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옆집 남자 이야기
빌 스웰딘은 개새끼다. 조슈아는 머릿속으로 똑같은 문장을 반복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머릿속을 뚫고 손가락으로 옮겨 가서 바탕화면 속 스케줄 조정표에 써지고 있었다. 개새끼, 개새끼. 조슈아는 백스페이스를 눌렀다.
조슈아는 컴퓨터 화면에 달란 후방 거울을 통해 편집장실을 힐끗 바라보았다. 투명한 통유리창 너머 편집장실에서 빌이 모델 제인 파커와 배우 샬롯 테일러 사이에서 무표정하게 있다가 인상을 두어 번 찌푸리는 게 보인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를 계속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만 모르는 척했다.
탁탁, 파티션을 두드리는 소리에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에밀리였다. 금발을 완벽하게 틀어 올린 아름다운 에밀리는 ‘에투왈’의 전설이었다. 10년째 망나니 편집장 빌 스웰딘을 문제없이 보좌하고 있는 비서계의 전설!
그런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편집장실을 집게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슈아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을 보는 대신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네일을 칭찬했다.
“와, 에밀리. 이번 네일 정말 괜찮은데요?”
“비싼 거거든. 그나저나 보스가 계속 SOS를 보내는데?”
“아직 제게 닿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어, 지금은 좀 급해 보이는데?”
에밀리의 나른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편집장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스스럼없이 편집장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난장판이었다. 제인 파커의 손목을 잡은 빌이 이제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동시에 샬롯 테일러가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3년간 숙련된 솜씨로 조슈아는 샬롯 테일러의 손목을 잡았다.
“아! 이거 안 놔?”
“제인 파커 씨. 샬롯 테일러 씨. 더 이상 하시면 근무 방해 및 폭행 미수로 신고할 겁니다. 아래층에 에투왈 소속 변호사들과 빌 스웰딘 씨의 개인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제야 제인 파커와 샬롯 테일러가 조슈아를 바라본다. 조슈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빌을 힐끗 바라보았다.
빌이 얼른 제인 파커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잘 관리된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채 고급 와이셔츠의 윗 단추를 하나 풀었다. 슬랙스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쫙 편 자세는 톱 모델 저리가라였지만 아쉽게도 이곳에서 빌을 찬양할 사람은 없었다. 아, 저주할 사람은 세 명 있는데.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데. 조슈아가 아쉽다는 듯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럴 거면 집에 있던지. 어차피 할 일도 없으면서.
잘나가는 모델이자 잡지사 에투왈의 메인 편집장 빌 스웰딘. 사실 그가 출근해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미국에서 10대 재벌가에 안에 드는 스웰딘가, 그 직계 중 한 명이 바로 빌 스웰딘이었으니까.
말하자면 놀고먹고 싸기만 해도 천문학적 돈에 휩싸여 사는 사람이지. 물론 그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가족들은 그가 그냥 놀고먹게 하지 않았다. 있어 보이게 놀고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 있어 보이는 자리가 제법 부수 잘 팔리는 잡지사 에투왈의 메인 편집장이었다. 물론 바로 본부장 자리를 줘도 되지만, 편집장이 더 마음에 든다는 말에 빌 스웰딘은 낙하산 쫙 펴고 내려왔다. 퍼스트 비서와 세컨드 비서, 수행 비서와 개인 변호사, 심지어 개인 코디네이터까지.
메인 편집장, 속칭 재벌 n세의 세컨드 비서인 조슈아 베넷의 오늘 공식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 피처팀 기사 수정안 받아 에밀리에게 전달.
- 보스 스케줄 조정표 전 사무실에 전송.
- 11시 20분 미스터 케니와 점심.
- 2시 프리스어스 갤러리 관장 약속.
- 4시 패션팀 룩북 받아 에밀리에게 전달.
하지만 비공식 일정까지 포함하면 상황이 달랐다. 빌의 여자 친구들에게 메시지 돌리기, 생일 맞은 여자 친구의 생일 선물 구하기―얼마나 구하기 힘든 것인지, 이미 품절된 것인지는 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까딱하며 한도 없는 블랙 카드를 내밀 뿐이었다―, 기념일마다 여자 친구의 취향에 맞는 이벤트 준비하기,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저녁 약속 잡기, 까먹지 않고 계절별로 달라지는 빌의 취향에 맞게 콘돔 사다 놓기 그리고 등등.
그나마 다행인 것인 재작년부터 비서실에 상주하는 빌을 위한 바리스타가 있어서 더 이상 식사 전마다 38 애비뉴의 스타벅스로 차를 몰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
아니면 빌의 집에 상주하고 있는 가정부 엠마와 집사―세상에, 조슈아는 이 미국에서 집에 집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니콜라스가 있어서 직접 깨우러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
물론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먼 셰퍼드 하리의 으르렁거림을 감수해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조슈아의 직장 복지는 나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슈아의 아침은 대개 이렇게 시작되었다. 양다리, 혹은 n다리를 걸친 빌의 일을 해결해 주는 것. 젠장할.
* * *
“오늘도 한 건 했다며. 조슈아.”
탁, 짐 캐스터가 조슈아의 책상에 망고 프루트를 올려놓으며 웃었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잔을 들어 올리며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음산한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가끔은 방음 처리 끝내주게 된 저 방에서 블라인드를 내려 주고 문을 잠근 채 나오고 싶긴 하지만요.”
“그러면 당장 해고겠지, 조슈아 베넷?”
낮은 목소리와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 파티션에 몸을 기대고 있던 지미가 벌떡 일어났다. 팔뚝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무시하고 조슈아가 해사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빌 스웰딘. 패션 잡지사 에투왈의 메인 편집장이자 조슈아의 보스인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조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조슈아가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듯이.
“보스. 벌써 식사 마치고 오신 거예요? 그렇게 짧게 식사하시면 다니엘라가 섭섭해한다니까요.”
“상관없어. 어차피 끝났거든.”
“벌써요? 아니 왜요?”
지난주 토요일에 요트 위에서의 불꽃놀이 이벤트도 열어 준 데다 선물로 한정판으로 딱 20개만 나온 뉴 버킨 백도 간신히 구해다 줬는데 왜 벌써 헤어진 거야?
“키스하고 이름을 잘못 불렀거든.”
뺨 맞을 뻔했어. 빌이 덤덤하게 덧붙였다. 조슈아는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으로 다니엘라 파발리티와 빌이 사귄 날짜를 꼽아 보았다. 34일. 딱 한 달하고 3일이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불꽃놀이 이벤트를 위해 뉴욕시의 허가를 받고, 이미 판매가 끝난 한정판 뉴 버킨 백을 얻기 위해 4일 동안 밤잠도 못 자고 연락을 해댔던 게 아스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조슈아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욕들을 모두 삼켰다. 그러고는 웃는 낯으로 물었다.
“누구를 불렀는데요?”
“애보니.”
“그건 다행이네요. 오늘 저녁에는 키스하고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겠어요.”
조슈아가 진심을 담아 말하며 제가 쓰던 카드를 들어 올렸다. 수요일마다 만나는 빌의 새로운 여자 친구, 모델 애보니 선셋에게 보낼 꽃바구니와 샤넬 백에 함께 넣을 카드였다. 달필로 된 카드를 힐끗 본 빌이 부루퉁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조슈아 베넷. 점점 기어오른다?”
올게 왔다. 끝이 날카롭게 올라간 진회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조슈아 베넷을 향했다. 옆에서 지미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빌 스웰딘을 보좌한 지 벌써 3년째였다.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세상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파티션 너머에서 관망하던 에밀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푹신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기어오른다니요.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나왔네. 에밀리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색소 옅은 커다란 갈색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여기까지만 해도 제 보스는 당황할 게 분명했다. 저것 봐. 미친개처럼 들이받는 대신 어, 어, 할 말 잃고 갈피 잃은 손을 어정쩡하게 놓고 있다니.
조슈아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잘 정리된 서랍 왼쪽에는 이번에 나온 아이폰이 열 개나 칸 맞춰서 누워 있었다. 조슈아가 마구잡이로 핸드폰 네 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중에 한 개를 켜서 채팅창을 열었다.
세상 밀당이 핸드폰 안에 있었다.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늦냐는 투정에 내일 저녁에 보자는 약속 그리고 이윽고 받은 꽃과 목걸이에 고맙다는 연락까지.
빌이 끙, 할 말을 잃었다.
“보스는 지금 보스 여자 친구가 몇 분인지나 아세요?”
“다섯… 명?”
“일곱 명이에요. 오늘 다니엘라 빼고. 월화수목금토일. 이렇게 열심히 보스 여자 친구들한테 메시지를 보내고, 선물을 위해 출장까지 다녀오며 보스가 제일 좋다던, 품절된 콘돔 공장을 가동시키기 위해 제가 감히 하늘같은 보스께 기어오르겠어요.”
“아니, 나는 니가 요즘 나를 대하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말실수했다.”
빌이 찜찜하다는 얼굴로 조슈아의 빨간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그리고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얼른 따라나서는 지미에게 조슈아가 한마디 했다.
“마르케시 초콜릿은 뒷좌석 보냉 백에 넣어 놓았어요.”
지미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투명한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고, 짝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조슈아는 환호에 감사하다는 듯 쇼맨처럼 손을 두 번 돌렸다가 가슴께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숙였다.
“조슈아 베넷. 점점 능숙해지는데?”
“뭘요. 다 에밀리한테 보고 배운 거죠.”
에밀리는 수줍게 웃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제 보스는 이 빨간 머리 청년한테 약했다. 힐을 신은 저보다도 작은 키에 빨간 머리, 콧잔등에 흩뿌려진 옅은 주근깨까지. 예쁘장하니 소년 같은 얼굴은 보스를 약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던 에밀리는 안경을 추어올렸다. 안경에 걸어 놓았던 미우미우 안경 체인이 찰랑였다.
“너무 자주 하진 말고. 면역된다.”
“에이, 다 보스가 봐주시는 거 저도 알죠. 저도 제 연봉과 보너스, 스튜디오 보증금 금리 1.6%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보스를 애정하는걸요.”
“말은, 그나저나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저요?”
“그래요, 조슈아. 요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던데.”
좋은 게 있으면 공유 좀 하지? 마감이 지나서인지 에밀리는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하긴, 한창 마감 때의 에밀리였다면 아까 제인 파커와 샬롯 테일러가 시끄럽게 구는 순간 당장 보안팀을 불러 내쫓았겠지. 물론 제압하지 못한 조슈아 역시 함께.
조슈아는 오늘 제가 무모하게 군 것에 대해 인정했다. 빌 엿 한번 먹어 보라고 버팅기다가 제 인생이 함께 튕겨나갈 뻔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스튜디오 보증금을 댈 수 있는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 전까지는.
보증금을 생각하다가 스튜디오가, 연이어서 그가 떠올랐다.
“그게요, 사실.”
에밀리가 눈을 반짝이며 조슈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슈아는 세상 제일 큰 비밀을 이야기하기라도 하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옆집 남자가 잘생겼어요.”
* * *
아직도 안 고쳤네.
조슈아는 점멸할 듯 깜빡이는 공용 현관의 전등을 바라보았다. 전등 커버 가장 오목한 부분에는 날벌레와 먼지가 모여 있어 꼭 새까맣게 탄 것 같이 보였다. 한번 깜빡일 때마다 바닥에 드리우는 제 그림자는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지만 이 스튜디오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다 익숙해진 제 계단을 올라가기 바빴다.
뉴욕 42 애비뉴의 5층짜리 스튜디오. 살인적인 물가의 뉴욕에서 그나마 집세가 가장 낮은 편에 속하지 않을까 싶은 곳이었다.
물론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어린아이부터 갓 어른이 되는 청소년들까지 수백 명이 있던 보육원에서 자라 온 조슈아에게 크게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기쁨에 모든 불편함은 상쇄되고도 남았다.
계단을 바라보던 조슈아는 제 손에 들린 봉투를 부러 들어 보았다. 흰색 비닐봉지 안에는 투 고(to-go)해 온 중국 음식이 들어 있었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배가 고파 오늘따라 더 많이 사고 말았다. 내일까지는 먹어야겠다. 뭘 했다고 지친 건지, 평소보다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계단을 오르며 조슈아는 제 퇴근길을 떠올렸다.
에투왈에서 조슈아가 사는 스튜디오까지는 지하철로 열한 정거장 그리고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퇴근길은 안 그래도 지친 몸을 더 늘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짜리 계단도 힘 빼는 데 일가견이 있었지만, 아. 에밀리와의 대화 역시 기력을 소진하는 데 한몫했다.
잘생긴 남자는 게이 아니면 애인이 있다더니. 아쉽다는 듯 웃는 에밀리의 대화 상대를 하기에 조슈아 자신은 아직 경력 부족이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에밀리와의 대화에서 빠져나오기에 급급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조슈아는 자신을 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조차 없으니 게이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게이인 것일까?
아니면….
옆집 남자가 너무 잘생긴 것일까.
“또 만나네요.”
맹세코 조슈아는 저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스크린에서조차 보지 못했다. 우아하게 반짝이는 금발과 그린 듯 깊은 눈매 속 아름다운 녹갈색 눈동자, 티 없이 하얗고 말간 피부와 높고 우아한 콧날 아래 복숭앗빛 입술까지. 보는 사람마다 감탄이 튀어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남자였다.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싸구려 노란색 조명, 여기저기 알 수 없는 얼룩으로 가득한 복도, 고여 있는 것처럼 쾌쾌한 냄새. 일상적인 건물 속에서 옆집 남자는 마치 다른 그림처럼 빛났다.
옆집 남자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고양잇과 맹수처럼 나른한 동작은 유려했다.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입고 있던 검은색 슈트 재킷이 가볍게 흔들렸다. 막눈인 조슈아가 보기에도 이런 건물 벽에 기대기에 미안해질 만큼 좋은 재질의 옷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나 봐요. 냄새가 좋은데요?”
“아.”
순간 조슈아는 제 손에 들린 봉투를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3년간 빌의 비서로 일하면서 다져진 표정 관리로 그렇다는 듯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집에 안 들어가고,”
“열쇠를 잃어버렸나 봐요.”
남자가 복숭앗빛 입술을 비죽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에. 자신보다도 훨씬 큰 남자가 애틋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조슈아는 열쇠를 대신 찾아 주겠다고 제 가슴을 팡팡 치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제 집 현관을 바라보았다. 어딘가에 열쇠 수리공의 전화번호가 붙어 있을 텐데.
“마침 오늘따라 저처럼 열쇠 잃어버린 사람이 많나 봐요. 두 시간은 뒤에 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조슈아가 전화번호를 찾기도 전에 남자가 말했다. 조슈아는 잠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근처 커피숍이라도 추천해 줘야 하나? 아니면 시간이 시간인 만큼 가볍게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조슈아의 입안에서 말이 맴돌던 찰나였다. 남자가 눈을 맞춰 왔다. 아름다운 녹갈색 눈동자가 상냥하게 웃었다.
“피곤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잡아 두었네요. 먼저 들어가세요.”
남자가 조슈아를 향해 목례했다. 조슈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507호, 자신의 집 앞에 서서 번호 키를 울렸다. 띠띠띠띠띠띠- 여섯 자리의 비밀번호를 누른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인용 스튜디오는 조슈아의 취향대로 깔끔했다. 조슈아는 식탁 겸용으로 사용하는 테이블 위에 비닐봉투를 내려놓고 잠시 집을 둘러보았다.
식탁과 책상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이인용 테이블과 의자 두 개, 마침 어제 청소한 주방과 문이 닫혀 있는 화장실. 넓지는 않아도 제법 깔끔해 보였다. 베란다가 있는 스튜디오의 오른쪽에 매트리스와 옷장을 놓고 가벽을 세워 놓은 것이 큰 역할을 해냈다.
집에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한 조슈아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인간이 된 입장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결정했다. 조슈아가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빼꼼히 연 현관문으로 옆집 남자가 보였다. 기름칠이 벗겨지기 시작한 문소리 때문인지 옆집 남자가 금세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혹시….”
제 목소리가 깔깔하게 느껴져서 조슈아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정말 작은 호의를 보인다는 듯,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잠시 들어올래요? 배고플 것 같은데.”
남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고는 사르르 녹아내릴 것처럼 달큰하게 웃었다. 그 순간 조슈아는 제가 어딘가에 빠졌다고 느꼈다.
이 사람 많은 5층짜리 스튜디오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남자. 이게 옆집 남자에 대한 인상이었다.
처음 남자를 본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자신이 이사 온 뒤로도 좀처럼 나가지 않던 508호에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짐은 단출했다. 옷이 담긴 박스들과 기본 가구 몇 가지.
그리고 저 남자가 나타났다. 가벼운 인사말이 일상인 사교성 있는 아름다운 남자.
“에이드리언 그렌트예요.”
“조슈아 베넷이에요.”
“고마워요 조슈아. 이렇게 저녁까지 해결했네요.”
에이드리언이 재킷을 벗어서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흰색 셔츠는 단추가 한 개 풀려 있었고 에이드리언이 움직일 때마다 언뜻언뜻 탄탄한 가슴 윤곽이 드러났다.
“사 온 건데요 뭐. 중국 음식 좋아해요?”
조슈아는 플라스틱 뚜껑을 열었다. 다진 고기가 잔뜩 들어간 매운 토마토 수프는 입구 부분을 접어서 훌훌 마실 수 있게 묽게 만들어져 있었다. 혼자라면 그랬겠지만.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프용 컵 두 개와 접시 두 개를 더 가져왔다. 그 사이에 남자, 에이드리언은 다른 음식의 뚜껑을 열었다. 튀긴 두부와 달달하게 양념된 치킨, 에그 누들이었다.
“네. 친구가 자주 먹거든요. 젓가락 써요 아니면 포크?”
“아, 저는….”
남자는 포장된 일회용 포크와 젓가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소 조슈아는 젓가락을 사용했다. 중국 식당 사장인 제이콥―50대 중국인 사장 이미지에는 안 맞는다고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했지만, 제이콥은 자신의 영어 이름은 무조건 제이콥이라고 했다. 그 이름이 아니면 대답도 하지 않는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만큼 ‘막젓가락질’이었지만 그 나라 음식은 그 나라의 방법으로 먹는 방식이 가장 좋아 보였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앞에서 ‘막젓가락질’을 하기에는 부끄러웠다. 주방에 있는 포크와 일회용 젓가락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하던 조슈아는 제가 꼭 잘 보이고 싶은 여자 앞에서 고민하는 십대 같다고 생각했다.
“…젓가락요.”
잠시 동그랗게 눈을 떴던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에게 젓가락을 넘겼다. 종이 포장을 찢은 조슈아가 짝, 하고 젓가락을 떼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돌돌 굴렸다. 에이드리언이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젓가락에 거친 부분이 정리되거든요.”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미간을 작게 찌푸리고 집중하며 자신을 따라 돌돌 젓가락을 굴리는 에이드리언의 모습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평소와 같은 음식인데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더 맛있었다. 제이콥이 뭔가를 더 넣은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젓가락질 잘하네요.”
친구와 자주 먹었던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젓가락질은 제이콥이 보여 줬던 동작과 거의 흡사했다. 무심코 감상을 이야기하던 조슈아는 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예상대로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젓가락질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조슈아도요.”
“…놀리는 거죠?”
“절대 아니에요.”
에이드리언이 깜짝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까지 내저었다. 옆집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서먹한 관계가 급격하게 가까워진 느낌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잘하는 편은 아닌 거 알아요.”
“못하는 편도 아니잖아요. 젓가락질 자체를 안 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제 친구만 해도 늘 포크로 먹거든요.”
에이드리언이 상냥하게 웃었다. 솔직히 이 미국에 젓가락을 쓰며 중국 음식 먹는 미국인이 얼마나 될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렇게까지 이야기해 주는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성인 남자 두 명의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조슈아를 따라 에이드리언도 플라스틱 용기를 모았다. 조슈아가 만류했다.
“그냥 둬요. 에이드리언. 손님이잖아요.”
“갑자기 방문한 불청객도 손님이라고 해줘서 고맙지만, 그럼 버리는 건 제가 하게 해 줘요.”
그렇지 않으면 용기를 헹구는 것까지 돕겠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셔츠 소매 아래 가려져 있던 근육과 툭 불어진 핏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조슈아는 뭐든지 빠르게 스캔하는 제 눈을 탓하며 마지못해 중얼거렸다.
“그러면 버리는 것만 도와줘요.”
에이드리언이 생긋 웃었다. 용기를 헹구는 것은 짧았다. 적당히 거품을 묻혀 기름기를 제거한 다음 물기를 툭툭 털었다.
“제가 버려도 되는데.”
조슈아의 말에도 에이드리언은 포장해 온 비닐봉투에 야무지게 용기를 담았다. 조슈아는 가벽 너머로 넘어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집을 가득 채운 음식 냄새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밤의 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그나저나 정말 집은 어떻게 들어가죠?”
“다시 한번 전화해 봐야죠. 이사 오자마자 번호 키로 바꾼다는 것을 까먹어서.”
핸드폰을 찾는지 에이드리언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드리언은 물론이고 조슈아까지 들었다. 에이드리언이 황당한 얼굴로 손을 빼냈다.
“찾…았네요.”
그 순간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당황과 황당 그리고 민망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것을 봤다.
“…접힌 부분에 있었나 봐요.”
“잘됐네요.”
조슈아는 웃음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에이드리언의 귀가 발갛게 물들어 갔다. 에이드리언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조슈아. 덕분에 잘 있다가 가요.”
“저녁 같이 먹어서 좋았어요. 잘 가요.”
현관에 서서 문을 열던 에이드리언이 뒤를 돌아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당황으로 물들어 있던 녹갈색 눈동자가 나른하게 조슈아를 응시했다.
“다음에는 제가 저녁 대접할게요. 내일, 괜찮아요?”
* * *
“다음에는 제가 저녁 대접할게요. 내일, 괜찮아요?”
그때 조슈아 자신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였는지, 좋다고 대답했는지. 어쨌거나 좋다는 뜻을 전달했다.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인사를 하고, 모든 게 너무 자연스레 흘러갔던 어제. 바로 옆집임에도 불구하고 에이드리언은 집에 잘 들어갔다고 메시지까지 보냈다.
오늘 고마웠어요! 덕분에 집에 잘 들어왔어요. :)
심지어 이렇게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넣어서.
조슈아는 핸드폰 액정 위로 이모티콘을 톡톡 건드렸다. 시선과 손가락이 당연하다는 듯 수신자 쪽으로 갔다. ‘옆집 남자’ 이름 대신 저장한 호칭을 보며 조슈아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왜 그럴까.”
“나도 궁금하네. 조슈아 베넷. 오늘 네가 아침부터 왜 그러는지.”
순간 조슈아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빌 스웰딘이 잔뜩 짜증난 얼굴로 책상 파티션에 팔을 걸친 채 조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슈아는 얼른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지? 순식간에 주변을 스캔하니 에밀리는 여전히 열일 중이었고, 지미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유일하게 눈이 마주친 사람은 코디네이터 엘라였다. 엘라가 발을 동동 구르며 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목, 목? 그리고 보니 오늘….
“오늘 내가 어디 가는지 알기나 하는 거야?”
조슈아는 빠르게 핸드폰 시계를 바라보았다. AM. 11:10 지금 시간에 있는 일정은 11시 30분 임원 회의였다.
지난 코디였던 매기가 퇴사하고 3개월 전 엘라가 코디로 입사했을 때부터 조슈아에게는 하나의 업무가 더 추가되었다. 임원 회의나 식사, 골프 접대 등 TPO가 필요한 곳의 의상 준비.
패션 잡지 모델 출신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엘라의 패션 센스는 탁월했지만, 아주 조금 과한 면이 없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지만, 엘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혹시나 제 과한 패션이 보스의 평판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평시 패션까지 너무 무난해질 정도였다.
빌 스웰딘이 코디된 옷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린 순간부터, 업무는 분담되었다. 에투왈에 입사하고 난 뒤부터 외국어 단어 암기하듯 브랜드 이름을 달달 외운 조슈아는 아는 브랜드 내에서 제법 끼워 맞춰 나쁘지 않은 센스를 보였다. 실제로 TPO를 생각한 옷을 내미는 편이고. 전체적으로 오늘 빌 스웰딘이 입은 옷은 회의와도 잘 어울렸다.
휴고보스의 짙은 그레이 정장은 투 버튼에 클래식한 칼라를 달고 어깨부터 허리까지 완만하게 라인이 잡혀 있었으며, 바짓단 아래 슬쩍 드러난 발목이 긴 다리를 부각시켜 답답하지 않았다. 검은 플레인 토우. 완벽하다 싶은 복장에 갑자기 생뚱맞은 느낌이 났다. 목에 걸린 구찌 호랑이 포인트 넥타이 때문이었다.
빌 스웰딘은 이 언밸런스한 조화를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양 세련되게 소화했다. 지금 바로 10층 촬영용 스튜디오로 내려가 이번 14∼19P에 들어갈 화보를 찍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임원 회의에는 그의 세련됨을 받아 주기에 너무 올드한 사람들만 가득 차 있을 게 분명했다.
조슈아는 머리를 팽팽 돌렸다. 임원 회의는 12층 대회의실에서 11시 30분.
여분의 넥타이는 언제나 편집장실 캐비닛 안에 있었지만, 며칠 전에 새로운 넥타이를 사 오라는 말에 엘라가 싹 정리해서 빌 스웰딘의 집으로 보냈다.
현재 시간은 11시 15분. 지금 편집장실이 있는 10층부터 협찬실이 있는 3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녀온다면 가능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식사 시간이 20분부터니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뛰어가는 것이었다.
조슈아가 비 맞은 어린 강아지처럼 처량한 눈빛으로 빌 스웰딘을 바라보았다. 빌이 무슨 짓이냐는 듯 팔짱을 낀 채 상체를 뒤로 젖혔다. 이때였다. 다부지게 핸드폰을 쥔 조슈아가 크게 소리쳤다.
“좀 이따가 두 배로 혼나겠습니다. 바로 따라 올라갈게요!”
“뭐?”
빌의 허락을 받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혼나는 것보다는 제 보스의 위신이 중요했다. 얼른 핸드폰으로 협찬실에 있는 안나한테 전화를 했다. 다급하게 다니는 사람이 많은지라 비서실을 나오자마자 다른 사람과 부딪힐 뻔했지만, 다행히 살짝 스치고 넘어갔다.
“안나. 지난주에 인디언 핑크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자수 놓인 넥타이! 어! 그거 에르메스 거 맞을 거야. 그거 좀 찾아 줄래? 내가 바로 내려갈게!!”
“…조슈아 베넷 어디 가는지 아는 사람?”
금세 사라진 조슈아의 뒷모습을 보며 빌 스웰딘이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엘라가 안절부절못하며 대답했다.
“아마 협찬실에요.”
“왜?”
“그야 보스의 회의 시간 시작 전에 넥타이 교체하려고…겠죠?”
“보스가 왜 넥타이를 바꿔?”
엘라가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에밀리가 안경을 벗은 채 질끈 묶고 있던 머리끈을 풀었다. 풀어진 머리카락을 두어 번 올리자 오늘 아침에 하고 온 완벽한 웨이브가 다시 완성되었다.
엘라는 난감한 얼굴로 빌과 에밀리 그리고 지미를 번갈아 보았다. 빌 스웰딘은 엘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아까 조슈아를 부르신 건,”
“레스토랑 때문에.”
“네?”
“오늘 사샤랑 갈 레스토랑 예약 내역 보니까 메인이 브란지노잖아. 점심에 농어 먹는 건 딱 질색이라고.”
엘라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에밀리는 쯔, 혀를 찼다. 아직 3개월 차인 엘라는 이 에투왈에서 빌 스웰딘이 어떤 역할인지 아직도 100% 이해하지 못했다. 임원들은 빌 스웰딘이 슬리퍼에 반바지를 입고 하와이안 셔츠를 걸치고 들어가도 혁신적이라 칭찬할 사람들이었다. 그게 오너 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패션에 대한 엄청난 감으로 에투왈의 실적을 상승시키고 있는 빌에 대한 감사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물론 3년 차인 조슈아가 이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눈치 빠른 조슈아는 에투왈이 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단 2주 만에 알아챘으니까. 오늘 오전 내내 이상하기는 했어도 다른 것 때문이겠거니 알아챌 줄 알았는데 대단한 착각을 하고 뛰어 내려갔다.
“전화라도 해야 하나?”
“놔둬요. 뛰고 오면 정신 차리겠지.”
옆에 있던 지미가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에밀리가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인더에 넣은 자료들을 확인한 뒤 빌의 뒤로 갔다.
“회의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11시 25분. 회의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넥타이는 왜?”
“보스 거야.”
“편집장님 어디 가?”
“임원회….”
아차. 빌 스웰딘은 임원 회의에 간다고 넥타이를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생각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조슈아가 할 법한 생각이었지 결코 빌 스웰딘이 생각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TPO를 맞춰 주는 것은 엘라가 너무 걱정해서 해 주는 일이었지, 빌이 필요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열심히 달려 내려왔는데 온 목적이 사라지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안나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고맙다는 말만 겨우 할 뿐이었다. 안나는 나중에 이야기해 달라며 바쁜 듯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바쁘긴 할 시간이었다. 11시 23분, 점심시간이 막 시작됐으니.
“보스 회의 올라가셨어?”
- 네. 조금 전에 에밀리와 함께요. 어디까지 왔어요?
“지금 3층에서 넥타이 받았어.”
- 빠르네요. 뛰어갔어요?
“당연하지.”
- 에밀리가 이제 정신 좀 차렸냐고 대신 물어봐 달랬어요.
“덕분에.”
전화 너머에서 엘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엘라는 천천히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조슈아는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닫은 뒤 계단에 걸터앉았다. 넥타이도 살짝 풀었다. 제 앞머리를 흩트리고 나서야, 조슈아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고작 그 한마디, 저녁 먹자는 한마디에 아침부터 운동 제대로 했다.
* * *
“다이어트 너무 싫다. 이 풀떼기들이 고기 맛이 난다면 좋을 텐데.”
엘라가 투덜거리며 포크로 양상추를 찍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결심한 듯 크림치즈 소스를 노려보더니 이내 양상추를 소스에 찍었다. 조슈아는 크림치즈 소스 통에 적힌 칼로리를 보았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비서실의 점심 식사는 대개 이랬다. 서브웨이 샌드위치와 샐러드. 그것도 올리브와 연어를 잔뜩 올려서.
“보스의 점심 식사랑 너무 다르잖아.”
“버는 돈이 다르잖아.”
“저야 그렇지만, 에밀리는 엄청 많이 벌잖아요. 왜 샌드위치 먹어요?”
엘라가 정말 궁금한 듯 물었다. 에밀리가 피식 웃었다.
“그러면 다음부터 맛있는 냄새 풍기며 돌아올까?”
“아, 너무해.”
엘라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지미가 한마디 했다.
“오늘 보스의 점심 식사는 뭐야?”
“전복 내장이 들어간 파스타. 애피타이저로는 성게 알이랑 김 크래커.”
“브란지노 대신에 말이지?”
“브란지노 대신에 말이죠.”
놀리는 듯한 지미의 말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화제는 금방금방 넘어갔다. 회의 때 피처팀의 에스닉이 갑자기 패션팀한테 주는 페이지 2장만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든지, 협찬실의 사라가 애인과 헤어졌다든지, 빌의 전속 바리스타인 미셸이 요즘 힘들어하는 게 보인다든지 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그 끝은 늘 그래 왔든 내기였다.
“사샤는 얼마나 갈까?”
“나는 2주.”
“안 돼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챗을 보내고 있는데.”
“분명한 건 빌 스웰딘이 호구 잡힌 낌새가 나기 시작했다는 거지. 사샤 생일이 다다음주거든.”
“무슨 생일 가까워지면 사귀는 남자도 아니고.”
지미가 고개를 저었다. 저 잘난 줄 알고 사는 남자가 듣는다면 충격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었다. 요즘 들어 생일이 다가오는 배우부터 모델, 셀럽들이 은근히 빌의 번호로 연락해 오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또 하나 있어요. 조슈아가 야근이 예약되었다는 거.”
엘라의 단언에 조슈아가 쓰게 웃었다.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으니까. 갑자기 힘들어지는 기분에 조슈아가 우울한 표정으로 빵을 씹었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띵- 반짝였다. 말풍선 같은 이모티콘. 메시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리가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게 다였다.
자리로 가서 무언가를 찾는 척하며 핸드폰의 패턴을 풀었다. 옆집남자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오늘 6시 반. 랜딩파크 분수대 앞에서 맞죠? 점심 맛있게 먹어요!
갑자기 식욕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이상하네.”
에밀리 스콧이 중얼거렸다. 잠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아, 하고 부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던 조슈아가 책상을 거쳐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죽을상이던 조금 전과 달리 환하게 웃으면서.
촉이 말하고 있었다. 조슈아에게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고.
* * *
“이 시간에 만나는 거, 생각보다 더 낭만적이네요.”
조슈아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피스 빌딩에서는 퇴근만을 바라던 회사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좀비처럼 퀭한 얼굴과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느라 굽은 등은 옅은 먹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보는 순간 환하게 펴졌다.
보통 이런 걸 낭만적이라고 하나?
조슈아는 같은 직장인으로서 안쓰럽게 느껴지는 마음을 꾹꾹 눌렀다. 낭만적인 로맨스 영화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한 남자가 낭만적이라고 하니, 낭만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그렇게 안 봤는데 굉장히 긍정적인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에이드리언이 배시시 웃었다. 설탕 입자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기분이 달았다. 어느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란히 랜딩 파크를 걸었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된 탓인지 나무는 푸르렀고, 바람은 적당히 따뜻했다.
“뭐 좋아해요?”
“맛있는 거요.”
“음, 범위가 너무 넓은데.”
에이드리언이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톡 내밀었다. 주변에서 힐끗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남자는 눈에 띄고 있었다. 조슈아는 시선이 너무 느껴져서 조금 당황스러운데도 에이드리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녹갈색 눈동자가 바닥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조슈아가 시선을 따라서 바닥을 내려다보던 참이었다.
“피자 어때요?”
“맥주까지요?”
“당연히 맥주까지죠. 가고 싶었던 곳이 있거든요.”
아마 조슈아도 좋아할 거라고, 에이드리언이 덧붙였다. 그 얼굴에 서린 기대감이 상당해서, 조슈아는 마주 보고 따라 웃었다.
“어때요? 괜찮죠?”
에이드리언이 안내한 피자 가게 ‘파파스 피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연노랑색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지만 맥주 한 잔 걸치기에 그만이었다.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씩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말해야 하나, 분명히 민망해할 텐데. 서버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조슈아가 생각했다. 눈이 놀랄 정도로 황홀한 미남의 등장 때문인지 서버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여기 메뉴판입니다.”
“어떤 게 좋아요. 조슈아?”
“조슈아?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에이드리언이 눈을 깜빡였다. 서버, 르네가 반갑다는 얼굴로 조슈아를 마주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다가 르네를 따라 웃었다.
“오래간만에 보스가 빨리 퇴근을 해서.”
“그 보스 얘기라면 이제 귀에 징이 박히겠어요. 사진이라도 보여 달라니까요? 더 이입해서 같이 욕해 주게.”
“우리 보스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르네.”
“역시 눈치 빠르네요, 조슈아. 오늘은 이만 포기하죠. 지미와 엘라도 못 본 지 오래되었는데. 다음에 같이 와요. 그런데, 이쪽 분은….”
“음, 그런데 뒤에서 피터가 계속 손짓하는 것 같은데. 주문은 정하고 할게요. 바쁠 텐데.”
애꿎은 피터를 들먹이며 르네에게 손을 흔들었다. 르네는 아쉬운 듯 알겠다고 대답한 뒤 돌아섰다. 사실 가게 안이 너무 바빠서 떠난 거기도 하지만.
“같이 왔는데 모르는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미안해요.”
“그것보다, 자주 오는 가게인 것 같은데.”
“아,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요. 타이밍을 놓쳤어요.”
“왜 미안해요? 내가 검증된 맛집으로 잘 데려온 것 같은데. 그러면 조슈아가 맛있는 메뉴를 추천해 줘요.”
에이드리언은 여상한 사람이다. 소개해 준 가게를 안다는 것에 대해 무안해하지 않고, 왜 말하지 않았냐고 투덜대지도 않았다.
조슈아는 눈을 깜빡이며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가지 메뉴를 골라 주었다. 그 중에서 에이드리언은 녹은 치즈와 페퍼로니가 가득한 피자와 맥앤치즈 그리고 감자튀김을 골랐다. 당연히 맥주는 피처였다.
주문을 마친 뒤, 바로 나온 피처를 잔에 따르며 에이드리언이 눈을 접어 사르르 웃었다. 짠, 잔이 부딪혔다. 잔에 들어 있던 얼음들이 짤랑였고 이내 흰 거품이 출렁였다.
“의외네요 조슈아. 레모네이드를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늘 맥주로 지갑이 텅 비고 싶은 거죠?”
“에이, 설마요.”
에이드리언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가 짐짓 불안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피처와 조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녹갈색 눈동자가 잠시 떨렸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조슈아는 모르는 척 맥주를 쭉 들이켰다. 꿀꺽꿀꺽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는 시원하기 그지없었고, 몰래몰래 제가 맥주 마시는 것을 바라보는 에이드리언의 눈동자는 놀리기 딱 좋았다.
페퍼로니 피자와 맥앤치즈 그리고 감자튀김의 조합은 환상이었다. 따끈따끈한 음식을 테이블까지 가져온 르네는 또 머뭇거렸지만 조슈아는 모르는 척 고맙다고 말했다. 르네는 눈치 없는 남자를 바라보듯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른 테이블로 갔다. 아마 다음번에 오면 호되게 쪼일 게 분명했다.
윽, 당분간은 피해야겠네.
조슈아가 목을 움츠렸다. 그러는 사이 제 접시 위로 피자 한 조각이 올라왔다. 에이드리언이 커다란 피자의 치즈가 주욱 늘어나게 올려 준 것이었다. 먹기 좋게 파마산 치즈 가루와 핫소스도 조슈아 앞으로 밀어 주었다. 몸에 밴 듯 자연스러운 매너였다.
“에이드리언, 정말 매너 좋네요.”
순수한 감탄이었다. 제 그릇에도 피자를 옮기던 에이드리언이 ‘그런가요?’ 하고 물었다. 제 매너가 얼마나 수준급인지 잘 모르는 듯 고개까지 갸우뚱거렸다.
예쁜 얼굴에 잘난 몸매인데 매너까지 좋아.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조슈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물론 에이드리언을 제외하고 조슈아의 주변에는 잘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빌 스웰딘. 미남에 모델 출신에 심지어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오는 집안의 귀염 받는 막내아들이었다. 그렇게 다 갖춘 사람은 다 빌 스웰딘처럼 세 다리는 기본에 성질이 개차반 같은 줄 알았는데. 아닌 사람도 있었다.
느끼하고 짭짤한 피자는 계속해서 술을 불렀다. 술값을 걱정하던 사람은 어디에 갔는지 에이드리언은 피처를 다 비우기도 전에 한 번 더 주문했다. 그러고는 마음껏 마시라며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조슈아는 조금씩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제법 술에 강한 편이었지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까지 막을 길은 없었다. 기분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풍선처럼 붕붕 뜨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들이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해졌다.
눈앞에는 옆집 남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이 다정한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술 세네요. 얼굴도 안 빨개지고.”
“에이드리언은 조금 빨개진 것 같은데.”
“정말이에요?”
에이드리언이 손등으로 제 뺨을 쓸었다. 그리고 ‘열기는 없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조슈아는 농담이라고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따라 웃었다. 힐끗거리는 시선이 점점 늘어났다.
“그렇게 잘생기면 사는 게 어때요?”
“네?”
“랜딩파크부터 여기까지. 사람들이 이렇게 쳐다보는데 설마 몰랐다고 하는 건 아니죠?”
몰랐다고 한다면 바로 ‘거짓말’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피자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지면서 조슈아는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괜히 친한 척을 한 걸까? 주제넘은 농담이었나?
이제 와서 말을 번복하기에는 늦은 것일까. 애꿎은 타이밍만 탓하며 조슈아가 입을 달싹였다.
“글쎄요. 돌이켜 보니까 별로 생각해 본 적은 없네요. 그냥 사람들이 좀 많이 쳐다본다, 이 정도?”
“학생 때 재밌었던 일은 없었어요? 예를 들어서 풋볼이나 미식축구 캡틴을 해 봤다거나, 치어리더 여자 친구가 있다거나.”
“뭐, 하나는 맞혔네요. 미식축구 했거든요.”
“오! 정말 틴에이저 영화 같네요.”
조슈아가 짝짝, 박수를 쳤다. 머릿속에서 ‘그만해!’라는 미약한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입은 통제력을 잃은 듯 저절로 움직였다.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으며 포크로 감자튀김을 찍어 조슈아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조슈아가 잠시 멈칫했다.
우리가 이 정도 사이인가?
“어서요. 속 버려요.”
“아니에요. 제가 먹을게요.”
에이드리언은 좋은 사람이었다. 거절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걸었다. 조슈아는 제 포크로 감자튀김을 찍어 먹었다.
“그러면 영화 속에서 당신 역할은 뭐예요?”
“음, 내 역할이요?”
조슈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이스쿨에서 제 역할이 뭐였더라. 독서 동아리를 했었는데, 그건 너무 뻔하고. 아,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비록 조금 다니다가 슬그머니 빠졌지만. 또 뭐가 있었나? 대학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좀 열심히 한 것은 자랑 같으니 빼자 정말 남는 게 없었다.
“음, 이름 붙이기에는 뭐한 빨간 머리 엑스트라 6 정도?”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에이드리언이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서늘한 공기처럼 상쾌한 체향이 같이 터져 나오는 기분에 조슈아가 살며시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렸다. 에이드리언이 입을 열었다. 초콜릿 라테처럼 따뜻하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내가 그 영화의 감독이라면 당신은 그냥 빨간 머리 엑스트라 6이 아니었을 거예요.”
“어디까지 시켜 주게요?”
“음, 일단 장르를 바꾸고요. 틴에이저 영화에 나는 안 어울리잖아요. 물론 조슈아는 그대로 청바지에 후드만 입는다면 학생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요.”
“내가요?”
“네. 조슈아가요.”
제가 앳된 외모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스물여덟 살에 하이스쿨 학생이라니. 평소라면 손을 내저을 말이었지만 술 한 잔이, 퇴근으로 들뜬 기분이, 적당히 쾌활한 파파스 피자 안의 분위기가 조슈아를 풀어 주었다. 에이드리언이 맥앤치즈를 조슈아 쪽으로 밀어 주었다. 조슈아가 한 입 먹고는 눈을 휘어 웃었다.
“어쨌든, 조슈아는 어떤 장르를 좋아해요?”
“저는, 일단 공포요. 공포 좋아해요?”
“좋아하기는 하는데, 지금은 싫어할래요.”
“왜요?”
“공포 영화에서 금발 미인은 다 죽거든요.”
에이드리언이 새침하게 턱을 들어올렸다. 녹갈색 눈동자가 도도하게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조슈아는 웃음을 참으며 한마디 더했다.
“그러면 공포는 안 되겠네요. 액션은 어때요?”
“액션은 그저 그래요. 요즘 금발에 몸 좋은 미인은 다 영웅으로 나오거든요. 빨간 머리랑 만나기에 너무 어려워요.”
“금발과 빨간 머리가 만나는 영화가 있기는 할까요?”
조슈아가 진지하게 물었다. 머릿속으로 제가 본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빨간 머리 남자와 금발의 남자가 교집합으로 묶이는 영화는 없었다.
그 순간, 에이드리언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그리고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리고 조슈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듯 작게 벌어진 입가에 조슈아가 집중했다.
드디어 붉은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음, 코미디는 어때요?”
“코미디요?”
괜찮은 생각이었다. 금발 남자와 빨간 머리 남자가 만난다면 분명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영화에 금발 남자와 빨간 머리 남자를 넣어도 될 텐데’라는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엔 이미 조슈아는 맥주의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뭐, 그 앞에 뭔가를 더 넣어도 좋기는 하고요.”
에이드리언이 은근히 한마디 더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슈아는 이미 빨간 머리 남자와 금발 남자의 코미디에 빠져든 뒤였다.
“짐 캐리 나오는 느낌으로 어때요? 아니면 화이트 칙스!”
“우리 보스는 말이죠.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악마예요. 악마.”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상기된 조슈아의 볼을 보며 에이드리언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조슈아 보스는 어떤 사람이에요?”
시작은 이 한마디였다. 아까 르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에이드리언의 모습에 조슈아는 이를 갈며 한마디 했다.
악마. 그 말보다 빌 스웰딘을 잘 표현하는 말이 또 있을까? 그나마 그 유명한 런웨이의 악마 ‘메릴 체르니’는 프라다만 입었다고 했는데 에투왈의 악마는 프라다부터 샤넬, 톰 포드 등 걸칠 수 있는 것은 다 걸치니 어쩌면 한 수 위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우리 보스가 마시는 커피 사려면 38번 애비뉴까지 가야 했거든요. 그런데 보스는 거의 세 시간에 한 번씩 커피를 마셔요. 그것도 손을 대었을 때 약간 따뜻한 정도의 커피 그란데 사이즈로. 그런데 매일 사람 손 온도가 일정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느 날은 몸이 좋지 않아서 손이 차고, 어느 날은 열이 있어서 손이 뜨겁고. 아무튼 커피 사러 왕복 30분 다녀올 때도 보온병에 넣고 다니는데 보스가 마음에 드는 온도가 아니면 또 가야 되고.”
말조심, 또 말조심.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이건 숫제 하소연이었다. 그나마 엄중한 분위기에서 작성했던 ‘비밀보안서약서’가 계속 둥둥 떠다녔다. 어쨌거나, 조슈아는 비서로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이 있었다. 덕분에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은 인터넷에서 한 번씩은 봤을 법한 비서의 서러움 중 대표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그렇게 다니지는 않아서 다행이죠, 뭐.”
“왜요? 이제는 조슈아가 직접 커피를 내리나요?”
“아뇨. 그 바리스타를 스카우트했어요.”
에이드리언의 눈이 커졌다.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농담인지를 분간하는 것 같은 표정에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완벽한 미모와 고급스러운 옷 때문에 에이드리언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지금 이 표정을 보니 알 것 같다.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다.
“믿기지 않죠? 나도 그랬어요. 하지만 세상에는 참 여러 사람이 있더라고요.”
에이드리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아한 눈매가 사르르 접히면서 달큰하게 웃었다. 뺨이 붉어지는 기분에 조슈아는 한 모금 더 홀짝였다.
“비서란 정말 대단한 일이네요. 그렇게 대단한, 악마를 서포트하다니.”
“저도 가끔 거울 보면서 그래요. 난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있어.”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웃을 줄 알았는데 에이드리언은 웃지 않았다. 대신 진심을 담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언의 금발이 살짝 흔들렸다.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조슈아가 시선을 피했다.
“…그러는 에이드리언은 어떤 일 해요?”
“저는 투자 회사에 다녀요. 재미있는 일이지만, 듣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에이드리언은 예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는지 눈썹 사이를 찡그렸다. 조슈아가 입가로 웃음을 흘렸다.
“이상하다. 에이드리언이 얘기해 주면 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말재주가 없었나 보죠.”
“에이드리언은 욕할 보스 없어요? 나 되게 공감 잘할 준비 되어 있는데.”
“음… 아쉽게도, 없네요.”
“그래요? 천사 같은 보스를 뒀나 봐요.”
에이드리언이 애매하게 웃었다. 천사 정도는 아닌가? 조슈아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 어떤 보스라도 빌 스웰딘에 비한다면 천사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빌 스웰딘이 가뭄에 비 내리듯 아주 조금 잘해 줄 때가 있기는 하지만.
띠링, 조슈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메시지였다. 발신자는 빌 스웰딘. 지금 핸드폰 시간은 8시 50분이 넘었지만, 원래부터 빌 스웰딘에게는 조슈아가 퇴근했다는 시간 개념 자체가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메시지 내용을 바라보았다.
사샤 선물. 3일 내.
조슈아는 괜히 편들어 주려던 생각을 접었다. 빌 스웰딘은 정말 악마다. 내일부터 야근 당첨이었다. 내기에서 빠지길 잘했다. 아무리 승산이 있어도 제가 야근을 한다는 것에는 걸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 있어요?”
“아, 별건 아니고. 내일부터 며칠간 야근을 하게 되어서요.”
일단 오늘 집에 가면 사샤 피바로츠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을 완료하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그녀의 SNS와 인터뷰 자료, 팬 커뮤니티와 방송들을 보면서 그녀가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선물을 확인할 예정이다. 물론 매니저나 기획사 관계자 등에게 연락을 하는 것은 당연한 코스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원하는 선물을 알아 낸 뒤, 그게 기성품이면 사면 되고 품절된 한정판이면… 갖은 노력으로 구해 내면 된다. 그리고 딱 3일 뒤, 빌 스웰딘은 차갑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능력남이 되어 조슈아 베넷이 구해 낸 선물을 내밀며 한마디 한다.
“가져.”
더 이상의 따뜻한 말은 필요 없다. 말도 안 했지만 눈치 빠르고 관심 많은 남자 친구가 준 선물에 감동한 여자는 그대로 사랑을 키워 갈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사랑의 큐피드가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큐피드가 너무 바빠서 못 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저에게 큐피드를 시키는 걸 보면 말이다.
으아. 조슈아가 잠시 제 머리카락을 뜯는 시늉을 했다. 다정한 체온이 손등에 닿았다. 에이드리언이었다.
“예쁜 빨간 머리가 뽑히고 있어요.”
얘는 참, 말도 예쁘게 한다. 조슈아가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다 먹은 피처 2개와 빈 그릇들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제 일어날까요?”
르네는 계산을 하면서도 에이드리언을 힐끗거렸다. 파파스 피자에서 제일 인기 좋은 르네가 이렇게까지 호감을 표현하는데도 에이드리언은 조슈아를 보고 웃었다.
“잘 먹었어요.”
“뭘요. 어제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
“그래도 주머니에 있었으니 다행이죠.”
“윽, 그건 모른 척해 줘요. 정말 어제는 너무 창피했어요.”
진심인 듯 새까만 밤하늘 아래에서도 에이드리언의 뺨이 붉었다. 조슈아는 키득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친구들과, 혹은 에밀리나 지미, 엘라와 저녁을 먹은 뒤라면 모두와 헤어져 늘 혼자 걸었던 거리였다.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다는 건 제법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말이 없어도 불편하지가 않았다.
가로수 잔가지들이 흔들렸다. 싸한 저녁 냄새와 함께 시원한 쿨워터 향이 났다. 조슈아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바다가 떠오르는 시원한 향이었다.
“향수 써요?”
“네. 짙은가요?”
“아니요. 에이드리언이랑 잘 어울리네요.”
조슈아가 기분 좋게 웃었다. 짭짤한 피자에 시원한 맥주와 좋은 이웃까지. 날아갈 것처럼 좋은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아이스크림, 무슨 맛 좋아해요?”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이 이내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는지 눈을 휘었다.
“조슈아는요?”
“저는 초콜릿으로 2단이요.”
“저도 같은 거로요.”
2단 주문은 3단이 되어 돌아왔다. 싹싹한 조슈아 덕이었는지, 아니면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불러온 서비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사 와서 이렇게 좋은 이웃을 만날 줄 몰랐어요.”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말하면서도 겸연쩍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시선을 피했다. 에이드리언 같은 미인이라면 나쁜 사람도 좋은 이웃이 되었을 거라는 말이 혀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진지한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농담은 목 너머로 삼켜졌다. 대신 자신도 그렇다는 듯 조슈아도 맞장구를 쳤다.
“저도요. 508호에는 사람이 안 들어올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좋은 집이 안 나갔다는 게 더 신기하네요.”
에이드리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 뉴욕 바닥에는 다시없을 가격이긴 했다. 집세 걱정하는 제 주변 친구들 같은 모습에 에이드리언이 새삼 친근하게 느껴졌다.
“오늘 조슈아 덕분에 즐거웠어요.”
“저도요. 맛있는 것도 먹고.”
“당분간 파파스 피자도 못 가겠고.”
에이드리언이 씩 웃었다. 마지막에 르네가 조슈아를 원망하듯 쳐다본 것을 본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손을 휘휘 저었다.
“어쩔 수 없죠. 혹시 르네한테 마음 있어요?”
“좋은 분 같지만, 아쉽게도.”
“그러면 저는 따로 소개 안 시켜 줄 겁니다. 오늘 에이드리언과의 시간, 즐거웠거든요.”
보스 흉도 잔뜩 보고. 말할 때마다 조슈아가 된 듯 계속 공감해 주고. 친구 관계도, 회사 동료 관계도 아닌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는 긴장 두 스푼 정도 섞인 재미로 가득 찼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자리로 조슈아를 볼 수 있을까요?”
에이드리언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녹갈색 눈동자는 긴장을 띤 채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쥔 손이 떨리는 것만 같아서 조슈아는 잠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당연하죠. 이렇게 즐거운데 제가 마다할 리가 없죠.”
“그거 참, 다행이네요.”
에이드리언의 입가에 핀 웃음이 짙어졌다. 미묘한 어조였지만, 조슈아는 제가 술에 취했거니 하고 가볍게 넘겨 버렸다.
* * *
사샤가 탐내는 선물은 마놀로블라닉 한기시 10주년 기념 한기시 리미티드 에디션이었다. 구하기 어렵지는 않은 제품이었다. 조슈아는 제 품에 있는 구두 박스를 바라보았다. 새틴으로 된 구두 보디와 아찔한 10㎝의 힐, 영롱하게 빛나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버클 장식 디테일까지. 멋스러운 필기체로 레터링 된 파랑색 구두 바깥 보디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야근 없네.”
“아쉬워 보이네요, 지미.”
“내기에 졌으니까 그렇지.”
지미 대신 에밀리가 대답했다. 에밀리 손에서는 10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엘라도 쓴맛을 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에밀리가 내기에서 지는 건 못 봤네요.”
“보스랑 있다 보니 저절로 감이 오르더라고.”
에밀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 조슈아는 탄식을 내뱉었다. 하긴, 저만 해도 3년 동안 눈치가 올랐는데 에밀리는 감에 눈치에, 말발에, 힘에. 더불어 연봉까지 올랐겠지만.
“에밀리. 그 감으로 저 하나만 도와줄 수 있어요?”
“주식이라면 안 도와줄 거야.”
“주식보다 더 어려운데.”
엘라가 우는 얼굴을 하며 에밀리 쪽으로 다가갔다. 엘라가 내민 핸드폰에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주로 엘라가 연락하며 약속을 잡고 있었고 상대는 그 연락에 단답을 달았다.
“지난번 보스 따라서 간 쇼에서 본 남자인데, 연락처도 그쪽이 주고 갔거든요. 그런데 두세 번 만나니까 이런 식으로 오는데.”
“이런 건 나보다 죠슈아가 더 제격이지. 어때?”
답은 나와 있었다. 에밀리는 턱을 들어 올리면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엘라는 맞다, 하는 얼굴로 조슈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때요 조슈아?”
“돌려 말해 줄까요 아니면 직구를 날려 줄까요?”
“직구요.”
“관심 있으면 연락하고, 가벼운 마음이었으면 정리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심심할 때 연락하기에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는데.”
엘라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핸드폰 액정을 톡톡 쳤다.
“무슨 일인데? 나 빼고 또 재미있는 이야기 하는 거야?”
“닉!”
엘라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자, 빌 스웰딘의 개인 변호사 닉 드어본이 양손을 번쩍 들고 반갑다는 듯 흔들고 있었다. 닉이 걸어올 때마다 더티 블론드가 붕붕 떴다. 손바닥을 맞부딪힌 지미가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말했다.
“요즘 왁스는 안 쓰나 보네요. 지난번에 변호실장님이 뭐라고 했다면서요.”
“이제는 베니가 날 포기했어.”
“어쩐지. 베니가 닉 소속을 비서실로 하면 안 되냐고 인사과에 얘기하고 다닌다던데요?”
“나야말로 대환영이지. 난 개인 변호사라고. 월급도 빌한테 받는데 도대체 왜 내가 비서실 소속이 아닌지 모르겠어. 에밀리, 그렇지 않아?”
“그야 빌 스웰딘이 에투왈의 주가를 좌지우지하는 편집장이니까요. 그의 스캔들을 정리하려면 다른 변호사들과도 입을 맞춰야죠.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미셸이야 말로 비서실 소속이죠. 아쉽게도 사내 카페가 생겨서 그쪽으로 소속을 바꾸긴 했지만.”
에밀리는 작년에 스카우트된 스타벅스 바리스타 출신 미셸의 이야기까지 꺼냈다. 탕비실에 호화찬란한 커피머신까지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아깝게 여긴 바리스타 미셸은 새로 생긴 사내 카페에서 매니저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미셸이 사내 카페로 독립하면 어떠냐는 이야기에 빌은 눈썹 한번 까딱하기는 했지만, 별말 없이 넘어갔었다. 빌의 기분이 가장 좋은 날 물어봤던 게 신의 한 수였다.
미셸의 이야기에 닉이 ‘힝’ 하고 어린아이가 낼 법한 소리를 내었지만 에밀리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다.
닉은 주변을 둘러보며 엘라의 책상에 놓인 과자를 집어먹었다. 엘라가 ‘비싼 과잔데’ 하고 투덜거리자 눈을 찡긋하며 애교스러운 웃음까지 짓기도 했다. 40대 아저씨의 눈웃음에 엘라가 어쩔 수 없지, 하면서 따라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보스는 어디 가셨을까요?”
“개인 스케줄입니다. 2시까지는 저도 비서실 대기이고요.”
지미가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10시 24분이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닉이 아, 하고 감탄을 흘렸다.
“어제 파티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빙고.”
지미가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딱, 소리를 냈다. 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보스가 하이스쿨 다닐 때부터 파티 다음 날이면 아주 뻗었지. 술도 못하면서 말이지.”
“그러게 말이에요. 보드카 세 잔이면 해롱거리면서.”
닉과 지미와의 대화를 듣던 조슈아가 울컥했다. 그 세 잔에 해롱거리는 사람이 사샤 선물 사라고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연락을 한단 말이지. 요즘은 패션 잡지에서도 워라밸을 고집하는데, 빌은 워라밸 소리를 들으면 ‘일과 일상의 밸런스를 일치시키라는 말이지?’라고 얄밉게 웃을 사람이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반짝였다.
날이 너무 좋네요. :) 오늘 정말 야근이에요?
발신자는 에이드리언. 누운 채 웃고 있는 이모티콘에 조슈아의 입가에도 저절로 웃음이 고였다.
다행히 해결되었어요. 정시퇴근이 간절하긴 한데. 에이드리언은요?
저는 야근 없어요!!! 조슈아 치즈버거 좋아해요?
치즈버거 좋아하죠. 감자튀김도요!
제 감자튀김 조슈아한테 줄 테니, 오늘 저녁도 같이 먹을래요? 조슈아가 그렇게 해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느낌표가 세 개나 달렸다. 점점 더 귀엽게 군다. 보육원에는 제 또래 아이들도 많았고, 한참 어린 아이들도 많았지만 이렇게 귀여운 사람을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이드리언이 한 살 더 많은데. 혹시 나이를 속인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조슈아가 쿡쿡 웃었다.
“조슈아.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파티션 위로 불쑥, 닉이 고개를 디밀었다. 조슈아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닉을 바라보았다. 닉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조슈아의 핸드폰을 턱짓했다.
“뭐야 조슈아. 엘라도 좋은 일이 있었더만, 여기도 좋은 일이 생기는 거야?”
저 뒤에서 엘라가 ‘끝난 일이라니까요!’ 하고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닉이 ‘아아, 그랬지’ 하면서 능청스레 넘겼다. 그렇지만 시선은 줄곧 조슈아를 향했다. 금방이라도 저 눈이 핸드폰 액정을 바라볼 것만 같았다.
별것 아닌 메시지였지만 누군가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자연스레 핸드폰 액정을 껐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은 일이야 많죠. 일단 오늘 보스 여자 친구 안 온 것도….”
핸드폰 진동이 울리는 통에 조슈아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닉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았는데, 보스 직통으로 연락이 왔네?”
“…그러네요.”
“무슨 일이려나?”
닉이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음률을 탔다. 남들한테 관심이 많은 저런 더티 블론드 아저씨가 빌의 스캔들 소식만 들으면 눈빛이 달라져 번개처럼 해결한다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가 급했다. 조슈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보스'라고 뜬 전화 잠금을 풀었다.
“네 보스. 사샤 선물은 메시지 드린 것처럼 해결해 놓았습니다.”
- …아메리카노. 시럽 두 번 넣어서.
뚝- 끊긴 전화를 바라보며 조슈아는 침을 한번 삼켰다. 예전에 언뜻 에밀리한테 들었다. 빌은 어렸을 때부터 붙어 있던 예절 선생님도 진저리를 칠 정도로 예절이랑은 담을 쌓았다고. 그나마 성인이 되었다고 사교계의 예절만큼은 완벽해서 다행이라고.
그래, 밖에서만 욕 안 먹을 정도면 되지. 스웰딘 가문의 변호사가 주구장창 했던 말이 어느새 조슈아의 입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야 말로 미운 놈한테 정든다는 것일까? 조슈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지미를 향해 말했다.
“지미. 보스 집까지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그야 당연하지만, 오늘 연습하면서 가는 거야?”
조슈아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미가 피식 웃었다.
“계속 연습 안 하다가 또 한소리 듣는 날 생긴다니까?”
“운전이라면 꽤 하는 편인데, 슈퍼 카는 무서워서 못 몰겠어요.”
조슈아는 주차장에 모셔져 있는 슈퍼 카들을 떠올렸다. 페라리, 맥라렌, 람보르기니 등 이름만 들어 보았던 차들이 빌의 저택과 주차장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토이 카처럼.
“그냥 차겠거니 하래도.”
운동을 해서 그런가? 아무리 봐도 지미는 담이 세다. 어떻게 슈퍼 카들을 제가 몰던 차들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연습이 필요하기는 했다. 수행 비서인 지미가 휴가를 가거나 잠시 다른 업무를 보러 갔을 때 운전을 해야 하는 사람은 세컨드 비서인 자신이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지미 대신 운전을 하다가 빈정거림이라는 빈정거림은 다 들었다.
“세상에, 나는 내 차 중에 40㎞를 달리는 차가 있는 줄 몰랐어. 어쩌면 달팽이 지나가는 것까지 배려하고 달리는 중인데 눈치 없는 내가 몰라 준 걸까? 덕분에 미스터 맥빈과의 조찬이 날아갈 뻔했다는 사실을 알려나 몰라. 내 비서라면 미스터 맥빈이 에투왈에 투자한 광고가 얼마인지 정도는 알 텐데 말이지. 이번에 홍보 모델로 뽑은 가수가 늦었다고 계약을 해지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참, 내 커피는 어디로 간 거지? 설마 다 식어빠진 이 검은 물이 내 커피라고 하지는 않겠지?”
정신 쏙 빼놓는 빈정거림이 떠올라서 조슈아는 눈만 깜빡였다. 정말 운전을 해야 하긴 할 텐데.
“…오늘은 아무래도 제가 운전을 해야 할 것 같죠?”
“그렇지. 그런 마음가짐이지.”
“…사고 나면 어쩌죠?”
“보스가 차 한 대 망가뜨린다고 자르는 사람은 아니잖아. 조금 빈정거릴 뿐이지. 아, 그리고 만약 사고를 낼 예정이라면 나는 오늘 빠질게. 몸이 망가지는 건 딱 질색이라서.”
“…정말 너무하네요, 지미.”
지미가 농담이라며 하하 웃었다. 조슈아가 핸드폰을 한번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어야 했는데. 핸드폰에 가 있던 시선과 생각은 지미가 던져 준 차 키의 엠블럼을 보고 싹 사라졌다. 안 그래도 하얀 조슈아의 얼굴에서 핏기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지미가 히죽 웃었다.
오 마이….
람보르기니였다.
* * *
운전 연수를 해주겠다던 지미는 정말로 빠져 버렸다. 비서실의 최고 실세 에밀리가 브랜드를 돌며 룩북과 협찬 샘플을 받아다 달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퀵보다 더 빠른 지미를 보면 가끔 그가 했다는 운동이 카레이싱이 아닐까 했지만, 지미의 사진이 떡하니 붙은 고교 미식축구 대회 기사들을 보았으니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슈퍼 카를 본 사람들의 친절 때문인지 조슈아는 조금 떨기는 했지만 무리 없이 빌의 저택에 다다랐다. ‘이 비싼 뉴욕, 그것도 맨해튼 한복판에 정원까지 갖춘 2층짜리 대저택이 몇 채나 있을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는 몰랐다. 세상에는 조슈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부자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으리으리한 저택이 즐비한 피프티 스트리트 가장 안쪽, 빌의 저택 앞에서 조슈아는 벨을 눌렀다. 이윽고 조슈아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대문이 열렸다. 조슈아는 어색하게 다시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이 조슈아에게 차를 받아서 주차를 했다.
조슈아는 미셸에게 받은 아메리카노 보온병을 꼭 잡았다. 어디에선가 튀어나올 셰퍼드 하리를 걱정하며 조심스레 걸었지만 다행히 오늘은 하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니콜라스는 이미 현관문을 연 채로 조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은 왁스를 발라 착 넘긴 니콜라스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조슈아. 오늘은 직접 운전이군요.”
“좋은 아침이에요, 니콜라스. 에밀리가 지시를 내린 탓에 지미가 다른 일을 하러 갔거든요. 보스는요?”
“도련님은 침실에 계십니다. 아직 눈도 못 뜨셨어요.”
눈도 못 뜬 채로 전화를 했군요, 하하하. 조슈아는 대꾸 대신 계단을 올랐다. 아무리 봐도 거실 천장에 걸린 화려한 샹들리에부터 고용인이 다섯 명이 넘는 규모까지, 소시민인 조슈아는 생각할 수 없는 범위였다.
빌의 침실은 2층 가장 끝에 있었다. 옅은 갈색과 베이지색으로 꾸며진 복도를 걸어 오크색의 문을 똑똑 두드렸다.
“조슈아 베넷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아직 눈도 못 떴다는 말을 떠올린 조슈아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하리가 왕, 하며 달려드는 바람에 놀란 조슈아가 뒷걸음질 쳤다.
“억….”
거짓말 조금 보태 송아지만 한 하리는 굉장히 멋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슈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송곳니를 드러낸 하리가 으르릉-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댔다. 위협하는 듯한 소리에 조슈아는 잔뜩 긴장한 채로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하하. 안녕 하리?”
“하리, 이리 와.”
빌이 목욕 가운을 걸친 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하리를 부르자 하리가 냉큼 꼬리를 흔들며 빌에게 다가갔다. 지난 밤 숙취가 심했는지 빌의 눈가가 퀭했다. 조슈아는 말없이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협탁에 놓인 머그잔에 따라 빌에게 건넸다.
“시럽 두 번 펌핑한 아메리카노입니다.”
한 손으로는 하리의 머리를 주면서 빌은 마치 약이라도 마시듯 눈가를 찌푸리며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조슈아는 눈으로 빠르게 방을 스캔했다. 역시나였다. 의외로 바른 생활 도련님인 빌의 방에서는 타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뭘 봐.”
“다른 분이 계실까 봐 잠시 경계했습니다.”
흥, 빌이 코웃음을 쳤다.
“지미는 밖에 있어?”
“지미는 다른 일 보러 갔습니다.”
“뭐? 운전 그러면 네가 했어?”
“예.”
“사고는 없었고?”
“아, 보스.”
조슈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빌이 머그컵을 내려놓고는 뒤로 몸을 젖힌 채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었다. 진갈색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느슨하게 벌어진 가운 사이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드러났다. 작년 서핑에 한창 빠졌을 때 태닝한 가슴은 섹시미를 더했지만 안타깝게도 조슈아는 빌의 섹시함에 얼굴을 붉히는 대신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태닝 숍 다시 다니시겠어요?”
“다른 말 없어? 섹시하다거나, 안기고 싶다거나?”
빌의 목소리가 낮았다. 목울대를 울리는 웃음소리는 맥주 광고처럼 나른하고 시원했다. 조슈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사내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고 싶으시다면 계속해 보시죠.”
“하여간 귀염성 없기는.”
“귀염성 있는 비서 한 명 더 구해 볼까요? 이 뉴욕에 보스 비서 자리에 원서라도 낼 수 있다면 귀염성 있는 것을 넘어서 귀엽기 위해서 다시 유치원까지 다녀올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기도 한데 말이죠.”
“한마디도 안 져 주네.”
“칭찬 감사합니다.”
당연했다. 빌 스웰딘을 서포트한 게 3년인데. 이제 구슬리는 것보다는 쪼는 게 더 적성에 잘 맞았다. 조슈아가 과장되게 묵례를 했다. 그 모습을 고까운 듯 보던 빌이 핸드폰을 검색했다. 그리고 씩 웃었다.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은 포스였지만 당한 게 많은 조슈아는 움찔했다.
“근데 아직 네가 모르는 게 있다?”
“그게 뭔데요?”
“내 비서 자리에 원서라도 내기 위해서라면 유치원에 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칼부림까지 불사하는 사람들, 그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빌이 자연스럽게 조슈아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나른한 걸음으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하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슈아가 빌이 주고 간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난주 주간지에 났던 기사였다.
[에투왈의 왕자님을 어시하기 위한 전쟁?!]
지난주, 엠배서더 자격으로 출장 갔을 때 묵은 호텔에서 빌 스웰딘의 방을 청소하기 위해 직원들이 다투던 중 결국 칼부림이 났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빌 스웰딘이 묵는 방 청소는 비서인 제 몫이었는데 말이다. 정정 기사를 내달라고 홍보실을 통해 압박을 넣었는데. 여기 있네. 기사 바로 아래에 올라온 정정기사는 빌 스웰딘의 시선을 끌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걸 정말 믿는 거야?”
조슈아가 떨떠름하게 드레스 룸 문을 바라보았다. 순진한 건지 아니면 정말 바보인 건지. 이걸 자랑이라고 내미는 제 보스의 모습에 조슈아가 결국 진한 한숨 한번 뱉었다.
“조슈아. 오늘 점심 뭐 먹을까?”
“…….”
“들려? 최고 60㎞로 달리는 조슈아 베넷?”
“…….”
“모든 사람들한테 차선을 양보하는 착한 조슈아 베….”
“보스.”
“응?”
“저, 진짜 지금 아무것도 안 들려요.”
조슈아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빌이 픽 웃었다. 그래 보이긴 했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는 앞만 응시하고 있었고 상체는 꼿꼿하게 세운 채 핸들 쪽에 바짝 붙어 있었다. 10시 10분, 운전 학원에서 가르쳐 주는 정석처럼 핸들을 쥐고 있는 손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난번에 보니까 제법 운전 하더만. 왜 그렇게 떠는 거야?”
“몰라서 물으세요? 페라리잖아요!!”
“페라리가 더 불편한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백미러로 빌을 바라보았다. 히죽 웃는 얼굴은 분명히 놀리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뭐 하러 이 불편한 조수석까지 왔겠어?”
“…저 놀리려고?”
“뭐 그 이유도 없지는 않지만.”
빌이 느릿하게 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반쯤 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와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뺨이 간질거렸다.
“운전 연수해 주는 거야.”
“보스가 직접?”
“그래. 이 내가 직접. 영광이지?”
반듯한 코끝이 끝없이 추켜 올라간 것이 한 대 톡 쳐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보육원 동생이 아니라 제 보스였다.
“네네.”
연수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다. 빌은 옆에서 어제 있었던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조슈아는 앞만 바라보며 네네, 하고 감흥 없는 대꾸만 이어 갔다.
에투왈의 앞에 페라리가 멈춘 것은 저택을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조슈아가 열어 준 문으로 나온 빌이 박수를 쳤다. 짝짝.
“20분 거리를 한 시간 만에 오다니. 역시 대단해.”
에투왈 건물 앞을 지나다니는 사원들이 키득거렸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발렛 직원에게 키를 맡겼다.
“주차까지 하고 올라오지 왜? 아하! 주차에 자신이 없,”
“없어요. 없어. 아주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좋은 말 할 때 입 좀 닥쳐요. 보스.”
조슈아가 찌릿 빌을 노려보았다. 빌이 양 손바닥을 들어 보았다. 몇 번 없는, 항복한다는 의미에 조슈아가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보스보다 저벅저벅 먼저 걸어가다가 조슈아가 걸음을 늦췄다. 자연스레 빌이 앞서 걸음을 옮겼다. 비서인 자신이 빌보다 먼저 앞서 나가는 것은 엘리베이터를 누르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가는 정도? 그 외에는 많지 않았다.
언제나 북새통인 엘리베이터였지만, 빌이 타자 엘리베이터는 텅 비었다. 조슈아는 10층 버튼을 눌렀다.
“오늘 오후 일정 브리핑하겠습니다. 각 팀 팀장들과 할 예정이었던 점심 만찬은 2시 애프터눈 티로 미뤘습니다. 3시에는 패션팀장이 다음 호 커버 모델 A컷을 들고 결재 받으러 올 예정이고 3시 반에는 홍보팀에서 광고지 구상 결재 예정입니다. 이후 4시 30분에는….”
지잉- 지잉- 핸드폰이 울었다. 브리핑 중에 핸드폰을 받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슈아는 말이 끊이지 않게 브리핑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무음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빌이 편집장실로 가는 것을 따라가면서 조슈아는 브리핑을 마무리 지었다.
“…쇼장으로 이동하신 후에 6시에 쇼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파티에 참석하시게 엘라한테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저녁에 사샤 만나려고 했는데.”
“오늘은 제니퍼 만나시는 날인데. 약속 취소할까요?”
빌이 턱을 매만졌다. 진회색 눈동자를 앞둔 눈매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세기의 계약을 앞둔 사람처럼 골똘히 고민하던 빌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둘 다 패스. 오늘은 파티에 전념해야겠어.”
“그러면 둘 다 연락하겠습니다.”
빌이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비서실의 모두가 제 업무 중이었다. 조슈아는 소리를 죽이며 자리에 앉았다. 어떤 이모티콘을 보내야 사샤와 제니퍼가 둘 다 전화하지 않고 납득할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주머니에 있던 제 핸드폰이 지잉- 다시 한번 울었다.
그러고 보니, 전화가 왔었지. 조슈아가 핸드폰을 꺼냈다. 락을 푼 조슈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고였다.
미안해요. 혹시 바쁜 업무 중이었나요? :‘-(
“하여간 귀엽긴.”
부재중 전화는 역시 에이드리언에게 온 것이었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로 나가며 메시지를 쳤다.
지금 전화 가능해요?
바로 전화가 왔다. 비서실과 편집장실 그리고 엘리베이터까지 잘 보이는 곳에서 경계하며 전화를 받았다.
- 아까 무턱대고 전화해서 미안해요. 곤란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네. 별일 없었어요. 제가 핸드폰을 조금 늦게 본 거지.”
- 다행이네요.
푹, 내쉰 한숨 소리에 귀 끝이 간지러웠다. 조슈아는 오그라드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 메시지에 답이 없어서 바쁘구나, 했어요. 점심은 먹었어요?
“이제 곧 먹으려고요.”
니콜라스가 준 빵과 과일은 간식이지 저녁이 아니었으니까.
- 그러면 안 되죠. 식사는 잘 챙겨 먹어야죠. 안 그래도 말랐는데.
“내가 마른 걸 어떻게 알아요?”
- 척 보면 척이죠.
당연하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었다.
- 그런 의미로 저녁에 맛있는 치즈버거 같이 먹으러 가고 싶은데. 오늘 시간 어때요?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건 꼭….
“꼭 데이트 신청 같은데요?”
제 입으로 말하고도 놀랐다. 전화 너머에서도 말이 없었다. 침묵이 점점 무거워지는 기분에 조슈아가 아하하, 웃었다.
“농담인데, 안 웃네요.”
- 정곡을 찔려서 못 웃은 거예요. 데이트 신청이니까.
나른한 목소리였다. 전화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하고 ‘아, 네’ 했던 것만 기억났다. 아, 에이드리언이 웃은 것도.
끊어진 전화를 보며 조슈아가 앞머리를 넘겼다. 뜨끈해진 뒷목을 한 번, 두 번 주물렀다.
“조슈아, 연애해?”
조슈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 빌이었다.
아차, 잠시 방심한 사이 편집장실에서 빌이 나오고 있었다. 조슈아의 심장이 덜컥 했다. 연애라니, 그렇게 낯간지러운 단어라니. 표정에서 웃음기를 싹 빼고 빌을 바라보았다. 빌이 미심쩍은 얼굴로 선 채 로퍼 앞코로 바닥을 콕 찍었다.
“연애라니요.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실 거면 빨리 가서 일이나 하세요.”
좋았어! 평소와 같은 대꾸였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심장 박동은 말도 안 되게 쿵쿵거렸지만.
“조슈아, 에디 올라오라고 해.”
홍보팀 팀장을 부르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스산했다. 다른 의미로 심장 떨리게 하는 포스에 조슈아가 바로 직통 전화를 붙잡았다. 전화선 너머 떨리는 에디의 목소리를 듣느라 조슈아는 깜빡하고 말았다.
빌 스웰딘, 제 보스가 얼마나 시간이 많은지, 그리고 호기심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이상하단 말이지.”
빌이 중얼거렸다. 편집장실과 비서실을 연결하는 유리창에 블라인드를 쳐둔 채 눈높이에 맞는 슬릿 하나를 비껴 올렸다. 제각기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유난히 조슈아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에디가 우는 소리를 하는 모양이었고 그런 에디를 위해 의자에 허브티까지 내민 조슈아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주 궁금했지만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에투왈의 편집장실은 비서실에서 나는 소리 한 음절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쉬움에 슬릿 사이에 눈을 가까이 대었는데, 웃기게도 딱 그 상황에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조슈아가 미간을 슬쩍 찌푸린 채 입을 크게 움직였다.
“이, 아, 에, 오? 일하세요?”
그 입모양을 따라 발음하던 빌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이미 조슈아는 다시 에디를 향해 시선을 옮긴 뒤였다.
빌이 미련 없이 슬릿에 걸친 손가락을 떼었다. 그리고 체형에 맞게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편집장 전용 의자에 몸을 파묻듯이 앉았다. 상체를 길게 늘어뜨린 채 빌이 중얼거렸다.
“…전혀 조슈아 베넷다운 행동이 아니었단 말이지.”
원래의 조슈아라면, 제 농담에도 그저 빤히 저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단정한 얼굴로 특유의 사람 열 오르게 만드는 표정을 지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겠지. 그리고 톡 쏘듯 말했을 것이다.
“연애하죠. 보스 때문에 일이랑 연애. 워라밸도 없는 악덕 보스. 그러니까 빨리 가서 결재 좀 해 주세요.”
자그마한 치와와처럼 왈왈 사람 몰아붙이며 편집장실로 저를 디밀어야 했을 조슈아는 말도 안 되게, 자리를 피했다.
빌이 고개를 돌렸다.
“어때. 나랑 똑같이 생각하지, 에밀리?”
“…제발 보스가 저랑 같은 생각을 해주셨으면 하네요. 홍보팀 모델 변경 건은 제 선에서 끝내겠습니다.”
홍보팀의 A안 때문에 들어왔다가 졸지에 10분간 말도 안 되는 보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밀리가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빌이 손을 내저으며 ‘어디 가’의 ‘어’까지 이야기하는 순간 편집장실에서 나갔다.
“하여간 다 성격 급하긴.”
에밀리나 조슈아나 제 비서실 사람들 성격이 다 어디에서 왔는지. 빌이 혀를 끌끌 찼다. 정작 에밀리나 조슈아가 듣는다면 복장 터질 만한 소리였지만 다행히도 둘은 밖에서 빌의 몫까지 일하는 중이었다.
빌이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자세히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오늘 저녁에 약속을 잡으려고 했었지.
흠.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조슈아가 만난다라. 아까 언뜻 보았던, 그 이상한 표정의 조슈아가 누군가에게 또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지어 준다라.
“속이 뒤집어지겠네.”
조슈아 베넷은 제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려도 해결할 수 있는 몇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조슈아가 연애라도 한다면 더 바빠질 것이었다. 지금처럼 제가 언제든 연락하기에 적합하지 않게.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빌의 표정에 어린아이의 심술이 어렸다 사라졌다.
“…오늘 오랜만에 회식이나 할까?”
그때였다. 요란한 기본 벨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울렸다. 심각한 고민 중 걸려온 전화에 짜증이 앞서던 빌이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잘생긴 입매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전화 너머에서 다정한 웃음소리가 햇살 입자처럼 잘게 퍼져 나왔다.
“오늘 쇼는 생략하지.”
“네?”
홍보팀이 떠난 3시 20분. 빌이 편집장실을 나오며 말했다. 얇은 자줏빛 블레이저에 커프스까지. 그대로 쇼에 간다면 바로 파파라치 A컷이 나올 정도로 세련되었지만 빌은 다른 말을 했다. 잘못 들은 줄 안 조슈아가 어리바리하게 되물었지만 빌은 대답해 줄 시간도 없는지 앞머리만 한번 매만졌다.
“짐, 그대로 퇴근하고.”
“예 알겠습니다. 보스”
“보스!”
조슈아가 빠르게 빌의 뒤를 따라갔지만 소용없었다. 긴 다리로 걸음을 옮긴 빌은 이미 엘리베이터에 탄 채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아, 언뜻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는데. 조슈아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엘리베이터가 멈춘다거나 하는 배려는 없었다.
조슈아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비서실에 돌아왔다. 엘라는 커다란 젤리를 질겅거리며 조슈아 쪽으로 다가왔다.
“보스 벌써 내려갔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느릿느릿하신 분이, 오늘 따라 엄청 빠르네요.”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설마. 사샤랑 제니퍼 둘 다 취소했는데.”
조슈아는 제가 알고 있는 빌의 약속들을 떠올렸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또 변덕인가. 조슈아가 옅은 한숨을 쉬는 사이 엘라가 새로운 젤리를 입에 넣으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아쉽네요. 오늘 쇼에 따라가고 싶었는데.”
“보스 초대장이라도 빌려줘?”
“에이. 보스한테 초대장이 어디 있어요. 저도 이제 알 건 다 알거든요?”
“뭐, 가끔 얼굴이 초대장인 경우도 있긴 하지. 그런데 오늘은 실물도 있는데.”
에밀리가 집게손가락 사이에 크림색 종이봉투 하나를 끼우고 피식 웃었다. 엘라의 눈이 커다래졌다. 봉투 가운데, 금박으로 박힌 샤넬 로고를 보고도 엘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어, 어 했다.
“정, 정말 초대장이네요?”
“그냥 초대장이 아니라 VVIP용 초대장이지. 맨 앞줄.”
“정말, 정말 저 빌려주시는 거예요?”
순진하게도 엘라가 눈을 반짝였다. 오로지 초대장만 바라보는 순수한 탐욕에 조슈아마저도 피식 웃었다.
“엘라. VVIP의 신분증 검사를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조슈아가 한마디를 하고 난 뒤에야 엘라가 덜 마른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그렇지, 참. 엘라가 중얼거렸다. 역력한 실망에 조슈아가 에밀리를 흘겨보았다. 에밀리는 언제나처럼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자, 오랜만에 칼퇴인데 엘라가 좋아하는 파파스 피자라도 갈까요?”
지미가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밝게 웃었다. 엘라가 팔을 들어 휘적휘적 흔들었다.
“찬성이요.”
“나도 찬성.”
“저는 빠집니다.”
“조슈아?”
지미는 제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약 있어요.”
“오호, 누군데요?”
“비밀이에요, 엘라.”
“수상한데, 조슈아.”
엘라가 탐정 놀이라도 하듯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조슈아는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엘라는 물론 지미까지 수상하다는 눈빛 그대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나 수상하다고 여길 시간에 창문이나 열어요. 환기 시키게.”
네네, 지미가 창가로 걸어갔다. 줄을 당겨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을 열던 지미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창문에 바짝 붙었다.
“어, 보스다.”
“그래요?”
“차는 보스 차가 아닌데?”
“뭐죠? 새로운 데이트인가요?”
엘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지미의 말을 받아쳤다. 조슈아도 피식 웃었다.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스를 단숨에 뛰어나가게 할 정도면 제법 수완 좋겠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 * *
“그러면 내일 봐요.”
“다음에는 꼭 같이 가요!”
엘라는 두 번이나 같이 가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손을 흔들었다. 에밀리와 지미, 엘라가 건널목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조슈아는 뒤돌아 걸음을 서둘렀다.
선약이 있는 것도 있는 거지만 파파스 피자는 당분간 못 가는 곳이었다. 에이드리언을 소개 받지 못한 르네가 어떻게 구슬리려 할지 몰랐다.
계절 탓인지 어두워질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날은 아직 환한 편이었다. 해의 꼬리가 저만치 기우는 것을 바라보면서 조슈아는 걸음을 늦췄다. 분수대 앞, 똑같은 약속 장소 앞에 에이드리언은 아직이었다.
“빨리 왔나?”
“네. 제가 먼저, 오고, 싶었는데.”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에이드리언은 숨이 차다는 듯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체를 살짝 숙였다가 폈다. 어깨가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것을 보자 괜히 안타까워서 조슈아가 가볍게 면박을 놓았다.
“뭐 하러 뛰어와요. 걸어오지.”
“그야, 이 시간을 기다렸으니까 그렇죠.”
에이드리언이 몸을 곧게 펴자 평소처럼 시선이 높아졌다. 녹갈색 눈이 나른하게 휘어졌다. 조슈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나도 제법 기다렸어요. 치즈버거 먹는 거.”
“아이언맨의 대단한 팬이 또 여기 있네요.”
“에이드리언도요?”
“아주요. 아주 팬이죠.”
또 공통점 하나 발견했다. 조슈아가 신기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말할 것도 없이 거기네요.”
어린아이를 동반한 손님과 십대가 주를 이루는 햄버거 가게 안에서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은 두 남자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것도 스크린에서 금방 빠져나온 배우 같은 남자라면 더욱 더.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갈색 플라스틱 쟁반 위에 있는 오늘의 만찬이었다. 치즈 소스가 눅진하게 뿌려진 감자튀김과 뜨끈한 김이 오르는 해시 브라운, 통깨가 뿌려진 번 아래 녹은 치즈와 두 장의 패티, 양상추와 양파. 탄산이 톡톡 터지는 콜라 라지 사이즈와 비스킷까지 더하면 만찬 완성이었다.
조슈아는 햄버거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치즈와 패티의 진한 맛이 혀끝을 타고 목 너머로 넘어갔다.
“아이언맨 말이에요. 이 맛이 안 날 정도면 정말 암담했겠어요.”
“이렇게 뚜렷한 맛이 말이죠.”
에이드리언은 역시 뭘 좀 안다. 조슈아가 포장지를 조금 더 접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번져서 다음에 DVD를 함께 보자는 이야기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에이드리언의 취미가 영화 감상이라 집에 블루레이 플레이어까지 있단다. 얼마나 좋은 이웃인가.
“에이드리언, 정말 좋은 이웃이네요.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요.”
조슈아가 눈을 반짝였다. 아주 잠깐, 에이드리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잘못 봤나? 하던 찰나였다. 에이드리언이 웃었다.
“그거 참, 제가 바라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네요.”
무슨 말인지 몰라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언이 쟁반에 있는 비스킷을 조슈아 쪽으로 더 밀어 주었다.
“보니까 더 말랐어요. 얼른 먹어요.”
“에이드리언도 말랐는데.”
“난 튼튼하잖아요. 어서요.”
“그런데 여기도 장난감 안 주네요. 요즘 장난감 안 주는 매장이 많나 봐요. 다른 매장도 그러더니.”
“몰랐어요? 이제 햄버거 먹으면 장난감 없는 거?”
다 식은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먹으며 조슈아가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에이드리언이 빙그레 웃었다. 그 눈빛에는 안 속는다는 듯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농담 아닌데. 진짜예요. 플라스틱 장난감 대신 책이나 과일이나 다른 걸 준다더라고요.”
“정말요?”
“뭘 그렇게 실망해요. 다 큰 어른이.”
“어렸을 때 못 모아서 그런가. 아쉽네요.”
김 샌 듯 낮은 어조로 말하며 에이드리언이 불퉁하게 입술을 톡 내밀었다. 빨간 입술을 보던 조슈아는 문득 지난번 보육원에 갔을 때 징징대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형, 이제 장난감 없어. 햄버거 안 먹을 거야.”
제가 사 간 햄버거를 야무지게 먹으면서도 앞으로는 햄버거는 안 먹겠다고 말하던 다섯, 여섯 살 꼬마아이들. 그래 놓고 저녁에 콩 수프가 나오니 햄버거 먹겠다며 말을 바꾼 꼬마 악동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웃어요. 설마 놀리는 건 아니죠?”
“별건 아니고. 제가 아는 다섯 살 꼬마랑 에이드리언이랑 비슷하다는 생각?”
“너무하네요.”
에이드리언이 낮게 한숨을 쉬며 조슈아를 흘겨보았다. 흘겨보는 눈매가 둥글어서인지 조슈아는 계속 웃음이 났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갈 때마다 쑥쑥 크는 꼬마들. ‘형, 한 밤 자고 또 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잔상을 에이드리언 위로 씌워 보았다.
분명히 어렸을 때도 이렇게 예뻤겠지. 화려한 금발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다섯 살 어린 아이를 떠올리기는 쉬웠다. 사과처럼 붉은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고 커다란 녹갈색 눈동자에 서러움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서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쓰는 어린 에이드리언.
“에이드리언은 분명 어렸을 때도 천사 같았을 거예요.”
“어렸을 때‘도’면, 지금 제가 조슈아 눈에 천사처럼 보인다는 말이겠네요?”
아, 실수. 조슈아는 웃던 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들어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그의 체격에 비해 더 작아 보이는 철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길고 우아한 눈매 속 녹갈색 눈동자에 비치는 것이 장난기인지, 아니면 수줍음인지 분간할 수도 없었다.
다 큰 성인을 천사처럼 생각했다는 걸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호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인지. 부끄러워할 게 너무 많아서인지 조슈아의 입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움직였다.
“그렇게 되네요? 축하해요 에이드리언. 제 눈에 천사처럼 보인 사람, 몇 없거든요.”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이 웃을 줄 알았다. 배시시 웃으면서 ‘그래요? 그것 참 괜찮네요’라고 맞받아치고, 곧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주말에는 뭐해요?’ 같은 소소한 일상 이야기나 재수 없는 상사의 이야기―조슈아는 보스 이야기를 조금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면 새로 발견한 저녁 식사하기에 좋은 레스토랑 같은 주제들.
그 수많은 보기들 중에 에이드리언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은 없었다. 그는 고운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잘생긴 눈썹을 추켜올렸다.
“있었어요?”
“뭐, 뭐가요?”
“나 말고, 조슈아 눈에 천사처럼 보인 사람이요.”
“그야, 있었죠?”
당황해서인지 말끝이 올라갔다. 대답한 뒤에 곱씹어 보니 웃긴 말이었다. 지금 그러니까, 제가 천사 같다고 했던 사람들을 묻느라 저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그러고 보니 뺨이 불퉁했다. 조슈아가 생각한 다섯 살짜리 에이드리언처럼.
조슈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잠시 움찔하더니 고개를 픽 돌렸다.
“궁금해요?”
“제가 왜요?”
궁금하다고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아니라고 버팅기면서도 조슈아 쪽을 바라보던 에이드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다시 딴 곳 보는 척을 해도 조슈아 눈에는 다 걸렸다. 보육원 시절부터 다져진 떼쟁이 돌봄 스킬에 더불어 취업 후에는 빌 스웰딘 세컨드 비서 생활로 ‘떼쟁이’들에게는 이미 면역이 생길 대로 생긴 터였다.
“아니, 뭐. 궁금하면 이야기해 주려고 했죠. 에이드리언 말고도 몇 있어서 말이죠. 아니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래요?”
“…많이는 아닌데 조금은 궁금하네요.”
관심 없다는 듯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니 또 이렇게 궁금하다고 말한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면서 손가락을 폈다.
“음, 일단 매기랑 이든, 티나, 제이크, 조시. 아, 생각보다 많네요.”
“정말, 생각보다 많네요.”
금세 표정이 심각해진다. 조슈아가 능청스레 한마디 더 했다.
“다섯 살 아이들만 해도 스무 명이 넘으니까 여섯 살이랑 일곱 살까지는 안 넘어가도 되겠죠?”
“다섯… 살이요?”
“그럼요. 다 큰 성인한테 하면 음, 진짜 없는 것 같은데.”
기껏해야 면접 날 보았던 보스? 그때는 정말 천사인 줄 알았지. 에투왈의 교정 교열자 면접에서 탈락하고 집에 돌아가던 길에 갑자기 비서는 어떠냐고 제안 받고 바로 면접을 보았으니까. 면접을 제안한 사람이 퍼스트 비서인 에밀리 스콧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다.
슈트 잘 갖춰 입고 지루하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올라온 서류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바라보았을 때, ‘와,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을까’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물론 돈도 없는 찰나에 보스를 봤으니 세상 그만큼 잘나 보이는 사람이 또 있었을까. 물론 돈이 주는 후광을 배제하더라도 보스가 잘난 것에는 이견이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보스도 천사 같았다고 말한다면 저 남자, 또 입술을 비죽이며 투정하려나? 조슈아가 힐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인상을 찌푸렸던 조금 전과 달리 자신은 인상 쓸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조슈아는 ‘천사 같은 보스’라는 말을 목 뒤로 삼켰다.
“분위기는 다 잡은 거예요?”
“음, 뭐가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콜라를 마시던 에이드리언이 금세 입에서 잔을 떼었다.
“김이 다 빠졌네요.”
그래 놓고도 기분 좋다는 듯 눈을 휘며 헤헤 웃었다. 조슈아는 따라 웃다가 순간 호흡을 멈췄다. 그리고 내쉬는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들로 가득 찼다.
언제 이렇게 들어온 거지?
조슈아의 삶은 제법 규칙적이었다. 평일에는 출근을 하고, 주말에는 쉬었다. 가끔 주말에도 일이 생길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극히 드문 편이었다. 일은 점점 익숙해졌고 퇴근하고 시간이 맞을 때는 동료들과 밥을 먹었다. 한 달에 한 번, 바쁘다면 두 달에 한 번 보육원을 찾아갔고 오전 내내 아이들과 놀다가 점심으로는 햄버거나 피자를 먹고 집에 돌아왔다. 가끔 친구를 보는 일도 있었다.
제법 조슈아 자신이 바라던 어른의 삶이었다. 독립된 방과 퇴근하고 즐기는 맥주 한 잔. 혼자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다는 믿음.
하지만 아주 가끔, 헛헛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속이 허했고, 고요한 여유가 적막하게 느껴져 외로웠다. 누가 있었으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삶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옆집 남자는 아주 쉽게 조슈아의 삶에 끼어들었다. 그것도 조슈아의 일상을 그대로 지켜 주면서.
“…신기하네요.”
“김빠진 게요?”
에이드리언이 잔을 흔들어 보였다. 투명한 플라스틱 잔에서 검은색 콜라가 출렁거렸다.
“벌써 주말이라는 거요. 하루하루는 바쁜데 일주일 돌이켜 보면 훅 가네요.”
“그러네요.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요. 이 속도로 가다가는 금방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겠어요.”
에이드리언이 손가락 네 개를 편 채 가볍게 휘저었다. 네 달 뒤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건지도 덧붙여 물었다. 조슈아의 계획은 뻔했다.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 봉사자를 도와 루돌프 역할을 맡는 것. 이제까지 쭉 그래 왔으니까.
조슈아의 계획을 들은 에이드리언이 비스듬하게 입술을 올렸다.
“크리스마스 때 하루 종일 루돌프 하는 거예요?”
“뭐, 별일 없으면 대개요. 이브 때부터 선물 포장하고 밤에 놔주고.”
“산타클로스들은 정말로 콧수염 붙이고 빨간 산타 옷도 입나요?”
“그럼요.”
조슈아가 자부심 있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조슈아가 어렸을 때는 안 그랬지만, 몇 년 전부터는 빨간 산타 옷도 입는다. 비록 밤에 머리맡에 선물을 놔주는 역할이지만, 요즘 어린아이들은 일부러 밤에 자는 척을 하며 산타를 볼 기회만 노리기 때문에 꿈과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서 말이다. 요의를 느끼고 화장실에 가는 아이들이 산타를 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고.
“그러면 루돌프는 뭘 입나요?”
“루돌프는 그냥 옷 입죠.”
선물 자루만 들고 뒤에 서성이는 게 다니까 다른 옷을 입을 일도 없다.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지라 조슈아가 웃었다. 어쩐지 에이드리언은 열을 올렸다.
“아니죠. 루돌프도 제대로 된 옷을 입어야죠. 빨간 코도 달고 머리에 뿔도 달고.”
“말이 루돌프지 선물 도우미예요. 특히나 제 얼굴 모르는 애는 없거든요. 예전에는 썰매도 만들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산타도 차랑 비행기 타고 다니는 줄 아니까 썰매도 필요 없더라고요.”
조슈아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크리스마스 때 정말 근사했는데. 조슈아가 볼이 발갛게 물들 때까지 어린 시절 봤던 산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형적인 산타였다. 배가 부르고 눈처럼 하얀 수염과 머리카락이 있고, 보육원 앞에는 타고 온 썰매가 있던 산타. 물론 루돌프는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조슈아는 말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보육원이라는 단어는 뺐다.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에이드리언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크리스마스 때 조슈아 따라서 같이 루돌프 해도 될까요?”
“사람이 많으면 편하긴 한데, 크리스마스에 괜찮겠어요? 다른 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인데?”
조슈아가 놀리듯 말했다. 에이드리언이 무해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좋아요.”
“제가 안 괜찮아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나중에 정말 하고 싶을 때 이야기해 줘요.”
조슈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 외모에, 저 매너에, 분명히 크리스마스를 노리고 에이드리언에게 다가가는 사람이 있을 거다. 만약 잘 돼서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위해 루돌프 역에서 빠져야 한다면 착해 빠진 에이드리언이 제대로 이야기나 할 수 있을까.
아, 그런데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조슈아가 쿵 내려앉은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이게 다 에이드리언 탓이다. 아까 데이트니 뭐니 해서 아주 조금, 떨렸던 게 분명하다.
조슈아가 밉지 않게 에이드리언을 흘겨보았다. 떨떠름하게 알겠다고 대답하던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눈매를 보고 당황한 듯 왜 그러냐고 물었다. 조슈아는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몰라요.”
조슈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쟁반을 들고 먼저 걸어가는 사이, 조슈아는 보지 못했다. 에이드리언의 눈매가 가늘어진 것도, 그 가늘어진 눈매 속 녹갈색 눈동자가 배고픈 짐승처럼 짙게 번들거렸던 것도.
조슈아가 뒤를 돌아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을 때는 모두 사라졌으니까.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어때요?”
“좋아요!”
그저 눈을 접어 크림처럼 달콤하고 녹아드는 웃음을 짓는 평소의 에이드리언만 남았을 뿐이었다.
“주말에는 보통 뭐해요?”
오늘 조슈아가 고른 아이스크림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초콜릿 시럽을 잔뜩 뿌린 뒤 잘게 자른 딸기를 토핑으로 올린 달콤한 아이스크림.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종이 스푼으로 떠먹던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말이라고 따로 별건 없었다.
“집에서 쉬거나 맛있는 걸 먹으러 나가거나. 뭐 그렇죠? 에이드리언은요?”
“무언가를 모아 보려고요.”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장난감 때문에 오기가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아까 장난감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에이드리언은 무척이나 진지했으니까. 조슈아는 제 집 어딘가에 있을 커다랗고 튼튼한 종이 박스를 떠올렸다.
‘미련덩어리’라고 별명 붙인 박스는 버리기에는 아쉽지만 쓸 곳 없는 물건들로 채웠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지 않다가 해묵은 미련들이 사라지면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박스 안에 있다고 해서 전체 다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열면 또 미련이 남아서 계속 상자 안에 넣어 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 버리지 못한 물건들 중에는, 하이스쿨 시절에 만들었던 문집과 어린 시절에 모았던 사진엽서들 그리고 일기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 구석에 놓았던 햄버거집의 고질라 장난감.
“…햄버거집 장난감 가지고 싶은 거면, 하나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말을 하다가 조슈아가 아이스크림을 들지 않은 손을 내밀어 서둘러 저었다.
“물론, 없을 수도 있어요. 어디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걸 보면 굉장히 소중한 물건인가 봐요.”
“소중한 물건이라기보다는 그냥 그런 날에도 안 잃어버린 게 신기해서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런 날이요?”
아, 실수했다. 에이드리언이 궁금하다는 듯 조슈아와 눈을 맞춰 왔다. 조슈아는 그냥 씩 웃었다.
“그런 날 있잖아요. 엄청 정신없는 날. 나중에 보니까 손에 그 장난감 하나만 들려 있더라고요.”
“신기한 일이네요.”
에이드리언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넘겼다. 조슈아는 웃음을 머금은 입가가 살짝 떠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11년 전, 그날만 생각하면 그랬다. 여기저기에서 소리를 지르고, 911을 부르라는 고함이 들려오고,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부딪히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차량 쪽으로 달려오는 사람들과 사거리, 그 가운데에 있는 추돌된 차량 세 대.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던 차량과 직진을 하던 차량이 부딪혔던 사고였다.
조슈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시야에 점점 가까워지던 사고 차량들. 왜 하필 제가 그 사고 차량에 근접하게 다가갔는지는 모르겠다. 깜빡이는 초록불을 보며 조금만 더 빠르게 걸어갔어도 3중 추돌 사고에 제가 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명히 차량 내부를 봤던 기억은 있는데 그때부터의 기억은 흐릿했다. 그저, 보육원 제 방에 돌아왔을 때 선생님들이 놀랄 정도로 식은땀이 많이 나 있었고, 손에는 고질라 장난감이 들려 있었다.
원래는 햄버거를 먹고 돌아오자마자 아무나한테 주려고 했던 장난감. 그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앓고 나서는 버리지도 그렇다고 눈에 띄는 곳에 놓지도 못했다. ‘필요한 누군가한테 주는 게 나을까’ 하다가 혹시나 재수 없는 물건일까 염려했던 게 생각났다. 아, 그러고 보니 한마디 더 해야 했다.
“그쵸? 그러니 주지는 않고, 찾으면 보여만 줄게요.”
말하고 나니 뭔가 이상했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꼭 제 물건을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재수 없는 물건이라서 못 주겠다는 생각을 티내지 않으려고 했던 게 오히려 독이 된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언이 풋, 웃었다. 눈치가 있는지 조슈아를 힐끗 쳐다보고는 웃음을 지우려 노력하는 기미가 보였지만 웃음이 쏟아지는 모양인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시원스레 터지는 웃음을 뒤로하고 조슈아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괜히 장난감 이야기를 꺼냈다가 이게 뭐람. 뒤에서 타닥, 바닥을 딛고 서둘러 뛰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조슈아는 볼에 차오르는 바람을 빼고는 부러 에이드리언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들린 컵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연신 퍼먹으면서 말이다.
“같이 가요, 조슈아. 안 웃을게요.”
“이미 웃을 대로 웃어 놓고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나간 말이 더 투정 같아서 조슈아는 입을 다물었다. 보스 앞에서는 깐깐하게 재고 따지던 말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보스한테 다 써 버린 걸까. 그러면 이건 다 보스 탓이다.
“정말로. 약속이요.”
에이드리언이 어설프게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조슈아는 잠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다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처음이니까 한번 믿어 볼게요.”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에이드리언은 받아 줘서 좋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뭘 모으려고요?”
“글쎄요. 그게 고민이네요. 뭘 모아 볼까요?”
그걸 왜 나한테…. 에이드리언의 녹갈색 눈동자가 조금만 덜 다정했어도, 이야기의 열기에 달아오른 복숭앗빛 뺨이 조금만 덜 애틋했어도, 화사한 미모만 조금만 덜 화려했어도 아직 남아 있는 투정으로 톡 쏘아 버렸을 텐데. 하필 가로등의 조명 아래 눈이 부시게 빛나는 남자를 마주한 조슈아는 얼결에 대답했다.
“어, 음. 같이 고민해 드릴까요?”
에이드리언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어쩐지 아이스크림이 너무 달았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아이스크림을 먹는 조슈아의 귀 끝이 조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입이 문제야.”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에서 환풍기를 튼 조슈아가 수건으로 탁탁, 머리를 털며 걸어 나왔다. 매트리스에 앉은 채 창을 바라보자 짙은 남빛으로 젖어든 하늘 때문에 불을 켠 제 방이 반사되어 보였다. 거울을 보듯 새빨간 머리카락을 툭툭 쳐올린 조슈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의 주말처럼 늘어져라 낮잠이나 자다가 일어나면 제이콥의 식당에나 가려고 했던 제 주말 루틴 위로 퀘스트가 끼어들었다. 옆집 남자가 무엇을 모을지 도와주는 것이었다.
특정한 걸 모으는 것을 도와준다고 해도 웃기는 일이지만 다 큰 성인이 무엇을 모을지 결정하는 것을 도와준다니. 다섯 살 매기가 코웃음 칠 일이었다. 지난번에 가니 양갈래는 유치하다며 방울 머리끈을 죄다 다른 친구한테 줬다고 하던데, 매기라면 분명히 한쪽 입꼬리만 위로 올려서 웃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짧은 혀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다 큰 어른이 마리야.”
가끔 제가 약속 시간보다 늦게 가는 날이면 날아드는 비수처럼 꽂히는 말이 생각나서 조슈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탁, 탁. 환한 도시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날벌레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조슈아는 창문의 방충망에 달라붙는 벌레들을 보다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제법 축축해진 수건을 대강 널어놓고, 조슈아가 옷장 아래에서 ‘미련덩어리’를 끌어당겼다. 묵직한 무게감은 언제나 제 미련들을 상기시켰다.
오랜만에 여는 뚜껑이었다. 그간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쓰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물건들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색색이 예쁜 구슬들과 다 읽고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옛 냄새 머금은 책들. 그리고 비닐로 둘러싸인 여러 장식품들 아래 있었다.
“있네.”
어쩐지 제 목소리가 잠긴 느낌이 나서, 조슈아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고질라 장난감은 오래된 느낌이 나긴 하지만 여전히 제법 괜찮은 플라스틱 장난감이었다. 누군가한테 물려줘도 잘 갖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이걸 어떻게 할까나. 방에 장식하기는 꺼림칙했고 버리자니 마음에 걸리고, 그렇다고 정말 누군가에게 주자니 재수 없을까 걱정되고. 휴. 입술 새로 나가는 한숨이 묵직했다. 결국 조슈아는 다시 물건을 박스 안에 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내일 맛있는 점심을 기대할게요. :)
조그마한 심술이었다. 이 작은 심술 하나로 자신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진 것을, 정작 조슈아는 깨닫지 못했다.
그 덕분에 하나를 놓쳤다. 스튜디오의 허술한 방음을. 옆집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어왔다는 것.
* * *
어두운 차 안에서 마크 웹디즈드는 보닛 끝을 바라보았다. 엠블럼이 없이 매끄러운 보닛은 에이드리언의 지시로 산 무난하고 평범한, 뉴욕의 어느 거리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차량이었다. 그가 평소에 타는 고급 세단의 승차감이나 잘빠진 외관과는 거리가 먼 차. 하지만 마크는 이 차 값의 열 배가 넘는 돈을 들여 안전성을 극대화시켰다. 에이드리언이 타는 차는 무엇보다 안전해야 했으니까.
마크는 백미러로 뒷좌석에 앉은 에이드리언을 힐끗 쳐다보았다. 차를 탄 직후 에이드리언은 그가 새로 거주하기 시작한 스튜디오 건물이 잘 보이는 장소로 갈 것을 지시했다. 캄캄한 밤 아래, 적당히 때가 탄 건물 외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은 어느 순간 핸드폰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크는 에이드리언의 손가락이 멈추는 순간을 살폈다.
“…방은 어떠십니까?”
“재미있는 공간이더라고요. 언뜻 옆집 소리도 들리고.”
에이드리언이 가볍게 대답했다. 실제로 에이드리언에게 있어 508호는 방으로서의 가치보다는 하나의 연결고리였다. 조슈아 베넷과의 접점이 생기게 하는 공간.
“그가 다시 뉴욕으로 왔더라고요.”
한숨처럼 흩어지는 말에 마크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에이드리언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조슈아에게서 온 메시지 아래, 그의 이름으로 온 메시지가 있었다.
이든!!! 나 왔다!! 빨리빨리 연락해!!!
붙어 있는 느낌표를 보자 느낌표의 개수만큼이나 활달한 그가 떠올랐다. 에이드리언의 눈매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가끔 나는 궁금해요.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무엇이 되든 그렌트 씨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갖게 되실 겁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철강으로 시작해 호텔·부동산·석유·군수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의 금융을 움직이는 미다스의 손인 헤럴드 그렌트의 손자이자 정계에 뿌리를 내린 데런 가를 외가로 둔 남자. 공식적인 후계자를 두지 않는 그렌트 가에서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내세우는 에이드리언은 엄청난 감각과 배짱 있는 투자 그리고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의 어마어마한 운으로 현재 있는 부동산과 석유, 군수를 비롯해 제약과 문화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성공시켜 무시무시한 속도로 확장시켰다. 눈 깜짝할 때마다 재산이 산처럼 쌓여 가는 남자.
완벽하게 아름다운 외모와 어마어마한 배경. 그 배경까지도 아우르는 능력까지. 세상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원해서 안 될 것은 없었다.
“정답이네요, 마크.”
바로 맞혔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