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느 낮 정사 직후의 노곤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선배……, 그동안 몇 명이랑 잤어요?”
질투라기보다는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섹스는 처음이었어도 키스는 아니었으니까. 대체 몇 명이랑 해 봐야 이렇게 혀의 움직임이 녹진하고 부드러워질까.
그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애인 사이에 과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현명하다고 하던데.”
“아니에요.”
나는 필사적으로 우겨댔다.
“그건 초반에 얘기고, 서로서로 알아 가면서는 과거 얘기도 하고 그러는 거죠.”
선배가 내 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내 애인이 나를 모태 솔로라고 속이고 있네.”
“선배는 이미 제 과거에 대해서 다 알잖아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누워 있던 그가 반대쪽 손가락으로 내 어깨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기억 안 나. 스무 살 때부터 세기 시작하면 너무 많아서.”
“…….”
“섹스라는 게 내게 의미를 잃은 순간부터는 수를 안 셌어.”
그러니까,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았다는 거다.
뭐, 그게 그렇게 싫은 건 아니었다. 기가 막히게 수련된 그의 혀가 항상 나를 황홀경에 이르게 했으니까.
“한아, 사람을 닦달해서 알아냈으면 표정을 숨기든가.”
선배가 낮은 소리로 웃으며 손끝으로 내 목덜미를 더듬었다.
“제 표정 지금 별로예요?”
“아냐. 잘생겼어.”
나는 한 손으로 내 입꼬리를 매만져 보았다. 약간 내려가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입가를 문지르자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짧게 키스했다.
“왜 의미를 잃었는데요?”
“글쎄.”
그가 진득한 움직임으로 내 입술 안쪽을 핥았다. 장난에 가까운 키스였다.
“섹스라는 걸 통해서 뭔가를 얻고자 했기 때문 아니에요?”
“그랬지, 처음에는.”
“…….”
“특별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가 속삭일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스무 살 땐 막 집에서 벗어났다는 그 해방감에서 오는 희열이 있었고, 성인들의 전유물을 내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그런 묘한 기분이 들어서, 기대를 많이 했지.”
선배의 스무 살.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가 이야기하기를 그는 어릴 적 정말 서툴렀다고 한다. 당신이 온실 속 화초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20대 초반을 보냈다고.
“글과 사랑이 내 인생을 바꿀 거라고 믿었어. 원래 곱게 자란 애들은 좀 수동적이거든. 그래서 내가 운명을 개척하는 일에 상당히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라고 믿었지. 고작 밤마다 다른 상대를 찾아 헤매는 일 따위를 노력이라고 부르면서.”
선배는 어느새 다시 나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섹스의 전 단계임을 자각한 나는 그를 슬쩍 밀어냈다.
“선배, 저 내일 오전에 수업…….”
그가 미간을 좁히더니 아쉽다는 듯이 조금 물러났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누워 이야기했다.
“계속 얘기해 주세요.”
“운명 같은 게 개소리라는 냉소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된 후에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달았다.
“내가 세워 놓은 명제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섹스를 했던 것 같아. 반항심도 조금 있었고, 내 일상이 고되다 보니까 남을 진지하게 알아 가고 싶지도 않았고.”
“……좀 아까워요.”
“뭐가?”
“아무도 알아 갈 여유가 없었던 게요.”
그의 볼 근육이 부드럽게 당겨졌다. 그가 다정하게 웃었다.
“안쓰러워할 필요는 없어, 한아. 내 선택이었을 뿐이야.”
“…….”
“그 선택으로 인한 시간이 불행하거나 괴롭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으니까. 너무 힘들었다면 다른 길을 찾았겠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그와 이렇게 되기 전 내가 그에게 종종 했던 말이었다. 모델 일 같은 걸 하라고. 그때도 그는 똑같이 답했었다. 지금이 좋다고. 편안하다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릴 적에 내가 세워 놓은 가설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 같아.”
“어떤 가설이요?”
“일회성 관계를 통해 온전한 정신적 교감의 상대를 식별해낼 수 있다는 가설.”
“…….”
“육체적 행위는 감정의 소모를 동반하는데, 기반 없는 관계에서 섹스를 통해서 무언가를 쌓아 올리려고 했다는 게…… 선후 관계가 잘못되었던 거지.”
제가 가설에 대해서는 좀 아는데요, 이런 건 보통 가설이라고 안 하거든요. 철학, 인생관, 이쪽에 더 가깝거든요…….
“이해 못 했어도 괜찮아, 한아.”
내가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못 알아들은 걸 알아들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죄송해요.”
“그냥, 너와도 육체적 관계로 처음을 시작한 게 후회된다는 뜻이야.”
그런가. 그러면 안 됐던 건가.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단순하게 결론을 내고 고개를 저었다.
“저도 섹스 먼저 하고 사귄 건 선배가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사귀고 있으니까 된 거예요.”
“…….”
“부족한 게 있으면 차차 채워 가면 되죠.”
선배는 또 웃었다. 모델 알바를 하라던 내게 ‘나는 지금이 좋아.’ 하며 웃던 그때처럼. 그때의 그런 얼굴로.
“그럼 한이 너도 얘기해 봐.”
“뭘요?”
“섹스는 먼저 안 하고 사귀었던 네 전 여친들에 대해서.”
그는 여전히 나른하게 웃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가시가 느껴지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 질문으로 인해 나는 선배가 왜 자신의 잠자리 경험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저했는지 100퍼센트 이해했다. 껄끄러운 감정이 확 밀려왔다.
“저는 다 얘기했었잖아요. 차였을 때마다 선배 찾아가서…….”
“그런 뜬구름 잡는 거 말고.”
“…….”
“한번 말해 봐. 네가 열 번이나 했던 연애가 네 인생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에게까지 들리지 않았기를 바랐을 뿐이다. 분명히 액체의 형태였는데 목구멍에 달라붙기라도 했는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저 혼낼 거예요?”
내가 겨우 그런 말을 꺼내 놓자 그가 느긋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혼내지 않아.”
“…….”
“너를 이해하고, 존중할 거야.”
“…….”
“너의 모호함이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더라도.”
선배는 나에게 모든 것을 열어 보여 주었다. 내가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은 페어플레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나의 지난 학교생활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오래 머뭇거렸을 뿐이다.
“선배를 처음 봤을 때, 그때는 잘 몰랐는데…….”
고작 1년 전인데, 지난날을 회상하는 나는 더듬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 앞에서 짝사랑의 역사를 매끄럽게 털어놓기란 어려운 일이었기에.
“제가 반했던 것 같아요.”
“…….”
“선배한테요.”
“그러니.”
선배는 조금 웃었지만 맥락을 끊어내는 웃음은 아니었다. 경청의 의미 정도였다.
“선배는 아마 기억 못 할 거예요. 그날 저한테 했던 말.”
“뭐라고 했지, 내가.”
“여자 친구랑 헤어지면 연락하라고. 술이라도 사 준다고.”
아무 의미 없는 말이었다. 그냥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니까 예의상 던졌던 말이었다. 인사치레 같은 말.
내가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 첫 여자 친구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냥 저한테는 그게 전부였어요.”
“…….”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깊은 사고 과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열 명을 만났다가 헤어진 거예요.”
“…….”
“선배랑 있으면 시간의 흐름을 잘 모르겠어서……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날 때가 있어요.”
그는 아까의 짧은 미소 뒤에는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똑 부러지게 끝나지 못한 나의 말 뒤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실감이 안 날까.”
“…….”
“한아.”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너무 차분해서 나는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정말 단 한 순간도…… 사랑한 적 없니?”
“…….”
“한 번도 너와 사귀었던 여자를 사랑스럽다고 느껴 본 적 없어?”
따져 묻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혹여나 내가 그렇게 느낄까 염려하는 것 같은, 부드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내게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그런 적 없어요. 그런 걱정 안 해도 돼요. 다 정리된 일이고, 저는 선배밖에…….”
하지만 나의 변명에 그가 짧게 웃었다. 그의 비틀린 입술을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런 사탕 발린 소리 내 앞에서 할 필요 없어.”
“…….”
“나도 네 앞에서 그러지 않으니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한아, 네가 보는 내가 유일하고 진실한 나야. 그래서 나는 너도 내 앞에서는 완전히 나체이길 바라는 거야.”
“…….”
“나는 네가 느낀 모든 감정을 존중해.”
“…….”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한아. 한 번도 애인이었던 사람을 사랑한 적 없고,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네가 그 성격에 왜 너를 함부로 폄하하는 소문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지.”
그가 그렇게 이야기한 순간 나는 무언가에 쿡 찔린 것처럼 아팠다.
근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선배는 그저 그 말만 남겨 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나와 밤을 함께 보내고, 낮엔 여전히 부지런하고, 할 일이 없으면 나와 드라이브를 가며 가끔 강원도에도 갔다. 별을 보러, 바다를 보러, 양 떼를 보러.
그는 아르바이트 인수인계를 하면서도, 휴학계를 작성하면서도, 내게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물었다면 대답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가족이 나의 일에 대해서는 포기를 했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
어쩌다 보니 혜주 누나의 손에 이끌려 유학 프로그램 설명회를 들으러 갔다.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누나는 원래 좀 거부하기 어려운 포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나는 요새 막 누나에 대한 감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해서 멍하니 그에게 손목이 붙들렸다. 그는 열의에 차 보였다. 나를 외국으로 보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열의.
누나는 설명회 내내 내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어디 떠나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그의 가느다란 엄지와 중지가 다 잡히지도 않는 나의 손목 둘레를 꼭 죄고 있었다.
“누나.”
내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렇게 세게 잡으면 나 좀 아픈데.”
하지만 그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다가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엄살 피우지 말고 집중해.”
어차피 유학이고 뭐고 갈 생각도 없어서 설명회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누나가 날이 갈수록 수척해 보이고 생기 없어 보여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한아.”
설명회가 끝나갈 무렵 조용한 목소리로 그가 나를 불렀다.
“응?”
나는 고개를 기울여 누나 쪽을 바라보았다. 누나의 입꼬리가 약간 떨렸다.
“……아니야.”
“뭐야.”
실없는 대답에 내가 헛웃음을 짓자 그가 다시 말했다.
“웃지 마.”
“…….”
“네가 그런 얼굴 하고 웃으면 기분이 나빠.”
“…….”
“행복해하지 마. 기분 더러워.”
내가 행복해하는 웃음을 지었던가. 나는 그냥 생긴 대로 웃었을 뿐이다.
“안 웃을게.”
나는 누나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내 입꼬리를 꾹꾹 눌러 내렸다. 그러자 그가 한쪽 눈썹을 구긴 채로 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밥 먹으러 가자.”
“누나, 나 이제 집에 가 봐야…….”
“같이 가. 장단 맞춰 준다고 했잖아.”
나는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생각하다가 누나와 헤어질 당시 그가 내게 했었던 말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먹고 가.”
여전히 그에게 손목이 잡힌 채로 일어났다. 그래, 밥 먹고 가자. 같이 먹는다고 세상에 뒤집어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한 손으로 요일을 확인했다. 어차피 선배도 오늘 늦게 들어오는 날이니 그를 혼자 두지 않아도 되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고개를 정면으로 들었는데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맞닥뜨렸다. 나는 눈을 두 번 깜빡이며 혹시 내가 본 게 헛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하지만 상대의 싸하게 굳은 표정을 보자니 절대 헛것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이소망.”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었다.
이소망.
이제 이름도 가물가물한 몇몇 전 여자 친구들과는 다르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이소망.
나의 두 번째 여자 친구이자.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미워하는 여자.
이소망은 새하얗게 질린 채, 싸한 무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곳에서 그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곤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기에.
나는 무의식중에 내 앞과 옆에 있는 두 여자의 눈치를 봤다. 이소망은 여전히 찬물을 맞은 얼굴이었고 혜주 누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을 꺼낼 만도 한데 두 여자는 별말 없이 고요했다. 결국 내가 먼저 혜주 누나를 끌고 강당을 나왔다.
“…….”
“…….”
불편하고 미묘한 정적이었지만 누나는 별 신경 안 쓰는 듯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식당으로 이동했다. 조명의 조도가 낮은 로맨틱한 이탈리아식 레스토랑. 누나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별 불평 없이 들어갔다.
“누구니?”
누나는 차분하게 레몬수를 한 입 머금고 나서야 내게 물었다.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전 여친.”
“몇 번째?”
“두 번째.”
내 여자 친구들은 이따금씩 서로에 대해서 알았지만 다섯 번째 여자 친구 이후로는 이소망을 몰랐을 것이다. 그쯤부터 걔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첫사랑?”
“그런 거 아냐.”
나는 헛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적어도 나한테보단 진심이었던 것 같던데.”
누나는 조금 자조적으로 말했다. 나는 수척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다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네가 그렇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니까.”
“…….”
“나한텐 안 그러잖아. 이렇게 억지로 끌고 와도 같이 밥도 먹어 주고.”
“…….”
“원래 마음이 깊었을수록 헤어지고 나서의 예상치 못한 조우가 불유쾌한 거야.”
그래, 그게 마음의 척도라면 나는 혜주 누나보단 이소망에게 진심이었을 것이다. 아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심장이 완전히 내려앉아 버렸으니까.
“네가 내게 덜 진심이어서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니었다면 아까 그 여자애한테 그랬던 것처럼 빳빳하게 굳어서 인사조차 못 했을 테니까.”
“그렇게 해석할 필요 없어. 그냥 좀 당황한 것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만났던 첫 번째 여자 친구와는 다르게 이소망과는 뭔가 달랐던 것이 있었던 것은 맞다. 그와는 동질감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과학 고등학교 출신이었고 같이 조기 졸업을 했기에 동기들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때는 내가 선배를 사랑한다는 것을 완벽히 깨닫고 인정하기 전이라 혼란과 무지 속에서 연애를 했고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연애상에 부합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었다. 그런 점에서 혜주 누나와 다르다. 누나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스쳐 지나치는 바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소망에게는 진심이었고 누나에게는 진심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 나한테도 진심이었니?”
“…….”
하지만 그 질문에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분명히 둘 다에게 진심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해서 나는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했다.
“그 순간에는 충실했어.”
이것만은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충실했다. 이소망과의 연애에도, 혜주 누나와의 연애에도. 다만 마음속에 나의 영원하고도 숭고한 첫사랑을 품었을 뿐이다. 무게감과 진정성으로.
그것이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누나의 접시를 가져가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썰어서 돌려주자 누나가 자연스럽게 접시를 받아 들었다.
“안 시켰는데 계속 종노릇을 하네.”
“……그냥 익숙해졌어.”
열 명의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바람직한 남자 친구가 가져야 할 법한 매너들이 몸에 익어 버렸다. 나는 진화하듯이 단계별로 변해 갔다. 지금은 레벨 10이 된 셈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누구나 연속된 열 번의 연애를 하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너랑 사귈 때 네가 그러는 걸 보고 기분이 이상하더라.”
“…….”
“싫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좋지도 않았어.”
예상외의 피드백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좋지 않았을까. 알 수 없었다.
“남의 흔적을 묻히고 온 느낌이라 조금 그렇더라.”
“…….”
“그러니까.”
누나가 잠깐 말을 멈추고 우아하게 물 잔을 들어 올렸다.
“지금 여자 친구한텐 그러지 마.”
“…….”
내가 멍한 얼굴로 누나를 바라보자 누나도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예리한 시야에서 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만나는 사람 있는 거, 알아.”
“…….”
“그냥 알 수 있어. 지금 너를 보면.”
“……어떻게?”
멍청한 내 질문에 누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어지간히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누나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고,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원인 불명의 이상한 불편함도 더 커졌다.
“우리가 헤어지고 요새 들어서 네 보조개를 더 자주 보게 됐으니까.”
“…….”
“내가 참 좋아했었거든, 네 보조개.”
나도 모르게 손등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누나의 입에서 나오는 노골적인 칭찬의 말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유학은 웬만하면 가. 정말 너한테 좋은 기회여서 그러는 거니까.”
“……그런 건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나의 대답에 누나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는 답답하고, 또…….
“한아.”
“응.”
“네가 한국에 있으면 내가 계속…….”
슬퍼 보였다.
“내가 계속 너를 이렇게 불러낼 것 같아.”
“……누나.”
포크를 떨어트리며 일그러지는 누나의 얼굴을 보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다시 묵묵히 포크를 부여잡았다.
“……옛날에 너 ‘프랑스 문학사’ 들었다고 했잖아.”
뜬금없는 소리였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나는 따라가지 못하고 버벅거렸지만 누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네가 그 수업 발표 평가로 읽었다던 고전 문학을 나한테 보여 줬었어. 기억나니?”
“……응.”
“무슨 책이었는지도 기억해?”
“그건 기억 안 나.”
“…….”
“사실 이해도 안 되고 어려워서 그냥 영화로 줄거리만 파악했었어.”
“…….”
“미안해.”
나는 이 순간 내가 대체 어떤 맥락에서 사과를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나가 프랑스 문학사 교수님도 아니고 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지.
누나도 어이가 없는지 소리를 내서 짧게 웃었다.
“뭐가 미안한데?”
나는 그 질문이 어쩐지 화가 났을 때 애인이 애인에게 하는 말 같다고 느끼며 대답했다.
“그냥, 우리 추억인데 기억 못 해서.”
그 말에 누나는 조금 더 선명하게 웃었다.
“고작 그런 게 미안할 리가 없지 않니?”
“…….”
“다른 게 미안한 거겠지.”
나도 그 말에 동의했으나 정작 뭐가 미안한지, 뭘 미안해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건 왜?”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렇게 물었다. 누나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반쯤 남은 자신의 스테이크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냅킨 위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냥.”
다정하고도 침침하고, 약한 목소리였다.
“생각이 나서.”
나도 누나를 따라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누나가 마저 말했다.
“요새 그 생각을 자주 해.”
“…….”
그 말을 끝으로 그와 나는 다시 침묵에 잠겼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누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
어딘가 껄끄럽고 복잡한 감정으로 선배의 집에 돌아왔을 때 선배는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 프린트된 문제지가 책상 위에 정갈히 놓여 있었다. 안경을 쓴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절로 입이 벌어졌다.
선배는 대체로 다정하고 따뜻한 인상이었지만 차가워 보이는 재질의 은색 안경테는 그의 인상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자기주장 강한 이목구비가 조금 더 날카롭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선배, 안경…….”
내가 어물거리자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더듬다가 아아, 했다.
“이상해?”
그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지적인 이미지까지 더해져 더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갑자기 천희윤 씨를 비롯한 문창과 학생들이 부러워졌다. 아무리 비즈니스 사이라지만 저 모습을 계속 봤겠지. 수업에서, 과방에서.
“아뇨. 잘 어울려요.”
“…….”
“선배는 뭐든…….”
말을 내뱉고 보니 지나치게 닭살이 돋는 말이었다. 그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뭐 하다 왔어?”
선배는 그저 다정하게 물었으나 나는 말문이 막혀서 두 템포를 쉬고 답했다.
“그냥 밥 먹고.”
“응.”
“그냥.”
“그냥?”
“그냥 있다 왔어요.”
안경알 너머로 선배의 눈동자가 어떤 빛일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나를 더 추궁하지 않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씻고 나와, 한아.”
내 이름을 부르는 마지막 음절은 잠겨 있는 것처럼 섹슈얼하게 들렸다.
젖은 머리로 그와 침대에 누워 손장난을 치다가 나는 문득 물었다.
“선배.”
“응?”
“저…… 보조개 있는 거 알았어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살포시 웃었다.
“왜 모르겠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글쎄.”
“…….”
“웃어 봐. 한번 보게.”
나는 순순히 한쪽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선배가 가벼운 손짓으로 뺨 위를 두드렸다.
“너 네가 섹시하게 생겼다는 거 알고 있어?”
“제가요?”
선배가 키득거리며 내 얼굴을 만져댔다.
“직선적으로 생겨서는 웃을 때 이렇게 보조개가 패잖아.”
“…….”
“그래서 야해, 네가 웃을 땐.”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왠지 쑥스러워 고개를 숙이고 웃다가 야하게 보일까 봐 다시 입꼬리를 내렸다.
“맞다, 이것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프랑스 문학사’요.”
“응.”
“그때 제가 발표했던 책 뭐였는지 기억나요?”
“갑자기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요.”
“음.”
그가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단단하게 얽어 왔다.
“좀 헷갈리네, 한아.”
“……뭐가요?”
“네가 지금 나를 꼬시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네?”
혀로 제 입술을 핥은 그가 내 뺨에 키스했다.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그와 눈을 마주 보게 되었다. 입술이 맞닿기 전 그가 작은 숨소리로 말했다.
“<연인>.”
“네?”
“<연인>이었잖아. 마르그리트 뒤라스.”
아. 생각이 났다.
선배는 정말 몰랐던 거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그가 발음하는 ‘연인’이라는 말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진짜로 까먹었던 거야?”
“네. 그 수업 저한텐 악몽이었거든요.”
그가 웃을 때마다 나와 닿아 있는 흉부가 들썩거렸다.
“그래 보이더라. 너 수업마다 졸거나 인상 찌푸리고 있었잖아.”
“사실 그 발표도 영화만 보고 했어요. 책 읽다가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런데 왜 들었어?”
“…….”
나 또한 그가 정말 이걸 몰라서 묻는지 모르겠어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픽 웃으며 내 뺨을 토닥거렸다.
“네 입으로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선배 때문에요.”
“…….”
“선배가 교양으로 그거 듣는다고 하니까……. 저 그거 제 인생에 유일한 D+이거든요. 선배 때문이에요.”
그가 제법 크게 웃었다. D+가 웃겨서 웃나 싶어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살살 문질러 폈다.
“선배가 발표했던 책도 기억나요. <노트르담 드 파리>.”
“네 건 기억 못 한다면서 그건 또 기억하네.”
“근데 발표 내용은 제대로 못 알아들어서 몰라요.”
그가 다시 웃었다. 나는 어쩐지 조금 창피해졌다. 이상한 좌절감에 눈썹을 양옆으로 뉘자 그가 “왜?” 하며 다정하게 물었다.
“선배 저랑 얘기하는 거 재미없죠.”
나는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그에게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그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다정했다. 소문도 좋았고 인생 경험도 많고 강인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의 동기나 선후배들과는 다르게 문학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교양 수업 하나 따라가지 못해 D+나 받고.
선배는 내 질문에 누워 있던 채로 내 얼굴을 단단히 붙잡고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전 그때까지 그 <노트르담 드 파리>가 뮤지컬인 줄 알았거든요.”
“…….”
“<연인>도 다 못 읽었고……. 가끔 선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때도 있어요.”
“……한아.”
나를 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그가 나를 불렀다.
“나는 사람이 꼭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
“맞지 않는 부분까지 억지로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고 강박인 거지.”
“…….”
“아마도 가족들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아. 어릴 적부터 너무 강요받은 삶을 살았어.”
선배가 천천히 내 팔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강압은 관계를 파괴할 뿐이야.”
“…….”
“그러니까 네가 나를 다 몰라도 괜찮아, 한아.”
나는 어쩐지 조금 쓸쓸하게 들리는 그의 음성을 위로하고 싶었다.
“선배, 그래도 우리는…….”
“응.”
“<연인>이잖아요.”
“…….”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내 뺨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래.”
“…….”
“네 말이 맞네.”
“…….”
“우리는 단순한 인간관계를 초월하는 애인 사이지.”
선배는 우리가 ‘애인’이라고 정정해서 말했다. 하긴, 어렴풋이 기억나는 <연인>은 새드 엔딩이었다.
***
선배는 대학 4년을 통틀어서 처음으로 ‘대학생’다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집안일을 할 필요 없이 늦은 오전까지 늦잠을 자고 초저녁부터 동기들과 술도 마시고 나와는 제대로 된 연애도 하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선배에게 제대로 된 친구라곤 민재 형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 생각보다 인간관계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의 여유롭고 다정한 성품이 사람들을 주변에 머무르게 하나 보다.
독서회 사람들과 1차 술자리를 가지고 2차로 넘어가던 새벽에 선배는 내게 전화했다. 희윤과 둘이 빠져나올 것인데 이리로 오라고. 내가 이미 아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배의 지인을 소개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한적한 룸 술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선배와 희윤은 조금씩 취해 있었다. 희윤은 약간 풀린 눈으로 나를 향해 마구 손을 흔들었다. 10년 만에 만나는 동창을 보는 듯 반가워하는 표정이 낯설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선배가 나를 끌어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희윤이는 원래 취하면 저래. 처음 보는 알바생한테도 저렇게 인사해.”
선배가 테이블 밑에서 나와 손을 겹쳐 잡고 손등을 살살 문질렀다. 싸늘한 에어컨 바람과 대비되는 그의 따뜻함이 좋았다.
나는 소주잔을 입에 댔다가 떼어냈다. 선배는 많이 취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를 책임져야 한다는 일념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희윤은 소파 뒤로 머리를 푹 기대며 말했다.
“둘이 결국 사귀기로 한 거지?”
우리가 대답하지 않자 희윤이 으아아 이상한 소리를 내며 팔을 휘저었다.
“부럽다. 부러워. 너무 부러워.”
“…….”
“진짜 진짜 부러워. 부러워. 짜증 나아아.”
선배는 그런 희윤의 모습이 익숙한 듯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투로 말했다.
“친구의 행복엔 축하를 해 줘야지, 희윤아.”
어린애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에 희윤이 선배를 확 째려보았다.
“야, 나 네덜란드 갈 때 네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
“헛짓거리하지 말고 졸업이나 하라고, 사랑 같은 소리 하는 나보고 한심하다고 했어, 안 했어?”
선배가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내 눈앞에서 연애질하는 꼴을 보이고 축하까지 바라냐? 양심도 없이.”
“취소할게.”
“아, 혈압 올라.”
희윤은 자작을 했다.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소파에 기대듯이 몸을 미끄러트렸다. 나는 선배를 빤히 바라보다 그의 손바닥 위에 조심조심 글씨를 썼다.
‘제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느릿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선배의’
간지러웠는지 선배의 손가락 끝이 조금 오므라들었다 다시 펴졌다.
‘행복이에요?’
물음표까지 쓰고 고개를 조금 기울여 의문을 표하자 그의 눈이 크게 휘어졌다.
“……희윤이도 가라고 할 걸 그랬네.”
그가 나를 뚫어 버릴 듯한 깊은 눈웃음을 지으며 제 입술을 핥았다. 그 말에 희윤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둘이 뭐 해? 또 연애질하지. 하지 마. 하지 마!”
희윤이 팔을 휘저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로 이마를 긁다가 사람을 앉혀 놓고 선배와만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희윤에게 겨우 한마디 물었다.
“저번에 그 강의실에서 봤던 그분이랑은…….”
“헤어졌어요.”
내가 당황해서 입을 벌리자 선배가 친절히 내 턱을 잡고 닫아 주었다.
“신경 쓰지 마. 그냥 저런 애야. 저런 성향에 네덜란드까지 간 게 미친 짓이었지.”
희윤 앞에서 선배는 자신의 냉소적인 부분을 숨기지 않았다. 희윤 또한 선배의 냉대에 그대로 맞받아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 지는 무슨 백년해로할 줄 아나 보지?”
나 또한 이러한 대화에 안절부절못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편하게 다시 물었다.
“네덜란드 가서 뭐 했는데요?”
“연애요. 그냥 연애하고, 같이 살고…….”
“…….”
“아, 결혼식도 했다. 상징적인 의미뿐이긴 하지만. 사진 보여 줄까요?”
솔직히 남의 사진 같은 건 전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내 허리를 가볍게 안으며 귓가로 낮은 웃음을 흘렸다.
“착하네. 내 친구랍시고 비위도 잘 맞춰 주고.”
상냥한 목소리에 목 뒤로 소름이 돋아서 몸을 조금 움츠렸다. 핸드폰 사진첩을 뒤지고 있는 희윤이 그 모습을 못 봐서 다행이었다.
나는 희윤과 이름 모를 상대의 행복해하는 사진을 감흥 없이 보고는 돌려주었다.
“예쁘네요.”
아주 가끔 연애를 많이 해 본 덕을 볼 때가 있는데 지금처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할 때 그랬다. 희윤은 다행히 나의 진심 어린 칭찬을 바라기엔 많이 취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이때 진짜 예뻤던 것 같아.”
“…….”
헛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희윤은 진지한 얼굴로 불쑥 말했다.
“나는…… 얘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
“…….”
“얘 빼곤 다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아.”
“…….”
“그건 다 그냥 감정이었지. 사랑이 아니었어.”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죄의식 없기는.”
선배가 가볍게 희윤을 힐난했다. 희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맞아. 인정해. 난 죄의식 없어.”
“…….”
“단순한 거야. 내가 아닌 거면 아닌 거지. 장시현 네가 너무 진지한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선배는 말없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술을 마셨다.
“서한 씨는 나를 이해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희윤은 악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게 술을 권했다. 나는 짧게 고민하다 수긍하고자 했다. 내게도 그런 건 없었으니까. 죄의식 같은 것.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 전에 선배가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너랑은 달라.”
“…….”
“한이는 너랑 다르다고.”
“감싸기는. 뭐가 다른데?”
“얘는 그냥 몰라서 그러는 거야.”
“…….”
“아무것도 몰라서.”
“…….”
“다 알면서 태생적 외로움에 남의 감정 이용하는 너랑은 다르다고.”
어쩐지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말투였다. 희윤은 선배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대변인인 줄?”
희윤이 피식댔음에도 불구하고 선배가 굳은 표정으로 제 턱을 매만졌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신경 안 써도 돼요. 저 자식 저렇게 예민한 거 이미 알고 있으니까.”
희윤은 내게 퍽 다정하게 말하며 술을 따라 주었다.
“이쯤 되면 과 애들도 이런 모습을 좀 봐야 되는데. 그래야 환상이 깨지지.”
“환상 심어 준 적 없어.”
“있어. 왜 없어.”
“…….”
“여지는 의도 없이 주기 어렵지만 환상은 아니란 거 알잖아.”
“…….”
“네가 문창과에 온 것도 그 빌어먹을 환상 때문이잖아, 장시현.”
이번엔 희윤이 신랄하게 대거리했다. 그들은 까칠한 말들을 몇 번 더 주고받았지만 서로의 태도에 대해서 개의치 않았다. 서로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었을 뿐이다.
“장시현이랑 연애하면 어때요?”
한참을 으르렁대고 나서야 희윤은 내게 보편적인 ‘친구의 연애’에 대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마를 긁적이다 대답했다.
“좋아요.”
“그게 끝?”
뭐라고 더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
희윤이 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생각 많은 장시현이랑 연애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네. 심플 그 자체라서 싸울 일도 없겠다.”
“좋은 뜻이에요?”
“네. 좋은 뜻. 쟤가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잖아요. 상대라도 좀 단순해야지.”
나는 내게 기대어 허벅지 위를 어루만지는 선배를 쳐다보곤 대답했다.
“선배가 성격이 안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
“남들이 자기한테 가지는 환상, 알면서도 그걸 함부로 깨 버리지 않고 지켜 줄 수 있는 거……. 그건 다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못 했던 일이다. 여자 친구에게도 그다지 자상하지 못했으니 주변인들에게 다정하게 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타인이 내게 가지는 버거운 환상을 지켜 주는 것, 그것은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선배의 태도가 단순한 가식이 아닌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희윤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장시현이 내 앞에서 이렇게 닭살을 떨 줄이야.”
눈을 감고 있던 선배가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러게. 한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나도 몰랐네.”
그의 목소리에 밴 웃음기가 그대로 다 전달되었다.
“좋냐? 어?”
“아까 한이가 대답해 줬잖아. 좋다고.”
“…….”
“나도, 좋아.”
“…….”
“너무 좋다, 희윤아.”
반쯤 잠긴 목소리로 선배가 말했다. 제법 철면피인 나조차도 얼굴이 화끈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얘가 뭐라고 이렇게 좋을까.”
선배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그대로 굳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선배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가끔 미운 짓을 하는데도…….”
“…….”
“예뻐서 죽겠고 그래.”
나는 내가 어떤 미운 짓을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 무딘 성격 탓인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만해. 나 토할 것 같으니까…….”
희윤이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일어섰고 그가 룸을 나가자마자 선배가 내게 키스했다. 복숭아 통조림 맛이 났다. 그의 숨결이 조금 다급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언제 희윤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금방 그를 밀어냈다.
그와 스킨십을 하는 시간은 늘 너무 짧게 느껴져서 스스로 시간 측정을 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선배.”
나는 숨을 몰아쉬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가끔 제가 미운 짓을 해요?”
“…….”
“알려 주면 앞으로는 안 할게요.”
선배가 손등으로 제 입술을 문질렀다. 키스의 여운을 만끽하듯이. 잠깐의 정적 끝에 여전히 잠긴 낮고 검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가끔…….”
“…….”
“악의 없이 사람 심장을 떨어지게 하는 면이 있지.”
선배는 내 목덜미 위로 입술을 짓눌렀다. 그의 음성에 따라 내 목구멍이 울렸다.
“가끔 지저분한 망상을 하게 만들어.”
“…….”
“보조개와 <연인>.”
“네?”
“그걸 갑자기 왜 물어봤을까.”
선배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나는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아 빳빳해진 입술을 핥았다.
“나한테 끼 부리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면 누구와의 기억이 떠올라서 물어봤을까…….”
별 의도 없이 그냥 그날 혜주 누나가 물었던 게 생각이 나서 했던 이야기인데 선배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정말 귀신같은 촉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동안의 연애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따르면 정말 아무 의도가 없었다고 답하는 게 맞았다. 괜히 찝찝함을 남겨서 좋을 게 없으니까. 하지만 선배는 내가 그렇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한아.”
취한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망상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내 곁의 네가 좋으니까.”
그는 취중 진담을 하듯이 무력하게 말했다.
“그건…….”
하지만 타이밍 좋게 희윤이 들어오는 바람에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사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방해받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희윤은 선배와 내 사이에 감도는 기류를 잠깐 파악하다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공모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장시현 너 진짜 당선 포기하게?”
희윤의 질문에 선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가 술을 마셨다.
“미친놈.”
“안 미쳤어.”
“속물.”
“아닐 필요 있니?”
“위선자.”
그 비난에는 그는 술잔을 내려놓던 손을 멈칫했다.
“언제는 글만 있으면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다고 했으면서.”
선배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재능이 주인을 잘못 만났어. 이렇게 속 좁은 인간인데.”
“별것 아닌 재능이었던 거지.”
“…….”
“그걸 받아들이는 것도, 애매한 재능을 짝사랑하지 않는 것도 재능이야.”
선배는 덤덤했다. 마음 정리가 끝난 사람처럼.
“냉혈한.”
희윤의 마지막 비난에 선배가 비스듬히 웃었다.
“내 주변에는 자꾸 나를 글 쓰게 닦달하는 사람뿐이네.”
그러고는 나를 봤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요?”
선배가 대답을 하지 않자 희윤이 한숨과 함께 말을 쏟아냈다.
“내버려 둬요. 그냥 예술병 걸린 애들 종특이니까.”
“네?”
“다들 애인만 생기면 영감이 분수처럼 샘솟아서 셰익스피어라도 된 것처럼 굴거든요, 원래.”
“…….”
“아마 쟨 첫 연애라서 더 심할걸요? 그런 와중에 관둔단 것 자체가 독한 거지.”
“…….”
“솔직히 말해 봐. 그만두고 싶지 않잖아.”
선배는 한쪽 입술을 비죽 올려 웃으며 평소에 잘 짓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희윤은 육식 동물처럼 웃었다가 순식간에 미소를 거두었다. 그들의 분위기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재밌네, 혼란스러워하는 장시현.”
희윤이 술잔에 묻은 립스틱을 닦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항상 너를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막상 네가 나를 배신하니까 자꾸 심술이 나.”
씁쓸하게 웃는 희윤을 보며 나는 언젠가 그와 나누었던 문답이 떠올랐다.
‘선배가 글을 그만두는 일이 희윤 씨 입장에서 배신인가요?’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걔랑 나는 원래 항상 서로를 배신하는 사이예요. 한배를 타고 있지만 언제든 뛰어내릴 준비가 되어 있죠.’
희윤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솔직한 진심이자 예고 같기도 했다.
“희윤아.”
선배는 메마른 음성으로 희윤을 불렀다. 희윤이 사선으로 숙인 채 시선만 끌어올렸다. 선배가 천천히, 그러나 명확하게 말했다.
“네 운명론을 그렇게 오래 외면했었는데, 표면적이고 가시적인 걸로는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게 진짜 있었어.”
“…….”
“진짜로 있더라고.”
“…….”
“네 말대로 그걸 확인하고 나니까 글을 그만두는 것쯤은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네가 옳았어. 내가 틀렸고.”
그 무덤덤한 시인을 희윤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들었다.
“네가 네덜란드에 갔듯이 나도 로스쿨에 가는 거야.”
“…….”
“그러니까 그만 심술부려, 희윤아.”
하지만 이어지는 선배의 말에 그는 미간을 조금 구겼다.
“나는 네 친구잖아.”
그 순간 사막 같은 목소리가 왜 그렇게 달큼하게 들렸는지, 내가 그만큼 선배에게 빠져 있기 때문일까? 타인에게 다정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를 더 사랑하게 될 만큼?
만물에게 다정하지만 내게 가장 진심일 것처럼 행동하는 선배는 희윤이 술자리를 떠나고서도 혼자 여러 잔을 더 마셨다. 나는 선배를 집에 데려가기 위해 술잔만 부딪혀 주었다.
“한아.”
“네.”
선배는 내 이름을 한 번 부르고 술을 먹고.
“한아.”
“……네.”
또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리셋 된 것처럼.
“한아.”
“…….”
“한아.”
“……선배 왜 고장 났어요.”
나는 그의 단순무식한 무한 알고리즘의 생성 원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는 코를 찡그리며 그 잘생긴 얼굴을 구겨 웃었다.
“너 때문에.”
“…….”
“너 때문에 자꾸 고장 나네.”
“…….”
“너 때문에 자꾸…….”
이번에도 고장이 난 선배는 몇 번이고 ‘너 때문에’라는 말을 했다. 나는 기왕 그가 브레이크 없는 무한 루프 함수가 될 바에야 조금 더 낯간지러운 말을 반복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거 말고 다른 말은 할 거 없어요?”
“다른 말?”
어설프게 달콤한 말을 유도했으나 가만히 놓여 있던 내 잔에 제 잔을 부딪혀 파동을 일으킨 선배는 술을 입 안에 오래 머금고 있다가 목구멍으로 넘긴 후 답했다.
“내가 너를 구속하니?”
“네?”
그가 무한 루프를 탈출하고 나와 내게 물었다. 그것은 낯간지러운 밀어와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아뇨.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정말로?”
“네. 선배가 하는 것 정도는 구속도 아니죠. 어디서 뭐 하고 있냐, 여자랑 있는 거 아니냐, 1분에 한 번씩 문자하고 전화하고, 이런 게 구속이잖아요.”
선배는 구속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내가 어딜 다녀오든 누굴 만나든 깊게 파고들어 묻지 않았다.
“왜요? 저 구속하고 싶어요?”
내가 웃음기로 물었는데 그는 정색을 하고 답했다.
“아니.”
한참의 텀 뒤에 그가 마저 남은 답을 토해냈다.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운 거지.”
“…….”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할까 봐.”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기댄 선배가 다짐하듯이 중얼거렸다.
“너한테는 좋은 사랑만 주고 싶어.”
“…….”
“그런데 그 기준을 잘 모르겠어서…… 어렵고.”
“…….”
“너를 구속하고 네게 집착하고, 내 멋대로 너를 바꾸려고 할까 봐 겁이 나.”
선배는 또 혼자서 어지러운 생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왜인지 아이 같은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선배, 저를 너무 많이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선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웃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알코올 향기를 잔뜩 묻히고서 짧게 입 맞추었다.
“맞아.”
물기 없는 건조한 음성으로 그가 뜨겁게 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구속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나한테 딱 붙어서 나만 보고, 그렇게 있어.”
“…….”
“절대 너를 붙잡지 않을 거니까.”
나는 온몸이 바싹 타는 것 같은 애정을 느꼈다.
***
혜주 누나의 장단을 맞추어 주는 일이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다. 단순히 만나는 게 싫은 문제가 아니었다. 누나의 얼굴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채감이 들었다.
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나는 이번에도 나의 방식으로, 누나와의 만남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유학을 갈 생각도 없으니 설명회도 필요 없었고 전 애인의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내가 스도쿠 기록 단축하기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내가 모르는 번호의 전화를 받지 않는 습관을 후회하게 된 것은 나의 집 앞까지 찾아온 선배의 친형과 마주했을 때였다.
“서한 씨, 맞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그가 내게 물었다. 나는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 멍하니 답을 미루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그는 신사적으로 굴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서늘한 눈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까딱 숙여 내 인사를 받아 준 그가 뒤돌아 멋대로 앞장섰다.
카페에 선배의 친형과 마주 앉자 공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숨이 막혀 입 안으로 공기를 가득 채웠다가 뱉어냈다. 다행히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현이와.”
그는 단도직입적이었다.
“만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내가 부정할 새도 없이 그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시현이가 직접 제게 와서 말하더군요. 자기 첫사랑을 현혹시키지 말라고.”
선배와 가까운 사람의 입에서 전해 듣는 고백은 늘 더할 나위 없이 진심 같아 살 떨렸다.
“걔가 그렇게 감성적으로 구는 건 나나 우리 가족에겐 익숙한 일이지만.”
“…….”
“제가 당신에게 유학 기회를 준 게 현혹이라고 서한 씨도 생각해요?”
검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그의 말투는 딱딱하고 단호했다. 선배와는 묘하게 닮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왔다.
“아니요.”
“…….”
“제가 가지 않을 거니까, 현혹도 뭣도 아니죠.”
그는 내 대답에 턱을 약간 치켜들었다. 저와 마찬가지로 내 까칠한 말투에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내가 당신을 협박하는 천하의 악인이 된 기분이라 기분이 조금 그런데.”
그가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나는 시현이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런 건 관심 없습니다. 부모님이야 자식을 낳아 놓은 원죄로 그런 것까지 신경 쓰겠지만 나는 한낱 대학생들의 연애에 관심 두기에 너무 바쁜 사람이에요.”
그는 뱀 가죽처럼 차가웠다. 나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그럼 왜 나를 찾아왔냐고 따져 물을 참이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시지만 않았다면 당신과 이렇게 마주 앉아 시간을 낭비할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
하지만 그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혀 버린 나는 혀를 꺼내던 그 상태로 멈추어 버렸다. 선배의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전혀 예상에 없던 이야기였다.
여유로운 태도의 남자는 낮은 톤으로 수긍했다. 이 모든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시현이 성격에 그런 걸 남에게 이야기할 리가 없죠.”
이해한다는 말투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올해 말에 수술을 하실 예정입니다. 생존율은 50퍼센트를 조금 웃돈다고 하더군요.”
문득 내가 사 놓은 케이크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날이 떠올랐다. 본가에 갔다가 바람 냄새를 묻히고 들어온 선배에게서 느껴지던 한기, 복잡하고 피곤해하던 표정.
“시현이도 아버지를 위해서 올해 로스쿨로 진학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걔가 알아서 처신을 잘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지만 내 동생은 자꾸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엇나가려고 하는 것 같네요. 나는 그 약속이 빈틈없이 지켜지길 바랄 뿐입니다.”
희윤의 앞에서는 그렇게 이성적인 척 이야기를 해 놓고 결국 선배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가족도, 꿈도, 연애도, 그중 무엇을 얼마만큼 포기해야 할지.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와 같은 냉정한 말투로 받아치고 싶었다. 나는 선배만큼 따뜻한 인간도 아니고 다정한 성품도 못 되었다. 남에게 상처 주는 일에 자책 따위 하지 않는다.
“아닌 척 말씀하시지만 그게 결국 선배를 마음대로 통제하겠다는 뜻처럼 들리는데요.”
하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 서한 씨에게 내 당위성을 입증해야 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건 서한 씨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점입니다.”
“…….”
“올해까지면 됩니다. 시현이의 로스쿨 입학이 확정되기까지만이에요. 그때까지만 서한 씨도 외국에 나가서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면 좋지 않겠어요?”
회유형이었지만 무게가 느껴지는 어조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내 동생이 누구랑 연애를 하든 상관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 자주 보지 않게 될 테니까. 부모님께 약속드린 걸 지키라고 하는 겁니다.”
“왜 선배에게만 그런 희생을 강요하시는데요?”
그의 눈이 서늘한 기색을 풍기며 슬쩍 웃었다.
“내게 효도를 하지 않냐고 묻는 거라면, 난 다다음 달에 결혼을 합니다.”
“…….”
“아버지가 주선하신 선 자리로요.”
“……선배는 휴학도 하고, 로스쿨도 가겠다고 했어요.”
“내게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감성적인 그 애 성격을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휴학도 계속해서 미루고 있고, 도무지 믿음을 주지 않으니까요.”
“…….”
“어릴 적부터 충동에 약하고 자극에 약한 애였습니다. 이 시점에 남자 애인이라는 존재는 독이 될 뿐입니다.”
“…….”
“안 그래도 예민하고 유약한 성질의 애를 괜히 뒤흔들지 말아요.”
그 이후의 침묵 동안 나는 이를 여러 번 악물었다. 기분이 나빴다. 모르는 사람이 내 인생에 훈수를 두는 것도 우스웠고 나를 내려다보는 한없이 시혜적인 시선도 불쾌했다. 그리고 그가 선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든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마른 입술을 떼어내자 그가 어디 한 번 이야기해보라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선배에게도 늘 그런 식으로 말해요?”
“…….”
“예민하고 유약하다, 충동적이다, 그런 식으로.”
아주 가끔씩 선배가 가족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얼굴에 드리우던 그늘을 본 바 있다. 조금도 존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처럼 어두워지던 눈 밑의 그늘.
“저도 그렇게 좋은 애인인진 잘 모르겠지만.”
“…….”
“되게 나쁜 가족이었겠네요.”
그의 무감각한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왜 서한 씨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무덤덤한 말투에서 나는 느꼈다. 그와 나는 동질의 인간이라는 것을. 이기적이고 또 거침없다.
“내가 원하는 게 있다면 내 동생이 무사히 로스쿨을 가는 것, 그거 하나예요. 효용 가치 없는 일에 휘둘려서 일을 그르치지 않고…….”
그의 시선이 내 옆으로 비껴갔다. 45도, 아니 30도 정도. 나는 그가 말을 다 끝마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등 뒤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한아.”
심장이 떨어지는 듯해 서둘러서 뒤를 돌아봤다. 죄지은 사람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뭐 하니, 여기서.”
선배는 눈가를 구겼다.
예민하고 유약한 얼굴로.
“장시현. 앉아 봐. 안 그래도 네 얘기 중이었으니까.”
선배의 친형은 태연하게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툭툭 두드렸다.
“훈수 들을 생각 없는데.”
“외제 차는 왜 받았어, 그럼.”
그 말에 선배의 인상이 구겨졌다.
“장시주, 정떨어지게 행동하지 좀 마.”
선배가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놈의 차 확 갖다 팔아 버리기 전에.”
선배의 시선이 내게로 잠시 떨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나를 향한 실망감을 읽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으나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서 나가 버렸다. 나는 당혹감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변명 한마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선배를 이곳으로 불러냈다고 수긍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먼저 말할 것을 종용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뜻대로 행동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갔다.
뜨거운 햇살이 정수리 위로 내리꽂혔다. 저 멀리서 점점 작아지는 등을 발견한 나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손을 뻗어도 꼿꼿하고 외로워 보이는 뒷모습이 잡히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선배, 선배……. 선배!”
그의 팔을 강하게 붙들고서야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돌아보는 눈빛이 무던하고도 싸늘했다.
“그렇게 가면, 어떡해요.”
“…….”
“저를 데려가든, 끌고 가든 해야죠.”
숨이 막혔으나 헉헉거리고 싶지 않았다. 호흡을 억누르듯 나오는 내 말에 선배가 잠시 동안 침묵하다 대답했다.
“왜?”
차분하고 공허한 말에 가쁜 숨을 그대로 뒤로 삼켜 버릴 뻔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
“네가 애도 아니고,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저 자리에서 너를 끌고 나와야 해.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단조로운 어조에 숨이 막혔다.
“그거,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선배 가족이랑 뭔 얘길 하든?”
나도 모르게 까칠하게 물었다. 선배는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내가 상관할 자격 없다는 뜻이야. 그럴 겨를도 없었고.”
“그 말 되게 기분 나쁜 거 알아요?”
스스로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말을 했냐고 따져 물어야죠. 그게 정상적인 거잖아요.”
“정상? 그게 대체 누구 기준에서 정상이야.”
“…….”
“네 전 여자 친구들?”
갑자기 나온 공격적인 발언에 말문이 턱 틀어 막혔다. 그런 식으로 빈정거린 그가 한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내가 너를 구속하고 집착하고 매달리고, 그런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
“어쩌지. 나는 아닌데.”
이쯤 되면 나도 정말로 삐뚤어지고 싶어진다. 주머니에서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렸다. 짜증스럽게 발신자 모르는 전화를 끊어 버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한 거예요? 선배 아버지 편찮으시단 얘기, 그래서 로스쿨 가겠다고 약속했단 얘기, 아무것도 안 알려 준 거예요?”
“…….”
이번엔 선배의 입이 딱 다물렸다.
“왜요? 내가 알게 되면 로스쿨 가지 말라고 애원이라도 할까 봐서요? 내가 왜요? 뭐가 좋은 글인지 구분할 줄도 몰라서 선배가 쓰는 글이 좋은 글인지, 선배가 예술인으로서 얼마나 대단한지 알 방법도 없는 내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사람들 다 보는 길가에서, 이게 사랑하는 그에게 할 말이었던가. 자괴감이 들었으나 그가 나를 폭주하게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싸가지 없이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화가 났다.
“저를 그 신파 같은 상황에 처하게 한 게 누군데요?”
“…….”
“제가 유학 같은 거 안 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근데도 저를 못 믿어서 말 안 한 선배는 정말 비겁하고…… 겁쟁이예요.”
말을 뱉어 놓고 후회해 봤자 늦었다. 나는 모난 내 성격을 탓했다. 더 좋은 방식으로 이야기했어도 됐을 텐데. 이렇게 나의 서투름을 온전하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는데.
선배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반듯한 눈매가 여러 번 일그러졌다.
“한아, 넌 정말 똑똑하다.”
침잠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지네.”
“…….”
선배가 인상을 찡그릴 때마다 손톱이 깎여나가는 것처럼 손끝이 저렸다.
또다시 전화벨. 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혜주 누나. 다시 수신 거부를 눌렀다.
“전화 받아.”
“괜찮아요.”
하지만 또다시 벨 소리가 울리자 선배가 내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매끄럽게 스쳤다.
“…….”
전화를 받은 선배는 눈을 내리깐 채 침묵했고 나는 내게까지 고스란히 넘어오는 혜주 누나의 나른한 목소리를 들었다.
-핸드폰 놓고 다니는 줄 알았어. 하도 안 받아서.
“…….”
-어디야, 한아. 오늘 유학 설명회인 거 알면서 왜 안 왔어.
“…….”
-기다렸는데.
선배에게서 핸드폰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쭉 뻗었다. 손이 떨려서 내 손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그것을 놓칠 뻔했다.
“누나,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아예 전원까지 꺼 버리고는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안감이 파도처럼 너울졌다.
“선배.”
“…….”
“제 말 듣고 있어요? 선배.”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해명의 범위일지 알 수가 없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누나와는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지, 아니면 유학 설명회에 관한 것부터…….
“말 안 해도 돼. 말했잖아. 네가 누구를 만나든, 뭘 하든 괜찮다고.”
“…….”
“내가 싫어진 것만 아니면 돼.”
하지만 그는 내게 해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너 스스로 떳떳하면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언제 떨어트렸는지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선배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내 핸드폰을 주워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아버지 얘기 못 한 건 미안해, 한아. 네가 내가 글 쓰는 걸, 혹은 그만두는 걸 말릴까 봐 그런 건 아니었어.”
“…….”
“하지만 너한테 솔직하지 못했던 건 내 과오겠지. 형한테 안 좋은 소리 듣게 한 것도 생각해 보니 내 잘못 맞고.”
선배는 꼭 잡히지 않을 사람처럼 돌아섰다. 나는 멍청히 자석처럼 그의 뒤를 쫓았다. 뒤쫓는 발소리가 커서 내가 뒤에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데 선배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를 부르지도 못하고 놓칠 수도 없어서 울고 싶어졌다.
왜 하필 혜주 누나는 그때 전화를 했을까. 왜 나를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니면서 지금 와서 구질구질하게 굴까. 아니, 내 문제인가? 왜 진작 유학 설명회 따위 가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굴지 못했을까. 왜 전 여친과 사적으로 연락을 했을까.
선배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비로소 그런 생각마저 했다. 왜 가짜 연애를 했을까. 선배가 있는데. 선배를 사랑하는데.
“선배.”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선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선배는 피곤하고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들어오지 마.”
단호한 음성으로 그가 나를 밀어냈다. 나를 다시 쫓아냈다.
다시 그와의 거리가 멀어졌다.
처음처럼.
완전히 처음처럼.
“선배…….”
나는 길짐승처럼 아련히 그를 불러대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네 집에 가 있어.”
왜 그래야 하냐고,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원래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배의 시선이 너무 싸늘해서 그럴 수 없었다.
선배는 내 눈앞에다 대고 문을 닫았다. 공허한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무지 속에서 후회했다. 어디서부터 후회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태로 인생의 근원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