서랍을 뒤지던 것이 생각이 났다. 꼭 그만큼의 아득함과 막막함이 눈앞에 있었다. 금단의 상자를 앞에 둔 판도라처럼 나는 유혹당했다.
홀린 듯이 그것을 여는 데는 대단한 용기나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유혹에 약했으므로.
하지만 상자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가 만년필과 폴라로이드, 콘돔보다 더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것은 글이었다.
빼곡하게 활자가 인쇄된 수백 장의 글. 어떤 것은 만년필로 적어 잉크가 번져 있었고 어떤 것은 인쇄되어 붉은색으로 첨삭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득한 시선으로 손으로 잡을 수도 없이 많은 종이 뭉텅이들을 바라보았다.
침대 밑, 가장 어두운 곳에 선배는 이런 것을 숨겨 두고 살고 있었다.
‘내 재능이 모자랐는지 노력이 부족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계를 느끼고 있어.’
나는 당연하게도 선배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내 환상 속에서 그는 항상 완벽했으니까. 한 번도 그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서는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민재 형이라든가 희윤 씨라든가, 스치듯 만난 그의 후배들이 칭송하는 그의 재능을 액면 그대로 맹신했다.
그래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재능을 타고났으면서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린다고, 내 멋대로 재단하고…….
“한아.”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 선배가 뒤에서 나의 어깨를 짚었다.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선배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
“울 것 같은 표정, 하지 말라니까.”
그가 무릎을 굽혀 앉으며 차가운 손으로 나의 뺨을 감쌌다. 다정하게 나를 매만지다가 조용한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아마도 매일 쓸고 닦았을 상자가 반짝거렸다.
“선배…….”
목이 메서 그저 그를 부르기만 하는데 그는 나를 향해 애틋하게 웃었다.
“절대 안 울 것 같이 생겨서는 왜 그렇게 잘 울어?”
선배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나는 그의 가슴팍 위로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냥 선배한테 미안해서요.”
“뭐가. 내 지난 역사를 훔쳐봐서?”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읽었어요. 그럼 안 될 것 같아서…….”
그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읽어 봐도 돼. 어차피 우리 과에서 허구한 날 하는 게 남의 글 읽고 평론하는 건데.”
“싫어요.”
“…….”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해서 죄송해요. 선배한텐 인생이 걸린 일인데 어떻게 할 거냐고 닦달하고, 노력할 만큼 했다는 선배 말을 믿지도 않았고, 함부로 선배 흔들어 놓고 그래서…….”
선배가 울먹거리는 나를 떼어내며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시선이 단정했다.
“그게 네가 미안할 일이니.”
“…….”
“내가 너 때문에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게?”
선배는 담임선생님 같은 말투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갯짓으로도 대답하지 못했다.
“한아, 내 치부를 이렇게 환한 빛 아래 전부 드러내 놓고 정작 네가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
“…….”
“화를 낼 수도 부끄러워할 수도 없잖아.”
그에게 고백하기 전에 그는 가끔 내 행동을 지적하며 나를 혼냈고 나는 그의 훈육이 좋았다. 내게 길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나를 가르치는 그는 어른스럽지 않았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는 듯이 복잡해 보였다.
“네가 나의 영감을 지나치게 자극한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너를 밀어내려고 했었고.”
“…….”
“그런데 너는 사랑한다는 말로 내게 왔고, 나는…….”
숨을 참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금 웃었다.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어이없다는 듯이.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치열하게 글을 썼던 순간이 모두 다 너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을 오래 참아서인지 그로부터 너무 낭만적인 말을 들어서인지 모르겠다. 문학을 가까이한 적 없는 내게 이런 감상은 과도했다.
“그러니까 미안할 것 없어.”
“…….”
“알았니?”
내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그만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내 턱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나는 눈물을 떨궜다. 선배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내 어깨 위를 토닥거렸다.
“중도 앞에서 울던 너를 보던 날, 사실 이렇게 하고 싶었어.”
그의 정갈한 숨결이 가까이 닿았다. 그에게서는 희미한 먼지 냄새가 났다. 그의 마른 입술이 나의 젖은 입술 위로 닿았다. 내가 입을 벌리자 그가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끝없는 미지 속에서 우리는 키스했다.
그가 깊은 곳에 감춰 두었던 글자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를 위로하고 그에게 답을 찾아 주고 싶었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큰 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