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단순한 옆집 남자가 아닌 (4/22)

#3. 단순한 옆집 남자가 아닌

낙엽이 한바탕 구르더니 벌써 겨울이었다. 일상은 잔잔했다.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는 평온한 일상인 걸까, 할 정도로. 조슈아는 소파에 배를 깔고 누운 채 소파 너머로 뻗어나간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반쯤 벗겨진 슬리퍼가 발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창문 너머는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어제도 눈이 내렸다. 첫눈이 오는 날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야근이었을 것이다. 에이드리언의 전화로 겨우 첫눈이 오는 것을 보았다. ‘연인이 같이 눈도 못 보는 낭만 없는 회사’라고 에이드리언이 우는 소리를 하는 게 제법 귀여웠던 게 기억나서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보스가 저녁을 먹자고 한 날부터 두 권의 잡지가 더 나오고 12월의 초입으로 들어섰지만 아직까지 조슈아는 보스와 저녁 식사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런 투정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빌은 바빴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빌 스웰딘이라는 막강한 인플루언서 편집장과 스웰딘의 어마어마한 재력에 에투왈은 쉬지 않고 노를 저었고, 결국 많은 투자자들을 유치했다. 명함이나 하라고 앉힌 자리에 제법 성실히 임하자 놀란 스웰딘가는 계속해서 에투왈을 지원했고, 결국 에투왈이 몸집을 불리면서 빌은 계약을 하기 위해 자주 이곳저곳을 다녔다. 물론 에밀리는 뒤에서 모든 서류들을 다 준비했고.

“왜 자꾸 지원하는 거야!!”

이리저리 계약하느라 짜증으로 가득 찬 빌이 결국 미하엘에게 가서 한바탕했다는 것은 에투왈에 쫙 퍼진 소문이었다. ‘우쭈쭈 잘한다 내 새끼’라는 심정으로 막대하게 지원하던 미하엘과 에단이 한풀 꺾였다는 것을 입증하듯 그 뒤로는 지원이 적어졌다.

하지만 한번 상승세를 탄 에투왈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두 권의 잡지에 엄청난 광고 문의가 쏟아지고 지면을 차지하려는 피처팀과 패션팀 에디터들이 신경이 곤두선 채 으르렁거릴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14∼17P 모델이 세 번이나 번복되는 일까지 있었으니 정말 이번 12월 호는 조슈아에게도, 에투왈 모두에게도 다사다난한 호였다.

그러니까, 오늘의 유급 휴가는 정말 심신 노곤하던 모두에게 선물 같은 일이었다. 당직으로 잡힌 몇몇 직원들만 빼고.

사다리 타기를 통해 당직으로 잡힌 몇몇 직원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엄숙해지던 조슈아가 코를 킁킁거리다 환하게 웃었다. 그새 완성이 되었는지 주방에서는 근사한 냄새가 났다. 에이드리언이 커다란 쟁반에 노릇하게 잘 구워진 로스트 치킨을 얹은 채 나오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기에 그렇게 예쁘게 웃어요?”

“기대돼서요.”

“로스트 치킨이요? 조슈아가 보기에도 제법 괜찮죠?”

에이드리언이 슬쩍 쟁반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제 저녁 에이드리언이 시판 제품으로 사다 놓았다는 치킨은 오븐에 굽기만 하면 완성이 되는 간단한 음식이었지만 옆에 곁들인 매시 포테이토―이것도 시판 샐러드다―와 콩깍지 절임―물론 이것도 시판―, 당근 글라세―이것도―를 곁들이니 파는 것만큼이나 근사해 보였다.

하지만 조슈아가 기대하는 것은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빨간 혀를 날름 내밀고 눈을 휘어 새초롬하게 웃었다.

“어제 전화요. 내가 바라는 대로 다 해 준다면서요.”

“당연하죠. 얼마 만에 보는데, 다 해 줘야죠. 왕처럼.”

진짜 왕한테 하듯 한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목례를 하던 에이드리언이 눈매를 사르르 접어 웃었다. 사탕처럼 달콤해지는 기분에 조슈아가 풀리는 표정을 다잡았다. 그리고 정말 왕이라도 된 듯 턱을 치켜들며 눈매 끝을 올렸다.

“내가 뭘 어디까지 원할 줄 알고요.”

“어디까지 원하든, 다 들어 줘야죠.”

결국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 앞에서 눈매를 둥그렇게 휜 채로 웃는 조슈아 베넷을 보자 에이드리언은 가슴 한편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눈을 떼고 싶은데 시선을 떼지는 못했다.

큼큼, 한참 만에 조슈아가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제법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요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다 원해도 괜찮은데.”

에이드리언이 나른하게 웃었다. 조슈아가 무엇을 원하든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그 요구를 100%, 아니 200% 확실하게 들어줄 재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조슈아는 순하게 웃었다.

“다 원하면 다음에 에이드리언이 왕이 되는 날에 감당 못 해요. 내가.”

이제껏 제가 들어온 대답들과는 달랐다. 지극히 현실적인 답변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슈아 베넷은 늘 제 예상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번 답은 제 취향이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은 순간 서늘해지는 낯빛을 바꿨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아니꼬웠다.

아, 알았다. 에이드리언이 꼬이는 입가에 애써 힘을 주며 웃음을 유지했다.

이게 다 저 말 때문이다. 적당하게 선을 긋는 말투가 마치 순식간에 어디론가 홀로 날아갈 종이 인형 같아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숭아처럼 얼굴을 붉히고 가빠지는 호흡을 온전히 제게만 의지하며 키스를 받았으면서 이제 와서 시침 뚝 떼는 게 못마땅해서.

그것 때문일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아무렇지 않은 척 칼집 난 가슴살을 포크로 찍어서 조슈아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아- 어미에게 음식을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조슈아 베넷이 입을 벌렸다. 이제 조슈아 베넷은 당연하다는 듯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음식을 받아먹었다.

“같이 봉사활동 가고 싶어요.”

채널을 돌리다 언뜻 본 뉴스에서 연신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조슈아는 뻔하게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하고 싶은지 물었고, 에이드리언은 대답했다. 봉사활동 가고 싶다고.

달콤한 첫 크리스마스에 나온 말이 봉사활동이라니. 하지만 조슈아는 생뚱맞다고 하는 대신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잡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하여간 예쁜 짓만 한다. 예전에 크리스마스 때 봉사활동을 간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걸 또 기억하고 있다니. 에이드리언이 아쉬운 듯 제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훑었지만 조슈아는 상체를 뒤로 뺀 채 모른 척했다. 아직 햇빛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대신 조슈아는 놀랐다는 표정으로 에이드리언을 마주 보았다.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비죽이고는 이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조슈아의 뺨을 살짝 꼬집는 모습이 마치 한번은 넘어가 주겠다는 뜻 같아서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당연하죠. 누가 한 말인데.”

한숨과 같이 흩날리는 에이드리언의 말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정말 왕이 된 것 같았다.

“무슨 역할하고 싶어요? 산타, 루돌프, 아니면 지도 선생님.”

“산타요.”

“왜요?”

처음 봉사활동 간 사람이면 산타를 할 확률이 높아진다. 처음 보는 얼굴이면 아이들이 산타라고 생각하기 더 쉬우니까. 하지만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수염을 붙인다고 해서 산타 할아버지라고 생각할까? 똑소리 나는 다섯 살 매기뿐만 아니라 여섯 살, 일곱 살 반 아이들도 수염을 떼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조슈아는 수염을 떼이지 않게 애쓰는 에이드리언을 떠올리다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 에이드리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루돌프라면서요.”

* * *

에이드리언이 영화를 틀었다. 그가 고른 영화는 12월에 어울리는 가족 영화였다. 어린아이가 가족과 헤어진 뒤 가족을 찾아가는, 잔잔하고 적당히 감동적인 영화. 두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웃긴 장면, 눈물을 쏙 빼게 하는 장면이 번갈아 나왔다.

하지만 조슈아는 영화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조슈아는 영화보다 에이드리언을 더 많이 바라보았다. 장면마다 얼마나 잘 몰입을 하던지 결국 결말에서 가족들이 모이는 장면에서는 눈이 촉촉해졌다.

곁눈질로 바라보았는데도 시선을 느꼈는지 에이드리언이 조슈아 쪽을 바라보았다. 녹갈색 눈동자가 반짝였고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끄러웠는지 에이드리언이 바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는 아무 말 없이 에이드리언의 어깨를 쓱쓱 쓸어주었다. 입꼬리에는 이미 놀리고 싶은 마음이 잔뜩 걸려 있었지만 미리 티를 내지는 못했다. 영화 엔딩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서서히 화면이 페이드 아웃되면서 크레딧이 올라갔다.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겉으로 드러나는 장난기를 쓱 지웠다.

“내가 감성적인 영화에 조금 약해요.”

“또요.”

“또요?”

에이드리언이 눈을 깜빡였다. 조슈아가 비열한 척 씩 웃었다. 그리고 붉어진 눈매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주었다.

“또 어떤 거에 약하냐고요. 알아야 나중에 또 놀리죠.”

“정말 그럴 거예요?”

새침한 척 에이드리언이 눈매를 치켜뜨고 조슈아를 노려보았다.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좋은데요? 감성 풍부한 사람을 보면 부럽거든요.”

“내가 부러워요?”

“네.”

에이드리언이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참새가 부리로 쪼듯 조슈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작은 스킨십이 따뜻해서 조슈아가 천천히 에이드리언한테 머리를 기대었다.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자 기대고 있던 가슴팍이 조금 울렸다.

“그거 알아요? 조슈아 당신, 첫인상이랑 조금 다른 거.”

“내 첫인상이 어떤데요?”

“음. 되게 바르게 산 사람이구나, 했어요.”

“나한테 너무 맞는 말인데요?”

조슈아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에이드리언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생각하도 자신은 너무 바르게 살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이드리언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 달랐던 건 이거예요. 잘 울 거 같은데 의외로 안 우는 거. 쉽게 동요하지 않는 거. 지난번에 손가락 베이고도 아무렇지 않고.”

“음. 그럴 여유가 없었거든요.”

“네?”

에이드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슈아의 말을 곱씹는 걸지도 몰랐다. 조슈아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한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삶이 제법 팍팍했어요.”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였으니까. 어쩌면 뉴욕 바닥에는 널리고 널렸을 이야기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만날지는 확실할 수 없었지만, 에이드리언이었으니까.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내가.”

조슈아는 입매에 적당히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도 제 인생이었는데 너무 웃으면서 이야기하거나 우울한 모습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어렸을 때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커서 제가 보육원에 온 경로를 알아보니 부모님은 저를 낳고 2년 뒤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이유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가족이나 형제가 없었다, 이것만 알려졌다. 뭐, 있었다고 해도 한 몸 살기 바빠서 찾을 예정도 없었다.

“그래도 제가 있던 성당 보육원이 제법 후원 많이 받던 곳 중 하나였으니까 자라는 건 괜찮았어요. 때 되면 공연 보러 다니고 공원에 다니고, 악기도 배우고 운동도 배웠고요. 복싱 같은 거요.”

조슈아는 어깨를 한번 으쓱 추어올렸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끝났다는 듯 팔을 벌리고 손바닥을 펼친 채 작은 목소리로 짠, 했다.

“뭐 그 이후 이야기는 동화 같죠. 제법 공부를 잘하던 조슈아 베넷은 주립대학교에 진학했고 현재 비서로 일 잘하고 있고.”

제 인생을 이렇게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까지 제 인생에 대해 서술할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들어갔으니까.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자라왔고, 가까이 지내는 혈육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육원 내의 원장 수녀님부터 여러 수녀님들, 선생님들과 정말 가족 같은 형제자매들이 있어 어려서부터 질서와 규범 그리고 협동심을 배울 수 있었다.

대학교 입학 리포트를 쓸 때도, 장학금 지원서를 넣을 때도, 제 인생에는 꼭 부연 설명이 들어갔다. 그래서인지 이 간략한 사실들이 제가 살아온 28년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이상했다.

조슈아가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어쩐지 혀끝이 까끌했다. 에이드리언은 말없이 제 말을 다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어? 에이드리언이 입을 벌려 제 이름을 불렀을 때, 조슈아는 제 눈을 깜빡였다. 잘못 본 걸까?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조금 전 본 에이드리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깊은 눈매 속 녹갈색 눈동자며 하얀 얼굴이 어쩐지 조금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조슈아는 제가 본 것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살고 있네요.”

난 또. 조슈아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어 웃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열심히 살 거예요.”

조슈아 베넷은 이제껏, 지금도, 앞으로도 열심히 살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조슈아 베넷을 위해서. 그 당연한 한마디에 조슈아는 마치 어디에선가 모닥불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올라 가슴 한편에 뿌옇게 번지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살고 있네요,

그 별거 아닌 한마디가 왠지 모르게 따뜻해서 목이 따끔거렸다. 말 한마디라도 튀어나온다면 꼭 우스꽝스럽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조슈아가 푹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따갑고 힘을 준 눈에 서서히 막이라도 끼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언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 앞에 동그랗게 어깨를 만 채 고개를 숙인 조슈아 베넷을 바라보았다. 풍성한 새빨간 머리카락이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꼭 어린아이 같은 저 동그란 어깨에는 왜 저렇게 얹어진 게 많은 걸까? 저 조그마한 머리통에는 정말 어린 시절부터 어떤 생각을 해왔던 걸까? 조슈아 베넷이 작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나자 에이드리언의 머릿속은 온통 엉망이 되었다.

소매를 당겨서 눈매를 꼼꼼히 닦은 후에야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운 게 여실히 티 나는 눈가가 붉었다. 코도 새빨갛게 물들어 가지고, 조슈아가 헤헤 웃었다. 바보같이.

세상 누구보다 매끄럽게 말할 수 있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저 세 치 혀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찬사와 슬픔 저 끝에 있는 위로까지 건네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저 번진 눈물자국은 닦아 주어야 했다. 어떻게든.

생각과 동시에 성급한 손이 먼저 나가 조슈아의 턱을 잡아 들었다. 마치 예술품을 들어 올리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에 조슈아가 부은 눈만 깜빡였다. 우느라 예민해진 눈가에 푸딩처럼 달콤하고 따뜻한 체온이 닿은 것은 순간이었다.

조슈아 베넷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조금 전 울었다는 것은 다 잊어버린 얼굴이라서 에이드리언은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야 잘 돌아가는 머리가 허름하고 잡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상황에서 다정한 남자 친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제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고작 이 작은 거 하나 눈치채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 * *

손님의 방문이었다. 그것도 보스가 없는 사이에 온, 조슈아에게는 존경스러운 손님, 로건 헤네스였다.

“안녕하세요. 우리 지난번에 봤었죠?”

이렇게 강렬한 빨간 머리를 보는 건 정말이지 재미있는 일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더 재미있을 텐데.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서 저와 로건을 힐끔거리는 엘라처럼 누구보다 열심히 볼 수 있는데. 하지만 조슈아는 당사자였다. 그나마 지미가 없고 에밀리가 회의에 들어갔다는 게 다행인 걸까?

어색한 미소는 비서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도 보스가 잘 따르는 사촌을 향해서라면 더더욱. 조슈아는 완벽하게 상냥한 얼굴로 가볍게 묵례를 했다.

“아, 네. 보스 만나러 오셨어요? 지금 자리에,”

없구나. 조슈아는 난감함을 숨기려 앞니로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빌과 같은 피가 흘러서일까 아니면 로건 헤네스라는 사람 자체가 예쁘고 반짝반짝한 걸까. 다정하고 예쁜 얼굴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저절로 말끝이 흐려졌다. 비서답지 못하게.

“없죠? 안 그래도 에단이랑 있다고 연락 받았거든요.”

하지만 로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오히려 핸드폰까지 흔들어 보였다. 조슈아는 의아한 얼굴로 로건을 마주했다.

“아, 그러면.”

“미스터 베넷 만나러 왔어요.”

“저요?”

아니, 도대체 왜? 조슈아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저와 눈 앞 남자가 만나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상상이 꺼져 버렸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로건은 마치 무언가 기대하듯 반짝이는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하하. 조슈아는 그저 웃었다.

조슈아가 틀렸다. 빨간 머리, 그 한 가지 공통점만으로도 엄청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미스터, 라는 격식을 차린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기까지 고작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정말 이런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빨간 머리가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맞아요. 눈에도 잘 띄니까 수업을 빠지면 꼭 체크되고, 툭하면 애들이 놀리고.”

“혹시 어렸을 때 별명이….”

“진저!”

“진저!”

조슈아와 로건이 거의 동시에 단어를 외쳤다. 그리고 합, 입을 가렸다. 사내 카페, 주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미팅을 하던 사람들이 조슈아와 로건을 쳐다보고는 다시 제 할 일을 했다. 조슈아가 주변에 목례를 했다. 바에 있던 미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보였다.

조슈아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1, 2학년 때는 정말 인어왕자도 할 뻔했다니까요. 다행히 세바스찬처럼 손에 집게발을 끼고 있었지만.”

어렸을 때 생각이 났는지 조슈아가 몸서리를 쳤다. 정말 인어공주를 너무 하고 싶어 하던 친구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인어왕자가 될 뻔했다. 주인공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으나 비늘처럼 반짝이가 잔뜩 붙은 물고기 다리 스타킹을 입은 채 1분 동안 파닥거리며 공주님을 찾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로건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은 보스와 다른 의미로 편했다. 꼭 형제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이 바로 로건이었다. 다정했고 선했고, 눈을 올곧게 마주 봐 주는 게 좋았다. 그래서 보스가 그렇게 잘 따르는 걸까?

그 이십여 분 동안, 로건은 자신만 조슈아에 대해 알면 공평하지 않다면서 로건 자신에 대한 정보도 알려 주었다. 소아과 의사로 LA에 1년 있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조슈아가 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건이 소아과 의사라면 아기들도 주사를 맞을 때 울지 않을 것 같았다.

조슈아가 그렇게 말하자 로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아직까지 그 정도 실력은 아니에요. 주사만 나오면 많이 울더라고요.”

그 솔직한 대답에 조슈아도 따라서 웃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서인지 카페에는 때 이른 캐럴이 잔잔하게 퍼지고 있었다. 조슈아도 로건도 오늘의 즐거운 만남은 이쯤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잠깐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조슈아는 아직 일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면 빨간 머리 동맹으로 자주 봐요. 빌 없이도 이렇게.”

그 자주가 얼마나일지는 모르겠지만, 조슈아도 대환영이었다.

“빨간 머리 동맹이라, 이름만 들으면 셜록 홈즈 팬인 줄 알 것 같은데요?”

“괜찮은데요? 홈즈도 좋아하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유머로 넘기는 로건을 보면서 조슈아는 로건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들었던 의문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쾌활하게 웃는 로건을 바라보면서 조슈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속이 달라도 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건 꼭 보스와 닮았으니까. 정말 보스와 사촌 맞냐는 제 허무맹랑한 질문은 꼭꼭 삼켜야 했다.

* * *

“14시 40분부터는 마리르테린의 책임 편집장과 화상회의 예정되어 있고 15시 30분에는 시즌 브랜드 입찰로 인해 대회의실에서 임원회의 있습니다. 이후 17시 30분에 있는 미스터 캠리 내외와의 식사 후에 바로 디올 쇼로 이동 잡혀 있습니다. 식사 출발은 16시 50분이고 식사 장소는 ‘장 조지’로 예약해 두었습니다.”

연말이라 그런지 보스의 일정은 빡빡했다. 어쩌면 여자 친구들과 헤어진 게 보스의 빅 픽처일지도 모른다. 매번 일정 브리핑할 때마다 몇 시에 끝나는지 꼭 묻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빌은 끝나는 시간을 묻는 대신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로건이 왔었다며.”

“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동맹을 만났다. 그런데 어쩐지 빌은 조금 이상한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삼키는 듯 툭 한마디를 던졌다.

“재밌었어?”

“그럼요.”

“식사도 같이 했어?”

“아니요. 일하는 중이잖아요.”

식사 시간도 아니고. 조슈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제야 슬쩍 찌푸려 있던 빌의 미간이 풀렸다. 그리고 평소처럼 여유 만만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이번 주 목요일 저녁에 뭐해?”

“목요일에는, 음. 오랜만에 이른 퇴근 축하드립니다. 지난번에 보고드린 것처럼 저녁 파티 캔슬로 정시 퇴근 하시게 되셨습니다.”

“나 말고. 조슈아 너 말이야.”

“저요?”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어쩐지 그 맹한 표정이 마음에 들어서 빌이 낮게 웃었다.

“얘기했잖아. 시간 되면 같이 식사하자고.”

“내일 저녁은 약속이 있어서 조금 늦을 거예요.”

“아쉽네요. 내일 저녁에 조슈아가 좋아하는 음식 만들려고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요?”

“네.”

“뭔데요?”

조슈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에이드리언은 자주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만 대체로 레토르트 식품이나 사온 음식을 데우며 몇 가지 샐러드를 곁들이는 정도였다. 파는 음식인 만큼 당연히 제법 맛이 있었다. 다 좋아하며 잘 먹었는데, 에이드리언이 보기에는 조슈아가 유독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지? 뭘 그렇게 맛있게 먹었을까.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대답 대신 검지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볍게 댔다. 그리고 해사한 얼굴로 살짝 웃었다.

“다음에 하고 나서 보여 줄게요.”

조슈아는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차, 한 듯 궁금한 얼굴로 말했다.

“에이드리언네 회사는 회식 같은 거 안 해요?”

“네?”

“매일 정시에 퇴근하고, 따로 동료들이랑 약속도 없는 것 같고. 혹시 나 때문에 약속 다 취소하고 일찍 오는 건 아니죠?”

에이드리언은 헛웃음을 삼켰다. 회식이라. 조슈아가 말하는 회식은 팀별로 가볍게 식사를 하거나 펍을 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임원 회의 후에 하는 식사를 제외한다면 따로 회식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가끔 마크가 비서실 소속 사원들과 함께 회식을 가겠다 보고할 때면 법인카드 말고 제 카드를 하나 더 주는 게 참여라면 참여랄까. 마크도 그걸 알고 보고하는 거겠지만.

제가 정말 회식에 참여한다면…. 에이드리언은 제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씩 웃었다.

볼만은 하겠네.

하긴, 그래도 지금 제 앞에 있는 조슈아의 얼굴만큼 볼만할까. 하얗고 순진한 얼굴은 마치 글씨라도 써 둔 것처럼 읽기 쉬웠다. 티 안 내려 앙다문 입술만 빼고, 얼굴에서 에이드리언의 회사 생활을 걱정하는 티가 흘렀다.

에이드리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주로 점심에 회식해요. 일과 일상의 밸런스라고, 요즘 회사에서 한창 밀어 주거든요.”

“아!”

조슈아가 이제 알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생활은 어떻게 그렇게 똑 부러지게 하는 걸까? 이렇게 사람에 대한 믿음이 커서. 에이드리언이 츠, 혀를 찼다. 조슈아는 듣지 못한 듯 아기처럼 배시시 웃었다. 새하얀 뺨이 위로 올라가고 생기 도는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어쩐지 뺨을 찔러 주고, 울리고 싶고, 그러다가도 어르고 달래 주고 싶어서 에이드리언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콕.

뺨에 찌른 손가락에 조슈아의 갈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확장된 동공이 이내 손가락의 정체를 알아챈 듯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빨간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다정하게 눈매가 휘어졌다. 가늘게 접힌 눈매 사이로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렸다.

“뭐예요.”

야유하듯 말끝을 끌었던 조슈아가 이내 톡 쏘는 탄산수처럼 청량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그 시원한 웃음을 보면서 따라 웃지 못했다.

무언가 단단히 찔렸다. 조슈아의 뺨 말고, 다른 것이.

* * *

뭘까,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탁 막힌 기분이 드는 걸까.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에이드리언의 손이 멈추었다. 조수석에서 일정을 조율하던 마크가 핸드폰 통화 상대에게 집중하면서 백미러로 에이드리언을 돌아보았다. 5일을 밤 새고도 멀쩡하다 못해 완벽하게 두바이의 호텔 사업권을 따냈던 제 보스는 오늘따라 조금 이상했다. 서류를 보다 말고 멍하니 있는 게 벌써 네 번째였다.

설마 멀미를 느끼는 것은 아닐 테고. 마크는 보스의 지난 건강검진을 떠올렸다. 192㎝의 큰 키에 모델 같은 체형의 보스는 신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는 암암리의 소문처럼 건강 상태도 완벽했다. 잘난 사람은 폐활량도 좋았고, 심지어는 반고리관까지 튼튼했다. 그것도 엄청!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주치의를 맡아 온 닥터 클라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반고리관이 튼튼하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에이드리언은 지금 당장 NASA로 가서 3개월 동안 무중력 훈련을 받은 우주 비행사들과 함께 그 원심 분리기 같은 기구에 들어가 훈련을 해도 비등할 거야.”

껄껄 웃는 품새를 보면 농담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보스는 그만큼 신체 능력이 좋았다. 심지어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체력도 남들과 달랐다.

마크는 서둘러 전화를 마쳤다. 그러다 조심히 말을 건넸다.

“따로 문제가 있는 사항이 있으십니까?”

서류에 문제가 있든 아니면 생활에 문제가 있든. 여러 의미를 내포한 말을 에이드리언은 잘도 캐치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에이드리언이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천천히 피어나는 백합을 보듯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문제는 없는데….”

약간 잠긴 듯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백미러로 에이드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마크는 나올 말을 기다렸다.

“갈 곳이 있어요. 랜딩파크로요.”

현재 시간은 13:41, 할리우드가 낳은 세계적 감독 앤드류 맥카디와 가벼운 오찬을 끝내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길이었다. 아직 에이드리언 앞에 쌓인 일은 산더미 같았고 그 일이 끝난다고 해도 새로 시작해야 할 일이 뒤이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 바로 차 돌리겠습니다.”

다행히도.

에이드리언이 일에 있어서 빈틈이 없는 것만큼, 그의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훌륭한 능력의 비서 마크 웹디즈드를 포함한 워커홀릭인 비서실 직원들은 이미 사내에서도 유명했다. 인간을 쫓는 좀비들처럼 일거리만 보면 달려든다고 말이다.

에이드리언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서류 위로 핸드폰을 올려 액정을 터치하고는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힐끗 본 마크가 소리 없이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눈치 빠르게 랜딩파크를 향해 출발하는 운전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랜딩파크까지 남은 시간은 40분이었다. 마크에게는 서류 3개를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 * *

“와우, 세상에! 드디어 되네요!”

조슈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엘라가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환호성을 질렀던 엘라가 머쓱한지 헤헤 웃었다. 에밀리는 잠시 엘라를 바라보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머니볼이라도 된 거야?”

“그렇게 되면 조용히 사표를 썼겠죠.”

엘라가 먼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반짝였다.

“그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은 소식이요. <어제의 당신에게>가 영화화되거든요!”

“그거 소설이 원작이었나? 아마존에서 본 것 같은데.”

“맞아요! 진짜 원작 소설도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읽으면서 계속 울었거든요.”

엘라가 방방 뛰었다. 연인과 관계를 끝내고 후회 많은 남자가 자고 일어났다니 마지막으로 싸운 날의 다음 날로 돌아간 것부터 시작되었다는 이 소설은 엘라뿐만 아니라 조슈아도 알고 있던 책이었다. 에이드리언에게 선물 받아 읽던 중 취향에 맞지 않아 손이 가지 않던 책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에이드리언이 이 영화 보러 가자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조슈아가 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제 턱을 톡톡 건드렸다. 에이드리언과 집 데이트나 운동 데이트는 많이 했지만 이상하게 영화관에 간 적은 없었다. 저 영화나 보러 가면 되겠다, 하던 조슈아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엘라에게 물었다.

“그러면 영화는 언제 개봉해?”

“내년 가을이요!”

“생각보다 늦게 개봉하네.”

에이드리언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던 게 몇 달 전이었는데. 아무래도 첫 영화 데이트에 보기에는 너무 늦게 개봉했다. 하지만 엘라는 무슨 말이냐는 듯 열을 올렸다.

“늦게라니요! 크리스마스 지나고 크랭크 인 한다는데, 엄청 빠르죠. 심지어 감독이 앤드류 맥카디인데!”

“앤드류 맥카디면 영화판 좀 떠나겠다고 하지 않았어? 지난번에 하나 찍고 안 찍는다고 했잖아.”

“뭐, 모르죠. 그래도 한다고 계약 완료했고 배우들도 카렌 웨일즈에 니콜라스 오브라이언에… 감독 계약이 어제니까 오늘 영화화된다고 발표난 거겠죠. 뭐 덕분에 지금 소설 팬들은 다 행복에 빠졌죠. 이런 깜짝 선물이 어디 있어요.”

“캐스팅 한번 쟁쟁하네. 나중에 꼭 봐야겠어.”

지미와 엘라의 도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 대화 속 내용들 중 몇 개가 조슈아의 감을 건드렸다. 분명히 영화화된다고, 예전에 에이드리언이 이야기했는데. 묘한 기시감이 조슈아의 등허리를 가로질렀다.

“조슈아!”

“네?”

생각에 빠지려던 조슈아를 부른 건 지미였다. 지미가 흥미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무슨 소리야?”

워낙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힌 조슈아 대신 에밀리가 대답했다. 쓰고 있던 레이밴 안경까지 벗으면서.

“소문 못 들으셨어요, 에밀리? 누가 조슈아 출근 같이 하는 사람 봤다고 하던데? 그것도 되게 잘생기고 다정해 보인다고.”

세상에. 사내 소문 제일 빠른 에밀리가 못 들었는데 소문 느린 지미가 알고 있었던 거야?

지미의 말을 듣던 조슈아는 얼른 엘라를 바라보았다. 엘라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 엘라를 캐물어 봤자 소용없었다. 조슈아는 타이머가 시작된 소형 폭탄을 받아든 기분으로 잠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있어요. 만나는 사람.”

“정말? 축하해! 드디어 조슈아도 일 말고 사람이랑 연애하네!”

“드디어 듣네요. 축하해요 조슈아. 그런데 저 정말 아니에요!”

지미와 엘라가 한마디씩 했다. 조슈아가 멋쩍게 웃었다. 말이 빠른 사내에서 소문이 도는 것은 금방일 거다. 지금 이 비서실에서야 에이드리언의 존재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고 해도 어디에선가는 조금씩 선입견 어린 시선도 있을 테고.

그런데, 뭐. 다 상관없다. 그냥 에이드리언이랑 조금 더 손잡고 회사 앞까지 와도 괜찮겠다, 라는 생각만 들던 참이었다.

“조슈아, 애인 생겼어?”

보스 등장이었다. 너무 이야기에 치중해 있었는지 편집장실 문 열리고 닫히는 것도 몰랐다.

빌 스웰딘은 평소바다 눈매를 사납게 치켜뜬 채 조슈아를 향해 물었다. 목소리도 조금 낮게 깔린 듯 했다. 이상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조슈아가 얼떨결에 대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