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2
지은이 : 피가
펴낸곳 : 교보문고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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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2
피가
목차
#4. 당신의 다정에 반하여
#5. 크리스마스의 연인
#6. 당신의 다정 속 별거 아닌,
#7. 징조들
#4. 당신의 다정에 반하여
“오늘 보스 무슨 일 있었어요?”
조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조슈아는 답을 알고 있었다. No. 오랜만에 이른 출근을 해서 편집장실에서 보고만 받던 보스에게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엘라와 지미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며 조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편집장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빌은 눈매를 사납게 치켜뜬 채 순식간에 사무실 분위기를 얼려 버렸다. 그리고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뒤 잠시간 조슈아를 노려본-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지만- 뒤 바로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조슈아는 조금 황당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약간 기분이 처졌다. 아까 빌이 제 쪽으로 와서 콕 짚어 저를 노려본 걸 보면 분명 제게 용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뚜렷한 잘못도 없는데 소리 없는 질책, 그것도 상사한테 그런 시선을 받으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겠다는 듯 지미가 짝짝, 박수를 쳤다.
“그런 거 아냐? 보스는 요일별 애인들 다 정리했잖아. 그런데 조슈아는 이참에 애인이 생긴 거지.”
“아, 질…투?”
엘라가 말을 이어 받으면서도 어색하게 버벅거렸다. 세상에 빌 스웰딘이 질투라니. 웃다가 허드슨 강에 빠질 일이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저 한마디는 사무실 분위기를 풀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웃으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또 뭔가에 짜증난 보스가 애꿎은 조슈아를 닦달하는구나.
그 와중에 에밀리는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고 착실히 일을 했다. 농담을 주고받던 지미와 엘라 그리고 조슈아도 다시 업무에 매진했다. 울리는 핸드폰을 받고 쇼 스케줄을 정리하고, 결재할 서류를 작성하고.
조슈아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조금 전 전화를 준다던 테라즈 라인의 책임 PD일 것이다. 조슈아가 츠, 혀를 찼다. 이번 책임 PD는 가브리엘 라인에서 왔다고 했는데 일솜씨가 엉망이었다. 친한 척을 하며 계속 전화를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쇼 초대를 하면서 기본적인 큐 카드와 초대장, 좌석 배치도와 간단한 참석 명단도 안 보내는 건 심각했다.
조슈아는 화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상냥하지만 사무적인 어조로 제 할 말만 했다.
“네, 조슈아 베넷입니다. 이번 쇼 큐 카드랑 초대장 보내 주시면 편집장님 스케줄 확인하고 참고하겠습니다.”
- …제가 뭘 보내 줘야 하나요?
귓가로 퍼지는 나른한 목소리에 조슈아는 귓가에서 핸드폰을 뗀 뒤 액정을 바라보았다. ‘옆집 남자’. 왜 화면도 보지 않고 무작정 책임 PD라고 생각한 걸까. 조슈아는 “잠시만요.” 한마디만 한 뒤 일하는 것처럼 책상 위에 놓인 아무 서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걸어 나갔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무적인 목소리를 유지하며 바깥으로 나간 조슈아가 복도 끝에 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드리언!”
전화 너머에서 근사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사람 기분 좋아지는 웃음소리에 조슈아의 입매도 씩 올라갔다.
- 세상에 조슈아, 아까 누구랑 대화하던 거예요? 냉기가 풀풀 나던데요?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했어요?”
- 보고 싶어서요.
담백한 목소리가 조슈아의 귓가에 훅 꽂혔다. 조슈아는 배시시 웃었다. 제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을지는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겪어도 면역이 없었다. 좋아서.
- 왜 같이 보고 싶다고 안 해 줘요?
다 큰 남자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졸랐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조슈아는 이런 말투에 약했다.
“목소리 듣는 게 좋아서요.”
- 아, 정말 조슈아.
에이드리언이 앓는 소리를 냈다. 혹시 제가 말을 잘못한 걸까? 고개를 갸우뚱해 봤지만 훅 내뱉은 말이라 별말 아니었던 것 같은데. 조슈아가 말이 없자 건너편에서 먼저 용건을 꺼냈다.
- 정말 안 되겠다. 조슈아 잠깐 볼 수 있어요?
“언제요?”
- 지금요.
“지금?”
조슈아가 앵무새처럼 에이드리언의 말을 따라했다. 그게 웃겼는지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 안 돼요? 오늘 퇴근하고 못 보니까.
안 될 건 없었다. 잠시 다른 팀을 다녀온다고 해도 되고, 아까 보스와 있었던 일 때문에 바람 좀 쐬고 온다고 해도 괜찮았다. 시무룩한 에이드리언의 목소리에 머릿속으로 변명거리를 만들던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어디로 갈까요?”
- 랜딩파크요. 첫 데이트 약속 장소.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고 낭만적이구나 했던 에이드리언을 보며 ‘사람 참 낭만적이구나’ 하고 느꼈던 공원.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바로 나갈게요.”
따로 변명거리를 준비하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비서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에밀리가 퀵을 보낼 게 있다며 문 앞에 있던 포장물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지미는 이미 다른 팀에 서류를 가지러 갔다고 했다. 옷이 든 것인지 분홍색 비닐에 포장된 포장물은 무게도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다.
“다녀올게요!”
조슈아는 명랑하게 비서실을 나섰다.
부글거렸다.
블라인드 슬릿 하나를 비껴 올려 바깥을 바라봤던 빌이 슬릿에서 손을 떼었다. 조슈아 베넷이 연애를 한다는 말에 왜 이렇게 속이 뒤집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리에 앉으려다가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기분에 빌은 자리에도 앉지 못하고 서성였다.
언제나 제 옆에 있을 것 같은 조슈아가 연애를 한다니 주먹 쥔 손에서 물이 줄줄 새어 나가는 것 같았다. 가슴 한편이 내려앉은 것 같은 기분은 어린 시절 여덟 살 로건이 보딩스쿨에 간다며 백 밤 뒤에나 볼 수 있다고 할 때와 같았다. 그때 네 살이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엉엉 우는 것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적어도 로건은 백 밤을 자고는 제 곁으로 다시 와서 저를 놀아 줬으니까. 하지만 조슈아 베넷은 백 밤 뒤에도 누군가와 만나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내 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지. 빌은 그렇게 생각했다. 조슈아 베넷이 연애를 하든 뭘 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람. 오히려 그가 연애를 한다면 제 연애 때마다 연사로 잔소리를 하는 입을 막기에도 좋을 터였다.
그러나 빌은 다시금 표정을 구겼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데, 백 밤 뒤에도 누군가와 만나고 있을 베넷은, 정말.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배가 아팠다.
빌은 소파에 앉아서 잠시 초조한 듯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오늘 조슈아와의 저녁 약속을 상기했다. 그리고 아까 조슈아를 뚫어져라 쳐다본 것을 후회했다.
식사 전에 제 이상 행동에 대해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했다. 그래야 식사 간 어색한 흐름이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빌은 지금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얼굴로 뒷목을 매만졌다. 그리고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식사를 취소한다거나 혹은 다른 날로 미룬다거나 하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로지 오늘이 답이었다.
결심한 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법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편집장실을 나섰다. 문 바로 앞 비서실에 있을 조슈아를 향해 입을 열려던 순간, 빌은 튀어나가려는 목소리를 삼켰다. 아까 일의 여파인지 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그 말에 에밀리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빌은 잠시 조슈아의 자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조슈아는 어디 갔어?”
“방금 전에 퀵 보낼 게 있어서 회사 앞으로 나갔습니다. 아마 곧 들어올 겁니다.”
에밀리의 대답을 들은 빌의 머릿속에 두 가지의 선택지가 떴다. 올 때까지 기다린다. 따라 나간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 없이 선택지가 골라졌다.
빌이 성큼성큼 비서실을 나섰다.
* * *
시간이 딱딱 맞았다. 에투왈 정문에 다다르자마자 퀵이 도착했다. 포장물을 건네고 송장을 받자 에이드리언에게 연락이 왔다.
- 어디까지 왔어요?
“음, 지금부터 한 10분 정도 걸리는 곳까지는 왔어요.”
조슈아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간다면 적어도 6분 안에는 공원에 도착할 것이었다. 호흡이 차올랐지만 내뱉은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전화 건너편에서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었다.
- 땡. 1분이면 돼요.
제가 아무리 빨리 걸어도 에투왈부터 랜딩파크까지 기본 거리가 있는데. 에이, 설마. 말을 하려던 조슈아가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는 고개를 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바쁘게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왜 이제 봤지 할 정도로 눈에 띄는 화려한 미인이 핸드폰을 든 채 조슈아를 향해 웃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에이드리언의 곁을 지나며 힐끗힐끗 쳐다보던 사람들이 잠시 조슈아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전 같으면 아차, 부끄러움에 잠시 후회했을 법한 행동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저녁에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탓인지 부끄러움보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채 조슈아를 맞이하듯 팔을 벌린 에이드리언은 꽃이 피어나듯 화사하게 웃었다. 품 안에 뛰어들 듯 가까이 다가간 조슈아가 배시시 웃으며 에이드리언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아까아까요.”
“안 추워요? 많이 기다렸을 줄 알았으면 커피숍에 들어가 있으라고 할 걸 그랬어요.”
“괜찮아요. 조슈아 바쁘잖아요. 곧 들어가야죠.”
어쩜 이렇게 배려심도 깊을까? 조슈아는 예쁜 말만 골라 하는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바깥만 아니었으면….”
“조슈아. 만난다는 사람이 에이드리언 그렌트야?”
“네. 네?”
조슈아의 말허리를 끊고 들어온 의외의 목소리에 조슈아는 자연스레 대답하다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있을 목소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끼어든 목소리는 아주 익숙한, 제 보스의 목소리였다.
거짓이 아니었다. 돌아본 곳에 서 있는 사람은 남청색 코트를 걸친 빌 스웰딘이 맞았다. 잘생긴 얼굴이 아까처럼 인상을 쓴 채 조슈아와 에이드리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에 주름질 텐데. 조슈아가 작은 걱정을 삼켰다. 지금 급한 건 보스의 미간보다 주변의 시선이었다.
주변의 시선에 수군거림이 섞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심지어 에투왈과 한참 떨어져 있는데 곁에 지미도 없이 혼자 나왔다. 물론 주변에야 보디가드들로 쫙 깔렸겠지만 옆에 수행비서 한 명 있고 없고가 큰 차이였다.
사람들이 더 수군대기 전에 빨리 보스를 수행해 에투왈에 돌아가야 했다. 조슈아가 빌 쪽으로 한 걸음 옮길 때였다. 조슈아의 소매가 잡혔다. 에이드리언이 어린아이처럼 조슈아의 코트 소매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낯선 얼굴로 빌을 향해 말했다.
“혼자 여기까지 나와도 괜찮은 거야? 내일 잡지가 볼만하겠는데?”
“너야말로 혼자네? 마크 없이 길은 찾아갈 수 있겠어?”
어라? 조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명을 번갈아보았다.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걸쳐진 삐뚜름한 비웃음이며 빌의 얼굴에 떠오른 경멸이며 둘 다 생경한 모습이었다.
“아는, 사이예요?”
“그렇게 친근한 단어로 묶은 사이는 아니고.”
“그럴 리가.”
딱 잘라서 말하는 걸 보니 친한 사이는 아닌 거 같고. 빌의 정재계 관련 인사들의 얼굴을 외울 때 에이드리언의 얼굴은 없었고. 조슈아가 반복해서 에이드리언과 빌을 바라보았다.
누구든 계속 돌아보게 만드는 화려하게 잘생긴 에이드리언과 톱 모델 출신의 반항기 기질 다분하게 잘생긴 보스.
설마, 예전에. 한 번 그려지기 시작한 상상은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랐다. 둘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하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소년처럼 말간 조슈아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그 얼굴을 눈치챈 에이드리언과 빌이 거의 동시에 조슈아의 이름을 불렀다.
“조슈아?”
“조슈아?”
“설마 예전에 서로…?”
조슈아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에이드리언과 빌을 바라보며 말했다. 떨림 가득한 목소리에 뒤늦게야 내용을 이해한 에이드리언과 빌이 동시에 인상을 팍 썼다.
“아니에요!!”
“아니거든!!”
…아닌가?
저렇게 질색을 하는 거 보면 아닌 거 같기는 하다. 서로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둘 사이에서 조슈아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대치하듯 서로를 노려보던 분위기가 끝난 것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빌 스웰딘을 알아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혹시, 혹시? 하며 주저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 생기자마자 조슈아는 보스를 감쌌다. 자신들이 나와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는지 가드 팀 중 두 명이 빌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보스. 바로 들어가시는 게….”
“기분이 어때?”
“네?”
뜬금없는 말에 조슈아가 빌을 올려다보았다. 빌은 에이드리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아찔한 얼굴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오만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모든 것을 다 발 아래에 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그 표정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에이드리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에이드리언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할 정도로 처음 보는 얼굴에 조슈아가 잠시 움찔했다. 빌은 기분 좋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리고 아주 큰 배려라도 하듯 조슈아한테 한마디 했다.
“잠시 배웅 좀 하고 와. 그래도 멀리서 왔을 텐데 말이야.”
에이드리언의 회사는 바로 요 앞이었지만, 보스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따로 수행은 필요 없다는 듯 돌아서는 빌의 뒤로 가드들이 붙었다. 아쉬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남아 있는 에이드리언에게로 쏟아졌다. 조슈아가 할 일은 하나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에이드리언을 데려가기.
“솔직하게 말해요.”
“조슈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정말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나 말고 다른 남자나 감싸 주고.”
에이드리언이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듯 앉고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세기의 미인이 와도 울고 갈 만큼 처연한 얼굴이었다. 누구라도 나서서 달래 주지 않고는 못 배길 미모와 표정이었다.
“내, 내가 뭘요.”
바로 눈앞에 있는 조슈아까지도 어쩔 줄 몰라 하게 만들 정도로. 꿋꿋하게 제 말을 하려던 조슈아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잔뜩 상처 받았다는 눈이 메마르면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에이드리언은 연기에 능했다. 금세 눈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웃음이 나올 것같이 간질거리는 마음을 참으며 에이드리언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요. 어떻게 빌 스웰딘을 먼저 챙겨요?”
“제 보스잖아요. 제가 해야 할 일이고.”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또박또박 대답도 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던 조슈아는 어디로 간 걸까? 눈을 마주하며 어린아이 달래듯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면서도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에이드리언이 먼저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손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에이드리언은 조슈아 건너편을 향해 몸을 틀었지만 테이블 위 손바닥을 곁눈질했다.
“손 차잖아요. 커피 나올 때까지만이라도요. 응?”
구슬리듯 다정한 말투에 에이드리언이 눈으로 카운터를 힐끗 바라보았다. 주문을 하려고 줄을 섰을 때 앞에 네 팀이 더 있었으니 음료가 나오려면 못해도 5분은 걸릴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 손을 내밀던 참이었다.
테이블 위 조슈아의 손이 쏙 뒤로 물러났다. 황당함에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 손도 차겠네요.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안 말해 줘서 계속 서 있었잖아요. 이 추운 날씨에. 그리고 잠시 전화 좀.”
조슈아가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새초롬하게 붉은 혀를 내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슈아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적당히 거리가 벌어졌을 때,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제야 에이드리언이 탁 막혔던 숨을 내뱉으며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점점 달라진다, 착하기만 한 조슈아 베넷이.
아니면 원래 이랬던 걸까?
둘 다 나쁘지 않았다. 상관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잘 들어가셨어요?”
- 잘 들어갔겠어? 비서 없이 혼자 들어갔는데? 그것도 업무 시간에 말이야.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내가 이렇게 시간 많이 줬어? 빨리 끝내고 오라고 했잖아!
참, 유치하다. 지나가는 다섯 살 꼬마도 이것보다는 말이 통할 거다. 조슈아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전화 너머를 향해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다 말았다. 시간을 준 게 어디람. 그것도 근무 시간에 말이다.
“네네, 알겠습니다. 곧 들어갈게요.”
- 아, 그런데 조슈아.
“네?”
전화 너머에서 빌이 우물쭈물했다. 조슈아는 저 멀리서 커피를 받아 오는 에이드리언을 발견하고는 살짝 손을 흔들었다. 곧 가겠다는 몸짓을 알아들었는지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안 그래보였는데 아이 같은 면도 많고. 조슈아가 피식 웃는 사이 빌이 뭔가 말했다.
- …때?
“네?”
- 저녁 식사, 어떤 게 좋을 거 같냐고.
“보스 어디 가고 싶으신데요?”
순식간에 조슈아의 머릿속에 빌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 리스트가 떠올랐다. 뉴욕 어딜 가든-비단 뉴욕뿐 아니라- 빌 스웰딘의 이름만 있으면 없는 자리도 생겨났다. 엊그제 다녀온 곳은 제외하고… 빌의 취향을 맞추던 차였다.
- 너는 뭐 먹고 싶은데?
“저요?”
- 당연히 너지. 누가 또 있어?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다.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전화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셀럽이나 모델들과 데이트를 할 때 빌 스웰딘은 상대에게 취향을 물어보는 타입이 아니었다. 선물의 취향은 조슈아가 조사했고, 데이트나 식사는 오로지 빌 스웰딘의 취향에 맞췄으니까.
“음, 아, 혹시 제가 먹고 싶은 곳으로 가는 건가요?”
- 뭐, 영광인 줄 알아.
그렇다면 정말 영광이기는 했다. 제법 많이 미안했나? 뭐든 좋았지만 선택권이 넘어오자 조슈아는 심각해졌다. 제 월급으로는 생각도 못할 비싼 곳으로 갈까? 예약만 해 본 수많은 레스토랑들이 떠올랐다. 더불어 메인 셰프의 화려한 음식들도.
하지만 이내 조슈아의 머릿속에 재미있는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보스, 정말 제가 가자는 곳으로 갈 거죠?”
두말하기 없는 거 아시죠? 덧붙이는 조슈아의 입매에 짓궂은 미소가 은근하게 머물렀다.
“라테 다 식었겠어요.”
“아직 따뜻한데요, 뭘.”
에이드리언은 아메리카노, 조슈아는 모카라테였다. 애꿎은 휘핑크림을 휘휘 젓다가 조슈아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웬 한숨이냐는 듯 에이드리언이 눈을 깜빡였다. 조슈아가 못내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혼잣말하듯 말했다.
“나는 열심히 일한 것뿐인데, 내 애인이 계속 오해하니까 정말 속상하네요.”
누가 읽어도 속이 훤히 보이는 빤한 수에 에이드리언이 왼쪽 입가만 씩 올렸다. 곁눈질로 올라간 입가와 풀어진 눈매를 확인한 조슈아가 더 엄살을 부렸다.
“오히려 속상해할 사람은 난데 말이죠.”
“뭐가 그렇게 속상한데요?”
“정말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얘기 안 해 줬잖아요.”
그 말에 에이드리언이 해사하게 웃었다. 녹갈색 눈이 가늘게 휘었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는 걸까? 조슈아는 해갈되지 않은 의혹을 잔뜩 안고 입술을 톡 내밀었다. 바람에 새하얗게 튼 뺨이 이제야 좀 녹아드는지 따끔거렸다. 조슈아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금세 걱정 어린 목소리가 다가왔다.
“뺨 튼 거예요?”
“조금?”
조슈아가 말끝을 늘였다. 조슈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겨울 초입만 되면 한 번씩 트곤 했다. 한 번 트고 나면 로션이든 크림이든 챙겨 발라서 더 이상 트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에이드리언은 뺨이 터 본 적이 있을까? 순전히 순수한 호기심이 돋아났다. 마치 누군가한테 관리 받듯 언제나 말끔한 모습은 영락없이 도련님 빌 스웰딘이랑 비슷한데. 물론 혼자 사는 에이드리언이 누군가한테 관리를 받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아침마다 혼자서 머리를 말리고 옷을 고르고 단정하게 자신을 가꾸는 에이드리언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부지런한 남자니까.
“어디 봐요.”
조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눈앞의 남자는 조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얼굴을 가져다 대자 도자기 인형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조슈아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간 조슈아를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이 결단이라도 내리듯 말했다.
“내가 매일 크림 발라 줄까요?”
세상 우스운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 큰 어른한테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 아기 다루는 것처럼 했다. 에이드리언도 그 점은 알고 있는지 조금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거짓말 아닌데.”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 줘요. 오늘만 이런 거니까. 평소에는 잘 바르고 다닌다니까요?”
“음, 믿어 볼까요?”
못 미덥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에이드리언을 보면서 조슈아가 가볍게 가슴을 탁탁 쳤다. 그러고는 아차, 했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까지 왔다. 원래 하려던 이야기의 줄기를 찾듯 조슈아가 다시 천천히 눈매에 힘을 주었다.
“그래서, 나 속상하게 계속 둘 거예요? 얘기 안 해 주고?”
“얘기할 게 없어서 그래요. 정말. 아는 사이 아니에요. 오히려, 잘 모르는 사이지.”
“잘 모르는 사이라고요?”
그럴 리가. 조슈아는 제 보스를 잘 알았다. 키스하다가도 이름을 헷갈려 차이는 남자인데 잘 모르는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그것도 풀 네임으로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냥 제 친구가 그의 사촌이라 오며 가며 몇 본 본 게 다예요. 워낙 안 맞아서 서로 알 것도 없고.”
“사촌이요?”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말 한 토막을 따라했다. 보스의 사촌이라면, 조슈아도 한 명 아는데. 빨간 머리 동맹으로 맺어진 로건.
에이드리언이 머그컵을 감싸 들었다. 그리고 다른 손은 테이블에 내려놓은 채 손바닥을 보였다. 아까 전 조슈아처럼.
“네. 그런데 우리 이렇게 소중한 시간에 이렇게 남 이야기를 해야 돼요? 나는 다른 이야기 하고 싶은데.”
관리 받은 듯 우아하고 긴 손가락이 느릿하게 까딱였다. 반짝거리는 에이드리언의 눈동자에 조슈아는 머릿속 생각들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드는 걸 느꼈다.
아무리 보스와 에이드리언이 아는 사이여도, 여기에 로건까지 아는 사이로 추가되는 건 과한 우연이다. 그리고 조슈아는 우연을 좇아 생각을 펼치는 것보다 애인의 손을 잡는 걸 더 좋아했다.
마주잡은 손이 따뜻해서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한껏 풀어지는 기분에 투정이 절로 나왔다.
“아, 돌아가기 싫네요, 정말.”
“반차 내는 게 어때요?”
“음, 그럴까요?”
능청스레 말을 이어받은 조슈아의 입매가 저절로 풀어졌다.
* * *
“…정말 여기가 가고 싶다고?”
“그렇다니까요? 제가 자주 오는 곳이에요.”
빌이 고개를 들어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Jacop's restaurant] 노란색 전등이 사위를 밝히는, 뉴욕 한 귀퉁이 거리에 있는 제이콥의 중국 식당 네온 간판이 깜빡였다. 전등을 갈아야 할 시기가 온 듯했다.
정말 안 어울렸다. 때 탄 채 깜빡이는 이 거리의 식당과 빌의 세련된 롤스로이스, 그리고 이 식당을 즐겨 찾는 조슈아와 과연 이곳이 식당인지 의혹 어린 눈으로 내부를 힐끗거리는 빌. 재밌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빌을 놀리기 위해 이곳까지 데려온 건 아니었다. 이곳은 조슈아가 좋아하는 맛집이었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식당을 가리켰다.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거예요? 안 추우세요?”
“…들어가.”
식당 한 번 오는 게 무슨 큰 결심이라고 빌은 꼭 영화에서 마피아 보스가 조직의 사활을 결정하듯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슈아는 당연하게도 모르는 척 식당 문을 열었다.
특유의 독특한 향신료 냄새와 함께 후끈한 김이 조슈아를 반겼다. 물론 조슈아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향신료 냄새에 인상 쓸 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의외로 빌은 냄새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살짝 깨진 푸른색 바닥 타일과 실밥이 풀린 갈색 커버의 철제 의자를 보느라 바쁜 걸지도 몰랐다.
“조슈아 아냐?”
주방 입구에 쳐진 흰색 천을 걷으면서 제이콥이 반갑게 외쳤다. 조슈아가 헤헤 웃으면서 제이콥 쪽으로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흰색 조리복을 입고 있던 제이콥이 손을 뻗었다. 굳은살과 상처로 뒤덮인 투박한 손은 조슈아가 존경하는 ‘열심히 사는 어른’의 손이기도 했다.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한 뒤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희끗한 흰 머리가 검은 머리의 수를 앞서 나가기 시작한 50대 아저씨 제이콥 렁은 10년 전 중국에서 건너와 뉴욕 스트리트에서 중국 식당을 하고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가는 견학이나 소풍을 통해 중국 음식을 접해 온 조슈아가 3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 즐겨 찾게 된 식당이기도 했다.
배 둘레에는 넉넉하게 살이 붙어 있지만 자랑하듯 “다 내 요리가 맛있어서 붙은 살이라니까?”라고 능청을 떠는 제이콥은 조슈아에게 몇 없는 지인이기도 했다. 물론 요리 역시 맛있고.
“그런데….”
무심코 옆에 같이 온 사람을 살펴보던 제이콥의 까만색 눈이 작게 흔들렸다. 아무 말 하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빌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여튼, 어딜 가든 이렇다니까.”
봤냐는 듯 우쭐한 빌의 표정에 조슈아는 속웃음을 삼켰다. 물론 제이콥이 빌을 알아보고 놀랄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든 TV 가십 프로그램만 틀면 일일 단위로 ‘에투왈의 왕자님’이라는 간지러운 타이틀과 함께 빌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으니까.
하지만 제이콥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을 거였다.
“설마 바뀐 거야?”
조슈아에게 가까이 다가온 제이콥이 양손 검지를 돌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조슈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질책하듯 한마디 했다.
“애인 그렇게 바꾸….”
“아니에요! 우리 보스예요!”
무슨 말이 더 나올까 무서워 조슈아가 제이콥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제야 흐름을 읽은 듯 빌이 인상을 팍 썼다. 하긴 보스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오해를 받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일 것이다. 조슈아는 제이콥이 다른 말을 더 하지 못하게 얼른 주방 쪽으로 밀었다.
“제이콥, 평소처럼, 아, 아니다. 해피 패밀리 추가에 볶음밥은 양주 볶음밥으로요!”
제대로 발음되지 않는 타국의 도시 이름까지 말하는 조슈아의 주문을 제이콥이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그리고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는 듯 다시 결의에 불탄 얼굴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휴. 그제야 조슈아는 한숨 돌렸다.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는 빌을 향해 어색하게 웃다가 벽을 가리켰다.
“차, 한잔 드실래요?”
단출하게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는 뜨거운 재스민 차가 담긴 스테인리스 급수통과 이름 모를 꽃이 그려진 사기 주전자와 찻잔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제이콥의 목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차는 셀프 서비스]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왔었나 보지?”
“네.”
조슈아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주변 햄버거 집이나 피자 가게도 자주 들렀지만 가장 자주 오는 곳은 바로 여기였다. 요즘에는 매번 먹던 음식에서 벗어나 메뉴판에 있는, 서른 가지 넘는 음식들을 모두 먹어 보겠다는 듯 하나씩 추가했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에이드리언을 봤을 때 제이콥의 반응도 재미있었는데. 브라운관에서 보는 배우들에만 익숙해져 있던 제이콥이 스크린을 찢고 나온 듯 화려한 미모의 에이드리언을 보고 말까지 더듬었는데. 그리고 조슈아는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뭐라고 했었다. 언뜻 그 말을 들었을 때 에이드리언이 엷게 웃었는데. 아마 느낌상 에이드리언 역시 칭찬인 줄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만약 에이드리언을 보지 않았더라면 제이콥이 오늘 빌을 보고도 말을 더듬었을까? 잠시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신선한 오해를 하느라 그런 진귀한 장면은 보지 못했다.
잠시 피식 웃는 사이 빌은 보는 사람이 더 나른해지는 동작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빌을 응시할 때까지 기다렸다.
강렬한 시선에 조슈아는 괜히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그 새, 아니 그 자식과는 어떻게 만난 거야?”
조슈아가 빌을 찌릿 노려보았다. 남의 소중한 애인을 부르는데 비속어는 왜 갖다 붙이는지 모르겠다. 조슈아의 눈빛에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빌이 말을 바꿨다. 흰 천 너머에서 화력 센 불에 주물 웍이 달달 돌아가며 무언가 튀겨지듯 고소한 냄새가 났다.
“보스, 이거 사생활 침해인 거 아시죠?”
“지금 그게 중요해?”
“네!”
당연하다는 듯 바로 대답하는 조슈아의 천진한 모습에 빌은 가슴 깊은 곳부터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하여간 똑똑한 척 다 해 대더니 순 맹탕 맞다. 어쩜 저렇게 사람을 잘 못 보는지.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 독사 같은 자식이 혀를 날름거리고 눈을 번들거리고 있는데 그 앞에서 좋아 죽겠다는 듯 볼이나 붉히고 순진하게 웃는 꼴이라니. 다시 한번 그때를 떠올리자 어쩐지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도대체 이건 무슨 느낌일까?
로건이 애인을 사귈 때도 느껴 본 적 없는 기분인데. 어쨌든 형인 로건보다는 조슈아가 더 어린 탓일까? 웃는 게 꼭 하이스쿨에나 다닐 법한 학생 같아서? 아니면 그냥 로건과 닮아서?
빌 스웰딘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조슈아 베넷을 바라보았다. 저를 약 올리려는 마음이 가득한 듯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린 채 웃다가 결국 안 되겠다는 듯 사르르 눈을 접고 배시시 웃었다. 접힌 눈매 사이로 상냥한 갈색 눈동자가 빌을 응시했다. 지난번, 호흡이 닿을 듯 가깝게 다가왔을 때만 봤던 콧등 위 주근깨가 이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아. 투명한 물이 담긴 물통에 물감 한 방울이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처럼 심장 한편이 몽글몽글해졌다. 도톰한 붉은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듯 오물거릴 때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져서 빌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늦은 기분이었다. 억울하고 마음이 상했다. 조금 더 보면 지금 제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 가능할 텐데. 빌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그 대신 계속해서 다가오는 질문을 마주했다.
하필 왜 그 자식일까. 다른 사람과 함께여도 대차게 반대할 마당에.
왜 반대하는지, 정확히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빌이 볼멘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부루퉁해진 얼굴을 마주하고 조슈아는 차 한 입을 마셨다. 뜨끈한 차를 많이 마시면 살이 빠진다고 했는데. 물론 이 말을 한 제이콥이 살이 빠지는 게 본 적이 없으니 정말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힐끗 바라본 빌의 얼굴이 너무 심각해서 조슈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기분이 더 상했는지 빌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보스,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얘기할 테니까 미간 좀 펴요. 지금은 손 안 깨끗해서 만져 줄 수도 없다고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빌은 조금 기분이 풀어졌다. 엉킨 실타래의 끝이 만져진 기분이었지만 바로 웃지는 않았다. 그제야 예상대로 조슈아가 조잘거렸다.
“휴, 제가 졌어요. 사실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거든요.”
조슈아가 웃었다. 으스대고 싶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3년간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빌의 옆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그동안 조슈아는 조금 궁금했다.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음을 내주고 받는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했다.
“어떻게 만났냐고요? 몇 달 전에 이사 왔어요. 에이드리언이 제 옆집으로.”
“옆집으로?”
“네.”
“네가 사는 스튜디오의 옆집으로?”
“네.”
빌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도 무슨 느낌인지 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슈아 저도 처음에는 제 옆집으로 이사 온 에이드리언을 보고 놀랐으니까. 얼굴만 봐도 사람 북적이는 스튜디오가 아니라 빌의 집 같은 저택에 사는 왕자님 같으니까.
“하, 역시 독사 같은….”
“네?”
못 들었는지 조슈아가 되물었다. 빌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다음 질문을 시작했다.
“언제부터 사귀었어?”
“음, 이제 두 달 조금 안 되었어요. 두 가지 대답했으니까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되죠?”
“안 돼.”
“정말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모르는 사이라니까.”
“정말 보스 사촌의 친구예요?”
허를 찔렸다. 빌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자식이 로건 이야기를 했어? 너한테?”
“그 사촌이 로건이에요? 세상에!”
아차, 성급한 마음에 패부터 내밀었다. 빌이 할 만한 실수는 아니었다. 조슈아는 신기한 사실을 알아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 참 좁네요. 어떻게 에이드리언의 친구가 딱 로건이죠?”
빌은 물끄러미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 베넷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왜 조슈아 베넷이 사는 스튜디오의 옆집에 사는지, 새빨간 머리카락이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지. 막막했다. 어떤 것부터 얘기해야 하나. 아니, 얘기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조슈아 베넷이 자신의 세컨드 비서가 된 이유도 저 눈에 띄는 빨강 머리와 소년 같은 외모 때문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조슈아가 아, 하는 얼굴로 빌을 바라보았다.
“미스터 로건, 아니 로건도 되게 부자 아니에요? 막 부자들은 학교도 엄청 비싼 사립 다닌다는데. 친구면 설마, 에이드리언도?”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음식 나왔어.”
이어지는 조슈아의 말을 자른 건 제이콥이었다. 스테인리스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피 패밀리와 고소하게 볶은 볶음밥, 에그 롤과 바삭바삭한 탕수육 그리고 상큼하게 입맛을 돋워 줄 할라피뇨와 오이 피클이 있었다. 콜라 두 잔은 서비스였다.
제이콥은 많이 먹으라는 말과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리고 힐끔힐끔 빌을 곁눈질했다. 평소라면 가까운 데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텐데. 오늘은 보스와 함께 왔다는 조슈아를 배려하는 모양이었다.
뻗어 나가던 상상이 잘린 채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짝, 떼서 돌돌 굴렸다. 문득 몇 달 전, 에이드리언과 처음 밥 먹었던 게 떠올랐다. 그때도 이랬었는데.
“안녕, 조슈아. 그것 참 맛있겠네요.”
“뭐야, 너.”
빌이 으르렁거리듯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슈아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서 튀어나온 듯 에이드리언이 화사하게 웃으며 제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놀란 조슈아가 귀엽다는 듯 그의 뺨을 쓸었다.
“에이드리언, 어떻게 알고 왔어요?”
“조슈아도 없고 간단하게 밥 먹으려고 왔는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오긴. 에이드리언에게는 유능한 비서 마크 웹디즈드가 있었으니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탁월한 연기 천재였다. 지금 바로 카메라 앞에 선다면 그 해 영화제를 모두 다 휩쓸 정도로 말이다. 에이드리언이 정말 몰랐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조슈아와 눈을 마주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실내에서 조슈아만 혼자 뺨이 붉어졌다. 저도 느낀 듯 덥다, 중얼거리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귀엽긴. 티 나게 시선을 피하는 조슈아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언의 입가에 자연스레 진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사람 뚫어질 듯 쏘아보는 개자식만 뺀다면 더 좋을 텐데. 에이드리언은 시선을 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가 빌 스웰딘이라면 더더욱.
조슈아가 눈만 깜빡거렸다. 에이드리언을 한 번, 빌을 한 번, 다시 에이드리언을 한 번, 빌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누군가 이야기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에이드리언은 왜 오자마자 보스를 쳐다보고, 보스는 에이드리언을 쳐다보는지 말이다.
“…혹시 어린애처럼 눈싸움이나 하는 건 아니죠?”
“물론 아니죠.”
타이밍 좋게 에이드리언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졸지에 상대를 잃은 빌은 제 헛짓거리에 혀를 찼다. 에이드리언이 사르르 눈을 접고 웃으며 조슈아를 마주했다. 크림 녹는 것처럼 달콤한 웃음은 제가 언제 그런 유치한 장난에 상대해 주겠냐는 듯 어른스러웠지만, 조슈아는 속지 않겠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씩 올린 채 에이드리언을 응시했다.
그러는 사이 상황이 종료된 것을 알아챈 제이콥이 한껏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에이드리언은 에그 누들과 새우 딤섬 그리고 게살을 푼 계란 수프를 주문했다. 제이콥은 당연하다는 듯 콜라를 서비스로 내준 채 요리를 하러 들어갔다.
에이드리언이 빤한 시선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아,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안쪽 자리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왜 들어가?”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빌이 말했다.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주려던 조슈아가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뺀 상태에서 눈만 깜빡이다 대답했다.
“그…러게요?”
“지금 나랑 식사 중이잖아. 갑작스러운 동석은 매너가 아니고.”
빌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매너를 운운했다. 조슈아는 천천히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눈은 풀 죽은 강아지처럼 눈매 끝을 내려뜨리고 하얀 치아만 보이게 입만 웃는 모습은 제법 귀여웠지만 이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의 손가락이 조슈아의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그리고 철제로 된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빌이 뭘 계속 있냐는 듯 턱으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도발하듯 날카롭게 치켜뜬 눈은 예전과 똑같았다. 가소롭다는 웃음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에이드리언은 속으로 삼키고 대신 상냥하게 웃었다.
저 독사 같은 새끼, 뭘 잘못 처먹었나. 왜 저런 식으로 웃는 거야. 본능적인 경고가 삐용삐용 사이렌을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에이드리언이 매끄럽게 기름칠 한 로봇처럼 웃었다.
“조슈아, 사실 거짓말이에요.”
“뭐가요?”
“빌과 저, 제법 잘 아는 사이거든요.”
“잘 아는 사이는 개뿔….”
아마 예절을 가르쳤던 미스 에멜리아가 듣는다면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졸도할 것이었다. 사춘기 이후 험한 말과는 거리를 벌렸던 빌의 입에서 자연스레 거친 욕이 나왔다. 귀를 쏙쏙 뚫는 욕을 듣자 조슈아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래졌다. 슬럼가에서나 들을 법한 저속한 단어를 빌은 어색함 하나 없이 사용했다. 조슈아가 약을 올릴 때마다 가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모습을 보고 그래도 역시 도련님은 다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욕을 삼키는 모습이었는지도 몰랐다.
앞으로 더 조심해서 수행해야지. 조슈아가 굳은 결심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빌의 입가에 시린 비웃음이 걸렸다.
“왜 이래? 이제 완전히 노선 갈아타기로 한 거야?”
“어린 시절에 그렇게 섭섭해하더니 지금까지도 맺힌 거야?”
“개소리하지 말고.”
“어렸을 때요?”
빌과 조슈아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조슈아가 휘둥그레 눈을 뜨고 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 종알거렸다.
“미스터, 아니 로건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셨어요?”
“로건…을 알아요?”
어? 순간적으로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굳었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로건의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잠시 잠긴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조금 전 생각을 털어 버렸다. 친구의 이름 말하는데 무슨 상관이람. 대신 공통점 하나를 더 발견했다고 좋아했다.
“네. 보스 사촌이잖아요. 뉴욕 참 좁지 않아요? 내가 아는 로건이 당신 친구고.”
당신이 내 옆집에 살고, 내 보스와 아는 사이고, 새로 사귄 친구와 이미 친구인 사이고.
조슈아가 손뼉을 쳤다. 이러다 정말 앞으로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 다 만나고 돌아올 수 있겠다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들었다.
조슈아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에이드리언은 사람 심장 졸아들게 만드는 서늘한 시선으로 빌을 내려다보았다. 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끓어올랐다.띄다 조슈아가 로건을 알게 되어서인지, 로건의 이름을 말해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탓인지 알 길은 없었다.
빌은 앉은 자리에서 어깨만 으쓱했다. 눈은 여전히 새파란 적의를 띠고 있었고 입가에는 비틀린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아이고, 음식 다 식겠네. 안 먹고 뭐했어?”
팽팽하게 당겨진 분위기를 순식간에 누그러뜨린 건 제이콥이었다. 쟁반 가득 음식을 들고 온 제이콥은 우는 소리를 냈다. 아차, 그제야 앞에 있는 음식을 하나도 안 먹었다는 생각에 조슈아가 전투적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는 사이 제이콥이 테이블 위에 에이드리언 몫의 음식을 올렸다. 빌의 왼쪽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 꿈틀거렸다.
“왜 여기다가….”
“에이 다 아는 사이끼리, 싸운 거 있으면 같이 밥 먹고 풀고 그래야지.”
제이콥이 다 안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려다 결국 두 눈을 다 감았다. 그리고 황당함에 말 못하는 빌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더니 내일 장사 준비를 해야겠다며 다시 주방으로 나갔다. 근처 좀 나갔다 온다며 손님 오면 오늘 장사는 끝났다고 말하라고 조슈아한테 소리치면서 말이다.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간 제이콥의 뒷자리를 감당할 사람은 조슈아였다. 괜히 불편해지는 기분에 조슈아는 헤헤,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빌과 에이드리언에게 젓가락을 내밀며 조심스레 말했다.
“다 같이, 먹을까요? 이것저것 같이 먹어도 맛있을 텐데.”
그냥 빌이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 가는 게 더 나았을까? 잠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의외로 빌과 에이드리언은 잠잠하게 식사를 했다. 둘 다 젓가락질이 수준급이었다. 에이드리언이야 자주 봤고, 빌 역시 예절 교사한테 젓가락질을 배웠다고 알고 있었다.
“조슈아, 그러다 식사나 할 수 있겠어?”
“보스. 제가 잘못 집었으면 이미 보스 옷자락이 엉망이 되었을 거예요.”
조슈아가 음산한 목소리로 젓가락 끝을 딱딱 소리 나게 맞붙였다. 빌의 얼굴에 웃음이 도는 것을 보자 조슈아의 마음 한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는데, 콜록콜록, 옆에서 사레들린 듯 괴로운 기침 소리가 났다. 무언가를 잘못 삼킨 듯 에이드리언이 예쁜 얼굴을 찌푸린 채 입을 막고 연거푸 기침을 했다. 조슈아가 재빠르게 차가 식었는지 확인하고 에이드리언에게 건넸다. 조슈아가 입가까지 가져다주는 물을 마시자 그제야 에이드리언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괜찮아요? 뭐 잘못 삼킨 거예요?”
“그런가 봐요.”
“정말, 조심해요. 사레도 잘못 삼키면 엄청나게 힘들다고요.”
“정말요. 지금도 힘들었어요.”
에이드리언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꼭 놀려 주고 싶은 얼굴에 코라도 살짝 꼬집고 싶었지만 참았다. 바로 앞에 있는 빌의 시선이 따가워졌다.
“아는 카메라맨이라도 부르고 싶은데. 어때?”
잔뜩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젓가락을 내려놓은 빌이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응? 조슈아가 왜 그러냐는 듯 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그거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러 주면 좋지. 이왕 부를 거 팀으로 불러 주는 게 어때?”
“보수가 제법 비쌀 텐데. 조슈아와 같은 스튜디오에 살면 감당하기는 힘들 테고. 저녁 값은 걱정하지 마. 내가 내줄게. 팁이 필요하면 너도 이야기하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제 스튜디오와 함께 까였지만 정정을 하는 대신 조슈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에이드리언이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이죽였다.
“그건 사양하지. 대신 이런 자리를 없애는 게 어때? 피차 불편할 텐데.”
“이번 일이 불편해진 건 끼어든 네 탓이지.”
음, 그건 맞는 말인 거 같은데. 조슈아는 순식간에 몰리는 시선에 눈만 동그랗게 떴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반응에 에이드리언과 빌은 내가 맞았네, 네가 틀렸네 설전했다.
빌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어깨를 늘어뜨리며 손바닥을 천장을 향하게 한 뒤 한 번 으쓱했다.
“이런 게 취미인 모양이야. 항상 이런 식이잖아. 조슈아도, 로건도. 내가 그렇게 부러운 모양이야?”
“아직 사회화가 덜 된 모양이야. 너만의 친구를 찾는 거면 인형 가게로 가는 건 어때?”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내가 그렇게 부러우면 차라리 부럽다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동정이라도 해 줄 마음이라도 들게 말이지.”
“잡지사에 있더니 소설 쓰는 실력이 늘었어. 글쓰기 낙제 받아서 로건이 고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는 너는 연기력이 그대로인데? 드라마 스쿨로 편입하지 그랬어? 네가 구걸하는 연기라도 한다면 배급사를 전부 사들일 용의는 있는데 말이지.”
“의미 없는 말씨름은 이쯤 하고. 네가 잘하는 거나 해. 순식간에 낯 싹 바꾸는 거.”
“음습하게 구는 것들이랑은 상종하지 말라는 게 내 친애하는 사촌의 지론이라서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로건은 너와 연을 끊어야겠는걸?”
“사촌이 바른 길만 갈 수 있게 자갈을 제거한 거라면 얼마든지 이야기하라구.”
빌이 얼마든지 하라는 듯 너그럽게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에이드리언이 여유롭게 웃었다.
“그 자갈에 캐비닛 속 편지들까지 있는 걸 알아도 괜찮겠지?”
에이드리언이 핸드폰을 든 채 살짝 흔들었다. 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보딩스쿨 시절 철없었던 걸 잘도 기억하네. 그리고 딱 한 건뿐이야. 복수 붙이지 말라고.”
“손버릇은 오래 간다고 하던데. 지금 없어지는 물건은 없어요, 조슈아?”
갑자기 불린 이름에 조슈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빌이 대답을 가로챘다.
“당연히 없지. 그러는 너야말로 순진한 애 물들이지 말고 혼자 꺼져. 조슈아는 알아? 네가 왜….”
“에투왈에서는 일개 직장 보스가 사생활까지 간섭해?”
조슈아가 제 이름에 반응하기도 전에 에이드리언이 빌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형형한 눈으로 빌을 노려보았다.
빌이 조슈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조슈아가 상처받는 것은 빌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제 말실수를 알아차린 듯 빌이 에이드리언이 의도한 대로 말을 돌렸다.
“내가 어딜 가나 ‘일개’ 붙는 사람은 아니잖아. 사람 보는 눈이야 정확한데. 마침 내 비서의 주변에 잡뱀 한 마리가 꼬였지 뭐야.”
“내가 보기에도 그래. 워낙 착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거절을 못하더라고. 조금 오래 같이 일했다고 선을 넘는 건 수준 미달인데 말이지.”
“너 말 다 했냐?”
끽, 의자가 살짝 밀리며 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탓에 누군가 본다면 금세 위압감이 들 법했지만 안타깝게도 에이드리언은 그와 비등했다. 에이드리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아주 조금 더 크려나.
“조금 덜 했는데, 계속 들을 거야?”
조롱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빌이 결국 하,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을 터트리던 찰나였다.
“정말 더 할 거예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둘의 시선을 빼앗았다.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조슈아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식사가 끝난 모양인지 접시가 많이 비어 있었다. 콜라를 한 모금 마신 조슈아가 입꼬리만 빙긋 올려서 웃었다.
“에이드리언 말이 맞네요. 제법 오래 안 사이 같은데. 여기서 더 하면 참 볼만하겠다. 그렇죠?”
“아, 조슈아. 그게….”
“조슈아.”
웃지 않는 조슈아의 눈을 바라보면서 에이드리언과 빌이 난감한 듯 조슈아를 불렀다. 다 끝나니까 새삼 부끄러운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에 조슈아는 호들갑을 떨며 서로를 말리는 대신 잠시간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사람 앞에다 두고 모르는 이야기하는 거 정말 무례한 일인데 제가 아는 두 신사분이 저한테 이럴 줄은 몰랐네요. 맛있는 밥 먹으면서 체할 수 있다는 좋은 경험 선사해 줘서 참 고맙네요. 덕분에 속이 참 불편하네요. 아, 그리고 보스.”
“아, 응?”
조금 전 앞사람을 찢어발길 기세는 어디로 가고 빌이 벙벙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슈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조근조근 말했다.
“제가 사는 스튜디오로 에이드리언을 공격하는 데 쓰는 거는 다시는 하지 마세요. 보스는 모르시겠지만, 저나 에이드리언 같은 또래가 이 살인적인 물가의 뉴욕에서 스튜디오를 온전히 하나 다 쓰는 거,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거든요.”
“아, 알겠어.”
“하나 더. 아까도 말씀드렸던 제 사생활은 제 사생활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빌의 눈앞에 순식간에 선이 하나 그어졌다. 조슈아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에 빌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맞는 말인데. 어쩐지 기분이 참 더럽고, 우울했다.
“에이드리언.”
“네?”
제 이름이 불릴 줄 몰랐는데.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부드러운 웃음은 어디로 갔는지 조슈아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다음부터는 어딜 가든 합의되지 않은 합석은 피하죠. 오늘은 제이콥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에이드리언한테나 나한테나 썩 유쾌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네요. 물론 보스한테도요. 그리고 쓸모없는 정보는 참 많이 들었네요. 그래도 제가 있는 자리에서 보스의 사생활을 오픈하는 건 아니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거짓말한 거는 달갑지 않아요.”
“그게 말이죠, 조슈아.”
에이드리언이 변명하듯 조슈아의 이름을 불렀다. 조슈아가 검지를 들어 입술 가운데에 가져다 대었다. 그 기세에 에이드리언이 찔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듣고 싶지 않은데. 물론 내일까지도. 그러면 먼저 갈게요. 보스. 지미는 10분 안에 도착할 거예요. 그게 싫으시면 주변에 있는 가드팀을 바로 부르시고요. 다시 한번 이런 진귀한 저녁 식사에 끼워 줘서 참, 고맙네요.”
“아, 잠깐만. 조슈아. 데려다줄게.”
“같이 가요. 조슈아.”
천천히 돌아서려던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서로를 향해 날을 세웠던 두 남자가 다급한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조슈아를 잡지 못한 손들이 어정쩡하게 뻗어 있었다. 그 두 손을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본 조슈아가 선을 긋듯 몸을 다시 돌렸다.
문을 열고 나가는 자세가 곧았다. 잡을 수도 없이 나간 기백에 빌과 에이드리언이 거의 비슷하게 한숨을 내쉬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응? 조슈아는 어디 갔어?”
한참 만에야 돌아온 제이콥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조슈아를 찾았지만, 빌과 에이드리언은 둘 다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대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에이드리언이었다.
“자리 옮겨.”
“우리 사이에 할 이야기가 남았나?”
이제 불리한 건 에이드리언 그렌트, 저 개자식이었다. 로건에게도 조슈아에게도 이렇게 엿 같은 짓이나 해놓고 이제 와서 제게 뒷감당이나 부탁하려는 꼴이라니.
비웃듯 입가를 비뚜름하게 올린 빌이 제이콥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둘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에 잠시 둘을 쳐다본 제이콥이 남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한 뒤 결제기에 카드를 긁고 다시 빌에게 돌려주었다.
드르륵, 오래된 결제기에서 영수증이 나오는 소리가 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빌은 코트 앞섶을 여민 채 먼저 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앞서 나가던 때였다.
“사실 말이야. 알려지는 건 피차 원하지 않잖아.”
생각과 다른 목소리였다. 부탁이라든지 애원이라든지 아니면 그런 류의 말투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패는 제가 쥐고 있다는 듯 거만한 말투였다.
빌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드리언이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빌을 보고 씩 웃었다. 타고난 오만함이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남자가 천천히 빌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가까이에 붙였다.
“로건이든. 아니면.”
조슈아든.
빌의 귓가에서 고혹적인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고 할 말 끝났다는 듯 빌에게서 떨어졌다.
빌이 입을 다문 채 에이드리언을 쏘아보았다. 화사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는 에이드리언과 대조적이었다.
수초 후에, 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한마디 했다.
“넌 정말 개새끼야.”
세상 더없는 칭찬을 들었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웃었다.
“너나 나나. 둘 다 개새끼이긴 마찬가지지.”
딱 십 년 전, 그러니까 제가 열아홉 대학생이던 시절 열다섯 살이던 빌 스웰딘은 비뚤어진 십 대처럼 껄렁하게 선 채 말했다.
“친구로 남아. 로건한테 상처 주면 그렇게 성하게 서 있지는 못할 거니까.”
그때 제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아. 그래. 습관처럼 왼쪽 골반 아래에 있을 상처를 매만지며 그렇게 이야기했었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잠시 지나갈 감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열여덟 그날, 교통사고 당시에 느꼈던 감정이 오래갈 줄 몰랐으니까.
커다란 사고는 아니었다. 뉴욕 한복판에서 추돌 사고는 빈번했고, 세 대 정도가 사고 난 건 세 줄 기사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세 줄도 안 될 법한 사고에서 에이드리언은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무서움, 눈앞에 연기가 이지러지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게 멀어지는 두려움. 그 와중에 번진 수채화처럼 부연 시야 속 저를 걱정하던 빨간 머리가 있었다.
“괜찮아?”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하던 한마디.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고 로건은 끔찍한 기억은 지워 버린 듯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때 제 옆에 있는 빨간 머리는 로건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흐릿한 빨간 머리와 갈색 눈,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꿈에서 보던 어느 날, 깨달았다.
내가 로건 헤네스를 좋아하는 구나.
한 번 자각한 감정이 싹을 틔우는 건 쉬웠다. 쾌활한 성격도 심지 굳은 마음도 예쁜 얼굴도 모든 게 다 좋았다. 하지만 그뿐인 줄 알았다. 얼마 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에이드리언 그렌트 인생에서 처음 맛본 명백한 오판이었다.
* * *
제이콥의 식당 앞에서. 시간은 빌의 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빌이 내건 두 가지 조건에 에이드리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마찬가지였다. 길게 얼굴 볼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깜빡이던 네온의 불이 꺼지고 제이콥이 먼저 자리를 떴다. 몇 개 없는 가로등이 이 컴컴한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언제나 나쁜 놈 포지션은 내가 맡더라고.”
에이드리언이 한 떨기 백합처럼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한숨처럼 흩어지는 말에 빌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을 뻔했다.
“그야 니가 개새끼니까. 사람 속이고 갖고 노는 데 착한 놈 포지션 맡을 줄 알았어?”
“조슈아는 자신이 어떻게 네 비서가 됐는지는 알아?”
빌이 입을 다물었다. 에이드리언이 진하게 웃었다. 빌 스웰딘은 여전히 애송이였다. 아직도 착한 척을 양심이라고 묻는, 그러면서도 속내는 저와 다를 거 하나 없는 개 같은 애송이.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상황에서 로건이었다면….”
“그냥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갔겠지.”
“제 일이 아니니까.”
빌이 동의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에이드리언은 피식 웃었다. 분명히 로건 헤네스는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만나도 아무렇지 않게 굴 것이다. 조슈아 베넷과 달리.
“그래서, 지금 조슈아 베넷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빌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언제부터 일개 비서의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에이드리언의 녹갈색 눈이 집요하게 빌의 시선을 쫓았다.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녹갈색 눈동자에 빌이 속내를 숨기듯 코웃음을 쳤다.
“…내 사람 곁에 뱀 같은 새끼가 얼쩡거리는 게 구역질 날 정도로 거부감 들거든.”
“뭐, 그렇다고 치지.”
“너야말로 대답이나 하지 그래.”
“몰라.”
“뭐?”
“그래서 알아 가는 중이야.”
에이드리언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연기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빌이 알아낼 도리는 없었다. 탁 차오르는 답답함에 빌이 에이드리언의 정면에 몸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녹갈색 눈동자에 거짓 한 점 없어서 더 목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에이드리언의 가슴팍을 밀 듯 탁 치면서 빌이 으르렁거렸다.
“…거짓말이면 내 손에 정말 죽을 줄 알아.”
“이런, 무서워서 어디 돌아다니겠나.”
가벼운 농지거리 취급하듯 에이드리언이 물러섰다. 간격을 벌린 에이드리언을 바라보던 빌이 기시감을 느낀 듯 에이드리언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조슈아 베넷, 좋….”
“나만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은데. 나도 하나 네 목줄을 쥐어야지.”
에이드리언이 빌의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그리고 예의 그 다정한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빌은 제가 하려던 말 대신 ‘뭐?’ 하고 반문했다. 에이드리언이 왼손을 들고 오른쪽 어깨를 매만졌다.
“앞으로도 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 그 어떤 힌트도 주지 말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너는 둘 다 상처 받는 게 싫잖아. 둘 다 네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마찬가지지만 난 내가 제일 중요하거든. 네가 말한 대로 개새끼라 말이지.”
에이드리언이 나른하게 웃었다. 빌 스웰딘은 어떻게든 혈연인 로건 헤네스가 상처 입는 모습을 보지는 못할 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애초에 빌 스웰딘에게 불리한 게임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아, 하며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그거 알아? 지금 차 기다린 지 15분 넘었다?”
그리고 그 말과 거의 동시에 골목 너머에서 차 한 대가 천천히 이쪽으로 왔다. 에이드리언의 벤틀리였다. 마크가 조수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에이드리언이 느긋하게 뒷좌석으로 향하다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차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끼익- 허겁지겁 멈춰선 차 안에서 지미가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보스. 오는 길에 차들이 막혀서. 어?”
말을 하다 말고 지미가 에이드리언의 차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듯 말을 멈췄다. 빌이 지미의 시선을 따라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 확신 어린 의심에 에이드리언이 얄밉게 웃었다.
“조금 더 막으려다 참았어. 볼일도 끝났고 말이야.”
“뭐?”
빌이 확 열받은 얼굴로 다가서려던 찰나 에이드리언이 냉큼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크가 타자마자 바로 차가 출발했다. 지미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빌을 부르려다 참았다. 그리고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는 이 상황에 간절히 떠오르는 조슈아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알아 간다…라.
“설마 그럴 리가.”
“예?”
“아니에요. 아무것도.”
마크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에이드리언은 상냥하게 웃으며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뉴욕의 불빛은 작은 거리의 가로등 불빛 정도는 가볍게 삼켰다.
11년의 순정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고 해서, 알아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아무것도.
백미러로 기분 좋다는 듯 화사하게 웃는 제 보스를 보면서 마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보스가 달라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낮은 허밍이 들리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마크는 앞만 바라보았다. 일에서라면 모를까, 사생활 측면에서 보스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비서인 제가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 * *
조슈아가 옅은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양손에 들고 있는 봉투가 무거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묵직하게 손에 감길 정도긴 했지만 기껏해야 내일 먹을 샐러드와 티슈, 샴푸가 전부였으니까.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한숨은 드디어 ‘도착했다’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스튜디오의 5층짜리 계단을 보자마자 마음이 놓일 정도로 말이다.
아침 출근할 때부터 직감했었다. 하루가 길 것이라고.
실제로 그랬다. 에이드리언의 차로 함께 출근한 지 며칠 되었다고 출근 지하철의 북새통에 빠르게 지쳤고, 어제 먹은 음식 탓인지 하루 종일 속이 좋지 않았다. 엘라가 약을 사다 주고 지미가 조퇴하지 않겠냐고 권유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놀러 왔던 닉도 한마디 거들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얘졌어. 이러다 시체가 형님 하겠어.”
닉 특유의 서늘한 농담에 엘라가 질색을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닉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왔지만, 조슈아의 상태를 보고는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갔다. 출근하지도 않은 보스를 위해 커피를 가져왔던 미셸은 사내 닥터를 부르자고 의견을 내놓았지만 조슈아는 희게 질린 얼굴로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간 고집이 노새보다 더해요.”
지미는 타박을 놓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연약해 보이는 저 예쁘장한 얼굴 속에 어마어마한 뚝심이 들어 있다는 것은 조슈아 베넷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지미의 말에도 조슈아는 그냥 말갛게 웃었다.
그 긴 하루에도 퇴근의 순간은 찾아왔다. 가지 않는 시간을 보채듯 계속해서 시계만 바라보던 비서실 사람들은 퇴근 20분 전부터 조슈아의 짐을 대신 싸 줬다. 코트를 입게 도와주고 가방을 챙겨 주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더 따라 주고. 그리고 지금부터 나가야 퇴근 시간에 딱 맞게 에투왈의 정문을 나갈 수 있다고 성화였다.
하여간 정말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적극적인 엘라와 가방까지 들어 주는 지미에, 안 나가면 정말 비서실 다 야근이라는 에밀리까지. 조슈아는 아무도 몰래 편집장실을 한 번 흘겨보았다. 붉은 입술이 어린아이처럼 비죽였다.
오늘 빌이 에투왈 편집장의 자격으로 스웰딘가의 연말 파티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조슈아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파티에 가기 위한 준비가 오전 8시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말이다.
누구 때문에 내가 아픈데. 빌 스웰딘.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 하여튼 둘 다 오늘까지는 정말 밉다.
흥. 가볍게 투정을 부리듯 콧방귀를 뀐 조슈아가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약을 먹어 속이 가라앉아서인지,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어서인지 지금은 속이 편안했다. 힘이 없어서 문제였지.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는 게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인 줄 처음 알았다. 2층과 3층의 중간층에 서서 조슈아가 잠시 나지막한 한숨을 뱉어 내었다. 그리고 남은 층계를 바라보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장에 달린 전등 커버가 깨끗했다. 공용 현관이나 계단이나 전등 커버의 가장 오목한 부분은 죽은 벌레들과 전등의 열로 진 때로 인해 언제나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올려다본 전등 커버는 은은한 미색 전등의 빛을 가감 없이 발산시키고 있었다. 이전까지 사용하던 싸구려 노란색 전등이 아닌 것 같았다.
관리비가 올랐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슈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여태까지 눈치 못 챘을까, 싶을 정도로 계단이 청결했다. 공용 창문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물때도 말끔하게 닦여 있었고, 복도를 메우던 쾌쾌한 냄새 대신 적당히 기분 좋은 포근한 냄새가 났다.
하긴 눈치채지 못할 만도 했다. 언제나 제 옆에는 시간의 흐름조차 까먹게 만드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조슈아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에이드리언은 참 요령 없는 남자다. 어젯밤 방음 엉망인 이 스튜디오에서 제 현관 앞에 서성이던 발걸음은 제법 오래였고, 옆집 현관문이 닫힌 것도 발걸음 소리가 멎은 것에서 한참 뒤였다. 그러고도 연락도 한 번 없다.
하여간 말은 참 잘 들어요. 조슈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말 갈 거냐는 듯, 당황 가득했던 녹갈색 눈동자가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해지던 게 떠올랐다. 순식간에 풀 죽던 그 순진한 남자라면 정말 내일까지 연락이 없을 수도 있겠다.
보고 싶기는 하고, 거짓말한 건 밉고.
5층에 올라 복도로 들어서던 조슈아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508호의 현관문에 등을 기댄 에이드리언이 기척을 느꼈는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결을 따라 떨어져 있던 금발이 사르르 걷어지면서 화려한 얼굴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이 자세를 바로 선 채 기죽은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앞으로 지나갔다. 현관문 앞에 서서 문을 열려고 하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조슈아의 이름을 불렀다.
“조슈아.”
“오늘까지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라. 속은, 괜찮아요?”
잔뜩 걱정 어린 목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조르듯 보고 싶었다든지, 정말 내일 볼 거냐는 투정을 상상하긴 했지만 제 속을 걱정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녹갈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뒷머리를 헝클이더니 한숨 한 번 내쉬고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내일까지 말 안 걸려고 했는데, 정말 속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들어갈게요.”
“내 속이요?”
“어제 체할 것 같았잖아요. 내가 너무 유치하게 굴어서.”
“알긴 알아요?”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 끝에서 에이드리언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조슈아가 부러 엄한 목소리를 냈지만 이미 입매가 풀린 뒤였다.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숙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떻게 할까.
“어제는 왜 걱정 안 하고 오늘만 해요?”
“어제는 약국 열린 곳을 못 찾아서.”
에이드리언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흰색 비닐봉지 안에는 소화제처럼 보이는 약이 들어 있었다. 조슈아가 피식 입새로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해긴 뭘 어떻게 해. 이미 답이 나온 상태에서도 괜히 한번 놀려 주고 싶었다. 제 눈치를 보듯 조금씩 고개를 들어 올리는 녹갈색 눈동자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시무룩하게 바닥을 바라보았다.
“뭐, 아까까지는 속이 좀 안 좋았는데.”
“병원 갈까요?”
금방 심각해져서 바라보는 시선에 조슈아가 낮게 웃었다. 그제야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말이 장난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따라 웃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꼬르륵-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저를 배려하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이 웃긴 건 어쩔 수 없는 듯 에이드리언의 눈의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굶어서 속 다 괜찮아졌거든요. 이제 좀 배고프네요.”
“그러면 맛있는 거 먹으러 오지 않을래요? 내 집에 조슈아가 좋아하는 것들로 준비해 뒀는데.”
“속 괜찮은지 확인만 하고 싶었다면서요.”
“속 괜찮은지 확인에는 허한 속 확인도 들어 있거든요.”
제가 하고도 멋쩍은지 에이드리언이 배시시 웃었다. 꼭 어린아이 같은 웃음에 저도 모르게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이 괜찮은 분위기가 더 좋아지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조슈아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가기 전에 먼저 할 얘기 있잖아요. 우리.”
“앞으로는 조슈아한테 안 숨길게요. 그게 뭐든.”
“정말요?”
“정말요. 조슈아 속상한 건 안 할 거예요.”
에이드리언이 한 번만 믿어 달라는 듯 두 눈을 맞춰 왔다.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게 하는 끈질긴 눈맞춤에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아,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이런 것도 다 말할까요?”
“어떤 거요?”
“아까 조슈아 꼬르륵 소리 컸….”
조슈아가 눈을 흘기며 에이드리언의 어깨를 탁 쳤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에이드리언이 엄살을 부리며 어깨를 문질렀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에이드리언의 집 문 쪽으로 다가갔다.
“뭐 했어요?”
안심이 된 탓인지 허기가 몰려왔다.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집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당신이 잘 먹던 걸로요. 미트 파이랑 가지 그라탕이랑 브로콜리 수프랑, 여러 가지요.”
“나 가지 안 좋아하는데.”
“네?”
열린 문을 잡고 있던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녹갈색 눈동자에 미묘한 파동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파동은 녹갈색 눈동자 아래로 숨어들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지 안 좋아했어요?”
아, 너무 직구로 말했나? 열심히 준비했을 텐데. 에이드리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조슈아는 잠시 아차, 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네.”
보육원에서 제일 많이 나오던 식재료 중 하나가 가지였다. 대량 조리를 하다 보니 물컹거리고 푹 퍼져 버린 가지를 코를 감싸 쥔 채 물과 함께 삼킨 날이 대다수였다.
그 좋아하는 제이콥의 요리들 중에서도 가지만 쏙쏙 빼서 먹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저와 맞지 않는 식재료인 것 같았다. 제이콥은 애기 입맛이라며 타박을 놓기도 했지만 말이다.
에이드리언은 말이 없었다. 계획이 틀어져서 속상한 건지, 아니면 당황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조슈아가 문 안으로 들어가며 에이드리언의 손을 잡아끌었다. 현관에 서서 훈기가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나 되게 에이드리언한테 잘 보이고 싶었나?”
“네?”
“내가 가지 잘 먹었다면서요.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 편식 안 하고 먹었겠죠.”
설마 먹는 것 가지고 에이드리언이 거짓말 했을 리는 없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 거짓말하지 않기로 약속까지 했으니 더더욱.
가지라면 분명 안 먹었을 텐데, 제가 잘 먹은 걸 보면 정말 잘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너무 떨려서 가지인 줄 모르고 먹었나? 하지만 이 말을 하면 에이드리언이 너무 좋아할까 봐 목 너머로 말을 삼켰다.
조슈아의 말에 에이드리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사르르 눈을 접으며 조슈아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거의 껴안듯 몸을 가까이 대었다. 훅, 하고 시원한 냄새가 조슈아의 코끝에 맴돌았다. 코끝이 마주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조슈아가 눈만 동그랗게 떴다.
“아니면 내가 너무 좋아서 가지인 줄 모르고 먹었나 보죠.”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설탕처럼 달콤했다. 조슈아는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건 좀.”
얼굴과 달리 정색하며 부인하는 목소리에 에이드리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에이드리언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어서 먹자는 듯 에이드리언의 팔을 잡아 내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호텔 바우처지.”
닉이 턱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조슈아는 닉의 손가락 끝에 잡혀 있는 티켓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반질반질하게 코팅된 고급 종이에 인쇄된 글씨는 조슈아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그것도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스웰딘 뉴욕 호텔의 디럭스 룸 바우처.
기본 룸인 스탠다드에서만 하루만 묵어도 350달러를 넘기는 스웰딘 뉴욕에서 디럭스 룸의 예약가는 상상을 호가했다. 그것도 바우처에 적힌 크리스마스 날의 디럭스 룸이라면.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닉이 바우처를 조슈아에게 내밀었다.
“자.”
“네?”
“가지라고. 선물이라고. 그것도 대가 없는 순수한 선물.”
“이게요?”
조슈아의 눈의 휘둥그레 커졌다. 반문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농담이라고 하면 차라리 웃겠는데 닉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알잖아. 이거 내가 제비뽑기로 뽑은 거.”
엘라한테 다섯 번도 더 들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의 제비뽑기 1등은 닉 드어본이 가져갔다고 말이다. 엘라는 “세상에.”를 연발하며 닉이 얼마나 시큰둥한 표정이었는지, 스웰딘 뉴욕 디럭스 룸을 탐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설명했었다. 돈이 많아도 크리스마스 날 스웰딘 뉴욕에서 묵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좋은 소식 있잖아.”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조슈아가 이내 깨닫고 피식 웃었다. 하여간 이놈의 회사에는 비밀이 없다. 닉이 비밀을 공유한 사이에나 통용될 은밀한 웃음을 띤 채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어깨를 한 번 추어올렸다.
“뭐, 요즘 연봉 오를 기미가 보이죠.”
“하여간 혓바닥에 기름칠을 했나.”
“변호사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이네요. 닉.”
한마디를 안 진다며 닉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냅다 건네듯 바우처를 내밀었다. 얼결에 바우처를 받은 조슈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닉….”
“왜?”
“무르기 없는 거 알죠?”
“…확 다시 뺏는다?”
“에이.”
닉이 짐짓 다시 낚아채려는 시늉을 하자 조슈아가 냉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팔랑팔랑 바우처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닉, 진짜 고마워요. 제가 근사한 저녁 쏠게요!”
“내 저녁은 데이트 상대한테 100% 예약되어 있어.”
“지금 솔로잖….”
“무슨 소리! 눈이 높아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못 만난 거야! 비서실 회식 때나 연락 잘 주고.”
“음, 그건 봐서요!”
배시시 웃던 조슈아가 정말 고맙다는 듯 닉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조금 전 솔로라는 조슈아의 말에 목에 핏대를 세우려던 닉도 푸스스 웃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다시 일을 해야 한다며 비서실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닉이 얼굴에 서린 웃음기를 지웠다. 대신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자동문 안의 조슈아를 힐끗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어깨가 푹 처졌다.
“와. 닉! 산타인 줄 알았네요.”
다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닉이 앞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텀블러를 든 에밀리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꼭 에밀리를 연상케 하는 지미 추의 11cm 은색 글리터 스틸레토 힐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차갑게 또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가끔 양심이 찔려서 말이지.”
“어머, 미스터 드어본한테 아직 남은 양심이 있었어요?”
에밀리가 정말 놀랍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닉이 쓰게 웃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이미 양심은 닳을 대로 닳았다고 생각했는데. 조슈아 베넷은 그냥 유쾌하게 마주하는 비서실 직원들 중 한 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제법 청렴한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나도 몰랐지만.”
어쩐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한층 낮았다. 에밀리도 지나가듯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산타가 되어야 할 것 같잖아요. 닉.”
* * *
“…그러면 이때 루돌프는 뭘 하는 거예요?”
“산타 뒤에서 산타가 선물을 건네기 좋게 대기하고 있죠.”
조슈아가 맥주 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적당히 뺨이 뜨끈해지는 게 좋았다. 에이드리언이 무언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조슈아가 배시시 웃으면서 검지로 에이드리언의 미간을 가볍게 누르자 그제야 녹갈색 눈으로 조슈아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손등을 뻗어 조슈아의 뺨에 대었다. 손의 온도가 딱 좋게 서늘했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살며시 눈을 접었다.
“오늘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도….”
에이드리언이 말끝을 흐리며 바닥에 놓인 맥주 캔들을 바라보았다. 500ml 캔이 벌써 여섯 개가 비어 있었다. 그중 다섯 개는 조슈아가 마신 것이었다.
“술도 약하면서.”
“안 약하거든요!”
발끈한 듯 조슈아가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소파에서 갑자기 일어난 터라 취기도 덩달아 올랐는지 조슈아가 비틀거리다 다시 쓰러지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물론 손에 들고 있는 맥주잔을 안 놓쳤다는 게 자랑스럽다는 듯 의기양한 얼굴로 말이다.
조슈아가 일어날 때부터 잡아 주기 위해 같이 일어섰던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정한 얼굴로 조슈아의 맥주 캔을 잡았다.
조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이드리언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그만 마셔요. 많이 마셨어요.”
상냥한 목소리와 다르게 맥주 캔을 빼앗는 손길은 매정했다. 단숨에 조슈아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떼어 낸 에이드리언이 맥주 캔을 테이블 끄트머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치즈 스틱 하나를 들어 조슈아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자연스레 치즈 스틱을 받아먹은 조슈아가 응석을 부리듯 눈을 깜빡였다.
“으응, 그러지 말고.”
어린아이가 조르듯 조슈아가 손만 뻗은 채 흔들었다. 헐렁하고 통이 큰 소매가 조금 내려가면서 손목이 드러났다. 술기운 탓인지 새하얀 피부가 연한 분홍색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살이 빠졌는지 손목뼈가 도드라져 있었다. 츠, 안타까움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탓인지 에이드리언이 혀를 찼다.
여전히 맥주 캔은 에이드리언의 손에 있었다. 조슈아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어림도 없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치사해. 조슈아가 입술을 비죽였다. 에이드리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의 입가에 올라간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빈틈을 발견한 고양잇과 동물처럼 단숨에 에이드리언의 손에 잡힌 맥주 캔을 낚아채기 위해 몸을 날렸다.
“윽.”
“괜찮아요?”
아무래도 술기운 도는 몸이라 조준이 잘못된 모양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위에 넘어져 있던 조슈아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꼴꼴꼴- 넘어진 맥주 캔에서 맥주가 바닥으로 흘렀다. 덕분에 바닥을 짚으려던 손이 한 번 더 미끄러졌다.
“윽, 조슈아. 복수하는 거 아니죠?”
에이드리언이 눈을 찡그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미끄러져 엉겁결에 에이드리언의 가슴팍을 들이받은 조슈아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정말 아니에요. 아파요?”
강아지처럼 축 처진 조슈아의 눈매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짙은 맥주 냄새 아래로 조슈아한테서 풋풋한 체향이 풍겼다. 조슈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몸을 일으킬 생각도 못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조슈아가 갑자기 킥킥 웃었다.
“왜요?”
“뺨에 속눈썹이 붙어 있어요.”
“조슈아 때문이에요.”
“네네.”
조슈아가 느릿한 손길로 에이드리언의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황금색 긴 속눈썹 한 올이 뺨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혹시나 보드라운 뺨을 긁기라도 할까, 조슈아가 얼굴까지 가져다 대며 조심스레 속눈썹을 떼었다. 가까이 마주 오는 조슈아의 얼굴을 의식한 탓인지 에이드리언이 살며시 눈을 접었다.
참 예쁘다. 한숨이 나올 만큼 예쁜 얼굴을 보던 순간이었다. 에이드리언이 눈을 번쩍 떴다. 짙어진 녹갈색 눈동자에 조슈아가 당황할 새도 없이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손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매가 젖혀진 채 드러난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젖은 소리와 함께 손목에 닿는 체온 때문에 묘하게 아랫배가 당겼다.
깜짝 놀란 조슈아가 몸을 뒤로 뺐지만, 어느새 상체를 일으킨 에이드리언이 한발 더 빨랐다. 조슈아의 팔목을 잡은 채 손목 안쪽을 가볍게 한 번 깨문 다음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옭아매듯 다른 팔로 단단히 껴안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입술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조슈아의 입술 위로 올라왔다.
눈도 감지 못하게 강렬한 시선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나른한 술기운보다 더한 텐션에 조슈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다정하게 두드리는 에이드리언의 혀를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젖은 체온이 고른 치열을 훑고 혀를 얽었다. 더 안쪽, 습하고 진한 곳을 공략당하는 새에 조슈아는 헐떡이며 에이드리언의 셔츠 가슴팍만 그러쥐었다. 좁은 공간 안에 도망갈 곳은 없었다. 성급하게 입 안으로 도망가려 하면 에이드리언이 끈기 있게 쫓아와 감으며 달랬다. 에이드리언은 도망갈 줄도 알았다. 이제 되었다는 듯 몸을 빼려 할 때면 오히려 조슈아가 더 서툴게 다가갔다. 젖은 소리가 야하게 울렸다.
잠이 깼다. 갑자기 들이닥친 폭풍을 맞이한 기분에 조슈아는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밭은 숨을 몰아 내쉬었다. 에이드리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슈아의 입술 위로 가볍게 뽀뽀를 해 준 뒤 조슈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꼭 혼자만 저렇게 안 다급한 척이다. 아주 앙큼하게. 부풀어 오른 앞섶 숨길 생각도 안 하면서. 검은 슬랙스 아래 숨길 수도 없이 부푼 앞섶을 노려보던 조슈아가 한 번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나른하게 웃었다.
“에이드리언.”
“네?”
“크리스마스 날, 하고 싶은 거 있어요?”
“하고 싶은 거 많죠. 조슈아랑 근사한 카페도 가고, 맛있는 레스토랑도 가고.”
“그거 말고요.”
“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침대 매트리스 아래 꼭꼭 숨겨둔 호텔 바우처를 떠올렸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 어때요?”
치켜뜬 눈매가 마치 도발하듯 말하는 것 같았다. 아직 열기도 가라앉지 못한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에이드리언은 심장이 뛰는 속도를 느꼈다.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다 육체적인 들뜸 때문일 것이다. 에이드리언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조슈아의 빨간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춰 주며 대답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되네요.”
“많이 기대해도 좋아요.”
특별한 날이 될 거니까.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