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개와 개와 개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조슈아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메시지는 엘라에게서 온 것이었다.
5분 내로 건물 앞에 도착해요! - 엘라
조슈아는 웃는 표정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크리스 밀러는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미스터 스웰딘, 5분 내에 건물 앞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고마워요, 조슈아.”
조슈아는 입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크리스는 지금 제 대답보다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게 더 먼저였다. 그 옆에 선 헤더나 브루노나 피터나. 넥스트 유어의 회의실을 인터뷰실로 탈바꿈하는 것을 총괄하는 엘과 마지막까지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는 피처팀장 미카엘라 기빈스를 제외하면, 넥스트 유어의 대표부터 팀장급까지 모두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바로 타고 올라갈 수 있게끔 각 층 사무실마다 사전 양해를 구한 직원 두 명이 눈을 반짝이며 대기하고 있었고.
“너무 떨리는데요?”
“이러다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갈 때 스텝 꼬이는 거 아냐?”
“아,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빨리는 안 왔으면 좋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 한 번 삼키는 것도 어려워하던 사람들이 입만 긴장 풀린 듯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조슈아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주먹을 한 번 꾹 쥐어 보았다. 괜찮았다. 어제 퇴근 바로 전, 빌 스웰딘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 저 차 맞지?”
누군가 작게 속삭였고 이내 모든 시선이 건물 앞으로 쏠렸다. 낯익은 검은 세단. 빌 스웰딘의 차가 맞았다. 나이 들어 보이기에 딱 좋은 차라고 빌이 늘 비꼬던 차였다. 운전석에서 내린 뒷좌석의 문을 열자 빌 스웰딘이 내렸다. 누군가 와, 하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앞좌석에서 에밀리가, 뒤따라온 차에서 엘라와 낯선 직원이 한 명 더 따라왔다.
낯선 직원 한 명이 건물 현관에 있는 문을 열었다. 빌 스웰딘은 그런 대우가 당연한 사람답게 무표정하게 걸음만 옮겼다. 너무 낯익은 풍경이었다. 저 풍경 안에 있는 제 모습이 머릿속에 선할 만큼.
크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넋을 놓고 빌 스웰딘을 바라보던 팀장들도 크리스의 뒤를 쫓았다. 적당히 따라가면서, 조슈아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정말 비현실적인 일이 많이 일어난다. 로건도, 그리고 빌 스웰딘도. 쓴웃음이 날 것만 같아서 억지로 입가에 힘을 주었다. 언젠가는 마주치겠지,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빌 스웰딘과 크리스 밀러가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크리스였다.
“인터뷰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스웰딘. 넥스트 유어 대표 크리스 밀러입니다.”
“…빌 스웰딘입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입을 열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 섞인 한숨을 자아내던 저 나지막한 목소리는 변한 게 없었다. 하긴, 다 똑같았다. 진갈색 머리카락도, 완벽하게 대칭되는 잘생긴 얼굴도, 사람 훅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도. 어디 하나 3개월 전과 다른 게 없었다.
빌과 크리스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손을 뻗어 앞으로 갈 때였다.
“…오랜만이네. 조슈아.”
조슈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빌과 인사를 할 거라는 건 예상했으나, 모두가 있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훅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저렇게 머뭇거리는 얼굴로.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런 미적거리는 태도는 빌 스웰딘과 안 어울리는데.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스웰딘.”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아주 오랫동안 입 속으로 되새긴 덕분에 보스…라고 부르지 않았다. 조슈아가 빌을 향해 미스터 스웰딘이라고 부른 순간, 빌 스웰딘의 얼굴이 아주 조금 일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조슈아 베넷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는 척했다.
에투왈 측에서 내민 조건은 세 가지였다. 1. 인터뷰 장소는 넥스트 유어의 회의실-블라인드 및 방음 완비된 곳-. 인터뷰어는 팀장급 이상. 회의실에는 인터뷰어(최대 2명)와 인터뷰이-빌 스웰딘-와 인터뷰이의 비서까지 최대 4명만 있을 것. 2. 인터뷰 항목은 선 제시한 문항 중 다섯 가지만 해당하며 인터뷰이가 불편함을 느끼는 그 즉시 인터뷰 중단 및 모든 기사화 중단. 인터뷰이 측에서 녹음할 예정. 3. 인터뷰 시간은 20분 내외로 끝낼 것.
조슈아는 [인터뷰 중]이라고 붙은 회의실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전에 조슈아가 처음 면접을 보았던, 투명한 통유리 벽이 쳐진 회의실. 에투왈 측의 요구대로 블라인드를 다 내린 채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들었다. 문이 닫히기 전까지, 경계하는 미어캣처럼 빌 스웰딘을 바라보던 직원들이 힘 빠진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 주저앉으려다가 꼿꼿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와, 여기가 넥스트 유어예요?”
조슈아는 피식 웃으며 옆을 바라보았다. 티 나지 않게 이곳저곳을 스캔한 엘라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제 열네 번째 후임이 서 있었다. 조금 전 룩북 돌리러 간다는 지미가 나가고도, 아직 에투왈의 사람들이 둘이나 남아 있다는 것을 직원들이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보다 말끔하게 닦인 바닥과 어제보다 훨씬 활기찬 태도들.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지 눈에 빤히 보이는 모습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엘라까지 왔어요?”
“넥스트 유어 간다고 들어서 에밀리 좀 졸랐죠. 페넬로피 혼자 있기도 뭐할 것 같다고. 아, 여기는 페넬로피 롭. 조슈아의 열네 번째 후임자. 페넬로피, 여기는 조슈아예요. 세컨드 비서로 4년을 버틴 에투왈의 전설 중 한 명.”
“말씀 많이 들었어요. 페넬로피 롭입니다.”
페넬로피가 눈을 반짝였다. 조슈아는 멋쩍게 웃었다.
“에이, 에밀리 정도는 되어야 전설이죠. 저는 그냥 이직한 비서죠. 조슈아 베넷이에요.”
가벼운 악수가 오갔다. 제 이름을 듣자 페넬로피의 눈에 고여 있던 호기심이 신기함과 존경심으로 변모했다. 마치 어마어마한 사람을 보듯 반짝이는 눈빛에 조슈아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비서실 쪽을 가리켰다.
“응. 일단 커피부터 한잔할까? 내 새 자리도 자랑할 겸.”
“치.”
새 자리라는 말에 작게 웃던 엘라가 금세 조슈아를 따라 나섰다.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던 페넬로피도 엘라의 뒤를 따라 비서실로 들어왔다. 비서실의 문을 잡고 있던 조슈아가 마지막에 들어간 후 문을 닫았다. 통유리 너머 직원들이 긴장 푼 채 자리에 앉는 게 보여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뭐 재밌는 거 있어요?”
“아니. 오랜만에 같이 커피 마시는 거잖아. 아, 거기 앉아 있어. 여기는 내 탕비실이야. 미스 롭도요.”
“하여튼 조슈아. 한 번도 안 오고서 말은 잘해요.”
테이블에 얼른 가방만 내려놓고 탕비실 쪽으로 오던 엘라가 못 이기겠다는 듯 웃었다. 커피를 내리던 조슈아는 잠시 커피 잔을 바라보며 고민을 했다. 인터뷰가 어느 정도 걸릴까. 답은 20분 내에. 조슈아는 커피 잔 대신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얼음을 담았다.
지잉- 지잉- 지잉-. 세 명이 인터뷰가 끝났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회의 끝났는데, 잠깐 들어올 수 있어요? - 보스
조슈아가 메시지를 확인하며 잠시 고민하는 사이, 엘라와 페넬로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슈아, 인터뷰 끝났다는데.”
“…그렇네요. 가요. 아, 스콘은 나중에 더 싸 줄게요.”
역시 빌 스웰딘이다. 20분 안 되는 시간에 인터뷰가 다 끝나다니. 조슈아는 반 넘게 남은 커피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일회용 컵에다 커피 타 주기를 잘했다. 스콘이 입에 맞는지 아쉬운 눈으로 스콘을 바라보던 엘라가 활짝 웃었다.
엘라와 페넬로피가 가방과 커피를 챙긴 뒤 조슈아를 따라 회의실로 향했다. 바로 회의실로 들어가려는데, 안쪽에서 문을 여는 게 더 빨랐다. 20분 전만 해도 세상 둥둥 떠다니는 듯 행복해하던 미카엘라는 진이 다 빠진 듯 겨우 문을 밀고 나왔다. 더 있기도 힘들다는 듯, 문을 닫고 문 바로 옆에 등을 기댄 미카엘라가 조슈아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안녕 조슈아. 나 살아 있어요?”
“그 태블릿 PC 지금 제가 1000달러 주고 살까요?”
“억만 금을 가져와도 안 돼.”
“아직 살아 있는 거 같네요, 미카엘라.”
들고 있는 태블릿 PC와 핸드폰 그리고 메모지는 그 누가 찾아온다고 해도 내주지 않겠다는 듯 굳건히 껴안은 채, 미카엘라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읏차, 힘을 내자는 듯 벽에 등을 퉁기듯이 일어났다. 누군가 미카엘라를 부축하려는 듯 이쪽으로 다가왔다. 미카엘라는 부러 엄살을 부리는 것처럼 으으, 신음을 하더니 신기하다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 에투왈에서 몇 년 있었다고 했죠?”
“4년 정도.”
“어휴, 조슈아. 진짜 대단한데요? 어떻게 저 카리스마에서 4년이나 살았어요? 아니, 그냥 빛인데? 무슨 쳐다를 못 보겠던데요?”
옆에서 페넬로피가 고개를 엄청나게 끄덕였다. 나중에 뒷목이 아프지 않을까 할 정도로. 엘라는 얼굴을 돌렸다. 큼큼,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조슈아 역시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흐렸다.
“아, 뭐. 빌 스웰딘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대단한 분이랑 내가 인터뷰를, 후.”
“미카엘라, 심호흡, 심호흡!”
직원 중 한 명이 장난스레 말하자 미카엘라가 맞추듯 후, 후, 하며 규칙적으로 호흡했다. 이제 좀 앉아야겠다며 미카엘라가 휴게실 쪽으로 가고 나서야, 엘라가 키득키득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여간 보스, 오늘도 장난 아니셨나 보네요.”
“왜 그래, 엘라. 엘라도 처음에는 보, 처음 봤을 때는 얼어붙었잖아.”
엘라는 조슈아가 잠시 멈칫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얼어붙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련하게 추억에 빠져들어서 다행이었다. 다 옛날 일이라며, 옛일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제 들어갈 타이밍이라는 듯 엘라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 베넷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 “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에서야 조슈아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빌과 에밀리 그리고 크리스가 앉아 있었다. 조금 전 나간 미카엘라와 달리 크리스는 괜찮아 보였다. 평소의 텐션과는 다른, 묵직한 분위기는 낯설었지만 기운 빠진 모습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한 뒤, 의식적으로 조슈아는 크리스의 곁으로 갔다. 분위기가 어땠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미카엘라에게 대강의 분위기를 전해 들었으니까. 크리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커피를 슬쩍 들어 보였다.
“커피 고마워요.”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아까 회의실을 인터뷰실로 탈바꿈하기에 정신없던 엘을 대신해 커피만 준비한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조슈아가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한편, 빌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리고 곱지 않은 눈으로 조슈아 베넷과 크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넥스트 유어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새 친해진 모양이었다. 심지어 에밀리와도 눈인사 하면서 제게는 대답 한 번 외에는 말도 안 건다. 어떻게 바로 미스터 스웰딘이 나와. 빌이 입 안쪽 살을 짓씹다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조슈아, 나 커피 좀.”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빌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 빌은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혔다.
버석하게 말라붙은 벌건 눈가, 메마르고 건조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갈색 눈동자. 마지막 보았던 조슈아 베넷의 눈이 아닌, 제가 알던 조슈아 베넷의 눈이다. 눈물자국 하나 없이 해사한 얼굴. 곱게 휘어지는 눈매, 붉은 입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빌은 숨을 삼켰다.
“거기 바로 앞에 있는 게 미스터 스웰딘의 커피입니다.”
똑 부러지는 대답은 조슈아 베넷이 맞았다. 저 완벽한 미소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제가 장난을 칠 때나 짓던 저 표정. 조슈아는 빌의 앞에 있는 커피와 스콘을 가리켰다. 손 댄 흔적 하나 없는 커피 빨대를 바라보던 조슈아가 예의 저 완벽한 미소를 굳혔다.
빌은 괜히 고개를 저었다.
“이거 입에 안 맞아.”
“저런, 아쉽네요. 제가 성심성의껏 내린 커피인데.”
조슈아는 하나도 아쉽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빌은 제 입 안을 깨물었다.
이게 아닌데. 옆에서 에밀리가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그냥 제 말 듣지 그러셨어요. 에밀리의 시선이 꼭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조슈아가 아, 하는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저는 여기 미스터 밀러의 비서입니다. 뭐, 잘 아시겠지만요.”
한마디 덧붙인 말이 더 쿵, 심장을 찍었다. 선을 긋는 말. 조곤조곤한 말투로 조슈아 베넷은 빌 스웰딘과 선을 그었다. 귀가 먹먹해졌다. 조슈아는 페넬로피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페넬로피는 가방을 뒤적였고 이내 보온병을 꺼냈다. 조슈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안내하려는 듯, 크리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회의실 문을 잡았다.
“저, 조슈아.”
“네?”
말이 먼저 나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조슈아가 이번에는 또 뭐냐는 듯, 빌을 돌아보았다. 빌은 침을 삼켰다.
“조슈아, 오랜만에, 저녁 먹을래?”
조슈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빌은 다급해졌다. 조슈아의 말문을 막기 위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다.
“예전에, 중국 식당 갔었잖아.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갈게. 물론 계산은 내가 할 거고.”
조슈아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문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던 찰나였다. 어, 하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균형을 잡기도 전에 누군가 조슈아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익숙한 향이 훅 끼쳤다. 동시에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 나도 끼어도 될까요? 다 아는 얼굴인데.”
낯익은 목소리였다. 사람 녹이는 달콤한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가 독 바른 사탕이라는 것은 조슈아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조슈아는 황급히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어깨를 잡아 주던 손이 떨어지고, 정면에 얼굴이 보였다. 아쉽다는 듯 떨어진 팔을 쳐다보더니, 고운 눈매를 접어 달큼하게 웃는 남자.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 개자식이 맞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니 오히려 걱정 어린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괜찮나요?”
괜찮냐고? 여기가 어디라고. 지난번에는 제 집까지 찾아오더니 이제는 제 직장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 주제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하듯 나보고 괜찮냐고? 순간적으로 조슈아의 눈앞이 새하얗게 번져 보였다. 조슈아는 치미는 말들을 검열할 새도 없이 입을 열었다.
“가….”
“괜찮아?”
“조슈아, 괜찮아요?”
떨리는 조슈아의 목소리 위로 더 큰 목소리 두 개가 겹쳐졌다. 순간 어지러웠다. 조슈아는 천천히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크리스와 빌이 양옆에서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가 괜찮다, 한마디를 하기도 전에 빌이 조슈아의 앞에 섰다. 커다란 등이 눈앞에 있었다. 곧이어 냉기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났다.
“미스터 밀러. 넥스트 유어에서는 이따위로 인터뷰이를 대접합니까? 그것도 내 인터뷰 시간에. 이렇게 누군가 들어올 정도로 허술하게?”
“아, 저.”
빌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회의실을 얼려 버렸다. 걱정 어린 눈으로 “피곤했나 봐요.” 하던 크리스는 작게 입을 벌리고 어어, 했다. 그러다가 에이드리언 그렌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 빌의 어깨가 위로 으쓱했다.
“아, 설마 그럴 리는 없겠죠? 그러면 모두 다 안에 외부 손님이 있는데도 밀고 들어온 저 개좆 같은 새끼 탓인 거죠?”
“아, 실례. 손님이 있다고 들었는데. 오랜만에 볼 보딩스쿨 동기 얼굴이 너무 기대가 되어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지 뭐야.”
건너편에 있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장미 꽃잎같이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조슈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옆에 있던 크리스는 조슈아를 향해 괜찮은지 물었고, 반쯤 열린 문 너머,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 뒤로 넥스트 유어의 직원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에밀리는 짧은 한숨을 쉬었고, 엘라와 페넬로피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다 엉망이었다.
“이 개자식이!”
상냥하게 이어지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목소리에 결국 빌이 이를 드러냈다. 순식간에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멱살을 잡은 빌이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나는 일에 크리스가 당황한 얼굴로 빌의 팔을 잡으려 할 때였다.
“보스.”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빌이 멈칫했다. 이제 새로운 보스는 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 ‘보스’는 분명 저를 부르는 거였다. 크리스가 팔을 잡은 게 무색해지도록 힘없이 주먹이 풀렸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멱살을 잡은 손아귀에서도 슬며시 힘이 풀렸다. 빌이, 크리스가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동시에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강렬한 빨간 머리, 그와 대비되듯 새하얀 얼굴. 언제나 따뜻하게만 웃을 것 같던, 다정한 갈색 눈동자가 차갑게 식은 채 크리스를, 빌을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까지 쳐다볼까. 조슈아는 세 쌍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다 미련 없이 시선을 떼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녹갈색 눈동자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꽉 쥔 주먹에 힘을 주고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미스터 스웰딘.”
“으, 응?”
“계속 그러시다가는 진짜 기사 납니다. 에투왈에서야 미스터 스웰딘이 표현 방식만 거칠지, 워낙 쑥스러움 잘 타는 분인 거 다 알지만, 여기는 넥스트 유어입니다.”
조슈아는 빌과 눈을 맞추며 턱짓으로 문가를 가리켰다. 가끔 눈치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빌은 조슈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확실히 인지한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전 세컨드 비서에게 특종 주고 싶으신 거면 감사하지만, 허위 기사로 에투왈에서 소송 걸리는 건 피하고 싶거든요. 아, 닉은 잘 있죠?”
조슈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빌 스웰딘이 들어간 회의실에서 나는 큰소리, 문틈으로 언뜻 보이는 멱살잡이에 호기심을 보이던 직원들은 허위 기사와 소송이라는 단어에 에이, 김샜다는 듯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조슈아는 굴곡 없이 빤한 시선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판은 다 깔아 주었다. 이제 더 막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이쯤 하고 정리할 것인지는 오로지 빌 스웰딘의 몫이었다. 빌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씩 웃더니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멱살을 잡은 채로 툭, 밀면서 놓았다. 형형한 눈빛 그대로 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러게. 미하엘은 나이 들면 나아진다는데. 보딩스쿨 때 버릇이 아직 남아서, 원.”
“너무 반가우면 그럴 수 있지. 아직 정신은 보딩스쿨에 머물러 있으니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제 셔츠 칼라를 매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 충분히 도발적인 말이었지만 빌이 다시 멱살을 잡는 일은 없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뒤를 향해 눈짓을 했다. 비서인 듯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문을 닫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과 단절된 공간 안에서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에이드리언이었다.
“늦었지만,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밀러.”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스터 그렌트.”
에이드리언과 크리스 사이에 악수가 오갔다. 에이드리언은 겸연쩍다는 듯 웃었다.
“안에 손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다 아는 얼굴이다 보니 반가움에 실례했네요.”
“아, 저는 괜찮은데.”
크리스는 애매하게 웃으며 뒤를 바라보았다. 빌은 팔짱을 낀 채 시린 눈으로 에이드리언을 쏘아보고 있었다. 엘라와 페넬로피는 한숨 돌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에이드리언을 바라보고 있었고, 에밀리는 빌의 옆으로 다가갔다.
“보스,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응.”
빌이 대답을 하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을 하고 눈치를 보는 강아지가 끙끙대는 것처럼 조름 가득한 시선이었지만 조슈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에이드리언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즘 지원 대상 회사들이 연이어 부도가 난다고 해서 무리하게 방문했는데.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췄네요. 넥스트 유어가 날개를 펴고 있다고 소문 많이 들었는데 말이죠.”
“감사합니다.”
크리스는 진심으로 기쁜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러다가 뒤에 있는 빌을 의식한 듯 난처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
“아, 저 그런데 미스터 그렌트.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미스터 스웰딘과의 선약이 끝나지 않아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미스터 스웰딘.”
크리스는 양쪽을 향해 양해를 구했다. 그 모습을 보던 빌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그러더니 금세 심드렁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투자자와 보는 일도 드물 텐데, 내 배웅은 미스터 베넷이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래도.”
크리스는 잠시 난감한 기색이었다. 아무리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왔다지만, 빌 스웰딘 역시 제가 배웅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옐로우 저널과 다른, 신사적인 모습을 보인다 해도 빌 스웰딘의 심기를 삐끗한다면 그거야말로 난감한 일이었다. 크리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때였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매끄럽게 웃었다.
“아니면, 이건 어떨까요?”
“어떤 거를 말씀하시는 거죠?”
“아까 제가 한 말대로요. 오늘 실례의 의미로 제가 저녁 식사를 사는 거죠. 미스터 밀러, 미스터… 스웰딘. 그리고….”
“그거 참 좋네요.”
에이드리언이 나른한 시선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그 틈을 파고들 듯, 조슈아가 툭, 제 말을 얹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해사하게 웃었다. 크리스가 순간 벙찐 얼굴을 하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귀엣말을 하듯 크리스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기회예요. 보스. 어마어마한 투자자와 최고의 잡지 편집장과의 식사라니. 이 정도면 퇴근하실 때 파워볼 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그런가요?”
그제야 크리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안을 곱씹듯 조슈아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조슈아가 작게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보던 에이드리언이 빛이 나듯 아름다운 얼굴로 조슈아를 향해 말했다.
“사과의 의미로, 미스터 베넷도 함께 갔으면 좋겠는데.”
“사…과라.”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에이드리언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사과라, 사과. 저 붉은 입술에서 나온 단어가 정말 ‘사과’였을까? 어쩌면 제가 너무 듣고 싶었던 나머지 지금이라도 듣는 상상을 해버린 건 아닐까? 조슈아는 녹갈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 예전에는 정말로 저를 사랑하는 줄 알았던 눈. 불같이 달아올라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눈. 그리고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는 눈.
조슈아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럴 필요 없어요, 미스터.”
조슈아는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에이드리언의 시선이 집요하게 조슈아의 표정을 따라왔다. 어디 한 틈, 미세한 균열이라도 있으면 바로 파고들겠다는 듯.
“지난 일이니, 제게는 없어진 일이에요. 그러니, 사과도 아닌 사과의 의미에서 하는 식사는 사양할게요.”
하지만 빙그레 웃었다. 엘라가 이야기하던, 예의 그 완벽한 미소로. 그 순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유려한 표정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아무도 보지 못할 정도로 짧게.
“와, 세상에. 정말 기 빨린다는 게 이런 거예요?”
파우더룸에서 립스틱을 고쳐 바르던 엘라가 입술을 맞부딪히다 말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에밀리는 소파에 앉은 채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페넬로피만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숨 막히는 회의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빌의 저녁 일정이 퇴근이 아닌 저녁 식사로 바뀌었다는 것. 얼결에 정해진 빌의 저녁 식사 일정에 에밀리는 빤히 빌을 바라보았지만, 무슨 심정에서인지 빌은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간담 서늘하게 하는 표정으로 에이드리언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게 끝이었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완벽히 다듬은 엘라가 문득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화려한 손톱 팁의 스퀘어 자국이 손바닥에 그대로 찍혔다. 마치 사자 우리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느낌 속에서 주먹을 너무 꽉 쥐었던 모양이다.
정말 등골이 오싹했었다. 미스터 그렌트, 그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회의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빌을 제법 봤다고, 알아 왔다고 생각한 저도, 빌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휴, 등골로 오한이 내달렸다. 엘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더 생각하다가는 살이 떨릴 것 같았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아, 엘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조슈아, 좀 달라지지 않았어요?”
“어떤 점이요?”
에밀리 대신 페넬로피가 대답했다. 하얗게 질린 엘라와 달리 페넬로피는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왜 저런 얼굴이지? 엘라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말했다.
“뭔가 엄청, 음, 아, 뭐라고 해야 하지?”
엘라는 끙끙거렸다. 분명히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는데. 잘 웃는다? 조슈아는 원래 잘 웃었고. 할 말을 한다? 이것도 원래 하던 거였는데. 강해졌다? 조슈아야 원래 일을 잘하니 파워가 셌다. 물론 에밀리 아래에서는 다 똑같았지만. 그건 정말 에밀리 스콧이 예외인 거고. 뭐지? 뭔가, 좀 더 사람이….
“…웃는데 웃는 거 같지 않아졌다?”
“에이, 그게 뭐예요. 엘라.”
페넬로피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엘라도 제가 한 말에 피식 웃었다. 사람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웃는데 웃는 거 같지 않아졌다…라니. 제가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잘 웃는데.
“아, 조슈아 기다리려나?”
“커피만 가져다준다고, 천천히 나오라고 했어요.”
엘라의 혼잣말 같은 말에 페넬로피가 한마디 얹었다.
“그러면 오랜만에 우리끼리 저녁 먹을까요? 여기 맛있는 피자집 있는데.”
숨 막히는 회의실 안에서 나오고, 조슈아가 속삭이듯 에밀리와 엘라, 페넬로피에게 말했다. 일이 바쁜지 바로 어디론가 가며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긴 했지만 말이다. 엘라가 골똘히 조슈아에게 더 알맞은 단어를 떠올리는 사이, 페넬로피가 탄성과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요, 엘라.”
“응?”
“그 세 분 조합, 너무 완벽하지 않았어요?”
“…응?”
급작스러운 말에 엘라가 당황해서 페넬로피를 바라보았다. 페넬로피는 얼굴까지 붉힌 채 열변을 토해 냈다.
“아니, 그렇잖아요. 보스야 서 있기만 해도 포스 넘치는 톱 모델 출신이신 거 알고 있었는데, 저는 정말 처음 보스 봤을 때 사람한테서 빛이 날 수가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니까요?”
“그러다 실수를 했지.”
덤덤한 엘라의 말에 페넬로피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에밀리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에밀리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페넬로피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말할 때마다 열이 오르는 듯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제 잘못이죠. 아무튼, 미스터 밀러도 유명했거든요. 떠오르는 신흥 유망 SNS 잡지사 넥스트 유어의 대표! 소매를 걷은 모습이 섹시한 편집장! 저는 정말 두 분의 조합만으로도 행복했는데, 마지막에 들어오셨던 미스터, 그렌트. 아, 그분은 정말. 보는 순간….”
“…사람 홀리는 얼굴이긴 하더라.”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페넬로피는 정말 행복하다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엘라는 그 순진한 반응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에투왈에 들어왔을 때는 자신도 저랬는데. 눈칫밥 몇 년 먹다 보니 이제는 달라졌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들은 위험했다. 엘라는 다시 팔뚝에 소름이 날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페넬로피, 물론 사회에서 외모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도 중요해. 무슨 사자 떼 같잖아.”
“사자 떼요?”
못 알아듣겠다는 듯 페넬로피가 앵무새처럼 엘라의 말을 따라했다. 엘라는 부연 설명을 해주려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에밀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완벽한 에밀리는 핸드폰으로 모든 일정을 다 수정한 뒤, 우아하게 꼰 다리를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리, 맞죠. 아까 세 명. 정말 사자 우리에 있는 거 같지 않았어요?”
순식간에 에밀리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어, 뭐지?” 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에밀리가 한마디 했다.
“개.”
“…네?”
“개랑, 개랑, 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계속 물어보는 엘라를 뒤로한 채, 에밀리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찔한 스틸레토 힐 굽이 힘 있게 바닥을 찍어 내렸다. 파우더 룸에서 나온 에밀리는 잠시 회의실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쁨 받으려고 낑낑 대는 새끼 개, 이제 와서 눈치 보는 개새끼. 그리고….”
“이 개자식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안 가는 개자식.”
개미도, 쥐도.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에밀리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슈아가 있을 편집장실로 걸어갔다.
* * *
“조슈아, 조슈아도 그 중국 식당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했었잖아요. 거기로 같이 가요.”
“아, 중국 식당은 패스. 나 그 향신료 냄새 싫어. 조슈아, 알지?”
“…….”
커피 세 잔을 들고 편집장실에 들어간 조슈아는 잠시 한숨을 삼켰다. 눈을 반짝이며 조슈아를 향해 말하는 크리스 밀러, 은근히 투정을 부리며 친한 척을 하는 빌 스웰딘.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는 개자식.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개판이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입꼬리만 올렸다. 그리고 쟁반에 있는 찻잔 세트 세 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조르듯 한마디씩 하던 크리스와 빌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쟁반을 팔꿈치에 끼운 채, 조슈아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가실 레스토랑 고르시면 바로 예약할게요. 어디가 좋으세요?”
핸드폰 속 조슈아만 볼 수 있는 업무 리스트 중 ‘식사’를 열었다. 예전에 엘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며 넥스트 유어가 있는 스트리트, 그리고 반경 2km 내에 있는 식당은 TPO별로 다 정리했다. 조슈아는 차례로 리스트들을 훑어보았다.
보스는 피자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지만, 맞춰 온 손님들의 취향도 생각해야 했다. 자연스레 4년간의 세컨드 비서로서 식당을 잡던 날들이 그리고 반년 넘게 같이 식사를 하던 개자식의 취향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던 조슈아가 아차, 하며 핸드폰에 시선을 꽂았다. 음, 하고 말문을 떼려던 크리스보다 빌이 더 빨랐다.
“너는, 가고 싶은 데 없어?”
“저는 따로 저녁 식사 예정입니다. 미스터 스웰딘. 거위 콩피는 어떠세요?”
“…너 계속 나 그렇게 부를 거야?”
묘하게 섭섭한 목소리에 조슈아가 고개를 들어 빌을 바라보았다. 제가 말하고도 이상한 걸 느꼈는지 빌이 아씨, 작게 중얼거리며 완벽하게 세팅된 뒷머리를 헤집었다. 세계에서 가장 못된 남자 1위를 수차례 차지한 남자는 마치 호되게 혼이 난 어린아이처럼 조슈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진회색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조슈아와 빌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크리스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겠다는 듯 일부러 더 밝게 웃으며 빌에게 물었다.
“아하하, 미스터 스웰딘. 조슈아, 아니 미스터 베넷과 굉장히 친하셨나 봐요.”
“…그러게요. 그랬던 거 같은데.”
빌이 말끝을 흐렸다. 조슈아는 가만히 빌을 바라보았다. 분명 제가 알던 빌 스웰딘은 저런 사람이 아닌데. 사귀던 애인이 갑자기 헤어지자 그래도 담백하게 “그래.” 한마디 하고 차를 집으로 돌리라던 사람인데. 그 4년의 세월 동안 제게 정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마지막에 얼굴도 보지 못할 만큼 미안해서였을까.
한층 더 가라앉은 분위기에 크리스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러다 가만히 있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향해 물었다.
“음, 미스터 그렌트. 거위 콩피 좋아하세요?”
“…좋아하죠.”
“어, 음.”
조슈아는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크리스가 할 말을 찾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조슈아는 크리스를 향해 평소처럼 웃었다.
“그러면 라 쇼미엘에 세 분 예약하겠습니다. 언제든 출발하실 수 있게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조슈아, 운전 되게 잘하네요?”
옆자리에 앉은 크리스가 신기하다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뉴욕의 퇴근길은 정말 차들로 꽉 막혔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작게 웃었다.
“다른 칭찬이야 다 받지만, 사실 운전 실력은 보통이에요. 이것도 겨우 하는걸요.”
“이게 보통인가요? 엄청 잘하는 거 같은데.”
“정말 운전 잘하는 수행비서에 비해서는 보통이죠. 아까 보스도 보셨겠지만 에투왈에 짐 캐스터라고 있거든요. 정말 운전 잘해요. 그때 운전 많이 배웠는데.”
그때에 비해서는 제 실력이 참 많이 나아졌다. 물론, 그때보다 훨씬 편안하게 운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제가 운전하는 차는 분명 고급 세단이었지만 페라리는 아니었고, 옆에 있는 사람은 “어어, 저거 봐라?” 하며 저를 놀리는 빌 스웰딘이 아니라 제 운전 실력을 칭찬하는 크리스 밀러였다.
“그래도요. 진짜 잘하는 건 잘하는 건데.”
“보스, 계속 그렇게 칭찬 안 하셔도 돼요. 야근 수당 신청 안 해요.”
“아, 이런. 들켰나요?”
“엄청요.”
크리스가 배시시 웃었다. 아까부터 계속 제 눈치를 보는 듯, 이런저런 칭찬을 하는 게 빤히 보였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크리스가 부러 칭찬을 하며 제게 말을 거는 것도, 제가 야근 수당을 운운하며 말을 돌리는 것도, 서로 다 아는 눈속임이었다. 하긴 그 이상한 기류를 눈치 못 챈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 저기 저쪽으로 가면 바로 내가 말한 중국 식당 있어요.”
크리스가 들뜬 것처럼 한마디 했다. 조슈아가 중국 식당으로 가는 길을 힐끗했다. 한번 가 봐서 그런지 눈에 선했다. 그날 본 로건도.
“라 쇼미엘과 가깝네요.”
조슈아가 가볍게 한마디 했다. 길을 두고 바로 건너편이었다. 라 쇼미엘이 있는 갓길에 들어서면서 조슈아는 사이드 미러를 확인했다. 뒤따라오는 세 대의 차가 속도를 줄이는 것을 보면서 정차하는 사이 크리스가 얼른 안전벨트를 풀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크리스, 차가 서자마자 내릴 건 아니죠?”
“갓길에 바이크가 지나가는 것 정도는 확인할 줄 아는 나이인데요, 내가?”
아 정말.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능글맞게 대답하던 크리스는 어리둥절해하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요즘에는 다른 걸 조심해야 하나요?”
“조심해야 할 건 그게 맞는데요, 보스. 보딩스쿨에서 우등생이었나 봐요.”
“그건 맞아요.”
크리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넣은 조슈아는 가볍게 웃었다.
“이왕 제가 수행하는 김에 끝까지 수행해도 괜찮을까요?”
“끝까지가 어디까지인데요?”
“음, 일단 차 문을 열어 주고 닫아 주고, 퇴근길 운전까지죠.”
“와우.”
크리스가 감탄했다. 조슈아는 차에서 내린 뒤 인도 쪽으로 걸어갔다. 곁눈질로 보니 뒤에 주차한 차에서 빌 스웰딘과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내리고 있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같은 차에 탔던 수행비서가. 빌 스웰딘은 뒤따라오던 차에서 내린 에밀리가.
조슈아가 크리스가 앉아 있는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크리스가 장난치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럴 때 내 두 손은 뭘 하고 있으면 될까요?”
“음, 좀 이따 식사를 대비해 가만히 손 스트레칭?”
조슈아가 손 푸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문을 잡은 채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 즐거운 식사 시간 되십시오.”
크리스가 내린 뒤, 조슈아가 가볍게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짓궂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크리스뿐만이 아니었다. 크리스보다 더 오래 두 개의 시선이, 마지막까지 한 개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화사한 황금빛 조명이 멋스럽게 내부를 비췄다. 가벼운 템포의 왈츠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적당히 떨어진 테이블 간격은 서로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금색 테두리가 장식된 새하얀 접시 위에는 후식으로 나온 초콜릿 에클레어가 얹어져 있었다.
“콩피가 참 괜찮았는데, 두 분 입맛에 맞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하.”
“괜찮았어요.”
“아, 다행이네요. 하하.”
크리스 밀러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고 어색하게 웃었다. 식사 중 계속 중재하며 눈치를 살피던 것치고, 크리스 밀러는 맛있는 식사를 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닦았다. 조금 전 먹은 디저트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채음식이 나올 때부터, 아니 사실은 그 전부터 식사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식사는 괜찮은데, 같이 밥 먹는 사람이 안 괜찮았을 뿐이지.”
바로 앞에 있는 빌 스웰딘 탓인가. 에이드리언은 빌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사나운 눈매를 할 수 있는 만큼 치켜뜬 채 진회색 눈동자 가득 “이 재수 없는 개자식.”이라고 티를 내는 빌 스웰딘은 성가시기는 했지만, 딱히 제 식사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은 딱 하나가 뇌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크리스 밀러가 타 있던 차 문을 열어 주던 조슈아 베넷. 짓궂은 척 잔뜩 눈매에 힘을 주고 웃다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환하게 웃어 버리던 조슈아 베넷.
아. 어느 순간, 입 안에서 비린 맛이 감돌았다. 그제야 에이드리언은 제가 입 안쪽 살을 깨물고 있던 것을 깨달았다. 얼른 턱에서 힘을 빼 봤지만, 이미 찝찔한 피 맛이 혀끝에 닿았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입 안쪽이 다 뜯긴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반대편 입 안쪽을 다시 깨물었다. 다른 곳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왈칵 새어나올 것만 같아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무언가가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이상한 기시감에 에이드리언은 테이블보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흉흉하게 날이 선 기세로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노려보던 빌은 꼴 보기도 싫다는 듯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올렸다. 빌이 선택한 디저트는 진한 오페라 케이크였다. 포크를 들고 한 조각 잘라 한입에 먹은 빌이 미간을 찌푸렸다.
“더럽게 달긴. 딱 조슈아 입맛이네.”
“어? 조슈아 단거 안 좋아하는데.”
크리스가 무심코 한마디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빌과 에이드리언이 거의 동시에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에클레어를 한 입 베어 물던 크리스가 움찔했다. 너무 놀랐는지 큽, 하고 사레가 들린 듯했지만, 다행히도 입 속의 내용물을 뱉는 일은 없었다. 대신 열심히 삼킨 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호호 식혀 마셨다. 옆에 있는 두 명은 시원한 물을 대신 주문해 주는 대신, 단호한 얼굴로 부정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조슈아 베넷이 단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다. 그 달달한 파이며 진저리 칠 정도로 단내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한입에 넣고 그 단맛을 즐겼다. 사르르 감긴 눈 위로 팔랑거리는 속눈썹이 얼마나 고운지. 눈을 뜨고 나서 부끄러운 듯 웃는 그 미소가 얼마나.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숨이 턱 막혔다. 저도 모르게 단정하게 매 둔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셔츠의 맨 윗단추 하나를 풀고 나서도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슈아 단거 안 좋아하던데요? 지난번에 다 같이 초콜릿 아이스크림 먹으러 갔을 때도 딱 질색이라고.”
말을 잇던 크리스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빌과 에이드리언을 한 번씩 번갈아 보다가 한마디 했다.
“조슈아 입맛이 변했나…요?”
초콜릿 아이스크림, 파이, 달콤한 빵과 달달한 간식들. 그리고 사탕까지.
하. 에이드리언은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테이블보 아래 꽉 쥐었던 주먹에는 감각이 없었다. 차라리 기억도 이렇게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좋을 텐데. 이제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둑이 터지듯, 한순간에 또렷하게 조슈아 베넷이 떠올랐다.
제가 파이 한 판을 내밀었을 때 볼을 붉히던 조슈아 베넷이, 이른 아침 더티 초코를 사 와서 품에 안겨 주었을 때, 메시지와 전화로 고맙다 말하던 조슈아 베넷이. 그리고 레몬 사탕을 선물했을 때 환하게 웃던 조슈아 베넷이. 모두 다 떠올라 버렸다.
며칠 전, 제가 베이글 샌드위치를 사 갔을 때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던 조슈아 베넷까지. 전부 다.
“너, 이 개….”
빌 스웰딘도 똑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잡고 뺨 한 대를 갈기겠다는 흉흉한 기세로 에이드리언을 노려보던 빌이 됐다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차라리 한 대 쳐 주지. 차라리 한 대 맞는다면, 뺨이 아프고 말 텐데.
말도 안 되는 제 생각에 에이드리언이 입꼬리만 올렸다. 둑이 터지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감정이 벼랑 끝까지 밀려왔다. 아,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은 처음이라서.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주먹만 꽉 쥐었다. 꼭 길을 잃은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 * *
“조금 더 있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맥주 못 마신 게 아쉽다면서?”
“그건 그래요. 그래도 근무 중이니까.”
지미의 한마디에 결국 엘라가 헤헤 웃었다. 조슈아도 피식 웃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네 대의 차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제법 고급인 세단 한 대 그리고 뉴욕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 차 세 대가 나란히 있는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거렸다. 라 쇼미엘 예약할 때 이야기를 해 두었다. 메인 요리가 나올 때쯤 연락을 달라고. 그때 복귀하면 시간이 딱 맞을 듯했으니까. 제 생각이 맞았다. 차를 주차하고 다시 전화하니 디저트가 나왔다고 했으니까.
즐거운 시간이었다. 에밀리와 엘라와 지미 그리고 제 열네 번째 후임인 페넬로피와 함께 가볍게 피자를 먹으며 웃고 이야기를 했다. 요즘 가장 인기 좋은 야구 선수 이야기와 에투왈에서 이직한 직원들 이야기, 넥스트 유어에는 제빵사가 있다는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에투왈에 있을 때 같다…라는 아주 작은 착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전화를 받고 주차된 차를 타는 순간 톡 깨져 버린, 그런 착각이지만.
디저트는 언제쯤 다 먹으려나, 조슈아가 차에 기대었다. 빌의 차 앞에 있던 엘라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어, 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로건, 로건!”
설마. 조슈아의 머릿속에 무심코 지나친 중국 식당 골목이 스쳤다. 바로 뒤에 병원이 있다는 로건의 말도. 조슈아가 빠르게 엘라의 시선을 좇았다. 그러는 사이, 지미가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정말이네? 안 그래도 병원 이쪽이라더니. 이렇게 다 보네.”
정말, 로건이었다. 이 어둑한 사위에서도 한눈에 띄는 강렬한 빨강 머리. 엘라가 손 흔드는 것을 봤는지 로건이 환하게 웃었다. 마침 신호등이 바뀌었다. 양옆을 한 번씩 살핀 뒤 횡단보도를 건너던 로건이 조슈아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잠시간, 머뭇거리던 로건이 사람들에 밀리듯 횡단보도를 건너 엘라가 있는 쪽으로 왔다. 손에는 조슈아도 알고 있는 중국 식당 포장 봉투를 들고 있었다.
“로건. 이렇게 다 봐요. 요즘 회사에도 안 오더니.”
“바빠서요. 알겠지만, 환절기잖아요.”
로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엘라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미와 에밀리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페넬로피는 로건을 처음 보는 듯 엉거주춤하게 고개만 숙였다. 조슈아는 그냥 웃었다. 이 어색한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로건은 바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로건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헤어지는 모습이 끝인 줄 알았는데.
“아참, 조슈아. 로건이 조슈아 엄청 보고 싶어 했어요. 조슈아 퇴사하고 나서 되게 자주 찾아왔었는데. 간식 가지고.”
“아, 엘라.”
난감하다는 듯 로건이 엘라의 말을 잘랐지만, 이미 들을 말은 다 들었다. 로건이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말했다.
“그냥, 그때 갑자기 퇴사했다고 해서요. 인사 못한 게 아쉬워서요.”
“정말요. 그래도 봐서 다행이에요.”
그때도, 지금도. 장난스러운 조슈아의 입모양에 로건이 피식 웃었다. 사이에 있던 엘라만 왜 웃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빤한 시선은 뭔지 말해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비밀이야.”
“와, 너무하네.”
엘라가 볼멘소리를 냈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로건을 바라보았다. 로건은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한 번 들어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봐서 반가웠어요. 음, 나는 오늘 당직이라 이제 들어가 보려구요.”
“벌써요? 안에 보스 있는데.”
“빌?”
“네!”
로건이 놀란 표정을 짓자 엘라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마치 끝까지 숨겨 두었던 히든카드를 내보이고, 그 결과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 얼굴이었다. 로건은 잠시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다가 어어, 멍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하는 기대감이 피어오르는 로건을 보고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로건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음, 그러면 더 빨리 가야겠는데요?”
“아, 하긴. 당직이라 그랬죠? 힘내요.”
아쉬워하던 엘라도 당직이라던 로건의 말을 기억했는지 측은한 얼굴을 하고 로건을 바라보았다. 로건이 양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로건?”
“…로…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레스토랑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나오는 걸까.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빌 스웰딘이 저를, 그리고 로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빛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조슈아, 오래 기다렸어요?”
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크리스 밀러만 다정하게 웃으며 조슈아에게 다가왔다. 조슈아는 가만히 서서 입꼬리만 올렸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예요?”
크리스가 로건을 힐끔 바라보며 조슈아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힐끗 로건을 바라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건 빌과 로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알고 오긴 뭘 알고 와. 그냥 가다가 우연히 본 거지.”
로건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로건을 바라보던 빌이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의식하고 경계하듯 로건 앞에 섰다. 우스운 일이었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미스터 스웰딘의 사촌분입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보스가 로건을 알아요?”
크리스가 지그시 로건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조슈아 쪽으로 다가왔다. 로건과 조슈아를 번갈아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빌 대신, 로건이 먼저 조슈아 쪽으로 다가왔다. 엉거주춤하게 로건을 바라보던 빌이 로건을 따라 이쪽으로 왔다.
“아니, 아는 건 아니고. 아!”
다가오는 로건을 보고 생각이 난 듯, 크리스가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그리고 로건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몇 번 봤어요. 중국 식당에서.”
정말 그 식당, 가지 말아야겠다. 조슈아가 속으로 다짐했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곱지 않은 눈으로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는 로건 헤네스와 비슷한 눈으로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노려보는 빌 스웰딘. 아무 말도 없이 제 쪽을 바라보는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리고 제 앞에 있는 크리스만 바라보는 저까지.
크리스는 다가온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빌 스웰딘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아,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오늘은 제가 더 감사하죠. 대접도 제가 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미스터 밀러께 받았네요.”
“저도. 먼저 들어가시죠.”
빌이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에게 차를 가리켰다. 그래도 망설이는 크리스보다 조슈아가 빨랐다. 조슈아는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모든 기류들이 크리스를 밀고 있었다. 크리스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그리고 빌 스웰딘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로건 헤네스를 바라보고 이내 차에 올라탔다.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은 조슈아는 얼굴에 그렸던 예의상의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운전석에 탔다. 이내, 차가 출발했다.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못한 채 남은 사람들은 목울대 너머로 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누구 하나 말을 시작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알아챈 에밀리가 빌을 향해 다가왔다.
“저, 보스.”
“실례지만….”
에밀리와 거의 동시에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거기에 있던 모두가 목소리를 돌아보았다. 라 쇼미엘의 카운터에 있던 지배인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례지만, 지금 레스토랑이 영업 중이라. 괜찮으시다면 자리를 이동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뭐야, 빌 스웰딘 아냐?”
“진짜? 그 옆의 남자는?”
“몰라. 새로 데뷔하나?”
“…네.”
에밀리 스콧이 대신 대답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파파라치야 가드들이 막고 있을 테고. 지나가며 쳐다보는 사람들과 잠시 멈춰 선 사람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마크 웹디즈드가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며 목례를 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걸음을 옮기는 대신, 로건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다. 분명 달랐는데. 물에 젖은 듯 먹먹하게 들리던 목소리와 부옇게 번진 시선 속 보았던 빨간 머리. 악몽에 잠겨 있던 로건. 붉은 앞머리가 땀에 젖을 만큼, 몸을 뒤척이다 아픈 한숨을 내쉬던, 상냥하고 다정한 로건 헤네스. 제가 좋아하는 사람.
제가 좋아하는 사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 훅 하고 올라오던 감정들이 기이하게 엉겨 붙어 생각을 괴롭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강렬한 빨강 머리도, 다정하게 웃어 주던 저 얼굴도, 상냥한 갈색 눈동자도. 로건 헤네스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치밀어 올라오던 감정들이, 누군가 제 심장을 손아귀에 넣은 채 으스러질 듯 죄이던 통증이, 저도 모르게 나오던 다정한 말들도 태도들이. 조슈아 베넷을 봐야 한다는 제 모든 순간들이.
도대체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가자. 로건….”
빌 스웰딘이 로건을 향해 말했다. 냉담하게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던 로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하나만.”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치밀어 오르는 말들을 다 억누르며 한마디 했다. 로건이 힐끗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돌아보았다. 인정해야 했다. 이제는 로건을 바라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말 이상했다. 10년이었다. 10년간, 로건 헤네스를 좋아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까.
아, 사실.
아무렇지 않다고 어렴풋이 느낀 건 그때부터다.
조슈아 베넷이 제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날. 꺼질 듯 가냘픈 목소리로 한 음절 한 음절 힘겹게 말하던 그날. 로건 헤네스에게 전화가 왔을 때. 그때 제가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로건이었을까. 아니면….
조슈아였을까.
하지만 묻고 싶은 건 단 하나였다.
“대답하지 마. 로….”
“악몽, 지금은 괜찮아?”
빌 스웰딘의 말허리를 자르고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그래. 그날이었다. 흐릿하게 번진 시야 속,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괜찮냐고, 붉은 앞머리가 젖어들 정도로 악몽을 꿀 정도로 힘들어했으면서도 정작 사고 당시에는 남 걱정부터 하던 순해 빠지고 착한 로건 헤네스.
그 모습이 계속 눈에 박혔다. 처음에는 잠시 머물러 있던 생각이 꿈에 나오고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하루들이 계속되고, 그러던 사이에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로건 헤네스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더 이상 끝나 버린 감정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제가 본 그 연약한 모습이 로건 헤네스의 마지막 악몽이기를 바랐다. 이미 제가 먼저 저버린, 허울뿐인 친구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하기에 적합한 말이었다.
“뭐야, 로건. 악몽 꿔? 그런 이야기 안 했잖아.”
“악몽은 무슨. 잘 시간도 없는데.”
빌 스웰딘의 물음에 비꼬듯 대답한 로건이 제 뒷목을 주물렀다. 한눈에 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별 이상한 말을 다 듣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던 로건이 뭔가 기억난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 혹시 그때? 야, 그런 일을 겪었는데 당연히 악몽 꾸지!”
“그때?”
“나 사고 났을 때. 그때 이후로는 악몽은 꿀 시간도 없이 살았거든.”
로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날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맥이 탁 풀렸다. 지금까지 계속 그날의 기억에 악몽을 꾸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과거에 빠져 있던 사람은 저 혼자였다. 그것도 로건 헤네스는 기억도 못하는 그 한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그날을 일축하는 로건 헤네스를 보고,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깨달았다.
미련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로건 헤네스. 첫사랑이라 믿고 계속해서 그 한 모습만 좋아했었다. 10년 내내. 덕분에 제 스스로가 눈을 가리고 있던 것도 몰랐다. 제가 진짜 좋아하던 사람이 누구인지.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천천히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목을 쥐고, 가냘픈 고백을 눌렀다. 손아귀에 쥐면 언제든 있다고만 생각했다.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지도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조슈아 베넷은 제 손아귀에 있었던 적도 없는데.
아,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걸까. 수많은 기억들이 소용돌이쳤다. 어색하면서도 다정하게 제 집에 잠깐 들어오라던 조슈아 베넷, 맥주를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조슈아 베넷, 저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던 조슈아 베넷. 그리고….
“사랑해요.”
저를 보며 힘겹게 한마디 하던 조슈아 베넷.
희미한 기대와 구렁텅이 같은 끝이 공존하던 갈색 눈동자. 그 메마른 눈을 보면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찾아온 저를 보고 조슈아가… 그런 표정을 지었구나. 먼저 손을 놔 버린 주제에 뻔뻔하게. 숨이 턱 막혔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아팠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두 눈을 깜빡였다. 모든 소리들이 이명처럼 멀어졌다.
“아, 저기. 카드 놓고 가신 분.”
“카드요?”
“네, 조금 전에 결제하신 분 카드 놓고 가셔서요. 전화도 했는데. 곧 오신다고.”
“…저요. 크리스 밀러입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고개를 들었다. 카드를 들고 있던 라 쇼미엘 직원도, 로건과 빌과 그 주변에 있는 모두가 아는 목소리였다. 주변에 둘러진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손을 들고 나왔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겨우 밭은 숨을 내쉬었다. 조슈아가 카드를 받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벼운 목례를 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안 된다. 저 뒷모습을 잡아야 했다. 호흡이 가빠졌다. 에이드리언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을 겨우 벌렸다.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올려 조슈아를 향해 뻗었다. 켜켜이 쌓이는 감정들에 목이 잔뜩 가라앉았다. 어쩌면 제가 불러야 할 이름이 너무 무거워서, 입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 하나도 참 무거운 사람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조….”
숨이 턱하니 막혔다. 에이드리언은 더 이상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무감한 표정이었다. 조슈아 베넷은 정말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힐끗 바라보던 조슈아 베넷이 다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한 꺼풀 자라났던 기대가 툭하니 꺾였다.
더 이상 부를 수도 없었다. 제가 놓친 사람이 너무나도 커서, 그 무게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게 너무 벅차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전에도 한 번 들어 본 소리였다. 너무 늦었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이번에는 제가 떨어뜨린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둑이 터졌다.
왜 하필 사람은 딱 이럴 때 다시 오게 되는 걸까?
조슈아는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산하던 라 쇼미엘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갑자기 식당에 예약 줄이라도 생긴 걸까?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조슈아, 나 카드 놓고 왔어요.”
“아니 그걸 왜 놓고 와요. 보스.”
“하지만, 진짜 정신 빠지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차에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크리스가 울리는 핸드폰을 받았다. “네? 카드요?” 눈이 떨리던 크리스가 재킷 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갈게요.”
조슈아는 사이드 미러를 봤다. 바로 갓길에 세우기는 조금 늦었다. 어쩔 수 없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계산할 때 카드도 안 챙기다니. 아니, 계산하는 직원은 카드도 안 돌려줬나? 하지만 크리스는 몸서리를 쳤다.
“조슈아는 몰라요.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말 숨도 못 쉬겠더라구요.”
“하지만 콩피는 맛있으셨죠?”
“네. 정말 살살 녹더라구요. 아, 그것도 그렇고. 조슈아 원래 단거 잘 먹었어요?”
놀리듯 말하던 조슈아가 사이드 미러를 보며 갓길에 차를 세웠다. 맛있는 콩피를 떠올리며 행복한 표정을 짓던 크리스가 다시금 생각난 듯 물었다. 단거? 조슈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네?”
“아니, 아까 미스터 스웰딘이 그러더라구요. 되게 달달한 초콜릿 케이크 보면서 딱 조슈아 입맛이라구. 미스터 그렌트도 그러고. 조슈아 단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러게요. 아, 보스. 카드 제가 가져올게요.”
“아니에요. 내가 놓고 왔는데.”
“오늘은 제가 끝까지 수행하기로 했잖아요.” 이 말이 아니었더라면 크리스는 정말로 다녀왔을 거였다. 만류하던 크리스는 못 이기겠다는 듯 미안한 표정만 지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차에 함께 있었더라면 표정 관리를 하는 게 더 힘들었을 텐데.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튼, 기억하는 거 하고는. 빌 스웰딘도 그렇고 그 개자식도 왜 제가 단거 좋아하던 것을 기억하고 난리일까. 이제 단 건 딱 질색인데.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조슈아는 순간 멈칫했다. 어쩐지 사람들이 몰려 있더라니. 아직도 안 갔을 줄은 몰랐다. 빌 스웰딘의 가드들이 파파라치를 제지하고 있었고, 군데군데 몰려든 사람들은 저들끼리 무리지어 빌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스트리트를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조슈아는 투덜거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에 다시 받아 가야겠다, 조슈아가 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악몽. 지금은 괜찮아?”
또릿하게 귀에 박히는 건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목소리였다. 뭐래? 잘 못 들었어. 영화 촬영 같은 거야? 에이 설마. 빌 스웰딘이면 티저 같은 건가? 수군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빌과 로건이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 악몽이라. 입매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고 있었잖아. 조슈아 베넷.
제게는 악몽이 된 개자식이. 누군가에게는 악몽을 꾸는지 물을 수 있을 정도로 다정한 남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조슈아는 부러 입꼬리를 올렸다. 흡, 하고 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가 들이쉬었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다가 조슈아는 웃어 버렸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서. 이제는 정말로 거의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라서. 두 가지 나쁜 습관도 벌써 고쳤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입술은 깨물지 않기. 상처 받지 않기.
그러는 사이, 로건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혹시 그때? 야, 그런 일을 겪었는데 당연히 악몽 꾸지!”
“그때?”
“나 사고 났을 때. 그때 이후로는 악몽은 꿀 시간도 없이 살았거든.”
사고.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왼쪽 골반 아래에 났던, 한 뼘 정도의 깊은 상처 자국을 떠올렸다. 지금 입고 있는 옷 아래에는 아직도 상처 자국이 남아 있을 거다.
“예전에 사고로 다쳤는데. 그때 조금 놀랐나 봐요. 아직도 이러네요.”
깜짝 놀란 얼굴로 조슈아를 밀쳐내고, 도리어 제가 더 아픈 듯 계속 사과를 하며 문지르던 그 얼굴. 그 다정한 얼굴에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이 제 옆에 있구나. 세상에 이렇게 착하고 예쁜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제 옆에.
조슈아는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모든 게 다 끝났는데. 자연스레 저 개자식이 연상된다는 게 우스웠다. 더 이상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그저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일상을 계속 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게 라 쇼미엘 안으로 들어가서 카드를 받아 오면 된다. 마침 라 쇼미엘의 문이 열리고 앳된 직원 한 명이 나왔다.
“아, 저기. 카드 놓고 가신 분.”
“카드요?”
로건이 되물었다. 직원이 얼굴을 붉히며 카드를 내밀어 보였다.
“네, 조금 전에 결제하신 분 카드 놓고 가셔서요. 전화도 했는데. 곧 오신다고.”
“…저요. 크리스 밀러입니다.”
조슈아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 앞으로 나갔다. 직원이 다행이라는 듯 카드를 건넸다. 저도 다행이었다. 이렇게 타이밍이 잘 맞아서. 조슈아는 놀란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빌과 로건을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까지 바라볼 시간은 없었다.
제법 시간이 지체되었다. 크리스가 기다릴 텐데. 조슈아가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찰나였다.
“조….”
왜 그랬을까. 조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짧은 음절, 그 하나에 서려 있던 기대감 때문이었구나. 조슈아가 잠시 뒤를 힐끗한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에 덧그려졌던 무언가가 사그라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조슈아 베넷이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저, 지금은 손에 들린 카드를 들고 크리스 밀러에게 가는 일. 딱 그것뿐이었다.
* * *
하루가 길었다.
조슈아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새로 사 둔 치즈와 파프리카 두 개, 베이컨과 식빵 몇 조각. 땅콩버터. 그리고 우유 한 팩과 캔 맥주 두 캔이 있었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캔맥주 하나를 집은 뒤 문을 닫았다. 침대 매트리스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TV를 켠 뒤, 캔을 땄다. 서늘한 김이 허옇게 올라왔다. 그대로 마시자 탄산이 목울대에 달라붙었다. 따끔따끔하게 터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조슈아가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까 피자를 먹을 때, 엘라가 어찌나 맥주를 찾던지. 집에 오자마자 맥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서두르는 조슈아를 보며 크리스가 집에 뭐 좋은 거라도 있냐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이 정도면 좋은 거 숨겨 둔 거지.”
깨끗하고 안락한 스튜디오와 시원한 맥주. 창밖으로 보이는 까만 밤하늘과 노란 가로등 불빛. 으아. 조슈아는 목을 뒤로 젖힌 채 천장을 보았다. 새하얀 천장과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형광등빛 덕분에 조슈아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었다. TV 소리가 멀어지듯 작게 들렸다.
아, 정말 하루가 길었다. 세상에 이런 하루가 다 있을까. 다시 볼 일이 있을까, 하는 얼굴들을 한 번에 다 보는 날이라니. 재수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미카엘라의 말처럼 너무 재수가 좋은 날이었을까.
“…파워볼은 내가 샀어야 했나?”
조슈아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하긴. 이 정도의 날이라면 운수라는 것도 제가 불쌍해서 뭔가 하나를 주기는 할 것이다. 조슈아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하루 종일 긴장을 했던 탓일까. 몸에 취기가 훅 돌았다. 조슈아는 조금 더 느슨하게 벽에 기대었다.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렸다. 새로 나온 액션 영화, 유명 연예인의 쇼, 화려한 보석을 파는 홈쇼핑을 넘기고, 연예 프로그램이 나왔을 때에서야 조슈아는 리모컨을 내렸다.
「맙소사. The Signal 여러분. 제가 지금 어디인지 아세요?」
리포터는 카메라를 향해 소곤거리며 커다란 저택을 가리켰다. 어둑한 사위 속에서 고풍스러운 저택이 보였다. 카메라가 줌 인을 할 때마다 화질이 깨졌다. 카메라가 다시 리포터를 비췄다.
「은둔한 천재, 앤드류 맥카디 감독의 집 앞입니다. 이전에 그가 은퇴를 발표했을 때 기억하시나요? 그때도 제가 이 저택 앞으로 왔었는데.」
리포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료 화면이 나왔다. 화면 왼쪽 상단에 [특종! 앤드류 맥카디, 은퇴 선언?!] 노란색 딱지가 붙은 영상이 흘러나왔다. 지금보다 좋지 않은 화질 속에는 조금 전보다 조금 앳된 리포터가 흥분에 가득 차서 저택 앞을 가리켰다. 저택 앞에는 충격에 빠진 듯 멍한 표정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몇 명이 카메라를 발견하고 들고 있는 피켓을 들어 보였다. [당신 덕분에 행복했어요. 미스터 맥카디], [죽을 때까지 영화와 함께한다면서요!!] 흰 피켓 위 적힌 문구들은 다양했다. 자료 화면이 끝난 듯 다시 화면에 리포터가 출연했다.
「미국 전역을 애틋하게 만들었던 소설 <어제의 당신에게>를 영화화한다며 은퇴를 번복한 그가 니콜라스 오브라이언의 사망 소식과 함께 저택에 칩거를 시작했다는 건 다들 아시죠? 오늘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The Signal 여러분. 그러면, 저와 오늘 함께 천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이….」
조슈아는 TV를 껐다. 빛이 꺼진 까만 화면으로 제 모습이 비춰졌다. 입이 썼다. 안주 하나 없이 맥주를 마셔서일까. 아니면 직업병 탓일까. 하긴. 사전 인터뷰 요청도 없이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무례한 인터뷰어들 덕분에 고생깨나 했지. 조슈아는 입매로 웃음을 뺐다. 그거 말고는 더 없지. 아.
조슈아의 머릿속에 톡, 떨어진 책 한 권이 스쳐 갔다. <어제의 당신에게>.
정말. 그 몇 개월이 뭐라고. 다 없는 일인데. 조슈아는 끝까지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빈 캔을 옆으로 흔들어 보았다. 찰랑이는 소리 하나 없이 빈 캔은 침대 옆에다 아무렇게나 놓았다. 바로바로 정리해야 하는데. 조슈아는 넘어진 캔을 보다가 비실비실 웃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른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조슈아는 가만히 옆으로 누웠다. 베개는 폭신했고, 깔고 누운 이불은 몸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 것 같았다. 시야가 가물가물해졌다.
참 길었던 하루다. 다시는 없을 것 같은, 이상한 하루.
그러니 푹 쉬어야지.
조슈아는 눈을 감았다. 아주 깊고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