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당신의 다정 속 별거 아닌, (7/22)

#6. 당신의 다정 속 별거 아닌,

“좋은 아, 오늘은 또 뭐야?”

에투왈의 아침, 가벼운 인사를 건네던 지미가 짓궂게 웃으며 조슈아의 품에 안긴 것을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멋쩍게 웃으면서 제 품에 있는 갈색 종이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봉투 안에서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훅 풍겼다. 빵이었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회의용으로 쓰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을 찢었다. 여섯 개가 넘는 빵들이 하나하나 유산지에 포장되어 있었다. 조슈아가 먼저 빵 하나를 드는 동시에 권하듯 빵을 가리켰다.

지미가 피식 웃으면서 빵 하나를 집어 드는 것을 보고서야 조슈아가 유선지를 벗겼다. 겹겹이 초콜릿을 발라 구운 뺑 오 쇼콜라였다. 바삭한 패스트리 위까지 초콜릿으로 코팅한 뒤 카카오 파우더를 뿌린 듯했지만, 어떻게 코팅을 했는지 파우더가 묻어나지 않았다.

한 입 베어 물자 버터의 고소함과 초콜릿의 그윽한 단맛, 그리고 바삭함이 입에서 녹아내렸다. 지미도 깜짝 놀란 듯 크게 한 입 더 먹으며 어디에서 샀냐고 물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미가 알겠다는 듯 능글맞게 웃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펴듯 빵을 들지 않은 손을 쭉 폈다.

“이거 원, 애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조슈아의 눈매가 사르르 풀어졌다. 그리고 입매를 올려 웃었다. 어라, 지미가 빵을 먹다가 눈을 조금 커다랗게 떴다. 에밀리를 똑 닮아 가는 조슈아 베넷이 저렇게 헤실헤실 웃는 걸 다 보다니. 세상 별일이었다. 지미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다시 빵을 먹으려는 사이 자동문이 열리고 엘라가 들어왔다. 화려하게 트위드 재킷을 입은 엘라가 코를 킁킁대며 활기차게 말했다.

“오, 맛있겠다. 좋은 아침!”

“빨리 와서 먹어. 이게 되게 맛있어.”

지미의 말에 테이블로 온 엘라가 깜짝 놀란 듯 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와! 이거 ‘무슈 블랑’ 빵 아니에요?”

“‘무슈 블랑’?”

“왜 있잖아요. 요즘 이스트어퍼스트릿에서 제일 유명한 빵집! 여기 아침 5시부터 빵 만들어서 6시 반이면 만든 200개만 팔고 딱 끝난다니까요. 그것도 줄 엄청 길어서 매번 못 사는 사람들로 태반이라는데!”

열변을 토해 내던 엘라가 핸드폰으로 SNS를 열었다. 그리고 ‘무슈 블랑’을 검색한 다음 조슈아와 지미에게 내밀었다. 핸드폰 속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긴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도 역시 못 먹음’, ‘이건 누가 사는 걸까?’라는 댓글들과 함께 산 사람들의 엄청나게 긴 빵 후기가 보였다.

조슈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에이드리언은 그냥 사 왔다고 했는데. 새벽에 온기가 없어진 것도 몰랐고. 지미가 슬그머니 먹던 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슈아의 눈치를 봤다.

“이거, 우리가 먹어도 되는 거야?”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거 조슈아가 사 온 거 아니에요? 그러면, 누가?”

빵을 집어 들던 엘라가 무심코 말하다 아, 했다. 그 틈을 타고 지미가 가볍게 야유하듯 눈짓을 했다.

“누구겠어할짝. 애인 없는 사람은 정말 서럽다니까.”

“세상에. 조슈아. 정말 최고의 애인 뒀네요. 어제는 호두 파이에 엊그제는 향 좋은 핸드크림에, 그 전에는 또 뭐였더라?”

“수제 과일 청이랑 영양제.”

조슈아는 책상에 파티션이 쳐져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러웠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반대편에 있는 제 책상 위, 과일청과 영양제가 고스란히 드러날 뻔했다. 엘라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분, 조슈아 되게 좋아하나 봐요.”

조슈아의 입매가 스스럼없이 올라갔다. 분홍빛 도는 갈색 눈이 세상 무엇보다도 반짝였다. 예쁜 얼굴이 살짝 부끄러워하면서도 확신에 찬 듯 웃었다.

“나도.”

나도, 되게 좋아해. 그 남자.

어휴, 정말. 커플은. 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지미도, 엘라도 그 행복에 전염된 듯 입꼬리가 빙싯 올라갔다. 어쨌든, 나름 에투왈의 인기인이던 조슈아 베넷을 활짝 웃게 만들 정도로 잘난 남자가 매일 빵이며 파이며 맛있는 것을 잔뜩 사 주는 건 보기 좋은 일이었다.

앞으로 예쁜 사랑 오래오래 하세요, 하며 응원이라도 한마디 하는 게 동료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설탕 가루처럼 저들에게도 떨어지는 맛난 간식들 때문에 그러는 것만은 절대 아니었다. 큼큼.

“그런데 조슈아. 먹을 건 먹을 거 대로 다 먹고 다이어트하는 거예요?”

푹, 아픈 곳이 찔렸다. 엘라의 티 없는 목소리에 조슈아는 하하, 영혼 없이 웃으며 제 점심을 내려다보았다. 살이 잘 찌지 않는 편이라 엘라가 질투할 만큼 잘 먹어도 체중이 그대로였는데. 요즘 에이드리언의 간식까지 이중으로 먹느라 넉넉하던 슬랙스들이 조금씩 딱 맞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오늘 점심은 신중하게 골랐다. 다이어트용 샌드위치로 유명하다던 크랜베리 닭가슴살 샌드위치. 물론 빵 속은 판 걸로.

“요즘 조금 찐 것 같아서.”

“조슈아. 그건 살이 찐 게 아니라 그냥 얼굴이 좋아진 거예요!”

엘라가 광분을 했다. 조슈아가 살이 쪘다고 이야기를 하자 제 앞에 있는 샐러드용 렌치 소스가 생명력을 얻어 조슈아를 비웃을 것 같았다. 샌드위치를 집어 드는 손목이 저렇게 말랐는데 누가 살이 쪘다고 말하는 걸까. 지미는 조금 현실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차라리 간식을 좀 줄이는 게 낫지 않아요? 애인분한테 말해서.”

“그게, 내가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해서.”

이상한 문장이었다. 조슈아도 말하면서 어색한지 머리를 긁었다.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해서라.

“조슈아가 먹고 싶다고 했다는 거예요? 아니면 그 애인분이.”

“그게, 내가 요즘 잠꼬대를 하나 봐요.”

조슈아가 털어놓듯 한마디 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모든 건 다 이 주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새해를 맞이하고 바쁜 에투왈에서 모처럼 정시 퇴근을 한 날이었다. 다정한 애인이 보낸, 빨리 오라는 메시지에 조슈아가 문을 열던 참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애인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조슈아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이게, 뭐예요?”

“사과 타르트요.”

설탕에 잔뜩 졸여진 달콤한 사과 향과 톡 쏘는 계피 향이 잘 어우러져 후각을 자극했다. 시럽을 발라 코팅한 듯 반짝거리는 타르트를 바라보던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에이드리언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웃었다.

“어때요? 맛있겠죠?”

“네. 되게 맛있어 보이는데. 웬 타르트예요?”

조슈아는 단것을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고, 사과 타르트도 가끔 먹었다. 하지만 혼자 살다 보니 이렇게 한 판을 혼자 사 본 적은 없었다. 에이드리언이 잠시 곤란한 얼굴을 하다가 조슈아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실, 조슈아가 잠꼬대하는 거 들었어요.”

“잠꼬대요?”

“조슈아 잠꼬대가 크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자다가 일어났는데 조슈아가 예뻐서 보다가.”

변명하듯 늘어놓는 말이 길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냥 제가 예뻐서 보다 들었다는 그 한마디 하는 게 왜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잠꼬대라. 예전에 보육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한참 어린 유아반 아이가 와서 제게 자동차 장난감을 주고 갔다. 재워 주다가 함께 잤는데, 그때 조슈아가 차, 차 하면서 잠꼬대를 했다는 거다. 흠뻑 땀에 젖은 채 무서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다며 차 줄 테니 앞으로는 무서운 꿈꾸지 말라고 단단히 저를 어르기까지 했었다. 정작 조슈아는 아침에는 어떤 꿈이었는지 기억도 제대로 못했지만.

비슷한 일인 것 같았다.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뺨을 쓸어 주며 가볍게 웃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꿈에서도 불러요. 나한테 직접 이야기하면 바로 사다 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몰랐는데.”

조슈아가 말을 받으며 날름 붉은 혀를 빼죽 내밀었다. 장난스러운 미소에 에이드리언이 짙게 웃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도 며칠에 한 번씩 잠꼬대를 한다더라고요.”

“조슈아 자기 전에 혹시 유튜브로 맛있는 영상 봐요?”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는 에이드리언 얼굴 보기에도 바쁜데 유튜브를 보는 데 할애할 시간은 없었다. 지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몸에 설탕이라도 필요한 건가? 요즘 삶이 설탕덩어리 아냐?”

덧붙인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세상이 참 달았다. 에이드리언의 눈웃음이 달큼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그와 함께한다는 자체가 사람 녹이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엘라는 지미의 앞말에 더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몸에 설탕이 부족한 거면 스트레스를 받는 거 아니에요?”

“스트레스? 요즘 조슈아가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어. 보스도 스웰딘 쪽 출장 가셔서 따로 일정 조정할 것도 없고, 애인이 맛있는 간식 많이 사다 주고.”

“그건! 그러네요.”

엘라가 빠르게 수긍했다. 그러다가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조슈아한테 말했다.

“아니면 수면 녹음 앱이라도 해 보는 게 어때요?”

“어떻게 하는 건데?”

“잠깐 핸드폰 좀 줄래요?”

조슈아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엘라에게 건넸다. 으스대는 얼굴로 조슈아의 핸드폰을 만지던 엘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 왜 다운이 안 되지?”

엘라가 의아하다는 듯 연거푸 액정을 눌렀다. 하지만 다운이 되는 화살표 모양은 뜨지 않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메시지가 떴다. 힐끗 엘라의 핸드폰을 들여다본 지미가 티슈를 뽑아 손에 묻은 버터기름을 닦으며 말했다.

“앱 수정 중이라는 거 아냐?”

“아! 그러네요.”

앱 다운 표시 옆에 뜬 ‘수정’ 표시에 엘라가 시무룩해졌다. 조슈아는 앱을 깔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엘라가 어쩜 저렇게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지가 더 신기했다. 조슈아의 놀랍다는 표정에 엘라가 으쓱하다는 듯 콧대를 세웠다.

“비서실 사람으로 당연한 거죠. 정보가 생명이니까. 비록 오늘 앱 수정 중이라는 정보는 몰랐지만.”

“그 정보까지 알았으면 앱 마켓 직원이지.”

지미가 추임새를 넣었다. 엘라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무튼, 그 앱 괜찮다고 들었어요. 제 친구도 잠꼬대 하면 얕은 잠 잔다고 들어가지고 이 앱 깔았었거든요.”

조슈아는 꼭 한번 깔아 봐야겠다며 앱 이름을 핸드폰에 기록했다. 그리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혼자 잔다고 하면 잠꼬대 정도야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이제 제 옆자리에는 에이드리언이 있었다. 안 그래도 서로 바빠 잠자는 시간도 늦추는 마당에 제 잠꼬대로 에이드리언의 수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슈아가 핸드폰을 터치했다. 이제 겨우 12시 40분. 퇴근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더 남아 있었다. 빨리 퇴근을 하고 집에 가고 싶은데. 조슈아의 입가에 달큼한 웃음이 걸렸다.

* * *

“세수 다 했어요?”

조슈아는 대답 대신 제 뺨을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눈을 감고 턱을 들었다. 언뜻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제 턱을 조심스레 받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적당한 온기와 함께 뺨에 닿는 차가운 크림의 느낌에 조슈아가 눈을 살짝 찡긋거렸다. 이윽고 나른한 웃음소리가 났다.

“차가웠어요?”

“별로요.”

조슈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새침하게 대답했다. 에이드리언은 놀리는 대신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눈을 감고 있으니 촉감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마와 뺨, 콧등, 입술 아래에 크림을 찍은 에이드리언이 손가락의 온기를 이용해서 크림을 발라 줬다. 손가락은 꼭 유리잔을 만지듯 조심스러웠고 부드러웠다. 매일 저녁, 세수를 하고 나면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얼굴에 크림을 발라 주었다. 그것도 3주가 넘게 말이다.

예전에 카페에서 에이드리언이 제 뺨이 텄다며, 크림이라도 발라 줘야겠다고 한 말을 농담처럼 흘려들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3주 전 어느 날, 에이드리언은 세수를 마친 조슈아를 앉히더니 눈을 감으라고 했다. 선물이라도 있나, 문득 달콤해지는 기분에 눈을 감았던 조슈아는 차갑게 뺨에 닿는 가벼운 질감에 질겁하며 눈을 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서투르던 에이드리언의 손길도 나날이 발전했다. 뭐든 빨리 배운다는 말은 크림을 바르는 것에도 통용되는 모양이었다.

처음 크림을 바를 때 저는 어땠더라. 어색하게 눈만 꼭 감았다. 누군가의 앞에서 긴장을 풀고 눈을 감아 본 적이 없어서, 경계를 풀고 맨얼굴을 맡기는 게 낯설었다. 에이드리언은 잔뜩 굳은 제 얼굴을 슬슬 쓸며 크림을 발라 주었다. 그리고 그게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조슈아는 조금 여유롭게 눈을 감았고, 3주인 지금은 가만히 눈만 감았다. 꼭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하게 눈을 감고 말이다.

누군가가 제 얼굴을 만져 준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 줄 몰랐다. 얼굴 솜털에 닿는 에이드리언의 손은 따뜻했고 다정했다. 가끔 제가 코끝을 찡긋거릴 때마다 낮게 웃는 목소리가 근사했고 마지막에 다 되었다며 품에 안고 도닥이는 게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크림을 다 바른 에이드리언은 언제나 제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얼굴에서 에이드리언의 손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온기가 닿지 않았다.

“끝났어요?”

분명 들었을 텐데 에이드리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갑갑함에 조슈아가 눈을 번쩍 뜬 순간이었다.

헉,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녹갈색 눈동자였다. 자기주장 강한 콧대가 제 코와 맞닿을 듯 가까웠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에이드리언은 물러나지도, 더 가까이 다가와 콧잔등에 뽀뽀를 해 주지도 않았다. 보석처럼 반짝이던 녹갈색 눈동자는 그저 조슈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더럭 이상한 기분이 조슈아의 등 뒤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무것도 조슈아를 결박하고 있는 것은 없었지만, 조슈아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어릴 적 동물원에서 커다란 사자를 봤던 때처럼. 사자가 있던 야외 관람장과 조슈아가 서 있던 곳 사이에는 30m 폭, 50m 깊이의 낭떠러지가 있었지만, 탐색하는 듯 그 샛노란 눈이 마주쳤을 때 아무 것도 못하고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이곳은 제 집이었고, 제 앞에서 저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에이드리언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사자의 눈을 지우고, 조슈아는 엉거주춤하게 고개만 내민 상태에서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깊고 우아한 눈매가 가늘게 접히며 장난기 가득 배인 녹갈색 눈동자가 달큼하게 웃었다.

그제야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평소처럼 앞으로 몸을 기대는 대신 뒤로 상체를 젖혔다. 당연히 받아 주려는 듯 팔을 벌리던 에이드리언이 의아한 듯 화사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조슈아가 입꼬리 한쪽만 올렸다. 그리고 장난치듯 말했다.

“왜 대답도 없이 계속 그렇게 봐요.”

“내가 어떻게 봤는데요?”

“어….”

조슈아는 말문이 막혔다. 나른한 에이드리언의 대답은 보편적이었으나 그 말에 난감해진 건 정작 처음 질문을 한 조슈아였다. 어떻게 봤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사자처럼?”

“진짜 먹어 버릴까요?”

에이드리언이 한 팔로 조슈아를 품에 안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조슈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머릿속을 헤집듯 단숨에 달려드는 온기에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에이드리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옷 너머로 닿는 허리는 탄탄했다. 입술을 지나 왼쪽 뺨과 눈가, 이마, 오른쪽 눈가와 오른쪽 뺨, 콧잔등을 거쳐 다시 입술에 입을 맞춘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노크를 하듯 꽉 막힌 치열을 두드린 뒤 틈을 비집고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혀가 얽히면서 끈적한 소리가 났다. 이제는 곧잘 호응하는 조슈아를 보고 에이드리언의 혀가 입 안 이곳저곳을 찔렀다. 점막에 닿는 혀는 평소와 달리 거칠어서 조슈아는 헉헉거리며 에이드리언의 호흡을 따라갔다. 숨을 불어넣듯 호흡을 건네는 키스의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조슈아의 입술을 살짝 깨물어 당기는 것이었다. 타액에 젖어서 번들거리는 붉은 입술을 보며 에이드리언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출장 가면, 조슈아가 잔뜩 고파질 텐데 말이죠.”

“출…장 가요?”

뜻밖의 말에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직장인이라면 무릇 회사의 이해관계에 따라야 하고, 출장이야 직장인에게는 빈번한 일이었지만 꿀을 바른 듯 달달한 연애관계에서는 아주 고약한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다. 에이드리언도 비슷한 마음인 듯 예쁜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조슈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는 이야기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결정된 출장이라 미리 이야기도 못했네요.”

에이드리언이 말할 때마다 목덜미에 더운 숨이 닿았다. 괜히 사람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에 조슈아가 번들거리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어쩐지 오늘따라 제 안쪽 팔에 닿는 에이드리언의 허리가 더 단단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언제부터…인데요?”

“내일부터 일주일이요.”

“내일부터 일주일이나요?”

조슈아는 앵무새처럼 에이드리언의 말을 따라했다. 그게 웃겼는지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가 당황한 얼굴로 조슈아를 불렀다. 아까웠다. 조금 더 에이드리언이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더라면 이런 표정 따위는 안 들킬 수 있었는데. 애써 입꼬리를 올리려고 해도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되게 웃긴 표정일 것 같은데.

“조슈아?”

“당황해서 그래요. 내일부터 일주일 못 보니까. 지금 내 표정 되게 웃기죠?”

겨우 일주일인데. 일주일 후면 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처졌다. 고작 몇 개월 전에는 알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일주일 못 본다고 이렇게 우울해지다니. 예전에 엘라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 어린아이가 된다고 했는데 정말인가 보다.

그때 콩, 하고 에이드리언이 이마를 부딪쳐 왔다. 조슈아가 눈을 올려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으며 조슈아의 뺨을 꼬집었다.

“하나도 안 웃겨요. 예쁘기만 하지.”

“…치.”

“딱 일주일이에요. 빨리 끝내면 더 빨리 올 테고. 그러니까 조슈아, 이렇게 갑작스러운 출장은 이번 한 번만 봐줘요. 응?”

예쁜 짓을 하듯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웃음을 그렸다. 다 아는데. 회사에서 가라고 하니 가는 거고 갑자기 정해진 거야 어쩔 수 없는 거 조슈아도 아는데, 꼭 아이 달래듯 하는 말에 마음이 풀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몽글몽글한 감정이 차올랐다. 일주일 후면 본다는 기대감이.

웃기는 일이었다. 조슈아 베넷은 아주 어렸을 때 기대하는 법을 버렸는데. 여섯 살 때 수녀님들 몰래 엄마라고 불러도 된다고 허락해 줬던 봉사자 아주머니가 열 밤 자고 또 온다고 하고서 안 왔을 때, 열 살 때 저와 가족이 되고 싶다던 한 부부가 조슈아보다 어리고 예쁜 아이를 데려갔을 때, 열두 살 때 누군가 제 노트를 가져가고 돌려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수많은 날들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발끝이 저절로 오므려지는 이 달큼한 기대를 믿기로 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에이드리언 보스 정말 나쁘네요. 일주일 출장을 전날에서야 알려 주고.”

에이드리언이 애매하게 웃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렇죠, 뭐. 일주일 출장이니까.”

조슈아는 잠시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일주일 출장이면 참 길다. 밤으로 따지면 무려 일곱 번의 밤이었다. 아까 제 팔 안쪽에 닿았던 감촉이, 목덜미에 닿았던 숨결이 뒤늦게 파도처럼 한번에 몰아닥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아랫배가 당기고 홧홧해지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으며 조슈아의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늘….”

조슈아는 조금 부끄러워하듯 시선을 내리면서도 제 아랫입술을 슬쩍 깨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간지러운 듯 묘한 기운이 아랫도리에서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일찍 잘까요?”

“네, 네?”

당연히 나올 말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래서 대답했는데. 에이드리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슈아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조슈아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사처럼 예쁜 얼굴이 조슈아를 향해 웃었다. 천년의 욕정을 샘솟게 만드는 눈웃음에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팔을 잡았다.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일주일이니까, 오늘 밤은,

“일….”

“내일 아마 조슈아 자고 있을 때 먼저 출발할 거예요. 못 보는 건 아쉽지만, 빨리 일해야 빨리 오죠.”

에이드리언이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 조슈아는 이마에 닿은 온기를 문지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내일 일찍 출발하려면 피곤할 테니 빨리 자야지. 무엇보다 합리적인 선택인데도 불구하고 조슈아는 제가 했던 생각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순진한 에이드리언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설레발만 친 기분이었다. 귓가와 뺨이 뜨끈해지는 것 같아서 조슈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이 마르다며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귀엽기는. 에이드리언은 붉게 달아오른 조슈아의 귓가를 바라보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참 마른 뒷모습을 눈에 담다가 쯔, 혀를 찼다. 먹인다고 먹였는데 여전히 참 말랐다. 참 마르고, 가냘프고, 연약하고, 무방비해서. 그러면서도 눈치가 빨랐다. 제가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어리숙한 얼굴로 놀랄 만큼 노련하게 잡아냈다. 참 묘하게도 말이다.

일주일간 못 본다면 참 아쉬울 텐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음심에 녹갈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저 해사한 얼굴이 얼마나 예쁘게 우는지, 가냘픈 몸이 얼마나 뜨거울 수 있는지, 얼마나 솔직할지를 알아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잡힌 출장은 제게 제법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에이드리언은 엉거주춤하게 걸어가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보며 제 입술을 핥았다. 마치 갓 태어난 사슴처럼 어설프게 걷는 게 한 입에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깜찍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아주 참을성이 강한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저 발그레한 얼굴이 말하고자 했던 바도 막을 수 있었던 거고.

이제 막 쾌락에 눈을 뜬 조슈아가 일주일 뒤, 어떤 얼굴로 저를 기다릴지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잔뜩 반가운 얼굴일지, 아니면 제 손으로 이미 한 번 수음한 뒤 식은 얼굴일지. 그도 아니라면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조슈아 베넷은 언제나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예상을 비껴가니까.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목이 마르다고 하면서 화장실로 향하는 조슈아. 속이 빤히 보이는 조슈아. 갑자기 목이 타는 기분에 에이드리언이 제 뒷목을 매만졌다. 예정된 출장은 일주일. 하지만 이번 출장은 무조건 5일 안에 끝나야 한다.

마크와 비서실 직원들이 안다면 “보스!! 원래는 삼 주 일정이지 않았습니까?!” 하고 바닥을 칠 법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에이드리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사자처럼.

* * *

5일이 지났다. 벌써 5일이 지난 것인지, 아직 5일밖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는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이제 막 퇴근을 한 조슈아가 번호 키를 눌렀다. 매번 띠띠띠띠띠띠- 일정한 전자음 여섯 번이 울리던 번호 키는 짧은 진동만 할 뿐이었다. 스르륵- 걸쇠가 돌아가는 소리에 조슈아가 문을 열었다. 5일 전부터였다. 그러니까 에이드리언이 출장을 가는 날부터 이 번호 키는 무음이었다. 지금이라도 고칠까? 하다가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무음으로 바꿔 둔 사람이 다시 되돌려야지.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온기 없는 제 스튜디오는 이상했다. 늘 밝고 따뜻한 느낌이었는데. 조슈아가 가벽 안쪽으로 들어가 매트리스 앞에 앉았다. 매트리스 위 새로 산 작은 테이블 위에는 에이드리언이 출장 가는 날 아침에 깜짝 선물로 놓고 간 초콜릿 쿠키 틴 케이스가 텅 빈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출장 간 날, 조슈아는 평소와 달리 핸드폰 알람을 듣고 일어났다. 으응, 잔뜩 잠이 묻은 얼굴을 부비적거리면서 몸을 일으켰을 때 조슈아의 몸 곳곳을 훑는 것은 평소처럼 다정한 온기가 아닌, 훈훈하게 달궈진 스튜디오 온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보인 것은 협탁 위 초콜릿 쿠키였고 말이다.

우습게도 협탁 위에 놓인 초콜릿 쿠키는 조슈아가 며칠 전 SNS에서 보고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브랜드의 쿠키였다. 쿠키 틴케이스 위에는 분홍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잘 다녀올게요:)

주인을 닮아 단정한 필체로 쓰인 글씨와 귀여운 이모티콘에 조슈아의 마음 한편이 간질거렸다.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제가 에이드리언과 함께 있을 때 무심코 말을 했는지, 아니면 또 잠꼬대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 잠꼬대였다면 이건 제법 심각한 일이었다.

“출장 가는 사람 잠도 못 자게 말이지.”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콩닥거릴 만큼 달콤한 기분 위로 파도가 치듯 감동이 밀려왔고, 그다음에는 혹시나 하는 미안함이 깔렸다. 생각의 결론은 하나였다. 잠꼬대라면, 정말 어떻게든 해야 할 텐데.

에이드리언의 출장 선물은 초콜릿 쿠키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퇴근을 하고 집에 왔을 때였다. 번호 키를 누르자 평소와 달리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침 전화를 해온 에이드리언이 아니었더라면 조슈아는 번호 키가 망가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갈 했을 것이다.

- 하하하. 아침에 조슈아 곤히 자는 거 같아서 내가 무음으로 바꾸고 온 건데.

시원한 웃음과 함께 나온 에이드리언의 대답은 제 상상보다 훨씬 시시하고 다정한 이유였다. 고작 문 한 번 더 열었다 닫는 게 미안해서, 그래서 무음으로 바꿨다는 귀여운 이유에 조슈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루에 딱 한 번, 퇴근하고 나서 10분 이내. 에이드리언은 제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걸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했다. 혹시 핸드폰이 고장 난 게 아닐까? 조슈아가 유심히 핸드폰을 들여다보았지만 핸드폰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먼저 전화를 해 볼까 하다가 출장 중 중요한 회의 때 핸드폰이 울리면 어쩌나 해서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눈매가 순하게 처진 게 꼭 시무룩한 어린아이 같았지만 조슈아에게 그 말을 해 줄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었다.

20분, 그리고 30분이 넘었을 때에서야 조슈아는 오늘의 전화는 포기하기로 했다. 바쁜 모양이었다. 제 경험을 떠올려도 출장은 늘 분주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단계가 사라지자 공연히 마음이 헛헛해서, 조슈아는 따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티셔츠를 입었다. 에이드리언이 지난번 놓고 간 셔츠였다. 속옷은 편안한 사각 팬티였다. 면 100%의 특가 할인으로 팔던, 흰색 사각 팬티.

더운 물에 샤워를 한 덕분인지 몸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슈아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긴 트레이닝 바지는 다시 캐비닛 안으로 집어넣었다. 티셔츠 아래 짧은 반바지를 입은 모양새였지만 아무도 없으니 상관없었다. 조슈아는 마시멜로를 띄운 진한 코코아 한 잔을 든 채 TV 앞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혼자 TV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뜨거운 코코아를 홀짝이면서 채널을 돌리던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이 정도 하면 당연히 등 뒤로 다정한 온기가 느껴질 법한데 아직도 없는 게 이상했다. 도리도리, 고개를 한 번 저으며 에이드리언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앞으로도 2일이나 더 남았는데 계속 에이드리언을 생각하는 건 생산성이 없었다. 마침 영화 전문 채널에서는 이제 막 영화 한 편이 시작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본 적 없는 영화였다. 볼까, 말까. 아주 잠시 고민하던 찰나였다. 영화 로고가 프레임 아웃되고 웅장한 시작을 알리는 음악이 끝나면서 화면이 전환되자 왼쪽 상단에 노란색 동그라미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 흰색으로 ‘19’가 그려졌을 때, 조슈아는 고민을 말끔히 지우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오늘의 영화는 딱 정해졌다.

영화는 킬링 타임용 로맨틱 코미디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로틱한 로맨틱 코미디. 이전의 조슈아라면 아주 조금 웃고 말 법한 B급 영화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조슈아는 제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부풀어 오른 제 앞섶을 바라보다 조슈아가 이마를 짚었다. 사춘기 때도 영화를 보고 자극 받은 적은 별로 없었는데, 정작 어른이 되고 애인도 생기니 이랬다.

영화의 야한 부분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분위기만 야릇한 장면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일을 하는 여자 주인공의 뒤로 몰래 다가가 깜짝 놀라게 하며 귓가를 잘근 깨물었을 때, 문득 에이드리언이 떠오르며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우습게도 한 번 의식하고 나니 장면마다 에이드리언이 떠올랐다. 그리고 키스를 하던 중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다리에 자신의 왼다리를 집어넣었을 때, 섰다. 오 마이….

그러니까, 이건 다 에이드리언 탓이었다. 조슈아가 돌연 투정을 부리듯 에이드리언을 떠올렸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앞에 있기라도 하듯 원망을 가득 담아 눈을 흘겼다. 하지만 앞에도 없는 사람을 원망한다고 해서 제 아랫도리가 다시 원만하게 진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라앉힐까, 아니면.

조슈아가 분홍빛 도는 갈색 눈을 반짝였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으니, 선택은 하나였다.

「대디 좆이 그렇게, 흐, 마음에 들어? 응? 아주 네 구멍이 오물오물 잘도 씹어 먹는데?」

「흐응, 대디, 좋아요. 더 주세요. 더.」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으로 난잡하게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비명 같은 신음소리가 넘어왔다. 차마 소리가 새어 나갈까 이어폰을 낀 것이었는데 오히려 더 야한 더티 토크까지 들리는 터라 조슈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보려고 켜 둔 태블릿 PC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화질 속에는 두 남자가 후배위 자세로 섹스 중이었다.

체구가 작은 갈색 머리카락의 백인 남자는 침대에 엎드린 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절정에 다다른 듯 침대 커버는 외설스럽게 젖어 있었다. 남자의 뒤에서 제 열심히 추삽질을 하는 남자는 히스패닉으로 보였는데, 숨도 차지 않는지 끊임없이 야한 말을 늘어놓았다. 갈색 머리 남자가 힘든 듯 흐으, 숨을 내쉬며 침대 커버에 뺨을 파묻고 움직임을 멈췄다.

짝, 히스패닉 남자가 갈색 머리 남자의 엉덩이를 거칠게 때렸다. 이미 여러 대 맞았는지 빨갛게 부은 엉덩이 위로 손자국이 하나 더 생겼다. 흐읏, 잔뜩 울어서 붉어진 갈색 머리 남자의 얼굴이 순간 찡긋했다.

「누가 마음대로 멈추라고 했지?」

더 이상은 못 보겠다. 야한 것을 떠나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콘셉트에 조슈아가 진저리를 치며 잠시 영상을 중단시켰다. 동영상 사이트 중 가장 상위권에 오른 영상이라 믿고 보는 영상인 줄 알았던 게 화근이었다. 조슈아의 타입은 롤 플레이가 아니었다. 조금 더 다정하게 몰아붙이면서, 예쁘게 웃는.

“으….”

확, 하고 아랫배가 당겼다.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의 느낌에 조슈아가 토마토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꾸물꾸물 손을 움직였다. 땅땅한 고무줄 사이에 손을 넣고도 차마 제 성기를 만지지 못했던 조슈아가 굳은 결심이라도 하듯 짧게 심호흡을 하고 제 성기를 쥐었다.

제법 단단하게 부푼 성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이상했다. 제 몸에 달린, 제 일부인데 꼭 타인의 살처럼 느껴졌다. 조슈아는 지난 번 에이드리언과 했을 때를 떠올렸다. 성기 표면으로 피가 몰리고 발가락이 경직되는 기분에 어떻게든 빨리 해소하고 싶었지만, 요령 없는 손은 그저 성기를 위아래로만 훑을 뿐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안 이랬는데. 강렬하게 온몸을 만져 주던 뜨거운 손과 어지러울 정도로 몰아붙였던 감각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겹치듯 잡았던 에이드리언의 커다랗고 잘생긴 성기와 제 안쪽을 헤집고 쉴 새 없이 밀려오던 성기의 느낌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조슈아는 눈을 꼭 감고 무작정 손으로 성기를 주물렀다. 발가락이 곱아들었고, 유두가 꼿꼿하게 서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야하게 웃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탄탄하게 잘 빠진 몸이, 다정한 목소리와 그렇지 못했던 흉포한 성기로 가득 찼다.

“에이, 에이, 흐.”

조슈아가 파드득 떨었다. 잔물결 같은 몸부림이 태블릿 PC를 잘못 건드렸는지 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문란하고 음탕한 영상 속 소리가 커다랗게 고막을 채웠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슈아는 혀를 빼어 물고 헐떡였다. 어느새 몸을 가리던 얇은 이불은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갔다. 아무런 정신이 없었다. 성기에 닿는 쾌락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 에이드리언이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덕분에 아주 작은 진동이 문 앞에서 울리는 것도 부드럽게 문이 열리는 것도,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제 앞까지 다가온 것도 조슈아는 몰랐다. 대신 눈을 반쯤 감고 에이드리언을 떠올리기에 바빴다.

“흐으, 에이, 에이.”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할 만큼 바쁜 숨소리였다. 손이 바쁘게 오가며 아랫배로 뜨거운 기운이 몰리던 찰나였다.

“취향이 이런 쪽이었어?”

음탕한 말들과 헉헉거림 사이로 나른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제 성기를 붙잡고 절정에 이르기 바로 전까지 다다랐던 조슈아가 순간적으로 숨을 멈출 만큼, 익숙한 목소리기도 했다.

설마, 아니겠지.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사람이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당혹감에 식어 버리는 성기는 두 번째 문제였다. 조슈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에이드리언이었다. 지금 당장 스크린 안으로 뛰어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제 연인.

그 연인이 짙어진 녹갈색 눈동자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굽혀 태블릿 PC를 터치했다. 문란한 영상이 일시정지되고, 이 공간에는 정적이 흘렀다.

에이드리언이 설탕을 뿌린 것처럼 달콤하게 웃었다. 그리고 미처 손도 빼지 못한 조슈아의 속옷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거리낌 없이 들어온 손에 조슈아가 화들짝 놀라기도 전에 에이드리언이 말랑한 성기를 가볍게 주무르며 말했다.

“다시 한번 세워 볼래요? 직접.”

부디 제가 잘못 들은 거라고 해 주세요. 조슈아는 눈을 깜빡이며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녹갈색 눈가가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 * *

마크는 힐끗 백미러를 통해 뒤를 바라보았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보스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파일 속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보스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세상 다시없을 화려한 얼굴에는 힘든 기색 한 점 없었다. 똑같은 일정을 수행한 비서실 직원들은 저를 비롯하여 모두 죽어났는데 말이다.

신의 사랑을 받는 남자. 보스가 다섯 살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그를 모셨던 전임자 체이스 랭튼은 은퇴하던 날 보스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카이로스라고 기회의 신이 나오거든? 앞쪽 머리카락이 길고 뒷머리가 없는 남성 신. 기회라는 게 그런 거잖아. 봤을 때 딱 캐치해야지, 지나가면 잡을 수 없는 거. 그런데 보스는 달라. 기회의 신이 오기도 전에 그걸 알고 있는 거야. 수백 명의 기회의 신이 지나간다고 해도 길목 막고 배수의 진까지 치고 와인 한 잔 하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분이라는 거지. 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럴 리가 없지. 오죽하면 넘어지는 것도 다 보스의 계획이라고 하겠어.”

실제로 보스는 그랬다. 보스는 단 한 번도 기회를 놓친 적이 없었다. 열여덟 살 실무에 뛰어들던 때부터 없는 기회까지도 만들어서 잡아채는 지금까지 말이다.

작년부터 아부다비에 육성급 그렌트 호텔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모두의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만들 극악의 프로젝트였다. 이미 아부다비에는 전통의 호텔들이 탄탄하게 자리잡은 채였고 저가 숙소들 역시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들을 끌어당겼다. 심지어 찌는 듯 덥고 건조한 기온에 호텔을 지을 작업자들을 부르는 것은 정말 부르는 게 돈일 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해냈다. 사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샌드듄을 앞에 두고 풀 빌라 서른 채와 50층짜리 초호화 호텔을 완공시켰다. 더운 날씨에 호텔 30층은 인공 눈이 내리는 ‘겨울의 방’으로 전체를 꾸미면서. 다른 호텔들은 아직 시도 중이었던 시원한 아웃도어 풀 역시 성공적이었다. 풀 벽면에 그렌트 특허 기술인 에어 선을 깔아 히팅과 서늘함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며 샌드듄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막의 성 같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더불어 바로 사막 투어를 즐길 수 있는 지리적 이점까지 누릴 수 있는 ‘그렌트 아부다비’는 커팅식을 하기도 전에 밀려드는 예약 문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런 ‘그렌트 아부다비’의 전면을 확인하기 위한 이번 출장에서 보스는 한 술 더 떠서 여러 명의 셀러브리티들을 ‘그렌트 아부다비’에 묵게 했다. 모두 두바이에 올 때마다 칠성급 호텔, 내지는 아부다비에서 제법 전통 있는 육성급 호텔에서만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금세 SNS에는 ‘그렌트 아부다비’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들이 폭발했다. 그렌트 건설과 철강에 대한 해외 유수의 호텔들의 문의가 빗발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주가를 치솟게 만든 주인공은 정작 덤덤한 얼굴이었다.

“마크.”

나른한 목소리에 마크가 흠칫 놀랐다. 보스, 에이드리언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였다. 마크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3주의 일정을 약 5일로 줄인 터라 잠 한숨 자지 못했다. 헛기침을 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그를 반증했다.

“예.”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죄송합니다.”

상냥한 목소리인데 사람 움찔하게 만드는 위압감이었다. 보스는 괜찮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검토하던 서류에 몇 가지를 적더니 파일을 접고 마크에게 건넸다.

“로컬 고객 유치가 약해요.”

현재 예약된 고객들의 비율로 따지자면, 타 외국 계열 호텔에 비해 전혀 낮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입소문 때문에 좋다면 좋은 편이지. 하지만 보스의 눈에는 한참 모자란 모양이었다. 보고 배운 게 보스의 시각인지라 마크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특성과 사유 파악 후 보완하기 위한 프로모션까지.

그러는 사이 차는 부드러운 운행으로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에이드리언이 잠시 어두운 사위를 바라보는 사이, 마크가 차 문을 열었다. 에이드리언이 잠시 5층을 올려다보았다. 가면같이 완벽한 표정에 아주 잠깐, 빈틈이 보였다 사라졌다.

5일 전, 조슈아의 은근한 유혹을 이겨 낼 때만 하더라도 에이드리언은 어느 정도 생각했다. 과연 성적으로 거의 무지하다시피 한 조슈아는 5일 뒤 어떤 모습일까? 순진한 얼굴 속 언뜻 눈을 내리깔고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짙어질까, 아니면 다시 맹한 눈으로 놀라서 뒤로 쏙 숨어 버릴까.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이야기했던 터라 5일 만에 온 저를 보고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뜰 것 같기는 했다. 에이드리언이 입꼬리를 올리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달콤한 바닐라 향과 더불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불은 켜져 있는데 조슈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뜻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문드문 끊기는 신음 속에는 제 이름이 섞여 있었다. 속옷 속 성기가 꺼덕였다. 귀에 착 감기는 야한 소리에 에이드리언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가벽 너머를 바라본 순간, 에이드리언의 눈이 짙어졌다. 커다란 셔츠와 흰색 사각 팬티를 입고 팬티 속에 손을 집어넣은 조슈아는 제 생각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도통 이 빨간 머리는 어디로 튀는지 모르겠다. 정말. 에이드리언이 달콤한 한숨을 쉬었다. 제 얼굴이 얼마나 풀려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 되는 것만 같았다. 5일 밤을 샌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꺼덕이던 성기가 툭 불거지기 시작했다.

조슈아의 앞에 있는 태블릿 PC에서는 싸구려 야동이 틀어지고 있었다. 영상 속 추삽질이 빨라지는데도 불구하고 조슈아는 눈을 감은 채 사각팬티 속 손을 꼼질거렸다. 길고 풍성한 빨간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반쯤 벌어진 붉은 입술은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도 못하고 헐떡였다.

사슴같이 날씬하고 탄탄한 허벅지가 배배 꼬였다. 그 새하얀 허벅지 사이로 불쑥 손을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에이드리언이 하나하나 꼼꼼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티셔츠가 배꼽 위까지 말려 올라가 살 한 점 없이 마른 배와 귀여운 배꼽이 드러났다. 얇은 이불 아래 자그마한 발이 경직된 것까지 세밀하게 관찰한 에이드리언이 몸을 낮게 숙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취향이 이런 쪽이었어?”

그리고 그 순간, 조슈아가 굳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벌어진 입과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미동조차 사라졌다. 아주 천천히 속눈썹이 팔랑이며 투명하게 분홍색 도는 갈색 눈이 저를 바라보았다.

아, 토끼 같다.

이 상황에서, 웃음 나올 정도로 순진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야한 모습에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었다. 끊어질락 말락, 제 인내심이 한계로 몰아붙여지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가볍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몸을 굽혀 태블릿 PC를 터치했다. 문란한 영상이 일시정지되고, 이 공간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지 조슈아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덫에 걸린 토끼처럼 눈만 댕그랗게 뜨고 있었다. 손을 꺼낼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에이드리언은 훌륭한 신사였지만 연인이 자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신사일 수는 없었다.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사각팬티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엾게도 식어 버린 말랑한 성기를 가볍게 주물렀다. 통통하고 자그마하고 사랑스러운, 꼭 제 주인을 닮아 보드랍고 연약한 성기. 더 커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래졌던 조슈아의 눈이 한 층 더 커졌다.

“다시 한번 세워 볼래요? 직접.”

“…농담이죠?”

흐으, 말끝에 달라붙은 야한 신음은 조슈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조슈아는 제 입에서 나간 단말마에 에이드리언을 노려보았다. 하필 딱 타이밍 맞춰서 귀두 끝을 문지르다니. 제가 제일 약한 부분을 만져 놓고 에이드리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근사하게 웃었다. 이미 제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은 저 멀리에 놓인 채였다.

남색의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 입은 에이드리언과 반쯤 올라간 티셔츠와 사각팬티 한 장만 입고 있는 조슈아. 조슈아는 달아오른 얼굴로 이불이라도 덮으려 애썼으나 제 속옷 속에 들어온 손은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힘을 주며 성기를 쓰다듬었다. 하응, 입에서 나오는 신음에 조슈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그럴 리가요. 정말 진심인데.”

“왜 그래요. 장난치지 말고.”

수치심에 눈앞이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조슈아가 몸을 일으키는 것까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위로 몸을 겹쳐 왔다. 순식간에 풍기는 에이드리언의 청량하고 시원한 향에 조슈아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음욕에 잔뜩 젖은 녹갈색 눈동자가 잡아먹을 듯 조슈아를 응시했다.

“보고 싶어서 머리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예쁘게 울고 있을 줄이야.”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목소리와 더불어 엇박으로 만지는 손길에 조슈아가 숨을 헐떡이며 이불자락을 그러쥐었다. 뜨거운 손에 쥐어진 성기가 빠듯하게 부풀었다. 아까 딱 조슈아가 상상하던 대로였다. 상황과 맞지 않게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절정에 다다를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하으, 흐… 에이…드리언?”

조슈아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에이드리언을 불렀다. 에이드리언은 천사처럼 달큼한 얼굴로 웃으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사정을 해도 안 빼 주던 손이 미련 없다는 듯 조슈아의 속옷에서 빠져나왔다. 조슈아는 눈만 깜빡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요….”

“직접 해 봐요. 이제.”

정말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평상시 다정하다 못해 꿀 떨어지던 제 연인은 어디 가고 이렇게 짓궂은 남자만 남았을까? 아까의 수치심이 한결 강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앞이 부옇게 번지고 생목이 올라왔다. 더 웃긴 건 이 상황에서도 제 성기가 식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슈아가 올라오는 말을 한 번씩 삼키면서 에이드리언을 노려보았다.

“에이…드리언. 이런 취…향이었…어요?”

“몰랐는데, 그러네요.”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양껏 노려보는 투명한 갈색 눈동자는 섹시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거리는 붉은 입술에 제 좆을 물려주고 싶고. 정말 몰랐는데 말이지. 에이드리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책망하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간신히 삼키고 있던 조슈아가 낯선 눈빛에 입술을 툭 내밀었다.

“…왜 그렇게 봐요.”

“나는 조슈아랑 전화하면서 자위했는데, 조슈아는 고작 이런 거나 보면서 하고. 정말 속상해서.”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정말 천하의 대배우였다. 한 떨기 백합이라 불리던 여배우들을 한 방에 쓸어버릴 정도로 청초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조슈아는 말문이 막혔다.

한껏 몰아닥치는 일에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였다. 욕정으로 짙어진 눈이라도 개미 오줌만큼의 투명한 막이 씌워지고 이윽고 한 방울 톡 흘러내리자 조슈아는 묘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심지어 제 성기는 지금 한창 땅땅하게 부풀었는데 말이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왜 제가 변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라진 듯 고개까지 팩 돌리는 모습을 보니 제가 잘못한 것 맞는 것 같았다. 에이드리언이 너른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나는 연인 사이에서는 그게 맞는 걸로만 알아서.”

순진한 연인의 충격 받은 목소리는 조슈아의 양심을 할퀴었다. 에이드리언은 저를 생각하며 자위했다는데. 그 한마디를 되새기다 조슈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 바쁜 출장 중에 저와 전화할 때 혼자서 했다니. 전화 속 에이드리언은 흔들림 하나 없는 목소리였는데.

“나랑, 전화할 때요?”

“당연하죠.”

부끄럼도 없는 남자가 긍정했다. 조슈아는 잠시 갈등했다. 사실 저도 영상을 보면서 한 건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을 떠올리면서 했지. 어차피 더한 모습도 보여 줬는데, 고작 이거 하나 가지고 제 애인을 속상하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 내적 고민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에이드리언은 은근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한마디 더 했다.

“정말, 오늘 속상해요.”

“알겠어요. 할게요!”

“영상도 틀어 줄게요. 마음에는 안 들지만.”

묘하게 신이 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필요 없다고 하고 싶은 말이 굴뚝같이 올라왔지만, 조슈아는 “당신 얼굴을 볼 거예요.” 라고 말할 철판은 없었다.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빠르게 이 일을 끝내자는 각오만 다졌다.

에이드리언이 영상을 다시 눌렀다. 그리고 짙은 녹갈색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입술을 깨물며 손을 팬티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무리 섹스 중 에이드리언의 손에 겹쳐 제 성기를 만져본 적은 있어도 이건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기는 아까 에이드리언이 만져 준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와중에 난잡한 신음 소리가 공간을 매웠다.

「오, 대디! 퍽 미, 퍽 미!」

영상은 한창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크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 남자가 사정없이 몰아붙여지고 있었다. 손에 잡은 성기는 저 소리에 부피를 키우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영상을 보는 대신 힐끔힐끔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에이드리언은 한 점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조슈아를 응시했다. 마치 정글의 포식자가 사냥감을 잡기 전 잔뜩 웅크린 채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듯한 모습에 조슈아는 긴장으로 굳은 제 입술에 침을 발랐다.

“…저런 말이 취향이었어요?”

잔뜩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조슈아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가 영상을 한 번 바라보았다. 커다란 비명과 함께 히스패닉 남자가 사정을 하고, 거의 동시에 갈색 머리 남자도 백탁액을 쏘고 몸을 떨었다. 금방이라도 실신할 듯 지친 얼굴과 달리 갈색 머리 남자는 바로 몸을 돌려 히스패닉 남자의 성기를 잡았다. 그리고 씩 웃더니 남자의 성기를 입 안에 가득 채웠다. 조슈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성적인 느낌과는 별개로 ‘저런 행위를 할 수 있구나’라는 원초적 놀라움이 컸다.

갈색 머리 남자는 커다란 아이스크림을 빨 듯 맛있다는 얼굴로 성기를 빨았다. 조슈아는 제 손이 멈춘 것도 모르고 영상을 응시했다. 만약 제가 저런 식으로 에이드리언의 성기를 빤다면 어떨까.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의 성기를 떠올렸다. 제 애널 안에 들어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고 흉포하고, 그리고 잘생긴 성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음란한 상상이었다. 저 천사 같은 얼굴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끼얹다니. 죄를 저지를 것처럼 창피해졌다.

갑자기 조슈아가 파득 몸을 떨었다. 예고도 없이 티셔츠 위로 다가온 손은 기가 막히게도 젖꼭지를 비틀었다. 바투 다가앉은 에이드리언이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잡고 비볐다. 그리고 한 손은 옷 안으로 집어넣어 오른쪽 어깨까지 셔츠를 젖혔다. 덕분에 왼쪽 젖꼭지는 옷 위로 만져졌고, 오른쪽 젖꼭지는 드러났다. 서늘한 공기가 젖꼭지 주변에 닿았다. 복숭앗빛 젖꼭지 위로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다가오더니 이내 뜨거운 혀가 젖꼭지를 깨물었다.

“아흣….”

“집중해.”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바퀴에 훅 올라왔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제 가슴을 에이드리언 쪽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에이드리언은 더 이상 만져 주지 않았다. 성기 끝부분으로 피가 쏠리는 기분에 조슈아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제 손으로는 충족되지 않았던 빈 공간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조슈아가 눈을 반쯤 감았다. 그리고 손으로 성기를 조물락거렸다. 기둥을 쓸어 주고 음낭 아래를 살짝 꼬집고, 귀두까지 만져졌지만 열기에 찬 숨소리가 쾌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조슈아가 잔뜩 울상인 채로 제 아랫도리를 바라보았다. 배가 당기는데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절정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나른한 표정과 달리 바지 앞섶은 이미 흉포하게 달궈진 채였다. 조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제 한 손으로 에이드리언의 손목을 잡았다.

“…더 해 줘요.”

잔뜩 기어 들어가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으면서도, 에이드리언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의 손을 제 속옷 안으로 끌었다. 에이드리언의 손이 순순히 속옷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성기를 만지지는 않았다. 달큰하게 달아오른 몸이 이리저리 꼬였다.

안 되겠다. 조슈아가 답싹 에이드리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드러나 있는 오른쪽 젖꼭지에 에이드리언의 재킷이 언뜻 닿았다. 발딱 선 젖꼭지에 가해진 강렬한 자극에 조슈아의 성기가 단단하게 섰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할딱거리는 숨소리를 억누르며 속삭였다.

“…사실 나도였어요.”

숨소리 반, 새어 나가는 목소리 반. 야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에이드리언이 아주 조금 팬티 속 손을 움직였다. 흐읏, 가느다란 신음이 귓가를 타고 오싹하게 등허리로 내달렸지만 에이드리언은 여전히 신사다운 표정을 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짙어진 눈빛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뭐가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얼굴을 보면서 조슈아는 입술을 질근 씹었다.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한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당신 생각하면서 갔….”

흐읏, 조슈아의 말은 끝까지 완결되지 못했다. 에이드리언이 손을 움직여 성기를 쥐었다. 이제 거의 절정에 다다른 성기는 타인의 온기에 깜짝 놀란 듯 주춤했지만 이내 익숙한 온기라는 것을 알아챈 듯 언제나처럼 자라났다. 귀두를 문지르고, 살덩이를 자극하고 회음부를 꾹 누르고.

이어지는 강한 자극에 조슈아가 뒤로 몸을 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옭아매듯 단단하게 조슈아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은 조슈아를 더 강하게 안았다. 어느새 티셔츠 왼쪽도 올라갔다. 두 개의 유두가 에이드리언의 셔츠와 재킷에 비벼졌다. 성기를 그러쥔 손에 에이드리언이 바짝 힘을 주며 기둥을 세게 훑던 순간이었다.

“아!”

높은 소리와 함께 조슈아가 뒤로 목을 젖혔다. 새하얀 목덜미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고, 음탕한 냄새가 순식간에 퍼졌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절정에 다다른 조슈아가 반쯤 벌어진 입을 다물고 정신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에이드리언은 모든 것을 눈에 담은 뒤였다. 에이드리언은 제 손을 조슈아의 속옷에서 꺼내며 달콤하게 웃었다. 손가락을 벌리자 묻어 있던 백탁액이 진득하게 늘어졌다.

“아, 어떻게 하죠? 나 진짜 오늘은 못 참을 것 같은데.”

진심이었다. 에이드리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번들거리는 제 눈 때문에 조슈아가 겁이라도 먹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할딱이며 숨을 가다듬던 조슈아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 입으로 해 줄까요?”

조슈아가 맹하게 말했다. 그것도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순간 에이드리언이 화사하게 웃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미친 사람처럼 번들거렸다. 야하게 입술을 핥는 순간, 조슈아는 제가 말을 잘못했다는 생각을 아주 언뜻 했다.

에이드리언이 우아한 손짓으로 성급하게 제 벨트를 풀었다. 금속성 소리의 끝에 벨트가 풀리고 바지가 내려갔다. 드로어즈를 찢어발길 정도로 흉흉하게 발기한 윤곽은 사람의 성기 수준이 아니었다. 그제야 조슈아는 제가 말을 잘못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며칠 못 봤다고, 제 애널에 들어갔었다고, 제 자신감이 하늘로 치솟은 것은 실수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 어린아이 팔뚝만 한 게 도대체 제 애널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르겠지만, 저 커다란 살덩이를 제 입에 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저, 에이드리언, 잠깐만.”

식은땀이 등허리를 따라 흘렀다. 에이드리언은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과 그렇지 못한 아랫도리를 동시에 조슈아에게 바짝 붙였다. 조슈아는 제 허벅지 사이에 닿는 뜨겁고 커다란 성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부피와 크기를 어떻게 기억 속에서나마 축소시킬 수 있을까?

“한 발 빼 준다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대담해.”

“나 그런 흐읏, 말 안 했는데.”

나른한 목소리가 귓전을 적시더니 이내 에이드리언이 귓바퀴를 깨물었다. 조슈아가 작게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탁한 목소리가 낮게 웃더니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욕망에 잔뜩 번들거리는 녹갈색 눈이 조슈아를 잡아먹을 듯 형형하게 빛났다. 조슈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조용한 가운데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에이드리언이 엄지손가락으로 조슈아의 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살짝 내리며 동시에 검지 안쪽으로 턱을 받쳐 주었다.

고개를 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에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에이드리언이 제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불편하다는 듯 어색하게 헤헤 웃는 저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자 목이 탔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따끈한 점막의 느낌이 미치도록 좋았다.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이 입으로 내 좆을 한 번 빨아서 한 발 빼 주겠다고.”

“왜 그렇게까지 말해요.”

감당하지 못할 만큼 야한 말에 조슈아가 눈을 내리깔며 울상을 지었다. 입술이 벌어진 터라 뭉개진 발음을 들으면서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제 머릿속에는 온통 저 조그마한 입에 추삽질을 하면 이 깜찍한 빨간 머리가 어떤 표정을 할지밖에 없는데, 조슈아는 벌써부터 울먹였다. 이러다가 진짜 제가 입에 대고 거칠게 박아 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럴까. 잔뜩 음욕에 젖은 머릿속으로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조슈아의 뺨에 제 입술을 부볐다.

“그야, 이게 당신 취향이니까?”

“아니에요! 그냥, 그건!”

조슈아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무심코 제 아랫입술을 씹으려다 에이드리언의 엄지손톱 위로 이를 올렸다. 신호탄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큰 눈 가득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던 조슈아를 보며 에이드리언이 생긋 웃었다. 그 다정한 미소와 다르게 엄지손가락은 조슈아의 입 안으로 쑥 들어갔다.

축축한 입 안이 놀란 듯 잔뜩 경직되었다. 아랑곳 않고 에이드리언은 제 엄지로 미끄러지듯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말랑한 혀를 누르고 입 속 여린 점막을 쿡쿡 찔렀다. 가벼운 추삽질에 조슈아가 서툴게 제 엄지를 빨았다. 츱, 츠, 새끼 강아지가 젖을 빨 듯 제 손가락에 달라붙어서 빨아 대는 모습에 에이드리언은 아랫도리가 빠듯하게 당겼다. 에이드리언이 다정하게 웃으며 조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빼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조슈아의 아랫입술을 한 번 꾹 눌러지고 말이다.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제법 큰 엄지손가락에도 불구하고 제법 잘 빨아 낸 제 자신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복숭앗빛 젖꼭지는 다 내보이고 속옷은 다 말려 올라가서 잘 빠진 허벅지를 내보이고. 오히려 다 벗은 것보다 자극적인 모습인지 알기나 한 걸까. 에이드리언은 가볍게 젖꼭지를 비볐다. 흐아아, 갑작스러운 손길에 조슈아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야하네.”

지난번 정사에서 가슴팍을 물어뜯을 듯 수놓았던 제 자국들이 옅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뭐, 곧 다시 생길 예정이었지만.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달랑 들어올렸다. 어? 조슈아가 당황하는 사이 에이드리언은 벽에 느슨하게 등을 기댄 채 조슈아를 제 무릎 아래에 앉혔다. 조슈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섹시한 검은 드로어즈가 찢어질 듯 커다란 성기가 꺼덕였다. 이미 잔뜩 성이 난 듯 성기의 끝이 드로어즈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쿠퍼액이 이미 흐르는 커다랗고 잘생긴 성기에 조슈아가 몸을 뒤로 슬금슬금 뺐다. 그걸 보는 에이드리언의 입가가 진하게 웃었다.

“옳지. 딱 거기에 있어요.”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팔을 잡아당긴 건 순간이었다. 앞으로 넘어지던 조슈아가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흉흉하고 뜨거운 성기가 눈앞에 있었다. 만져 봤을 때도 크다, 크다 했는데. 눈앞에서 보니 정말 무서울 정도로 커다랬다. 에이드리언이 상냥하게 웃었다.

“그렇게 내 좆이 빨고 싶었으면, 미리 알려 주지 그랬어.”

“아니, 헉….”

조슈아가 숨을 들이켰다. 에이드리언이 살짝 드로어즈 끝을 내리자마자 퉁, 하고 튕겨져 나온 성기가 조슈아의 뺨을 때렸다. 잔뜩 발기한 성기에서 나는 뜨거운 열기에 질겁했지만, 에이드리언은 되레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조슈아의 입 앞에 제 성기를 조준했다. 번들거리는 입술이 당황한 듯 아주 살짝 벌어졌다.

“빨아 줘요.”

“…….”

“안 그래도 당신 때문에 아까부터 섰거든.”

에이드리언이 가늘게 눈을 뜨고 야하게 웃었다. 조슈아는 엉거주춤하게 엎드린 자세에서 저도 모르게 성기에 손을 뻗었다.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커다란 성기를 향해 조슈아가 입을 벌렸다.

“!!!”

컸다. 그것도 너무 컸다. 컥, 컥. 아까 손가락을 빨면서 느꼈던 자신감이 한 방에 사라졌다. 반도 안 넣은 것 같은데 벌써 입 속을 가득 채운 성기의 부피에 조슈아가 숨을 헐떡였다. 입 안을 쿡쿡 찔러 오는 성기에 당장에라도 엉엉 울어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 대신 조슈아는 더 입을 크게 벌렸다. 얄팍하게 눈을 뜬 채 조슈아를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이 하, 숨을 토해 냈다.

이건 뭐, 구멍만큼이나 끝내줬다. 뜨겁고 좁은 곳이 축축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미약하게 움직이려는 혀가 제 성기를 아주 조금씩 건드렸다. 제대로 머금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입에 대고 거칠게 푹푹 박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잘게 흔들리는 빨간 머리카락을 보며 에이드리언이 충동을 가늠할 때였다.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잔뜩 부푼 성기를 반쯤 입 안에 넣은 채, 꽉 찬 성기를 우물거리며 조슈아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말했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렸다. 잔뜩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 아래로 주욱, 타액이 흘러 성기를 적셨다.

“너…무, 커요.”

입에 가득 들어찬 성기 때문에 제대로 발음조차 나지 않았다. 올려다본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심상찮게 굳어져서 괜히 서러워졌다. 최선을 다한다고 빨고 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까 괜히 빨아 준다고 했나. 참으려 했지만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릴 때였다.

“하,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드네.”

에이드리언에게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거칠고 탁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눈치를 보듯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입을 가득 채웠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턱이 빠질 듯 얼얼한 통증에 조슈아가 제 턱을 감싸며 울먹거렸다. 그리고 그 틈도 주지 않고 조슈아가 침대에 눕혀졌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제 위로 올라탄 에이드리언이 성급하게 조슈아의 다리를 벌렸다. 아, 그리고 거칠게 조슈아의 입에 제 손가락을 넣었다가 뺐다. 이내 손가락이 다리 사이 구멍을 비집고 들어갔다.

파득, 갑작스러운 침입에 조슈아가 몸을 떨었다. 회음부 애무 한 번 없이 이렇게 손가락이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슈아가 잔뜩 그렁그렁한 눈으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하으… 아, 아파….”

가늘게 신음하는 조슈아의 얼굴이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이 돌연 조슈아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살을 짓씹는 듯한 통증에 조슈아가 엉엉 울며 에이드리언에게 매달렸다. 조금만 살살해 달라는 안쓰러운 애교가 잘못 해석되었는지 에이드리언이 날카롭게 웃으며 목덜미를 따라 가슴팍까지 안착하며 이를 드러냈다. 그러는 사이 손가락은 평소보다 급하게 조슈아의 구멍을 헤집었다. 두 개, 세 개. 마치 성기처럼 쑤시는 느낌에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에이드리언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콘돔을 씌우는 손이 십 대처럼 성급했다.

“나 진짜 거칠게 할 것 같아서, 한 발 빼자고 한 건데.”

이미 거칠게 하고 있었다. 다리 안쪽이 뻐근할 정도로 벌어진 다리와 가슴팍에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과 말랑한 성기를 주무르는 성급한 손짓이 조슈아의 온 감각을 괴롭혔다.

그리고 손가락들이 모두 빠져나가던 순간이었다. 하. 듣자마자 사람 솜털이 다 설 정도로 섹시한 한숨이 조슈아의 귓가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엉덩이 사이로 축축하게 젖은 뜨거운 성기가 파고들었다. 놀란 조슈아가 바둥거렸지만 에이드리언이 더 빨랐다.

눈앞에서 별이 보였다. 제 몸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이 통증에 조슈아가 입만 벌리고 벌벌 떨었다. 에이드리언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역시 이렇게 바들바들 떠는 몸을 보며 좆질을 하는 건 제 타입이 아니었다. 조금 더 복숭앗빛으로 달아올라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온통 세상에 저만 있다는 듯 매달리며 엉엉 울고, 야한 신음을 뱉어 내는 거, 그게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타입이었다.

에이드리언은 번들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조슈아의 뺨을 어루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회음부와 접합부를 만지작거렸다. 잔뜩 부푼 입술을 빨아 당기며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처럼 근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 넣었어요. 응? 착하다. 숨 쉬어 볼까요?”

그제야 눈물범벅인 얼굴로 조슈아가 파르르 떨며 숨을 쉬었다. 투명한 눈이 깜빡일 때마다 눈매를 타고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조슈아 베넷은 제가 본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 예쁘게 울었다. 매일 좆을 물게 하고 거칠게 박아 엉엉 울게 하고 싶을 정도로.

“흐, 아흐, 에이, 에이드리언.”

조슈아가 눈을 맞추며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드리언이 붉게 물든 조슈아의 눈가를 핥으며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조슈아의 젖꼭지부터 허리까지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에 조슈아의 몸이 이완되던 순간이었다.

“흑, 흐으! …에이, 드리, 흐아앙, 언. 아파, 아, 파요….”

에이드리언이 반쯤 들어갔던 성기를 밀어 넣었다. 지난번의 기억을 잊은 듯 구멍은 꼭 처음인 것처럼 좁았고, 습했고 또 사람 미치게 만들었다. 성기를 잘라 버릴 듯 기분 좋은 압박감에 에이드리언이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가늘게 울고 있는 조슈아는 통통한 입술로 연신 제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마치 그게 제 구원이라도 되는 양.

에이드리언은 피식 웃었다. 머리가 얼얼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 깜찍한 녀석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걸까? 지금 자신을 범하고 괴롭히는 사람도 분간 못하고 이렇게 팔까지 감고 매달리며 아프다고 울다니.

“아파, 아, 흐어엉.”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조슈아를 바라보며 에이드리언이 회음부를 매만졌다. 빠듯하게 제 성기를 삼킨 접합부는 이미 더 벌어질 새도 없을 것처럼 빨갛게 부은 채 벌어져 있었고, 말랑한 성기는 충격을 받은 듯 식어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손가락 사이에 성기를 끼운 채 몇 번이고 정성스레 훑어 주었다. 그제야 하얗게 질려 있었던 조슈아의 몸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짜, 당신 안이 어떤지 알아?”

“에이드, 에이, 흐윽….”

조금 익숙해졌는지 제 이름을 부르는 조슈아를 보며 다시 아랫도리가 아파 왔다. 정말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참을 수도 없게 보채는 조슈아의 모습에 에이드리언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천천히 추삽질을 했다. 퍽퍽, 조슈아가 도망치려는 듯 몸을 뒤로 뺐지만, 소용없었다. 쾌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슈아가 손톱으로 에이드리언의 등을 긁었다. 어린아이 같은 몸짓에 에이드리언의 만족스러운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엉덩이에 부딪히는 살끼리의 마찰음이 점점 더 커졌다. 달큰하게 풍겨 오는 체향과 코끝이 아릴 정도로 야한 냄새, 그리고 뜨거운 체온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당신, 너무 달아. 너무 좋아….”

거친 숨소리로 그르렁거리듯 말한 에이드리언이 더 깊은 구멍 속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흉포한 움직임에 배 속이 다 아릿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발끝을 바르작거리게 만드는 쾌감이 오싹하게 피어올랐다. 흐으, 조슈아는 부은 눈으로 에이드리언을 올려다보면서 울었다. 그리고 매달리듯 말했다.

“흐윽, 에이, 내 이름, 내, 흐아….”

머릿속을 녹일 듯 저릿하게 피어오르는 감각에 조슈아의 언어체계가 뭉개진 듯 문장이 끝나지 않았다. 팍, 제 손가락을 적시는 정액을 보며 짙게 웃던 에이드리언은 몸을 숙여 조슈아의 입에 귓가를 가져다 대었다. 헐떡이는 소리 사이로 조슈아의 울먹임이 들려왔다.

“내 이름, 흐윽… 불러, 줘…요.”

그리고 저를 향해 애원하는 제 애인의 모습에 에이드리언의 머리카락이 쾌감으로 쭈뼛 섰다. 성기의 뜨거운 감각과는 또 다른, 가슴속 깊은 곳을 충족시키는 만족감에 에이드리언은 조슈아를 한입에 삼킬 듯 뺨을 깨물었다. 그리고 탁해진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조…슈아. 조…슈아.”

허리짓이 점점 더 거세졌다. 배 속을 꿰뚫는 커다란 움직임에 조슈아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불렀다. 귓가에서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좁은 구멍을 오가는 성기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리고 하, 절정에 달한 남자가 한숨을 토해 냈을 때였다. 구멍 안으로 꿀렁꿀렁한 정액이 뜨끈하게 차올랐다.

하아, 하아, 조금 전까지 난잡하게 살 부딪히는 소리가 난무했던 공간에 거친 숨소리만 오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슈아를 단단하게 옭아매던 남자는 아주 조금 조슈아에게서 떨어졌다. 그것도 눈치 못 채고, 조슈아는 제 팔로 눈가를 닦았다. 다 큰 어른이 이렇게 엉엉 운다는 게 창피했지만, 에이드리언과의 정사 끝에는 언제나 꼭 이랬다.

출납의 흔적이 가득한 쓰린 구멍과, 짓씹어진 온몸과, 잔뜩 당겨진 채 얼얼한 턱까지.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아팠지만 만족스러웠다.

처음이었다. 섹스 중 에이드리언이 제 이름을 불러 준 건. 제 조름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에이드리언이 사랑스럽다는 듯 저를 바라보며 제 이름을 불러 주었다. 뺨과 입술을 오가며 키스까지 퍼부어 주었다. 달콤한 느낌이 발끝부터 타고 올라왔다. 조슈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거, 알아요? 당신, 섹스 중에 내, 이름 처음 부….”

에이드리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웃던 조슈아가 멈칫했다. 섹스 후 여느 때와 달리, 에이드리언은 웃으며 저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가쁜 숨을 정리할 수조차 없이 숨이 막혔다. 달콤하고 야하고 뜨겁던 분위기가 싹 식어 버렸다. 침조차 삼킬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에서 조슈아는 힘겹게 문장을 끝마쳤다.

“…른… 거….”

“…그런가요?”

한참 만에야 에이드리언이 푸스스 웃었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로 조슈아의 뺨을 쓰다듬어 주고 입을 맞춰 주었다. 금세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치 이상한 분위기는 한 번도 형성된 적 없다는 듯. 조금만 더 있다가는 한 번 더 섹스를 하게 될 것 같다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말갛게 웃으며 에이드리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조슈아의 심장 한편이 서늘해졌다.

조슈아는 조금 전, 에이드리언이 지었던 표정을 알고 있었다.

열 살 때, 저를 입양해 가려던 부부 중 한 명이 저를 보고 다른 이름을 불렀다. 조슈아보다 더 어리고, 예쁜 아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부부는 저를 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렸던 조슈아가 지금까지 잊지 못할 이상한 표정.

그건,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동시에 깨달은 표정이기도 했다. 우리가 찾던 아이는 이 아이가 아니구나.

그날 저녁, 부부는 조슈아를 입양해 가려던 것을 취소했다. 대신 어리고 예쁜 아이를 입양해 갔다. 그리고 그건 보육원에서 제법 흔한 일이었다. 적어도 조슈아에게는. 그와 같은 일이 두 번이나 더 있었으니까.

조슈아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웃었다. 그리고 불안한 감정을 외면하려는 듯 에이드리언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따끈한 온기가 조슈아를 진정시켰다.

복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에이드리언을 보지 못한 것은, 조슈아에게 좋은 일이었는지 반대였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 * *

“정말 보스는 언제 오신대요?”

SNS를 살피던 엘라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꿈치를 책상에 얹은 채 손바닥에 턱을 올렸다. 지미는 벽에 걸린 에투왈 홍보용 달력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화보 사진 아래 흰색 바탕과 깔끔한 폰트의 달력에는 유독 커다란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음, 다음 주 월요일?”

달력 위 다음 주 월요일에 쳐진 커다란 동그라미는 조슈아가 그렸다. 하도 비서실을 들락거리며 “편집장님은 언제 오시는 거야?”를 물어 대는 타 부서 사원들 때문에 일부러 글씨도 커다랗게 썼다. [축! 보스 출근 날!!] 그 옆에는 노란색 포스트잇도 같이 붙였었다. [그만 물어보세요!] 물론 이 노란색 포스트잇은 과거형답게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있었을 때도 굳이 조슈아한테 물어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은 슬픈 이야기였고 말이다.

“보스 이러다 스웰딘 쪽으로 가시는 거 아니에요?”

엘라는 울상을 하며 투덜거렸다. 실제로 요 몇 주간, 빌 스웰딘의 행보는 딱 스웰딘의 막내아들이었다. 스웰딘 테크놀로지부터 호텔, 건설, 로펌 등 스웰딘이 뻗고 있는 기업들의 연말연시 행사에는 모두 빌 스웰딘이 등장했다. 패션 잡지와 연예 뉴스의 왕자님은 스웰딘의 사보를 거쳐 주요 경제지에도 실렸다. [스웰딘의 새로운 후계 구도?!]라는 가십지에나 나올 법한 기사 제목과 함께 말이다. 실제로 증권가에 도는 찌라시에는 스웰딘의 지분이 어떻게 분배되었는지, 현재 스웰딘가의 형제들이 어떤 실적을 나타냈는지 분석한 기사가 제일 인기라고 했다.

속 타는 듯한 엘라와 달리 지미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거야 보스가 판단하시겠지.”

“지미!”

“그것보다 나는 사보가 판매된다는 게 더 기가 막혔다니까? 세상에 그것도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세상에, 누가 사보를 돈 주고 살 줄 알았을까. 하지만 빌 스웰딘이 직장인 티 물씬 나는 얌전한 검정 슈트를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보는 프리미엄을 얹고 사는 사람들이 이 미국에는 수두룩했다.

“그래도, 나는 빨리 보스가 오셨으면 좋겠어요.”

엘라가 울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지미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지.”

“조슈아는요?”

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잠시 편집장실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가 내려간 편집장실이 비어 있는 게 벌써 몇 주째였다.

사실, 빌 스웰딘은 보스로 모시기 아주 힘든 사람이었다. 회의를 하러 간 에밀리처럼 열심히 일을 하거나 일에 애정이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으며, 사생활을 회사로 끌어오는-실제로 저 편집장실에 들어온 보스의 여자 친구만 해도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합쳐도 세기 힘들었으니까- 사람이었으며 세컨드 비서에게는 더없이 많은 일을 안겨 주는 보스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자면 3일 밤은 더 새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빨리 보스가 왔으면 좋겠어.”

조슈아가 한숨을 쉬듯 웃었다. 저 많은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빌 스웰딘은 제 보스였다. 가끔 어깃장을 두고, 자주 애인이 바뀌고, 한도 없는 블랙카드를 주며 말도 안 되게 구하기 힘든 애인의 선물을 구하라 하고, 갑자기 일정을 바꾸고, 어린아이나 부릴 법한 떼를 쓰기도 했지만. 음, 이 정도면 너무 별로이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에는 그 웃기는 떼조차도 가끔 귀여울 정도로 정이 많이 들었고, 얼굴 새빨개져서 사과할 줄도 알고, 밥도 사 주고.

그러니 3살이나 나이 많은 조슈아가 봐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별일이 없다면, 그냥 쭉 여기에서 일한다면 좋을 텐데. 물론 보증금 대출 금리 1.6%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로. 조슈아가 푸스스 웃으며 다시 한번 편집장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 문이 원래 저렇게 열려 있었나?

조슈아가 이상하다는 듯 아주 조금 열린 편집장실 틈새를 바라보던 찰나였다.

“하여간 없는 데서도 이렇게 찾으니….”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근사하고 오만한 목소리는 귀에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주 조금 열려 있던 편집장실 문이 툭 열리고, 긴 다리가 먼저 나왔다. 발목이 살짝 보이는 슬랙스와 컨버스 운동화 그리고 금색과 검은색이 섞인 화려한 패턴의 셔츠가 무섭도록 잘 어울리는 남자. 빌 스웰딘이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갈색 머리카락이 조금 눌려 있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평소보다 나른한 분위기로 빌이 고개를 까딱였다. 짓궂게 웃는 얼굴이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성 봐서라도 출근해야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엘라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지미도 한껏 반가운 얼굴이었다.

“보스!”

“언제 오신 거예요.”

빌이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엘라가 황홀하다는 듯 눈을 감고는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에투왈의 복지가 높아졌어. 그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빌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빌이 제 뒷목을 주물렀다.

“오늘 새벽에. 이제야 겨우 끝났다니까.”

빌이 지겹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긴, 뉴스에서 보는 빌 스웰딘의 행보는 화려했으니 지겨울 만도 했다. 매일 쇼 장 아니면 촬영장, 그도 아니면 편집장실에서 농땡이나 피우던 보스가 그렇게 착실히 일을 하고 왔다는 게 비서로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지미가 걱정된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왜 안 쉬시고.”

“쉬고 싶은데. 뭐.”

빌이 슬쩍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커다란 눈이며, 살짝 입술이 벌어져 맹한 표정이며, 새빨간 머리카락이며. 다 똑같은 거 같으면서도 달랐다. 몇 주 전보다 뭔가 조금 다른데. 예리한 눈썰미가 조슈아를 완벽하게 스캔하기도 전에 엘라가 한발 빨랐다.

“그 피곤한 일정에도 얼굴이 더 좋아지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엘라는 정말 말도 안 된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조슈아가 보기에도 그랬다. 빌은 살짝 얼굴 살이 빠진 것 외에는 오히려 얼굴에 더 광이 나는 것만 같았다.

“하도 이거 먹으라 저거 먹으라 들볶는 사람이 여럿이니. 건강한 생활만 하고 왔다니까.”

빌이 생각만 해도 귀찮다는 듯 투덜거렸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빌 스웰딘은 스웰딘가의 사랑받고 귀염받는 막내였으니까. 미하엘과 에단이 하는 것만 봐도 그런데 온 가족이 모여 기업을 돌았으니 오죽 예쁨받았을까.

“하긴, 보스 정말 좋은 것만 드셨겠어요.”

“나도 사보 사진 봤는데, 꼭 우리 연말 행사 같더라.”

“규모가 다르잖아요.”

각각 한마디씩 하는 사이, 빌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사람 마음이 몽글몽글해질 정도로 다정한 얼굴이 엘라와 지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아주 미묘하게, 평소와 달랐다. 빌은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너는 얼굴이 왜 그래?”

“저요? 제 얼굴이 뭐요.”

신종 시비인가? 조슈아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보스 얼굴이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제 얼굴 보고 얼굴이 왜 그렇다니. 통통하게 부풀린 뺨을 바라보던 빌이 고개를 저으며 조슈아에게 다가왔다. 훅 다가오는 빌을 바라보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어찌할 새도 없이 빌이 조슈아한테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조슈아의 이마를 덮었다. 날것으로 닿는 온기에 조슈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빌은 사르르 풀어진 조슈아의 눈매를 보며 숨을 삼켰다. 이상했다. 제게 다가올 때는 훅 들어오면서도 언제나 미묘하게 벽을 세웠던 조슈아 베넷이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군다는 게. 어쩐지 평소와 다른 조슈아의 분위기가 사람 침 마르게 하는 것 같았다. 입술이 바짝 건조해지는 기분에 빌이 얼른 조슈아한테서 손을 떼었다.

바로 사라진 온기에 조슈아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봐. 또 저렇게 안 하던 짓을. 혀를 차려던 빌의 머릿속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아, 다 그 자식 때문인 걸까. 그 빌어먹을 에이드리언 그렌트.

빌이 조금 무뚝뚝하게 말했다.

“얼굴이 조금 하얀 것 같다?”

“아….”

조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잠을 잘 못 잤어요.”

빌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맞췄다. 조슈아는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어쩌면, 잠을 잘 자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표정을 보고 났는데 말이다.

생각할 때마다 심장 쿵 떨어지게 만드는 이상한 표정. 어젯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이 고른 숨소리를 내고 편안한 표정을 지을 때까지도 잠에 들지 못했다. 한 폭 그림처럼 근사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표정. 지금 자고 있는 이 예쁜 얼굴이 지었다고 하기에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슬픈 표정.

날이 가장 어두운 새벽이 되었을 때, 조슈아는 결국 한숨과 함께 제 질문을 삼켰다. 그리고 그제야 잠에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 얼굴은 당연한 거였다.

그 와중에 엘라가 조슈아를 보고 능글맞게 웃었다. 어른이니 다 이해한다는, 엘라한테는 하나도 안 어울리는 표정. 조슈아가 한숨을 쉬었다.

“몰랐어?”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에밀리는 빌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놀랍다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그러고는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야 원. 세컨드 비서로서 실격인데?”

오늘따라 편집장실에 들어가지 않고 비서실에 상주해 있던 빌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얼굴이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비서실 밖을 서성이던 직원들이 낮게 탄성을 질렀다. 모두 오랜만에 돌아온 에투왈의 최강 ‘복지’를 확인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직원들의 마음을 아는지 빌은 생전 안 하던 짓까지 했다. 그러니까, 팬서비스 차원의 손 흔들기 같은 거. 당연하게도 직원들이 이마를 짚고 쓰러졌다. 거리가 멀어 못 본 직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아주 잠시 들렸다. 같은 공간에서 그 서비스를 본 엘라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에밀리의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보스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세컨드 비서는 이제 4년 차인 조슈아도 들어 본 적 없으니까. 비록 보스가 스웰딘가의 일로 하루에도 세 군데씩 다른 곳을 방문했어도 말이다.

조슈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대신 빌을 향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빌이 피식 웃더니 조슈아를 향해 말했다.

“왜 그렇게 봐?”

“제가 뭘요.”

“아주 내가 몇 주 자리 비웠다고 상당히 불손해졌다?”

“그럴 리가요. 하하.”

조슈아가 얼른 눈매에서 힘을 빼고 입술을 말아 올려 웃었다. 요 몇 주 못 봤다고, 그 전에 제게 좀 물렀다고 해도 빌 스웰딘은 빌 스웰딘이었다.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과 동시에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언제 봐도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조슈아는 단 한 번도 불손한 행동을 한 적 없다는 듯 아주 상냥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빌이 거드름을 피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번은 봐주지’라는 메시지에 조슈아가 그제야 헤헤 웃었다. 새하얀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나듯 웃었다. 빌은 눈을 크게 뜬 채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까도 분명 조슈아 베넷의 얼굴이 풀어지는 걸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조슈아의 얼굴에 올라와 있던 미소가 금세 사라지고 평소의 조슈아가 짓던 웃음이 올라왔다. 우습게도 목이 말랐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기분에 빌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해갈되지 않는 감정에 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보스의 모습에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슈아 베넷한테는 저런 표정보다 아까 그런 표정이 더 어울렸다.

“조슈아. 따라 들어와.”

낮은 목소리와 함께 빌이 먼저 뒤돌아섰다. 영문을 모르는 조슈아가 어리둥절해하며 머뭇거리다가 빌의 뒤를 따랐다.

소파에 앉은 빌이 무표정하게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한숨 나오게 잘난 얼굴이 뚫어져라 쳐다보니 조슈아는 곰곰이 제 행동을 뒤돌아보았다. 혹시 제가 뭔가를 실수한 게 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실수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분위기에 웃은 게 전부였다.

“저, 보스.”

“…왜.”

“저 뭐 실수한 거 있어요?”

“너 뭐 실수한 거 있어?”

아니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황당해서 조슈아가 입만 뻐끔거렸다. 꼭 금붕어가 숨을 쉬는 것 같이 웃긴 얼굴에 그제야 빌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금세 풀어진 분위기에 조슈아가 종알거렸다.

“아니, 보스가 갑자기 이렇게 딱딱한 얼굴로 들어오라고 하고 가만히 앉아만 계시니까 저한테 화나신 줄 알았죠.”

조슈아는 양손 검지로 눈썹을 끝을 올리면서 아까 빌의 표정을 따라했다. 하여간 별거 아니라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복귀한 보스 마음 상하게 했으면 제가 더 속상할 뻔했다. 그때였다. 빌이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가까이서 볼 때만 보이는 희미한 주근깨가 보이고, 분홍빛이 도는 투명한 갈색 눈이 또렷하게 저를 응시하는 게 보였다.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꼭 조슈아 베넷 같은. 달콤하고 따뜻한 냄새. 그 냄새 때문일까. 제 심장 소리가 귀 끝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빠르게 뛰었다. 그사이, 삼켜야 하는 말이 입까지 올라왔다. 꼭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말이었다. 빌은 얼른 침을 삼키려 했지만 쿵쿵,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결국, 빌이 입을 열고 한숨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

“네? 뭐라고요?”

조슈아가 빌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빌의 끝말을 따라하며 말을 유추했다. 뭐를 내? 빌이 오묘한 기분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한 번 더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못 들었으면 말고.”

별일 아니었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안 듣기를 바랐으니까. 빌은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조슈아 베넷이 얼굴을 들이밀지만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중요한 말이었어요?”

소년같이 해사한 얼굴이 못 들어서 미안하다는 듯 눈매가 축 처졌다. 하여간 정직한 조슈아 베넷. 꼼수라고는 하나도 모르면서 수 쓰는 척 깜찍한 척 다하는 조슈아 베넷. 그리고 사람 기분 참 묘하게 만드는 조슈아 베넷.

빌은 조슈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한 점 거짓 없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빌이 침을 한 번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저는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이 이상한 기분을 해결할 수도 있는 갈림길.

빌이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는 사이, 제 입에서는 무슨 말이 나갈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빌은 화들짝 깨어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입술 새로 웃음을 뺐다.

발신자는 로건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조슈아가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향해 눈짓했다.

“보스, 좀 이따 다시 들어올까요?”

연신 울려 대는 핸드폰 벨소리와 순진하게 제 허락을 기다리는 조슈아. 그사이에서 빌은 피식 웃었다. 아주 짧은 기대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런 상황에서 제 우선은 로건이었다. 이게 이성적인 판단인지 아니면 습관화된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한편이 이상하게 아쉬운 건 그냥 삼키기로 했다.

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어올 필요 없어. 나가서 일 봐.”

“네!”

조슈아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을 때마다 새빨간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로건은 머리카락이 흔들리지 않았다. 조슈아는 웃을 때 꽃이 만개하듯 화사했고, 로건은 어른스러웠다.

빌은 머리가 아팠다. 탁, 편집장실 문이 닫힌 뒤에도 로건의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 * *

조슈아의 잠꼬대는 계속되었다…고 했다. 조슈아는 매일 저녁마다 앱을 깔아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도 깔지 않았다. 덕분에 에이드리언은 매일 조슈아의 선물을 사 왔다. 하루는 파이, 하루는 제이콥의 식당에서만 파는 튀긴 두부에 설탕 뿌린 간식, 또 다른 날은 보송보송한 하늘색 캐시미어 니트. 이런 식으로.

덕분에 조슈아의 스튜디오에는 하나하나 에이드리언의 흔적들이 늘어 가고 있었다. 먹어 없어지는 것들도 작은 케이스들이 남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조슈아는 이런 작은 선물들이 좋았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크리스마스날 선물이 아닌, 통 큰 기부자가 선물한 똑같은 인형이 아닌, 누군가 매일 조슈아만을 위해 선물을 생각하고 고르고, 건네준다는 것은 입 속의 사탕처럼 달콤한 일이었다. 심지어 에이드리언은 조슈아가 제게 뭔가를 조르는 것 같아서 좋다고 했다.

그래서 앱을 안 까는 걸까? 조슈아는 자문했지만 답을 도출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주 조금만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오늘도 그랬다.

“짠, 이거 조슈아 선물이에요.”

하여간 선물 하나 주는 것도 이렇게 귀엽게 준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숨 쉬는 것조차 까먹을 만큼 잘생긴 얼굴에 그린 듯 유려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등 뒤로 숨겼던 선물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슈아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갈색 종이봉투는 조슈아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거, 그 사탕 맞죠? 그 수제 사탕?”

“기억하네요.”

에이드리언이 기분 좋다는 듯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조슈아는 피식 웃으면서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봉투 속을 바라보다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파란색, 분홍색, 노란색, 초록색 온갖 색깔이 잔뜩 들어 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초록색 사탕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제가 잘 먹었던 분홍색 딸기 사탕과 보라색 포도맛 사탕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평소처럼 기대 어린 표정으로 제 감탄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슈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드리언, 나 사탕 좋아하는데, 레몬 사탕은 안 좋아해요.”

“…그래요?”

에이드리언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괜히 사다 준 사람한테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조슈아는 애교 어린 표정으로 에이드리언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너무 셔서요. 근데 다른 건 다 좋아해요.”

“조슈아가 좋아하는 줄 알고 사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물어보고 사 올 걸 그랬어요.”

착하기도 해라. 에이드리언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슈아의 손에 들려 있던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따로 빼내며 다정하게 웃었다. 조슈아는 놀리듯 웃었다.

“내가 레몬 사탕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나한테 별로 관심이 없는 거 아니에요?”

“아, 그게 아니라. 조슈아가 잠꼬대할 때 레몬, 이야기도 했거든요.”

“정말요?”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잠꼬대가 무의식의 세계라지만, 어디까지 뻗어 나가는지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꿈에서는 가지까지 먹는다고 하겠다, 정말. 조슈아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손에 들려 있던 사탕을 다시 잡았다.

“이거, 그냥 내가 먹을래요.”

“괜찮아요. 내가 먹으면 돼요.”

“싫어요. 당신이 나 준 선물이잖아요.”

좀 셔서 안 당기기는 해도. 온전한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조슈아의 방식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씩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조금 걱정된다는 얼굴로 조슈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조슈아, 요즘 스트레스 받는 거라도 있어요?”

“갑자기요?”

“아니, 그냥. 안 좋아하는 것도 갑자기 먹고 싶다고 하니까.”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예쁘고 또 상냥한 남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정말. 조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무의식에서는 먹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조슈아는 얼른 레몬 사탕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새콤한 느낌에 눈가도 찡긋거리면서.

사탕은 달았다. 하지만 역시나, 조슈아는 레몬사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 제 잠꼬대라면 빨리 한번 고쳐야겠다고.

그날 밤, 조슈아는 엘라가 알려 준 수면 녹음 앱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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