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옆집 남자의 수집 (3/22)

#2. 옆집 남자의 수집

좋은 꿈 꿨어요? 일어나면 우리 집으로 와요. :) 절대 서두르지 말고요!

“이모티콘을 좋아하는 편인가?”

조슈아가 혼잣말을 하며 메시지 속 이모티콘을 톡톡 건드렸다.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을 보고 있자니 봄꽃이 만개한 것처럼 화사하게 웃는 옆집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반쯤 걷어 둔 블라인드로 햇살이 비쳐 왔다. 잘 개켜 둔 이불 위로 쏟아지는 햇살 그림자를 바라보던 조슈아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시간은 AM. 10:20 메시지가 온 시간은 AM. 09:00 부지런한 새 나라의 어린이 같은 정확한 시간에 조슈아는 입가에 웃음을 그렸다.

일찍 일어나려고 했건만, 주말 습관이 어디 안 간다고 눈을 뜨니 9시 50분이었다. 정신을 차리게 씻은 뒤 의자에 앉아 우유를 마시며 메시지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절대’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봐도 부랴부랴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만날 시간을 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얄미운 마음으로 보냈던 점심 기대한다는 메시지에 꼭 노력하겠다는, 성실한 답장이 와서 웃으면서 잠들었었지.

옷을 갈아입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려다 멈칫 했다. 운동화를 신을까, 아니면 슬리퍼를 신을까. 겨우 옆집인데 왜 이런 걸 고민할까,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도 그랬다. 티셔츠는 회색 후드로 잘만 고르더니 바지는 트레이닝 바지를 입을까 청바지를 입을까 잔뜩 고민했다. 결국,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바지까지 갖춰 입었지만.

그래도 옆집에 가는데 운동화는 오버였다. 여차하면 다시 제 집에 와서 운동화로 갈아 신으면 되고. 그렇게 따지만 청바지 자체도 웃겼지만, 처음 에이드리언 집에 가는 것이니 넘어가기로 했다.

슬리퍼를 신고, 문을 닫고, 508호 앞에 선 조슈아가 벨을 눌렀다. 딩동- 고르게 퍼지는 벨소리가 어쩐지 제 집과 다른 것 같았다. 조슈아가 문 앞에서 조금 비켜섰다.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화사한 얼굴이 조슈아를 반겼다.

“어서 와요. 잘 잤어요?”

다정하게 문을 열어 준 에이드리언은 그 상태로 비켜서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조슈아가 멈칫했다. 무슨 의미지? 들어오라는 것일까 말라는 것일까. 멀뚱히 에이드리언을 바라보고 있자니 에이드리언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 들어와요?”

“그, 에이드리언이 안 비켜 줘서요.”

“아, 문 잡아 주는 건데.”

앞 사람이 문을 잡아 준다든가 먼저 지나가라고 반대편 사람이 문을 잡아 주는 경우는 심심찮게 봤다. 심지어 그 빌 스웰딘도 여자 친구들과 만나서는 문을 잡고 먼저 들어가게 해줬다. 하지만 그런 매너를 같은 남자한테 받는 것은 조슈아에겐 생각도 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조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럼, 한마디 덧붙이면서 508호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이 좁기 때문에 잠시 에이드리언 옆으로 바짝 붙었을 때, 에이드리언에게서 특유의 시원하고 묵직한 향이 났다.

조슈아가 거실에 서서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제 방의 구조와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모델하우스 같다는 정도? 가구며 장식장 위에 올려진 책이며 사용감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 이사 오면서 모든 물건을 새로 산 모양이었다. 내년 여름 장마가 지나면 습기에 망가질 수도 있을 텐데.

조슈아는 첫 이사를 왔던 3년 전 여름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멋모르고 출장―가동을 멈춘 콘돔 공장을 다시 재가동시키기 위해 조슈아는 그해 여름을 다 보냈다. 물론 빌 스웰딘은 그사이 계절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취향 또한 바꿨다―을 다녀왔을 때, 곰팡이가 피어난 벽지를 따라 옷장의 시트지가 다 일어났다.

내년 여름에 환기 잘 시키라고 이야기해 줘야지. 꼼꼼히 생각을 정리하던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웃긴 일이었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내년 일을 생각하고 있다니. 그것도 언제 이사 갈지 모르는 이웃집 사이에.

문을 닫고 들어온 에이드리언이 주방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점심 말고 저녁을 기대해 줘요. 점심은 정말 간단하니까.”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언뜻 보니 빵과 과일, 달걀 그리고 치즈와 소시지, 베이컨이었다. 아침 겸 점심으로 먹기에 딱 좋은 메뉴 선정이었다.

“간단하다고 하니 시리얼인 줄 알았는데, 엄청 성대하네요. 뭐 도와줄 건 없어요?”

“있어요. 소파에 앉아서 내가 뭘 모으면 좋을지 고민해 주기!”

아예 오지도 말라는 소리에 조슈아가 음, 아쉽다는 듯 주방을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개까지 저은 에이드리언이 팬에 기름을 두르는 게 보였다.

“자주 해 먹어요?”

“음,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는 아니고요. 가끔? 이 칼은 손에 안 익거든요.”

에이드리언이 식칼을 들어 오렌지를 반토막 내며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오렌지를 자르는 솜씨는 엉성했다. 조슈아는 잠시 TV 쪽을 보다가 툭 내뱉었다.

“나는 그날 분리수거도 에이드리언한테 넘겼는데. 에이드리언은 하나도 나한테 안 넘겨주네요.”

부러 들으라는 말에도 에이드리언은 꼼짝하지 않았다. 어쩌면 오렌지를 자르는 것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조슈아는 천천히 주방으로 갔다. 오렌지를 다 자른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발견하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기 안 있고 여길 왔어요.”

“같이 하고 싶어서요. 빵은 그대로 구울 거예요?”

에이드리언이 잠시 낮게 한숨을 쉬었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두 눈만 깜빡였다. 보스에게는 제법 잘 먹히는 방법인데 에이드리언에게도 먹히려나? 안 먹히려나?

“주방 위험하니까, 조심해야 돼요. 알겠죠?”

꼭 다섯 살 어린아이한테 주의를 주는 것 같은 말투에 조슈아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에이드리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참을 수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는 듯 버터를 내밀고도 힐끗거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어린 시절부터 아침을 차리는 것을 도왔다. 보육원의 아침은 바빴으니까.

달궈진 팬 위로 버터 조각을 올리자 금세 노란색 버터가 녹아내렸다. 팬을 들어 굴리자 바닥에 골고루 버터가 묻었다. 잘린 식빵은 우유나 달걀로 적시지 않은 채 팬으로 직행했다.

“빵 한 장, 아니면 두 장이요?”

“한 장이요. 조슈아는요?”

“저도 한 장이요.”

조슈아가 두 장만 팬에 얹었다. 아침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으니 베이컨에 달걀까지 먹으면 충분할 터였다. 빵을 굽고 소시지와 베이컨을 굽고, 달걀을 프라이하려던 찰나였다.

“요리 되게 잘하네요?”

에이드리언이 불쑥 뒤로 다가왔다. 과일을 다 자른 모양이었다. 고소한 버터 냄새 사이로도 훅 끼치는 시원한 체향에 조슈아가 멈칫했다. 그리고 달걀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원래 좀 해요.”

에이드리언이 시원스레 웃었다. 세상에 달걀 프라이만큼 쉬운 요리가 있을까. 버터를 바르고 달궈진 팬에 달걀을 깨고 잠시 기다리면 완성되는데. 하지만 이 쉽고 무난한 요리가 어색했다. 제 뒤를 바라보는 사람 탓일까. 치익- 익어 가는 달걀을 바라보던 찰나였다.

“조심….”

“아, 뜨거.”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팔을 붙잡았지만 내려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불 앞에 있을 때는 다른 생각하는 법이 없었는데 오늘 실수를 하고 말았다. 멍하니 내려간 손날이 잠시 팬에 닿았다. 가볍게 데인 정도였는데 손날을 볼 새도 없이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끌어다 싱크대 앞에 세웠다. 손 위로 찬물이 쏟아졌다.

“안 아파요? 따끔거리거나 열기는요?”

“아주 잠시라 괜찮아요. 정말이요. 그나저나 달걀이 더 급해 보이는데.”

조슈아가 물 묻은 제 손을 들어 보였다. 정말이었다. 아주 잠깐 닿은 거라 화상이라는 거창한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 달걀. 인덕션 전원 버튼을 누른 에이드리언이 다시 조슈아의 손을 잡고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데인 곳보다 제 손을 감싼 타인의 온기가 더 뜨거웠다. 손을 빼고 싶어서 움찔거렸다.

“가만있어요.”

엄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손에서 힘을 뺐다. 에이드리언이 이끄는 대로 주방을 나섰다. 소파에 앉히는 모습에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심각한 분위기라 참았다. 구급함을 가져온 에이드리언이 소독약에 연고에 밴드까지 붙여 주었다. 고작 해야 개미 오줌만 한 상처에 손바닥을 휘감는 밴드가 붙어서 조슈아가 손바닥을 회회 저어 보았다.

“미안해요. 괜히 요리해서.”

에이드리언이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지 입술이 우물대다가 끝났다. 조슈아는 괜히 더 밝게 웃었다.

“내가 한눈 판 게 잘못이죠.”

“그래도.”

“그것보다 나 배고픈데.”

조슈아가 재촉을 하고 나서야 에이드리언이 미련 남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따끔한 것보다 따뜻한 게 더 남아 있는 손을 바라보다가 조슈아도 주방으로 향하려 했지만, 앞으로 주방 출입 금지라는 말에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끝이 바삭바삭한 달걀 프라이와 부드러운 식빵, 고소한 풍미가 가득한 소시지와 베이컨에 곁들여 먹는 과일까지. 간단한 식사라고 하기엔 어딘지 풍족한 식사는 꽤나 즐거웠다. 간혹 가다 에이드리언이 상처를 바라보며 미안한 기색을 비치려 할 때 말을 돌리기 위해 헛소리를 해야 했던 것을 제외한다면.

설거지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에 어차피 할 생각도 없었다며 낼름 받아치자 에이드리언이 접시를 싱크대에 넣은 뒤 조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 난 뭘 모으면 좋을까요, 조슈아?”

“나한테 묻지 마요. 난 같이 고민해 주는 것뿐이니까.”

“냉정하네요.”

“세상 혼자 사는 곳이잖아요.”

너스레를 떠는 농담에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조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이드리언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웃인 만큼 같이 고민하러 나가죠.”

“나가요, 우리?”

“밖에 나가서 보이는 것들 중에서 한번 생각해 봐요. 책이든 엽서든 사진이든 하다못해 네잎클로버라도.”

“이건 어때요?”

크림빛 조명 아래 에이드리언은 기대 어린 얼굴로 옷걸이를 내밀었다. 옷걸이에 걸린 옷은 캐러멜빛 니트다. 제법 촉감이 좋은 뜨개실로 굵게 떠진 니트는 쌀쌀한 요즘 날씨에 제격일 것이다. 매장 앞에 있는 마네킹에게도 걸린 만큼 옷의 인기도 높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에게는 너무 작은 사이즈 같은데.”

“나보다는 조슈아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그렇죠?”

“정말요. 그리고 그쪽 분은 이런 셔츠가,”

“제 거는 나중에 볼게요. 조슈아, 이거 한번 입어 보는 게 어때요?”

얼굴을 붉히며 에이드리언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갈색 머리 점원이 스트라이프 셔츠를 들고 있던 팔을 축 늘어뜨렸다. 바닥에 소매가 끌리는 것 같은데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닥에 끌리는 옷보다 급한 건 앞에 있는 에이드리언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지금 녹갈색 눈을 반짝이며 니트를 내밀 때가 아니었다. 조슈아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에이드리언, 여기는 왜 왔을까요?”

“조슈아가 오자고 해서?”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려한 금발이 귀 끝을 스치듯 찰랑였다. 조슈아는 용암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애써 삼키며 웃었다.

“내가 여길 왜 오자고 했을까요?”

어린아이 떠먹여 주듯 하나하나 묻자 그제야 에이드리언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좀 제대로 된 대답이,

“가을 옷이 필요해서?”

…나오지 않았다. 참을성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졌다.

“뭔가 모으고 싶다면서요!”

“아! 그랬죠? 하지만 이 옷은 정말 조슈아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에이드리언은 즉각 수긍하면서도 아쉬운 듯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하루 내내 이랬다. 조슈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 세 번째 장소 이전에 다녀온 곳들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모으고 싶다고 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으는 것이 많은 곳을 찾았다.

햄버거 가게의 장난감을 갖고 싶다는 말이 생각나 장난감 매장에, 장식용 책을 보니 책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서점에 갔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에이드리언이 고르는 것은 다 조슈아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장난감은 어때요?”

“조슈아는 어떤 책 좋아해요?”

하나하나 물어 가면서 조슈아의 취향을 고르고 발견하는데, 반짝거리는 두 눈 때문에 지적도 못했다. 심지어는 계산까지 해서 같이 온 기념 선물도 받았다. 손바닥 반만 한 토끼 인형―심지어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많은 시리즈 중 조슈아한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에이드리언이 굳이 말했다. 그것도 손날을 바라보면서―은 단호히 거절했지만, 잘나간다는 소설책 한 권은 챙겼다.

하다못해 옷가게라면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옷에 대한 취향이 있을 테니까. 에이드리언이 입고 다니는 옷이 고급스러워 보여서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에이드리언은 브랜드를 가리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데려간 패션 매장에서조차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에게 어울릴 법한 옷을 골랐다. 저 캐러멜빛 니트처럼.

결국 졌다. 조슈아는 질렸다는 듯 에이드리언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바라보았다. 조슈아의 얼굴과 달리 에이드리언은 요 근래 가장 즐거운 쇼핑이었다면서 앞서 걸었다. 아련하게 에이드리언을 바라보는 갈색 머리 점원이 아차, 한 듯 어색하게 조슈아한테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으면서 점원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세 군데나 다녀온 덕분인지 고층 빌딩들 사이로 해가 뉘엿이 지고 있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빌딩 한 면이 붉은 노을빛으로 번진 게 제법 예뻤다. 뉴욕 한복판, 세계에서 가장 땅값 비싼 이곳에 스웰딘가의 회사도 있다고 들었는데. 잠시 건물들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있으면 뭐 해, 내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해요?”

에이드리언이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화려한 얼굴은 볼 때마다 면역이 되지 않았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조금만 더 친했다면 빌을 대할 때처럼 에이드리언을 밀었을 텐데.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걸까. 아니면….

“왜 그래요? 어지러워요?”

이 예쁜 남자를 밀기가 미안한 걸까.

아까 개미 오줌만큼 덴 자국에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에이드리언은 이제 조슈아가 아주 약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지러우면 잠시 주저 앉자느니, 앞은 잘 보이냐느니 하며 쏟아지는 질문들은 듣기만 해도 우스웠지만, 조금은 좋았다. 누군가 챙겨주는 건 익숙지 않았고 간지러웠다. 귓등을 쓸어 주는 듯한 다정함에 조슈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어린아이 같다며 하지 않는 행동 중 하나였다.

“에이드리언이 훅 다가와서 놀라서 그렇죠.”

“정말요?”

에이드리언이 두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게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면서 에이드리언의 어깨를 치는 척했다. 물론 닿지는 않았지만.

“정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왜 훅 다가와요.”

“훅 다가가면 바로 봐 주잖아요.”

이번에는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에이드리언이 달콤하게 웃었다. 하현달처럼 사르르 접힌 눈매 속 녹갈색 눈동자가 다정했다.

“조심스레 다가가면 천천히 봐 주니까.”

“…무슨 어린애 같은 소리예요. 다 큰 어른이.”

“원래 급한 마음 앞에서는 사람이 다 아이 같아진댔어요. 그 책에.”

에이드리언이 조슈아가 들고 있는 소설을 가리켰다. 아까 에이드리언이 선물이라며 준 책이었다.

“그 내용 있나 꼭 볼 거예요.”

“보라고 미리 알려 준 거예요. 그러니까, 꼭 봐요.”

조슈아가 물끄러미 책을 내려다보았다. 분홍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책 표지 위에는 <어제의 당신에게>라고 제목이 적혀 있었다. 언뜻 들어 본 적이 있었다. 16주째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놓치지 않은 책이라고. 뒤편에 간략하게 내용이 나와 있었다. 타임슬립물로 연인 관계를 끝내고 후회 많은 남자가 자고 일어났더니 마지막으로 싸웠던 날의 다음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였다.

“왜 하필 싸운 날의 다음 날로 돌아갈까요?”

“내가 알려 주면 재미없을 거예요.”

“에이드리언은 이 책 읽었어요?”

“당연하죠.”

에이드리언이 환하게 웃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게 보기 좋았다. 조슈아는 제법 두꺼운 책등을 바라보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 다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보다시피 책 좋아하거든요.”

“그러면 다 보고 나중에 같이 영화도 보러 갈까요?”

“이 책 영화화되었어요?”

“곧이요.”

곧 나온다는 말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에이드리언이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어느 한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그 시선을 따라갔지만 소득은 없었다. 뉴욕의 거리는 주말이라도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정도?

“뭐 특별한 거라도 있어요?”

“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릴래요? 곧 올게요.”

“네?”

“잠깐이면 돼요.”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에이드리언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머리통 하나는 차이 날 만큼 장신이었지만 멀어지니 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엉겁결에 혼자가 된 조슈아가 당황해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인도 안쪽 가장자리에 섰다.

설마 타고 온 차량을 먼저 가지러간다는 것은 아닐 테고. 조슈아는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스튜디오부터 중심지인 이곳까지 타고 온 에이드리언의 검은색 승용차는 한 블록 떨어져 있는 공용 주차장에 주차를 해 둔 터였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같이 가는 게 더 빠를 것이었다.

그도 아니면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을 봤나? 조슈아가 멍하니 차도를 바라보았다. 좌측으로 펼쳐진 8차선 사거리는 어마어마하게 길었고 유동 인구 또한 아주 많았다. 신호가 바뀌며 순식간에 차오르는 사람들을 보던 중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기, 횡단보도 너머에 있던 사람들 중에 빌 스웰딘… 아니었나? 키 크고 잘생긴 사람 많은 뉴욕에서도 빌만큼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는 보기 드물었다. 하지만 이내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빌이 주말에 부르지 않는다고 이제는 눈앞에 아른거리는구나. 설마 빌 스웰딘이 이 뉴욕 거리를 차 없이 걸어 다닌다는 것은 생각조차 되지 않았다. 작년 한창 할리우드를 들썩이게 만들던 배우 아가사 크리스틴과 교제하면서도 아가사가 원하는 공원 데이트 한번 안 해 줬던 이야기는 비서실에 제법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빌에게 있어서 집과 에투왈 외에 가는 곳이라고는 클럽, 레스토랑, 호텔, 유람선 등 보안이 철저하고 사람 적은 장소가 다였다.

무엇보다, 정말 빌이었으면 그렇게 환하게 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빌의 얼굴에 어울리는 감정은 짜증, 지루함, 놀릴 때의 얄미움 등이었으니까. 아주 짧은 순간, 먼 거리였지만 환한 웃음만큼은 뇌리에 박힌 듯 생생했다.

닮은 사람이겠지. 찝찝한 생각을 지워 가며 고개를 돌리던 순간이었다. 한 번 더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까 저쪽으로 갔던 에이드리언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엄청나게 뛰어갔다 왔는지 숨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급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에 멍하니 시선이 끌리던 조슈아가 순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디 다녀온 거예요?”

“이거, 사느라고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이드리언이 내민 것은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갈색 종이봉투였다. 얼결에 봉투를 받아 든 조슈아가 봉투를 벌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사탕?”

“수제 사탕이에요. 그것도 주인 마음대로 장사하는.”

에이드리언이 빙그레 웃었다. 같은 모양의 사탕이 투명한 비닐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사탕부터 손톱만 한 사탕까지. 꼭 자그마한 큐빅 같은 사탕을 바라보면서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이드리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제법 유명한 곳이에요. 오늘 사 줄 수 있나 했는데 다행히 열려 있네요.”

“좋아해요, 사탕?”

에이드리언이 잠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오가는 사람들의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마침내 조그마한 웅성거림 같아졌을 때가 되고 나서야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좋아해요, 아주.”

그러니까, 조슈아 줄 거예요. 분명 조슈아도 좋아할 거예요.

에이드리언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조슈아는 제 다리가 뿌리를 내린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주 조금 했다. 먹지도 않았는데 사탕은 분명 아주아주 달 것 같았다. 그냥, 감이었다.

* * *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에밀리.”

월요일의 에투왈은 적당한 긴장과 잔잔히 퍼지는 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자동문이 열리며 에밀리가 들어오자 향긋한 커피 냄새가 비서실을 가득 메웠다. 커다란 남색 텀블러를 들고 온 에밀리가 가벼운 인사말을 건넸다. 파우치에서 화장품들과 젤리 한 봉지를 꺼내던 엘라가 코를 킁킁대더니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냄새 좋다. 아직 미셸 출근 안 하지 않았어요?”

“오늘 새로운 원두가 들어온다고 일찍 출근한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덕분에 1L나 받았지.”

에밀리는 텀블러 무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들어올렸다.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자랑스럽게 웃는 모습에 조슈아는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그런 정보는 어디에서 얻는 거예요?”

“그건 당연히 비밀이지.”

에밀리가 텀블러를 내려놓은 뒤 검지를 들어 립스틱이 완벽하게 칠해진 입술 위에 살짝 가져다 대었다. 에밀리는 에투왈의 모든 일―피처팀의 막내 에이미 커런스의 연애사 등 소소한 이야기부터 임원들이 배당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또는 협찬실에 있는 지미 추 구두가 몇 켤레인지까지―을 다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야 편집장의 퍼스트 비서가 된다는 것일까? 존경 어린 눈으로 에밀리를 바라보던 조슈아가 깨달은 듯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제가 펼친 논리대로라면 조슈아는 에밀리만큼 알지 않아도 괜찮았다. 언제나 퍼스트 비서가 있을 테니까.

“역시 에밀리!”

“남 얘기 하듯 하지 마요, 조슈아.”

들켰다는 듯 조슈아가 뒷목을 긁적였다. 그런 조슈아를 바라보던 에밀리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에밀리가 있을 거잖아요.”

“언제까지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그게, 무슨 이야기예요?”

“몰랐어? 조슈아. 생각보다 소문이 늦네.”

“그런 건 비서한테 어울리지 않는데.”

에밀리와 엘라가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조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몰랐다는 듯한 모습에 에밀리가 낮게 한숨을 뱉었다. 엘라는 거울을 잘 조절해서 제 얼굴이 잘 보이게 하더니 입술을 빰빰 했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이상하지 않았어요? 에밀리 같은 재원이, 그것도 딱 봐도 야망에 실력까지 겸비한 이 시대의 커리어 우먼 대표상이 왜 비서를 하고 있는지?”

엘라의 말이 제법 마음에 드는 듯 에밀리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런 에밀리의 표정 변화를 감지할 새도 조슈아는 엘라의 말을 곱씹었다.

이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영어에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3개 국어를 완벽하게 하며 현재 독일어까지 공부한다고 했는데.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패션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학원 박사까지 밟고 있는데, 도대체 왜 비서의 자리에 만족하고 있는지. 아예 팀의 팀장으로 가도 에밀리는 누구보다 잘해낼 텐데.

“어차피, 어차피 보스는 일을 잘 안 하니까 그래도 적당히 만족하는 줄 알았는데.”

“역시 조슈아, 눈치가 빠르다니까. 반은 맞췄지. 어차피 보스 일이 내 일이니까. 경력도 괜찮고 연봉도 괜찮고. 그리고 조슈아도 있으니 일도 괜찮아졌고.”

에밀리는 조슈아를 보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3년 전 온 조슈아 베넷은 새빨간 머리에 선이 가는 얼굴을 하고 어리바리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깜짝 놀라했다. 그래 놓고는 눈치 빠르게 세컨드 비서가 할 일―빌 스웰딘의 연애 문제 해결, 변호사 조언, 홍보부와 연락해서 가십 내리는 법 등―을 잘 캐치했다.

에밀리가 흐뭇해하거나 말거나 조슈아는 심각해졌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에밀리는 몇 년 안에 빌의 퍼스트 비서를 그만두고 어디론가 갈 예정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퍼스트 비서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조슈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만약에 에밀리가 퍼스트 비서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이직하면 퍼스트 비서 자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뭘 어떻게 되긴. 당연 조슈아가 하는 거죠. 그렇죠, 에밀리?”

엘라가 당연하다는 듯 에밀리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설마, 설마. 조슈아 역시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절하게 에밀리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음, 그건 아직 생각 안 해 봤는데.”

에밀리가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제야 조슈아는 엘라와 에밀리가 저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표정의 변화를 발견한 엘라가 키득키득 웃었고, 에밀리는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입에 걸었다.

“뭐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안심하지는 마. 생각 안 해 본 거지 확정은 아니니까.”

“안 돼요. 퍼스트 비서는 정말 에밀리 같은 사람이 해야 된다니까요.”

에밀리가 코웃음을 쳤다.

“보스 마음에 드는 나 같은 사람이 흔할 줄 알아?”

“…그러네요.”

조슈아가 뽑히기 이전에 34명의 세컨드 비서 면접자가 다녀갔다고 하는데, 퍼스트 비서라면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슈아는 암담해지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아차, 무언가를 떠올렸다는 듯 테이블 옆에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탕 드실 분?”

“무슨 사탕인데요?”

엘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다. 조슈아는 갈색 종이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도통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한번 으쓱했다.

“뭐, 여러 가지죠.”

“저요! 다 봐도 돼요?”

“보스 출근하셨네.”

휘파람을 불 듯 낮은 목소리로 에밀리가 한마디 했다. 조금 전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며 편하게 웃던 에밀리는 에투왈의 전설, 에밀리 스콧으로 변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정리했는지 오늘의 주간지 5부와 오후 회의에 필요한 자료들 그리고 각 팀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들을 들고.

사탕을 보던 엘라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조슈아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복도를 런웨이처럼 걸어오는 보스를 바라보다 시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09시 10분. 보스가 평소에 출근하는 시간보다 일렀다. 곧 커피를 찾을 보스를 위해서 빠르게 미셸에게 다녀와야 했다. 어느 새 퍼스트 비서에 대한 생각은 저만치로 날아가 버렸다.

지미가 얼른 자동문 도어 버튼을 누르고 뒤로 빠지자 자연스레 빌이 들어왔다. 에밀리가 빌의 뒤를 따라서 편집장실로 향하던 찰나였다. 엘라와 조슈아의 목례를 가볍게 받아 주던 빌이 갑자기 몸을 돌려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따라 들어가던 에밀리도 걸음을 멈췄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조슈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시선이 길어졌을 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뭐지? 내가 무슨 일이라도 쳤나? 대신 메시지를 보냈을 때 여자 친구의 이름을 다르게 보냈나? 선물을 받았을 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조슈아, 잠깐 들어와.”

한마디만 남기고 빌이 편집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에도 들어오라고 하는 것은 일상이었지만 이렇게 출근하자마자, 저렇게 주시하듯 쳐다보면서 들어오라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지미가 옆으로 다가와 한마디 했다.

“조슈아, 요즘 뭐 실수한 거 있어?”

“오면서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오늘 가 보니까 준비도 다 해놓으셔서. 흔한 일은 아니잖아.”

아, 물론 전혀 없는 일은 아니지…만. 시무룩해진 조슈아의 표정을 보고 얼른 지미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던 때는 에밀리가 닦달하고 조슈아가 빌의 집에서 함께 자고 일어났던 주주총회 날밖에 없다는 것은 조슈아가 제일 잘 알았다.

“세상에. 무슨 일이람.”

에밀리가 영혼 없이 한마디 붙였다. 스멀스멀 불안함이 올라왔다. 조슈아는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사탕이 담긴 봉투까지 챙겼다. 결의에 찬 얼굴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옮기던 조슈아는 편집장실을 열 걸음 앞둔 상태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마지막으로 눈에 담겠다는 듯 결연한 얼굴에 엘라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입술을 씹었다. 입술에 바른 틴트가 치아에 묻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편집실 안으로 들어갔다. 달칵,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엘라와 지미는 자석에 끌리듯 에밀리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일까요, 에밀리?”

“조슈아가 잘못할 게 뭐가 있어. 안 그래요?”

아웅다웅 한마디씩 켜켜이 쌓여 가는 대화가 웃겼다. 에밀리는 탁탁, 서류들을 파일별로 꽂아 놓더니 심드렁히 한마디 했다.

“그러면 내기 하나 할까?”

“무슨 내기요?”

“저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에밀리는 뭐에 걸 건데요?”

“나?”

에밀리는 더럽게 방음 완벽한 편집장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붉은 립스틱이 완벽히 칠해진 입술을 올려 웃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에이, 보스 표정이 평소랑 다른데?”

“정말. 무슨 일 일어나긴 할 것 같은데.”

에밀리는 대답 대신 프라다 지갑에서 10달러 2장을 꺼냈다.

“내기할 사람?”

“토요일에 메인 스트리트 갔었어?”

“네?”

뜬금없는 말이었다. 잔뜩 긴장한 어깨가 한순간에 풀려 버릴 만큼. 조슈아는 앉아 있던 소파에 어깨를 기대었다. 빌의 한쪽 눈썹이 추켜 올라가건 말건, 지금은 제 긴장이 우선이었다.

“아 진짜, 보스.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부르신 거예요?”

“겨우 그거라니. 토요일부터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

“겨우 그거죠. 그리고 토요일부터 궁금했으면 바로 연락하시면 될걸.”

“네가 워라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며.”

“네?”

조슈아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분명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빌 스웰딘이 맞는데? 조각이라 추앙받았던 얼굴이 짜증으로 물드는 게 보이는 걸 보면 빌 스웰딘이 맞긴 한데? 도대체 왜 갑자기 제 워라밸을 챙기는 거지? 순간 조슈아는 겁이 더럭 났다. 사람이 안 어울리는 짓을 하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건데.

“보스.”

조슈아가 목소리를 쫙 깔았다. 속눈썹을 든 비장한 눈동자며 곧추 세운 허리며, 조금 전과 전혀 달라진 모습에 빌이 또 무슨 일이냐는 듯 턱만 까딱했다.

“무슨 일 있는 거죠?”

“뭐?”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만 아는 보스가 내 워라밸을 챙겨 줄 리가 없는데!”

“야!!”

결국 빌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평상시의 보스였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조슈아가 헤헤, 웃었다.

“보스 맞네요.”

“어휴, 이걸 확.”

말은 그래도 저처럼 꿀밤 먹이는 시늉도 하지 못하고 화를 식히듯 부채질을 하는 빌을 보며 조슈아가 냉큼 테이블에 올려진 서류를 들고 부채질을 도왔다. 위로 솟구쳤던 빌의 눈매가 슬그머니 내려가더니 언뜻 웃음이 고였다 사라졌다.

“근데 저도 메인 스트리트에서 보스 봤어요.”

“그런데 왜 아는 척 안 해.”

이건 좀 웃겼다. 불퉁하게 볼이나 부풀리고 팔짱을 낀 모습은 꼭 다섯 살 어린이였다. 보스는 어렸을 때도 꼭 이랬을 것 같다. 심통나면 팔짱 끼고 툴툴대고. 그래도 지금도 워낙 잘생겼으니 어렸을 때도 정말 예뻤겠지.

조슈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보스 아닌 줄 알았거든요. 보스가 그런 곳에 계실 분도 아니고, 또.”

“또?”

“엄청 환하게 웃고 계셨거든요.”

아. 빌이 낮게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매끄럽고 날카로운 턱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씩 웃었다.

“오랜만에 사촌이 왔거든.”

“되게 사이좋은 사촌인가 봐요.”

“그러고 보니 넌 한 번도 못 봤겠네.”

빌이 슬쩍 조슈아를 살폈다. 그 기묘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촌이라면 빌과 비슷하려나? 빌의 두 형이 빌과 전혀 다른 걸 보면 잘 모르겠다. 조슈아는 빌을 우쭈쭈 하려다 차갑게 내쳐졌던 둘째 형 에단 스웰딘을 떠올리며 속으로 킥킥 웃었다. 그때 좀 웃겼는데. 스웰딘 로펌의 간판 변호사라 가끔 TV에서 봤던 에단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 조슈아는 그때 빌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저렇게, 서로 사랑하는 게 가족인 걸까.

“하여튼. 나도 너 아닌 줄 알았는데. 맞네.”

“저는 평소랑 똑같았는데요?”

조슈아가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분명 토요일의 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옷차림이 출근할 때와 달라서 그런가? 조슈아는 제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진한 남색 슬랙스와 소매를 두 번 말아 올린 흰 셔츠, 검은색 로퍼. 캐주얼하긴 했어도 출근한다는 이미지가 강한 옷이기는 했다.

그때야 청바지에 후드 티 차림이었으니 다를 만도 하긴 했다. 제 사복 차림을 빌은 몇 번 보지 못했으니까. 기껏 해야 비서팀과 함께 야유회를 갔을 때 정도? 그때도 빌은 일찍 빠졌지. 보스가 먼저 빠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아무튼, 결론이 났다.

“옷 때문인가?”

“아니, 옷 때문은 아니야.”

“그럼요?”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였다. 빌은 조금 난감해졌다. 익숙한 새빨간 머리카락의 조슈아 베넷은 가끔 이렇게 빌을 곤란하게 했다. 버릇인 듯 살짝 내미는 입술을 바라보다 보면 한 대 톡 쳐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빌은 나른한 태도로 소파에 몸을 파묻듯 앉았다. 그리고 평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뭐 때문이었을 것 같아?”

아니, 이제는 뭐 수수께끼라도 하자는 건가? 어이없는 마음에 찌릿 빌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빌은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되면 대강 말을 맞춰 주고 빨리 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음, 너무 잘생겨서?”

에이, 농담인데. 조슈아가 풀 죽은 척 덧붙였지만 빌은 빈말로라도 ‘그래’라고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는 듯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조슈아는 머리를 쥐어짰다. 무슨 클림트의 ‘키스’에서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똑같았다는데 뭐가 다르다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누구랑 같이 있었어?”

“아, 보스! 사생활이거든요!”

팩 고개를 돌리며 조슈아가 빌을 흘겨보았다. 빌은 여자 친구 한 명 만나는 것까지 스케줄이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평범한 소시민의 사생활을 캐묻다니. 매너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물론 에이드리언이랑 함께 있었던 것은 맞는데.

훅 다가오던 그날의 에이드리언 얼굴이 갑자기 머릿속을 채웠다. 얼굴이 더워지는 기분에 고개를 슬쩍 뒤로 돌리고 부채질을 했다. 빌이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개져?”

“보스가 이상한 거 물으니까 그렇죠!”

“그날 네 표정이 더…! 말을 말자.”

“제 표정이 뭐요!”

둥근 눈매에 억지로 힘을 줘서 새침하게 올린 조슈아가 톡톡 쏘아댔지만 이상하게도 빌은 말문이라도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화난 건가? 하지만 뭐가 달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빌이 이마를 짚으며 나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저거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말을 안 들어요. 조슈아는 한마디 더하려다가 꿀꺽 삼키고 대신 봉투를 내밀었다.

“아, 보스. 사탕 드실래요?”

“무슨 사탕인데?”

호기심을 보였다. 안 삐쳤구나, 안도감에 조슈아가 배시시 웃으며 봉투 안에 각각 비닐 포장된 사탕들을 꺼냈다. 보라색과 파란색과 연두색과 또 옅은 분홍색과….

“음, 아직 다는 안 먹어 봤는데. 이거는 포도맛이었고, 이건.”

“이 사탕은 어디에서 났어?”

“네?”

“사탕 이거. 어디서 났냐고.”

왜 보스는 사탕 하나에 심각해지는 걸까. 아니면 오늘 콘셉트인 걸까? 정말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조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찌푸린 빌의 미간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보스, 저 오늘 출근하자마자 손 엄청 깨끗하게 씻었어요.”

“뭐?”

“그러니까 한번만 봐줘요. 이러다 미간에 주름져요.”

조슈아의 손이 빌의 미간에 닿는 순간이었다. 진회색 눈동자가 커지더니 빌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꼭 괴롭힘 당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조슈아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빌이 조슈아보다 세 살이나 어리기는 했어도 언제나 괴롭히는 것은 빌의 포지션이었고 저는 괴롭힘 당하는 일개 세컨드 비서인데!!

“뭐, 뭐야!”

“뭐긴요. 안 그러면 계속 인상 찌푸리실 거잖아요. 그리고 그 사탕은 그냥 선물 받은 거예요. 수제 사탕이라고 했던….”

말하는 새 빌이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갔다.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 의자에 앉아 반 바퀴를 휙 돌렸다. 순식간에 ‘나 누구랑 이야기하지?’의 당사자가 된 조슈아는 말문이 막혔다. 고작해서 커다란 등받이 너머로 완벽하게 세팅된 진갈색 머리카락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알겠으니까 나가 봐.”

“보스가 물어봐 놓고. 사탕 안….”

“안 먹어, 안 먹어. 나가.”

“네, 네.”

허락도 없이 미간 만져서 화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조슈아가 어린아이 달래듯 말끝을 늘여 대답하고는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빌이 의자를 다시 반 바퀴 돌렸다. 하얀 얼굴은 변화가 없었지만 진갈색 머리카락에 슬쩍 가려진 귀 끝은 타는 것처럼 뜨겁고, 또 붉었다. 쿵쿵, 웃기지도 않게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왜 갑자기 얼굴을 디밀고 난리래.”

빌이 중얼거리면서 한 손으로 눈을 쓸어내렸다. 정말 깜짝 놀랐다. 새하얀 얼굴이 불쑥 가까워지더니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빙그레 웃었다. 평소에는 몰랐던, 콧잔등의 아주 작은 주근깨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던 순간, 미간에 닿는 온기는 다정했고 순식간에 스친 향은 달콤했다.

“…샴푸를 달달한 걸 쓰나?”

무심코 한마디를 내뱉고 빌은 고개를 저었다. 빌 스웰딘, 정신 차려라. 어제의 연장선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이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저 빨간 머리 조슈아한테 너무 약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보내기에는, 일을 참 잘했다. 그것도 딱 빌의 취향으로. 다른 곳으로 뻗었던 생각들은 빌이 진정함에 따라 한쪽으로 귀결되었다.

조슈아를 이 방으로 부른 가장 큰 이유.

“분명히, 그 자식을 본 것 같은데.”

빌이 중얼거렸다. 찜찜했지만 기우이길 바랐다. 조슈아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하필 저 사탕을 갖고 있던 것도 그리고 그 재수 없는 얼굴이 조슈아가 있는 방향을 향해 웃은 것 같은 것도.

“와, 에밀리. 정말 빠르네요. 그사이에 내기를 주도하고.”

조슈아가 혀를 내둘렀다. 에밀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지미와 엘라에게서 받은 40달러를 지갑에 넣었다. 엘라가 울상인 상태로 말했다.

“이게 다 조슈아 때문이에요. 왜 별일이 없어요?”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조슈아가 편집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달려들 듯 제게 다가온 엘라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눈을 반짝였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으니 대답도 아무 일 없다고 했다. 에밀리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손에 발린 호일 네일이 번쩍이는 것을 본 지미와 엘라는 아무 말 없이 지폐를 내밀었다. 참고로 지미는 두루뭉술하게 혼난다는 것에, 엘라는 조슈아가 여자 친구 선물을 잘못 보냈고 한소리 듣고 나온다에 걸었다고 했다.

“오늘 아침 표정은 장난 아니었는데, 정말 별거 아니었나 보네.”

에밀리의 지갑에 미련 남은 눈빛을 보내던 지미가 금세 활달해져서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조슈아도 어깨를 으쓱이며 허세를 부렸다.

“사실 뭐, 저는 별로 안 그랬는데.”

“아닐 텐데. 아까 비장하게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우리 바라보고 가는 거 다 봤는데.”

조슈아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제 일을 하겠다는 듯 강력한 의지가 담긴 얼굴로 모니터만 쳐다보았다. 엘라와 지미가 열심히 놀리는 것을 본 에밀리는 서류를 들고 편집장실로 향했다.

에밀리 스콧은 자신이 반만 맞췄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조슈아는 분명 별일 없었다. 하지만….

“어제 에투왈의 주가와 오늘 아침 개장 이후 주가입니다. 다음 총회를 위해 동향에 따른 이슈들 준비하겠습니다. 마리 데생타와 엘르윈 등을 포함해서 3개의 잡지사 피처팀에서 이번에 비건과 패스트 패션에 대한 에투왈의 피처팀 기사에 대해서 항의서를 보내왔습니다. 특히 마리 데생타에서 지난번에 쓴 패스트 패션 화보를 정면 비판한 거 아니냐고 하는데 이건 홍보팀과 피처팀의 의견 수렴해서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기획부에서는 다음 기사들 목록을 뽑아 왔는데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에밀리?”

“네, 말씀하십시오.”

“조슈아한테 초록색 사탕은 빼고 먹으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에밀리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빌은 오늘도 에밀리가 가져온 서류들을 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에밀리는 편집장실을 나가다 말고 잠시 힐끗 빌을 바라보았다. 브리핑을 하던 짧은 시간과 0.1초의 지금 이 순간, 에밀리는 생각했다.

조슈아는 분명 별일 없었다. 별일은 보스에게만 해당되었다. 그 별일이 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에밀리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기의 승리를 위해서도,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 * *

“월요일은 애슐리 테닝텀 아니었어? 맞지?”

“맞아요. 지금 난리 난 애슐리 테닝텀.”

조슈아가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핸드폰 액정에는 차세대 팝가수라고 불리는 애슐리 테닝텀이 디즈니 드라마에서 함께 출연하던 상대 배우와 키스하는 사진이 크게 박혀 있었다. 드라마 속 장면이 아니라 실제 데이트를 하다 찍힌 파파라치 컷으로.

“와우, 오늘 보스 기분 푹 다운되겠는데.”

“그걸 보고하러 가야 하는 저도 다운되었어요.”

3년 차, 이런 일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다. 입사 초기에도 한 번 있었고, 작년에도 한 번 있었으니 으레 연간 행사―라고 하기에는 부담감 있지만―처럼 여기기로 했다. 안 그래도 보스의 핸드폰으로 불나게 연락이 오는 중이었다.

달링, 이거 합성이야. 설마 믿는 거 아니지? 연락 좀 받아 제발.

그러더니 100통의 메시지와 30번의 전화에 답이 없자―답을 보낼 수조차 없었다. 너무 빠르게 많은 물량의 연락이 쏟아져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오며 빌을 비난했다.

빌, 당신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이야? 당신도 신디랑 양다리인 거 내가 다 알거든?

그러다가 애슐리도 지친 모양이었다.

좋아. 헤어져. 연락하지 마.

그 이후로는 연락이 없었다. 나름 정들었던 빌의 여자 친구였는데. 가끔―사실 거의―빌 대신 조슈아가 연락을 하는 것을 눈치챘어도 빌에게 ‘바쁘면 연락을 하지 마’라고 한마디 쿨하게 해 주는 게 다였던 애슐리. 물론 정말 연락이 하나도 없을 줄은 애슐리도 몰랐겠지만.

제발 다음에는 빌 같은 사람 말고 연인으로서 좋은 사람 만나길. 몇 번 얼굴 본 사이에 웃기지만, 짧은 기도까지 했다.

“그러면 보스는 새로운 월요일 여자 친구가 생기는 걸까?”

“왜, 그 모델 중에 한 명이 계속 보스한테 치근댄다고는 들었는데.”

“아, 나도 알아요. 안젤라 화이트!”

엘라가 안젤라 화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지만 조슈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덜 짜증 내게 이별 통보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그게 조슈아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단것이 최고였다. 조슈아는 봉투 속에서 사탕들을 들어 바라보았다.

알록달록 색색이 고운 사탕들을 보며 무슨 사탕을 먹을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아, 조슈아. 초록색 사탕은 먹지 마.”

“왜요?”

“나야 모르지. 보스가 그렇게 이야기하라고 지시했거든.”

“보스가요?”

에밀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보고 있는 서류가 바쁜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소분된 비닐봉투들 중 초록색 사탕을 응시했다. 꼭 보석 같이 반짝이는 초록색의 엄지손톱만 한 사탕. 이게 제일 맛있어서 먹지 말라는 건가?

원래 사람은 하지 말라는 게 제일 하고 싶은 법이었다. 조슈아가 초록색 사탕을 하나 집었다. 엘라가 초록색,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씩 웃었다. 그리고 입에 넣는 순간이었다.

“이거 레몬 사탕이네요.”

온 미간이 찌푸려졌다. 실눈도 뜨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린 조슈아가 경직된 입매로 겨우 말했다. 일단 먹은 것인 만큼 뱉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빨아먹는 게 제법 웃겼다.

“지금 표정 엄청 웃긴데. 사진이라도 찍어 줄까요?”

“아냐, 됐어요.”

엘라가 키득거렸다. 한쪽 눈을 윙크하듯 계속 찡긋대는 건 어설픈 추파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어린아이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어른 같기도 했다.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에밀리가 한마디 했다.

“조슈아, 레몬 사탕 안 좋아해?”

“네. 너무 셔서요.”

조슈아 베넷은 레몬 사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에밀리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알겠어.”

의외로 빌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애슐리에 대한 분노를 터트리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놀림감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조슈아는 결국 레몬 사탕을 먹었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렇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데 어떻게 몰라. 아니면 나한테 윙크라도 하는 거야?”

“절대 아니거든요!”

능글맞게 웃는 것을 보면 애슐리의 일로 상처 받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씩씩거리는 와중에도 빌의 상태를 체크한 조슈아가 아차, 떠오른 듯 빌이 있는 책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보스 정말 어떻게 아신 거예요?”

“네가 레몬 사탕 먹은 거?”

“그거 말고요. 제가 레몬 사탕 안 좋아하는 거요.”

“그야 그때 네가 안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언제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하는 조슈아를 보면서 빌이 저도 모르게 입매를 빙그레 올렸다. 부드러운 웃음이 걸린 얼굴을 보며 조슈아는 감탄조차 터트리지 못했다.

보스가 이런 얼굴을 할 수 있었구나.

“기억 안 나? 예전에 내가 저 사탕 똑같은 걸로 준 적 있는데.”

“그랬어요?”

“이렇게 기억력이 금붕어 같아서야. 생색을 못 내겠네.”

금세 다시 빙그레 웃으면서도 입에 칼 찬 말을 하는 빌 덕분에 감동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조슈아가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다.

“네네. 금붕어 기억력 같은 저는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

“2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여러 가지 내밀었는데 네가 골랐잖아.”

“어?”

그러고 보니 부옇게 번진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아마 주말이었던 것 같은데. 느지막한 저녁에 떨어진 호출로 갑작스럽게 출근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정확히 어떤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빌이 들어왔던 것 같다. 잔뜩 화가 난 채로 들어온 빌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일을 하는데 갑자기 오라고 해서는 사탕을 줬지. 그래서….

“아, 아!”

“기억났어?”

“네. 덕분에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사탕까지 챙겨 주는 보스한테 감동하지 않고?”

빌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보스 최고’ 등 제가 가끔 해 주는 아부성 발언이 붙지 않는 게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이 상황에서 전혀 나오지 않을 말이었다.

“왜냐면, 정말로 다 생각났으니까요. 보스.”

“뭐가?”

“사탕 준다고 해서 레몬 사탕 안 먹는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하필 레몬 사탕으로 챙겨 주셨던 보스가요.”

이를 악물고 이야기해서인지 제법 음산한 분위기가 났다. 정말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연기력이었다. 레몬 사탕은 잘 못 먹는다니까 굳이 ‘그럼 이 사탕 맛있어’라고 추천해 주던 보스. 그때는 1년 차라 멋도 모르고 우물대며 눈가를 찡그렸었지.

빌이 시선을 피했다. 제 차가운 시선의 효과였다. 조슈아는 조금 우쭐해졌다.

* * *

“한 방 먹였네요. 조슈아가 보스한테.”

“그렇죠!”

탕. 500㎖ 맥주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조슈아가 뻐기듯 어깨를 펴고 눈을 반짝였다. 평소라면 언뜻 자랑스러움이 지나갔을 터였지만 술에 취한 조슈아는 조금 달랐다.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만 본다면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에이드리언 이번 주 내내 바빴네요.”

“아.”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새 에이드리언의 볼이 조금 더 홀쭉해진 것 같다. 안 그래도 빠질 곳 없이 완벽한 얼굴에서 살이 빠지니 더 날카로운 분위기가 났다. 하지만 뭐 어떤가. 가느다랗게 휘어진 눈이 사르르 웃기라도 하면 봄의 미풍처럼 금세 다정해지는데.

“조금 바빴어요. 생각보다 일이 쉽지가 않아서.”

“에이드리언의 보스가 그렇게 일을 많이 시켜요?”

“뭐, 그런 셈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조슈아.”

“그러면 뭐가요?”

“내가 바쁜 동안 나 보고 싶었어요?”

아, 재미있는 얼굴이다. 도화지처럼 하얀 볼에 붉은 물감이라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천천히 홍조가 피어 가는 얼굴. 투명한 갈색 눈이 당황으로 젖어 들어갔다. 조금 더 가 볼까, 아니면 놔줄까. 그렁그렁해지는 걸 보면 무척이나 재미있을 텐데.

조슈아가 눈치채지 못할 순간, 가늘게 접힌 눈매 속 녹갈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하지만 이내 에이드리언은 여느 때처럼 상냥하게 그리고 조금 우울해진 것처럼 덧붙였다.

“나는 조슈아 되게 보고 싶었는데. 같이 할 게 수십 개잖아요.”

에이드리언이 핸드폰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그 안에는 조슈아가 틈틈이 보내 준 메시지들이 가득했다. 박물관들을 돌아다니며 수집할 물건을 정하는 것부터 배드민턴과 테니스, 농구 같은 운동들을 비롯해서 인라인 스케이트, 쿠킹 클래스에 심지어 꽃꽂이까지. 인터넷에서 찾아본 별의 별것들이 가득했다.

조슈아가 달아오른 얼굴로 두 손을 내저었다.

“이건 그냥 다 에이드리언이 뭘 모으면 좋을까 하다가 찾은 거예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다른 뜻이 조금 있었으면 좋을 텐데.”

“네?”

물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에이드리언이 티슈를 가져다 조슈아의 입가에 묻은 크림소스를 닦아 주었다. 티슈에 묻어난 크림을 보고 조슈아가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에이드리언이 팔꿈치를 테이블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세운 팔에 얼굴을 기대었다. 다른 팔은 테이블 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펍의 호박색 전등 아래,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어쩐지 평소랑 조금 달라 보았다. 어쩐지 조금. 조슈아는 제 아랫배가 조여드는 기분에 앉은 자리에서 들썩였다. 농밀한 시선이 조슈아를 향했다.

“요즘 슬슬 모으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그게, 뭔데요?”

긴장감을 주듯 잔뜩 낮아지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에 조슈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에이드리언의 낮은 웃음소리에 귓가가 간지러워졌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말하면 조슈아가 들어줄 거예요?”

“뭐, 가능한 부분까지는요?”

어차피 거의 노는 것 같으니까. 에이드리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거 다행이네요. 조슈아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거든요.”

“그런 게 있어요?”

“조슈아와의 하루하루, 그게 내가 모으고 싶은 거예요.”

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당황해서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와글와글한 펍의 소리들이 한순간 멈춘 것 같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것을 모으고 싶다는 당사자는 아무런 당황 없이 천사같이 예쁘게 웃으며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어요?”

한참의 정적 만에 겨우 찾아낸 말치고는 너무 비련의 주인공 같았다. 조슈아는 말하고도 후회했다. 혹시 그냥 장난 아니었을까? 조금 더 농담처럼 받아들였어야 했나?

“아무렇지 않아 보여요?”

“네.”

“되게 동요하고 있는데, 나 지금.”

“동요하고 있다기에 너무 멀쩡한데.”

에이드리언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괜히 찔리는 마음에 조슈아가 어깨 한번 으쓱였다.

“잠깐 손잡아도 돼요?”

“손은 왜요?”

“내가 얼마나 동요하는지 알려 주고 싶어서.”

에이드리언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허락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다. 강아지라기에는 너무 크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잠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조금 전 긴장한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 상황이 유쾌했다.

“어떻게 알려 줄 건데요?”

“이렇게요.”

순식간에 온기가 손에 닿았다. 상냥하고 다정한, 딱 에이드리언 같은 따뜻한 기운. 그리고 조슈아의 눈이 커졌다.

“떨…리네요.”

“무척이요. 안 떨려고 팔에도 기대었는데. 못 봤다니 다행이네요.”

아주 조금씩 에이드리언의 손이 떨렸다. 조슈아의 머릿속에 고여 있던 생각들이 빠져나갔다. 에이드리언은 꼭 열두엇 먹은 소년처럼 수줍게 웃었다.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게 했다고는 하지 마요. 나 되게 용기 내서 한 말이니까.”

집에 오는 길은 여느 날과 같았다. 우습게도 말이다. 조슈아는 내일 저를 기다리는 출근에 대해 이야기했고, 에이드리언은 간간이 맞장구를 쳤다.

“에이드리언은 내일 뭐 해요?”

“평소랑 같죠. 투자할 항목을 찾고 열심히 투자 계획 세우고, 그걸 이행하죠.”

“엄청 어려운 거 아니에요? 엄청 숫자도 많고.”

조슈아는 영화에서 봤던 투자자를 떠올리며 말했다. 대학 강의실처럼 대형 모니터를 둘러싸고 계단식으로 된 책상에 앉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장면 같은 것. 그건 좀 구식이려나? 에이드리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바쁘겠네요.”

“그래서 더 이런 시간이 좋아요. 숫자 없고, 보고서도 없고, 대신 나랑 조슈아랑 있고.”

다시 말문이 막혔다. 조슈아는 앞만 보고 걸었다. 팔과 다리가 함께 나갈까 봐 신경 써서 걸었다. 옆에서 낮게 웃은 에이드리언이 화제를 돌렸다.

“참, 책은 어때요? 바빠서 아직 못 읽었으려나?”

“아. 조금 봤어요. 1장 중반까지만.”

정말 조금이었다. 13장까지 있는 책 중 1장 중반까지. 하지만 거기까지 읽고서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언도 알겠다는 듯 키득거렸다.

“생각보다 답답하죠?”

“네. 그리고 파비엘이 정말 나쁘더라고요.”

소설 속 1인칭 화자의 주인공 파비엘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다. 연인인 테사가 원하는 것 중에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침에 화단에 물을 주기, 우유를 사다 주기, 열심히 한 요리에 감상평 들려주기, 주말 오후에 함께 산책을 나가기 등 작고 소소한 일상들이었다. 하지만 파비엘은 그중 하나도 하지 않았다. 매일 ‘내일 할게’, 혹은 ‘오늘 일이 생겨서’라는 식으로 등한시하기에 바빴다.

책을 읽다 말고 덮은 것도 그쯤이었다. 물론 아무리 파비엘이 바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 지친 거라는 서술이 있었어도 조슈아는 납득하지 못했다. 에이드리언은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

“베스트셀러라는데, 조슈아한테 별로 재미가 없다니 아쉽네요.”

“제가 워낙 취향이 확고해요.”

“어떤 취향인데요?”

“음, 책은 추리물 좋아해요. 탐정물도 좋고. 영화도 추리물도 좋고,”

“히어로물도 좋아하잖아요. 아이언맨.”

“맞아요.”

조슈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취향이 하나하나 이야기되는 건 제법 재미있는 일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어떤 걸 좋아하더라. 일단 치즈버거를 좋아하고, 아이언맨을 좋아하는 걸 봐서는 히어로물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에이드리언은요?”

“뭐가요?”

“어떤 취향이냐고요.”

“빨간 머리에 웃는 게 예쁜 사람이요.”

동그랗게 떠진 투명한 갈색 눈을 보면서 에이드리언이 달큼하게 웃었다.

“아, 아니면 영화 취향 물어본 거예요? 그러면 나는 액션물이랑 로맨스.”

그 이후로도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취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중에 조슈아의 귀에 꽂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음악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갈 뿐이었다.

“들어가요.”

집까지 오는 거리는 짧고도 길었다. 손을 흔들던 에이드리언이 집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조슈아는 제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거실에 벌렁 누웠다. 반쯤 걷어 둔 블라인드 아래에서 뉴욕의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천장에 있는 형광등을 바라보면서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왜.”

왜 나와의 하루하루를 모으고 싶다고 했을까.

“왜.”

빨간 머리 이야기를 한 걸까? 웃는 얼굴이 예쁜 사람이 좋다는 것은 또 무슨 이야기일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결국 묻지 못한 죄로, 조슈아는 계속해서 에이드리언의 말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날 밤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 * *

보스의 출근은 지미의 몫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비몽사몽에 걸려왔던 에밀리의 전화를 기억했다.

- 지미 대신 조슈아가 보스 출근 담당해.

용건만 간단히. 에밀리는 누구보다도 그 말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보스의 출근용 차량은 회사에 있겠지만, 조슈아는 에투왈에 가는 대신 바로 빌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의 차고지에 수많은 차들이 있을 텐데, 뭘 걱정한단 말인가.

“이야, 오늘 얼굴이 말이 아닌데?”

아, 빌의 입을 걱정했어야 했구나. 하필 오늘 같은 날 지미가 자리를 비울 게 뭐람. 조슈아는 퀵서비스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룩북을 가져오는 지미를 탓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런 지미의 재능을 누구보다 다양하게 써 먹는 에밀리를 탓해야하는 건지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그냥 보스를 탓하면 되지 왜 애꿎은 피고용인들을 탓하고 있는 거지? 이게 자본주의로 인한 사람의 타락인 걸까?

“…역시 보스랑 있으면 사람이 못돼져요.”

“가만히 있는 나는 왜 건드려?”

“내가 지금 지미와 에밀리를 탓할 뻔했거든요.”

“그건 그냥 네가 못된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해둘게요.”

끝말은 듣지 못했는지 빌이 의기양양하게 턱끝을 올렸다. 니콜라스가 꼼꼼한 손길로 넥타이핀을 꽂아 준 뒤 한 걸음 물러났다.

드레스 룸조차 거울 룸과 옷장 방으로 분리되어 있다니. 조슈아는 조금 질린 눈으로 사방의 거울들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스뿐 아니라 아침마다 빌의 머리를 만져 주는 사용인 두 명이 한쪽에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새삼 네 보스가 얼마나 잘났는지 깨달았냐?”

“…밤에 이 방에 있으면 조금 무서울 것 같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었는데 빌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니콜라스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니콜라스와 사용인들까지 총 세 명을. 빌은 알 게 뭐람.

평소처럼 톡 쏘는 반응이 없어서인지 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이곳에서 누가 더 유리한지 깨달았는지 웃음을 머금었다. 꼭 심술궂은 동네 개구쟁이가 웃는 것 같은 얼굴에 조슈아는 니콜라스의 눈치를 보며 빌을 찌릿 노려보았다.

지금 이곳에서 장난치면 에투왈에 가서 정말 가만두지 않겠다는 나름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조슈아는 지난번에 통했던 제 카리스마를 믿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빌은 조슈아의 일격을 보고 아기 고양이의 젤리 펀치를 떠올렸다. 공격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하찮은 게 제법 볼만했다. 빌은 저택 어딘가를 쏘다니고 있을 하리를 떠올렸다. 아직 어려서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이라고는 답싹 달려들거나 왕왕 짖는 것밖에 모르는 하리.

제 앞에 있는 빨간 머리의 바보는 하리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던데. 언제쯤 진실을 이야기해 줄까. 아주 잠시 착한 마음으로 고민하던 찰나였다.

크릉- 꽉 닫히지 않은 문을 코로 밀고 들어온 하리가 낮게 그르렁거렸다. 소리를 듣자마자 놀라운 반사 신경을 선보이며 조슈아가 빌의 뒤로 물러났다. 니콜라스가 엄하게 손바닥을 들어 저지하자 끄응- 하리가 불쌍하게 앞발을 모았지만 조슈아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하리 안녕? 오늘도 건강하네?”

뒤로 잔뜩 몸을 빼고서는 그래도 친한 척 말 붙이는 모습이, 제 재킷 끝자락을 잡고 있는 손이 우습고 간질거렸다. 견디기 어려운, 이상한 마음에 빌이 퉁명스럽게 재킷을 잡은 손을 쳐내며 한마디 했다.

“내 뒤에 서서 하리한테 말하면 들리겠냐?”

“아, 진짜 보스 너무하네요.”

너무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조슈아의 볼멘소리에도 차마 말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이 들어 빌은 혼자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조슈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오늘 운전을 너무 열심히 했나? 아니면 어제 에이드리언의 말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던가?

경악하는 조슈아와 달리 빌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오늘 약속 취소하라고.”

“하지만, 오늘은 수요일인데. 애보니 선셋인데.”

조슈아가 더듬거렸다. 에밀리라면 ‘알겠습니다’ 한 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을 테지만 조슈아는 달랐다. 특히나 애보니 선셋은 빌이 요즘 제일 즐겨 만나는 여자 친구기도 했다. 빌이 뒤로 상체를 젖혔다. 풀어헤친 셔츠 첫 번째 단추 아래 섹시한 쇄골이 보였다.

“조슈아, 지금 필요한 말은 그 말이 아니라 뭘까?”

“알겠습니다.”

다행히 조슈아는 빌의 경고조를 알아챘다. 뺨이 불룩하게 나온 걸 보면 그간 안겨 준 선물을 구한 방법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양이었지만 지금 빌이 신경 쓸 건 그게 아니었다.

잠시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한 빌은 조슈아가 묵례를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조슈아는 이번에 또 무슨 선물을 안겨야 하나 고민하면서 편집장실을 나섰다.

“이번에는 또 무슨 미션이기에 얼굴이 어두워요?”

이번 시즌 룩북을 보고 있던 엘라가 고개를 번쩍 들며 조슈아한테 말했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약속 취소랍니다.”

“요즘 들어 보스 약속 취소가 잦네요.”

“맞아, 지난번에도 그랬는데.”

“그때는 쇼 관람도 안 가시고.”

“정말 몰래 다른 분이라도 만나시나?”

그때였다. 에밀리의 내선 전화가 울렸다. 보던 서류 그대로 전화를 받은 에밀리가 알겠다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별일이네요. 에밀리한테 직통으로 전화가 오고.”

“특별한 연락이거든요.”

그 말과 함께 에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집장실로 가는 에밀리를 보는 조슈아가 문득 핸드폰 진동을 느꼈다. 에이드리언이었다. 조슈아의 얼굴이 한층 밝아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도.

오늘은 정말로 조슈아 하고 싶은 거 같이 하고 싶어요! 뭐 하고 싶어요?

사람 잠도 잘 못 자게 만들어 놓고 다정하기는 꿀 떨어지게 다정하다. 괜히 심술이 나서 조슈아가 액정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면 진짜 못 피하지.”

메시지를 봤을 때만 해도 ‘잠시 피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복도 벽의 시린 느낌을 만끽하면서 기대어 있던 찰나였다. 비서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빌이 나왔다. 조슈아가 얼른 등을 떼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잠시 나와 있었어요. 어디 가세요?”

“운전 필요 없으니까 안에서 업무해.”

“그러면 차까지만 모시겠습니다.”

“1층으로.”

아, 1층은 힘든데. 조슈아는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핸드폰으로 연락해 차를 정문 앞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빌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조슈아가 따라 타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간부용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할 때까지 열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고 보면 에투왈도 참 몸집을 많이 불렸다. 빌이 처음 편집장이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간부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없어서 빌이 엘리베이터 탔다 하면 같이 타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한 트럭을 채울 수 있겠다 했는데. 결국 에밀리가 바로 스웰딘의 돈을 끌어다가 간부용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다니. 들을 때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였는데, 새삼 생각하면 놀라운 사람이기는 했다.

조슈아는 통유리로 된 바깥을 힐끗거렸다. 초고속 모드를 누르지 않는다면 엘리베이터는 120m/min 속도로 내려간다. 조슈아에게는 딱 좋은 속도였다. 빌딩들 한복판에 있는 랜딩파크가 단풍으로 물들어 있는 게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안 어지러워?”

“딱 좋은데요?”

빌이 풍경을 보라고 만든 통유리 엘리베이터임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빌은 엘리베이터를 탈 때 가끔 멀미를 일으켰다. 당연히 경치 관람은 꿈에서나 이룰 수 있는 이야기였다.

“뭐가 보이는데?”

“단풍이 예쁘네요.”

아이스크림도 팔고,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고. 좋아 보이네요.

조슈아는 단조로운 음으로 덧붙였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나가던 사원들이 빌을 향해 묵례를 했다.

조금 전 멀미 난다고 해쓱해졌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빌이 턱을 치켜들고 고고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사원들이 작게 ‘최고의 복지다’라고 속삭이는 게 조슈아의 귀에 들렸다. 아마 빌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겠지.

로비를 걸어 나갈 때 에밀리나 지미 없이 조슈아 혼자만 따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물론 사내 가드팀도 있고 스웰딘가에서 붙이는 비공식 가드팀도 따로 있지만 말이다.

정문에 다다를 쯤에서야 조슈아는 빌보다 먼저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빌의 포르쉐는 정문 앞에 딱 대기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였다.

“보스, 잠시만.”

척하면 척이라는 듯 빌은 조슈아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조슈아는 에투왈의 정문을 둘러싸고 있는 파파라치들을 스캔하듯 바라보며 가드팀을 호출했다.

이미 포르쉐가 나와 있을 때부터 주변을 돌아다니던 가드팀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파파라치들을 잡았다. 요즘에는 대포 카메라가 아니더라도 화질 좋은 소형캠들이 너무 많아서 까딱하면 놓치기 십상이었다.

다른 집안의 또래 후계자들보다, 심지어 스웰딘의 형제자매들보다 언론은 유난히 빌 스웰딘을 좋아했다. 톱 모델 출신의 잘생긴 왕자님. 천문학적인 돈을 쌓아 놓고 사는 스웰딘가의 도련님. 그러면서도 따로 약혼자나 정혼자가 없는 자유로운 영혼. 그래서인지 신데렐라를 꿈꾸는 어린 소녀들부터 세상의 풍파에 찌든 성인 남녀들에게까지 빌은 즐거운 요깃거리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수십 명의 파파라치를 몰고 다니는 보스. 그래서 가끔은 지친 표정을 짓는 가엾은 보스. 빌이 안다면 허, 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귀를 후빌지도 모르지만 조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섯 명의 가드들이 파파라치를 쫓아내는 사이 빌이 걸음을 옮겼다. 대강의 파파라치들이 다 처리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틈을 비집고 한 남자가 빌 쪽으로 달렸다. 정장을 갖춰 입고 사원증 케이스까지 목에 걸고 있던 터라 가드들이 신경 쓰지 않았던 남자였다. 어느새 주머니에서 소형캠을 꺼낸 남자가 차 문을 여는 빌 쪽으로 달려들던 찰나였다.

탁- 순식간이었다. 캠을 든 손을 잡아채 뒤로 꺾은 뒤 포르쉐 뒷문으로 파파라치를 민 조슈아가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아나는 사람이 셋, 나머지는 가드들에게 저지당했다. 한 명의 가드가 파파라치를 인계받기 위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조슈아가 꺾어 둔 팔에 힘을 가했다. 파파라치의 손에 잡혀 있던 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실례.”

“저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고장 났으면 에투왈로 항의서 보내세요. 저희도 가만있지는 않을 예정이거든요.”

끙, 파파라치는 대답 대신 앓는 소리를 이었다. 조슈아는 다가온 가드에게 파파라치를 넘겼다. 이미 에투왈은 여러 차례나 파파라치들에게 경고를 먹인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봐줄 필요가 없었다. NYPD를 거칠 것도 없었다. 미국 최대 규모, 최고 클래스인 스웰딘 로펌이 언제나 빌의 뒤에 든든히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같은 잡지들끼리 너무한 거 아냐?”

“언제부터 황색 언론지와 에투왈이 같은 잡지가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빈정거리는 듯한 조슈아의 말에 파파라치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빌에게 달려들 듯 다가온 남자는 위협 항목까지 추가될 것이었다.

조슈아가 차문을 열어 주었다. 가만히 서 있던 빌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파파라치를 이렇게 가까이에 오게 한 게 마음에 안 든 걸까? 빌의 미간이 펴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가능성이 확신으로 변해 갔다. 보스가 화난 게 분명했다.

“저, 보스. 앞으로 주….”

“네가 왜 나서.”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조슈아가 한마디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끔 투덜거리거나 뭐라고 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화낸다는 느낌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조슈아가 눈만 깜빡였다.

내려다보는 진회색 눈동자가 시렸다. 가림막 하나 없이 그 찬 눈빛을 받은 조슈아는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빌이 잘 세팅된 머리를 막 쓸었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았는지 잇새로 감정이 억눌러진 목소리가 나왔다.

“제정신이야? 저놈들이 뭘 가지고 있을 줄 알고 나서냐고.”

딱 한 번 있었다. 파파라치를 가장한 미친놈이. 자기가 헤어진 것을 전 애인이 좋아하던 빌 스웰딘의 탓으로 돌리던 찌질한 새끼. 카메라 대신 나이프를 들고 달려들다가 지미에게 팔이 꺾였던 놈이었는데, 결국 징역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빌이 뭘 이야기하려는지 감이 잡혔다. 하지만 그건 딱 한 번이었고, 조슈아 베넷은 빌 스웰딘의 비서였다. 파파라치 한두 명 정도는 강하게 제압할 수 있어야 하는 세컨드 비서.

빌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 조슈아는 움츠린 어깨 그대로 짧게 묵례를 했다. 빌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우웅- 우렁찬 엔진음과 함께 출발하는 포르쉐를 보면서 조슈아가 부러 어깨를 폈다. 그리고 아까 하지 못한 꿍얼거림을 뱉어 냈다.

“칫, 내가 파파라치 잡은 게 처음도 아니고.”

비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실제로 조슈아가 파파라치를 신체적으로 제압한 건 이미 두세 차례 있었다. 고무처럼 질깃한 파파라치들은 이렇게까지는 해야 하루이틀이라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물론 역고소 당할까 두려웠던 게 없지는 않았지만, 파파라치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 컸다. 뒤에 스웰딘 로펌이 있는 것 역시 한몫했고.

할 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제게 진심으로 화낸 적 없는 보스의 시린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들어가서 일이나 해야지. 우선 이 파파라치들을 넘기고, 머릿속으로 할 일을 정리하던 조슈아가 다시 한번 오후를 준비하기 위해 기지개를 피던 참이었다. 팔을 하늘로 쭉 뻗은 상태에서 앞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멋들어진 가로수가 놓인 길 한복판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슈아가 얼빠진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드리언?”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에이드리언이 건넨 커피 잔을 받아들며 조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평소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쌀쌀한 날씨 탓에 입었는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는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조슈아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에 패션팀 사람들이 없는지 살폈다. 만약 한 명이라도 있다면 에이드리언은 그대로 납치되어 스튜디오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조슈아 보러 왔죠. 다행히 시간 잘 맞췄네요. 연락도 안 했는데 이렇게 보고.”

“언…제 왔는데요?”

혹시 어디서부터 본 걸까. 빌한테 지적을 받는 것부터, 아니면 파파라치를 제압하는 것부터?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딱히 보여 주고 싶은 장면은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조슈아가 파파라치의 팔을 꺾는 것부터?”

“윽.”

조슈아가 낮게 신음했다. 다 봤네. 괜히 부끄러운 기분에 조슈아가 커피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드리언은 한마디 덧붙였다.

“몰랐어요, 조슈아. 한 방에 팔을 꺾는 게 보통 솜씨가 아니던데요?”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보니 에이드리언의 얼굴 속 미소는 꼭 장난을 거는 개구쟁이 같았다. 조슈아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도톰한 분홍색 입술이 나온 것을 보고서도 에이드리언이 커피를 내려놓고 박수까지 쳤다.

“파파라치가 윽, 하는데 무슨 액션영화 보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 그 액션영화 에이드리언이랑 함께 찍는 수가 있어요.”

놔 버렸다, 아주. 말이 나가자마자 조슈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건 에이드리언에게 보여 주는 착한 조슈아 버전의 말이 아닌데. 기름칠이 되지 않은 로봇 목이 돌아가듯, 뻣뻣하게 조슈아가 에이드리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놀랐으려나?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그거 내가 되게 바라는 건데. 그러면 나는 가만히 있는 금발 미인 역할인가요? 조슈아는 나를 구하러 오는 빨간 머리 히어로?”

“그, 그렇게 되나요?”

“당연하죠. 설마 조슈아가 나를 꺾을 건 아니잖아요.”

실제로 그런 생각으로 말한 조슈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가끔 에이드리언은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잠시 굳은 믿음으로 이야기하던 에이드리언이 아, 하며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뭐라고요?”

“아니에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이 뭐라고 했는지 듣지 못했지만 에이드리언은 다시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정말 대단했어요. 이건 장난 아니고 진심으로요.”

“음, 진심으로 받아들이죠.”

조슈아가 피식 웃는 것을 보고 그제야 에이드리언도 눈을 휘어 웃었다.

“조슈아네 보스는 좋겠어요. 조슈아 같은 비서가 있어서.”

“보스는 아닌 것 같아요.”

금세 또 기분이 축 쳐졌다. 에이드리언이 의아한 얼굴로 조슈아를 들여다보았다. 조슈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다행히 이를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 조슈아가 입을 벌리려다가 합, 다물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마음을 구슬리듯 다가왔다.

“보스가 뭐라고 했어요?”

“…아니에요.”

뭐, 위험했다면 위험할 일이었을 수도 있었다. 괜히 부하를 걱정하는 보스를 흉보는 나쁜 비서가 되는 느낌에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내려다보는 에이드리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면 오늘 조슈아 기분 좋아지게 맥주 한잔하러 갈까요? 뭐 먹고 싶어요?”

평소 에이드리언보다 높은 톤이었다. 제 기분을 배려해 주는 건가, 싶어서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목을 두어 번 돌리는 시늉을 했다.

“술 말고….”

“말고….”

“오늘 내가 하자는 대로 할래요?”

“그게 뭔데요?”

“뭐든요.”

조슈아의 말에 에이드리언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놀리듯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뭐 하자고 할 줄 알고 그렇게 바로 승낙해요.”

“뭐든, 좋아서요.”

하여간, 부끄럼 하나 없이 말한다. 조슈아는 조금 겸연쩍은 기분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다홍색으로 달아오른 귓가를 보고 소리 없이 웃는 것은 에이드리언의 몫이었다.

“그럼 정말 들어갈게요. 에이드리언도 얼른 들어가요!”

패션팀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조슈아는 더 이상 에투왈 쪽으로 배웅하는 것을 말렸다. 그리고 밀림에 다시 뛰어드는 사슴처럼 주변을 둘러보더니 얼른 에투왈이 있는 대로로 나갔다. 보는 사람 하나 없을 텐데, 아무도 모르게 에이드리언에게 손을 흔들더니 시침 뚝 떼고 에투왈 안으로 들어갔다.

“…귀엽네.”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 마크를 통해 들은 보고는 오늘 하루의 시작을 흥미롭게 해 줬다.

빌 스웰딘의 차가 1층에 나와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파파라치가 쫙 깔려 있다.

평소의 에이드리언이라면 겨우 이 두 마디 가지고 직접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에게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시간 나면 커피 한잔하자는, 뻔한 방법을 안고 에투왈 쪽으로 가던 때였다. 대로를 앞에 두고 정말 빌 스웰딘의 차가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수두룩한 파파라치들까지.

그때까지만 해도 에이드리언은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빌 스웰딘에게 다가가는 파파라치들이 한 명 한 명 제압되고, 마침내 마지막 파파라치를 조슈아 베넷이 제압했을 때. 에이드리언은 낮게 휘파람을 불 수밖에 없었다.

조슈아 베넷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빨간 머리였다.

에이드리언은 우아한 눈매로 에투왈을 힐끗 바라보았다. 표적을 놓치지 않는 포식자의 눈이 아주 잠시, 에투왈 속으로 스며간 사슴의 기척을 되새기는 듯 번뜩였다가 이내 눈을 깜빡이면서 사라졌다.

과연 조슈아 베넷이 오늘 보여 줄 게 무엇인지 제법 기대되었다. 아직 답을 보내지 않은, ‘그’에게서 온 메시지 생각은 날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정작 에이드리언은 깨닫지 못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형이 괜히 불러서 그렇잖아.”

에단의 말에 빌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와, 서운하네. 에단이 혀를 내둘렀다.

“와, 핸드폰도 안 받아서 겨우 내선 전화로 연락했더니 서운하게 그러기야?”

“그러게 누가 이렇게까지 나 불러내래? 그것도 로건 이름 팔아서?”

“내 이름으로 연락해도 이렇게 나올 거였어?”

“당연 아니지.”

틱틱거리는 건 여전한데. 에단이 커버가 씌워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빌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잘생긴 막냇동생의 얼굴에 옅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에단은 끔찍이도 말을 안 듣는 막냇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글거렸다. 평소 잘 세팅된 머리도 어정쩡하더니. 드디어 안하무인인 막내한테도 고민덩어리가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혹시나 알아? 이 형아가 처리해 줄 수 있는 일일지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뭐든 확신에 찬 건 좋지 않은데 말이지.”

“빈정거리지 마. 식사 같이 안 해 주는 수가 있어.”

“알겠어, 알겠어.”

에단이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완벽한 항복의 표시에 빌은 앞에 놓인 요리를 바라보았다. 허브가 올려진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였다. 에단이 직접 주문한 만큼 빌이 딱 좋아하는 미디엄 레어로 구워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입맛은 없었다.

빌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리고 접시를 앞으로 밀었다. 몸에 갖춰진 테이블 매너는 한쪽으로 갖다 둔 채 빌이 중얼거렸다.

“…너무했어.”

머릿속에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제 눈치를 보던, 움츠린 어깨의 조슈아가 둥둥 떠다녔다. 그래, 제가 너무했다. 빌이 테이블 매트에 뺨을 가져다 대었다. 조금은 까끌까끌한 느낌이 뺨에 선연했다. 에단이 질색을 하며 매트 더럽다고 하는 게 멀어지듯 들렸다.

* * *

“먼저 갈게요.”

“내일 봐.”

조슈아는 손을 흔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가장 먼저 퇴근한 에밀리의 뒤를 이어 엘라와 지미까지 문을 나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다다르는 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조슈아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에투왈에서 가장 야근이 적은 두 번째 주 수요일. 다음 달 잡지 발간 때문에 오늘이 지나면 야근이 줄을 이을 게 분명했다. 조슈아도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을 해야 했다.

끝나면 연락해요!!!

느낌표가 세 개나 붙은 메시지를 바라보면서 조슈아는 얼마 남지 않은 스케줄 변경표를 바라보았다. 퇴근 20분 전에 날아온 쇼 초대장들과 파티 안내장들을 정리하고, 보스가 결재해야 할―이라고 쓰고 에밀리가 결재하게 될―서류들을 올라온 부서별로 나눴다.

정시 퇴근이라기에는 10분 늦었지만 나름 선방이었다. 조슈아가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어지러운 책상 위의 노트와 펜을 정리하고 마우스를 패드 위에 올려놓는 등 마무리를 했다. 다 되었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들던 참이었다.

“다 퇴근했어?”

자동문 쪽에서 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본 자동문 앞에 빌이 서 있었다. 점심 약속을 갔던 빌이 회사로 다시 복귀하다니. 그것도 퇴근 시간인데 말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있을 수 없는 일을 바라보는 조슈아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지금 퇴근 시간인데요. 보스는 왜 퇴근 안 하시고 다시 오셨어요?”

너무 건조한 목소리였나. 괜히 아까 섭섭했던 것을 티내는 것 같은 목소리에 조슈아가 빌 못 보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리고 의자를 집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빌이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는 것을 놓쳤다.

빌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운을 띄웠다.

“그냥, 아까. 아씨.”

빌은 저를 바라보는 조슈아의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금세 눈치챘다. 꼭, 이상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빌이 뒷머리를 긁었다.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 한마디가 너무 어려웠다. 입 안을 가득 채웠다가 소리로 내놓으려고 하면 금세 사라져 버리는 한마디.

“할 말 없으시면 먼저 퇴근해도 되죠, 보스?”

평소에는 눈치가 요물 같더니만, 이럴 때는 또 하나도 모른다는 눈이다. 빌은 답답함에 끓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리고 제 승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조슈아의 투명한 갈색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대번에 조슈아의 눈은 놀란 고양이처럼 커다래졌다.

“뭐, 시키실 거라도, 있으세요?”

띄엄띄엄 말하는 게 무슨 일이라도 시킨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엄한 각오를 드러내는 것 같았지만, 빌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말하기 벅차다면, 조금 시간을 버는 걸로 만족해야 했으니까.

“저녁, 먹자고.”

“저녁이요?”

“그래 저녁.”

“선약 있는데요.”

“뭐?”

“그러면 먼저 가 봐도 괜찮죠?”

“급한 선약이야?”

이건 또 뭘까. 조슈아의 앞길을 막아서고는 다급한 얼굴로 묻는 빌이라니. 혹시 무슨 사고라도 친 걸까? 심각해지는 기분에 조슈아는 천천히 빌의 얼굴을 스캔했다.

“…뭐예요, 보스. 무슨 일이에요.”

“그게,”

빌이 다시 입술을 우물거리다 말문을 닫았다. 순간적으로 빌의 얼굴이 더없이 처연해 보여서 조슈아의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어마어마한 일이라도 친 걸까. 조슈아는 침착하려 애쓰면서 빌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애보니 선셋이 뭐 터트리겠대요?”

“뭐?”

“아니면 다른 스캔들이에요?”

“아니거든!”

“아, 깜짝이야. 아니면 말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놀라기는 했어도 다행이었다. 풀어지는 마음에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빌이 잠시 가만히 있다가 한마디 했다.

“너.”

“네?”

“…선약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보스 취했어요?”

듣는 제가 다 부끄러워지는 말에 조슈아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빌이 딴청을 부리듯 다른 곳을 바라보았지만 귀 끝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이래서 빌 스웰딘을 못 미워하겠다. 아까 응어리진 마음이 살그머니 풀렸다.

“보스도 중요한데, 선약이잖아요.”

“…그러면 지금 말할….”

“빌!”

비서실에 울리는 제3자의 목소리에 조슈아의 눈이 또 한번 커졌다. 오늘 따라 소리 한번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자동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짜증스레 돌아본 빌의 눈도 조슈아처럼 커다래졌다.

“…로건?”

빌이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야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시원한 목소리였다. 조슈아보다 조금 큰 키에 비슷한 체형 그리고 소년처럼 맑은 얼굴이었다. 남자는 입고 있던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빌에게로 다가섰다. 그와 거의 동시에 조슈아를 본 남자의 갈색 눈이 조금 커졌다. 커진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빨간 머리 동맹이네요. 로건 헤네스예요.”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다 조슈아가 얼결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제 머리만큼이나 강렬한 로건의 빨간 머리카락을 보며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보스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조슈아 베넷입니다.”

로건이 빙그레 웃으며 마주 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어쩐 일이야, 로건?”

“너 보러 왔지. 아까 에단이 내 이름으로 장난쳤다고 해서.”

조슈아는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의 빌은 처음 봤다. 놀라서 저절로 벌어진 입을 주체할 수 없어 손으로 밀어 겨우 닫았다. 오늘 참 여러 번 놀란다. 조슈아가 놀라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는 빌은 로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로건이 손을 올려 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 놀라운 건 그 손길을 자연스레 받아 내는 빌이었다. 심지어 기분 좋은 듯 살짝 눈을 감기도 했다.

까칠한 내 보스는 어디로 간 거야?!

조슈아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는 미간 한번 만져 주기 위해 미리 선언을 했고, 그토록 잘 챙겨 주는 빌의 형 에단은 지난번에 머리에 붙은 먼지 한번 쓸어 주려다가 ‘손 잘리고 싶냐’는 그르릉거림을 들으며 깨갱했다.

조슈아는 존경 어린 눈으로 로건을 바라보았다. 내가 조금 전 악수한 사람이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이었구나.

“나 배고픈데,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지금?”

“응, 지금. 너 선약 있어?”

로건이 맑은 눈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속으로 로건을 응원했다. 조금 전 조슈아에게 선약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제가 더 중요한지 물어보던 빌은 잠시 곤란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어깨만 으쓱했다.

“…알겠어. 가자.”

“그 전에 나 편집장실 구경 좀 시켜 줘. 네가 그렇게 자랑했잖아.”

“그러면 보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기는 했지만 조슈아를 부르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로건에게도 짧게 묵례를 했다. 그리고 로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로건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눈치 빠른 조슈아는 그 순간 로건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면에 가득 미소를 머금은 조슈아가 서둘러서 비서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쳤다.

지금 퇴근해요! 어디에요?

바로 답이 왔다.

조슈아 회사 앞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결국 말하지 못했다. 빌은 처지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편집장실에 들어선 로건이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빌을 바라보았다.

“에단이 너 잘하고 있다고 했는데, 정말이네?”

“당연하지. 내가 애도 아니고, 설마 깽판이라도 칠까?”

콧대를 으쓱이며 말하는 얼굴에 로건은 차마 진심을 내비칠 수 없었다. 정말 깽판 칠 줄 알았는데, 제법 잘하고 있는 사촌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웃는 로건의 얼굴을 보면서 빌은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따라 웃었다. 로건 헤네스는 빌 스웰딘이 제일 잘 따르는 사람 중 하나였다. 친형인 미하엘이나 에단이 섭섭해할 만큼.

하지만 로건에게는 미하엘이나 에단과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빨간 머리카락에 디즈니 배우들처럼 예쁜 얼굴, 무엇보다도 다정하지만 강단 있는 성격까지.

덕분에 로건은 소아과 의사라는 본업이 천직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그 이야기에 빌은 100% 동의했다. 아마 로건이 주사를 놔 준다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칠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제가 제일 잘 따르는 사촌이 왔는데,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아마 조슈아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조슈아가 문제였다. 그 눈치 없는 빨간 머리. 제가 얼마나 사과하고 싶었는지, 그 분위기를 눈치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빌이 낮게 탄식을 뱉어내던 순간이었다.

“어?”

야경이 멋지다며 창문으로 바깥을 내려다보던 로건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작게 탄생을 뱉었다.

“왜? 멋진 거라도 있어?”

“맞는 거 같은데. 아닌가?”

“뭐가?”

“잘못 봤나?”

로건은 어둑해지는 거리의 눈에 띄는 빨간 머리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 옆에 다가오는 화사한 금발은 뉴욕 거리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머리 색깔이었다. 로건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0층이라서 확실하지는 않은데.

로건이 뒤를 돌아보았다. 사촌은 소파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로건이 장난스레 웃었다.

“왜 비서 퇴근도 못하게 잡고 그래.”

“어…떻게 알았어?”

들켰다는 게 부끄럽기는 한지 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짓궂게도 로건은 모른 척하며 말을 덧붙였다.

“자동문 열리면서 들었지. 하여간 유치해. 뭐라고 했더라? 선약이 중요해, 내가….”

“아, 시끄러!”

“알겠어, 알겠어.”

새빨개진 얼굴로 퉁퉁거리는 빌은 언제 봐도 즐거웠다. 잔뜩 골이 난 사촌 동생을 달래던 로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사탕 먹고 싶네.”

“사탕?”

“응. 너 있어?”

빌은 스멀스멀 떠오르는 조슈아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그러곤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당연히 없지. 밥 먹기 전에 사러 갈래?”

“좋지.”

* * *

“…여기가 조슈아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곳 맞아요?”

“맞아요.”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두 번이나 맞는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못 믿겠다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보던 조슈아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도대체 복싱장 온 게 뭐가 그렇게 안 믿기는 거예요?”

에이드리언이 어정쩡하게 웃으면서 뒷목을 매만졌다. 머쓱해하는 그 모습에 괜히 더 웃음이 났다. 에이드리언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을 내려다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게요. 아마 옷 갈아입을 때만 해도 복싱장은 쏙 빼 놓고 다른 운동만 생각해서?”

“그래서, 지금은 좀 믿겨요?”

“음, 아까 본 조슈아의 모습을 떠올리니 좀 믿기네요.”

조슈아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에서 만든 주립체육관 안에 있는 복싱장은 놀랄 만큼 깨끗하고 사람이 없었다. 아마 조슈아 역시 예전에 보육원에서 만난 사회복지사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정도로 체육관 구석에 있었다.

사방이 거울로 되어 있으며 창가 쪽에는 러닝머신이 두 개 놓여 있었다. 가운데 천장에는 샌드백이 세 개 달려 있고 그 옆에는 펀치 볼이 놓여 있었다. 창가 옆면에 놓인 5단 원목 선반에는 줄넘기와 글러브, 헤드기어까지 놓여 있었다. 물론 핸드랩이나 붕대는 개인이 가져오는 게 복싱장 운영 원칙이었다.

조슈아는 사각 링에 앉아서 옆을 탁탁 쳤다. 에이드리언이 가만히 그 옆에 앉았다. 조슈아는 익숙하다는 듯 가져온 실내용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에이드리언도 가져온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혹시 헬스장에서 신는 운동화가 따로 있냐는 말에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에이드리언이 챙긴 신발이었다.

“조슈아, 복싱도 해요?”

“그럼요. 에이드리언은 해 본 적 있어요?”

“음, 아뇨.”

에이드리언이 장난스레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에이드리언은 사람 때리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손으로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것은 믿기지도 않았다. 에이드리언이 좋아하는 운동은 농구나 달리기였으니까.

“오늘 내가 한번 알려 줄게요. 에이드리언이 나한테 농구 알려 준 것처럼.”

“기대되네요.”

에이드리언이 나른하게 웃었다. 조슈아는 체육관이 조금 더운 것 같다고 한마디 했다. 에이드리언은 붉어진 조슈아의 귓가를 보고 그렇다고 맞장구 쳤다.

에이드리언은 줄넘기도 잘했다. 줄넘기 200개를 한 번에 하고도 숨이 차지 않아 보였다. 오랜만에 하는 줄넘기에 살짝 숨이 차던 조슈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곳을 보며 숨을 나눠 뱉었다.

다섯 세트의 줄넘기를 하고 나서야 조슈아는 드디어 스텝 밟는 법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거울 앞 바닥에 붙은 십자 모양의 테이프 앞에 서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나랑 똑같이 서 볼래요?”

“이렇게요?”

“음, 오른쪽 다리를 조금만 더 옮길래요?”

“이 정도요?”

“너무 많이 옮겼어요. 아까 방향으로 조금만 더.”

“조슈아가 한번 잡아 줄래요?”

“제가요?”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드리언은 말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사심 없는 듯한 무해한 표정에 조슈아는 괜히 저만 의식했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이곳에 복싱용 미트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에이드리언의 다리로 손을 뻗는 순간, 조슈아는 숨을 흡 머금은 채 내쉬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에이드리언의 다리를 옮겼다. 선선히 따라오는 에이드리언의 다리를 옮기고 조슈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요.”

“전문가가 만져 주니 다르네요.”

“에이드리언 자세가 좋은 거예요.”

쑥스러움에 조슈아가 칭찬을 했지만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진지한 얼굴로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이건 조슈아가 해 준 거예요. 내가 한 게 아니라.”

말을 한 직후 바로 자세 흐트러진다며 에이드리언은 허리 위에 손을 척 올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지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되게 빠르게 배우네요.”

“조슈아가 잘 가르쳐 줘서 그렇다니까요.”

“그것도 있지만 재능이죠.”

조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복싱을 배울 때만 해도 처음에 자세 잡고 스텝 밟는 것만 2주 했었다. 그런 거에 비해서 에이드리언은 엄청나게 빨랐다. 기본 스텝을 밟고 잽을 하는 것까지 불과 1시간 만에 끝냈으니까. 물론 자신은 전문적인 코치가 아니니 자신을 가르친 코치처럼 세세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말이다.

에이드리언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천장에 걸린 샌드백을 툭툭 쳤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의 손에 감긴 밴드를 바라보았다. 조슈아의 핸드랩은 남성 프리 사이즈였지만, 에이드리언의 손에 비하면 한참 작았다. 제법 신축성 좋은 제품이었지만 손을 집어넣는 게 겨우였다. 꽉 조이는 거 같아 설마하며 가져온 밴드는 아주 효과가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에이드리언, 의외네요.”

“어떤 점이요?”

“딱 굳은살만 겨우 박인 예쁜 손일 줄로만 알았거든요. 왜 있잖아요. 귀족 같은 손.”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손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몇 번 잡아 본 적은 있었어도 손 자체를 자세히 본 것은 밴드를 감아 준 조금 전이 처음이었다. 농구를 하는 것을 보면 굳은살이 없지는 않겠구나 했는데, 길고 우아한 손은 굳은살투성이었다. 잘 관리되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조슈아 손은 한 손에 잡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단단하기까지 했다.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는 이상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조슈아를 바라보며 미심쩍은 듯 말했다.

“그거, 놀리는 거죠?”

“눈치챘어요?”

조슈아가 얄밉게 혀를 쏙 내밀었다. 새초롬히 나온 분홍색 도톰한 혀는 금방 입술 사이로 사라졌지만 에이드리언의 시선은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오히려 짙어진 눈빛으로 조슈아의 입술을 응시했다.

복싱장이 조용해졌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반동에 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출렁이는 샌드백뿐이었다. 본능적으로 조슈아가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따라오는 진득한 시선까지 물릴 수는 없었다. 꼴깍, 침 소리까지 선명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땡-

3분마다 울리는 카운트 벨이 울렸다. 큰 소리와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끊어진 고무줄처럼 풀어졌다. 조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안 힘들어요? 끝낼까요?”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긴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배우는 김에 조금 더 배우고 싶어요.”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허리 뒤로 숨겼다. 어느새 꽉 쥐고 있던 손바닥 안은 땀으로 흥건했다.

“잽이랑 스트레이트는 배웠으니까, 남은 기술이라고 해 봤자 훅이랑 어퍼뿐이네요.”

조슈아는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콕콕 찍었다. 웃긴 일이었다. 그 짧은 순간이 뭐라고 그렇게 긴장했던 걸까? 조금 전 완벽한 자세는 어디로 가고 다시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잽도 스트레이트도 아닌 이상한 펀치를 내미는 이 남자를 상대로.

“그런데 오늘 훅이랑 어퍼 해도 되나 모르겠네요.”

“설마 내 완벽한 자세를 보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죠?”

“음, 완벽하려면 가드를 조금 더 올리고 스트레이트를 끊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요?”

그 순간, 에이드리언이 자세를 조금 틀었다. 그리고 스트레이트를 찍었다. 잘 친 스트레이트는 샌드백이 밀리지 않았고 위에 있는 사슬이 흔들렸다. 지금 에이드리언이 친 스트레이트가 딱 그랬다.

더해지는 잽은 엉망이었지만.

조슈아는 감탄과 웃음이 섞인 이상한 얼굴로 짝짝 박수를 쳤다. 에이드리언은 엉성한 잽을 친 것을 알지도 못하는지 왼팔로 샌드백을 안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와. 정말 예전에 배운 적 없어요?”

“습득력이 빠른 편 같다면서요. 이 정도면 어퍼랑 훅 배울 수 있죠?”

기대감에 찬 눈을 실망으로 물들이는 것은 조슈아의 몫이 아니었다.

최대한 멋있게 보이고 싶었다.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내는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스탠드 자세를 취하던 조슈아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쳤다.

조슈아가 눈을 반짝이며 에이드리언 앞으로 갔다.

“가드 자세 잡아 볼래요?”

“지금요?”

“네!”

에이드리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드를 올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조슈아가 가볍게 허리와 다리를 틀어 잠시 앉더니 추진력을 받듯 일어났다. 아랫배 바로 아래까지 다가온 깔끔한 라이트 어퍼에 에이드리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어퍼고….”

짧은 설명으로 대신하고 조슈아가 다시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게 훅이….”

아, 그런데 너무 가까웠나 보다. 에이드리언의 놀란 얼굴에 신이 나서 한 걸음 더 앞서 나간 탓이었다. 정확히 옆구리에 찌르는 대신 에이드리언의 허리를 껴안는 자세가 되었다.

왼팔 안에 안긴 허리가 슬쩍 닿았다. 옷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허리의 느낌에 조슈아가 화들짝 놀라며 팔을 빼려 할 때였다.

“정말, 못 참게 만드네요.”

“네?”

한숨처럼 나지막한 말과 함께 조슈아의 팔 위로 에이드리언의 손이 얹어졌다. 당황함에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녹갈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어진 채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몸을 빼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제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리는 게 금방이라도 들킬 정도로.

조슈아는 오른팔로 에이드리언을 밀어 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당황 때문인지 조슈아의 손짓에는 힘이 없었다. 힘없는 밀쳐냄을 저지하는 건 어린아이의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당황에 젖은 갈색 눈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처음 겪어 보는 알 수 없는 긴장에서 어쩐지 아랫배가 당겨 왔다.

“어떻게 할까요? 조슈아.”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길 잃은 어린 사슴 같은 눈을 하고도 입은 여전히 톡 쐈다. 새침하게 튀어나온 한마디에 에이드리언이 푸스스 웃었다.

“당신 훅에 내가 걸렸잖아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조슈아가 웅얼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에이드리언에게서 바다를 떠오르게 만드는 시원한 체향이 느껴졌다.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었다. 닿은 몸이 조금 울렸다.

“일부러든 아니든 나 좀 봐요. 되게 중요한 이야기 하려는 참이니까.”

귓가에 숨결이 닿았다. 바싹 세운 솜털을 간질이는 나른한 목소리에 조슈아는 무언가에 빠진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녹갈색 눈동자가 조슈아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던 순간이었다.

“조금 더 자주 전화하고 싶어요.”

“지금도 자주 연락하지 않아요? 요즘 내 연락 목록 다 에이드리언인데.”

조슈아의 말에 에이드리언이 조금 웃었다. 그리고 조슈아의 팔을 잡지 않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서 손가락을 꼽으며 한마디씩 더했다.

“퇴근할 때 약속하지 않아도 같이 집에 가고 싶고, 조슈아 집에 핑계 없이 놀러가고 싶어요. 집 문 앞에서 손 흔드는 대신 같이 들어가고 싶고요.”

평소에도 잘하는 일이라고 푸스스 웃으려던 조슈아는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가까운 탓에 마치 머리로 에이드리언의 가슴팍을 들이 받는 듯한 모양이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공간에는 단둘뿐이었으니까.

“아, 하나 더 있어요. 머리도 쓸어 주고 싶어요.”

“…그건 지금 해도 돼요.”

작은 목소리로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조슈아의 뒤통수에 손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마치 도자기 인형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쓸어 주듯 세심한 터치에 조슈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순간, 숨을 내뱉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조슈아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눈으로 저를 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간지럽고 부끄러울 정도로 에이드리언은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마치 제가 엄청나게 사랑스럽다는 듯.

퍼즐의 빈칸을 맞추듯 알맞은 단어를 떠올리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툭 한마디 내뱉었다.

“왜 이렇게 나한테 다정해요.”

짧은 그 한마디가 마치 긴 문장처럼 떨렸다. 입 밖을 빠져나간 떨림이 느껴졌는지 에이드리언이 또 한번 웃었다. 그리고 팔을 뗀 채 뒤로 조금 물러났다. 단단히 지탱해 주던 온기가 떨어져 나갔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눈으로 멀어지는 팔을 바라보았다.

“좋아서요.”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러워요?”

듣기만 해도 부끄러운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에이드리언이 뒤로 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이야기했잖아요. 나도 되게 떨린다고.”

꼭 며칠 전 같이 맥주를 마셨던 때처럼 그의 손이 떨려서 오히려 조슈아는 긴장을 덜었다. 편하게 웃자 에이드리언이 보였다.

“꼭, 하이틴 영화 같네요.”

“잘됐네요. 하이틴 영화는 새드 엔딩이 없잖아요.”

자신만만한 태도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다정한 눈빛, 세상 누구보다 높은 콧대의 아름다운 남자가 조슈아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나를 하이틴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건가요?”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이 뒤로 손을 감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녹갈색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만 같았다. 눈맞춤이 미묘하게 긴장되는 남자, 손이 따뜻하고 저를 보고 다정하게 웃는 남자, 사람 심장을 두근대게 하는 남자.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이 남자는 아닐까 하고 고민하게 만든 남자.

조슈아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침을 한번 삼킨 뒤,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리죠.”

에이드리언이 씩 웃었다. 그리고 조슈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귀어 본 적 없는 조슈아였지만 내재되어 있던 본능이 말해 주었다.

이건 분명히 키스의 징조다!

조금 전, 에이드리언과 붙어 있을 때만큼이나 두근거렸다. 마치 제 눈이 세밀한 카메라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에이드리언이 다가오는 게 마치 슬로우 모션이 걸린 것 같았다.

눈을 감아야 하나, 코가 부딪히면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조슈아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 다가오던 온기가 멈췄다. 이제 하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무슨 생각 하는 거예요?”

이상한 목소리였다. 그보다 더 이상한 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설마….

조슈아가 살며시 눈을 떴을 때, 앞에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듯 휘어진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뭘 기대한 거예요? 난 그냥 어깨에 뭐가 묻은 것 같아서 털어 주려고 한 건데.”

참지 못한 웃음이 에이드리언의 입새로 삐져나왔다. 그리고 빈말이 아니라는 듯 조슈아의 어깨 위에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무엇이 묻어 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뜨겁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마 티가 날 정도로 붉어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머리는 더없이 차분해졌다. 저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금 저처럼 물들여야 했다.

너무 웃었다 싶었는지,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던 참이었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조슈….”

순식간이었다. 조슈아는 열이 식지 않은 얼굴로 트로피라도 거머쥔 듯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서 있다가 긴 손가락으로 제 입술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아주 잠시, 입술에 닿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스쳐 지나간 건 분명 제 앞에서 잘난 듯 뽐내고 있는 저 분홍색 입술이었다.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딱 유치원 수준인데. 어떻게 할까. 에이드리언의 눈이 짙어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콧대 높인 조슈아가 가벼운 마음으로 웃었다.

“이제 갈까요?”

“울까 봐 한번 넘어가려고 했는데. 정말 사람 못 참게 만드네요.”

포식자가 그르릉거리듯 낮게 울리는 소리에 조슈아가 눈만 깜빡였다. 눈 깜짝할 새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다가왔다. 그리고 서로의 호흡이 얽혔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시각이 차단되자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닿는 입술 너머에서 에이드리언의 혀는 닫힌 조슈아의 치아를 두드렸다. 톡톡, 타인의 온기가 여린 살에 닿는 순간 조슈아의 마음처럼 입이 벌어졌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에이드리언이 혀를 밀어 넣었다. 파드득, 놀란 마음에 움직이던 조슈아의 혀 위로 타인의 혀가 올라탔다.

혀끼리 엉키는 소리가 야하게 울렸다. 제 턱과 머리를 움켜쥔 손이 뜨거웠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조슈아가 걱정했던, 코의 각도나 시선은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도무지 끝나지 않을 듯 가득 차 있던 혀가 빠지고,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던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떨어졌다. 작게 난 젖은 소리에도 조슈아는 숨만 헐떡였다. 가쁜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에이드리언이 눈매를 휘어 웃었다. 그리고 보란 듯 엄지로 제 입술을 쓸어 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조슈아가 눈 감았을 때부터 할 걸 그랬어요.”

아쉽다는 에이드리언이 중얼거렸다. 키스한 티가 여실히 남은 젖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숨을 몰아쉬고는 있었지만.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며 온통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하긴, 이 빨간 머리는 온통 다 기대 이상이었으니.

“그럼 좀 더 하면 되죠.”

이 맹랑함까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이면서 조슈아는 살며시 에이드리언을 잡아당겼다.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조슈아의 턱과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럴까요?”

* * *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조슈아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들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가을이 맞았다.

냉장고에서 꺼낸 물을 입 대지 않고 마셨다. 식도로 넘어가는 물이 빈 배에 꿀렁꿀렁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차가웠다.

씻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던 조슈아가 무작정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슬리퍼만 겨우 꿰어 신은 채 조슈아는 508호 앞에 섰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두근거렸다. 손이 조금 떨렸다. 힘을 주어 현관문을 두드리려던 참이었다.

문이 먼저 열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에 조슈아가 주춤거리며 조금 떨어졌다. 꼭 맞는 구두를 신고 습관처럼 앞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리던 에이드리언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내가 먼저 가려고 했는데, 조슈아가 더 빨랐네요.”

조슈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가만히 팔을 벌렸다. 자연스럽게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넓은 어깨를 감싸 안자 코트 아래 타인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닿는 어깨가 온통 근육인 듯 단단했다. 조슈아가 어깨에 뺨을 기대자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나 혹시 아직 꿈에서 안 깬 거 아니죠?”

“꿈 아닌 거 실감하느라 이러는 거예요.”

맞닿은 온기와 훅 끼치는 에이드리언의 향이 어젯밤 있었던 일이 진짜라는 것을 믿게 해주었다. 배시시 웃던 조슈아가 얼른 에이드리언을 안았던 팔을 풀고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멀어짐에 에이드리언이 눈만 깜빡였다. 조슈아가 제 집으로 몸을 돌리다 에이드리언을 보고 한마디 했다.

“뭐 해요. 출근 준비해야죠.”

조금 전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 남은 사람은 출근 준비를 하는 비서 조슈아 베넷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조슈아가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와요.”

“같이 가자는 이야기는 안 해요?”

“에이드리언은 준비 다 되었잖아요. 난 좀 걸려요.”

“그 걸리는 거 기다리려고 일찍 준비한 거예요.”

하여튼 말을 너무 잘한다. 조슈아는 고민하는 척 현관문에 고개를 기대었다. 출근 준비 시간을 깎아 먹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제 대답을 기다리는 저 남자를 보는 게 좋았으니까.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요.”

천천히 해도 된다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조슈아는 서둘렀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고인 웃음이 진해졌다.

“당분간은 온통 야근이겠죠?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더 놀고 올걸.”

쇼 초대장을 보며 룩북을 수정하던 엘라가 기지개를 펴며 아쉽다는 듯 한마디 했다. 대체로 엘라는 야근 주간 전에 신나게 놀고 왔다. 어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제 새로 간 클럽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이야기하는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 아주 신나 보였다.

“나중에 다 같이 가요! 거기 분위기 정말 괜찮아요.”

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에밀리와 조슈아, 지미를 바라보았다. 지미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지금은 예전처럼 놀라면 못 놀겠는데.”

“지미. 꼭 예전처럼 놀 필요 있어요? 그냥 가서 노는 거지.”

“나도 패스.”

“에밀리도요?”

믿었던 에밀리마저 손을 내젓자 엘라는 마지막이라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도 조슈아는 모르는 척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아까 경영지원팀에서 올라온 이번 달 광고 및 협찬 단가는 지난달보다 약 8% 더 올랐다.

조슈아는 조용히 전월 대비 이번 달 단가를 그래프화했다. 다음 총회 때 빌이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패였다.

“뭐, 됐어요. 조슈아 갈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요.”

엘라가 툴툴댔다. 모니터만 바라보던 조슈아가 옆으로 고개를 기울여 엘라와 눈을 맞추고는 배시시 웃었다. 참 어쩔 수 없다는 듯, 서운한 티를 팍팍 내던 엘라 역시 웃어 버렸다.

“조슈아는 정말 클럽이랑은 담을 쌓았어요.”

“하긴. 그날 조슈아 고생 꽤 했을 테니까.”

지미가 피식 웃으면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 아니에요. 엄청! 엄청 했다니까요.”

“그래그래. 엄청 했겠지. 내가 갔을 때, 아주 술 냄새가 그렇게 배었을 정도면 뭐, 말 다 했지.”

조금 찔리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고생한 것은 맞으니까. 그리고 짐짓 편집장실에 눈을 흘겼다. 아직도 출근하지 않는 보스를 바라보듯이.

*

모두가 입을 모아 동의하는 ‘그날’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반 전이었다.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조슈아가 처음으로 파티에서 단독 보좌를 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교 모임을 비롯한 대부분의 파티의 보좌는 에밀리의 몫이었다. 빌이 싫어하는 경영인 파티를 비롯해 각종 쇼 뒤풀이 파티, 영화 시상식 등 수많은 파티에서 에밀리는 단 한 번도 참석자들의 이름과 소속 회사, 직책 등의 정보를 틀려 본 적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빌과 대체로 어떤 관계인지도 알고 있어서 그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완벽하게 서포트했다.

때문에 파티에서 조슈아의 몫은 많지 않았다. 빌과 에밀리를 따라다니며 컴퓨터와 사진으로만 봤던 사람들의 실물을 익히거나 지미가 없을 때 운전을 하는 등 부수적인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올라온 결재 요청 서류는 많았고 당일에 해결해야 할 일은 더 많았다. 퇴근 한 시간 전에 쏟아지는 서류들에 에밀리는 관자놀이를 두어 번 눌렀다. 형형한 에밀리의 눈에 조슈아는 물론이고 팀원들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보스든 에밀리든 한 명은 남아야 했다. 그리고 보스보다 일을 더 잘 아는 에밀리가 남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네. 어차피 보스 사교 모임에 오는 사람들이야 거기서 거기니까. 지미는 근처에서 대기할 거지만 술은 적당히 하고.”

에밀리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조슈아는 ‘거기서 거기’까지에 포함된 빌 또래의 정재계의 젊은 인사들을 열심히 되새겼다. 사진과 간단한 약력 그리고 보스와의 관계까지. 모두 다 간단한 시험까지 보면서 암기한 자료들이었다.

조슈아의 차림새를 보던 에밀리가 묵직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알겠지만, 보스 술잔에서 절대 눈 떼지 말고.”

어딜 가든 질 나쁜 또라이는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부지게 대답했다.

“명심할게요.”

에밀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조슈아 몰래 올라간 입꼬리에는 아주 조금, 안도의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파티의 초반, 모든 것은 조슈아가 준비한 대로 착착 흘러갔다.

파티의 장소는 일반 사교 클럽에서 미러볼이 번쩍이는 고급 클럽으로 바뀌었지만, 조슈아가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정도였다.

다 아는 사이여서 따로 빌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언질해 줄 필요도 없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 다가오거나 소문이 더러운 사람이 기웃거릴 때 조슈아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 역시 완벽했다.

“…그래서, 네 말은, 나를 위해서, 네 옷을, 버렸다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잘빠진 우퍼가 쿵쿵댈 정도로 커다란 음악 소리와 사방이 번쩍이는 미러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빌이 소리치듯 끊어 말했다. 빌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데도 조슈아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화이트 와인으로 젖은 와이셔츠 앞섶을 들어 보였다.

거짓말. 빌이 말했지만 조슈아는 못 들었는지 헤헤 웃을 뿐이었다. 어두운 클럽의 분위기에도 조슈아의 하얀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득 찬 제 잔을 비우고 오라고 건넬 때마다 에밀리가 하던 대로 다 마시더니 결국 조금 취했나 보다.

에밀리야 자타가 인정하는 술꾼이었지만 조슈아는―빌의 기준에서―썩 잘 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눈치 빠르게 술잔을 잘 비우더니만 오늘은 왜 또 맹하니 그걸 다 받아 마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빌이 혀를 차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슈아는 에밀리를 대신해 단독 보좌를 한다는 사명감에 푹 빠져 있었다.

조금 전, 빌과 사이가 좋지 않은 데이빗 런치가 접근했을 때 자신의 대처는 정말 매뉴얼 그 자체였다. 시비가 걸리기 전에 런치의 앞에서 마치 부딪힌 것처럼 와인을 쏟는다. 이때, 절대로 데이빗 런치에게 한 방울도 튀어서는 안 된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을 보며 데이빗 런치는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멀어진다. 절대로 조슈아가 실수로 제 셔츠에 와인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는 빌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입모양을 최대한 크게 하며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그니까 보스. 보스 구하려다 한 거니까 제가 물티슈로 손보고 올 때까지는 제발 여기서 저 좀 기다려 주세요. 절대로 손에서 잔 놓지 말고요.”

“아예 같이 가자고 하지 그러냐?”

“정말 그래도 돼요?”

조슈아가 눈을 반짝거리며 되묻자 빌이 질린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쿵쿵거리는 음악의 리듬과 빠르게 돌아가는 화려한 빛들 사이에서도 빌은 전성기 톱 모델 빌 스웰딘인 것처럼 빛났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빌을 힐끔거렸다.

얼른 물로 옷을 닦은 뒤에 지미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적당히 취기가 도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착착 정리했다.

조슈아는 리듬에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지나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달콤한 와인이어서 그런지 살짝 끈적였다. 난감한 얼굴로 옷을 내려다보던 조슈아가 할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꺼냈다. 지미에게 연락을 해서 답신을 받는 것까지 채 5분도 안 되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조슈아가 화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빌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쩐지 너무 쉬웠다. 술이 확 깨는 기분에 조슈아는 난간을 잡고 1층을 내려다보았다.

미러볼이 반짝일 때마다 1층 무대 사람들이 쭉 보였다. 사람 수가 적어서 한 명 한 명 꼼꼼히 볼 수 있었으나 빌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조슈아의 걸음이 빨라졌고 보폭이 커졌다. 혹시라도 이 안에 빌에게 앙심을 품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거나 아니면 혼자 있는 빌의 잔에 누군가 약을 타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생각들이 자꾸만 이어져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냥 화장실까지 같이 가자고 했어야 했는데. 때늦은 후회를 할 때였다.

“아….”

옆만 보고 걷던 중 누군가와 부딪혔다. 상대가 들고 있던 잔의 술이 조슈아의 재킷과 셔츠 위로 쏟아졌다. 훅 끼치는 독한 술 냄새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 미안해서 어쩌죠?”

남자 목소리가 잠시 멀게 느껴질 정도로 독한 술 냄새에 조슈아가 잠시 휘청였다. 남자가 손을 뻗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더니 이내 조슈아의 팔을 잡았다. 아프지 않게, 딱 잡아 주는 정도로. 조슈아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 남자가 손을 떼었다.

“괜찮아요.”

더 독한 술이 부어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미 젖어 있던 터였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한테 더 화를 내는 것은 조슈아의 타입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급한 건 제 옷이 아니라 사라진 빌이었다.

“다 젖었는데. 정말 괜찮아요?”

사려 깊은 남자였다. 저보다 키가 훌쩍 크고 주변이 어두워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조슈아는 최대한 남자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러운 탓에 남자의 목소리조차 끊겨서 들렸다.

“정말, 괜찮아요. 그러면 먼저 실례할게요.”

조슈아가 남자를 지나쳤다. 그리고 난간을 잡은 채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환한 장소였다면 이렇게까지 걱정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두운 클럽, 야심한 시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조슈아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누구 찾아요?”

뒤에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조슈아는 ‘네, 뭐’ 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두운 조명 아래 남자의 실루엣이 언뜻언뜻 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혹시 여기 없으면 2층 테라스로 나가 봐요. 거기에도 사람들 자주 가니까.”

2층 테라스는 조슈아가 생각하지 못한 장소였다. 조슈아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풀리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며 테라스로 나갔다. 뒤에 따라오는 시선이 짙었지만 조슈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코팅된 강화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정말 테라스였다. 열기에 가득 차 있지만 시원한 안과 달리 후덥지근한 바깥 공기가 피부 곳곳에 스몄다. 그 더위를 느낄 새도 없이 조슈아는 하, 하고 큰 숨을 뱉었다.

정말 있다.

마치 화보라도 찍는 것처럼 난간에 기댄 채 앞을 바라보고 있던 빌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러는 보스야말로 왜 여기 있어요.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로 했잖아요.”

“네가 잘 찾아올 줄 알았지. 그런데 그 꼴은 뭐고. 아예 술을 들이부은 거야?”

“이게 다 보스 찾다가 그런 거거든요?”

빌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찬찬히 조슈아를 살폈다. 클럽 내의 열기와 조슈아가 없는 틈을 타 금세 엉겨 붙는 사람들을 피해 잠시 나왔는데, 조슈아 꼴을 보아하니 같이 따라갈 걸 그랬다.

나름 빼입었다고 자랑한 재킷은 물론이고 재킷 안의 셔츠까지 다 젖어 있었다. 실크 소재의 셔츠가 맨살에 달라붙은 채 살짝 속이 비쳐 보였다. 어두운 클럽 안에서라면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은은한 조명이 둘러싼 테라스는 달랐다.

조슈아가 움직일 때마다 언뜻 술 냄새가 났다. 술기운과 열기가 섞여 상기된 얼굴이 빌을 보고 웃었다. 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손 많이 간다니까.”

“보스, 드디어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알게 되신 거예요?”

“너 얘기한 거거든?”

“설마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조슈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빌이 제 재킷을 벗어서 조슈아한테 건넸다. 조슈아는 제 연봉을 훨씬 상회하는 아르마니 재킷을 들고 잘 개킨 뒤 들었다.

“뭐 하냐?”

“네?”

빌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입으라고 준 걸 왜 들고 있어.”

“저도 재킷 있는데 이걸 왜 입어요?”

조슈아는 제 재킷을 슬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풍겨져 나오는 독한 술 냄새에 빌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 들이붓고 온 거야.”

“보스 찾다가 다른 사람이랑 부딪혔어요.”

조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곤 제 재킷을 들어 펄럭였다. 빌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거 당장 벗고 이거 입어.”

“싫어요. 그게 얼마짜리인데요!”

조슈아는 들고 있던 빌의 재킷을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빌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조슈아의 재킷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면 술 냄새 나는 그 옷 계속 입고 있게?”

“벗죠 뭐. 안 그래도 더웠는데.”

“야!”

* * *

다시 생각해봐도 보스는 다혈질인 게 분명했다. 조슈아는 가끔 틴에이저 잡지에서 빌을 얼음 왕자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정정 자료를 보내 주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결국 그날 차 시트 버리게 할 작정이냐는 빌의 으름장에 제 재킷은 벗고 빌의 아르마니 재킷을 입었다. ‘셔츠에는 얼마 안 묻었는데’라고 꿍얼거릴 때마다 빌은 시끄럽다고 고개를 돌렸다.

지미는 진하게 풍겨 오는 술 냄새에 오늘 힘들었겠다며 조슈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말이다. 지미의 생각과 다르기는 했지만 힘든 것은 사실이었으니 조슈아는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아련하게 회상을 하던 조슈아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에밀리. 혹시 로건 헤네스라는 분 알아요? 보스 사촌이라고 하던데.”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던 에밀리가 조슈아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알지. 너는 어떻게 알아?”

“봤어요, 어제. 보스가 그렇게 누구 말 잘 듣는 건 처음 봤어요.”

“보스가, 누구 말을 들어요?”

엘라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보고 조슈아가 잠시 웃었다. 아마 저도 어제 저런 눈이었겠지, 싶었다.

“뭘 그래. 가끔 에단 말도 듣고 그러잖아.”

“음, 저는 못 봤나 봐요.”

엘라는 솔직했다. 조슈아는 키득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시간이 제법 되었는데 보스는 출근할 기미 하나 없었다. 에밀리한테 조금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는데, 정말 늦는가 보다.

하긴 빌이 꼬박꼬박 출퇴근을 하게 된 것도 요 두세 달 전부터였다. 그 전의 근퇴는 아주 자유로웠지.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얼른 일을 하고 최대한 빠르게 퇴근을 해야 했다.

“시작이 좋은데요?”

엘라가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발간 때문에 기본 8시에 퇴근하던 평상시와 달리 오늘 퇴근은 6시 15분이었다. 선방이었다.

엘라는 고개를 저으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빠른 퇴근이 가능했던 것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던 조슈아의 덕이 컸다.

패션 용어에 약한 터라 피처팀의 기사를 제외하고 시사팀 기사나 경영지원팀에서 올라온 오늘 대부분의 서류는 다 조슈아가 처리했다. 결재를 맡아야 할 서류도 간추린 덕분에 에밀리의 일이 한결 줄었다.

“이번 주 다 이렇게 끝나면 정말 좋겠다.”

“오늘처럼만 하면 가능하지.”

에밀리가 조슈아를 보고 웃었다. 조슈아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시선을 피했다. 에밀리가 저렇게 웃을 때마다 에투왈이 들썩인다는 것을 조슈아는 잘 알고 있었다.

피한 시선에 우연찮게 편집장실이 닿았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빌은 결국 출근하지 않았다.

보스의 출근을 왈가왈부할 만큼 조슈아가 일에 열정적으로 매진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스 없이 에밀리만 있어도 에투왈은 잘 돌아갔고.

어제 선약이 중요하니, 보스가 중요하니 하며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부리던 빌의 모습이 생각나 조슈아가 입꼬리로 웃음을 흘렸다.

딱 오늘도 비슷한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인 걸까? 오늘도 선약이 있었으니까.

“정말 오늘 아무도 안 가는 거죠?”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엘라가 마지막으로 묻는다는 듯 한 명 한 명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정말 아쉽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미가 놀리듯 말했다.

“클럽에 직장 동료랑 가서 뭐 해. 혼자 가야 다른 사람도 만나지.”

“직장 동료랑 가야 여러 사람을 만나죠. 저만 가면 한 사람밖에 더 만나요?”

“그러면 클럽 말고 간단하게 식사는 어때?”

지미의 제안에 새침하던 엘라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엘라가 에밀리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잠시 핸드폰 액정 속 시계를 바라보던 에밀리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엘라가 에밀리의 옆에 바짝 붙으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손을 내저었다.

“저는 선약이요.”

“선약이면 조를 수도 없네요. 참, 르네랑 무슨 일 있었어요?”

조슈아가 움찔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엘라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파파스 피자 갔는데 르네가 조슈아 언제 다시 오냐고 막 묻던데요?”

“뭐, 글쎄요. 내가 요즘 좀 안 가서 그런가?”

조슈아는 대강 말을 얼버무렸다. 따로 묻는 게 없는 것을 봐서는 르네가 에이드리언에 대해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엘라는 그런가 봐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아무도 몰래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러면 파파스 피자는 다음에 조슈아도 같이 가고, 오늘은 다른 데 가 볼래요?”

“어디 갈 데 있나?”

“새로 생긴 중국 음식집이 괜찮다고 하는데, 어때요?”

“그러면 먼저 가 볼게요.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오늘 먹을 저녁 메뉴 선정에 들뜬 직장 동료들과 헤어진 조슈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큰길로 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었다.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할 것도 없이 통화 버튼 가장 상단에 있는 이름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두어 번의 신호음이 길게 느껴지고, 연결음과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 퇴근했어요?

“네. 지금요. 에이드리언은요?”

- 나도 지금 했어요.

“어디에요?”

- 당신 앞에요.

전화에 신경 쓰는 사이 앞을 놓쳤다. 조슈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 왔는지 앞을 가로막은 에이드리언을 발견하자마자 조슈아의 입가에 반가운 웃음이 고였다. 여전히 잘 세팅된 화려한 금발이며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는 코트며 아침과 달라진 것은 한 점 없었다. 에이드리언이 해사하게 웃자 아랫배부터 무언가 몽글몽글하게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색을 감추기 위해 조슈아가 괜히 짓궂은 척 에이드리언이 입고 있는 코트의 소매를 흔들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퇴근했다는 사람 치고 코트가 제법 선선했다. 마치 바깥에 꽤 오래 서 있던 사람처럼.

“…에이드리언 언제 퇴근했어요?”

“지금?”

“사실대로는?”

“방금 전?”

더 이상 묻는다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배시시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제법 일찍 퇴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에이드리언은 그보다 더 일찍 퇴근한 모양이었다. 기다리게 만들었다는 미안함과 기다려 줬다는 고마움에 조슈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일 없어요? 왜 이렇게 일찍 끝나요?”

조금 까칠했나, 싶은 차에 에이드리언이 한 발 먼저 걷고 조슈아를 뒤돌아보았다.

“그야 당연히 당신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으니까.”

“…정말 부끄럼 없네요.”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에이드리언이 어깨만 으쓱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조슈아 베넷보다 딱 한 살 많고 근처 투자 회사에서 근무하는 남자.

그리고….

좁은 조슈아의 세계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남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도무지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환하게.

저녁 식사는 가는 길에 간단하게 사 온 햄버거 세트였다. 에이드리언은 집 주변에 자리한 개인 햄버거 가게를 신기하게 쳐다봤었다. 가게 주인 역시 에이드리언을 보다가 조슈아에게 ‘혹시 배우예요?’라고 물었으니 서로에게 실례는 아닌 셈이었다.

가게를 나오며 걸린 묵직한 비닐봉지의 무게를 느끼면서 조슈아가 힐끗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에이드리언이 눈을 맞추며 빙그레 웃었다. 조금 전까지 호시탐탐 조슈아의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가로채기 위해 세밀한 눈으로 빈틈을 노리던 모습과 달라 보이는 게 웃겼다.

조슈아가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설마 이제 와서 얼굴 보는 게 부끄러운 거예요?”

“그럴 리가요.”

착각도 자유다. 물론 안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다른 의미인데. 에이드리언은 전혀 모르겠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턱선 날렵한 성인 남자가 해도 참 귀여운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슈아의 눈에 저절로 반달이 그려졌다.

에이드리언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조슈아가 풀어진 틈을 타서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투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일 때, 에이드리언은 봉지를 앞뒤로 흔들며 혀를 날름 내밀다가 다시 배시시 웃었다.

“뺏겼네요, 조슈아.”

남이 했으면 정말 어이없었을 것이다. 손에 들린 물건 하나 뺏고 저렇게 당당한 듯, 뽐내듯 웃다니. 하지만 에이드리언과의 관계가 재정립되자 웃기게도 설렜다. 지나가는 보딩스쿨 학생도 하지 않을 법한 어리숙하고 뻔한 일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부러 뺏겨 준 거예요.”

“네, 네.”

잘 알겠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대답을 늘였다. 그러고는 봉지를 들어 불투명한 비닐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집 주변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네요. 프랜차이즈는 사이즈 업 같은 거 안 해주는데.”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에이드리언을 보면서 이번에는 정말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웃음소리에 에이드리언이 눈만 깜빡였다. 조슈아가 턱을 까딱였다. 대상은 비닐봉지 속, L로 사이즈 업 된 감자튀김이었다.

“원래 그냥 가게도 사이즈 업 같은 거 잘 안 해 줘요.”

“정말요?”

“뭐, 이제까지의 제 경험이지만요.”

그 햄버거 가게에서 1년 반이 넘게 구매했는데 사이즈 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케첩을 두세 개 넣어 준 적은 있었지만. 1년 반 넘게 그대로였는데, 오늘에서야 자주 온다고 서비스로 사이즈 업을 해줬다는 말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조슈아는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이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의뭉스러운 얼굴조차 예뻤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을 자각하자마자 조슈아는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사람이 변하면 빨리 죽는다고 했는데 큰일이었다. 사람을 보고 이렇게 감탄을 거듭하다니. 이 상태로 가다가는 제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빌의 광팬들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깐, 그러면 나는 에이드리언의 애인이 아니라 팬이 되는 건가?

조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미간을 터치하듯 닿았다. 에이드리언이 배시시 웃었다.

“미간에 힘 들어가요. 힘 빼요.”

조금 전의 말도 안 되는 고민이 싹 날아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보니, 이건 팬의 애정이 아닌 게 맞았다. 가랑비에 젖어들 듯, 제 설렘은 그런 방식인 듯했다.

햄버거는 완전식품이었다. 양상추와 양파, 치즈와 고기 패티에 통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거친 식감은 완전 통밀이었다―으로 만든 번까지. 조슈아가 이 말을 하자 에이드리언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조슈아의 말에 감동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는 힐끗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햄버거를 감쌌던 포장지들을 단정하게 접고 있었다. 웃긴 일이었다. 하이스쿨, 아니 보딩스쿨 학생들도 사귀는 친구가 집에 오면 이렇지는 않을 것이었다. 저만 긴장하고 있나 싶어서 묘하게 억울했다.

그러는 새, 정리를 마친 에이드리언이 손바닥을 톡톡 털었다. 조슈아가 떠보듯 턱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다, 했어요?”

“네. 완벽하게요.”

“이제 뭐 할까요?”

조슈아의 물음에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찬란한 금발이 고갯짓을 따라 사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알아차렸다는 듯 에이드리언의 오른쪽 입가가 씩 올라갔다. 조슈아는 부러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글쎄요, 이 야심한 밤에?”

“야심하다기에는 초저녁 아니에요? 고작 8시인데.”

조슈아가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8시가 되기까지도 2분이나 남아 있었다. 보육원에서 나올 때, 브로디 선생님이 선물로 준 시계는 몇 년이 지났지만 제때 약만 갈아 주면 째깍째깍 잘 갔다.

이런 초저녁에 벌써 간다는 듯 말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냥 저랑 있는 게 부담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머릿속의 지레짐작에 조슈아의 눈이 샐쭉하게 길어지기 직전이었다.

“얼마든지 야심하게 만들 수 있죠, 난.”

다가오는 목소리가 낮고 짙었다. 녹갈색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 왔다. 순식간에 밤하늘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옅고, 몽롱하고, 또 아랫배가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압도된 분위기를 한 방에 뒤집은 것은 에이드리언의 눈매였다. 세상 진지하다는 듯 응시하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가슴팍을 가볍게 툭 밀었다. 에이드리언이 선선이 밀렸다.

조슈아가 고양이처럼 끝이 올라간 눈매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꿈도 꾸지 마요.”

역시 이 빨간 머리는 만만치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순진한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단호해지는 것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조슈아 베넷은 늘 예상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비서 일에만 만능인 줄 알았더니 사람 한두 명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듯했고, 사람 대하는 게 능해 보이다가도 제가 다가서면 한 발 물러섰다.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려나? 에이드리언의 시선은 조슈아의 모습을 좇았다. 잠시 현관으로 걸어가던 조슈아가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자리에 멈춰 에이드리언을 돌아보았다.

“아직은요.”

“…네?”

“못 들었으면 말고요.”

새침하게 돌아서는 귓가가 붉었다.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갛던 뺨이 언뜻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에이드리언이 풋 웃었다.

거 봐. 지금도 예측할 수가 없잖아.

그러다 에이드리언이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제가 웃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식은 눈으로 나풀거리는 빨간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그래. 딱 저 머리카락.

“영화, 보고 갈래요?”

그리고 저 얼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이 맑고 예쁘장한 얼굴.

그거면 되는데.

에이드리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별거 아닌 질문이 뭐라고 조슈아는 그새 긴장했나 보다. 몰래 하는 듯, 뱉어 낸 한숨이 너무 커서 또 제 눈치를 보기에 에이드리언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해사하게 피어난 얼굴을 보자 어쩐지 명치 아래 부근이 아릿해서, 에이드리언이 탁탁 가슴을 두드렸다.

조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조금 전까지 웅장한 전투 신을 보여 주던 TV 화면은 영화 엔딩 크레딧이 끝났다는 듯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대략 두 시간 동안 러그 위 자그마한 소파에 앉아 쿠션을 껴안고 영화에 집중했더니 온몸이 찌뿌둥한 느낌이었다.

에이드리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뒤 제 옆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팔을 쭉 펴는 걸 보면 말이다.

구부정했던 자세가 쭉 펴지는 느낌에 조슈아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에이드리언이 빤한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안 앉아요?”

에이드리언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소파와 조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프링 하나 꺼지지 않은 겨자색 소파가 불편하기라도 했던 걸까? 2∼3인용이라고는 하지만 남자 두 명이 앉기는 조금 좁았었나?

조슈아는 조금 전까지 제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하던 에이드리언의 체온을 떠올렸다. 하지만 좁았다고 해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함 없는 얼굴로 제 옆에 앉아 영화만 잘 봤는데.

“…다리에 쥐가 났어요.”

괜한 기우였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드리언은 부러 심통 난 표정을 지으려는지 볼을 부풀렸지만, 빵빵하게 부푼 볼과 새침한 눈매 속 흔들리는 녹갈색 눈동자, 어정쩡한 자세는 묘한 케미를 자아냈다.

“웃지 마요. 그럴 수도 있지.”

“소파에 앉아만 있었는데 왜 쥐가 나요?”

“…너무 앉아만 있었으니까 그렇죠.”

계속 앉아 있어서 쥐가 날 수도 있나?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쥐 난 에이드리언의 다리였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팔을 잡고 소파에 앉으라는 듯 소파 옆을 팡팡 두드렸다.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풀릴 것 같아요.”

“정말요?”

“네. 그러니까 조슈아, 쥐 좀 잡아 줄 수 있어요?”

“내가 말했잖아요. 소파에 앉기만 하면 내가 발 젖혀서 쥐 잡아 줄게요.”

“그거 말구요. 고양이 소리로요.”

“네?”

조슈아는 장난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유심히 눈을 마주했다. 에이드리언이 조금 계면쩍다는 듯 뺨을 긁었다. 그런 중에 저린 다리 때문인지 눈꺼풀을 파르르 한번 떨었다.

“어렸을 때부터 쥐 난 거 잡을 때는 고양이 소리 들어 왔거든요. 그래서인지 쥐 났을 때 그 소리를 들으면 좀 빨리 풀리는 것 같거든요.”

“플라세보 효과네요.”

변명처럼 길어지는 에이드리언의 말에 조슈아가 명쾌하게 결론을 냈다. 그럴지도요.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이다 미간을 찌푸렸다. 전기가 온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입술 끝에 힘을 주었다.

“이아옹,”

에이드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예상한 고양이 소리는 기껏해야 ‘야옹’이었는데 이건 정말 고양이 소리였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 배부르게 밥을 먹은 뒤 식빵을 구운 채 졸고 있는 고양이가 누군가 콕콕 찌르는 손길에 짜증 한번 내는 듯한 그림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날카롭게 치켜 뜬 눈동자는 투명한 갈색이고 말이다.

에이드리언의 놀란 눈을 보고 조슈아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했다.

“진짜 쥐라면 이미 도망갔을 텐데. 요 쥐는 달아났나 모르겠어요.”

“아, 음. 달아난 모양이네요.”

물론 정말 쥐 때문은 아니었지만. 에이드리언이 더듬거리며 정말인 듯 다리를 흔들어 보였다. 조슈아가 씩 웃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 * *

“조슈아, 요즘 누구랑 같이 출근해요?”

모니터를 보고 있던 조슈아의 숨을 삼켰다. 커질 것만 같은 눈에 힘을 빡 주고 표정 관리를 했지만, 엘라가 은근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딱 집어서 ‘누구’와 ‘같이 출근’을 하냐고 묻다니.

그나마 비서실에 엘라와 조슈아만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미는 빌의 출근을 위해 저택으로 갔고, 에밀리는 발간 최종 회의에 들어갔으니까. 무언가를 아는 것만 같은 표정에 조슈아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회사 사람들이 안 보일 법한 곳에서 헤어졌는데. 누가 본 걸까?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황에서 자주 사용하는 제스처였다.

“뭐, 궁금해요?”

조슈아는 더 은근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격한 반응을 보니 아직 확실하게 뭔가를 보거나 듣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저 정도면 툭 한마디만 던져 줘도 괜찮을 듯했다. 조슈아가 아무도 몰래 안도의 숨을 돌리면서 빙그레 웃었다.

“네.”

“네?”

“누구랑 같이 출근하냐면서요. 같이 출근한다고요. 누구랑.”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엘라가 아우성을 쳤다.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완벽하게 방음이 되어 있는 터라 다른 곳에 들리지는 않겠지만, 안 들린다 하더라도 비서실의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엘라도 자신이 시끄럽게 한 것에 대해 놀랐는지 헙, 입을 가리고 주변을 살폈다. 조슈아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에밀리가 있었다면….”

“킬…이네요.”

엘라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안 그래도 요 며칠 출근하지 않던 빌 때문에 잔뜩 신경이 곤두선 에밀리였다. 어제 에밀리가 산더미같이 쌓인 결재 서류들을 보다가 지포라이터를 꺼내 뚜껑을 딸깍인 것은 이미 에투왈 전 층에 퍼졌을 만큼 커다란 이슈였다.

‘실내 금연’이라는 말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는 에밀리였던 터라 두 가지 해석이 나왔다. 첫째, 너무 속 터져서 실내 금연을 잊고 바로 자리에서 한 대 태울 뻔했다. 둘째, 그냥 책상 위 결재 서류들을 다 태울 뻔했다.

아무도 에밀리한테 묻지는 못하니 진짜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엘라가 기운이 빠진 듯 책상에 엎드렸다는 것이다. 작은 위기를 넘겼다는 기분에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에이드리언과의 관계를 쭉 숨길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뽐내듯이 으스대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엘라든 에밀리든 에투왈의 사원이 에이드리언을 알게 된다면 에이드리언이 투자 회사를 다니든 아니든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날부로 에이드리언은 ‘축! 데뷔!’를 외치며 에투왈의 표지에 자리매김할지도 몰랐다.

상상 속 에이드리언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조슈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면 에이드리언은 그 얼굴과 그 몸으로 어떻게 아직까지 데뷔를 안 한 걸까. 조슈아 자신도 처음 에이드리언을 봤을 때 스크린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배우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정말 보스는 왜 요즘 안 나오는 걸까요?”

“그러게요.”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벌써 3일째였다.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얼굴 도장은 찍던 보스가 나오지 않자 에투왈의 직원들 사기가 뚝뚝 떨어졌다. 계약서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최고의 복지’라 불렸던 빌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물론 서류 결재할 사람 없는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빨리 보스 왔으면 좋겠어요. 에투왈이 날카로워졌어요.”

책상에 뺨을 댄 채 중얼거리듯 말하는 엘라를 향해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심코 투명한 자동문을 바라보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가 요정 대모님은 아니지만, 소원은 이루어 줄게요.”

“네?”

무슨 소리냐는 듯 엘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알아차린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션 너머로 자동문을 바라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자동문이 열렸다. 엘라가 코디했던, 딱 떨어지는 진회색 톰 포드의 투 버튼 슈트와 어깨에 걸쳐 코디한 새까만 아르마니 코트를 누구보다 잘 소화한 빌은 거만한 시선으로 비서실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야. 오면 파티가 열릴 거라며.”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특유의 오만한 목소리에 엘라가 우는 소리를 하며 책상 앞으로 나갔다.

“보스!! 왜 이제 오세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무심히 엘라를 바라보던 빌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너는.”

“네?”

“너는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슈아는 입꼬리를 빙그레 올렸다. 오랜만에 보는 보스의 투정을 받아 주는 것은 조슈아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출근 좀 시간 맞춰 하세요. 에투왈 복지를 생각하셔야죠.”

아주 조금은 진심이었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레 말하자 그제야 빌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조금 파티 같네.”

“바로 케이크도 준비해 오겠습니다.”

지미의 말이 이어졌다. 출근 한번 한다고 파티에 케이크라니. 과하다면 과할 일이었지만 에투왈의 왕자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슈아는 빌이 좋아하는 케이크 가게 몇 군데를 떠올렸다. 전화해서 가장 간단한 케이크라도 준비되는 대로 가져온다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아냐, 곧 다시 나갈 거야.”

하지만 곧 들려온 빌의 목소리에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빌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서 비웃듯 웃었다.

“꼭 놀란 고양이 같은 얼굴이네. 꼬리라도 밟힌 거야?”

“그게 아니라. 어디 가세요?”

“내 스케줄을 비서인 네가 묻는 거야?”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조슈아는 대답 대신 불만스러운 듯 뺨만 부풀렸다. 뭘 알려 줘야 스케줄을 조정할 텐데. 막상 오늘 출근하는 것도 몰랐던 터라 빌의 오늘 스케줄은 전면 백지였다.

통통하게 부풀린 뺨을 보고 빌이 손을 뻗다가 멈칫, 했다. 제 쪽으로 뻗어지는 손에도 무방비하게 새침하게 눈매만 올리는 조슈아를 보다가 빌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더 자리 비울 거니까 일주일 정도는 스케줄 잡지 말고.”

“안 그래도 요즘 보스 폰 불나는 거 아세요? 어제랑 엊그제도 연락 안 되어서 여자 친구 분들이랑 약속 다 취소했거든요.”

“잘했어.”

“정말요? 곧 헤어지자는 이야기 나올 것 같은데요.”

담백한 대답에 당황한 건 조슈아였다. 아직까지 온 연락에 헤어지자는 말은 없었지만 이제 곧 나올 때가 다 되었다. 하지만 빌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뒷목을 한번 주무르고는 말았다. 그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더니 다시 자동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간 되면 알아서 퇴근하고, 참.”

나갈 때에서야 뭔가 다시 떠오른 듯 빌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조슈아를 향한 시선에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빌은 잠시 엘라와 지미를 바라보더니 조슈아를 향해 말했다.

“조슈아는 따라 나오고, 지미는 바로 차 대기시켜. 내가 운전할 테니.”

“예.”

짧게 대답한 지미가 바로 문을 나섰다. 빌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앞서 나갔다. 엘라가 ‘빨리 또 출근하세요!’ 하고 외치는 말에도 한번 손을 흔들어 줄 정도로 여유를 부리던 빌이 지미와 엘라가 없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뭐 시키실 거라도 있으세요?”

“…약속은 재밌었냐?”

“아….”

낮게 말문을 열던 조슈아의 머릿속에 에이드리언이 퐁 떠올랐다. 이 정도면 조건 반사였다. 그 약속 하나 잘 지켜서 여기까지 왔으니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빌은 종이에 물감 한 방울 떨어져 물들 듯 복숭앗빛이 번져 가는 조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왜 얼굴이 빨개져?”

“요즘 자주 이러네요.”

조절되지 않는 얼굴 온도와 달리 입은 매끄럽게 말을 했다. 물끄러미 저를 내려다보던 빌이 손을 뻗었다. 이윽고 적당히 서늘한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깜짝 놀란 조슈아가 몸을 뒤로 빼기 전에 빌이 손을 거뒀다.

“열은 없는데. 닥터한테 가 보지 그래.”

말투는 무뚝뚝해도 내용은 걱정이었다.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빌이 맘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뭘 그렇게 웃어.”

“아니, 그냥요.”

철든 것 같아서 뿌듯하다는 말을 하면 또 미간 팍 구기고 싫은 티 철철 내겠지. 적당히 끊은 말에 빌이 입꼬리에 바람 빼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또 언제 웃었냐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 주에 시간 한번 비워.”

“왜요?”

하여간 일을 제외하고 조슈아 베넷의 눈치는 제로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순진한 갈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반짝였다.

“아, 지난번에 저녁 먹자는 거 때문이죠?”

그 간단한 걸 이제 떠올리고 기억해 낸 게 뿌듯하다는 듯 또 웃는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빨간 머리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자꾸만 얼굴이 제멋대로 풀어진다. 빌이 숨을 뱉어 내며 어깨에서 힘을 빼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조그마한 얼굴로 잔뜩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으면서 생색이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대답을 기다리는 제 쪽이었다. 아니라고 하면 말면 될 것을. 고작 그 한번 화낸 게 미안해서 이렇게 안절부절못했던 걸까, 아니면.

“좋아요.”

아니면.

조슈아 베넷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떠올렸다. ‘아니면’. 빌은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섣불리 무언가를 규정짓기에 이 빨간 머리는 제법 제게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역시 보스네요.”

엘라가 감탄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나 감동 먹었음’이라고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조슈아는 조금 웃었지만 마음은 엘라와 다르지 않았다. 비서실의 회의용 테이블 위에 올려진 갖가지 점심 식사들은 무척이나 훌륭했으니까.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10분 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발자국이 다가오는 소리에 으레 회사 직원이겠거니,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던 조슈아는 당황했다. 정갈한 빵모자를 쓴 사람 네 명이 저마다 커다란 트레이를 들고 비서실의 자동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조슈아가 뭐라고 이야기할 새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빌 스웰딘 님께서 주문하신 런치 메뉴입니다. 바로 드실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케이터링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직원들과 달리 에밀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회의용 테이블 위치를 알려 주었고, 케이터링 직원들은 노련하고 신속하게 음식을 세팅했다.

A4 용지만 한 네모난 접시가 스무 개 정도 깔리고 요리들이 얹어졌다. 윤기 나는 연어 샐러드와 게살을 넣은 샐러드와 콥 샐러드를 비롯해서 한 손으로 먹을 수 있는 네 가지 종류의 카나페―크래커 위에는 각기 다르게 새우, 크림치즈와 슬라이스 치즈, 참치, 베이컨이 올려져 있었다―, 유산지에 쌓인 채 한 입 크기로 만들어진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와 노른자가 톡 터져 있는 BLTE―베이컨, 양상추, 토마토, 거기에 요리사의 재량으로 추가한 달걀― 샌드위치에 베이글과 쿠키, 컵 과일까지.

개인 접시와 포크,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커다란 유리병과 그 옆에 투명한 유리잔까지 세팅이 되고 나서야 케이터링 직원들은 손바닥으로 요리들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한 시간 반 뒤에 수거하러 와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케이터링 직원들이 나가고 나서야 에밀리는 조슈아와 지미, 엘라를 돌아보며 박수를 짝 쳤다.

“미셸이 곧 커피 가지고 올라올 거야. 미셸 올 동안만 기다립시다.”

“이게 다, 뭐예요?”

에밀리가 세 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빠진 얼굴들이 웃겼다.

“뭐긴 뭐야. 보스의 지시지.”

“우와, 정말요?”

엘라의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엘라뿐만이 아니었다. 조슈아와 지미 역시 놀란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레 음식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에밀리가 작게 웃었다.

“뭘 놀라고 그래. 출근 안 하면 이런 거라도 하셔야지.”

“그러네요.”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자리에 없으면 돈이라도 쓰는 게 맞았다. 그래도 감동은 감동이었다. 예전에는 성과급으로만 주어지던 게 먹을 것으로도 변하다니. 조금 더 신경 쓰는 게 세심해진 느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완전히 먹을 것으로 가서 성과급이 덜 나오는 건 아니겠지? 돈은 중요한 문제였다. 조슈아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밀리.”

“응?”

“설마 이게 성과급 인하로 이어지지는 않겠죠?”

엘라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얼굴에 걱정이 번졌다. 곧 나올 프라다의 신상 가방을 예약했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연말 성과급을 생각하고 지른 것이라는 말도 말이다. 정말이냐고 놀라는 엘라를 보며 에밀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뭘 걱정하고 있어. 보스한테 넘치는 게 돈인데.”

아참. 그랬지. 초마다 돈이 쌓이는 보스가 비서실 직원들의 성과상여금에 째째할 리가 없었다.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 하마터면 소시민의 생각에 스웰딘의 왕자님을 끼워 넣을 뻔했다. 조슈아가 능청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자, 그건 그렇고 이제 다 왔으니까 먹을 준비 할까?”

에밀리가 투명한 자동문 너머에 시선을 주다가 피식 웃었다. 에밀리의 시선을 따라 가던 조슈아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 다 왔네요. 에밀리가 연락한 거예요?”

“그럴 리가.”

에밀리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과 동시에 자동문이 열렸다. 그리고 미셸이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린 커다란 보온병을 들어 보였다.

“짠, 커피 왔어요. 세상에 왜 이렇다 다들 오랜만이에요!”

“미셸! 자주 좀 놀러 와요!”

“나도 좀 반겨 주지 그래?”

미셸 뒤로 따라 들어오던 닉이 옆으로 빼꼼 고개를 뺐다. 더티 블론드 머리카락이 밑으로 쳐졌다. 엘라가 성큼 앞서 나가 미셸에게서 보온병을 받으며 닉을 바라보다가 음, 하고는 일부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래요. 잘 지냈죠?”

“이거야 원, 너무 다른데?”

닉이 섭섭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그제야 엘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연이어 웃음이 터지자 즐거운 분위기가 한결 더 풍성해졌다.

“그래서 식사는 언제 하게. 빨리 다들 와요.”

어느새 음식이 올려진 테이블 앞으로 간 에밀리가 먼저 접시를 들어 올렸다. 하나둘 움직이는 발걸음을 따라 조슈아도 테이블 쪽으로 갔다. 회식 같은 점심 식사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런데 조슈아,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네.”

따끈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시던 조슈아는 간신히 커피를 삼켰다. 하마터면 뱉을 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레가 들렸는지 콧속 점막과 목이 따끔거렸다. 조슈아가 입을 가리고 잔기침을 하자 엘라가 티슈를 뽑아 건넸다. 입가를 닦으면서도 조슈아는 눈을 굴려 빠르게 주변 사람들을 스캔했다.

“괜찮아?”

지미는 걱정을 했고….

“뜨거웠어요?”

미셸 역시 마찬가지고….

“데인 곳은 없어?”

에밀리도 그랬다.

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괜찮냐고 물으면서도 눈으로는 걱정하지 않는 닉과 ‘어떻게 해요’ 하면서 조슈아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엘라.

“괜찮아요. 당연히 좋아야죠.”

“아니, 그냥. 일이 없나 해서.”

“그런 말은 비서실과 안 어울리는 거 알죠?”

조슈아가 닉을 슬쩍 노려보았다. 닉이 시선을 피하며 구두 앞코로 바닥을 콕콕 찍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고개를 숙이고 어린아이처럼 발끝을 돌리기도 했다.

“알지. 비서실 바쁜 거 알지. 그런데….”

닉이 고개를 들었다. 이마와 입매에 진 주름 위로 미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닉이 저런 미소를 지을 때는 분명 뭔가 있었다. 조슈아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요?”

“일이 또 생겼지 뭐람.”

‘옆 부서에 신입이 출근했다더라’라는 일상적인 이야기 말하듯 닉이 가볍게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가벼운 게 아니었다. 조슈아는 요 근래 있었던 일들을 쭉 되새겼지만 딱히 짐작 가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일일 텐데.

세컨드 비서인 조슈아 베넷이 모르고 있었던 일을 변호사인 닉 드어본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은 조슈아에게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보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조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편안하고 다정한 미소 대신 사무적인 대외용 스마일이 올랐다.

“무슨 일인데요?”

“이번 상대는 일반인이더라고. 그것도 지렐드 단독으로.”

‘지렐드’라면 지난번 경고를 돌릴 때 명단에 있었던 황색 언론지 중 하나였다. 비록 기사 수준은 난잡하지만 인플루언서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로 제법 규모를 불리고 있는 잡지사였다. SNS를 잘 활용해서 일일 단위로 기사를 내기 때문에 분명 오늘 아침에도 확인했건만, 아침 이후에 뭔가를 터트린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얼른 핸드폰을 찾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닿는 곳에 있었던 핸드폰에 발이라도 달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새 비서실 소속 모두가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지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 빨간 머리, 조슈아 아니야?”

“저요?”

느닷없이 나온 제 이름에 핸드폰을 찾다 말고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미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과 조슈아를 번갈아 보았다. 미셸도 화면과 조슈아를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제 핸드폰을 찾는 것보다 지미의 핸드폰을 보는 게 더 빨랐다.

액정 속 파파라치 컷 중앙에 나온 사람은 빌이 맞았다. 아주 여러 각도로 나왔다. 걷는 모습, 잠시 멈춰 있는 모습. 보지 못한 옷이니 아마 요 근래 출근하지 않았을 때 찍힌 것 같았다. 사진을 살피며 쭉 내리다 조슈아가 멈칫했다. 누군가를 향해 환히 웃는 빌의 사진 다음 장에 빌의 옆에 모자이크 된 빨간 머리가 보였다. 반만 나온 빨간 머리는 조슈아의 머리카락처럼, 새빨간 색깔이었다.

“이거….”

“조슈아 아냐.”

조슈아가 말문을 여는 새, 곁눈질로 지미의 핸드폰을 보던 에밀리가 단정 짓듯 말했다. 지미가 정말이냐는 듯 조슈아에게 눈짓했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사촌 분 같은데. 저는 아니거든요.”

“보스 사촌이면 그 엄청나다는 그분?”

엘라가 생각났는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쩐지. 지금 이분 입고 있는 거 보면 다 장난 아닌데요? 코트랑 바지는 다 그렇다 쳐도, 운동화도 벨루티 같은데.”

“보스 사촌이면 보통 분은 아닐 테니까.”

지미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슈아는 낮게 숨을 삼키며 닉을 슬쩍 노려보았다.

“일반인이라면서요.”

“아니, 뭐. 나는 조슈아인가, 했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보스 사촌이면 일반인이지. 배우나 모델 계열은 아니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100% 맞는 말도 아니었다. 그래도 조슈아가 맡게 된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당장 기사를 내린다고 해도 이미 조회 수는 상당했으니 사진은 떠돌게 될 것이었다. 조회 수에는 잡히지 않는, 우회 트래픽까지 계산한다면 더더욱.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점심시간은 20분 남았지만 제 점심은 끝났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닉.”

“별말씀을.”

닉이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조슈아가 씩 웃었다.

“알려 준 김에 이전 건과 합쳐서 고소 가능하게끔 자료 좀 준비해 줘요. 지금 당장.”

“지금? 하지만 아직 점심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요? 보스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역시. 닉이네요. 하긴 저한테도 이렇게 일거리를 물어다 주시는 분인데. 얼른 가서 일하시겠다고요?”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는 데는 도가 텄다. 닉은 평소처럼 느물느물 넘어가려고 했지만 여기는 비서실이었고 언제나 중립파인 에밀리를 제외한다면 지미와 엘라, 미셸은 모두 조슈아 편이었다. 특히 미셸의 커피를 찬양하는 닉은 조슈아 뒤에 든든히 서 있는 미셸을 보며 거짓 눈물을 훔쳤다.

“일 하라면 일 해야지 뭐.”

“그것 참 듣기 좋은 소리네요.”

닉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미셸은 따라 나가면서 조슈아에게 ‘파이팅!’ 하고 응원을 던졌다. 졸지에 점심시간을 끝낸 조슈아가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핸드폰은 모니터 바로 아래에 있었다.

조슈아가 기사를 내려 달라 요구하는 문서를 작성하는 사이, 에밀리가 다가왔다. 그리고 평소처럼 책상에 기대고는 한마디 했다.

“스트레스 풀리는 소리라도 들려줄까?”

“무슨 소리인데요?”

에밀리의 위로 같은 말에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리던 조슈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 에밀리! 위험하잖아요!”

“뭐가?”

조슈아의 목소리에 에밀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엘라와 지미가 경악한 얼굴로 에밀리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라이터잖아요!”

“그래. 이거. 소리가 제법 괜찮아.”

“무슨, 소리요?”

“이거.”

탁- 탕-. 에밀리가 은색으로 완벽하게 칠해진 손톱으로 지포라이터를 열고 닫았다. 가볍게 튕겨지는 금속 소리가 경쾌했다.

“스트레스 풀리지 않아?”

에밀리가 씩 웃으면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와 지미, 엘라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투왈을 들썩이게 만든 이슈의 실체를 이렇게 허무하게 알아내다니.

“협박용이라면 소장과 증거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물론 진짜로 하려면 이거 더 추가하고. 스캔본은 둘 다 보내 놓았으니 확인하면 돼.”

매번 비서실 소속으로 바꿔 달라며 징징대는 닉 드어본은 아주 유능한 변호사였다. 거짓말 조금 보탠다면, 뉴욕에서 이기지 못할 재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닉이 내미는 두 개의 서류 봉투만 있으면 ‘지렐드’는 당분간 보스는 물론이고 에투왈도 건들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보스의 이야기로 한번 돈 맛을 본 지렐드가 겁먹은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달은 가지 않을까.

“고마워요, 닉.”

“별말씀을. 이 정도 했으면 곧 비서실 소속으로 승진일까?”

“일단 비서실 명예 소속으로 회식 때는 연락하죠.”

“그거 괜찮은데? 언젠가는 그냥 비서실 소속이 되겠지.”

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슈아가 입술 끝을 올려 웃었다. 닉은 조슈아가 바쁜 것을 알았는지 손만 대충 흔들어 보이며 비서실을 나섰다. 투명한 유리 자동문 너머 멀어져 가는 닉을 보던 조슈아가 사내 메일을 열었다.

닉에게서 온 메일에는 두 개의 압축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각각 ‘협박용’, ‘진짜’라는 직설적인 이름을 달고 있었다. 압축을 풀고 스캔된 파일을 살폈다. 소장이야 환상적인 솜씨로 잘 작성되었고, 증거는 조슈아가 아는 그대로였다. 조슈아가 소스를 줬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톱 모델의 은밀한 파티’, ‘왕자님의 사생활’ 등 진부하고 자극적인 제목과 빌의 사진을 모자이크 해 놓은 기사들. 사진 아래 돋보기를 끼고서야 읽을 수 있는 글자 크기로 ‘사진은 본 기사와 관계없음’이라고 쓰여 있는, 있으나 마나 한 변명들. 그 외에도 이번을 포함해 두 번이나 파파라치 컷을 찍어서 올린 것까지.

언제부터 미국이 이렇게 파파라치에, 또는 셀럽과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이유로 찍힌 일반인들의 초상권에 이렇게 관대했을까. 조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함께 찍힌 ‘빨간 머리 동지’를 위해 조금 더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슈아가 아차, 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티 내지 않고 비서실을 쭉 훑어보았다. 에밀리는 자리를 비웠고, 엘라와 지미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점심시간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파파라치 컷의 피해자이자 ‘빨간 머리 동지’를 위하는 이타적인 마음가짐 앞에 달달한 기분이 끼어들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핸드폰을 가린 조슈아의 엄지손가락이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닉을 몰아붙이던 조슈아는 어디론가 가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다 먼저 보냈네.”

입 밖으로 나간 말에 조슈아가 합, 입술을 앙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행히 엘라와 지미는 대화에 빠진 듯 조슈아의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다시 일하는 척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개 메시지는 에이드리언이 먼저 보내 왔다. 밥은 먹었는지, 뭐 하는지,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느니, 커피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제가 먼저 보낸 것도 없지는 않았지만 에이드리언이 보낸 메시지들에 비하면 적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조슈아가 드디어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닉 드어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잠시 고민했다. 오른쪽으로 간다면 바로 제 사무실이 있을 테지만 그 안에 있는 변호사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다. 딱딱해 가지고 원. 닉은 투덜거리면서 자연스레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왼쪽으로 가면 홍보팀의 앤디가 간이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거짓말도 잘하셔라.”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목소리에 닉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다가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뒤돌아섰다. 닉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껏 과장하며 검지로 제 자신을 가리켰다.

“누구 말하는 거야? 설마 나?”

“그러면 이 복도에 또 누가 있나요? 닉과 나 빼고.”

또각, 그리고 또 또각. 잘 빠진 하이힐 굽이 아찔한 소리를 내면서 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닉은 에투왈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대상을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음, 에밀리도 거짓말에 일가견 있잖아.”

에밀리가 입술 끝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그래도 그렇게 빤한 거짓말을 하지는 않죠. 그것도 사람 잘 구분하는 당신이 고작 빨간 머리라는 이유로 헷갈린다고 하는, 그런 거짓말은요.”

“뻔한 거짓말 대신 아무 말 안 하기로 한 거야?”

닉이 도발하듯 한마디 던졌다. 에밀리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흠 하나 잡을 곳 없이 완벽한 비즈니스적 미소였다. 입술은 곡선을 그리지만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 속 눈동자는 닉을 응시했다. 닉은 순간 제가 옴짝달싹 못하는 올무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에밀리는 나른하게 머리를 뒤로 젖혔다. 굽슬굽슬하게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거든요.”

“냉정하군. 에밀리. 제법 그를 아끼는 줄 알았는데.”

“아끼긴 하죠. 어딜 가든 보스 마음에 드는, 일 잘하고 눈치 빠른데다가 주제 파악까지 확실한 세컨드 비서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니까요.”

닉이 조금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 에밀리 스콧은 저런 사람이었지.

“생각보다 더 나쁜데?”

“글쎄요. 누가 더 나쁠까.”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에밀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닉과 가까워진 에밀리가 흥미롭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닉을 거의 스쳐가듯, 에밀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사진 속 남자가 로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조슈아한테 이야기를 한 닉인지, 아니면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 않는 나인지.”

“…확실히 당신은 마녀가 맞아.”

닉이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에밀리는 지금 제가 찔린 부분을 콕 집어서 이야기했다.

보스가 약한 보스의 사촌과 똑 닮았다. 그래서 채용도 쉬웠고, 보스와의 관계도 좋았다. 당연히 에밀리나 닉과도 잘 지냈다. 보스를 잡아 주는 목줄 역할을 톡톡히 했으니까. 조슈아 베넷이 잘한 것도 있지만, 어쨌거나 처음 적응 단계에서는 로건을 빼닮은 게 큰 역할을 했다. 어린 사회 초년생 조슈아 베넷이 알게 된다면 어쩌면…. 닉이 한숨 대신 고개를 떨궜다.

에밀리는 큰 칭찬을 들었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묵례를 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에밀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셔 있었다. 평소 에투왈의 실세, 에밀리 스콧의 권태로운 얼굴이었다.

“어쭙잖게 알려 줄 거면, 아예 하지 말아요. 알아 봤자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텐데.”

냉정하지만 그게 맞았다. 다 닳아 없어진 줄 알았던 양심의 모서리가 심장을 콕콕 찌른다고 해도, 말해 봤자 결과는 하나일 것이다. 조슈아 베넷이 상처받는 거.

“앞으로는 그러죠.”

“잘 생각했어요.”

에밀리가 웃었다. 이번에는 눈까지 휘어서.

* * *

지렐드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기사를 내릴 테니 좋게 좋게 가자는 사정조였다. 조슈아는 강하게 나갔다. 추후 변호사와 이야기한 뒤 연락하겠다는 말에 지렐드의 홍보 팀장은 잔뜩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기사도 내렸다. 한 건 해결이었다.

조슈아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푹신한 쿠션감이 든든하게 조슈아를 받쳐 주었다. 조슈아가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환하게 켜진 화면에는 새로 온 메시지나 부재중 전화는 없었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톡 내밀었다. 그리고 투정을 부리듯 핸드폰 액정을 꾹꾹 눌렀다. 하지만 애꿎은 핸드폰 액정을 건드린다고 해서 연락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메시지를 보낸 지 고작 40분 넘었는데도 이해 못할 만큼 성급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조바심이 났다. 바쁜 모양이었다. 일 때문에 전화를 못 받은 적도 있는 제가 기다리는 것 하나 못해서 되겠냐는 생각에 조슈아가 일부러 어깨를 추켜올렸다. 그리고 빌한테 전화를 걸었다. 사진이 내려갔어도 보고는 해야 했으니까.

하도 많이 걸어 눈에 익은 번호를 꾹 눌렀다. 신호음이 가기 시작했다.

“래서, 좀 이따가.”

우우웅- 즐거운 로건의 목소리 위로 핸드폰 진동음이 끼어들었다. 카페의 테이블 위, 빌의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이 뒤집어져 있었던 터라 수신자를 알 수 없었다. 로건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거리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빌은 느릿한 손길로 핸드폰을 뒤집으며 말했다.

“별거 아냐, 계속.”

빌이 말을 멈추었다. 로건도 똑똑히 보았다. 수신자는 '시끄러운 빨간 머리'였다. 로건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빌이 곤란한 얼굴을 하며 로건을 바라보다가 얼른 핸드폰을 제 쪽으로 당겼다. 로건이 눈짓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생각보다 더 친한가 보다, 그 비서랑.”

로건이 아는 빌은 저렇게까지 길게 누군가를 호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번호를 저장하는 사람 역시 아니었고. 제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100% 확신할 수 있었지만, 에단은 글쎄. 아, 미하엘이면 그래도 조금 승률이 올라간다. 그래 봤자 50%지만.

저장했거나, 혹은 저장하지 않았거나.

“전….”

“형,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빌이 먼저 말을 마쳤다. 로건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빌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로건은 태평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폭신하게 감기는 소파는 앉기에 딱 좋았다. 좋아하는 캔버스화를 신고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 게 재미있었다. 기분 좋게 눈을 감은 로건은 빌에게 전화를 건 빨간 머리 비서를 떠올렸다.

조슈아 베넷…이라고 했지. 비서실에서 보았던 조슈아는 제법 강단 있어 보였고 빌과 친해 보였다. 짐승 같은 제 사촌이 그만큼 곁을 내 줄 정도면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빨간 머리는 빨간 머리만의 고충이 있었다. 불처럼 강렬한 새빨간 머리카락은 제 형제들에게서도 본 적 없었다. 친해지면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음에 케이크나 사 들고 갈까. 로건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빌을 바라보았다.

전화가 길어지려는 모양이었다. 빌은 눈이 마주치자 로건한테 미안하다는 듯, 날카로운 눈매를 누그러뜨려 웃었다.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긴가민가했던 사람들이 흥분과 확신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빌 스웰딘 맞지?”

미국 전역을 봐도 제 사촌처럼 사람한테 관심 많이 받는 사람도 드물 것이었다. 어딜 가든 저렇게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좀 이따 빌이 전화를 끊거든 자리를 옮겨야 할 모양이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카페인데. 아쉬움에 혀를 차던 로건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번뜩 떠올랐다.

빌 스웰딘만큼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람.

그리고 그 순간 로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한 로건이 환하게 웃었다. 소년처럼 해사한 웃음소리를 터트리며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연락이 되네. 에이드리언 그렌트!”

전화 너머에서 귓가를 간질이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너무 얼굴 안 비추는 거 아냐?

“조금 바빴거든.”

통유리창으로 환한 햇살이 들어왔다. 에이드리언은 선 채로 창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17층 아래 환상적인 뷰가 펼쳐져 있었다. 전화 너머에서 로건이 빈정거렸다.

- 그래그래. 어련하시겠어. 바쁘신 몸이 어쩐 일로 전화까지 주셨대?

그 빈정거림에도 웃음이 섞여 있었다. 로건 헤네스다웠다.

“그냥. 메시지 보고 연락 못한 게 걸려서.”

- 걸린 김에 얼굴까지 보여 주지 그래?

“당연하지.”

- 오, 정말?

“그래. 언제든 연락해. 바로 갈 테니까.”

전화 너머에서 로건이 웃었다.

- 야, 그런 말은 애인한테나 해. 아니지. 애인은 있냐고 묻는 게 먼저지?

목소리에 묻어나는 은근한 기대감에 에이드리언이 잠시 눈을 감았다. 로건이 제게 애인을 물을 때마다 으레 에이드리언이 습관처럼 하던 행동이었다. 이렇게 하면 머릿속에는 쨍한 빨간 머리가 떠올랐고, 그다음에는 환하게 웃는 로건이 떠올랐으니까.

하지만 눈을 감고 있던 에이드리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얼마나 놀랐는지,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사이 전화 너머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이번에는 진짜 생긴 거야?

“…지금 회의 들어가 봐야겠다. 나중에 전화해.”

- 오케이.

뚝- 무심한 전화 종료 음과 함께 에이드리언이 핸드폰을 들고 있던 오른손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왼손으로 뒷목을 주물렀다. 하. 고개를 젖히느라 벌어진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조금 전, 눈을 감았을 때 떠오른 것은 언제나처럼 쨍한 새빨간 머리카락이 아닌, 조슈아 베넷의 웃는 얼굴이었다.

투명하고 곧은 갈색 눈동자와 가까이에서만 볼 수 있는 콧잔등 위 희미한 주근깨 몇 개, 소년처럼 해사한 얼굴이 다시 한번 에이드리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토록 사라지지 않던 얼굴 대신 고작 몇 달 만난 조슈아 베넷이 떠오르다니.

요즘 너무 많이 만난 게 분명했다. 아니면,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그다음에 나올 문장을 완성하고 싶지 않았다. 승산이 없는 것에는 걸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러니. 딱 이 정도가 좋았다.

에이드리언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반짝거리는 편지 봉투가 시선을 끌었다.

저녁 같이 먹어요! 물론 에이드리언 시간 괜찮으면!!

“하여간 사려도 깊어라.”

에이드리언이 혼잣말을 하면서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메시지만 봐도 사람이 떠오르게 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덧붙인 말이 조슈아의 볼이라도 되는 것처럼 꾹 눌러 준 뒤 에이드리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쉽지만 어떻게 하죠? 오늘 야근할 것 같은데… ;_(

에이드리언이 잠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몇 초 안 지나서 핸드폰을 다시 바라보았지만 조슈아는 아직 메시지를 보지 못한 듯했다. 쳇. 저도 모르게 혀를 차고 에이드리언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핸드폰을 책상 끄트머리로 밀어 두었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드리언이 자세를 바로한 채 말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서류철을 든 마크가 들어왔다. 결재해야 할 서류들을 보기 좋게 펼친 마크가 오후 일과 브리핑을 했다. 말없이 브리핑을 듣고 있던 에이드리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얼었다.

“내 기억으로는 오늘 4시 반에도 일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마크.”

“예. 원래 있었습니다만, 조금 전 4시 반에 약속 잡혀 있던 게이트 백화점의 미스 게이트로부터 약속을 미룰 수 있는지 물어보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녁 식사로 하자는 거겠죠?”

“맞습니다.”

마크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언은 이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올해 28살인 게이트 백화점의 상속녀 제니퍼 게이트는 아름답고 수완이 좋았으나 소문이 느린 모양이었다. 벌써 수백 명 넘는 약속 상대들이 어정쩡한 시간에 잡힌 미팅을 저녁 식사로 옮기려고 시도했던 것을 듣지 못한 듯했다. 물론 미팅에 걸린 계약 자체도 엎어진 것도 몰랐을 테고.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마크는 당연하다는 듯 묵례를 했다.

“알겠습니다.”

보고는 끝났다. 에이드리언이 결재 서류를 보고 결재하기까지는 대략 20분이 걸렸다. 그 서류가 반려되든 승인되든 소요되는 20분 동안 마크는 보통 새로운 티를 내왔다. 언제나 그랬듯 마크가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개인 탕비실로 가던 순간이었다.

“참, 오늘 식재료 좀 구매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마크는 순간 멈칫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주 익숙했으나 내용은 생경했다. 하지만 마크는 곧 뒤를 돌아 이야기했다.

“필요하신 식재료가 있으시다면 퇴근하실 때 가져가실 수 있게 구비해 놓겠습니다.”

지난번에 식빵과 베이컨 등을 사 놓았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 마크가 핸드폰 메모장을 켜던 때였다.

“내가 직접 살 거예요. 그러니 스튜디오 주변 마트만 알려 줘요.”

“왜….”

너무 놀란 모양이었다. 마크는 고삐 풀린 듯 새어나오던 본심을 갈무리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튀어나간 말은 이미 에이드리언의 귀에 들어간 뒤였다. 마크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 무례를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간결한 사과에 에이드리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크는 살짝 눈을 올려 에이드리언을 살폈다. 믿기지 않게도, 에이드리언은 웃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걸까? 평소와 다른 모습에 마크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침묵을 택했다. 잠시 후 에이드리언이 눈매를 가늘게 접고 반달로 휘었다.

“내가 직접 사려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생색도 내죠.”

근사한 목소리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없어서 마크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드리언은 제 계획이 마음에 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쉬운 일이었다. 하루 일정이 끝나가는 시간, 컴퓨터를 끄던 조슈아는 애꿎은 핸드폰만 노려보았다. 분명한 데이트 신청에 돌아온 의외의 대답에 전화까지 했건만 에이드리언은 안타까운 듯 짧은 한숨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쏟아 내었다.

알고는 있다. 직장인이라면 보스의 사정에 따라 갑작스러운 야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도 남는다. 하지만 하필 오늘이랄 게 뭐람. 어깨를 잔뜩 올렸다가 한번에 힘을 뺐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먼저 컴퓨터를 끈 에밀리와 지미 그리고 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빌의 깜짝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루 종일 엘라는 둥둥 떠다녔다. 아까 계속 사진을 찍더니 인스타에 올렸는지 알림이 줄창 이어졌었다.

“정말, 오늘 같은 날만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숨처럼 엘라가 내뱉었다. 에밀리가 앞서 나가며 피식 웃었다.

“이제 정말 본업은 안 하기로 한 거야?”

엘라가 가볍게 제 양 갈래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코디 지원하기 전에 패션모델을 했었다고 했는데. 엘라도 에밀리처럼 사전 조율이 있었을까? 조슈아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엘라가 흥미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내려놓았다.

“제가 옷을 입는 것보다 누군가를 코디해 주는 게 더 흥미롭거든요. 무엇보다 모델들 얼굴 실컷 보고 있는 것도 좋고.”

“운이 좋았지. 인터넷 접수를 하고도 지원서를 120통이나 보냈다며. 보스가 그 얘기 듣고 한 번 불러 보자고 했으니까.”

지미가 한마디 던졌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 코디네이터를 뽑는다고 했을 때 원사 접수는 인터넷으로만 받았다. 하지만 하루에 10통씩 꼬박 120통을 보낸 지원자가 있었다. 인사과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세절하려던 지원서는 그렇게 돌고 돌아 보스의 손에 넘어갔다. 결국 그 흥미로운 이야기에 엘라는 면접을 봤고 한 팀이 되었다.

엘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자랑스럽다는 듯 제 가슴 부근을 탁탁 쳤다.

“끈기라고 불러 줘요. 그래도 붙었으니 되었죠.”

해피 엔딩이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들어온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엘라는 제 영역을 만들었고 확고히 했다. 실제로 엘라의 센스는 패션 팀에서 가끔 조언을 얻으러 올 정도였으니까.

정문에서 내일 보자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은 짧았다. 내일 할 일은 내일의 자신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조슈아는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조슈아는 골똘히 생각했다. 집에 먹을 게 좀 있었나? 요즘 마트에 간 일도 거의 없어서 먹을 게 있다고 해도 제법 오래된 것일 게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중국 음식이라도 사 올까 하다가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배가 막 고프지는 않았으니 우유나 한 컵 마시고 자면 될 것이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조슈아는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이드리언은 저녁이나 먹었을까? 일하는 중일지도 메시지로 연락을 해야 할까. 메시지를 열던 참에 핸드폰이 울렸다. 수신자를 확인한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언제나 한 발 빠르네요.”

- 빨라야죠. 그래야 예상할 수 있으니까.

“직업병이에요?”

전화 너머에서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었다. 헤이즐넛이 부서지는 것처럼 근사한 웃음소리에 조슈아가 따라 웃었다. 다리는 부지런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3층을 지나 4층으로 들어섰다.

- 그것도 맞는데, 오늘은 기대 때문이에요.

“뭘 기대하는데요? 일찍 끝나서 퇴근할 거?”

- 그것보다 더 좋은 건데. 참, 조슈아. 저녁은 먹었어요?

“아직이요. 에이드리언은요?”

- 내 걱정은 말고요. 먹을 건 있어요?

“음, 집에 가 보면 알겠죠.”

- 그러면 내 집에서 좀 가져가요. 안 그래도 오늘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도 없는 에이드리언 집에서 나 혼자요?”

- 왜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5층에 다다랐다. 에이드리언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조슈아가 웃으면서 복도로 들어섰다.

“그렇다고 이야기해 줄까요, 아니라고 해 줄까요?”

- 그렇다고 해 줘요. 얼른 날아가게.

어린아이가 조르듯 말끝을 끄는 목소리에 조슈아는 잠시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일 빨리 끝내고 와서 쉬어요.”

- 안 되겠어요. 일 못 하겠네요.

“네?”

갑자기 전화가 뚝 끊어졌다. 조슈아가 벙찐 눈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찰칵, 작게 금속성 문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508호의 문이 열렸다. 문 안에 있는 사람은 야근 중이라는 에이드리언이었다. 조슈아는 홀린 듯 에이드리언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쩐지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집 안을 본 순간, 조슈아가 와, 감탄을 터트렸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야근한다고 해놓고 몰래 음식을 준비한 남자가 배시시 웃었다.

“당신 그 얼굴 보고 싶어서요.”

조슈아가 감탄을 삼키면서 피식 웃었다.

“당신이 기대한 만큼 내가 많이 놀라 보여요?”

“내 예측보다 훨씬 더요.”

꿀처럼 녹아드는 다정한 얼굴에 조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좀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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