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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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진 알 길이 없었지만 민재 형은 이미 내 유학 소식을 알고 있었다.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송별회를 해 주겠다며 유난스럽게 굴어 마지못해 참석하게 되었는데, 마침 장소가 ‘브릿지’여서 술을 마시기도 전에 입 안이 씁쓸해졌다.

“한이 네가 여기 좋아했잖아.”

민재 형의 불필요한 배려에 나는 성의 없이 웃었다.

짙은 남색의 앞치마를 한 초면의 알바생이 주문을 받았다. 나는 오직 선배만이 제외된 이 익숙한 공간에서 서글픔을 느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바빴어요.”

“준비할 거 많지?”

“뭐, 그렇죠.”

농구부 형들에게 한 잔씩 술을 따라주고 내 잔도 채웠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술이라 한 잔만으로도 머리까지 알싸한 느낌이 퍼졌다.

“요새 조용하더라, 너.”

곧 졸업을 앞둔 형이 내게 말했다. 내가 네? 하고 되묻자 그가 피식 웃었다.

“원래 알아주는 유명인사셨잖아.”

“…….”

“실컷 놀다가 홀라당 떠나 버리네. 네가 위너다, 야.”

결국 돌고 돌아 또 연애 얘기였다. 딱딱하게 뭉친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다 무던히 대답했다.

“금방 돌아올 건데요, 뭘.”

“왜, 숨겨 둔 애인이라도 놓고 가?”

능글맞은 물음에 대거리할 의욕을 잃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놀림이 따라붙었다.

“가서 새 여자 만나다 보면 또 다 까먹을걸?”

“형…….”

“왜 순진한 척하고 그래. 안 어울리게.”

키득거리는 그들을 보자니 이 자리의 주인공이 내가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말없이 머리를 헝클이자 형들은 금세 저들끼리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아서 떠들었다.

“왜 이렇게 안 먹어, 한아. 너 때문에 여기 온 건데.”

“맛없어요, 여기.”

“언젠 여기 안주 좋다며. 뭐, 엄마 손맛이라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형, 저 좋아하세요? 별걸 다 기억해요.”

“그런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라.”

나를 좋아할 일이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늘 조금 낯설고 막막한 구석이 있었다. 그랬기에 민재 형처럼 특출 난 사교성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순탄히 어울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농구부 형들은 민재 형처럼 다듬어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징그러운 소리이긴 하네요.”

“…….”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거든요.”

그랬기에 내 경건한 고백에도 그들은 그저 나를 비웃었다.

“이번엔 몇 주짜리인데?”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진심인데요.”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어.”

입 안에서 부서지는 땅콩의 잔해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민재 형.”

“왜.”

“진심이…….”

“…….”

“그러니까 그게 어떤 방식으로 증명된다고 생각해요?”

우웩. 옆에 있던 누군가가 토하는 흉내를 냈다. 민재 형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갑자기 왜. 누가 증명해 달래?”

“그것도 그렇고…….”

“…….”

“연애라는 게 단순히 마음만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 것 같아서요.”

“…….”

“단 한 번도 마음만을 매개로 연애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을 뱉어 놓고 나서야 한 박자 늦게 그 말의 진실한 의미들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대충 마무리 지었다.

“아무래도 그게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것인데 증명하고 말고 할 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차분한 나의 주절거림을 들어 주던 민재 형이 눈까지 휘어 가며 웃었다.

“왜 무형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

“이 세상에서 연인 간에 진심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 얼마나 많은데.”

“……저는 나름대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해 달란 대로도 해 주고, 때론 모른 척도 해주고.”

“네 표현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라면, 어쩌면 네가 진심의 본질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는 거겠지.”

“…….”

“그걸 지나치게 감성의 영역이라고 판단하거나, 혹은 인생의 매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 순간 진심이 엮여 있다는 걸 외면하면서 살아왔거나.”

아, 이 형도 문과였지. 그가 하는 말들은 점이나 선보다는 면처럼 쏟아지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술잔을 들었다.

“……됐어요.”

“조언을 해 줘도 지랄이네, 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냥.”

문득 혜주 누나가 조금 보고 싶어졌다.

혜주 누나도 간혹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긴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나와 같은 언어를 구사했다. 과학의 언어.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건조하고도 단정한 정서.

아마 누나에게 그런 것을 물었다면 누나는 과학의 언어로, 그러니까 내 맞춤식으로 적절히 내게 설명해 주었겠지. 그래서 누나에게는 진심 같은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던 걸까. 혹은 나와 그 사이엔 그런 간지럽고 뜨거운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인지.

나는 선배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 내가 엄청난 주당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럼 그와 더 오래 술을 마실 수 있을 테니까. 그때부터 나의 진심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술집 알바생인 그를 사랑하게 된 순간 부가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 무형의 무언가가 퇴적된 후, 단단하게 굳어져서 나의 유일하고도 원대한 진심 그 엇비슷한 것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와 사귀게 되고, 심지어는 헤어지고 난 지금에는 내가 알코올에 면역이 없는 일에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덕에 이렇게 선배를 찾아올 수 있었으니까.

“선배, 문 열어요.”

“…….”

“선배!”

이쯤 되면 나뿐 아니라 선배도 이 건물에서 쫓겨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집 문을 쿵쿵 두드리다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술기운에 몸이 잘 가눠지지 않았다.

눈앞이 깜깜해졌다가 다시 온통 환해졌다. 화난 얼굴의 선배가 몸집을 부풀리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주춤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나름대로 빠르게 몸을 움직였으나 그의 눈에 비틀거리는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생각보다…….”

“…….”

“진상 짓을 많이 하네.”

차가운 그 목소리에 가장 먼저 치고 올라오는 감정은 우습게도, 성욕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마르고 버석한 입술이 닿자 급하게 갈증이 났다. 술을 많이 마셔서일 것이다. 원래 음주 후에는 늘 갈증이 따라오니까.

급하게 그의 입술을 적시고 핥았다. 잠시간 미동 없이 서 있던 그가 나를 억지로 떼어냈다.

“왜 이렇게 멋대로 구니.”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전지적 시점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가 너무나도 비겁하여 마음을 숨기는 수단으로 그런 태도를 취한단 걸 안다.

“사랑해요, 선배.”

그가 전화로도 내게 하지 못했던 말을 나는 숨 쉬듯이 할 수 있었다.

“사랑해요.”

“…….”

“사랑한 건 선배뿐이에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사탕 발린 말처럼 달콤하게 중얼거렸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의 표정이 조금 사나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삐뚤어진 입가가 꿈틀거렸다.

“그래서.”

“…….”

“또 나 꼬셔서 한번 먹고 버리려고?”

꿈결처럼 차가운 물음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품에서는 한결같이 깨끗한 비누 향이 났지만 그는 전과 달리 냉소적인 태도로 나를 대했다.

“한아, 너 왜 이렇게 저질이야.”

그가 조소하듯이 짧게 웃었다. 기가 막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내가 무슨 저질이에요…….”

울컥 억울한 마음이 들어 항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셀 수도 없이 경험이 많은 선배가 더 저질이지. 무슨 콘돔 회사 다니는 사람처럼, 섹스 못 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살았던 선배가 왜 나한테 저질이라고 해요?”

“…….”

“나는 선배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

“밤마다 선배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알아요?”

나를 떼어 놓으려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문득 올려다본 그는 아주 복잡 미묘한 얼굴이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자 따뜻한 입김이 뺨 위로 쏟아졌다.

“한아, 너는.”

“…….”

“이상한 데서 너무 능숙하고…….”

“…….”

“정작 중요한 건 아무것도 몰라, 애기처럼.”

나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이 조금 떨렸다. 내 타액으로 적셔 놓았던 그의 입술이 다시 말라 가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불안해져서 인상을 썼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미안하고 아까워서 너를 더 건드릴 수가 없잖아.”

“…….”

“네가 내 아버지 일을 모른 척할 수가 없듯이, 나도 네 하룻밤 유혹에 넘어가 줄 수가 없다고.”

그가 시원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 넘겼다. 두피에 닿는 감각이 이질적이어서 몸을 움츠리자 그가 나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유학 준비는 잘되어 가니?”

그의 숨소리에서 머뭇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성급하게 변명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이용해서 유학이라는 기회를 잡은 게 아니라 곁에 있으면 또 애매하게 맴돌게 될까 봐 그런 거였다고…….

하지만 내가 혀를 씹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선배는 이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한아.”

“…….”

“애기야.”

“…….”

“잘 선택했어.”

심장을 떨어지게 하는 목소리에 그에게 질질 매달리고 싶었으나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단호함에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의 무연한 시선이 천천히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너는 가면 더 잘 지낼 거야. 여긴 너를 오해하고 폄하하는 사람이 너무 많고, 네 곁의 나는 늘 비겁했으니까.”

“…….”

“가서 남들이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똑바로 정신 차리고 행동하고, 사람 쉽게 대하지 말고, 이런 짓도 이제 하지 말고.”

“…….”

“알았니?”

나는 목구멍이 꽉 막혀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 문이 닫히면 끝일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선배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쓸쓸히 웃었다.

“모르겠어도 어쩔 수 없어.”

“…….”

“지금으로서는.”

“…….”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책임을 질 뿐.”

나는 처음으로 그의 비겁함이 성숙함의 반작용이라고 느꼈다. 성숙하기 때문에 비겁할 수밖에 없다고……. 선배는 나를 끌어안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먼저 내게서 문을 닫아걸었다. 문밖에서 내가 우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나와 보지 않았다. 그는 늘 내 앞에서 비겁했다.

나보다 훨씬 성숙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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