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징조들 (8/22)

#7. 징조들

수면 녹음 앱은 신기했다. 일정 시간 이상 핸드폰을 만지지 않으면 잠을 자는 걸로 자동 인식해서 알아서 앱이 시작되었다. 앱을 열자 수정이 완료되었다는 공지도 떴다. 잠꼬대를 더 확실히 듣기 위해서 소리가 날 때 녹음이 시작되고, 잠꼬대가 끝나면 그 녹음이 마무리된다는 글이었다. 앱이 작동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서 배터리를 쓰지 않고도 한층 더 길게, 그리고 크게 녹음이 된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조슈아를 보며 에이드리언의 눈이 사르르 고운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조슈아의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귓불을 깨물었다.

“아….”

깜짝 놀란 조슈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어깨를 움츠리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문이 막히게 예쁜 얼굴과 다정하게 휘어진 녹갈색 눈동자에 조슈아는 투정을 부리려던 것도 잊은 채 에이드리언을 따라 배시시 웃었다. 예뻐라. 에이드리언이 작게 중얼거리며 새가 부리로 쪼듯이 조슈아의 입술 위에 여러 번 버드 키스를 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해서 그래요.”

“그냥요, 이 앱이 뭔지 알아요?”

“뭔데요?”

“앞으로 내 잠꼬대를 녹음해 줄 앱이에요!”

조슈아는 신이 나서 앱에 대해 줄줄 이야기했다. 그러는 사이 에이드리언은 미묘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다가 다시 조슈아를 향해 웃었다.

“…잠꼬대가 그렇게 신경 쓰였어요? 나는 조슈아가 나한테 뭔가를 조르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그것도 있지만 그냥….”

조슈아가 잠시 말을 멈추고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저 해사한 얼굴에는 피곤 한 점 없었지만 잠꼬대가 쭉 이어지면 어떨지 모른다. 함께 자는 에이드리언한테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제 무의식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또 제가 안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에이드리언한테 미안한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조슈아가 헤헤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에이드리언의 품에 꼭 안겼다.

“…잘까요?”

에이드리언이 가볍게 조슈아의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새하얀 콧잔등에는 아주 가까이에서만 볼 수 있는 희미한 주근깨가 나 있었다. 귀엽기도 하지. 따끈한 체온이 저밖에 없다는 듯 매달리자 심장에서 안정감이 차올랐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흩트리자 조슈아가 너무하다는 듯 눈매를 축 내려뜨렸다. 하여간, 사랑스….

에이드리언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조슈아가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에이드리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 되게 야한 거, 조슈아도 알죠?”

그제야 조슈아가 알아챈 듯 새하얀 얼굴이 서서히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을 향해 눈을 흘겼다. 새침하게 바라보던 갈색 눈이 다시 동글동글하게 웃었다.

아, 에이드리언이 신음을 삼켰다. 심박동이 빨라졌다. 귓불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에이드리언이 제 뒷목을 잠시 주물렀다. 그러는 사이 로건의 파티 한 장면이 떠올랐다.

조슈아와 로건이 함께 서 있다가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을 때. 그때도 갑자기 심장이 덜컹했었지.

그런데, 자연스레 제 시선이 누구를 먼저 바라보았을까?

당연히 로건이었다고 생각했던 그날이 갑자기 궁금해지던 찰나였다.

“…해요.”

“네?”

에이드리언이 되물었다. 머리카락처럼 새빨간 얼굴로 조슈아가 잠시 웅얼거렸다. 조슈아 베넷이 이런 얼굴을 할 때면, 에이드리언은 언제나 제가 의도하고 계획한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슈아의 턱 끝에 손가락을 대는 순간, 조슈아 베넷이 저처럼 예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내가, 원래 좀… 야하다고요.”

제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조슈아가 품에서 벗어나서는 이불을 폭 뒤집어썼다. 마른 몸이 이불 속으로 숨겨지고 차마 이불 속에 들어가지 못했던 자그마한 발이 바둥거리다가 이불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것을 천천히 감상하던 에이드리언의 눈이 짙어졌다. 조금 전 하던 생각은 본능 앞에서 어디론가 날아간 뒤였다. 정말 아쉽게도.

* * *

앱의 성능은 확실했다. 조슈아는 녹음한 지 3일째 되던 날 한 번에 몰아서 녹음을 들었다. 물론 점심시간 혼자 있을 때. 탕비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슈아는 녹음 파일을 켰다.

고른 숨소리들이 이어지다가 사이사이에 제 목소리가 나왔다. 세상에, 정말 잠꼬대를 하잖아. 조슈아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제 목소리가 녹음된 것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녹음된 제 목소리가 너무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서, 조슈아의 얼굴이 다 붉어졌다.

따로 긴 문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단어를 이야기 하거나, 무의식적으로 하는 대답 같은 게 전부였다. 예를 들어 갑자기 “초록색.”이라고 한다든지, “응….” 한다든지.

하지만 그 단답들이 다 끝을 늘이고 있었다. 이래서 에이드리언이 조르는 것 같다고 한 걸까? 말 그대로 정말 ‘조르고 있었네’. 갑자기 몰려오는 창피함에 조슈아가 제 얼굴을 감쌌다. 이왕 들어 보기로 한 거 끝까지 다 들어 보자 하며 조슈아가 다음 녹음을 틀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엽게 굴어요?」

「흐읏….」

너무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나른한 에이드리언의 목소리 끝에 달라붙은 건 분명 제… 조슈아는 빠르게 앱을 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거였다. 조슈아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

“앱 성능이 좋기는 좋구나.”

새삼스레 조슈아가 한마디 했다. 혼자 있는데도 이렇게 민망할 일이었다. 조슈아는 핸드폰을 톡톡 건드렸다. 이래서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도 안 왔다. 너무 잠꼬대에 신경을 써서인지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그제야 밀려오는 졸음에 조슈아가 하품을 했다. 눈물이 가느다랗게 맺혀서 눈매로 똑 떨어졌다.

핸드폰을 보니 점심시간은 한 30분 정도 남았다. 같이 점심을 먹었던 에밀리나 엘라, 지미는 미셸한테 다녀온다고 했으니 시간이 더 걸릴 거였다. 남은 시간에 잠이나 좀 잘까? 조슈아가 탕비실의 푹신한 소파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갑자기 손에 들린 핸드폰이 우웅- 진동했다. 에이드리언인가? 반가움에 핸드폰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헨리 제프리]

조슈아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저장될 정도면 분명히 어느 정도 아는 사이였을 텐데. 하지만 일적으로 만난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조슈아가 고민을 하는 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그러나 이내 다시 맹렬하게 핸드폰이 울렸다.

그제야 조슈아는 헨리를 떠올렸다. 대학 시절 학과 동기였다. 오지랖이 넓고 발이 넓고 지나치게 동기의 우정을 강조하던. 졸업 후에 알음알음 들리는 소식으로는 친하게 지내던 선배들을 따라 제법 저명한 경제지의 인턴으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조슈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조슈아, 지난주 웨스트 51 스트리트 쪽 갔었어?

졸업하고 몇 년 만의 연락인데 간단한 안부도 없이 용건이 훅 들어왔다. 조슈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끊을까? 하지만 지난주에 웨스트 51 스트리트에 간 일이 있었다. 에이드리언과 함께 갔으니 기억 못할 리가 없었다. 몇 년간 연락도 안 한 대학 동기가 그걸 어떻게 아는지, 그건 좀 궁금했다. 그래서 전화를 끊는 대신 차분하게 말했다.

“…헨리. 일단 오랜만에 연락했으면 잘 지냈는지, 가벼운 안부부터 묻는 건 어떨까?”

- 아, 그렇지! 조슈아. 미안하다. 잘 지냈어? 내가 너무 급해서. 그런데 나 정말 진지해. 내가 센트리21에서 인턴 하는 거 들었어? 내 기자 생활이 달렸다고. 한 번만 이야기해 줘. 갔었어?

쏟아내듯 제 할 말만 한 다음에 초조한 듯 전화 건너편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조슈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대답하기 전까지는 계속 물어 댈 기세였다.

“갔었어.”

-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전화 너머에서 헨리가 미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조슈아는 귀에서 핸드폰을 떼었다. 헨리는 전화하고 있는 것까지 까먹었나, 싶을 정도로 알아듣지 못할 말만 연신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 세상에 조슈아, 너 누구랑 다니는 거야?

“뭐?”

- 왕자님의 비서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직이라도 한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내 눈썰미란. 전화 너머에서 헨리는 계속해서 횡설수설했다. 간간히 ‘예스!’ 하는 것을 보아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싶었다. 그 일에 제가 관련되어 있고. 하지만 조슈아는 헨리의 좋은 일보다 줄어드는 점심시간이 더 아쉬웠다. 그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고 제 신난 것만 티 내는 헨리라면 더더욱.

“헨리. 나 바쁜데 이상한 말 할 거면….”

- 너 그렌트랑 무슨 사이야?

“응?”

그렌트? 에이드리언 그렌트? 내 남자? 갑자기 나온 애인의 성에 조슈아가 눈만 깜빡였다. 그러는 사이 헨리가 한마디 더 했다.

- 그렌트 있잖아. 세계 경제의 중심 그렌트가!

아, 그 그렌트. 맥이 빠졌다. 물론 조슈아도 알고 있었다. 미국 경제를 넘어서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그’ 그렌트. 그런데 갑자기 ‘그’ 그렌트가 이야기에는 왜 등장한 걸까? 헨리는 묻기도 전에 동기는 자랑스럽다는 듯 말한다.

- 사실 우리 선배가 요즘 두 달 넘게 그렌트가 집중 취재 중이거든. 너도 알지? 그렌트가에 차기 공식 총수 아직 없는 거. 그런데 물밑에서는 다르잖아. 이미 있단 말이야. 지난번 두바이에 그렌트 호텔 성공적으로 오픈한 차기 공식 총수가! 우리는 그 사람을 조커라고 불렀지.

이상했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헨리의 이야기를 듣자 심장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 엄청난 그렌트는 조슈아와 하등 연관이 없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걸까?

조슈아가 아는 그렌트는 딱 한 명이었다. 살인적인 물가의 뉴욕에서 간신히 발품 팔아 찾아낸 스튜디오의 옆집으로 이사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다정한 남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조슈아는 핸드폰을 들지 않은 팔로 다른 팔을 껴안았다. 헨리는 신이 난 듯 계속해서 말을 했다.

- 그런데 간신히 꽁무니를 따라잡은 거지. 두바이부터 쭉 따라 가면서. 그러다가 비서 얼굴 보고 계속 쫓아다니다가 결국 지난주에 웨스트 51 스트리트에서 그렌트의 조커 카드 비서를 본 거야! 그래서 열심히 따라 다니다 본 거지. 딱 그렌트의 조커 같은 사람을! 선배가 또 참된 기자거든. 당연히 사진을 찍었지.

“그…래서. 그 사람 얼굴 사진 있어?”

제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바짝 마르는 침을 삼켰다. 아닌데, 당연히 아닌데. 조슈아의 그렌트는 투자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인데.

- 정말 아쉽게도, 아니야. 그 미친놈의 안티 파파라치 때문에 사진 다 망쳤어.

“안티 파파라치?”

- 왜 카메라 셔터 터질 때마다 센서 감지해서 플래시나 전자파 보내서 사진 못 쓰게 망치는 거 있어. 아주 악질적인 거. 심지어 그 비서가 카메라까지 뺐어갔다니까? 말이 돼? 뉴욕에서?

수도 없이 파파라치를 겪은 조슈아가 동의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 아, 맞아 맞아. 그래서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선배가 그 앞에 주차된 차를 본 거야. 그 차에 있는 블랙박스를! 겨우 블랙박스를 구매해서 보는데, 그놈의 그렌트는 블랙박스에도 안 찍히더라고. 다 흐릿하게 나와.

헨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뜸을 들이던 헨리가 뻐기듯 말했다.

- 하지만 내가 누구냐? 사진을 다 보는데 그중 한 장면에 니가 찍힌 거지. 흐릿한 조커의 뒤를 따라가는 조슈아 베넷. 캬. 나 눈썰미 대단하지 않냐? 하긴 이 뉴욕에 너처럼 강렬한 빨간 머리가 몇 명이나 될까?

“나, 아닐 거야.”

조슈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럴 리가 없다. 제가 아는 에이드리언이 헨리가 말하는 그 ‘그렌트’일 리 없었다. 헨리가 무언가 착각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헨리는 커다랗게 웃었다.

- 너 맞아. 내가 지금 사진 보내 줄게!

그리고 조슈아가 대답할 새도 없이 잠시만, 했다. 부산스러운 소리와 동시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편지봉투가 깜빡였다. 메시지를 열어 보려는데 손이 떨렸다. 아닐 텐데. 분명히 제가 아닐 텐데. 헨리의 말대로 이 뉴욕에 새빨간 머리가 흔한 건 아니었지만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제 주변만 해도 로건이 있는데.

바들바들 떨리는 검지에 힘을 줬다. 별거 아닐 거다. 그냥 헨리가 착각한 거다. 조슈아가 애써 웃으며 메시지를 눌렀다.

그리고 사진이 로딩 된 순간, 조슈아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사진 속 인물은 제가 맞았다. 예전에 에이드리언이 사 준 캐러멜색 니트를 입은, 조슈아 베넷.

- 맞지? 조슈아? 너 맞지?

헨리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조슈아는 그저 멀거니 사진만 바라보았다. 제 앞에 같이 걸어갔던 에이드리언은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에이드리언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언제나 다정하게 웃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떠올리려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그래서 보스랑 아는 사이였구나.”

텅 빈 머리로 겨우 하나 생각했다. 어떻게 보스랑 아는지, 로건과 아는지 그렇게 궁금해 본 적 없었는데. 이제 알겠다.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던 찜찜함이 거미줄처럼 얽히고 퍼즐이 풀리듯 답이 나왔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그’ 그렌트구나.

- 뭐라고?

나직하게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했는지, 헨리가 계속해서 물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 너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지금 바빠서. 먼저 끊을게.”

- 조슈….

심상찮은 목소리에 전화 너머에서 애타게 조슈아의 이름을 불렀지만, 조슈아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몰려온 충격 탓인지 몸이 휘청했다. 겨우 옆에 있는 싱크대를 붙잡고, 조슈아가 숨을 크게 쉬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내쉬고. 하지만 싱크대를 놓친다면 넘어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던 메리 포핀스처럼, 갑자기 제 세계에 들이닥친 남자가 사실은 어마어마한 그룹을 이끌고 있다니. 그런데 왜 제 옆집으로 온 걸까? 왜 투자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왜 나랑….”

조슈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물끄러미 바닥만 바라보았다. 언제나 단단할 줄 알았던 바닥이 이상하게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치,

갑자기 발판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조슈아 베넷의 세계 한 축이 흔들렸다. 그것도 아주 커다랗게.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어떻….

조슈아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날, 조슈아는 평소의 조슈아와 달랐다. 에밀리한테 깨진 홍보팀장 에디를 위로해 주지도 않았고, 엘라의 웃긴 이야기에도 한 박자 늦게 웃었다. 무엇보다 에밀리가 가져오라는 피처팀 수정 기사를 이전 버전으로 가져다줬다. 일상의 조슈아 베넷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였다.

“아, 죄송해요. 금방 새로 가져올게요.”

물끄러미 이전 버전을 바라보던 에밀리 덕분에 바로 제 실수를 알아챈 조슈아가 얼른 사과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에밀리가 더 빨랐다.

“조슈아.”

“네.”

에밀리가 빤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에밀리가 이렇게 쳐다보는 것에 대해 적당히 무서워했을 것이다. 에투왈의 신화인 에밀리는 일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고 기준이 높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제가 한 실수는 입사한 지 고작 2개월 안팎의 신입이나 할 법한 일이었고.

하지만 오늘은 에밀리한테 미안함 섞인 미소 한 번 보낼 힘조차 없었다. 제가 알던 모든 것이 파도처럼 쓸려 사라지고 텅 빈 머릿속에는 온통 한 단어만 떠다녔다. 왜, 왜, 왜, 도대체,

“…왜.”

조슈아는 작게 중얼거린 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에밀리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가만히 조슈아를 응시하던 에밀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아파?”

“아….”

“점심 끝나고부터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점심 먹은 거 얹힌 거 아냐?”

“저 약 있는데. 줄까요?”

에밀리의 말을 들었는지 엘라가 주섬주섬 제 파우치를 열어 소화제를 꺼냈다. 지미가 얼른 탕비실에서 머그컵을 꺼내와 미지근한 물을 받았다. 순식간에 아픈 사람으로 확정 난 조슈아가 제 앞에 내밀어진 약 한 알과 물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웃어야 하는데. 입꼬리가 굳어 버린 듯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정말 체한 걸까? 약을 입에 머금고 물을 삼켰는데 여전히 이상했다. 조슈아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

“안 되겠네. 단단히 체한 모양이야.”

에밀리가 안 되겠다며 지미를 향해 눈짓했다. 에밀리의 사인을 눈치챈 지미가 조슈아의 등을 슬쩍 밀며 탕비실 쪽으로 향했다. 조금만 쉬고 와. 지미가 탕비실의 문까지 열어 주며 말했다. 탕비실에 들어가려던 조슈아가 잠시 뒤를 돌아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주 잠시,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엘라가 잠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약이 바로 효과가 있나 봐요. 아까는 웃지도 못하는 것 같더니. 좀 웃네요.”

엘라가 제 입꼬리를 양손 검지로 올렸다. 지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듣던 에밀리가 힐끗 탕비실을 바라보았다.

엘라의 말은 틀렸다. 조슈아 베넷은 웃지 않았다. 조슈아 베넷이라면 저렇게 입모양만 웃었을 리가 없었다. 그 다정한 눈을 담뿍 휘어서 보는 사람도 함께 웃을 만큼 햇살처럼 웃는 사람. 조슈아 베넷은 그런 사람인데.

조금 전 그 입꼬리만 아주 조금 올린 사람은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그러니까, 꼭 반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사람 같았다.

에밀리는 제 비유가 딱 알맞다고 생각했다. 그 짧은 점심시간 내, 갑자기 텅 빈 사람이 되는 이유가 뭘까. 평소의 에밀리 스콧이라면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에밀리 스콧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제 앞에 놓인 일이 중요하고, 제 승진이 중요하고, 제 보스의 지시와 보스가 가져다줄 달콤한 보상이 중요한 사람. 그래서 타인을 깊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 들어간 조슈아 베넷의 얼굴이 계속 신경 쓰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화사한 얼굴이 아닌, 새하얗게 질린 얼굴.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잠시 고민을 하던 에밀리가 문득 가슴 한편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저도 체했나?

제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던 에밀리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엘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밀리를 바라보았지만, 웃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세상 다시없는 코미디였다. 일개 세컨드 비서 때문에 양심이 찔리다니. 그것도 피도 눈물도 없다는 에밀리 스콧이 말이다.

어떻게 퇴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소파에 조금 누워 있다가 다시 일을 하러 나갔고, 몇 가지를 정리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지금 이 스튜디오에 있었다. 불이 꺼진 스튜디오에서, 조슈아는 매트리스에 가만히 누운 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밤이 늦도록 에이드리언은 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늦으면 늦는다고 칼같이 연락을 하던 남자가 하필 오늘따라 연락도 없이 오지 않다니. 혹시나 싶어서, 조슈아는 검색창에 ‘그렌트’를 검색했다. 마지막 엔터를 누르는 순간 손가락이 조금 떨려 심호흡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조슈아가 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너무 짧고 감정이 없어서 제가 듣기에도 이상한 그런 웃음소리. 검색으로 나온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음 달에 그렌트 금융의 해외 200번째 지점이 오픈한다는 게 가장 최신 기사였다.

전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목소리를 듣는다면, 잔뜩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한 채 울어 버릴 것만 같았다. 오랜 고민 끝에 조슈아는 아주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늦어요?

하지만 자정이 지나도록 메시지에 대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조슈아는 계속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햇빛이 슬금슬금 제 침대를 적셨을 때, 그제야 제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는 것을 알았다.

조슈아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은 핸드폰을 바라보았을 때, 조슈아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생목이 올라왔는지 목이 아팠다.

* * *

“체했었다며?”

“아, 보스.”

점심시간이었다. 모두가 밥을 먹으러 간 사이, 잠시 들어온 빌이 혀를 찼다. 탕비실 소파도 있건만 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처량하게 책상에 엎드려서 이럴까? 빌의 목소리에 조슈아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푸스스 웃었다.

빌은 못마땅한 얼굴로 희멀건 얼굴을 마주했다. 꼭 스프 한 그릇도 못 먹은 것처럼 다 죽어 가는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저 웃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웃는 척하는 조슈아 베넷 저 녀석 자체였다. 반짝반짝하던 눈이 하루 만에 저렇게 죽을 수 있을까? 빌이 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분명히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 자식 때문일 거였다. 연차로 치면 4년이나 봐 온 조슈아 베넷이 이렇게 구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제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만 같은 기분을 억지로 떨쳐 내면서 빌이 편집장실을 가리켰다. 못 알아들은 듯 조슈아가 눈만 깜빡거렸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면서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빌이 눈썹을 치켜떴다.

“들어가서 쉬고 나오라고….”

“하지만, 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 비서실에 아픈 사람은 필요 없어.”

부러 더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 곰 같은 빨간 머리는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작업 분위기가 처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도 지금 저처럼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아픈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조슈아는 고개만 푹 수그린 채 빌의 말에 응했다. 빌은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한 번 까딱인 다음 먼저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조슈아는 숨을 뱉어 낸 뒤 제 핸드폰을 가지고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편집장실에 있는 소파는 탕비실에 있는 소파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크고 푹신했다. 심지어 진짜 캐시미어 100%인 담요도 여러 장이었다. 소파 위에 담요 두 장을 깐 빌이 그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계속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라도, 또 보스가 두 번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조슈아는 고분고분하게 빌의 말에 따랐다. 구두를 벗고 소파 위로 올라가 누운 채 어린아이처럼 눈만 깜빡이는 조슈아를 보면서 빌이 속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조슈아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킁킁, 조슈아가 풍겨 오는 냄새에 코를 킁킁댔다. 섬유 유연제 향인지, 아니면 보스의 향수 향인지. 시원하고 묵직한 냄새가 났다. 에이드리언과는 또 다른, 아. 조슈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아프니 생각하지 않기로 해놓고. 또 이런다.

조슈아는 대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빌을 바라보았다. 다시 나가려는 듯 빌은 문가로 걸어갔다. 나가기 전에 얼른 불러야 했다.

“보스….”

조슈아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빌이 뒤를 돌았다. 꼭 톱모델이 턴을 하듯 부드럽고 유려한 몸짓이었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 건방지기는커녕 날카로운 멋을 더했다. 빌이 잘생긴 얼굴로 한 마디 했다.

“뭐.”

“감사해요.”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이지만 눈도 같이 접어서. 떼쟁이 보스가 다 컸다. 이제 세컨드 비서 걱정까지 해 주고. 담요도 덮어 주다니. 이런 상황에서 함께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제 보스가 철이라도 조금 든 것 같아서 조슈아는 그냥 웃었다.

빌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시선을 피하는 게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티 내며 웃는 대신 눈을 깜빡거렸다. 어쩐지 조금 졸린 것 같았다. 햇빛이 졸아들며 나타나는 달콤한 냄새와 보스 담요의 냄새와 적당히 따끈한 온기가 조슈아를 다독이는 것만 같았다.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조슈아는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멀어져 가는 현실에서 빌이 퉁명스럽게 말하는 게 언뜻 들렸다.

“…시끄럽고, 푹 자.”

“네.”

조슈아가 웅얼거렸다.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걸 바란다는 자체가, 지금이 현실임을 단단히 상기시켰다. 그리고, 모든 게 암전이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사이로 잠시간 사위가 조용했다. 그러다 숨을 죽인 듯한 발걸음 소리가 났고, 이윽고 문이 닫혔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간, 조슈아의 핸드폰이 잠시 부르르- 진동했다. 수면 녹음이 활성화되었다. 작은 알림 메시지가 깜빡였다.

[잠꼬대가 들린다면 바로 녹음을 시작할게요]

아, 핸드폰.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제 코트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적당한 부피감이 느껴져야 할 핸드폰이 만져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바빠진 덕분에 비몽사몽인 채로 제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 곳도 있을 텐데. 오늘따라 내선 전화가 많이 걸려와 핸드폰이 없다는 것도 이제야 알아챘다.

자고 나서 핸드폰을 챙기기는 했나? 문득 든 생각에 조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돌아갈까. 하지만 이내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한 퇴근인데.

하루 정도는 핸드폰 없이도 크게 문제없지 않을까? 조슈아가 입술을 달싹이며 이유를 붙였다. 1. 보스는 오늘 외출 계획이 없었다. 피곤하니 일찍 집에 가서 잠이나 잔다고 했으니 다른 일정이 생길 일은 없었다. 가까운 사교 모임도 내일 모레였다. 2. 따로 연락 올 지인이 별로 없다.

하지만 못내 하나가 걸렸다. 혹시라도….

에이드리언한테 연락이 왔으면 어떻게 하지?

순식간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빠르게 펌프질 될 때마다 조슈아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강도가 조금씩 세졌다. 조슈아는 제 마음을 다독였다.

우선, 우선 집에 가는 게 먼저였다. 어차피 공용 계단을 다 올라왔다. 잠시 집에 가서 생각을 하고, 에투왈에 갈지 결정하자.

조슈아는 제 집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도어 록 커버를 올리고 여섯 자리를 눌렀다. 에이드리언의 생일. **0701. 무음에서 다시 소리가 나는 걸로 변경하면서 함께 바꿨다. 살짝 뻐기듯이, 미리 에이드리언한테 생일 선물을 주는 거라며 말이다. 그때 에이드리언이 어떤 표정이었더라. 조슈아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으며 문을 열었다.

아, 떠올랐다. 정말 대단한 것을 들은 것처럼 녹갈색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가 이내 깊은 눈매가 사르르 전혀 달콤하게 휘어졌지. 복숭아 향이 날 것처럼 건강한 혈색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고,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웃었다. 마치 지금 제 스튜디오에 서 있는 저, 에이드리언처럼.

조슈아가 눈만 깜빡거렸다. 어젯밤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에이드리언은 제 상상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제 스튜디오에 가운데에 서 있었다. 에이드리언 역시 조슈아를 보고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렸다. 환하게 빛이 들어온 핸드폰에는 조슈아에게 전화한 기록이 찍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찡그린 얼굴이 솜사탕이 녹듯 사르르 풀어졌다.

환상일까, 아닐까. 조슈아는 가만히 제 손등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러는 사이, 에이드리언이 제게 걸어왔다. 잔뜩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가 말했다.

“조슈아, 미안해요. 걱정했죠? 어제 갑자기 회사에 일이 터져서 그거 수습한다고 연락도 못했어요. 화 많이 났어요?”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역시 천사처럼 생겼다. 예쁘고 다정하고, 그래서 사람 마음 녹이는 얼굴. 저 진심 가득한 얼굴이 제게 거짓말을 한다는 걸까?

“조슈아? 많이 화났죠?”

에이드리언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고는 조슈아의 눈치를 보듯 제대로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꼭 혼난 강아지처럼 굴었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다가오지 않겠다는 듯. 그 무해한 얼굴 탓이었다. 어제부터 내내 고민한 말은 순식간에 조슈아의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혹시, 당신. 그렌트예요?”

에이드리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길고 풍성한 금색 속눈썹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거렸다. 그리고 이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 듯 에이드리언의 빙그레 웃었다.

“그렇죠? 내 이름이 에이드리언 그렌트니까.”

“그게 아니라….”

조슈아는 다시 한번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입 안이 깔깔하게 말랐다.

“그, 그렌트예요?”

그리고 이제야 알아챈 듯 에이드리언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의 입가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상했다. 조슈아는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보았다. 현실성이 없었다. 꼭 마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아닌가? 에이드리언이 좋아한다는, 로맨스인가? 옆집에 배우가 산다든지, 혹은 그룹의 총수가 산다든지 해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순간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미안해요. 일부러 거짓말했어요.”

하루 종일, 저를 고민하게 만든 것치고 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 거짓말을 했구나. 그 사실을 덤덤히 곱씹을 뿐이었다. 그러다 조슈아가 한마디 했다.

“왜요?”

에이드리언이 가만히 조슈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이유에서 묻는 것인지 의도라도 파악하려는 듯. 하지만 조슈아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 그렌트가, 차기 총수가 될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니고 제 옆집에서 저와 이웃이 된 걸까?

“…사실, 조슈아를 만난 적이 있어요. 이사 오기 이전에. 어떤 파티에서.”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달콤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를 봤다면 잊어버릴 리가 없는데. 제 시선에 그런 의심이 섞였는지 에이드리언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조슈아는 나를 기억 못 할 거예요. 거기는 어두웠고, 조슈아는 취해 있었으니까요.”

조슈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드리언은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백하듯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처음에는 조슈아랑 친해지고 싶었어요. 그리고 계속 친해지니까 욕심이 생겼어요. 말 안 한 건 미안해요. 그냥, 나는 ‘그렌트’의 에이드리언이 아니라,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 자체로 보이고 싶었거든요. 회사 불만도 이야기하고,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주고받고. 그러다 당신과 사랑에 빠진 건 정말 행운이었고요.”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한숨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로.

조슈아는 잠시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영화 속 배우 같은 남자다. 어쩌면 자신은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기자의 역할을 맡게 된 걸지도 몰랐다. 세상을 알고 싶어 잠시 뛰쳐나온 공주와 함께하는 기자.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사라져 버릴 공주와 함께하는 기자.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조슈아는 곧은 눈으로 에이드리언과 시선을 맞췄다.

“왜, 나예요?”

무엇보다 제일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하필 내 옆집으로 이사 온 걸까? 왜 하필 그 파티에서 나를 본 걸까?

에이드리언이 잠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조슈아였어요. 조슈아 베넷. 빨강 머리 조슈아 베넷. 당신이요.”

우습게도, 그 대답에 조슈아가 눈만 깜빡였다. 그냥 나라니. 그냥 나였다니. 세상에 태어나 ‘그냥 조슈아 베넷이라서’라는 답변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어제, 그리고 오늘. 줄곧 고민해 왔던 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고 확실한 대답이었다. 손이 바르르 떨릴 것 같아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달큼하게 사람을 녹인다 해도 이미 조슈아는 한 번 속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생겼으니까.

그래도….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을 응시했다. 에이드리언은 보는 사람이 눈물이 나올 정도로 애처로운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싫어졌나요? 당신을 속여서?”

“이거 말고….”

조슈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에이드리언은 침이 마르는 듯 괴로운 얼굴로 조슈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조슈아는 결정했다. 저 얼굴을, 저 다정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한테 또 다른 거 숨기는 거 있어요?”

적막 위로 조슈아의 심장 박동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녹갈색 눈동자가 조슈아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잠시 휘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조슈아가 눈을 깜빡거렸을 때, 에이드리언은 세상 그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조슈아한테 맹세하듯 말했다.

“…없어요.”

“…하나만 더요. 당신, 갑자기 사라질 거예요?”

이번에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에이드리언의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조슈아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조슈아는 냉랭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은 내게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공주라고요. 어느 날 당신의 세계로 갑자기 돌아가 버릴 거면, 지금 말하라고요. 난….”

혼자 남겨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조슈아가 말끝을 웅얼거렸다. 정말이었다. 이제 혼자 남겨지는 건 정말 싫었다. 이제야 사람 온기가 어떤 건지 알게 되었는데.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게 심장 뻐근해질 정도로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정말이지, 이런 걸 알려 주고 떠나가기만 한다면 정말.

다정한 포옹이 조슈아의 생각을 차단시켰다. 훅 끼치는 시원하고 청량한 냄새에 조슈아가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럴 리가요. 조슈아.”

“갑자기 상원의원과 결혼한다고 기사 뜨는 건 아니겠죠?”

귓가에서 나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꼭 평소 같았다.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평소.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요. 조슈아.”

그러더니 잠시 에이드리언이 주저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용기를 긁어모았다는 듯 한마디 했다.

“…키스해도 될까요?”

오, 세상에. 조슈아는 그제야 이 남자가 제 남자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거리감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에이드리언의 입술에 제 입을 맞췄다. 그냥 가볍게 입술이 맞닿아 떨어지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눠 가졌다. 조슈아가 속삭였다.

“…믿을게요. 에이드리언.”

에이드리언의 눈이 커다래졌다가 곱게 접혔다. 그리고 조슈아의 귓가에 연신 속삭였다.

“고마워요. 정말.”

* * *

오늘따라 더 햇살이 눈부셨다. 룸 셰어를 통해 주당 180달러짜리 방을 나서면서 헨리 제프리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어깨에 걸친 갈색 백팩 속에는 엊그제 큰맘 먹고 산 최신형 맥북이 들어 있었다. 카드로 긁은 할부금은 걱정하지 않았다. 곧 해결될 예정이었으니까.

햇살이 좋다 싶더니 오늘 운수는 더 좋았다. 자주 가는 카페의 바리스타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사이즈를 업해 준 것이다. 갈색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은 채 카페의 캡을 쓰고 있는 바리스타는 “자주 오시잖아요.” 하며 생긋 웃었다. 지난번에는 뜬금없이 웃어 주며 “날씨가 좋네요.”라고 말하더니 말이다. 헨리는 아메리카노가 든 컵을 치켜들며 빙그레 웃어 주었다.

매일 걷는 거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꼭 바쁜 직장인의 출근길에 나오는 그런 장면.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가 뛰면서 나오면 bgm이 깔릴 법한 느낌에 헨리는 일부러 더 경쾌하게 걸었다.

오늘은 헨리 제프리를 위한 날이었다. 아, 제 사수인 찰리 드윈을 위하는 날이기도 하고.

하지만 취재는 찰리가 했다지만 중요한 소스를 발견한 건 헨리 제프리 자신이었다. 세상에, 엊그제 찰리가 가져온 블랙박스 영상 캡처본 사이에서 빨간 머리를 발견하다니. 역시 훌륭한 언론인은 눈썰미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라는 지도교수의 말이 맞았다. 그 빨간 머리가 학교 다닐 때 늘 혼자 다니던 조슈아 베넷이라는 걸 발견한 건 제 공이었다.

역시 하늘은 착한 일을 하면 선물을 내린다는 말이 맞았다. 맨날 혼자 다니는 게 안쓰러워 말도 붙이고 몇 번 연락도 했더니, 그게 이렇게 좋은 소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물론 그때 조슈아 베넷은 재수 없는 얼굴로 “고맙지만 괜찮아.”라는 말만 입에 붙이고 다녔지만 말이다. 어린 마음에 학과 사무실에서 업무 보조를 하며 본 조슈아 베넷의 장학금 사유에서 고아라는 말을 보고 소문을 낸 건 물론 껄끄러운 일이었지만,

헨리는 예전 일은 잊기로 했다. 먼저 제게 시비를 건 건 조슈아 베넷이었다. 그때 제가 좋아한 도나가 그 자식한테 관심이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 거다. 심지어 제가 도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영문학과 전체에 퍼졌는데 조슈아 베넷은 도나한테 제 이야기 한 번 하지 않았다. 헨리 제프리 자신이 조슈아 베넷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 이후로 한 몇 가지 소소한 일들-바뀐 강의실을 잘못 알려 준다든지, 과제 기간을 실제보다 훨씬 길게 알려 준다든지, 혹은 음료를 들고 있는데 툭 친다든지-은 정말 많이 참은 것이었다.

됐다. 헨리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말끔히 닦인 한 가게의 창에 제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깔끔한 세미 정장에 잘 손질된 금발, 이 정도면 딱 ‘센트리21’의 정식 기자 모습이었다. 곧 그렇게 될 테고.

헨리는 가만히 걸음을 멈추고 제 앞에 있는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하게 고개를 ‘센트리21’을 바라보았다. 딱 제게 어울리는 회사였다. 이제 조슈아 베넷이 그 ‘그렌트의 조커’ 이야기만 풀어주면 되는데.

“얘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헨리는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헨리는 줄기차게 전화를 했지만 조슈아 베넷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받게 될 테니. 뭐, 안 받으면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고.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인으로서 취재는 당연한 일이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와장창, 헨리는 제 머릿속에서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눈앞에는 인턴으로 출근한 첫날만 봤던 데스크의 부장 로널드 화이트가 머리를 짚은 채 날카로운 눈으로 헨리를 쏘아보았다. 헨리는 오금이 저리는 느낌을 애써 참았다.

지금 들은 말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 ‘그렌트’를 취재하지 말라니. 헨리는 제가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며 옆에 있는 찰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찰리는 이미 체념한 얼굴이었다. 몇 달째 다녔던 기사를 포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에! 그런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 잡은 물고기를 놔준다고? 그것도 세계를 움직이는 ‘그렌트의 조커’를?

“하, 하지만 미스터 화이트. 우리는 언론….”

“고작 인턴 나부랭이와 이제 겨우 정직원이 된 얼간이 때문에 이 ‘센트리21’이 흔들릴 줄 누가 알았겠어.”

나직하게 떨어지는 한 문장이 얼음송곳보다 차게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헨리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지 않았다. 찰리와 제가 취재한 건 황금보다 더 비싸게 팔릴 특종이었다! 하지만 이 프렌치 불독 같은 부장은 오히려 제가 한 일이 잘못인 것처럼 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봐, 인턴.”

“네, 네.”

헨리가 말을 더듬었다. 갑작스럽게 저를 부른 부장은 차가운 음료를 많이 마셔 머리가 아픈 아이처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헨리와 눈을 맞췄다. 갯벌 속 진주 같은 제 특종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건 부장인데, 오히려 부장은 마치 헨리와 찰리를 똥오줌도 분간 못하는 머저리를 바라보듯 봤다. 그리고 딱 한 번 참겠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네가 어딜 가든, 설사 CNN이든 타임즈든 니가 특종이라고 주장하는 이 재앙덩어리를 기사로 내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을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그 멍청한 표정은 좀 치워 봐. 쉽게 말하자면, 누구는 몰라서 취재를 안 하는 줄 아냐는 거야.”

“우리는, 언론이잖아요.”

“…뭐?”

부장이 잠시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 틈을 타서 헨리가 항변했다. 늘 언제나 꿈꿔 왔던 장면이었다. 제대로 되지 못한, 썩어 빠진 제 윗선에게 제 이야기를 하고, 제가 승리하는 것. 그건 기자로서의 사명이기도 했다.

“그만큼 커다란 그룹의 총수가 누군지는, 시민들은 물론이고 투자자들까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피를 토하듯 뱉어 낸 헨리의 말에 잠시 가만히 있던 부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원, 참. 그냥 멍청이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냥 미친놈이었고만. 영화 <스포트라이트> 같은 거 보고서는 기자 되겠다는 미친놈.”

헨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제가 <스포트라이트>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부장이 잠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는 사이 옆에 있던 찰리가 작게 속삭였다.

“너, 니가 미스터 화이트한테 보고했어?”

“아니…요.”

잠깐, 뭔가 이상했다. 찰리의 말은 그러니까, 꼭.

“선배가 보고한 거 아니에요?”

“니가 안다며. 나야 당연히 기다렸다 증거 다 해서 보고하려고 했지.”

그러면 도대체 부장은 어떻게 헨리와 찰리가 ‘그렌트의 조커’를 취재한 것을 알아낸 걸까? 뒷골이 당겼다. 심장이 박동을 빨리했다. 설마, 설마. 그렌트가 알고 있었던 걸까?

부장은 이야기를 해주는 대신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뭐, 지금 삶보다 특종이 중요하면 한번 해 봐.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그 재앙 덩어리를 받아 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을 거야. 심지어는 니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말이지. 그렌트가 발표할 때까지 니가 가져오는 건 그냥 ‘민간인의 사생활’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부장을 보며 헨리는 그제야 제 등 뒤에 땀방울이 송연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헨리 제프리는 진짜 머저리는 아니었다. 아연해지는 눈앞에 오늘 아침에 그렸던 제 미래가 휴지조각처럼 잘게 잘게 찢어졌다.

* * *

“하루 만에 살아났네요. 조슈아!”

엘라가 반가운 얼굴로 손바닥을 들었다. 가볍게 손바닥을 맞부딪히면서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부끄러움 반, 편안함 반이 섞인 미소에 엘라가 가벼운 핀잔을 건넸다.

“어제는 정말 조슈아 쓰러지는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쉬엄쉬엄해야죠.”

“쉬엄쉬엄하다가 정말 일 쉬게 되면 어떻게 해. 열심히 해야지.”

“다 나은 것 맞네. 조슈아.”

지미가 어깨를 으쓱하며 조슈아를 향해 엄지손가락 한 번 치켜올렸다. 조슈아는 과장된 쇼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 부근에 손을 얹은 채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책상에 앉았다.

조슈아는 빠르게 제 책상을 스캔했다. 책상 위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제 핸드폰은 없었다. 서랍을 열어 보았지만, 빌 대신 메시지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열댓 개의 핸드폰이 줄 맞춰 있을 뿐 조슈아의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흘린 거지?

조슈아는 제가 마지막으로 누워 있었던 탕비실까지 가 보았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잔뜩 눈이 처진 채 이리저리 무언가를 찾는 조슈아의 모습은 엘라와 지미가 보기에도 퍽 이상한 모습이었다.

“조슈아, 뭐 찾아요?”

“어제 핸드폰을 놓고 가서.”

“전화 한번 해 줄까요?”

“오! 그러면 고맙지!”

그래 전화! 전화를 하면 바로 찾을 수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조슈아가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엘라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으로 조슈아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엘라의 핸드폰에서 연결음이 이어졌다. 하지만 탕비실에서도 비서실에서도 심지어는 남자 화장실에서도 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핸드폰 찾는데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조슈아를 따라다니며 계속 전화를 걸던 엘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핸드폰 어디에 놓았는지 기억 안 나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헨리 제프리한테 전화를 받고 그때부터는 마치 술을 마신 것처럼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퇴근해서야 핸드폰 잃어버린 것을 알았으니 말 다했다. 지하철인가?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에투왈인 것 같은, 아!

조슈아가 힘없이 드러누웠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편집장실을 바라보았다.

어제, 분명히 편집장실 소파에 누워 잠을 잤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왜 기억 못했는지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명확한 사실에 조슈아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엘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기억났어요?”

“응. 편집장실에 놓고 온 것 같아.”

“오! 말 되네요!”

엘라가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고맙다는 듯 헤헤 웃었다. 조금 전 에밀리가 보고 때문에 들어갔으니, 에밀리만 나오면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겨우 한숨 떨친 조슈아가 의욕적으로 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스티커 메모장에는 오늘 조율할 일이 빼곡했다.

조슈아가 손가락을 풀며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사이 엘라가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손바닥을 펼쳐 손을 괴었다. 그리고 조슈아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조슈아, 그래도 내가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선물 같은 거 없어요?”

조슈아가 오버하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그걸 놓쳤지?’ 하는 뻔한 표정에 엘라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사례가 있어야지! 엘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이럴 때 엘라가 고르는 건 작고 가벼운 간식거리였다. 사탕이나 초콜릿 혹은 도넛 같은 거. 엘라가 입에 달고 사는 다이어트와는 하등 관계없는 것이었지만 모두 알면서 넘어가는 것이었다.

엘라는 언제나처럼 턱을 비뚜름하게 들고는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딱 고맘때 아이들이 지을 법한 웃음을 지었다.

“뭐, 오늘은 다이어트 중이니 사탕 하나만요. 아침부터 이리저리 다녔더니 급속 에너지가 필요해요.”

조슈아는 그럼 그럼, 추임새를 넣으며 제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렸다. 가방을 열자 갈색 종이봉투가 나왔다. 에이드리언이 사 준 수제 사탕이었다. 봉투 안에는 보라색, 분홍색, 노란색, 오렌지색 등 색색깔의 사탕이 아주 조금 있었고, 초록색 사탕은 아주 많았다.

조슈아는 색색의 사탕을 번갈아보았다. 잠꼬대 하나만 듣고 사탕을 사 온 어리숙하고 상냥한 남자. 조슈아는 엘라에게 보라색 사탕을 꺼내 주었다. 엘라는 오! 하는 표정으로 사탕을 받아먹었다.

“이거 지난번에도 준 거죠? 맛있었는데. 어디에서 팔아요?”

“아, 선물 받은 거라.”

“오호. 선물이란 말이죠.”

엘라가 음흉하게 웃었다. 저런 얼굴의 엘라는 꼭 기자처럼 집요했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초록색 사탕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금세 새콤하다 못해 시큼한 사탕 맛이 입에 쫙 퍼졌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쪽 눈을 뜨면 저절로 한쪽 눈이 감기게 만드는 레몬 맛 사탕에 조슈아가 한창 기묘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레몬 사탕 싫어하잖아.”

익숙한, 까칠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옆을 바라보았다. 빌이었다. 빌은 초록색 사탕을 바라보다 조슈아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선물 받았거든요.”

조슈아는 새콤함을 참지 못하고 연신 눈가를 찡긋거렸다. 어린 아이가 처음 윙크를 배운 것 같기도 하고, 갓 사춘기에 들어선 틴에이저가 서툰 추파를 보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묘하게 끌어당겨지는 그 표정보다 더 중요한 건 저 초록색 사탕이었다.

“누구한테?”

“조슈아가 누구한테 선물을 받겠어요.”

계속 새어 나오는 침에 제대로 대답조차 못하는 조슈아 대신 엘라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실제로 제게 사탕을 선물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답을 들은 빌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누구보다도 빌의 성격을 잘 아는 에밀리가 긴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비서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너!”

갑자기 화를 내듯 저를 향해 말하는 빌을 보며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입에 고인 신맛을 삼키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뒤늦게 물었다.

“…저…요?”

어리둥절해 있던 조슈아가 가만히 눈만 데구르르 굴렸다. 출근해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핸드폰을 찾고, 사탕을 먹고. 그런데 가끔 짓궂게는 굴어도 화를 내는 일은 없었던 제 보스가 이렇게 흥분해서 거친 숨을 몰아쉴 정도로 제가 잘못한 게 있었나?

조슈아는 입술을 한 번 축이고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았지만 걸리는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빌은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뜨고 조슈아를 노려보았다.

“조슈아, 이 바보 같은!”

조슈아는 대답 대신 눈을 깜빡거리다 빌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노려보는 거긴 한데, 보스 표정이 이상했다. 꼭 겉으로만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제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닌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꼭.

누군가에게 화를 내야 할지 몰라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조슈아는 새큼하게 퍼지는 레몬맛 사탕을 깨물어 조각내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침을 삼켜 신맛을 씻어 냈다. 절대로 없어질 것 같지 않은 새콤한 맛이 점점 중화되었다. 마비된 것같이 꼬부라지던 혀가 점점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보스, 무슨 일이에요?”

빌이 픽, 입새로 바람 빼듯 웃었다. 한참이나 침을 삼키고 눈가를 찡긋찡긋 하더니 한다는 말이 결국 저거다. 남 걱정. 그것도 조금 전 조슈아한테 화를 냈던 제 걱정이라니. 하여튼 착해 빠졌다.

빌은 투명한 갈색 눈과 눈을 맞췄다. 미묘하게 분홍빛이 도는 갈색 눈은 진심으로 빌이 걱정된다는 듯 염려를 담고 있었다. 환한 미소가 어울리는 붉은 입술도 작게 벌어져 있기만 했다.

빌은 잠시 저 투명한 갈색 눈이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해 봤다. 그 순간, 빌은 손을 들어 제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누군가 가슴팍을 세게 때린 것처럼, 심장이 욱신거렸다.

빌은 대충 손만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저를 올려다보는 조슈아의 시선을 외면했다. 저런 걱정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어쩐지,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빌은 다시 편집장실로 돌아갔다.

탁, 문이 닫히고 나서야 빌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블라인드의 슬릿 하나를 비껴 올렸다. 조슈아가 제 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 바로 슬릿을 내렸다. 후, 숨을 크게 내쉬어도 심장의 통증은 여전했다.

다 그 개자식 때문이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빌은 잇새로 터져 나오는 분노를 간신히 삼키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스팸 명단 중에서 ‘개자식’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스팸을 풀고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가는 순간, 빌은 제 혀끝에서 피 맛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피를 쓱 닦는 순간,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이드리….

“야, 이 개자식아!”

저 아래부터 뻗어지는 강렬한 분노에 빌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앞에만 있었어도 당장이라도 숨통을 눌러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전화 너머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갑자기 전화를 해서 욕을 하는 사람의 이름이라도 확인하는 듯했다. 잠시 후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하긴, 너 아니면 이럴 사람도 없는데. 빌 스웰딘.

“조슈아한테 레몬 사탕을 선물했어?”

- 겨우 그거 때문에 전화한 거야? 니가?

“겨우, 그거 때문?”

빌은 말문이 막혔다. 전화 너머 에이드리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나른하게 떨어지는 웃음소리에 빌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조슈아를, 마치….”

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차마 제 입으로는 내뱉기 힘든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손끝이 저릿했다. 침묵 후에야 겨우 빌은 떨리기 시작하는 입술을 떼었다.

“조슈아를, 마치 로건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잖아. 너.”

결국 말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말에 빌은 제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분명히 정곡을 찔렀을 텐데, 전화 너머의 개자식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 너도 마찬가지잖아. 왜 조슈아를 비서로 들인 건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안 어울리게 착한 척하지 마. 빌 스웰딘. 그래 봤자, 나랑 같은 부류면서. 그리고 너도 함께 묻고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로건을 위해, 비밀을 지켜 주기로 했잖아.

빌이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액정에 뺨이 닿으면서 스피커폰이라도 되었는지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조용한 편집장실을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스피커폰을 끌 여유 따위는 없었다.

우아하게 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빌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쩌면, 맞다. 저 개자식과 자신은 비슷한 선상에서 출발했다. 조슈아를 로건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 봤자 저 역시 개자식이었다.

로건과 닮았다는 이유로 채용을 하고, 로건을 위해 조슈아한테 사실을 숨기고.

혀끝에서 다시 한번 피 맛이 느껴졌다. 엄지손가락에 묻은 핏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빌이 툭 내뱉었다.

“넌, 조슈아 눈 볼 때 아무 생각도 안 드냐?”

전화 너머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대답 없이 전화가 끊겼다. 빌은 끊어진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소파 위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화면이 새하얗게 빛났다.

빌은 한 손을 들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제 눈을 비벼 보아도 제가 한 일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 빌은 제가 한 일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깨달았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졌다.

* * *

오늘 보스는 정말 이상했다. 이건 비단 조슈아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아까 빌이 화를 내고 간 것을 본 엘라는 연신 편집장실을 살폈고, 언제나 유쾌한 지미는 이상한 비서실의 기류를 살피며 조용히 있었다.

빌이 아예 비서실을 나갈 때까지도, 조슈아를 비롯한 모두는 긴장한 채였다. 편집장실을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빌은 다시 문을 열고 편집장실을 나왔다. 비서실의 전 인원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빌은 그 누구도 한 번 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비서실을 빠져나갔다. 운전을 위해 지미가 헐레벌떡 움직였지만, 빌은 “각자 일 봐.”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보스가 나가고서야 엘라가 한마디 했다. 그것도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오늘 정말 이상하죠?”

지미가 동조했고, 에밀리는 잠시 침묵했다. 조슈아는 어색한 틈을 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스의 외출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빨리 편집장실에서 제 핸드폰을 찾아야 했다.

편집장실 안으로 들어간 뒤, 조슈아가 문을 닫았다. 가장 먼저 찾아볼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소파. 마침 하얗게 빛나는 게 있었다. 조슈아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조슈아 게 아니었다. 빌의 핸드폰이었다.

“핸드폰도 두고. 어디를 가신 거지?”

조슈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파 한쪽에 있는 담요를 뒤적였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캐시미어 담요 사이에서 조슈아의 핸드폰이 쏙 빠졌다. 와! 조슈아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찾았는데, 결국 여기였다. 기쁜 웃음이 입에 걸리고, 조슈아는 잠시 핸드폰 액정을 톡톡 건드렸다. 이틀이나 충전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에는 배터리가 10%나 남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배터리를 아끼고 싶은 마음에 조슈아가 사용 중인 앱을 다 끄던 참이었다.

상단에 있던 수면 녹음 앱이 켜지더니 ‘NEW’라고 적힌 주황색 글씨가 떴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편집장실을 나가는 게 더 급했다. 조슈아는 얼른 앱을 끄려고 했으나 손가락이 미끄러졌는지 꺼지는 대신 녹음 파일이 틀어졌다.

「야, 이 개자식아!」

응? 우습게도 제 잠버릇을 녹음하기 위해 켜 두었던 앱에서 보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도 거친 목소리.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에이드리언이 떠올랐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던 사이인데. 설마 에이드리언인가? 하지만 조슈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에이, 아닐 수도 있는데. 계속 듣는 것은 보스 사생활을 침해하는 일이었다. 조슈아가 녹음된 음성을 끄려던 참이었다.

「조슈아한테 레몬 사탕을 선물했어?」

갑자기 나온 제 이름에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레몬 사탕? 제게 레몬 사탕을 선물한 사람은 에이드리언밖에 없는데.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녹음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전화 통화인가?

「겨우, 그거 때문?」

조금의 텀이 있고 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겨우, 그게 아니면 뭐기에. 조슈아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커지고 빨라졌다. 이상했다. 분명히 에이드리언은 더 이상 숨기는 게 없다고 했는데. 이건 꼭, 헨리 제프리와 전화할 때 느꼈던 불안감 같았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조슈아를, 마치 로건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잖아. 너.」

삐- 커다란 소리를 듣고 난 뒤처럼 귀에 이명이 들렸다. 다리가 풀렸다. 조슈아는 소파를 짚어 보았지만, 결국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다 큰 어른이 고작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다니. 이건 거짓말인 걸까, 아니면 꿈인 걸까? 아니라면 그럴 리 없는데. 다 큰 어른이 고작 다리가 풀려 넘어지는 것도,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저를….

로건으로 만들 리도.

에이드리언한테 직접 물어봐야 했다. 지금 이 녹음에서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안 들릴 테니까. 얼른 전화를 해서 진짜 에이드리언의 목소리로 이게 무슨 말인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조슈아의 기대를 배반하듯, 녹음된 음성에서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도 마찬가지잖아. 왜 조슈아를 비서로 들인지 내가 모를 것 같아? 안 어울리게 착한 척하지 마. 빌 스웰딘. 그래 봤자, 나랑 같은 부류면서. 그리고 너도 함께 묻고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로건을 위해, 비밀을 지켜 주기로 했잖아.」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분명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맞았다. 어젯밤, 제 목덜미를 깨물다가 결국 저한테 한 소리를 듣고 불쌍한 척 끙끙거리던 에이드리언,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카락으로 제 옆에서 이를 닦다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던 에이드리언, 출근하는 제게 아침 못 먹어서 속상하다며 에너지바를 쥐여 주고 입술에 입을 맞추던 에이드리언, 그리고 다정하게 오늘 저녁에 보자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에이드리언 그렌트.

이건 다 거짓말일 거다. 에이드리언은 이렇게 아픈 소리를 할 줄 아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냥 다정하게 쪼듯이 키스를 하고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게 웃으며 치즈버거 하나에도 행복하게 웃는 남자였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는, 조슈아는 모른다. 이 남자는 조슈아 베넷의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아니었다.

조슈아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이 부옇게 번지는 기분에 조슈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힘을 주어서 핸드폰을 바라보았지만, 이상하게도 계속 시야가 흐렸다. 눈이 나쁘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조슈아는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나직한 목소리가 하나 더 흘러나왔다.

「넌, 조슈아 눈 볼….」

편집장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조슈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때 아무 생각도 안 드냐?」

빌이었다. 조슈아는 아주 작게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뭐예요.”

꿈인 거죠?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핸드폰을 놓고 올 줄이야. 빌은 주차장에서부터 다시 편집장실로 올라왔다. 자동문이 열리기도 전에 저를 본 비서실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막힘없는 발걸음이 편집장실로 향하는 사이, 엘라가 작게 “아, 안에 조슈….” 하며 중얼거렸지만 흐릿한 문장이 빌의 귀에 꽂히지는 않았다.

방음 잘 되는 편집장실을 열었을 때, 빌은 잠시 굳었다. 도무지 제 편집장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빨간 머리가 천천히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때 아무 생각도 안 드냐?」

저건 분명히 제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까 대화 때 제가 했던 말. 반쯤 저를 돌아본 얼굴은 여전히 앳되고, 예뻤다. 그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빌을 응시했다. 빌은 누군가 제 숨을 틀어막는 기분으로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도망가고 싶다.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무기력함이 빌을 덮쳤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갈색 눈동자 위로 올라온 눈물은 고집스레 눈동자에 매달려 있었다. 조슈아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뭐예요.”

꿈인 거죠?

정말, 꿈이었으면 좋겠다.

조슈아 베넷의 눈을 바라보면, 진작부터 이런 기분이 들었어야 했다.

숨이 막히고 막막하고 답답하고, 무엇보다 모든 희망들이 다 꺾인 상태에서 제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 가냘픈 빛을 마주한 얼굴에 대고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그 기대를 꺾는 말밖에 없다는 참담함.

빌은 제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상상보다 훨씬 아프고, 지독한 통증이었다.

조용한 편집장실에서 빌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빌을 올려다보았다. 웃긴 일이었다. 제가 이렇게 넘어진 것처럼 바닥에 앉아 있는데 빌은 놀리는 대신 처음 보는 얼굴로 제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저러면 안 되는데. 진회색 눈이 짓궂게 웃으며 “속았냐?” 하고 제 어깨를 툭툭 쳐야 하는데. 아니면 에이드리언한테 전화가 와서 “미안해요, 조슈아. 다 빌이 계획한 거예요.” 하며 사과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빌은 꼭 뭉친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듯 손으로 가슴팍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러면 꼭….

“…진짜 같잖아.”

조슈아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부옇던 시야가 점점 원상태로 돌아왔다. 눈싸움을 하듯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눈이 뻑뻑해졌을 때가 되어서야 조슈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통유리 창에 흐릿하게나마 제가 비쳐 보였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은 채 멍한 표정으로 있는 조슈아 베넷이 우스워서, 조슈아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빌의 표정이 더 아파진 건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이제야 정신이 든 듯 엉덩이와 발목이 아팠다. 꼭 에이드리언에게 침대에서 밀려 떨어졌을 때처럼.

그때 그 미안한 표정과 제가 더 속상한 듯, 입술을 꾹 깨문 채 아픈 표정을 지었던 건 뭐였을까. 나한테 그렇게 애틋하게 굴던 남자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손길은, 깨질 듯 소중히 쓰다듬어 주던 손길은 다 뭐였을까.

조슈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파에 앉았다. 다리와 엉덩이에 퍼졌던 차가운 감각이 선뜩하게 올라와 조슈아의 뒷목을 꾹 누르는 기분이었다. 얼얼한 엉덩이와 저릿한 다리를 문질렀지만,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침대에서 밀려 떨어진 날은 열심히 마사지해 준 사람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조슈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이상하게도, 지금 들은 게 더 충격적일 텐데, 헨리 제프리한테 전화를 받았던 때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조슈아는 제 양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기가 잼잼하듯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그러다 별안간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빌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고개를 들어 빌과 시선을 맞췄다. 빌은 차마 시선을 못 마주치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숙였다.

“보스.”

“…….”

빌은 대답이 없었다. 조슈아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가 가득 찬 것처럼 엉망이었다. 조슈아가 흡,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주 가끔 조슈아가 기분이 이상할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평소 같으면 갑작스러운 들이쉼에 폐부가 찔리는 듯한 짧은 통증이 느껴졌겠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켰다. 더 이상 숨을 들이쉬지 못할 만큼, 심해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숨을 마시듯.

너무 들이마시는 바람에 조슈아가 콜록콜록, 잔기침을 뱉었다. 그리고 그 기침과 함께 제가 가장 하고 싶은 말 한마디가 생각났다.

“에이드리언이 좋아하는 사람, 내가 아니에요?”

제 입을 통해 나가는 목소리가 놀랄 만큼 건조했다. 아무 일도 없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조슈아는 가만히 빌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각질 하나 없이 잘 관리된 빌의 입술에는 핏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4년 동안 본 빌의 모습 중 저런 모습은 딱 두 번째였다. 2년 차 때, 여자 친구한테 입술을 깨물렸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하고 씩씩댔을 때. 그때는 정말 빌이 어려웠는데. 지금 빌은 마치 제가 어렵다는 듯 시선조차 맞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에이드리언의 입술도 언제나 빌의 입술처럼 각질 하나 없었는데. ‘그렌트’라는 걸 알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그냥

“…….”

“…아, 보스도 모르겠구나.”

조슈아가 살짝 웃었다. 바보처럼, 보스한테 물었다. 정작 물어볼 사람은 따로 있는데.

조슈아는 제 핸드폰 액정을 살짝 두드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10%나 배터리가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줄어든 걸까? 배터리를 표시하는 건전지 모양의 앱에 빨간 불이 깜빡이더니 2%의 숫자가 1%로 줄어들었다.

정말, 되는 일이 없다. 빨리 물어봐야 하는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몸은 생각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웃고 나서 다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입가 끝이 아렸다. 조슈아는 검지로 제 입매를 톡톡 건드렸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입매가 조금 풀렸다. 조슈아는 소파에 있는 빌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보스, 저 핸드폰 좀 빌려줄 수 있어요?”

“…그래.”

빌은 던지듯 한마디를 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조슈아를 보는 눈빛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을 바라보듯 불안했지만, 조슈아는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튈 곳이 없었다. 그냥, 막막한 검은 바다에서 핸드폰 하나만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조슈아는 한참 동안 꺼지지 않던 핸드폰 액정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보스가 맨 마지막에 사용한 앱이 액정에 떴다. 통화 목록이었다. 에밀리, 지미, 형1, 형2가 가득 찬 목록들 중 가장 맨 위의 저장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단 10분 전, 1분가량 전화한 상대는 ‘개자식’이었다.

어이없게도, 조슈아가 살짝 웃었다. 이름 아래 저장된 열한 자리 번호는 조슈아에게 아주 익숙한 번호였으니까. 조슈아는 잠시 망설였다. 수화기 모양만 한 번 누르면 곧 전화가 갈 텐데, 그 한 번의 터치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르고, 조슈아는 전화를 걸었다.

-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통화 연결음 대신 나온 상냥한 거절 안내 문구에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잔뜩 부푼 풍선 같던 기대감이 순식간에 푸스스 바람 빠진 모양이 되어 버렸다. 조슈아가 핸드폰을 흔들며 빌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이, 보스 전화 차단했나 봐요.”

“…그런가 보네.”

빌은 꼭 부채감에 말을 하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보스한테 물어야 할 말들도 따로 있었다. 조슈아는 아까 들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대화를 떠올릴 때는 더 많이 침을 삼켜야 했다. 침을 한 번 삼킬 때마다 생목이 올라와 목이 아팠다.

그리고 조슈아가 빌에게 말을 하기 전, 다시 빌의 핸드폰이 우우웅- 진동을 울렸다. 설마, 에이드리언일까? 하는 생각에 조슈아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저장된 이름은 ‘로건’이었다. 담백한 저장 명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액정을 톡톡 건드렸다. 빌은 제 핸드폰에 전화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을 달라는 말도, 시늉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가, 대신 받아도 돼요?”

다 갈라진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너무 건조해서, 빌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조슈아 베넷이 언제나 주장하는 ‘평균 남성 체격’은 오늘따라 너무 가냘팠고, 늘 하얗다고 생각한 얼굴은 파리할 정도로 질려 있었다. 무엇보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가까스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아서 빌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걸 물을지 아무것도 짐작 가지 않는데. 심지어는….

로건이 상처 받는 말을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조슈아는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까는 그렇게 안 움직이던 손가락이 참 쉬웠다. 전화 너머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본 음량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 로건의 목소리는 빌조차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들렸다.

- 빌!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오늘 약속 안….

“…안녕하세요, 로건.”

- …조슈아?

예상한 목소리가 아니어서일까, 잠시 말이 끊겼다. 아마도 전화를 잘못 걸었나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보스가 지금 전화 못 받으셔서 제가 대신 받았어요. 놀랐죠.”

세컨드 비서 4년 차인 조슈아가 하기에 너무 쉬운 거짓말이었다. 빌은 제 앞에 있었고 얼마든지 전화를 받을 수 있었지만.

- 아하, 그렇구나. 나는 또 내가 잘못 전화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조슈아, 혹시 감기 걸렸어요? 목소리가 안 좋은 것 같은데.

하지만 로건은 좋은 사람이었다. 조슈아가 제게 거짓을 말할 리 없다고, 그게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처럼 자연스레 웃었다. 그러고는 조슈아를 걱정했다. 조슈아는 침을 한 번 더 삼켰다. 그리고 애써 높은 목소리를 냈다.

“배가, 배가 고파서 그래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잖아요.”

- 그러고 보니, 조슈아. 우리 중국 음식점 가기로 한 거 안 잊었죠? 조슈아가 엄청나게 맛있는 식당 알려 주기로 약속했잖아요.

“아, 그랬죠.”

조르듯 말하는 로건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그리고 그에 대답하는 제 목소리는 딱딱했다. 그래서일까? 에이드리언이, 그가. 조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로건, 나 몇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요? 하하. 뭔데요?

놀리듯 대답한 로건이 전화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슈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토끼 인형 중에 의사 가운 입은 거, 갖고 있어요?”

전화 너머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조슈아, 정말 기억력 좋네요. 나 선물해 주려고 묻는 거예요? 정말 아쉽게도, 가지고 있어요. 예전에 의사 면허 따자마자 에이드리언한테 선물 받았거든요.

“이런 장난감은 어때요?”

로건의 목소리 위로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손바닥 반만 한, 의사 가운을 입고 있던 토끼 인형을 선물해 준 에이드리언. 그건 조슈아가 책과 캐러멜색 니트와 함께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받은 첫 선물이었다. 이제는 침을 삼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슈아는 다음 질문을 했다.

“무슨 색 좋아해요?”

- 꼭 소개팅 질문 같네요. 하하. 나는 병아리색 같은 노랑색이랑 우리 머리처럼 강렬한 빨강색이랑….

제 예상이 너무 과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좋아하던 색깔을 늘어놓는 로건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슈아가 낮게 숨을 뱉을 때였다.

- 아! 캐러멜색도요. 따뜻하잖아요.

“나보다는 조슈아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제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문득 조슈아는 헨리가 보내 줬던 사진을 떠올렸다. 캐러멜색 니트를 입었던 빨간 머리 조슈아 베넷.

“계속할 거야?”

어느새 빌은 제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가 들렸는지, 로건이 “어? 빌? 거기 있어?” 하고 말했다.

조슈아는 물끄러미 빌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진회색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마지막 질문은 빌도 함께 들었으면 했으니까. 조슈아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마지막 질문, 레몬 사탕, 좋아해요?”

진회색 눈동자가 잔뜩 흔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전화 너머에서 화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신나는 목소리가 줄줄 답변을 늘어놓았다.

- 레몬이면 다 좋아요. 레몬 사탕, 크림치즈 레몬 타르트랑, 레모네이드도.

“짠, 이거 조슈아 선물이에요.”

“의외네요 조슈아. 레모네이드를 더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였구나.”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겨우 한마디가 나왔다.

그래서였다. 제게 인형을 선물하고, 니트를 선물하고, 레몬 사탕을 선물했던 건. 모두 다. 로건이 좋아했던 거였다. 뭐가 더 있을까? 지금 제가 떠올리지 못하는 선물들 중, 무엇이 로건의 취향이었을까?

- 응? 뭐라고요 조슈아?

로건이 되물었다. 조슈아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입을 열었다.

“로건, 혹시. 에이드….”

조슈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얼음장같이 찬물을 맞은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제가 물으려던 말이 뭐였지?

에이드리언, 좋아해요?

스스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로건 헤네스는 좋은 사람인데. 분명 아무것도 모를 텐데. 무슨 말이기에 하다 멈추냐고 묻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스스로가 추잡해서, 조슈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서둘러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저, 로건. 제가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 보스 나오면 바로 전화드리라고 전해 드릴게요.”

- 알겠어요. 조슈아, 좋은 하루 보내요.

끝까지, 좋은 사람이다. 다정하고 활기차고. 아마 로건은 태어날 때부터 햇빛처럼 따뜻했을 것이다. 저와는 달리.

끊긴 전화를 바라보던 조슈아가 갑자기 핸드폰에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열한 자리 중, 일곱 자리를 눌렀을 때 제 번호가 떴다. 동시에 저장된 이름이 떠올랐다.

‘시끄러운 빨간 머리’

에밀리는 에밀리였고 지미는 지미였다. 엘라는 엘라였고. 그런데 자신은 시끄러운 빨간 머리였다. 빨간 머리. 빨간 머리. 그러고 보면 에이드리언도 자주 제 빨간 머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스러운 빨간 머리, 예쁜 빨간 머리. 숨이 막히는 기분에 조슈아가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빌을 바라보았다.

“보스도, 내가 로건과 닮아서, 그래서 나를 여기에 둔 거예요?”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묻어 나왔다. 아니라고, 거짓말이라도 괜찮았다. 어차피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오늘은 한 번 속아 줄 테니. 제발.

빌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래.”

그 입에서 나온 대답은 완벽히 조슈아의 기대를 배반했다. 조슈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지막하게 한마디 했다.

“아, 어떻게 하지?”

조슈아는 제 표정이 되게 이상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눈가가 잔뜩 붉어져 있는데, 눈은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게 더 아파서 빌은 침을 삼켰다. 목이 다 아팠다.

* * *

그리고 그 시각, 에이드리언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화사하게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서류를 검토하며 웃었다. 마크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요즘 보스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얼굴이 화사하게 웃을 때마다 보스한테 단련된 마크조차 빤히 바라볼 뻔 했다.

“호텔 수주 건은 계속 진행하도록 하죠.”

마침내 에이드리언이 펜을 들고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유려한 필체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마크가 얼른 파일을 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에이드리언이 마크를 보다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아, 오늘은 따로 안 나갈 거예요.”

“예.”

24시간을 분과 초 단위로 살아가던 보스는 조슈아 베넷이 사는 스튜디오로 들어간 뒤부터 조금 달라졌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20분을 사기 위해서라면 수천억 달러도 불사할 사람들이 널렸는데, 보스는 20분이 아닌 저녁시간부터 아침까지를 조슈아 베넷과 함께 보냈다. 처음 보는 일도 많이 늘어났다. 보스는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은 길거리 상점의 니트를 입었고, 주립 체육관에 가는 것을 즐겼고, 또 직접 시간을 내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사기도 했다. 그것도 꼭 하루에 한 번씩.

마크는 여상하다는 시선을 꼭꼭 숨긴 채 입술을 떼었다. 제가 남아 있던 것은 다음 일정 조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분 취향에 대해서 다시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에이드리언이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올렸다. 무표정보다 더 사람 등골 서늘하게 하는 미소에도 마크는 침착하게 에이드리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비서진이 고작 그의 취향 하나도 못 캐치할 정도로 무능한가요?”

“죄송합니다.”

에이드리언은 입매를 조금 더 올렸다. 비서진은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사람들’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제 비서진을 잘 알았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던져 주면 비서진은 그 프로젝트가 가루가 될 때까지 파고 또 팠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결과물들을 도출해 냈다. 그런 그들이 겨우 일반인인 조슈아 베넷의 취향 하나 캐치하지 못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다시’라는 말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보고 있던 서류철까지 덮은 채 마크와 눈을 맞추고 상냥하게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요?”

“지난번에 지시하셨던 하늘색 캐시미어 니트와 사과 파이에 대해서, 그분 취향이 바뀌셨는지 여쭤 보고 싶었습니다.”

“바뀌다니요. 그는 원래 하늘색이 잘 어울리고 파이류는 거의 다 좋아하는데.”

에이드리언이 금세 심드렁해졌다. 조슈아 베넷에 대해 어떤 걸 잘못 알고 있나 했는데. 초장부터 잘못 알고 있었다. 조슈아는 하늘색이 참 잘 어울렸다. 하늘색을 좋아하기도 했고. 제가 니트를 내밀었을 때 조슈아는 소년처럼 해사하고 예쁜 얼굴로, 배시시 웃었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어요? 나 하늘색 좋아하는데. 가을 하늘을 담은 것 같잖아요.”

그리고 입고 나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짐짓 걱정하기도 했었다.

“조금 촌스럽죠. 머리카락이랑 너무 대비돼서.”

하지만 조슈아 베넷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조슈아는 모든 색이 다 잘 어울렸다. 에이드리언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파이도 참 좋아하는데. 처음 사과 타르트를 줬던 날 조슈아는 들뜬 것을 숨기지 못했다. 단 한 번도 한 판으로 된 것을 사 본 적이 없다고. 매번 조각 파이만 샀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온전히 한 판의 파이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잔뜩 기뻐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본다면 그가 파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모르다니. 처음 조슈아에게 접근할 때 받았던 사전 조사 외 조슈아에 대해 아는 게 뭘까.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말을 하기도 전에 마크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헤네스에 대해 다시 한번 조사 후 재보고드리겠습니다.”

“…로건에 대해 이야기한 건가요?”

마크는 잠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에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언제나 그렇듯 그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찾겠다는 듯. 하지만 안타깝게도 마크는 이번만은 정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보스의 그분은 언제나 ‘로건 헤네스’였으니까.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더 이상 질문하는 대신 의자를 돌렸다.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마크는 잠시 제 대답을 되새겼다. 하지만 제 대답은 틀린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크는 기시감을 느꼈다.

보스는 단 한 번도 길거리 상점의 니트를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런 선물을 해 주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주립 체육관에 간 적도 없었다. 그리고 선물을 직접 사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그분’에게 가는 선물조차도.

“…나가 봐요.”

묵직하게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마크는 제 생각의 팽창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보스의 명대로 문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에이드리언은 다시 의자를 반 바퀴 돌렸다. 언제나 세상을 제 손 안에 넣고 주무르던, 달콤하고 오만한 미소 대신 생경한 표정이 올라와 있었다. 그래, 그건. 혼란이었다.

로건 헤네스는 하늘색을 싫어했다. 차가운 색 같다고.

“하.”

언제부터. 언제부터 혼동한 걸까.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직한 한숨이 사무실을 메웠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로건에게서 온 전화였지만 지금은 전화보다 제 생각 정리가 먼저였다. 하지만 끈질기게 울리던 전화는 수신자 없이 계속해서 울었다.

무음으로 돌리기 위해 핸드폰을 들던 찰나였다. 메시지가 왔다.

나 좋아해?

순식간에 혼란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에이드리언은 바로 전화를 눌렀다. 그리고 연결음 너머에서 전화를 받는 순간,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낮게 그르렁거리듯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잠시간의 침묵 후, 전화 너머에서 로건이 말했다.

- …너야말로, 정말이야?

아이들은 이성보다는 본능이 더 발달했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귀신같이 알았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눈이 어른보다 밝았다. 특히 병원에 오는 아이들은 더 그랬다. “이 주사는 안 아파.”라는 매번 똑같은 거짓말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길러진 기술인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런 아이들과 지낸 로건 헤네스 역시 보통 어른들보다 훨씬 더 본능이 발달했다. 로건은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건은 제 빨간 머리 동맹군을 떠올렸다. 명랑하고 쾌활하고 꼭 소년처럼 해사한 남자. 이제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만큼 앳되고 예쁘장한 남자. 이야기를 하면서 로건은 단 한 번도 조슈아가 그늘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전화 너머의 조슈아는 일부러 톤을 방방 띄우려고 했으나 목소리는 다 갈라졌고 가라앉아 있었다. 큼큼, 헛기침을 해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어디 아프냐고 물었지만 사실 아픈 목소리와 가라앉은 목소리를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늘 조슈아는 제 취향을 물어봤다. 말 안 해준 게 그렇게 많은데도 조슈아는 제 취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 로건, 혹시. 에이드….

흐릿하게 사라지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건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두드렸다. 이내 연결음이 이어지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로건은 건너편에서 넘어오는 상대의 목소리보다 더 크고 분명하게 말했다.

“빌. 사실대로 말해. 조슈아랑 에이드리언 사이에 내가 연관되어 있어?”

전화 너머에서는 옅은 숨소리만 번져왔다. 그러다 이내 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로건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 …이게 무슨 소리야.

뒷목이 눌린 것처럼 온몸이 오싹해졌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뒤에 섞인 그르렁거림은 마치 짐승의 숨소리 같았다. 로건은 잠시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너야말로, 정말이야?”

- 이게 무슨 소리냐고.

에이드리언은 제 할 말만 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는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로건은 대답하는 대신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빌은 쉽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고, 그러다 “내가 연관된 일인데, 나한테도 거짓말 할 거야?”라는 말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빌은 입을 열었다. 빌에게 들은 말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저를 좋아했단다. 그리고 제게 고백하는 대신 조슈아와 사귀었다고 한다.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것을 조슈아한테 덧씌우면서.

“하.”

로건은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토끼 인형, 좋아하는 색깔, 레몬. 그것들을, 에이드리언이 조슈아한테 추천했을까?

“에이드리언, 넌 정말 개새끼구나.”

빌이 매번 말했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 자식은 정말 개새끼라고. 그러면 로건은 그런 험한 말은 어디서 배웠냐며 빌을 혼냈다. 빌이 맞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정말 개새끼였다. 하지만 전화 너머에서는 귀를 녹일 듯 달콤하고 근사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사람을 꾀어내듯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가 너한테 말했지?

“지금 그게 중요해?”

- 빌 스웰딘?

로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이 맞았다.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수십 개가 넘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야. 조슈아 베넷한테는 왜 그랬어 등등. 그러는 사이 에이드리언은 몇몇 사람의 이름을 더 말했다. 둘이 공통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여전히 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그러다 에이드리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말했다.

- 설마, 조슈아 베넷?

“…하….”

혀끝까지 올라온 헛웃음이 결국 터져 버렸다. 누가 도대체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보고 세기의 천재라고 말하는 걸까? 조슈아 베넷은 제게 이런 말을 할 사람도 못 되었다. 빌의 말에 따르면 가엾은 조슈아는 빌의 강제 반일 휴가 조치로 집에 가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멍하니 앞만 보고 걸어 차까지 태워 보냈다고 했다. 머릿속의 말들이 온통 엉키는 사이, 전화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로건은 섬뜩해지는 기분을 억지로 삼켰다. 그러는 순간, 기이하게 뒤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맞구나.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뚜, 뚜, 뚜, 뚜. 로건은 팔뚝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우습게도 그렇게 자주 전화했던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오늘따라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이제 전화할 일이 없겠지만.

에이드리언의 전화번호를 내려다보는 로건의 눈은 싸늘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번호 삭제를 누른 로건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했다. 제 본능은 아이들의 본능과 닮아 있었다.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감으로 알았다. 그 덕에 학교를 다니며 달콤한 감정이 떠오를 때마다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는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에이드리언 그렌트로부터는 그러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쟤는 나를 좋아한다, 그런 감정.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너무 감정을 잘 숨긴 걸까? 생각을 정리하려던 로건의 신경에 무언가 툭툭, 걸렸다. 뭔가를 자꾸 놓친 기분이었다.

로건의 머릿속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조슈아 베넷은 제게 이런 말을 사람이 못 된다는 생각이 박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드리언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놓칠 수밖에 없었다.

* * *

친절한 지미는 정말 혼자 올라갈 수 있겠냐고 계속 물었다. 조슈아는 연신 괜찮다고 대답했다. 지미는 못내 찜찜한 얼굴로 올라가서 전화를 하라고 잔소리를 열 번 넘게 한 뒤에야 돌아섰다. 떠나는 차를 보며 조슈아는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다리 힘은 풀렸지만 계단을 오르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깨끗해진 스튜디오 공동현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웃음이 썼다. 왜 몰랐을까. 관리비 하나 안 오른 이 스튜디오가 갑자기 말끔하게 달라진 걸, 왜 우연으로 생각했을까.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며 조슈아는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윤이 나는 바닥을. 반짝이는 창문을. 그리고 생각했다.

왜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을까.

“그거, 알아요? 당신, 섹스 중에 내, 이름 처음 부…른… 거.”

“…그런가요?”

당신은 내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 만들었어요. 미트 파이랑, 가지 그라탕이랑….”

“가지 그라탕이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걷는 사이에, 어느새 5층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 순간, 조슈아의 코끝에 익숙한 체형이 내려앉았다.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는 사이, 벽에 기대어 있는 익숙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조슈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처음 봤을 때랑 똑같은 모습이다. 이 사람 많은 5층짜리 스튜디오와 지독하게 안 어울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남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화사하게 웃었다.

“이제 왔어요?”

조슈아는 무너질 것처럼 웃었다.

왜 정말 몰랐을까?

“사랑해요.”

“…그래서 말했나요? 로건한테?”

사랑한다고 대답해 주지 않는

당신을.

평생.

로건 헤네스는 평생 몰라야 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로건 헤네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로건 헤네스를 좋아한다고 인정한 그날부터 에이드리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안일하게도 그 감정이 곧 사라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에이드리언의 예상을 비웃듯 얼마 가지 않을 줄 알았던 그 수채화처럼 먹먹한 감정이 계속되었다. 계속해서 꿈에서 강렬한 빨간 머리와 갈색 눈, 덜덜 떨리던 목소리가 나왔다.

잠에서 깨어나도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 순간의 기억이 뭐라고, 잠을 자도 잊히지 않는 장면 속에서 에이드리언은 열아홉 살을 보내야 했다. 혹시나 다른 일을 하면 사라질까, 바쁘게 살았다. 초 단위로 쪼개진 일정 속에서 봉사활동도 수없이 다녔다. 그렇게 하면, 어쩌면 믿지도 않는 신이 ‘그래 너 참 장하다.’ 하며 제 감정을 지워 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은 쭉 이어졌다. 그리고 울지 못하고 덜덜 떨던 목소리는 아주 길게 에이드리언을 괴롭혔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려도 무방할 만큼 가냘픈 주제에 자신을 걱정하던 목소리. 로건을 볼 때마다 좋았다. 그 단단한 연약함이, 강한 상냥함이, 환하게 웃는 예쁜 얼굴과 흐릿한 기억들이 계속해서 그 감정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에이드리언은 로건 헤네스에게 평생 친구여야 했다. 로건 헤네스한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친한 친구, 그 이상이 되지 않았다. 틈새가 없었으며 에이드리언은 무리해서 철옹성을 함락하려 들지 않았다. 어쭙잖게 접근했다가 친구의 자리까지 잃는 건 싫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사람 심장 후벼 파는 그 아픈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었다. 괜찮냐고 묻던 목소리가 ‘정말이냐’ 묻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에이드리언은 훌륭한 배우였고, 평생을 좋은 친구 흉내를 내며 로건 헤네스의 옆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

- 에이드리언, 넌 정말 개새끼구나.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로건의 나직한 한마디에 에이드리언은 눈을 커다랗게 떴었다. 메시지를 보고 전화를 받으면서, 에이드리언은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아픈 목소리를 듣게 되겠구나. 생각만 해도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겠구나.

그리고 예상보다 더한, 직접적인 비난이 들려왔다. 에이드리언은 눈을 깜빡였다. 해일처럼 아픈 감정이 몰려올 줄 알았는데, 에이드리언은 괜찮았다. 놀랍게도 말이다. 그저 한쪽 심장이 휑하게 비는 느낌만 났다. 우습게도, 제가 이를 악물면서까지 각오했었던 극심한 고통은 없었다.

에이드리언이 웃었다. 입매가 올라가고 눈매가 사르르 휘어지고 보는 사람조차 따라 웃을 만큼 달큼하게.

하지만 예상만큼 아프지 않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에이드리언의 머리는 놀랄 만큼 차갑게 식어서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로건이 혼자 제 감정을 눈치챘을 리는 없었다. 그럴 정도로 감이 있었더라면 이미 애초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에이드리언은 제 계획을 망치는 사람에게는 냉혹한 사람이었고, 십 년, 아니 이제 십일 년의 계획을 망친 사람에게는 응당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용의가 있었다.

에이드리언의 눈이 번들거렸다.

“누가 너한테 말했지?”

미친놈처럼 빛나는 눈과 달리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했다. 아이를 구슬리듯 부드러운 목소리에 전화 너머에서 어이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지금 그게 중요해?

“빌 스웰딘?”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장 확률이 높은 남자였지만, 에이드리언은 빌 스웰딘을 넘겼다. 그는 개새끼이긴 했지만, 자신의 사촌이 상처 받는 것은 싫어하는 모순된 개새끼였다. 빌이 로건이 상처 받을 것에도 불구하고 로건에게 말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저와 로건이 공통으로 알고 있는 몇 사람의 이름을 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로건으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스멀스멀 등을 타고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설마’라는 가정과 함께 에이드리언이 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가 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끼우며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지금 제가 따라하고 있다는 게 웃겼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한 번 시작된 가정이 에이드리언을 흔들었다. 에이드리언은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풀었다. 손바닥 안에 축축하게 식은땀이 뱄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몇천억 달러가 오가는 계약에서도 에이드리언은 이래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고 눈앞이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설마, 조슈아 베넷?”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 에이드리언은 잠시 숨을 참으며 핸드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제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조슈아 베넷이어서는 안 되었다.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친 생각에 에이드리언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왜 조슈아 베넷이어서는 안 될까?

그가 빨간 머리여서? 제가 로건 대신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 …하.

그리고 전화 너머에서 로건이 작게 반응했을 때, 에이드리언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에서, 로건을 달래고 아니라고 상냥하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가운데에서 로건에 대한 생각은 저만치 미뤄졌다.

“맞구나.”

제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입가를 올렸다.

조슈아 베넷이구나.

온통 머릿속은 그 한 문장으로 가득 찼다. 아니, 조슈아 베넷이 가득 찼다. 빨간 머리 조슈아 베넷, 예쁜 얼굴의 조슈아, 베넷, 그리고 그냥 조슈아 베넷.

조슈아 베넷이 알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잠시 숨을 참았다. 심장 통증이 몸서리치게 아팠다. 손바닥 안에 올려 둔 심장을 터트릴 것처럼 꽉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바닥이 무너지는 듯 시야가 흐려졌다. 동시에 목이 타고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에이드리언은 이게 다 뒤늦게 찾아온 통증이라고 생각했다. 로건 헤네스의 아픈 목소리가 뒤늦게 작용한 거라고. 사람 심장 후벼파는 목소리가 너무 아파서 바로 느끼지 못한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안일한 생각 때문에 에이드리언은 통증의 바로 앞에 있었던 생각을 잊어버렸다.

…조슈아 베넷이 알았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졌던 생각은 “지금 조슈아 베넷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였는데 말이다.

어떻게 스튜디오까지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드문드문한 기억 사이로 마크가 잠시 놀란 얼굴을 한 게 떠올랐다. 차를 몰고 오는 내내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에이드리언은 5층 벽에 기대선 채 공용 계단을 바라보았다. 꼭 처음 조슈아 베넷을 만났을 때처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오르는 소리와 함께 조슈아 베넷이 계단을 올라왔다. 에이드리언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화사하게 웃었다. 제가 미친놈처럼 보이는지 아니면 평소의 다정한 에이드리언일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제 왔어요?”

조슈아 베넷은 아주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슈아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 달싹이는 입술을 보며 에이드리언은 잠시 기다렸다. 조슈아 베넷한테는 그 정도 이상의 권리가 있었다.

“…사랑해요.”

가라앉은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잠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지금 조슈아 베넷은 제게 저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욕을 하고 저를 때리고, 혹은 아니지 않냐고, 간절한 희망을 담아 제게 물어야 했다.

조슈아 베넷은 지금 이런 때에도 제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도 정반대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말로 커다랗게 한 대를 맞은 것처럼 골이 울렸다. 다 쓰러질 것처럼 연약한 얼굴은 눈물 한 방울 비치지 않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투명한 갈색 눈이 가늘게 무언가를 잡고 있는 것 같아서, 에이드리언의 심장이 기이하게 뛰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딘지 이상하고 심장 조이는 기분이었다.

에이드리언은 빳빳하게 굳는 입매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는 조슈아 베넷을 가장 아프게 할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말했나요? 로건한테?”

조슈아가 웃었다. 꼭 울 것처럼,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그 순간 에이드리언은 어디에선가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 소리가 난 곳이 제 쪽이었는지, 조슈아 쪽이었는지. 아니면 둘 모두에게서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정말 행복했는데. 아침을 해 주지 못한 게 속상해서 에너지바를 쥐여 주고 입맞춰 주던 에이드리언은 어디로 간 걸까? 조슈아는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하지만 연거푸 눈을 깜빡여도 앞에 있는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금발, 그리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녹갈색 눈동자.

아…. 조슈아가 나직하게 웃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매끄럽게 예뻤던 입술에 상처가 나 있었다. 이럴 상황이 아닌데도, 그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아플 텐데. 분명히 아팠을 텐데. 에이드리언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물었다.

“왜 웃어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는 목소리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생경했다. 몇 개월을 듣고, 귓가에 속삭였던 목소리가 너무 이상하게 들려서, 조슈아는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어 보았고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과 똑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조슈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루약을 잔뜩 먹은 것처럼 텁텁하고 썼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보내려 하자 여기저기에서 할퀴는 것처럼 목이 아팠다.

“그냥,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가 어떤 사람인데요?”

조슈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떤 사람일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조슈아와의 하루하루, 그게 내가 모으고 싶은 거예요.”

“그야 당연히 당신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으니까.”

“너무 예뻐요, 당신.”

“당신 그 얼굴 보고 싶어서요.”

“당신 훅에 내가 걸렸잖아요.”

머릿속에 수많은 에이드리언이 떠올랐다. 이 사람 많은 5층짜리 스튜디오와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남자. 다정하고 상냥하고 사려 깊은 이웃 남자. 부끄럼도 없는지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남자. 좁은 제 세계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남자. 처음으로 제게 온전한 감정을 주었고, 그래서 눈물 나게 고마웠던 사람.

그리고….

“…모르는 사람.”

그래. 그 수많은 얼굴을 지우고 가만히 서 있는 저 남자는 제가 모르는 남자였다. 가끔씩 너무 낯선 표정을 짓던 저 남자는 조슈아 베넷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피식 웃었다. 입꼬리에 바람만 빼듯 쓱 올려서.

“그거 참 재밌는 대답이네요. 조금 전까지는 사랑을 고백하고, 지금은 모른다고 하고. 어떤 게 정답인지, 나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이건 알겠죠?”

“뭔데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했던 그 웃음을 보면서 조슈아는 계속해서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입 안쪽 살을 아프게 깨물었다. 혀끝에서 비릿한 맛이 퍼져 나갔다. 이토록 건조한 남자였구나. 조슈아는 깨달았다. 이때까지의 그 달콤한 다정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어쩌면 그 모든 다정이 다 거짓이었을지도 모르지.

하나하나 저 낯선 남자에 대해 생각할수록 조슈아는 더 눈을 커다랗게 떠야 했다. 그는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가만히 웃고 있는데.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조슈아는 소리 나지 않게 목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큼큼, 하는 다 갈라진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 입술에 힘을 주며 조슈아가 말문을 열었다.

“멋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

“닥쳐요.”

순식간에 남자의 표정이 깨져 버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격렬하다 느꼈던 다정한 사랑 따위는 저 감정 하나에 빗댈 것조차 아니었다. 심장을 흔들어 놓던 손길과 오직 나만을 위한 것 같던 말들과 더없이 찬란했던 눈빛이 모두 다 색이 바랜 채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고작 빈정거리는 한마디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눈을 번뜩일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거.

“…당신 같은 사람이 좋아한다는 게 아까울 만큼.”

“그 입 닥치라고 조슈아 베넷.”

순식간에 등이 벽에 부딪혔다. 세게 부딪힌 등이 얼얼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손이 우악스레 제 어깨를 붙잡았다. 언제나 상냥하다고 느꼈던 녹갈색 눈동자가 너무 뜨거워서, 조슈아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누가 그러던가요. 내가 그에게 말했다고?”

“…한마디만 더 해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손이 제 목을 감쌌다. 등허리가 선뜩해졌다. 목울대에 닿는 손바닥이 순간 강한 힘을 주었다. 컥, 순식간에 목을 감쌌던 힘은 사라졌지만, 제 숨통을 조였던 악력은 아직도 목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슈아는 밭은 숨을 뱉고 기침을 하면서도 에이드리언의 눈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혔던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왜 몰랐을까. 이 남자, 이렇게 뜨거운 눈을 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정말, 당신. 나를 사랑한 적이 없구나.”

힘없는 중얼거림에 아주 잠시, 녹갈색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조슈아에게는 더 이상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조슈아 베넷을, 사랑한 적 없었다. 단 한 순간도.

에이드리언에게 있어서 로건 헤네스, 그는 그 자체로 빛나는 사랑이었고. 조슈아 베넷은 그를 투영하는, 인형이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놀랄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슈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고 달싹이는 에이드리언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말해 주기를 원하는 듯, 에이드리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슈아가 할 것은 말이 아니었다.

조슈아가 오른쪽 무릎을 잠시 구부린 것은 그때였다. 오른쪽 아래로 잠시 낮아졌던 무게 중심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조슈아가 오른 주먹을 단단하게 쥐고 빠르고 강하게 훅을 날렸다. 불시에 옆구리를 맞은 에이드리언이 잠시 옆으로 밀렸다. 둔탁한 통증이 퍼진 듯 에이드리언이 손으로 옆구리를 만졌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과 눈을 맞췄다. 저 예쁜 얼굴이 지독히도 좋았다. 다정한 말투도, 상냥한 손길도, 저만을 위하는 모든 행동들도. 어느 순간, 에이드리언이 부옇게 번져 보였다.

흐릿한 에이드리언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안녕.”

에이드리언이 굳은 것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하지만 조슈아는 번호 키를 눌렀다. 소리가 나지 않는 비밀번호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생일이었다. 빠른 시일 내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보조 열쇠까지 전부 다 잠근 뒤에서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매트리스로 다가갔다. 바깥옷을 벗지 않고는 매트리스에 눕지 않는다…는 철칙은 오늘 만큼은 무시하기로 했다.

조슈아 베넷은 매트리스에 누운 채 몸을 웅크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추웠다. 너무 추워서 몸이 떨렸다. 그런 상태에서 조슈아는 울기 시작했다.

세 번의 입양 기대가 무너지고, 엄마라고 불러도 된다던 봉사자들이 오지 않았을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소리 내지 않고.

어쩌면 조슈아 베넷은 소리 내서 우는 방법을 아주 잊어버렸는지도 몰랐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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