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다정과 다정 사이에서 (15/22)

#14. 다정과 다정 사이에서

큼큼, 조슈아는 마지막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핸드폰 전화를 터치했다. 전화 연결음이 가는 순간, 조바심이 났다. 괜히 전화했나, 하지만 짧은 후회를 하기도 전에 전화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요? 조슈아? 지금 어디에요? 무슨 일 있어요? 왜 안 올라와요? 내가 내려갈까요?

크리스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늘어놓았다. 조슈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려다 아야, 하고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터진 입술이 당기고 얼굴에 남은 소금기가 따가웠다. 세수라도 한 번 하고 전화할 걸 그랬나 했지만, 제가 자리를 비운 지 벌써 40분도 넘었다.

“보스.”

아차. 조슈아는 핸드폰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려 큼큼, 헛기침을 했다. 조금 전 “보스-” “보스?” “보스!” 하고 연습까지 했는데. 정작 나간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운 티가 선연했다. 전화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무거워서 조슈아는 치고 들어갔다.

“자리 비우는 시간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보스. 배웅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 아니, 조슈아. 그게 아니라.

“30분 내로 돌아가겠습니다. 이건 사적 시간 사용이니 돌아가서 연장 근무든 개인 외출이든 처리하라고 하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크리스가 당황해하다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조슈아는 작은 죄책감을 느꼈다. 물론 그게 아니라는 건 조슈아 제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게 고맙고 미안해서 조슈아는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였다.

- …그런 건 됐어요. 어차피 회사 일 때문에 함께 배웅 나간 건데.

“감사합니다.”

- 지금 어디에요?

옆 건물 화장실 칸 안이요. 회색 칸막이로 둘러싸인 곳에서 변기에 앉아 있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조슈아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 공백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크리스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대답 못할 상황이면 ‘보스’라고 말해요.

“아, 제발. 크리스.”

일하는 와중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철칙까지 어기고 조슈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입술이 아프고 얼굴이 땅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리스는 심각한데 그 심각함이 괜히 애틋해서, 콧등이 시큰거려서. 조슈아는 부러 더 웃었다. 그 웃음의 끝이 녹녹한 건 조슈아도, 크리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별일 없어요. 정말로.”

미안해요, 크리스.

별일은 많았지만, 이 또한 말할 수는 없었다. 착한 사람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삼각형 모양의 양심이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개운치 않은 일이었다. 조슈아는 잠시 눈을 감고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

- ……정말이에요?

아무래도 제 대답이 신통치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반신반의하는 목소리에 조슈아는 부러 목소리 톤을 높였다.

“정말이죠. 그냥 잠깐 할 이야기가 있었어요.”

- 이런. 괜히 미스터 그렌트를 오해했네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 끝에 크리스가 헙, 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조슈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 보니 보스.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요?”

- 네?

“우리 할 이야기가 좀 생긴 것 같아서요. 물론 사적으로.”

전화 너머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어디까지 아는 걸까. 아니, 어떻게 아는 걸까. 조슈아의 눈이 짙어졌다. 물론 빌 스웰딘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까지. 자주 부딪히고 어느 정도 눈치가 있다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관계긴 했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크리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 그럴…까요?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참 좋네요. 하하하.

“좋다니 저도 좋네요. 메뉴는 먹고 싶은 걸로 알려 줘요. 오늘은 제가 대접할 테니까.”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크리스의 입맛이야 눈 감고도 맞출 수 있을 만큼 훤하게 보였다. 과연 뭘 선택하려나. 가만히 생각하던 찰나였다.

- 조슈아.

“네, 보스.”

- …조금, 더 걸려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점심 먹기 전까지는 꼭 와요.

“…네.”

아, 정말. 착하기도 해라. 목이 메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들킬 것 같아서 조슈아는 얼굴에서 핸드폰을 떼었다. 1초, 2초, 3초. 시간이 더 가다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 크리스가 먼저 전화를 끊은 것이다. 물끄러미 핸드폰을 바라보다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일어서려고 했는데, 바닥을 디디자마자 순간 어지러웠다. 손으로 간신히 칸막이를 짚자 쿵- 하고 울리는 소리가 컸다.

아무래도 너무 울기는 했다. 손바닥으로 뻑뻑한 눈 위를 덮었다. 시야가 차단되고, 나프탈렌과 지린내가 더 훅하고 올라왔다. 으, 하고 코끝이 저절로 찡그려지는 게 웃겨서 조슈아는 손을 내리고 잠금 쇠를 열었다.

기름칠이 벗겨진 문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조슈아는 다리에 힘을 주며 세면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 감탄했다.

“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너무 자주 만나는 거 같은데?”

누가 보더라도 울었다 싶을 정도로 퉁퉁 부은 눈과 붉은 눈가, 터진 입술에 다 구겨진 옷차림. 아무리 생각해도 사무실로 돌아가기에 적합한 모습은 아니었다. 찬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당연히 붓기가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넥스트 유어가 있는 건물 화장실로 가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괜히 이런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달갑지 않은 소문만 껴안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한번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제 사생활에 관심 두는 사람들도 몇 있는데. 새로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며 과할 정도로 제게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던 사람들을 떠올리자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구두 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 조슈아는 무덤덤하게 입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긴. 아무리 제 이야기가 돈다고 해도 저 남자가 엉망인 것만큼 이야기가 돌까.

잔뜩 운 얼굴도, 제 옷보다 더 구겨진 옷도 꼭 의도한 것처럼 애처로운 남자가 가파른 숨을 참으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쪽 손에는 흰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조슈아는 저 봉투 안에 뭐가 들려 있을지 알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제대로 제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조슈아가 선 안쪽 세면대에서 가장 먼 바깥쪽 세면대 앞에 섰다. 그리고 봉투를 연 채 안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다.

“인공 눈물이랑 얼음주머니랑, 다림질 된 재킷이랑, 생수.”

“인공 눈물, 얼음주머니, 재킷 다림질, 생수 한 통.”

“15분, 아직 안 되었어요.”

“15분 내로.”

딱 15분 전에 조슈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 인적 드문 화장실 안에 들어와서였다.

불과 20분 전, 조슈아는 비적비적 다리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분위기에서, 그 상황에서 조슈아를 다시 일으킨 건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향한 분노도, 슬픔도, 제 자신을 향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복귀해야 하는데.’

그래서 조슈아는 인적 드문 화장실을 떠올렸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할 생각을 했다. 바지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에이드리언의 눈이 떨렸다.

“다시는, 내 업무 시간 방해하지 마요.”

“…그럴게요.”

그렇게 갈 줄 알았는데.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끝까지 제 뒤를 따라왔다. 수많은 시선이 조슈아의 뒤를 따라왔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면서도 잔뜩 운 얼굴을 손으로 가리면서 화장실 입구까지 따라왔다.

그 두 명까지 감내하기엔 조슈아는 너무 지쳤고, 힘들었다. 뒤따라오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또 그 뒤를 따르는 마크 웹디즈드의 존재는 시야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서 조슈아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구겨진 제 재킷을 벗어 에이드리언에게 넘겼다. 엉겁결에 재킷을 받아든 에이드리언이 눈만 깜빡거렸다.

“인공 눈물, 얼음주머니, 재킷 다림질, 생수. 15분 내로.”

“네?”

“함부로 찾아와서 이야기하자 했으면 이 정도는 해 올 수 있죠?”

주변에 세탁소도 없는 이곳에서 15분 내에 이 모든 것을 해 오려면 아마 꽤나 애를 먹을 텐데. 에이드리언은 군말 없이 바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이렇게 돌아왔다. 제가 말한 것을 다 지켜서.

조슈아는 대답 대신 생수부터 집어 들었다. 뚜껑을 따서 마시려다 에이드리언을 곁눈질했다. 목마를 텐데. 피가 굳은 채 바짝 각질이 올라온 입술이 도드라지게 눈에 박혔다. 그래서 조슈아는 보란 듯 생수를 따서 입을 대고 마셨다. 갈증이 해소될수록 속은 불편해졌다.

뻑뻑한 눈에 인공 눈물을 넣고 눈가에 얼음주머니를 가져다 대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눈에 찬 기운이 스몄다. 주머니가 커다래서 한 번에 두 눈을 누를 수 있었다. 시야가 가려진 와중에도 시선은 계속 느껴졌다. 조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계속 쌓였다. 불편함은 가시처럼 뾰족하게 돋아났다.

조슈아가 얼음주머니를 내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그냥 좀 피곤하다는 말로 어물쩍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가면 시간도 얼추 맞을 듯했다.

얼음주머니를 터트려서 세면대에 얼음을 버리고, 반쯤 남은 생수병을 잠시 흔들었다가 끝까지 다 마셨다. 재킷을 입자 이제 정말 다시 가도 괜찮을 모습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저를 보고 있었다. 물 한 모금, 세수 한 번 못한 모습으로 계속 똑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자꾸 걸려서 조슈아가 뱉듯이 말했다.

“손목….”

“아, 여기요.”

기다렸다는 듯 에이드리언은 작동기를 내밀었다. 걷어 올라간 소매 아래 검은 플라스틱 전기 충격기가 보였다. 어떤 팔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다친 건 알아서 처리해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이 어땠는지 볼 필요도 없었다.

못된 건 배우기 쉽다더니.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를 선물하는 건 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서 배웠다.

조슈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사 왔던 흰 봉투는 화장실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어쩐지 거슬렸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물끄러미 작동기를 내려다보았다.

수도 없이 고민했었다. 저를 볼 때마다 은연중에 목을 매만지는 모습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무서워하지 않고 저를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데 도리어 무섭게 만들었다.

에이드리언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한껏 물어뜯긴 입술이 아팠다.

제 손목을 걱정하는 말이, 덤덤한 목소리가, 저를 쳐다보지 않는 눈이. 벌인 걸 알면서도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게 한없이 미안하고 고프고, 또 아팠다.

그래서 에이드리언은 핸드폰을 들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정말로 답을 못할 것 같아서. 연결음이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째 들려오던 순간, 전화 너머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 미스터 그렌트. 우리의 대화가 끝난 줄 알았는데.

전화 너머에서 앤드류 맥카디가 전화를 받았다. 여유로운 어투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언제든’이 이렇게 짧게 끝난 줄은 미처 몰랐군요. 미스터 맥카디. 생각보다 기다리는 것에는 소질이 없는 모양이네요.”

- …감기라도 걸렸습니까?

“그럴 리가요.”

- 그러면 울었나요?

에이드리언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무너진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과 달리 에이드리언은 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낮게 웃었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매끄럽게 말했다.

“재밌는 추측이네요. 걱정은 고맙지만 이 이상은 사양하죠.”

- 아, 불쾌했다면 사과하죠. 직업병이거든요.

“…일단, 괜찮다고 대답하죠. 어쨌든 저는 미스터 맥카디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 그러려면 미스터 그렌트가 답을 찾았어야 하는데.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았으면 하네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네요.”

- 상당히 자신만만하군요. 그러면 다시 질문하죠. 왜 하필 싸운 날의 다음 날로 돌아갈까요?

“…처음에는 왜 전날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날의 전날로만 돌아갈 수 있으면 어땠을까. 에이드리언은 제법 길게 생각했다. 하루 정도는 출근하지 않고, 조슈아와 있으면서 모든 연락을 다 끊어 버리면, 조슈아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모든 생각의 결말은 현실과 같았다. 뾰족하게 날 선 진실은 언젠가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겨눌 일이었고, 조슈아는 다시 제게 등을 돌릴 거였다.

“그러다가 당일도 아닌 것이 궁금했죠.”

“사랑해요.”

오랫동안 후회했다. 끊어질 듯 겨우 이어진 그 한마디에 답하지 않은 제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말에 대답한 채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면 다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하지만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졌죠. 싸우기 전날, 싸운 날로 돌아가도 어차피 불완전한 믿음은 깨지기 마련이니까.”

균열은 이미 이전부터 있었다. 징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제가 만들려던 유리 온실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는 깨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래서 시간은 다음 날로 돌아간 겁니다. 파비엘이 가장 후회하는 싸운 날의 다음 날.”

울지도 말라고 했고 불쌍한 척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진한 후회는 밀물처럼 혀끝까지 몰려왔다. 가시처럼 돋아난 잘못들은 쉴 틈 없이 에이드리언을 찔렀다. 탁하게 올라오는 생목을 삼키고 에이드리언이 끝까지 말을 이었다.

“…다음 날까지는 마법이 걸리거든요.”

그래, 그날 밤에는 마법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외면했던 사실을 마주하고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흩어졌던 밤의 조각들이 제자리에 맞춰지면서 텅 빈 507호 속 제가 보였다.

아니, 그날 밤의 조슈아가 보였다.

“사실, 그날. 밤이 되게 길었는데. 하염없이 길어서 어떻게 삼켜야 할지 모를 만큼.”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울고 있던 조슈아는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구하러 오는 이가 하나도 없는 악몽. 소리도 못 내고 끅끅 울음을 삼키는 악몽. 그러다가 덜컥 깨어난 조슈아는 계속 문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지.”

감은 눈앞에 조슈아의 모습이 필름처럼 돌아갔다. 남빛이 새까맣게 빛나던 시간부터 어스름하게 푸른빛이 도는 새벽이 올 때까지. 안락함이 사그라든 507호 안에서 조슈아 베넷은 가만히 누워 있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배어 나오고, 울음을 삼키고, 그러다 다시 회색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문을 열었는데, 정말 아무도 없어서. 울었어.”

햇빛이 장판을 적시고 조슈아가 몸을 일으키고 준비를 하고. 그리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조슈아가 지었을 표정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싸운 뒤에도 다시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 수 있는 마법.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

그 순간 마법이 풀린 거다. 문을 열었을 때 아무도 없어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에이드리언은 꾹꾹 가슴께를 눌렀다. 아픈 척도 불쌍한 척도 우는 일도 모두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날로 돌아간 겁니다. 어쨌든, 주인공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니까.”

숨이 차올라서 에이드리언은 밭은 숨을 내뱉었다. 조용하던 전화 너머에서 앤드류 맥카디가 말했다.

- …영화는 진행하죠. 진행 사항은,

짧은 침묵이 흘렀고 앤드류 맥카디는 말을 이었다.

- 추후에 이야기하죠. …지금은 미스터 그렌트만의 시간이 필요할 듯싶네요. 그럼.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에이드리언은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다 텅 빈 웃음을 지었다. 직업병이라더니 감 하나는 더럽게 좋은 사람이다.

저도 감이 좋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다면 달라졌을까. 입이 쓰지만 거짓말은 나오지 않았다. 안전하다 믿는 유리 온실에서 제가 감히 누굴 좋아하지도 못하는 멍청이로 남았겠지.

용서받을 수 있는 마법이 걸린 시간. 파비엘은 그 시간에 뛰어서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지난 시간 앞에서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평생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서. 모든 것은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평생 지고 가야 할 형벌이었다.

조슈아가 제법 긴장하며 복귀한 것과 달리 회사에서는 아무 일 없었다. 모두 제 일이 바쁜 탓에 조슈아가 와도 자세히 얼굴 보며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한 탓이었다. 가끔 ‘오늘 좀 피곤해 보인다’라는 이야기를 듣는 게 다였다. 그리고 조슈아는 “월요일이잖아요.” 하며 어깨를 으쓱이며 넘기기에 충분한 연기력을 지녔다.

“…그러다가 카드 지갑을 주러 갔는데 미스터 그렌트가 거기에 서 있더라구요. 조슈아는 들어가는 중이었고, 미스터 그렌트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구요. 그래서 그냥 돌아섰어요. 이게 다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번잡한 피자 가게 안, 뜨거운 피자를 앞에 두고도 조슈아는 표정 한 점 변하지 않고 크리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리어 이야기하는 크리스가 조슈아의 눈치를 힐끔 봤다.

“…괜찮아요, 조슈아?”

“난 괜찮은데. 왜요? 혹시 나 지금 표정 안 좋아요?”

“아니.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요. 좀 놀라거나 그럴 줄 알았거든요.”

조슈아가 엷게 웃었다. 그리고 맥주잔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잔에 맺혀 있던 차가운 물방울이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놀라는 것보다 크리스가 어디까지 아는지가 더 궁금했거든요.”

사실이었다. 창피하거나 놀라는 것보다는 크리스가 어떻게 알았는지, 어디까지 아는지가 더 중요했다. 만약 제가 우는 것까지 보았더라도 조금 머쓱하고 말 일이었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잔을 들고 살짝 흔들었다. ‘어, 어?’ 하던 크리스도 잔을 들고 짠 하고 부딪혔다. 잔 안에 담겨 있는 맥주가 황금빛으로 출렁거렸다. 잔에 입술을 대고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목이 따끔할 정도로 탄산 기포가 톡톡 터졌다.

“월요일 저녁 맥주 한 잔도 좋네요.”

“내일 출근만 없다면 더 마음 놓고 마실 텐데 말이죠.”

티가 날 정도로 말을 돌려도 크리스는 더 묻는 대신 말을 맞춰 주었다. 조슈아는 그릇에 피자를 뜨며 웃었다.

“퇴근할 때만 하더라도 아쉽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야. 대표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죠. 내일 찍을 브이로그도 기대되고.”

오늘 퇴근하기 전에 본 공고가 떠올랐다.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첫 브이로그 영상을 촬영할 테니 내일 잘 준비해서 오라는 말이었다. 갑자기 조슈아의 눈이 커졌다. 맥주를 잘 마시던 크리스가 깜짝 놀랄 정도로 놀란 얼굴이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내일 촬영인데. 술 마시면 얼굴 붓잖아요.”

안 그래도 오늘 운 것 때문에 내일의 얼굴을 장담 못하는데. 조슈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반밖에 남지 않은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저 나머지 반이 지금 제 배 속에 있을 걸 생각하니 내일 얼굴이 볼만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난 또. 비서실에 잘 숨어 있으면 되죠. 어차피 4일 찍고 20분 컷으로 만들 건데. 안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렇…겠죠?”

술 탓인가. 크리스의 말이 믿음직스러웠다. 흐트러지는 기분이 좋아서 조슈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에 맞추듯 연하게 웃던 크리스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입술이 달싹이다 멈추고를 반복했다.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아, 아닌데요!”

아니긴. 반응을 보니 더 확실하다. 급하게 나오는 대답에 조슈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라는데 캐묻기도 멋쩍은 일이었다. 그러자 크리스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알겠어요.”

“…안 물어봐요?”

“할 말 없다면서요.”

조슈아가 빙글빙글 웃었다. 알면서도 그런다는 웃음에 크리스가 뾰로통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결국 크리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생활이니까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조슈아.”

크리스가 첫 마디를 내뱉는 순간 알아챘다. 오늘에 관한 일이라는 것을.

“오늘 괜찮아요?”

그래서 걱정스레 물어오는 크리스의 얼굴에도, 다정한 물음에도 웃을 수 있었다.

“그럼요. 괜찮죠.”

무덤덤한 척 깔았던 표정이 싹 깨져 버렸고, 제 입술을 물어뜯기 싫어서 남의 입술을 물어뜯고, 진심으로 밉다고 이야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조슈아 베넷은 진심으로 아주 조금, 편하게 웃었다.

* * *

이틀에 한 번 꼴이다. 월요일에는 에이드리언 그렌트, 수요일 지금은 빌 스웰딘. 달갑지 않은 불청객들은 아주 순번이라도 정한 것처럼 저를 방문하고 있다. 이 정도면 정말 성당에 제대로 나가지 않은 벌을 톡톡히 받는 셈이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지끈거리는 기분에 조슈아는 이마를 짚었다. 스튜디오 앞에 주차된 부가티는 한눈에 봐도 이 스트리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슈퍼 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빌 스웰딘도 어울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빌 스웰딘이 고개를 들었다.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매 속 진회색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쯔, 조슈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요즘 사교계에서는 입술 트는 남자가 대세인 걸까. 잔뜩 뜯긴 에이드리언 그렌트만큼은 아니더라도 빌 역시 허옇게 각질이 올라올 정도로 입술이 텄다.

“연락하지 말라고 했더니, 아예 연락도 없이 찾아왔네요. 미스터 스웰딘.”

“그러면 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알면서도 왔네요.”

사실을 직시했을 뿐이었는데 빌의 얼굴에 상처 받은 티가 스쳐갔다. 정말 안 어울리는 얼굴이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차로 시선을 돌렸다. 저 부가티는 0이 몇 개나 달렸으려나. 생각하기도 겁나는 차를 잘도 몰고 왔다. 옆에 달리는 차들이 얼마나 겁을 먹었을까.

그러고 보면 제가 예전에 빌 스웰딘의 차를 몰 때 제 옆에서 달리는 차들은 얼마나 저를 욕했을까. 옛날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었다. 웃음의 끝이 써서 조슈아는 흐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새 입술을 달싹이던 빌은 겨우 한마디 꺼냈다.

“…할 말이 있어서.”

“지난번부터 정말 할 말이 많으시네요. 설마 또 가드를 붙여 주겠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조슈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같은 말을 또 반복한다면 정말 쫓아내 버려야지. 아주 조금의 기대는 지난번 전화 때 꼭꼭 씹어 삼켰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쩔쩔매고 제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기대도 지치는 법이었다. 조슈아는 오늘 빌을 본 순간부터 계속 꾹꾹 제 기대를 눌렀다.

“…미안해.”

그래서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졌을 때 조슈아는 순간 모든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잘못 들었을 거다. 빌 스웰딘이, 그 오만방자한 왕자님이 제게 지금 뭐라고 했는지 간에 제가 듣고 싶은 말로 들린 걸 거다.

하지만 빌 스웰딘을 쳐다보았을 때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 눈썹 한 번 까딱할 때마다 저를 맨해튼 강에 담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게 만들었던 빌 스웰딘이 지금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 이리 뻔해. 이렇게 뻔할 거면서. 참, 오래 걸려서. 조슈아는 가만히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진작, 얘기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어. 미안해. 조슈아.”

“뭐가요.”

“……다. 다 미안해. 조슈아 베넷.”

저 건조한 목소리가 녹녹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고개를 숙인 빌 스웰딘의 표정이 궁금하다가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보고 싶은데 제 얼굴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알면서도 미리, 말 안 한 것도. 바로잡지 못한 것도. 그리고, 너무 늦게 사과한 것도.”

천천히 이어지는 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래서 조슈아는 웃음이 났다. 참, 별거 아니다. 알면서도 미리 말 안 한 거. 바로잡지 못한 거. 그리고 너무 늦게 온 거. 정말 별거 아닌데… 참 속상한 거였다.

“……웃기시네.”

빌 스웰딘도 속상했으면 좋겠을 만큼, 속상해서.

“조슈….”

“좆 같은 빌 스웰딘.”

순간 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벙한 얼굴이다. 조슈아가 탁한 숨을 뱉으며 웃었다. 정말 좆 같은 놈이다. 이렇게 늦게 오고도 제가 웃는 얼굴로 사과를 받아 줄 거라고 예상했을까?

그 당황한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나와서 조슈아가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하하. 좆 같은 빌 스웰딘. 배가 당기고 입을 통해 나오는 웃음소리가 컸다. 한계치에 다다른 웃음이 써서 조슈아가 웃는 얼굴이 허물어졌다.

좆 같았지만, 정 들었던 빌 스웰딘. 찌푸린 눈썹 한 번에 무섭다가도 아주 가끔 만만하게 굴어 주고. 안 그러는 듯 투덜거리면서 가끔 챙겨 주었던 제 첫 보스. 그래.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빌 스웰딘.

그 빌 스웰딘이 제 앞에 있었다.

“조….”

“진작 그러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놀리고 싶은데. 웃는 턱이 덜덜 떨렸다. 뒤늦게 턱에 힘을 주었다. 빌 스웰딘한테 들키고 싶지는 않은데 저 얼빠진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었다.

“…뭐?”

“진작 그러지 그랬어요. 이 개새끼야. 몰랐는데. 내가 미스터 스웰딘을 많이….”

목이 아픈지 다른 곳이 아픈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조슈아는 깔깔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 안에 가시가 돋은 것처럼 말들이 갇혔다. 진심을 내비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이건 다, 제가 빌 스웰딘을 많이.

“……많이 믿었는데.”

많이 믿었다. 제 생각보다 더.

맥이 탁 풀려서인지 자꾸만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빌 스웰딘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꼭 빌 스웰딘이 상처 받은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

“지금은 내가 뭘로 저장되어 있어요?”

“…조슈아 베넷.”

아, 그래도 저 사람한테 중요한 사람이기는 했구나. 나도. 시끄러운 빨간 머리 조슈아가 아니라, 조슈아 베넷 자체로 빌 스웰딘한테 영향을 미치긴 했구나 해서. 조슈아가 씩 웃었다.

“그것 봐. ……그냥 나는 참 쉬운데. 사과, 그거 하나인데.”

빌 스웰딘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조슈아 베넷의 목소리가 조금씩 끊어질수록 숨이 턱턱 막혔다. 사과와 동시에 이 관계마저 끊어지면 어떻게 하지, 제 얄팍한 고민이 너무 미워서 빌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미스터 스웰딘은 너무 어려워.”

아닌가. 돈 많고 잘나면 다 어려운 걸까. 조슈아의 목소리가 흩날렸다. 고집스레 저를 미스터 스웰딘이라고 지칭하는 목소리가 점점 떨려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어서.

“……미안해. 진짜. 내가, 정말. 미안해.”

밀랍을 바른 것처럼 딱 붙은 입을 간신히 떼었다. 나오는 말이 참 뻔했다.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은데, 수많은 미사여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저는 고작 미안하다는 말만 번복했다.

차라리 아까처럼 욕을 해주면 좋을 텐데. 눈이 따끔거렸다. 뚫어져라 노려보던 길바닥이 흐릿하게 번졌다. 콧날이 물에 젖은 것처럼 시큰거려서 빌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설마 우는 거예요?”

제가 말하고도 웃겼지만, 조슈아는 유심히 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세상에, 욕을 먹고도 우는 빌 스웰딘이라니. 황색 언론에 실려도 아무도 안 믿을 법한 일이 조슈아 제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시끄러. 울기는 누가 울어.”

목소리까지 젖었으면서 말은 잘한다. 코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주제에 빌 스웰딘이 획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가 혀를 찼다.

“참 사과 못 한다.”

사과 안 해본 티가 난다. 커다란 등이 움찔했다.

“그럴 때는 그냥 미안해. 하고 엉엉 우는 게 제일 잘 먹혀요.”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제게 그 예외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였고.

“……미안해. 진짜, 미안…해.”

“그래도 사과는 바로 안 받아요.”

조슈아가 덧붙였다. 띄엄띄엄 이어지던 말이 울음으로 얼룩졌다. 날카롭게 놀라간 눈매 끝이 조금씩 떨어졌다. 결국 빌 스웰딘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잘못한 주제에 우는 건 여기 있는 개자식이나 저기 있는 개자식이나 다 똑같아서 조슈아가 어이없다는 듯 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그 입매 끝이 풀어졌다.

사실 아주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었다. 진심을 담은 사과. 그게 참 뭐기에 사람 들쑤셔서.

조슈아는 잠시 등을 돌렸다. 단단하게 응어리졌던 마음 한구석이 연하게 풀려서 빌이 못 보게 눈가를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 조슈아는 해사하게 웃었다.

꼭 빌 스웰딘이 떠올리던 조슈아 베넷 그대로.

“우는 거 사진 찍어도 돼요?”

누그러진 줄 알았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선다. 조슈아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거, 참. 귀염성 없다.

“다 울었어요?”

“…별로 안 울었거든?”

퍽이나.

조슈아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 웃음 뭐냐고 또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빌도 제 모습은 아는 모양이었다. 푹 수그린 고개 아래로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씨, 작게 투정을 내뱉었다. 이제 조금 정신이 도는 모양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며 이제 막 붓기 시작하는 눈가가 제법 볼만 했다. 세컨드 비서로 일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장장 4년 동안 빌이 우는 걸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내일 나 울었소, 티가 선연한 얼굴이 될 빌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소리에 빌이 사나운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올렸다.

“지금 우…는 사람 앞에서 웃냐?”

사람 간담 서늘하게 만드는 눈매와 달리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다. 진회색 눈동자는 짐짓 눈치라도 보듯 계속 조슈아의 표정을 살폈다. 참 서툴다. 그래서 여실히 티가 났다. 빌 스웰딘은 절대로 조슈아 베넷에게 무서운 사람이 되기 싫다는 마음이.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환하게 웃었다.

“웃긴데 그럼 같이 울까요?”

단정한 얼굴이 화사하게 웃으며 놀리는 게 아주 예전과 똑같아서 빌은 잠시 숨을 삼켰다. 눈물이 고여 있어서 시야가 조금 흐릿했다. 또렷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빌은 급하게 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았다. 보딩 스쿨을 들어가기 전에도 안하던 짓이었다.

적당히 날이 선 재킷 옷감이 연하게 부르튼 눈가를 아프게 닦을 때였다. 제 팔을 가볍게 잡아 저지시키는 동작에 빌의 눈이 조금 커졌다. 혹시나, 하는 미약한 기대가 진회색 눈동자에 어리던 찰나였다.

“옷감 망가져요.”

이게 얼마짜린데.

조슈아가 덧붙이듯 중얼거리는 말이 빌의 머리를 세차게 때렸다. 조슈아가 손을 떼자 팔에 닿았던 온기가 순식간에 식었다. 그러면 그렇지. 딱 이 정도 거리도 그토록 바랐는데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 가라앉혀야지 다독이면서도 못난 투정이 올라갔다.

“…내 걱정부터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뭐 예쁘다고 걱정을 해 줘요.”

“그건, 그러네.”

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썼다. 예쁠 거 하나 없는 보통의 관계인데 이렇게 명명되니 심장 한편이 시렸다.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질 것 같아서 빌은 서둘러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킷 가슴에 꽂혀 있는 포켓치프를 꺼냈다. 엘라가 정성을 기울여 접었던 모양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다행이다. 지금 표정 되게 못날 것 같은데, 소매 말고도 가릴 게 있어서. 코를 훌쩍이고 싶은데 소리가 날 것만 같아서 빌은 꾹 참았다. 이대로 집이었으면 좋겠다.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하게 바랄 때였다.

“…저택 도착하면 생수부터 마셔요. 목 되게 마를 테니까. 눈에는 인공 눈물 충분히 넣고 얼음찜질해요. 니콜라스가 어련히 잘 케어해 주시겠지만, 그래도 부끄러워서 얼굴 숨기고 싶으면 인공 눈물이랑 얼음주머니만 달라고 해요. 찜질 좀 하면 내일 출근하기 어려운 얼굴은 아닐 거예요.”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봄결 같았다. 빌은 아주 조금 포켓치프를 내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빌은 저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 하나 닿은 게 뭐라고, 괜히 부끄러워져서 빌은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서 빌은 무심코 말했다.

“되게 잘 아네.”

“경험담이거든요.”

덤덤한 대꾸에 빌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아프게 짓이겼다.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했던 조슈아 베넷이 눈앞에 선연한 것 같아서. 빌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제 앞에 있는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슴에 박힌 아픈 기억은 빠지지 않아서. 빌은 가만히 숨을 멈추고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요. 내일도 출근하려면 빨리 올라가서 쉬어야 돼요.”

조슈아가 핸드폰 시계를 곁눈질했다. 벌써 40분이나 지났다. 이제 빨리 이 불청객을 보내고 올라가서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휴식 취해야 하는데, 저 불청객은 약속이라도 하고 온 거야?”

“무슨….”

빌의 목소리가 짙어졌다. 말을 잇기도 전에 조슈아는 빌의 시선을 좇았다. 빌의 차 바로 뒤에 주차된 차가 익숙해서 조슈아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급하게 차에서 내린 에이드리언의 표정이 복잡했다. 놀라고 화나고 슬픈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언제부터인가 참 읽기 쉬운 남자가 되었구나, 하면서도 그마저도 100% 믿을 수 없다는 게 웃겼다.

조슈아는 가만히 이마를 짚으며 탁음을 뱉었다. 운세를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만약 오늘 같은 날 점성술이라도 본다면 수정구슬 속에는 아마 뿌연 안개와 함께 기묘한 해골들이 잔뜩 그려져 있을 것이다.

“조슈…아.”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저와 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차단된 건 한순간이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제 앞을 가로막은 빌의 등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고개를 푹 숙이며 처음 보는 얼굴을 한 울보는 어디로 갔는지. 등만 봐도 오만하고 건방진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이게 제가 알던 빌 스웰딘이라서 조슈아는 조금 웃음이 났다. 그래서 조슈아는 빌의 팔을 잡았다. 빌이 돌아보았다. 삐딱하게 올라간 눈매가 무척이나 친숙했다.

“가요. 미스터 스웰딘.”

“하지만.”

빌이 잠시 말을 멈췄다. 언제부터인가 조슈아의 눈을 보면 반사적으로 다정하다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선을 받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만큼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눈. 연하게 분홍빛이 돌만큼 투명한 갈색 눈동자.

그런데 지금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바라보던 조슈아의 눈은 더없이 낮았다. 무슨 생각인지 물어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가라앉은 시선이 시려서. 그 시선이 제게도 향할까 봐 빌은 바닥을 쳐다보았다. 혹시나 같은 눈으로 바라볼까 봐 더럭 겁이 올라왔다. 생경한 맥박이 점점 빨라졌다.

“운 거 다 티 나는데. 평생 놀림거리 만들게요?”

그 와중에 제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장난스러워서 빌은 입 안쪽을 아프게 깨물었다. 이 목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계속 이렇게나마 지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막연하게 올라오는 생각들을 갈무리하며 빌이 조슈아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말했다.

“…갈 테니까 내가 말하는 거 하나만 해 줘.”

“뭔데요?”

“등 한 번 토닥여 줘.”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요.”

토닥이는 것보다는 가라고 등 떠미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조슈아가 빌의 등을 두드렸을 때, 빌은 운 자국이 선연한 얼굴로 씩 웃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저 개자식의 얼굴에 걸린 절박한 표정이 순간 벗겨지는 게 제법 볼만했다. 일그러지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이 더없이 달콤한 승리처럼 느껴졌다.

그래. 사실 조금 전에 미안함에 휩쓸려 울었다고 해도 빌 스웰딘은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다. 스웰딘 가의 왕자님으로 태어나 오만을 제 옷처럼 걸친 채 평생을 제멋대로 살아왔다. 그마저도 우쭈쭈해 주는 가족들 사이에서 살아온 왕자님은 귀신같이 제 적을 구분 지었다. 그리고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 적이었다. 물론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빌은 일부러 에이드리언을 등진 채 검은 로퍼 앞코로 바닥을 콕콕 찍었다.

“그럼 진짜 가?”

“빨리요.”

미련이 뚝뚝 남는 발짓을 모른 척이라도 하듯 조슈아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마저도 반가워서 빌이 피식 웃었다. 아쉽지만 이제는 가야 할 때였다. 빌은 아쉬움을 삼키며 손을 흔들었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 로봇이 손을 흔드는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조슈아가 아주 조금이라도 웃었으니 되었다.

빌이 조슈아를 등지며 제 차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만 보지 않았다면 정말 완벽한 저녁인데. 빌의 입가에 걸렸던 다정한 웃음이 사그라들고 특유의 시니컬한 비웃음이 드러났다. 눈물도 닦은 얼굴이겠다, 저 새끼나 조지고 가고 싶은데. 먼저 가라고 했던 조슈아의 말을 어길 수도 없는 모양이었다.

“감히. 누구한테 온 거야.”

다행히도 조슈아는 걸어오는 시비를 피하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잔뜩 만개한 독초처럼 요사스러운 얼굴이 빌을 마주했다. 가면처럼 덧씌워졌던 여유롭고 화려한 껍데기 대신 독이 바짝 오른 얼굴로 마주하는 건 또 오랜만이라서. 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이래. 같은 개새끼끼리.”

그래, 같은 개새끼라서 미안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엿 먹일 수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 새끼가 엿 먹는 방식이 곧 제가 엿 먹을 수 있는 방법이라서.

짙게 가라앉은 녹갈색 눈동자가 흉흉하게 번뜩였다. 시선의 높이가 빌보다 아주 조금 높았지만, 날 선 기세라면 빌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빌이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올렸다. 진회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마주했다.

“너야말로 감히 누구한테 온 거야.”

“뭐?”

“그깟 사진 좀 지워 주고 회사 조금 지원해 줬다고 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정말 잊어버리기라도 한 거야? 그거 참 편리한 기억력인데?”

기름칠을 한 듯, 혀를 타고 나오는 빈정거림이 자연스러웠다. 말을 하면서도 빌은 제 심장이 콕콕 찔렸다. 제 비꼼에 저까지 포함되는 건 아무리 후회해도 변하지 않는 일이라서. 하지만 새하얗게 질리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이 점점 더 볼만해져서 멈출 수가 없었다.

“너….”

“너나 나나 조슈아한테 개새끼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급이 다르잖아. 나는 사과할 수 있는 개새끼. 너는 그냥 사라져 주는 게 합당한 개새끼.”

가까워지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모습에 울었던 제 얼굴을 들킬까 걱정한 게 무색해졌다. 부르튼 입술이며 까칠한 얼굴이 제 얼굴과 비슷해서. 아니 제 얼굴보다 훨씬 더 심하게 앓은 꼴이라서. 빌이 쓰게 웃었다. 안 그러던 새끼가 정말 진심인 양 구는 게 꼴같잖아서. 속이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불편한 기분 사이 뭔가 찜찜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빌은 꽉 다물린 에이드리언의 입술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토록 꺼려하던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흉내를 내듯 순식간에 낯을 바꿔 웃었다. 그리고 친한 친구한테 그러듯, 빌이 에이드리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얼굴이나 잘 관리해. 볼 건 얼굴밖에 없는 새끼가.”

빌이 다정한 목소리로 에이드리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떨어졌을 때 빌은 으, 싫은 내색 가득한 얼굴로 제 손을 탁탁 털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그리고 빌이 다시 제 차로 걸어가서 차 문을 열었다.

차에 탔을 때 빌은 조금 전과 다른 얼굴이었다. 이 정도면 지난 번 빚은 톡톡히 갚은 셈이라 괜찮은 기분일 줄 알았는데.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찜찜하고 거북했다.

빌이 창문으로 힐끗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천천히 조슈아에게 다가가는 것이, 그리고 그 뒷모습에 조슈아가 가려지는 것까지 다 지켜보았다. 그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지난 번 제가 도출해 낸 답이 떠올랐다.

애가 탈 대로 탄 거다. 그러니까….

진심인 거다.

“……미친놈.”

빌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단 한 번도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무언가에 진심인 적을 본 적이 없었다. 늘 권태로운 듯 나른하게 웃으면서도 모든 걸 손아귀에 거머쥐었던 개자식에게 처음으로 진심인 대상이 생겼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가 않아서 빌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헤집었을 때. 빌은 한 번 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저 새끼의 앞길이 유황불로 점철된 가시밭길이라는 건 확실했다. 복잡한 머릿속이 가위질을 한 것처럼 단숨에 맑아져서 빌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는 좀 덜 아플 제 앞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 그렇지. 조금 울었다고 사람이 달라질 리가 없다.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 스웰딘이 다정하게 웃으며 에이드리언의 어깨를 토닥였다. 와. 예전 같으면 파르르 떨면서 얼굴 맞대는 것조차 질색하던 사람이 많이 컸다. 조슈아는 감흥 없이 둘을 바라보았다.

이내 대화가 끝난 듯 빌이 먼저 차에 올라탔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달빛에도 반짝일 정도로 새하얀 얼굴을 한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짙게 가라앉아 있던 녹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끔찍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질린 얼굴이 천천히 제 빛을 찾아왔다. 마치 구원이라도 바라보듯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조슈아가 희게 웃었다. 제가 에이드리언에게 줄 수 있는 건 나락밖에 없는 것 같은데. 이해관계가 맞는 건지 아닌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제게 걸어왔다. 거북이도 그보다는 빠를 것 같았다. 그리고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에이드리언은 부르튼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물어뜯은 흔적이 붉게 남아 있었다. 립밤조차 바르지 않고 보란 듯 내보이는 튼 자국이 순식간에 눈에 박혀서 조슈아가 에이드리언 너머를 바라보았다. 녹갈색 눈동자가 한풀 꺾인 채 끝까지 조슈아를 응시했다.

“…안녕, 조…슈.”

완연한 봄의 밤을 녹여 만든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제 이름을 발음하는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떨리지만 않았더라도 이 모든 게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달콤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제 이름을 부르며 울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오늘의 에이드리언은 띄엄띄엄이라도 제 이름 세 음절을 끝내지 못했다. 끝내 포기한 모양인지 점점 떨어지는 그 시선을 바라보다 조슈아는 가만히 손가락 두 개를 꼽았다.

“오늘은 불청객이 두 명이에요. 미스터 스웰딘, 미스터 그렌트.”

“……빌 스웰딘. 그가 여길 왜….”

“사과하러 왔거든요.”

조슈아가 단조롭게 대답했다. 사실만으로 꽉 찬 응답에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창백한 공포가 번졌다. 그 표정은 조슈아가 익히 잘 아는 얼굴이었다.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혼자만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함. 더럭 차오르는 겁, 그런 거. 한 명씩 새 집으로 떠나는 날마다 빈 침대를 바라보던 어린 조슈아 베넷이 짓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초조함을 반증하듯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슈아가 물어뜯은 자국은 아마 한참 더 갈 것 같았다. 못된 버릇이 옮겨 갔구나, 조슈아가 느슨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를 용서했나요?”

“아뇨.”

조슈아의 대답에 에이드리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매끈하게 깎은 가면처럼 다정하고 여유롭기만 하던 얼굴 아래 어쩌면 저렇게 많은 얼굴이 숨어 있었을까. 그래서 조슈아는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죠.”

녹갈색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눈동자에 절망이 서렸다.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금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는 서로 못된 습관을 하나씩 주고받았다. 저는 그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기대를 선물하는 방법을 받았고, 그는 제게 입술을 물어뜯는 버릇을 받았다. 얽힌 관계가 더욱 엉켰다. 조슈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미스터 스웰딘은 내 상사였잖아요. 미스터 그렌트와는 시작점이 다르죠.”

“…….”

“연인이었잖아요. 우리는.”

아, 아닌가?

조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어린아이를 놀리듯 가볍게 덧붙인 말에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숙였다. 예쁜 얼굴이 아프게 무너졌다. 그래서 조슈아는 아주 조금 궁금해졌다. 도대체 저 남자는 왜 이렇게까지 할까?

“그쪽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나를 속였고, 기만하고, 내 목을 조르고. 그런데 둘을 동급으로 둬야 하나요?”

조슈아가 나긋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후벼 파기에는 그 편이 더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더 아픈 얼굴이었다. 내색조차 못 하는 그 얼굴이 반가웠다. 그래서 조슈아는 기꺼운 마음으로 후벼 판 상처를 찔렀다.

“내가 너무해요?”

“……아니요.”

나지막하게 나온 대답은 사그라든 잔불처럼 힘이 없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에이드리언의 눈을 마주했다.

“그런데 왜 그런 눈으로 날 봐요?”

아까는 읽어 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저 복잡하게 뒤섞인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서 조슈아가 물었다. 짙게 가라앉은 녹갈색 눈동자가 음울했다.

“…내가 미워서요.”

나지막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 제가 후벼 판 속내가 벌겋게 속살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왜 이렇게까지 할까. 이 정도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는데.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낯을 바꾸며 갈 법도 한데 땅에 뿌리라도 박은 것처럼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모진 말만 감내한다. 이상하다. 이상해서 조슈아는 두어 걸음 물러났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그 자리에 서 있다. 여전히, 그 아픈 얼굴로 저를 바라봤다. 참 연기를 잘한다, 싶다가도 조슈아의 머릿속에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사랑…해요.”

말도 안 되게, 그 말이 정말.

조슈아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바다에 혼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심해가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채 저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조슈아가 입술을 벌렸다.

“나한테 왜 이래요?”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은 예고도 없이 툭 떨어졌다. 무심코 한 질문에 에이드리언의 눈이 커다래졌다.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요. 속인 것도, 처음부터 의도 갖고 접근한 것도, 목 조른 것도 다. 너무, 미안해요.”

“그게 다예요?”

“…….”

“미안해서?”

이성은 묻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제 입은 공주를 꾀는 마녀처럼 달콤하게 말했다. 사과에 면역이라도 생겨서 더 큰 사과를 바라는 걸까. 아니면 이제 그만하자고 내팽개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걸까.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헷갈려서 조슈아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았다. 우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에이드리언이 기묘하게 웃었다. 마치 월요일 그때처럼.

“내 앞에서 울지 마.”

머릿속에 빨간 사이렌이 울었다. 집에 가야 한다. 빨리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에이드리언이 아주 조금 더 빨랐다.

“…사랑…해요.”

달빛처럼 창백한 얼굴로 에이드리언이 울 것처럼 말했다. 덜덜 떠는 얼굴은 달큼한 고백보다는 선고를 앞둔 죄수와 더 가까웠다. 판결을 기다리듯, 에이드리언이 두 손을 마주잡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독초 같은 새끼. 이젠 안 속는다고, 제가 더 다정하게 웃으며 맞받아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독하게 퍼진 말이 꼭 진심 같아서. 저를 바라보는 저 녹갈색 눈동자가 정말인 듯해서.

들어서는 안 될 금기를 들은 것처럼 조슈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상하다. 분명 제가 줄 수 있는 건 설탕 바른 나락밖에 없는데. 기이하게도 그 아래에 무엇이 더 있는 것 같아서, 자꾸만 속이 뒤집어졌다.

사실은 무서워서. 조슈아가 돌아섰다.

* * *

금요일 업무가 시작하자마자 엘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일찌감치 엘의 자리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크리스부터 미카엘라와 헤더에 피터 등등. 굵직굵직한 팀장급부터 막내인 보니나 재니퍼까지 사람 층이 몇 겹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긴장된 얼굴이었다. 하긴, 저기에만 안 끼어 있을 뿐이지 거울을 보면 저 역시 긴장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가 그토록 기다리고 동시에 오지 않기를 바라던, 첫 브이로그를 업로드 하는 날이었으니까.

“5, 4, 3, 2, 1!”

“눌렀어, 눌렀어!!”

크리스의 카운트다운이 끝나기 무섭게 엘이 엔터를 눌렀다. 그리고 전력을 다한 뒤 모든 힘이 소진된 것처럼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와!! 뒤에 서 있던 직원들이 다함께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에 추진력을 얻은 듯, 미카엘라가 박수를 두 번 치고 말했다.

“자자, 빨리 조회 수를 올려야 된다구!!”

맞다. 업로드가 끝이 아니었다. 그 말에 새로운 고비를 맞이한 듯 직원들이 우르르 제자리로 돌아갔다.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다. 비서실로 가서 제 자리에 앉아 유튜브 창을 켰다. 구독을 눌러 둔 넥스트 유어 채널로 들어가니 영상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직원들이 열심히 누른 탓인지 벌써 조회 수가 100이 넘었다. 생경한 기분에 조슈아가 가만히 영상을 클릭했다. 뒤따라온 크리스가 조슈아 뒤에 섰다.

“지금 보는 게 처음이죠?”

“네.”

어제 오후 사내 인터넷망에 편집본이 올라오긴 했다. 제 모습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하다는 직원들의 아우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안 봤다. 어차피 올라가면 계속 볼 걸 미리 보고 싶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 전날, 산타클로스가 사라지자마자 포장지를 뜯어 선물을 확인한 뒤 티 안 나게 다시 포장하는 느낌 같았다.

그래서일까. 20분가량의 브이로그는 신기했다. 일상이 된 제 직장이, 매일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새삼스러워서 조슈아는 연거푸 브이로그를 돌려 보았다. 처음 제 모습이 나왔을 때는 부끄러워 스킵까지 했는데 세 번째 보자 덤덤해졌다. 제가 저런 표정으로 일하는구나. 집중했을 때 입술이 톡 튀어나오는 모습이 꼭 제가 아닌 것 같아서 점심 때 크리스한테 말하기까지 했다. 크리스는 오히려 이제까지 몰랐냐며 웃었다.

하지만 조슈아나 넥스트 유어 직원들이 하루 종일 시청한다고 해서 생각만큼 조회 수가 오르는 건 아니었다. 세 자리 수를 넘지 못하는 조회 수에 엘은 잔뜩 낙담한 듯 점심을 걸렀다. 미카엘라도 힘 빠진 얼굴이었다. 크리스가 눈치를 보며 내민 샌드위치도 거절할 정도였다.

다 알고는 있던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실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확 달아올랐던 오전 분위기가 점점 식어 갈 무렵이었다.

“…어?”

책상에 엎드린 채 조회 수를 체크하던 엘이 몸을 일으켰다. 심상찮은 목소리에 조슈아도 고개를 빼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조회 수 오르는데?”

엘의 목소리가 얼떨떨했다.

“에이, 엘. 조회 수야 계속 오르죠!”

“아니, 엄청 늘고 있다고!”

누군가의 농담에 엘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하며 직원들이 하나둘 엘의 자리로 모여들었다. 만든 지 몇 년이나 된 채널에 첫 영상이 올라왔다. 솔직히 SNS에 아무리 홍보를 했다 해도 오늘의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엘의 반응은 정말이었다. 궁금증에 엘한테 다가간 조슈아도 모니터를 보고 휘둥그레 눈이 커졌다.

엘이 새로 고침을 누를 때마다 조회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유입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핸드폰을 바라보던 미카엘라가 답을 알아내었다는 듯 말했다.

“에투왈 공식 계정에 우리 브이로그 글 올라왔다는데?”

“거기가 왜요?”

“나야 모르지. 댓글에 그렇게 쓰여 있어.”

조슈아는 황급히 핸드폰을 켰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나온 크리스의 눈이 커졌고, 조슈아를 응시하는 시선이 많아졌지만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에투왈의 SNS. 에투왈을 나오면서 관련된 것들을 다 지웠다. 그 덕에 SNS 팔로우 역시 끊었던 터였다. ‘에투왈’을 검색하자 피드에 최신 게시물이 올라왔다. 빠르게 움직였던 조슈아의 손가락이 일순간 멈췄다.

#같은업계, #다른회사, #남일하는건재밌어, #내일은왜. #우리도편집장님있다, #편집장=빌스웰딘, #우리도유니콘회사, #넥스트유어

글조차 없이 해시태그만 주렁주렁 놓인 게시 글에는 유튜브를 시청하는 노트북 사진이 찍혀 있었다. 그 유튜브 사진이 넥스트 유어의 브이로그 인트로였다. 멋스러운 필기체로 사각이는 소리와 함께 넥스트 유어라고 쓰이는 인트로. 혹시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조슈아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에투왈의 공식 계정에 올라오는 홍보의 대략적인 금액이 얼마인지, 조슈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에투왈의 마케팅 팀장이 아직도 에이바려나? 엘라한테 연락을 해 볼까?

“댓글 봐, 지금 반응 장난 아니야.”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슈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는 지원사격에 당황한 건 조슈아뿐만이 아니었다. 제각기 하고 있던 업무를 놓고 모두 핸드폰이며 노트북으로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조슈아도 핸드폰을 내려놓고 영상의 댓글을 확인했다. 댓글들의 수 역시 가파르게 증가했다. 30개에서 50개, 72개, 101개….

- 회사에 저런 대표 없어

- 회사에 저런 대표 없어 22222222 훈기로 만들었나 훈훈함 쩌네

- 막내였을 때 생각난다. 물론 난 퇴사… 막냉이 파이팅!

- 에투왈 타고 왔는데 구독 누르고 갑니다~

상당히 호의적인 댓글이었다. 악플이 없지는 않았지만 호응하는 댓글이 압도적이었다. 쓱쓱 핸드폰을 내리며 댓글을 확인하던 조슈아가 잠시 멈칫했다.

- 우리 왕자님 비서 여기로 간 거야? 빌 스웰딘이 제 사람 아낀다더니 이직하고도 홍보해 줄 줄은 몰랐네.

- 빌이랑 투 샷도 좋았는데, 새로운 상사랑 투 샷도 좋다

저절로 씁쓸한 기분이 돌아서 조슈아가 부러 어깨를 으쓱했다. 저를 향한 응원이, 아쉬운 남은 이야기가 다 먼 이야기 같았다. 스트레칭이라도 하듯 조슈아가 뒤로 몸을 기울일 때였다. 뒤통수에 무언가 닿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크리스가 더 놀란 얼굴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조슈아, 괜찮아요?”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해요. 같이 웃자고 불렀는데.”

미안하다면서도 크리스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서려 있었다. 아침만 해도 직원들을 독려하고 혼자 편집장실에서 울적해하던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참았는지 크리스가 핸드폰을 들이밀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베키 이야기도 많고 보니 이야기도 많고, 우리 회사 진짜 좋은 회사래요. 물론 그런 회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 건 맞지만 벌써 이렇게 알아주니까 너무 좋아요. 우리 회사 칭찬도 많고 우리 직원들 칭찬도 많고. 계속 브이로그 만들면 이런 칭찬들 더 늘어나겠죠? 아 진짜, 되게 기분 좋고 그러네요.”

“보스, 그런 이야기는 여기 와서 다 같이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비서실 바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내 왁자지껄 웃음이 퍼졌다. 말뿐이 아닌지 피터가 비서실까지 들어와서 크리스의 등을 밀었다. 조슈아까지 당기는 손길에 비서실 바깥으로 나가자 이미 흰 벽에 빔을 쏘며 다 함께 댓글을 읽고 있었다. 지금 급한 건 일이 아니었다. 새로이 올라오는 그 댓글 하나하나, 그리고 좋아요와 구독 하나하나가 더 중요했다.

결국 기사까지 냈다. 이름 하여 ‘매거진 회사의 낭만을 파괴하고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는 유니콘 같은 회사, 넥스트 유어’.

참고로 이 기사를 처음 낸 곳은 넥스트 유어였다. 이 기사 타이틀을 잡은 엘은 하루 종일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띤 홍조가 부끄러움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직원들은 모두 다 알았다.

스타 유튜버 되는 거 아니에요? 참고로 첫 사인 내 꺼! 조슈아 우리 우정 잊은 거 아니죠?

한창 들뜬 직원들이 서로 축포를 터트려야 하는 게 아니냐며 웃던 시간, 조슈아는 핸드폰에 온 문자를 발견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조슈아가 급히 비서실 안 탕비실로 들어갔다. 모두 들뜬 분위기라 조슈아 한 명 사라지는 것 정도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은 조슈아가 침착하게 텍스트를 두드렸다.

엘라, 근무 중일 텐데 미안하지만 전화 괜찮아?

바로 전화가 왔다. 조슈아는 가만히 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에서는 텐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나 지금 스타 유투버랑 전화하는 거죠? 스타 생활은 어때요 조슈아?

“…스타랑 전화하는 기분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엘라?”

엘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 긴장한 채로 한가득 질문을 쌓았는데, 정작 전화를 하자 맥이 탁 풀리는 기분에 조슈아가 입매를 끌어올렸다. 눈이 다정하게 휘어졌다.

- 친근하고 좋네요. 지금도 장난 아니네요. 이러다 브이로그 한 회 만에 실버버튼 받는 거 아니에요?

채널을 보고 있는지 엘라가 혀를 내둘렀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다 에투왈 공식 계정 덕이지. 사실 그거 때문에 연락했어.”

- 어때요. 선물 마음에 들어요?

“선물?”

조슈아가 엘라의 말을 따라했다. 당연히 빌 스웰딘인 줄 알았는데. 엘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 어? 메일 안 봤어요?

“메일? 어떤 메일?”

조슈아가 급히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스피커폰을 켰다. 그리고 제 메일 앱을 열었다. 출근하면서 메일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혹시 못 본 메일이 있었나? 하지만 스팸메일함까지 들어가 봐도 엘라에게 온 메일은 없었다. 전화 너머에서도 확인을 해 보는지 마우스 커서 딸깍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내 엘라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 아차. 내 실수예요. 조슈아. 에투왈 계정 메일로 보냈네요. 메일이 반송되었다고 도리어 나한테 왔네요.

“그 메일 읽으러 다시 한번 에투왈에서 계정 만들고 싶은데?”

- 조슈아는 언제든 환영인 거 알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전화로 이야기하죠. 에투왈 계정에 올라온 홍보, 에투왈에서 주는 선물이에요.

“선물? 갑자기 무슨”

- 에투왈이 에투왈 가족한테 주는 응원이요. 비록 지금은 다른 곳에서 일해도 우리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요. 그러니까 에투왈에서 조슈아 응원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요. 해시태그에 조슈아 베넷도 넣고 싶었는데, 에밀리가 그건 과하다고 기각해서 무산되었어요.

“…에밀리 의견에 동의.”

이상했다. 에투왈 가족이라는 그 단어가 생경하게 와닿아서 조슈아는 겨우 한마디 했다. 눈치챘을 법도 한데 엘라는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 치. 어쨌든 결재도 다 합당하게 받은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물론 경쟁사 홍보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아무리 조슈아라도 다음은 없어요. 알죠?

“…아, 정말. 되게 감동이네.”

텀을 둔 다음에 조슈아가 푸스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가 잠겨 있다는 건 엘라도 조슈아도 알았다. 엘라는 한층 더 밝게 웃으며 말했다.

- 그러니까 넥스트 유어한테 생색도 내고 좀 그래요. 이 정도면 성과급에 내년 연봉 협상 완전 조슈아한테 유리한 거 아니에요? 나 잊으면 안 되는 거 알죠?

“그래서, 슈퍼스타 반응은 어때?”

엘라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였다. 파티션 너머에서 들려오는 에밀리의 목소리에 엘라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감동 엄청 받았죠, 당연히.”

그러더니 엘라가 편집장실을 힐끗 바라보았다.

“보스는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하셨대요? 와~ 진짜 나라도 퇴사했는데 전 회사에서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이러면서 서포트하면 눈물 5L 날 거예요.”

“엘라 퇴사할 거야?”

“그건 절대 아니죠. 이런 데가 어딨어요.”

엘라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밀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결재 커버가 들린 상태였다. 새빨간 스틸레토 힐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편집장실을 향했다. 그리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답은 들리지 않았다. 잠깐의 텀을 둔 뒤 에밀리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엘라의 칭찬을 한 몸에 받은 제 보스는 그 넓은 업무용 테이블에 엎드린 채 고개만 들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완벽한 서라운드에서는 브이로그 소리가 흘러나왔다. 멍한 표정이 볼만했지만 에밀리는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들고 온 커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금 전 엘라가 조슈아한테 전화를 했는데 상당히 감동받았다고 하더군요.”

그제야 빌이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어제 결근을 한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눈이 움푹 패었다. 그마저도 선정적인 퇴폐미를 보였지만 안타깝게도 빌의 미모를 칭송해 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흥미를 이끌었다는 것만 확인한 뒤 에밀리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잡지의 선도를 이끄는 저희 에투왈에서도 좀 더 다양한 팬층을 위해 브이로그를 찍자는….”

“안 해.”

“네. 피처팀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에밀리는 바로 결재 서류를 펼쳤다.

“잠깐만….”

에밀리가 고개를 들었다. 빌은 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에밀리는 참을성을 갖고 빌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 거 하면 같은 잡지계끼리 서로 교류하고 그러지 않나?”

“설마 조슈아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에밀리가 표정도 없이 대답했다. 묵직한 한 방이 꽂혔다. 제가 생각해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주 조금 반짝이던 빌이 다시 시무룩하게 엎드렸다. 에밀리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편집장실을 나섰다.

“현재 넥스트 유어의 구독 및 댓글 수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에투왈의 SNS 공식 계정에 홍보 게시글이 올라온 게 영향을 끼친 듯합니다. 댓글 수위는 계속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엘 화이트로부터 장비에 대한 감사 인사 메일이 왔습니다.”

마크 웹디즈드는 태블릿 PC 세 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각기 넥스트 유어의 채널, 에투왈의 SNS 공식 계정, 그리고 엘 화이트의 감사 메일이 떠 있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시선이 세 개의 화면을 짚었다. 이내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건 없나요?”

옅은 메이크업으로 붉은 눈가는 가렸지만 처연한 분위기는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잔뜩 가라앉은 녹갈색 눈동자와 창백하리만큼 새하얀 얼굴, 그에 반해 화사한 금발은 물 먹은 백합같이 나른하고 애틋한 분위기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마크 웹디즈드는 그 안타까운 미모 아래 숨겨진 게 얼마나 어둡고 끈끈한 건지 대강 알았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는 대신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저 완벽한 미모에서 발견한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따로 지시하신다면 바로 알아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영화 진행 사행 체크해서 알려 줘요.”

“예.”

어렴풋하게 올라오던 기대감이 꺾인 얼굴로, 에이드리언이 대답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크는 고개를 숙였던 터라 그 날것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마크가 나간 뒤, 에이드리언의 시선에 태블릿 PC가 걸렸다. 에투왈 SNS 공식 계정 속 올라온 넥스트 유어 브이로그 홍보를 보자 에이드리언의 눈매가 다시 서늘하게 치켜 올라갔다.

빌 스웰딘, 비겁한 새끼.

저렇게 티 나게 하면 더 싫어할 줄 알았는데. 게시물을 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간 모양이었다. 똑같이 할 걸 그랬나. 그렌트사의 SNS 공식 계정의 파급력을 생각하다가 에이드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쉬움을 삼켜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다시 커다란 모니터를 응시했다. 풀 죽은 시선의 끝에는 넥스트 유어의 브이로그가 닿아 있었다. 특별편이라고 급하게 올라온 비하인드 영상이었다. 일시 정지를 해 둔 화면 속에서 조슈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의 눈매가 저도 모르게 풀어졌다. 얼굴 가득 짙은 그리움이 담겼다.

그리고 다시 재생을 눌렀을 때,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다 날아가 버렸다. 조슈아가 나오는 2~3초 컷, 그 안에서 조슈아는 크리스 밀러랑 참 친하게 비춰졌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털어 주는 사이. 조슈아 베넷의 선 안에 들어가는 그런 사이. 그게 하염없이 속상했다. 그리고 그게 웃음이 날 정도로 우스웠다.

“미스터 그렌트는 연인이었고.”

머릿속에서 조슈아의 목소리가 흩날렸다. 누구보다 가장 가까웠던 자리였다. ‘연인’이라는 그 달큼한 두 음절.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온 건 다름 아닌 자신이라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에 에이드리언이 밭은 숨을 탁하게 뱉었다.

진작 좀 알아채지. 멍청한 새끼.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꾹 눌렀다. 분명 처음에는 얼굴 보이는 것만 싫어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자꾸만 욕심이 늘어났다.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고, 사과를 받아 주었으면 좋겠고.

…웃어 주었으면 좋겠고.

턱없는 바람이 커서, 에이드리언이 결국 쓰게 웃었다. 손바닥을 내리고 책상 위에 엎드리자 뺨이 서늘해졌다. 한숨에 겨운 입술이 달싹였다.

“…차라리 계속 미워해 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

사실은.

바라는 것이 점점 작아졌다. 뻔뻔하게 집 앞으로 찾아갈 때만 하더라도 당연하게 저를 돌아봐 줄 것 같았고, 점점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가, 그냥 사과를 받아 주길,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주길.

그리고 지금은 어느 날, 홀연히 제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될까 봐 가장 무서웠다.

그냥 미워하기만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어서. 그렇게라도 옆에 두고 저를 봐 주었으면 좋겠어서. 에이드리언은 억지로 웃었다. 해갈될 수 없는 갈증이 바싹바싹 에이드리언의 목을 조여 왔다. 에이드리언이 다시 손바닥으로 제 눈을 가렸다. 막막한 눈앞이 다시 한번 조슈아가 고여서, 차마 눈을 감을 수도 없는 그 상황이 아파서 에이드리언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게 암전 같았다.

* * *

감사 인사로 올린 비하인드 영상에 업로드 할 2회까지 준비되어 있다. 1, 2회로 매거진 회사 브이로그의 정체성을 보여 줄 수 있으니 남은 건 시청자의 구미에 맞는 콘텐츠 제작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모습이었다.

조슈아는 고심하며 태블릿 PC를 들여다보았다. 액정 안에는 1회 및 비하인드 시청자 댓글 889개를 요약 및 도표화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 20분 전 미카엘라가 정리해서 사내 메신저에 올린 거였다. 특정 인물에 관한 응원과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는 의견이 66%, 넥스트 유어의 취재 방식이 궁금하다는 의견이 12% 그리고 회사가 좋다는 의견 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이런 의견에서 2~3회 정도는 특집처럼 직원 개개인의 며칠을 브이로그화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후보도 미카엘라가 정리해 주었다. 댓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후보 10인 중 세 명을 뽑는 거다. 옆에는 가제도 달아 두었다.

1. 회사 대표가 저렇다고? - 넥스트 유어의 대표는 그렇습니다. 크리스 밀러

밑에는 캡처 사진까지 달아 두었다. 크림색 니트를 입은 크리스가 책상 앞에 앉아 카메라를 보고 활짝 웃는 사진이었다. 무슨 커피 머신 광고에서나 나올 법한 사진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트렸다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슬쩍 주변을 보는데 하필 제 바로 옆에 상처받은 표정의 크리스가 서 있었다.

“…조슈아. 지금 내 사진 비웃은 거죠?”

“보스,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저는 그저 보스 사진이 브이로그에만 남기에 너무 아쉬울 만큼 잘 나와서 웃은 건데.”

“…정말요?”

“설마 제가 보스를 비웃을 리가.”

미심쩍다는 듯 되묻는 크리스의 얼굴에 조슈아는 대놓고 상처받은 척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효과는 직방이었다. 이제는 오히려 크리스가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조슈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털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진짜 잘 나왔는데. 보스 투표 좀 많이 받을 것 같지 않아요?”

“나는 보니 이야기도 재밌던데. 이거 봤어요?”

크리스가 조슈아의 태블릿 PC를 쓱 내렸다.

2. 인사팀 막내 보니의 하루 - 회사 생활 2년 차인데, 왜 아직도 막…내….

그 제목 아래 보니의 클로즈업 사진이 붙어 있었다. 언제나 순한 얼굴로 “조슈아!” 하던 얼굴과 달리 사진 속 보니의 눈은 희번득하게 빛났다. 처음 보는 표정에 조슈아가 혼잣말을 했다.

“와, 보니. 이런 표정도 지었어?”

어쩐지 아까부터 보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들어 보니를 찾으니 사람들 무리에서 여전히 놀림 받고 있었다. 이건 다 순간 캡처의 모함이라고 열심히 반응하면서도 관심을 받는 게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서 주변에서도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진도 좋단 말이죠.”

크리스가 액정을 쓱쓱 내렸다. 미카엘라와 엘, 피터의 사진들이 쓱쓱 거쳐 지나가고 9번 제목이 올라왔다. 조슈아는 무심코 아, 입 밖으로 짧은 소리를 내뱉었다.

9. 넥스트 유어는 비서도 유니콘 - 대표 비서의 하루는 24시간이 모자라지만 능력자는 칼퇴가 가능하죠

“…저네요?”

조슈아는 조금 생경한 기분으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제가 이렇게 웃었던가? 분명히 거울에서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눈매가 가늘게 접혀서 반달처럼 휘어 있었고 입매가 자연스레 위로 올라가 있었다. 조슈아는 입매를 조금 올려 보았지만 의식한 탓인가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음, 좀 다르죠? 사진 속 조슈아는 이렇게 웃는데, 지금 조슈아는 이러니까?”

사진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크리스가 손가락으로 입매를 빙그레 올렸다가 다시 옆으로 당겼다. 그게 뭐예요.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리스가 따라 웃었다.

“지금 그 얼굴이요. 이제는 똑같네.”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조슈아가 입을 딱 다물었다. 크리스는 아쉬운 기분에 입술만 톡 내밀었다가 조슈아에게 투표용지를 내밀었다.

“다 봤으면 빨리 선택해요. 세 명.”

그러더니 윙크를 하면서 덧붙였다.

“물론, 내 착한 비서님은 바쁜 대표의 일정을 고려해서 일을 늘려 주지 않을 거라 믿어요.”

“아쉽게도 착한 비서는 회사의 이익과 발전에 더 관심이 많아서.”

조슈아는 누구보다 깍듯하게 묵례를 했다. 완벽한 비즈니스 미소를 띤 채 투표용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볼 수 없게 1번, 2번, 3번을 적었다. 선거처럼 반으로 두 번이나 접은 뒤에야 조슈아는 선거함 줄에 섰다. 제 앞앞에 선 피터가 선거함에 투표용지를 집어넣으며 우스갯소리처럼 투덜댔다.

“꼭 이렇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투표해야 돼? 우리 21세기잖아.”

“대통령 선거도 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하거든? 가장 보편적인 방법인데 뭘 그래.”

“맞아요. 박진감도 이게 더 좋고!”

재니퍼가 호응했다. 박진감이라, 어린 시절 학급 투표 이후로 이렇게 개표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조슈아도 조금 즐거웠다. 다행히도 직원들 대부분이 그런 모양이었다.

80명이 넘는 직원들이 다 투표를 마치고, 엘과 미카엘라는 커다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1번부터 10번까지의 후보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9번 조슈아 베넷. 그 와중에 제 이름이 쑥스러워서 조슈아가 헛기침을 했다. 그러는 사이 개표는 시작되었다.

미카엘라가 첫 투표용지를 연 순간부터 긴박감이 넘쳤다. 사이사이에서 가벼운 내기가 성행했다. 물론, 단독 1등 후보는 크리스 밀러였다. 하지만 마지막 개표 용지가 열리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1등은, 우리 막내 보니!”

우오오오! 보니한테 1등을 걸었던 인사팀장 엘이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피터가 갖고 있던 내기 돈을 낚아채며 흔들었다. 깜짝 놀란 보니가 허탈하게 웃는 사이 엘이 보니에게 윙크를 했다.

“보니! 우리 행운의 천사. 먹고 싶은 거 있어? 말만 해!”

엘의 텐션을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이 부수입에, 보니가 새로 찍을 브이로그에 기대하며 다시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손바닥을 세게 말아 쥐었다. 아까부터 계속 야릇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미카엘라를 보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분명 크리스가 저보다 두 표나 많은데. 모두의 시선이 엘에게 간 사이 개표를 한 미카엘라와 피터는 조슈아 베넷,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카엘라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2등이 우리….”

미카엘라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모두의 시선이 미카엘라에게 향했을 때, 미카엘라가 웃음기 짜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슈아!”

아. 하하하. 잘된 일인지 안된 일인지는 모르겠다. 저 앞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폐를 흔드는 크리스가 크게 외쳤다.

“오! 조슈아! 나 조슈아한테 걸었어요!”

“크리스, 3등이에요.”

마지막까지 완벽했다. 그 상태로 얼어붙은 크리스의 모습에 엘은 놓칠 수 없다는 듯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그 모습이 또 웃겨서 조슈아는 제 촬영도 잊고 그 분위기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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