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1
지은이 : 피가
펴낸곳 : 교보문고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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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1
피가
목차
프롤로그
#1. 옆집 남자 이야기
#2. 옆집 남자의 수집
#3. 단순한 옆집 남자가 아닌
프롤로그
비가 오는 날은 딱 질색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어정쩡하게 비가 오는 날씨는 더욱 더.
퇴근길이라 그런지 거리는 우산을 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우산을 잘 들지 않으면 타인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튀길 정도로.
조슈아 베넷은 조금 전 어깨를 부딪치고 간 남자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정비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블록에 고여 있던 빗물이 바지 밑단에 다 튀어 버렸기 때문이다.
조슈아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새빨간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 다시 옆으로 넘겼다.
그래도 오늘은 비 오는 날 중 가장 좋은 날이다. 이직한 회사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비록 제 보스는 출근하지 않았지만, 다른 직원들이 말하길 자신들의 보스만큼 좋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이직한 회사의 복지 덕분에 새로 이사 온 스튜디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튜디오 생각을 하니 어깨에 묻은 물기도, 밑단을 적신 빗물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되었다.
새로 이사한 스튜디오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험난한 뉴욕에 필수적인, 하지만 여태까지 조슈아에게는 사치였던 공용 현관 보안카드도 있는 건물이었다. 심지어 공용 현관에는 경비원도 있었다! 세상에!
조슈아는 우산을 쓴 채 입을 벌리고 불투명한 유리현관을 보다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깔끔한 흰색 외벽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때 탄 흔적조차 없었다. 창문마다 동그랗게 달린 어닝은 아기자기한 느낌까지 주었다.
“저기요. 지나갈게요.”
“아, 네.”
뒤에 서 있던 여자의 요청을 듣고 나서야 조슈아는 정신을 차리고 서 있던 자리에서 비켜섰다. 장우산을 접은 갈색머리 여자가 잠시 조슈아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카드를 댔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갔다.
잠시 비치던 깔끔한 로비와 프런트를 보며 조슈아 역시 카드 지갑에서 보안 카드를 꺼내 문 앞에 찍었다. 딕- 전자음과 함께 미닫이형 유리문 현관이 열렸다.
화사한 베이지색 조명이 흩뿌려지는 가운데 깔끔한 로비에 서 있던 50대 경비원이 조슈아를 향해 목례했다.
“엘리베이터가 왔네요.”
“아, 감사합니다.”
이거거든! 조슈아는 8층이라고 쓰인 동그란 버튼을 누르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까지 그의 스튜디오에는 없던 또 하나, 바로 이 엘리베이터. 이제 술에 찌들어서 벽을 더듬어 가며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계단이 힘들 때는 술 마셨던 때만이 아니었다. 발목을 다쳤을 때도 힘들었고, 술 취한 친구를 데려올 때도 힘들었지. 그리고 그 에이드리언을 피해 도망치듯 나왔을 때도.
조슈아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머리카락과 햇빛 한 점 못 받은 것처럼 창백한 얼굴. 색소가 옅은 갈색 눈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조슈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눈이 반달이 될 정도로 웃었다.
힘들었던 시간은 그 집에 다 놔두고 오기로 했잖아. 이제 새 집에서 행복할 일만 남았다. 좆같았지만 정 들었던, 보스 빌 스웰딘이 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직한 것도 다 새로운 행복을 위해서지 않은가.
옹골차게 말아 쥔 주먹으로 파이팅을 외치듯 가볍게 흔들었다. 거울 속 제가 꽤나 괜찮아 보였다. 하긴, 원래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지.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 스튜디오는 24시간 복도 불이 켜져 있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나온 조슈아가 스튜디오 복도를 걸었다. ‘ㅁ’자 형태로 된 스튜디오 복도에서 1호, 2호 문 앞을 지나 모퉁이만 돌면 곧장 803호 제 집이 나온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걸음걸이마다 좋은 향이 났다.
비싼 스튜디오는 복도에 방향제도 있나? 코를 킁킁거리던 조슈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 축축한 공기를 순식간에 청량하게 만드는 시원한 향은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향이다. 그리고 그 향수를 쓸 사람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조슈아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기라도 하듯, 모퉁이 너머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제 온 거예요?”
“…에이드리언 그렌트.”
“아, 그거 싫다니까요. 이름만 불러 주기로 했잖아요. 다정하게.”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빙그레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로 달콤하게 조르면, 딱 부러지던 조슈아라도 매번 흐물흐물해져서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슈아는 그 이름을 부른 제 입을 벌하듯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그리고 현관문의 앞에 섰다. 175㎝인 조슈아보다 한 뼘 큰 에이드리언이 간격을 좁혀 오는 게 느껴졌다. 그토록 좋아했던 향이 코끝을 적셔 왔지만 감정이 정리된 탓인지 심장이 일렁이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현관의 번호 키를 누르는 대신 지갑을 꺼냈다. 달랑거리는 테슬에 달린 보조 열쇠를 잡았다. 삑- 잘못 찍혔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 바꿔 놓았어요, 조슈아. 내 생일선물로 당신 집 비밀번호, 내 생일로 바꾼다고 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급 셔츠에 쌓인 탄탄한 가슴팍을 지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보는 순간 빠져들었던 녹갈색 눈이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웃음을 잔뜩 머금은 눈이 우아하게 휘어졌다.
조슈아는 딱 삼 개월 전, 저 눈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언제까지나 다정할 줄로만 알았던 눈이 차갑게 굳어서 경멸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심장이 뻐근해서 터져 버릴 것 같았던 그 순간을.
“퇴근이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이 뺨 좀 봐. 다 텄어.”
적당히 굳은살이 박인, 잘 관리된 이 손의 악력이 무시무시했던 것 역시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날이 떠오르자 조슈아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목을 매만졌다.
삼 개월 전 그날, 이 남자와는 모든 게 끝났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설마 또 상사 잘못 만난 건 아니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한테….
“저녁 먹으러 갈까요?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왜 그렇게 웃는 걸까?
이렇게 늦었는데.
조슈아는 손을 내려 허리 뒤로 숨겼다. 제 손이 떨린다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굳은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남자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냥 저녁 먹자고 하는 건데.”
에이드리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단호했다.
“그쪽과 저녁 먹을 일 없어. 그러니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 오늘 당신 첫 출근이었죠? 피곤하겠다. 그러면 내일 같이 밥 먹을까요?”
“말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말을 잘라 내던 조슈아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오늘 첫 출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러고 보니 가장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안 거야.”
“뭘 어떻게 알아요.”
“내가 있는 곳, 어떻게 알았냐고.”
“당신보다 아마 내가 먼저 알았을 거예요.”
“뭐?”
대답한 제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떨렸다. 그제야 에이드리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저를 매번 설레게 만들었던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슈아 베넷. 이렇게 순진해서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타이밍 정말 잘 맞지 않았어요? 직장을 딱 그만두려고 마음먹고, 이력서를 보내자마자 인터뷰가 잡히고, 복지가 잘 된 탓에 새로 스튜디오 구할 걱정 안 해도 되고.”
조슈아는 골이 아팠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쓰레기는 저 예쁜 얼굴로 맹하게 웃으면서 ‘넌 내 손바닥 안이었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