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당신의 거짓된 다정 (12/22)

#11. 당신의 거짓된 다정

불 꺼진 방 안으로 묵직한 어둠이 물밀듯 들어왔다. 통유리 창 너머로 보이는 새까만 밤하늘이 일렁였다. 평소에는 밝게만 보이던 가로등도 오늘따라 다 꺼져 있었다.

소파에 몸을 기대어 앉은 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제가 있는 곳은 같았다. 짙고 어두운, 꼭 무저갱 깊은 곳처럼 앞 한 발자국 보이지 않는 곳.

꼭 심해 같았다.

어느 겨울이었다. 밖에는 눈이 내렸고 작은 스튜디오는 포근했다.

조슈아는 회색 후드 티셔츠를 입은 채 제게 기대 있었다. TV에서는 바다와 심해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라운관을 꽉 채운 바다는 눈부셨다. 파도 한 점 일렁이지 않고 잔잔하게 석양을 삼키는 바다. 금이 간 것처럼 갈라진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의 빛을 그대로 빨아들인 바다 위로 이내 남색 하늘이 번졌다. 모래 알갱이들이 반짝거렸다.

“바다 정말 예쁘죠?”

혼잣말을 하듯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두 눈은 온통 브라운관에 빠져 있었다.

브라운관에 염전이, 고기를 낚는 어부들이, 입을 꾹 다문 조개들과 평화로운 해변가가. 그리고 요트가. 동시에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바다는 다정합니다. 많은 것을 주죠. 소금, 생선, 조개, 휴식, 레저. 하지만 바다는 공평합니다. 사람에게 허락한 범위가 정해져 있죠. 만약, 바다가 허락한 범위를 그 이상으로 들어온다면….」

요트에 있던 사람이 다이빙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물보라가 일고, 브라운관은 계속해서 깊은 바닷속을 보여 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파란색.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파란색이 끝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짙고 컴컴한 색깔. 햇빛도 투과하지 못할 만큼 깊은 바다. 심해였다.

화면 위로 겹쳐지듯 프레스 기계와 모형 폐가 나왔다. 프레스 기계가 천천히 내려왔다. 플라스틱으로 된 모형 폐가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원래의 모양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내레이션이 덤덤하게 말했다.

「순식간에 찌그러지죠. 폐든, 뭐든.」

“갈까요?”

“…난 찌그러지고 싶지 않아요.”

제 물음에 조슈아는 무서운 말을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이 우스웠다. 현대 과학으로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는 것이. 자연스레 더듬거리며 잡는 게 제 손이 아니라 소매라는 것이. 그때 제가 뭐라 그랬더라. 아.

“난 그냥 바닷가에 가자는 거였는데. 저 깊은 곳에 가고 싶었어요? 안 되는데. 나랑 계속 있어야 하는데?”

어깨를 으쓱이며 놀리듯 말하자 그제야 조슈아가 입을 벌렸다. 사람을 진정으로 미워해 본 적 없는 것 같은 눈이다. 한 번 제대로 흘겨보지도 못하고 둥근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분홍기 도는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웃었다.

“일부러 그러죠?”

붉은 입술이 투정을 부리듯 새부리처럼 뾰족해졌을 때. 그때라도 깨달았어야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는 이게….

사실 우스운 게 아니라 그저 사랑스러운 것이었는데.

폐부 깊숙한 곳에 통증이 훅 들어왔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두 눈을 감았다. 두 손을 꽉 잡아 봐도, 입술을 깨물어 봐도 기억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밀려왔다.

“혹시, 잠시 들어올래요? 배고플 것 같은데.”

현관문의 열린 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던 첫 만남이.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가 있어요?”

조슈아와의 하루하루를 모으고 싶다는 제 말에 얼굴을 붉히던 조슈아 베넷이.

“당신 기대만큼 내가 많이 놀라 보여요?”

제가 음식을 해 두었다는 말에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더니 장난스레 웃던 조슈아 베넷이.

제 눈을 똑바로 바라봐 주는 다정한 시선이, 발걸음을 맞춰 주는 상냥한 마음이, 할 말을 다 하는 그 단호한 표정이, 가만히 옮겨지는 온기가. 보는 사람도 따라 웃을 정도로 환한 웃음이.

그 모든 순간의 조슈아 베넷이 다 미치도록 달콤했다. 닿고 싶었고, 안고 싶었고. 그냥 눈을 마주치는 게 좋았다.

누군가를 위해 처음으로 마트에 갔을 때, 처음으로 음식을 했을 때, 음식을 해놓고 기다렸을 때, 그 기다림마저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커다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저를 올려다보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아니, 발갛게 붉어진 얼굴로 제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

아니, 적어도.

“사랑해요.”

차마 울지 못하는 아픈 눈동자가 저를 바라볼 때. 가라앉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지며 제게 진심을 토해 낼 때. 그때만큼은 알았어야 했다. 그 기이한 떨림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심장의 조임을. 무언가 쿵, 떨어지던 그 소리를.

조슈아 베넷을 마주한 뒤부터 이어진 모든 순간들이 기회였다. 그 수많은 기회들을 그냥 넘겨 버렸다. 강렬한 새빨간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라는 특징만 좋을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다.

그래서 결국 조슈아 베넷은 그런 얼굴을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텅 비어 버린 얼굴. 저를 보고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무감한 얼굴.

천천히 심호흡을 하려고 했지만 숨이 막혔다. 새까만 심해만큼이나 깊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파르르, 긴 속눈썹이 떨렸다. 우아한 얼굴에 아주 잠시 음영이 드리우더니, 이내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두 눈을 떴다.

다시, 돌려놓아야 했다. 어그러진 모든 것을. 다시.

떠오르는 그 모든 순간의 조슈아 베넷이 아파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바닷물보다 짜고 비린 맛이 났다. 아름다운 녹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 *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조슈아는 조금 놀랐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는 삼각형의 가랜드가 붙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넥스트 유어! 파이팅!!이 붙어 있었다. 가랜드뿐만이 아니었다. 회사는 파티 분위기였다. 리드미컬한 노래가 흘러나왔고, 벽 군데군데에는 풍선이 붙어 있었다. 무엇보다 직원들 모두가 신나 보였다.

“안녕, 조슈아, 좋은 아침이에요.”

“안녕, 보니. 좋은 아침.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뭐 있어요?”

크림치즈를 바른 베이글을 들고 오던 인사팀 막내, 보니가 조슈아의 물음에 웃었다. 조슈아는 순간 연간계획을 떠올렸다. 창립기념일은 8월이었고. 보스 생일인가? 이번 달에 따로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보니가 눈을 크게 뜨고 조슈아를 보다가 하하, 웃었다.

“오늘 말고 어제 있었죠! ‘그’ 빌 스웰딘의 인터뷰를 땄으니!”

“아, 그거 때문에?”

조슈아가 가랜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보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 정도가 아니죠.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 덕분에 오늘 새벽부터 미스 기빈스가 나와서 열심히 꾸몄잖아요.”

보니가 혀를 내둘렀다. 조슈아는 미카엘라를 찾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열정적으로 이 파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정말 파티에라도 온 듯 잔을 들고 있는 미카엘라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걸어 다녔다. 어딜 가든 미카엘라를 향해 휘파람과 자그마한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는 사실 정말 넥스트 유어에서 미스터 스웰딘 같은 거물의 인터뷰를 따낼 줄 몰랐거든요.”

아무 사심 없는 표정으로 말하던 보니가 앗, 하며 입을 가렸다. 그리고 조슈아의 눈치를 보았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빌 스웰딘은 에투왈과 어깨를 겨눌 정도로 커다란 잡지사인 마리 데상타와 엘르윈에서 ‘편집자의 세계’라는 주제로 편집장 인터뷰를 공동기획 했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에밀리가 초강수를 두며 에투왈의 인터뷰를 성사시킨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런데 넥스트 유어에서 그의 인터뷰를 따내다니.

조슈아가 가볍게 웃었다.

“워낙 다 열심히 해서 그렇죠. 보니가 말한 대로 미스터 스웰딘 기준이 어마어마하게 높거든요.”

“하긴, 정말 집 가서도 인터뷰 항목 세세히 조율하고. 정말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요! 그나저나 조슈아, 진짜 대단해요!”

“네?”

“어제 미스 기빈스가 빌 스웰딘 이야기 하면서 그랬거든요. 인터뷰하는데, 그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했다고. 조슈아는 4년이나 빌 스웰딘의 비서였잖아요.”

아하하. 보니의 반짝거리는 눈을 슬쩍 피하면서, 조슈아는 미카엘라를 바라보았다. 어제 잔뜩 지친 얼굴로 나오더니. 그래도 눈 반짝이며 “미스터 빌 스웰딘은 어때요?” 하며 묻는 직원들을 상대로 무용담깨나 들려준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행히 세컨드 비서여서요.”

“오, 진짜 에투왈 같은 데는 퍼스트에 세컨드 비서도 둬요? 무슨 드라마 같은데요?”

보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꼭 제가 처음 빌 스웰딘의 저택에 가서 집사인 세바스찬을 봤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니는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여기가 첫 직장이랬지. 앳된 얼굴을 보며 조슈아의 마음에 스멀스멀 장난기가 돌았다.

조슈아는 돌연 입을 꾹 다문 채 주변을 살폈다. 보니는 조슈아를 따라 주변을 살폈다. 조슈아는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보니가 긴장한 얼굴로 조슈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조슈아가 아주 은밀한 비밀을 말하듯 보니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행 비서에 집사도 따로 둔답니다. 드라마보다 더하죠.”

“오, 세상에.”

보니가 제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조슈아가 몸을 곧게 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왕자님이잖아요.”

스웰딘가의 왕자님. 세계에서 가장 멋진 남자 1위를 수차례 거머쥔 빌 스웰딘. 모델계의 영원한 전설.

“들어 보면, 조슈아는 진짜 더 대단하네요.”

보니가 조금 전보다 더 눈을 반짝였다. 들고 있는 크림치즈 베이글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잘 구워졌던 베이글이 식어 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빌 스웰딘’의 세컨드 비서였어서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 어마어마한 직장에서 넥스트 유어로 이직을 한 거잖아요. 분명 뭔가 엄청난 비전을 가지고 온 거죠? 세컨드 비서가 아닌 퍼스트 비서로서의 야망!”

“아, 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마운데. 제가 그렇게까지 야망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조슈아, 사람이 너무 겸손하면 안 돼요!”

조슈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야망을 품고 이직을 한 사람이 된 조슈아 베넷은 보니의 선망 가득한 눈을 조심스레 피했다.

“와, 보스 짱!”

“잘 먹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가운데에 선 크리스는 환호가 자연스럽다는 듯 웃었다.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은 채 음식을 펼쳤다. 중국 음식과 피자. 독특한 조합이었다.

“오랜만에 우리 다 같이 맛있는 거 먹을까요?”

점심시간 20분 전이었다. 크리스는 편집장실을 나오자마자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가 눈을 깜빡이다 환호했다. “뭐지? 뭐 시키셨을까?” 하는 궁금증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배달원 세 명이 각각 음식 봉투와 피자박스들을 치켜들면서 외쳤다.

“배달이요.”

이후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모두 연습이나 한 듯 중국 음식과 피자를 나누고 콜라를 따랐다. 크리스는 콜라 잔을 높이 들었다.

“자, 어제 정말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맛있게 먹어요!”

짠- 입으로 잔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모두가 웃었다. 그리고 입맛에 맞게 각자 피자와 중국 음식들을 집었다. 크리스는 엘과 조슈아가 앉은 테이블로 왔다. 엘은 피자부터 먹었다. 크리스가 조슈아와 엘의 사이에 앉았다. 엘이 크리스를 보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나이스 보스!”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신난 얼굴로 중국음식이 든 종이 용기를 잡으려다 의아한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환하게 웃던 조슈아는 피자에도, 중국 음식에도 손을 대지 않고 물끄러미 중국 음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슈아?”

“네?”

“안 먹어요?”

“하하, 먹죠.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거짓말이다. 조슈아는 입매에 능숙하게 웃음을 올리면서 소고기 볶음면을 들어 올렸다. 지난번에 이 중국 음식점에 갔을 때 로건을 만났고, 어제는 모두를 만났다. 이 중국 음식에 신기한 징크스라도 있는 걸까? 유심히 소고기 볶음면을 바라보던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럴 리가. 음식에는 죄가 없지. 조슈아는 평소처럼 젓가락을 짝- 소리 나게 뜯은 뒤 돌돌 굴렸다. 그리고 소고기 볶음면을 들어 한 입 먹었다. 짭조름하게 간이 잘 되어 있었다.

“오, 조슈아. 젓가락질 되게 잘하네요?”

“보통이죠.”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를 했다. 그리고 한 입 더 크게 들어 우물거릴 때였다. 우웅- 조슈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원장 수녀님]

조슈아의 눈이 커다랗게 커지는 사이, 두 번 울린 전화는 끊어졌다. 잠시만, 전화 좀. 조슈아는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잠시 일어났다. 그리고 탕비실로 들어가며 원장 수녀님한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두 번 넘기 전에 전화 너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조슈아?

“원장 수녀님! 잘 계셨어요?”

- 나야 잘 지내지. 조슈아, 너는 잘 지내고? 한창 바쁠 텐데. 전화해서 미안해.

푸근한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눈물이 날 정도로 다정했다. 괜히 전화했다며 미안해하는 목소리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요즘 통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잘 계셨죠?”

통 못 갔다. 그 3개월 동안 한 번, 그리고 이직하고 쭉 못 갔으니 곧 한 번 가야겠다. 이번에 가면 뺨 부풀린 매기한테 실컷 괴롭힘 당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일곱 살이 되었다고 삐진 티도 안 내려나? 금세 조슈아의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전화 너머에서도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나야 잘 지내지. 조슈아, 아가. 너도 잘 지내지? 남극을 보내도 잘 살 애인 걸 알지만.

“에이, 수녀님도.”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 참, 바쁜 애한테 말이 길었다. 조슈아, 보육원에 물건들이 엄청 많이 배달되었는데. 다 너한테 온 거라서.

“네?”

- 아, 그러니까. 오늘 아침부터 계속 뭐가 배달되는데 책도 전집으로 세 세트가 넘고 그릇에 이불에 애들 장난감이랑, 아유. 너무 많아서 뭐가 또 왔더라?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침을 한 번 삼키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럴 리가 없지만, 정말 그럴 리가 없는데.

“누구…한테서 온 거예요?”

- 그게. 에이드리언 그렌트라는데. 그 크리스마스 때 아가 너랑 같이 온 사람 이름이 에이드리언 아니었어?

“…혹시 그 물품들 개봉하셨어요?”

- 아니지. 너한테 온 건데, 내가 함부로 못 열지.

“하하. 아무래도 잘못 온 거 같은데. 제가 한 번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 그래, 조슈아. 점심인데 밥은 꼭 먹고 일하고.

“에이, 저야 항상 잘 먹죠. 수녀님도 꼭 점심 맛있게 드시고요.”

머리가 묘하게 식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평소와 같았다. 원장 수녀님이 약속한다며 웃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보육원으로 선물을 보낸 개자식. 그것도 조슈아 베넷, 저에게.

이제 와서 뭘 하자는 걸까.

이제야 겨우 입술을 깨물지 않고,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데. 겨우 이제 와서.

조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일단, 보육원에 간 물품부터 해결해야 했다. 가장 간편한 방법은 돌려주는 것이지만 그거야말로 그 개자식이 바라는 일일 것이다.

조슈아 베넷이 먼저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연락을 하는 일.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부 물품 내역서를 보낸다거나, 기부증서를 발급한다든가. 내용 증명까지 해서 보낸다면 물품은 그대로 기부로 처리한 채 일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내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물품이 제 이름 ‘조슈아 베넷’에게 온 이상, 그리고 그 개자식이 어마어마하게 부자인 이상. 도돌이표처럼 똑같은 일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질 수도 있었다.

확실하게 끊어야 했다. 조슈아가 엄지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매만지던 차였다.

“조슈아, 여기 있었어요?”

탕비실 문을 열고 크리스가 들어왔다. 조슈아가 얼른 손을 내린 뒤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전화하다 보니. 뭐 필요한 거 있어요, 크리스?”

“아, 조슈아 찾으러 왔죠. 겸사겸사 따뜻한 물도 좀 마시고.”

하지만 따뜻한 물을 마시겠다던 크리스는 머그컵과 정수기 쪽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 문을 잡은 채 조슈아를 기다렸다. 조슈아는 부러 정수기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얼른요, 볶음면 입맛에 맞던 것 같은데. 면 다 불겠어요.”

“그건 그래요. 면 정말 맛있는데.”

“가게 가서 먹으면 더 맛있어요! 나중에 한번 정말 가요.”

크리스가 기대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아쉽다는 듯 물었다.

“조슈아, 중국 음식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좋아해요. 사실 가서 먹어도 봤어요. 진짜 맛있더라고요.”

“그런데요?”

“너무 맛있어요. 거기는.”

“네?”

무슨 말이냐는 듯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맛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오잖아요.”

정말, 너무 맛있어서 로건도 거기에 왔을 테고. 정말 징크스처럼 되기 전에 조슈아는 발을 빼기로 했다. 크리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조슈아를 보고 웃었다. 조슈아는 대답하는 대신, 먼저 앞서서 탕비실을 나섰다.

“일단 빨리 먹으러 가요. 면 정말 다 불겠어요.”

- 저, 조슈아. 정말 미안한데요.

점심시간이 끝난 다음이었다. 잘 볶아진 소고기 볶음면과 바삭하게 튀겨진 에그 롤과 튀김만두. 치즈가 쭉 늘어나는 피자와 맥앤치즈, 샐러드까지 정말 호화로운 점심을 먹고 난 뒤, 조슈아가 책상 앞에 앉았을 때였다. 핸드폰으로 엘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점심시간 등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보통 메시지를 보내는 엘라를 아는 터라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 엘라는 아주 미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혹시 기사는 언제쯤 나올까요?

“어제 인터뷰한 거 기사 초고?”

조슈아가 되물었다. 엘라는 제가 질문해 놓고도 웃긴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이내 물꼬를 튼 듯 말을 이었다.

- 네. 아니 어제 인터뷰한 거 아는데, 계속 보스가 기사 언제 나오냐고, 초고부터 탈고할 때까지 다 검수하신다고. 조슈아한테 연락해 보라고, 아. 네? 보스가 연락해 보라고는 말하지 말라고요?

전화 너머에서 누군가 엘라에게 말을 하는 소리와 엘라가 대답하는 소리가 뭉그러졌다.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일 것도 없었다. 분명 빌 스웰딘이겠지.

안 봐도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처음에 에밀리한테 지시했다가 씨알도 안 먹혔을 테고. 두 번째로 엘라에게 전화하라고 했을 것이다. 착한 엘라에 거절 못하고 제게 전화했을 테고.

인터뷰 기사가 하루 만에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빌 스웰딘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빌 스웰딘처럼 어마어마한 잡지사의 편집장 인터뷰라면 더더욱. 초안부터 10번은 더 퇴고하고 나서야 에투왈에 보내서 마지막 검수를 받을 텐데.

제게 직접적으로 재촉은 못하고 엘라 옆에서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있을 게 웃기기도 했다.

“조슈아, 오랜만에, 저녁 먹을래?”

“예전에, 중국 식당 갔었잖아.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갈게. 물론 계산은 내가 할 거고.”

순간적으로 조슈아의 머릿속에 괜찮은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아주 확실하게 내용 증명을 보내는 방법. 조슈아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톡, 톡.

“…옆에 미스터 스웰딘 있죠.”

- 네. 옆에서 아주… 얘기하지 말라고요?

핸드폰에서 떼고 말하는지 엘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괜찮으면 나 좀 바꿔 줘요, 엘라. 아니다. 괜찮으면, 저한테 직접 전화하라고 이야기해 줄래?”

- 직접 전화하면 저야 고맙죠. 보스!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조슈아는 가만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머릿속으로는 무슨 말을 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슈아의 핸드폰이 울렸다. 4년간 익숙하게 보던 핸드폰 번호가 떴다. 조슈아가 핸드폰을 받았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 전화, 해도 돼?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어쩐지 주저하고 있어서, 조슈아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보. 아니. 큼큼. 미스터 스웰딘. 목소리가 왜 그렇게 풀 죽어 있어요.”

- 풀 죽기는 누가 풀 죽어. 그냥. 전화해도 되냐고.

“공적으로야 상관없죠. 미스터 스웰딘은 넥스트 유어의 인터뷰이였고. 정식으로 인터뷰 기사에 관해서 요청하신 거잖아요.”

- 그건! 그렇지.

빌 스웰딘에게는 차라리 지금처럼 발끈하는 목소리가 더 잘 어울렸다. 조슈아는 천천히, 그리고 침착하게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톡, 톡, 톡. 규칙적인 소리에 조슈아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전화 너머에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웅얼거림이 들려왔지만 조슈아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바로 용건을 꺼냈다.

“식사 사 주고 싶다고 했죠?”

- 응, 아, 응. 맛있는 걸로.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오늘 사 주세요.”

“조슈아 베넷 님.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어요?”

조슈아의 이름을 들은 서버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조슈아는 가볍게 웃으며 서버의 뒤를 따라갔다. 높은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에서는 찬란한 황금빛 조명이 쏟아졌다. 적당한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말끔하게 닦인 어두운색의 바닥은 우아한 분위기를 한껏 올렸다.

서버가 한쪽 테이블을 안내했다. 가장 사람이 오지 않는 안쪽, 길쭉한 가림막으로 안쪽이 잘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테이블 옆에는 커다란 통유리 창이 있어서 화려한 거리와 조용한 파크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였다.

“예약석입니다.”

“네. 아, 식사는 일행이 오면 함께 시작할게요.”

“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긴 꼬리 연미복 같은 유니폼을 입은 서버가 상냥하게 웃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조슈아는 의자에 앉았다. 흰색의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예쁘게 세공된 도자기 티슈꽂이와 분홍색 커다란 꽃과 꽃병. 그리고 유리잔 안에 켜진 티 라이트가 있었다. 조슈아는 검지로 티 라이트가 담긴 유리잔을 톡, 건드렸다. 쨍- 하니 투명하게 퍼지는 울림소리가 예뻤다.

이런 곳이었구나. 조슈아는 새삼스럽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의 데이트 코스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빌 스웰딘이 즐겨 찾는 레스토랑. 에투왈에 있을 때, 농담 보태서 천 번은 넘게 예약 전화를 한 곳이었다. 아, 옛날 생각이라니. 조슈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언제 오려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PM 6:43. 약속 시간까지는 17분 남았다. 오늘따라 길이 하나도 안 막힌 덕분에 생각보다 더 일찍 왔다. 빌 스웰딘은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은 아니니까. 한 7시 5분? 아니면 10분? 어쩌면 그보다 더 늦어지려나. 배고픈데. 기분 좋게 퍼지는 깔끔한 디퓨저 향과 맛있는 냄새들이 어우러져서 조슈아의 허기를 자극했다. 조슈아가 몸에서 힘을 빼고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던 참이었다.

“벌써 왔어?”

생각지도 못한 빌의 목소리에 조슈아가 토끼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림막 안으로 들어온 빌이 코트를 벗으며 빈 의자에 걸쳤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먼저 올 줄 알았는데.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미스터 스웰딘.”

“너가 더 일찍 왔잖아. 그런데, 조슈아. 계속 그렇게 부를 거야?”

빌의 눈이 사납게 치켜떠졌다. 하지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진회색 눈동자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자주 있었던 일이라서일까. 뭐든 상관없었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빌의 눈매가 순식간에 누그러지던 참이었다.

“따로 부를 말이 없어서요. 아예 부르지 않는 것은 너무 정 없잖아요. 그나저나 저 되게 배고픈데. 맛있는 걸로 시켜 주세요. 참고로 알레르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창밖을 바라보았다. 야경은 끝내주게 멋졌다. 잔뜩 약이 오른 것을 억누르며 주문을 하는 빌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포함해서.

맛있는 것을 사 주겠다던 빌은 약속을 지켰다.

새까만 도자기 그릇에 올려진 시금치 퓨레와 관자 스테이크는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푸릇푸릇한 초록색 퓨레와 새하얀 관자, 그 옆에 있는 노란색 레몬과 장식용 꽃은 눈까지 즐겁게 만들었다.

전채 요리로 나왔던 달콤한 문어 샐러드와 양배추, 완두콩과 레몬을 얹은 생선 요리에 메인까지 든든하게 먹자 조슈아의 표정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도수 없는 스파클링 와인까지 한 입 먹으며 조슈아가 가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진짜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말했잖아. 맛있는 거 사 준다고.”

와인 잔을 들고 있던 빌이 거드름을 피우듯 말했다. 정작 빌의 그릇은 절반도 채 비워지지 않았다. 조슈아는 힐끗 빌의 스테이크 그릇을 보다가 한마디 툭 했다.

“진짜요. 예전에 예약만 할 때는 여기가 이렇게 맛있는 데인 줄 몰랐는데.”

읍, 빌이 놀란 듯 마시던 와인까지 내려놓으며 콜록거렸다. 조슈아는 팔을 뻗어 물 잔을 밀어 주었다.

“사레들린 거예요? 물 좀 마시면 나을 텐데.”

“크흠, 흠. 너 진짜 기억력 좋다?”

“천 번 넘게 예약하면 기억 못할 리가 없죠.”

“…그냥 좀 기억 못하는 척이라도 해 줘.”

빌이 원망하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저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잔기침을 하면서 물을 계속 마시는 게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그냥 빌의 일상을 이야기한 건데. 뭐 저렇게 잘못 지적받은 것처럼 구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철이라도 든 건가?

“뭐.”

조슈아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리고 와인 잔을 들어 한 입 마셨다. 깔끔하게 톡 쏘는 맛이 좋았다. 빌은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대신 화두를 돌렸다.

“됐고. 디저트나 먹어. 여기 디저트도 맛있어.”

그러더니 빌이 잠시 조슈아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거, 안 먹는다며.”

“아니, 아까 미스터 스웰딘이 그러더라구요. 되게 달달한 초콜릿 케이크 보면서 딱 조슈아 입맛이라구. 미스터 그렌트도 그러고. 조슈아 단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차 안에서 크리스가 해줬던 말이 생각났다. 조슈아는 가만히 빌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미간이 조금 찌푸려져 있었고, 진회색 눈은 테이블 가운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웃긴 일이었다. 왜 빌 스웰딘은 이제 와서 이럴까. 제가 달달한 디저트를 먹지 않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제 눈조차 보지 못할까.

하긴. 단걸 질색하게 만든 개자식도 이제 와서 그러는 걸 보면 이번 달에 뭐가 잔뜩 겹친 모양이기는 했다. 조슈아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었다.

“네. 뭐. 저는 그냥 커피면 돼요. 미스터 스웰딘은요?”

“…정말 예전과 달라졌네. 나도 커피만.”

“여기는 커피도 입맛에 맞으세요?”

빌이 피식 웃었다.

“뭐, 미셸 솜씨보다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에밀리는 안 받아 줬죠? 저한테 전화하라고 한 거.”

“…엘라가 이야기했어?”

빌이 찔린 듯 엘라 이야기를 했다. 조슈아는 여유롭게 빨대로 커피를 저었다. 투명한 유리잔 표면에는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빨대가 움직일 때마다 안에 있던 동그란 얼음들이 유리잔과 부딪히며 쨍한 소리가 났다.

“제가 그래도 세컨드 비서로 4년이에요. 척하면 척이죠.”

“…진짜. 4년…이지.”

빌은 조슈아의 말을 곱씹었다. 4년이었다. 조슈아 베넷이 제 세컨드 비서로 있었던 게 자그마치 4년. 어지간한 비서는 삼사 일 내로 포기하던 그 자리에서 조슈아 베넷은 무려 4년이나 있었다.

편하다고 생각했고, 제법 친하다고 생각했다. 곁을 내어 주는 게 낯선 제가, 옆에 조슈아 베넷이 있는 게 오히려 당연해질 정도로.

“미스터 베넷은 정이 많네요. 선을 지킬 줄 알면서 저렇게 정 많기 쉽지 않은데.”

어느 날, 퇴근을 한 제게 니콜라스가 흘리듯 말했다. 생일이라며 받은 선물까지 들고서 말이다. 그때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슈아 베넷은 참 정이 많지. 에투왈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퇴사를 할 때마다, 이직을 할 때마다 선물까지 챙겨 주면서 아쉬움을 삼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분홍빛 도는 투명한 갈색 눈이 하도 다정해서. 사람 챙겨 줄 줄 아는 그 모습이 따뜻해서.

그래서 조슈아 베넷이 낯설었다. 삼 개월 만에, 겨우 만날 구실을 찾아서 갔을 때, 저를 공적으로 대하듯 꼬박꼬박 ‘미스터 스웰딘’이라고 불러서. 그렇게 장난스럽게 웃을 줄 알던 사람이 남 대할 때 웃듯 완벽하게 웃어서.

아니, 무엇보다도.

정 많은 조슈아 베넷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저를 대해서. 그래서 속이 쓰렸다.

“…엘라 통해서 말고 내가 바로 너한테 연락했으면, 받았을 거야?”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빌의 말에 조슈아가 빤히 빌을 바라보았다. 충동적으로 한 말인 듯, 빌은 눈을 크게 뜬 채 조슈아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슈아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안 받았을 거다. 정말로.

“솔직히. 제가 미스터 스웰딘한테 전화를 달라고 이야기할 줄도 몰랐죠. 다시는 안 볼 줄 알았으니까요. 아까 아시던 눈치던데.”

- 전화, 해도, 돼?

아까 빌은 분명 망설이고 있었다. 조슈아는 조금 편하게 웃었다.

“나한테 미안한가 봐요. 미스터 스웰딘.”

빌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조슈아는 아주 조금 아쉬웠다. 그때, 정말 그때. 제가 로건과 닮아서 좋았냐고 물었을 때. 아니 마지막으로 편집장실을 나서며 혹시나 할 말이 더 있냐고 물었을 때. 그때 이런 얼굴을 했으면 어땠을까. 차마,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하는 이런 표정.

하지만. 조슈아는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빌은 그러지 않았고, 시간은 제법 흘렀다. 그리고 저는 약게도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부터 했다.

“부탁이 있어요. 들어주셨으면 해요.”

“…뭔데?”

조슈아는 가방 안에서 서류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빌의 앞으로 내밀었다. 빌은 봉투를 받았다. 서류봉투 겉면에는 인쇄된 종이가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성 아녜스 보육원에서, 친애하는 후원자 미스터 그렌트께. 이게, 뭐야?”

조슈아는 잠시 고민했다.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그러다가 툭, 말을 던졌다.

“…제가 자란 보육원이에요. 성 아녜스 보육원. 그런데 ‘친애하는 후원자’가 저한테 물품을 보냈더라고요.”

“그 자식이 네 뒷조사를 한 거야?”

“그건 아니에요. 제가 알려 줬어요.”

“아.”

빌은 침을 삼켰다. 어쩐지 속이 타서 유리컵을 들어 찬물을 들이켰다. 성 아녜스 보육원. 조슈아가 퇴사한 후에 직접 조슈아의 이력서를 파기하면서 봤다. 조슈아가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것을. 그런데 그 개자식은 저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안다. 직장 상사와-대체할 말이 없어서 정말 끔찍하지만-연인이었던 관계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히 마음이 쓰였다.

조슈아는 다시 한번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후원자’가 보낸 모든 물품을 다 기부로 넘겼어요. 내용 증명보다 더 확실하게, 다시 볼 일 없게 기부 내역서를 전달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저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보냈다는 증거를 남길 수 있는 변호사도, 다시는 안 보내게 할 수 있는 방법도.”

“…내가 가면 다 해결되겠네.”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바랐던 말이었다.

* * *

유난히 기대되는 날이 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는 딱 오늘이 그랬다. 어제 오후, 보육원에 물품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오늘 아침을 기다렸다. 혹시나 연락이 오지 않을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만큼 심장이 쿵쿵 뛰었다. 까마득한 밤이 끝나고 동이 터갈 무렵까지 뒤척였다. 심지어 차를 타고 출근을 하는 지금도.

일부러 조슈아의 이름으로 보냈으니 혹시나. 정말 혹시나.

단번에 저를 받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하나 해나간다면, 그래도 조슈아에게 닿지 않을까.

기대감이 풍선처럼 부풀던 순간이었다.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에이드리언은 보던 서류 커버를 덮었다. 이내 문이 열렸다. 그런데, 마크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보스. 앞에 미스터 스웰딘이 와 있습니다.”

“그 새끼가?”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부드럽게 웃었다. 장미꽃처럼 붉은 입술 사이에서는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마크는 못 들은 척 문에서 내리기 쉽게 비켜섰다.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여, 친애하는 후원자님.”

마크의 말대로였다. 페라리에 걸터앉은 빌 스웰딘이 반갑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한 번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감이 좋지 않았다. 기대가 사그라들었다.

제 예상이 아니었으면 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차가운 목소리에 빌 스웰딘이 씩 웃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에게 다가왔다. 키가 비슷한 둘이 얼굴을 맞댈 정도로 가까워졌다. 빌이 가볍게 박수를 두 번 치더니 빌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부 내역 증명서 주러 왔어. 좋은 일 했더라. 친애하는 후원자, 미스터 그렌트.”

아. 머릿속이 온통 조슈아 베넷으로 가득 찼다. 다정한 조슈아 베넷, 사랑스러운 조슈아 베넷, 가냘프고도 텅 빈, 제가 아프게 한 조슈아 베넷. 그리고.

빌 스웰딘이 웃음을 지웠다. 낯을 싹 바꿔서 경고를 하듯, 그리고 협박을 하듯 속삭였다. 딱 에이드리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조슈아한테 계속 선물을 보내 봐. 그때마다 나랑 마주치게 될 거야.”

에이드리언이 입매를 올렸다. 아. 제가 잊고 있었다. 조슈아 베넷의 수없이 많은 모습들.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통통 튀는 조슈아 베넷. 이럴 상황이 아닌데도 에이드리언은 결국 웃고 말았다. 지금 조슈아 베넷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아니, 그냥. 조슈아가 궁금했다.

미션 완료

빌에게서 단문 메시지가 왔다. 조슈아가 희미하게 웃던 참이었다. 연달아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이미지 메시지였다. 어찌할 새도 없이 로딩이 되었다. 사진이었다. 파란색 페라리에 걸터앉은 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빌. 그 뒤로 ‘그렌트’라는 멋스러운 필기체의 문패가 보였다. 아마도 그렌트 사옥 앞인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또 오면 알려 줘. 내가 직접 간다고 개자식한테 단단히 이야기했으니까.

조슈아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어깨에 힘을 빼고 의자에 기대듯 앉았다. 어떤 표정이었을까, 그 개자식. 빌의 이죽이는 태도와 표정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으니까. 엄청 약올라했을까. 아니면 그저 무덤덤했을까.

조슈아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정말.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 천사같이 예쁜 얼굴 속, 사탕 바른 독처럼 아름다운 웃음이 일그러지는 거 따위는 생각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인데. 제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제 이름으로 보육원에 선물을 보내지 않는 것.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하지 않게 빌미를 만들지 않는 것. 다시는 얼굴 볼 일 없는 것. 딱 이 정도였으니까.

아, 하나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조슈아는 힐끗 편집장실을 바라보았다. 블라인드를 치지 않은 유리창 너머로 크리스가 보였다. 언제나 여유롭고 농담을 좋아하던 크리스는 엊그제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투자자와의 만남 때문이겠지. 아마 넥스트 유어에 있는 한 마주칠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조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넥스트 유어에 다니고 싶었다. 저, ‘조슈아 베넷’을 필요로 해주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같이 성장하고 싶었다. 보니의 말처럼 제게는 저도 모를 정도로 숨겨진, 어마어마한 야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조슈아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 까먹은 일 하나는 지금 처리하기로 했다.

조슈아가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를 눌렀다. 그리고 빠르게 메시지를 작성했다.

원장 수녀님. 그 물품들 사용하셔도 괜찮아요! 안면만 있는 분이 기부해 주셨어요. 혹시 나중에 또 그 이름으로 물품이 오면 저한테 바로 알려 주세요. 사랑해요! 곧 찾아뵐게요!

* * *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하면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맞다. 그 개자식 내 스튜디오를 알고 있지.

집 문 앞에 한 번, 그리고 스튜디오 출입문 앞에 한 번. 이 정도면 정말 접근 금지 신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슈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집 비밀번호도 바꾸고 보조 키도 달았다. 거기에 접근 금지 신청이라니. 세상에. <섹스 앤 더 시티>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제 삶이 더 어마어마했다.

혹시나 현관문 앞에 그 개자식이 붙여 놓은 사람이 있을까, 잠시나마 문을 열까 말까 고민을 하던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에서 내리고 집까지 걸어온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스튜디오 앞에 있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보안 카드를 찍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공동 현관 앞, 그 옆에 딱 기대고 서 있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공동현관 위에 달린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스크린에서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조슈아를 발견한 순간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우아한 녹갈색 눈동자가 달큼하게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고생했어요.”

“비켜요.”

“네?”

“비켜 달라고요. 들어가야 하니까.”

조슈아는 코트 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낸 뒤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당황하는 낯빛 하나도 없이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 그리고 투정을 부리듯 말을 끌었다.

“아까부터 기다렸는데. 그냥 들어갈 거예요?”

“미스터 그렌트.”

“치. 정말 계속 그렇게 부를 거예요?”

“오지 마요.”

아, 다행이다. 제가 낸 목소리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서. 높낮이 하나 없이 무덤덤해서. 그래서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새초롬한 시선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조금 커다래진 눈으로 저를 봐서. 다행이었다.

“조…슈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떨렸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다는 듯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상냥하게 웃었다. 아, 정말. 아주 예전의 조슈아라면 부끄러워서 딴청을 부릴 정도로 달콤한 미소였다. 심장이 기분 좋게 간질거렸고, 이 다디단 기분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는 웃음.

그래도 조슈아는 가만히 있었다. 사탕 바른 독에서 깨어나는 방법 정도는 익혔으니. 주먹을 꽉 쥐면, 더 이상은 목을 감싸며 주춤 뒤로 물러나지 않을 정도는 되니까.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미안하다는 듯 미간을 조금 찡그린 채 웃었다.

“아. 퇴근했는데 피곤하죠. 내가 너무 오래 붙들어 놓았네요. 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고 싶은데. 먹고 왔나요?”

“왜 여기에 있어요?”

“그야….”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둑하게 물든 거리, 점점 사그러들던 전등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정말 연극 같구나. 아니 정말, 연극 같은 삶을 사는 남자구나.

귓가를 오싹하게 할 정도로 나른한 한숨과 동시에 핀 조명처럼 남자를 비추는 전등. 그 평범한 전등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남자.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녹갈색 눈이 짙어졌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쥐어짜듯. 조슈아와 눈을 맞춰 왔다. 정말 애틋해서, 너무 소중해서 차마 손도 대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 붉은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당신이 보고 싶으니까요.”

아, 정말 예쁜 얼굴이다. 풀이 죽은 저 얼굴조차 참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제가 처음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보았을 때, ‘혹시 배우가 아닐까?’ 라고 착각한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 예쁜 얼굴로, 달콤한 미소와 근사한 목소리로. 저를 속였으면서.

조슈아 베넷이 조금 웃었다. 상황과 다르게 정말 웃긴 것을 본 듯한 웃음에 에이드리언은 말없이 조슈아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요. 삼 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아니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바로 반박했지만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드리언은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채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말이 나올지 예측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얼굴도 여전히 예쁘고, 목소리도 근사하고… 그리고 여전히 연기도 잘하겠죠.”

조슈아는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커다란 눈에 안타까움이 번졌다. 제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는 게 답답한 것 같기도 했고, 속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상관없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그러지 마세요. 그런 아쉬워하는 표정. 사람 가지고 놀 듯 후회하는 표정.”

“조슈….”

“사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독하게도 예쁜 얼굴이 혼란스러운 듯 조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언한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왜 저런 표정을 하는 걸까? 조슈아 베넷, 자신 때문에?

조슈아가 입매를 올렸다.

“사실, 당신이 후회를 하든, 하지 않든. 나와는 상관없어요. 말했잖아요.”

“…….”

“당신, 나한테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지독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마치 정말 남을 보듯 무감한 눈동자였다. 엊그제 레스토랑 앞에서 봤을 때보다 더 가까이에서 저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조슈아를 볼 줄 몰랐는데. 에이드리언이 작게 입을 벌렸다. 사람 빠져들게 만드는 녹갈색 눈동자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조금 흔들렸다.

조슈아가 천천히 공용 현관 키패드에 카드 지갑을 찍었다. 곧 불투명한 유리문이 열렸다. 움직여야 하는데. 에이드리언은 속으로 저를 재촉했다. 하지만 다리는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조슈아 베넷이 멀어지고 있었다. 로비 안, 경비원이 조슈아와 가벼운 목례를 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불투명한 미닫이 유리문이 서서히 닫혀 갈 쯤, 에이드리언은 낮게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선물, 계속 보낼 거예요.”

분명 들렸을 텐데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리문이 다 닫혔다. 더 이상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마크가 준 공용 현관 카드가 주머니에 있었지만 에이드리언은 카드를 꺼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어쩐지 저 뒷모습이 너무 시려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조슈아가 더 멀어질 것 같아서.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잘 잤으면 좋겠는데.”

진심으로 좋은 꿈을 꾸었으면 좋겠는데.

제 목소리가 전달되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없었다. 갑갑하고 답답해서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유리문을 응시했다. 그러다 천천히 뒤를 돌아 걸었다. 갈 곳이 생겼다.

초인종이 열리고, 무심코 바깥을 보던 마리 테사는 멈칫했다.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에이드리언 그렌트였다. 마리 테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힐끗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빼앗는 남자. 파인더 너머로 본다면 얼마나 매력적인 인물일까. 스크린에서조차 본 적 없는 미모와 그 강렬한 분위기는 감독으로서의 욕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마리 테사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에이드리언과 마크 웹디즈드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마리 테사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한참 올려다봐야 겨우 시선이 맞았다. 에이드리언이 나직하게 말했다.

“…미스터 맥카디를 만나러 왔습니다.”

“감독님께 바로 말씀드릴게요.”

마리 테사는 얼른 몸을 돌려 앤드류 맥카디가 있는 방으로 갔다. 안에 있는 동기가 “누군데?” 하며 나오다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거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아- 어색한 감탄사, 그게 끝이었다. 지난번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이 저택에 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다 알았다.

똑똑- 마리 테사는 문에 가까이 대고 말했다.

“감독님, 미스터 그렌트가 왔습니다.”

그리고 마리 테사가 문에 귀를 기울였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제 뒤로 와서 기다렸다. 이상하게도 침이 말랐다. 저게 위압감 때문일까. 지난번에는 흥분해서 미처 몰랐던 것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관록 있는 배우들 앞에서도 제법 배짱을 부리던 마리 테사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마리 테사는 문에 더 바짝 붙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마리 테사는 깜짝 놀라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앤드류 맥카디는 흰색 셔츠와 편해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트레이드마크 같은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며 앤드류가 말했다.

“왔군요. 미스터 그렌트.”

“문을 바로 열어 주시네요.”

앤드류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웃었다. 평소 그 사람 같지 않은 웃음기가 싹 빠졌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없었고 얼굴에는 희미하게 피곤한 기색이 있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앤드류는 문가에서 안쪽으로 비켜섰다.

“약속했으니까요. 들어올래요?”

아. 마리 테사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제 소리에 놀라 입을 가렸다. 저 안에서 일어날 일이 너무 궁금해서.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앤드류와 에이드리언은 마리 테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느릿하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무슨 얘기가 오갈까요?”

뚫어져라 문을 바라보던 마리 테사가 중얼거렸다. 우연인지, 제 시선 끝에 마크 웹디즈드가 보였다. 왁스로 잘 고정시킨 머리만큼이나 딱딱한 남자. 그는 상사만큼이나 딱딱한 표정으로 마리 테사를 잠시 바라보았다.

“보스의 이야기를 예측하는 것은 제 일이 아니라.”

무감한 목소리로 단조롭게 말한 마크는 예의상의 묵례도 없이 쌩하니 뒤를 돌았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앉은 뒤 들고 있던 가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졸지에 혼자가 된 마리 테사는 “저, 저! 싸가지 없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킨 채 가자미처럼 눈을 홉뜨고 마크 웹디즈드를 째려보았다.

“차라도 한 잔 줄까요?”

앤드류는 원형 테이블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힐끗 앤드류의 뒤를 바라보았다. 생수가 묶음으로 쌓여 있고, 그 옆에 있는 협탁에는 전기 티 포트와 쟁반 가득 종류별로 차와 커피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앤드류의 앞에 앉았다.

“됐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가죠.”

앤드류는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미간 사이를 눌렀다.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잠시 앤드류의 책상을 바라보았다. 잘 정돈된 책상 위에는 몇 권의 책이 올려져 있었다. 그중에는 <어제의 당신에게>도 있었다. 책 등받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미스터 맥카디와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죠.”

“그랬죠.”

“답을 한다면, 바로 영화를 만들 건가요?”

“미스터 그렌트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죠.”

앤드류는 잠시 벽을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는 규칙적인 초침 소리가 났다. 톡, 톡, 톡, 톡, 톡. 초침 바늘이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 동안 에이드리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재촉할 줄 알았는데, 앤드류는 에이드리언에게 눈짓도 하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책등을 바라보았다.

처음 저 소설을 알게 된 건 로건 때문이었다. 모처럼 연락을 하다가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며 로건이 이 소설에 대해 알려 주었다. 아마존에서 벌써 몇 주째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고 있는 소설이라고. 많은 제작사들이 이 소설의 영화화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그 우스갯소리에 에이드리언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었다.

마침 메간이 가져다준 영화화하기 적합한 소설 리스트에 저 소설이 있었다. 나머지 일들은 일사천리였다. 영화화 판권을 구매하고, 은퇴를 한다는 앤드류 맥카디를 조사해서 그를 설득하고, 그리고 어느 날 조슈아와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이 소설이 영화화되면 꼭 보러 가자고.

에이드리언이 아주 조금 입술을 달싹였다.

“…같이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미스터 맥카디, 당신이라면 이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영화에 녹일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요.”

영화가 개봉한다면 같이 보러 가기로 했었다. 말을 붙일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수십 억 달러가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에이드리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금액을 지불할 수 있었다. 조슈아가 영화를 같이 보러 가 줄지, 그건 확신할 수 없었지만.

뇌리에는 아직 조금 전의 조슈아가 생생히 남아 있었다. 마치 정말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비키라고 했던 조슈아, 그리고 정말 남이라고 단정 짓던 조슈아. 에이드리언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먹먹해지던 귀에 앤드류의 목소리가 꽂혔다.

“…부족한데요.”

“내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나를 찾아와서 그렇게 감동적인 말을 했던 미스터 그렌트의 대답으로는 확실히 부족하죠. 나는 미스터 그렌트의 말 때문에 은퇴를 번복한 거니까요.”

앤드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눈이 에이드리언을 응시했다. 마치 속내를 파낼 듯 예리하게 번쩍이던 눈이 순간 휘어졌다.

에이드리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이 빙빙 돌고 있었다. 입매가 판판하게 굳어졌다. 더 이상의 말장난은 사양이었다. 에이드리언이 말하려던 찰나였다. 앤드류가 조금 더 빨랐다.

“왜 하필 싸운 날의 다음 날로 돌아갔을까요.”

아, 물론. 소설은 다 읽었을 거라 믿습니다. 앤드류가 덧붙였다.

물론 책은 읽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바로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왜 하필 싸운 날의 다음 날로 돌아갈까요?”

책을 선물한 날, 조슈아가 제게 한 질문과 같은 말이었다. 책 커버에 쓰인 문구들을 보면서, 왜 하필 싸운 날의 다음 날로 돌아가냐고.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묻는 그 갈색 눈이 예뻤다. 그때 저는 꼭 답을 아는 것처럼 대답했는데.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초침 소리를 따라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 톡, 톡. 그러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처연해서 앤드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러게요. 차라리 싸우기 전날, 하다못해 싸운 날로만 돌아갔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만약에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날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사랑해요, 그 끊어질 듯 겨우 이어지는 말 한마디, 꺼질 듯 텅 비어 가는 눈빛, 버석하게 말라 버린 눈가를 보자마자 바로 안아 버릴 텐데.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입꼬리만 올렸다. 웃지 않는 눈을 보면서 앤드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하죠. 진심으로 미스터 그렌트와 함께 영화를 제작하고 싶어요. 그러니, 언제든 답을 알게 된다면 내게 이야기해요.”

에이드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조금 전 모든 것을 다 엎어 버린 듯 텅 빈 표정의 남자는 사라졌다. 대신 평소처럼 완벽하고 능숙하게, 모든 것을 웃음으로 가릴 수 있는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방을 나서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앤드류 맥카디는 소설 <어제의 당신에게>를 집어 들었다. 안경을 다시 끼고 한 글자, 한 글자.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책을 엎었다.

“이상한 일이지.”

참 인간미 없는 남자다.

수많은 사람들을 봐 오고, 그보다 더 많은 캐릭터를 창조해 낸 앤드류 맥카디조차 종잡기 힘든 남자였다. 빙그레 웃고 있는 얼굴이 참 싸늘한 사람.

이제까지 했던 몇 건의 계약 시에도 대리인이 왔었다. 제가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본 일은 영화의 시사 성공 후 뒤풀이 때에서나였다. 잠시 얼굴을 비추고 가는 제작사 대표.

은퇴를 했을 때서야 직접 온 남자는 정확히 앤드류가 약한 점을 파고들었다. 아마 제 뒷조사를 했겠지.

하지만.

앤드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주 조금이지만, 조금 전 제 방에 있었던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서는 제가 원하던 파비엘의 모습이 비춰졌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진심으로 후회를 하는 모습, 그리고 어쩌면 아직 후회보다 더 큰 게 남아 있는 듯한 모습. 그 응축된 모습은 앤드류의 기민한 감각을 건드렸다.

앤드류 맥카디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은 평소보다 더 또렷했고, 허기를 느낀 듯 반짝였다. 이내 그가 펜을 잡았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 * *

“와, 끝났어요.”

엘이 보고 있던 프레젠테이션 파일의 저장 버튼을 눌렀다. 크리스에게 메일까지 보낸 뒤 프린트를 눌렀다. 인쇄기에서 종이가 찰칵찰칵,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엘은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책상에 엎드렸다. 옆에 앉아 있던 조슈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쇄기에서 프린트물을 모아 엘에게 가져다주었다.

“고생했어요, 엘.”

“고마워요. 아직 더 미팅이 남아 있지만….”

엘이 책상에 엎드린 채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탈자를 확인하듯 꼼꼼하게 프린트물을 바라보았다. 다음 주 화요일, 크리스와 엘이 함께 갈 NS 미디어 플랫폼과의 협업 미팅을 위해 장장 3주간 매달린 발표용 파일이었다. 이제 엘은 눈을 감고도 발표의 A부터 Z까지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더 이상의 수정 사항은 없었다. 엘은 고개만 돌려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조슈아.”

“뭘요. 다 엘이 한 건데요.”

“그래도요. 나는 영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어렵더라고요.”

“원래 엘 담당이 아닌데 일을 더 하니까 그렇죠.”

“어쩌겠어요. 갑자기 미카엘라가 너무 바빠졌는데.”

엘이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어깨를 한 번 돌렸다. 조슈아는 미카엘라가 있는 곧을 바라보았다. 하긴, 요 근래 넥스트 유어에서 가장 바쁜 사람 2위를 뽑는다면 아마 50% 넘는 직원들이 두말하지 않고 미카엘라를 뽑을 것이다. 물론 1위는 크리스고. 엘이 조슈아를 향해 윙크를 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이야 제가 인사 파트지만, 처음 창립 때는 정말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다 했어요. 여기저기서 협업 따오고 광고 따오고. 어휴.”

엘이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옛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지 엘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조슈아가 조금 웃었다. 이럴 때면 정말 에투왈과 넥스트 유어가 다르다는 게 실감이 났다. 갑자기 엘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응? 조슈아가 눈을 깜빡이는 새, 엘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어마어마하게 큰 꿈을 안고 넥스트 유어에 이직했다면서요?”

“네?”

“역시, 당사자한테만 소문이 안 가는 게 맞아. 화장실만 들어가도 장난 아니던데.”

놀리듯 눈웃음을 짓는 엘을 보자 문득 지난번 보니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거들먹거리듯 웃었다.

“뭐, 워낙 꿈이 커서요.”

“그 큰 꿈, 넥스트 유어랑 오래오래 갈 거죠?”

엘이 눈을 반짝였다. 자연스럽게 흐른 말에 뭔가 덫을 밟은 기분이었지만 조슈아는 아무래도 좋았다. ‘조슈아 베넷’을 인정해 주는 곳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조슈아의 웃음을 긍정적인 대답으로 받아들였는지 엘이 한결 마음 놓은 표정으로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러는 사이 여기저기에서 퇴근을 시작했다. 다음 주에 보자는 활기찬 인사와 함께. 조슈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오후 6시를 넘어가는 시간, 모두가 바라던 금요일의 퇴근이었다.

그제야 엘도 아차 하는 표정으로 데스크톱을 껐다. 그리고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린트는 결재 파일에 잘 넣은 채였다. 조슈아는 엘을 따라 함께 걸었다. 복도를 걸어 편집장실로 가면서 조슈아가 파일을 바라보았다.

“보스한테 드리려고요?”

“네. 아무래도 종이로 보는 건 다르니까요. 으아, 주말은 좀 편하게 지내도 되겠어요.”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편집장실 바로 앞에 있는 제 책상에서 가방을 챙기는 사이, 엘은 편집장실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 대신, 크리스가 문을 열고 나왔다. 엘은 빙그레 웃으면서 결재 파일을 내밀었다. 크리스가 파일을 받아 들면서 빙그레 웃었다.

“끝?”

“끝!”

크리스의 말에 달린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꾼 엘이 환하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리스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고생 많았어, 엘. 조슈아도요.”

조슈아가 빙긋 웃었다. 한껏 뽐내듯 어깨를 펴던 엘은 이제 에너지가 다한 듯 시들해진 얼굴로 퇴근을 재촉했다.

“아무튼, 메일로 다 보내 놓았으니 오늘은 빨리 좀 퇴근을 합시다. 크리스가 퇴근을 안 하니까 직원들이 힘들어하잖아요!”

“누가?”

크리스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바깥을 바라보았다. 엘의 말이 무색하게 퇴근할 사람들은 알아서 퇴근을 하고 있었다. 반 이상 빈자리들을 보면서도 엘은 꿋꿋하게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랑 조슈아가요!”

못 이기겠다는 듯 크리스가 웃었다.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다. 엘은 능청스레 한마디 더 했다.

“심지어 주말인데. 얼마나 약속이 많은데요. 오랜만에 친구들도 좀 보고, 맛있는 데도 좀 가 보고, 운동도 좀 하고 싶고. 보스는 주말에 뭐 없어요?”

“나? 음, 일단 잠도 좀 자고, 청소도 좀 해야겠고. 아, 세차!”

“으….”

크리스의 말을 듣던 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희망은 조슈아에게 있다는 듯 기대감을 안고 조슈아 쪽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요? 이번 주말에 뭐해요?”

크리스도 궁금하다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다가 웃었다.

“비밀이에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데요?”

엘이 우스갯소리를 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 * *

햇살 잘 들어오는 커다란 창이 있는 방, 여덟 개의 침대 위에는 여섯, 일곱 살 남자 아이들이 누운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이었다. 조슈아는 한 명 한 명, 이불을 덮어 주며 잠자리를 살폈다.

군데군데가 젖은 채, 비눗방울을 하며 더 놀겠다며 울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모두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긴, 아무리 오후라고 해도 아직은 쌀쌀했다. 따끈한 물에 목욕까지 한 아이들이 낮잠에 빠지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아이들에게서는 달콤한 바디 로션 냄새가 훅 풍겼다. 조슈아는 마지막 아이까지 빠짐없이 살핀 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방을 나섰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나온 조슈아가 으,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기지개를 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오늘따라 노곤했다. 한 살 더 먹었다고 그러는 걸까, 아니면 오랜만에 온 제게 단단히 삐진 아이들을 달래느라 평소보다 더 놀아서 그러는 걸까. 음, 오늘은 후자. 조슈아가 경쾌하게 웃었다.

“어? 거잉말재이다!(거짓말쟁이다)”

유치가 하나 빠진 매기를 비롯해서 이제 일곱 살이 된 아이들은 조슈아를 아는 척도 안 했다. 말을 붙일 때마다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모습에 봉사자들은 물론 수녀님들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내 아이들은 다시 조슈아에게 엉겨 붙었다. 장난을 치고, 물을 튀기고, 눈가를 찡그리며 환하게 웃는 조슈아를 보면 그 어떤 아이도 더 이상 투정을 부리지 못했다.

“피곤하지?”

어느새 다가온 원장 수녀가 다정하게 한마디 했다.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아, 원장 수녀님.”

“꼬마들도 자는데, 오랜만에 여유롭게 티타임 좀 가질까?”

조슈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볕이 잘 들어오는 원장 수녀실에서, 조슈아는 동그란 머그컵을 든 채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색깔의 커피를 보니 아주 예전, 어렸을 때가 생각이 났다. 막연하게 노란 햇살과 원장 수녀실의 부드러운 소파, 달콤한 냄새가 나는 우유 쿠키와 제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커피 같은 거.

“어렸을 때는 이 커피가 되게 먹고 싶었는데.”

조슈아의 말에 원장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되지. 밤에 잠 못 자게. 그러고 보니 세상에,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어. 그 꼬마 조슈아가 나랑 이렇게 커피를 마시는 어른으로 자라났을 줄 누가 알았겠어.”

“좀 빨리 컸죠, 제가?”

“빠르지. 정말 조그마한 애기였는데.”

원장 수녀가 천천히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무릎 위로 올렸다. 그리고 아주 옛날을 떠올리듯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동자에 그리움과 애틋함이 겹겹이 쌓였다. 조슈아는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까지 헤집는 듯 원장 수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슈아는 원장 수녀를 부르는 대신 가만히 기다렸다.

이내, 원장 수녀가 빙그레 웃었다.

“이러다 보면 꼭 앨범을 꺼내게 된단 말이지.”

“앨범요?”

조슈아는 놀란 척 웃었다. 원장 수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슈아는 얼른 원장 수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 있는 종이 박스들을 대신 꺼냈다. 매일 닦는지 종이 박스 커버에는 먼지가 없었다.

커버를 여니 열 권 남짓한 두꺼운 앨범들이 보였다. 다 똑같은 앨범인데도 원장 수녀는 거침없이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한 장 한 장 넘겼다. 조슈아는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기억나니? 이때 세 살 때 처음 동산에 소풍 갔었는데.”

“당연 안 나죠. 헤헤.”

원장 수녀는 사진을 하나하나 짚으며 이야기해 주었다. 이때 누가 울었고, 이때 누가 오줌을 쌌고, 누구랑 누가 싸웠는지, 그런 사소하지만 재밌는 추억을. 조슈아의 눈에도 익은 친구들이 많았다. 미국 각지 그리고 해외에서 열심히 사는 제 가족들.

천천히 넘어가는 사진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가물가물한 기억들이 조금이나마 또렷해지는 것은 1~2학년 시기였지만 말이다. 조슈아는 넘어가는 사진들을 보다가 흐릿한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화질이 좋지 않은 사진은 귀퉁이가 닳아 있었고 구깃했다. 웃고 있는 빨간 머리 남자아이와 검은 고수머리 남자아이.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죠?”

“그럼 당연하지. 이렇게 예쁜 빨간 머리 꼬마가 어디에 또 있겠어.”

원장 수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그냥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정말 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또 있더라고요. 원장 수녀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며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마 조슈아, 네가 다섯 살 때인가? 요 뒤 동산에서 찍은 사진인 거 같은데.”

조슈아는 사진을 더 들여다보았다. 제 또래의 가족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데, 이렇게 굽실거리는 검은 머리 남자애는 누구지? 어린 시절이라 바로 입양을 간 건가? 그래서 제가 기억을 못하는 건가?

“그런데 얘는 누구예요?”

“잠깐만,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에이.”

조슈아가 투정을 부리는 사이, 원장 수녀는 앨범의 필름용 비닐을 올리더니 사진을 꺼내 뒤집었다. 사진 뒤에는 사진이 찍힌 날짜와 ‘조슈아 그리고 노먼’이라고 쓰여 있었다. 노먼. 조슈아는 입 속으로 이름을 되새겼다.

“노먼. 맞아, 노먼. 너랑 정말 친하게 지냈었는데. 하긴 기억이 안 날 만도 하지. 정말 어렸잖니.”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장 수녀가 잔잔하게 웃었다.

“한 육 개월 정도 있었는데, 가만있자. 그게 몇 년도더라? 내가 그때 트렌턴 쪽 보육원에 파견을 가느라 애가 가는 것도 제대로 못 봤지. 그래도 조슈아가 엉엉 울었다는 건 들었는데 말이지.”

“제가요?”

에이 설마. 조슈아는 웃었다. 원장 수녀는 눈을 크게 뜨고 조슈아를 바라보다가 조금 웃었다. 꼭 다섯 살배기 어린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에 조슈아는 괜히 몽글몽글해졌다.

“정 많은 꼬마가 어디 가겠어? 그 육 개월 새에 정말 친해졌었지. 이 사진도 원래 한 장씩 가지겠다고 떼를 써서 줬었는데. 아가사 수녀님 말로는 노먼이 가던 날 둘이 사진 잡고 우느라 이렇게 구겨졌다고 하더라.”

원장 수녀가 짓궂게 웃었다. 조슈아는 헤헤 웃으면서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가져갈래?”

원장 수녀가 사진을 들어서 내밀었다. 조슈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와서 또 볼래요.”

노먼. 입양을 갔을까, 아니면 다른 보육원으로 갔을까.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의 친구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조금 흐릿한 사진 속 그 시절 풍경이 참 예뻐서. 조슈아는 오래오래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위는 이미 어두워졌다. 버스에서 내린 조슈아는 기분 좋게 숨을 들이마셨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스튜디오까지 가는 길이 산책처럼 느껴졌다.

“다음에 또 사진 보여 주세요.”

빨리 또 오라는 어린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원장 수녀와 인사를 할 때 조슈아가 한마디 덧붙였다. 함께 추억을 훑어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원장 수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자주 가야지. 발걸음이 가볍게 걷던 조슈아는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조슈아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다를 게 하나도 없는 평범한 하루인데. 오늘 정말 피곤했나 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있는 평범한 검은색 세단을 보지 못한 채.

* * *

“…차라리 직접 뵙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조슈아 베넷이 스튜디오의 공용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띄지 않은 검은색 세단 안에서 마크는 말을 하고 조금 긴장했다.

분명 주제넘은 말이었다. 하지만 제 보스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이렇게 뒤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보스에게도, 조슈아 베넷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마크의 시선에서는 그랬다.

마크는 숨을 죽인 채 보스의 말을 기다렸다. 사람 서늘하게 하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크는 백미러로 보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갈 곳이 있다고 할 때의 묵직한 포스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세상 처연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의 어둠이 물씬 들어온 차 안에서, 보스의 하얀 얼굴은 더 새하얗게 동동 떴다.

“…싫어할 거 같거든요.”

“예?”

한숨 섞인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줬으면 했지만 보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가죠.”

마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의 생활이 일그러졌다. 그 간극이 계속 비뚤어지고 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져서. 마크는 조금 더 긴장했다.

창 너머 풍경들이 뒤로 지나갔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멍하니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가라앉은 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환했다.

그래, 딱 저 가로등 불빛들 같았다. 제가 일을 할 때면 올바른 답은 저 가로등 불빛처럼 확실하게 빛났다. 열여덟 살 때, 수천 억 달러가 걸린 수주 계약에서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선택을 믿었다. 그리고 남들은 배팅이라며 말리는 무모한 짓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결과는 다 제 뜻대로 되었다.

누군가는 천재적인 감각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타고난 감이라고, 선택의 귀재라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슈아 베넷에게는 그 어떤 답도 보이지 않았다.

선물을 보낸다면 자신을 찾아올 줄 알았는데. 찾아간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에이드리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슈아를 알고 나서부터 묘하게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답답함. 그리고 에이드리언은 모르고 살았던 불안감.

어떻게 해야 할까. 선물을 보내는 것도, 집으로 찾아가는 것도 어렵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아.”

문득 에이드리언이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마크.”

“예.”

“예전에 내가 성 아녜스 보육원에 간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예. 12년 전에. 그, 사고 이후 후원하는 전 보육원에 다녀가셨습니다. 기념사진 및 증서까지 모두 저택 지하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12년 전이라, 나쁘지 않네요.”

에이드리언이 작게 웃었다.

성 아녜스 보육원이 눈에 익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고 이후 보육원 및 고아원에 기부금을 들고 갔던 것은 기억난다. 모든 정신이 다 그 흐릿한 꿈에 집중되어 있던 터에 차를 타고 내려서 사진을 찍고, 증서를 전달하고. 그런 사소한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12주년 기념으로 다시 한번 후원 보육원 및 고아원에 방문하죠. 성 아녜스를 포함해서 3개 정도만 추려 줘요. 조슈아가 가는 날이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아요. 후원 증서에는 제작사를 찍고, 비용은 내 개인 계좌에서 나가는 걸로 하죠. 아, 그리고.”

에이드리언은 잠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기념사진은 도착하는 대로 내 방에 올려 줘요.”

“예. 알겠습니다.”

마크는 바로 대답했다. 그 대답이 참 마음에 들어서 에이드리언은 화사하게 웃었다.

* * *

“크- 진짜 오늘따라 맥주가 더 시원한데요?”

엘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맥주 500cc 한 잔을 다 비웠다. 탈탈 터는 시늉을 하는 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만 가득했다. 조슈아는 레몬을 띄운 물 한 잔을 밀어 주며 웃었다.

“천천히 달려요. 엘. 그러다 치즈스틱 추가한 거 못 먹는 거 아니에요?”

“Nope! 오늘은 몇 cc를 마시든 취하지 않을 거 같아요.”

검지를 들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던 엘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하긴, 적어도 오늘 엘은 취하지 않을 것 같기는 했다. 이번 주까지 하면 장장 4주간의 프로젝트가 바로 오늘 끝났으니까.

“어땠어요?”

“…끝내줬어요. 크리스도, 나도.”

NS 미디어의 협업 미팅을 마치고 복귀한 크리스의 표정에서부터 알았다. 오늘 둘이 얼마나 프레젠테이션을 잘 마치고 돌아왔는지. 어느 정도로 결과를 기대하는지.

미카엘라가 맡은 파트가 마무리되려면 다다음 주까지는 봐야 했다. 덕분에 전체 회식은 미뤄졌지만, 이렇게 소규모로 하는 가벼운 저녁 식사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아, 진짜 금요일에 결과 나오기까지 어떻게 기다리죠?”

조금 전, 어깨 위의 짐을 던 게 기쁜 듯 웃던 엘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크리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일하다 보면 수요일, 목요일 금방 갈 텐데?”

“하여튼.”

얄미운 말만 한다는 듯 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조슈아도 조금 웃었다. 크리스는 농담이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얼굴이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조슈아는 크리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슬쩍 물었다.

“오늘 빨리 취하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지난번에는 연거푸 잔을 비워도 멀쩡해 보였는데. 오늘따라 조금 달랐다. 하긴, 피곤할 만도 했다. 요즘.

“그런가요? 오늘 조금 피곤하긴 했는데.”

크리스가 뒷목을 매만지며 웃었다. 눈동자가 또릿한 걸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면 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서버가 다가왔다.

“치즈 스틱 나왔습니다. 이건 서비스!”

“감사합니다.”

김이 폴폴 나는 뜨거운 치즈 스틱과 서비스로 나온 치즈 나초. 크리스는 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려면 어때. 엘과 크리스 두 명 정도는 택시까지 태워서 집에 보낼 자신이 있었다.

딸랑- 가게 문을 열자 고소하고 기름진 피자 냄새가 훅 끼쳤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서버가 어서 오세요, 큰소리로 인사를 하다가 조슈아를 알아채고는 “어?” 했다.

“어? 뭐 놓고 가셨어요?”

“아, 네. 일행이 계산하고 나온다고 했는데. 안 나와서요.”

계산을 하고 바로 나온다던 크리스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들어오려던 찰나에 택시가 먼저 도착했다. 조금 취한 엘을 보내고, 조슈아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카드랑 지갑 모두 계산대에 맡기고 화장실 간 손님 있어요. 급해 보이더라고요.”

문 바로 옆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웃으면서 욱, 하는 시늉을 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엘보다 더 급한 사람을 가게 안에 놓고 갔구나. 아무리 멀쩡하다고, 괜찮다고 했어도 챙겼어야 했는데.

직원이 지갑과 카드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카드와 지갑을 받아 든 조슈아가 고맙다고 한마디 한 뒤 돌아섰다. 테이블 사이가 좁았다. 사람 북적이는 가게를 가로질러 화장실로 다가갔을 때였다.

“어? 조슈아?”

화장실 문을 열고 크리스가 먼저 나왔다. 정말 속을 비우기라도 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속은, 괜찮아요?”

“네, 뭐.”

크리스는 멋쩍은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조슈아는 카드와 지갑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크리스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흘렀지만 조슈아는 모른 척했다. 아무래도 안색을 보니 시원한 공기 좀 쐬어야겠다. 조슈아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가 따라 걸었다.

“너무 안 나와서 혼자 2차 이어서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고 싶은데 더 이상 마시면 내일 출근 못할 거 같아서요.”

“정말 성실하네요.”

“하하. 그나저나 엘은요?”

“택시 잡아서 먼저 보냈어요. 집에 가면 메시지 준대요.”

“고마워요.”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크리스를 발견하고 조금 웃었다. 크리스가 카드와 지갑을 흔드는 사이, 조슈아가 문을 열었다. 크리스가 먼저 가게를 나섰다. 두어 걸음 더 나간 뒤 크리스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아, 살겠다.”

시원한 밤공기 하나에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조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택시가 몇 대 있었는데, 다 어디론가 간 모양이었다. 길가 쪽으로 걸으면서 조슈아는 주변에 빈 택시를 찾았고, 크리스는 지갑에 카드 꽂기를 시도했다. 아직 취기가 도는지 헛손질이 이어졌다. 크리스의 미간 사이가 찌푸려졌다.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크리스가 머쓱한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다가 괜히 투정을 부렸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요.”

조슈아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회사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일에 몰입하는 남자가 낑낑거리며 헛손질을 하는 건 재밌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크리스가 휙 고개를 돌렸다. 삐졌나?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덕분일까, 아니면 어둑하게 내려앉은 밤하늘 덕분일까. 크리스의 귓불이 달아오른 것은 보지 못했다.

“지갑이 이상해요. 카드도 안 들어가고.”

그제야 조슈아가 다시 크리스를 돌아보았다. “어리광인가?” 할 만큼 뒤를 끄는 말투에 크리스를 다시 바라보았지만 크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원래 술에 취하면 이런가? 조슈아가 조금 웃었다.

“대신 해드릴까요?”

“그래 줄래요?”

크리스가 좋다는 듯 웃으며 카드와 지갑을 내밀었다. 그리고 조슈아가 카드와 지갑을 받아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카드를 지갑에 집어넣으려는데….

어. 조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크리스가 지갑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조슈아가 천천히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웃던 크리스는 술이 다 깬 얼굴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봐, 봤어요?”

많이 놀랐는지 말도 더듬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지금 크리스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놀란 걸로 따지면 저도 많이 놀랐다. 잠깐 봤지만 지갑 속에 꽂혀 있는 건.

“사진이면, 네. 봤어요.”

주말에 원장 수녀와 함께 본 제 어린 시절 사진이었다. 동산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저와 노먼의 사진. 조슈아가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어디에서 났어요?”

크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울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분명 노먼이라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 크리스는 검은 머리였다. 설마.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에 조슈아의 눈이 차분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듯 크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다 크리스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조슈아는 순간 긴장했다.

“아, 택시다.”

응? 크리스가 뛰기 시작했다. 크리스의 말을 기대하던 조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뒤늦게 크리스를 따라 뛰었다. 택시는 언제 발견했는지 크리스가 급하게 택시에 올라탔다.

조슈아가 붙잡을 새도 없이 택시가 출발했다. 그 와중에 창문이 열렸다. 크리스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손을 저었다.

“내일 봐요. 조슈아!”

“잠깐만….”

요-를 붙일 새도 없이, 택시가 멀어졌다. 조슈아는 제자리에 서서 벅차는 숨을 몰아쉬었다. 술김에 뛰어서 그런지 더 힘들었다. 머릿속으로 가는 산소를 허파에서 다 소비하나? 그래서 아무런 생각이 안 드나?

사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생각할 것도 없었다. 궁금증이 차올랐는데, 상대가 튀어 버렸다. 아하, 하하하. 정말 허탈해서 웃음이 나온다는 게 이런 걸까. 조슈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봤지만 조슈아는 개의치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을 때에서야, 조슈아는 웃음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켰다. 메시지였다.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

도착했어요 고마워요!!

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집에 도착했구나.”

조슈아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멍했다.

* * *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출근을 하자마자 조슈아는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크리스는 미리 예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 뭐 좀 마실까요?” 어색하게 말을 늘어놓는 크리스를 보며 조슈아는 어젯밤 내내 생각했던 말을 툭 내뱉었다.

“나, 알아요?”

크리스의 긴장된 표정이 조금 허물어졌다.

“당연히 알죠. 조슈아 베넷. 제 비서잖아요. 내 첫 비서.”

“나를 알고 있었어요?”

조슈아는 돌리는 말머리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젯밤 내내 생각했다. 그 사진은 뭘까. 왜 그 사진을 가지고 있을까. 크리스는 나를 알고 있었을까. 나를 알고 연락을 했을까. 그리고….

“당신보다 아마 내가 먼저 알았을 거예요.”

정말 나는 그 개자식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걸까.

조슈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다리와 주먹과 입매와 온몸에 힘을 주었다. 혹시라도 떨리는 부분이 있을까. 조슈아는 크리스의 눈을 응시했다. 대번에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꼈는지 크리스가 주춤했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었다.

“…속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조슈아.”

“당신 누군데.”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숨이 차는 것일까, 숨이 막히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크리스예요. 크리스. 그리고….”

크리스가 잠시 웃었다. 조금은 슬픈 것 같기도 했고,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개명하기 전에는 노먼이었죠. 노먼 밀러.”

아. 노먼. 바짝 당겨졌던 긴장이 순식간에 탁 풀렸다.

“조슈아!”

조금 비틀거린 것도 같다. 크리스가 놀란 듯 저를 불렀다. 크리스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어어. 그러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제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크리스한테 들킬 것 같았다. 조슈아는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다. 크리스가 선명해졌다. 그는 제 옆에 앉아 어딘가 애틋한 표정을 지은 채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더 일찍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말했나요? 로건한테?”

크리스의 목소리 위로 그 개자식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다정한 것처럼 사람 가지고 놀던 그 개자식의 목소리. 조슈아는 눈을 깜빡였다. 정말 진심으로 제게 미안하다는 듯, 크리스가 조슈아에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처음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미뤄졌어요. 기억 못할 수도 있어서. 조금 더 친해지면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다 크리스가 조슈아의 눈치를 보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 파란 눈을 본 순간, 조슈아는 옅게 웃었다.

아,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제가 속은 게 아니라, 크리스가 속인 게 아니라.

그 개자식 손바닥 위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한참 만에야 크리스가 말문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어려워서, 조슈아는 잠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크리스가 멋쩍게 웃었다.

“사실 다섯 살 때라서 나는 잘 기억도 안 나요. 그냥, 그런 띄엄띄엄한 기억 있잖아요. 모두 까만 옷을 입고, 독특한 냄새가 났고, 어머니가 막 울었고, 불안하고, 내가 잡은 어머니의 치마가 까만색이었고.”

크리스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조슈아는 조금 전 크리스가 주었던 사진을 들여다보며 크리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제가 맞는데, 꼭 아닌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는 아이, 노먼인 동시에 크리스. 같은가? 검은 머리카락은 같은데. 웃는 얼굴도 조금 비슷한 거 같기는 한데.

“집이 힘들었대요. 뭐, 어머니도 힘들었겠죠. 그래서 잠시 성 아녜스에 맡겨졌죠. 그래도 육 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갔어요. 어머니는 지금도 그날들을 죄스러워하시고. 이름도 그래서 바꿨어요. 아직도 우리 집에서는 제가 성 아녜스에 있던 육 개월이 볼드모트 같은 이야기라서. 뭐, 나도 그 육 개월이 아직 맺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죠. 불안하고, 초조했고. 혹시나 나를 정말….”

크리스의 말이 끊겼다. 조슈아는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 크리스의 얼굴에 해묵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한 번에 삼킨 듯 희미하게 웃었다.

“안 찾으러 올까 봐.”

문득 조슈아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매일 밤, 창문 근처에 기대어 앉아 있는 아이. 새파란 달빛 아래에서 쓸쓸한 냄새를 풍기던 아이.

하루는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늦은 밤이었고, 모두가 자는 시간이었다. 그때 저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왜 안 자?”

“혹시 왔는데 내가 못 봤나 해서.”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처음 온 애들이 대개 그렇듯 잠자리가 익숙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다. 손을 잡아 이끌어 제 침대에서 같이 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창에서는 보육원의 대문이 잘 보였다. 혹시나, 크리스가 그 애였을까. 조슈아는 가만히 그 애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대부분 그렇듯 그 애의 얼굴이 흐릿했다.

“그래서인지, 보육원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가겠더라고요. 내 감정이 좀먹는 거 같아서. 진짜 가고 싶었는데. 생각이 많이 났었거든요. 거기서 먹었던 간식이나 애들이랑 놀았던 거랑 그리고 사진 속 조슈아랑.”

“…기억력이 되게 좋네요.”

“뒤에 적혀 있어요. 조슈아랑 나랑.”

조슈아는 사진을 뒤집어 보았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보육원에 있는 사진과 똑같은 자리에 조슈아와 노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크리스는 이제 조금 편해졌다는 듯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넥스트 유어 하고서 굉장히 바빴는데, 가끔 사진을 봤어요. 그러다가 문득 조슈아 이야기를 들었죠.”

“제 이야기요?”

“네. 업계 최고의 편집장과 그를 보좌하는 두 비서 이야기. 에밀리 스콧과 조슈아 베넷. 유명해요. 몰랐어요?”

조슈아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다 모른다면 거짓말이다. 이번에 인터뷰 다니면서 제 소문이 어느 정도 퍼졌는지는 대면으로 확인했다. 크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모를 리가. 처음에는 그냥 동명이인인 줄 알았죠. 뉴욕이잖아요. 사람 많은 뉴욕. 그러다 우연히 편집장 파티 때 조슈아를 봤어요. 제가 딱 기억하는 얼굴, 빨강 머리.”

신기한 우연이다. 크리스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했다.

“어떻게 다가가지. 하면서 시간 보내다가 엘이 저한테 비서를 권했고, 혹시나 해서 조슈아를 추천했어요. 사실 정말로 넥스트 유어로 올 줄 몰랐는데. 헌팅 연락 많이 받았을 거 같았거든요.”

“아, 그건 맞아요. 연락이야 많이 받았죠.”

조슈아가 무심코 대답했다. 크리스의 눈이 커다래지는 게 웃겼다.

“아니, 근데, 왜.”

크리스의 말 위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동시에 크리스와 조슈아가 문을 응시했다. 크리스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엘이 들어왔다. 어제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쌩쌩한 얼굴이었다.

“아, 크리스. 조슈아도 여기 있었어요?”

“네. 잠깐 스케줄 때문에. 끝나서 바로 나갈 거예요. 편히 이야기하세요.”

“아니에요. 결과 나오는 거 미뤄졌다고. 그거 보고드리려고 온 거예요. 아직 못 봤을 거 같아서.”

엘이 나가려는 조슈아를 만류하며 속사포처럼 말했다. 그리고 잔뜩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조슈아는 한 박자 늦게 엘의 말을 인지했다. 결과가 미뤄질 만한 거라면….

“NS 미디어?”

크리스도 같았는지 되물었다.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한 팀이 많아서 날짜는 추후 공지라고 메시지 돌렸어요.”

아, 조슈아는 아쉬운 한숨을 삼키고 일부러 더 빙그레 웃었다.

“에이, 미뤄지면 더 꼼꼼히 본다는 거겠죠. 그러면 더 승산 있는 거 아니에요? 보스랑 엘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낱낱이 본다는 건데.”

“그렇겠죠?”

엘이 설핏 웃었다. 금요일까지도 어떻게 버티냐는 어젯밤의 엘을 기억해서. 기분 좋게 웃던 크리스를 알아서. 조슈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 *

오후 햇살이 제법 따뜻해졌다. 술래잡기 도중, 아이들이 눈치 못 채게 도망친 조슈아는 보육원 뒤뜰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여서 조슈아는 눈가를 찡긋거리다가 이내 손바닥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긴 일주일이 흘렀다. 결국 NS의 발표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며 금요일까지 기다리던 엘은 낙담한 표정으로 퇴근했다.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힘이 빠질 만했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고 있었다.

당분간 넥스트 유어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거 같아서, 조슈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다 하품을 했다. 아직 낮인데. 괜히 몸이 피곤한 것 같아서 조슈아는 조금 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왜 여기 있어?”

누군가 조슈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조슈아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인기척도 못 느꼈다. 혹시 술래인가 해서 커다랗게 뜬눈으로 옆을 바라봤던 조슈아가 금세 웃었다.

“아, 깜짝이야. 웬디 수녀님, 놀랐잖아요.”

“놀라긴. 왜 여기 있어?”

통통한 몸집의 웬디 수녀가 빙그레 웃었다. 제가 정말로 어렸을 때, 그러니까 웬디 수녀가 견습 수녀이던 시절부터 그녀의 앞주머니에는 언제나 사탕이 있었다. 몰래몰래 우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쥐여 주었던 웬디 수녀는 원장 수녀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나고서도 그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뭐, 나중에는 원장 수녀도 알음알음 눈을 감아 주었지만.

조슈아는 과장되게 몸을 숨기는 척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쉿! 술래가 저를 찾고 있거든요.”

“아아.”

웬디 수녀는 알 만하다는 듯 앞뜰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베니 찾았다! 앳된 목소리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그사이, 조슈아는 한 번 더 하품을 했다. 깜빡이는 눈가에 옅게 눈물이 고여서 조슈아는 슥 닦아 냈다. 웬디 수녀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더 잘 숨을 수 있는 곳 하나 알려 줄까?”

“파랑새 방이요?”

장단을 맞추듯 조슈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웬디 수녀가 맞혔다는 듯 빙고, 했다.

“피곤할 만도 하지. 계속 일하고 애들 놀아 주고. 얼른 들어가서 한숨 자. 안 그래도 곧 손님 오는 것 같던데. 오기 전에 자리 피하는 게 낫지.”

“손님이요? 주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봉사자라면 모를까 이 주말에 손님이라니. 후원자나 기부자일까? 아니면 입양을 원하는 가족?

“응. 아까 원장 수녀님이 전화하시는 거 잠깐 들었는데. 큰 건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가서 한숨 자. 좀 이따 오후 간식 먹을 때 깨워 줄게.”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의 일처리는 완벽했다.

주중에 에이드리언은 두 개의 보육원을 방문했다. 후원금과 후원 물품만 전달하고 가볍게 보육원을 돌아보았다.

성 아녜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기 후원이 아닌 일회성 후원이지만 조용히 기부만 하고 끝내고 싶다는 의견은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원장 수녀 한 명만이 나와서 에이드리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에이드리언은 빙긋 웃었다.

“보탬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원장 수녀는 따라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앞장섰다. 에이드리언은 원장 수녀를 따라 걸었다. 노란 볕 아래, 뛰노는 아이들과 서로 도와가며 일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슈트를 갖춰 입은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에이드리언은 주변을 살폈다. 마크는 분명 조슈아가 이곳에 있다고 했다.

원장 수녀는 보육원 건물 안으로 에이드리언을 안내했다.

“토요일이라 봉사자들이 많아요. 대부분 앞뜰에 있어서 내부만 보고 가는 게 편하실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원장 수녀가 에이드리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 한 번 오지 않았어요? 크리스마스 때.”

“네. 기억하세요?”

“조슈아랑 함께 왔던 산타클로스. 당연히 기억하죠.”

원장 수녀가 흐뭇하게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그 후로 한 번 더 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늦었어요.”

“뭘요. 기억해 주고 이렇게 후원해 줘서 고맙죠. 아, 조슈아도 와 있는데. 같이 맞춰서 온 거예요?”

원장 수녀의 말에 에이드리언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 침묵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 전까지 바깥에 있었던 거 같은데. 아, 웬디 수녀님. 조슈아 봤어요?”

다행히도 원장 수녀는 대답을 바란 말은 아니었는지 혼잣말을 하며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지나가는 다른 수녀에게 물었다. 체크무늬 이불을 들고 지나가던 수녀가 묵례를 하며 대답했다.

“아, 조슈아라면 파랑새 방이요. 졸려 보여서 조금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요.”

“하여간, 오늘 너무 열심히 일하더니.”

못 말리겠다는 듯 조용히 미소 짓던 원장 수녀가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어쩌죠? 그 애. 푹 자고 있을 텐데. 차라도 한잔하며 기다릴래요, 아니면.”

“괜찮다면….”

에이드리언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 누구라도 가진 적의를 누그러뜨릴 만큼 다정하고, 친절해 보이게.

“그 파랑새 방에 가 봐도 괜찮을까요? 사실 서프라이즈로 온 거라서.”

원장 수녀가 빙그레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조심스레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파랑새 방의 새파란 문이 열렸다. 조슈아는 커다란 창 아래에 있었다.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채 흰색과 푸른색의 줄무늬 이불을 덮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이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흐으, 흑.”

에이드리언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분명히 자고 있을 텐데, 이 조용한 방에서 아주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울음의 끝에서 나는 힘겨운 소리에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조슈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만지면 터질 것 같은 비눗방울을 대하듯 아주 조심히 이불을 조금 걷었다.

“으, 흐.”

에이드리언은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새하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앞머리는 땀에 젖은 듯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깊은 눈꼬리로 눈물이 떨어졌다. 괴로운 듯 끙끙대는 신음이 붉은 입술 사이로 연신 내뱉어지고 있었다. 괴로운지 이불을 그러쥔 손에 핏줄이 올라왔다.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조슈아를 불렀다. 떨리는 손이 조슈아를 흔들었다.

“조슈…아. 조슈아. 일어나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떨렸다.

조슈아는 이런 식으로 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기처럼 곤하게, 세상 무해한 얼굴로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다가 입술 끝을 말아 올리며 웃으며 잤다. 말랑거리는 코를 찡긋거리다 눈매를 가늘게 휘기도 했다. 가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이내 편안하게 숙면을 취했다. 예쁘고, 연약하고, 무방비하게. 마치 세상에 위험한 건 하나도 없다는 동화 속 왕자님처럼 말이다.

“흐, 으.”

흔들려서인지, 아니면 제 이름을 불러서인지 조슈아의 속눈썹이 떨리더니 이내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멍한 갈색 눈동자가 보이고, 이내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얼굴 굴곡을 따라 또르르 떨어졌다.

“괜찮아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에 조슈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부스스하게 자리에 앉았다.

“꿈…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조슈아가 연신 눈을 깜빡이다가 순간 손을 들어 올렸다. 에이드리언은 제 얼굴 부근으로 다가온 손이 뺨을 꼬집는 것을 보고 뒤늦게야 아, 나지막하게 아픈 소리를 냈다. 조슈아가 손을 떼었다. 에이드리언은 제 뺨을 쓰다듬었다.

“…아닌가. …그쪽….”

큼큼, 목이 잠겼는지 조슈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잔뜩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를 듣자 문득 에이드리언은 그날이 떠올랐다.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게까지 낮게 가라앉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

“난 그냥.”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뭔가 울컥, 하고 올라왔다. 조슈아는 느릿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옷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회색 옷소매가 진하게 얼룩졌다. 그 자그마한 자국이 에이드리언의 심장을 쿵, 때렸다. 준비해 온 말들이 많았는데. 정작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조슈아가 입술을 떼었다.

“이제 만족해요?”

“네?”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떨렸다. 조슈아는 더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들으면 안 된다. 들으면 분명히 더 이상해질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들었는데 에이드리언은 조슈아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곧게 쳐다보는 갈색 눈동자에는 다정함이라고는 한 줌도 없어서, 아니, 그 어떤 감정도 찾을 수 없어서. 조슈아가 시선을 돌리면 다시는 저를 보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이 더럭 올라와서.

조슈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가 악몽을 꿔서. 만족하냐고요.”

“악몽, 지금은 괜찮아?”

그 담담한 목소리 위로 로건에게 말하던 제 목소리가 덧그려졌다. 그 무감하던 눈빛이, 한 번 지체하지 않고 돌아서던 뒷모습이, 마치 남을 대하듯 제게 예의를 차리던 조슈아 베넷이.

아. 에이드리언은 연신 제 입술을 깨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조슈아의 모습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지려는 사람처럼.

에이드리언은 떨리는 손으로 조슈아의 소매를 잡았다. 손에 닿는 옷자락 하나가 너무 귀해서 에이드리언은 올라오는 생목을 삼켰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제…발요. 안 돼요.”

가냘픈 애원이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끊어질 듯 가늘게 울고 있었다. 녹갈색 눈이 마지막 희망을 품은 채 조슈아를 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툭 터질 듯 녹갈색 눈동자에 투명한 겹이 생겼다.

조슈아는 그 눈을 곧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더러운 것을 떼어내듯 툭, 하고 에이드리언의 손을 뿌리쳤다. 녹갈색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 예쁜 얼굴에 눈물이 떨어졌다.

“조…슈….”

“어떻게.”

입술 밖으로 나간 제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조슈아는 숨을 가다듬었다. 등지고 있던 창문에서 찬란한 햇살이 들어와 에이드리언을 비췄다. 조슈아는 길게 난 제 그림자와 에이드리언의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떻게 웃을 수가 있었을까.”

나를 찾아와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어떻게 웃을 수가 있었을까.

<4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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