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1. IF의 세계 (17/22)

목차

#1. IF의 세계

#2. 그 비서의 브이로그

#3. 그만 모르는 소개팅

#4. 그날 밤 오지 않았던, <어제의 당신에게>

#5. 축! 조슈아 생일!

#6. 그날, 성 아녜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1. IF의 세계

보통 VVVIP 병동은 세 번의 출입 확인이 이루어졌다.

첫째. 1층 병동 입구에서 무기 소지와 방문 목적, 환자의 방문 여부 승인에 대한 확인, 둘째. 병동에 들어간 뒤 개인 병실-이라고 부르고 여느 저택 못지않은 공간을 의미한다- 앞에서 신원 체크와 ID 카드 확인, 셋째. 병실에 들어가기 전 환자의 출입 승인 의사 재확인까지. 첫째와 둘째 조건에 부합하더라도 마지막에 환자가 변덕을 부린다면 들어가지 못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체이스 랭튼은 이 모든 출입 확인 위에 있었다. 그는 이 VVVIP 병동 전체를 사용하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비서였다. 그것도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5살 때부터 18살인 지금까지 14년을 모신 퍼스트 비서.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어렸던 시절에는 도련님으로 모셨고, 실무에 뛰어든 지금은 보스로 모셨다. 에이드리언 그렌트 역시 비서진 중 체이스 랭튼을 가장 신임했다. 그러니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랭튼. 미스터 웹디즈드는 보안 규정상 검사를 해야 해서.”

…하지만 제 후임이자 직접 교육한 마크 웹디즈드는 아니었다. 1차 관문에 선 가드가 무뚝뚝한 얼굴과 달리 조금 난감하다는 투로 말했다. 체이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보스의 지시에 깜빡 잊고 마크까지 끌고 들어갈 뻔했다. 언제나 무표정한 마크가 귀 끝을 벌겋게 달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내가 잊어버린걸. 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부탁하죠.”

다행히도 단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첫 단계에서 더 이상 확인하지 말고 빨리 올려 보내라는 말에 두 번째 단계는 물론 세 번째 단계까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전용 카드가 아니라면 열리지 않는 자동문이 열리고, 체이스와 마크는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구두 밑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체이스의 손에는 태블릿 PC가 들려 있었다. 그토록 충성심 강한 체이스 랭튼이 보스의 사고 이후 30분이나 자리를 비우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엊그제. 하굣길에 보스가 교통사고에 휩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체이스 랭튼은 당연히 그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남자였다. 타고난 감과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배짱 있는 배팅으로 이미 프로젝트를 두 개나 성공시켰다. 넘어진다면 그 넘어지는 것조차 계획적일 거라는 말을 듣는 남자가 사고라니. 하지만 불행히도 그 소식은 사실이었다. 사거리의 삼중 추돌 사고. 그 안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휩쓸려 있었다.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다행히도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왼쪽 골반에 15cm가 넘는 흉터 자국이 생겼다는 걸 제외한다면 거의 특이점이 없었다. 동승한 친구 로건 헤네스가 온몸의 통증을 호소하며 하루나 늦게 깨어난 것에 비한다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튼튼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깨어난 보스는 뭔가 이상했다. 창백하게 질린 아름다운 얼굴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쉬는 것만으로도 모자랄 시간에 침대를 세워서 가만히 벽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체이스를 바라보고 명령했다.

“체이스. 내 사고 영상을 구해다 줘요. 아무도 모르게.”

이미 그렌트사의 유능한 비서진들은 그 사고를 없던 일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체이스 랭튼에게 아무도 모르게 사고 당시 영상을 빼돌리는 건, 다 구워진 빵을 대령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명령을 들은 지 단 30분 만에 체이스 랭튼은 보스가 기다리고 있는 이 병실로 돌아왔으니까.

“다녀왔습니다. 보스.”

문 열리는 소리도 없을 정도로 조용한 병실이었다, 체이스가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에이드리언은 짧은 칭찬도 없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의 녹갈색 눈동자가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럽게 번뜩였다는 건, 체이스 랭튼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용한 병실이었다. 블라인드의 슬릿 사이로 보이는 바깥은 새까맣게 어두웠다. 병실은 에이드리언 그렌트, 저 혼자였다. 끝까지 남아 있을 거라고 했던 체이스마저 다른 방으로 보내 버리고 새로운 비서 역시 내쫓았다. 베드 테이블을 당긴 뒤 태블릿 PC를 올린 상태로, 에이드리언은 뚫어져라 새까만 액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커다란 사고는 아니었다. 뉴욕 한복판에서 추돌사고는 빈번했고, 세 대 정도가 사고 난 건 세 줄짜리 기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세 줄도 안 될 법한 사고에서 저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서움, 눈앞에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게 멀어졌고, 저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처럼 손가락만 움직였다. 그 와중에 부옇게 번진 수채화처럼 흐릿한 시야 속에 빨간 머리가 있었다.

“괜찮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목소리였다. 누가 누구를 챙기는지, 형편없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 주제에. 그런데 우습게도 그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그 다정한 말 한마디가 뭐라고. 무슨 말이라도 대답을 해 주고 싶은데,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처음에는 로건 헤네스인 줄 알았다. 그 사고 현장에 빨간 머리는 로건밖에 없을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깨어난 로건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넘기면 될 일이었는데 무언가 계속 찜찜했다. 확실하지 못한 건 딱 질색이었다.

이미 그렌트사의 유능한 사원들은 제가 포함되어 있던 사고를 없는 일로 무마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체이스에게 제 사고 영상 하나를 구해 달라고 했다. 체이스라면 아무도 모르게 제 사고 영상을 구해 올 수 있을 테니까.

사고 당시의 영상을 보는 건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을 봐야 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녹갈색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스크린을 눌렀다.

제 예상이 맞았다.

교차로 앞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탄 차가 멈췄다. 에이드리언은 사고가 난 타이밍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앞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변한 다음이었다. 그리고 이때, 이 초록색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너는 빨간 머리 소년이 액정 안으로 들어왔다. 강렬한 새빨간 머리카락에 에이드리언은 홀린 것처럼 그 소년만 바라보았다. 손에는 제법 큰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흐릿한 기억 속 빨간 머리도 뭔가를 들고 있었는데.

에이드리언이 생각을 하는 사이, 빨간 머리 소년은 횡단보도의 중간까지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불안한 느낌이 솟구쳤다. 이 애도 설마, 이 사고에 연관된 걸까?

그 생각도 동시에 태블릿 PC에서 제법 큰 굉음이 퍼졌다. 그때의 충격이 느껴지는 것처럼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한쪽 눈을 찡그리면서도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가 탄 차가 들이 받히고 그 뒤로 한 대가 더 추돌한 것까지, 총 3중 추돌 사고였다. 그 여파에 빨간 머리 소년이 뒤로 넘어졌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고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몰리는 사고 현장에서도, 에이드리언의 눈은 오로지 빨간 머리 소년에게만 닿아 있었다.

“…넘어지지 말지.”

아팠겠다. 아팠을 텐데 아무도 저 애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몰리는 사람들의 관심은 사고에만 쏠려 있었다. 이상하다. 왜 아무도 저 애를 봐 주지 않지? 나라면. 나라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을 텐데. 엉덩이도 탁탁 털어 주고 어디 다친 데 없는지, 꼼꼼히 봐 주었을 텐데. 놀란 듯 멍하니 벌어진 입에 아이스크림도 물려 줄 수 있는데. 에이드리언은 제 12살 사촌이 넘어져 울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몇 달 전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듯, 어울리지 않게 상냥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작 영상 속에서 저는 사고 난 차 안에서 가물거리는 눈만 억지로 뜨고 있느라 보이지도 않았다. 아. 에이드리언은 조금 놀랐다. 분명 영상을 보면 불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 빨간 머리 소년한테 너무 집중했다.

빨간 머리 소년은 씩씩했다. 충격에 빠진 얼굴로 혼자 일어나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순간 에이드리언은 숨도 쉬지 못하고 영상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향한 곳이 바로 제가 탄 차였다. 깨진 유리창이 보이는 그 자리는 바로 제가 앉아 있던 자리라서 에이드리언은 빨간 머리만 바라보았다

순간, 그 애의 입이 조금 열리는 것 같았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당연하게도 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꼭 제게는 그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괜찮아?”

그 덜덜 떨리는 소리가.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모를 그 다정함이. 에이드리언은 숨이 막혔다.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애는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밀쳐졌다. 앰뷸런스에 저와 로건이 타고,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면서 엉엉 울었다.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영상 속 소년을 쓸어내리다가 영상을 일시 중지 시켰다. 서둘러 영상을 재생하자 우는 얼굴로 빨간 머리 소년이 걷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커다란 무언가를 든 채, 그리고 사라졌다. 영상이 끝났다. 다시 새까맣게 꺼진 액정 속에는 에이드리언 제 모습이 담겼다. 그 태블릿 PC를 손으로 엎으면서 에이드리언은 가만히 생각했다.

저 애를 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왼쪽 골반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에이드리언은 상처를 성형하자는 부모님의 권유를 이미 거절했다.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잘한 선택이었다.

이 상처는, 그러니까. 아주 특별한 거 같았다.

* * *

기다리던 날은 빨리 왔다.

성 아녜스 보육원. 빨간 머리, 조슈아 베넷이 있는 곳. 재밌는 우연이었다. 성 아녜스는 그렌트사에서 후원하는 보육원 중 하나였다. 안전성이 극대화된 맥라렌을 타고 가면서 에이드리언은 수십 번도 더 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보육원 원생 신고서인 듯 간출한 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슈아 베넷. 17살. 2살 때 양친 사망 후 성 아녜스로 보내졌음. 양친 역시 따로 가족 없음.

혈액형, 키, 취미, 특기가 간략하게 적힌 그 종이를 바라보면서 에이드리언은 자꾸만 기대를 했다. 어떤 아이일까. 일부러 사진은 빼고 달라고 했는데, 사진도 달라고 할 것을. 괜히 아쉬웠다. 도착하면 볼 수 있겠지. 에이드리언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볼을 붉히며 우르르 제게 달려드는 아이들 사이에 조슈아는 없었다. 조슈아, 조슈아 베넷. 수천 번도 더 발음해 본 이름이었지만 정작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에이드리언은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강렬한 빨간 머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면 이미 체이스가 보고를 했을 것이다. 이 안에 있는 것은 맞았다. 그때였다.

“…슈아는요? 아직도 아파요?”

“누가 아픈가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수녀 두 명이 깜짝 놀란 듯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 앙큼한 연기를 기가 막힌다는 듯 보고 있는 체이스는 안중에 없었다. 화려한 금발과 여느 배우보다도 아름다운 얼굴, 빠져드는 녹갈색 눈동자에 수녀 역시 벽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 조슈아라고. 우리 원생 중 한 명인데. 요 근래에 끙끙 앓는 일이 잦아져서요. 한 달 반 되었나? 병원에 가도 이상은 없다 그러고.”

“왜 그때 울면서 왔잖아요. 전혀 조슈아답지 않게.”

한 달 반 전. 에이드리언은 아무도 모르게 혼자 눈을 번뜩였다. 한 달 반이면 딱 제 사고가 있던 때다. 그 사고로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에이드리언이 눈매를 가느다랗게 휘었다.

“있잖아요.”

귓가를 녹이듯 다정한 목소리에 수녀들이 무심코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들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에이드리언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조슈아를 보고 가도 괜찮을까요? 그만 괜찮다면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싶어요.”

“병아리색 방문, 거기로 들어가면 돼요.”

복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선물을 뜯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에이드리언은 샛노란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조심스레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통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방 안, 다섯 개의 침대 중 창 바로 앞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흐, 흐으….”

츠, 에이드리언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앓고 있다더니 이건 숫제 우는 소리였다. 흰색과 푸른색의 줄무늬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덕분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불 안에서는 막힌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에이드리언은 만지면 깨질 유리 세공품을 대하듯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강렬한 새빨간 머리와 대비되듯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그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동그란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혔다.

에이드리언은 직감으로 알았다. 조슈아는 악몽을 꾸고 있었다.

“흑, 흐….”

붉은 입술 사이로 끊어질 듯한 흐느낌이 비집고 나왔다. 그 순간, 에이드리언은 속이 울렁거렸다. 젖살도 빠지지 않은 어린애가 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죽이는 건 어디서 배웠을까. 이불을 꽉 그러쥔 하얀 손에 유난히 뼈가 툭 튀어나왔다.

안다. 아무리 이 보육원이 지원을 많이 받는다고 해도 결국 정해진 담당 수녀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봉사자들은 정해진 날에만 온다는 것을. 그에 비해 아이들의 수는 턱없이 많다는 것도. 하지만, 그래도. 저라면 이 아이를 혼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아픈 얼굴을 쓸어 주고, 만져 주고, 가끔 말랑거리는 코를 꼬집고. 그리고 이 악몽을 거둬 줄 텐데.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했던 마음에 균열이 생기고 욕심이 일렁였다. 에이드리언은 잔뜩 붉어진 입술을 살며시 눌렀다가 떼었다. 말랑할 줄 알았는데, 입술이 다 터서 까칠했다. 무게감에 놀란 듯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제야 기척을 느낀 듯 조슈아는 눈도 뜨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혼자, 있어도, 되는…데.”

다 갈라진 목소리였다. 말은 그러면서도 눈가가 휘어졌다. 젖은 눈꼬리를 따라 고여 있던 눈물이 똑 떨어졌다. 그 모습을 에이드리언은 하나하나 다 지켜보았다. 원래 열일곱 살은 이렇게 작고 마른 걸까? 이거야 원 빌 스웰딘 그 새끼보다도 더 작을 것 같았다. 그 새끼가 몇 살이었더라. 아마 열서넛이었던 거 같은데.

에이드리언은 천천히 앞머리를 넘기고 동그란 이마를 쓸어 주었다. 눈도 못 뜬 강아지처럼 끙끙대면서도 어떻게든 온기에 엉겨 붙으려는 듯 제 손을 따라왔다. 제 손바닥이 다시 한번 이마에 닿자 붉은 입술 끝이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그 처연한 모습이 너무나도 애틋해서 속이 울렁이다 못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울컥 치미는 기분은 난생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안녕?”

에이드리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 누구….”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할 만큼 부은 눈으로 조슈아가 되물었다. 대답이 없자 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천천히 속눈썹이 팔랑였다. 한 번, 또 한 번. 조슈아가 눈을 깜빡였다. 옅게 분홍빛이 도는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초점을 찾아가는지 에이드리언 쪽으로 고개가 기울었다.

“천…사?”

에이드리언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저도 모르게 나간 웃음소리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조슈아는 한발 늦게 그 다정한 웃음소리를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이 꼭 강아지 같았다.

“웃는 것도 예쁘네.”

“네?”

대답을 참 잘한다. 성실하기도 해라. 에이드리언이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 시키는 것보다 한숨 자는 게 우선이었다.

“좀 더 자.”

귀가 녹아내릴 듯 다정한 어조였다. 이불을 토닥이는 손길이 규칙적이었다. 다시 수마가 몰려온 듯 빨간 속눈썹이 느릿하게 감겼다. 예쁜 눈동자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한결 편안해진 얼굴은 마음에 쏙 들었다.

자는 모습이 참 예뻤다.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에이드리언은 말랑거리는 코를 톡 건드렸다. 이잉, 투정을 부리듯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마저도 안타까워서 에이드리언은 얼른 손을 떼었다. 자세히 보니 콧잔등에는 가까이에서만 보일 정도로 옅은 주근깨가 나 있었다.

그래, 조슈아 베넷은 이런 게 어울렸다. 넘어져서 그렁그렁하게 우는 것을 꾹 참거나, 혼자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누군가가 오면 강아지처럼 온기를 갈구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예쁘고, 연약하고, 무방비하게. 세상에 위험한 건 하나도 없다고 믿는 동화 속 왕자님처럼. 이렇게.

에이드리언이 조슈아 쪽으로 살짝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내가 지켜 줄게. 악몽이든, 뭐든. 그러니까.”

무해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달콤하고 세상모르게. 그렇게 아기처럼 자.

꼭 조슈아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조슈아의 입술 끝이 올라가더니 배시시 웃었다. 에이드리언은 그 아기처럼 말간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애는 내 거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언제나 날카롭게만 번뜩이던 녹갈색 눈동자는 다정하게 풀어진 채 오롯이 조슈아만을 향했다.

* * *

휴일의 볕이 따뜻했다. 햇빛에 눈이 부셨지만 조슈아는 자꾸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뺨을 간질이는 바람은 살랑거렸다. 봄이었다.

흐으. 조슈아는 기지개를 폈다. 찌뿌둥한 기운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더 그런 건지도 몰랐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원장 수녀님의 심부름으로 식료품 상점에 들렀다.

조슈아는 가만히 손가락을 접어 보았다. 지난주 토요일부터 오늘까지 총 일주일이었다. 요근래 계속 되었던 악몽을 꾸지 않은 게 말이다.

한 달 반 전부터였다. 햄버거를 먹고, 플라스틱 고질라 장난감을 받아 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정확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큰소리가 났던 것 같은데 그것마저도 어렴풋했다. 그 이후로 잘 때면 악몽을 꾸었다. 되게 무섭지만 깨어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기이한 악몽.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후원자가 왔다는 날부터였다. 더 시끄러울 것 같아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고 잤는데 오히려 더 조용히 잘 잤다. 무슨 꿈을 꾸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그냥 되게 좋은 꿈 같았다. 뭐, 깨어나고 제 협탁 위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까지 있었으니 예지몽이었던 걸까. 조슈아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노력했지만 희뿌연 구름에 가로막힌 듯 번번이 막혔다. 그러는 사이, 부지런한 걸음은 보육원으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걸음이 느려지고 갈색 눈동자가 커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안녕?”

귓가의 솜털이 오소소 설 만큼 다정하고 근사한 목소리였다. 맹세코 조슈아는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처음 보았다. 햇빛 아래 화사하게 반짝이는 금발과 조각을 한 듯 깊은 눈매 속 아름다운 녹갈색 눈동자, 도자기 인형처럼 하얗고 말간 피부와 이마부터 이어진 높고 우아한 콧날과 붉은 입술까지. 소년인지 아니면 성인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이 조슈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슈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오지 않게 노력했다. 그러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쓰며 대답했다.

“안…녕?”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방치된 차 두 대, 커다란 쓰레기통 하나가 전부인 이 일상적인 골목에서 저 남자는 마치 다른 그림인 것처럼 빛났다.

남자가 무언가를 찾듯 몸을 숙였다. 모델처럼 훤칠한 키로도 남자의 동작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가볍게 입은 듯 얇은 코트의 끝자락이 바닥에 쓸렸다. 막눈인 조슈아가 보기에도 흙먼지 이는 바닥에 끌리기가 미안해질 만큼 좋은 재질의 옷이었다.

“이 근처에서 우리 슈슈 봤어?”

“슈슈?”

조슈아가 무심코 되물었다. 참 예쁜 발음이었다. 정을 가득 들여서 지은 이름 같았다. 새침한 눈매가 축 처졌다. 시무룩하게 붉은 입술이 우물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조슈아는 숨을 삼켰다. 자신보다도 족히 한 뼘은 큰 남자가 애틋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응. 우리 슈슈. 예쁜 고양이.”

와, 씨. 그 고양이 참 보는 눈 없다. 저렇게 예쁜데 어떻게 달아났지? 이동장도 안 가지고 있는 건 생각 안 하고 조슈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 남자가 덧붙였다.

“이름까지 붙여 줬는데. 간식만 먹고 사라졌어.”

기르는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길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길고양이라도 어떻게 저 미모를 보고 가지?’ 하는 인간 중심적인 생각과 ‘간식 먹고 갔으면 끝났네’라는 경험이 충돌했다. 물론 두 개 다 말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참 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고양이한테 이름까지 다 붙여 주다니.

“나는 못 봤는데.”

조슈아가 말끝을 길게 늘였다. 제 말 한마디에 남자의 얼굴에 실망이 번졌다. 저 예쁜 얼굴에 실망이라니. 조슈아는 묘한 죄책감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자가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도 고마워. 지나가는 길이었을 텐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네.”

심지어 착하기까지 했다. 미안한 듯 눈매를 살짝 찡그리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조슈아는 홀린 것처럼 남자를 바라보다 아차, 하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계속해서 고양이를 찾는 듯 차 밑을 살폈다. 조슈아는 주춤거리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안 보려고 해도 계속해서 남자한테 시선이 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살짝 더운 듯 남자의 뺨에 복숭앗빛이 번졌다. 부채질이라도 대신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조슈아는 초인적인 힘으로 꾹 참았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열심히 찾는데. 조슈아는 자꾸만 망설였다. 걸음이 느려지다가 이내 멈추었다.

“괜찮으면….”

조용한 골목에 조슈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얼마나 긴장을 한 건지, 이 짧은 말을 하는 데도 음 이탈이 날 것만 같아서 조슈아는 잠시 침을 삼켰다. 남자가 느릿하게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저 녹갈색 눈동자가 오로지 저만 바라보자 발끝부터 몸이 배배 꼬이는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나른한 눈빛 탓일까, 아니면 살짝 벌어진 입술 때문일까. 배 안쪽이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이건 정말 작은 선의였다. 마침 휴일이고, 날이 좋고, 자신은 정말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단순한 배려였다. 제가 하는 생각이 더 변명 같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조슈아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같이 찾아 줄까?”

녹갈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마치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남자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만개한 장미꽃처럼 화사한 웃음은 모든 것을 녹일 것처럼 달콤했다. 그 순간, 어딘가 빠져 버리는 소리가 났다. 퐁당. 무엇이, 어디에 빠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에 조슈아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덕분에 조슈아는 몰랐다. 마냥 달큰하게만 웃던 녹갈색 눈동자가 진득한 욕망에 젖어서 제 목덜미를 바라보았던 것을. 먹잇감을 포획한 포식자의 눈처럼 어찌나 형형했는지.

조슈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애틋한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상냥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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