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믿을 수 없고 괜찮지 않은 (14/22)

#13. 믿을 수 없고 괜찮지 않은

칫솔에 치약을 짜서 입에 물었다. 조금 전 샤워를 하면서 꽉 들어찬 훈증이 거울에 계속 고였다. 조슈아는 양치를 하면서 이번 주말에는 욕실 청소를 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꿈을 꾸었다.

그 개자식이 나왔다. 하지만 무너진 땅을 밟고 있는 건 제가 아니었다. 왜 봐주지 않냐고 우는 것도 제몫이 아니었다.

모두 다 그 새끼였다. 입술을 깨물고, 부르튼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소리 없이 우는 사이 턱 끝에 눈물이 고이고. 조슈아가 원하던 표정을 하고 우는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이 밟은 땅이 무너졌다.

거품을 뱉고, 물로 입을 헹구면서 조슈아는 그 상황을 되새겼다.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은 꿈의 잔재가 마치 영화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하나를 깨달았다.

꿈속에서 조슈아는 단 한 차례도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칫솔을 칫솔꽂이에 꽂은 뒤, 조슈아는 흐린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거울의 가장자리에 물기가 어리며 제 얼굴이 비춰졌다. 그러다 하나를 더 떠올렸다.

꿈속에서, 조슈아는 아주 조금 웃었다. 에이드리언이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어서.

낯선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울 때 웃어 본 기억이 없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대신 끊어 버리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너무 많이 마음을 주어서, 이전처럼 끊어 내는 대신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많이 미워하기로 했나 보다.

조슈아는 마치 남 이야기를 하듯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기분이 생경해서 조슈아는 거울에서 얼른 시선을 떼었다.

할리우드의 악동 지나 케일런이 영화 촬영 후 스토커에게 칼을 맞았다. 스토커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NYPD에 인계되었고, 지나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속보로 들려온 소식에 아침부터 넥스트 유어는 부산했다. SNS에는 이미 사건과 관련한 기사를 써 냈고, 후속 기사를 위해 이미 미카엘라와 헤더를 비롯한 몇 명이 취재를 나갔다. 촬영장과 병원 그리고 경찰서에까지 나가 버리니 막상 오늘 넥스트 유어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요즘 스토커 장난 아니라더니. 촬영장에서 그럴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엘이 혀를 내두르며 마우스를 내렸다. 조슈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엘의 모니터에 시선을 꽂았다. SNS에는 지나 케일런에 관한 영상이 수십 개가 올라와 있었다. 아마 시간이 가면 수천 개는 더 올라올 것이었다.

엘은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화질이 깨끗한 영상 속에서 지나 케일런은 가드들의 경호를 받으며 트레일러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메이크업을 지우고 의상을 다 갈아입었는지, 지나 케일런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편한 모습이었다. 지나는 환하게 웃으며 앞에 선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있는 파파라치들을 발견했는지 간혹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 팬들에게는 정성을 다했다.

사인을 원하는 어린 팬들이 다가서려 할 때마다 가드들은 보호막을 만들 듯 팬들과 지나 사이에 거리를 벌렸다. 다 매뉴얼대로였다. 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간에서 지나가 펜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가드는 규정대로 지나의 손을 거두려 했지만 지나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무언가를 내밀었고, 이윽고 비명이 들리더니 탁,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다리가 잠깐 보이다 이내 비디오가 끝났다.

“으, 지나 케일런 괜찮을까요?”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인사팀의 누군가가 혀를 차며 한 말에 엘이 중얼거렸다. 조슈아도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딱 소리를 냈다.

“지난번에 피처팀 기획 중에 스토커 관련 있지 않았어요? 파파라치랑 스토커랑 결합해서 기사 쓴다는 거.”

“있었지.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던데. 사례가 하나 늘었네.”

누군가 씁쓸하게 말했다. 분위기가 더 다운되었다. 누군가 급하게 헛기침을 하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로운 기사를 보는 듯 연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 피처팀 기사 빨리 써야겠네요. 지금 스토커 기사들 훅훅 올라와요.”

“기획이야?”

“아,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약간 겉핥기식 사례 위주예요. 지난번에 앤서니 핸더슨 가택 침입한 스토커도 있고, 로단 크레프한테 협박 전화한 거랑, 빌 스웰…딘?”

순식간에 시선이 조슈아에게 쏠렸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자기도 빌 스웰딘 스토커 본 적 있어?”

“그냥, 가끔 가다가요.”

“세상에. 진짜 그사세네.”

누군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새 보니가 핸드폰을 보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더니 조슈아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보니. 뭐 재밌는 거라도 발견한 거야?”

“아니, 그게. 재밌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조슈아 혹시 스토커 잡았어요?”

“뭐?”

“뭔데?”

“내가요?”

내가 스토커를 잡았던가? 조슈아 본인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니 사람들이 보니에게 몰렸다. 자그마한 화면을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조슈아를 향해 엄지를 치켜올렸다.

“칼 든 미친놈 공격, 조슈아가 막은 거야? 대단한데?”

“그거랑 요 아래 파파라치 컷에서도 모자이크해서 나온 사진. 조슈아잖아요.”

아. 그제야 조슈아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눈치챘다. 그리고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칼 든 놈 공격 막은 건 저 아니에요.”

“진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감탄을 보내던 사람들이 또 제 말을 믿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 순진한 모습에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가드들 다 있는데. 제가 칼 든 미친놈을 어떻게 상대해요. 다른 수행비서가 한 일이에요. 미식축구 했던 비서인데 어지간한 가드들만큼 해요. 지난번에 오긴 했는데 일이 바빠서 올라오지는 못했어요.”

“와. 진짜 대단하다. 그냥 수행 비서인데 스토커까지 제압하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스토커라기보다는 파파라치를 가장한 미친놈이었다. 자기가 헤어진 것을 부정하고 전 애인이 좋아하던 빌 스웰딘의 탓으로 돌리던 찌질한 새끼. 카메라 대신 나이프를 들고 달려들다가 지미한테 제압당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징역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되었으려나. 몇 년 지났으니 출소했으려나?

“딱 사진만 보면 조슈아가 스토커 제압한 거 같은데.”

“사진이요?”

사진이라면 이골이 나게 다 확인하고 삭제 요청 후 확인까지 다 했는데. 조슈아의 말에 보니가 얼른 핸드폰을 내밀었다. 조슈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개인 블로그였다. 아마 잘나가는 팝스타의 그루피가 만든 듯 게시글은 대부분 특정 팝스타였다. 조슈아는 다시 보던 게시물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는 NYPD에 인계되어 수갑을 찬 채 끌려가던 미친놈이 있었다. 아, 사진 보니까 더 확실히 기억난다. 술도 좀 취했었던 것 같은데. 사진을 내리자 모자이크 된 빌 스웰딘과 제가 보였다. 모자이크는 빌 스웰딘의 우월한 기럭지뿐만 아니라 제 새빨간 머리카락의 색감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사진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현대판 왕자님 빌 스웰딘 그리고 스토커의 습격으로부터 그를 구한 비서]

정말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딱 제가 빌 스웰딘을 구했다 생각하기에 좋은 구성이었다. 조슈아는 아래로 내렸다. 아. 사진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진짜 조슈아 아니에요?”

엘이 사진을 보다가 조슈아를 가리켰다. 누군가의 팔을 꺾는 조슈아 베넷의 모습. 아마 몇 번 되지 않던, 조슈아가 파파라치들을 제압하던 모습을 포착한 것 같았다.

“사진이 또 있었어?”

한 번 또 우르르 사람들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일을 할 만큼 한 팀장급인 엘도, 갓 대학을 졸업해서 이곳에 온 보니도 모두 순진한 얼굴이라서 조슈아는 잠시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건….”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맞네요.”

“오! 조슈아! 스토커도 제압하는 거야?”

“맞다니까! 조슈아랬잖아!”

순식간에 ‘스토커도 때려잡는 조슈아!’가 된 조슈아 베넷이 입가를 올려 웃었다. 누군가의 팔을 꺾었던 것도, 운동을 나간 지도 아주 오래되었지만. 조슈아는 아주 조금, 콧대를 높이는 척했다.

* * *

지나 케일런이 병원에 입원했다. 직접 SNS에 사진을 올릴 정도니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나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자신은 괜찮다는 말과 걱정해 준 팬들에게 고맙다는 말 그리고 스토커는 피해자에게 너무 무서운 일이라 꼭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문인지, SNS에는 스토커 가중 처벌법을 통과시키자는 해시태그가 들끓었다. 덕분에 ‘넥스트 유어’는 하루 종일 바빴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였다.

기력 없는 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일 기사만 작성하느라 진이 빠진 직장 동료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달리 버스 정류장으로 바로 가던 찰나였다.

아, 집에 뭐 있더라? 문득 텅 빈 냉장고 생각이 났다. 조슈아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고민했다. 틈틈이 에너지바를 먹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는 못했다. 식재료 쇼핑이야 내일 한다고 해도 오늘 저녁은 든든하게 먹고 싶은데.

안 되겠네. 조슈아는 장난스레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돌렸다. 자주 가는 베이글 샌드위치 집은 회사 건물 건너편에 위치했다.

딸랑이는 벨소리와 함께 조슈아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시간은 지났지만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부산했다. 어느새 안면이 튼 서버가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한 뒤 계산대 옆에 있는 투명 쇼케이스 앞으로 갔다. 어지간한 델리보다 훨씬 커다란 가게라서 그런지 쇼케이스 안에는 갖가지 샌드위치 재료들이 가득했다.

윤기 나는 선홍빛 훈제 연어와 로스트 치킨, 얇게 저민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비롯해 갖가지 신선한 채소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다. 조슈아는 슬라이스 된 토마토와 적색 양파를 보다가 계산대로 갔다.

“연어 크림치즈 하나랑 라즈베리 치킨 하나요. 연어와 양파 더블로, 라즈베리 치킨은 닭다리살 더블로 해 주세요. 빵은 둘 다 에브리띵에 크림치즈는 둘 다 기본으로요. 아, 저기 크루아상 한 박스도 같이 계산해 주시고요.”

조슈아가 카드를 내밀려던 찰나였다. 가벽 너머에서 트레이 하나가 나왔다. 커다란 판 위에는 보기만 해도 입이 달달해지는 초콜릿 브라우니가 가득 놓여 있었다.

“…초콜릿 브라우니도 하나 추가해 주세요.”

“단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난번에 초콜릿 스프레드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그러게요. 그런데.”

이상한 충동이었다. 분명 단건 딱 질색인데.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는 단걸 제법 좋아했거든요.”

그냥 딱 한 입이라도. 달달한 게 먹고 싶어졌다.

가게를 나오는 조슈아의 두 손이 묵직했다. 내일 식재료 쇼핑을 하며 퇴근한다면 앞으로 며칠은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을 거다.

얇게 저민 햄과 베이컨 그리고 양파와 토마토. 또 뭐가 있더라. 조슈아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 무엇을 사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 거리만 걸을 때면 유독 비 오던 그날이 떠올랐다. 요 근래 들어 도통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저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비 오는 날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싫어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그냥 좋은 건 좋은 대로 넘기고 싫은 것은 그냥 넘겼는데. 싫은 게 많아진다는 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슈아 베넷다워지고 있구나. 이런 생각만 들었다.

조슈아가 모퉁이를 돌았다. 자그마한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아서 에이드리언은 최대한 목을 뺀 채 조슈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올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초콜릿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

아이스크림 팝업 가게의 서버가 커다란 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어떻게 올린 거지, 할 정도로 커다란 아이스크림이 더블 스쿱으로 올려져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에이드리언은 고동색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응시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생각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조슈아를 보겠다는 생각으로 왔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는 조슈아를 볼 때부터 계속 조슈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주 멀리 떠나라는 그 말이….

그래서 숨어 버렸다. 차마 따라가지도 못하고, 이 아이스크림 가게에. 겁쟁이처럼.

단 한 번도 스스로가 겁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조슈아를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정말로 진절머리 나는 얼굴로 저를 바라볼까 봐. 이제는 조슈아가 저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본다면 정말 그의 곁에 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에이드리언은 무심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혀끝에 닿으면서 녹았다. 그 맛이 지독하게 달아서, 조슈아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조슈아는 단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딱 질색이라고.

아마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에도 이곳에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가 조슈아를 마주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감히.

그래, 감히.

감히 마주해도 될까. 제가.

* * *

스토커 기사가 연일 화제였다. 넥스트 유어에서 기획으로 올린 <스토커와 파파라치> 기사 역시 조회 수가 월등하게 높았다. 아무래도 사건 당일 밤, 지나 케일런이 라이브 방송을 한 게 큰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포털 사이트마다 지나 케일런의 라이브 방송을 캡처해서 사진을 제공했다. 많은 스타들이 케일런의 일을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스토커 재발 방지법과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글을 개인 SNS에 올렸다.

조슈아는 커피 두 잔을 들고 기획지원팀 쪽으로 걸어갔다. 팀장인 브루노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리에 없었다. 오늘 오전은 취재로 자리를 비우는 사원들이 많았다.

브로노는 잔뜩 피곤한 얼굴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책상 위를 더듬었다. 커피 잔을 잡고 바로 입가로 가져갔지만, 커피가 없는지 잔 안을 보다가 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럴 줄 알았다. 조슈아는 피식 웃으며 브루노에게 말했다.

“커피 한잔하고 해요.”

“오, 조슈아! 나이스 타이밍! 고마워요.”

브루노는 반가운 얼굴로 조슈아를 보더니 이내 커피를 받아 들었다. 커피를 마시자 잔뜩 피곤했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카페인 공급이 즉효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잠시 파티션에 등을 기대었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 왔어요? 마침 다 마셔서 가지러 가려고 했는데.”

“글쎄요. 타고난 센스 덕분일까요?”

조슈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잘난 척을 했다. 브루노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사실은 비서실에서 봤다. 30분 간격으로 탕비실을 오가던 브루노가 한 시간이 넘게 탕비실로 가는 비서실 앞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조금 전 크리스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는 김에 브루노를 생각한 것뿐이었다.

“으, 진짜 점심만 보고 있어요. 오전 내에 기사 다 추려야 하니까.”

조슈아가 조금 웃었다. 기다리던 금요일. 점심시간부터는 회식이었다. 심지어 맥주까지 함께하는 회식.

“저도요. 빨리 다들 복귀했으면 좋겠어요.”

이미 누가 어떤 음식을 투 고(to-go) 해 올지 다 정했다. 배달이 되는 음식들은 11시 20분부터 이곳에 도착할 것이었다. 맥주까지 넉넉하게 들어 있는 냉장고와 냉동실을 생각하자 조슈아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브루노는 한 가지가 더 남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더 좋은 건 내일이 휴일이라는 거죠.”

“일주일을 불태웠으니 주말은 푹 자야겠어요.”

“기획도 다 잘 들어가니까 브루노는 이번 주말이 즐겁겠네요.”

브루노가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이미 눈이 행복으로 뿅뿅 물들어 있었다. 조슈아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의 커피 타임이 지났으니 이제 다시 점심까지 달려야 할 시간이었다.

“조슈아, NS 미디어랑 첫 미팅 언제였죠?”

“다다음 주 화요일 두 시입니다. NS 측에서는 플랫폼 기획 이사와 IT 팀장이 나온다고 전해 들었으며 수정될 시에는 재보고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음식 잘 오는지와 외근 나간 팀원들 복귀 시간만 한 번 더 확인해 줘요.”

“네.”

모두가 약속한 시간은 11:30이었다. 앞으로 한 시간 반가량 남아 있었다. 아까까지 스토커 관련 취재를 나간 피처팀이야 11시 20분 도착 예정이라고 했고, 나머지 팀원들한테 연락을 해 봐야겠다.

차근차근 배달 음식 리스트들을 떠올리던 조슈아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크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볼일이 다 끝난 뒤 들어갈 줄 알았는데 크리스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담고 말이다.

조슈아는 완벽한 미소를 띤 채 크리스를 향해 물었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없는데요?”

크리스가 자연스레 대답했다.

“그러면 들어가서 일하시면 되겠네요.”

“치. 어떨 때는 조슈아가 악덕 보스 같아요. 알아요?”

“원래 유능한 비서는 유능한 보스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서포트해야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 월급 주신 거에 부끄럽지 않게 일하는 거고요. 그러니, 파이팅하세요.”

조슈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손바닥으로 편집장실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크리스가 투덜거리면서 들어갔을 때, 조슈아는 돌연 냉동실 안에 들어 있는 초콜릿 브라우니를 떠올렸다. 브라우니는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진짜 기획하면서 알았는데, 스토커 처벌법이 생각보다 약하네요.”

엘이 한숨처럼 말하며 맥주를 마셨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동떨어진 무거운 주제였지만, 테이블을 둘러싼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금 전 건배사를 할 때 “일 이야기는 다 잊고 모두 잔뜩 취해 봅시다!”라고 이야기했던 크리스조차.

이번 취재에 열을 올렸던 브루노가 소고기 누들 컵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증명 자체가 어려우니까. 이번 지나 케일런 사건도 사실 스토킹보다는 습격이나 테러지.”

“정말. 사례들도 솔직히 다 칼이나 총을 든 거 아니면 입증하기가 애매해.”

“그래도 뉴욕은 법이라도 구체화되었으니 다행이지. 다른 주는.”

이번에는 미카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입맛이 떨어진 듯 먹던 음식을 내려놓은 채 맥주만 연거푸 들이켰다. 분위기가 다운된 걸 느꼈는지 처음 화두를 꺼냈던 엘이 웁스, 하며 잔을 들었다.

“아이고, 갑자기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많이 먹고 더 시켜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회사 재정도 안정화되었을 텐데. 많이 먹어야죠.”

조슈아가 냉큼 분위기를 받았다. 화두가 달라지니까 나오는 이야기들도 달라졌다. 피자 맛이 더 맛있어졌다든지, 다음에는 디저트도 다양하게 시키자는 이야기부터 주말에 무엇을 할 건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들이 이어졌다.

미카엘라가 열변을 토해 냈다.

“요즘에는 연애도 못하겠어. 너무 바빠. 집 가서 기절하듯 자고 일어나면 또 출근하고. 쳇바퀴가 따로 없어.”

“그게 과연 시간이 없어서일까?”

“무슨 소리예요. 크리스?”

미카엘라의 눈이 싸늘해졌다. 크리스는 눈치챘으면서도 입가에 빙글빙글 장난 어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서 연애를 못한다고 하기에는, 그 바쁜 제인 파커도 스캔들 나잖아요.”

“…인정. 진짜 세계를 종횡무진하면서 어떻게 연애하나 몰라.”

빠른 인정에 조슈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낯익은 이름에 저도 모르게 옛날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제인 파커. 아주 예전에 배우인 샬롯 테일러와 함께 빌 스웰딘의 편집장실에 들이닥쳤던 모델. 세계에서 가장 바쁜 톱스타 중 한 명이라는 그녀는 최근 동료 모델과 스캔들이 났다. 그 기사를 보던 날 조슈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렴. 문어 다리만큼이나 여자 친구가 많은 사람보다는 함께 옆에서 일하는 동료가 훨씬 낫지.

“담배 타임 하고 올 사람?”

저편에 있던 피터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몇 명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루노도 마찬가지였다. 엘이 야유하듯 말했다.

“브루노. 금연한다 하지 않았어?”

“이번에 새삼 깨달았지 뭐야. 내가 생각보다 나약한 사람이라는 걸.”

“자랑이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둘의 케미가 좋았다. 크리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둘을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

“이러다 좋은 소식은 여기서 생기겠는데요?”

조슈아는 겨우 웃음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조슈아밖에 없는 듯했다.

“응? 뭐라고요?”

엘이 뒤늦게 물었지만 크리스는 한 번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엘이 조슈아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전 크리스가 뭐라고 했는지 물어보는 빤한 몸짓이었지만 조슈아는 모르는 척 핸드폰을 들고 일어났다.

“아, 잠시만요.”

타이밍 좋게 핸드폰이 울렸다. 조슈아는 급한 전화가 온 척 잠시 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깥에서 보이지 않게 구석진 곳으로 가며 전화를 받았다.

“엘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 저야 잘 지내고 있죠. 조슈아는요? 바쁜데 전화한 거 아니죠?

“넉넉하지는 않아도 바쁘지는 않아. 엘라는? 요즘 한창 바쁘겠다.”

이윽고 가벼운 한숨이 들려왔다.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엘라는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나 케일런으로 인해 바빠진 건 에투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열네 번째 지원자 역시 잘렸다는 말을 하던 엘라가 아참, 하며 화두를 돌렸다.

- 조슈아, 사실 이 이야기 말고 더 급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내 열다섯 번째 후임에 관한 이야기야?”

조슈아는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울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아뇨. 당분간은 열다섯 번째 후임은 없을 예정이에요. 엘라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 요즘 보스 주변 보안도 강화했거든요.

“그렇겠다.”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기획에 올린 사례에 빌 스웰딘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많았다. 그중 40% 이상은 조슈아가 있을 당시에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차라리 이렇게 사례로 나온 극성 스토커나 무기를 소지한 테러라면 신고할 수라도 있다. 괜히 애매하게 따라다니는 것은 스트레스만 잔뜩 받게 하고 신고하기도 정말 애매했으니까.

아무리 철저하게 지원자를 가린다고 해도 괜히 위험을 부담할 필요는 없었다.

- 아, 그것 때문도 있는데. 출소했다고 들었거든요.

“누구?”

- 왜 있잖아요. 예전에 보스한테 칼 들고 덤볐던 머저리 같은 놈. 지미가 제압하고 조슈아가 신고했다던, 파파라치 사칭한 놈.

엘라의 자세한 설명에 조슈아는 금세 엘라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떠올렸다. 아. 나지막하게 나간 탁음에 엘라 역시 조슈아가 그 사람을 떠올린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엘라가 덧붙이듯 말했다.

- 그래서 전화했어요. 조슈아도 알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생각보다 빨리 출소했네.”

잊고 있는 시간이 길어서였는지, 남의 출소가 이렇게 확 와닿을 줄 몰랐다. 엘라도 같은 마음인지 전화 너머에서는 가벼운 한숨이 들렸다.

- 그러게 말이에요. 그 당시에는 최대치의 형인 줄 알았는데. 그 덕분에 미스터 스웰딘이 오셨었죠. 정말 우리 보스 왕자님이기는 한가 봐요.

엘라가 말하는 미스터 스웰딘은 로펌에서 일하는, 빌 스웰딘의 형이었다. 에단 스웰딘. 빌 스웰딘을 우쭈쭈하며 과보호하려 하지만 매번 팽 당하는 둘째. 둘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제법 재미있었다. TV에 나올 때는 칼처럼 날카로운 사람이면서 제 동생에게만큼은 그렇게 팔불출인 수가 없었다.

형제란, 그런 거겠지.

빌 스웰딘과 에단 스웰딘을 볼 때마다 조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는 새, 전화 건너편에서는 엘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아, 아무튼 혹시나 싶으면 언제든 와요. 접근 금지 신청은 지금으로서는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로펌에서 방법을 찾고 있대요.

“에이, 뭘. 나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 그래도요. 아까 보스가 그러는데,

아. 엘라가 묵음을 삼켰다. 조슈아는 조금 웃었다. 엘라는 마치 언급해서는 안 될 이름처럼 이야기했지만 사실 엘라한테 전화가 온 것을 봤을 때부터 눈치챘었다. 요 근래 빌 스웰딘으로부터 연락이 통 없었으니까. 조슈아는 놀리듯 말했다.

“미스터 스웰딘이 뭐라고 했는데?”

- …보스가 시킨 것도 있지만 제가 전화하고 싶어서 전화한 것도 있어요. 조슈아, 제 마음 알죠?

“지금은 글쎄?”

- 조슈아….

엘라가 불쌍하게끔 느끼게 하려는지 말끝을 늘렸다. 조슈아는 나직하게 웃었다.

“알겠어. 미스터 스웰딘이 뭐라고 했는데?”

- 사진이요. 요즘 기사 많은데, 조슈아도 같이 찍힌 사진이 있어서.

엘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주변을 의식하듯 소곤거리며 말을 이었다.

- 혹시나, 그러니까 이상한 낌새라도 있으면 언제든 에투왈로 오라고요. 조심하고.

“와. 미스터 스웰딘답지 않은데?”

조슈아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주 예전에는 까칠하게 친절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상냥해졌다. 전화 너머에서도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렇죠? 심지어 오늘 보스는 아예 편집장실 안에 계세요. 전화 다 하고 보고만 하면 돼요.

“오늘의 공식 업무 끝이야?”

- 네. 금요일이잖아요. 클럽 가야죠.

“보스. 지시 수행 완료했습니다! 조슈아한테 다 전달했어요.”

“고생했어.”

빌은 무덤덤하게 답변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엎드린 채 핸드폰 인터넷 창을 새로고침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게시글로 가득하던 블로그가 텅 비었다. 스토커 키워드와 관련되어 있던 조슈아 사진들 역시 다 사라졌다.

빌은 핸드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꺼지고 새까만 액정에 제 모습이 비춰졌다. 음울한 표정이었다. 언제나 우수에 젖었다 찬사를 듣던 눈빛도 가라앉아 있었고, 눈 밑도 거뭇했다. 그러고 보니 닥터한테 갈 날이 지난 것 같은데.

가만히 피부과와 에스테틱에 갔던 날을 떠올리던 빌의 시야에 엘라가 잡혔다. 엘라는 잔뜩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비명이라도 막으려는지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뭐 해.”

나지막이 나온 빌의 목소리에 엘라는 입을 가렸던 손을 떨구듯 내렸다. 그리고 빌과 눈을 맞추고 마치 탐색이라도 하듯 빌을 바라보았다. 수초가 흐른 뒤에야 엘라는 감탄처럼 말했다.

“…헐. 세상에. 보스, 어디 아프세요?”

“뭔 소리야.”

“조슈아 말이 맞아요. 오늘 보스는 보스답지 않아요.”

“조슈아가 뭐라고 했는데?”

아, 깜짝이야. 엘라는 다른 의미로 조금 놀랐다. 나무늘보처럼 늘어진 채 핸드폰만 터치하던 빌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바르게 자리에 앉았다. 비싼 휴고보스 재킷이 구겨진다고, 차라리 재킷만 벗고 엎드리면 안 되냐고 아침부터 엘라가 사정을 할 때에도 한 번 움직인 적 없던 사람이 말이다.

그도 모자라 빌은 엘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답변을 바라듯 물은 말이었지만 진회색 눈동자는 마치 포식자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엘라는 저도 모르게 말을 늘어놓았다.

“보스답지 않다고요. 정확히는 미스터 스웰딘답지 않다고. 너무 친절하다고요.”

“그게, 다야?”

엘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빌은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렸다. 엘라는 빠르게 뛰는 심장 위로 지그시 손을 올렸다. 적응된 것 같다가도 가끔 이런 빌 스웰딘을 보면 또 무섭다. 어휴. 이 정도면 위험수당 더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엘라는 지난 분기에 받았던 보너스와 미우미우 백은 기억 저 너머로 넘긴 채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빌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일정한 공백 이후에 문이 열렸다. 이 편집장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 사람은 단 한 명, 에밀리뿐이었다.

휴, 살았다. 엘라는 배턴터치를 하듯 깍듯하게 묵례를 하고 문 쪽으로 갔다. 또각또각 하이힐 굽 소리가 빌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엘라가 편집장실을 나가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에밀리는 빌의 시선이 닿는 곳에 서류 클립철을 내려놓았다. 빌은 한쪽 뺨을 책상에 댄 상태로 스캔하듯 서류를 바라보았다. 표로 정리된 서류의 반절 정도는 노란색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사진 관련 보고입니다. 조슈아 베넷이 나온 사진과 유추 가능한 사진까지 모두 확인했습니다. 개인이 저장한 사진은 IP 확인하는 중이며, 현재 온라인상에 올라온 흔적은 다 지웠다고 개빈으로부터 연락 왔습니다.”

“다 지웠으면, 이건 무슨 구분이야?”

빌은 노란색 형광펜 자국을 눈짓했다.

“인터넷 기사와 SNS 게시물 193개 중, 에투왈에서 지운 것 95개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98개는?”

에밀리는 가볍게 숨을 가다듬고는 답변했다.

“조슈아의 사진을 지우는 데 나선 게 에투왈만은 아니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물론 삭제한 곳은,”

“그렌트.”

빌이 잇새로 짓이기듯 중얼거렸다. 에밀리는 대답 대신 입매만 조금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긍정의 뜻이었다.

“미스터 베넷의 사진 및 유추 가능한 사진이 올라온 기사와 게시물이 총 193건이었습니다. 현재 기사와 게시물은 다 내려간 상태입니다. 개인이 다운받은 기록은 현재 확인 중입니다. 사내 IT팀에서 98건 처리했습니다. 나머지 95건은 아마 에투왈에서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추적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확실히 추적할까요?”

“아뇨. 여기까지만 하죠.”

“예.”

추적하나마나였다. 조슈아 사진에 관심 있는 곳이라면 제가 있는 그렌트사와 빌 스웰딘이 있는 에투왈일 테니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마크 웹디즈드가 가져다준 리스트를 확인한 뒤 서류 커버를 덮어 책꽂이 한구석에 꽂았다. 그러다 두 손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올렸다.

“사진에 관련된 데이터는 정말 다 삭제된 거죠?”

“인터넷 데이터 기록과 미스터 그렌트 개인 하드 디스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제가 지시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크의 대답을 듣는 순간 에이드리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뱉었다.

IT팀에서 삭제 작업을 했다면 복구는 어렵다. 그것도 완전 삭제를 지시한 것이라면, 복구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저는 하드 디스크를 완벽하게 부술 것을 당부했다.

이제 조슈아와 관련된 파파라치 컷, 스토킹 건 사진은 인터넷 망에 없다. 물론 제 손에도 말이다.

그 순간, 에이드리언은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마크는 이제 자연스레 립밤을 건넸다. 마크의 재킷 안쪽 포켓에는 새 립밤이 다섯 개나 남아 있었다. 저러다가는 정말 입술이 남아나지 않겠다 싶어서 구매한 것들이었다.

립밤을 보고 나서야 에이드리언은 턱에 힘을 주었다. 어린 시절에도 하지 않던 고약한 버릇이 들어 버렸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특히 이럴 때는 더.

에이드리언은 삭제를 지시하기 전 봤던 조슈아의 사진들을 떠올렸다. 좋지 않은 화질임에도 누가 봐도 조슈아인 것을 알 수 있던 사진들. 한숨처럼 새어나오는 아쉬움에 마크가 잠시 멈칫했다.

“아쉬우십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요.”

“명령하신다면 원본 사진을 구해 오겠습니다.”

“…번복은 안 해요. 난 지금도 이미 판단이 흐려졌거든요.”

에이드리언은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바른 말을 할 정도의 판단은 남아 있었지만, 마크가 한마디만 더 한다면 정말 흔들릴 것 같았다.

“그런데 가지고 있던 사진들은 왜 다 없애시는 겁니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마크는 원본 사진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에이드리언에게 물었다. 에이드리언은 조금 놀란 얼굴로 마크를 바라보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크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스토커 같잖아요.”

순간 마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에이드리언은 입술만 빙그레 올린 채 조금 웃었다. 그러다 순식간에 낯을 바꿨다. 마크는 분위기를 잘 알아챘다. 그대로 묵례를 한 채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뒤, 에이드리언은 핸드폰을 꺼냈다. 조슈아의 핸드폰 번호는 외우다 못해 잘 때 꿈에서도 나올 만큼 잘 알고 있었다. 핸드폰 번호를 누르자 초록색 통화 아이콘에 시선이 갔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수만 번 반복한 것처럼, 통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 핸드폰 화면을 껐다.

조슈아가 좋아하지 않을 일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제 마음대로 연락하는 것 따위는.

에이드리언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켠 뒤 익숙하게 넥스트 유어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톱 화면에는 커다란 문구가 뜨고 있었다.

[넥스트 유어는 스토킹 피해자들과 함께합니다. 스토킹은 범죄입니다 - 넥스트 유어 일동]

그 아래로는 넥스트 유어 직원들의 친필 서명이 적혀 있었다. 그 중에는 조슈아의 이름도 있었다. 다 똑같은 크기로 맞췄을 텐데, 유독 조슈아의 이름만 확대되어 보였다.

그리고 핸드폰 화면을 조금 내렸다. 넥스트 유어에서 올린 스토킹 예시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1. 끈질기게 전화를 건다. 2.계속 따라다니거나 미행을 한다. 3. 언제나 집 또는 직장 앞에서 기다린다. 4. 폭행을 하거나…

수없이 많은 스토킹 예시들을 보다가 숨이 막혔다.

모두 다 제가 한 짓들이었다. 싫어하는 짓 피하려고 다운 받았던 조슈아 사진을 다 삭제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한 게 너무 많아서.

감히 용서를 바라러 가도 괜찮을까.

어제도, 그제도 그 전에도 모두 갔었는데. 차마 용서를 빌 용기조차 없어서 돌아섰었는데.

그래도 오늘도 다시 가야 했다.

다시, 가서. 진짜로 말을 해야 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퇴근 시간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똑똑한 마크는 이미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두었고, 에이드리언은 그 엘리베이터에 탔다. 마크는 내일 변경된 일정에 대해 짧게 브리핑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저 ‘빨리 가야 된다’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정문 앞에 차가 있었고, 그 차를 타고 조슈아에게로 가면 된다, 그게 다였는데.

“너지? 조슈아 사진 내린 거.”

제 차 앞에 불청객이 기다릴 줄은 몰랐다.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걸음을 멈추었다. 에이드리언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빌 스웰딘이 얼굴에 비웃음을 건 채 차에 기대어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면서 굳이 여기까지 온 거야?”

“니가 무슨 자격으로 조슈아 사진을 내려.”

“너는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데?”

“뭐?”

빌이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장신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 사나운 눈매와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아우라는 누가 보더라도 기가 눌릴 정도로 위협적이었지만, 마주하고 있는 에이드리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마디 했다.

“내가 조슈아 사진을 내리는 거랑 너가 무슨 상관이냐고.”

“나야!”

빌의 말문이 콱, 하고 막혔다. 분명히 쏘아붙일 말이 수십 개였는데, 단 한마디 앞에서 다 사그라들었다.

자격이라, 그리고 무슨 상관이라. 아픈 구석이 콕 찔렸다.

빌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날선 눈으로 에이드리언을 노려보다가 한마디 했다.

“…너는. 너야말로 자격 없잖아.”

순간,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언제나 뺀질대듯 웃음을 지우지 않는 새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다는 건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기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에이드리언은 입매만 조금 올렸다.

“없어. 그래서 내렸어. 조슈아한테 재수 없게 붙어 있는 건 너랑 나 둘만으로도 벅차니까.”

“새끼야, 재수 없게 붙어 있는 건 너야.”

욱하는 마음에 빌의 입에서 거친 말이 줄줄 나왔다. 뱀 같은 새끼. 아주 오래전부터 저 새끼랑 엮이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랬더라면 로건도, 그리고 조슈아도. 아무도 상처 받지 않았을 텐데.

공연히 화가 났다. 진짜 한 대 패 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빌의 손이 주먹을 말아 쥐려던 찰나였다.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독기가 빠졌다.

“그래서, 패 줄래?”

“뭐?”

순간 빌은 제가 들은 게 맞는지에 대해 의심했다. 저 엿 같은 새끼가 저렇게 힘이 빠진 얼굴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입매만 조금 올리며 빌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딱 빌에게만 속삭이듯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흠씬 두들겨 맞고 싶은데.”

“미친.”

빌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이 새끼,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아닐 수도 있다. 저런 개 같은 얼굴이야 세상에 하나인 걸로도 재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저런 눈을 한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빌은 제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어디 하나 뼈가 부러지게 늘씬하게 패 주는 건 일도 아닌데. 차마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면 비켜. 바빠.”

“뭐?”

오늘 참 얼빠진 짓 많이 한다. 아무 방어도 없이 에이드리언한테 턱 밀렸다. 빌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서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빌을 힐끗 보고 말했다.

“사과하러 가야 돼.”

그리고 정말 갔다. 무슨 말을 더 할 새도 없이 시동을 걸고 바로 출발했다.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빌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미친놈.”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알고는 있지만, 정말 미친놈이다. 그것도 달라진 미친놈.

순간, 빌은 예전에 제가 조슈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거야 말로. 애가 탈 대로 탄 거지. 전혀 에이드리언 그렌트다운 수법이 아니잖아.”

조금 전 개자식은 전혀 에이드리언 그렌트답지 않았다. 빤한 얼굴이 연기를 하지는 않았다. 특유의 그 재수 없는 웃음도 없었다. 오히려 여유가 없었다.

“사과하러 가야 돼.”

애가 탈 대로 탄 거다.

그러니까. 진심인 거다.

“말도 안 돼.”

제가 도출한 답에도, 빌은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지는 못했다. 딱 저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따라가서 저 역시도,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을.

* * *

퇴근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기사는 스웰딘 로펌에서 빌 스웰딘의 스토커에 대해 강경 대응을 한다는 발표였다. 기사 상단에는 빌의 둘째 형, 에단 스웰딘의 사진이 있었다. 보는 사람도 어이쿠, 할 정도로 차가운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을 보면 빌과 닮았다가도 안 닮았다. 때마침 뒤에 인기척이 다가왔다. 조슈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였다.

“퇴근 안 하고 기사 보고 있는 거예요?”

크리스는 퇴근 준비를 마친 듯 가벼운 재킷을 입은 채 백팩을 매고 있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는 얼굴이 나와서요.”

“와. 에단 스웰딘까지 알아요?”

“뭐. 제가 워낙 발이 넓거든요.”

조슈아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얼른 데스크톱을 껐다. 크리스는 조금 기다렸다가 조슈아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빠른 퇴근의 날이다 보니 남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이제 막 퇴근을 하려는지 재킷이며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길을 걸을 때였다. 크리스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에단 스웰딘이 빌 스웰딘의 형이죠?”

“네, 둘째 형이요.”

“대단하네요. 형제끼리 앞장서고.”

“형제란, 그런 걸까요?”

무심코 말이 나갔다. 크리스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조슈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입매를 조금 올렸다. 크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겠죠. 아무리 싸워도 형제니까. 나쁜 일은 피하게 하고 싶고, 좋은 일만 가득 했으면 좋겠고. 그런 면에서 우리도 형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크리스가 멋쩍은 듯 오른 뺨을 긁적였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뭐, 아니면 말고요.”

형제, 형제. 조슈아는 입속에서 단어를 굴려 보았다. 매끄럽기도 했고 거칠기도 해서 제대로 굴릴 수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멀고도 어려운 단어가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아서 조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렇죠. 형제네요.”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크리스가 차 키를 돌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김에 태워다 줄게요.”

“정말요? 한참 돌아갈 텐데요?”

크리스가 씩 웃었다.

“그러려고 일부러 맥주도 참았어요.”

“저 스튜디오 맞죠? 어디서 내려 주면 될까요?”

“크리스 편한 데서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러면 저기에서 내려 줄게요.”

크리스는 작게 웃으며 스튜디오 앞으로 갔다. 제게 운전을 잘한다, 이야기를 했지만 크리스의 운전 실력도 좋은 편이었다. 잠시 차를 정차한 틈을 타서 조슈아가 차에서 내렸다. 이내 조수석 창문이 내려갔고 크리스가 보였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조슈아야말로 일주일 고생했어요. 주말 잘 보내요.”

가볍게 손을 흔들던 크리스가 이내 출발했다. 차가 출발해서 멀어지는 것을 살피던 조슈아가 뒤돌아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하루 종일 웃음이 떠나지 않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조금 떨어진 곳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가로수 아래에 서 있었다.

하얗고 예쁜 얼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예쁜 얼굴이 처연하게 일그러져서 조슈아는 그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저. 조슈아.”

정말 이상했다.

제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라니. 딱 몇 주 전, 제 스튜디오 앞에서 사르르 눈매를 접으며 웃던 에이드리언 그렌트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에이드리언의 눈 밑이 거뭇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조슈아한테 다가오며 말했다.

“잠깐 시간 될까요?”

“찾아와 놓고 시간 되냐고 묻는 거, 되게 웃기지 않아요?”

조슈아가 나직하게 웃었다. 정말 웃긴 일인 것처럼.

기대처럼 반짝이던 녹갈색 눈동자가 잔뜩 흔들리더니 탁하게 가라앉았다.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숙였다. 딱지가 얹은 입술이 또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조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까 마신 술이 다 깨지 않아서일까, 머리가 어질했다. 숨이 조금 차는 것 같기도 했고,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는 통증이 아릿했다.

그 와중에도 제 감정은 무엇보다도 선명했다.

밉다. 정말 미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 사람이 이렇게 누군가를 미워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눈앞에 있는 남자가 미웠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 감정을 미움이 아니라면 어떤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까. 증오? 저주?

“…해요.”

에이드리언의 말을 놓쳤다. 아니, 믿기지 않아서 잘못 들었다고 치부한 걸지도 모르겠다. 조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금 웃었다. 나올 리가 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드는 순간,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조슈아.”

녹갈색 눈동자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는 울음을 담은 채 조슈아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순간 이명이 들리는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조슈아는 눈만 깜빡였다. 곧게 서 있는 것 같은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오늘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아니면 정말로,

저 개자식이 한 말이 맞을까?

아주 오래전에는 참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그래서, 제 귀에만 들리는 걸까?

에이드리언이 제게 손을 뻗었다. 조슈아는 손을 들어 에이드리언의 손을 세게 쳐냈다. 짝- 하고 살과 살이 마찰되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제 손에도 얼얼하게 통증이 남은 걸 보면 분명 에이드리언도 아플 것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빨갛게 달아오른 손등을 문지르는 대신 조슈아를 바라보고 울었다. 새하얀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입술, 깨물지 마요. 조슈아.”

아, 그 덜덜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알았다. 제가 입술을 깨물었다는 걸.

굳던 다짐이 처음으로 깨졌다.

하지만 조슈아에게 더 급한 건 입술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봐요.”

너무 믿기지 않으면 사람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건조해진다는 것을 지금 알았다. 버석하게 말라붙은 모래알처럼 목소리가 꺼끌꺼끌했다. 눈도 뻑뻑했다. 조슈아는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뜨고서야 에이드리언은 다시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계속 울고 있었다. 소리 한 점 없이, 눈물만 뚝뚝 흘렀다.

“뭐라고요?”

잘못 들었을 것이다. 저 개자식은 그런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냥 쭉 그런 놈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미워하면 되는데,

“미안해요. 조슈아. 내가 다 잘못…했어요.”

조슈아는 조금 비틀거렸다. 그리고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사라지지도 않았다. 현실이었다.

혹시라도 꿈일까, 하고 뺨을 꼬집어 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꾸지 않은 지는 제법 오래되었으니까.

조슈아는 물끄러미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차마 제 눈조차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른 어리숙한 아이처럼 고개만 수그리고 있었다. 저보다 훨씬 큰 남자가 정말 어린아이처럼 손을 덜덜 떨며 소리 없이 울었다. 이게 현실이라면 정말 지독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입 안에 쇠 비린 맛이 훅 끼쳤다. 그제야 이 상황이 왈칵 느껴졌다. 제 스튜디오 앞, 개자식이 소리도 없이 울며 사과를 하고 있는 현재. 그토록 바랐고, 포기했고, 미련 없이 버렸던, 영원히 이뤄지지 않을 것 같던 일이 해일처럼 조슈아를 덮쳤다.

지독한 현실.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더 이상 할 말을 듣는다면 정말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선연한 감정이 날뛰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뻗어 나가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집으로 가야겠다. 오로지 자신만의 공간. 그 안에서 저 남자를 싹 빼 버려야 했다. 더 이상의 접근을 막고,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조슈아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스튜디오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갑작스러운 말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왔지만 집에만 가면 다 괜찮을 것이었다.

“제발, 나한테…….”

조슈아가 딱 다섯 걸음 앞으로 나아가던 때였다. 끊어질 듯 연약한 목소리가 조슈아에게 닿았다.

한 걸음 더 가야 하는데. 끊어질 듯 연약한 목소리가 조슈아의 뒤에서 다시 한번 이어졌다.

“나한테 용서를…… 빌 기회를 줘요.”

아. 조슈아는 결국 눈을 꼭 감았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누르고 있는데,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고작, 저 형편없이 무너진 목소리와 그 말에, 추락하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자꾸만 울컥 역류하듯 말들이 입 안에 가득 차올랐다. 새빨간 감정들이 강렬하게 치밀어 올라서, 조슈아는 결국 뒤를 돌았다.

“내 목을 조르고, 마음대로 찾아오고, 협박까지 하더니.”

잔뜩 비틀린 목소리가 밤공기를 꿰뚫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것을 보며 조슈아가 나지막한 웃음을 뱉었다.

“이제는 사과할 기회를 달라고?”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나는 걸까.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조슈아는 생각했다. 평생 저 얼굴이었으면 좋겠다. 마음껏 미워하고 마음껏 싫어한 다음 다 비워 버리기로 한 뒤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심장 한편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 안쪽 살을 깨물어 버렸는지 입 안에 다시 시린 맛이 감돌았다.

조슈아는 진심으로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노려보았다. 우습게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다. 저 남자를 만나고 나서 힘든 게 너무 많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복잡해서. 결국 조슈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쉽나 봐요.”

찾아오는 것도 쉽고.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하는 것도 쉽고. 그 모든 것을 이제 와서 한다는 것까지. 어쩜 저 남자는 저렇게 쉬울까.

조슈아가 잠시 길바닥을 보는 사이,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이지러졌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것같이 연약한 얼굴은 조슈아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다. 순식간에 에이드리언은 표정을 바꾸었다. 이 표정이 맞는지, 알 수조차 없으면서도. 최대한 제 표정이 조슈아가 바라는 표정이기를 바랐다. 에이드리언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 처연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슈아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난 어려운데.”

모든 게 어려웠다.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미웠고, 마음 놓고 미워하는 것은 이렇게 힘들고, 마주하는 것은 더욱 더.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수없이 줬는데. 그 기회를 다 놓치고. 이제 와서. 이제야.”

그 단조로운 목소리에 에이드리언은 무력하게 손을 뻗었지만, 갈피를 잃은 손은 허공에서 다시 떨어질 뿐이었다.

조슈아는 이 모든 게 다 건조하게 느껴졌다. 꼭 연극 속 한 부분 같았다. 모든 게 다 사실은 가짜가 아닐까, 할 정도로 현실성이 없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묻고 싶었다. 이런다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사랑…해요.”

에이드리언의 입에서 그 말이 쏟아진 순간, 에이드리언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조슈아는 희게 웃었다. 정말.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저 말에 모든 걸 다 주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은 속을 여력도 없었다. 저 달콤한 말이 제게 얼마나 아픈지는 이미 제대로 체감했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이 상처 주고 싶고, 더 많이 제 생각을 하고, 모든 게 다 어려웠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했다.

“밤이 길어요?”

“사실, 그날. 밤이 되게 길었는데.”

에이드리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마 이전에 했던 제 말을 기억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에이드리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는 조금 더 웃었다.

진심을 담아서,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밤이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바닥이라고 생각한 곳이 더 가라앉아서 스스로를 원망하는 시간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마디 더 했다.

“……아주 많이, 사랑했던 거 같아.”

말이 나오는 순간, 심장이 찔린 것처럼 아팠다. 내보인 진심이 어떻게 취급받았는지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독 바른 알약을 삼키는 심정으로 조슈아는 웃었다.

저자의 밤이 칠흑같이 어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 가련한 기대감이 무참히 꺾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 와서는 아무 소용없겠지만.”

끝내 조슈아가 화사하게 웃고 돌아서 스튜디오로 향했다. 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희망고문이었다.

절대 사랑할 수 없는 남자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중이었다.

멀어져 가는 조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에이드리언은 이를 악물었다. 공용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까지. 그리고 공용 현관 앞을 밝게 비추던 자동 센서의 불이 꺼졌을 때, 에이드리언은 꽉 쥐었던 손의 힘을 뺐다. 잔뜩 긴장한 손바닥 안에서 땀방울이 뱄다.

아까 빌 스웰딘에게는 호기롭게 사과를 한다고 말하고 왔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오늘의 저는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는 것을.

미안했다. 미안해고 미안해서, 차마 사과를 하고 싶은데. 용서를 바랄 수 있는 염치라도 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제 욕심이 망쳤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었는데.

결국 제 욕심이 모든 걸 망쳤다.

“사랑…해요.”

전해서는 안 되는 진심이었는데. 강제로 전해 버렸다.

띄엄띄엄 나오는 제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차마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서, 에이드리언이 주먹을 들고 거칠게 제 눈가를 훔쳤다. 이미 벌겋게 짓무른 눈가가 쓰라릴 법도 했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곳이 더 아파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이제 가야 했다. 오늘 밤은 틀림없이 길 거였다. 에이드리언이 차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리고 익숙한 사람을 보고 눈을 살짝 치켜떴다.

“…미스터 밀러.”

“미스터 그렌트. 좋은 저녁, 아니 그게 아니라. 저녁은 맛있게 드셨나요?”

크리스 밀러는 거짓말에 재능이 없었다.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놀라면서도 어색하게 눈을 피하는 꼴이라니. 에이드리언은 무감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고 있었는지 가늠할 필요도 없이 크리스가 줄줄 불었다.

“저는 조슈아 데려다주고 가려는데, 조슈아가 제 차에 카드 지갑을 놓고 가서. 혹시 필요할까 봐. 전화도 안 받고. 차로 다시 오기에는 일방통행이라서. 놓고 뛰어왔는데. 조슈아는 이미 들어간 것 같아서, 다시 돌아가려고 하던 찰나였어요.”

“그렇군요.”

크리스의 손에 들린 카드 지갑은 에이드리언도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크리스는 에이드리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제야 에이드리언은 엉망일 제 얼굴을 떠올렸다. 크리스가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뭐, 필요하면 연락을 주겠죠. 이만 가서 메시지라도 한 통 남겨 놓아야겠어요. 그러면 미스터 그렌트. 주말 잘, 음. 잘 보내세요.”

“조슈아한테.”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처럼 굴던 크리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조슈아의 이름이었다. 에이드리언의 탁한 목소리가 부른 이름에 크리스가 머뭇거렸다. 에이드리언은 잔뜩 뻑뻑한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는 투명한 얼굴로 에이드리언을 마주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사내. 속내가 눈에 보일 정도로 투명한 남자. 정직한 사람.

그래서 더 싫었다. 차라리 저와 비슷한 부류라면 조슈아의 경계라도 살 텐데. 허물 하나 없이 다정한 사람이라서 내내 거슬렸는데. 지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조슈아가 좋아할 법한, 착한 사람이라서.

“좋….”

에이드리언이 까끌한 속내를 내비추려다 삼켰다. 혹시라도 제 질문이, 자각하지 못한 저 남자의 진심을 일깨우기라도 할까 봐. 하지만 이미 반쯤 나온 말에 크리스 밀러는 무슨 말인지를 깨달은 듯 작게 아, 했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조슈아를 좋아하냐구요? 물론이죠.”

제발 아니라고 했으면 좋겠다, 했던 생각이 순식간에 꺾였다. 에이드리언이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긴 입술을 다시 깨무는 사이, 크리스 밀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다정하고, 근사하고 사려 깊고.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가 더 힘들잖아요. 오랜만에 만난 형제라면 더더욱.”

“뭐…라고요?”

거짓말일 터였다. 조슈아 베넷은 제 입으로도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했으니까.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되묻기 전에 크리스 밀러가 판판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조슈아가 싫어할 법한 일은 저 역시도 싫습니다. 미스터 그렌트. 그럼.”

가벼운 목례와 함께 크리스 밀러가 뒤돌아 가 버리는 사이, 에이드리언은 얼얼한 기분으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정말 형제일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카운터에 훅을 먹이는 건 둘이 꼭 닮았으니까. 더불어, 보기만 해도 참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도.

그래서 저 남자가 싫었다.

그와 별개로 자신이 없어졌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조차 없었다.

* * *

세탁기 뚜껑을 닫자 동전 투입구가 빨갛게 반짝였다. 집에서 가져온 동전을 집어넣자 이내 세탁기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이불이 세탁되려면 남은 시간은 두 시간. 하지만 조슈아는 잠시 어딘가 다녀올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긴, 어딘가 다녀올 생각이 있었으면 이렇게 화창한 주말, 공들여 코인 세탁소에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코인 세탁소의 투명한 유리문 너머를 응시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과 쏟아지는 황금빛 태양이라니. 정말 주말 날씨에 제격이었다. 만약 평일의 한낮이었더라면, 회사 내 모두가 피크닉이라도 가자고 아우성이었을 테니까.

묵은 빨래를 하기에는 아쉬운 날일 수도 있지만 조슈아는 코인 세탁소를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빨래를 한다는 마음을 먹기까지는 귀찮아도, 빨래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풍성하게 올라오는 흰 거품을 보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뽀송하게 마른 빨래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도 한몫했고.

아, 저것도 좋았다. 코인 세탁소 중앙에 있는 공용 TV. 브라운관을 통해 가십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TV 앞에는 이미 조슈아 또래 여자들 두 명이 앉아 있었다. TV 내용이 제법 재미있는지 가벼운 이야기를 하면서도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를 찾으려던 조슈아의 눈에 음료수 자판기에 들어왔다. 걸음을 옮기며 무심코 카드 지갑을 찾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쨍그랑거리는 동전 소리가 유난히 커다랗게 울렸다. 조슈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 크리스로부터 차에 카드 지갑을 놓고 갔다는 메시지를 받았는데도 이런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짤랑이는 소리가 날 만큼 지폐와 동전을 잔뜩 가져왔는데도 말이다.

동전을 넣고 탄산수 버튼을 누르자 자판기 하단부에 탄산수가 툭 떨어졌다. 캔을 따자 탄산이 톡 하고 올라오다 뽀글뽀글 가라앉았다. 비스킷도 하나 먹을까. 조슈아는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자판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요즘 회사에서 마사의 빵을 너무 먹었다. 조만간 다시 다이어트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TV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TV에서는 완쾌한 스타 지나 케일런에 대한 소식과 새로 개봉하는 액션 영화 소식을 짧게 보여 주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이었는지, 스튜디오에 있는 두 명의 캐스터가 엔딩 멘트를 했다. 화려한 시각 효과와 함께 프로그램 로고가 뜨고 바로 광고가 나왔다. 빌 스웰딘이었다.

풉, 하마터면 탄산수를 뿜을 뻔했다.

세상에, 에밀리.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예요. 빌 스웰딘이 TV 광고라니.

이성도 놀랐지만, 목은 더 놀란 모양이었다. 탄산 가득한 탄산수를 잘못 삼켰는지 목에서 별이 터지는 것 같았다. 쿨럭이는 소리가 컸는지 여자 두 명이 조슈아를 돌아보고 슬쩍 얼굴을 붉혔지만, 조슈아는 목이 따가운 것과 광고에 나온 빌 스웰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여러 번 큼큼,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따가움이 가라앉았다. 광고는 이미 끝난 뒤였고.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아는 사람의 이야기여서일까.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탁기와 건조기 사이에서도 저만치 떨어진 여자들의 이야기가 또렷하게 들렸다. 단발머리 여자의 말에 업 스타일로 머리를 묶은 여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요즘 유튜브에서 저 광고 나오면 안 넘기잖아.”

저 정도면 진짜 팬인데? 조슈아가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이 단발머리 여자가 까르르 웃다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나도 그러거든? 모델 은퇴하고는 TV 광고 처음 찍은 거잖아. 이제까지 한 번도 안 찍고.”

“그니까. 15초가 순식간에 지나가.”

“왕자님이잖아.”

“왕자님이면 진짜 스웰딘 왕자님답게 스웰딘사 제품 좀 광고하라고! 통장 준비해 놓았는데 뭐가 문제야.”

“그냥 다시 모델 겸업하면 안 되나? 에투왈 겸업 금지야?”

온통 찬양이었다. 저는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빌 스웰딘이 무엇을 광고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새삼 ‘사랑받는 왕자님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슈아가 씩 웃었다.

그래, 에밀리의 놀라운 수완이 어떻게든 빛을 발했겠지, 하면서 넘겼다. 저는 빌 스웰딘의 팬이 아니니까. 그냥 1초마다 쌓이는 재산이 조금 더 불어났겠다, 하며 잠깐 부러워할 뿐이었다.

조슈아는 손바닥을 비벼 가벼운 열을 냈다. 그리고 뻑뻑한 두 눈덩이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미지근한 열기가 눈을 감쌌다. 새까만 시야 속에 띵- 하고 건조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여자들의 빨랫감이 다 건조된 모양이었다. 빌 스웰딘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두 명이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건조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코인 세탁방의 공기가 따뜻해졌다. 훈기를 타고 뜨겁고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이 넘실거리며 조슈아에게도 전달되었다. 조슈아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조슈아가 제일 좋아하는 냄새 중 하나였다.

* * *

햇빛이 반짝이며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밤은 끝없이 길었다. 어쩌면 이곳이라서 더 길었는지도 모르겠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검지로 바닥을 쓱 훑었다. 차가웠다.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늦봄이라는 것을 싹 무시하듯, 이 공간은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라도 돋을 것처럼 추웠다.

이곳은 507호 스튜디오. 조슈아 베넷을 닮아 따뜻하고 다정하던 공간. 연노랑색 필터를 낀 것처럼 포근한 집.

아, 지금은 아니지. 에이드리언은 바스러질 듯 건조한 눈으로 스튜디오를 훑었다. 커다란 검은색 쓰레기봉투 하나, 보다가 만 보육원 기념 사진첩. 그것들을 외면하고, 텅 빈 집은 희끄무레한 회색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어젯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빈집에서 조슈아 베넷의 흔적을 좇았다. 함께 식탁을 옮기며 발견했던 바닥의 눌린 자국, 화장실 타일 틈을 보수해서 생긴 유난히 하얀 틈새, 비상금을 숨기기 좋다며 조슈아가 알려 주었던 찬장 아래 공간. 빨래가 가장 잘 마르는 베란다의 가장자리 건조대. 그 흔적 끝에는 꼭 조슈아 베넷의 웃음소리가 묻어났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우리 보육원 뒤뜰에 빨랫줄 있잖아요. 거기 아래에 보면 벤치 하나 있거든요. 왜 거기에 벤치가 있는 줄 알아요?”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겨울날이었다. 베란다가 얼어붙어 코인 세탁소를 찾았던 밤이었다. 빨래가 다 되는 동안 먹겠다고 사 온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조슈아가 말했다.

“글쎄요.”

그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조슈아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꽁꽁 싸 입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새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주제에, 코끝이 새빨갛게 얼어붙은 주제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보고 눈을 반짝이는 게 예쁘고 얄미워서.

에이드리언의 표정을 다 읽었는지 조슈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쫌. 안 추워요. 에이드리언.”

“이렇게 얼굴이 차가운데?”

“얼굴은 차가워도 안 춥다니까요. 아무튼, 빨래줄 밑에 왜 벤치가 있었게요?”

졌다, 졌어. 빨간 머리 조슈아 베넷은 끈기가 대단했고,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번번이 졌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에이드리언이 왜냐고 물었다. 조슈아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할 때 보이는 특유의 녹녹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빨래가 다 되면 빨래를 가져와서 널어야 하거든요. 보통은 어른들이 너는데, 나는 빨래 너는 걸 되게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널려고 하는데 키가 안 닿아서 거기다 벤치를 끌어다 놓고 널었어요. 계속 빨래 널 때마다 옮기기 귀찮아서 아예 안 가져다 놓으니까, 수녀님들이 그래 거기 빨래는 다 조슈아가 널어라, 하고 땅 아래에 못으로 고정해 주신 거예요. 말하자면, 내 거죠.”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한 어린이였네요?”

에이드리언은 놀리듯 맞장구를 치면서 조슈아의 코끝을 가볍게 꼬집었다. 조슈아가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끝의 코를 빼냈다.

“그것보다는, 빨래한 다음에 바로 널고 나면 나는 냄새 있잖아요. 세제 냄새랑 섬유유연제 냄새랑 햇빛 냄새랑 바람 냄새 같은 거. 그게 좋았죠.”

에이드리언은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냄새였다. 하지만 앙큼하게도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에이드리언은 교묘하게 화제를 돌렸다.

“겨울에는 아쉽겠네요. 지금 바깥에 빨래 널면 북극 생선처럼 꽁꽁 얼 텐데.”

“아, 그런데. 이건 독립하고 알았는데.”

조슈아가 세탁방 한쪽을 곁눈질했다. 한 남자가 건조기 뚜껑을 연 채 건조된 세탁물을 꺼내고 있었다. 조슈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곱게 휘어 웃었다.

“건조기 냄새도 좋아요. 섬유유연제랑 세제 냄새가 따뜻해져 가지고 몽글몽글하잖아요.”

에이드리언은 조슈아를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 건조기 특유의 훈기가 퍼지긴 했지만 조슈아가 말하는 몽글몽글한 냄새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조슈아한테 나는 체향이 훨씬 더 몽글거리고 따뜻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기회를 놓치진 않았다.

“그러면 나랑 건조기 있는 집으로 이사 갈까요?”

“건조기 때문에요?”

조슈아 베넷이 어린아이를 놀리듯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어깨를 으쓱했다.

“왜 웃어요? 난 진심인데.”

그 말이 기폭제가 된 듯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조슈아가 웃을 때마다 어디에선가 몽글몽글한 향이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딱 조슈아 베넷을 닮은 따뜻하고 말캉하고 부드러운 냄새. 맡고 있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 향이 고파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숨을 들이마셨을 때, 들어오는 건 건조한 빈집의 먼지 냄새였다. 눈을 떴을 때, 기억 속 코인 세탁방은 사라지고 따뜻한 507호도 사라졌다. 조슈아가 기르던 공기 정화 식물도 없었고, 선생님한테 선물 받았다는 낡은 시계도 없고, 보육원에서 나온 뒤 한 권 한 권 모았다던 책도 없었다.

집이 아니었다. 그저 이곳은 공간이었다. 삭막하고 황량한 곳, 꼭 저를 닮은 곳.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마른세수를 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손이었다. 뻑뻑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손을 떼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외면하려고 했던 것들이었다.

에이드리언은 무력한 힘으로 보육원 기념 사진첩을 끌어당겼다. 그렌트사에서 기부를 할 때마다 기념으로 찍어 만들었다던 사진첩에는 꼭 조슈아가 찍혀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커 가는 조슈아가 담겨 있었다. 단 한 번만 빼고.

“…딱 한 번, 내가 왔을 때만.”

그 딱 한 번, 제가 왔을 때 찍었던 사진에만 조슈아가 없었다. 왜 하필 딱 그 한 번일까.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곳에 남은 것은 단 세 개였다. 하필 조슈아가 없었던 사진, 차마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조슈아가 버리고 간 물건들.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 제 자신.

“미안해요, 조슈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바닥으로 몸을 기울였다. 코트를 입었어도 바닥의 찬 기운이 몸 곳곳으로 스몄다. 차라리 호된 감기에 걸렸으면 좋겠다. 아픈 얼굴로 가면 그래도 조금은 돌아봐 주지 않을까? 쓰러지면 911이라도 불러 주지 않을까. 그러다 제 얕은 수작 아래 깔린 기대감이 무엇인지 알아챘을 때, 에이드리언은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열감에 들뜨면 조슈아가 걱정하는 환상이라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얄팍한 환상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고작 저는 이런 놈이었다.

바보 같은 놈. 어리석은 놈. 제가 누구를 사랑하는 줄도 모르는 놈.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조차 모르는, 멍청한 개자식.

손가락 사이로 잔뜩 가라앉은 녹갈색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눈매 사이로 곱게 흐르던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하필 조슈아 베넷은 왜 저 같은 놈에게 걸린 걸까. 그에게 어울리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 대신에 이렇게 지독한 개자식한테.

수없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조슈아 베넷을 가장 위하는 걸까’라는 고민은 결국 똑같은 답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해요. 조슈아.”

쉰 목소리가 진심을 담은 사과를 건넸다. 닿지 못할 사람에게. 닿아서는 안 될 사람에게. 부디 닿고 싶은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해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바스러지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 끝은 언제나 그렇듯, 소리도 못 내는 울음이었다.

* * *

형광등 빛보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더 환한 아침이었다. 편집장실의 블라인드는 깔끔하게 걷어 올렸고, 창문은 조금 열어 두었다. 업무용 테이블 위는 말끔하게 한 번 닦은 뒤 광고지를 뺀 메이저 조간신문 세 부를 올려 두었고, 메모지와 삼색 펜을 추가했다. 태블릿 PC와 노트북은 이미 100% 충전되었고, 오늘 결재를 위해 올라온 서류들은 서류 커버에 끼워져 한쪽에 놓여 있었다.

조슈아는 편집장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가 출근하면 가져다줄 커피도 준비되었다.

조슈아는 미색 셔츠의 소매를 두 번 접어 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난 달 바꾼 우드 향 디퓨저와 아침 공기가 섞여서 폐가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크리스가 지나가는 말로 바꾼 디퓨저가 더 좋다더니 이유가 있었다. 반쯤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구매 품목에 추가했다.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시간을 확인한 조슈아가 편집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오늘의 업무 브리핑을 준비했다. 딱 5분 뒤, 8시 30분. 비서실 문이 열리고 크리스가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보스.”

“좋은 아침이에요. 조슈아.”

“커피 내려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조식 겸 간식은 크루아상 햄 샌드위치인데, 몇 개 드실래요?”

“두 개요.”

크리스는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조슈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준비해서 들어가겠습니다.”

기분 좋은 듯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조슈아는 바로 비서실에 딸린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받아 온 샌드위치는 총 세 개. 크루아상 햄 샌드위치는 크리스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다. 넉넉하게 준비한 덕분에 한 번 더 가는 수고를 덜었다. 하나는 제 몫으로 남긴 뒤, 조슈아는 쟁반에 커피와 샌드위치를 올렸다.

“아참….”

조슈아가 까먹을 뻔했다는 듯, 냉장고에서 자그마한 유리 볼도 하나 꺼냈다. 불투명한 커버를 씌워서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다. 유리 볼까지 쟁반에 담고 나서야 조슈아는 탕비실을 나섰다. 그리고 제 책상에서 태블릿 PC까지 집어 든 채 편집장실 문을 두드렸다.

곧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조슈아가 안으로 들어갔다. 크리스는 벌써 업무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듯, 자리에 앉아 조슈아가 보낸 일정표를 보고 있었다. 조슈아는 쟁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잔, 유리 볼을 내린 뒤 태블릿 PC를 켜서 일정 브리핑을 시작했다.

“9시 반에 대회의실에서 주간 계획 발표를 시작으로 11시에 미스 캐딘과 마케팅 예산 회의, 2시에 프로그램팀 보고, 3시 반에 NS미디어 측과 화상 회의 계획되어 있습니다. 오늘 미스 화이트와 미스 기빈스를 비롯한 피처팀 직원 6명이 NS 미디어사로 출근 완료했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조슈아는 창문을 통해 힐끗 바깥을 바라보았다. 엘과 미카엘라를 비롯한 직원 6명의 자리에는 [출장 중]이라는 팻말이 올려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협업 뉴 플랫폼 작업을 위한 출장이었다. 크리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NS 미디어에 왔다갔다하는 직원들이 몇몇 더 생길 예정이었지만 조슈아의 업무는 달라질 게 없었다. 크리스는 넥스트 유어에 있으니까. 가끔 화상 회의를 하는 일이 있지만 그게 다였다.

“끝인가요?”

“네. 이상입니다.”

“정말요?”

크리스가 태블릿 PC를 내려놓고 웃으며 물었다. 조슈아는 잠시 생각했다. 빠뜨린 것이 있을까, 자문했지만 답은 ‘없다’였다. 조슈아는 신중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주운 사람 게 되는 걸까요?”

크리스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카드 지갑을 꺼냈다. 조슈아가 카드 지갑을 받아 들며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보스. 깜짝 놀랐잖아요. 순간 정말 뭔가 빠뜨렸나 했다니까요?”

“거짓말. 그렇다기에는 없다는 대답이 너무 빨랐는데요?”

“빠뜨린 게 없으니까요.”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척을 했다. 그 모습에 크리스는 눈 곱게 흘기는 거 한번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조슈아는 괜히 머쓱해졌다. 보통 이러면 으- 잘난 척, 한마디 하기 마련인데 크리스는 당연하다는 조슈아에게 맞장구를 쳤다. 조슈아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유리 볼을 슬쩍 크리스 쪽으로 밀자 온통 햄 크루아상 샌드위치에 정신을 집중하던 크리스가 의아한 듯 볼과 조슈아를 번갈아보았다.

“뭐예요?”

“특별히 주문하신 ‘추억’입니다.”

“무슨….”

순간 크리스의 얼굴에 설마,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다정하게 웃었다. 그 빤히 보이는 구슬림에 넘어간 크리스가 커버를 걷었다.

“오트…밀이네요?”

오트밀이었다. 위에 꾸덕한 시럽도 뿌려진.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하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골탕 먹이기에 성공한 악당처럼 웃고 있던 조슈아가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었다.

“메이플 시럽도 뿌렸습니다. 건강에 좋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했어요. 좋아하신다면서요?”

순전히 상사의 건강을 위해 준비했다는 조곤조곤한 말씨 끝에 장난기가 물씬 묻어났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마무리 펀치를 날렸다.

“혹시, 지시하실 게 더 남아 있다면.”

“…맛있게 잘 먹을게요.”

K.O. 땡땡땡.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크리스는 유리 볼을 들고 흔들었다. 제가 졌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을까.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장난스럽고, 쾌활하고.

그래서, 조슈아가 나간 뒤 크리스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유리 볼을 바라보았다.

분명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어제 그렇게 잘 우는 걸 봐서 눈물은 있는 거 같은데.

하지만 눈물이 많다고 해서 제 형제나 다름없는 조슈아 베넷의 옆에 놓기에 100% 마음에 차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조슈아에게 ‘그 남자는 별로야’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으아아! 크리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오트밀을 한 입 먹고 미간을 찌푸렸다. 미화된 기억 속에서는 맛있었는데, 한 입 먹으니 생생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리 메이플 시럽을 뿌려도, 오트밀은 별로다.

그러니까, 눈물을 흘려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별로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회사 내 브이로그를 찍을 거예요.”

“…네?”

엘과 미카엘라가 넥스트 유어로 출근한 목요일 오후였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해쓱했다. 점심으로 시킨 피자와 핫 윙을 왕성하게 먹어치운 뒤, 콜라까지 한 잔을 다 비우고 나서야 엘이 한마디 했다. 그 한마디에 피터가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는 듯 반문했다.

그 반응을 예견했다는 듯 엘과 미카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런 반응 나올 줄 알았어.”

“뭘 이제 와서 안 그런 척해요. 보스도 어제 보고할 때 저랬으면서.”

“내가? 설마.”

크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에 잔뜩 얼어 있던 모두가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딱 좋게 분위기가 풀렸다. 엘과 미카엘라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NS 미디어 실무진이랑 홈페이지 매뉴얼에 관해 회의를 하다가, 어떻게 해야 더 효과적으로 홈페이지를 광고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마케팅 이야기가 나왔어요. 덕분에 어제 헤더도 급하게 회의에 왔었구요. 고마웠어요. 헤더.”

마케팅 팀장인 헤더가 과장되게 손을 올려 인사했다. 진심으로 감사를 나눈 엘이 말을 잇는 사이, 미카엘라가 빔 프로젝터를 켰다. 그리고 한쪽 벽에 빔이 쏘아지며 유튜브 채널이 나왔다. 넥스트 유어. 만든 지 벌써 3년이 넘은 채널에는 공식 영상 하나 없었다.

엘이 자연스레 크리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조금 전까지 어깨를 으쓱하며 관망하던 크리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모두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크리스는 넥스트 유어의 날카롭고 감각 있는 대표의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NS 미디어와 함께 만들 미디어 플랫폼에서 넥스트 유어는 뉴스와 소식을 맡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요.”

카드 뉴스 제작과 기사 편집 및 업데이트. 넥스트 유어에서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이었다. 섹션이 훨씬 다양해진다, 정도가 다른 점이겠지만. 크리스가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새로운 홈페이지에 대한 홍보 대안으로 넥스트 유어에서는 유튜브를 통해 매거진 회사의 브이로그, 다시 말해 우리 회사의 브이로그를 올리려고 합니다.”

“브이로그라….”

누군가 중얼거렸다. 조슈아도 곱씹었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이전에 에투왈에서도 빌 스웰딘을 모델로 한 ‘편집장의 하루 Vlog’ 제작을 하려 했으니까. 물론 무산되었지만.

“단순히 플랫폼 홍보에만 활용하려는 게 아니에요. 넥스트 유어의 브이로그를 시작으로 차후 특집 기사를 영상으로 푸는 등 다양한 시각으로 보고 싶어요. 알겠지만 넥스트 유어에는 다양한 재능의 기자들이 많거든요. 이미 개인 블로그에 기고한다든지, 채널에 브이로그를 찍는다든지. 그렇죠?”

크리스가 가볍게 윙크를 했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인사 기록을 볼 때 봤다. 조슈아 역시 봤다. 입사 지원서에 쓰여 있던 어마어마한 이력들. 이미 유튜브를 운용하는 직원들이며, 에세이를 쓰는 기자들. 추후 넥스트 유어의 영상팀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지닌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표의 이야기는 도화선이 되어 폭발했다. 당장이라도 시작하자는 이야기가 수없이 나왔다.

“장비는 일단 사내 카메라를 활용하나요?”

누군가 질문을 했을 때, 엘은 기다렸다는 듯 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무심코 바라본 눈들이 휘둥그레 커졌다. 쌓여 있는 카메라 상자만 다섯 개였다. 새 걸로 보이는 삼각대와 봉 마이크, 영상 장비를 모르는 조슈아가 봐도 상당한 고가의 물건들이었다. 이걸 언제 구입한 거지? 요 근래 들어온 예산 편성안에 저런 물품은 없었는데. 생각하던 사이, 미카엘라가 으스대듯 말했다.

“이번 NS미디어와의 합작 플랫폼 협업, 지원이 그렌트사거든요.”

……네?

그 이름이 왜 여기에서 나오는지, 뜬금없는 지원 기업에 조슈아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만약 이게 우연이라면, 세상에 우연으로 안 될 일이라는 건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

크리스가 까먹을 뻔했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브이로그에 관한 수입은 인센티브입니다.”

순식간에 열의가 불타올랐다. 그 뜨거운 열정들 속에서 조슈아는 물끄러미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고작 이런 기사 때문에 온 거야?”

빌 스웰딘은 보고 있던 핸드폰을 흔들며 빈정거렸다. 핸드폰 액정에는 [특보! 빌 스웰딘 스토커 출소 후 생활?!]이라는 자극적인 타이틀의 기사가 나와 있었다. 그에 반해 기사 내용은 형편없었다. 요즘 한창 화제가 되었던 스토커의 이야기를 쭉 늘어놓은 뒤, 막 줄에 ‘한편, 최고의 인기를 구사한 전직 모델, 빌 스웰딘을 공격한 스토커 역시 출소했다고 한다.’라는 설명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단 스웰딘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빌의 빈정거림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의 순위를 매긴다면, 자신이 1등일 것이라는 확신과 자부심까지 있었으니까.-물론 미하엘이 듣는다면 자신이 1위라며 길길이 날뛸 것이다-

“고작 이런 기사라니. 네 스토커가 출소했는데.”

“그래서?”

빌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에단이 반갑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경호 단계를 조금 더 높이면 어떨까?”

“현재 내 가드들 수준이 겨우 민간인 스토커 한 명도 못 막을 정도야? 너 설마 그 정도 가드들을 나한테 붙인 거야?”

“절대 아니지! 내가 다 면접 보고 뽑은 사람들이야!”

에단이 억울하다는 듯 한껏 눈매를 내리고 항변했다. 실제로 빌의 가드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경호 수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웰딘가의 귀염둥이 막내라면 당연히 그 정도의 경호는 받아야 했다.

“근데 뭘 더 높여.”

빌이 비뚜름하게 웃었다.

아차, 걸렸다. 에단은 내심 놀란 얼굴로 빌을 바라보았다. 매번 직설적이던 애가 어느새 돌려 까는 것까지 늘은 걸까. 한편으로는 흐뭇하기까지 했다.

빌은 이제 다 끝났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업무용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이제 가라는 듯 에단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다급해진 에단이 빌을 따라 일어났다.

“설마 내가 경호 수준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어?”

“볼일이 또 있어?”

사실 경호는 말뿐이었다. 본론은 따로 있었다. 에단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네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진짜 죽고 싶냐?”

빌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잔뜩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에단은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까지 갔다. 진짜 물러나야 할 때-라고 쓰고 도망가야 할 때라고 읽는다-였다. 오늘은 이 정도 놀았으면 많이 놀았다. 에단은 살랑살랑 손을 내저었다.

“다음에 또 올게.”

“꺼져.”

시리다 못해 한파 같은 으름장에도 에단은 귀여운 막냇동생을 보는 시선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물론 동작은 누구보다 빠르게 편집장실을 나선 뒤였다.

탁, 닫힌 편집장실 문을 바라보던 빌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심란한 얼굴로 핸드폰을 몇 번 눌렀다. 전화번호 목록에 ‘조슈아’를 검색한 뒤 빌은 뒷머리를 헤집었다. 전화할까 말까. 수없이 고민을 해 봐도 예상 시나리오상 결말은 항상 같았다.

“…내 전화번호면 안 받겠지.”

한풀 꺾인 듯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빌은 침울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보다 테이블에 엎드렸다. 빌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얼굴에 음영을 드리우며 우울하고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날카로운 눈매가 처연하게 떨어졌다.

“…그래도 위험하면 어떻게 해.”

워낙 미친놈 많은 세상이다. 이 스토커도,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 개자식도. 에이드리언 생각에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처졌다.

결국 미친놈 중 하나가 저라서. 전화해서 말할 수도 없는 사이가 되어서. 뱃속 아래부터 답답함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리고 결국, 이제야. 빌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고해성사를 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해. 조슈아.”

아, 정말. 빌 스웰딘이 다시 테이블에 엎드렸다. 혼자 있을 때는 이렇게 잘 나오는데, 꼭 그 얼굴만 보면 입술에 밀랍이라도 붙인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빌은 가만히 핸드폰 이름을 다시 바라보았다.

정말 사과를 한다면, 이 얄팍한 관계마저 완전히 끝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 * *

아침부터 신나게 놀던 아이들은 지친 상태로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뒤였다. 아직도 눈이 초롱초롱한 몇몇은 우르르 놀이방으로 갔고, 봉사자 및 수녀들은 삼삼오오 앉아 서로 이야기를 했다. 그 사이에서 조슈아는 어깨를 주물렀다. 아무래도 내일은 근육통이 올 것만 같았다. 그나마 내일이 일요일이어서 다행이었다.

“좋아하는 빨래 냄새 실컷 맡은 기분이 어때?”

에이블리 수녀가 놀리듯 말했을 때, 제각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어른들이 하나같이 조슈아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조슈아는 진이 다 빠진 얼굴로 후들거리는 팔을 들어 보였다.

“아, 당분간은 정말 빨래 안 해도 섬유유연제 향이 느껴질 것 같아요.”

‘정말 빨래 산을 해치웠다’라고 말해도 농담이 아니었다. 다른 수녀님들이 빨래가 정말 많다고, 나중에 나눠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말릴 때, 아니 빨래를 세탁기에 넣은 다음에라도 조금 고민을 했어야 했는데.

오전의 조슈아 베넷은 열의에 가득 찼다. 빨래를 다 널어 버리겠다는 그런 열의. 덕분에 세탁기를 여섯 번이나 돌렸고, 비눗방울 가득한 대야에서 끊임없이 이불을 밟았다. 그리고 결국 빨래를 다 해서 널었다. 물론 틈틈이 매달리는 아이들을 안아 어르는 것은 필수였고.

“그러기에 그 많은 빨래를 혼자 한다고 나서.”

원장 수녀가 혀를 차면서도 조슈아의 안색을 쭉 훑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에 조슈아는 부러 더 장난스레 웃었다.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죠. 그래도 좋은 냄새 가득 맡아서 좋긴 하네요.”

조슈아가 씩 웃으며 소파에 폭, 몸을 파묻었다. 녹녹한 공기 중 어디엔가 상큼한 섬유유연제 향이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재잘대는 이야기 소리와 적당한 볼륨의 TV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한 봉사자가 TV 채널을 돌리다가 문득 한 채널에서 멈추고 말했다.

“어? 이거 조슈아네 회사에서 취재했던 거 아냐?”

“맞네. 스토커 이야기.”

조슈아도 몸을 조금 일으켜 TV를 바라보았다. 지나 케일런 이후에 끊임없이 나온다 싶더니 이제는 빌 스웰딘 스토커가 출소했다는 것까지 뉴스거리로 만들었다. 캐스터들은 빌 스웰딘의 경호를 강화해야 하지 않냐며 걱정까지 했다.

조슈아는 입매 끝으로 가벼운 웃음을 뺐다. 빌 스웰딘의 경호 수준을 안다면 저런 말들이 쏙 들어갈 텐데. 그런 정신 이상자 민간인 스토커는 빌 스웰딘의 반경 100m 안으로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까.

그때 갑자기 놀이방 쪽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에 쏠렸다.

“제가 갈….”

자리에서 일어나던 조슈아가 무심코 윽, 소리를 냈다. 몇 분 앉아 있었다고 고새 근육이 엄살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조슈아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본 원장 수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슈아는 나랑 같이 가야겠는데? 내 관절염 약이라도 줘야겠어.”

와르르 웃음을 터트린 수녀님들 중 몇 명이 놀이방으로 나갔고, 원장 수녀는 조슈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했다. 조슈아가 씩 웃으며 원장 수녀를 따라 걸었다.

원장 수녀실에는 정말 없는 게 없었다. 커다란 구급함에서 꺼낸 파스를 뿌린 뒤에야 조슈아는 으으, 괜한 엄살을 떨며 말했다.

“진짜 관절염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누구보다 자상하게 웃은 원장 수녀가 조슈아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렸다. 그 장난에 조슈아는 배시시 웃었다. 조슈아가 으으- 하며 기지개를 한 번 폈다. 파스 덕인가, 아까보다는 괜찮은 것도 같았다. 구급함을 정리한 원장 수녀가 조슈아의 옆에 앉았다.

나른하고 포근한 공간 속에서는 저절로 눈이 감겼다. 조슈아는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새하얗고 앳된 얼굴 위로 순간 지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원장 수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아가.”

“아 진짜, 제가 몇 살인데.”

조슈아가 웃으면서 투정을 부리다 말을 멈췄다. 우습게도 그 한 마디에 콧날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그대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조슈아는 부러 방바닥 한쪽을 노려보았다. 목울대가 꿀꺽꿀꺽 올라올 때마다 조슈아는 계속 침을 삼켰다. 그때 원장 수녀가 다시 말했다.

“몇 살이라도 나한테는 아가라니까.”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등을 살살 쓸어 주는 손길이 따스했다. 새부리처럼 입술을 비죽이던 조슈아는 결국 원장 수녀의 무릎에 엎드렸다. 꼭 어린 시절처럼. 원장 수녀의 무릎에서는 예전과 똑같은 냄새가 났다.

포근한 분유 냄새와 희미한 흙냄새, 고소한 버터 냄새와 서늘한 바람 냄새. 그런 모든 게 다 뒤섞여서 조슈아를 안정시켜 주었다. 원장 수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몇 번이고 조슈아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천천히 묵은 감정을 이야기했다.

“…미운 사람이 생겼어요.”

한참만에야 나온 목소리는 조금 녹녹했고, 잘게 떨렸다. 조슈아는 어깨를 작게 움츠렸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고해성사는 어렸을 때에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유치한 말을 한다는 게 웃겨서, 조슈아는 조금 웃고 싶었다. 하지만 떨리는 입술은 웃음 대신 다른 말을 내놓았다.

“그런데 미워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말, 너무 힘들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더 독한 말로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심장을 헤집고 싶다가도, 그런 얼굴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아 꼭 뒤를 돌아야 했다.

우스웠다. 양심이라고는 태어날 때부터 결여된 것 같은 놈을 상대하면서, 왜 저만 힘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워하고 싶어요.”

조슈아가 웅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원장 수녀님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안 하던 짓을 한다고 놀랐을까, 아니면 제 편을 들어 주며 분개하고 있을까. 조슈아는 가만히 새까만 수녀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말을 끝으로 원장 수녀실에 정적이 퍼졌다. 그리고 조슈아는 조금 후회했다. 괜히 말했다. 수녀님 걱정하실 텐데. 헝클어진 머릿속에 누군가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훅 식었다.

조슈아는 애써 웃었다. 이제 고개를 들고, 사실 별거 아니라고. 그냥 요즘 이직해서 조금 힘들었다고 너스레를 떨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조슈아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뒷머리에 따스한 손길에 닿았다.

무심코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 원장 수녀는 웃고 있었다. 이상했다. 저는 실컷 걱정할 법한 소리만 늘어놓았는데. 지금 저 표정은 꼭 대견한 어린아이한테 하듯 다정한 격려였다.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무너지듯 웃었다.

“치. 나는 심각한데.”

“아가. 예전에 수두 앓았던 거 기억나니?”

“수두요?”

뜬금없는 대화였다. 그러면서도 조슈아는 곰곰이 원장 수녀의 말을 따라 기억을 떠올렸다. 수두라면 아마 열한 살 때였을 것이다. 원장 수녀는 이미 추억에 잠긴 듯 먼 곳을 바라보며 아련하게 웃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봄이 되어 갈 무렵이었는데, 애들 사이에서 수두가 쭉 퍼졌지. 분명히 걸린 애들을 격리시키고 모든 걸 분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환자가 생기는 거야.”

아, 이제 기억났다.

조슈아는 괜히 제 어깨를 주물렀다. 원장 수녀가 슬쩍 조슈아를 바라보다 짓궂게 웃었다. 세월의 풍파에 곱게 생긴 주름들이 다정한 웃음을 그렸다.

“그래서 애들 상태 싹 다 확인하는데, 글쎄. 한 녀석 몸에 이미 열꽃이 지는 흔적이 생겼지 뭐야.”

“덕분에 엄청 혼났죠.”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 했다. 원장 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혼냈지. 약 쓰고 하면 될 것을 끝까지 미련하게 끙끙 앓다가 혼자 나았잖니. 제 몸도 고생이고, 애들도 여럿 옮고.”

정말, 엄청 혼냈다. 얼굴에는 열꽃 하나 없었던 터에 누구도 조슈아가 수두를 앓았을 거라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 안 그래도 보채는 아이들 사이에서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는 환영받되 관심 받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보육원에 수두가 퍼져도 누구 하나 조슈아가 아픈 걸 몰랐다.

원장 수녀가 쓴웃음을 지으며 아픈 속을 삼켰다. 그리고 눈앞의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보육원에서 자란 제 새끼들이 다 그렇지만, 조슈아는 유독 몸만 컸다. 해사하니 예쁜 얼굴도, 순진하게 반짝이는 투명한 갈색 눈동자도. 앳된 분위기도 다.

“한편으로는 다른 수녀님들이랑 엄청 이야기했지. 세상에, 수두 걸렸는데 어떻게 참았지? 되게 아팠을 텐데. 몸에 분명 열꽃 핀 것도 보았을 텐데. 무섭지도 않았을까?”

원장 수녀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조슈아는 가만히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글쎄. 아팠던 건 기억난다. 몸에 빨갛게 발진 같은 게 나서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누군가한테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냥, 나을 줄 알았다. 며칠 밤 숨을 헐떡이며 아프다 보면, 입맛 없어도 꾸역꾸역 밥을 잘 먹으면. 그러다 보면, 그냥.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 지난 일이었다. 하지만 원장 수녀는 해묵은 기억들을 꺼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체육대회 때도 그랬다더라. 그 남색 체육복, 어쩐지 색깔이 마음에 안 들더라니. 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깨졌는데도 아무도 몰랐지.”

덕분에 피가 난 무릎으로 보육원에 돌아와서 혼자 씻고 서툰 손으로 연고를 발랐다. 그냥 양호실에 갔었어도 될 일이었는데. 조슈아는 그 예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모든 손가락은 깨물면 다 아팠다. 보육원에 있는 아이들 하나하나 안 예쁘고 안 애달픈 애가 없었다. 이 애는 이래서 아프고, 저 애는 또 저래서 아프고. 조슈아는 그래서 아팠다. 너무 잘 참아서. 너무 잘 숨겨서.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서.

“…그리고 또, 언제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혼자 울었지. 소리도 안 내고. 그 더운 이불 안에서.”

“어떻…게.”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숨을 삼켰다. 절대 모를 줄 알았는데. 커다란 방에서 여섯 명이 함께 자면서도 아무도 몰랐다. 당연히 제 어린 시절의 버릇은 수녀님들도 모를 줄 알았는데. 원장 수녀가 아프게 웃었다.

첫 입양이 취소되었던 날이었다. 괜찮다고, 애써 웃는 얼굴이 더 아파서 들여다보았다가 봤다. 모두가 곤히 잠든 방, 새파란 달빛이 들어오는 방 한쪽에서 숨 막힐 정도로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려 덮은 침대 하나를. 그 침대에서 새어 나오던, 끊어질 듯 여린 숨소리를.

원장 수녀가 조슈아의 뺨을 살짝 쓸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 위로 무언가 넘실거리다 이내 사라졌다. 원장 수녀가 조슈아와 눈을 마주하며 다정하게 웃었다.

“그렇게 잘 숨기는 애가 미워하고 싶다면, 진심인 거지. 그러니까, 마음껏 미워해.”

조슈아는 공연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앙다문 입술 새로 다른 말이 새어 나갈까 힘을 주다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다 괜히 웃으면서 딴지를 걸었다.

“원장 수녀님이 그래도 돼요?”

“뭘?”

“남 마음껏 미워하라는 말을 그렇게 해도 되냐고요.”

“안 미워하고는 못 배기겠다며.”

조슈아가 조금 웃었다.

“그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못 배기니까 말했겠지.”

“정말….”

정말. 하나도 못 속이겠다. 원장 수녀님한테는. 콧날이 시큰거렸다. 꼭 물을 잘못 마신 것처럼 목이 아팠다. 조슈아는 일부러 기침을 했다. 이미 원장 수녀님한테는 다 들켰을지 몰라도, 조슈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하면 어쩌죠?”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되지. 편하게 살아. 하고 싶은 대로. 너는 너무 안 해. 이런 건 다 어린 시절에 해 봤어야지. 다 커 가지고.”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여튼 덜 컸어. 못 말린다는 듯 곱게 눈을 흘기던 원장 수녀도 결국 웃어 버렸다. 그러다 아차,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뭐, 정 안 되겠으면 데려와. 엉덩이라도 걷어차 주게.”

“사실….”

조슈아가 비밀을 말하듯 소곤거렸다.

한 대 제가 때렸어요.

* * *

아,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조슈아는 가만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제 잔을 들었다. 사람 많은 이스트사이드 파크 한복판, 요즘 가장 인기 많다는 카페에 앉아 매콤한 특제 페퍼 가루가 뿌려진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건 제법 기분 좋은 일었다. 조금 전에 온 메시지만 보지 않았더라면 이 화창한 일요일 오후를 좀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슈아는 핸드폰을 보고 조금 고민했다.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일이야. 연락 괜찮은 시간 알려 주면 그 때 연락할게. - 빌 스웰딘

제가 번호 저장 안 한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정직하게 뒤에 적은 이름에 조슈아가 작게 웃었다. 그래도 4년간 인이 박히게 본 번호인데 설마 누구한테서 온지도 모를까. 몇 번 주고받은 메시지도 바로 위에 있는데.

그나저나, 참 제멋대로인 문자다. 어쩜 이렇게 문자가 보낸 사람을 쏙 빼닮았을까. 괜히 심술이 나서 조슈아는 빌 스웰딘의 이름을 쿡쿡 찔렀다. 무섭다가도 만만하다가도 좆같다가 또….

아. 전화가 걸렸다. 이름을 찔렀는데, 영리한 핸드폰은 전화를 위한 터치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빨리 끊어야 하는데, 신호음 한 번 가기도 전에 덜컥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조슈아?

주저하듯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빌 스웰딘이 맞았다.

“잘못 눌렀는데. 바로 받았네요.”

- …언제 답이 올지 몰라서.

참 안 어울리게 군다. 기죽은 것 같은 목소리에 주도권을 넘기는 듯한 말까지. 정말 빌 스웰딘과 동떨어진 단어들에 조슈아는 잔을 끌어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짝 톡 쏘면서 시원했는데, 다시 마시니 조금 텁텁하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는 제 아메리카노 말고도 레몬 물 한 잔이 더 있었다. 사려 깊은 동행자가 가져다준 물은 이럴 때를 대비한 걸지도 몰랐다. 물 한 모금을 마시자 텁텁하던 입이 그나마 나아졌다.

조슈아가 말을 하지 않는 동안, 전화 너머에서도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기민한 예감은 꼭 이렇게 한발 앞서 나갔다. 무슨 일일까. 혹시, 설마. 이런 걸로.

“할 말이 뭔데요?”

입 밖으로 나간 제 목소리는 유난히 무덤덤했다.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런 기대감이 없다.

……정말?

마음 가는 대로 하자고, 그렇게 다짐을 해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조슈아는 조금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은, 어쩌면.

- …내 스토커가 출소한 거, 들었지?

“…중요한 이야기가 그거예요?”

- 응.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너한테 가드를 붙이면 어떨까, 해서. 물론 페이는 내가 지불할 거야.

웃기다. 웃겨서 웃음이 다 났다. 작게 새어 나간 웃음소리에도 전화 건너편 빌 스웰딘은 아무 말이 없다. 아, 정말 엿 같은 빌 스웰딘. 조슈아는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왜 이렇게까지 해요?”

- 그야….

빌 스웰딘은 말이 없었다. 웃겼다. 분명히 레스토랑에서 함께 밥은 먹은 날, 빌 스웰딘은 제게 미안한 것처럼 굴었다. 태생부터 오만함을 두르고 나온 왕자님이 이렇게 쩔쩔매고 있는데. 왜 말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굴까?

그래서 조슈아는 다시 한번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정말로 이게 다예요?”

“조슈아. 앗, 전화 중이에요?”

어느새 왔는지, 크리스가 맞은편에 앉다가 놀란 눈을 했다. 말을 하면서도 크리스의 시선은 쏟아질 듯 커다란 휘핑크림에 쏠려 있었다. 잔을 놓자마자 자리라도 비켜 주려는지 크리스가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조슈아는 크리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끊으려구요.”

그리고 조슈아는 전화에 대고 말했다.

“제안은 거절할게요. 이만 끊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어졌다. 조슈아는 미련 없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크리스를 향해 작게 웃었다.

“휘핑크림 장난 아닌데요?”

“휘핑크림 좋아한다니까 많이 올려 주더라구요.”

조슈아 몰래 날름 혀를 내밀며 보이지도 않는 전화 너머를 욕하던 크리스가 사르르 웃었다.

“심각한 전화였어요?”

“그래 보여요?”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크리스는 빨대로 휘핑을 저으며 작게 웃었다.

“그건 아닌데. 말투가 꼭 미스터 베넷 버전이거든요. 아, 혹시 알고 있어요? 조슈아 평상시 대화와 사무적인 전화 말투 엄청 다른 거?”

“당연하죠. 다 연습한 건데.”

조슈아가 평이하게 말했다. 빌 스웰딘의 세컨드 비서는 의례적인 인사말부터 말투, 톤, 계산된 웃음소리까지. 전화 하나 받는 것도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자리였다. 덕분에 예의 바르면서도 사무적인 전화를 하는 것은 이골이 났다. 물론, 에밀리 스콧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수 덕분에 정말 정석을 밟아 가며 배운 덕이 컸고.

“그래서 그런가? 조슈아가 사무적인 전화한 다음에 조슈아랑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 느낌이 좋아요. 뭔가, 조슈아랑 더 친한 느낌? 더 친밀해지고 조슈아의 경계 안에 들어오는 그런 느낌?”

웃으며 말을 하던 크리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조슈아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느낌이에요. 원래 사람들 다 그렇잖아요. 더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 대하다 보면 말투 다 다르고. 조슈아랑 친한 척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어쨌든, 우리는 친구니까.”

별거 아닌 말인데. 크리스 말이 유난히 길었다. 혹시나 제 기분을 상하게 했나, 하며 슬그머니 눈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조슈아는 작게 웃었다. 참 사려 깊다. 그 웃음소리에 크리스가 작게 고개를 들었다. 조슈아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선 안에 들어온 기분이 어때요?”

크리스 말대로 더 친한 사람이 있다면 덜 친한 사람이 있고, 미운 사람이 있다면 좋은 사람도 있고. 조슈아 베넷에게 크리스 밀러는 이미 선 안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아주 깊숙이 묻어 놓은 타임머신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서로의 이름을 적어 놓은, 그런 사이.

놀란 듯, 크리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작게 벌어진 입에서 아, 하는 얼떨떨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맞닿은 눈을 보면서 조슈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크리스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어, 음…. 말로 표현 못하겠는데요?”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 좋다. 누구에게나 예의를 지키는 상냥한 사람의 선 안에 들어간다는 건. 조슈아 베넷의 선 안에 들어가는 건, 정말이지. 크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바보처럼 보일 텐데.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장난스레 웃고 있던 조슈아가 제 잔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러면 오늘 저녁은 기분 좋은 크리스가 사는 걸로?”

“기꺼이.”

- 제안은 거절할게요. 이만 끊겠습니다.

잠깐만, 이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뚝- 끊어진 전화에 빌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정말 끊어졌다. 통화 기록 한 줄이 전화의 전부로 압축되었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빌이 쓰러지듯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불편한 자세는 아랑곳 않고, 빌은 가만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연습까지 했는데. 전화를 걸기 전만 해도 할 말 있다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고, 괜찮다면 만나서 정말 사과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전화 너머에서 조슈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겁이 앞섰다. 사과는 거절한다 하면 어떻게 하지? 그냥 연락을 안 하는 게 좋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연락할 수 있는 핑계를, 제 마지막 보루를 잃어버리면 어쩌지?

아. 빌이 작게 신음을 뱉었다. 입이 쓰다 했더니 어느새 입술을 깨물고 있던 모양이었다. 소매로 대충 입술을 닦자 새빨간 피가 소매에 배어 나왔다. 핸드폰을 잡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풀렸다. 결국, 빌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 왜 이렇게까지 해요?

적어도, 그 질문을 들었을 때야말로 말했어야 했다. 처음 다리를 덜덜 떨면서 전화했을 때는 말하지 못했어도.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정작 말문이 막혔다.

- 나한테 할 말, 정말로 이게 다예요?

조슈아 베넷은 다 알고 있다. 지금도, 그때 레스토랑에서도, 그리고 퇴사하겠다고 말하던 날, 제 편집장실을 나갈 때에도. 빌 스웰딘이 하지 못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차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말도 못할 정도로 조슈아 베넷은 많이 기다려 줬다.

“…나랑은 주말에 안 놀았으면서.”

그러니까, 저는 이런 투정만 늘어놓는 거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는 조슈아의 현 보스 크리스 밀러였고. 우습게도 그게 참 서러워서.

참 못났다. 입에서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슈아가 있었을 때도 빌 스웰딘 일정 중 주말에 세컨드 비서와 놀 여유조차 없었으면서. 사과 대신 찌질한 투정이나 늘어놓는 꼴이 되었다.

빌은 가만히 손바닥을 폈다가 천천히 주먹을 감아쥐었다. 그리고 톡, 이마 위로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런 사이였을 수도 있다. 그냥 주말에 뭐 하냐, 한번 전화해서 웃긴 이야기를 하고. 퇴근 후에 잠깐 저녁을 같이 먹다가 인사도 없이 헤어져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조금은 그런 사이였을 수도 있었는데.

그때도, 오늘도. 제가 다 망쳤다.

제 것이었을지도 모를 아쉬움이 진득하게 남아서 빌은 침 한 번 꿀꺽 삼킨 뒤 다시 눈을 떴다. 한층 더 가라앉은 진회색 눈동자에는 굳은 결심이 넘실거렸다.

더 이상 바보짓을 하는 거에는 진절머리가 나서 빌은 직접 가기로 했다. 그리고, 직진은 사실 빌 스웰딘이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 * *

“엘 찾는 소리 아니에요?”

탕비실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조슈아가 말했다. 갓 구운 빵을 먹으며 행복한 얼굴을 하던 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거 같은데요?”

엘이 잠시 빵을 내려놓고 탕비실을 나섰다. 괜한 궁금증에 조슈아도 힐끗 바깥을 내다보다 깜짝 놀랐다.

화창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그것도 8시 반. 한 주를 시작하는 싱숭생숭함과 주말간 늘어져 있던 몸이 출근에 적응하는 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들어온 배달원은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끌고 온 카트에는 카메라가 그려진 상자들이 배달원 키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급하게 빵을 삼킨 엘이 배달원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재무회계팀 멜라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게 뭐예요?”

“그러게요. 엘. 더 올 카메라가 있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없었는데.”

“저, 실례지만 제가 다음 배달도 있어서.”

대화 사이를 비집고 배달원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아차, 한 얼굴로 엘이 미안함을 표했다.

“아, 미안해요. 일단 여기에 놓아 주시겠어요?”

장비실에 넣기 전에 어디에서 왔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엘은 엘리베이터 바로 옆을 가리켰다. 배달원은 빠르게 박스를 놓은 뒤 친절한 인사와 함께 나갔다. 이미 장비실에 쌓인 카메라도 한가득인 상황에서 재무회계팀은 새로 온 카메라들도 리스트화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엘은 NS에 전화를 해본다며 핸드폰을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보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크리스는 빈 커피 잔을 든 채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방송국이라도 개국해요?”

그 말에 조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스스로의 농담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크리스도 빙그레 웃었다. 하긴, 저 정도의 카메라 물량이라면 작은 유튜브 방송보다는 적어도 주 방송국 정도가 맞을 듯싶었다.

“글쎄요. 보스. 계획에 있던 일인가요?”

“아직은 유튜브 채널 설립 단계였는데. 목표가 점점 커지네요.”

크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엘이 다가왔다.

“NS 측에서는 모르는 것 같은데. 지원사에 연락해서 알아볼게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였다. 엘이 다시 한번 전화를 건다고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조슈아가 빈 커피 잔을 바라보며 새로 커피를 가져다주겠다고 말을 하려던 순간.

띵- 가벼운 전자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더 올 사람이 있나, 무심코 엘리베이터를 바라본 조슈아의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이런, 카메라보다 제가 조금 늦은 모양이네요.”

귓가의 솜털이 보송하게 설 만큼 나른하고 근사한 목소리였다.

월요일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인의 등장에 힐끗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던 넥스트 유어의 직원들의 눈도 커졌다.

배우도 저만큼 이미지가 다채롭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번, 빌 스웰딘의 인터뷰 때는 화려하게 흐드러진 장미꽃처럼 요요했던 미인이 오늘은 잔뜩 물을 먹어 슬쩍 기울어진 백합처럼 청초하기까지 했다. 조금만 더 바라보았더라면 붉은 입술을 가릴 정도로 두텁게 올린 립밤을, 그리고 그 아래에 투명하게 보이는 입술의 상처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원들 중에는 감히 그렌트사의 대표를 뚫어지게 바라볼 정도로 대담한 사람은 없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비서 한 명만 대동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조슈아는 크리스의 손에 걸려 있는 커피 잔을 부드럽게 빼냈다. 잠시 조슈아를 바라보던 크리스가 앞으로 쓱 나서며 환하게 웃었다.

“아, 미스터 그렌트.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지원 품목이 덜 갔다고 해서요.”

말을 하며 에이드리언이 무심한 눈길로 엘리베이터 앞에 쌓인 카메라를 훑었다. 그 말이 조잡한 핑계라는 걸 아는 사람이 이곳에 몇 명이나 될까. 조슈아 저 자신과 에이드리언 그렌트. 아, 그의 비서까지 하면 세 명이겠지. 조슈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가만히 시선을 맞췄다.

“아, 이걸 다.”

조슈아가 시선을 돌렸다. 아마 크리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조슈아도 순간 이곳이 어디인지 잊어버릴 뻔했다. 꽉 쥔 주먹에서 힘을 풀고 조슈아는 사무적으로 웃었다. 잠시 조슈아를 곁눈질하던 크리스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정말 방송국 프로그램처럼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야겠습니다.”

에이드리언의 뒤에 있던 비서가 그에게 짧게 속삭였다. 에이드리언의 시선이 잠시 조슈아에게 닿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크리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미련이 남는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입매만 살짝 올렸다.

“아쉽게도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네요.”

에이드리언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한 층 한 층 다시 올라오는 층수를 바라보며 크리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1층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조슈아. 잠깐 다녀올게요.”

“미스터, 베넷.”

한 음절을 쉬듯 에이드리언이 가만히 저를 불렀을 때. 조슈아는 평생을 들었던 제 성이 그토록 생경한 단어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녹갈색 눈동자가 잔뜩 굳은 채 조슈아를 응시했다. 마치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쉰 뒤,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사람처럼 간절한 빛이 스쳤다.

“…도, 같이 배웅해 줄 수 있나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도 겨우 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빙그레 웃는 얼굴과 자그마한 목소리 사이에서 크리스는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조슈, 아니. 미스터 베넷도.”

“네.”

크리스가 어물거리는 사이, 뒤에서 간결한 대답이 들려왔다. 크리스가 화들짝 놀라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조슈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간 얼굴이었다. 도리어 크리스의 반응이 웃긴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되묻기까지 했다.

“왜요?”

그리고 조슈아 베넷은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응시했다.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곧게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닿았을 때, 그는 알아챘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 사이, 조슈아 베넷의 눈이 아주 조금 휘어졌다.

“배웅이잖아요.”

경고였다.

당신이 어디까지 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조슈아 베넷의 응답.

그리고 그마저도 좋아서, 정말, 지독한 사이가 된 것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허물어지듯 웃었다. 그 웃음 속으로 깨진 감정들이 아슬아슬하게 에이드리언을 찔렀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조용했다. 숨소리 하나조차 커다랗게 울릴 것 같은 곳에서 조슈아는 한 층 한 층 바뀌는 층수 숫자를 바라보았다.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다. 이 어색한 침묵 속에서 크리스가 쓰러지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부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크리스는 이제 얼굴까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호흡이 조용한 걸 봐서는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이게 다 저 개자식 때문이다. 얼마나 부담스러우면 크리스 얼굴이 다 이렇게 질릴까.

층수 바로 아래로 시선을 조금 내리자 화려하게 반짝이는 금발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이야 다 터졌어도 머릿결은 여전히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수 없게도 동그란 두상이 참 예뻤다. 한 대 딱 후려갈기면 좋을 만큼 동그랗고 예뻐서. 조슈아는 머릿속으로 저 뒤통수를 때리는 상상을 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조슈아는 혼자만의 상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조슈아와 함께 버튼에 손을 뻗었던 에이드리언의 비서, 마크 웹디즈드가 조슈아를 향해 목례를 했다. 에이드리언을 에스코트하듯 뒤따라 나가는 모습은 정말이지 에밀리와 닮았다.

“보스, 안 내리세요?”

조슈아가 크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고작 십 몇 초간, 크리스에게만 어마어마한 중력이라도 얹어졌는지 낯빛이 좋지 않았다. 조슈아는 농담이라도 하듯 에이드리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저런 에스코트를 바라는 건 아니죠?”

“바란다면, 해 줄 거예요?”

크리스가 장단을 맞추듯 웃었다. 조슈아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면서 발걸음을 떼었다. 자연스레 크리스가 조슈아를 따라 걸었다.

“음. 연봉 협상 시, 특수 에스코트 항목 추가를 고려해 봐야겠네요.”

그제야 크리스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조슈아는 한결 나아진 보스의 분위기를 살피다 힐끗 주변을 살폈다. 사람 많은 사무실 건물의 1층 로비가 오늘따라 한산했다. 딱히 눈에 띄는 일은 없는데.

검은 세단은 건물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다른 비서가 이미 뒷문을 연 채로 대기 중이었다. 건물 계단만 내려가면 그대로 차로 갈 텐데.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갑자기 문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가 의아해하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에이드리언이 당도한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이었다. 살짝 꺾여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 딱 좋은 곳. 뒤따라오는 걸음에 에이드리언이 뒤돌아섰다. 내내 표정의 변화가 미미했던 얼굴에 굳은 결심이 어려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미스터. 베넷. 잠시간 시간을 내 줄 수 있나요?”

아, 이제 알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저를 부를 때 미스터와 베넷 사이에 한 뼘의 공백을 두었다. 그 틈에 담긴 거리감을 조슈아는 천천히 곱씹었다.

아주 손쉽게 저는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부를 수 있지만, 이제 그는 제 이름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꼭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무너진 바닥에서 낭떠러지에 매달리듯 안간힘을 쓰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그걸 바라보는 조슈아 베넷, 저 자신.

크리스는 우물쭈물하며 조슈아와 에이드리언을 번갈아보았다.

“아, 미스터 그렌트. 그, 조슈, 아니. 미스터 베넷은.”

숫제 조슈아를 등 뒤로 가리려는 모습이었다. 조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리스를 가늠했다. 이제 보니 크리스 밀러는 투자자 방문에 대한 부담보다 더 큰,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미 저와 에이드리언 그렌트 사이의 기류까지 읽은 듯했다.

“잠깐이면 돼요. 정말이에요.”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크리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오롯이 한 사람에게만 닿기 바란다는 듯 녹갈색 눈동자가 간절하게 흔들렸다. 재킷 소매 아래로 드러난 주먹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새삼 긴장이 탁 풀려서 조슈아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만류하듯 제 앞에 선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보스. 먼저 올라가실래요?”

“조…슈아.”

그럴 줄 몰랐다는 듯 크리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조슈아는 크리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주 잠깐일 거예요. 그렇죠. 미스터?”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 몇 초가 될지 몇 십 초가 될지는 전적으로 조슈아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잠시 에이드리언과 조슈아를 바라보던 크리스는 너무 늦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에이드리언을 배웅하는 말을 했다.

빨리 가라는 의도에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바닥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한 발자국도 떼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가 완전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에이드리언은 조슈아로부터 세 걸음 물러났다.

“…뭐 하자는 겁니까.”

조슈아는 조롱하듯 웃으며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애원을 하더니 지금은 말이 없었다. 시간을 끄는 걸까. 아니면 다른 수라도 쓰는 걸까.

그래 봤자 상관없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무엇을 하듯 이 기울어진 관계는 수평을 맞출 수 없을 것이었다. 조슈아가 이 순간을 허락한 이유는 단지 어떻게 해야 제가 저 남자를 더 미워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욕을 할까, 침을 뱉을까, 그도 아니라면 원장 수녀님 말대로 한 대 걷어찰까. 어떻게 해야 저 개자식을 마음껏 미워하고 제 마음에서 밀어 버리듯 치울 수 있을까.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미는 동안, 생각에 빠진 조슈아는 그 손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눈을 깜빡였을 때, 곧 제게 내밀어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손을 발견했을 때,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고 숨이 막혔다. 저 손이, 커다란 그림자가 언제든 제 앞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조슈아의 호흡을 조였다. 아, 아. 입 밖으로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새어 나갔다.

어느 순간, 등이 막혔다. 차갑게 퍼지는 벽의 한기에 조슈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부옇게 번진 시선 아래로 또르륵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느새 제 손은 목 부근까지 올라와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제 목을 조일 수 없는데.

아, 정말.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힘을 주려 애썼지만, 조슈아는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당긴 손이 덜덜 떨렸다. 조슈아는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숨을 참았다가 내쉬고, 다시 한번 참았다가 내쉬었다. 더운 숨이 얼굴에 부딪히고, 습습하게 사라졌다.

그제야 이 모든 현실이 천천히 조슈아에게 닥쳐왔다. 화창한 아침의 태양빛과 늦게야 밀려오는 엉덩이의 통증. 점점 가까워지는 울음소리.

“…발요. 조슈아. 미안…해요.”

그건 제대로 호흡조차 조절되지 않는 애원이었다. 조슈아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반대편 건물 벽에 등을 기대 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안해요. 절대로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왜.”

왜 그랬어요.

숨이 턱 막혔다. 모래알이라도 씹은 듯, 까끌한 입에서 미처 발화하지 못한 말이 마르는 동안. 조슈아는 턱뼈가 부서져라 힘을 주었다.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끝까지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흠뻑 젖은 녹갈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조차 싫어서 조슈아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내 건조하게 말라붙은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왔다.

“이거, 주려고 그랬어요.”

무언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조슈아가 곁눈질을 했을 때, 에이드리언의 옆에는 핸드폰 반만 한 검은색 직사각형 물체가 놓여 있었다.

“…전기 충격기 작동기예요. 특수한 제거기가 없는 이상은 절대 풀리지 않아요. 당신은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돼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제 소매를 걷어 보였다. 재킷 소매로 가려져 있던 팔목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팔찌가 걸려 있었다. 눈이 뻑뻑해져서 조슈아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남자가 정말 그 남자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가련한 모습이었다. 조슈아가 물끄러미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의도일까.

저 자그마한 머리 안에 든 생각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단단한 플라스틱 팔찌 같은데. 손목에 찬 저게 정말로 정말 전기 충격기가 맞을까. 우는 얼굴 아래로 지금은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을까.

그러다 조슈아가 손을 늘어뜨렸다. 거친 바닥 결에 손등이 아프게 쓸렸다. 하지만 손등을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지쳤다. 끝없이 의심하는 것도, 재면서 어디까지 미워할지 계산하는 것도. 저 남자를 보면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다. 그냥 힘들었다.

그냥 다 던져 버릴까, 조슈아가 잠시 푸스스 웃으려던 찰나였다.

“…조슈아, 당신이. 나를.”

에이드리언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을 때, 눈물이 잔뜩 괸 녹갈색 눈동자에서 톡,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붉게 번진 눈가가 괴로운 듯 가늘게 떨렸다. 내 이름을 부르네. 조슈아가 감흥 없이 에이드리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립밤을 잔뜩 올렸던 입술이 다시 갈라졌다. 그리고 붉은 속내를 내보였다.

“……무서워한다는 게, 너무 싫어요.”

그 순간, 귀 너머가 웅웅거리듯 멀어졌다. 번지는 목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너무, 스스로가 너무, 미워요.”

부옇게 흐린 눈을 아무렇게나 닦았다. 지금 저 남자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봐야 했다. 세상 가련하게 울고 있는지, 그 눈으로도 웃고 있을지, 아니면….

…단 한 번, 봤던 그 눈처럼 뜨거울지.

하지만 아무리 닦아도 시야는 김 서린 창문 너머를 보는 것처럼 흐릿했다. 소매는 계속 축축하게 젖어 들었고, 결국 조슈아는 소매로 눈을 가렸다.

“그러지 마요. 눈 아파요.”

애가 타는 듯 간절한 목소리가 건조하게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정말, 저 남자는 평생이 가도 모를 남자였다. 다정하게 웃으며 사람 농락하더니, 목을 졸랐고, 이제는 손목에 전기 충격기를 단 채 제게 작동기를 주며 운다. 그리고 제가 눈 아플 것까지 걱정한다.

입 안쪽 살을 힘껏 깨물었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혀끝을 타고 들이닥칠 비린 맛도, 통증도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어쩌면, 저 남자는 정말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다 지독한 꿈일지도 모른다.

태생부터 오만한 남자. 깔고 앉은 옷의 가격조차 제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자.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것조차 숨 막히게 아름다운 남자.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숨통을 조이고도 웃으며 찾아올 수 있는 남자.

조슈아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저만치 멀어져 있던 에이드리언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다. 이제야 눈앞이 선명한데 햇빛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가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다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멈추지 않아서 밭은기침까지 쿨럭였다. 웃겼다.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하하하.”

그토록 나타나기를 바랄 때는 단 한 번 얼굴 비춘 적 없더니, 이제는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슈아는 이 연극에서 저 남자를 퇴장시키기로 했다.

“…가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그림자는 한 올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조차 모습에 조슈아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술을 마신 것처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머릿속이 아무렇게나 헝클어졌다.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겠는지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가라고, 좀. 이!”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려고, 한 번 제대로 노려보려고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이… 개새끼야.”

한껏 올라왔던 감정은 파도에 무너진 모래성처럼 밀려 내려갔다. 맥이 탁 풀렸다. 그렇게, 그렇게까지 뜨겁던 눈이었는데.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저를 보며 울었다. 그토록 아름답던 녹갈색 눈동자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그런 눈으로 잘도, 잘도. 모든 것을 맡긴 사람처럼 오롯이 저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주먹을 꽉 쥐고 눈가를 벅벅 닦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내 앞에서 울지 마.”

구깃하게 젖은 소매와 달리 버석하게 건조한 목소리였다.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톡 건드리면 툭 터질 듯 눈동자 위로 투명한 눈물이 겹겹이 올라온 주제에.

“네.”

녹녹하게 젖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세상에 오직 단둘만이 있는 것처럼, 제 말이면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절절 기는 게 구역질이 났다. 바닥을 짚고 있는 커다란 손을 보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웅크려졌다. 외면하듯 시선을 맞췄다.

“불쌍한 척도 하지 마.”

“안, 그럴게요.”

에이드리언이 딱딱한 입매를 올려 웃었다. 잔뜩 괸 눈물은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울고 있는 눈으로 웃었다. 그 기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에 조슈아가 탁한 웃음을 터트렸다.

숨 막히도록 예쁜 얼굴 때문에 어울리지 앉는 조화는 오히려 더 기괴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에서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는데. 사위가 조용하게 느껴질 정도로 에이드리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양손으로 셔츠 소매를 잡아 내렸다. 살갗에 돋아난 닭살을 애써 비비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

“나는, 당신이.”

조슈아가 가만히 시선을 맞추었다. 이제 조금 보인다.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이 허물어져서. 아주 조금,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맨얼굴이 보였다. 덜덜 떨면서도 차오르는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경련이 날 듯 입매를 올리는 웃음이, 저를 향해 어정쩡하게 뻗은 두 손이 참 무방비해서.

조슈아는 꼭꼭 잠가 놓았던 빗장을 풀었다. 억지로 내세웠던 무덤덤함과 이제야 시작한 미움. 바닥으로 끌어내린 뒤 가두었던 감정이 뒤범벅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조슈아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소름 끼치게, 무서워.”

지금 에이드리언은 어떤 표정일까. 우습게도 이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서 조슈아는 잠시 숨을 참았다. 누군가 가슴 한편을 콱 움켜쥔 것처럼 통증이 몰려왔다. 괜찮을 것이다. 가늘게 떨리는 팔을 뒤로 숨기면서 조슈아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수많은 시간을 감쪽같이 속인 것도.”

“…….”

“사랑을 속삭이다가 한순간에 낯을 바꾸어 웃던 것도.”

“…….”

“나한테 다정했던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목을 조를 수 있는 사람이라서.”

“…….”

“한순간, 증발한 것처럼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

“그러고도 정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나타나는 것도.”

“…….”

“나를 헤집는 것도.”

“…조슈…아.”

울지 말라고 했는데. 울고 있다. 커다란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달라붙는 시선을 느꼈는지 에이드리언이 허겁지겁 눈물을 훔쳤다. 0이 몇 개나 붙었는지도 모를 비싼 옷의 소매가 구깃하게 젖어 들었다. 소매 끝을 말아 쥔 손에는 언제 생긴지 모를 생채기가 나 있었고, 눈물로 얼룩진 새하얀 뺨에는 흙먼지가 엉겨 붙었다. 애처롭게 떨리던 입가가 다시 어색하게 올라갔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예쁘구나. 땀에 젖어 헝클어져도, 눈가가 붉게 번지고 눈이 부어도, 입술이 다 터져도. 저렇게 바들바들 떠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아도. 그 모습마저도 애처롭고 가련할 만큼 애틋해서.

조슈아가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그건 비웃음이나 조롱과는 달랐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따뜻했다. 그 웃음에 에이드리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조슈아가 천천히 손을 펼쳐 에이드리언에게 뻗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와 손바닥을 번갈아 보았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을 긁듯 중얼거렸다.

“거짓…말….”

“맞아. 거짓말이야.”

조슈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미소가, 펼쳐 보인 손바닥이 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에이드리언은 흠뻑 젖은 눈을 휘어 웃었다. 이 사탕 바른 독을 삼키면서도 이 환상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얼굴로.

황금빛 속눈썹이 사르르 접혔다. 붉은 눈매 끝으로 눈물이 똑 떨어졌다. 한없이 무너져 내렸던 얼굴에 화사한 빛이 올랐다.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에이드리언은 머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아양을 부리듯 손바닥 위로 뺨을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에 뺨이 닿을 때, 그가 가장 방심했을 때.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의 넥타이를 낚아채듯 잡아끌었다.

“큭.”

순식간에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얼굴 앞까지 끌려왔다. 단숨에 숨통을 졸린 남자는 균형을 잃고 조슈아가 기댄 벽을 짚은 채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다. 질끈 감겼던 녹갈색 눈동자가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조슈아는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밀쳐 낸다면 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밀릴 텐데.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목줄을 맡긴 강아지처럼 가만히 거친 숨만 뱉었다. 그러다 숨이 막히는 듯 헐떡이며 말했다.

“입술, 깨물지 마요. 응?”

우습게도 얼굴이 붉게 오를 정도로 숨이 막히면서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걱정이라니.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의 넥타이를 팽팽하게 당겼다. 주름 한 점 없이 다려진 목깃이 뒤집어지고 넥타이가 점점 목을 조여 갔다. 에이드리언은 당기는 대로 다가왔다. 호흡이 섞일 정도로, 입술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조슈아는 다른 한 손으로 에이드리언의 턱을 고정시켰다.

시선이 얽혔을 때, 조슈아는 비밀을 말하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에게만 닿을 수 있게 속삭였다.

“그래서. 나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무서워.”

자그마한 목소리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에이드리언이 눈을 깜빡였다. 녹갈색 눈동자가 텅 비고 그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조슈아는 나른하게 웃었다. 그 한 번의 웃음에도 에이드리언은 멍하니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순간이었다. 조슈아는 짙게 웃었고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아, 저 남자가 더 무너졌으면 좋겠다. 더 이상 헤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닥친 일에 에이드리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내 갈구하듯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입술을 따라왔다.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눈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조슈아는 거칠고 부르튼 에이드리언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넥타이를 놓았다.

에이드리언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넘어졌다. 땅을 짚은 손목이 이상하게 돌아가 있는데, 에이드리언은 아랑곳 않고 조슈아만 바라보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붉던 얼굴이 다시 제 빛을 찾아갔다. 생리적인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얼굴이 놀랍도록 투명했다. 붉게 번진 눈가가 너무 아파서, 물어뜯긴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와서, 조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제 입술을 아무렇게나 훔쳤다. 손등 위로 피가 번졌다.

그래. 저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무서웠다. 사랑한다 해 놓고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태도가 달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뜨거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며 목을 졸랐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났다.

이제는 지쳤다.

조슈아는 밭은 숨을 내쉬며 다시 벽에 등을 기댔다. 넥타이를 팽팽하게 쥐었던 손아귀가 아릿했고, 다리가 저릿거렸다. 입술에서는 쇠 맛이 느껴졌다. 울지 않았어야 했는데. 눈가가 쓰렸다. 아마도 운 티가 제대로 날 것 같았다. 사무실에는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다른 생각을 이어 갈 때였다.

“조슈아,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정말 끈질기다. 아니면 아직도 제 행동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걸까. 날카롭게 곤두선 눈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걸렸다. 아, 정말. 지독하게도 예쁘다. 땀에 젖은 금발 머리카락도, 흙먼지에 뒹군 듯 더러워진 옷을 입고도 녹갈색 눈동자로 제가 전부인 듯 절박하게 애원하는 저 모습은 정말이지. 왈칵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순식간에 번졌다.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아주 좁은 제 세계에 들어온 그 사람이. 사랑한다 달콤하게 고백하던 그 남자가. 평생…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믿게 해 준 남자가. 정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사실은, 에이드리언 그렌트만큼이나 제 자신이 무서웠다. 그렇게 된통 앓아 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괜찮지 않아서. 계속 울렁거려서.

주먹을 꽉 쥐어 보고 입술을 꾹 깨물어 보고, 고개를 치켜올렸지만 소용없었다. 아, 정말. 너무 싫다. 입 밖으로 울음이 새어 나와서. 조슈아는 화를 냈다.

“왜 그랬….”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하고 에이드리언을 노려보았다. 눈앞이 금세 부옇게 흐려졌다. 희끄무레한 시야 속에 번진 듯한 금발이 다가왔다.

“울지 마…요. 조슈아. 제발.”

“다 너 때문이야.”

이건 전부 에이드리런 그렌트, 저 개자식 탓이었다. 월요일을 망친 것도, 아침을 울음으로 시작한 것도, 일하러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부은 것도. 누군가를 믿기에 경계가 앞서는 것도.

“다. 전부 다. 너 때문이라고.”

너무 많이 울어서 머리가 다 아팠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냥, 지금 확실한 건.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같이 울고 있다는 거다.

“내가 다 잘못…했어요.”

하지만 조슈아는 그 눈물을 닦아 주지 않았다. 저 예쁜 얼굴에 속절없이 녹아 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너무 늦었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다, 너 때문이야.”

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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