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3
지은이 : 피가
펴낸곳 : 교보문고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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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3
피가
목차
#8. 정리의 시간
#9. 모르는 사람
#10. 개와 개와 개
#11. 당신의 거짓된 다정
#8. 정리의 시간
밤은 길면서도 짧았다. 조슈아 베넷은 멍한 눈으로 핸드폰 알람을 껐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것도 여느 날의 아침처럼 평범한 시작.
제대로 겹쳐지지 않은 블라인드의 슬릿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방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누운 채 방바닥을 바라보았다. 부어서인지, 아니면 초점이 맞지 않아서인지, 흐릿한 시야 너머로 환하게 물든 바닥이 보였다. 분명 어제와 똑같은 아침이었다. 그리고 너무 다른 아침이었다.
몸에 힘을 주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자리에 앉았다. 한 번 휘청였고, 눈이 제대로 깜빡여지지 않았고, 머리가 아주 아프기는 한 것 빼고는 다 괜찮았다. 아,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것 하나만 빼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테이블과 의자를 짚고 냉장고를 열었다. 그리고 반쯤 남은 생수통을 꺼냈다. 기계적으로 입을 벌리고 물을 마셨다. 꿀렁꿀렁 찬물이 식도를 타고 빈속에 내려가는 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밤새 탈수 증세가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하긴, 있었어도 물을 마실 정신은 없었을 거다.
조슈아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 저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은 여기에도 있었다. 닉이 본다면 “어이쿠, 시체가 정말로 형님 하겠는걸?” 하고 놀려 댈 정도로 새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돌 정도로 창백한 얼굴과 누가 봐도 운 것이 티 나는 붉은 눈가와 깨물어 짓이겨지다시피 한 아랫입술과 퉁퉁 부은 얼굴.
“…많이도 울었네.”
제 입에서 나가는 목소리라고 하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조했고, 잔뜩 갈라졌으며 낮았다. 정말 낯선 얼굴을 보며 조슈아는 가장 찬물을 틀었다. 그리고 세수를 시작했다. 눈물의 짠 기운 탓인지 물이 닿을 때마다 얼굴이 쓰렸다. 세수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별생각이 다 났다. 딴생각이 나는 걸 보면 아마 괜찮은 모양이구나, 조슈아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며 샤워를 할 준비를 했다. 따끈한 물을 틀고 옷을 벗으면서 오늘 해야 할 수많은 일들 가운데에 하나를 더 끼워 넣었다. 이불 빨래. 욕실에 금세 훈기가 들어찼다.
이별한 다음 날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덤덤한 시작이었다.
…제가 한 게 이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조슈아는 잠시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려면 어때. 이미 다 끝났는데.
단정한 남색 스리피스 정장에 큐빅이 박힌 감색 넥타이와 단추형 베스트까지 갖춰 입었다. 슬랙스와 셔츠 차림이 아닌 정장을 차려 입는 건 12월에 있었던 에투왈의 크리스마스 파티와 해피 뉴이어 파티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몇 주 되었다. 조슈아는 빳빳하게 잘 다려진 셔츠의 목깃을 만지작거리다가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계속 현관이 신경 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관 너머가. 조슈아는 영화에서 봤던 몇 장면들을 생각했다. 세계적 대기업의 총수가 나오는 그런 뻔하디뻔한 영화들. 그런 영화에서 보면 이별하고 난 뒤 주인공의 집 앞에는 보디가드들이나 감시하는 비서들이 가득하던데. 어쩌면 어제 ‘그’의 옆구리에 제대로 된 훅을 먹였으니 문을 열자마자 어디론가 바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문가로 다가갔다.
문에 달린 렌즈로 조심스레 바깥을 살펴보았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답답했지만 적어도 정면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911에 전화를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하지?
“제 애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 그렌트의 총수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저를 그 사람 대신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어제 옆구리에 훅을 먹였는데 문 열기가 무섭네요. 와 주실 수 있나요?”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프로페셔널한 911 콜센터의 어떤 직원이라도 제 이야기를 듣는다면 미친놈의 장난 전화라 치부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벌금을 먹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친절하게 고지를 할지도 모른다.
제 주변에 ‘그’만큼 재력 있는 사람은 보스뿐인데. 잠시 빌을 떠올리던 조슈아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겨우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한 게 결국 보스라니. 연결고리는 다시 한번 ‘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친절하고 상냥한 제 빨간 머리 동맹군까지도.
조슈아는 흡, 한번 숨을 들이켰다. 요 근래 매일 아침을 먹었던 터라 빈속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조슈아는 애써 입가를 끌어올렸다. 앞에 누가 있든 아무런 티 안 낼 자신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여기는 조슈아 베넷의 구역이었다. 그 누가 와도 이곳은 제 홈경기가 될 것이었다. 조슈아는 다부지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것은 그저 복도뿐이었다. 말끔하게 잘 닦인 바닥과 벽. 조슈아는 현관에서 두 걸음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그 길고도 짧은 밤을 새는 동안 제 옆집이 열리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제 집 앞에서 주저하는 발자국 소리 또한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었다. 그도 아니면 하이틴 영화의 주연으로 만들어 달라는 ‘그’의 말에 너무 심취했는지도 모르지.
다리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조슈아가 현관문 손잡이를 꽉 잡았다. 입가에 쓴웃음이 올라왔다. 우습게도, 뭔가를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심장 한편이 다시 한번 푹 꺼졌다.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별일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한테, 에이드리언 그렌트한테 자신은 정말 별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로 알려 줄 만큼.
아, 정말.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밤새 충분할 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울 힘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걸 보면. 벽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뭉뚱그려지는 경계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면서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제 알량한 바람 때문인지도 몰랐다.
울음이 입 앞까지 차올랐다. 조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리광이라고는 하나도 몰랐던 스물여덟의 조슈아를 스물아홉의 어린아이처럼 만들어 놓은 개자식은 이미 사라졌지만. 그 단 몇 개월의 시간의 시간 동안 조슈아는 투정을 배웠다.
자꾸만 침을 삼키다,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삼키다, 조슈아가 웅얼거리듯 한 말은 딱 한마디였다.
“…공주도 아니면서.”
공주도 아니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의 세계로. 조슈아 베넷은 이제야 역할에 걸맞는 사람이 되었는데, 캐스팅을 잘못 했다는 통보와 함께 혼자 남겨졌다. 정말….
“…딱 질색이라고 했는데.”
아, 결국 울 거 같아서. 조슈아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혀끝에서는 두껍게 바른 립밤 맛과 더불어 피의 비릿 맛이, 그리고 아주 아픈 짠맛이 났다.
조슈아 베넷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
아침 출근을 하며 수런거리던 가십들 중 가장 크게 들려오던 주제에 코웃음을 치던 엘라는 비서실에 들어오자마자 왜 제가 가십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크게 후회해야 했다.
조슈아 베넷한테는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짓무를 것 같이 붉은 눈가, 퉁퉁 부은 얼굴과 피딱지가 잔뜩 얹어진 아랫입술은 분명 무슨 일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엘라 패티슨은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눈으로 애써 조슈아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한마디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조슈아.”
말을 하자마자 엘라는 후회했다. 하지만 마치 콩트처럼 조슈아는 ‘무슨 일이 있는 사람’의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엘라.”
잔뜩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는 평소 조슈아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이 상황 자체가 조슈아 베넷과 거리가 멀었다. 조슈아 베넷은 언제나 ‘무슨 일이 있는 사람’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강렬한 빨간 머리가 잘 어울리는 예쁜 얼굴로 매일 아침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입에 달고 살았으며 밝고 쾌활하고 다정했다.
그런 조슈아가 저런 얼굴을 하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꿈일 거야. 엘라는 잠시 제 볼을 꼬집었다. 아팠다. 그러면 이건 꿈이 아니라는 건데. 어제 반차를 쓸 정도로 몸이 안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하루 만에 이렇게 사람이 달라져서 올 수 있을까? 엘라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엘라를 혼돈에 빠뜨렸던 갈라진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차라리 물어볼래요, 엘라?”
“아, 미안, 미안해요. 조슈아.”
엘라는 말을 더듬으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제 자신에게 욕을 했다. 이런 멍청한 엘라 패티슨!! 사람을 뚫어져라 보는 똥매너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야. 차라리 이럴 때 에밀리가 있었더라면! 아니면 지미나, 그도 아니면 보스라도!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결해 주었을 텐데. 하필 있는 사람이 저뿐이라니!
엘라는 하필! 오늘 같은 날 이른 출근을 한 저 자신을 원망했고, 아직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지 않은 걸 아쉬워했다. 조슈아가 일찍 출근한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조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그 퉁퉁 부은 얼굴로.
“재밌네요.”
“네?”
순간 엘라는 제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다. 제가 한 말 중에 무슨 실수라도 있던 걸까? 아니면 제 당황한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나? 하지만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평소의 조슈아처럼.
“사과, 고마워요.”
아무도 나한테 사과하지 않는데. 조슈아는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 정말 아무 일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 * *
어두운 방, 말끔하게 닦인 통유리 창으로 햇빛이 넘실거리며 들어왔다. 불 하나 켜지 않은 방에서 소파에 몸을 파묻듯 앉아 있던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날이 새고 있었다. 옅어지던 남빛 수평선 사이로 해가 뜨며 뉴욕의 아침을 비추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었다. 밤을 새는 것은 에이드리언에게 있어서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에이드리언은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을 힐끗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까지 재검토해야 할 프로젝트가 두 개이고 사인해야 할 서류가 세 개인데 하나도 보지 못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데, 곧 마크가 들어올 걸 알면서도 에이드리언은 서류를 들어 확인하는 대신 제 오른쪽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에이드리언이 픽 입새로 바람을 빼듯 웃었다. 간신히 올라가 있는 입술 끝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맞았다. 그것도 제대로.
울 줄 알았는데. 삶이 제법 팍팍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던 그날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눈이 붉었으면서. 그러면서도 조슈아 베넷은 눈물 한 방울 내비치지 않았다. 그 대신 처음 보는 눈으로 자신을 봤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독한 말을 뱉었다. 그리고….
큭, 에이드리언은 제 심장 부근을 짓누르며 탁음을 뱉었다. 순간적으로 누군가 심장을 쥐어짠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요즘 들어 처음 겪는 통증이 진해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닥터를 불러야 하나…라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하지만 이 통증은 간헐적인 것이 아니었다. 대개, 누군가를 떠올릴 때 느껴지는 것이었다. 후우, 에이드리언은 잠시간 숨을 고르게 쉬었다.
조슈아 베넷. 에이드리언은 입 속으로 나직하게 이름을 되새겼다. 당돌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이한 빨간 머리. 로건과 하나도 닮지 않은 얼굴을 닮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에이드리언이 손으로 천천히 주먹을 쥐어 보았다. 그럴 리 없는데,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손바닥이 점점 닫히면서 이내 주먹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 손이었다. 조슈아 베넷의 얼굴만큼 커다란 손. 하이스쿨 시절 사과 정도는 손바닥에 쥔 채 한 번에 으깨 버렸다. 그런 손으로 그 가느다란 목을 쥐었다.
도대체, 왜?
에이드리언은 눈을 깜빡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평생을 이성적으로 살아왔다. 겨우 조슈아 베넷의 도발 한마디에 갑자기 누군가의 목을 조를 정도로 감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은 그랬다.
“멋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
그 한마디가 뭐라고. 그 말을 멈추게 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그 순간은 마치 날아간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에이드리언이 잠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황금색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렸다. 짙은 녹갈색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정말 당신 나를 사랑한 적 없구나.”
“아, 아니.”
다시 한번 숨이 턱 막혔다.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변명이 터져 나갈 것 같아서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그 힘없는 중얼거림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짓씹어 피딱지가 잔뜩 얹어졌던, 그 덜덜 떨리던 입술이. 창백하게 질린 새하얀 얼굴이. 그리고 잔뜩 붉어진 채 무르던 눈가와 끊어져 버린 듯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그 눈은 결국 울지 않았다. 하, 에이드리언이 낮게 한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아팠을까. 당연히.
“…아팠겠지.”
에이드리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감아도 계속 그 텅 빈 눈동자가 따라왔다. 쿵, 쿵. 심장이 불에 덴 듯 쓰렸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아팠다. 눈앞이 막막했다. 심장이 아파서인가, 아니면. 에이드리언이 설핏 웃었다. 웃는 게 우는 것 같은, 기이한 표정이었다.
* * *
조슈아 베넷이 출근을 했다.
밤새 마신 술 때문에 골이 울린 와중에도 빌은 그 한마디만 듣고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훤칠한 몸이 휘청였다. 소식을 전해 준 니콜라스가 재빠르게 빌을 부축했다. 걱정스러운 눈빛과 함께 니콜라스가 토마토 주스를 건넸지만 빌은 힘없이 손만 내저었다. 지금 무언가를 마신다면 그대로 다시 게워 낼 판이었다. 니콜라스는 한 번 더 권하는 대신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밖에서 미스터 캐스터가 대기 중입니다.”
지미가 밖에 있다는 말에 빌은 힐끗 문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깜빡여 시야의 초점을 잡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누군가에게 연신 얻어맞은 듯 머리가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움직여야 했다. 빌은 술기운이 잔뜩 묻어나는 한숨을 쉬고는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욕실을 향해 갔다. 그러다가 힘에 겨운 듯 잠시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했다.
“…지미한테 말해. 곧 출발할 준비하라고.”
빨리 출근을 해야 했다. 차마 찾아가지 못했던 지난밤, 할 말을 목 끝까지 채워 놓았다.
어젯밤, 빌 스웰딘은 초조하게 깨물었던 엄지손톱이 흉하게 찢어질 정도로 고민했다. 로건과의 약속이 미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빌은 혼자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자 차마 찾아가지 못한 게 아쉬워서, 또 속상해졌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봐야 할까.
…하지만, 그 모든 고민이 다 무색해졌다.
“너, 뭐….”
빌은 아연한 얼굴로 편집장실로 들어오는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채 퉁퉁 부은 얼굴로 조슈아 베넷이 배시시 웃었다. 붉게 짓무른 눈가가 휘어지다 아, 신음이 흘러나왔다. 피딱지가 얹은 입술 끄트머리가 찢어진 듯 피가 배어 나왔다. 조슈아는 오른손으로 입술 끄트머리를 닦았다. 빌은 서둘러 움직여 티슈라도 뽑아 주고 싶었지만 아직도 짙게 퍼진 술기운 탓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조슈아는 조금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빌은, 기가 찼다.
“조금 부었죠? 안 부을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선글라스라도 끼고 올 걸 그랬어요.”
덤덤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 지하까지 가라앉은 듯 잠긴 목소리가 목을 긁으면서 나오는 터라 조슈아가 큼큼, 헛기침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빌은 잠시 숨을 참았다. 심장 한편이 욱신거려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선글라스로 가려지겠어?”
“그런가요?”
조슈아는 덤덤하게 말하며 잠시 한 손으로 제 목 부분을 짚더니 다시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여상스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빌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슈아 쪽으로 가다 한 번 휘청였다. 보스, 조슈아가 놀란 듯 가볍게 빌을 부축했다.
이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적당히 마실걸. 빌은 잠시 후회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빌은 조금 떨리는 손을 들어 조슈아의 목깃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조슈아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이번에는 빌이 조금 더 빨랐다. 빌이 조슈아의 셔츠 첫 단추를 풀었다.
“…목에 이건….”
뭐야. 빌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했다. 언뜻 본 시야에 걸린,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지나칠 정도로 아주 옅은 붉은 자국에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 빌은 세차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커다란 손바닥의, 엄지부터 중지까지 힘주어 누르면 저 정도의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딱 제 손바닥 사이즈만 했다. 그렇게 커다란 손바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그 개새끼가!”
빌은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 으르렁거렸다. 금세 짙어진 살기에 조슈아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푸스스 웃었다. 그 모습이 더 마음이 아파서, 빌은 조슈아를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화를 내고 싶은데, 화를 낼 형편이 안 되었다.
“안 그래도, 제가 한 방 먹였어요. 훅으로. 엄청 세게.”
그러고 보니 복싱을 했었다고 했다. 예쁘장한 얼굴과는 하나도 안 어울리게도. 대학 때는 뉴욕 시에서 제법 했다고 했는데. 파파라치 두서넛의 팔은 단번에 꺾을 정도니 실력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렌트, 그 개새끼였다. 한순간은 정말 로건 헤네스가 아닌 조슈아 베넷을 보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개새끼 본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어디 손 댈 것이 없어서 저 가느다란 목에! 잠시 조슈아의 상태를 더 살피던 빌이 움찔했다.
옅은 손자국 아래, 단추가 여며진 셔츠 사이로 아주 조금 붉은 울혈이 보였다. 그 울혈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빌 스웰딘이 아니었다. 새하얀 가슴팍에 자국처럼 새겨진 울혈이 이 상황과는 너무 동떨어져서, 그리고 너무. 빌이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는 이제 되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단추를 채웠다.
순식간에 파들거리며 화를 참지 못하던 빌은 가만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어젯밤 그 수많은 말들이 빌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빌은 저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그 말이 무엇이든, 빌은 다 들어주고 싶었다. 산 채로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살가죽을 벗겨 오라고 하거나, 이 일을 대가로 에투왈을 넘겨 달라고 해도. 빈약한 상상력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았다. 빌이 천천히 조바심을 내던 찰나였다.
“보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게 무슨….”
술로 인해 마비된 것 같은 머리가 팽 돌았다. 그리고 그 말이 이해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니다, 아닐 거야. 빌은 힘없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엷게 웃었다.
“저, 이제.”
“…하지 마.”
아닌 걸 알면서도, 빌은 조슈아의 말을 잘랐다.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 빌은 처음으로 간절해졌다. 제발, 제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애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만두려고 합니다.”
빌은 고개를 젓다가 뺨을 한 번 꼬집어 보았다. 아픈 걸 보면 현실인데. 이렇게 웃는 조슈아 베넷은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었다.
제 입에서 나간 말에 온점을 찍듯,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마치 처음 출근할 때처럼 옷을 갖춰 입고, 인사과에 들러서 잠시 퇴사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보스가 출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편집장실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막연함과 달리 현실이 확 와닿는 기분이 낯설었다. 조슈아는 잠시 빌을 바라보았다. 제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빌은 고개를 젓다가 뺨을 한 번 꼬집었다.
“제가 꼬집어 드릴까요?”
조슈아는 넌지시 말하며 오른손 검지와 엄지를 두 번 맞부딪혔다. 제 손가락이 철이었으면 캉캉, 날카로운 집게가 부딪히듯 소리가 났을 텐데 말랑한 살이라 그런지 손가락 끄트머리에 잠시 닿는 느낌만 났다.
됐다고, 질색하듯 미간을 찌푸려야 할 빌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이상한 표정. 잠시 멈칫한 조슈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더 이상 생각 안 하기로 했으면 지켜야지. 고작 두 단어에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그러는 사이 빌이 낮게 중얼거렸다.
“…한번 꼬집어 줄래?”
“네?”
오히려 조슈아가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지막하게 나온 말은 도무지 빌 스웰딘답지 않게 연약하고 가냘파서, 조슈아는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제 보스인지 아주 조금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의심은 접었다. 세상에 갈색 머리카락과 진회색 눈을 가진 남자는 아주 많겠지만, 이토록 잘생긴 남자는 딱 빌 스웰딘밖에 없을 테니까.
“정…말요? 꼬집고 나서 화내는 거 아니죠?”
조슈아는 부러 밝은 척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빌의 시선을 피했다. 이상했다. 정말로. 언제나 날카롭게 뻗쳤던 눈매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살짝 아래로 내려갔고 진회색 눈동자는 처연하게 풀이 죽어 있었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소식을 들은 것처럼. 빌이 입술을 달싹이며 천천히 조슈아와 눈을 맞췄다. 도무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쩐지, 이번에는 피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진회색 눈동자가 언뜻 기대를 품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러다 서서히, 아주 조금씩 그 빛이 꺼지기 시작했다. 기대가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조슈아는 안타까워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 순간 잠시, 저도 저런 눈을 했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 한편이 다시 아릿해져서 조슈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눈에 힘을 빳빳하게 주었다. 빌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거짓말 아니에요. 정말….”
정말, 조슈아는 잠시 침을 삼켰다.
진심으로, ‘정말’이라는 단어를 쓸 만큼 확신에 차 있는 걸까?
‘에투왈’은 제 첫 직장이었다. 보육원을 나와 대학생활을 하면서 꿈꿨던 자립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 직장. 물론 처음부터 비서를 할 생각으로 지원한 건 아니었다.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처음에는 기사를 쓰거나 교정 및 교열을 담당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면접을 보고 나온 뒤, 우연히 복도를 걷다 만난 카리스마 넘치던 에밀리에게 비서직을 제안 받으면서 달라졌다. 물론 그때도 스튜디오 보증금 대출과 금기 1.6%에 혹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가끔 맥주를 마시며 “힘들어.” 하고 투정 부린 날은 많지만 사실 즐거운 날이 더 많았다.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불러 달라며 도와 달라고 하는 것도 좋았고, 비서실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팀 사람들과도 다 함께 우르르 몰려가 피자를 먹으며 함께 불평하는 것도 즐거웠다. 에밀리가 시키는 작업 후에 작은 칭찬을 듣는 것도, 지미와 함께 운전 연수를 하는 것도, 엘라의 새로 사귄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전부.
요일별 애인을 만들고 고압적인 태도로 굴던 보스가 달라지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사람 간담 서늘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눈매에 한마디 못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뺨까지 꼬집어 보라 내줄 만큼, 확연히 달라진 거리감을 느낄 때마다 기뻤다. 정말, 정말.
하지만.
조슈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편안하게 웃었다.
“그만두고 싶어요. 아, 물론 보스가 사표 수리를 해 주셔야 하지만요.”
“…왜 갑자기. 로건과, 닮았다고 해서, 그래서 그러는 거야?”
빌의 목소리가 차츰 작아졌다. 끝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흐릿한 끝맺음에 조슈아는 잠시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볼썽사납게 파르르 떨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슈아는 웃었다.
“음, 처음에는 조금, 아주 조금 서운하기는 했는데.”
거짓말이었다. 사실 아주 많이 서운했다. 꼬박 4년을 봤는데, 처음 시작이 제가 아닌, 조슈아 베넷이 아닌 로건 헤네스로부터 시작됐다는 건 아주, 아주…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하다 결국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속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런 말을 한다면, 빌 스웰딘은 더 이상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조슈아는 애써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보면 이 경제 불황에 누군가와 닮았다고 취업하는 건 행운이잖아요. 아, 그러고 보면 에밀리도 내가, 로건이랑 닮았다고 생각한 건가?”
그건 생각 안 했는데. 그렇다면 저는 조금 더 많이, 섭섭해질 텐데.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조슈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빌은 잠시 알 수 없는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세상을 발아래에 둔 듯 오만하게 빛나던 진회색 눈은 오늘따라 너무 연약하게 속을 다 내비치는 것만 같았다. 꼭 빌이 상처 받은 표정을 지어서, 조슈아는 참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사촌, 로건 헤네스를 보호하기 위해. 가족의 정이 너무 큰 나머지 ‘그’에 대해 다 알면서, 어쩌면 정말 다 알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으면서. 왜 빌은 아픈 표정으로 있는 걸까?
정작 조슈아는 티 하나 내지 않는데.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깨질 듯한 표정 아래, 지쳐 버린 속내가 아주 잠시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냥, 조금 쉬고 싶어요. 그래서 그래요.”
아무래도 좋았다. 조슈아 베넷한테는 쉴 시간이 필요했다. 가만히 따듯한 이불 속에 파묻혀서 시계 초침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몽롱한 기분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그러다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울음에 먹먹해질 정도로 울 수 있는 여유가. 짓무른 눈으로 거울을 보다 ‘참, 내가 왜 이럴까?’라고 성찰할 기운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조슈아 자신이. 너무너무 필요했다.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찢어진 입술이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빌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티슈 한 장을 건넸다. 그 티슈를 받고서 조슈아가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실업수당은 받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제 개인 사유로 퇴사하는 거니까. 그건 안 바라요. 대신 퇴직금은 좀 기대할 건데.”
“…사표 수리 안 해 줄 거야.”
“농담이시죠?”
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바닥만 응시할 뿐이었다. 조슈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제 용건은 다 끝났다. 조슈아가 잠시 편집장실 문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저한테 더 할 말 있으세요?”
그제야 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진회색 눈동자가 온전히 조슈아를 담았다. 그 순간, 조슈아는 아주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진회색 눈동자가 어떠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편집장실이 쨍하고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침 삼키는 소리마저도 커다랗게 들릴 것 같던 때였다.
빌이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조슈아는 제 마음 속에 풍선처럼 부풀었던 무언가가 푸시시 꺼져 버린 것을 느꼈다.
후에 생각해 보니, 그건 기대였다. 하지만 조슈아 베넷은 유능한 세컨드 비서였고 표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 있으면 부르세요.”
아주 조금, 마주친 진회색 눈동자가 간절하게 저를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빌의 입술은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을 때, 빌은 몸을 돌렸다. 조슈아는 제 착각이겠거니, 하며 편집장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편집장실에서 빌은 잠시 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탁,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은 굳건했고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빌은 침을 삼켰다. 굳은 듯 가만히 있던 혀가 이제야 톡톡, 입술 사이로 무슨 말이든 내밀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빌이 다시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에 보았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 빌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말했어야 했는데.
“보스도, 내가 로건과 닮아서, 좋았어요?”
“…그래.”
어쩔 줄 모르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 얼굴을 보고 말했어야 했는데.
“혹시, 저한테 더 할 말 있으세요?”
조금 전, 기다리는 듯 침착하게 죽어 있던 그 눈을 보고 말했어야 했는데.
빌이 작게 입을 벌렸다.
“…처음에만, 처음에만 그랬어.”
잔뜩 잠긴 목소리가 이제야 튀어나왔다. 말했어야 했는데. 한발 늦어 버린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는데. 사실 정말 처음에만 그랬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머리가 울렸다. 동시에 빌은 가만히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정말 우습게도, 나와야 할 때를 가리지 못하고 터져 나온 제 진심이 몸속에 있는 용기를 다 앗아간 기분이었다.
사실은, 이야기를 해도. 그 끊어진 듯 아픈 눈동자가 저를 믿지 않을까 그게 너무 두려워서 말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빌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사표를 낸다고 한 날부터 보스는 출근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그리고 나흘이 되는 오늘까지. 조슈아는 가끔 편집장실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가끔 에밀리가 들어가 서류를 가지고 나올 뿐이었다.
조슈아는 한숨에 아쉬움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십여 명은 거뜬히 둘러앉을 수 있는 커다란 회의실 안, 에밀리는 잠시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뭐, 퇴사 수순이잖아. 이런 면담은. 원래는 부서장이 하는 거지만.”
에밀리는 뒷말을 삼켰다. 조슈아는 가만히 웃었다. 입술 위로 우둘투둘했던 피딱지들이 점차 가라앉았는지 이제는 웃는다고 해서 다시 터지는 일은 없었다. 얼굴의 붓기도 이제는 없었던 것처럼 빠졌다.
“보스야 워낙 바쁘시니까요.”
조슈아는 섭섭함을 토로하는 대신 애매하게 둘러말했다. 에밀리는 껄끄러움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퇴사 관련 서류 몇 가지를 내밀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안 쓰고 모은 연차가 11일 남았더라고. 내일부터는 휴가로 처리될 거야. 그러면 다다음주 화요일이 퇴사 날이네.”
11일. 조슈아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딱히 모으려고 모은 연차는 아니었다. 그냥, 일이 바쁘고 갑작스러운 보스 일정 변동에 쓰지 못한 거지.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었다. 소문이 빠른 회사인 만큼 제 얼굴에 대한 이야기가 에투왈의 전 층을 돌았다. 무슨 일 있냐고 호기심과 걱정 어린 얼굴로 물어 대는 사람들한테 그냥 뭐, 하며 말을 흐리는 것도 질렸다.
인수인계가 없는 것도 다행이었다. 이제 앞으로 제가 담당했던 일들은 엘라와 지미가 나누어 맡기로 했다. 그나마 여자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거나 선물을 구매하는 사소하지만 중요했던 일이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휴가 때는 뭘 할까? 잠깐이나마 장밋빛 상상을 펼치려 할 때였다. 에밀리가 보증금 대출 제도가 적힌 공문을 내밀었다.
“보증금 대출은 원래 퇴사 전 반납인데. 특별히 그 주 금요일까지 끝내.”
“정말 칼 같네요.”
너무하다며 조슈아가 과장되게 눈꼬리를 내렸다. 이 뉴욕에서 보증금 대출 금리 1.6%인 회사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 훌륭한 회사를 나온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나서 조슈아는 잠시 혀를 내둘렀다. 뉴욕 대부분의 스튜디오가 그러하듯 조슈아도 월세살이였다. 보증금이 높지는 않았지만 부담되지 않을 정도도 아니었다. 조슈아는 머릿속으로 제 잔고들을 떠올렸다. 다행히 보증금을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정도로 모으긴 했다.
그러는 사이 에밀리는 조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렬한 빨강 머리와 덜 자란 소년처럼 해사하고 예쁜 얼굴의 조슈아 베넷. 에밀리는 4년 전의 조슈아를 떠올리다 크리스마스 파티와 해피 뉴 이어 파티 때 봤던 조슈아를 떠올렸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하게 웃던 조슈아.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품에 안은 듯 솔직하고 밝은 조슈아.
그리고 지금은….
에밀리는 붉게 짓무른 눈가를 바라보았다. 물기 하나 없이 마른 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밀리는 더 이상 조슈아를 바라보지 못했다. 대신 서류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빨리 보증금 빼고.”
여기서 떠나. 그래서, 더 편안해지는 곳으로 가. 묵음처럼 삼킨 말은 당연하게도 조슈아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에밀리는 파르르 속눈썹을 떨다가 이제야 기억난 것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사표 수리는 안 되었어. 넌 해고야.”
보스의 명령이었다. 오늘 아침, 잔뜩 흐트러진 목소리로 들려온 명령. 에밀리는 아주 잠시 조슈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그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가 흐드러지는 것처럼 웃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회의실을 나서며 에밀리가 한마디 했다. 복도에 서서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에이, 에밀리. 정말 지금이 마지막인 거 같잖아요. 오늘 퇴사 파티도 있는데. 무려 파파스 피자에서!”
조슈아가 기억 안 나냐며 농담을 했다. 제 퇴사 소식을 듣자마자 농담이라고,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라고 연신 이야기를 하던 엘라가 결국 울먹이며 오늘 퇴사 파티를 하자고 이야기했었다. 참석자는 비서실 사람들과 미셸 그리고 닉이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에투왈 주주총회 회식이 오늘로 당겨졌거든.”
“아….”
조슈아가 아쉬운 마음에 침음을 흘렸다. 처음 만난 사수, 에투왈의 전설 같은 에밀리가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주주총회 회식에 에밀리가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요.”
“일하는 자리인데 뭘. 그리고.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밀리는 척 보기에도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프랭클린 바인더를 내밀었다. 검은색 가죽으로 된 표지를 보며 조슈아가 이게 뭐냐는 얼굴로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에밀리는 대답 대신 바인더를 조금 더 앞으로 내밀며 받으라는 듯 채근했다. 얼결에 바인더를 받은 조슈아가 물었다.
“열어 봐도 돼요?”
“당연하지. 선물이라니까.”
조슈아는 바인더를 열어 보았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바인더 속에는 빽빽하게 쓰인 추천서와 타 회사들의 구인 구직 자료들이 가득했다. 에밀리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추천서. 그리고 왼쪽에 꽂혀 있는 거는 나한테 연락 온 헌팅 회사들이랑 추천 받은 거. 제법 괜찮은 회사들일 거야.”
실은 다 뒤졌다. 가장 괜찮아 보이고 경력을 받아 주는 곳들로. 물론 보증금 대출도 되는 곳으로. 에밀리는 입꼬리를 올려 씁쓸하게 웃었다.
이 복도에서 닉에게 충고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무래도 저도 진짜 마녀는 못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조슈아 베넷한테 누가 마녀일 수 있을까. 햇살처럼 밝고 다정한 사람한테.
조슈아가 웃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조슈아 베넷은 평소처럼 환하게 웃지 않았다. 그 간극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에밀리는 잠시 숨을 참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꾹 눌렀다. 어쩐지 너무 아파서. 정밀 검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뒤늦게야 에밀리는 제 스스로에게 먹히지도 않을 변명을 했다.
* * *
“흐어엉, 조슈아. 가지 마요.”
“엘라. 많이 취했어. 응?”
지미가 요령 좋게 엘라의 입 앞에 물이 담긴 커다란 맥주잔을 가져다 대었다. 완벽한 방수를 보여 준다고 자랑하던 아이라이너는 정말 하나도 번지지 않았다. 대신 마스카라가 번져서 문제였지. 조슈아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예전처럼 입술을 깨물지는 않았다. 이제 새로 정한 규칙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제 입술을 깨물지 않는다.’
조슈아는 잠시 옆을 둘러보았다. 술에 불콰하게 취한 닉은 피자에 핫 소스를 쭉 뿌리고 있었고, 한참이나 다시 일하자고 열의에 불타 연설을 하던 엘라는 꿀꺽꿀꺽 물 한 잔을 다 마셨다. 미셸은 조금 전 아이 때문에 먼저 집에 갔으니 정신이 멀쩡한 지미만 제일 고생이었다.
“안 되겠는데요. 오늘은 이만 갈까요?”
“벌써?”
지미는 아쉬운 얼굴을 하다가 엘라와 닉을 바라보았다. 파티가 시작한 지 두 시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파하자는 말이 아쉬울 만도 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성급하게 마신 닉이며 엘라 때문이라도 자리를 접을 때가 되긴 한 것 같았다. 지미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제 잔을 들어 올렸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잔을 올렸다. 쨍- 가볍게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조슈아가 잔에 든 맥주를 마셨다. 오늘따라 목 넘김이 좋았다.
“그래. 날이 오늘만은 아니잖아. 그렇지?”
지미가 어설프게 눈을 찡긋거렸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투왈은 나가지만 여기서 만난 인연은 앞으로도 계속 갔으면 좋겠다고, 조슈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지미가 조슈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지미. 짐 캐스터.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초콜릿을 잔뜩 사 준 지미. 조슈아는 천천히 엘라를, 닉을 바라보았다. 정말 잊지 못할 인연들이었다. 닉이 붉어진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금붕어 같다고 생각하며 조슈아는 귀를 기울였지만, 닉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결국 테이블 위로 쿵, 엎드렸다. 지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아쉽지만, 진짜 가야겠는데?”
“그러면 지미. 나가서 택시 좀 잡아 줄래요?”
“그럴게. 잠깐만.”
대답을 한 지미가 테이블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찾았다. 조슈아는 날름 테이블에 있던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한발 늦은 지미가 얼른 조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계산서를 넘기는 대신 배시시 웃었다.
“제 퇴사 파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퇴장해 주실래요?”
웃으며 고집 부리는 조슈아를 당해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미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다시 내미는 대신 잘 먹었다고,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며 엘라와 닉을 부축했다. 오늘따라 바쁜 파파스 피자 안을 둘러보며 조슈아가 계산대 쪽으로 갔다. 정신없이 주문을 받던 르네가 얼른 계산대 쪽으로 다가와 조슈아의 계산을 도왔다. 그러며 궁금하다는 듯 한마디 물었다.
“조슈아 어디 가요?”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르네의 눈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해고되었거든요.”
“어머, 음. 축하해도 되는 거죠?”
곤란한 듯 르네가 우물거렸다. 괜히 캐물었나, 하는 후회 어린 표정에 조슈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죠. 드디어 보스 흉 안 봐도 되게 생겼는데.”
“그건 다행이네요.”
르네가 배시시 웃으며 영수증을 뽑았다. 그리고 카드와 함께 조슈아에게 건네던 참이었다. 당연스레 카드를 받으려던 조슈아의 손에 카드가 닫기 바로 전, 르네가 손을 뒤로 빼더니 앙큼하게 웃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아, 그때 그 엄청 잘생긴 남자 있잖아요! 조슈아랑 같이 왔었던!”
아. 이래서 내가 파파스 피자 안 오려고 한 건데. 술을 마셔서인지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었다. 조슈아는 굳어지는 표정에 애써 힘을 주었다. 르네는 바뀌는 조슈아의 표정도 보지 못하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나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봤는데. 아무튼 그 사람 애인 있어요?”
“…몰라요.”
조슈아가 침을 삼켰다. 맥주를 마셔서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어쩌면 피곤해서인지도 모른다. 르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에이, 모를 리가. 그렇게 잘….”
“정말,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르네의 말허리를 자르고 조슈아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조금 전과 달리 너무 건조하고, 너무 아파서.
르네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상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조슈아 베넷인데. 사람 좋고 가끔 취한 사람을 요령 좋게 달래 주기도 하며, 꼭 제게 팁을 주는, 그 조슈아 베넷인데. 어쩐지 다른 사람 같아서. 르네는 황급히 저 멀리에 있는 TV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란 것처럼 한마디 했다.
“아, 음. 세상에! 니콜라스 오브라이언이 사망했대요! 교통사고로!”
스크린에서 종횡무진하는 톱스타의 사망 소식에 이미 파파스 피자에 수런거림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정작 조슈아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정말 안타깝네요.”
“그러니까요. 아무튼, 나중에 또 와요!”
조슈아가 작게 묵례를 했다. 그리고 가게를 나섰다. 딸랑, 작은 종이 울리고 르네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뉴스에서는 사망 사고에 대한 기자의 브리핑이 흘러나왔다.
「이번 사고로 사망한 니콜라스 오브라이언 씨에 대해 사후 조사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NYPD 측은 보닛에서 연기가 났다는 주변인들의 인터뷰에 집중하여 차량 조사에 착수한다고 합니다. 한편, 니콜라스 오브라이언 씨가 출연을 확정 지었던 영화 <어제의 당신에게>는 앞날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조슈아는 멀어져 가는 택시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닉과 엘라를 차례대로 돌려보낸 뒤, 마지막으로 택시에 올랐던 지미가 뒤쪽 유리를 통해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조슈아는 차가 우회전을 해서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팔을 들었다. 그리고 깍지를 낀 채 스트레칭을 했다. 으, 제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람이 찼다. 1월의 한복판에서, 조슈아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빌딩들과 이제 막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사람들, 슈트를 입은 채 함께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사람들, 편한 옷을 입고 크게 웃으며 주말을 맞이하는 사람들까지. 4년간 지겹게 봐 왔고, 앞으로는 더 이상 보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리울까…라고 물으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무척이나 그리울 것이다.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칼같이 에투왈 정문을 나오던 날들이. 새로운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며 한번 맛보러 가자며 불시 회식을 시작하는 것도, 이 회사원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섞인 채로 회사와 보스에 대해 불평을 하다가도 “그래도 우리 보스가 그나마 낫지.” 하며 은근히 그를 추켜세우던 것도. 전부 다.
이제, 에투왈은 끝났다.
“정말, 좆 같았어.”
조슈아는 툭 내뱉고는 피식 웃었다. 어색하게 제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이 낯설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욕 하나 제대로 내뱉지 못했던 터에 쌓여 있던, 해묵은 답답함이 아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좆 같았지, 정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슈아는 가만히 빌딩들 사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아도 떠오를 만큼 익숙한 에투왈을 발견했다. 불이 켜진 채 쉬지 않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건물에서 이제 제 기록은 사라질 것이었다. 가만히 제 남은 휴가 일수를 따져 보던 조슈아는 어딘가에 있을 보스를 떠올리기도 했다. 갈색 머리카락에 진회색 눈동자를 한, 좆 같았지만
정들었던 빌 스웰딘.
가슴 저 아래부터 올라온 가쁜 숨이 공중으로 흩어지고, 조슈아는 드디어 걸음을 떼었다. 무겁고, 이상할 것만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평소와 같았다. 4년을 함께한 회사와의 작별은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았다.
타코 가게와 수제 버거 가게. 나란히 줄지어 있는 레스토랑들을 따라 걷다가 조슈아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어야지, 생각하기도 전에 걸음이 아이스크림 가게 앞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물끄러미 아이스크림 통을 바라보다 주문했다.
“초콜릿 맛으로 2단이요.”
점원은 익숙하다는 듯 스쿱을 들더니 숙련된 솜씨로 아이스크림을 펐다. 2단이 아닌 3단으로. 그런 뒤 점원은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조슈아는 계산을 하며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걸음을 옮기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진한 고동색의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혀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녹았다. 혀에 남은 맛이 지독히도 달았다. 진저리를 칠 정도로 달아서, 조슈아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걸어 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까이에 있는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을 버렸다. 철퍽, 하고 동그란 스쿱 모양의 아이스크림이 처참하게 뭉개졌다. 조용히 아이스크림의 흔적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천천히 입술에 침을 발랐다.
휴가 기간 내에 할 일이 많았다.
에밀리가 추천해 준 회사를 확인해 봐야 했고, 보증금을 반환하기 위해 은행도 가야 했다. 미뤄 뒀던 청소도 해야 했고, 어쩌면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리도 해야 한다. 물건들이며, 감정이며 전부 싹 다.
조슈아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우습게도 아직도 혀끝에는 단맛이 남아 있었다. 진하고 부드러운 초콜릿 맛.
이제 단 건 정말 딱 질색이었다.
* * *
마크는 메간이 가져온 속보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미디어 콘텐츠와 영화, 음악과 콘서트뿐 아니라 그림이나 사진 등 문화 예술 전반에 대해 담당하고 있는 비서실 소속 메간 트레이너는 심각한 얼굴로 마크가 들고 있는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미스터 맥카디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자택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 영화감독 앤드류 맥카디가 살고 있는 집은 철통 보안으로 유명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따질 게 되지 않았다.
영화 제작 중 주연 배우가 사망하다니.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훅 다가올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도 보스가 직접 나서서 영화화를 주도한 작품이면 더더욱.
마크는 그 모든 일정에 동행하면서 보스가 얼마나 이 작품에 공을 들였는지 봐 왔다. 베스트셀러 <어제의 당신에게> 원작자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게일 피츠버그는 이미 다섯 개가 넘는 작품을 성공리에 영화화했다. <어제의 당신에게>를 영화화하기로 계약하기 전, 게일 피츠버그는 하나의 조건을 더 달았다. 바로 앤드류 맥카디가 메가폰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앤드류 맥카디가 은퇴식을 하며 영화판을 떠난 건 전 세계의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러하듯 앤드류 맥카디도 괴짜의 축에 들었다. 거기에 조금 괴팍하기까지 했다.
그런 상대를 설득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보스는 해냈었다.
“계약서 가져와요.”
무엇을 했는지 마크는 모른다. 그저 보스가 지시한 대로 문 앞에서 대기했을 뿐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앤드류 맥카디는 계약 조항에 하나만 더 적었다.
“남자 주연 배우는 무조건 니콜라스 오브라이언으로 갈 거예요. 그게 안 된다면 사인은 할 수 없어요.”
그 말에 보스가 짙게 웃었던 것도 기억난다. 메간이 이번 영화화를 위해 만든 41번째 최종 브리핑 요약집의 가상 캐스팅 중 1순위가 니콜라스 오브라이언이었으니까 말이다.
마크는 잠시 입술에 침을 바르다 두꺼운 원목 문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있는 보스도 이 사실을 인지하셨을 텐데.
“그래서요?”
마크는 잠시 보스의 얼굴을 훑었다. 아주 조금 피곤한 기색이 있었지만, 이내 마크가 눈을 깜짝하는 새에 사라졌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평소처럼 입가만 살짝 올린 채 마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크는 잠시 태블릿 PC를 가리켰다.
“주연인 니콜라스 오브라이언 사망으로 인해 영화화가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힘들어질 수도.’ 그럴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마크는 그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1. 앤드류 맥카디가 다른 영화배우를 뽑는다.
이건 실행력 0%였다. 앤드류 맥카디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세 번째 대박 작품인 <행 온 더 맨>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앤드류는 주연 배우로 케일리 단을 뽑았다. 하지만 그녀는 불규칙한 다이어트로 인해 섭식 장애를 앓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가 새로운 배우를 뽑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모두 틀렸다. 앤드류 맥카디는 영화 촬영을 중지했다. 그리고 케일리 단이 영화에 필요한 이유에 대해 제작사를 돌며 브리핑을 했다. 결국 영화는 3년 간 중지되었고, 케일리 단은 앤드류의 설득에 따라 영화에 출연했다. 그리고 결과는 뭐, 대박이었다.
다른 방법도 있긴 있었다. 2. 그냥 가서 앤드류 맥카디를 설득한다.
하지만, 이건….
마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마크 웹디즈드는 유능한 재원이었고 동시에 탁월한 언변술사였다. 하지만 그런 마크의 설득에도 앤드류 맥카디는 그저 귀를 막고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소리를 질렀다. 마크는 정말로 제 보스가 어떤 방법으로 그를 설득했는지 알고 싶었다.
보스가 나선다면 이것은 60% 정도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미스터 맥카디는 다른 배우는 뽑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메간이 저택에 도착했으나 만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영화 제작을 보류하시는 건 어떨까 합니다.”
“영화 제작은 진행입니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말했다. 마크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분 당 몇 억만 달러가 나올지, 혹은 그 이상이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있어 문화 예술 분야는 잠시 머리를 식히고 감상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영화에 대해서 제작을 다시 이야기하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당황한 마크가 다음 발을 찾는 사이,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입술 끝만 올려 웃었다.
“<어제의 당신에게>를 영화화하세요.”
세상을 발아래에 둔 듯 오만하고 단적인 명령이었다. 누군가 제 오금을 저리게 하는 것처럼 마크는 몸을 숙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왜 이 영화를 고집하는지 물어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간결한 대답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신호를 본 마크가 가벼운 묵례와 함께 문을 나섰다. 탁, 다시 문이 닫혔을 때 에이드리언은 제가 낯설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그 누구보다 트렌드를 읽어 나가는 속도가 빨랐고 앞서 내다보는 시선이 탁월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문화 산업은 하나의 여흥거리였다.
<어제의 당신에게>는 분명 수작이었다. 굳이 그렌트 배급사에서 투자를 하지 않아도 영화화를 하겠다는 회사들이 줄지어 돈다발을 들고 원작자에게 엎드려 계약서를 내밀 정도로. 하지만 굳이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시간을 빼앗으면서까지 만들 정도의 영화는 아니었다.
심지어 이미 에이드리언은 제작 단계에서 한 번 영화를 엎은 적이 있었다. 반쯤 촬영한 상태에서 주연 배우가 마약 스캔들로 이미지를 버렸었다. 그때 에이드리언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를 다른 배급사에 팔아 버렸다. 귀찮지 않게. 걸리적거리지 않게. 그 영화의 성공 가도는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잠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사용하지 않아 검은색 화면 보호기가 떠 있었다. 검은 화면에 제 모습이 그대로 비춰졌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 이상하다. 다를 것은 하나도 없는데 여상하게도 제가 어색했다.
대체 뭐 때문일까. 에이드리언은 잠시 조금 전을 곱씹었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어제의 내일에게>를 영화화하라는 제 지시.
우습지도 않은 일이었다. 지난번 만났던 감독이나 원작 작가나 둘 다 한 고집했다. 마지막 보루라며 들이밀었던 제안이 바로 남자 주인공이었는데, 그 배우가 사망한 것을 인지했다면 이 영화는 태풍 몰아치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다니는 돛단배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 영화화하라니.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잠시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베트남에 있는 디스플레이 지사에 새로운 공장을 추가하는 사업과 호텔 수주 관련한 입찰, 펴 둔 프로젝트 제안서만 두 개였다. 아직 파일을 열지 않은 프로젝트들이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고.
에이드리언은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오늘 내내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뻐근했다. 이쯤 되면, 분명. 에이드리언은 퍼뜩 제 생각의 흐름을 읽고 잠시 얼어붙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정말 ‘그’일리가 없는데.
검은 화면 속 자신은 얼이 빠진 얼굴로 스스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닥터를 불러야겠어.”
에이드리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내 직통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한 번의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 마크 웹디즈드입니다, 보스.
해야 될 말은 하나였다. 빠르게 닥터를 불러 달라고. 하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조슈아 베넷 관해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죠?”
뒤이어 전화 너머에서 마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 * *
다행히도 속이 쓰리거나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밤바람을 맞으며 걸은 시간이 길어서인지도 모른다. 지하철을 열한 정거장, 걸어서 20분 거리였던 에투왈에서 한 시간이 넘게 걷다가 버스를 탔다. 집까지 오는 길은 익숙했고, 이제는 낯설어질 예정이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손끝으로 창문을 더듬었다. 마치 창문으로 비춰지는 풍경들을 어루만지듯 말이다.
버스에서 내린 뒤 조슈아는 스튜디오로 걸어갔다. 그리고 스튜디오 앞에 서서 물끄러미 5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깨끗해졌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가 어쩐지 공허한 것 같아서 조슈아가 입을 다물려다 피식 웃었다.
이건 공허해도 괜찮다. 4년이나 산 집에서 나가는 건데 어떻게 안 허전하겠어. 한눈에 보이는 작은 스튜디오. 조슈아 베넷의 4년이 가득 차 있는, 사람 많은 스튜디오를 곧 떠나야 하는데.
이제 조금 더 섭섭해질 예정이었다. 집 안에 있는 물건들 중 상당 부분을 버리고, 또 바꿔야 했으니까.
띠띠띠띠띠띠- 조슈아는 커버를 올리고 비밀번호를 치다 웃었다. 너무 익숙해서, 손가락이 먼저 움직일 정도로 친숙한 번호. 그 예쁜 얼굴이 제게도 선물을 달라고 했던 말을, 조슈아는 아주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러니까 그건 한 달 전쯤이었다. 매일 사 주는 선물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제게 그가 아주 달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나도 선물 하나 해 줘요.”
“선물요? 말만 해요! 어떤 거 갖고 싶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반갑게 대답했는지도 기억난다. 해주고 싶은 게 많았다. 한창 겨울이었으니까 제 머리카락 색과 같은 새빨간 머플러를 사 주고 싶었다. 새하얗고 말랑해 보이는 다정한 얼굴과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포근한 니트도 사 주고 싶었고 예쁜 코트도 입히고 싶었다. 손가락이 길고 예쁘니 반지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너무 앞서나가니 부끄러웠다.
잠시 생각만 해도 해주고 싶은 게 수천 가지였다.
그냥 뭐든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녹을 듯 다정하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
“집 비밀번호, 바꿔 줘요.”
“내 집 비밀번호요?”
갑작스레 나온 황당한 말에 조슈아가 벙벙한 얼굴로 제 집 문과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흐드러지는 꽃처럼 화사한 얼굴이 빙그레 웃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조슈아는 천천히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렸다.
“내 생일이 언제였더라?”
눈만 깜빡이며 앙큼하게 웃는 그 얼굴에 홀딱 넘어갔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약속했었다. 제가 먼저. 집 비밀번호를 그의 생일로 바꾸겠다고. 그 말을 하자마자 사르르 웃는 얼굴이 또 예뻐서. 그렇게 좋았는데.
조슈아는 가만히 커버를 매만졌다. 그 생년월일을 지우고 새로운 8자리 번호로 바꾸는 데까지 3분이나 걸렸다. 비밀번호가 바뀌었다고 알리듯 커버 가장자리 선이 반짝반짝하게 빛이 났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 개자식의 생일로 비밀번호를 바꿀 때는 딱 30초 정도밖에 안 걸렸던 것 같은데.
문을 닫자 스르륵-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그제야 조슈아는 후, 하고 숨을 뱉었다. 그래도, 그래도.
생각보다는 쉬웠다. 막막했는데. 손도 떨리지 않았고 입술을 떨지도 않았다. 조슈아가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짙은 군청색 하늘에 달이 높다랗게 떠 있었다. 커다란 달을 바라보다 조슈아가 한숨처럼 뱉었다.
“정리하자.”
잠자고 일어나서 할 것도 없었다. 다 정리해야 했다. 전부 다.
버릴 게 너무 많았다.
캐러멜색 니트와 하늘색 니트. 의사 가운을 입은 토끼인형과 쌓아 둔 초록색 레몬 사탕. 예쁘다고 모아 둔 쿠키 틴 케이스들이 계속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조슈아는 커다란 검은색 쓰레기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봉투 입구를 벌렸다. 커다란 봉투가 마치 입을 쩍 벌린 괴물 동굴(괴물의 입) 같아 보여서 조슈아가 입새로 바람 빼듯 웃었다.
마음이 약해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해서 라디오를 켰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 스튜디오의 사정을 고려해서 가장 작게.
더 버릴 게 있을까. 조슈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주방을 보고 아, 했다. 제 주방에 서서 제 조리 도구를 만지며 요리를 하던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다 버려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 설핏 웃었다. 저걸 다 버리면 이제 뭘로 요리하지. 갑자기 훅 끼치는 현실이 웃겨서.
그래도 뭔가를 더 버려야 했다. 더 정리되고 더 비어 있는 집이 보고 싶었다. 그때 두리번거리던 시야에 선반이 콕 박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반 위에 있는 책 한 권이. <어제의 당신에게>.
조슈아는 가만히 책장을 휘리릭 넘겨 보았다. 도입부 빼고 읽지 않은 책에서는 새 책 특유의 인쇄 잉크 냄새가 풍겼다. 엘라가 그렇게 극찬을 했던 내용이 아무런 감흥 없이 단 5초 만에 마지막 장으로 넘어갔다. 아, 하나 궁금하기는 했다. 여기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얼마나 후회할까. 조슈아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소설이니까. 후회하겠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텐데.
“…영화도 안 봐야지.”
잔잔하게 라디오 소리가 울리는 방 안에 조슈아의 목소리가 얹어졌다. 거의 새 책이니 누군가에게 주면 딱 좋을 텐데, 정말 아쉽게도 이제 에투왈을 그만두었으니 누구한테 줘야 할지도 몰랐다. 어딘가에 두면 누구라도 읽을까, 조슈아는 잠시 집 근처에 있는 주립 도서관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침의 일정이 정해졌다. 가벼운 산책과 책 기부. 안 받아 주면 그냥 산책으로 끝나면 되는 것이고. 조슈아에게 나쁠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뭉텅이로 담긴 검은 쓰레기봉투를 보자 무언가 가물가물하게 조슈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뭐지, 고민하던 조슈아가 단음의 탄성을 터트렸다.
“아!”
조슈아는 곧장 옷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이 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게 또 있었다. 옷장 아래, 공간만 채우고 있던 이 ‘미련덩어리’ 박스. 보육원을 떠날 때조차 버리지 못하고 내내 끌어안고 살았던 색색이 예쁜 구슬들과 다 해진 책들 그리고 포장된 장식품들과.
어쩌면, 악몽을 꾸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는 플라스틱 고질라 장난감.
조슈아는 가만히 고질라 장난감을 들어 올린 뒤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조금 오래된 티가 나기는 하지만 아직도 장난감으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난감을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제 이것도 다 버릴 때가 되었다.
미련은 그냥 미련일 뿐이니까, 버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 박스도, 고질라 장난감도, 물건도 그리고 추억도 다.
조슈아는 무감한 눈으로 상자를 봉투 안에 넣었다. 잔뜩 채워진 봉투는 혼자 들기에 제법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디에선가 계속 힘이 솟아나는 사람처럼, 조슈아는 봉투를 들고 끙끙대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띠릭- 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조슈아는 공용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깨끗한 계단도, 말끔히 닦인 창문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쉬지는 않았다. 계속 스스로를 몰아붙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 하고 턱 끝까지 차올랐던 숨을 뱉어 낸 건 1층 공용 현관을 나와서였다. 조슈아가 사는 스튜디오에는 매일 아침마다 쓰레기차가 와서 쓰레기를 수거해 갔다. 조슈아는 검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쓰레기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으로 걸어갔다.
옹기종기 쌓여 있는 쓰레기봉투들을 바라보다가 침을 삼켰다.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힘만 풀면 되는데, 오늘따라 손아귀 힘이 마음대로 안 움직였다. 놓아 버리면 끝이야, 놓아 버리면 끝. 조슈아는 봉투를 내려다보다가 잠시 숨을 참았다. 그리고 눈을 일부러 크게 떴다. 생생하게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그런 뒤….
툭.
드디어 제 손에서 쓰레기봉투가 떨어졌다. 바닥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조슈아가 후, 하고 숨을 뱉었다.
끝이다. 정말 버렸다.
조슈아는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공용 현관의 전등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앞만 보고 걸어 나가야 했다. 딱 앞만 보고. 다리에 힘을 주고. 그리고 더 할 일이 있나 머리를 팽팽 굴렸다. 아….
레쥬메, 그리고 커버 레터.
에밀리가 줬던 회사들의 리스트가 떠올랐다. 하나씩 작성해서 보낸다면 그래도, 조금 바쁘지 않을까.
조슈아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새벽이 올 때까지 노트북 앞에서 열심히 레쥬메를 작성해서 메일을 보냈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곤한 숨소리가 잔잔히 깔리고, 그 위로 핸드폰의 메일 앱이 여러 번 깜빡였다.
* * *
도서관에 책을 기부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사실 쉽다 말다 할 것도 없었다. 도서관 로비 한편에 마련된 책 기부함에 책을 넣기만 하면 되었다. 조슈아는 책 기부함 앞에 서서 아주 잠시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았다. 적당히 조용한 가운데 간간히 사람들 목소리가 쌓이는 게 참 낯설고 좋았다. 여유 가득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슈아 자신도 여유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조슈아는 핸드폰의 시계를 보았다. 4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쉬다가 이 시간에 가만히 도서관의 로비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이 되다니. 승진한 것 같은 기분에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제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손가락 끝으로 잡고 있던 책을 기부함의 입구까지 밀어 넣다가,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가 조슈아는 다시 한번 책을 펼쳤다. 그리고 제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부분을 펼쳤다.
[주말이 되면 파비엘은 대개 소파에 누운 상태에서 하루를 보냈다. 테사는 파비엘에게 자주 부탁했다. 아침에 화단에 물을 주기, 우유 사다 주기, 열심히 만든 요리에 감상평 들려주기, 주말 오후에 함께 산책 나가기 등. 하지만 파비엘의 대답은 비슷했다.
“내일, 내일 하자.”
그러자 테사는 어느 순간부터 부탁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비엘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테사가 자신에게 맞춰 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조슈아는 답답함을 참고 책장을 넘겼다. 드디어 조슈아가 찾던 부분이 나왔다. 헤어진 날, 술을 진탕 마신 파비엘이 후회하며 잠에 드는 장면.
[“돌아가고 싶어요. 당장 그날로.”
독한 위스키를 연거푸 마신 탓일까, 파비엘은 흐느적대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지금 당신, 잠이 와?”
눈이 먼저 번쩍 뜨였다. 테사의 목소리였다.]
소설이다. 허구다. 그러면서도 아주 작은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개자식은, 이런 생각이라도 할까?
조슈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답은 그럴 일 없다…라는 게 너무 확실히 와닿았다.
조슈아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기부함에 밀어 넣었다. 툭, 책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제 마음 한편에 있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이를 테면, 아주 잘게 남아 있던 기대감, 그런 거.
* * *
보들보들한 이불이 몸에 착 감겼다. 3초에 한 개씩 팔린다는, 유명한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쉰다는 건 참 좋았다. 따뜻한 이불 속에 폭 파묻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가 몽롱하게 멀어지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와 우는 일은 차츰 줄어들었다. 거울을 통해 붓고 짓무른 눈을 보며 웃는 횟수 역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다.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조슈아는 멀어지는 시계 초침 소리를 느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좋은 꿈 꿔야 할 텐데….”
그 말이 사실이 된다면 참 좋으련만.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줄어든 것 사이에서 확실하게 늘어난 게 하나 있었으니까. 조슈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리는 대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입 속으로 단어 하나를 삼켰다.
그래, 악몽.
소름 끼치게 지독한 악몽.
이건 꿈이다. 확실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저 개자식이 눈부실 만큼 예쁘게 웃고 저를 안아 주고, 뺨에 입을 맞추는 건 이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뿌리치면 되는데, 우습게도 맨날 똑같은 이 악몽 속에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때와 똑같이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려고 애를 썼으나 손끝 하나 바르작거리지도 못했다. 정신은 온전히 깨어나 훅을 날리든, 뺨을 때리든 뭐든 하라고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꿈은 언제나처럼 달콤하게 시작했다. 음식을 만들어 주고 선물을 받고 키스를 퍼붓고. 달아서, 너무 달아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꿈의 배경은 제 스튜디오 복도로 옮겨간다. 조슈아는 숨을 참았다. 이제 곧 스프 한 그릇 먹지 못한 듯 지친 제 목소리가 울릴 것이다.
“…사랑해요.”
“…그래서 말했나요? 로건에게?”
아. 진정한 악몽은 여기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저 예쁜 얼굴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잔인하게 웃고, 제 목을 조르고, 사랑한다고 답하지 않을 때부터. 심장을 후벼 파는 미소가 정확하게 저를 겨냥해서, 숨이 막혔다.
말끔하게 닦인 바닥이 깨진 유리처럼 조각조각 갈라지고, 갑자기 꺼져 버린다. 추락한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어느 하나 잡히지 않았다. 에투왈이, 에밀리와 지미, 엘라와 닉과 미셸, 그리고 빌과 로건이,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멍청하게도 꿈속의 저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향해 손을 허우적거린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저를 바라보고 있던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또 그 표정이다. 이상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던 그 표정.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표정.
그 표정이 계속해서 시선에 박힌다. 바둥거릴 필요조차 없어진다.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감도 잡히지 않아서 조슈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
“…흐으….”
눈을 깜빡였다. 가물가물했던 시야가 또릿하게 초점이 잡혔다. 눈매에 고여 있던 미지근한 눈물이 관자놀이로 떨어졌다.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고였다. 조슈아는 손바닥으로 눈 주변을 꾹 눌렀다. 아팠다. 눈이 아니라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헛헛하고 갑자기 확 조여서 저도 모르게 쓴 한숨을 쉬었다.
안 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바랐는데. 결국 또 악몽이었다.
악몽을 꾸기 시작한 것은 헤어지고 나서. 아니, 헤어졌다고 할 수 없는 그날. 제가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 날부터였다. 첫날에는 밤을 꼬박 새었으니 악몽을 꿀 겨를조차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이제 악몽은 매순간 저를 찾아왔다. 눈을 감을 때부터 뜰 때까지. 그 모든 순간에 지독하게 달라붙었다.
조슈아는 가볍게 어깨를 올렸다가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매트리스를 짚고 일어났다. 자면서 우느라 진이 다 빠진 느낌이었지만 조슈아는 일어서야 했다. 골이 띵-하게 울리는 것을 참고, 비척이는 발걸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말끔하게 닦아 놓은 거울 앞에 서서 조슈아는 스스로를 비춰 보다 비실비실 웃었다.
창백한 낯에 퉁퉁 부은 눈가가 우스웠다. 웃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우스워하는 건 제법 효과가 좋았다. 바로 악몽을 떨치고 일어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스스로를 돌아볼 수는 있었으니까.
조슈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정신 차리라는 듯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툭 쳤다.
“할 일이 많잖아. 조슈아 베넷.”
조슈아는 머릿속으로 제 통장 잔고를 떠올렸다. 에투왈에서 빌려줬던 보증금 대출을 갚은 지도 벌써 며칠이나 흘렀다. 이 스튜디오는 이제 온전히 제 통장에서 나온 돈으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빠르게 떨어지는 통장 잔고를 떠올리니 새삼스레 구직에 대한 열정이 피어올랐다.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조슈아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시원스레 나오는 물을 손바닥으로 받아 세수를 했다. 여느 때와 같고, 또 다른, 그런 일상이었다.
* * *
[쓰레기수거 업체와의 계약 해지로 다음 주 금요일까지 쓰레기 수거는 없습니다.]
쯔, 조슈아는 혀를 내두르며 쓰레기장에 붙은 A4용지를 바라보았다. 며칠째 쓰레기장이 가득 차 있더라니 이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봄이나 여름이었으면 벌레가 꼬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조슈아는 겹겹이 쌓인 쓰레기봉투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옹기종기 쌓여 있는 검은 쓰레기봉투들 사이에 동그라니 빈 공간이 눈에 띄었다. 꼭 제가 쓰레기를 버렸던 위치 같은데.
생각은 멀리 가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에 조슈아가 픽 웃었다. 아직도 영화를 꿈꾸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제 쓰레기봉투만 쏙 가져갈 리가 없는데 말이다. 쌓인 쓰레기봉투들 중 하나에 제 쓰레기가 있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이 편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 털어 버렸다. 동시에 제 우스꽝스러운 추리 역시 훌훌 날려 버렸다.
“면접 보는데 정신없는 분위기라 정말 죄송해요, 미스터 베넷.”
“아니에요. 리모델링 끝나는 분위기라 정신없을 것도 없는데요. 그보다도 무척이나 근사하게 되었는데요?”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빙그레 웃었다. 투명한 통유리로 된 회의실 너머 문 없이 커다란 사무실 하나가 보였다. 기분 좋아지는 아이보리색 천장과 화사한 금색과 분홍색의 벽지는 인테리어에 관심 없는 조슈아가 보기에도 제법 근사했다. 걸어오면서 봤던 복도도 마찬가지였다. 인테리어 하느라 물품이 없어서 그렇지 사무용품까지 들여놓는다면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할 지경이었다.
“근사하다니 제가 더 감사하네요. 물론 우리 회사에 면접 보러 와 주신 것도 감사하구요,”
“저야말로 연락 주셔서 감사하죠. 미스 화이트.”
“이제 면접도 끝났는데, 엘이라고 불러 줘요.”
조슈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명함을 슬쩍 바라보았다. 엘 화이트. 감각적인 기사와 짧은 카드 형식의 인터뷰로 SNS 및 인터넷에서 자리잡아 가는 패션 잡지사 넥스트 유어의 인사 담당자였다.
조슈아는 며칠 전 받은 메일을 떠올렸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들어오는 헌팅 메일들 사이에서 유난히 넥스트 유어의 헌팅 메일이 눈에 띄었다. 그것도 비슷비슷한 메일 제목들 사이에서.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넥스트 유어에 들어오니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사람 편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크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 짧은 시간에 엘이 보여준 것은 몸에 밴 듯한 예의와 사교적인 웃음 그리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해 주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작은 태도가 뭐라고.
조슈아는 배시시 웃었다. 저도 모르게, 조금 풀어져서.
인터뷰는 10분도 안 걸렸는데, 대화는 30분이나 더 했다. 다른 회사들의 인사 담당자들과도 대화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대화를 한 건 오랜만이었다. 엘은 여러 분야에서 해박했다. 조슈아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보는 대신 엘에게 다과가 참 맛있다고 이야기했다. 엘은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회사에 제빵사가 있어요. 이게 다 스타트업 회사의 패기죠.”
“정말 대단한데요?”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투왈에도 미셸이 있기는 했지만 따로 제빵사는 없었다. 물론 보스, 아니 전 보스의 취향에 맞는 제빵사는 언제든 상시 대기 중이었고 가끔 간식이 배달되는 날이 있었지만 제빵사를 고용하지는 않았다.
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제스처를 하면서도 자랑스러움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 갭이 재미있어서 조슈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다 잠시 멈칫했다.
얼마 만에 웃은 걸까?
입가가 당기는 그 생경한 느낌에 와락 이상한 감정이 밀려왔다. 조슈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매를 부드럽게 올렸다.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
조슈아는 자세를 곧추세웠다. 엘이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엘은 기다림을 티내지 않았고, 무모하지만 조슈아는 그 태도를 믿기로 했다.
“아까 제시한 연봉 말인데요.”
…물론 믿는다고 했지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조슈아는 스스로의 가치를 잘 알았다. 업계 최고의 회사에서도 최정상의 위치에 있는 보스, 그 보스를 4년이나 보좌한 세컨드 비서라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