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4
지은이 : 피가
펴낸곳 : 교보문고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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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4
피가
목차
#12. 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反)하여
#13. 믿을 수 없고 괜찮지 않은
#14. 다정과 다정 사이에서
#15. 당신의 진심이 나의 다정에 기대어
#12. 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反)하여
“어떻게, 웃을 수가 있을까.”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다. 처음 당신이 나를 찾아온 날. 그 복도 안에서. 그랬다면 웃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아니, 제 얼굴을 보지 못했을 텐데.
조슈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에이드리언의 눈에 잔뜩 눈물이 괴었다.
“내가 우스워?”
“아니, 그런 거 아니라.”
“찾아올 용기가 나?”
“…….”
“어떻게?”
“…….”
“감히.”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정말 핏기가 가신 얼굴이란 게 이런 걸까. 녹갈색 눈에 잔뜩 괴어 있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턱선에 맺힌 눈물이 똑, 똑 떨어졌다. 제가 덮고 있던 이불 위에 동그라니 짙은 자국이 번져 갔다.
왜 이제 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일까. 조슈아는 희게 웃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꼭 내가 나쁜 놈 같잖아.”
나쁜 건 그쪽인데.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고개를 저었다. 코끝과 눈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상했다. 조슈아는 호흡을 삼켰다. 무언가 왈칵하고 치밀어 올라오는 것 같아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이불을 걷었다. 에이드리언의 무릎을 덮게 되었지만 에이드리언은 이불을 쳐내지 않았다.
조금 잔 거 같은데, 몸이 노곤하게 풀려 있었다. 조슈아가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웠다.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젖은 얼굴에 햇빛이 비춰서 반짝거렸다.
“가요.”
조슈아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목소리라서 겨우 에이드리언만 들릴 정도였다.
“아주 멀리.”
어디로든 상관없었다. 그저, 제 시선에 닿지 않는 곳이면 족했다.
문 앞에 다다른 조슈아는 문고리를 잡고 조금 돌렸다. 문이 열렸을 때, 속삭이듯 덧붙였다.
“어쩌면, 영원히.”
그 순간, 아주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너무 활기차서, 이 가라앉은 방 안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서.
갑갑했다.
발을 떼는 게 이렇게 망설일 일이었나. 발바닥 아래로 뿌리가 뻗은 듯, 깊숙이 땅속에 박힌 것처럼 묵직했다. 조슈아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발을 떼었다.
뒤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슈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문고리의 자물쇠를 콕 눌렀다. 문이 닫히면 바로 잠길 수 있게.
그리고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았을 때에서야 조슈아는 벽에 등을 기대었다.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아주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심장 박동이 평소처럼 일정히 뛰는 것이 느껴졌을 때, 그제야 조슈아는 눈을 떴다.
제 앞에 보이는 것은 똑같았다. 흐릿하지도 않았고, 번져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웃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턱 막혀서, 조슈아는 주먹을 쥔 채 콩콩, 제 가슴을 두드렸다.
“어쩌면, 영원히.”
그리고 탁, 문이 닫혔다.
에이드리언은 눈을 커다랗게 뜨려고 노력했다. 시야 너머가 부옇게 번져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문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눈을 감았다 뜨거나,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면 그만일 텐데. 에이드리언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꼭 눈을 감으면, 그 뒷모습이 마지막처럼 눈에 남을 것 같아서.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조슈아가 잔상처럼 눈에, 그리고 마음에 박힐 것만 같아서,
하지만 묽어진 시야가 접혔다. 손등을 타고 미지근한 온기가 떨어졌다.
에이드리언이 제 손을 바라보았다. 계속 조슈아를 향해서 뻗었는데.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닿지 않을 게 너무 극명해서. 그리고,
그 뒷모습이 너무 단호해서.
심장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 너무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살갗에 닿는 모든 공기가 칼처럼 살을 에듯 아팠다. 에이드리언은 아주 어린아이처럼 둥글게 몸을 말았다. 마침내, 에이드리언이 제 가슴 위로 손을 올렸을 때.
막힌 둑이 터지듯, 입술 밖으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목을 긁고 나오는 소리는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의 울음처럼 처절했다. 숨이 계속해서 차올랐다. 누군가 목줄을 쥔 채 숨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산소를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아, 조슈아는 심해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바다였구나.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그리고 이제는 정말 남 같은 조슈아.
「바다는 다정합니다. 하지만 바다는 공평합니다. 사람에게 허락한 범위가 정해져 있죠. 만약, 바다가 허락한 범위를 그 이상으로 들어온다면. 순식간에 찌그러지죠. 폐든, 뭐든.」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잡아야 하는데.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애원을 하든 빌든 뭐든 해야 하는데.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안 잡힐까 봐. 그 뒷모습이 계속해서 제게 등만 보일까 봐. 숨이 막힐 정도로 겁이 났다.
똑똑. 조슈아는 선팅된 차 창문을 두드렸다. 곧 창문이 내려오고 무뚝뚝한 30대 초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냉한 얼굴, 한 올의 흐트러짐조차 없이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카락.
“무슨 일로.”
“미스터 그렌트가 나오려면 조금 걸릴 거예요.”
“그렇군요.”
무표정한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비서로서 정말 좋은 덕목인데. 문득 떠오른 생각이 웃겼다. 조슈아는 보육원 안뜰을 가리켰다.
“원장 수녀님이 차 한 잔 권하시는데, 들어오실래요?”
“괜찮습니다. 제안 감사하다고 대신 전해 주십시오.”
“우리 예전에 봤었죠.”
“그런가요.”
남자는 놀라거나 주춤하지도, 뜸을 들이지도 않았다. 사실에 대한 대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난번 넥스트 유어에서, 그리고 아주 예전에 로건 헤네스의 생일파티에서.”
남자는 대꾸 없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실례되지 않는 선에서 눈을 맞추는 것과, 더 할 말이 있는지 기다리는 게 예의 규범에 꼭 들어맞아서. 조슈아는 아주 잠시,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남자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조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입술만 위쪽으로 조금 올린 뒤 가볍게 묵례를 하고 돌아섰다. 뒤로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걸로 끝냈다. 대신, 안뜰로 들어서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원장 수녀님, 차 안 마신대요.”
원장 수녀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아이들 사이로 자연스레 끼어들어 갔다. 뒷문으로 나가는 길, 언뜻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무심코 허리를 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파랑새 방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깔고 잤던 요와 이불은 말끔히 개켜져 있었다. 분명 동그란 자국이 있었는데, 이불은 한 점 얼룩 없었다. 가만히 이불을 들여다보던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불을 들고 방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핸드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이런 토요일에 연락 올 곳은 별로 없는데. 조슈아는 무심코 핸드폰을 열어 보았다가 조금 놀랐다. 메시지는 크리스에게서 온 것이었다.
혹시 내일 시간 괜찮아요?
연달아 핸드폰이 두 번 더 울렸다.
아, 이거는 보스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보내는 거예요!!
물론, 조슈아가 괜찮다면 :)
조슈아는 새로 온 메시지 두 개를 더 확인한 뒤, 애매한 얼굴로 마지막 이모티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비죽 내밀다가 조금 웃었다.
마침 아주 옛날 친구를 찾고 싶었는데. 잘되었네요. 내일 점심에 보는 거 어때요?
조슈아는 메시지를 보내는 데 신경을 쏟았다. 덕분에 방문 너머에서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놓쳐 버렸다.
“그런데, 아까 그 아저씨 있잖아. 울고 있지 않았어?”
“어떤 아저씨?”
“아이 참. 아까 나갔던 아저씨 말이야. 되게 예쁘게 생긴 아저씨!”
* * *
“와, 조슈아. 멋진데요?”
“하하, 고마워요.”
“정말요! 청바지가 되게 잘 어울려요.”
크리스는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그래서일까?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조슈아는 이를 악물고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 좀 낮춰 줄래요?”
“왜…요?”
크리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리스가 제 시선을 따라 주길 바라면서.
자전거를 타는 어린아이와 뒤따르는 젊은 부부, 솜사탕을 뜯어 서로의 입에 넣어 주는 다정한 연인, 게이트볼을 치러 온 노인들, 벤치에 앉은 채 책을 보는 노신사와 그 옆을 지키는 개. 잠깐 훑은 제 주변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았다.
일요일의 웨스트사이드 파크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하늘이 이렇게 화창한 날이면 더더욱. 그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의 말을 들으며 조슈아를 힐끗 보며 웃고 있었다. 하긴, 조슈아 저라도 그랬을 것이다. 어떤 옷을 입었기에, 무슨 청바지를 입었기에 저렇게 큰 목소리로 칭찬을 할까. 조슈아가 입은 것은 흰색 후드 티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흰색 운동화가 전부인데 말이다.
“잘 모르겠는데. 무슨 문제 있나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크리스는 정말 눈치를 못 챈 모양이었다. 크리스는 조슈아의 눈치를 보듯 눈을 깜빡이다가 조금 전보다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덕분에 조슈아는 진심으로 조금 웃었다. 크리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보스 때문에 다 제 옷만 보잖아요.”
작게 웃으며 한 말에 크리스가 조금 멈칫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은 보스 아닌데.”
아. 맞다. 오늘은 정말 친구로 보자고 해서 나왔는데. 조슈아가 어색하게 입매만 씩 올렸다. 크리스는 따라 웃었지만 아무래도 얼굴에 서운한 티가 다 났다. 이렇게 보면 꼭 어린아이 같은 게 사진 속 다섯 살 배기 어린 노먼과 똑같았다. 그래서일까? 조슈아는 조금 편하게 웃었다.
“하도 매일 보스라고 불러서 그래요. 음, 크리스?”
“…원래 회사에서도 나한테 보스라고 부르는 사람 별로 없는데.”
얼굴 표정이 환해졌는데도 입은 여전히 속상한 척이다. 하지만 조슈아는 이미 투정에는 이골이 날 대로 났다. 모르는 척 빤한 얼굴로 크리스를 보고 웃었다.
“지금부터는 더 신경 써야죠. 이렇게 사적으로 보기도 하는데, 일할 때는 확실히 해야 뒷말 없죠.”
치이, 다 큰 남자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참 귀여운 소리였지만 조슈아는 한 번 더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대신 이렇게 놀 때는 크리스…라고 부를 거예요.”
아직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은 먼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뒷말을 잇기도 전에 다시 한번 크리스가 웃었다. 조슈아는 아까 했던 생각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웃는 얼굴만 봐도 사진 속 어린 노먼이 떠올랐다. 사진을 계속 염두에 두어서일까?
“참, 점심 뭐 먹을래요? 바로 갈까요?”
아무려면 어때. 어린 시절 친구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제게 넘어온 배턴을 잡았다.
“맛있는 거면 다 좋은데. 근처에 괜찮은 데 알아요?”
“여기가 사실 제 손바닥 안이거든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크리스의 말에 조슈아는 아주 설핏, 울 것같이 웃었다. 그러다 크리스가 알아채기도 전에 다시 웃었다. 어쩐지 이상한 웃음이었지만 크리스는 친구라는 말이 그저 좋은지 마냥 웃었다.
“여기 분위기 진짜 좋네요.”
조슈아가 프레츨을 집으며 말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어둑한 분위기와 적당히 시끄러운 분위기, 벽면 한쪽에 스크린이 붙어 있어 축구를 보기에 딱 좋았다. 물론 맛있는 맥주와 짭조름한 피자와 치즈스틱이 한몫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크리스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고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눈매가 반으로 접혀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눈웃음이 그려졌다. 회사에 있을 때보다 더 편하게 웃는 것 같았다.
크리스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 조금 취한 것 같은데? 조슈아가 생각하던 참이었다. 크리스가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우리 은근 취향 겹치는 거 같은데.”
크리스가 말끝을 끌었다. 조슈아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년기의 기억이 취향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는 하죠.”
멍하게 눈을 깜빡이던 크리스가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박수까지 치는 걸 보면 제 농담이 제법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크리스가 잔을 들고 짠- 하는 소리와 함께 부딪쳤다.
즐거운 저녁이었다.
“음, 미화된 게 너무 많은데요?”
“뭐가요?”
“우선, 오트밀. 그건 아무리 먹어도 맛없어요.”
“하지만 건강하잖아요. 위에 가끔 메이플 시럽도 올려 줬던 거 같은데.”
크리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조슈아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트밀은 언제 먹어도 맛없어요. 고등학생 때는 제가 메이플 시럽 뿌려 주는 역할이어서 제 거에만 많이 뿌렸는데, 그래도 맛없어요.”
“조슈아. 내 추억 그렇게 무너뜨리기에요?”
크리스는 과장되게 고개를 떨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조슈아는 오트밀만큼은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오트밀이 나올 때마다 조슈아는 통밀 과자를 한 움큼씩 먹었다. 원래 어린 시절에는 몸에 좋은 것보다는 입에 좋은 게 더 당기는 법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제 환상이 깨지는 것이 못 믿기는 듯 오트밀 맛있는데, 하며 중얼거렸다. 장난기가 훅 올라왔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오트밀 자주 먹어요, 크리스?”
“음, 가아끔?”
크리스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호. 저건 가끔 크리스가 거짓말할 때 나오는 특징이었다. 눈이 어디를 향할지 모르는 것.
“그렇게 좋아하는데. 점심을 아예 오트밀로 먹는 건 어때요?”
“네?”
순간 크리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걸렸다. 조슈아는 입가에 슬며시 감겨 오는 웃음을 삼키고 모르는 척 기지개를 폈다. 밤공기 좋다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리고 다시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건강 챙겨야겠다면서요.”
“우, 운동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크리스는 말까지 더듬었다. 다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조슈아는 조금 더 모르는 척을 했다.
“야근을 그렇게 자주 하는데 운동까지 하는 거예요?”
“뭐, 야근이야 가끔 하고 운동이야 취미니까.”
“건강 때문에요?”
“건강도 중요하고, 지금 몸 유지하는 것도 좋고.”
“그러면 더더욱 오트밀 같이 먹으면 좋겠네요.”
아. 크리스가 나지막하게 탁음을 뱉었다. 갈피 잃은 시선이 사시나무 떨듯 휘청여서 조슈아는 결국 걸음을 멈춘 채 웃음을 터트렸다. 배가 다 당길 정도였다. 이제야 놀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크리스가 아, 조슈아. 하고 투정을 부렸다.
너무 웃었다. 이 밤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조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반듯하게 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놀린 거죠?”
“‘크리스’한테는 그래도 된다면서요. 편하게,”
“그건! 그렇죠?”
눈을 깜빡이던 크리스가 어정쩡하게 대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루퉁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편해진 건가? 하면서 조금 좋아하기까지 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면, 뉴욕도 참 좁네요.”
“좁기도 하고, 만날 사람이라서 만난 거기도 하겠죠.”
조슈아는 가만히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크리스의 검은 머리카락이 새까맣게 빛났다. 시선을 느꼈는지 크리스가 조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연결되자마자 크리스가 눈매를 접었다.
“크리스.”
“네?”
“말을 참 예쁘게 하네요.”
“그냥, 조슈아랑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크리스가 조금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미풍이었다.
* * *
“에이…드리언?”
다정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알았다.
아, 이건 꿈이구나.
에이드리언은 쓰게 웃으며 눈을 꼭 감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조슈아가 다시 예전처럼 제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조슈아가 바란 건 제가 오지 않는 것이니까. 적어도 노력이라도 해야 했다.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냥, 그가 원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들어주고 싶었다.
“자요?”
하지만 제 귓가에 작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멀어질 때만큼은 참지 못했다. 더럭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황급히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좋았다. 꿈이 깨고 나면 더 큰 후회가 들 걸 알고 있어도, 지금만큼은 독 위의 사탕을 취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슈아도, 그 달콤한 목소리도. 모두가 사라진 곳에는 오로지 저 혼자 남아 있었다.
혼자.
목깃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낯선 감각이 선연해졌다. 정말로, 제가 조슈아를 못 보고. 그러고 살 수 있을까.
에이드리언은 내선 벨을 눌렀다. 곧 노크 소리와 함께 마크가 들어왔다.
“오늘 퇴근은 좀 일찍 하도록 하죠. 스튜디오로 가야겠어요.”
“보스, 다시 한번….”
“마크.”
에이드리언이 마크를 응시했다. 마크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보스에게 좀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는 언제나 보스 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마 마크 웹디즈드가 조금 더 잘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눈이 평소와는 너무 달라서.
마크는 말하지 못하고 이내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방을 나섰다.
“NS 미디어 결과는 언제 나올까요?”
엘이 한숨처럼 말했다. 조슈아는 무표정하게 크리스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크리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 뺨을 대었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엘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크리스와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내기요. 오늘 출근하자마자 엘이 NS 미디어에 대해서 몇 번이나 이야기할까, 20달러 걸었거든요. 저는 30번 이상, 크리스는 29번 이하. 그래서 제가 이겼죠.”
“와. 정말 너무하네.”
“아, 참고로 엘에게 돌아갈 수수료는 50%입니다. 그러니까, 10달러네요.”
“크리스. 뭐 해요. 빨리 내기 돈 안 주고.”
볼멘소리를 하던 엘이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은근히 엘의 말에 동조를 하려던 크리스는 입도 벙긋 못하고 순순히 지갑을 꺼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꺼낸 1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조슈아는 가벼운 손으로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크리스. 이건 엘 몫.”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네요. 이건 좀 이따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먹어야겠어요.”
조슈아에게 받은 10달러 지폐를 흔들던 엘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이었다. 조슈아는 엘 모르게 크리스를 향해 눈짓을 던졌다. 크리스도 그걸 느꼈는지 빙그레 웃었다. 내기에 져서 시무룩해진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침부터 가라앉은 엘의 모습에 떠올린 묘안이 잘 먹혔다. 에투왈에서 수시로 보던 에밀리의 내기를 이렇게 써먹는 건 또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성공적이었다. 순식간에 20달러를 잃은 크리스까지 웃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진짜 NS 미디어 언제 나올까요?”
서른한 번째.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심코 말했는지 엘은 조금 멋쩍은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아무래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엘의 머릿속에는 온통 NS 미디어뿐일 것이다.
“그래도 월요일밖에 안 되었으니까. 넉넉잡아 다음 주까지는 나오겠죠?”
엘이 황급히 덧붙였다. 조슈아가 박수를 쳤다.
“오! 인내심이 2주나 길어졌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내 인내심을 이렇게까지 늘리다니. 2주 뒤에 바로 프로젝트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계획서부터 다시 짜야겠어요.”
합격을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겠다는 듯, 엘이 결심 어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 겸 짧은 티타임의 끝이었다. 엘은 서류 커버를 들고 비서실을 나섰다. 조슈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크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듯 크리스가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왜요?”
크리스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무해한 표정으로 조슈아를 향해 웃었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보스. 결재 서류는 마저 보시면 제가 각 팀장들에게 다시 전달하겠습니다.”
“…가서 일하라고요?”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조슈아는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가 피식 웃었다.
“정말 칼 같네요. 어제 조슈아랑 오늘 조슈아.”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조슈아가 빙그레 웃으며 빈 잔들을 들고 탕비실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아차 한 듯 크리스를 향해 뒤돌았다.
“커피 더 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죠.”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뒤에서 보는 걸음이 경쾌했다. 정말 공과 사가 뚜렷해서. 크리스는 조금 웃었다. 내심 섭섭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워서. 그러다 크리스가 어라, 하며 뒷머리를 긁었다. 어쩐지 모르는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 * *
퇴근하는 걸음은 가벼웠고, 손은 든든했다. 회사 건물 앞에 새로 생긴 샌드위치 가게에서 베이글 샌드위치 두 개를 사 왔다. 연어 크림치즈 베이글은 오늘 저녁으로, 치킨 양상추 베이글은 내일 아침으로 먹을 예정이었다.
“조슈아.”
스튜디오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 가로등 아래 혼자 서 있는 저 남자만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즐거운 퇴근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꽉 잡았다.
“아주 멀리 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건 너무 가까운데.
조슈아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건 현실이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현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아랫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피가 밸 정도로 깨물었는데, 혀끝에 잠시 비린 맛이 감돌던 것 빼고는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슈아와의 거리는 열두 걸음 남짓. 어둑하게 물드는 거리, 가로등 없이도, 조슈아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슈아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손끝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지만, 애써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요.”
조슈아의 이름을 부를 때만 해도 형편없이 떨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유려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다시 에이드리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몸을 돌려 스튜디오로 걸음을 옮겼다.
잡아야 했다. 저 뒷모습이 정말로 건물 안으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한 번만 뒤를 돌아봐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까 이름을 부르는 데 모든 용기를 다 써 버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숨이 가쁘고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뒤돌아봤으면 좋겠는데. 순식간에 머릿속에 조슈아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떠올랐다.
“넥스트 유어.”
내뱉고 나서야 에이드리언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이건 명백한 오판이다. 머리로는 확신했다. 이건 조슈아를 더 멀어지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조슈아가 천천히 저를 돌아보는 순간, 제 입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NS 미디어와 합작 프로젝트 건 미팅했다고 들었어요.”
“…….”
조슈아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입이 말랐다. 입 안쪽 살을 아무리 깨물어 보아도 손끝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 걸음만 더 다가가면 조슈아의 얼굴이 보일 것 같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가는 게 제게 훨씬 나은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그러지 못했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10월이면 스타트업 회사 대상으로 투자금 논의가 있을 거예요. 물론 넥스트 유어도 해당이 되고요.”
“…협박인가요?”
매끄러운 제 목소리 다음으로 조슈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한마디는 에이드리언의 남아 있던 이성을 모두 끊어 냈다.
조슈아가 제 말에 관심을 가졌다.
조바심이 났다. 조금 전, 이런 얼굴로 이런 말을 하러 온 건 아닌데, 하는 그 모든 생각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에이드리언은 머릿속으로 계산조차 하지 못하고 말했다.
“조슈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요. 원한다면 투자금도 훨씬 더 많이 유치할 수 있고.”
누군가 듣는다면 퍽 달콤한 제안일 것이다. 이제 조슈아는 제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을 테니.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넥스트 유어 정도야 순식간에 정점의 궤도에 올려 줄 수 있었다. 막대한 자본과 광고판 그리고 몇 개의 계약만 더 갖춰진다면 넥스트 유어는 몇 년 안에 에투왈만큼이나 커질 수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빙그레 웃었다. 그 입매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오직 에이드리언만 알았다. 조슈아는 쉽게 답하지 않았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1초 1초가 수십 분같이 느껴지던 찰나였다.
아주 잠시, 조슈아가 웃는 것 같았다. 한쪽 입매가 조금 올라갔다. 그 입매가 올라갈수록 에이드리언의 기대도 풍선처럼 부풀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더할 나위 없이 커지던 순간이었다.
“당신, 진짜 애가 타기는 하는구나?”
아, 그건 에이드리언이 기대한 미소가 아니었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에 담긴 건 조소였다.
“협박을 할 필요가 없지.”
빌과 식사를 한 날이었다.
먼저 시킨 디저트를 다 먹어갈 무렵, 빌은 허기가 진다며 새 디저트를 하나 더 시켰다. 물론 조슈아의 눈치를 보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조슈아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세상에 빌 스웰딘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끈다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무알콜 칵테일을 시켰다. 어차피 계산하는 사람은 빌이었으니까. 하지만 빌 스웰딘은 오히려 더 시키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 유명한 ‘있는 무알콜 칵테일 다 갖다줘’를 간신히 말린 조슈아는 복숭아 맛이 나는 칵테일을 받았다. 빌은 괜히 툴툴거렸다.
“집에 가서 후회하지 마라?”
“비싼 밥 먹은 걸로 만족해요.”
“…계속 먹을 수도 있는데.”
빌은 한 템포 느리게 말을 했다. 하지만 조슈아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체. 빌이 혀를 한 번 차고는 고개를 숙인 채 디저트에 집중하는 척했다. 언뜻 스치듯 본 얼굴에 상처 받은 티가 고스란히 드러났지만 조슈아는 모르는 척했다. 알은체를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 빌이 조금 더 상처받는 거. 그 정도였다.
삐지면 무서운 건 옛말이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빌이 미간만 찌푸려도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 되새겨 보던 시기가 있었는데. 첫인상이 아무리 천사같이 잘생겼어도, 빌은 기본적으로 사나운 반항아 스타일의 미남이었으니까. 처음 그가 화났을 때는 다음 날 제가 맨해튼 강에 담가지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했었다. 물론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아,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빌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출퇴근할 때 갑자기 경호원이나 갱이 와서 저를 협박하거나 그와 유사한 수준의 일이 일어나면 어쩌죠?”
여태까지는 없었지만, 걱정이 안 되지는 않았다. 전 스튜디오에 살 때 조슈아가 문을 열기 전 생각했던 가장 최악의 수였다. 보육원에도 왔었고, 제 직장이며 스튜디오며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제가 가는 모든 곳을 알고 있었다. 이전처럼 무르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조슈아의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빌은 김샌 얼굴로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왜요?”
“협박을 할 필요가 없지. 안 해도 제 뜻대로 되는데. 협박을 해서 뭐 하겠어. 오히려 협박보다는 회유지.”
빌이 조슈아를 빤히 보았다. 너도 알 거 아니냐는 그 시선에 조슈아는 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예쁜 얼굴을 무기처럼 들고 와서 제 하루를 헤집었지. 달콤하게 웃으며 사르르 눈을 접고 깜빡이며. 그렇지. 협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태까지 그런 짓을 했어도 제게 협박 한마디 하지 않았을 것이고.
“뭐, 모르게야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무슨 짓이든 못하겠냐마는, 겉으로 보이는 체면을 중시하는 놈이니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런 방법이 너한테 안 먹힌다는 건 그놈도 잘 알 테고.”
빌이 힐끗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매를 조금 올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데. 만약 그 새끼가 그러면,”
만약. 빌은 그 기약 없는 가정을 두고 조슈아를 향해 말했다.
“그거야말로. 애가 탈 대로 탄 거지. 전혀 에이드리언 그렌트다운 수법이 아니잖아.”
빌의 말에 따르자면, 지금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애가 탈 대로 탄 거였다.
한 꺼풀 한 꺼풀,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무너졌다. 조슈아는 가만히 눈에 매겨지는 그의 절망을 바라보았다. 녹갈색 눈동자가 새까맣게 빛이 죽었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이 거리에서도 보였다.
조슈아는 일부러 봉투를 시선을 쏟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양파가 그릴에서 꺼내지자마자 서둘러 걷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다른 곳에 들렀다 오거나, 줄이 길어서 포기한 1달러 피자를 사 왔어도 괜찮았을 텐데. 계속해서 다른 생각을 하려 했는데.
결국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자연스레 조슈아는 빈손으로 제 목 부근을 매만졌다. 일부러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었는데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묘했다. 제 목을 졸랐던 남자가 저런 표정을 하는 게 우스워서. 조슈아는 에이드리언 쪽으로 한 걸음 걸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텅 빈 녹갈색 눈이 먹먹하게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걸음을 돌리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저 바스러질 것 같은 얼굴을 그냥 무시하고 가면 될 일이었다. 모든 기대가 꺾인 얼굴이니. 어쩌면 제가 바라는 대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슈아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에이드리언과 시선을 맞추었다. 차마 울지 못하는 눈이 조슈아를 마주했을 때, 그 새까만 눈이 달처럼 한순간 반짝였다. 조슈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그날. 밤이 되게 길었는데.”
그 말에 반응하듯 에이드리언이 아주 조금, 움찔했다.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혓바늘이 돋아난 것처럼 입 안이 따가웠다. 그만 말하라는, 제 이성이 보내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조슈아는 한 번 더 목 부근을 쓰다듬었다. 제 손에 닿는 살갗이 낯설었다. 훅, 하고 아팠다. 마치 정말, 그날처럼.
“하염없이 길어서 어떻게 삼켜야 할지 모를 만큼.”
조금 떨렸다. 덤덤할 줄 알았는데. 삼 개월이 넘어가서 거의 사 개월이 되었는데.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가슴 한편이 울렁거렸다. 꼭 토할 것처럼 이상하다가 훅 가라앉았다. 조슈아는 입매에 힘을 주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입술만 달싹였다. 먹먹했던 눈이 어느새 메말라 있었다. 그 건조한 눈이 오히려 더 아파 보여서 조슈아는 오히려 웃음이 났다. 억지로 올렸던 입매가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그런가. 그날 밤에 잠이 안 오는데, 아주 잠깐씩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만약, 이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떨까. 내 목을 조른 사람이, 갑자기 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그랬다. 보조 열쇠까지 단단히 잠그고 처음으로 제 규칙을 깨고 입은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밤을 새는 동안, 잠깐씩, 그러나 계속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제 목을 조른 사람이며, 단숨에 낯을 바꾼 사람이고.
제가 사랑이라 믿었던 사람이고. 진짜 사랑 받았다, 착각했던.
“그런데 궁금하더라고. 과연 들어온다면, 왜 들어오는 걸까. 네가 나를 때려? 이러면서 들어올까. 아니면.”
생목이 올라왔다. 침을 삼키는 동안 목이 아팠다.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짙게 물드는 밤 사이에서 남자의 뺨이 새하얗게 질리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조슈아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고. 잠시 미쳤다고. 잘못했다고. 평소 잘 그러듯 울면서 들어와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언뜻,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조슈아는 잠시 격양되어 가는 숨을 뱉었다. 그리고 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지.”
그 수많은 걱정과 달리,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한순간에 사라진 꿈인데, 집 곳곳에 꿈이 아니라는 증거들은 너무 많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질려 있었다. ‘숨은 쉬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언뜻 들 정도로. 눈 한 번 깜짝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문을 열었는데, 정말 아무도 없어서.”
추저분한 복수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고, 더러운 이기심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마음 한편에 숨어 있던 어두운 마음이 제게 속살거리는 것만 같았다.
“울었어.”
저렇게 모든 희망 하나 없이. 꼭 거울에서 봤던 그다음 날 제 얼굴처럼. 아무런 표정조차 없이 아파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더, 그리고 더. 그리고 또 더.
조슈아는 잠시 에이드리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잔뜩 물어뜯긴 입술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왜 이제 와서. 조슈아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그리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계속 그런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어.”
순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순간, 에이드리언이 아주 조금 더. 허물어진 것 같았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돌아섰다. 스튜디오로 향하는 조슈아의 뒷모습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뭐라고 하는지조차 모를 만큼 젖은 목소리였지만, 조슈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디론가 사라졌으면 했다. 그든, 저든. 누구든 상관없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신발을 어떻게 벗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순간이 띄엄띄엄 남아 있었다.
손이 떨려서 연신 공용 현관 리더기에 카드 지갑을 찍었던 것, 저를 보던 경비원이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가 엘리베이터를 눌러 준 것 그리고 집 안으로 겨우 들어와서 이렇게 몸을 웅크려 엎드린 것까지 전부 다.
추웠다. 지독히도 추워서, 조슈아는 매트리스에 엎드린 그대로 아무렇게나 손을 뻗었다. 움켜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서 눈을 꼭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계속 눈물이 났다. 코를 타고 눈물이 났다. 입을 앙다물었는데, 목울대 너머로 왈칵 울음이 넘어왔다.
뾰족뾰족 튀어나온 울음이 아파서, 다른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조슈아는 띄엄띄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아주 오지, 말지. 아주, 오지 말지. 왜.”
한 음 한 음이 성글은 진심이 되어 조슈아를 찔렀다.
그냥 뒤돌아섰어야 했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그렇게 마주하지 말았어야 했다. 평소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외면했어야 했는데. 그랬는데. 그 텅 빈 눈과 찢어진 입술을 보고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온전히 저만을 향한 사랑에 늘 허기졌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훅 끼어들었다. 늘 날 선 조슈아 베넷의 세상에. 사랑을 받는다는 건 참 좋았고. 폭신한 구름 속에 안락하게 있는 그 기분이 너무 좋아서 도리어 제게 독이 되었다.
헛헛해서 숨이 막혔다. 조슈아는 의식적으로 숨을 쉬려 노력했다. 젖은 공기로 가득 찬 이불 속은 덥고 짰다.
꾹꾹 눌러 버렸던 감정들이 툭툭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외면했던 날것들이 조슈아 위로 쏟아졌다. 결국 조슈아는 울기 시작했다.
매번 의식적으로 다물었던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울음소리가 새어 나갔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놓아 버린 이불이 걷히고 울음소리가 서럽게 방 안을 휘감았다.
건들지 않았으면 언젠가는 싹 사라졌을 텐데, 싹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상처가 곪아 터져 버렸다.
소리 내서 우는 법을 영영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조슈아 베넷은 저도 모르는 새, 진심으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 * *
아스라이 들리던 벨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눈이 부었는지 뜨는 것도 힘들었다. 습관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보았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팔 뻗는 게 이상했다. 아, 겉옷조차 벗지 않았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그대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내 핸드폰이 잡혔다. 조슈아는 몇 번이고 핸드폰 위를 끌었지만 알람이 꺼지지 않았다. 결국 부은 눈에 힘을 주어 핸드폰을 보았다. 6시 30분. 정시 기상이었다.
알람을 끄고 나서 조슈아는 매트리스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울리고 눈이 아프고 얼굴이 땅겼고 목이 깔깔했지만, 잠은 잘 잤다. 어느 순간부터 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뭘 먼저 해야 할지는 알았다. 조슈아는 겉옷을 벗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마른 식도로 찬물이 쏟아지자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띵띵 부은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환한 불빛 아래에서, 조슈아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골이 울려도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퉁퉁 부은 눈과 얼굴을 다시는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안녕? 두 번째지?”
평소 자고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첫 음을 내뱉는 순간은 목이 긁히듯 아팠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말의 끝에 웃음이 섞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웃겼으니까. 그래도 지난번 얼굴보다는 낯빛이 좋았다. 어쩌면, 너무 푹 자서 얼굴이 부은 거라는 말로 둘러댈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적당히 차가운 물을 틀어 세수를 했다. 얼굴에 짠 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지 눈이며 뺨이며 따끔거렸다. 클렌징 폼으로 거품을 잔뜩 내서 세수를 한 뒤, 조슈아는 다시 한번 거울을 바라보았다. 앞머리 끝에 묻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거울 속 조슈아 베넷이 퉁퉁 부은 얼굴로 저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습관처럼 마주한 얼굴을 향해 웃었다.
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악몽을 꾸고 우는 일이 있어도 일어나서는 바로 세수를 했다.
의식적으로 잊으려고만 했었다. 흘러가는 대로 없어질 거라 생각했고, 추슬렀다고 생각했다. 봐도 없는 사람이라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맞았으니까.
엉망이었던 모습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정작 제 자신을 위해 울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제 스스로까지 저를 위해 울면 제가 정말 불쌍한 것처럼 느껴질까 봐.
스스로 보듬지도 못하는 사람이 더 좀먹어 가는 것을 놓쳐 버렸다.
“…그래도 입술은 안 깨물었어. 잘했어. 조슈아 베넷.”
입 밖으로 나간 목소리가 저를 다독였다. 거울 속 제 모습이 점점 부옇게 번졌다. 그래도 입가에 걸린 미소가, 둥글게 휜 눈매는 또렷하게 남았다.
“조…슈아.”
툭, 크리스가 들고 있던 종이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새파란 눈이 커다래지더니 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조슈아한테 달려올 듯 구는 전조에 조슈아는 척,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크리스의 눈동자에 물음표처럼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줄줄 말을 이었다.
“짠 거 안 먹었고, 밤늦게 먹은 것도 없고, 애인한테 차인 거 없고, 슬픈 영화는 안 봤고, 잠은 푹 잤어요. 됐죠?”
넥스트 유어 건물을 들어오면서 마주쳤던 직원들은 모두 조슈아의 얼굴을 보고 크리스처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짠 거 먹었어요?”
“혹시, 애인한테 차였어요?”
“밤늦게 먹으면 그러던데.”
“슬픈 영화 봐도!”
조슈아를 본 사람들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줄줄이 이어지는 레퍼토리는 그래도 에투왈 때보다는 약했다. 그때는 어디 가서 맞았냐는 소문도 있었다. 얼굴이 더 어마어마했으니 당연했다.
한번 해 본 일이라고,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덕분인지 사람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크리스도 그런 눈치였다. 아, 하며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웃었다. 그리고 아차 한 듯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슈아가 한발 더 빨랐다. 금세 서류를 주워 탁탁 결을 맞췄다. 그러는 사이 빠른 눈썰미로 서류 머리말에 적힌 단어 몇 개를 읽었다.
투자 유치, 실리콘밸리, 흑자.
순식간에 어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한 말들이 떠올랐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크리스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제 얼굴 때문에 놀라 떨어뜨렸는데.”
짓궂은 척 말하자 크리스가 멋쩍게 웃었다.
“얼마나 푹 잔 거예요.”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오늘 컨디션은 엄청 좋겠는데요?”
조슈아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티가 날 정도로 부은 눈은 땅땅하게 당겼지만,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아침만 해도 지끈거리던 두통은 어느 순간부터 날아간 듯 말끔하게 사라졌다.
“아, 맞다. 보스. 아침 먹었어요? 예를 들어, 오트밀이라든가.”
조슈아가 짐짓 장난스레 뒷말을 끌었다. 크리스의 눈이 아까보다 더 크게 흔들렸다. 그러더니 뒷걸음질 치며 편집장실 쪽으로 다가갔다.
“음. 오늘은 속이 좋지 않아서.”
“할 수 없죠. 베이글 샌드위치 사 왔는데. 두 개.”
조슈아는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어제 먹지도 못한 베이글 샌드위치 대신 오늘 아침에 나오자마자 갓 사 온 샌드위치였다. 똑같이 연어 치즈 크림과 치킨으로. 크리스가 아, 하며 말을 우물거렸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배시시 웃었다.
“보스 평소처럼 아침 안 먹었을 줄 알았는데. 엘한테 물어봐야겠네요.”
“잠깐만요!”
크리스가 황급히 조슈아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냐는 듯 조슈아가 눈을 마주쳤다.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오트밀은 추억으로 남기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조슈아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봉투를 벌리며 물었다.
“치킨이 좋아요, 아니면 연어치즈?”
“둘 다 좋아해요. 그런데 조슈아. 가끔 짓궂은 거 알죠?”
“음, 매일 짓궂게 굴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농담…이죠?”
크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조슈아는 어깨를 들썩인 채 무슨 말을 했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마감!! 오늘 마감! 정말 끝!!”
미카엘라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피처 팀은 이미 전멸한 듯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박수를 쳤다. 다음 달에 나올 특집 <전설들의 대답 : 편집장편>은 정말 넥스트 유어에서 총력으로 밀던 프로젝트 중 하나였으니까.
조슈아는 비서실 안에서 미카엘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따로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지 않은 상대, 빌이었다. 내용은 [이번에는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였다.
그 위에는 왜 빌이 기사 수정을 요구했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이 붙어 있었다. 하나의 메시지마다 세 줄 이상 넘어가는 설명들과 달리 늘 제 답은 [네], 혹은 [그렇군요]였다.
조슈아는 스크린을 터치하며 빌의 핑계들을 살펴보았다. Q&A 형식이 매끄럽지 않아서,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않아서, 사진을 넣은 지면의 간격이 0.5mm가 아니라서. 그 유명한 런웨이의 악마 ‘메릴 체르니’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변명인 듯 변명 아닌 듯 기사에 퇴짜를 놓은 날마다 하나씩 왔던 문자들을 보며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까다로울 거라 예상했던 마리 데상타의 책임 편집장보다 오히려 에투왈 메인 편집장과의 대담 기사 수정이 훨씬 더 힘들었다고 피처팀 모두가 입 모아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다 조슈아한테 어떻게 버텼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마디씩 던졌고.
에투왈 기사는 매번 날로 먹던 사람이…. 그럴 때마다 조슈아는 혀끝까지 나오는 말들을 겨우 삼키고 대답 대신 한 번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빌에게서 온 문자였다.
바빠?
왜요?
바로 답을 보냈는데, 빌은 답장하지 않았다.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조슈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아까 크리스가 떨어뜨렸던 서류는 사내 인터넷망에 올라와 있었다. 재무제표를 다운 받는 김에 몇 가지 파일들을 열어 보던 중 발견했다. 매년 받았던 감사 느낌의 스타트업 회사 점검이 이번 가을에는 정식으로 실시될 예정인 것 같았다.
개시 재무제표부터 최근 재무제표까지. 넥스트 유어는 투자 받는 회사들 중 월등히 성적이 좋았다. 제가 봐도 앞서가는 기업이니, 투자금 회수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조슈아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때를 맞춘 듯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였다. 눈에 익은 번호를 보고 조슈아는 잠시 망설였다. 진동이 세 번이 넘어갔지만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조슈아는 잠시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기사 이번에는 정말 마음에 들었어.
전화 너머에서는 숨 쉴 틈조차 없이 빌이 말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서 조슈아는 눈을 두 번 깜빡이다 소리 내어 웃었다.
- 여보세요.
“기사 이번에는 정말 마음에 들었어.”
한 박자 쉬는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전화 너머에서 연결음 대신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빌은 준비한 말을 바로 꺼냈다. 고르고 고른 말들 중에서 가장 무난한 말이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지? 잘못 선택했나? 일 초가 수십 초같이 느껴질 때쯤,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빌은 잠시 멈추었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다행히도, 제 말이 실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 그러실 거예요. 피처팀장이 정말 신경 많이 썼거든요.
“…그렇더라고.”
나른하게 넘어오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빌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 되게 기사 꼼꼼히 보셨다던데. 피처팀에서.
“일이니까.”
사실 처음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말 한마디 더 보낼 핑계가. 2교, 3교, 4교. 수정 요청을 거듭할수록 빌에게 오는 기사는 점점 더 퀄리티가 좋아졌다. 나중에는 트집 잡을 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조슈아가 낮게 웃었다. 전화를 타고 오는 웃음소리가 둥글었다. 지난번 얼굴을 보고 식사를 할 때는 웃는 것조차 짧아서, 그 순간이 아쉬웠는데.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순간 머릿속에 옛날 조슈아가 한 장면처럼 스쳐갔다. 출근을 할 때마다 꼬박꼬박 인사말을 붙이던 모습부터, 일에 집중하는 모습과 그러다가 비서실에 번지듯 퍼지는 이야기에 환하게 웃는 모습.
- 되게 편집장님 같은 말이네요?
“…원래 진짜 편집장인데.”
- 아, 그러네요?
정말 이상한 날이다. 자꾸만 조슈아 베넷이 웃었다. 딱 몇 개월 전만 해도 너무 당연한 일이었는데. 편집장실을 나서기만 하면 다정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는데. 왈칵 치미는 말들 중 하고 싶은 말을 고르던 중이었다. 전화 너머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조슈아가 잠시 무언가 말을 하더니 전화에 대고 말했다.
- 아, 저 가 봐야 해서요.
“일하는 시간이지, 참.”
터질 것 같던 말들이 순간 톡 터져 흩어졌다. 분명 전화를 걸 때만 하더라도 한 번만 받았으면, 했는데. 받고 나면 두 마디 이상 말이 오가면 좋겠다, 했는데. 기대라는 건 끊임없이 번식해서 통제할 틈조차 없이 이리저리 부풀었다.
조슈아는 보지도 못할 텐데, 빌은 애써 입매를 고쳐 웃었다. 그러는 새, 다시 한번 조슈아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정말 급한지 조슈아가 빠르게 말했다.
- 오후도 진짜 편집장님처럼 일하시고요. 그럼 먼저 끊을게요.
그리고 뚝- 전화가 끊어졌다. 뚝, 뚝, 뚝. 끊어진 연결음을 듣다가 빌은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전화를 하는 상태였어도 하지 못했을 말들이었다. 오후도 힘내라든가, 나중에 또 연락하자든가, 하루 잘 보내라든가, 그런 평범한 말들. 조슈아 베넷에게는 일상처럼 당연한 말들.
하지만 정말 해야 할 말도 못해 버렸다.
정말 늦었지만, 진심으로….
“…미안해.”
잔뜩 눅눅한 목소리였다. 방음이 완벽한 편집장실에서 혼자만 듣고 사라지는 목소리.
왜 늘 한 박자씩 늦는지 모르겠다. 사과든, 뭐든, 전부 다. 빌이 결국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NS 미디어 플랫폼 협업 미팅 결과예요.”
“…….”
“우리로 최종 결정이래요!”
넥스트 유어로 최종 낙점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앵무새처럼 말하던 엘은 진이 다한 듯 의자 위로 넘어지듯 앉았다. 엘의 깜짝 발표라는 말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환호성을 질렀다. 겹경사였다. 프로젝트를 마친 뒤 어슬렁거리다 가장 먼저 엘의 옆에 와 있던 미카엘라가 가볍게 엘을 껴안았다.
“이럴 거면서 왜 결과 발표를 미뤄, 미루길. 진짜로 축하해요 보스. 엘!”
조슈아는 반사적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똑같이 눈만 커다랗게 떴던 크리스가 서서히 웃음을 머금었다.
“진짜, 고생 많았어요. 엘.”
“뭘요. 크리스. 진짜 매일 야근하고 그랬으면서.”
“아, 정말. 너무 훈훈한 거 아니에요?”
매번 업되어 있던 사람이 이럴 때는 또 보스처럼 굴었다. 누군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들뜬 듯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슈아는 마음껏 웃었다. 그러는 사이, 화제가 달라지고 있었다. NS 미디와의 협업에서 미카엘라의 프로젝트 끝과 더불어 회식까지.
“이 정도면 진짜 우리 회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 많으니까 팀별로라도.”
“에이, 그러면 회사 전체 흥이 안 나는데. 지난번처럼 점심 회식도 좋고요, 보스!”
“하지만 점심 회식하면 술이 빠질 텐데. 회식에 술이 빠지면 쓰나.”
와글와글한 의견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든 시선이 크리스에게 꽂혔다. 크리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음, 어쩔까. 나는 민주주의적 보스니 다수결의 원칙에 따를게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머릿속에는 착착 시나리오가 갖춰진 모양이었다. “에이, 보딩스쿨도 아니고.”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가득했다.
“첫째. 사람이 많으니 팀별로 따로 저녁 회식을 간다. 대신 나랑 엘 그리고 조슈아는 모든 회식에 참여한다.”
“네? 저요?”
듣고 있던 조슈아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이 프로젝트의 주역인 크리스와 엘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제 이름이 나온 건 너무 뜬금없었다. 하지만 조슈아가 고개를 젓기도 전에 주변 사원들이 오히려 무슨 문제 있냐는 식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크리스가 두 번째 안을 이야기했다.
“둘째. 지난번처럼 점심 회식. 날짜는 내일로 하고 메뉴는 오늘 내로 정하는 걸로.”
“에이, 둘 다 좀 아쉬운데.”
헤더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마디 했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변에 이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할 만한 가게가 없다는 게 정말 너무 아쉬웠다. 있기만 한다면 바로 저녁 예약을 걸고 올 텐데. 시원한 맥주에 기분 좋은 회식을 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조슈아 역시 아쉬운 얼굴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크리스의 입매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셋째도 있는데?”
“오! 세 번째 안까지 있어요?”
준비된 보스네. 헤더가 덧붙였다. 가만히 있던 조슈아가 풉, 웃음을 참았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가 예쁘게 눈을 접어 웃더니 말을 이었다.
“셋째는, 이번 주 금요일. 점심부터 이어지는 회식! 물론 메뉴는 투표로 열 가지 이내에서 받을 거고, 투 고(to-go)만 되는 곳은 지는 팀이 직접 다녀오기. 세 번째의 장점은 맥주 프리! 와인과 보드카는 예산 내에서 진행할 거고.”
“나 셋째!”
“셋째에 줄 섭니다!”
“그냥, 셋째 아닌 사람 손드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아닌 사람 있어요?”
피터가 크게 외쳤다.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정이었다.
엘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뭐야! 크리스! 이거 완전 답이 정해져 있는 거잖아요!”
“다수결에 따른 투표인데?”
크리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짝짝-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러면 답이 정해진 거죠?”
그리고 그날, 누군가가 커다란 화이트보드의 월간 일정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번 주 금요일, ‘넥스트 유어 전체 회식’이었다.
하루 만에 회사에 커다란 일이 두 개나 생겼다. 덕분에 제 부은 얼굴에 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붓기가 가라앉은 것도 한몫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에는 평소처럼 피곤에 찌든 직장인 조슈아 베넷만 남아 있었다. 화장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본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정말 퇴근하고 집에 가면 되겠….
“오늘 바로 한잔 갈 거죠, 조슈아?”
…다…라고 생각했다. 조슈아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는지 엘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아하하. 조슈아는 웃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카엘라의 마감과 NS 미디어와의 협업. 안 그래도 주변에서 옹기종기 소규모로 한잔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들렸는데 제가 왜 간과했는지 모르겠다.
미카엘라야 당연히 피처팀과 함께할 테고, 엘도 당연히 인사팀과 갈 거라고 생각했다. 아! 인사팀! 조슈아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엘. 오늘 같은 날은 팀이랑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팀이랑 가는데요?”
무슨 소리냐는 듯 엘이 웃었다. 너무 당연한 대답에 조슈아는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러면 저는요?”
“조슈아랑 크리스는 당연히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솔직히 이건 인사팀의 일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사업 따내는 거니까. 보스인 크리스랑 인사팀장인 나를 주축으로 인사팀과 비서인 조슈아가 다 같이 한 걸로 보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인원도 마침 다 하면 아홉 명이니까 회식하기에도 딱 좋고.”
뭔가 이상하지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어, 하는 사이에 우르르 회식에 갔고, 어느 순간 조슈아의 손에는 요즘 유행한다는 과일 맥주병이 들려 있었다. 평소 오는 피자집이 아닌 아이리시 펍이었다. 회사들로 즐비한 메인 스트리트에서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 제가 미처 보지 못한 곳에 이렇게 다양한 펍이 있었다.
빨간 조명과 잘 어울리는 화려한 노래가 귀를 쨍쨍하게 울렸다. 테이블은 따로 있었지만, 자연스레 섞이는 분위기였다. 이미 테이블에는 조슈아와 엘 그리고 크리스만이 남아 있었다. 조슈아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새, 크리스가 제게 몸을 기울였다. 커다란 노랫소리 사이에서 목소리를 전달하려는지 크리스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옥수수 피자 먹고 싶었는데. 엘이 꼭 여기 오자고 해서.”
“크리스. 아마추어처럼 왜 그래요? 하여튼 요즘에 피자에 빠져가지고. 예전에는 클럽이든 펍이든 다양하게 다녔으면서.”
그새 들었는지 엘이 툭 한마디 했다. 눈을 깜빡이던 크리스가 절대 아니라는 듯 빠르게 고개를 저었지만 조슈아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화제를 잡았다. “그래요?” 라는 한마디에 엘이 신이 난 듯 달려들어 이야기를 했다.
“알겠지만, 진짜 넥스트 유어 처음 시작할 때는 엄청 바빴거든요. 그런데 틈만 나면 클럽이야. 아주, 클럽에 펍에. 남들 다 지쳐서 회사에서 잘 때도 크리스는 잠깐 스트레스 풀고 온다고 클럽 다녀왔다니까?”
“그거야! 진짜로 클럽 다녀오면 스트레스가 풀리니까.”
크리스가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조슈아는 조금 웃었다. 클럽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간 클럽에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서 그렇게 텐션이 높았던 걸까? 웃는 조슈아를 보며 크리스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클럽 다니는 게 웃긴 건 아니잖아요.”
“웃긴 거보다, 되게 안 어울려서.”
“나랑 클럽이랑?”
“네. 보스랑 클럽이랑. 뭐랄까. 보스는 요거트에 오트밀 말아 먹으면서 농구공 튕길 이미지인데?”
생각해 보니 웃겼다. 딱 고등학생 크리스 밀러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농구부 주전 이미지인데. 아침으로 요거트에 오트밀 먹고, 크리스는 키가 크니까 빵도 먹으면서 걸어 다니고. 그러다 농구공 찾고.
“치.”
“어머, 크리스, 미쳤어요?”
크리스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엘이 못 들을 것 들은 얼굴로 조슈아에게 물었다. 조슈아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중립을 선택했다. 지난 일요일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익숙했다. 보육원에서 저만 보면 투정부리는 아이가 수십 명은 되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엘의 타박에도 크리스는 그대로였다.
“안 되겠어. 난 못 견뎌요.”
엘은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는 엘을 잡는 대신 오히려 조슈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면 클럽이랑 잘 어울리는 이미지는 뭐예요?”
“음, 글쎄요. 일단 술 좋아하고.”
아, 조슈아가 작게 움찔하며 뒤로 몸을 뺐다. 누군가 와서 부딪히더니 순식간에 오른쪽 어깨가 젖었다.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슈아-! 황급히 조슈아를 부른 크리스가 티슈를 뽑아 조슈아의 어깨를 닦았다. 당황한 듯 술을 쏟은 사람이 연신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아, 진짜. 옷 젖었죠. 정말 죄송해요.”
“조슈아, 괜찮아요?”
“아, 괜찮.”
펍에서 이런 일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조금 차갑기는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는데, 말하다 말고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예전에, 분명 이런 상황이 또 있었다. 앞섶이 다 젖을 정도로 독한 술을 맞은 날.
“아, 미안해서 어쩌죠?”
“…사실, 조슈아를 만난 적이 있어요. 이사 오기 이전에. 어떤 파티에서.”
제대로 기억나지 않던 날의 한 조각이 이렇게 생각날 줄이야. 흐릿하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제 착각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먹먹한 기억 속, 기가 막히게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수많은 거짓말들 속에서 이거 하나는 진실이었을까.
맥이 탁 풀렸다. 조슈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연신 사과를 하는 사람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요. 이럴 수도 있죠.”
“그래도… 아, 세탁비라도.”
“정말 괜찮아요. 술부터 새로 주문해야겠네요.”
조슈아는 맥주잔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빈말은 아니었던지 지갑까지 꺼내 들던 사람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조슈아의 얼굴에서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저만치로 갔다. 옆에 있던 크리스가 새 티슈를 뽑아 조슈아의 어깨에 꾹꾹 눌러 주었다.
“하여간 조슈아. 속 좋은 거는 좋은데. 술 냄새 장난 아닌데요?”
“뭐 어때요. 술집 왔는데 진탕 취한 느낌 들고 좋죠.”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재킷이 아닌 셔츠가 젖었다는 거다. 조슈아는 크리스에게서 티슈를 받아 들어 다 젖은 셔츠 위를 꾹꾹 눌렀다.
티슈를 찍을 때마다 독한 술 내음이 훅하고 풍겼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고 정신없었던 그날이 마치 파편처럼 조각난 기억으로 떠올랐다.
만약 그 자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문득 떠오른 가정에 조슈아는 입매를 올렸다. 확실하게, 시발점을 정하고 나니 그날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날 그 개자식은 저를 보면서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어두운 조명 아래, 얼굴도 보이지 않던 그 개자식을 떠올리려던 조슈아가 화들짝 놀랐다. 무심코 떠올린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어젯밤 보았던 것처럼 한 꺼풀 한 꺼풀 무너지던, 입술조차 하얗게 부르텄던 그 모습이었다.
희미하게 울 것처럼 웃던 그 얼굴.
과연 지금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조슈아는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
* * *
“엘레사 측에서 내일 오전 미팅 관련 최종 제시안을 보내 왔습니다. 이건 다음 주 수요일 예정된 옥토디움 회의 때, 제인이 레비스트로스 상원 의원과 만날 예정입니다. 현재까지 협상된 사항 정리해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스 케인즈에게 보낼 그림 카탈로그입니다.”
마크 웹디즈드는 세 개의 서류철을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건넸다. 에이드리언은 무심한 얼굴로 서류철을 받아 들고 책상 한편에 두었다. 에이드리언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시력이 2.0, 2.2인 그가. 마크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의 당신에게>에 관한 취재 요청은 다 물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많이 피로해 보이십니다. 닥터를 부를까요?”
“아, 이거요.”
에이드리언은 안경테를 한 번 올렸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계속 활자를 보니 눈이 피로해서요.”
“닥터에게 이야기해서 영양제를 추가하겠습니다.”
“지금 먹는 것도 충분히 많은데.”
에이드리언이 잠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웃었다. 희미한 그 웃음에 마크는 잠시 마음을 놓았다.
평소와 같았다. 오늘 새벽, 출근을 위해 저택을 찾았을 때 집사가 했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어제 저녁에 나가셨다 들어오셨는데. 나도 잘 모르겠어요. 들어오실 때 얼굴을 제대로 못 봤거든요. 그런데 주차도 제대로 안 하시고. 문을 닫고 들어가실 때도 뭔가 평소와 다르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마크는 조금 긴장했었다. 분명 보스는 조슈아 베넷에게 갔다 왔을 것이다. 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충고를 입 밖으로 냈어야 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침을 삼키며 방문을 두드렸을 때, 들어오라는 허락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다른 점은 하나도 없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있었고, 마크는 일정 브리핑을 시작했다.
입술이 다 튼 것은 피곤으로 넘겼다. 보스에게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지만, 마크는 이상한 일을 애써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 대신 보습용 립밤을 건넸다. 에이드리언은 알아챈 듯 빙그레 웃었다.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 시간을 넘기고 일을 한다는 것까지 다른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마크는 무심코 말했다.
“얼굴도 평소와 다르십니다.”
“내 얼굴이 다른가요?”
에이드리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마크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피부에 소름이 오돌토돌하게 올라왔다. 이건, 평소와 달랐다. 에이드리언의 얼굴도 보지 않고 마크가 묵례했다. 깔깔해진 입을 간신히 열어 말을 이었다.
“…실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궁금해서 그래요. 뭐가… 다른가요?”
이상했다. 녹갈색 눈동자가 사람 오싹하게 하려는 듯 형형하게 빛났다. 마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돌리고 싶은데 피할 수가 없었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얼굴빛이 평소와 다르셔서 말씀드렸습니다. 입술이 트신 것도, 평소보다 피곤하신 듯해서 빨리 퇴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의도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마크의 대답에 이어 에이드리언이 말했다. 그 대답이 너무 허망하게 들려서, 마크는 순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대신 보고가 끝났다는 듯 가볍게 묵례를 하고 나갔다.
가볍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에이드리언은 닫힌 문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정말 얼굴빛이 달랐던 걸까. 아니면 그 외 다른 게 있던 걸까.
에이드리언은 탁상용 거울을 들었다. 그리고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가벼운 티타늄 안경을 쓴 제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오늘 아침 욕실에서 보던 얼굴, 매일 아침마다 보던 얼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제 눈에 제 얼굴이 너무 익어 버려서 위화감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마크가 건네준 립밤을 보기 전까지 입술이 터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에이드리언은 손끝으로 제 입술을 더듬었다. 아까 바른 립밤이 다 말랐는지 거칠거칠하게 부르튼 입술이 만져졌다. 반사적으로 조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건조하게 말라 버린 갈색 눈 그리고 새하얗게 부르튼 입술과 얼마나 물어뜯었는지 아프게 찢어진 입술.
아. 에이드리언은 제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어린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좋지 않은 습관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마르고 아픈 눈이 계속 떠올라서 숨이 막혔다.
에이드리언은 반사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잔뜩 조이는 셔츠의 윗단추도 두 개 풀었다.
어젯밤,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조슈아의 얼굴과 목소리만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었다.
“당신이, 계속 그런 표정을 지었으면 좋겠어.”
어떤 표정이었던 걸까.
그 다정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제 심장을 파고들었던 순간, 조슈아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그런 표정을 짓고 싶었다.
에이드리언은 거울 속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매를 내렸다. 눈썹에 힘을 주기도 했고, 눈을 감았다가 뜨기도 했다.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전부 다 이상한 얼굴이었다. 맛없는 음식을 먹고 미묘한 표정을 숨기려는 표정 같았다. 어떻게 해야 그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문득,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제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기에 조슈아가 그렇게 울 것처럼 웃었을까. 그 다정하던 갈색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서, 제가 멀리 가버리기를 바라던, 다정하고 차가운 조슈아.
차마 이름도 부를 수 없는….
“…조슈아.”
한숨처럼 나오는 이름이 너무 아파서. 한 글자 한 글자가 자신을 책망하듯 날이 서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거울을 들지 않은 손으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이런 얼굴이었던 걸까?
손이 바들바들 떨려서 에이드리언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말끔한 거울 속에는 핏기가 다 가신듯 파리한 얼굴이 비춰졌다. 아무것도 없는 듯 텅 빈 눈과, 튼 입술. 조금 전과 같은 얼굴인데. 달랐다.
공포에 질려 있기도 했고, 굶주리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허했다.
흩날리듯 조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요, 아주 멀리, 어쩌면.”
새파란 문의 방 안에서,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단단한 뒷모습. 거울 속의 제 모습이 흐릿해졌고 허물 듯 손이 무릎으로 가라앉았다. 떨어진 거울이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깨졌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더니 이내 볼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서러운 어린아이처럼 눈물이 옹글옹글 턱 끝에 잔뜩 맺혔지만, 입새로는 한숨의 소리도 나가지 않았다. 목이 잔뜩 메어서 날숨조차 가라앉던 찰나였다.
기억나는 조슈아의 마지막 말이 제 목에 턱하니 고였다. 에이드리언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영원히.”
가라앉은 목소리의 끝에 나온 말이 현실이었다. 눈을 감아도 떠도 사라지지 않았다.
조슈아의 말 대로였다.
이미 끝난 관계였다.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관계.
이 관계를 만든 게 모두 저였다.
아, 아.
그제야 에이드리언은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훅 밀려오는 감정들이 너무 커서 손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버거웠다.
그럼에도….
정말 추잡하게도….
조슈아가 보고 싶어서.
에이드리언은 결국 소리도 내지 못하게 계속 울음을 삼켰다.
제발 조슈아 베넷이 느꼈던 것보다 아프기를 바랐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입술이 다 찢어지는 것보다.
조슈아가 얼마나 아팠을까, 차마 말하지도 못할 미안함에 제 가슴이 만 갈래로, 아니 수도 없이 많이 찢어지기만 바랐다.
그래서, 단 한 번이라도 전해지기를 바랐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조슈아.”
부디. 단 한 번만이라도.
조슈아 베넷한테 진심으로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차고 올라왔다.
결국,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아무에게도 전달될 수 없는 눈물이었다.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서툰 사과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