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당신의 진심이 나의 다정에 기대어
봄이라 그런지 매장 내 옷들은 죄다 화사했다. 조슈아는 니트가 걸린 행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강렬한 빨강색부터 신비로운 보라색까지 무지갯빛도 모자라 찬연한 파스텔빛까지 다양한 니트들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조슈아의 시선에 걸리는 니트는 단연 하나였다.
가을 하늘처럼 맑은 하늘색 니트.
주저하는 듯 조슈아의 손이 느리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니트의 소매를 아주 조금 만졌다. 봄에 입기 좋게 얇은 실로 뜬 듯 톡톡한 촉감이 좋았다. 조슈아는 옷걸이를 행거에서 빼내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거 되게 잘 나가요. 저희 매장 베스트 아이템이거든요.”
제게 말한 건가 싶어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매장용 검은 티셔츠를 입은 갈색머리 점원이 바로 앞에 있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참 앳되었다. 조슈아는 웃으면서 점원의 말에 보조를 맞췄다.
“어쩐지, 되게 예쁘더라구요.”
“되게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 거울이라도 한번 보시는 건 어떠세요?”
참 수완이 좋은 점원이었다. 상냥하게 물어 오는 모습에 조슈아는 이끌리듯 거울 앞으로 갔다. 전신 거울에 비춰지는 제 모습이 조금 어색해서 흡, 하고 숨을 가만히 멈췄다. 그러다가 점원이 권하듯 내미는 하늘색 니트를 앞에 가져다 대보았다. 참, 예쁘다.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강렬한 제 머리카락 색깔과도 잘 어울렸다. 그제야 조슈아는 입매를 말아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어머, 조슈아의 웃음을 본 점원은 저도 모르게 그 미소를 따라 웃었다.
“얼굴도 되게 환해 보이고, 예쁜데요?”
입에서 나오는 칭찬은 덤이었다. 그 말에 조슈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아하는 색깔이거든요. 이런 하늘색.”
“네?”
자그마한 목소리에 점원이 되물었다. 조슈아는 살짝 웃었다.
“너무 예뻐서, 사야 할 것 같아요.”
점원이 환하게 웃으며 계산대를 안내했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고 결제를 마쳤다. 옷을 싸 준다는 말에 조슈아는 입고 갈 거라고 대답했다.
커튼으로 가려지는 탈의실 안에서 조슈아는 하늘색 니트를 입었다. 벽면에 붙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어색했다. 이런 하늘색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조슈아는 어정쩡하게 팔을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했고 괜히 옷태를 만져 보기도 했다. 그러다 제 이상한 행동들에 스스로 웃음을 터트렸다.
잘 어울린다. 스스로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다짐 같은 말을 되새겼다. 거울을 한 번 더 보다가 조슈아는 핸드폰을 열었다. 메모장에는 어젯밤 작성했던 리스트가 있었다.
1. 하늘색 니트 사기
2. 제일 단 타르트 먹기
3. 예고 없이…
1번 옆에 동그라미를 적어 넣은 뒤, 조슈아는 3번 할 일을 바라보았다. 차마 끝내지 못한 문장은 아직도 결정지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일단 타르트부터 먹으러 가야지. 2번까지 끝내다 보면 결심이라도 설 것 같았다. 조슈아는 탈의실을 나섰다.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커플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바깥에 내놓은 물건 탓에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나가며 물었다.
“어머, 비가 오나요?”
“아뇨. 오늘 비 온다는 뉴스가 있어서 예비용으로 가져왔어요. 뭐, 뉴스는 반대라지만 가져오면 마음은 놓이잖아요.”
그 말을 들으면서 조슈아는 상점 바깥으로 나섰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이 꾸물거렸다. 정말 비가 오려나. 조슈아는 요 근래 하나도 맞지 않던 기상 예보를 떠올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이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타르트 전문점이었다.
흰 접시 위에 놓인 타르트는 다크 초콜릿 타르트였다. 다크 체리도 두 개나 올라간 뒤 슈가 파우더까지 팍팍 뿌린, 보기만 해도 입에서 단내가 날 것처럼 달달한 타르트. 조슈아는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든 머그잔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타르트를 바라보았다. 따끈한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전달되는 사이, 문득 몇 주 전에 샀던 초콜릿 브라우니가 떠올랐다.
오래된 초콜릿 브라우니는 냉동실을 여닫을 때마다 조슈아의 눈을 잡아 두었다. 하지만 정작 그릇에 옮겨서 앞에 두었을 때는 한 입 먹는 것도 어려웠다. 그 한 입이 너무 달 거 같아서. 그게 무서워서 번번이 시도만 하다 결국 버렸다. 그 쓰레기통 앞에서 조슈아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조슈아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화사한 새 옷을 입고 달콤한 타르트를 앞에 둔 상태에서 계속 우울한 생각을 하는 건 싫었다. 그래서 얼른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기세와는 다르게 막상 타르트에는 닿지 않았다. 눈이 내린 듯 하얗게 흩뿌려진 슈가 타르트가 참 달 것 같아서. 반짝거리는 다크 체리가 참 예뻐서 건드리는 게 겁이 났다.
그러다 한순간이었다. 날카로운 포크가 뾰족한 타르트 끄트머리를 아주 조금 떼었다. 진한 고동색 초콜릿 타르트, 그 부스러기 같은 것을 입 안으로 넣었다. 갈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한참 만에 조슈아가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달다.”
달았다. 저절로 몸서리를 칠만큼 지독히도 단맛이었다. 여운이 사라지지 않아서 조슈아는 포크로 아주 조금 더 잘라서 한 입 먹었다.
여전히 달았다. 한 입, 또 한 입. 느릿하던 포크가 조금씩 빠르게 타르트를 잘랐다. 망설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조슈아는 가만히 타르트를 먹었다. 그 단맛에 목이 막히면서도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는 않았다. 이 단맛이 사실은 너무 반가워서 조슈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사이에 달짝지근한 초콜릿 부분은 다 먹었다. 끄트머리 바삭한 타르트 과자들을 먹기 좋게 조각내면서 조슈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과자만 다 먹는다면, 리스트의 2번을 달성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대박! 미친!”
깜짝 놀란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옆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금발 여학생이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에 가벼운 묵례를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밀짚 머리의 포니테일 여학생이 작게 죄송합니다, 말했다. 주변의 시선이 다 가신 뒤에야 금발 여학생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조금 전의 여파 탓인가, 아니면 테이블이 가까이 붙은 탓인가 그 목소리가 조슈아에게 꽂히듯 잘 들렸다.
“미쳤나 봐. 여기 전세 냈냐?”
“아니, 너무 놀라서. 미안.”
“뭔데 그렇게 놀라냐?”
“너도 놀라지 마. 맥카디 감독, 다시 영화 촬영 재개한대!”
“아! 무슨 영화였지? 분명히 알았는데!!”
“<어제의 당신에게>.”
심장이 턱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아주 운이 좋은 개자식이다. 그게 아니라면 제가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누군가 귀에 속삭이듯 그를 떠올리는 대화를 하고 있을까. 조슈아는 가만히 조각낸 과자를 먹었다. 무엇을 씹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에서 조슈아는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예고 없이 찾아가기
문장이 완성되었다. 그러는 사이 옆 테이블에서는 생각이 난 게 반가운 듯 환한 목소리가 오갔다.
“파비엘! 내 남편이야.”
“웃기시네. 실제로 파비엘 같은 남편 만나면 그날로 <와이 우먼 킬> 찍는 거거든?”
타이밍 좋게 잘 일어났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아저씨가 웃는다면 더 이상한 시선을 받았을 거다. 조슈아는 그릇을 반납한 뒤 입구로 나갔다. 거의 마시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보고 점원이 갸우뚱하다 개수대에 버렸다.
어느새 바깥은 저물고 있었다. 조슈아는 걸음을 내딛다가 멈춰 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힘차게 디딘 것과 달리 다시 가게 앞으로 돌아왔다. 분명 달콤한 것을 잔뜩 먹었는데 기분이 형편없이 가라앉았다.
이건 참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다시 걸었다. 유일하게 아는 곳은 이전에 빌 스웰딘이 사진까지 찍어서 보내 준, 그렌트사였다.
조슈아가 간과한 게 두 가지였다.
첫째. 오늘은 휴일이다. 그러므로 그렌트사에는 주말을 반납한 채 일에 매진하는 직원 몇몇과 당직 근무자들밖에 출근하지 않았다. 둘째. 제 옷차림은 누가 보더라도 직장인보다는 휴일을 즐기는 행인1 같아 보인다. 그러므로 결론. 이렇게 찾아왔어도 저는 그렌트사에 입장조차 불가하다.
잔뜩 긴장한 채로 온 게 무색해졌다. 어둑하고 잔뜩 구름 낀 하늘에 우산까지 사 왔는데. 조슈아는 조금 허탈해진 심정으로 높다란 본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건물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건물이었다. 시야가 아득해져서 조슈아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몇몇 직원들이 회전문을 통과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본사 건물과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서 조슈아는 가만히 생각했다. 제가 아는 집은 전 스튜디오 508호, 회사는 이곳. 그리고, 그리고.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발이 까딱였다.
“미스터 베넷?”
확신 없는 듯 주저하는 목소리가 조슈아를 불렀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조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옅게 웃었다.
“미스터….”
“마크 웹디즈드입니다. 미스터 그렌트를 모시고 있는.”
“아, 반가워요. 미스터 웹디즈드.”
마크는 뒤에 있는 직원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는지 손에는 커다란 테이크아웃 잔들이 들려 있었다. 조슈아를 향한 호기심 어린 눈빛도 잠시, 직원들이 가벼운 묵례와 함께 다시 본사 건물 안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싫은지 발걸음들이 느렸다.
조슈아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마크를 바라보았다. 보육원에서나 넥스트 유어에서나 얼굴은 제법 보았는데, 이렇게 마주서서 통성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은 정말 무슨 날이라도 한 걸까. 그러는 새 다시 마크가 조슈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휴일인데도 출근하셨나 보네요.”
“일이 덜 끝나서요. 그러는 미스터 베넷께서는 여긴 어쩐 일로.”
“미스터 그렌트를 보러 왔는데.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마크 웹디즈드가 대답 없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더 이야기를 해 주길 원하는 눈빛이었지만 조슈아는 모르는 척 대답을 기다렸다.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듯 마크가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조슈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는 얼른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선명하게 들려오는 연결음 소리에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우산 손잡이를 꽉 잡았다. 하지만 연결음 너머로 목소리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마크는 끈기 있게 세 번이나 더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죄송합니다만….”
“알아요. 못 알려 주시는 입장인 거.”
누군가의 말을 자르는 건 조슈아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것만큼 조슈아 베넷답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없었다. 우산 손잡이를 잡은 손이 새하얗게 질렸다.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눈과 마주하고 조슈아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유롭고 당당한 미소. 표정을 숨기고 속내를 숨기는 거라면 조슈아 베넷도 자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불공평하죠. 미스터 그렌트뿐만 아니라 미스터 웹디즈드도 내 회사, 내 집, 심지어는 내가 자주 가는 식당까지 다 알고 있는데.”
혹시나, 하고 던진 말이었는데, 마크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쓴웃음을 삼키고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아니잖아요.”
사라져도 찾아갈 수조차 없었다. 누군지도 정말 어쩌다 알았다. 증권 회사에 다니는 다정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아니라는 것도.
그렌트사의 총수인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너무 멀었다. 이렇게까지 찾아왔는데도 보지 못한다는 건 정말.
“미스터 베넷. 미스터 그렌트는 지금 507호에 계십니다. 전에 사시던 스튜디오라는 부연 설명 없이도 아시겠지만요.”
조슈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마크가 무감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회사는 이곳 그렌트사의 회장실이고, 미스터께서 오신다면 언제든 올라가실 수 있도록 조치 취해 놓겠습니다. 자택의 경우는 직접 들으시는 편이 더 좋을 듯싶습니다. 자주 들리는 레스토랑이나 브랜드가 궁금하시다면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물론 몇 가지는 미스터 베넷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마크는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 홀더를 꺼냈다. 그리고 명함을 조슈아에게 내밀었다. 명함조차 저 남자를 닮았다. 흰색 배경에 이름과 핸드폰 번호, 메일만 적혀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안 알려 줄 줄 알았는데요.”
조슈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마크가 아주 조금 웃었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그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동종 직군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보스가 원하시는 게 곧 저희가 원하는 거라서요.”
참 비서의 철칙 같은 남자다. 심지어 에밀리랑 명함 홀더도 같다니. 조슈아는 가만히 명함을 내려다보다 다시 마크를 바라보았다.
“고맙다고는 안 할 거예요.”
“별말씀을.”
“그럼.”
갈 곳을 되찾는 걸음이 빨라졌다. 보폭이 넓어지고, 조슈아는 갓길에 선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택시 한 대가 조슈아의 앞에 섰다. 조슈아는 다급하게 말했다.
“42 애비뉴로 가 주세요!”
마크는 끝까지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택시를 잡던 조슈아가 택시를 타기까지,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색 니트와 그보다 더 강렬한 빨강머리.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곧은 시선까지.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후에야 걸음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간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마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말서가 될지, 성과급이 될지는 명확한 일이었다.
* * *
바닥의 한기는 끊임없이 올라왔다. 바깥은 봄인데 이 낡은 스튜디오 안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불조차 켜지 않은 컴컴한 507호 안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운 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멍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우울한 얼굴에 묘한 분위기를 드리웠다.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이 울렸지만 에이드리언은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마크한테 주말 내에는 연락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는데. 에이드리언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핸드폰은 제법 길게 울렸다. 우웅- 진동이 계속되자 제 몸까지 울리는 것 같은 불쾌감이 들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누운 그 상태 그대로였다. 결국 전화는 끊어졌다.
지금이 몇 시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창문 너머도 어둑했다. 아마 저녁일지도 모른다. 늦은 새벽에 이곳으로 퇴근한 직후 계속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마시지 않았다. 이렇게 주말을 가만히 보내는 게 이상했다.
언제나 무언가를 했다. 일을 했고, 결재를 검토했고, 조슈아를 찾아갔다.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루 깎지 않은 턱수염이 까칠하게 올라왔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정말로 제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돌이켜 보고 싶어도 이 현실은 바뀌는 게 없었다. 감히 제가 바꿀 수 있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라서. 에이드리언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깨문 탓에 이제는 딱지가 얹을 시간도 없었다.
그때였다. 현관벨 소리가 들렸다. 벨소리는 이 텅 빈 집을 한 바퀴 휘감고 사라졌다. 올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 누군가 잘못 누른 게 분명했다. 에이드리언은 대답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문 열어요.”
에이드리언의 눈이 커다래졌다. 부르튼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형편없는 방음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조슈아의 것이었다.
다시는 올 일이 없는 줄 알았다.
택시에서 내려 스튜디오 앞까지 걸어오면서, 조슈아는 조금 이상한 기분으로 스튜디오를 바라보았다. 3년을 넘게 살았던 곳이다. 대학 기숙사를 제외하고 제가 혼자 힘으로 꾸린 보금자리였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곳이기도 했고.
조슈아는 흡,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잠시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공기가 들어온 듯 짧은 통증이 끝나기 무섭게 머릿속이 맑아졌다. 조금 단단해진 눈으로 조슈아는 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공동현관에는 카드키도, 경비원도 없다. 지금 사는 스튜디오처럼 카드키를 찍어야 했다면 조슈아는 누군가 들어가길 계속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어두운 노란색의 전등이 공동현관을 비추고 있었다. 조슈아는 힐끗 조명을 바라보았다. 어둑하다 했더니 전등 커버에 먼지처럼 죽은 벌레들이 잔뜩 고여 있었다.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조슈아의 뒤로 들어온 남자는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조슈아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남자는 2층으로 들어갔다.
이 스튜디오는 변한 게 없었다. 계단의 틈새에는 먼지가 끼어 있고, 난간 손잡이는 이상한 얼룩이 묻어 있었고, 층계 방화문 틈에는 사람들이 발로 쓱쓱 밀어 둔 쓰레기와 낙엽이 끼어 있었다. 기억 속 스튜디오의 모습과 너무 같아서, 조슈아는 조금 웃다가 멈칫했다.
이 스튜디오는 변했다. 조슈아의 마지막 기억 속 이 스튜디오는 깨끗했다. 윤이 나던 바닥이, 반짝이는 창문이, 벌레가 없이 말끔하던 전등 커버의 오목한 부분이. 다시 처음 그대로, 엉망인 상태로 돌아간 거다.
그가 이사 오기 전으로.
조슈아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5층짜리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갔다. 그리고 마주한 곳은 싸구려 노란색 조명이 비추는 얼룩덜룩한 5층 복도였다. 창문을 열어 두어도 고여 있는 듯 남은 쿰쿰한 냄새가 슬며시 풍기는 이곳.
조슈아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며 벽을 바라보았다. 저 벽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우연임을 가장하여 저를 기다리던 남자는 지금 제가 살던 507호에 있다. 507호 팻말이 붙은 현관문 앞에 선 채, 조슈아는 벨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슈아는 말했다.
“문 열어요.”
나직한 목소리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허겁지겁 나오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기름칠이 필요한 듯 끼익-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조…슈아?”
쇳소리처럼 건조한 목소리였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저 맹한 표정이 이 남자의 진심이라고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진심으로 놀랐을지, 아니면 핸드폰이라도 들여다보고 제가 올 것을 알았을지는 그밖에 모를 일이었다. 조슈아는 남자 너머로 어두운 방을 바라보았다. 노란 조명 아래 환하게 서 있는 조슈아와 달리 남자가 있는 곳은 빛 한 점 없었다.
조슈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부딪힌 어깨에 에이드리언은 맥없이 밀려났다. 아랑곳 않고 조슈아는 스위치를 눌렀다. 컴컴한 곳이지만 이곳의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는 조슈아가 제일 잘 알았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려는 듯 탁탁 소리와 함께 방이 환해졌다. 에이드리언은 눈이 부신 듯 손바닥으로 천장 빛을 가렸다. 그러다 힘없이 손을 내렸다.
“진…짜…예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에이드리언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지만 소용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너무 그리운 나머지 환상이라도 보는 걸까. 에이드리언은 제 뺨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 얼얼했다. 현실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제가 선물했던 하늘색 니트와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조슈아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걸음. 그 자리에 선 에이드리언은 얼빠진 얼굴이었다. 까칠하게 올라온 얼굴이며 턱 부근에 뾰족뾰족한 수염기마저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조슈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요?”
“…….”
“갑자기 막 찾아오니까. 어떠냐고.”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수그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슈아는 벽에 등을 기댔다. 등을 타고 한기가 섬뜩하게 올라왔다. 봄날 같은 바깥과 달리 507호는 아직도 겨울이었다.
“무섭나요? 아니면 놀랐나?”
조슈아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이사한 제 스튜디오로 찾아온 그날, 제 표정이 저랬을까? 여긴 어떻게 알았을지 놀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려웠고, 화가 났다.
그러니까 저런 표정은 아니었을 거다. 저렇게 무너진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지는 않았을 거다.
조슈아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내 스튜디오, 내 회사 다 알잖아요. 하다못해 내가 즐겨 찾는 곳도 다 아는데.”
“…….”
“나는 아는 게 없더라구요.”
에이드리언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제대로 숨은 쉬고 있을까 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버석하게 마른 눈가가 붉게 번졌다. 그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조슈아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건 참, 불공평하잖아요. 아, 물론 그쪽 말고 나한테.”
이제 이사 갈 일도 없고 직장을 옮기고 싶지도 않다. 넥스트 유어는 제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해 줬고, 같이 가고 싶은 회사였다. 그래서 참 불공평했다. 에투왈에서 쭉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줄 알았는데. 정작 조슈아가 그만두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 저 남자는 아무런 패도 까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룰에 어긋났다.
“당신 집, 당신 회사, 당신이 즐겨 찾는 곳. 하다못해 당신이 나한테 말해 준 것들조차 다 거짓일 텐데.”
508호, 에투왈 근처의 증권 회사, 클럽 샌드위치가 맛있는 카페. 조슈아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다 거짓이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집, 회사, 즐겨 찾는 곳. 근사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던 그 모든 것들이 거짓이다. 그러다 조슈아는 퍽 우스운 이야기를 떠올린 것처럼 웃었다.
“하긴. 사랑도 달콤하게 거짓으로 속삭일 줄 아는 사람이 무엇은 진실로 이야기하겠어요.”
상냥한 목소리가 에이드리언의 머리 위에서 비수처럼 떨어졌다. 입술을 깨물다 못해 입 안쪽 살까지 깨물어 보았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제 심장을 손아귀에 넣고 꽉 움켜쥐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눈앞이 새까맣게 번져서 에이드리언은 제 넥타이를 풀려고 애썼다. 하지만 서툰 손길은 번번이 미끄러졌다. 넥타이는 풀리지 않고 도리어 숨통을 조였다.
조슈아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조슈아는 사랑한다 했던 제 말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사랑해요.”
“……그래서 말했나요? 로건한테?”
기억 속 목소리가 아득하게 떨어졌다.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쩌면 정말로 영원히. 조슈아는 믿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하다못해 제가 하는 모든 말들을 다 의심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만든 게 바로 저였다.
발밑이 꺼지는 것처럼 아찔해졌다. 아주 조금, 에이드리언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그러다가 가만히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천천히 빛이 도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혀끝으로 짠 울음이 왈칵 올라와서 입술을 꽉 다물었다. 조슈아가 불쌍한 척하지 말라고 했는데.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가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조슈아는 물끄러미 에이드리언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제 기분조차 종잡을 수가 없었다. 더, 더, 더. 한없이 무너졌으면 좋겠는데. 제가 원하는 선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이드리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고 방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바닥에 어지럽게 놓인 앨범과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눈에 박혔다. 앨범 커버가 어쩐지 익숙했다. 보육원 기념 사진첩이었다.
조슈아는 쪼그려 앉은 채 잠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한 해에도 수십 장씩 기부 감사 사진을 찍어 댔다. 그 기부 명단 사이에는 그렌트사가 있었고. 감흥 없이 사진을 넘기던 조슈아가 한 사진에 긴 시선을 주었다. 보육원에 오고 난 이후, 유일하게 제가 빠졌던 사진이었다. 우습게도 그 사진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있었다. 예쁜 얼굴이 똑같아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제가 딱 한 번 빠졌을 때 왔을까. 조슈아의 입매 끝으로 나직한 비웃음이 걸렸다. 그것마저도 참 운명 같았다. 이 남자는 절대 아니었다는 운명 같은 거. 그래서 다 버렸었다. 저런 검은색 쓰레기봉투에 물건을 욱여넣었다. 캐러멜색 니트와 하늘색 니트, 의사 가운을 입은 토끼 인형과 초록색 레몬 사탕을.
그냥 아니었던 거다. 저 남자가 선물한 것들이 저를 향한 게 아니고 저 남자 또한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제 세계에 들어올 유일한 사람이 아니고. 제 자신에게 주문을 걸 듯 조슈아는 계속해서 똑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검은색 쓰레기봉투에 눈에 띄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쓰레기장이 떠올랐다. 수거도 하지 않고 꽉 찬 쓰레기장 속 동그라니 빈 공간, 꼭 제가 쓰레기를 버렸던 위치만 비어 있는 것 같던 착각.
더 생각을 할 것도 없이 조슈아가 손을 뻗었다. 성급한 손길이 쓰레기봉투의 매듭을 풀었다. 꽁꽁 잠긴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툭 찢어졌다. 시끄러운 소리에 에이드리언이 손을 내리던 찰나였다. 커다랗고 튼튼한 미색 종이박스가 떨어지면서 봉투 안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캐러멜색 니트, 제가 입은 것과 비슷한 하늘색 니트, 꼭꼭 포장해 두었던 초록색 레몬 사탕들과 쿠키 틴 케이스. 조슈아는 가만히 종이박스를 툭 건드렸다. 떨어지면서 뒤집힌 상자 안에는 눈에 익은 물건들이 가득했다. 색색이 예쁜 구슬들과 겉장이 다 뜯어질 만큼 해진 책들, 포장된 예쁜 장식품과 그 아래로 삐죽 나온 플라스틱 고질라 장난감.
‘미련덩어리’였다.
오싹하게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눈물 자국이 선연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에이드리언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녹갈색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 가련한 표정을 보자 반사적으로 조슈아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더 상처 주고 싶다.
제가 받았던 것보다. 훨씬 더.
그래서 에이드리언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버렸던 거, 맞네.”
아, 소름 끼쳐.
녹갈색 눈동자가 다시 한번 새까맣게 죽어 갔다. 어디에선가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제게서 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조슈아는 아주 단단히 주먹을 쥐고 있으니. 그러니까, 이 소리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계속해서 차곡차곡, 바닥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무저갱으로.
비닐이 찢어지고 물건들이 떨어지는 순간, 에이드리언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뻔한 변명이라도 늘어놓고 싶었다. 절대로 당신을 무섭게 하려고 버린 물건을 가져온 건 아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조슈아가 저를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조슈아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버렸던 거, 맞네.”
아 소름 끼쳐.
귀가 먹먹해졌다. 다리의 힘이 풀려서 에이드리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분명 딱딱한 바닥에 퍽 넘어진 건데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차가운지도 구분 지을 수조차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알았다. 조슈아가 한 말은 저에게 향한 것이다. 그걸 깨닫자마자 어디에선가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에이드리언은 자꾸만 떨어졌다. 끝이 없는 추락에 에이드리언은 습관처럼 입술만 깨물었다. 당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조슈아는 아주 오랜만에 제 ‘미련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수없이 쌓아 두었던 미련들을 쓰레기 버릴 때 함께 버려서인지 별 감흥이 없었다. 아, 하나. 저 플라스틱 고질라 장난감. 조슈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 있네. 햄버거집 장난감.”
조슈아는 손을 뻗어 고질라 장난감을 들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장난감은 멀쩡했다. 몇 개월 동안 쓰레기봉투 안에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조슈아는 장난스레 장난감을 흔들었다.
“그쪽이 모으고 싶다고 했던 거잖아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쪽 그냥 줄걸, 아쉬웠는데. 주인 잘 찾아갔네.”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에이드리언은 주저앉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조슈아는 비밀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나한테는 되게 재수 없는 물건이라서 안 주고 보여 준다고만 했던 거거든. 햄버거 먹고 장난감 가져오던 그날, 사고 날 뻔했으니까.”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까맣게 죽은 눈동자가 초점도 못 잡고 조슈아를 올려다보았다.
“사거리였는데, 아마 조금만 더 빨리 걸어갔으면 나도 같이 사고가 났을지도 몰라. 정말 발 앞에서 사고가 났거든.”
조슈아의 말끝이 흐렸다. 여기저기에서 비명 소리가 나고, 911을 외치고,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광경은 지금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생생했다. 분명 그때 차 가까이로 갔는데, 차량 내부를 봤던 기억도 있는데 그때부터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육원에 돌아갔는지도 흐릿할 정도였다. 이 고질라 장난감만이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동안 악몽을 꾸었지. 그래서 사진도 못 찍고 앓아누웠는데, 하필 그때 그쪽이 왔었네. 내가 유일하게 없던 사진에.”
그 순간 에이드리언의 눈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사진첩을 바라보던 조슈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입꼬리로 웃음을 빼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따지면 정말 신호가 많았는데 몰랐다. 정말 아니라는 걸 이렇게 깨닫게 될 줄은 몰랐는데.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의 발치에 고질라 장난감을 툭 던졌다. 튼튼한 장난감은 한 군데도 부서지거나 깨지지 않았다.
“기왕 가져간 거. 당신한테 내 악몽도 모두 옮겨 갔으면 좋겠다.”
교통사고에 대한 악몽도, 에이드리언 그렌트에 대한 악몽도 모두 다. 여상하게 중얼거리던 조슈아가 잠시 멈칫했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싹 말라 죽을 것처럼 굴던 녹갈색 눈동자가 이상하게 번쩍였다. 그림자가 드리운 가련한 얼굴은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그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려서 조슈아는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머물렀다.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빠졌다. 옛 이야기, 특히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때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렇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제 실수였다. 말이 너무 길었다. 이제는 가야 할 타이밍이었다. 조슈아가 천천히 현관문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그, 사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슈아의 발걸음을 잡았다. 텁텁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에이드리언이 말을 이었다.
“그 사고, 어디에서 났었어요?”
“그게 중요한가?”
조슈아가 에이드리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후회했다. 저 표정을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참 이상한 표정이다. 후회라기보다는 간절함 쪽으로 기울어진 얼굴. 그래서 조슈아는 아주 작게 대답했다.
“웨스트 32번 스트리트.”
그 말을 끝으로 조슈아는 현관문을 나섰다. 쾅- 문을 세차게 닫고서 조슈아는 507호 팻말에 아주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망치듯 이 방을 빠져나갔을 때와 달랐다. 지금 조슈아 베넷, 저는 승자였다. 아주 짧은 울렁거림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는 승자. 조슈아는 도도하게 턱끝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돌아볼 것만 같아서, 조슈아는 앞만 바라보았다.
바닥을 짚고 있던 에이드리언의 팔이 덜덜 떨렸다. 12년 전, 웨스트 32번 스트리트. 우연에 우연이 맞물렸다. 단지 그뿐일 거다. 이건 그 우연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일 뿐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제 발치에 던져진 고질라 장난감에 손을 뻗었다. 플라스틱 재질의 이 장난감은 유난히 낯이 익었다. 안개처럼 뿌옇기만 하던 제 사고 기억 속에는 흐릿하게 번진 빨간 머리만 보였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 속에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서, 에이드리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전에 퍼지는 것처럼 컸다.
아닐 것이다. 그 빨간 머리가 조슈아는 아닐 것이다. 그냥 로건일 거다. 로건은 아무것도 기억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로건이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정말 무슨 짓을 한 걸까.
“괜찮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로건 목소리라고 생각한 목소리가 이지러졌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생각만으로도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이 막혔다.
초점 없는 눈으로 에이드리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핸드폰을 찾았다. 바닥에 놓인 핸드폰을 들고 에이드리언은 마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바로 전화 너머에서 마크가 전화를 받았다.
- 예, 보스.
“……12년 전, 내가 사고 났을 때 영상을 찾아요. 찾을 수 있는 한 전부 다.”
그 말을 끝으로 에이드리언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왼쪽 골반 아래를 쓸어내렸다.
아니어야 한다. 아니어야 한다.
제발.
아니어야 한다.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일어날 리 없다.
에이드리언은 주문처럼 되뇌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데. 불안은 맥박을 타고 점점 커졌다.
어디까지 무너지면 괜찮을까. 여기가 바닥인 줄 알았는데, 제 죄는 계속 깊어져서. 쿵, 쿵, 쿵. 에이드리언은 눈을 감았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게리 그로운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피프티 스트리트로 들어가는 페라리 한 대를 노려보았다. 선팅이 잘 된 차였지만, 저 차 안에 누가 있는지 게리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택이며 직장이며 다 아는데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접근 금지 신청 때문만이 아니었다. 페라리 뒤를 따라붙는 저 가드 새끼들 때문이었다.
“좆 같은 새끼. 겁쟁이 새끼. 가드들이나 세우는 마마보이 같으니라고.”
옆을 지나가던 여자가 게리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게리를 쳐다보았다. 아차. 게리는 선량하게 웃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여자는 갸우뚱하다가 이내 다시 스쳐 지나갔다. 게리의 눈매가 날카롭게 여자를 노려보았다. 퉤, 오지랖 넓은 여자 같으니라고.
게리는 옆에 있는 상점의 통유리 창을 통해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검은색 슬랙스에 하늘색 셔츠를 입은 차림이 말끔했다. 제 머그샷과는 정반대였다.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는 못할 일이었다. 혹시나 몰라 안경을 쓰고 옅은 금발을 진한 밤색으로 염색까지 했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었다.
빌 스웰딘, 그 좆 같은 새끼. 시니컬한 비웃음이 걸린 그 엿 같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새끼 때문이다. 그 새끼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 부모님의 애정, 친구들의 믿음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 그웬.
4년 전, 게리는 빌 스웰딘 테러 사건으로 징역을 선고받았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그웬을 돌려 달라 이야기하려고 간 거였다.
그웬은 참 좋은 여자 친구였다. 밥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섹스도 잘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 허술한 빈틈을 채워 주는 게 제 역할이었다. 그러면 그웬은 제 말을 잘 듣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웬이 달라졌다. 건방지게 말대꾸도 했고, 은근한 추파에도 겨우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잠자리를 회피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에게 웃어 주고 공부한다는 핑계로 연락도 잘 안 되었다. 심지어 빌 스웰딘의 팬이 되었다며 그의 사인회에도 참여한다고 했다. 그러다 감히 헤어지자는 말까지 꺼냈다.
그웬이 그럴 수는 없었다. 분명 누군가 그웬을 살살 꼬드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게리가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조금 강압적으로 굴어도 그웬은 그런 게 아니라고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오히려 접근 금지까지 신청했다.
게리는 빠르게 그웬의 관심사를 역추적했다. 하지만 건성으로 들은 터에 기억나는 건 빌 스웰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건 다 빌 스웰딘 탓이었다.
이야기를 하려는데 가드들로부터 저지를 당했다. 심지어 팔까지 꺾였다. 몸부림을 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칼이 떨어졌다. 그 이유만으로 저는 전 세계에 빌 스웰딘을 테러하려 했던 남자로 낙인이 찍혔다.
이건 불공평했다. 이건 자본주의의 횡포였고 돈 많은 새끼들의 억지였다. 자신은 그 틈에서 희생당한 거다. 가진 거 없고 힘없는 소시민이라서. 누구는 사람을 죽이고도 잘만 풀려 나오는데, 자기는 겨우 칼을 소지하고 빌 스웰딘 같은 톱스타를 보러 왔다는 이유만으로 4년을 구형 받았다.
빌 스웰딘 정도의 사회 지도층이면 선처를 해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저 개 같은 새끼는 그러는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그 반응에 매스컴은 더 날뛰었다. 테러범은 절대로 선처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캠페인도 열렸다. 변호사를 구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이가 으득 갈렸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교도소에서 배웠던 심호흡 방법을 떠올렸다. 숨을 마셨다가 천천히 내쉬고, 또다시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그러다 보니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성은 그 언제보다 또렷했다.
복수. 죽고 싶었던 교도소 생활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게리를 살린 건 바로 빌 스웰딘이었다. 교도관 몰래 빌 스웰딘의 화보 사진을 구해서 산책 시간에 주운 돌조각으로 그 얼굴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면서 죽을 각오를 버렸다.
그런데 정작 나왔는데 그 새끼 근처에도 가지 못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엄연히 자신이 피해자인데. 가해자한테 다가가지도 못하다니. 게리는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잭나이프가 반으로 접힌 채 있었다.
오늘도 낭패다. 게리는 힘없이 돌아섰다. 하루 종일 차를 따라다니느라 제대로 끼니도 못 챙겼다. 가까운 카페 안으로 들어가서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데 옆 테이블 커플이 거슬렸다. 이런 공공장소에서 저렇게 가까이 붙어서 핸드폰 하나를 들여다보는 꼴이라니. 게리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핸드폰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내 게리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저 화면 속 새빨간 머리카락이 낯익었다. 게리는 허겁지겁 제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 폴더 안에는 그날을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한꺼번에 후루룩 사진들을 보던 게리가 어느 한 사진을 터치했다.
맞다. 빌 스웰딘의 비서.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제가 잡혀갈 때 근처에 있었다. 어쩌면 제 팔을 꺾은 새끼가 이 새끼일 수도 있다. 가능성이 90%, 아니 100%였다.
“저기, 그거.”
흥분 탓인지 게리의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핸드폰을 보던 커플이 고개를 갸웃하며 게리를 쳐다보았다. 게리는 애써 상냥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가리켰다.
“그, 영상. 뭐예요? 재밌어 보여서요.”
아. 여자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거 넥스트 유어 브이로그인데. 재밌어요.”
넥스트 유어. 게리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면서 입 속으로 넥스트 유어를 중얼거렸다. 이내 핸드폰을 열고 유튜브에 검색을 했을 때, 바로 나왔다.
조슈아 베넷. 빨간 머리. 제가 복수해야 할 대상.
게리의 눈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 * *
“라이브 방송요?”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데우면서 조슈아는 엘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응. 유튜브에 보면 있잖아요. 왜, 실시간으로 방송하면서 소통하는 거. 그런 것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해서.”
엘은 말을 하면서도 계속 조슈아의 반응을 살폈다. 확신이 없는 듯 주저하는 티가 가득했다. 그러다 엘이 씩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별로죠? 사실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난 좋은 거 같은데.”
“응?”
“재밌을 거 같은데. 엘은 별로예요?”
예상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엘이 벙한 얼굴을 했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티스푼으로 코코아 가루를 푹 펐다. 두 스푼이나 머그컵에 넣자 마침 전자레인지가 띵- 소리와 함께 작동을 멈추었다. 얼추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를 머그컵에 넣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진한 코코아색이 우유와 섞이면서 머그컵 안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달콤한 냄새가 탕비실을 휘감았다.
아, 조슈아가 빠뜨렸다는 듯 다시 엘을 돌아보았다.
“마시멜로 넣어 줄까요?”
“…두 개요.”
얼떨떨한 얼굴을 하면서도 마시멜로에서는 확고했다. 조슈아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면서 마시멜로가 든 유리통을 집었다. 집게로 마시멜로를 두 개 넣자 진한 코코아 위로 흰색 마시멜로가 동동 떠올랐다. 완성이었다. 조슈아가 머그컵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엘은 물끄러미 컵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코코아를 마셨다. 조슈아는 코코아를 한 잔 더 타기 시작했다. 코코아 가루 두 스푼과 데운 우유와 마시멜로 세 개.
“달다.”
엘이 기분 좋다는 듯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슈아는 그 표정을 힐끔 보았다. 엘은 주말 내내 출근했다. 1층을 지키는 수위 아저씨한테 귀띔으로 들었다. 그 정보가 없었더라도 오늘 엘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엘이 주말간 얼마나 속이 썩었는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한 얼굴은 고민으로 잔뜩 까칠해져 있었다.
“조슈아. 있잖아요. 잘되니까 겁난다는 말 알아요?”
조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엘 역시 대답을 바란 말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잘되니까 겁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요. 친구들이 그런 말 할 때면 ‘이 자식, 자랑이냐?’ 막 이러는 편이었는데. 요즘 내가 겪어 보니까 이게 아주 속 타는 거더라구요.”
엘이 괜히 씩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한번 축 처진 어깨가 금방 올라올 것 같지는 않았다.
“NS랑 협업할 때도, 유튜브 하자고 할 때도 사실 ‘잘하자, 잘해야지!’ 이런 생각만 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엘의 말끝이 조금 흐려졌다. 그리고 조슈아는 엘의 말 뒤로 이어질 말이 뭔지 알았다. 정말이지 생각보다 너무.
“너무 잘되고 있잖아요. 에투왈 덕분에.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데 정말, 내가 잘 젓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아이템이 더 먹힐지도 확신이 안 서고. 구독자 줄 것도 걱정되고. 솔직히 넥스트 유어는 이 프로젝트 아니라도 잘나갈 일이 많은데. 괜히 나만 이렇게 별거 아닌 거 가지고 고민하나, 이런 생각도 들고.”
되게 배부른 고민 같다고, 엘이 덧붙였다. 하지만 그 고민이 결코 배부른 게 아니라는 건 조슈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슈아가 씩 웃었다. 엘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는 사이 조슈아가 새로 만든 코코아 잔을 들고 엘의 잔에 쨘- 소리 나게 부딪혔다.
“아까 한 이야기는 진심이에요. 라이브 재밌을 거 같다는 거. 나도 유튜브에서 라이브 스트리밍 자주 보거든요.”
“정말요?”
“네. ASMR도 보고 가끔 영화 소개도 보고.”
엘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런 코코아 한 잔, 또는 맥주 한 잔이었다. 나머지는 엘에게 달린 일이었다.
코코아가 식어 가는 사이 엘의 얼굴에는 다부진 결심이 어렸다. 엘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각오가 선 듯 단단한 얼굴이었다.
“그냥 걸어 봐야겠어요. 나는 못 믿어도 우리 넥스트 유어의 저력은 믿어야죠.”
“어? 나는 엘 믿고 왔는데. 엘이 스스로를 못 믿으면 어떻게 하죠?”
능청스러운 조슈아의 대답에 엘이 윽, 하며 탕비실 싱크대 위에 머그컵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제 심장 부근을 꾹 누르곤 과장되게 휘청이며 벽에 기대었다. 스르르 감은 눈을 천천히 뜨면서 엘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조슈아. 내가 사랑한다고 이야기한 적 있던가요?”
“아쉽지만, 엘. 늦었어요. 이미 아침에 커피 한 잔에 보니와 마리아에게 구혼까지 받았거든요.”
“역시. 보니랑 마리아. 젊은 피가 빠르네요.”
“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젊은 피 아니에요?”
조슈아가 피식 웃으면서 말을 맞췄다. 그리고 제 잔을 들어 올렸다. 달다. 참 달아서 조슈아는 천천히 코코아를 마셨다. 몸을 일으키던 엘이 의아한 듯 ‘어?’ 하더니 중얼거렸다.
“그거 코코아 아니에요? 조슈아 단거 안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다시 먹어 보니까 이 좋은 걸 왜 안 먹었나 싶더라구요.”
조슈아가 연하게 웃었다. 혀끝에 남은 지독한 단맛이 자꾸만 당겼다.
정말 점심 안 먹을 거냐는 크리스와 엘을 간신히 보내고 나서야 조슈아는 비서실에 딸린 제 탕비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잠그고 조슈아는 가만히 소파에 앉았다. 금세 나른하게 몸이 가라앉았다. 눈을 감은 상태로 조슈아는 소파에 몸을 파묻듯 기대었다.
토요일 그날, 그렇게 멋있게 507호를 나오고 정작 집에 와서는 잠을 설쳤다. 악몽을 주고 싶었는데 도리어 제가 꾸었다. 아니, 악몽은 아닌가. 조슈아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나왔으니 악몽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꿈속에서 에이드리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천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충격을 받은 유리처럼 어느 순간 전체가 깨져 버려도 그는 가만히 있었다. 바로 앞에 제가 있는데 에이드리언은 손도 뻗지 않고 무너지는 바닥에 같이 가라앉았다. 507호에서 보았던 창백한 얼굴은 계속해서 조슈아를 응시했다.
그 꿈에서 에이드리언은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헛헛하게 빈 가슴이 이상하게 울렁거려서 조슈아는 잠자리를 뒤척였다. 어젯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슈아는 가만히 눈을 떴다. 새까맣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지고 초점이 또릿해졌다. 시선 끝에는 아까 엘과 사용했던 머그컵 두 개가 말끔히 닦여 있었다. 조슈아는 입술 끝을 아주 조금 말아 올렸다.
“조슈아. 있잖아요. 잘되니까 겁난다는 말 알아요?”
아까 엘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실 잘 알고 있다. 잘 되니까 겁난다는 말. 지금 저 역시 겁이 날 것만 같은 상황이니까.
에이드리언 그렌트. 조슈아는 입 속으로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반사적으로 그 예쁜 얼굴이 떠올랐다. 참 미운 남자다. 잊고 싶었고 얼추 잊어 간다고 생각했었다. 잘 살고 있는 제 앞에 뻔뻔하게 나타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너무 미워서 저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작정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 미운 감정이 훌훌 털어지면 그때는 정말 편안하게 없는 사람처럼 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울기 시작했다. 울고, 후회를 한다고 하고, 미안하다고 제게 잘못을 빌고,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다.
조슈아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입가에 쓴웃음이 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마치 신이 판을 깔아 둔 것처럼 너무 잘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진심으로 그가 후회하길, 미안해하길 바랐던 날들이 펼쳐져서 조슈아는 가만히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아프다. 이것 또한 현실이 맞긴 한데. 그러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사실.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노력이 반가웠다. 정말 진심인 양 구는 그 태도가 기꺼웠다. 제가 전부인 것처럼, 진짜 좋아하는 듯한 그 모습이 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을 수는 없었다. 이 이중적인 마음이 제 속을 계속 울렁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져서 조슈아가 다시 눈을 감았다. 문득 아까 엘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냥 걸어 봐야겠어요. 나는 못 믿어도 우리 넥스트 유어의 저력은 믿어야죠.”
저도 그렇게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조슈아가 힘없이 웃었다. 그 개자식한테 이미 한번 전부를 걸어 보았던 전적이 있어서 자꾸만 이 미적지근한 관계를 질질 끌고 있었다.
믿고 간다. 믿고 갈 수가 없다. 믿고 간다. 믿고 갈 수가 없다.
결국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난한 고민이 참 어려워서, 스스로가 바라는 게 뭔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어서 조슈아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개새끼.”
조슈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한 게 이거 하나뿐이라니, 참. 개새끼다.
“…내가 영상을 찾으라고 이야기한 지 30시간이 지났는데. 왜 아직까지 나한테 온 게 없는 거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에서 풍기는 위압감은 마크의 뒤통수를 찍어 누를 것처럼 날카로웠다. 이렇게 날것 그대로의 위협은 전혀 에이드리언 그렌트답지 않았다. 제 보스는 언제나 우아했다. 분노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구분이 되지 않게 아름다운 웃음을 건 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관망했다. 그게 에이드리언 그렌트다운 방법이었는데.
마크는 등골을 내달리는 오싹함을 이겨내려 애썼다.
“죄송합니다.”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비서진 전체가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주말 내내 사고 영상에 매달렸지만 단 1초의 영상도 구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2년 전 그 사고 영상은 다 폐기되었으니까.
무려 그렌트가의 비공개 후계자가 관련된 사고였다. 그것도 귀한 몸에 흉터까지 남긴 교통사고. 사고를 처리하고 기사를 낼 수 없게 압박을 넣고 아무 일도 없던 것으로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그사이에 CCTV를 비롯한 영상까지 없애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감히 제 보스 앞에서 12년 전 사고 영상이 다 폐기되어 구하기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루.”
침묵의 끝이 뾰족해지던 찰나였다. 보스의 목소리에 마크는 고개를 들었다. 뺨이 들어갈 듯 수척해졌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 더 주죠. 그 안에 내 앞에 영상을 가져오세요.”
“예.”
그 누구도 어길 수 없을 만큼 단호한 지시였다. 1분 1초가 귀했다. 마크는 묵례와 함께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마크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에이드리언은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의자에 주저앉았다. 입이 바싹 마르고 속이 타들어 갔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 탓에 에이드리언은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아닐 텐데. 아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눈을 감았지만, 컴컴한 시야 너머에는 계속해서 흐릿한 빨강 머리와 그 사고 현장만 떠올랐다. 그 빨강 머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꼭, 조슈아처럼.
에이드리언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숨이 가빠졌다. 갑갑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 미친 우연에 조슈아가 있다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조슈아에게 저는 용서를 구할 게 산더미처럼 많은데. 눈앞이 막막해졌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신이 주셨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타고난 감도, 배짱 있는 선택도, 심지어 언제나 도움이 되던 외모도 에이드리언을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가가 뻐근하게 당겨 왔다. 에이드리언은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붉게 튼 눈가를 타고 떨어지던 눈물이 테이블에 톡 떨어졌다. 이 조용한 공간에 한 방울, 또 한 방울 눈물이 톡톡 고였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 공간에서조차 에이드리언은 팔로 제가 우는 모습을 숨겼다. 혹시나 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지도 말고, 불쌍한 척도 하지 말라는 그 말이 주문처럼 에이드리언을 눌렀다. 그 말이 맞았다. 울 자격도, 불쌍한 척할 자격도 제게는 없었다.
* * *
“세상에. 오늘 화요일 맞아요?”
조슈아는 감탄을 터트렸다. 사내를 돌아다니는 직원들의 옷차림이 다 화사했다. 편한 게 최고라고 체크무늬 남방에 회색 추리닝 바지만 입고 다니는 피터의 옷마저 갓 직장에 들어온 신입 사원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슈트였다. 어젯밤 퇴근하는 길에 사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 옷이었다. 향수까지 뿌린 듯 시원한 냄새가 났다. 기술이 발달한 시대라도 라이브 방송에서 향기까지 송출하지는 못할 텐데 피터는 오늘 단단히 꾸미고 온 모양새였다.
이건 다 크리스와 엘의 합작품이었다. 추진력 좋은 상사와 배짱 있는 부하 직원의 합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를 보여 주는 단편이기도 했다.
어제 오후,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엘은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라이브 방송 제안서를 들고 편집장실로 들어갔다. 제안서를 보기가 무섭게 크리스는 “오, 좋은데?” 하면서 결재했다. 화색이 된 엘은 그러면 바로 다음 주에 찍을 것을 이야기했다. 크리스는 한발 더 나갔다.
“왜? 내일 바로 찍자!”
이게 무슨 할리우드 스타의 SNS나 유튜브 스타의 라이브 방송도 아니고. 이렇게 공지도 없이 바로 하는 게 어디 있냐고. 아직은 라이브 방송 준비가 안 되었다는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웃으면서 밀어붙였다. 준비 안 된 생방인 만큼 대표인 자신과 엘이 먼저 나서겠다는 것과 각 팀장들이 잠깐씩 모습을 비춘다면 준비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극심한 반발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크리스는 반갑다는 듯 못을 박았다.
“그러면 내일 방송하는 거예요! 브이로그처럼 잠깐씩은 나올 수 있다는 건 알죠?”
그 한마디에서 시작된 나비효과가 바로 이 순간이었다. 피터의 체크무늬 남방을 벗기다니. 세상에! 조슈아는 자연스레 피터의 옆에 앉았다.
“피터. 오늘 근사한데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그러더니 피터는 잠시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뜸을 들였다.
“나 화장이라도 좀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한참을 머뭇거린 뒤에야 피터가 꺼낸 말에 조슈아는 큽, 하며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겨우 삼켰다. 목이 따가웠다. 당황한 건 이 오전 수다 타임에 합류한 브루노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리야. 피터. 드디어 미친 거야?”
어제 버그 뜬다고 괴성 지를 때부터 알아보았다고, 브루노가 피터에게서 슬쩍 물러섰다. 피터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조금 전의 주저함은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피터가 대번에 받아쳤다.
“이 새끼가. 라이브 찍는다고 크리스가 신신당부했는데도 머리도 안 빗고 온 것 같은 주제에 뭐?”
“내가 뭐. 조슈아, 나 이상해요?”
브루노가 어깨를 으쓱이며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피터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제 편을 들어주길 원할 때, 조슈아는 제3자의 입장에서 둘을 외면했다. 피터와 브루노는 그 이상 조슈아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브루노가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멋부리고 그러냐? 어차피 우리 라이브 찍어도 얼마 안 나와.”
“그래서. 혹시 카밀라가 영상 볼 수도 있잖아.”
아. 조슈아가 탁음을 삼켰다. 카밀라라면, 제가 입사하기 한 달 전 피터와 헤어진 여자분이었다. 아직까지도 미련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브루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빛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떴다. 하지만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화제를 돌렸다.
“됐어. 너는 오늘 체크무늬 셔츠 벗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나 정말 편견 없는 사람인데. 너가 그 체크무늬 입을 때마다 공돌이는 다 체크무늬를 입는다는 편견에 사로잡힌다니까?”
“웃기지 마. 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는 않거든?”
안 지가 오래되었다더니 둘이 붙어 있으면 참 재미있다. 조슈아는 웃음을 숨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 퇴근할 때만 하더라도 브이로그랑 똑같이 하면 되지 않느냐며 여유를 부리던 사람들이 다 예쁜 옷을 입고 여기저기에서 모습을 단장하고 있었다. 참 귀엽다. 웃음을 가리려고 다른 곳을 본 건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조슈아의 입매에 흐뭇한 웃음이 걸렸다.
잠깐 서류 받으러 왔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조슈아는 브루노에게 서류 커버를 받아 제자리로 걸어갔다. 머릿속은 할 일을 정리했다. 촬영 전 크리스의 옷은 이미 체크했고, NS 미디어 측에서 온 홍보문은 엘에게 전달했다. 기획지원팀과 마케팅팀에서 올라온 결재 서류를 보고했고, 광고주의 생일도 선물에 카드까지 챙겨 보냈다. 책상 앞에 앉기까지 골똘히 생각하던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빠뜨릴 뻔했다. 모니터 옆에 붙은 노란색 포스트잇에는 ‘마사 휴가. 다과 준비에 빵 추가’라고 적혀 있었다.
제빵사인 마사가 오늘 휴가라는 건 전 사원이 다 아는 중요 뉴스였는데 정작 중요한 임무-다과 준비에 빵 추가-를 맡은 조슈아만 깜빡할 뻔했다. 조슈아가 피식 웃으며 SNS를 열었다.
요즘 들어 인기가 많아진 근처 베이커리는 매일매일 빵이 나오는 시간을 SNS에 게시했다. 정해진 물량만 파는 터에 시간 맞춰 가지 않는다면 빵이 없을지도 모른다. 마침 인기 메뉴라는 초코 크루아상이 30분 뒤에 판매 예정이었다. 조슈아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실을 나서려는데 바깥의 공기가 차분했다. 아차. 제가 SNS를 검색하는 동안 5분짜리 예고 라이브 방송이 시작한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잠시 고민했다. 베이커리까지는 느긋하게 걸어서 15분 거리였지만, 줄 서는 것도 감안해야 했다. 지금 가지 않는다면 다음 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몰랐다. 방해되지 않게 슬쩍 지나가면 괜찮을 거였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조슈아가 조심스레 복도를 걸어가려던 찰나였다.
“그래서 저희 본 라이브는, 조슈아, 어디 가요?”
갑자기 들려온 제 이름에 조슈아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섰다. 엘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이 커다래졌다. 이 상황에서 크리스만 해맑게 웃고 있었다.
“헐, 보스 지금 이거 라이브거든요?”
“자연스러운 콘셉트잖아요. 각본 없이 하라면서요.”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다시 한번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촬영 카메라 역시 조슈아 쪽을 비췄다. 어색하지 않아야 하는데 라이브라는 것이 생각보다 의식되었다. 조슈아는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삐그덕 소리라도 날 것처럼 경직된 모습에 누군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빵 사러 갑니다.”
“같이 갈까요?”
“아닙니다. 보스. 예고편 멋지게 찍고 계세요. 빨리 다녀올게요. 하하.”
엘리베이터가 빨리 오기를 이토록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빨리 왔다. 어쩐지 운이 좋았다. 오늘 하루가 전부 다 좋을 것만 같았다.
같은 시간, 에이드리언은 마크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말씀하셨던 12년 전, 사고 영상입니다.”
마크는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운이 좋았다. 사고 지점 바로 옆에 폐업을 준비하느라 그렌트사의 시선에서 벗어난 피아노 학원이 하나 있었다. 다음 주인이 그대로 인수한 덕분에 바깥으로 난 CCTV 역시 살아 있었다. 주인은 CCTV의 기록은 3개월마다 자동 삭제가 된다며 별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했지만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비서진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화질을 높이는 것마저 가능했다.
에이드리언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 PC를 받아 들었다. 3일 밤을 샌 마크보다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더 해쓱했다. 눈이 움푹 패서 안타까울 정도로 아련한 분위기가 풍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주간의 강행군 출장에도 혼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복귀 야근을 하던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이런 얼굴을 하다니. 마크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제 참견은 여기까지였다. 마크는 묵례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지만 에이드리언은 영상을 재생하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영상이었지만 에이드리언은 영상 재생을 누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말이 더 알맞았다. 차마, 차마 영상을 재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새까맣게 타들어 간 녹갈색 눈이 태블릿 PC를 바라보았다.
아닐 것이다. 아닐 것이다. 에이드리언은 며칠 동안 기도문처럼 외웠던 말을 중얼거렸다. 제발 아니어야 했다.
한참동안 태블릿 PC를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이 결국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맞다. 웨스트 32번 스트리트의 사거리.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 속 웨스트 32번 스트리트와 똑같았다. 영상 오른쪽 하단에 적힌 날짜 역시 12년 전 그날이 맞았다.
제가 탔던 차가 교차로에 섰다. 그래, 그냥 이것뿐이다. 이제 곧 추돌 사고가 일어날 거였다. 하지만 사고가 일어나기 전, 제가 탔던 차 앞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길을 건너는 빨간 머리 소년이 액정 안으로 들어왔다.
말도 안 돼. 순간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에이드리언은 떨리는 눈으로 영상 속 소년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제법 큰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맞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누군가 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자꾸 눈앞이 흐릿하게 번지는 것 같아서 에이드리언은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그러면서도 영상에서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이후에 일어지는 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지, 마.”
에이드리언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형편없이 휘청이는 목소리가 12년 전에 녹화된 조슈아에게 닿을 리 만무했다. 안 돼. 안 돼. 에이드리언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조슈아는 씩씩하게 도로 중앙까지 가고 있었다. 점점 제가 타고 있던 차량과 가까워졌다.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제발 가지 마. 곧, 사고가 날….
순간 에이드리언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녹갈색 눈동자가 충격에 휩싸였다. 갑자기 뒤에서 들이받은 차 때문에 큰 굉음이 퍼졌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듯 귀에 삐- 하고 이명이 울렸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의 눈은 오로지 영상 속 조슈아만 좇았다. 곧이어 한 대가 더 들이받은 것까지 총 3중 추돌 사고였다. 그 충격 탓인지 조슈아가 뒤로 넘어졌다.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기저기에서 차를 세우고 사고 현장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몰리는 와중에서도 에이드리언의 눈에는 박힌 것처럼 조슈아만 보였다. 그리고 눈앞이 새까맣게 번졌다.
아니어야 했는데. 제게 말을 해 준 사람이 조슈아가 아닌 것만 확인하려고 했는데. 조슈아가 넘어진 것을 보자 손부터 벌벌 떨렸다. 에이드리언은 제 양손을 맞잡았지만 떨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영상 속 조슈아는 12년 전의 조슈아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조슈아다. 사고 현장과 조슈아는 관계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조슈아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조슈아가 보고 싶었다. 조슈아가 괜찮다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한동안 악몽을 꾸었지. 그래서 사진도 못 찍고 앓아누웠는데.”
“…크, 마크!”
조슈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잠식했다. 에이드리언은 그답지 않게 소리를 지르며 마크를 찾았다. 잔뜩 잠긴 목소리가 절박했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노크까지 하고 들어간 마크는 놀란 눈도 숨기지 못한 채 제 보스를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온통 식은땀 범벅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핏기 하나 없었다.
“보스, 괜….”
“조슈아, 조슈아, 어디 있죠?”
마크의 말을 자르고 에이드리언이 물었다. 가야 한다. 봐야 한다. 온통 머릿속에는 조슈아 생각뿐이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비이성적인 상사의 모습에 놀란 것도 잠시 마크가 서둘러 나갔다. 비서진에게 무어라 이야기하는 게 멀어졌다. 수분 같은 몇 초가 지나고 마크가 메간을 대동해서 들어왔다.
“미스터 베넷, 지금 잠시 나갔다고 합니다.”
메간 트레일러가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액정 안에는 넥스트 유어의 라이브 방송이 나오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댓글들이 가득했다. 그 댓글들 중 하나가 ‘유니콘 비서! 빨리 다녀와요~’였다.
“내 차. 1층, 아니. 내가 가죠.”
에이드리언이 테이블 위에 있는 스페어 차 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 속도가 마치 번개 같아서 마크조차 한발 늦게 소리쳤다.
“가드팀 연락해! 당장 보스 따라붙으라고!”
불안했다. 아까 본 보스의 눈이 미친 것처럼 형형했다. 마크가 허겁지겁 뒤쫓아갔지만 이미 에이드리언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후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메간이 놀란 얼굴로 손을 뻗어 가드 팀에게 연락을 했다. 그러는 사이, 관심에서 벗어난 태블릿 PC는 착실하게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다. 사고 뒤, 충격에 빠진 조슈아가 천천히 일어나 홀린 것처럼 에이드리언 차에 다가간 것이. 깨진 유리창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밀쳐졌다가 멀거니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이내 엉엉 울며 걷는 모습까지. 전부 다 재생한 태블릿 PC는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천천히 빛을 껐다.
운이 좋았다.
게일은 눈을 번뜩였다. 핸드폰에서는 그 증오스러운 빨간 머리가 웃고 있었다.
「아, 빵 사러 갑니다.」
「같이 갈까요?」
「아닙니다. 보스. 예고편 멋지게 찍고 계세요. 빨리 다녀올게요. 하하.」
빨간 머리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지켜본 게일이 입꼬리를 비틀어 비열하게 웃었다. 그리고 넥스트 유어의 라이브 방송을 스트리밍하던 핸드폰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 게일이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던 커피를 채 다 마시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톡 넣었다.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어제 하루 종일 넥스트 유어 앞에서 진을 쳤는데. 그 증오스러운 빨간 머리는 운 좋게도 빠져나갔다. 오늘도 하루 종일 진을 쳐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친절한 공지라니. 게일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제 곧 빨간 머리가 나올 것이었다. 그러면 가장 무방비할 때를 노리자. 그래, 빵을 사고 안심해서 돌아오는 시간은 어떨까.
하늘은 역시 제 편이었다. 게일이 상쾌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조슈아는 빵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힐끗 내려다보며 걸음을 서둘렀다. 버터 향이 진하게 올라오는 빵의 풍미는 마사의 빵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먹음직스러웠다.
빨리 가서 세팅까지 하려면 조금 더 빨리 가야 했다. 조슈아는 머릿속으로 돌아가자마자 할 일들을 시뮬레이션했다. 일이 술술 풀리던 것처럼 오후 일과까지 완벽하게 짜맞춰졌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일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는데. 아닐지도 모른다. 고작 이 짧은 외출을 하러 나왔는데.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마주친 걸 보면 운이 안 좋은 날일지도 모르지.
빠르게 걷던 걸음이 서서히 멈춘 채,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딱 다섯 걸음 거리. 참 웃기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을까. 조슈아의 눈매가 날이 서던 찰나였다. 어쩐지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이상했다. 평소랑 달랐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저를 보고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은 다 같은데. 뭐가 다른 걸까.
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얼굴이다. 왜 저를 보고 안도하는 표정을 짓는 걸까? 조슈아는 아주 조금 뒷걸음질 쳤다. 속이 좋지 않았다. 꼭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저래서야 참 학습 능력 없다는 소리 듣기 좋았다. 제가 줄 수 있는 건 정말 나락밖에 없는데, 저 남자는 왜 제가 구원인 것처럼 저렇게 웃는 걸까. 조슈아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흐릿해지고 에이드리언 그렌트만 보였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아주 천천히 제 쪽으로 다가왔다. 딱 그만큼 조슈아는 뒷걸음질 쳤다.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붉게 짓무른 눈가며 쏙 패일 정도로 들어간 볼이 애틋하게 느껴져서 조슈아는 자꾸만 겁이 차올랐다.
에이드리언의 희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이드리언이 쥐어짜듯 말했다.
“내가,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다가가게 해 줘요.”
거칠고 쉰 목소리가 간절했다. 다섯 걸음에나 떨어져 있는데 꽂히듯 에이드리언의 목소리만 들렸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왜요.”
“당신이 멀쩡하다는 걸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요.”
에이드리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가만히 보니 손도 떨렸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조슈아의 입술이 아주 조금 달싹이던, 그 찰나였다. 오롯이 조슈아만 향하던 에이드리언의 눈이 커다래졌다.
순식간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껴안았다. 더운 체온이 왈칵 조슈아에게 닿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에이드리언을 밀어내려던 순간, 선뜩한 느낌이 났다.
조슈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무의식적으로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을 때, 에이드리언은 희게 웃었다. 녹갈색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악!!!”
챙-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묻혔다. 에이드리언이 무너지듯 조슈아에게 기대었다. 얼결에 그를 받친 상태에서 조슈아는 눈만 깜빡였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람들이 밤색 머리 남자를 바닥에 깔아뭉개며 제압했다. 남자의 옆에는 피가 묻은 잭나이프가 떨어져 있었다.
“보스.”
언제나 무표정하던 마크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에이드리언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에이드리언은 제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무겁게 감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눈이 감겼다. 마크가 무어라 지시하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러더니 마크가 이내 에이드리언을 떼어 내듯 안았다. 뜨거운 온기가 사라지고, 손이 축축했다. 내려다 본 손바닥에는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에이드리언의 왼쪽 복부에서 뭉글뭉글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에이드리언 위로 옷이 덮어졌다. 가드들이 에이드리언을 부축했다. 마크가 조슈아를 이끌었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이게 무….”
조슈아의 목소리가 퍽퍽하게 갈라졌다. 이상하다.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저는 그냥 빵을 사러 나왔을 뿐인데. 눈 깜짝할 새 아수라장이 되었다. 들고 있던 빵 봉지는 이미 납작하게 눌렸다. 조슈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쩌면 현실이 아닐지도 몰라. 번뜩 든 생각에 조슈아는 에이드리언이 향한 쪽으로 뛰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드들이 에이드리언을 부축해 세단 뒷좌석에 태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헤집고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내려다보았다. 에이드리언이 뒷좌석 시트에 쓰러지듯 누워 있었다. 땀으로 얼룩진 그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슈아는 돌연 손을 뻗어 에이드리언의 뺨을 꼬집었다.
이것 봐. 아무런 미동도 없잖아. 꿈인가 보다. 그러면 그렇지. 조슈아가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데 손바닥이 여전히 축축했다. 새빨간 피를 보자 눈앞이 어지러웠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미스터,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느새 따라온 건지 마크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 초조해 보였다. 한껏 뛰었는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조슈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의 옆에 타자 마크가 문을 닫아 주었다. 그리고 마크가 앞자리에 탔을 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차가 출발했다. 모든 풍경이 빠르게 뒤로 지나갔다. 조슈아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고개를 돌리자 에이드리언이 보였다.
저 감은 눈이, 창백한 얼굴이 제 꿈과 똑같을 뿐이다. 무너지는 바닥 속으로 가라앉던 에이드리언. 끝까지 제게 미안하다고 하던 에이드리언. 손조차 내밀지 않았던 에이드리언, 이 개자식.
조슈아는 덥석 손을 뻗어 에이드리언의 손을 잡았다. 소매가 내려가면서 손목에 검은 플라스틱 팔찌가 보였다. 전기 충격기. 조슈아는 그 팔찌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을 거예요.”
조슈아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과 달리 손이 덜덜 떨렸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이를 악 물었다.
* * *
그날 오후, 연예 가십 프로그램과 뉴스를 도배한 소식은 빌 스웰딘의 출소한 스토커 이야기였다.
「그 소식 들으셨죠? 빌 스웰딘의 스토커로 매스컴을 휩쓸었던 게리 그로운! 출소한 지 겨우 몇 주 만에 다시 교도소로 돌아갈 위기입니다.」
「세상에, 딘.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글쎄. 지나가는 행인을 칼로 찔렀다지 뭐예요. 저희 The Signal에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게리 그로운은 심각한 피해망상 환자라고 하는데. 과연 그가 적합한 재활을 받고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재활로 치료가 된다는 전제하에 말이겠죠. 우리의 훌륭한 리포터 애나가 지금 전문가와 함께 있다고 하니 만나 볼까요?」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상황을 촬영한 영상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초점은 모두 게리 그로운에 관한 것이었다. 중증 피해망상 환자 게리 그로운, 재활 치료도 몇 번이나 불참한 게리 그로운, 이전에 여자 친구 폭행으로 신고당했던 게리 그로운.
그 어디에도 에이드리언과 조슈아의 이름은 없었다. 오로지 게일 그로운, 가해자의 이름만 가득했다.
“…재미없어.”
불 꺼진 편집장실 안에서 빌이 낮게 중얼거렸다. 상체를 잔뜩 젖혀 푹신한 소파에 파묻히듯 앉은 채 빌은 흰색 벽면에 쏘아지는 빔 영상을 바라보았다. 빵빵한 서라운드 스피커며 홈 씨어터 남부럽지 않은 화질을 두고서도 빌의 잘난 얼굴에는 지루함이 가득했다. 벽면을 가득 채우며 나오는 영상은 넥스트 유어의 라이브 스트리밍이었다.
분명히 빵 사 온다고 예고편에 나갔는데. 정작 기다리던 조슈아는 코빼기도 안 내비치고 빵만 나온다. 누가 빵 보고 싶어서 이렇게 한 시간이나 라이브를 본단 말인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크리스와 팀장들에게 실례되게도 정말 빌은 빵만 바라보았다. 슈가 파우더가 잔뜩 뿌려진 피칸 파이. 더 이상 단걸 좋아하지 않는다던 조슈아가 골라 온 빵.
빌은 입술을 비죽였다. 거의 끝나 가는데도 조슈아의 그림자조차 안 나오는 걸 보면 제가 예고편에 낚인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빌은 라이브 시청을 종료할 수 없었다. 혹시나 마지막 인사에라도 나올 수 있으니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빌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엘라가 들어왔다. 들고 온 쟁반에는 피칸 파이 두 조각과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보스, 간식입니다. 어? 보스도 브이로그 보고 계셨어요?”
“너도?”
엘라가 내려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었다. 의미 없이 물은 말에 엘라가 눈에 띄게 뻣뻣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비즈니스 적 미소를 띤 채 빌을 바라보았다.
“네. 물론 일과 관련해서요. 같은 업계 사람으로서 동종 업계의 동향 파악 정도는 기본이죠.”
“다 좋은데. 근데 너는 코디네이터잖아.”
빌이 느슨하게 웃으며 맹점을 찔렀다. 아, 하하하. 엘라가 뜨끔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급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듯 브이로그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왜 조슈아는 안 나올까요? 당연히 나올 줄 알았는데.”
제 말이 그 말이었다. 왼쪽 하단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들에도 ‘우리 비서님 어디 갔어요?’가 보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크리스는 도통 조슈아를 부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빌의 관심이 다시 브이로그로 향한 것을 확인한 엘라는 조용히 묵례를 하고 편집장실을 나섰다. 이제 영상에서는 질문을 받고 있었다. 하하하 웃는 대표가 천천히 핸드폰을 보며 질문을 읽었다.
「우리 조슈아요? 어디 갔냐고요?」
나왔다. 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바르게 했다.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중요한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볼 때보다 더 집중했다. 진회색 눈동자가 뚫어져라 크리스의 입을 바라보았다. 음, 크리스의 얼굴에 잠시 고민이 스쳐 지났다. 그러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었다.
「아, 우리 조슈아. 오늘은 대표와 팀장의 시간이라고 다음에 나온다네요. 보니도 저기에서 꼼짝을 안 해요. 다음이 보니 브이로그인데.」
「아, 보스!」
「어? 스포인가요?」
크리스가 당황하는 사이 옆에 있던 다른 팀장들이 야유했다. 왼쪽 하단 댓글들이 폭주했다. 하지만 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쉬쉬 가라앉은 채 다시 소파에 기대었다. 낚였다. 한 시간 내내 열심히 보았던 이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다 마신 잔을 내려놓았다.
피칸 파이를 노려보던 빌이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소파에 누웠다. 서라운드는 시끄러웠고 편집장실은 컴컴했다. 소파 한구석에 있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안 받으면 끊어질 줄 알았는데 상대는 지치지도 않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아 진짜! 빌은 짜증을 내면서 손을 뻗었다. 몇 번을 더듬거린 끝에 핸드폰을 집었다. 둘째 형 에단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바빠. 전화하지 마.”
- 끊지 마. 끊지 마! 너 스토커 구속되었어!!!
귀 따가워. 핸드폰을 뚫고 나오는 음성에 빌은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리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어. 잘됐네. 그러면 가드들 좀 줄여 주고.”
- 안 돼. 그 미친놈이 칼 들고 조슈아를 찾아갔었더라구.
순간 모든 소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단의 말이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 울렸다. 잘못 알았을 거다. 이건 에단이 착각한 거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진회색 눈동자가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는 사이, 전화 너머에서는 못을 박듯 이야기했다.
- 그래서 구속된 거야. 현행범으로. 로건네 병원으로 갔다는데 그 후로는 못 들었어.
빌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소파 틈새로 쏙 들어간 핸드폰에서 에단이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신경 바깥이었다.
조슈아가 습격을 받았다. 그것도 제 스토커한테.
다리가 풀릴 것처럼 후들거렸지만 빌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진회색 눈동자가 새파랗게 번뜩였다.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 조슈아가 다쳤을 리 없다. 파파라치 팔 꺾는 것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빌이 편집장실을 나섰다. 에밀리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스, 무슨….”
“당장 차 대기시켜. 로건네 병원으로 갈 거야.”
보는 사람 기를 죽이는 사나운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에밀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지시를 따랐다. 지미는 이미 뛰어나갔다. 나가면 딱 맞게 차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었다. 엘라가 주춤하는 얼굴로 에밀리를 따랐다.
미친 새끼. 사람 잘못 건드렸다. 감히, 감히 누구를 건드려.
빌이 이를 아득 갈았다.
한편, 서라운드 빵빵하게 울리는 편집장실. 소파 틈바구니에서는 빌이 놓친 한마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그런데 칼은 에이드리언이 맞았다는데. 둘이 아는 사이야? 설마 에이드리언이 대신 칼 맞고 그런 거야? 에이드리언 걔가 남 위해서 그럴 애가 아닌데. 미치기라도 한 건가? 나 소름 돋았어. 여보세요? 빌? 들리니? 나 누구랑 말하니? 여보세요?
조슈아는 멀거니 앞을 바라보았다. 고급스럽고 단정한 모노톤의 공간이었다. 들어오는 길에는 새까만 그랜드 피아노와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이 꽂힌 책장도 보았다. VVIP 병동이라고 했다. 손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싸 보이는 유리 장식품이 곳곳에 놓여 있고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반짝이는 곳. 제가 알던 병원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소독약 냄새가 나고 하얀 병원에 비교하자면 그냥 호텔 같았다. 여기는 무슨 냄새가 날까. 조슈아는 부러 킁킁거렸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마크가 다가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냉철하게 가라앉았다. 표정 역시 조슈아가 알던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무표정.
“…감사합니다. 빵 보낸 거, 미스터 웹디즈드가 한 일 맞죠?”
조슈아가 느릿하게 말했다. 저도 신경 못 쓴 부분까지 커버했다. 마크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그러고 보니 라이브는 잘 끝났으려나.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넥스트 유어를 떠올린 게 다행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에이드리언을 보면서 조슈아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크리스에게 전화를 했었다.
“보스. 정말 죄송한데, 지금 갑자기 일이 생겨서….”
- 조슈아, 무슨 일 있어요? 빵은 배달로 왔는데.
저는 빵을 배달시킨 적이 없었다. 생각이 헝클어져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무슨 일은 있었다.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칼을 맞을 뻔했다. 제 일이 아닌 것 같던 일들이 점점 자각되는 순간 조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팠다.
이상한 기류를 읽었는지 크리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돌아오면 각오하게끔 일을 몰아주겠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래서 억지로 밝게 대답했었다.
마크는 힐끗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힘을 꽉 주었는지 마주잡은 손이 팽팽했다. 희게 질린 얼굴에는 핏기 한 점 없었다. 금방이라도 툭 밀면 쓰러질 얼굴을 하고도 갈색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크는 모르는 척하고 조슈아의 앞섶을 눈짓했다.
“피라도 닦고 오시는 건 어떠시겠습니까.”
그 말에 조슈아는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크림빛 카디건과 흰 셔츠 앞자락에 피가 묻어 있었다. 한번 자각하고 나니 살과 맞닿은 부분이 척척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아, 화장실이.”
“바로 옆입니다. 갈아입으실 수 있게 옷 준비해 두겠습니다.”
마크의 대답 위로 시끄러운 소리가 겹쳐졌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다고 마크가 나서기도 전에 구두 밑창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이 어지러운 구조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단번에 소리가 가까워졌다. 누구일까. 가만히 복도 끝을 바라보던 조슈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보스?”
저도 모르게 나간 말에 조슈아가 반사적으로 입을 가렸다. 자그마한 목소리라 마크는 몰라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온 빌 스웰딘은 듣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뛰어오느라 날린 갈색 머리카락이 다시 이마 위로 가라앉았다.
VVIP 병동이라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된다는 말도 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병동은 누구보다 빌이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안쪽 입원실이 있는 곳으로 와락 뛰어 들어갔는데, 정작 조슈아는 입원실 바로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입고 있는 새하얀 옷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자 빌은 제 머릿속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조슈아가 놀란 눈으로 빌을 바라보았다. 너무 화가 나면 말도 안 나온다더니. 빌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물론 끝에는 화가 터져 나왔다.
“미…친 거 아냐? 얘가 환자인데 왜 여기 있어!”
“저 안 다쳤어요.”
“그거 피잖아.”
“제 피 아니에요.”
덤덤한 대답에 빌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래서 박자를 놓치고 뒤늦게 대답했다.
“…뭐?”
“제 피 아니라구요.”
그게 무슨. 무언가 더 말을 하려고 하는데 이제야 눈앞이 트인 것처럼 시야가 넓어졌다. 조슈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조슈아가 앉아 있는 소파 바로 옆에는 에이드리언 그렌트 그 개자식의 비서가 있었다. 여긴 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빌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바로 입원실 문을 열었다.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에이드리언 그렌트였다. 손목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고, 알 수 없는 수액이 똑똑 떨어졌다. 더 볼 새도 없이 문이 닫혔다. 누군가 빌의 팔을 잡고 당겼다.
“환자 쉬고 있는 중이거든?”
로건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듯 로건이 숨을 돌렸다. 흰색 가운 아래로 운동화 뒤축이 구겨져 있었다.
“…저 새끼가 왜.”
빌의 말문이 막혔다. VVIP 병동이라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정작 저 개자식이 이곳에 누워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로건이 눈치를 보듯 조슈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야. 수면 부족으로 누워 있는 거야. 상처는 안 커. 왼쪽 옆구리 자상인데 얕게 찔렸거든. 어찌나 운동한 보람이 있는지 어지간한 잭나이프로는 안 되겠더라. 가해자 힘이 모자란 것도 다행이지. 그런데 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에단한테 들었어. 조슈아…가 습격당했다고.”
말을 돌리려고 했는데, 결국 다시 도돌이표였다. 로건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 대책 없이 귀여운 사촌은 조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마크. 저 옷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조슈아가 말문을 열었다.
“네. 화장실에 계시면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그러면. 잠깐만 실례할게요.”
“아, 화장실은 저쪽이에요.”
로건의 말에 희게 질린 얼굴로 조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축해 줘야 할 것 같은 얼굴인데 조슈아는 그 누구보다도 바르게 잘 걸어갔다. 빌과 로건은 말없이 조슈아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퉁이를 돌아서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로건이 빌을 툭 쳤다.
“눈치 챙겨. 응?”
“…뭐가.”
“에이드리언이 다친 거 보고서도 조슈아 습격당했다는 말이 나오냐?”
“그치만, 말이 안 되잖아.”
“뭐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새끼가 왜 칼 맞고, 왜 저기에 드러누워 있어. 가드들은 다 뭐했대.”
빌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개자식이 제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놈이라는 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알았다. 저 팔 하나 비틀어 보려고 격투기부터 주짓수까지 제법 많은 운동을 배워 왔으니까.
아무리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진심-이 빌어먹을 단어를 대체할 단어가 제발 부디 나오기를 바라지만-이라고 해도. 겨우 잭나이프나 휘두르는 놈한테 당할 리는 없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칼까지 맞을 위인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 없다.
“자고 있는 거라니까. 제압 못한 건 뭐, 나야 모르지.”
로건은 모른다. 하지만 빌은 안다. 한없이 부정해도 그 부정하고 싶은 게 진실이라서. 저 개자식이 조슈아를, 정말로….
빌은 입원실 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억지를 부리듯 말했다.
“…저 새끼 일부러 그랬어.”
그런 빌을 보면서 로건은 야트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힘주어 빌의 어깨를 꾹 눌렀다. 빌이 정말이라는 듯 로건을 바라보았지만, 로건은 웃는 입매와 달리 철없는 어린애를 보듯 빌을 응시했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조슈아 나오면 말실수하지 말고. 응.”
화장실이라고 하기에 미안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었다. 조슈아는 옷을 갈아입었다. 제가 입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흰색 셔츠와 베이지색 카디건이었다. 급하게 준비했을 텐데 몸에 알맞게 맞았다.
피에 젖은 옷은 금방 핏물을 빼야 하는데. 문득 생활 상식이 떠올랐지만 조슈아는 옷을 빨거나 조물거리지 않았다. 그저 아까 옷을 받은 종이봉투에 대충 접어 넣었다. 버릴 거였다.
조슈아는 손을 씻었다. 옷을 갈아입기 전, 배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여러 번 씻었는데도 그 축축한 느낌이 손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 상황 자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던 에이드리언이 갑자기 저에게 달려들던 것이, 제게 기대듯 무너지던 몸이, 손을 적시던 뜨끈하고 축축한 감촉이. 그리고 접히던 눈매 속 웃는 녹갈색 눈동자가.
왜 그랬을까. 왜.
왜 이렇게까지 할까.
조슈아가 가만히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어렴풋이 안다. 저 안개 뒤편에 있을 거 같은 저 개자식이 정말로, 정말로 저를 사랑할지 모른다는 거. 하지만…. 조슈아는 침을 삼켰다. 거울 속 눈동자가 단단하게 저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서 조슈아는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조슈아가 화장실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마크가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옷은 버려 드리겠습니다.”
“마크. 혹시 그거 어디 있는지 아세요?”
대답 대신 꺼낸 말에 마크는 잠시 당혹스러운 눈빛을 했다. 하지만 이내 조슈아가 하는 말에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다 드릴까요?”
“네. 최대한 빨리요.”
* * *
어렴풋이 작은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얼굴 위로 선선한 바람이 스쳤고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별로 아프지 않은 것 같은데 병원에 올 것까지야. 그것보다 조슈아가 걱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 창백했는데. 마크라면 당연히 조슈아를 병원에 데려다주었을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눈을 떴다. 파르르 속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뿌옇게 번진 시야가 천천히 초점을 맞춰갈 무렵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제 오른편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조슈아였다.
녹갈색 눈동자가 두어 번 깜빡였다. 사라질 줄 알았던 조슈아가 더 또렷해졌다. 에이드리언은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긴, 천국인가요?”
이상하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조슈아가 옆에 있는 걸 보면 현실은 아닌 듯했다. 무슨 일일까. 겁이 더럭 나는 와중에 조슈아는 가만히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홍빛 도는 갈색 눈동자의 시선이 곧아서 계속 조슈아가 생각났다. 조슈아는 괜찮은 걸까.
“혓바닥 잘 돌아가는 걸 보니 죽진 않았네.”
기분 나쁘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생리적인 적대감에 에이드리언은 아름다운 얼굴을 팍 구기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비아냥거리는 말을 한 빌이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재수 없는 얼굴이 여전해서 에이드리언은 꺼지라는 말을 하려다 순간 멈칫했다.
천국에 저 새끼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여기가…. 에이드리언은 숨도 쉬지 못하고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조슈아다. 조슈아 베넷.
“…조…슈….”
이름을 끝까지 부를 수가 없었다. 진짜일 걸 알면서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아서. 손이라도 뻗고 싶은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을 응시했다. 흰색 환자복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도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눈부시게 예뻤다. 땀에 젖은 금발 머리카락이 이마에 가라앉아 있었고 얼굴은 파리하게 질렸는데도 창백한 얼굴이 애틋하리만큼 예뻐서. 조슈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봉합은 잘 되었어요. 몇 바늘 꿰매었다는데 아마 마크가 조금 이따가 다시 설명해 줄 거예요.”
“정말 조…슈…예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에이드리언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슈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에이드리언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뒤에 이어질 말을 이미 눈치챘다. 에이드리언이 제 눈치를 살폈다. 조슈아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치지 않았어요. 덕분이에요.”
“아니, 아니에요.”
“하지만 감사의 인사라던가, 그런 거 하려고 있는 건 아니에요.”
에이드리언이 자연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허옇게 튼 입술에 순간적으로 분홍빛이 돌았다. 얇은 환자복 아래 넓은 어깨가 잘게 떨렸다. 울컥울컥 겁이 올라왔다. 저런 조슈아는 처음 보았다. 언뜻 본 갈색 눈이 저를 경멸하지 않아서, 무서웠다. 설마, 그냥 이걸로 다 끝낸다고 할까 봐. 눈앞이 아득해졌다.
에이드리언이 손에 힘을 주었다. 손목에 놓인 바늘을 타고 연결된 호스에 뭉실뭉실 피가 번졌지만 에이드리언도 조슈아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 만에야 에이드리언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알아요.”
이상한 기류에 빌은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조슈아가 빌을 돌아보았다. 괜찮다는 듯,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아도 알았다. 조슈아는 정말로 괜찮았다. 해사한 얼굴이 한없이 단호했다. 그래서 빌은 입원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동시에 조슈아는 다시 에이드리언을 쳐다보았다. 축 처진 어깨를, 숙인 얼굴을,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조슈아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나는 당신이….”
“…….”
“원망스러워요.”
“…….”
“밉고, 정말 미워요.”
조슈아가 말을 할 때마다 에이드리언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렸고, 녹갈색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졌다. 알고 있는데. 알면서도 들을 때마다 아팠다. 그리고 이 말의 끝이 무엇인지 알아서 더 아팠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감히 조슈아 앞에서는 그 어디로도 제가 먼저 도망갈 수가 없었다. 비수처럼 쏟아지는 말들이 잠시 끊겼던 찰나였다.
“나는 정말로 당신이 너무너무, 좋았어서.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덤덤한 말이 꼭 사형 선고 같았다. 그 나지막한 한마디가 심장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꼭 울 것만 같이 눈가가 뜨거워졌다. 입술을 한없이 깨물어도 숨도 못 쉴 것처럼 아팠다. 손바닥을 펴고 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에 부딪히는 호흡이 거칠고 뜨거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
조슈아 베넷은 참 반짝반짝하게 예쁘다. 저를 보던 눈이 참 예뻤고, 코도 예뻤고 입술도 예뻤고, 그 모든 게 예뻤다. 보는 제가 다 눈치챌 만큼 열렬하게 저를 좋아해 주던 사람이 그렇게 반짝반짝 아름다웠는데.
무슨 짓을 한 걸까. 에이드리언 그렌트.
조슈아는 입술을 닫고 에이드리언을 지켜보았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다 가렸다. 통으로 된 상의 소매가 내려가면서 검은색 전기 충격기가 보였다. 그 새까만 플라스틱을 보면서 조슈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친 짓이다. 이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슈아는 이미 기울어졌다.
조슈아가 작게 입술을 떼었다.
“하지만, 난 미워할 사람이 필요해요.”
언제부터 기울어졌는지는 모른다. 꿈과 현실이 구분이 가지 않는 사람처럼 덥석 에이드리언의 손을 잡았을 때, 아니면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릴 때, 그도 아니라면 조슈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 퐁당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쌓인 그 한 방울 한 방울이 서서히 풀잎의 끝에 맺힌 게 틀림없었다.
화장실에서 내내 생각했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은, 충분히 미워하고 싶었다. 아주 충분히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제 온 마음을 다해서 에이드리언 그렌트를 미워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기회를 줄 수는 있어요.”
그 순간 에이드리언이 굳었다. 잘게 떨리던 손등이 어깨가, 그리고 모든 게. 똑, 똑, 똑. 조용한 입원실의 적막 위로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 위로 조슈아가 말했다.
“사과를 할 기회.”
에이드리언이 아주 느리게 제 손을 내렸다. 아름다운 녹갈색 위로 눈물이 가득 번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두 눈을 깜빡이자 그림처럼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턱끝에 걸쳐졌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말을 잃은 듯 끝내 나오지는 않았다. 조슈아에게는 다행이었다. 저는 지금 할 말이 아주 많았다.
“들어는 줄게요. 당신이 하는 그 말들이 다 내게는 거짓말 같지만, 그래도. 들어는 줄게요.”
“…….”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용서한다 해도 내가 언제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몰라요.”
“…….”
“이 관계의 끝도 나한테 있어요.”
조슈아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까 마크한테 부탁한 전기 충격기 작동기였다. 바로 알아본 듯 에이드리언의 눈이 살짝 커다래졌다. 조슈아는 무감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먼저 사라진다면 난 이걸 미스터 스웰딘에게 넘길 거예요. 그라면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평생 이걸 눌러 주겠죠. 물론 당신이 풀어 버린다면 소용없겠지만.”
한 번 사라진 사람이 두 번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조슈아는 혀끝까지 막막하게 차오르는 상실감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았다. 마크가 정보를 보내 준다고 했지만, 그조차도 언제든 백지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조슈아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자그마한 협박이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것 역시 알았다. 하지만,
“…절대, 그럴 일 없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에이드리언이 대답했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인지, 아니면 풀어 버릴 일이 없다는 것인지 구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거면 되었다. ‘절대’가 어디까지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역시 질렸다. 그냥 조슈아는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내건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정말로 내게 사과를 하고 싶다면.”
“…….”
“……한번 해 봐요. 사과.”
조슈아의 말이 끝났다.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 녹갈색 눈동자에서 맺힌 눈물방울들이 죽죽 떨어졌다. 고급스러운 흰색 이불에 짙은 동그라미가 번져 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서툴게 달싹였다. 그러다가 이내 잠긴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진짜, 내가 정말 미안해요.”
처음 한두 번을 제외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발음이 계속 뭉개지면서도 에이드리언은 계속 말했다. 그 말의 끝이 울음으로 얼룩져 더 이상 말이 아닐 때까지 에이드리언이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고. 제가 잘못했다고.
앞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에이드리언은 계속해서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눈물이 고인 두 눈을 바라보면서 조슈아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사실은 정말, 정말 듣고 싶었다. 이 개자식이 말할 때마다 울렁거리던 속내에는 사과에 고픈 제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웃음이 날 리가 없었다.
어쩌면.
조슈아는 문득 떠오른 가정에 입술을 달싹였다. 어쩌면 정말로 일찍 왔다면. 적어도 그날 아침에라도 헐레벌떡 이런 얼굴로 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우리’였을까. 하지만 조슈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저에게는 아직도 에이드리언이 개자식이었다.
에이드리언이 잠시 코를 흥 들이마셨다. 잠깐의 적막 이후, 에이드리언이 조슈아의 눈치를 보았다. 새하얗게 튼 입술이 달싹였다. 잠깐의 시간 뒤에야 에이드리언이 다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름, 불러도 돼요?”
“…될 거라고 생각해요?”
에이드리언은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이 웃겨서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아주 조금 웃었다.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언젠가가 가까워질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멍청이는 좀 더 아프다가 앓아도 괜찮았다.
힐끔 조슈아를 바라보던 에이드리언이 순간 굳었다. 찰나의 시간에 본 조슈아가 웃고 있어서. 에이드리언은 얼른 눈을 비볐지만 조슈아는 다시 무표정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멍청이였지만 두 번째 온 기회마저 놓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기회를 잡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에이드리언 제 자신이 잘 알았다.
이날 에이드리언은 탈진으로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조슈아는 나가지 않고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이 정해졌고, 아주 조금 달라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