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모르는 사람
비가 오는 날은 딱 질색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어정쩡하게 비가 오는 날씨는 더욱 더.
퇴근길이라 그런지 거리는 우산을 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우산을 잘 들지 않으면 타인의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튀길 정도로.
조슈아 베넷은 조금 전 어깨를 부딪치고 간 남자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신경질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정비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블록에 고여 있던 빗물이 바지 밑단에 다 튀어 버렸기 때문이다.
조슈아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새빨간 머리카락이 시야 앞까지 떨어져 다시 옆으로 넘겼다.
그래도 오늘은 비 오는 날 중 가장 좋은 날이다. 이직한 회사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비록 제 보스는 출근하지 않았지만, 다른 직원들이 말하길 자신들의 보스만큼 좋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이직한 회사의 복지 덕분에 새로 이사 온 스튜디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생각을 하니 어깨에 묻은 물기도, 밑단을 적신 것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되었다.
새로 이사한 스튜디오는 메인 스트리트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험난한 뉴욕에 필수적인, 하지만 여태까지 조슈아에게는 사치였던 공용 현관 보안카드도 있는 건물이었다. 심지어 공용 현관에는 경비원도 있었다! 세상에!
조슈아는 우산을 쓴 채 입을 벌리고 불투명한 유리현관을 보다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깔끔한 흰색 외벽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때 탄 흔적조차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창문마다 동그랗게 어닝을 단 게 아기자기한 느낌까지 주었다.
“저기요. 지나갈게요.”
“아, 네.”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말을 걸고 나서야 조슈아는 정신을 차리고 서 있던 자리에서 비켜섰다. 장우산을 접은 갈색 머리 여자가 잠시 조슈아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카드를 댔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갔다.
잠시 비치던 깔끔한 로비와 프런트를 보며 조슈아 역시 카드 지갑에서 보안 카드를 꺼내 문 앞에 찍었다. 딕- 전자음과 함께 미닫이형 유리 현관이 열렸다.
화사한 베이지색 조명이 흩뿌려지는 가운데 깔끔한 로비에 서 있던 50대 경비원이 조슈아를 향해 목례했다.
“엘리베이터가 왔네요.”
“아, 감사합니다.”
이거거든! 조슈아는 엘리베이터에서 8층이라고 쓰인 동그란 버튼을 누르며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까지 살던 스튜디오에는 없던 또 하나, 바로 이 엘리베이터. 이제 술에 찌들어서 벽을 더듬어가며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계단이 힘들 때는 술 마셨던 때만이 아니었다. 발목을 다쳤을 때도 힘들었고, 술 취한 친구를 데려올 때도 힘들었지. 그리고 그 에이드리언을 피해 도망치듯 나왔을 때도.
조슈아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머리카락과 햇빛 한 점 못 받은 것처럼 창백한 얼굴. 색소가 옅은 갈색 눈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조슈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눈이 반달이 될 정도로 웃었다.
힘들었던 시간은 그 집에 다 놔두고 오기로 했잖아. 이제 새 집에서는 행복할 일만 남았다. 좆 같았지만 정 들었던 보스 빌 스웰딘이 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직한 것도 다 새로운 행복을 위해서지 않은가.
옹골차게 말아 쥔 주먹으로 파이팅을 외치듯 가볍게 흔들었다. 거울 속 제가 꽤나 괜찮아 보였다. 하긴, 원래 이 정도면 괜찮은 남자지.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 스튜디오는 24시간 복도 불빛이 켜져 있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나온 조슈아가 스튜디오 복도를 걸었다. ‘ㅁ’자 형태로 된 스튜디오 복도는 1호, 2호 문 앞을 지나 모퉁이만 돌면 곧장 803호 제 집이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걸음걸이마다 좋은 향이 났다.
비싼 스튜디오는 복도에 방향제도 있나? 코를 킁킁거리던 조슈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 축축한 공기를 순식간에 청량하게 만드는 시원한 향은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향수였다. 그리고 그 향수를 쓰는 사람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조슈아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기라도 하듯, 모퉁이 너머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이제 온 거예요?”
“…에이드리언 그렌트.”
“아, 그거 싫다니까요. 이름만 불러 주기로 했잖아요. 다정하게.”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빙그레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얼굴로 달콤하게 조르면, 딱 부러지던 조슈아라도 매번 흐물흐물해져서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슈아는 그 이름을 부른 제 입을 벌하듯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그리고 현관문의 앞에 섰다. 175cm인 조슈아보다 한 뼘 큰 에이드리언이 간격을 좁혀 오는 게 느껴졌다. 그토록 좋아했던 향이 코끝을 적셔 왔지만 감정이 정리된 탓인지 심장이 일렁이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현관의 번호 키를 누르는 대신 지갑을 꺼냈다. 달랑거리는 테슬에 달린 보조 열쇠를 잡았다. 삑- 잘못 찍혔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밀번호 바꿔 놓았어요. 조슈아. 내 생일선물로 당신 집 비밀번호, 내 생일로 바꾼다고 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급 셔츠에 쌓인 탄탄한 가슴팍을 지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보는 순간 빠져들었던 녹갈색 눈이 조슈아를 내려다보았다. 웃음을 잔뜩 머금은 눈이 우아하게 휘어졌다.
조슈아는 딱 삼 개월 전, 저 눈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언제까지나 다정할 줄로만 알았던 눈이 차갑게 굳어서 경멸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심장이 뻐근해서 터져 버릴 것 같았던 그 순간을.
“퇴근이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이 뺨 좀 봐. 다 텄어.”
적당히 굳은살이 박인, 잘 관리된 이 손의 악력이 무시무시했던 것 역시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날이 떠오르자 조슈아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목을 매만졌다.
삼 개월 전 그날, 이 남자와는 모든 게 끝났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퇴근이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설마 또 상사 잘못 만난 건 아니죠?”
나한테….
“저녁 먹으러 갈까요? 오늘은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그렇게 웃는 걸까?
이렇게 늦었는데.
조슈아는 손을 내려 허리 뒤로 숨겼다. 제 손이 떨린다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굳은 표정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남자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냥 저녁 먹자고 하는 건데.”
에이드리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하지만 조슈아는 단호했다.
“그쪽과 저녁 먹을 일 없어. 그러니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아, 오늘 당신 첫 출근이었죠? 피곤하겠다. 그러면 내일 같이 밥 먹을까요?”
“말 못 알아듣는 척하지 마.”
말을 잘라 내던 조슈아는 이상한 것을 느꼈다. 오늘 내가 첫 출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러고 보니 가장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안 거야.”
“뭘 어떻게 알아요.”
“내가 있는 곳, 어떻게 알았냐고.”
“당신보다 아마 내가 먼저 알았을 거예요.”
“뭐?”
대답한 제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떨렸다. 그제야 에이드리언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저를 매번 설레게 만들었던 다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조슈아 베넷. 이렇게 순진해서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타이밍 정말 잘 맞지 않았어요? 직장을 딱 그만두려고 마음먹고, 이력서를 보내자마자 인터뷰가 잡히고 복지가 잘된 탓에 새로 스튜디오 구할 걱정 안 해도 되고.”
조슈아는 골이 아팠다.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쓰레기는 저 예쁜 얼굴로 맹하게 웃으면서 “넌 내 손바닥 안이었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얼굴 본 걸로 만족할래요. 내일 또 봐요.”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눈치가 빠른 개자식이었다. 조슈아가 대차게 한마디 할 틈새조차 주지 않고 생긋 웃으며 발을 뺐다. 말문이 턱 막혀서 그 어떤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언이 저만치 멀어지고 살랑살랑 손을 흔들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쏙 사라졌다.
띵- 맑은 벨소리가 들렸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지 밝은 빛이 복도로 쏟아지고,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그제야 조슈아는 손을 앞으로 꺼내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웃기지도, 가당치도 않았다.
“…안 떨렸어야 했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말았다. 볼썽사납게. 사람 우스워 보이게.
그 누구에게보다 당당하고 빛났어야 했는데, 하필. 그 개자식한테.
조슈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흡,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호흡을 뱉어 냈다. 진정을 해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집에 들어가서 다시 비밀번호를 바꾸고, 열쇠로 열 수 있는 육각 자물쇠도 하나 더 달아야겠고, 회사가 그 개자식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알아봐야겠고.
할 일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 많은 할 일 중 이런 건 없었다.
‘그 개자식이 왜 저를 찾아왔는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다시는 제 곁에 오지 않을 사람이었고, 오지도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그냥.
그냥….
“모르는 사람.”
딱 그 정도였다.
* * *
열쇠 수리공에게는 오전 8시가 되자마자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오늘 열쇠형 자물쇠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고. 디지털 도어 록의 비밀번호는 여덟 자리로 바꿔 두었지만, 어제 바꾼 놈이 오늘은 못 바꾸겠냐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어제 녹음이라도 했어야 했다. 너무 어이없어서 놓쳐 버리고 말았지만. 남의 집의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은 주거 침입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개자식이 달큼한 목소리로 “비밀번호 바꿔 놓았어요.”라고 말하는 그 한 토막만 녹음했더라면 오늘 댓바람부터 달려온 곳은 이 넥스트 유어가 아니라 경찰서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조슈아는 어젯밤 녹음을 하지 못했고, 비공식적 인사 다음 날, 그러니까 보스가 있는 공식적인 첫 출근 날을 넘겨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넥스트 유어가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아니, ‘그렌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알아봐야 했고.
하지만….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조슈, 아. 미안해요. 편하게 말해도 되는지 먼저 물어야 하는데. 엘이 그 전부터 엄청 누누이 이야기했는데 제가 워낙 잘 까먹거든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사실 인터뷰 했다고 들었을 때부터 조슈, 아. 아직은 미스터 베넷! 미스터 베넷한테 내적인 친근감이 계속 생겼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혼자 막 친구가 된 것 같고 그러네요. 하하. 너무 나갔나요? 그래도 언젠가는 진짜 친구처럼 지낼 수도 있겠죠? 막 퇴근하고 함께 맥주 마시러 가고. 아직 넥스트 유어에서는 나랑 같이 와인 마시는 사람은 많은데 맥주에 피자 먹으러 가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요. 기껏해야 엘이나 피터나. 아, 피터는 지난달에 애인이랑 헤어져서 제가 억지로 데려간 거긴 하지만요. 근데 미스터 베넷, 피자 좋아해요?”
조슈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살짝 굽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조슈아보다 반 뼘 정도 큰 키. 맑은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지나가다가도 언뜻 뒤돌아볼 만큼 호감형으로 잘생긴 남자는 잘 관리한 듯 각질 하나 없는 입술로 수많은 말을 쏟아 냈다.
저만치에 서 있던 엘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다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슈아의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 남자는 해맑게 웃었다. 조슈아는 남자를 따라 매끄럽게 웃었다.
“편하게 부르세요. 미스터 밀러. 저도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알려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피자는 다 좋아합니다. 요즘에는 맥주는 최대한 자제 중이라 피자부터 먹는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이어트 중인데, 맥주는 최대의 적이라고 들었거든요.”
“와….”
역시…. 엘이 감탄과 함께 작게 속삭이는 말이 조슈아의 귓속에 쏙 박혔다. 조슈아는 엘을 향해 어깨를 슬쩍 으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해맑은 남자, 새로운 보스이자 넥스트 유어의 대표인 크리스 밀러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환하게 웃었다.
“와, 피자 좋아한다니 정말 다행인데요? 편하게 부르라고 해 줘서 고마워요. 조슈아. 조슈아는 어떤 게 편해요? 보통은 나보고 그냥 크리스라고 부르고 엘만 가끔 사람 있을 때 보스라고 부르는데.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보….”
당연히 보스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한 음절을 내뱉자마자 목이 턱하니 메었다. 잔뜩 기대하는 남자를 향해 조슈아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바르르 떨릴 것 같은 입술에 힘을 주고. 보스. 4년 동안 불렀던 호칭을 다시 부르기 힘든 건 정이니, 의리니 하는 시답잖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 호칭으로 불렀던 상대에게 가졌던 기대가 너무 커서. 아니, 너무 컸어서. 그래서인 것 같았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큼큼, 말하다가 사레들린 것처럼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없애려면 확실히 없애야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호칭은 겨우 호칭이니까. 그러니까.
조슈아가 입술을 부드럽게 말아 올렸다.
“보…스라고 부르는 거 어떠세요?”
“딱 좋네요. 보스라. 뭔가 되게 있어 보이고 폼 나는데요?”
“와. 제가 그렇게 부를 때는 별로라더니. 이거 차별 아니에요?”
엘이 부러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를 흘겨보았다. 크리스는 금세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야 엘이 나한테 보스라고 부르는 건 투자자 왔을 때니까. 나도 좀 사리고 싶거든.”
투자자. 그 한마디에 어련히 짐작이 갔다.
“혹시….”
입이 먼저 움직였다. 잔뜩 크리스를 흘겨보며 어휴, 하던 엘도, 워워 하며 엘을 약 올리던 크리스도 모두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이고 최대한 가볍게 이야기했다.
“혹시 넥스트 유어의 투자자나 투자 그룹 어딘지 알려 줄 수 있어요? 명색의 보스, 비서인데.”
여기에서 만약 그렌트…가 나온다면.
조슈아 베넷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끝까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손발이 차가워져서 어떻게 할 줄 모를 정도로 빳빳해질 것 같았다. 조슈아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엘이 환하게 웃었다.
“우리 이번 연도까지 실리콘밸리에서 지정한 스타트업 지원 회사예요! 조슈아!”
“…네?”
“…제가 혹시 이야기 안 했나요?”
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표정을 어둡게 굳혔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이야기하지 않았다니! 스스로를 자책하는 표정에 크리스가 한마디 얹었다.
“세상에, 실리콘밸리에서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선정한 스타트업 지원 회사라는 강점을 이야기 안 하다니! 엘. 설마 계속 이렇게 일한 거야? 조슈아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우리를 거절하면 어쩔 뻔했어!”
“…그, 그래도 몰랐을 때도 입사를 희망했는데, 알고 나니 더 좋지 않나요?”
항변하듯 말하는 엘과 놀리는 크리스를 보며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딱딱해지는 표정을 겨우 삼켰다. 실리콘밸리, 그 커다란 울타리 속에 그렌트가 있을까, 없을까.
그 개자식이 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웃었던 게 맞을까 봐.
조슈아는 어쩐지 더 물어보고 싶지가 않았다.
“인수인계가 이렇게 빠른 건 처음이에요.”
엘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조금 전 엘이 준 다이어리-회사 1주년 때 배포용으로 만든 네이비색 커버 다이어리-에 메모를 하다가 고개를 들고 엘을 바라보았다. 사람 무해하게 만드는 투명한 갈색 눈을 깜빡이다가 조슈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엘이 워낙 인수인계를 체계적으로 잘해 줘서 그렇죠.”
눈매를 반달처럼 휘어진 채로 웃자 곧 서른을 앞둔 남자가 꼭 소년처럼 해사했다. 예쁘장한 얼굴 때문일까, 아니면 남한테 공을 돌리는 게 익숙해 보이는 저 말투 때문일까.
엘은 마음속으로 조슈아에 대한 호감도를 한 단계 더 높였다. 그리고 흐뭇하게 웃었다.
이 얼마나 천국 같은 직장 생활인가.
조금 전 마케팅 팀장 헤더와 기획지원팀 팀장 브루노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을 중재할 때만 해도, 아니 오전에 지난 주 토요일 게재되었던 피처팀의 모피 불매 운동 관련 기사와 이번 주 월요일에 올렸던 패션팀의 할리우드 스타 레베카 앤디와 그녀의 꽤 괜찮은 모피 패션에 대한 기사가 부딪힌다는 구독자의 항의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이 빌어먹을 회사는 언제 퇴사해야 퇴직금이 나오지?’를 계산했었는데.
한순간에 말이 바뀌었다. 하지만 엘은 그 사실은 당연스레 무시하며 조슈아를 한 번 보았다가 투명한 유리벽 너머 무언가에 골똘히 몰두하고 있는 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역시 아름다운 회사 생활이었다.
평소에도 예쁘지만, 웃을 때는 특히나 더 예쁜 직장 동료와 말만 하지 않는다면 완벽한 보스. 하. 회사 복지 수준이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조슈아는 다이어리에 더 추가할 사항이 없나를 고심하다 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친절한 사수의 모습으로 웃던 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편집장실 쪽을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엘의 시선을 따라 편집장실 안에 있는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블라인드가 올려진 커다란 창문 너머에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크리스가 있었다. 흰색 셔츠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린 채 노트북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언뜻 예전 일을 하나 떠올렸다. 아마 연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눈발이 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던 날이었다. 드레싱을 뺀 샐러드를 뒤적이던 엘라가 눈을 반짝이며 한마디 했다.
“그거 알아요? 요즘에 넥스트 유어 잘나가잖아요. 거기 편집장도 남자래요!”
“엘라 요즘 소문 느린데?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야.”
지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소문이라면 에투왈에서 최고점을 찍은 엘라가 지미보다 느릴 때가 있다니. 하지만 엘라는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 대신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고 검지를 들어보였다.
“그러면 그 별명! 그 별명 너무 인상적이지 않아요? 세상에. 나는 우리 보스한테만 그런 별명이 붙는 줄 알았거든요.”
“별명?”
지미가 구미가 당긴다는 얼굴로 자세를 바로 세웠다. 세상 남 얘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그것도 요새 핫하게 올라오는 넥스트 유어의 편집장이라니.
엘라는 아무한테나 얘기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주변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나서야 입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팔이 섹시해 보이는 남자…라.”
조슈아는 그때 엘라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지미가 에이 뭐야, 하며 김샌 얼굴로 자세를 흩트리던 것도, 엘라가 얼마나 신난 얼굴로 이야기했는지도, 그 이야기를 듣던 에밀리가 입꼬리로 웃음을 흘린 것도 다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선명한데. 조슈아는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이곳은 에투왈이 아니었고, 이제 직장 동료는 엘이었으며, 보스는 크리스였다.
달라졌다. 그리고 더 많이, 달라져야 했다.
조슈아는 펜을 고쳐 잡고 엘을 향해 물었다.
“아, 엘. 회사 이름으로 선물 보낼 때 말이에요….”
우선 일부터 확실하게 익히고. 지금은 근무 시간이니까 말이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첫날인데 오늘은 빨리 퇴근하고 들어가서 쉬어요. 대신에 다음 주 중으로 한번 식사 자리 어때요? 요 앞에 진짜 괜찮은 피자 집 하나 있거든요!”
새 보스, 크리스 밀러는 텐션이 아주 높은 사람이었다. 편집장실에 들어간 결재 건이 네 건, 기사 리딩이 세 건, 광고 계약서 검토한 게 한 건. 그 와중에 커피를 채우러 나올 때마다 엘의 인수인계에 한마디씩 더하던 것까지 하면, 보스의 하루는 참 많이 바빴을 텐데 말이다.
한 치도 말을 쉬지 않겠다는 듯 보스는 피자집의 인테리어부터 그 곳의 주력 메뉴인 옥수수 피자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장인 샘이 지난번 옆집 꽃가게의 지나에게 거절당해 풀이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갔을 때, 엘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크리스는 정신을 차린 듯 아, 작게 탁음을 내고 푸스스 웃었다.
“미안해요. 퇴근 시간인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죠? 그것도 첫 출근이라 피곤할 텐데.”
“그것도 있지만, 크리스. 계속 가다가는 조슈아에게 샘 이미지는 퇴짜 맞은 남자가 된다구요. 샘한테 다 이를 거예요.”
“설마, 농담이지. 엘?”
“몰라요. 크리스 하는 거 봐서요.”
엘이 새침하게 웃자 크리스가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밝혔다. 그 모습을 보던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이긴 했다. 꼭 저런 투닥거림이 낯설지 않아서. 아니, 너무 익숙해서. 그리고 그 익숙한 모습이 머릿속에 몽글몽글 떠올랐을 때, 조슈아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입이 마르고, 손에 힘이 빠졌다.
잊어버리자고 했는데. 계속 이 모양이었다.
“어, 조슈아. 어….”
난감한 듯한 크리스의 목소리가 물에 젖은 것처럼 먹먹하게 울리다 가까워졌다. 아. 그제야 조슈아는 입술에 힘을 주고 호선을 그려 웃었다. 표정 연기는 언제나 자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마주 본 크리스와 엘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엘은 완전히 넘어온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보스한테 하는 것치고 너무 격의 없기는 하죠? 하지만 조슈아도 곧 익숙해질 거예요.”
“아니에요. 보기 좋은걸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첫 출근인 사람을 이렇게까지 오래 붙잡아 두다니. 크리스 보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는데 크리스를 닮아 가다니!”
“아니, 엘. 나 닮아 가는 거면 좋은 거 아냐?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편집장이 어딨어. 응? 능력 있고, 잘생겼고, 이만하면 재산도 제법….”
“있죠. 물론 있으시죠. 그런데 크리스는 말이 너무 많아요. 빨리 조슈아 가야된다니까요?”
엘이 목소리를 높이며 장식용 벽걸이 시계를 가리켰다. 이제 막 6시 5분을 넘기고 있었다. 조슈아는 힐끗 비서실 바깥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사원들이 데스크톱을 종료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엘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조슈아. 먼저 가요. 고생 많았어요.”
“안녕, 조슈아. 내일 봐요. 내일 꼭 봐요!”
엘과 크리스의 인사를 보던 조슈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제 보스는 마치 제가 내일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밌는 곳이다. 내일도, 내일 모레도 오고 싶을 만큼.
“내일 꼭 봬요. 그러면 먼저 가 볼게요.”
비서실의 문이 닫히고, 조슈아가 복도를 따라 멀어졌다. 방음이 잘된 탓에 비서실은 아주 조용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엘이었다. 엘은 팔짱을 끼며 옆에 있는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까지 손을 방방 흔들던 크리스는 멋쩍은 듯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엘이 혀를 쯔쯔 찼다.
“그렇게 좋아요? 아주 오늘 입꼬리가 귀까지 올라가겠던데요?”
“티 났어? 나 일부러 오늘 일만 엄청 했는데. 오늘따라 왜 그렇게 일이 몰리는 거야?”
“그야 크리스가 계속 놀았으니까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크리스가 크흑, 하며 심장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지만 엘은 냉담하게 콧방귀만 뀌었다. 살짝 실눈을 뜨고 엘의 눈치를 보던 크리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집중이 안 되니까 그렇지. 엘이라면 내 심정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조슈아잖아. 그것도 무려 그 조슈아 베넷!”
“알죠, 알죠. 어쩌면 크리스보다는 제가 더 많이 들었을걸요?”
‘그’라는 수식어가 너무나도 당연한 빌 스웰딘과 잡지계의 전설인 에밀리 스콧 아래에서 착실히 실무를 쌓은 비서계의 샛별. 하지만 크리스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조슈아는!”
“네, 조슈아는요?”
걸렸다.
엘은 크리스의 말을 따라하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숨겼다. 분명 뭔가 있다. 대학생 때부터 따지면 잡지계 생활이 어언 8년 차. 엘 화이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상했다. 2주 전부터였다. 넥스트 유어를 시작한 지 3년 차인데도 불구하고 인사 담당자인 제가 비서의 역할을 겸할 정도로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하던 크리스 밀러가 갑자기 비서가 필요하다며 생떼를 부리다니. 그것도 면접 보러 온 지원자들을 이 핑계, 저 핑계로 다 내치고는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한 말이 그거였다.
“조슈아 베넷 있잖아. 왜, 에투왈에서 실력 있는 비서라고 유명하던데. 퇴사했다던데. 혹시, 여기로는 안 오려나?”
여자라면 제법 잘 만나고 잘 사귀던 걸로 알았는데. 새로운 사랑에 빠진 걸까?
엘은 절로 가늘어지는 눈에 최대한 힘을 주고는 크리스의 답변을 기다렸다. 물론 크리스가 알려 준다고 해도 따로 이야기를 퍼트릴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 가다 짝사랑하는 모습을 짓궂게 놀릴 생각은 충분했다. 그러니 어서, 어서. 엘은 달싹이는 크리스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엘. 빨리 퇴근해.”
“…이게 끝이에요?”
정말? 진짜? 진심이야? 거짓말이지? 엘은 산산이 부서지는 기대를 끌어모아서 물었지만 크리스는 번복하지 않았다. 와, 세상에. 엘은 중얼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남 일인데 이렇게 관심 기울여서 뭐하나. 얼른 퇴근해서 맥주 한 잔 마시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 내리는 게 더 유익한 일이었다. 엘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저 먼저 퇴근해요, 크리스.”
“잘 가. 내일 봐.”
생글생글 웃으면서 편집장실로 쏙 들어가는 크리스를 보며 엘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래도 조슈아가 와서 일 더 열심히 하는 보스로 변했다면, 그걸로 되었다. 엘은 겉옷을 입으며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비서실을 나섰다.
한편, 창문으로 엘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한 크리스가 휴,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엘은 워낙 눈치가 빨라서 아마 대강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섣부른 추측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리스는 푹신한 바퀴 의자에 몸을 기대듯 앉았다. 이제야 조금 긴장이 풀리는지 진이 다 빠졌다. 이래서야 집까지 갈 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크리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는 또 에너지 충전을 해야지. 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반지갑을 열자 크리스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지갑을 열자마자 보이는 사진은 옛날에 찍은 듯 화질이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 구깃하게 접힌 자국이 많은 그 사진 속에는 네댓 살로 보이는 남자 아이 두 명이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명은 살짝 굽실거리는 검은 머리였고, 다른 한 명은 강렬한 빨간 머리였다.
* * *
열쇠 수리공과 약속한 시간에 맞춰 가려면 서둘러서 집에 가야 하는데.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쩐지 발걸음이 느려졌다. 조슈아는 점점 작아지는 보폭을 바라보다가 결국 멈춰 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스튜디오 앞에 도착할 텐데. 열쇠를 추가하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쉬면 될 텐데. 빨리 자고 내일 일어나야 새로운 보스와의 약속대로 다시 출근을 할 텐데.
이런 낙관적인 생각들이 하나둘 쌓여 가는데도 발걸음은 쉬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제 쇄골과 목 부근을 매만졌다. 그러다 제 손의 위치를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팠던 기억은 마음뿐 아니라 몸에도 자리한 모양이었다. 제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조슈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려다 말고 주먹에 힘을 꽉 쥐었다. 이제 제 입술은 깨물지 않기로 했으니까.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로 했으니까. 조슈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앞으로 걸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그리고 세 발자국. 처음은 어려웠지만 이후는 조금씩 나아졌다.
열쇠 수리공은 스튜디오의 보안 문 앞에서 조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안 카드를 찍고 프런트를 지나며 경비원과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을 눌렀다. 열쇠 수리공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새로 달 문고리를 꺼냈다. 그리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보조 열쇠를 다는 분은 정말 오랜만이에요. 보통은 번호 키 배터리가 방전되는 일로 많이 오거든요.”
“그런가요?”
대답을 하면서도 조슈아의 생각은 온통 8층 제 집 앞으로 쏠려 있었다. 설마, 정말 있을까. 제게 그런 말을 듣고 설마 저 위에 있을까. 그리고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성급한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조슈아는 힘이 탁 풀렸다.
없다. 아무도.
복도를 채우는 것은 조슈아가 늘 감탄하던 옅은 베이지색 조명뿐이었다. 헛웃음이 나오는 조슈아와 달리 열쇠 수리공은 조슈아의 옆에 섰다. 그리고 손잡이 위를 짚어 보였다.
“요 위에다 보조 자물쇠 달게요. 위치 괜찮으세요?”
“아, 네.”
“그러면 문 한번 열어 주시겠어요?”
조슈아는 번호 키를 꾹꾹 눌렀다. 문이 열리는, 부드러운 소리와 동시에 조슈아의 머릿속에는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혹시, 이 집 안까지 들어온 건 아닐까. 그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미 내 집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었으니. 바꿨다 해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조슈아는 조심스레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여차하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게 몸을 뺀 채로.
하지만 집은 온통 컴컴했다. 열쇠 수리공은 멍한 조슈아를 슬쩍 피해 가져온 공구함에서 드릴을 꺼냈다. 이내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드릴이 돌아갔다.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슈아는 보조 자물쇠를 바라보다 수리공에게 물었다.
“이거, 튼튼한 거죠?”
“그럼요. 전화 주신 대로 제일 좋은 제품으로 가져왔어요.”
당연하다는 듯, 열쇠 수리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조슈아에게 열쇠를 건넸다. 조슈아는 보조 열쇠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제일 좋은 제품.
보조 자물쇠를 다는 일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끝났다. 열쇠 수리공은 출장비와 제품비를 받고 집을 떠났다. 조슈아는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스르륵, 소리와 함께 번호 키가 자동으로 잠겼다. 조슈아는 가만히 잠긴 번호 키를 바라보다가 그 아래에 있는 보조 자물쇠를 잠갔다.
이제는, 안전할 것이다. 조슈아는 입 속으로 되뇌었다. 그 당연한 말에 어쩐지 목이 메는 것 같아서, 조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
침대 옆 협탁 위에서 웅웅- 진동이 울렸다. 따끈하게 샤워를 마치고 김이 폴폴 나는 머리를 수건으로 탁탁 털며 욕실을 나오던 조슈아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알람을 껐다. 핸드폰에 뜬 시간은 6시 반.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넥스트 유어에 출근을 결심하고 가장 걱정했던 게 바로 일찍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거진 3개월 동안 자고 싶은 만큼 잠을 청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게 무척이나 힘들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조슈아는 빠르게 예전 생활로 돌아왔다. 아니, 조금 더 빨리 일어나게 되었다.
조슈아 베넷의 아침은 여유로워졌다. 알람이 울리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샤워를 했고, 천천히 머리를 말리며 아침 뉴스를 봤다. 밤사이 특별한 일은 없었다. 단정한 모습의 앵커는 새로운 뉴스들을 브리핑했고, 마지막에는 기상캐스터가 나와 날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는 사이 조슈아는 적당히 머리를 말렸고 옷을 갈아입었다. 남색 슬랙스에 흰 셔츠, 위에는 코트를 입을 예정이었다.
“아, 오늘은 마트 좀 들러야겠다.”
냉장고를 열자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 제법 커다란 냉장고 안에 있는 거라고는 식빵 한 봉지와 크림치즈 한 통 그리고 우유와 생수 각각 한 병씩이 전부였다. 친구같이 느껴지던 맥주 한 캔이 없는 것은 조금 다행이었다.
빵에 바를 버터도 없어서 그냥 토스터로 빵을 구웠다. 투명한 유리컵에 우유를 따르고 한 입 마시면서 눈은 연신 뉴스를 좇았다.
다 구워진 빵에는 크림치즈를 듬뿍 발랐다. 바삭하게 잘 구워진 빵과 크림치즈의 조합은 아침 식사로 적합했다. 출근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남아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걷고 싶은 날이었다.
조슈아의 출근길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10분, 버스로 스물두 정거장. 그리고 다시 걸어서 20분. 그 스물두 정거장 중 한 정거장은 걸으면서 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맛있는 중국 음식점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이콥이 해 주던 것처럼 맛있는 볶음밥과 토마토 달걀 수프를 파는 그런 가게. 나무젓가락을 딱 반으로 가르는 것을 가르쳐 주고 가끔 호탕하게 웃으며 다 잘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는 어른이 있는 가게.
그러고 보면 제이콥한테 놀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수녀님한테도 마지막으로 연락드린 지 제법 되었고. 조슈아는 빵을 입에 문 채 코트를 입으며 머릿속으로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TV를 끄고 빵을 다시 손에 든 채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의 조명이 더 화사한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출근길이었다.
“안녕, 조슈아. 잘 잤어요?”
…스튜디오의 보안 현관을 나서던 순간까지만.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보안 현관의 오른쪽에서 들려왔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남자가 있었다. 조슈아는 일부러 옆을 보지 않았다. 보통은 바로 오른쪽으로 틀어 걸었지만 일부러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온 뒤 도보를 따라 걸었다.
언뜻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옆을 스치는 순간부터 청량한 향이 훅 끼쳐 왔다. 눈에 그가 입은 남색 겉옷의 색이 잔상처럼 남았지만 조슈아는 그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젓거나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 대신 빵을 한 입 더 우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삭바삭한 빵과 크림치즈 맛이 조화로웠는데, 지금은 무언가 어석어석한 것을 씹는 것만 같았다. 조슈아가 먼저 앞서 걷자 뒤에서 따라 걷는 기척이 났다.
“아침 미리 먹고 있었네요. 샌드위치 사 왔는데.”
뒤에서 종이봉투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따라오는 남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에드나의 가게, 이번에 신메뉴 나왔어요. 허브치킨에 아보카도 얹은 베이글 샌드위치. 그래도 당신은 크림치즈 연어를 가장 좋아하잖아요. 둘 다 사 왔는데. 어떤 게 더 좋아요?”
“…그래서 말했나요? 로건한테?”
설탕에 절여지듯 달콤한 목소리 위로 잔상처럼 그날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조슈아는 남은 빵을 한입에 다 넣고는 무의식적으로 씹었다. 보통 날이다. 제 뒤에는 아무도 없다. 여느 날의 뉴욕처럼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 다른 것이라면, 저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제 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다는 것?
빨리 버스를 타야 하나. 아니면 원 계획대로 한 정거장을 걸을까. 어느새 다다른 버스 정류장을 보며 조슈아가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들고 있던 가방을 뒤적여 무선 이어폰을 꺼냈다. 케이스를 열자 뒤에서 투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 정말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우습게도, 그 말을 듣자마자 이 상황이 너무 생경해졌다. 마치 가상현실 게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조슈아는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보이던 새파란 하늘이,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아침부터 빵빵대는 택시들과 버스들이, 신호등이 바뀌고 출발하는 차들이 모두 다 이상했다. 아, 가장 이상한 건 지금 제 뒤였다. 조슈아는 들고 있던 무선 이어폰 케이스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뒤를 돌았다.
“아, 이제야 나 좀 봐 주는 거예요? 자, 뭐 먹을래요? 둘 다 먹어도 좋은데.”
사람 홀리는 예쁜 얼굴이 배시시 웃었다. 똑같았다. 삼 개월 전과, 엊그제와, 지금 제 앞의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모두 다. 살이 빠지거나 더 찌거나 하는 사소한 차이도 없었다. 문득 빌 스웰딘이 떠올랐다. 자기 관리를 호흡처럼 당연하게 생각하던 사람.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셔도 타인들 앞에서는 언제나 완벽한 왕자님의 모습을 내보이는 남자.
생각해 보면, 이 개자식도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오직 에이드리언 그렌트만을 위해 만들어졌을, 훅 풍겨 오는 청량하면서도 시원한 향으로 감싸진 채. 완벽한 체형을 절제하듯 드러내는 남색 코트와 슈트를 입고.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한 화려한 금발로. 화사하게 만개한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저 얼굴로 눈 아래 다크서클이 생기는 것 하나도 계획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손에 샌드위치를 들고 타인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대신, 이별을 한 상태에서도 술을 마셔도 흐트러지는 모습 하나까지 계산할 수 있는 남자로. …아, 그게 이 남자한테 이별로 취급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조슈아?”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이, 무슨 일이냐는 듯 다정한 녹갈색 눈이 저를 바라보자 조슈아는 숨이 막혀 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다시 한번 제 목줄을 움켜쥐는 느낌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제 목 부근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처럼 안도하듯 가벼운 숨을 뱉었다.
그 순간, 녹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이며 조슈아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슈아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다시 유순하게 웃었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저 개자식과 말을 섞지 마. 그대로 돌아서 출근을 해. 하지만 이성적인 생각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전, 입술 밖으로 툭 하고 한 마디가 나갔다.
“…로건과 안 되었나 봐?”
입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아, 하는 후회감이 들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후벼 팔 수 있는 질문인지 아니면 순수한 호기심인지 파악하기 전에 제게 칼이 될 말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아는 사실인데, 누군가의 대체가 된다는 것을 다시 인정하는 것은. 침을 삼킬 때마다 생목이 올라오고 눈앞이 순간 새하얗게 번지고, 머리가 쭈뼛거리게 아프고 주먹이 꽉 쥐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마시멜로를 녹인 듯 달콤한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다정함을 표방한 녹갈색 눈동자가 조금 짙어진 채 동그래졌다.
침이 말랐다. 주먹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지만, 조슈아는 준비를 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는 제가 더 유리했다. 어쨌든,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양손에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고,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여차하면 자신은 이 자리를 바로 뜰 수도 있었다. 아무 버스나 잡아서 타고 가면 되니까.
하지만 녹갈색 눈동자가 사르르 접히는 눈매 속에서 부드럽게 웃는 것은 조슈아가 예상한 범위에는 없었다. 크림처럼 새하얀 뺨이 볼록하게 올라가며 장밋빛 입술이 다정한 호선을 그렸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웃었다. 묘한 기시감에 팔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예의 갖추는 말도 좋은데, 이쪽도 좋아요.”
좀 더 가까운 사이 같아서.
장밋빛 물감을 한 방울 똑 떨어뜨리기라도 한 듯, 새하얀 뺨 위로 서서히 홍조가 올라왔다. 부끄럽다는 듯 덧붙이는 말은 전혀 그 개자식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어쩌면 정말 거절당해서 살짝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 엊그제 제 집 앞에 오고. 오늘은 이렇게 아침에 오고.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정말로. 정말로 미쳐서. 그래서 로건 헤네스에게는 갈 자신이 없어서. 차선으로 저를 찾아온 거라고.
조슈아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조슈아를 바라보다 빙그레 웃었다.
“조슈아?”
순간 맥이 탁 풀렸다.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라서 손으로 옆을 더듬다 버스 정류장 표지판 기둥을 잡았다. 새벽 내 쇠기둥에 달라붙어 있던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으로 이동했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지금 바로 스크린으로 들어가도 완벽한 모습으로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 저를 보고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냐고 물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조슈아 베넷한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조슈아를 부축할 것처럼 손을 뻗었다. 커다랗고 새하얀 손. 손가락이 길고 우아한 손. 적당히 굳은살이 박인 손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 손을 보자 혀끝까지 올라오던 모든 말들이 다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조슈아는 시선을 돌려 정류장에 진입하는 버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조금 돌아가기는 했지만, 넥스트 유어 부근에 도착하는 버스였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돌아보지 않았다.
“…병원을 알아봐요.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버스 문이 열렸을 때, 조슈아는 사람들을 제치고 버스에 올랐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조슈아를 잡지 않았다. 더 말하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럴 것 같았다. 이런 감으로는 주식을 해야 하는데. 괜히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
꾸역꾸역 뒤따라 타는 사람들에게 밀려 버스의 중간까지 왔다. 창문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버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꽉 찬 버스 안에서는 여러 가지 냄새가 났다. 조슈아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꽉 잡았다.
“…미친 거지.”
툭, 조슈아의 입 밖으로 한마디가 새어 나갔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그 말을 들었는지 찌푸린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지만 조슈아는 인식하지 못한 듯 바깥을 바라보았다. 모든 풍경이 빠르게 뒤로 가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제게 올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게 맞았다.
그 속에. 단 한 톨이라도 다른 감정이 있었으면. 제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을 테니까. 아니. 찾아올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미친 게 맞았다.
멀어져 가는 버스를 향해서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봄날처럼 다정하던 얼굴이 순간적으로 무표정해졌다. 조금 전부터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기웃거리며 얼굴을 붉히던 여자들이 눈을 껌뻑이며 달라진 온도 차에 당황하는 사이, 에이드리언은 차도 쪽으로 한 걸음 걸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검정 세단을 바라보았다.
신호를 알아챈 검정 세단이 금세 에이드리언의 앞으로 와 부드럽게 정차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마크가 바로 내린 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에이드리언이 다가오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던 마크가 종이봉투를 발견했다.
“아, 봉투는.”
“내가 들고 갈게요.”
“예.”
에이드리언의 품에 들린 봉투를 받으려 손을 뻗던 마크가 바로 대답하며 손을 내렸다. 에이드리언이 좌석에 앉고 안전벨트를 맸다. 곁눈질로 그 모든 것을 확인한 마크가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전사가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점점 창문 너머의 풍경들이 뒤로 가기 시작했다. 잠시 에이드리언의 표정을 본 마크가 오전 일과 브리핑을 시작했다.
“말씀하신 대로 오전 일정 조정 완료했습니다. 08:20에 그렌트 뉴욕에서 미스터 서랜드와 조찬, 10:30에 티타임 겸 철강 수주 확정 미팅 잡혀 있으며 11:10에 그렌트 브루나이 총괄 책임자와 화상 회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제 정기 총회 이후 메이건 리 이사 측에서 케이지 이사, 에저든 이사 측으로 다음 주 토요일 저녁 약속을 넣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부다비 호텔 관련 수주 결재 이후 마음이 급해진 모양입니다.”
마지막 보고에서만큼은 보스가 조금 웃을 줄 알았는데. 에이드리언은 웃는 대신 푹신한 시트에 몸을 파묻듯 기대었다. 품 안에 있는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이드리언은 봉투를 슬쩍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결국 조슈아 베넷은 샌드위치를 가져가지 않았다.
조슈아 베넷에 대한 보고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필요로 할 때마다 언제든 받을 수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조슈아 베넷이 집 밖으로 나왔다, 집 앞에 있는 빵집에서 샌드위치를 구매했다, 쓰레기를 버렸다, 하늘색 스웨터 등 새 물건이 있어서 따로 빼 두었다. 이직 인터뷰를 보러 갔다, 등 조슈아 베넷에 대한 소식은 하루에 한 번 이상 들을 수 있었다.
당찬 조슈아 베넷은 잘 살고 있었다. 에투왈을 그만두고, 이사를 하고, 틈틈이 다른 회사의 인터뷰를 보면서.
마크가 붙여 둔 수행원은 유능했다. 수행원에게 조슈아 베넷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손바닥을 폈다가 꽉 쥐어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그래 봤자, 제 손바닥 안이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픽 웃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왜 손바닥 안에서 사그라들 거라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다 괜찮아질 일이었다. 할 일은 많았고, 조슈아 베넷은 이후에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습관이 두 개가 생겨났다. 하나는 핸드폰을 자주 확인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동할 때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황금무더기로도 살 수 없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시간이 고작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창밖을 바라보는 데 쓰이다니. 은퇴한 후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여유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체이스 랭튼이 듣는다면, 관자놀이에 검지를 돌리는 시늉을 하며 코웃음을 칠 것이었다.
“헛소리. 세상에! 보스의 시간이 초 단위로 계산되는 거 잊었어? 이동할 때마다 서류에 전화 미팅에 화상 미팅까지. 비서진 이외에 차에 안 태우는 보스 고집만 아니었더라면 차 앞에 수억 싸매고 한마디만 하겠다는 사람들로 대기 줄이 이어질걸?”
하지만 실제로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이동 중에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고, 그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새빨간 머리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늘색 스웨터를 입은 사람은 제법 있었고, 화사하게 웃는 사람은 몇 없었다. 나중에는 사람이 없는 거리에서도 색깔을 뽑아내며 웃었다. 아, 저 색깔은. 딱 거기까지였다. 저 색깔은? 저 색깔이 뭐?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계속 핸드폰에 눈이 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핸드폰을 확인했다. 업무용 핸드폰은 불이 난 것처럼 계속 울려 대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에이드리언은 일하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퇴근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때였다. 띵- 책상 한편에 두었던 핸드폰이 울렸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코트를 집어 들던 에이드리언의 녹갈색 눈이 순간 커다랗게 커졌다. 분명 울린 것은 업무용 핸드폰이 아닌, 개인용 핸드폰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볍게 핸드폰 액정을 건드렸다. 편지봉투 모양의 알림이 떴다. 메시지였다.
참을 수 없었다. 잠시 판단할 여력조차 없이 에이드리언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에이드리언은 스스로에게 조소를 머금었다.
제가 기다리던 연락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챈 순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제가 누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 수많은 거리의 사람들을 보면서, 누구와 어울리는 색깔을 보고 있었는지도 알아차렸다.
조슈아 베넷.
차마 이름을 혀끝으로 토해 낼 수조차 없었다.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생경한 감정이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가슴을 후려쳤다. 조슈아 베넷과 로건 헤네스를 혼동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처음 느꼈던 감정.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으면서 눈을 깜빡이며, 제가 바라보던 사람이 누구인지 계속 찾게 되는 감정. 그리고 명확하게 한 명으로 가려졌을 때.
찾아갈 시간이 된 거라고 생각했었다.
강렬한 빨간 머리에 소년처럼 해사하게 웃을 줄 아는 예쁜 남자.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조슈아 베넷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으니까. 3개월 전이든, 지금이든.
“그쪽과 저녁 먹을 일 없어. 그러니까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날 저녁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는 맞는다고 생각했다. 당황함을 겨우 가라앉힌 채 투명한 갈색 눈으로 저를 쏘아보는 조슈아 베넷은 분명 제가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아침….
“로건과 안 되었나 봐?”
“…병원을 알아봐요.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저를 보며 죽은 눈빛으로 무덤덤하게 독한 말을 내뱉는 조슈아 베넷은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 낯선 사람. 문득 3개월 전의 조슈아 베넷이 떠올랐다. 저를 향해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조슈아 베넷. 그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목소리로 말했는지 떠올리려 하자 날 선 통증이 가슴을 가로질렀다.
늘 손바닥 안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조슈아 베넷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모래알처럼 사라졌다. 제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할 때마다 심장 부근에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매번 닥터를 불러야지…라고 생각만 했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결국 닥터를 부르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더럭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질 거다.
무엇이?
결국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무엇이 괜찮아질 것인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 * *
- 안 그래도 어제도 룩북을 퀵 보냈는데, 지난 시즌 걸로 보냈거든요. 그쪽에서 연락 오고, 에밀리 그걸로 화나 있는데 오늘 에밀리한테 걸려온 전화 내선도 못 돌려서 결국 에밀리가 다시 전화하고. 하여튼 그래서 지금 비서실 분위기 장난 아니에요.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엘라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경쾌했다. 점심시간이 반쯤 지났을 때 걸려온 엘라는 여는 날처럼 “휴, 조슈아. 진짜 내가 조슈아 엄청 그리워하는 거 알죠?”로 말을 시작했다. 조슈아는 커피가 든 머그컵을 들고 탕비실 의자에 앉아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래도 내 열네 번째 후임자인데. 인수인계 하나 못 하고 온 전임자로서는 되게 찔리네.”
그 삼 개월 동안 후임자가 열세 명이나 거쳐 갔다니. 이삼 일에 한 명 꼴로 잘리는 그 험난한 자리에 제가 4년 넘게 앉아 있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전화 너머에서는 엘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인수인계 할 게 뭐 있어요. 에밀리에 지미에 나도 있는데. 그리고 내선 돌리는 건 내가 이미 다섯 번도 넘게 알려 줬단 말이에요. 그것도 엄청 친절하게!
“다섯 번도 넘게 알려 줬으면 음.”
- 그렇죠? 조슈아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래도 한 번만 더 알려 줘. 의지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처음에는 다 어렵잖아.”
조슈아가 피식 웃으면서 엘라를 달랬다. 인수인계를 하나도 해주지 못했다는 얄팍한 미안함 1% 그리고 열다섯 번째 후임자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99%가 버무려진 목소리에 엘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하여튼 조슈아. 알겠어요. 아, 나 지금 가 봐야겠다.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전화 너머로 누간가 엘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인데. 아마 제 후임자이려나? 조슈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고생 많아, 엘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고.”
- 고마워요. 조슈아도요. 좋은 하루!
급한지 서둘러 말한 엘라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부러 어깨를 추어올렸다. 하루의 시작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대체적으로 좋은 하루였다.
조슈아가 탕비실을 나가려 할 때였다. 탕비실 문이 열리더니 엘이 반가운 얼굴로 조슈아를 마주했다.
“아, 조슈아! 여기 있었군요.”
“네. 엘도 커피 마시러 온 거예요? 향이 되게 좋은데.”
조슈아가 머그컵을 슬쩍 들어 올렸다. 엘이 푸스스 웃으며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여기에 마사가 만든 마들렌 같이 먹으면 진짜 좋죠.”
한 층 아래에서 열심히 제빵을 하고 있을 마사 이야기를 하자 조슈아의 기분은 한결 더 나아졌다. 마사의 마들렌은 적당히 달고 적당히 상큼했다.
“안 되겠네요. 엘. 빨리 가서 마들렌 좀 받아 와야겠어요. 같이 갈래요?”
“네. 아, 그것도 중요한데 조슈아.”
“네?”
탕비실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조슈아가 뒤를 돌아 엘을 바라보았다. 엘은 잔뜩 흥분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시간 있어요?”
“퇴근하면 시간이야 엄청 많죠.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어요?”
“오늘 딱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조슈아. 옥수수 피자 먹으러 갈래요?”
대답이 들려온 곳은 엘이 있는 뒤가 아니라 문을 연 앞쪽이었다. 웃음기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앞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가지러 온 건지 머그컵을 든 크리스가 다정하게 웃으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조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실례, 여기에 실이 붙어….”
상냥하게 어깨에 붙은 실을 떼어 주던 크리스가 잠시 멈칫했다. 조슈아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데요, 보스? 그러면 퇴근하고 바로 가는 거죠?”
“네! 우선은 조슈아랑 크리스랑 나랑 가고, 그리고 오늘 피자 끌린다는 사람 있으면 더 가고. 대체로 피터가 많이 가요. 헤더랑 브루노도 가는 편이고요. 셋 다 옥수수 피자 엄청 좋아하거든요. 물론 맥주도. 크리스. 마사한테 마들렌 받으러 갈 건데 같이 갈 거예요?”
조슈아의 말에 대답하던 엘이 힐끗 크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 것도 갖다줄 거지, 엘?”
“하여튼. 엄청 시켜요.”
“우리 사이에 마들렌 다섯 개는 가져다주겠지?”
“하나도 과분한데요?”
엘이 피식 웃으며 조슈아를 이끌었다. 머그컵을 들고 나서던 조슈아가 크리스를 보고 가볍게 웃으며 목례를 했다.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웃음에 손을 흔들던 크리스는 조슈아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슬쩍 피했다. 그것도 어깨를 움츠리면서. 별거 아닌 손길이었는데. 그저 조금 과한 친절로 실밥 하나 떼어 준 것이었는데. 그때 조슈아의 얼굴에 올라온 것은….
거부감.
눈썰미 좋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당연히 놓쳤을 법한, 아주 희미한 거부감이었다. 크리스는 애꿎은 제 손을 쥐었다 폈다. 그리고 뒷목을 매만졌다.
“너무 대놓고 다가갔나 보네.”
아쉬움 섞인 목소리가 잠시 탕비실을 머물렀다 사라졌다. 미심쩍은 직감은 무언가 다른 게 더 있다고 이야기했으나, 크리스는 그냥 제 탓으로 넘겼다.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조슈아 베넷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는 선택지는 크리스 밀러에게 있을 수 없는 길이었으니까.
“새 가족이 된 조슈아를 위하여!”
“위하여!”
벌써 몇 번째 위하여, 인지 모르겠다. 조슈아는 어질어질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잔을 부딪쳤다. 가운데로 네 개의 잔이 모아졌다. 쨍- 하니 잔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는 목으로 넘어갈수록 더 시원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고, 크리스가 그토록 극찬한 옥수수 피자는 알갱이가 톡톡 터지면서 고소한 맛이 나는 게 일품이었다. 맥주를 두어 모금 더 마시고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크리스가 소개한 피자집 이름은 ‘샘의 피자’였다. 채도가 낮은 노란색 조명 아래 갈색 테이블들과 조금 더 짙은 갈색 의자들 그리고 군데군데 있는 흰색과 파랑색 체크무늬 장식 보들은 피자집의 우디한 느낌을 조금 더 강조했다. 이뿐만 아니라 흰색 파랑색 체크무늬 앞치마를 입은 서버들이 노련하게 주문을 받고 있었다. 30개가량의 테이블은 모두 다 만석이었고, 퇴근 후, 후끈하게 달아오른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여기저기서 진동했다.
여기저기를 바라보던 조슈아가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앉았을 때 온 잔은 여섯 개, 그리고 지금 계속 테이블 위를 지키고 있는 술잔은 두 개. 이미 뻗어 있는 피터와 브루노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희가 버그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기분을 알아?” 하며 울분을 토해 내던 피터와 “제발 포스트잇 좀 그만 사 달라고 하라고! 영수증 첨부해!”라고 가랜드 달린 벽을 보며 화를 내던 브루노는 이미 벽에 등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리고….
“어라, 조슈아. 취한 거예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헤더가 피식 웃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더니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잔뜩 풀린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조슈아, 이거 몇 개?”
“헤더. 취한 건 너야.”
“으응, 그런가?”
조슈아의 왼편에 앉아 있던 엘이 헤더의 등을 툭툭 쓸어 주자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헤더가 스르르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잠에 든 것처럼 도로롱도로롱 곤한 소리를 내었다. 조슈아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엘과 헤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은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헤더 술버릇이에요. 턱 괴다가 잠자는 거.”
“깔끔한 술버릇이네요.”
조슈아의 감탄에 엘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곱지 않은 눈으로 피터와 브루노를 흘겨보았다.
“하여튼, 조슈아 입사 축하 기념으로 가볍게 마련한 자리인데. 어떻게, 내일 출근하자마자 조져 줄까요?”
“하하. 아니에요. 스트레스 많이 받은 거 같아 보이는데. 잘 마시고 오늘 다 풀렸으면 좋죠. 그나저나….”
조슈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왁자지껄한 샘의 피자에서 엘은 조슈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슈아는 힐끔 제 오른편을 바라보았다.
물빛 셔츠를 입은 크리스는 피자 한 입을 베어 물다가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제일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모를 일이었다. 피처로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크리스의 앞에는 빈 500cc 맥주잔이 다섯 개도 넘게 놓여 있을 것이었다. 조슈아는 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보스 술버릇, 가만히 웃는 거예요?”
“없는데.”
하지만 대답이 들려온 곳은 엘이 있는 왼편이 아니었다. 웃음기 가득 배인 목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크리스였다. 오히려 엘은 듣지 못했는지 ‘네?’ 하고 되물었다. 괜히 멋쩍어진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취하셨어요?”
“아, 크리스? 취할 리가요. 아마 넥스트 유어에서 제일 술이 셀걸요?”
그제야 화두를 알아챈 엘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말이 맞는다는 듯 크리스는 피처에 담긴 맥주를 제 잔에 가득히 따랐다. 거품이 얼마 올라오지 않게 따르는 기술이 제법이었다. 크리스는 비어 있는 조슈아의 잔에 눈짓을 했다. 조슈아는 아, 하고는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엘이 으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헤더를 툭툭 쳤다. 잔뜩 취했는지 헤더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헤헤 웃었다.
“잠깐 일어나. 바람 좀 쐬러 가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비틀거리는 헤더를 보며 조슈아는 무의식적으로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엘은 익숙하다는 듯 헤더의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거의 끌려 나가듯 나가는 헤더의 뒷모습을 보며 조슈아는 혀를 내둘렀다.
“와. 엘 장난 아닌데요?”
“그러는 조슈아야말로, 술 취한 사람 다루는 게 능숙하던데요?”
크리스가 벽면에 기대어 앉은 피터와 브루노를 눈짓하며 짓궂게 웃었다. 오늘 술에 취해서 이리저리 날뛰던 피터와 브루노를 잠들게 한 사람은 조슈아였으니까.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크리스가 자연스레 쨍- 하고 건배를 했다.
“기본이죠. 그나마 바로 잠들어서 다행이죠.”
“잠 안 들면 맥주잔으로 내리칠 기세던데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조슈아가 장난스레 웃으며 잔을 들고 까딱였다. 그리고 각을 재듯 가볍게 잔을 흔들었다. 반 조금 안 되게 남은 맥주가 출렁였다. 크리스가 소리 내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조슈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가게에서 틀어 놓은 빠른 비트의 노래도, 왁자지껄 시끄러운 가게의 분위기도 그저 편안하게 느껴졌다. 술에 취했나 보다. 조슈아가 생각을 검열할 새도 없이 말이 튀어 나왔다.
“계속 웃기만 하셔서 웃는 게 술버릇인가 했어요.”
“그러는 조슈아야말로 웃는 게 술버릇인 줄 알았어요.”
“네?”
“비서실에서는 이렇게까지 안 웃잖아요.”
가벼운 농담 같은 말에 조슈아가 환하게 웃었다. 둥근 눈매가 자연스레 휘어지면서 눈매 속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술기운으로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동그랗게 올라갔고, 붉은 입술이 말려 올라가며 새하얀 치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크리스가 잠시 멈칫, 하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조슈아는 세상에서 제일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소리 내어 웃었다.
“세상에. 보스! 일할 때 누가 이렇게 웃어요.”
“…그런가요?”
“당연하죠! 일할 때는 엄격하고, 때로는 근엄하고, 진지하게! 그러면서도 적당하게 웃으며 매너 지키고! 그래야 보스한테 누 안 끼치고 보좌 잘하죠! 맨날 웃으면 사람들은 ‘아, 저사람 만만하구나’ 그런다구요. 그러면 일하기 힘들어진다구요. 나도, 보스도.”
보는 사람도 따라 웃을 만큼 환하게 웃던 조슈아가 갑자기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리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꼭 투정 부리려고 입을 댓 발 내미는 어린아이 같아서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큽, 웃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찮은데.”
“네?”
“네?”
“아…니에요.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분명 무슨 말을 한 거 같은데,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크리스의 티 없는 파란 눈동자에 조슈아는 그저 피식 웃었다. 아, 크리스가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 했다.
“아, 그래도 조슈아.”
“네?”
“우리 일할 때 빼고는 그래도 이렇게 웃는 사이 할 수 있는 거죠?”
“그게 무슨?”
“아, 그러니까. 우리가 일적으로 만난 사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하루 이틀 볼 사이는 아니잖아요. 가끔 이렇게 맥주 마시면서 이야기 하는 날도 있을 거고. 또 그러다 보면 저녁도 같이 먹을 테고. 나도 원래 엘이나 브루노나 헤더나 피터랑 하나도 안 친했는데 처음에 창업하고 나서 계속 같이 밥 먹다 친해진 거거든요. 물론 처음에는 나보고 밥맛 떨어진다고 따로 먹자고도 했는데, 지금은 그냥 같이 먹으면서 에이 밥맛없다고 할 정도로 친해졌고. 또 알아요? 계속 친해지다 보면 일할 때도 가끔 웃으면서 장난치고 막 그럴지. 엘이랑 나랑 친한 것도, 다.”
“보스.”
“네, 네?”
나지막하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크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조슈아의 표정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잠시 제가 한 말을 찬찬히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은 미풍에 날아간 한 줌의 재처럼 사라져 버렸다. 혹시 실수한 게 있으려나. 식은땀이 등 뒤로 훅 흐르려던 찰나였다. 무표정이던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당황하면 말이 길어지는구나? 그렇죠?”
“그…런가요?”
새로운 보스는 웃긴 면이 있었다. 조슈아는 맥주잔을 들고 한 모금 더 넘겼다. 입 안에서 씁쓸한 탄산이 훅 터졌다. 포크를 들고 아까 먹던 맥인 치즈를 한 입 더 우물거린 후에야 조슈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죠. 원래 비서랑 보스 관계는 그림자 따라다니는 것만큼….”
“요즘 그림자가 많이 떨어졌다? 빨리 안 와, 조슈아?”
번진 기억 한편에 꽁꽁 숨겨 두었던 빌의 목소리가 조슈아의 말 뒤로 따라왔다. 맨날 센 척하면서도 가끔 제가 엄살을 부릴 때나 눈에 보이는 칭찬을 할 때마다 져 주던 제 첫 보스.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꼭꼭 자물쇠까지 잠가 두었던 기억이 다 풀리다니.
“조슈아?”
갑자기 말하다 멈춘 조슈아가 의아했는지 크리스가 조슈아를 불렀다. 퍼뜩 기억에서 빠져나온 조슈아가 헤헤 웃었다.
“…아무튼 그렇게 친밀한 관계라구요. 그러니까, 보스.”
조슈아가 다시 한번 잔을 들어 올렸다.
“많이 친해져요.”
“…그거 참 좋은데요?”
크리스가 짠, 하고 잔을 부딪쳤다. 뒤늦게 온 엘이 “뭔데요, 나 빼고 왜 분위기 좋아?” 하고 투덜거렸지만 크리스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좋은 분위기였다. 조슈아가 다시 한번 웃었다.
밤바람은 기분 좋았다. 조슈아는 주변의 화려한 불빛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숨을 쉴 때마다 가볍게 맥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소매를 들어 코 근처에 대고 킁킁 대자 기름진 피자 냄새가 났다. 이거야 원, 집에 가서 세탁기에 옷부터 집어넣어야겠다.
그래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조슈아는 흡,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웃었다.
술도 오랜만에 마셨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신 건, 또 같이 저녁 식사를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일어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처음에는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자리가 나중에는 정말 이것저것 재지 않아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즐거웠다.
좋은 정보도 하나 알았다. 조슈아는 대로변의 간판들을 보다가 아까 크리스가 말했던 연하늘색 빵가게 간판을 발견했다. 늦은 시간이라 이미 불이 꺼진 가게 쇼윈도 너머로 냉장 장식장 안에 있는 타르트들이 보였다.
“여기도 맛있다고 그랬는데.”
조슈아가 혼잣말을 하며 타르트들을 바라보았다. 까치나무열매가 올려진 보랏빛 타르트를 보다 보니 아까 크리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리를 파한 직후였다. 브루노와 피터는 택시에 태워 보냈고, 취한 헤더는 제 집에 가면 된다던 엘이 택시를 타고 떠났을 때였다. 조슈아는 조금만 더 걸어가면 버스 타는 곳이 나온다고 했고, 크리스는 밤공기를 조금 쐬다가 근처에 있는 집에 들어간다고 했다.
거리를 걷는 중에 갑자기 나온 이야기는 보통 저녁으로 무엇을 먹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크리스는 보통 피자를 먹는다고 했다. 샘의 피자에서 포장해서 먹거나 아니면 가게에서 먹고 간다고. 그도 귀찮으면 집에서 맥앤치즈를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조슈아는 피자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며 놀리듯 웃었고. 슬며시 웃던 크리스는 조슈아에게 물었다. 보통 저녁에 뭘 먹느냐고. 조금 고민을 하던 조슈아가 대답했다.
“샌드위치나 피자나. 있는 거 먹는 편이에요. 아, 중국 음식도요. 매운 토마토 수프나 에그 누들 같은 거요.”
“중국 음식 좋아한다고요? 나돈데.”
크리스는 새로운 공통점을 발견해 신이 난 사람처럼 박수를 쳤다. 그 모습이 재밌어서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크리스는 대로변을 가리켰다.
“안 그래도 회사 근처에 되게 맛있는 중국 식당이 있거든요. 시간도 되게 늦게까지 하고. 대신 문도 늦게 열지만. 거기 오렌지 비프가 정말 끝내주게 맛있어요.”
“그래요? 거기가 어디예요?”
“…중에 같이….”
“네?”
“…저쪽으로 쭉 가서 ‘파랑새’라고 연하늘색 간판의 빵집이 있거든요. 그 사이로 들어가면 나와요. 무슨 한자로 쓰여 있는 가게인데. 뜻을 들었는데 또 까먹었어요.”
크리스가 부스스 웃었다. 가볍게 바람이 불 때마다 크리스의 까만 머리카락이 아주 조금 나부꼈다. 조슈아는 유심히 크리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리스가 꿀꺽 침 한 번을 더 삼켰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넘어가는 사이, 조슈아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되게 기대되네요. 안 그래도 여기 이사 와서 중국 음식 못 먹었는데.”
아, 오늘은 이 정도면 되었어.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웃음이었다.
“저긴가?”
분위기를 살리는 어둑한 조명들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흰색 간판이 눈에 쏙 들어왔다. 끝이 삐치는 글씨체로는 뜻을 알 수 없는 한자 다섯 자가 쓰여 있었다. 늦게까지 한다더니, 정말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이 시간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문이며 들어가는 곳이 모두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고, 위에는 철로 된 슬레이트가 올려져 있었다. 스무 개 정도 되어 보이는 테이블이 있었고 그중 다섯 개의 테이블에는 손님들이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조슈아가 천천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훅 끼치는 특유의 향신료가 조슈아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바쁘게 서빙을 하고 있던 검은 머리 서버가 조슈아를 힐끗 바라보고는 물었다.
“투 고(to-go)예요?”
“네.”
“저기서 바로 주문하시면 돼요.”
서버가 가리킨 곳은 주방 앞이었다. 이미 사람 너덧이 서 있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 했다.
“나는 에그 롤이랑 치킨 수프. 선배는요?”
“뭘 물어. 보나마나 가지 튀김이지.”
“잘 아네. 나 가지 튀김이랑 매운 토마토 수… 조슈아?”
이제야 조슈아를 보았는지, 남자가 설마 하는 목소리로 조슈아를 불렀다. 조슈아와 눈을 마주치자 남자의 눈에 확신이, 그리고 약간의 당황함이 묻어났다.
피곤에 찌든 사람들 사이에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조차 없었는지 잔뜩 구겨진 옷을 입고서도 씩, 장난 어린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저 강렬한 빨간 머리 남자는 조슈아가 아주 잘 아는 남자였다. 갈색 눈동자도. 조슈아보다 조금 큰 키도. 다정한 목소리도.
“…오랜만이네요. 로건.”
조슈아가 설핏 웃었다. 빨간 머리 동맹군이었다.
가만히 있는 삼 개월 동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지나가다 만나면 어떻게 할까. 누구를? 그들을.
그 개자식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시간이 금인 사람이니 당연히 지나가다 볼 일은 없겠지-물론 그 뻔뻔한 얼굴로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빌은 아주 드물게 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자신은 다시 이 업계에 취업할 거고, 그러다 보면 한 번은 마주칠지도 모른다. 아, 아닌가? 어차피 연말 편집장 파티 때도 대개 에밀리가 갔으니 볼 일이 있으면 에밀리를 더 보려나?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을 거 같다. 어쩌면 그냥 되게 오랜만에 출근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장난치다, 그러다 제 갈 길 가고. 그러지 않을까 했다.
에투왈 팀은 마주치면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이야기 하겠지.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엘라나, 가끔 술 한잔하자고 연락 오는 지미와 반갑게 인사하고 다시 또 연락하고. 그렇게 지낼 것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제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말문을 터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잘, 지냈, 아, 음. 뭐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제 빨간 머리 동맹군.
로건 헤네스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며 말을 바꿨다. 조금 전까지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주문을 하는 걸 도와주고, 잠깐 같이 앉을 수 있냐고 묻던 로건 헤네스와는 너무나도 달라 보였다. 저와 마찬가지였다.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는 모습.
그제야 이 우연찮고 비현실적인 만남이 피부에 와닿았다. 아, 진짜구나.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로건 헤네스구나. 제 머리카락처럼 강렬한 새빨간 머리카락이,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다 로건 헤네스구나.
조슈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어떤 말을 골라야 할까, 밤을 새게 만들었던 고민이 다 무색해질 정도로 할 말이 툭 튀어나왔다.
“잘 지냈죠. 당연히. 로건은요?”
“나도요. 잘 지냈어요.”
외국어 회화 1장에나 나올 법한 뻔한 대화였다. 안녕, 잘 지냈니? 응, 잘 지내. 너는? 이 뻔한 대화가 반가워서, 조슈아가 씩 웃었다. 로건이 마주 보며 웃었다. 진짜 만났구나, 현실감이 와닿자 이제는 웃겼다.
“갑자기 보니까 조금 당황했는데. 되게 별거 아닌 거 같네요.”
이 상황이, 이 만남이.
조슈아는 로건의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편안하게 웃었다. 다행이었다. 저도 그랬으니까. 그러는 사이, 쟁반을 든 서버가 로건과 조슈아가 앉은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쟁반 위에는 그릇이 많았다. 일회용 포장 용기 안에 들어가려다 로건이 “잠시만요! 저 먹고 갈게요!” 하고 주문을 바꾸었던 가지 튀김과 매운 토마토 수프까지 말이다.
“맛있게 먹어요, 로건.”
“고마워요, 메이.”
서버가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의 앞에는 에그 누들과 매운 토마토 수프가, 로건의 앞에는 가지 튀김과 매운 토마토 수프가 세팅되었다. 서버는 자연스레 로건에게 숟가락과 포크를 놓아 주었다. 조슈아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한 서버가 쟁반 위에 있는 숟가락과 포크를 집어 들었다. 조슈아가 말했다.
“아, 저는 젓가락 주세요.”
서버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무젓가락을 건넸다. 그리고 농담을 하듯 로건을 향해 말했다.
“거 봐요. 젓가락 쓰는 미국인들도 많다니까요? 아, 미국인 맞죠?”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로건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잖아요, 메이. 내 주변에서는 거의 처음인 거. 다들 젓가락질만 하면 음식이 날아다닌다니까?”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서버가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함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기분 좋게 웃던 로건이 포크를 잡고 가지 튀김을 푹 찍었다. 속에 돼지고기를 꽉 채운 채 바삭하게 튀긴 가지 튀김은 보기만 해도 식욕이 돌 정도로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조슈아에게는 아니었다. 조슈아는 애써 제 토마토 수프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수프를 한 입 떠먹자 속에 따뜻한 기운이 훅 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조슈아는 다시 한 입 먹었다.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것 같기는 하지만 정확히 무슨 맛인지 느낄 수는 없었다. 조슈아가 로건 몰래 피식 웃었다. 설마 맥주에 마취라도 된 걸까? 애써 어깨를 으쓱거린 조슈아가 장난스레 한마디 했다.
“이거 해장에 좋은데.”
“아, 술 마시고 왔어요? 그러고 보니 얼굴이 조금 빨간 거 같은데?”
“정답.”
“와, 진짜 부럽다. 나는 3주째 병원에서 살았는데.”
로건은 부럽다는 듯 가볍게 입술을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그러다 갑자기 소매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다 웃었다.
“윽, 옷에서도 병원 냄새 나는 것 같아요.”
“소아과도 많이 바빠요?”
“원래는 이렇게까지 바쁜 건 아닌데. 요즘 공부 더 하고 있거든요. 그냥 퇴근 안 하고 병원에 붙어 있는 거죠, 뭐.”
“그거 멋진데요?”
조슈아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직장인의 숙명처럼 퇴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 공부하기 위해 남아 있다니. 저런 게 의사의 사명감인가? 포크로 가지 튀김을 콕 찍어 한 입 베어 문 로건이 피식 웃었다.
“조슈아, 진짜 좋은 사람인 거 알죠? 어쩌면 이렇게 사람한테 칭찬하는 게 자연스러워요.”
“로건이 진짜 좋은 사람이어서 그렇죠, 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로건이 커다란 눈을 다정하게 휘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다시 수프를 바라보았다. 왜 하필 매운 토마토 수프를 시켰을까? 여길 보나 저길 보나 눈이 아플 정도로 빨간색투성이다.
저 새빨간 머리카락이, 제 눈동자와 비슷한 갈색의 다정한 눈이. 로건 헤네스 역시 삼 개월 전의 로건 헤네스와 똑같았다. 아, 사람 위해 주는 상냥한 목소리도.
조슈아는 의식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다. 제법 연습한 티가 나는 젓가락질로 에그 누들을 돌돌 말아 한 입 먹었다. 마찬가지였다. 보들보들한 면을 우물거리는데, 잘 볶아진 채소를 씹는데 턱은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로건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그러니까 로건 헤네스와 우연히 만나 함께 동석을 하고 밥을 먹는 이 비현실적인 우연을 제가 100% 이해한 건 아니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그 개자식이 찾아왔을 때는 당연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있다. 하지만 로건에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돌아갈 수 없는 예전처럼 대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로건은….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로건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멋쩍게 웃으며 냅킨을 집어 제 입가로 가져갔다.
“…? 혹시 나 뭐 묻었어요?”
“…아니에요.”
조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로건 헤네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냥 주변에 사람 잘못 둔 사람이니까.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제야 조슈아 베넷은 조금씩 음식에서 맛을 느꼈다. 수프를 먹고 에그 누들을 반복적으로 먹으며 로건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날씨에 관한 이야기. 로건이 새로 공부하는 이야기. 그 와중에 조슈아는 제 이야기를 뺐다. 로건은 좋은 사람이어서 조슈아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그때, 빌이. 아.”
병원에 입원한, 보딩스쿨 동창 이야기를 하던 중 무심코 빌의 이름을 꺼낸 로건이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하긴,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 에이드리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유추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떠나고, 왜 에투왈까지 떠나게 되었는지.
조슈아는 수프를 한 입 더 떠먹었다. 매운 토마토 수프는 제이콥의 식당만큼이나 맛있었다.
…아쉽게도, 다시 올 일은 없겠지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 식당 안의 공기와는 또 다른 시원한 공기가 조슈아의 코트 자락에 파고들었다. 향신료에 둔하게 마비되었던 콧속으로 서늘한 밤바람이 스몄다. 조슈아는 왼손에 든 봉투를 한번 들어 보였다. 내일 아침,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아침에 출근하기 전 먹을 마지막 만찬이었다. 일회용 도시락에는 딤섬이며 오렌지 비프, 에그 롤과 달걀 수프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조슈아와 달리 로건은 빈손이었다. 로건은 기지개를 펴듯 팔을 위로 쭉 올린 다음에 으으, 나지막하게 신음을 뱉었다. 조슈아가 웃자 로건이 나른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바깥바람 쐬니까 팔다리가 다 저리네요.”
“병원 가면 더 저리지 않아요? 좁은 침대에 끼어서 자고.”
“오, 조슈아. 의학 드라마 많이 봤나 보네요?”
“한때 ‘그레이 아나토미’가 제 전공이었죠.”
으스대듯 말하는 조슈아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로건은 어쩐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저보다 아주 조금 작은 남자인데. 비슷하다면 비슷한 특징을 가진 저 남자가 웃을 때면 꼭 어린 시절의 빌을 보는 것처럼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어서. 어쩌면 빨간 머리 동맹이라는 공통점 아래, 계속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로건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조….”
“로건.”
하지만 조슈아가 한발 빨랐다. 로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며 나올 말을 기다렸다. 조슈아는 잠시 로건을 보고 입가를 올렸다.
“사실, 아까 꿈인 줄 알았어요. 왜 한여름 밤의 꿈 같잖아요. 이 넓은 뉴욕에서. 로건이 자주 가는 중국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아니다. 지금은 봄이니까 봄밤의 꿈?”
로건 헤네스는 좋은 사람이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어른스럽고. 그러면서 배울 점 많고 옆에 있으면 따뜻해지는 그런 사람.
하지만 지금 계속 보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로건 헤네스는 아무 잘못 없고, 오히려 아주 좋은 사람일지라도. 그래도 지금 당장은. 그 기억을 떠올리는 모든 것은 다 뒤로 하고 싶었다.
조슈아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로건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조슈아의 손을 잡았다. 눈치 빠른 로건은 제 말을 다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조금 남은 미안함을 지우고, 대신 아쉬움 담뿍 든 얼굴로 씩 웃었다.
“잘 지내고요. 오늘 저녁 같이 먹어서 좋았어요.”
“나도요. 반가웠어요.”
담백했다. 마치 이게 가장 이상적인 안녕, 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볍게 맞닿은 악수가 끝나고 먼저 걸음을 옮긴 사람은 로건이었다. 조슈아가 먼저 가지 않을 것을 알기라도 하듯 말이다.
로건은 한 번 뒤돌지 않았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조슈아 베넷은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계속해서 치밀어 올라오던 말 한마디가 있었다.
‘그 전화 이후로, 에이드리언 그렌트. 만난 적 있나요?’
정말 확실하게 거절당해서. 그래서 정신이 나가서 제게 온 걸까. 하지만 이 강렬한 궁금증은 다시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푹 꺼졌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이제 개자식도, 빌도, …로건도 볼 일 없는 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 * *
“어떻게 하죠? 오늘도 감독님 문 안 여실 것 같은데.”
마크 웹디즈드는 제 옆에서 포기한 듯 한숨을 쉬는 마리 테사를 바라보았다. ‘그’ 앤드류 맥카디의 몇 없는 수제자. 데뷔와 동시에 유수의 영화제를 휩쓴 감독. 스승의 칩거 소식을 듣자마자 영화 제작을 중단하고 바로 뉴욕으로 날아온 마리 테사.
삼 개월 전, 마리 테사를 봤을 때만 해도 이렇게 나란히 서서 이야기-한두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를 나누게 될 줄 몰랐는데. 마리 테사는 현관문 앞에 서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막았다. 마크는 두어 걸음 물러난 상태에서 팔짱을 끼고 메간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어딜 들어와요? 당장 나가요. 불법 침입으로 신고하기 전에.”
“유감이지만 미스 테사. 지금 제가 들어온 건 불법 침입이 아니라 계약 불이행에 따른 정당한 방문입니다. <어제의 당신에게> 크랭크인 날짜가 지났거든요.”
“바로 변호사 부를 거야.”
“불러도 소용없을 겁니다. 저 역시 변호사를 대동했거든요. 참고로 미스터 맥카디의 방문을 부술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은요.”
오호. 매번 따로 일해서 몰랐는데. 메간 트레이너는 마크가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준으로 일을 했다. 마크가 메간에게 완전히 일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을 때, 마리 테사는 총을 들었다. 저 앞에서 계약서를 들고 있던 메간은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뒷걸음질 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간신히 총을 빼앗은 뒤 그녀를 제압했다.
첫인상부터 미친 사람이라고 착각하기에 딱 좋았던 여자. 기세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정말 죽이겠거니, 했던 여자. 하지만 지금 마리 테사는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앤드류 맥카디가 가장 좋아한다는 특제 치즈 샌드위치를 들고 있었다.
이제는 제게 동질감이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칩거하는 스승과 그 스승이 걱정되는 제자. 그 스승을 꺼내기 위해 매일같이 이곳으로 퇴근을 하는 보스와 그 보스를 수행하는 비서.
어차피 앤드류 맥카디가 각본 집필할 때 혹은 집중할 때에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게끔 안에 통조림과 물도 많다고 하는데. 하지만 마크는 그 말은 하지 않는, 현명한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마크는 닫힌 문 앞 소파에 앉아 있는 제 보스를 바라보았다. 분명 마리 테사의 말이 들렸을 텐데. 보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우아하게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보스가 앉은 초록색 실크 소파는 2주 전에 보스의 지시로 문 앞에 가져다 놓은 보스 전용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2주째였다. 보스가 미스터 맥카디의 집으로 퇴근을 시작한 것은.
“미스터 맥카디의 집으로 가죠.”
어느 날과 같은 퇴근길이었다. 안전벨트를 맨 보스가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점심 때, 급하게 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여기 괜찮은데요.” 말할 때처럼.
옆에 앉은 운전기사의 시선을 느끼며 마크는 뒷좌석을 살짝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서류를 응시하고 있었다. 거의 두 달 반 동안 앤드류 맥카디 집에서 살다시피 하던 메간 트레이너는 오늘 오전 핏발 잔뜩 선 눈으로 와서 말했다.
“모르겠어요, 마크. 어떻게 해도 문이 안 열려요. 진짜 그냥 도끼로 문 부숴 버릴까 봐 잠깐 나왔어요.”
하필 그때 보스가 나온 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고.
마크는 잠시 침을 한 번 삼켰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보스.”
원래 보스가 제게 지시한 일이었다. 앤드류 맥카디 정도면 제가 갔어야 했는데, 메간이 두 달을 넘겼을 때라도 갔어야 했는데. 다 제 탓이었다. 적어도 아까 점심시간에라도 갔어야 했는데. 내일 가야겠다는 안일한 생각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아니요. 지금 내가 가죠.”
마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운전기사에게 맥카디의 집 주소를 알려 주는 게 전부였다.
대체로,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하루는 아침 5시 반부터 시작됐다.
마크 웹디즈드가 보스의 침실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마크는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불필요한 인사치레 대신 오전 일과를 브리핑한다. 에이드리언은 오로지 그만을 위해 만들어진 슈트를 차려입은 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마크가 건넨 태블릿 PC의 기획안을 보며 마크의 브리핑을 듣는다.
차로 이동하는 시간, 식사를 하는 시간 등 필수적인 시간마저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무언가를 했다. 외국에 있는 그렌트 호텔 지사장과 화상 회의를 하거나, 이사들과 식사 약속을 잡는다거나. 이미 이동하면서 해야 할 회의가, 앞으로 해야 할 식사 약속들이 족히 세 달치는 밀려 있었다.
저녁 식사에 당연하게 치러지는 야근까지. 퇴근을 하는 시간은 대개 정시였지만, 마크를 비롯한 비서진들은 모두가 알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수면 시간은 다섯 시간 내외였고, 퇴근을 해서도 일거리를 잡고 있을 것을.
그 일상이 흐트러진 것은 단 몇 개월 만이었다. 보스의 ‘그분’과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 보스는 숙소를 옮겼다. 그리고 삼 개월 전 보스는 다시 원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다였다.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왜 계속 달라지는 걸까.
아침에 출근을 늦추고 작은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를 사고, 퇴근을 한 후 미스터 맥카디의 집으로 오고. 그 누구도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설득력으로 설득을 하는 대신 앤드류 맥카디에게 인사 한 번 하지 않고 그의 방문 앞에 앉아 있다가 제 집으로 가고.
왜 계속.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전과 다른 행동을 하는 걸까.
마크는 소파에 앉아 있던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았다.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 삼 개월 전이나, 반년 전이나. 심지어 제가 모시기 시작했던 그날과 겉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데.
그때였다.
“가, 감독님!”
옆에서 마리 테사가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눈을 의심하던 마크는 마리 테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제가 본 게 진짜라는 것을 실감했다. 철옹성 같던 문이 아주 조금, 그리고 조금 더 열렸다. 그러더니 앤드류 맥카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에 안경을 쓴 노인. 이전에 봤을 때는 풍채 좋다, 생각할 정도로 큰 체격에 넉넉한 배 둘레를 자랑하던 사람이 삼 개월 만에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눈 밑과 뺨이 움푹 들어갔고, 옷 아래 어깨가 야윈 게 훤히 보였다.
하지만 그 마른 모습보다 더 눈에 박힌 건 시뻘건 눈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 버석하게 마른 채 충혈된 눈. 보기만 해도 눈을 깜빡이게 될 정도로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앤드류 맥카디는 성성하게 모두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 안에서 삼 개월 동안 은둔 생활을 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랜만에 뵙네요. 미스터 맥카디.”
모두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에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앤드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앤드류는 잠시 그 손바닥을 바라보다 가볍게 악수를 했다.
“오랜만이네요. 안 그래도 메간이 자주 왔었는데. 최종 보스 등장이네요.”
“<어제의 내일에게>, 영화화 일이니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볼 일 없겠네요. 내 계약 조건 알죠? 니콜라….”
앤드류 맥카디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침을 삼키는 것 같기도 했고, 마음을 가다듬는 것 같기도 했다. 수십 분 같은 몇 초가 지나고, 앤드류 맥카디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스 오브라이언. 그가 아니면 나는 영화 안 찍어요.”
“미스터 맥카디도 아시겠지만, 저는 아주 바쁜 사람입니다.”
“알죠. 그러니 더 이상 시간 낭비 하지 말아요. 위약금이 있다면 마리한테 내 변호사 불러 달라고 하고.”
“미스터 맥카디. 잘못 알아들으신 모양이네요.”
“그게 무슨….”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 어느 스크린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매혹적인 미인이 웃자 수백 송이의 장미가 단번에 피어난 것처럼 주변이 화사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에이드리언 그렌트에 대해 적의를 드러내던 마리 테사까지 순간 얼굴을 붉힐 정도로.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집중했다. 그 순간, 핏빛처럼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저처럼 바쁜 사람이 2주를 기다렸습니다. 적어도 5월에 크랭크인을 한다는 전제로 4월 중순까지는 계속 기다릴 용의가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다시 촬영장으로 가게 할 거고, <어제의 당신에게>가 극장에 걸릴 때까지 우리는 계속 봐야 합니다.”
태생부터 명령이 자연스러웠던 남자. 누군가에게는 오만과 거만이 될 수 있는 말과 어조, 행동 그 모든 것들이 꼭 몸에 맞춘 슈트처럼 잘 어울리는 남자.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져들게 하는 남자. 그 말이 지켜질 거라 모두가 확신하는 남자.
그 남자가 에이드리언 그렌트였다.
“…내가 아니더라도 찍을 감독은 많아요. 저기 있는 마리 테사라든가 아니면 맥도 괜찮겠네요. 물론 개런티는 알아서 더 얹어 주고요.”
“물론 미스 마리 테사와 미스터 맥의 실력에는 당신과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당신에게>는 당신이 가장 적임자예요. 당신의 감성과 기법이 제가 이 영화를 영화화하면서 가장 알맞겠다 생각했어요.”
“피츠버그 때문이라면….”
“물론 미스터 피츠버그 역시 당신을 고집해요. 그러니 내게 미스터 피츠버그를 설득하라고 하는 대신 다시 한번 영화를 어떻게 찍을 건지 그걸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겠네요.”
앤드류 맥카디가 주름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안경을 추어올렸다. 한순간 날카롭게 벼려진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살폈다. 마치 무언가를 찾듯 샅샅이. 그 노련한 눈빛이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다 거친 후에, 앤드류 맥카디가 입을 열었다.
“왜 <어제의 당신에게>에 이렇게까지 합니까?”
“…무슨 말이죠?”
“사실 그냥 제작을 포기하면 되지 않나요? 어차피 누군가는 당신의 뒤를 이어 영화 제작할 텐데.”
게일 피츠버그와 그의 출판사가 판권을 내걸 당시, 수많은 영화 제작사들이 달려들었다. 게일 피츠버그가 감독은 앤드류 맥카디라고 못을 박았어도 유수의 제작사들은 돈다발을 들고 제발 자신들과 계약을 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실제로 그렌트 제작사가 제작을 포기한다면 그 판권을 팔아 달라고 달려들 제작사가 얼마든지 있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피식 웃었다.
“이건 그렌트사에서, 그리고 당신이 영화 제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왜죠?”
왜 미스터 그렌트와 제가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하죠?
앤드류 맥카디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덧붙이는 앤드류 맥카디의 말을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머릿속에 누군가 스쳐 지나갔다. 새빨간 머리카락의 새하얀 얼굴. 소년같이 예쁘장하고 말간 얼굴로 환하게 웃을 줄 아는 남자.
“…내가 그것까지 미스터 맥카디에게 이야기해야 하나요?”
앤드류 맥카디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잠시, 저 완벽한 남자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거래는 공평해야죠. 나는 이미 미스터 그렌트에게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잖아요. 내게 말할 준비가 되면 와요. 그때는 정식으로 커피 마시며 이야기를 하죠. 물론 영화화에 대한 이야기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내가 당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앤드류 맥카디가 콜록콜록 잔기침을 했다. 넋 놓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 테사가 얼른 물 한 잔을 가져와 앤드류 맥카디에게 건넸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앤드류 맥카디가 물을 마시는 사이, 문 바로 안쪽에 치즈 샌드위치를 놓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앤드류 맥카디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지만 치즈 샌드위치를 꺼내 놓지는 않았다.
이제 다시 들어갈 시간인 듯했다. 앤드류 맥카디는 문을 잡고 다시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덧붙이듯 말했다.
“아참, 메간은 너무 탓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그래도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온 외부인은 그녀가 유일하거든.”
그 말과 함께 다시 문이 닫혔다. 탁. 그 소리가 마치 큐시트라도 되듯, 멈춰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말문을 터트렸다.
“세상에, 감독님 뵌 거 너무 오랜만이야.”
“아까 잡았어야 했던 거 아냐?”
“에이, 감독님이 누구한테 잡힐 성미셔? 그런 거라면 마리가 냅다 방 안으로 들어갔겠지.”
“그나저나 아까 감독님이 이야기하셨다는 게 뭐야?”
“그걸 누가 알겠어.”
“다 시끄럽고, 자기 할 거나 해!”
힐끔거리는 시선들, 수군대는 입들을 막은 것은 마리 테사였다. 할 일이 없냐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젓던 마리 테사가 아주 잠시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돌아섰다.
이내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마크를 향해 뒤돌아섰다. 마크는 괜히 제 발 저리는 기분에 바짝 서서 보스의 지시를 기다렸다.
“이제 가죠.”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빙그레 웃었다. 예의 그 완벽한 웃음으로. 그러더니 아, 나직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건 이제 치워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가리킨 것은 그의 전용 소파였다. 이제 더 이상 이곳으로의 퇴근은 없겠구나. 마크는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점 하나가 떠올랐다.
도대체….
보스는 왜 그렇게 이 영화에 신경 쓰시는 걸까.
하지만 마크는 이번에도 현명한 선택을 택하기로 했다. 어차피 해소되지 않을 의문이면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게 편했다.
그래도 메간이 잘릴 가능성이 적어졌다고, 그 다행스러운 소식 하나 들고 돌아가는 것으로 족했다.
* * *
엘라는 눈만 깜빡거렸다. 오늘따라 화장이 잘 되어 하필 속눈썹도 제일 긴 걸로 덧붙였는데, 눈을 떴다 감을 때마다 팔랑거리는 소리가 날까 무서웠다. 목이 타는데, 바로 앞에 있는 텀블러를 집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잔이 움직이며 딸깍이는 소리라도 난다면…. 엘라는 등골이 섬뜩해졌다.
이럴 때 지미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필 ‘이 사단’이 나기 바로 전 룩북 퀵으로 외근을 나갔다. 아마 돌아오려면 30분은 더 걸릴 것이다. 하긴, 돌아온다 해도 이 분위기를 본다면 바로 문워크를 해서 도망갈 거고.
그 순간이었다.
“…미스 롭.”
“네, 네?”
얼음장처럼 차가운 에밀리의 목소리 뒤로 가냘픈 목소리가 대답했다. 엘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파티션 아래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무서웠다. 분명히 보면 얼어붙을 것을 아는데도 슬금슬금 눈이 위로 올라갔다. 엘라는 일을 하는 척, 워드 파일을 켰다. 그리고 자판 위로 손을 움직였다. 타닥타닥, 조용한 사무실 위로 제 타자 소리만 동동 떠다녔다. 적막이 이어지자 엘라는 나무늘보처럼 미세한 움직임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물론 언제든 시선은 모니터로 향할 수 있게 적당히 고개를 들어서.
파티션 너머로 에밀리의 자리가 보였다. 에밀리는 앞에 서 있는 미스 롭에게 가려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에밀리의 표정이 안 보인다는 게.
엘라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미스 롭, 페넬로피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조슈아의 열네 번째 후임자. 다른 곳에서 비서 인턴 경험을 다섯 번이나 했다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면접을 봤던 게 며칠 전인데. 저렇게 떨다가는 정말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페넬로피는 눈만 깜빡였다. 분명히 꿈일 거야, 이건 꿈일 거야. 하지만 눈을 두 번 더 깜빡여 봐도 제 앞에 보이는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빠뜨리지 않고 완벽하게 틀어 올린 채, 속눈썹 한 올까지 빈틈없이 마스카라가 된 얼굴. 일자로 꾹 다물린 붉은 입술. 그리고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차가운 눈동자.
비서를 꿈꾸면서 알게 된 제 롤 모델 에밀리 스콧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에투왈에 입사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 없었다. 아니, 면접을 보러 온 날부터.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 1위에 빛나는 빌 스웰딘이 편집장. 비서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유능한 에밀리 스콧이 퍼스트 비서. 처음 면접을 보러 온 날부터 페넬로피의 행복 회로는 풀가동했었다.
오 마이, 내가 정말 빌 스웰딘의 세컨드 비서 면접을 보는 거야? 그 빌 스웰딘? 와우. 여기서 일한다면 정말 빌 스웰딘을 볼 수도 있겠지? 그러다 보면 인사도 할 수 있겠고, 가끔 회식도 할 수 있고. 정말 그러다 보면 혹시 알아?
그 상상의 끝은 언제나 똑같았다. 이제 곧 스물다섯 살이 된 페넬로피 롭은 핑크빛 상상에 가득 잠겼다.
“…내가 분명 내 책상 위에 있는 ‘결재 커버’ 보스 책상에 놓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 상상 중에 이런 일은 없었다. 페넬로피는 눈에 힘을 꾹 주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가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에밀리는 화려한 호피무늬 네일이 된 손으로 책상 위에 올려진 결재 커버를 꾹 눌렀다. 그 옆에는 여러 장의 프린트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제야 페넬로피의 머릿속에 아까 전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회의에 올라가던 에밀리가 ‘결재 커버’에 대해 이야기한 것, 그리고 에밀리가 나간 뒤 들어온 빌 스웰딘. 처음 보는 빌 스웰딘은 화보나 브라운관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빛나는 남자였다.
보슬보슬해 보이는 진갈색 머리카락에 깊은 진회색 눈동자. 모델다운 키와 체격. 그리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잘생긴 얼굴.
“아, 저.”
새로 온 세컨드 비서라고 인사할 새도 없이 빌 스웰딘이 편집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빌을 따라 들어온 지미나 엘라는 원래 보스가 그렇다고 한마디 해 줬지만 페넬로피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블라인드까지 드리운 저 편집장실 안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보인 것은….
결재 커버와 따로 있는 프린트들.
아… 제 잘못이다. 이 멍청한 페넬로피 롭. 물론 빌 스웰딘은 아주 멋졌지만 너무 떨려서 서류를 놓고 나오기까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저, 그게….”
머릿속에 온갖 말들이 맴돌았다. 사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제가 바로 옆에 있는 것까지 가져가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실은 아까 에밀리 목소리를 잘못 들어서. 수없이 많은 변명들이 머릿속에 실처럼 이어 나왔다. 하지만 페넬로피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페넬로피가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 대학에서도, 심지어 인턴 때도 하지 않은 실수였다. 에밀리의 책상 끝이, 그리고 제 구두 앞코가 보였다. 앞코가 점점 번져 보였다.
띠링- 핸드폰 알림음이 들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있다가 앞에서 가벼운 한숨이 들렸다. 그리고 에밀리가 단호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
“…미스 롭. 자리로 돌아가요.”
에밀리가 자리에 일어나는 소리, 서류 커버와 종이를 챙기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에밀리가 제 옆을 지났다. 똑똑. 편집장실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에밀리가 들어간다고 말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페넬로피는 책상 끝을 잡고 주저앉았다.
어느새 다가온 엘라가 괜찮냐 묻는 소리가 멀어졌다. 페넬로피의 머릿속에 딱 한 문장이 떠다녔다.
끝. 났. 다.
하하하. 페넬로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 텅 빈 표정을 보고 엘라가 쯔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하필 그 서류를 줬어요. 페넬로피.
“할 거야.”
에밀리가 들어가자마자 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밀리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뒤 소파 쪽으로 갔다. 빌은 모처럼 똑바로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늘어져 있지도, 낮잠을 자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지도 않았다. 빌의 손에는 그 ‘문제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잘못 드린 겁니다.”
에밀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빌이 한쪽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에밀리가 아니라면 내가 잘못 봤나? 할 정도로 아주 아주 조금 올라간 정도였다. 하지만 에밀리에게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하긴, 이렇게 똑바로 앉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눈이 반짝이는 것 역시 근 3개월간 볼 수 없었던, 진짜 ‘빌 스웰딘’이었다.
“잘못 준 거든 상관없어.”
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글씨로 ‘특집! 에투왈의 전설에 대해’라고 쓰인 저 서류는 어젯밤 에밀리가 퇴근도 못하고 들여다본 서류기도 했다. 너무 많이 봐서 무슨 내용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잡지 창간 3주년을 맞아 잡지계의 전설 에투왈, 그의 편집장인 빌 스웰딘과 대담 형식으로 인터뷰를 한 뒤 특집 기사를 내고 싶다는 인터뷰 요청이었다. 너무 흔해 빠진 소재였다. 이미 십몇 년 전에 한 칙릿 영화의 유행으로 ‘편집장과의 대담’이 한창이던 때. 그때에나 유행했을 법한 소재였다. 아무리 레트로가 돌아왔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이렇게 무시하면 될 법한 인터뷰 요청이었지만, 딱 하나가 걸렸다.
바로 넥스트 유어에서 온 요청이라는 거, 딱 그거 하나.
빌은 알고 있었다. 조슈아가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한 게 바로 저니까. 그러니까, 이건 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이메일로 보내실 수 있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아까 들어온 비서 시켜서 답신 보냈어. 내일 오후야. 내일 같이 가.”
“…답신은 바로 취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만에 일을 할 의욕이 나신다니, 저도 참 기쁘네요. 이왕 하시는 김에 파티도 가시지 않으시겠어요?”
“에밀리. 나 장난하는 거 아냐.”
“유감이지만 보스.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에밀리.”
“조슈아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빌은 침을 한 번 삼켰다. 에밀리가 큰소리로 말한 것도 아닌데.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손발이 단번에 저릿해지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처음은 아니었다. 손발이 저릿해지고 침을 삼키지 못할 만큼 생목이 올라오고 가슴이 온통 뻐근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기분.
이미 두 번이나 겪어 봤다. 조슈아 베넷이 알아 버린 날, 그리고.
빌은 질끈 눈을 감았다. 새까만 공백이 둥둥 떠다니면 잠시나마 멎을 줄 알았는데. 완전 닫아 버린 머릿속에 마지막 모습이 박힌 것처럼 떠올랐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 버석하게 말라 버린 채 텅 비어 버린 갈색 눈, 다 부르터 버린 입술 그리고 새하얀 목 부근에 나 있던 붉은 자국.
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에밀리는 동요 하나 없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빌은 그대로 소파에 눕듯 기대었다. 목을 뒤로 기대자 천장이 보였다. 새하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하나 달려 있었다. 아주 예전에, 조슈아 베넷과 저 샹들리에에 있는 유리 조각 장식의 커팅 면이 몇 개인지에 대해서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저 커팅 면이 어떻게 열여섯 개야. 열다섯 개지.”
“아니라니까요? 저거 열여섯 개예요! 제가 어제 의자 들고 와서 들여다보며 세었다니까요?”
“열다섯 개야.”
“아, 진짜! 아니면 지금 한번 세어 볼까요?”
“세면 뭐 해. 어차피 열다섯 개인데.”
“아, 보스!”
물론 조슈아 베넷이 졌다. 어떻게 해도 조슈아 베넷이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에밀리나 지미라면 잘 모르겠어요, 하고 넘길 만한 질문에 끝까지 근성 있게 덤비더니 동생 봐주는 듯 휴, 한숨을 쉬고 매끄럽게 웃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알겠어요. 보스 말이니까 커팅 면 열다섯 개라고 칠게요. 보스 말이라면 열여섯 개도 열다섯 개 되는 세상에.”
“조슈아!”
낼름 편집장실을 나가면서 조슈아가 웃었다. 빌이 저도 모르게 따라 웃을 정도로.
그러니까, 조슈아 베넷은 그런 사람이었다.
“알아. 그래도.”
그래서 그게 마지막 모습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 조슈아 베넷은 웃는 게 잘 어울렸다. 강렬한 빨간 머리도, 다정한 갈색 눈동자도, 가까이에서만 봐야 언뜻 보이던 콧잔등의 주근깨와 훅 풍기던 달콤한 냄새. 그걸 다 한순간 날려 버리는 해사한 웃음.
그냥 예전처럼 웃어야 했다. 모두가 다 따라 웃을 정도로, 환한 웃음.
그 환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빌이 부드럽게 웃었다. 날카로웠던 눈매가 휘어지고, 진회색 눈동자가 애틋해졌다. 매번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다정하게 올라갔다. 에밀리는 순식간에 말문이 막혔다.
빌 스웰딘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반칙이었다. 매번 저 잘난 줄 알고 살던 남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정말.
에밀리는 주먹을 꾹 쥐었다. 며칠 전 새로 붙인 네일 팁이 아프게 손바닥을 찔렀다. 얼른 빌의 말을 끊어야 하는데. 입술은 밀랍이라도 발라 봉한 것처럼 꾹 붙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 빌이 붉은 입술을 떼었다.
“…그래도 가야 돼. 안 가면 정말.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빌이 침을 한 번 삼켰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후회는 딱 질색이거든.”
빌이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그래. 후회라면 딱 질색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내일 오후, 일정 잡아 놓겠습니다.”
한참 만에야 에밀리가 대답했다. 빌이 슬쩍 에밀리를 곁눈질하다 희미하게 웃었다. 꼭 바람 불면 사라질 것처럼 연약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