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 7장. 질식(1) (17/25)

제 7장. 질식

(1)

미각이 느껴지지 않는 입 안에 먹을 것을 욱여넣고 얕은 잠을 여러 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불도 끄지 않고 자서인지 눈이 찌르르 아파 왔다. 나는 멍하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곤 밖으로 나섰다.

발걸음이 절로 선배의 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모르겠고 그냥 선배가 보고 싶었다. 우리가 헤어진 게 아니라는 확답을 듣고 싶었다. 선배는 헤어진 연인에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주지 않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걸 예의라고 생각할 테니까.

“선배! 선배애!”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눌러댔다. 응답이 없어서 계속 손가락에 힘을 주며 선배를 불렀다. 옆집에서 인상을 찌푸린 이웃이 나와 내게 주의를 주기 전까지 멈출 수 없었다.

“불 꺼져 있는 거 안 보여요? 여기 주민 아니면 나가요!”

그제야 어두컴컴한 창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두통이 찾아왔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뒤돌아서는 나를 미친놈 보듯이 한 옆집 남자가 쾅 하고 문을 닫았다. 그 소리에 아까 선배의 차가웠던 표정이 다시 생각났다.

현관 밖을 나서자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고자 했다.

이대로 헤어지게 되려나. 그러기는 싫은데. 혜주 누나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고 누나 또한 내게 같은 마음이었다고, 그렇게 해명하면 되는 걸까. 그럼 내 열 번의 연애는 다 없었던 일인 것처럼 될 수 있는 걸까.

마른 무릎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데 저 멀리 익숙한 차가 멈춰 섰다. 나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애스턴 마틴. 선배의 차였다.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그쪽으로 다가가자 조수석의 창문이 내려갔다. 그러곤 보이는 무표정한 선배의 얼굴.

“……타려면 타.”

버석한 목소리로 그가 명령했다. 나는 말없이 차에 올라탔다.

어두운 적막 속에서 선배가 물었다.

“밥은 먹었니?”

“……네.”

“잠은 좀 잤고?”

“네.”

“그래.”

정작 자신은 한숨도 자지 못한 얼굴로 선배는 액셀을 밟았다. 헝클어진 머리, 고요한 숨소리, 창틀에 걸친 한쪽 팔과 핸들을 돌리는 마른 손가락. 선배의 모든 시각적, 청각적 신호가 서글펐다.

“선배는요?”

내가 되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틀에 걸친 팔의 검지로 마른 입술을 매만지며 액셀을 거세게 밟았을 뿐이다. 화가 났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차가 멈춰 선 곳은 한 호텔 정문 앞이었다. 내가 고전적인 건물 형식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선배는 갈라진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발레파킹을 맡기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따라가는 내 발걸음이 조급하게 느껴졌다.

그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더 나은 변명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변명이라기보단 선배의 기분을 풀어 줄 수 있을 만한 아양 같은 것들. 애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비는 일은 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선배에게서 두어 발자국 정도 떨어져서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지갑에서 새카만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종이에 서명을 하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것까지. 그는 이곳의 일원처럼 자연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미숙해 보이기도 했다.

선배는 내게 따라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탄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그를 따라갔을 뿐이다. 두 발자국 떨어진 상태로. 그와 연결되지도 단절되지도 않은 상태로.

카드가 룸 도어락에 스치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렸다. 슬로우 모션처럼 선배가 느릿한 손동작으로 문을 열었다.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그가 몸을 틀어 내 목덜미를 거세게 낚아챘다.

“흡!”

카드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뜨겁고 건조한 키스와 함께 선배가 몸을 이용해서 나를 벽으로 짓눌렀다. 문이 닫히며 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혀가 아프게 깨물렸다. 나는 목을 젖히며 입술을 떼어냈다. 내 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입술의 위치를 옮겨 옆 턱을 핥고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아, 너는 내가 간절하지 않지.”

“왜 그렇게, 생각해요, 아아…….”

멍울이 질 만큼 따가워서 앓는 소리를 하자 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시선이 뜨겁게 내리꽂혔다.

“내가 너한테 특별해? 응?”

그가 초조한 투로 내게 대답을 독촉하며 나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당연하죠.”

“근데 왜 나는 내가…….”

“흣.”

“그냥 스쳐 지나가는 네 열한 번째 애인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까.”

손이 안으로 쑥 들어왔다. 현관에 선 채로 섹스하고 싶진 않았다. 우선 그와 대화를 먼저 하고 싶었다. 그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그의 팔은 억셌다.

“선배, 일단 좀…… 얘기부터…….”

선배는 망부석처럼 단단한 자세로 나를 구속했다.

“여기서 선 채로 너한테 박을 거고, 욕실 욕조에서도 널 엎드리게 할 거고, 침대에서도 벌리게 할 거야.”

“…….”

“그동안 했던 것처럼 마냥 곱게 한다고 보장 못 해.”

“…….”

“그러니까 너는, 내가 네게 특별하단 말 증명해.”

나는 가만히 들썩이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다리가 가볍게 떨렸다. 아침 드라마 같은 상황이 싫다던 선배는 지나치게 상투적으로 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선배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빠르고 투박하게 허벅지 사이로 침투했다.

“그럼에도 네가 얌전하게 있으면, 네 말 믿어 줄 테니까.”

빡빡한 구멍 안으로 곧장 손가락이 기어들어 왔다.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그가 신경질적인 손길로 바지를 끌어 내리며 내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아아!”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아래위로 치닫는 고통에 아프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선배가 나를 받쳐 안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바지 지퍼를 끌어 내렸다. 그의 혀가 치아를 박아 넣었던 곳을 빈틈없이 핥으며 노련한 솜씨로 고통을 다시금 자각하게 했다.

“아파요, 선배.”

그가 손을 멈추었다.

“잘됐네.”

음산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리는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은 그렇게라도 네게 뭔가를 남기고 싶으니까.”

그의 가늘고 검은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그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그의 눈썹 사이가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낮게 욕설을 짓씹은 그가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맹렬한 기세로 내 목덜미를 깨물던 그가 귀두를 구멍 안으로 들이밀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그가 목덜미의 잇자국 위를 질척이도록 핥았다. 내 허리를 꽉 누르며 억지로 삽입한 그가 후우 하고 짧은 숨을 내뱉었다.

“흐으으, 흐으.”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자 입술이 억지로 맞물렸다. 나는 그가 숨을 나누어 줄 때만 간신히 공기를 넘길 수 있었다. 몸의 모든 부분이 그에게 종속된 것 같았다.

“너한테 박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한아.”

“아흣.”

“너는 어깨뼈가 직각인데 허리는 또 얇아. 말라서 그런가.”

“으응…….”

“그리고 안은 꽉 조이고.”

음담패설에 나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자 어깨 위로 다시 그의 치아가 박혀들었다. 엉덩이 위로 닿는 그의 바지 버클이 차갑고 따끔거렸다. 그가 쳐올릴 때마다 몸이 위로 끌려갔는데 그는 매번 억지로 허리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달랑거리며 그의 움직임을 쫓아가기도 바빴다.

내 성기를 자위하며 성감을 느끼고 싶었는데 선배는 수음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딜 손을 대니.”

“아아…….”

애가 닳아 몸을 비비자 그가 웃는 것도 같았다.

“앞으로도 못 만지게 해야겠다.”

“선배애.”

“네가 애원하는 거 보니까 꼴리는 것 같은데…… 느껴지니?”

그의 어깨 위로 이마를 비볐다. 그의 움직임이 더 거칠어졌다. ‘앞으로도.’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건 나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뜻일까. 그럼 그대로 괜찮은 걸까. 이러고 나면 다 지나가게 되는 걸까.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나를 증명하고 싶었기에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가 나를 들어서 자세를 바꾸면 그대로 따라 했다. 욕실에서 내 옷을 벗길 때도, 침대 위에서 부은 구멍에 다시 삽입할 때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호텔 시트의 냄새가 낯설었고 선배의 잔혹함이 어색했지만 가만히 그를 받아 주었다.

“……여기 흡연 가능한 객실이면 담배 좀 가져다줘요.”

가물거리는 눈을 깜빡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그가 내 가슴팍을 씹어대다 말고 일어서서 내 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왔다. 손을 뻗을 힘도 없어 보고만 있자 그가 어설픈 손짓으로 라이터 휠을 돌렸다. 

              아, 선배 담배 피울 줄 모르지……. 하지만 너무 멍하고 피로해서 그저 그 서투른 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고전하다 겨우 담배 끝에 불을 붙인 그가 입술에 그것을 물려 주었다. 내가 담배를 한 모금 빨자마자 그가 다시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나는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

“제가 얌전히 있으니까 좋아요?”

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를 마음대로 해서 기분이 풀렸어요?”

쉬어 빠진 목소리가 덤덤하게 들렸다. 나는 멍하니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바라보았다.

“아니.”

“…….”

“더 좆같은데.”

섹스할 때 빼고 그가 그런 욕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아서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놀랐다. 저렇게 완벽한 얼굴에서. 하기야 침대에서 그가 하는 음담패설을 떠올려 보면 영 단정한 이미지를 추구하지는 않는 듯도 했다.

“한이 너는 내가 아니었어도 거부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더 좆같다고.”

나는 어떻게 해야 그의 기분이 나아질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그가 내 허벅지를 그러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벌어진 구멍이 화끈거렸다.

“너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리감을 아는 것 같아.”

허리를 숙인 그가 내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치우며 키스했다. 담배 연기가 그에게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비흡연자인 그는 목 안에서 가볍게 기침했다. 매캐한 맛의 키스였다.

“손에 닿기는 하는데, 가질 수는 없게 행동하잖아.”

“…….”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데 막상 거리를 좁히질 않아. 아쉬울 게 없다는 것처럼.”

“…….”

“여자애들이 너한테 왜 그렇게 매달리는지 알겠어.”

그가 기어이 다시 내 구멍으로 좆을 처박았다. 나는 고개를 젖히며 신음했다.

“흣.”

“널 만나고 정말로 천희윤 말처럼 이상한 예술병 비슷한 거에 걸리는 것 같아, 씨발.”

음울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눈이 감겨 왔다.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한 음성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그래도 이렇게 대하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가…… 어떻게인데요.”

니코틴의 힘으로 겨우겨우 묻자 그가 망설이다 답했다.

“……부모가 준 차, 부모가 준 카드, 부모가 준 이런 썩은 정신머리를 네게 보이고 싶던 건 아니었는데.”

“…….”

“나는, 널 조금 더, 소중하게…….”

한계였다. 자괴감 어린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서서히 내려놓았다.

마지막 순간 그가 죄책감 어린 손짓으로 나를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

선배의 아버지가 죽는 꿈을 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장례식에 가는 꿈을.

정장을 입은 선배와 선배의 형, 향냄새, 우는 소리.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중 아무도 울지 않았다. 선배의 형은 나를 모르는 체했고 나 또한 무표정하게 선배의 곁을 지켰다. 선배만이 가장 헝클어진 얼굴로 야위어 있었다. 그는 서서히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괜찮아.’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버리는 연약한 목소리로 그가 다짐하듯이 말했다.

‘나는 괜찮아, 한아.’

‘…….’

‘내겐 네가 있잖아.’

‘…….’

‘나를 쓰고 싶게 하는 네가…….’

그 말을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폭신한 이불을 힘겹게 걷어냈다. 뻣뻣한 고개를 돌리자 어깨를 조금 구부리고 내 옆에서 잠든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은 이불을 제대로 덮지도 않았으면서 내게는 가운까지 입혀 놓았다.

욕실에 가서 확인한 내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목덜미부터 가슴팍까지 잇자국이 시뻘겋게 남아 있었다. 육식 동물에게 뜯길 뻔하다 겨우 도망을 친 먹잇감 같았다. 여름이 다가오는 이 계절에 도대체 뭘 입고 다녀야 할지 모르겠어서 골이 아팠다. 

              절대로 키스 마크 같은 걸 남기지 않았던 선배의 기존 섹스 스타일과 어제의 관계가 너무 달라서 당혹스러웠고,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몰아갔는지 알 수 없어 곤란함을 느꼈다.

난폭한 정사로부터 그가 얻고자 하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옷을 대충 주워 입고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 선배를 깨우지 않은 것은 그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거니와 방금 꾼 꿈 때문에 머리가 펑 터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야, 깜짝이야. 저 사람 뭐야?”

복도에서 부부 단위의 고객들이 내 목덜미를 보고 기함하듯이 소곤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며칠간 칩거 생활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멍의 색깔이라도 조금 빠질 때까지.

택시를 잡아타고 선배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 벗어 두었던 옷가지들을 좀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내겐 네가 있잖아.’

꿈에서 선배가 했던 말이 내 속을 계속해서 울렁거리게 했다. 누군가 이 감정을 명확히 명명해 주었으면. 내게 알려 주었으면. 이 불쾌감이 무엇인지, 어떻게 파훼할 수 있는지.

‘나를 쓰고 싶게 하는 네가…….’

선배와 사귀게 되기 전 그가 내게 했던 말이 그때는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으로 들렸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선배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남아 있던 담배를 모조리 피웠다. 더러운 것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전 여자 친구에게 커피 세례를 맞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역겨운 기분.

이상하게 선배의 집에 들어서자 그 부정적인 감정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래서 그 원인이 어젯밤 선배가 나를 강간과 비슷한 형태로 안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난폭하긴 했으나 그건 강간이 아니었다. 

              나를 더 소중히 대했어야 했다고 했으나 소중히 대하지 않았던 어제마저도 나는 그의 모든 행동에서 애틋함을 느꼈으니까. 나를 막 대하는 게 결국 키스 마크를 잔뜩 남기는 수준인 것. 그것이 선배의 한계였다. 아무리 화가 나도 결국 남을 망가트리는 일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마침내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

그의 앞에 있으면 나의 이기심이 더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나의 이기심에 불을 붙이지만 도리어 그 불을 끌어안아서 잠재워 주곤 한다.

옷장을 열어 보자 선배의 옷과 나의 옷이 단정하게 접힌 채로 뒤섞여 있었다. 옷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각이 잡혀 있는 것이 선배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선배의 손길이 묻은 나의 셔츠들이라니. 생각하고 보니 꽤 감상적이다. 선배와 사귀고 난 후로 가끔 그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들어 버렸다.

그와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던 그다음 날처럼 나는 손가락으로 벽면을 쓸며 그의 원룸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모든 게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다시 책상 위의 두 번째 서랍을 열기 전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폴라로이드 한 장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꺼냈다. 사진 속에는 내가 있었다. 한 번도 그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언제 찍었을까. 얼마 전 그와 데이트를 하러 강원도에 갔을 때 하늘을 보고 있는, 입을 벌려서 꽤 멍청해 보이는 내 얼굴. 

              그게 너무 낯설어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폴라로이드를 쓰다듬는 손끝이 파들거리며 떨려왔다. 사진의 밑 부분에 수려한 글씨체로 한 달 전쯤의 날짜와 함께 적힌 선배의 메시지.

‘마지막 필름으로 찍은 내 마지막 조각.’

무던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었는데 선배의 필체가 나를 미치도록 가슴 뛰게 했다. 마지막, 필름, 내, 마지막, 조각.

내, 마지막, 조각…….

마구잡이로 서랍에 들어 있던 폴라로이드를 모조리 꺼냈다. 하지만 모두 이전에 내가 본 것들 뿐, 새로운 건 그것 한 장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책상 구석에 놓여 있던 선배의 노트북을 끌어왔다. 비밀번호조차 걸려 있지 않은 노트북 바탕 화면엔 정말 별게 없었다. 

              인터넷, 한글, 엑셀, 통장 사본 파일, 그리고 목적성이 뚜렷한 이름의 파일들, 예컨대 ‘과제’, ‘아르바이트’, ‘작업물’.

나는 직감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그가 나에 관한 것을 남겨 두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작업물’ 폴더를 열자 스크롤이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많은 파일들이 저장돼 있었다. 

              뜻도 모르는 어려운 단어들로 이루어진 제목들을 쭉 훑어보다가 가장 아래로 스크롤을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한이’라는 파일이었다. 그가 가진 파일 이름들 중 가장 짧았다.

내 이름. 어떻게 보아도 내 이름밖에 될 수 없는 그런 정직하고 순수한 제목의 파일은 세 페이지의 짧다면 짧은 글이었다. 그가 나에 대해서 글을 썼다. 어쩌면 자주, 어쩌면 많이.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때때로 인간에게는 자신이 전복된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나는 살면서 무수한 타의와 악의로 몇 바퀴를 전회했고, 최후의 전복을 앞두고 있던 때에 한이를 만났다.

그 이후로는 막 잡힌 생선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히며 펄떡대고 있다.’

나와 월등한 격차가 있는 그의 어휘력을 내가 전부 이해하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야 가능한 일일 테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글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아니, 왜인지 알게 되어서 울었다. 나를 괴롭히던 감정의 정체를 마침내 눈물로 토해내게 된 것이다.

……사실은 선배가 내게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보다 더 나쁜 생각도 했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내용이라면 굳이 듣고 싶지 않았다.

선배가 내게 헤어지자고 할까 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헤어져야 할까 봐 사실 선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했다. 선배가 내게 자신의 비밀을 완벽하게 숨기지 못하고 들킨 것에 원망을 느꼈었다.

나는 그냥 그의 주위를 영영 공전만 하고 싶었다. 책임도 의무도 없이, 슬픔도 없이.

죄책감.

그 검은빛의 무겁고 전혀 이기적이지 못한 천하의 등신 같은 감정을 선배가 내게 일깨웠다.

왜 몰랐을까. 그의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나는 그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선택을 유보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왜 그것을 경시했을까. 왜 나의 이기심을 그렇게 철저하게 믿었을까.

선배는 그 글에서 시종일관 나를 ‘한이’라고 지칭했다. 세상에서 그를 흔들어대는 것이 정말로 나뿐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것보다 다정하고 잔인한 호칭은 없었다.

“……한아.”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우는 순간엔 늘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계속 울게 되는 것은 내가 실은 눈물이 많은 인간이었기 때문인 걸까?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헝클어진 머리로 한숨을 내쉰 그가 성큼 다가와서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놀랐잖아.”

선배가 내 손을 꽉 붙들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노트북 화면으로 잠시 꽂혔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는 늘 그러했듯 내가 자신의 무언가를 함부로 열어 본 것에 대하여 화내지 않았다.

“어제 일,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는데…….”

“선배.”

“…….”

머리로는 열이 쏠리는데 가슴이 자꾸 차가워지는 것처럼 시큰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응.”

“…….”

“얘기해, 한아.”

선배는 무슨 말이든 다 들어 줄 것처럼 진중하고 자상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듯 그의 분홍색 혀가 입술을 핥고 지나갔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고 감정만이 가득 찬 ‘나답지 못한’ 상태가 되어…….

“헤어져요.”

순식간에 그의 세상을 잿빛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말을 하고.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아요.”

힘이 풀어진 그의 손을 약하게 뿌리쳤다. 툭 하고 떨어지는 팔이 볼품없었고, 그래서 또 애틋했다.

선배는 한참을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도와 관계없이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왜.”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가까스로 그렇게 물었다.

“왜……?”

“…….”

“왜.”

그는 재차 되물었다.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나 때문에 선배가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잖아요.”

“…….”

“선배 아버지 편찮으시다면서요. 근데 선배는 나 보면 계속 글 쓰고 싶은 거죠.”

“…….”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라는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내게 하는 거짓말은 부정(不正)한 일인 거겠지.

“선배가 저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것도 싫고, 저 때문에 가족을 포기하는 것도 다 싫으니까요.”

“…….”

“그렇게 중요한 결정에서 저를 빼고 생각했으면 좋겠으니까요……!”

지독하게 이기적인 말이 진심을 가장해서 튀어나왔다. 나는 두려웠다. 그가 어느 쪽으로 결정을 해도 내가 그를 쥐고 흔들었다는 것이 언젠가 내 약점이 될까 봐. 그게 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거칠게 몰아갈까 봐. 단순히 키스 마크를 남기는 것 이상으로 그가 내게 타격을 입힐까 봐.

“저를 배제하고 생각해 봐요. 선배가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쓰고, 로스쿨을 가고 싶으면 로스쿨을 가요.”

그러고 나면, 그 혼돈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다시 선배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그냥 괜찮은, 좋은 애인으로 다시 시작하면 될 것이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울 일이 아니다. 선배도 내가 싫어진 게 아니고, 나도 그렇지 않으니까.

천천히 그의 노트북을 닫고 일어섰다. 아까 챙겨 둔 옷들을 집어 들고 나가려는데 허리에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안 쓸게.”

그가 무릎을 꿇은 채로 나를 끌어안고 다급하게 그렇게 말했다.

“글 같은 거 안 쓸게.”

“…….”

“너무 쓰고 싶어도 그냥, 혼자만 쓸게.”

“…….”

“혼자 쓰고 혼자 간직하고 혼자만 볼게. 혼자 마음으로 삭일게. 그러니까.”

“…….”

“그러니까 가지 마.”

“…….”

“나를 버리지 마, 한아.”

선배가 글에 쓴 것처럼, 인간에게는 누구나 전복의 순간이 오는 거라면 나는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우리 둘에게 운명처럼 찾아왔다고 느꼈다. 절대로 죄책감 같은 감정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나는 믿을 수 없게도 죄책감으로 이별을 고했고, 나를 붙잡지 않을 것이라던 선배는 처절하게 내게 매달리고 있었다.

“비겁해요, 선배.”

고작 나를 붙잡으려고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너무 비겁하잖아.”

“알아.”

“…….”

“그래도 버리지 말아……, 응?”

힘이 들어간 그의 팔근육이 모조리 갈라져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손을 대어 그의 팔을 풀어내자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상실감이 만연한 얼굴을 외면하기가 힘들었으나 나는 내가 본질적으로 선배보단 선배의 형에 가까운 인간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고작 눈물이 많아진 것 따위의 특성으로는 바뀌지 않는 절대적 진실이었다.

“선배가…… 선배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

“내가 없어야 선배가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어떻게 계속 모르는 척을 해요. 내가 그 정도로 뻔뻔하진 못한 것 같아.”

“한아.”

그는 차마 내게 손을 대지도 못하고 나를 더 붙잡지도 못했다. 꼿꼿하게 무릎을 세운 채로 앉아서 그렇게, 가는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다리가 묶인 사람처럼, 꼭 깊이 뿌리 내린 식물처럼.

선배와 나는 그렇게 헤어졌다. 나의 이기심과 그의 비겁함이 만난 화학 작용으로. 잠시 부글거리다 잦아드는 하얀 거품처럼 부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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