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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크리스마스의 연인 (6/22)

#5. 크리스마스의 연인

“휴, 이제 좀 살겠네요.”

빨간색 산타클로스 셔츠를 벗은 에이드리언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주변은 산타클로스 셔츠 안에 끼워 넣었던 쿠션들로 어지러웠지만 조슈아도 에이드리언도 개의치 않았다. 조슈아는 피식 웃으면서 차가운 얼음물 한 잔을 건넸다.

“많이 더웠죠? 여기 물.”

“고마워요. 조슈아.”

“나야말로 고맙죠. 애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구요.”

조슈아가 장난스레 웃으며 분장용 흰 수염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진한 군청색 문에 난 창문 너머에는 선물을 가지고 신나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조슈아의 입가에 설핏 웃음이 서렸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벌어지는 산타 이벤트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수녀님들 그리고 봉사자들과 선생님들한테도 큰 인기였다.

선물 상자의 크기와 알록달록한 포장지 그리고 다 큰 어른들이 흰 수염을 붙이고 몸집을 부풀리려 산타 옷 안에 바람을 넣은 쿠션을 끼워 넣고 산타클로스인 척하는 모습은 모두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의 열기는 작년, 재작년과는 또 달랐다. 몸집을 부풀리고 하얀색 턱수염으로 하관을 다 덮었어도 에이드리언은 에이드리언이었다. 준비하기 전 에이드리언을 봤던 봉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산타로 분장한 에이드리언을 보고 “배우 같아!”, 혹은 “TV에서 본 것 같아!”라며 한껏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 위로 순간 짓궂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모르고 지나갈 법한 얼굴이었지만, 그곳에서 유년기는 물론 청소년기까지 보냈던 조슈아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루돌프로서 한참 뒤에 서 있던 조슈아가 한발 늦었다.

선물을 받을 차례이던 일곱 살 찰리가 선물을 주기 위해 몸을 숙인 에이드리언의 수염을 낚아챘다. 흰색 고무줄로 모자에 엉성하게 고정되어 있던 수염이 툭,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와아아!! 아이들의 커다란 함성 소리였다.

뭐, 둘러싼 아이들 사이의 에이드리언이 애절하게 조슈아를 바라보았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모르는 척했다는 건 에이드리언한테 비밀이었다.

“뭐, 아이들한테도 통하는 미인계라고 해두죠.”

에이드리언이 새침하게 웃으며 콧대를 올렸다. 그리고 행거에 소파 한쪽에 걸쳐져 있는 검은색 슬랙스를 잡았다. 셔츠는 어떻게 입었다지만 산타클로스 바지의 기장은 에이드리언한테 한참이나 깡똥했다. 피식 웃는 조슈아의 얼굴을 보며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웬일이에요? 갈아입을 옷만 들어도 나가던 조슈아가?”

놀리듯 하는 말에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순진한 에이드리언은 아직도 왜 그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자신이 나갔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 에이드리언을 배려한 건지도 모르고. 거사를 앞둔 마당에 겨우 옷 갈아입는 것은 이제 아무렇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이 눈치채지 않는 것을 바랐다. 깜짝 놀라게 하고 싶은 마음에 뒤늦게나마 “아….” 하며 어색하게 웃고는 방문을 잡았다.

“그럼 편하게 갈아입어요. 하하.”

부자연스러운 웃음과 함께 나가면서도 창문에 달린 가리개를 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이 픽, 웃었다. 여유로운 척은 혼자 다 하더니만 겨우 귓가 달아오르는 것 하나조차 숨기지 못하는 조슈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길게 내다볼 일도 아니었다. 마크의 보고에 따르면 조슈아가 재미있는 바우처를 하나 가지고 있다니까. 바지를 갈아입은 에이드리언의 입가가 조금 더 올라갔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도 눈을 반짝이며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던 조슈아를 위해 에이드리언은 그렌트 호텔의 스위트룸을 취소했다. 이제 조슈아가 보여 줄 차례였다.

거울에 힐끗 제 모습을 비춰 본 에이드리언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우웅-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급한 일인가? 상사를 본받아 유능한 제 직원들이 연락하려면 아주 중요한 일일 텐데. 하지만 예상외로, 핸드폰에 떠오른 이름은 마크나 비서실 직원들이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이 성급한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

“로건?”

- 메리 크리스마스! 에이드리언!

한바탕 신난 아이들을 놀이방에 몰아넣고, 이제는 어른들의 정리 시간이었다. 한껏 정리된 분위기에서 봉사자 및 선생님들은 제각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따끈한 코코아 한 잔을 들고도 구석진 자리에 앉은 조슈아가 계속해서 분장실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원장 수녀가 조슈아의 앞 소파에 앉았다. 조슈아가 반가운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면 나오겠니? 꼭 청승맞은 똥강아지처럼 굴지 말고 점잖게 좀 있어.”

“원장 수녀님!”

조슈아가 발끈해서 원장 수녀를 불렀다. 하지만 수백 명의 아이를 키우고 또 어른으로 성장시킨, 팔순의 원장 수녀는 무슨 일 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밉지 않게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러니까요. 어린아이도 아닌데 왜 자꾸 놀리세요.”

원장 수녀가 못 들은 척 어깨를 으쓱했다.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 속에서 총기 어린 푸른 눈이 따스하게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은 네 보스가 안 볶아?”

“어휴, 말도 마세요. 그냥 아주! 아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좋은 말만 할래요.”

툴툴대는 조슈아를 바라보던 원장 수녀가 쪼글쪼글한 입매를 부드럽게 올렸다.

“아니면 저 사람이 편한 모양이구나.”

“네?”

원장 수녀가 분장실에 시선을 한 번 주었다.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휘어 웃었다. 지난여름보다 조슈아는 한껏 풀어져 있었다. 몸의 긴장을 최대한 뺀 채 정말 편안하다는 듯,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조슈아 베넷은 어려서부터 아주 예민한 아이였다. 눈치도 빨랐고 분위기도 잘 맞췄고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줄 알았다. 하는 것을 보면 딱 부러지고 야무진 아이가 사람 많은 이곳에서는 사람의 눈을 보며 상대를 기다렸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지금의 조슈아를 보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오래 기다렸죠, 조슈아.”

누군가 감탄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샌가 다가온 남자에 원장 수녀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옆에 앉아 상냥하게 웃으며 원장 수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산타클로스 해 줘서 고마워요. 안 그래도 새로운 봉사자가 필요했거든요. 애들이 워낙 눈치가 빨라서 말이죠.”

“수염을 떨어뜨려서 오히려 제가 죄송한 걸요.”

“걱정 마세요. 요즘 산타는 어렸을 때 인턴을 하면서부터 시작한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거 참 21C다운 이야기인데요?”

에이드리언이 시원스레 웃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면서 팔꿈치로 에이드리언을 가볍게 쳤다. 그 가벼운 시늉에도 에이드리언이 윽, 하며 아픈 척을 했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기던 조슈아가 원장 수녀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원장 수녀님, 그러면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조슈아. 크리스마스인데 바쁘겠지.”

원장 수녀가 눈을 찡긋 했다. 친한 사이라고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장 수녀는 눈치 챈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민망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원장 수녀의 뒤에서 어깨를 껴안았다. 그리고 애교 있게 배웅해 달라고 말했다.

현관까지 걸어 나오는 사이에도 원장 수녀는 걱정 어린 염려를 놓치지 않았다. 채소 잘 먹고, 편식하지 말고. 네네. 조슈아는 대답하다가 영혼이 없다며 혼날뻔하기도 했다.

현관 앞에 서서 조슈아가 원장 수녀를 한번 가볍게 안았다. 다정한 향에 절로 눈이 휘어졌다. 에이드리언과는 가벼운 악수였다. 잠시 웃으면서 에이드리언을 보던 원장 수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무언가 찜찜했다. 결국 원장 수녀가 말했다.

“혹시 우리 어디에서 본 적 있나요?”

“원장 수녀님, 뭐예요? 지난번에는 60년대에나 쓸 법한 말이라면서요.”

조슈아가 쾌활하게 웃었다. 원장 수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수백 명의 아이를 보았던 원장 수녀는 그 기억력도 대단했다.

그리고 분명 에이드리언은 원장 수녀의 기억에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면서도 언제 어디에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 더 어린 얼굴에, 조금 더 키와 체구가 작았던 모습이 흐릿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 혹시 지나가다 보셨을까요?”

에이드리언이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TV에서 비슷한 배우라도 본 거 아니에요?”

조슈아도 한마디 거들었다. 원장 수녀는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싱거운 소리 했다며, 원장 수녀가 다시 한번 안녕을 말했다. 앞으로도 일상에 축복이 가득하라는 진심 어린 기도와 함께 말이다.

원장 수녀는 두 사람이 정문을 지나 거리로 나가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둘이 모퉁이를 돌아서야 원장 수녀도 뒤를 돌아섰다.

“내가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야.”

원장 수녀가 혼잣말을 하며 복도를 걸었다.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아니 그도 아니라면 현관부터 복도의 벽에 붙어 있는 액자들만 바라보았더라도 알아차렸을 텐데 말이다.

벽에는 1960년부터 지금까지 후원자들과의 추억을 담아 놓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 사이 딱 11년 전 사진에는 꾸준히 후원해 오던 그렌트가의 도련님이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빙그레 웃고 있었다. 매번 사진에 참석했던 조슈아가 하필 자리에 없었던 날이었다.

하지만 원장 수녀는 이내 자신을 부르는 아이들의 목청에 에이드리언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는 그저 조슈아의 친절한 친구, 혹은 그 이상으로만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 * *

스웰딘 뉴욕의 지하에 위치한 바는 짙은 회색의 벽과 반짝이는 대리석 그리고 연노랑과 황금색 조명들로 꾸며져 있었다. 오픈 바를 제외하고는 헤링본 파티션과 커튼으로 프라이빗한 분위기가 강조되어 있었다. 조슈아는 들고 있는 잔을 한 번 흔들었다. 기포가 뽀글뽀글하게 올라오는 장밋빛 샴페인이 잔을 따라 출렁였다.

“뭘 그렇게 긴장해요?”

조슈아가 토끼 눈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옆을 바라보았다. 귓가 가까이에서 속삭였던 에이드리언은 시침 뚝 떼고 조슈아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어두운 황금색 조명 아래에서 에이드리언의 금발이 반짝였다. 조슈아는 하나도 놀라지 않은 척 여유롭게 웃었다.

“무슨 긴장이요?”

“조슈아, 잔 떨리는데요?”

이크, 아까 손이 떨리는 것 같아서 부러 잔을 한 번 흔들었는데. 계속 떨리는 걸까? 화들짝 놀란 조슈아가 잔을 내려다보았지만 제 잔은 물론이고 잔 안에 든 샴페인도 잔잔했다.

“농담이에요.”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으며 검지를 들었다. 그리고 조슈아의 앞머리를 따라 귓바퀴를 둥글게 쓸었다. 훅 끼치는 체향과 함께 귓바퀴에 닿는 체온이 낯설어서 조슈아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귓바퀴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체온에 입 밖으로 아, 하고 아쉬운 소리가 새어 나갔다. 혹시나 에이드리언이 들었을까 바로 눈치를 보았지만 에이드리언은 테이블 위 카나페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크래커 위에 크림치즈와 마리네이드된 방울토마토 반쪽을 올린 뒤 조슈아의 입 앞까지 가져다 대는 일. 조슈아가 한입 가득 받아먹고 나서야 흐뭇하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웃었다. 그리고 나서야 잔을 들었다. 조슈아와 똑같이 시켰던, 제법 도수 있는 샴페인이 아닌 입가심용 크랜베리 주스였다. 조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스?”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스 잔을 가로챘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눈을 찡그릴 만큼 새콤달콤한 게 맛있었지만 무알콜이었다. 이건 조슈아의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다.

“샴페인 맛있는데.”

조슈아가 은근하게 에이드리언한테 몸을 붙이며 잔을 건넸다.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조슈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잔을 받았다. 됐다. 일부러 도수도 제법 있는 것으로 골랐으니 에이드리언도 한잔 하면 취기가 오를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차 가져왔잖아요.”

아, 차! 조슈아는 주차장에 세워 두었던 에이드리언의 차를 떠올렸다. 미리 바우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은 탓이었다. 조슈아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조슈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슈아, 술기운 올라오는 거 아니에요?”

에이드리언이 손등으로 조슈아의 뺨을 쓸었다. 조슈아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 하고 호텔 체크인부터 생각한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달래듯 조슈아를 다독였다.

“자, 조슈아. 이제 그만 마시고.”

“자고 가요.”

“네?”

말이 먼저 나갔다. 에이드리언의 녹갈색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당황했다. 조슈아가 생각한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조금 수줍어하거나 아니면 정말이냐고 확인을 해보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여기 바우처가 있는데, 물론 노리고 오늘로 잡은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생긴 거긴 한데.”

말이 길어지면 변명이라고 했는데. 변명만큼 구차한 게 없는데, 조슈아의 말이 자꾸 길어졌다. 유혹하듯 낮게 깔았던 목소리도 점차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갔다.

꼭 이렇게까지 말을 길게 해야 알아듣나, 한 번에 눈치 못 채나 계속해서 말을 멈추며 에이드리언의 반응을 살폈지만 여전히 에이드리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만 좋았나?

에이드리언과 닿는 것, 키스하는 것,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소중하다는 듯 뺨에 입을 맞춰 주는 게 좋았다. 깍지를 낀 채로 어깨에 기대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았고. 그래서 더 닿고 싶었는데.

어쩐지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기세 좋게 올라가 있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하지만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내 고개를 들고 쾌활한 척 말했다. 얼굴이 붉어졌을 게 뻔했지만 이번에도 에이드리언이 술기운으로 착각해 주기를 바랐다.

“아, 물론 에이드리언 의사가 제일 중….”

“조슈아.”

“네?”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제 이름에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얼굴을 마주했다. 불과 10cm 안, 아름다운 녹갈색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게 가라앉은 채 조슈아를 응시했다.

이상했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굳었다.

에이드리언이 숨 막히도록 예쁜 얼굴로 조슈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키스인 줄 알고 살며시 눈을 감으려는데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떼었다. 꼭 놀림 받는 기분에 조슈아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에이드리언이 하하 웃으면서 달래듯 조슈아의 뺨을 톡톡 간질였다. 그리고 몸을 가까이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되게 신사로 보였나 봐요.”

“그야, 지금도 신사처럼 굴기는 하….”

뒷말을 이으려는 조슈아의 입술을 에이드리언이 슬쩍 깨물었다. 통통한 아랫입술이 금세 붉게 물들고 성급하게 에이드리언의 혀가 침범하듯 들어왔다. 휘몰아치듯 들어온 혀가 진득하게 조슈아를 얽었다. 조슈아의 뒷머리를 잡은 손이 단단했다.

호흡을 할 수 있게 숨을 불어넣어 주는 일은 없었다. 가쁜 숨을 할딱이면서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에이드리언의 품에 기대듯 안겼다. 에이드리언은 바르작거리는 조슈아의 손을 잡아다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쥘 게 없어서 계속 미끄러지던 손이 이내 에이드리언의 앞섶 쪽으로 다가가자 에이드리언이 빙그레 웃었다.

조슈아의 눈앞이 부옇게 번져 예쁜 얼굴도 흐려보였다. 입천장을 두드리고 혀를 옭아매듯 핥더니 조슈아가 뒤로 물러날 낌새를 보이면 벌을 주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까지의 키스와는 달랐다. 좀 더 거칠었고, 급했고, 야했고, 그리고.

조슈아의 머릿속이 새까맣게 칠해져 갈 무렵에서야 에이드리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볍게 조슈아의 입술을 빨았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조슈아가 가쁜 숨을 뱉으며 에이드리언을 노려보았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며 눈가며 모든 게 다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쉽게도. 내가 그런 말을 듣고도 집으로 가자고 할 정도로 신사는 아닌데. 어쩌죠?”

“지금은 그래 보이네요.”

조슈아가 입술을 삐죽하더니 긴장이 풀어진 듯 배시시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조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슈아, 많이 대담해졌는데요?”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 하던 조슈아가 순진한 얼굴로 에이드리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허벅지에 올라간 제 손을 보고 얼른 손을 소파로 내렸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나른한 동작으로 에이드리언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물론 아까처럼 깊숙한 곳까지는 아니었지만. 한층 더 붉어진 얼굴로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조슈아를 보자 에이드리언은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원래 내가 좀 대담해요.”

“정말요?”

“그러니까, 바로 갈래요?”

위로. 에이드리언의 눈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조슈아는 제가 한 말에 흡족해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윽고 에이드리언이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조슈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 말이 맞네요. 매번 나를 놀라게 해요.”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에이드리언의 말 탓인지는 몰랐다.

체크인을 어떻게 했는지, 엘리베이터를 어떻게 탔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탁- 무게 있는 문이 닫혔다. 조슈아는 룸 안으로 들어서면서 주저하듯 말했다.

“룸이, 다른 것 같은데.”

분명 바우처로는 디럭스 룸이었는데. 와인 셀러가 있는 미니바와 장식용 가벽 너머 보이는 커다란 침대, 그리고 여러 개의 문들과 뉴욕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창, 그 앞에 있는 커다란 풀은 분명 디럭스 룸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뒤에서 안으며 왼쪽 귓불 아래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아까 풀 체킹이라고 하더니. 업그레이드인가 봐요.”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 업그레이드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조슈아의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슈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놀란 얼굴을 했다. 여실히 드러나는 긴장감에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구는 척 키스를 했다. 아랫입술을 빨고 핥고 그리고 살짝 깨물자 조슈아가 입술을 열었다. 톡톡 두드리듯 달래는 키스 한 번에 조슈아의 눈가가 붉어졌다. 등을 감쌌던 손이 조금씩 내려갔다. 허리, 그리고 엉덩이. 조슈아가 잠시 움찔했다. 에이드리언이 그를 확 잡아 당겼다. 끌어들인 곳은 당연히 침대였다.

“잠깐만- 읏.”

쉴 틈 따위는 없었다. 흰색 셔츠의 단추를 푸는 손은 거침없었다. 맥없이 상대를 밀어내던 손은 흉포한 기세에 밀려 에이드리언의 어깨만 그러쥐기에도 벅찼다.

귓불이 깨물렸다. 목선을 타고 키스가 번졌다. 셔츠가 벗겨졌다. 햇빛 한번 본 적 없을 것 같은 새하얀 몸이 드러났다. 에이드리언의 눈이 한층 더 짙어지는 것도 못 보고 조슈아는 잠시 두 팔을 교차해 팔꿈치를 잡았다. 몸에서 한 겹 천이 떨어져 나간 게 뭐라고 몸이 오소소 떨렸다. ‘그’ 스웰딘 뉴욕이 실내 온도에 야박할 리도 없는데 말이다.

그때였다. 맨어깨에 다정한 온도가 닿았다. 츠, 하고 젖은 소리와 함께 떨어졌던 에이드리언이 다시 한번 어깨에 입을 맞췄다. 에이드리언이 입을 맞출 때마다 그의 머리카락이 목 부근을 간지럽혔다. 아야, 조슈아가 낮게 신음했다. 어깨를 깨문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아, 잠깐만-!”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예쁘다고만 생각했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야했다. 살짝 젖은 입술 탓인지, 아니면 분위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에이드리언이 빙그레 웃다가 조슈아의 쇄골 부근을 깨물었다. 아파요? 에이드리언이 나른하게 웃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프기보다는, 아랫배가 당겼다. 그것도 뭉근하게.

에이드리언이 얼굴을 조금 내렸다. 뚫어져라 제 가슴을 보는 시선에 조슈아는 팔을 올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팔목을 잡아 제 목에 걸쳤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젖꼭지, 무슨 색인지 알아요?”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읏-”

그렇게 집중해서 바라봐 놓고 하는 말이 겨우 젖꼭지 색깔이라니. 화려하고 단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제 신체의 색깔이나 묻는 말에 조슈아가 대답했지만 그 또한 끝을 맺지는 못했다.

“되게 야한 분홍색. 꼭 지금 당신 눈가 같은 색깔이야.”

탁한 목소리는 느긋했지만 손은 그렇지 않았다. 서늘한 온도에 바짝 선 젖꼭지를 가볍게 긁고, 누르고, 그리고 문질렀다. 조슈아가 눈가를 찌푸렸다. 묘한 흥분이 아래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으며 젖꼭지를 빨았다. 조슈아의 입에서 야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슈아의 위에 있던 에이드리언이 야살스럽게 웃으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조슈아가 흡, 숨을 삼켰다. 바지 위로도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드러났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울 것처럼 꼭 감고 있는 붉어진 눈가도, 제 자국이 여실히 남은 목과 가슴도. 그러면서도 색기 없이 제 목을 그러쥔 자그마한 손도.

이건 몰랐는데. 에이드리언이 제 입술을 할짝이며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조슈아 베넷은 사람 미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갑자기 멈춘 움직임에 조슈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물기 어린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매달리듯 에이드리언을 바라봤을 때, 에이드리언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슈아의 허벅지를 벌리고 무릎을 접은 다음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오므릴 새도 없이 버클이 풀리고 바지가 끌어내려졌다. 브리프 한 겹 남은 상태에서 다리가 썰렁했다. 브리프가 벗겨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아, 예쁘다.”

진득한 욕망이 묻어나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에 조슈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반대로 에이드리언은 이 말랑하고 예쁜 성기를 어떻게 예뻐해 줄까, 고심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성기를 빨아 준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으나, 이 정도면 한입에 넣고 빨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갔다.

에이드리언이 성기를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귀두의 껍질을 벗기듯 뒤로 젖히고, 선단을 쓸어 주고 고환을 조물락거렸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조슈아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참고는 뒤로 몸을 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몸을 숙인 에이드리언이 옴짝달싹 못하게 몸을 누르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다시 한번 귀두를 간질였을 때 조슈아가 아, 가늘게 신음했다. 이윽고 야한 냄새와 함께 에이드리언이 손에 묻은 끈적끈적한 정액을 보며 씩 웃었다. 조슈아가 탈력감 가득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만, 흐으, 그만해요.”

“부끄러워요?”

“부, 부끄럽다니요. 그냥 보통이죠.”

사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실제로도 눈가가 야하게 붉어져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만지는 대로 몸을 떨고, 허리를 비틀고, 파닥거리고, 그렇게 반응하는 그 자체가 다. 하지만 조슈아는 솔직하게 대답하는 대신 새빨갛게 물든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왜, 나, 나만 벗어요. 에이드리언도 벗어요.”

“정말, 그래도 돼요?”

“당연하죠.”

에이드리언은 두 번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셔츠를 벗었다. 매번 옷 위로만 드러났고, 가끔 키스할 때마다 밀착했던 에이드리언의 몸은 상상보다 훨씬 더 잘빠져 있었다. 잘 관리된 새하얀 피부와 섬세하게 꽉 짜인 근육은 마치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바지를 벗었다. 그 순간 조슈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저. 에이드리언?”

“네?”

“…저기, 혹시 다리 사이에 뭐 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웃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바지를 내리자마자 속옷을 밀어내듯 툭 불거진 성기가 흉흉하게 제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귀엽게 군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성기를 조물거렸다. 조슈아가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고운 분홍색의 성기는 언제 말랑였냐는 듯 제법 착실하게 부피를 더했지만, 단단해진 상태에서도 에이드리언의 한 손에 충분히 들어갔다. 성기를 감싸는 손길은 다정하고, 또 끈적였다.

“뭐가 있기는 하죠.”

“그게, 조금 다른 거 같아, 흐….”

에이드리언이 속옷을 벗었다. 조슈아는 차마 말도 끝내지 못하고 깜짝 놀랐다. 꺼덕거리며 일어난 성기는 제 짐작보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핏줄이 잔뜩 선 채 울컥, 쿠퍼선이 흐르고 있는 성기는 무지막지했고, 또 커다랬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과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하지만 또 묘하게 잘 어울리는 커다랗고 잘생긴 물건이 조금 흔들렸다. 바로 아래에 있는 조슈아의 분홍색 성기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에이드리언이 벌어진 조슈아의 입을 보고 한층 짙어진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조슈아한테 몸을 밀착했다.

“음, 조금 더 놀랄 거 같은데.”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바로 제 성기와 조슈아의 성기를 포갠 뒤 그 위로 조슈아의 손을 얹었다. 조슈아의 손바닥에 꽉 들어차는 성기가 꿈틀하더니 조금 더 섰다. 찌부러지듯 눌리는 제 성기보다 핏줄이 흉흉하게 불거진 잘생긴 성기가 더 커다래질 수 있다는 사실이 조슈아를 경악시켰다.

조슈아의 성기가 다시 단단해졌다. 그리고 한 번 더 백탁을 뱉어 냈다. 조슈아가 두 번을 사정하는 동안 그 위용을 더 세워 가던 에이드리언의 성기가 드디어 최고치에 달한 듯 앞뒤로 꺼덕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꼭 어린아이 팔뚝만 했다. 조금 전의 분위기는 어디 가고 조슈아가 뒤로 몸을 빼려 했다. 잡힌 성기가 당겨서 몸을 빼지는 못했지만.

“아, 안 될 것, 같은, 안 들어 가, 흐으-”

조슈아가 몸을 퍼뜩 튕겼다. 어느새 차가운 젤이 고환 아래를 타고 엉덩이 골을 따라 흘렀다. 선득한 액체에 조슈아가 몸을 잘게 떠는 사이 에이드리언이 콘돔을 씌운 채 다시 한번 손가락에 젤을 발랐다. 그리고 좁은 구멍 주변을 둥글게 애무했다. 흐으, 생경한 감촉이 계속해서 조슈아를 덮쳤다. 배꼽 아래가 참을 수 없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주름을 하나하나 펴듯 꼼꼼하게 주변을 만지던 손가락이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흐윽, 아, 읏-!”

둔탁하고 이질적인 이물감에 조슈아가 몸을 뒤틀었지만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연분홍빛 자그마한 애널은 빠듯하게 벌어졌다. 축축한 습기 위로 손가락을 잘라 낼 듯한 조임에 에이드리언이 구멍 주변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하나 더 넣었다. 다정하게 찌르고, 벌리고 그리고 슬쩍 긁는 동작이 반복되었다.

“더, 못 들어, 못 넣어, 흐으….”

조슈아가 잔뜩 젖은 얼굴로 할딱였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이 예쁜 구멍만 해도 제 손가락을 오물오물 잘만 씹어 먹고 있는데 퉁퉁 부은 저 입술은 얄미운 소리만 냈다. 그러면서도 손은 제 성기를 감싸고 있으면서.

하지만 우습게도, 그 같잖은 우는 소리가 심장을 덜컹하게 만들 정도로 예뻐서,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었다.

“정말, 그만둬요?”

눈물 잔뜩 고인 눈으로 젖은 호흡을 내뱉던 조슈아가 천천히 에이드리언과 초점을 마주했다.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조슈아를 껴안았다. 물론 손가락은 빼지 않은 상태로. 흐으, 에이드리언이 아닌 척 손가락을 깊게 찔렀다. 조슈아가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귓불을 깨물었다.

“무리하지 마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옆으로 흐르고 머릿속은 온통 열기로 엉망이었다. 에이드리언이 깨문 귓불이 화끈거렸다. 더 이상 하면 정말 머릿속이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조슈아가 입술을 달싹이던 찰나였다. 손아래, 흉흉하게 발기한 에이드리언의 성기가 눈에 박혔다. 이 심각한 와중에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의아한 시선으로 조슈아를 바라볼 때, 조슈아가 성기에서 손을 떼고 에이드리언의 목을 감아 얼굴을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오는 에이드리언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할, 거야, 하고 싶어, 당신, 흣.”

조슈아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가락이 빠졌다. 내벽 이곳저곳을 찌르며 성감을 일깨우던 손가락이 나가고 허전함을 인식하기도 전에 애널에 더운 감이 훅 끼쳤다.

“쉬, 이제 들어갈게요.”

흐트러진 조슈아의 앞머리를 한 번 올려 주더니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입술에 쪽, 뽀뽀를 했다. 그 순간, 구멍이 화끈거렸다.

“으, 아, 윽, 윽-”

눈앞에 번쩍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도저히 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무언가가 제 몸을 반으로 쪼개는 것만 같았다.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조슈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의 성기는 천천히 조슈아의 애널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숨, 쉬어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멀어지다 가까워졌다. 조슈아는 정신을 붙들려 노력하며 에이드리언의 목이 생명줄이라도 되듯 껴안았다. 에이드리언은 최대한 천천히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흐, 흐으. 아파요.”

조슈아가 어린아이처럼 울먹였다. 에이드리언이 츠, 혀를 찼다. 그리고 조슈아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손으로는 푹 죽어 버린 성기를 쥔 채 가볍게 쓸었다. 키스가 눈가를 지나 이마, 뺨, 머리카락, 온 데를 스쳤다. 조슈아가 젖은 목소리로 할딱였다.

“키스, 키스, 해 줘요.”

기꺼이. 야하게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조슈아가 사정했다. 그리고 탈력감에 다시 몸에 힘이 빠졌다. 에이드리언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강하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자그마한 구멍이 빠끔일 틈조차 없이 벌어지고,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기다렸다. 조슈아가 익숙해질 때까지. 그리고 수십 분같이 느껴지는 몇 분이 지나고 조슈아가 다시 울며 에이드리언을 불렀다.

“흐, 아파, 아파요. 에이드리언.”

“예뻐, 너무 예뻐.”

세상에 저밖에 없다는 듯 매달리는 조슈아를 보면서 에이드리언이 연신 얼굴에 입을 맞췄다. 달래듯 다정하고 애틋한 얼굴과 달리 하반신은 흉포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꿰뚫린 채 찢어질 듯 벌어진 애널을 두고 에이드리언의 성기가 안을 찔렀다. 고환이 엉덩이를 때리듯 쳐올려졌다.

흐으, 성기가 밀려들어올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통증 사이에서 아찔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고 눈앞이 번쩍였다. 조슈아는 휘몰아치는 낯선 느낌에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며 에이드리언을 껴안았다.

“나 봐요.”

뚝뚝, 땀방울이 흐르는 것 같았다. 욕망에 잔뜩 쉰 목소리로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조슈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에이드리언이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성기가 다시 설 것만 같은 고혹적인 미소였다. 터질 것같이 뛰는 심장 소리가 제 것인지 에이드리언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안을 헤집는 듯한 성기의 움직임에 조슈아는 주문을 외듯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불렀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응?”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헐떡였다. 에이드리언이 상냥하게 웃었다. 기이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조슈아가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도대체 이제까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걸까? 축축하고 따뜻한 습기가 잘라 낼 듯 제 성기를 조였다.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내벽 전부가 성감대인 듯 파르르 떨다가 흐으 울었다. 이렇게 야해 빠져 가지고 이제까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 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구멍 부근을 매만졌다.

광폭한 기세로 내부를 찔러 대던 물건이 조금 빠져나갔다. 조슈아가 흐, 하고 숨을 몰아쉬려던 찰나였다. 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성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잠시 적응한 줄 알았던 내벽이 잘게 떨렸다.

에이드리언이 안으로 깊이 들어올 때마다 배꼽을 타고 흐르던 묘한 감각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제멋대로 흔들리는 몸이 뜨거워졌다. 땀과 체액에 젖은 몸이 부딪히면서 야한 소리가 났다. 에이드리언이 거칠게 아랫도리를 움직이다 한 번 크게 허리를 쳐올렸다. 그러고 얼마 뒤 안에서 뭔가 뜨끈한 게 퍼졌다.

조슈아가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떴다. 결코 나가지 않을 것 같은 물건이 빠져 나가고 뜨끈한 체온이 조슈아를 감쌌다. 땀에 젖은 얼굴로 에이드리언이 세상 다시없을 것같이 달큼하게 웃었다. 조슈아가 힘 하나 없는 손가락에 억지로 힘을 주어 까딱였다. 그것을 봤는지 에이드리언이 얼른 조슈아의 얼굴 위로 제 얼굴을 마주했다.

“되게, 좋은, 거네요.”

잔뜩 울어 가지고 쉰 목소리가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를 뱉어 냈다. 에이드리언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가 금세 둥글게 휘었다. 그리고 다시 조슈아의 온몸에 자국을 내겠다는 듯 이곳저곳에 뽀뽀를 했다. 그러더니 한마디 했다.

“좋죠. 조금 더 할까요?”

“지금은, 말구….”

안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신없이 울며 소리를 지르고 흔들렸다. 사정감과 기묘한 열감이 식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밀려오는 수마가 먼저였다. 예전에 심야 프로그램에서인가, 만족스러운 섹스 후에는 잠이 온다고 했는데. 그건 정말 맞는 말 같았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내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만족스럽다는 듯 조슈아의 코에 뽀뽀를 하던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조슈아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잘 자요. 조슈….”

다정하게 속삭이던 에이드리언이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름다운 얼굴에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에이드리언이 하, 나지막한 한숨을 뱉어 내며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조금 전 제가 사정할 때 떠올렸던 얼굴은 매번 그렇듯 흐릿한 빨간 머리가 아니었다. 제 앞에서 색색거리며 잠든 조슈아 베넷이었다.

* * *

“어제도 왔었는데, 조슈아 휴가일 줄 알았으면 오늘 올 걸 그랬어요.”

로건의 말에 조슈아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26일까지 이어서 휴가를 낸 게 신의 한 수였다. 지금도 온몸이 근육통으로 욱신거리는데 어제 출근했더라면, 어휴. 어차피 출근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겨울인 것도 다행이었다. 목덜미 앞뒤 가릴 것 없이 죄다 자국이 남아서 목이 길게 올라오는 폴라형 니트가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난처해질 뻔했다.

어제 에이드리언이 뜨거운 물수건으로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풀어 줬으니 이 정도였다. 덕분에 어제는 그냥 보냈다. 가끔 이런 농담도 하면서

“그걸 어떻게 바지 안에 넣었어요?”

“음, 조슈아가 한번 넣어 줄래요?”

조슈아가 어제처럼 새빨개지려는 얼굴을 두어 번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리고 오늘 저를 찾아온 손님을 향해 상냥하게 물었다.

“로건은 크리스마스 잘 보냈어요?”

“네. 병원에서 매년 봉사활동 가거든요. 이번에는 보육원 다녀왔어요. 원래는 애들 진료 목적으로 갔는데, 진료고 뭐고 쿠키만 잔뜩 구웠네요. 그런 의미에서 선물이요.”

로건이 카페의 동그란 테이블 위로 포장된 쿠키를 내밀었다. 눈에 초코 칩이 박힌 쿠키는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동물인데, 귀가 작고 배가 나왔으니까, 음.

“곰?”

“토끼…인데 아무리 봐도 곰 같죠?”

“아니에요. 자세히 보니 토끼 같아요!”

조슈아가 손을 내저었다. 동그랗게 뜬 갈색 눈에 당황함이 어렸다. 로건이 피식 웃었다. 이래서일까? 제 사촌이 빨간 머리 동맹군한테 그렇게 관심을 쏟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이유가.

“나도 보니까 반죽 성형할 때 귀를 제대로 못 살렸어요. 다음에는 꼭 성공해서 토끼 과자로 줄게요.”

“토끼 좋아하나 봐요?”

“귀엽잖아요. 작고 몽실거리고.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아, 그거 알아요? 토끼로 된 인형 시리즈인데.”

조슈아는 순간 집에 있는 토끼 인형을 떠올렸다. 에이드리언이 선물로 줬던, 의사 가운을 입은 토끼 인형. 친구라 그런가 취향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알아요. 하나 있거든요.”

“이 정도면 조슈아, 우리 정말 동맹 아니에요?”

로건이 심각한 얼굴로 상체를 조슈아 쪽으로 바싹 당겼다. 조슈아도 덩달아 진지한 얼굴로 로건을 마주 보았다.

“이미 동맹인걸요. 그런데 이 동맹으로 어떤 걸 더 할 수 있을까요?”

“음, 일단은 이렇게 합법적인 만남? 어쨌든 나는 편집장의 아주아주 귀한 손님이니까!”

로건이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조슈아가 조금 더 웃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에이드리언의 이야기를 할까, 말까.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더 기쁜 일이었으니까. 이 좁은 뉴욕 바닥에 내 동맹과 내 애인이 친구일 확률이 도대체 몇 퍼센트나 될까.

“아, 사실 이 얘기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금요일에 뭐 해요? 퇴근하고.”

로건이 한발 빨랐다. 조슈아는 곰곰이 날짜를 따졌다. 이제 따로 수행해야 하는 보스의 행사도 없었다. 연초까지 사적 모임이야 많았지만 지미의 몫이 될 예정이었다. 조슈아의 퇴근 후 일상은 이제 에이드리언으로 가득 찰 예정이었다.

“음, 계획된 약속은 없어요.”

하지만 로건 앞에서 애인 이야기를 꺼내자니 어쩐지 수줍어졌다. 조슈아의 대답에 로건이 한 층 밝아진 얼굴로 웃었다.

“잘됐다. 혹시 파티 안 올래요? 내가 여는 연말 파티인데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가볍게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한잔하고. 그런 건데.”

귀가 쫑긋했다. 로건이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모임이면 에이드리언과도 접점이 있을 것 같았다. 로건에게 말하는 거야 에이드리언과도 이야기를 해 봐야 했으니, 좋다면 가고 안 되겠다면, 음. 고민해 보고.

조슈아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사이 로건이 가볍게 웃으면서 한마디 더했다.

“바쁘면 안 와도 괜찮아요. 연말이니까 바쁘겠죠?”

“아, 그게 아니라.”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찰나, 로건의 뒤에 있는 통유리 문에 제 뒤가 언뜻 비쳤다. 그리고 제 뒤로 다가오는 빌까지 보였다. 조슈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물론 볼륨은 높게.

“혹시, 보스도 오나요?”

“당연히, 아.”

로건이 빌을 발견한 듯 작게 웃었다. 조슈아의 윙크를 본 로건이 바로 말을 맞추었다.

“음, 원래는 초대하려고 했는데. 조슈아 불편하면 뺄까요?”

“조슈아, 잠시 로건이랑 있으라고 했더니 이런 뒤 공작을 펼쳐?”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조슈아가 깜짝 놀란 척 뒤를 돌아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목소리만 깔았지 딱 봐도 섭섭함 가득한 얼굴에 조슈아가 피식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레 빌의 의자를 빼 주었다.

“에이, 장난이죠. 보스 저 멀리서 오시는 것도 제가 다 보고 이렇게 말한 건데. 설마 속으셨어요?”

빌이 오는 것을 모른다면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는 거다. 이 사내 카페를 반경 100m 밖에서부터 술렁이게 할 사람은 에투왈에서 빌 스웰딘뿐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의자에 앉으면서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듯 빌이 일축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빌의 입매가 아주 조금 더 올라간 것을 봤다.

파티 이야기를 곱씹던 빌이 갑자기 두 개의 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로건을 향해 말했다.

“로건, 나는 아메리카노.”

“아, 커피라면 제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조슈아의 팔목을 붙잡고 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상체를 기대었다.

“됐어. 코 묻은 내 돈으로 사겠어, 아니면 한 살 어린 네 돈으로 사겠어. 당연히 로건이 사야지.”

눈 감았다 뜰 때마다 돈이 산처럼 불어나는 스웰딘가의 도련님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로건은 그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일어나서 미셸한테 다가갔다. 그렇게 잘 따르는 사촌한테 커피 한 잔 사 달라고 하고 싶었나? 어차피 사내에서 마시는 커피면 누구든 다 무료로 마실 수 있는데.

역시 보스의 사고방식은 알 수가 없다고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빌이 멀어진 로건을 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파티에 갈 거야?”

“음, 보스 오신다면 고민 좀 해 보고요.”

“까분다.”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흥, 빌이 코웃음을 쳤다.

“음, 일단 가서 얘기해 보고요. 에이드리언은 당연히 초대되었을 거 같으니까.”

“매년, 그랬지.”

빌이 잠시 말을 끊었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다가 입가로 웃음을 흘렸다.

“혹시 거기에서도 보스랑 에이드리언이랑 막 싸우고 그래요?”

“누가 그렇게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해.”

“제가 다 봤는데. 그날 저 체할 것….”

“핫 초콜릿 안 마셔? 다 식겠다.”

부끄러운지 제 잔을 들어 입가까지 대어 주는 모습에 조슈아가 한번 봐준다는 듯 눈썹만 한 번 찡긋했다. 그리고 핫 초콜릿을 한 모금 마셨다. 진한 갈색의 핫 초콜릿 위 동동 뜬 마시멜로가 달큼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매일 그렇게 단거 먹다가는 당뇨 온다.”

“밤에 잠 잘 못 잘까 봐 마시는 거예요. 그러는 보스야말로 그렇게 아메리카노 많이 마시다가는 밤에 잠 못 자요.”

“이미 다 커서 괜찮아. 아, 너는 좀 덜 컸지?”

이! 조슈아가 사나운 눈으로 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뱉듯이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전직 모델 출신인 보스랑 평균 키인 저랑 비교하는 건 사절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자리에 안 있겠다는 듯 흥,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커피를 받아 오던 로건한테 인사까지 한 조슈아가 뒤도 안 돌아보고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로건이 다가와 커피 잔을 빌 앞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또 뭐야. 어린애도 아니고.”

“…어린애였으면 편했으려나?”

“뭐?”

로건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빌은 가볍게 머그잔을 흔들었다. 잘 내려진 커피가 작은 파동과 함께 물결쳤다.

심란했다. 몇 년째 이어지던 파티는 빌 역시 제법 좋아하던 파티였다. 딱 한 명만 빼고. 제 주변에 느물거리듯 다가와 어느새 조슈아와 로건을 쥐고 살살 흔드는 뱀 같은 새끼.

빌이 가볍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건의 파티에 조슈아가 오는 게 제 입장에서 좋은 일일지 아니면 반대일지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분명한 건, 그 파티에 둘이 온다는 생각만으로도 제 기분이 팍 상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심장 한편이 저릿한 것에 관해서는, 빌은 잠시 묻어 두기로 했다.

* * *

- 어떡하죠? 아쉽게도 저는 금요일에 야근인데.

아무래도 진정한 악마는 에이드리언의 보스인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구두 앞코로 바닥을 찼다. 폭신폭신한 붉은 융단 카펫은 이 정도로 꺼지지 않았지만 조금은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연말의 금요일, 빠른 퇴근을 해도 모자란 마당에 야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에이드리언은 옅게 웃으며 “대신 크리스마스 다음 날을 쉬는 걸로 딜 했었거든요.” 한마디 했다. 조슈아는 할 말이 없었다. 로건의 연말 파티야 같이 못 오는 게 아쉬운 것으로 끝나도, 크리스마스 다음 날 함께 있지 못했다면 서러움이 왈칵 밀려왔을 거다.

조슈아는 한 번 어깨를 추켜올렸다가 훅 힘을 뺐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술들로 화려한 바 안에는 연미복을 차려입은 전문 바텐더가 셰이커에 있던 칵테일을 잔에 따른 뒤 가볍게 불을 붙이고 있었고, 갤러리를 방불케 만드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의 방 중앙에는 가벼운 저녁거리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미안할 만큼 훌륭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뉴욕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창은 물론,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와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수많은 문들까지. 눈이 휘둥그레지는 어마어마한 풍경은 도무지 ‘작은 파티’가 아니었다. 무려 스웰딘 뉴욕의 스위트룸이었으니까.

에이드리언은 거짓말쟁이다. 자신도 몇 번이나 로건의 파티에 가본 적이 있었고, 정말 작은 파티니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하긴, 로건이 줬던 초대장을 리셉션에 보여 줬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제법 높은 직급의 직원이 직접 엘리베이터에 카드까지 찍어서 친절하고 정중하게 안내해 주는 건 딱 제 보스가 다니는 사교 모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반짝거리는 미니드레스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족히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이 파티는 조슈아가 생각한 가벼운 맥주 파티와는 거리가 있었다. 맥주도 서버가 직접 오크통에서 따라 줬다. 물론, 어떤 맥주 스타일을 좋아하는지도 물어보고 말이다.

다행히도 조슈아는 보스의 사교 모임을 몇 번이나 수행했다. 맥주의 발효 방식이 세 가지인 것이나, 어떤 맥주에 어떤 잔이 어울리는지는 기본이었다. 스니프터 잔에 담긴 흑색 맥주는 손에 물방울이 묻어날 정도로 차가웠다. 거품의 풍미도 좋았다. 한 모금 맥주를 마시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조슈아는 피식 웃으며 로건을 찾았다.

오자마자 반가운 인사만 한 번 했던 로건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 눈이 마주쳤다. 혼자 있는 조슈아를 보며 잠시 미안한 표정을 짓던 로건이 이쪽으로 오려고 했지만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조슈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서로 다 아는 눈치였다. 생각해 보면, 로건 역시 스웰딘가의 가족 계열인 ‘헤네스 제약 회사’의 자식일 텐데. 제 빨간 머리 동맹군이 먼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빌이라도 오면 덜 심심하려나?

“로건-”

뒤에서 제 어깨를 감싸 안는 손길에 조슈아가 들고 있던 맥주잔을 떨어뜨릴 뻔할 만큼 깜짝 놀랐다. 조슈아가 얼른 앞으로 몸을 빼자 어깨에 얹어졌던 손이 힘없이 툭 내려갔다. 뒤를 보니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이 제법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간격을 벌린 상태에서도 숨 쉴 때마다 술 냄새가 났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조슈아가 정중하게 말하자 상대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그제야 사실을 알아챈 듯 동공이 커졌다. 남자는 술에 취하기는 했지만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남자가 금세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로건인 줄 알았는데.”

조슈아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조슈아를 따라오며 말을 건넸다.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혹시 로건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네?”

“아니, 그냥.”

무례하다 느껴질 만큼 뜬금없는 질문에 조슈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다가 지나가는 서버에게 새로운 와인 잔을 받았다.

“로건 파티야 다 아는 사람들만 오는데, 새로운 얼굴 보니까 신기하기도 해서요. 그렇다고 의료 쪽이나 스타트업은 아닌 것 같고.”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조슈아는 남자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갔다. 다섯 걸음 정도 걸었을 때였다. 손목을 잡아채는 손길에 몸이 뒤로 돌려졌다. 갑작스러운 신체적 접촉에 조슈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남자한테 한 걸음 다가가려던 순간, 조슈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남자는 그런 조슈아의 반응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거드름을 피우듯 조슈아한테 말했다.

“아니면 로건 사촌인가? 쫌 닮은 것 같은데.”

“사촌은 저기 있네.”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뒤로 휘청였다. 어깨를 잡은 손의 악력에 남자가 화를 내듯 뒤로 돌아보다 딱딱하게 굳었다. 에이드리언이었다.

“안녕, 조슈아. 놀랐죠?”

“오늘 야근이라고….”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요. 내가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어때요. 놀랐어요? 태평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랐다. 분홍색이 언뜻 도는 갈색 눈이 커진 채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작게 벌어진 입술을 진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상냥하게 웃었다. 남자가 으, 작게 신음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남자가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오, 오랜만이네. 에이드리언. 잘 지냈어? 영화….”

“잘 지냈지. 그런데 오늘 조금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빨리 집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에이드리언이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잔뜩 굳어 있던 남자가 화색이 돌았다.

“응, 응! 하하. 내가 오늘 좀 취했나 봐. 먼저 들어가야겠다. 고마워.”

에이드리언의 손이 남자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남자가 뒷걸음질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사과는 하고 가야지.”

“응?”

“취했든 안 취했든, 허락도 없이 손목 잡은 건 잘못이잖아. 안 그래?”

에이드리언이 나른하게 웃었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만 보는 사이,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미안, 미안합니다. 제가 오늘 너무 취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뭐, 네.”

조슈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남자는 그제야 끝난 것 같다는 듯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허겁지겁 문을 향해 걸어갔다. 에이드리언이 조심스레 조슈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속상하다는 듯 조슈아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안 아팠어요? 지난번에 보니까 팔 잘만 꺾더니, 오늘은 왜 안 그랬어요.”

“에이드리언만 안 나타났어도 곧 꺾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조금 늦게 올 걸 그랬어요.”

에이드리언이 정말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에이드리언을 잡아끌었다. 목적지는 소파가 많은 가장자리였다. 가장 폭신해 보이는 빨간색 소파에 앉은 뒤 조슈아가 농을 던지듯 한마디 했다.

“에이드리언,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이랑은 아는 사이예요?”

“같은 고등학교였어요. 미식 축구할 때 러닝 백 벤치 선수였는데, 가끔 코치님 대신 제가 훈련시킨 적이 있어서 얼굴은 알아요.”

“무섭게 훈련했어요?”

“설마요. 제가 마음이 여려서.”

능숙하게 대답하는 에이드리언을 보면서 조슈아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상냥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고는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무서우면 얼마나 무서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새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손목을 잡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어요. 오늘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줄 수 있어요?”

“뭔데요?”

“나 오늘 일일 보디가드 시켜 줘요.”

“네?”

여기가 무슨 위험한 곳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보디가드의 자청에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 봤잖아요. 갑자기 술 취한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고. 위험해요.”

에이드리언은 정말 위험한 곳을 가 보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조슈아는 빌을 수행할 때를 떠올렸다. 정말 칼을 들고 날뛰는 스토커부터 편지봉투에 유리조각과 칼을 붙이는 협박범 등을 보면 손목 잡는 술 취한 사람 정도는 가볍게 넘길 텐데. 하지만 조슈아는 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에이드리언의 청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보디가드면 뭐 할 건데요?”

“모든 곳을 같이 다닐 거예요.”

“화장실까지도요?”

“화장실은 필수죠.”

결연하게 말하는 에이드리언을 보면서 조슈아가 새침하게 웃었다. 그리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언?”

그때였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다가온 로건이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함께 있는 조슈아를 보고, 둘이 맞잡은 손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에! 말하지 않아도 로건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조슈아는 무의식적으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아, 이상한 표정이다. 그린 듯 예쁜 얼굴은 같은데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무슨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답을 할 수가 없어서 조슈아가 한 번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언이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오랜만이야. 로건. 놀랐지?”

“못 온다고 했잖아. 그런데, 옆에 조슈아랑 손을 잡고 있네?”

능글맞게 목소리를 깔던 로건이 팔꿈치로 에이드리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에이드리언이 아픈 척을 하면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조슈아는 조금 따라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의아하다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왜요. 조슈아?”

“네?”

“내가 그렇게 예뻐요? 왜 그렇게 계속 쳐다보지?”

“제가요?”

과장되게 대답하는 조슈아를 보며 에이드리언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하면 또 서운한데.”

“예뻐서 나도 모르게 봤나 봐요.”

에이드리언이 화사하게 웃으며 조슈아의 뺨을 쓸었다. 그 온기에 조슈아는 살짝 눈을 감았다 뜨며 마주 웃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본 모양이었다. 찰나의 순간, 에이드리언이 짓고 있었던 표정은 지금처럼 예쁘고 다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날것 같은.

조슈아가 생각을 멈췄다. 세상에, 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날것 같은 얼굴이라니. 말도 안 되는 제 표현에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이상한 표정이라니. 저 예쁜 표정에서 이상한 표정이 나올 수가 있냐는 말이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깨 한 번을 털어 버리듯, 조슈아가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세상 좁다더니 정말이네.”

로건이 눈을 반짝이면서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조금 더 이야기해 보라는 강력한 사인에 조슈아가 난감하게 웃었다.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저 표정이었다. 조슈아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입을 떼거나 다른 동작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보스는 안 오나 봐요?”

분명히 퇴근 전에 확인한 빌의 일정은 이곳이었는데. 파티 시간이 무르익는데도 불구하고 빌은 보이지 않았다. 로건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 빌은 오늘 안 와요. 갑자기 가족끼리 조촐한 파티를 한다고 해서.”

스웰딘가, 그것도 직계 중 직계의 조촐한 파티라.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다이아몬드로 번쩍거리는 방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라면 훨씬 조화로울 텐데.

“아무튼, 이든. 축하한다. 그것도 내 빨간 머리 동맹군이라니.”

스스럼없이 다 큰 남자끼리 애칭으로 부르는 정도면 얼마나 친한 걸까? 조슈아는 조금 부러웠다. 그리고 입 안에서 두 글자를 굴려 보았다. 이든. 이든. 에이드리언과 잘 어울리는 애칭이었다. 장난스레 툭툭 건드는 손길에도 에이드리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빨간 머리 동맹?”

“잘 봐. 이 정도로 새빨간 머리가 어디 흔해? 심지어 둘 다 홈즈 팬이라고.”

로건이 제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 보며 으스대듯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초콜릿을 들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아서 조슈아가 따라 웃었다. 그리고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인가 봐요. 아까 누가 나를 로건으로 착각하더라고요.”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는지 로건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누구였는데요?”

“음, 이름은 모르고. 아까 에이드리언은 알던데. 같이 미식 축구했다고.”

말을 하면서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향해 웃었다. 로건은 누구냐고 에이드리언한테 물었지만, 에이드리언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어깨만 으쓱했다.

“알아서 뭐 하게?”

“…그러게? 조금 놀릴까?”

“착각했다고?”

“…유치해?”

에이드리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떠냐는 듯 로건이 헤헤 웃었다. 그럼 안 찾지 뭐. 혀를 날름 내밀며 한마디 하는 게 해맑았다.

“너가 보기에는 어때? 우리가 닮았나?”

에이드리언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로건과 조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새빨간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와 채도가 조금 다른 갈색 눈동자. 이내 에이드리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에이드리언의 입매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게 떨렸다. 그것을 놓친 조슈아는 적당히 웃으며 주변을 힐끗거렸다. 아무래도 호스트에 에이드리언까지 있으니 시선이 쏠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에이드리언이 더 많은 시선을 받는 걸지도 몰랐다. 조슈아의 시선에 로건이 알아차린 듯 에이드리언의 발을 툭 찼다.

“니가 가. 조슈아랑 이야기 좀 하게.”

“뭐?”

에이드리언이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로건은 이미 몸을 반이나 돌려 에이드리언을 외면했다. 제 편을 들어 달라는 듯 에이드리언이 소매를 잡고 흔들었지만, 조슈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로건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정말 하이스쿨 시절 에이드리언이 금발 미인 포지션이었는지 같은 우스운 이야기 같은 거.

에이드리언이 잠시 난감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조슈아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귓가에 딱 조슈아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속삭였다. 로건은 그 작은 목소리는 놓쳤지만 조슈아의 콧잔등이 장밋빛으로 달아오르는 것은 알아차렸다. 제 말이 끝났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몸을 폈다. 사자가 몸을 늘리듯 우아하고 거만한 자태로, 에이드리언이 한마디 했다.

“대신에 조슈아한테서 떨어지지 말고.”

“와. 저 재수 없는 자식.”

로건이 허망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리고 그렇지 않냐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동조를 바라는 얼굴에도 조슈아는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제 빨간 머리 동맹군에게도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로건이 고개를 떨궜다.

“완전 다른 사람이야. 너무 변했어.”

고개까지 설레설레 저으며 극적이게 말한 로건이 불현듯 고개를 들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아까 에이드리언이 뭐래요?”

로건은 소아과 의사가 아니라 배우를 했어도 참 잘 어울렸을 거다. 어쩜 저렇게 감정이 풍부하고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해사하게 웃으며 궁금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로건을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비밀이 아니고서야 술술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았다.

“음, 그건 비밀이에요.”

하지만 아쉽게도 조슈아는 눈을 찡긋했다. 로건이 입을 떡 벌렸다가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비밀이었다.

“위험하니까 로건 옆에 꼭 붙어 있어요.”

위험이라고는 먼지 한 톨만큼도 없어 보이는, 화려하고 안락하고 따뜻한 이곳에서 혼자서 보디가드를 자처했던 제 애인의 귀여운 모습은 특급 보안 딱지를 붙여도 모자랄 정도였으니까.

“나랑 처음 봤던 날, 에이드리언 왔었죠?”

서버가 가져다주는 요기될 만한 요리 외에 간단한 핑거 푸드는 바 옆 가장자리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가볍고 예쁜 접시에 핑거 푸드를 담던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건과 처음 본 날이라면, 빌이 저녁을 함께 먹자 했던 그날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저를 데리러 온 날이기도 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빌이 야경 멋있다고 해서 보다가 우연히 봤어요. 뉴욕에서 보기 힘든 머리카락 조합이잖아요.”

타오르듯 강렬한 빨간 머리와 화려한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금발. 조슈아가 키득거리며 동의했다. 로건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 집게를 들어 샐러리를 들었다. 윽, 조슈아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확실히 로건은 보스랑 사촌이네요.”

“조슈아 샐러리 안 먹어요?”

“먹으라면 먹는데,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것도 마요네즈 딥을 듬뿍 찍어야 겨우 한 입 먹는다. 이상하게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빌은 가끔 다이어트 도시락을 먹었다. 물론 조슈아도 함께. 그 도시락에는 필수로 샐러리가 들어가는데, 조슈아가 남기자 그 후로 조슈아의 도시락에 샐러리는 들어가지 않았다. 빌은 한껏 거만한 얼굴로 ‘애송이’라고 놀렸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로건은 놀리는 대신 동질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꼭 가리는 음식이 있는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떨떠름한 웃음 말이다.

“나는 목이버섯이요. 혹시 목이버섯 알아요?”

“네! 중국 음식 좋아하거든요.”

“오, 나도요!”

하나의 공통점이 더 늘어났다. 옆에서 음식을 담던 사람들이 로건과 조슈아를 돌아 다른 음식을 받으러 갔다. 그것도 모르고 로건이 들뜬 듯 말했다.

“대학 다닐 때 엄청 먹었거든요. 포장해 가서 영화 보면서 먹고. 내가 너무 좋아해서 친구들이 나중에는 샌드위치 먼저 사 왔었어요. 그거 같이 먹자고. 그래도 꿋꿋이 사서 애들 샌드위치 먹을 때 같이 먹고.”

“저도 그랬어요. 자주 가는 곳도 있고.”

“나중에 나도 한번 같이 가요.”

식사 약속도 하나 잡았다. 제이콥의 요리를 누군가한테 소개시켜 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조슈아가 목이버섯을 좋아하니 어떤 요리를 먹어도 크게 상관은 없을 거였다. 버섯 같지 않다고, 로건이 한마디 하다 요리 중 하나를 발견한 듯 웃었다. 그리고 그 요리 그릇 앞으로 가서 집게를 들었다. 그리고 조슈아를 향해 물었다.

“가지 브루스케타, 좋아해요?”

어슷썰기 한 바게트 위에 치즈 스프레드를 듬뿍 펴 바르고 토마토와 구운 가지를 올린 뒤 바질과 통후추가루로 장식한 브루스케타는 먹음직스러웠으나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씩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요?”

로건은 다정하게 웃으며 브루스케타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그리고 제 그릇에 하나를 더 올려놓았다.

로건과의 이야기는 즐거웠다. 의사 면허를 공부하던 일도, 빌과 있었던 일도.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역시 에이드리언에 관한 이야기였다.

“에이드리언과 처음 만난 거요? 열 살 때였나?”

로건이 잠시 회상에 잠긴 것처럼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참, 예쁜 꼬마였는데. 꼭 저는 그때 꼬마가 아니었다는 듯 이야기를 하는 게 웃겼다. 하긴, 조슈아도 한번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뺨이 통통한 다섯 살 애기 에이드리언을.

하지만 지금은 그 천사 같은 꼬마를 상상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조슈아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그러면, 혹시. 에이드리언도 보스나 로건 쪽인가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로건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아까부터 아주 예리한 감이 조슈아를 콕콕 찔러 왔다. 어쩌면 예전부터일지도 모른다. 제 옆집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조슈아처럼 평범한 소시민인데, 보스를 둔 투자 회사맨인데, 무섭도록 이 자리에 잘 어울렸다. 그 누구보다 더.

“노코멘트!”

“네?”

아까의 일의 연장전인가? 조슈아가 눈썹을 늘어뜨렸지만 로건은 단단하게 웃었다.

“그런 일은 연인 사이에서 물어야죠. 나는 빠질래요.”

우아하게 선을 긋는 로건을 보면서 조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 털었다. 그리고 그런 조슈아를, 저 멀리에서 바라보는 에이드리언의 시선이 번뜩였다.

들고 있는 잔을 굴리다가 샴페인으로 입술을 축였다. 제 주변에 몰린 사람들이 서로 떠들어 댔지만 귀에 들어오는 말은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조슈아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이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조슈아가 빙그레 웃으며 가슴 부근께로 손을 올려 작게 흔들었다.

귀엽기도 해라. 부끄럽다는 듯 얼른 손을 내리고 다시 로건과 대화하는 조슈아를 보면서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웃었다.

파티에 온다는 것은 제 패를 까는 일이었다. 제 옆에는 어떻게든 다가오려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조슈아는 눈치가 빨랐으니까. 옆집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평범한 소시민이 아닐 수 있다’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슈아가 이상한 소리를 듣는 것은 에이드리언으로서는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로건은 타인의 일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건이 있다면 그 누구도 조슈아한테 허튼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가 그렌트의 후계자라는, 조슈아 베넷한테는 아직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 같은 거.

그리고 로건이 잠시 제 쪽으로 시선을 준 순간, 부드러우면서도 선 긋는 그 미소에 에이드리언은 제 선택이 옳았음을 직감했다.

느슨해진 입매를 타고 에이드리언은 아까 로건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가 닮았나?”

그럴 리가.

에이드리언은 아까 못했던 대답을 했다. 닮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조슈아 베넷이었는데. 다른 부분들이 너무 많이 튀어나온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데 말이다.

자그마치 11년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12년이 될 마음이었다.

다른 부분은 같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아찔하게 웃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조슈아와 로건이 함께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둘 중 누구한테 먼저 자연스레 시선이 갔는지는 모른다. 둘은 가까이에 있었고, 한눈에 들어왔으니까. 그저 제 심박동이 빨라지는 것으로 보아 추측할 뿐이었다.

다시 한번….

로건 헤네스구나. 하고.

* * *

“우리 둘 다 왜 차를 생각 안 했나 몰라요.”

로건이 함께 가라고 해 준 비서가 아니었더라면, 택시 타고 올 뻔했다. 마크 웹디즈드라는 로건의 비서는 완벽한 운전 솜씨로 스튜디오까지 데려다준 뒤 함께 따라온 차를 타고 복귀했다.

조슈아가 소파 아래에 앉은 채 등을 기대었다. 샤워 직후, 젖은 머리카락에서 샴푸 냄새가 훅 끼쳤다. 소파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으면서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조슈아의 뒷목에 입을 맞추었다. 대답 대신 따뜻하고 뭉근하게 닿는 체온에 조슈아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드리언이 달콤하게 웃었다.

“당신한테서 좋은 향이 나서.”

“치, 똑같은 향일 텐데, 뭐.”

같은 욕실을 썼으니 샤워 젤도 당연히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목에 한 키스에 대해 고작 한다는 말이 향 이야기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나른하게 웃으며 조슈아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단번에 조슈아를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아무리 힘이 세도 조슈아도 건강한 성인 남성인데, 에이드리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편안하게 웃었다. 오히려 조슈아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등에 기대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니까요. 똑같은 향이어야 하는데, 왜 당신한테서 나는 향이랑 내 향이랑 다른 거야?”

“똑같은 거 썼잖아요.”

“그거야 모르죠. 같이 씻은 것도 아니고. 나 몰래 욕실에서 다른 걸 썼는지.”

아하. 조슈아가 소리 없이 입꼬리만 씩 올려 웃었다. 같이 씻자던 말을 거절한 걸 이런 식으로 섭섭하다 토로하는 모양이었다. 모르는 척 조슈아는 제 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정말 다른가? 제 팔이라 그런지 그냥 바디 워시 냄새만 나는 것 같았다.

조슈아가 몸을 돌렸다. 자세가 불편해 오른쪽 다리까지 돌리자, 소파에 앉아 있는 에이드리언에게 마주 보고 안기는 모습이 되었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품에 파고들 듯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그리고 킁킁 다시 한번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눈을 깜빡였다.

“나 말고, 에이드리언이 다른 거 쓴 거 아니에요?”

우습게도, 정말 향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제 집에 있는 샤워젤은 달콤한 바닐라 향이었다. 그런데 에이드리언 품에서 나는 냄새는 달콤함보다는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강했다. 처음 에이드리언을 만나고 나서 느꼈던, 에이드리언의 향이었다. 분명히 바닐라 향 느낌은 나는데. 이게 사람의 체향이라는 걸까?

기분 좋은 느낌에 조슈아가 조금 더 에이드리언의 품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무언가 커다랗고 단단한 게 조슈아의 앞섶을 툭툭 건드리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은 아랫도리의 사정 따위는 하나도 모른다는 듯 고귀해 보였으나, 아래에 느껴지는 부피는 이미 이 세상 성기가 아니었다.

세상 앙큼한 짓은 조슈아의 머릿속에 있었다. 물론 줄줄 울 정도로 아프고 무서웠던 건 사실이었으나, 그만큼 좋았다.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에이드리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조슈아의 눈에는 단정하고 새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으….”

조슈아가 왼쪽 목덜미에 이를 세웠을 때,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신음을 뱉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바닐라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잘근잘근 깨물고 새끼고양이처럼 핥고 빨아들였다. 그리고 뽀뽀를 하면서 떨어지자 목덜미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마음에 들었다.

“에이드리언. 나는 금요일이 진짜 좋아요.”

“내일이 쉬는 날이라서요?”

에이드리언이 탁해진 목소리로 웃었다. 조슈아가 눈을 가늘게 접고 웃었다. 그리고 제 손을 천천히 내렸다. 바지 위로 발기한 성기의 윤곽이 언뜻 드러났다. 조슈아의 손이 닿자 윤곽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쉬니까, 좋잖아요. 뭘 하든 간에. 그렇죠?”

그러고 눈을 깜빡거렸다.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요망한 말을 한 얼굴이 더없이 예뻐서, 우습게도 에이드리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져 버렸다.

“아, 잠깐만.”

눈꺼풀까지 파르르 떨릴 정도로 짙은 키스에 헐떡이던 조슈아가 제 바지 위로 오는 손길에 에이드리언의 가슴을 밀쳐 냈다. 에이드리언은 그 힘없는 손길에 밀려나는 대신 그 손을 잡고 손가락을 핥았다. 손가락에 닿는 축축한 온기가 명백한 성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아까 키스의 여파로 제 성기 역시 빠듯하게 부풀었지만, 지금 그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잠깐만요. 에이드리언, 나 잠깐만.”

“왜. 화장실?”

에이드리언이 짙어진 눈으로 조슈아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 바지 위로 조슈아의 성기 부분을 건드렸다. 흐으, 조슈아가 잘게 몸을 떨었다. 사실은 더 급한 일이었다. 집이라 아무 생각 없이 편한 사각팬티를 입었다. 그것도 심지어 전혀 섹시하지도, 유혹적이지도 않은 검은색 줄무늬 사각팬티.

예전에 애슐리 테닝텀을 집에 데려다줬던 날이 떠올랐다. 뒷자리에서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던 중 웃긴 이야기를 들었다며 애슐리가 입을 열었다.

“조슈아. 자기, 사람이 시각적인 효과에 얼마나 강한지 알아?”

“글쎄요?”

다행히 그날 애슐리를 데려다주면서 운전했던 차는 BMW였다. 덕분에 조슈아는 제법 떨지 않고 애슐리의 말을 맞췄다.

“얼마나 크냐면, 전희 때 남자 속옷이 줄무늬 트렁크 팬티여서 섹스 할 기분이 식어 버릴 정도지. 심지어 그 남자가 지금 엄청 핫한 슈퍼스타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애슐리가 키득거렸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보스도요?”

“음, 빌?”

애슐리가 잠시 생각하듯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입꼬리만 쓱 올려 웃었다.

“빌은 논외! 그는 엄청 핫하고 섹시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섹시 핫 그 자체잖아.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나 웨스트우드 스트리트로 데려다줄래? 적어도 거절당한 내 친구 위로는 해 줘야지. 아, 이건 빌한테는 비밀! 빌은 아직도 내가 자기랑 신디랑 만나는 거 모르는 줄 알더라. 한번 속 좀 썩어 보라지.”

애슐리가 짓궂게 웃었다. 물론 빌은 애슐리의 일에 신경도 안 썼고, 둘은 헤어졌지만, 애슐리의 그 말은 아직까지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조슈아는 섹스 전희에서 섹시하지 않은 속옷 때문에 분위기가 변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얼른 뒤로 몸을 뺐다. 그리고 금방이면 된다는 식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금세 다시 눕혀졌다. 안전하게 제 등을 받쳐 주며 동시에 어깨를 누르는 에이드리언을 보며 조슈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에이드리언은 황금빛 꿀이 떨어지듯 달큼하게 웃었다. 그리고 무릎을 들어 조슈아의 앞섶을 뭉근하게 눌렀다. 흐으, 직격으로 오는 자극에 조슈아가 신음을 뱉었다.

“나, 화장실, 화장실 가야 하는데.”

“나 저 옷장에 뭐 있는지 아는데.”

“네?”

“빤히 보였다고요. 아차 하고 바지 내려다보다 속옷 있는 옷장 보다가 화장실 보고 나 밀쳐내고.”

에이드리언은 갈색 눈이 당황으로 물든 것을 즐겁게 감상했다.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귀엽게 논다. 도대체 아랫도리에 어떤 깜찍한 걸 숨겼기에 이러는 걸까? 에이드리언이 무릎에 힘을 주자 조슈아의 눈가가 조금 더 달아올랐다.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트레이닝 바지를 내렸다. 허리 밴딩이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하. 세상에. 에이드리언의 낮은 중얼거림에 조슈아가 제 눈을 가렸다.

“줄무늬네요.”

식었다. 분명히 식었을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말 속옷 섹시한 걸로 입었을 텐데. 지난 크리스마스 전, 큰마음 먹고 구매한 속옷들이 옷장에 한 가득인데. 왜 하필 오늘 골라도, 꼭.

“흣! 에, 에이드리언!”

에이드리언이 속옷 위로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엄지로 꾹 누르면 말랑한 성기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에이드리언의 손은 성기를 꼭 감싸고도 조금 남았다. 성기가 쉴 틈 없이 주물러지는 건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지는 강한 쾌락이었다.

“흐, 흐읏, 아-”

쉴 새 없이 신음을 흘리던 조슈아가 바르작거리며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뭐라도 잡지 않으면 꼭 떠밀려 내려갈 것 같았다. 속옷 위로 만져지는 느낌인데도 불구하고 아랫배가 저절로 당겼다. 하지만 조슈아는 지난번의 감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빨리 속옷이 벗겨졌으면 했다.

“귀여운 속옷이네요. 누구한테 보여 주려고 이렇게 귀여운 거 입었어요?”

달뜬 분위기와 달리, 에이드리언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조슈아는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보여 줄, 흐, 줄 알았…더라면, 섹시한, 걸 입었죠. 으, 흐.”

조슈아가 물 위로 뛴 물고기처럼 파드드 몸을 떨었다. 성기와 애널 사이 회음부 위로 뭉근한 자극이 마치 톡 쏘는 별사탕처럼 튀어 올랐다. 속옷을 한 겹 사이에 두고 회음부 위의 자극은 점점 더 애널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잔뜩 당기는 성기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애널을 맴돌던 손가락이 속옷 위로 구멍을 꾹 누르자 조슈아는 더 버티지 못하고 사정했다. 그리고 탈진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에이드리언은 짙게 물들어 가는 조슈아의 속옷을 벗겼다.

몸 주인을 닮아 말랑하고 예쁜 성기였다. 지친 얼굴로 부끄럽다는 듯 다리를 오므리는 모습에 에이드리언은 더 이상 참지 못할 만큼 성기가 당기는 것을 느꼈다. 새침하게 오므린 다리 속 구멍이 얼마나 뜨겁고 조이고 자신을 놔주지 않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거칠게 다리를 벌리고 한번에 제 성기를 밀어 넣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아주 인내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바지를 벗고 속옷을 벗자 커다랗고 잘생긴 성기가 잔뜩 성이 난 채로 꺼덕였다. 에이드리언은 한 손으로는 제 성기에 조슈아의 정액을 묻혔고, 다른 한 손으로는 구멍을 파고들었다.

흐으, 제 안으로 파고드는 익숙지 못한 이물감에 조슈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오랜 애무로 녹진해진 몸은 다른 반항 없이 손가락을 삼켰다. 손가락이 하나, 둘, 셋 들어갈수록 빠듯한 틈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새하얗던 애널 주변이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면서 에이드리언의 손짓이 성급해졌다. 잔뜩 울먹이던 조슈아의 목소리는 그의 이성에 불을 지폈다.

저 예쁜 얼굴이 더 가늘게 울면서 세상에 온통 저만 있다는 듯 매달린다는 것을 알기에.

“에이드리언, 에이, 아-!”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조슈아가 순간 숨을 헉, 하고 멈췄다. 제법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허벅지가 강한 힘으로 가슴팍까지 밀어붙여졌다, 좁은 틈으로 잔뜩 젖은 성기의 끝이 파고들었다.

몸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조슈아가 우는 사이, 눈물보다 더 뜨거운 축축함이 제 눈가에 닿았다. 에이드리언이 아주 천천히 허리를 밀었다. 이 따뜻하고 좁은 곳은 제 성기를 빈틈 하나 없이 감쌌다. 하, 에이드리언은 감탄을 내뱉었다. 조슈아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제 이름을 불렀다.

머리가 돌아 버리는 느낌에 에이드리언은 다정하게 조슈아의 앞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순간, 애틋한 얼굴과 달리 에이드리언이 흉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흐, 흣, 조슈아의 몸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통통하게 부푼 버찌색 유두가 꼿꼿하게 선 채 달랑거리며 시선을 빼앗았다. 에이드리언은 다른 한 손으로 유두를 누르고 짓이겼다.

“그거, 알아요? 당신 안이, 지금 나를 꽉 물고, 놓지를 않아.”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에이드리언이 맞았다. 머릿속을 넘치게 만드는 야한 말끝에 나직한 한숨이 섞였다. 몸을 반으로 가를 듯 강한 자극에 조슈아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애꿎은 이불만 잡았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팔을 제 목에 감았다. 이내 따끈하게 달라붙는 온기에 에이드리언이 웃었다.

퍽, 퍽, 강한 마찰음이 날 정도로 에이드리언이 빠르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코를 킁킁 댔다. 아까 났던 달콤한 향기 위로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 정도로 야한 향이 묻어났다. 그 향은 에이드리언의 허릿짓을 더 음탕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 주인처럼 말랑한 성기를 한 손에 잡은 에이드리언이 찰흙을 쥐듯 부드럽게 음낭 밑을 주물렀다.

흉악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커다랗고 단단한 성기가 배 속 깊은 곳까지 찔러 들어왔다가 훅 하고 빠졌다가 다시 밀어붙였다. 숨 쉴 틈 하나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성기에 쪼그라들었던 조슈아의 성기가 다시 단단하게 부풀었다.

조슈아는 어린 강아지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분명 색기 없는 신음 같았는데, 조슈아의 목소리는 귀에 찰싹 달라붙어 묘하게 사람 배 속을 꼴리게 만들었다. 음심을 동하게 만드는 울음에 에이드리언이 거세게 허릿짓을 했다. 부딪히는 대로 놔주지 않고 오히려 틈을 좁히며 성기를 물어 대던 구멍이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그리고 머릿속을 펑펑 터트리던 감각이 최고조로 몰아붙여졌을 때, 조슈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손바닥 안에서 주물러지던 성기가 정액을 토해 냈다. 동시에 귓가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안으로 뜨뜻한 것이 느껴졌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에이드리언 역시 사정했다.

조슈아가 헥헥거렸다. 다정한 손길이 진득하게 조슈아의 허리를 훑었다. 조슈아가 지친 얼굴로도 웃음을 터트리면서 에이드리언을 껴안으려 할 때였다.

“한 번 더 할까요?”

에이드리언이 수줍게 웃었다. 잔뜩 사정한 성기는 여전히 거대했고, 아주 조금 꺼덕였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어지는 섹스는 없었다. 샤워를 하기에는 몸이 너무 나른했다. 에이드리언이 눈을 빛내며 씻겨 주겠다고 했지만 조슈아는 거절했다. 웅얼거리며 ‘서 있기 힘드니까’라고 하는 말에 에이드리언은 욕조가 있는 집에 살아야 했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에이드리언이 가져온 뜨거운 물과 수건으로 조슈아의 몸이 뽀송해졌다. 크리스마스 날, 에이드리언이 몸을 닦아 줄 때만 해도 부끄러워서 차라리 제가 씻고 싶었는데, 두 번째라서 그런지 조금 익숙해졌다. 의기양양하게 팔을 맡기던 조슈아의 얼굴이 가벼운 터치에도 달아오른 건 안 비밀이었지만 말이다.

녹아내릴 듯 노곤했던 몸에, 조슈아는 속옷도 입지 않고 가벼운 이불 하나만 두른 채 에이드리언의 품에 기대었다. 눈앞이 가물가물한 것 같은데 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조슈아를 보며 에이드리언이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올려다보았다.

황금을 녹인 듯 빛나는 금발과 새하얀 피부, 그림 속 요정 같은 녹갈색 눈동자가 사르르 휘어지면서 웃는 미소는 사람 기분을 달큰하게 만들었다. 스크린에서조차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 제 옆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웃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조슈아가 손가락으로 에이드리언의 뺨을 콕 찔렀다. 손가락 끝에 닿는 피부가 따뜻했다. 에이드리언이 살짝 고개를 뒤로 뺀 뒤 애교를 부리듯 조슈아의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조슈아가 푸스스 웃으며 손가락을 뺐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당신을 이제야 만났을까?”

“그거 칭찬인 거죠?”

에이드리언의 되물음에 조슈아가 아차 했다. 아무래도 졸린 게 분명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 속내를 털어놓은 거 같아서 조슈아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웃었다. 조슈아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다가 에이드리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제 눈높이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에이드리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옷 위로 볼 때도 참 단단하게 잘 관리된 몸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더 대단했다. 빈틈없이 짜인 근육은 철저한 식단 관리와 운동만으로는 생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끔 패션팀에 룩북이나 에이미의 전달 사항을 전달하러 갈 때마다 봤던 톱 모델들의 상반신 누드들보다 훨씬 훌륭한 몸이었다. 차마 에이드리언의 유두를 건드리는 게 부끄러워서, 조슈아가 머뭇거리다가 가슴 근육 아래로 내려갔다. 에이드리언이 웃자 피부로 진동이 느껴졌다.

“선물이에요?”

“시끄러워요.”

성적인 지분거림 대신 애정이 가득한 손길에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풀어졌다. 그리고 조슈아가 더 만지기 쉽게 제 몸을 조슈아 쪽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기분 좋다는 듯 눈을 감았다.

천천히 다정하게 에이드리언의 단단한 몸을 만지던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왼쪽 골반 아래에 난 깊은 상처 자국을 발견했다. 길이로 따지면 한 뼘 정도 되어 보이는 상처는 딱 보기에도 다쳤을 때 얼마나 아팠을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조슈아가 무의식적으로 걱정을 담아 자국 위로 손을 대던 순간이었다.

“에이드리언, 이거….”

팍!

순식간에 밀려났다. 눈 깜짝할 새 침대 밖으로 떨어진 조슈아가 멍하니 침대만 바라보았다. 떨어진 것보다 놀라서 아무 생각 안 나는 게 더 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는데 순간 번뜩이며 조슈아를 내려다보던 에이드리언의 눈이 돌변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해요. 너무 놀라서.”

아팠죠? 침대에서 내려와 조슈아를 공주님처럼 안아 든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엉덩이와 손목을 쓰다듬으며 아픈 목소리를 했다. 놀란 게 더 컸던 터라 이제야 엉덩이가 조금 아팠다. 하지만 별건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축축하게 배어나올 것같이 사람 심장 저리는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아니에요. 나야말로 미안해요.”

어쩌면 에이드리언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상처인데, 아무 생각 없이 만졌다. 상처에 놀란 사람이 밀치는 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이 미간을 찡그리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 참 착해서 괜히 더 미안해하는구나. 조슈아가 다정하게 에이드리언의 뺨을 두드렸다. 그리고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제 손목을 만져 주는 에이드리언의 손을 잡아다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담백하게 떨어지는 뽀뽀에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쓰게 웃었다.

“예전에 사고로 다쳤는데, 그때 조금 놀랐나 봐요. 아직도 이러네요.”

정말 미안해요. 사과를 들으면서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귀에 쏙 들어갈 수 있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정말 괜찮아요. 미안하면 나 계속 만져 주고. 딱 좋은데, 지금.”

에이드리언이 포슬포슬하게 웃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조슈아의 엉덩이를 문질렀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에 조슈아의 입가에 웃음이 고였다.

* * *

곤한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십 년 전, 교통사고 때 깨진 유리창이 왼쪽 골반에 박혔다. 15cm도 넘는 이 상처를 볼 때마다 부모님은 마음이 아프다며 수술을 권유했지만, 정작 수술을 받지 않은 것은 에이드리언의 결정이었다. 이건 특별한 공유였다.

편안하게 오르락내리락거리는 하얀 가슴팍 위에는 제가 만든 자국들이 붉게 번져 있었다. 적당한 근육이 붙어 있었지만 저 몸의 곳곳이 얼마나 말랑거리는지는 에이드리언밖에 모를 것이었다.

불이 꺼진 채, 에이드리언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며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스물여덟, 이제 며칠만 있으면 스물아홉으로 넘어갈 남자라기에는 소년같이 예쁜 얼굴이었다. 이 앳되고 예쁘장한 얼굴이 일을 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좋아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는 눈썹을 어떻게 찡그리는지, 그리고 제 앞에서는 눈이 어떻게 휘어지는지. 이제 에이드리언은 다 알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검지로 조슈아의 얼굴 윤곽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은 윤곽을 타고 내려다가 입술에 안착했다. 하루 종일 깨물고 입 맞추느라 부푼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그래. 조슈아 베넷은 잘 때 이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붉은색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기도 하고, 말랑거리는 코를 찡긋거리기도 하다가 아기처럼 입술 끝을 말아 올려 배시시 웃었다. 예쁘고, 연약하고, 무방비하게. 그리고 로건 헤네스와 다르게.

열아홉 살 때, 에이드리언은 로건 헤네스보다 단 하루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 의료진들이 가득한 그곳에서 에이드리언은 스쳐 가듯 봤다. 로건 헤네스는 악몽을 꾸었다. 붉은 앞머리가 땀에 젖을 만큼, 몸을 뒤척이다가 흐으, 아픈 한숨을 내쉴 만큼.

제가 안일했다. 조슈아 베넷은 로건 헤네스가 아니다. 직접적인 깨달음에 에이드리언이 무감각한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비슷한 외모, 비슷한 키, 비슷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하나 비교하면 다 달랐다.

로건 헤네스에 비해 조슈아 베넷의 머리카락이 조금 더 쨍하게 붉었고, 햇빛 아래에서 바라보는 눈은 투명한 분홍색이 돌았고 입을 맞출 정도로 가까이에서 보면 콧잔등에 희미하게 주근깨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깜찍했다. ‘이렇게 하겠지’라는 보편적인 생각에서 조슈아는 언제나 엇나갔다. 부끄러워하면서도 강했고, 또.

에이드리언이 화들짝 놀라 조슈아에게서 손을 떼었다. 온기 탓인지 제 손가락 쪽으로 뺨을 붙이던 조슈아가 으응, 잠투정을 했다.

로건 헤네스는 앞으로도 친구일 것이고 친구여야 했다. 십 년의 마음은 앞으로도 한 점 내비칠 계획이 없었다. 로건 헤네스한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친한 친구, 그 이상을 차지하지 않았고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인생에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은 딱 거기까지면 족했다. 어쭙잖게 접근하다가 친구의 자리까지 잃는 것은 싫었다.

그 대신, 에이드리언에게는 조슈아 베넷이 있었다. 순진하고, 다정하고, 그리고 빨간 머리인 조슈아 베넷.

그리고 그 순간 조슈아 베넷이 에이드리언 쪽으로 뒤척였다. 무언가가 허전했는지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다리 쪽으로 꾸물꾸물 손을 뻗더니 꼭 껴안았다.

“…정말 어쩔 수 없네.”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슈아의 손을 살짝 떼어 그 틈으로 제가 누웠다. 꼭 맞게 벌어진 틈에 에이드리언이 눕자 그제야 조슈아가 말갛게 웃었다. 제가 찾던 온기가 이런 것이기라도 했다는 듯이.

무해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에이드리언이 손가락으로 조슈아의 코를 살짝 눌렀다. 이잉, 투정을 바라보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얼마나 풀어져 있었는지, 토닥이는 손이 어찌나 조심스러웠는지, 맞닿은 체온 너머로 튀어나갈 듯 뛰는 심장 박동이 어땠는지. 그 수많은 감각들을 하나도 눈치채지 못한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당연하게도 지금 제 시선이 어떤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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