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날 밤 오지 않았던, <어제의 당신에게>
이제 정말 여름에 접어든 기분이었다. 7시가 넘었는데도 가로등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날이 밝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나씩 켜진 가로등이 있었다. 집 앞에서 조금 떨어진 연노랑빛 가로등, 그 아래가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조슈아는 걸음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아까 받은 연락을 떠올렸다. 며칠 전, 처음으로 받았던 모르는 번호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의 비서 마크 웹디즈드의 것이었다.
[미스터 베넷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 미스터 그렌트가 방문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 마크 웹디즈드]
정중히 의사를 묻는 메시지는 문장만 보고도 마크가 떠오를 정도로 무미건조했다. 직접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하니 비서 부려먹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조슈아는 에투왈 시절이 떠올라서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대개 조슈아는 그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그 뜻이 곧 화답인 것처럼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저기에 서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조슈아를 봤는지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이제 퇴근해요?”
“요즘 자주 오네요. 연속으로 4일째인가.”
조슈아가 무심히 얘기했다. 그리고 티를 내듯 손에 들린 봉투를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의 시선이 함께 쏠렸다. 오는 길에 사 온 맥주 두 캔과 아직 식지 않았을 1달러짜리 피자 두 조각이었다. 맥주 캔의 겉면에는 아직도 물기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에이드리언이 어색하게 입매를 당겼다.
“아, 목요일이니까요. 저녁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에이드리언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녹갈색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조슈아가 가만히 말했다.
“그거.”
조슈아가 에이드리언을 향해 말했다. 정확히는 등 뒤로 숨긴 손을 향해서. 신비로운 녹갈색 눈동자가 놀란 듯 커다래졌다. 조슈아는 우물쭈물하는 저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등 뒤로 숨긴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도.
에이드리언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긴장한 듯 꽉 쥐고 있는 봉투 겉면에 LA 컨벤션 센터라고 적혀 있었다. 역시나였다. 그래서 조슈아는 느슨하게 웃었다.
“안 받아요.”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웃지 못했다. 언제나 그러던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화사한 금발이 반짝였다.
“…내일 또 와도 돼요?”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조슈아는 여느 때처럼 대답하지 않고 스튜디오로 걸어갔다.
* * *
“진짜 하늘에서 시사회 티켓 하나 안 떨어지나.”
시작은 문화예술팀의 케일럽이었다. 맥카디 감독의 열렬한 광팬이라는 그는 넥스트 유어에서 영화 <어제의 내일에게> 개봉을 가장 기다리는 열혈 전도자기도 했다. 그런 그가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바로 저 말이었다. 한숨 푹푹 쉬면서도 눈에 가득한 희망에 보니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티켓은 안 떨어져. 케일럽.”
“하지만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그러잖아.”
“아무리 말하는 대로라고 해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의 월드 프리미엄 시사회 티켓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이제 좀 일 좀 해. 한 번만 더 티켓 타령하면 진짜 가만 안 두겠어.”
보니가 선뜩하게 이를 갈았다. 무려 한 달이나 참아 주었던 동기의 변화에 케일럽이 깨갱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카엘라가 짝짝 박수를 쳤다.
“보니. 요즘 진짜 조슈아 닮아 가는데?”
“내가요? 저렇게 심한 말을요?”
가만히 둘의 투닥거림을 지켜보던 조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정했다. 하지만 이미 물타기가 시작되었다. 보니는 잔뜩 선망 어린 눈으로 조슈아를 바라보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제 롤 모델이 조슈아거든요. 야망을 갖고 신생 스타트업에 입사하는 에투왈 출신의 비서.”
“크. 어마어마하지. 보통 인물이 아니야. 어떻게 그 대기업을 박차고 나올 수가 있지? 엘. 어떻게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인재가 찾아온 거죠. 그렇죠, 보스?”
“아무렴. 보니. 조금 더 조슈아 같으려면 마지막에는 희망을 불어넣어야 돼. 날 봐. 채찍과 당근 때문에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
마치 만담처럼 돌아가는 대화에 조슈아는 눈만 깜빡였다. 그제야 모두가 저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조슈아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진짜. 다들. 보스 요즘 아주 물 만나셨네요?”
하하하. 크리스는 자연스레 조슈아의 눈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제의 당신에게> 소설도 재밌었는데.”
“아, 보스. 진짜.”
간신히 케일럽의 <어제의 당신에게>에서 빠져나왔는데 크리스의 말 한마디에 케일럽이 눈을 반짝였다. 주변에 쏟아지는 야유에도 케일럽은 눈을 반짝이며 줄줄 이야기했다.
“원작부터가 무려 게일 피츠버그라구요! 솔직히 저 니콜라스 오브라이언 사망하고 맥카디 감독이 이 영화 안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다 그랬잖아요. 칩거한다는 소식도 막 들려오고. 그런데 그런 신예를 발견할 줄 누가 알았어요. 그 캐스팅 디렉터 진짜 상 수십 개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래도 다니엘 히들턴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어요. 데뷔작이 앤드류 맥카디 감독 작품인 거는. 어휴.”
케일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수백 번을 들은 이야기에 보니가 뒤에서 입모양을 흉내 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엘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사이, 조슈아는 문득 엘라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엊그제 연락이 왔었다.
- 조슈아 대박! 저 보스 따라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 가요! 기억하죠? <어제의 당신에게>!!! 물론 영화는 못 봐도 LA 컨벤션 센터를 공식으로 간다니까요?
진심으로 흥분한 듯 엘라는 취한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이미 다니엘 히들턴부터 주연 배우들의 SNS를 다 좋아요 눌렀고 몇 시간 몇 분 뒤에 시사회에 가는지 시간도 체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엘라는 조금 시무룩하게 말했다.
- 근데 사인은 못 받아요. 보스가 절대로 사인 받을 생각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조슈아는 조금 웃었다. 알만하다. 엘라는 빌을 모르는 척하고서라도 사인을 받고 싶어 했겠지만 빌의 싸늘한 시선 한 번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을 거다. 눈에 장면이 그려지듯 선한 풍경에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도’로 시작되는 위로를 늘어놓았다. 다행히 시사회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지 엘라의 목소리가 밝아졌었는데.
조슈아가 다시 케일럽을 바라보았다. 점점 눈매가 처지는 걸 보면 이번에는 한숨 섞인 말을 늘어놓을 차례였다.
“시사회 초대 리스트랑 초대 잡지 기자들 보니까 진짜 하늘의 별을 따는 게 더 쉽겠더라구요.”
빙고. 케일럽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사회는 최소화하자는 맥카디 감독의 이야기에 월드 프리미엄 시사회는 단 한 번이었다. 이 처진 분위기를 올리겠다는 듯 크리스가 짝짝- 박수를 쳤다.
“나중에는 그런 시사회에 당당히 초대받을 수 있게 넥스트 유어가 성장하는 수밖에 없겠네.”
“보스!”
케일럽이 촉촉한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아, 그냥 크리스라고 부르라니까. 크리스가 혼잣말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슈아를 향해 입술을 비죽했다. 조슈아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했다. 크리스가 피식 입꼬리로 웃음을 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일단 지금은 영화 개봉하면 다 같이 보러 갈까? 하루 야유회처럼 해서.”
그 말에 모든 사원들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하루 일을 안 한다는 게 반가운 건지, 아니면 영화를 보고 야유회를 간다는 게 즐거운 건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조슈아가 조용히 웃었다. 뭐, 영화만 잠깐 안 보면 되겠지.
순간 조슈아의 머릿속에 <어제의 당신에게>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을 도서관 책 기부함에 넣던 그때가. 어쩐지 손이 헛헛해서 조슈아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니었다.
* * *
<어제의 당신에게>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 당일은 무척이나 화창했다. 시사회장인 LA 컨벤션 센터 앞은 초대된 거물급 스타들과 영화 관계자들, 이 광경을 놓치지 않고 찍는 기자들과 리포터 그리고 팬들로 꽉 차 있었다. 검은 벤들이 줄지어 초대객들을 레드 카펫 앞에 내려주었다. 손을 한 번 흔들 때마다 귀가 떨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눈부신 조명들과 팡팡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도 레드 카펫을 걷는 배우들은 그보다 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레드 카펫을 찍던 카메라맨이 리포터를 향해 눈짓했다. 그리고 카메라가 리포터를 향했을 때 금발의 리포터 역시 시선을 사로잡는 핫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카메라를 향해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The Signal 시청자 여러분, 자넷 메이입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시겠죠? 바로 LA 컨벤션 센터 앞, <어제의 당신에게>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장입니다. 지금 할리우드의 별들이 레드 카펫 입장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 내리는 배우, 조시 브론테입니다. 라벤더 홀의 로즈라는 별명으로 우리에게 더 친근하죠. 그녀가 포토 존에 입장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제 오는 차들을 한 번씩 볼까요? 아, 저기 저기 말씀드리는 순간 들어오는 저 차를 주목해 주세요!!”
흥분한 것처럼 리포터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리포터만이 아니었다. 조시 브론테를 찍고 있던 카메라들과 팬들의 함성 역시 일제히 레드 카펫에 선 차를 향해 돌아갔다. 검은색 고급 세단 조수석에서 금발의 날카로운 미인이 내렸다. 미인은 자연스럽다는 듯 운전석 뒷자리를 열었다. 아르마니 구두가 레드 카펫을 밟는 순간, 소란스럽던 LA 컨벤션 센터 앞이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하지만 빌 스웰딘이 차에서 완전히 내렸을 때, 컨벤션 센터가 떠나갈 듯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포터는 비명에 묻히지 않게 악을 쓰며 말했다.
“빌 스웰딘입니다! 에투왈의 편집장이자 미국의 영원한 얼음 왕자님!”
태생부터 오만함을 타고 난 듯 웃음 한 점 없이 무감한 얼굴이었다. 손을 흔들고 키스를 날리는 다른 스타들과 달리 햇빛에 눈이 부신 듯 빌 스웰딘은 눈매를 슬쩍 찡그렸다. 사납고 날카로운 미모가 완벽하게 빛을 발하는 시점에서 리포터는 헉, 숨을 들이마시더니 다다다 말을 했다.
“세상에. 왕자님이 파트너 없이 혼자 입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벌써 몇 번째인가요! 우리가 사랑하는 악동이 드디어 무성애자가 된 걸까요? 아니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섹시한 빌런 이미지를 브루노에게 넘겨주려는 작전일까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에도 빌 스웰딘은 무심히 레드 카펫을 걸었다. 오직 빌 스웰딘의 체형만을 위해 만든 고급 슈트가 유려한 동작을 그대로 드러냈다. 모델의 역사를 털어 보아도 빌 스웰딘처럼 완벽한 얼굴과 이미지 그리고 몸매를 가진 모델은 없었다. 큰 보폭으로 걷는 워킹마저도 환상적이어서 이곳이 과연 시사회장으로 가는 레드 카펫 위인지 아니면 4대 컬렉션 패션쇼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팬이 아닌 사람들조차 빌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라인 근처로 뛰어들었다.
레드 카펫의 라인에 바짝 붙은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드들을 몸통으로 들이받으면서까지 한 번이라도 빌의 시선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빌의 옛 여자 친구들의 이름을 외치는 기자들부터 커다란 조명을 가져다 대는 취재진까지. 빌 스웰딘의 가드들까지 달라붙었지만 취재진과 파파라치들은 굴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라인이 무너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때였다. 포토 존도 그냥 지나치던 빌이 잠시 멈춰 섰다.
빌이 취재진과 팬들을 향해 돌아섰다. 깜짝 포토타임인가 팬들과 취재진의 함성과 질문들이 쏟아졌다.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고 플래시가 펑펑 터지며 빌을 비추던 때였다. 아주 슬쩍, 빌이 조금 웃었다. 붉은 입술 한쪽이 씩 올라갔다. 무표정해도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이 섹시한 웃음을 머금자 순간 말문이 막힌 사람들은 이내 더 큰 환호를 했다. 하지만 빌은 제발 한 번만 더 웃어 달라는 악다구니에도 이미 컨벤션 센터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멍하니 빌을 바라보던 리포터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보셨어요? 보셨죠? 저만 본 거 아니죠? 마이클, 잘 찍었어? 오늘 무슨 날인가요? 섹시한 왕자님의 팬 서비스라니. 이거 거의 최초 아닌가요? The Signal의 자넷 메이 단독이라고 붙여 주세요! 세상에. 이 모습을 실제로 볼 줄이야. 퇴근할 때 파워볼이라도 사야겠어요!”
한편 빌이 컨벤션 센터 안으로 들어갔을 때, 대기하고 있던 에밀리는 빨대를 꽂은 탄산수 병을 내밀었다. 그 옆에서 엘라는 이곳저곳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고생하셨습니다.”
흥. 빌이 콧방귀를 뀌었다.
“엘라.”
“네, 네!”
이크. 엘라가 목을 움츠렸다. 그렇게 주의사항을 들었는데 막상 센터 안에 들어오니 눈이 돌아갔다. 엘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앞서가는 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가 안 보여서 더 무서웠다. 분명히 레드 카펫에서의 환호성이 장난 아니었는데.
“…자랑해도 좋아.”
“네?”
저도 모르게 말끝을 올린 엘라가 헙, 하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빌이 힐끔 엘라를 뒤돌아보았다. 헐. 엘라는 조금 전 제 입을 막은 게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했다. 안 그랬더라면 저 주저하는 얼굴을 보고 “보스 어디 아프세요?”라고 호들갑을 떨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빌이 잠시 어깨를 으쓱였다. 그제야 엘라가 아는 보스였다. 태생부터 오만한 보스. 그 보스가 붉은 입술을 열고 말을 이었다.
“내 비서진은 다른 회사랑 달리 이런 곳도 오고, 뒤풀이도 갈 수 있다고. 지난번에 여기 온다고 자랑한 것처럼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기왕이면 기사 첨부해서.”
그 말을 끝으로 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시사회장으로 안내하는 스태프들이 빌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 뒷모습을 보던 엘라가 눈을 깜빡였다.
“…에밀리.”
“응.”
“보스 무슨 일 있으세요? 저러실 분이 아닌데.”
와. 심지어 팬 서비스도 하셨네요. 엘라가 핸드폰으로 빌 스웰딘을 검색하며 혀를 내둘렀다. ‘레드 카펫을 녹이는 얼음 왕자님’ 제목하고는. 당장 데스크에서 잘라 버릴 법한 타이틀이었지만 내린 사진 속 빌 스웰딘이 웃고 있어서 제목 따위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말 잘 듣는 엘라가 꾸역꾸역 제 SNS에 빌 스웰딘의 팬 서비스 기사와 더불어 지금 와 있는 센터의 포토 존 사진을 올렸다. 해시태그도 화려했다.
#왕자님비서, #백스테이지도왔다, #지난번에는샤넬쇼, #그렇지만오늘영화는못보지, #기다려요어제의당신에게, #돈쭐낼준비완료, #5번은기본이죠
이내 핸드폰에 하트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에밀리는 피식 웃었다. 몇 주 전 펍에서 나올 때 어쩐지 충격받은 얼굴이더라니. 조슈아한테 회사 자랑이라도 하다 까인 걸까. 미스터 그렌트에 미스터 밀러까지 있었던 걸 보면 분명 보스 속이 팍 상했을 텐데. 그래도 제게 나쁜 제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 서운한 마음 다독여서 오랜만에 투정 한 점 없이 시사회까지 이끌었으니까. 조슈아한테 고맙다고 선물이라도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 시각, 고급 호텔 스위트룸을 방불케 하는 호화로운 대기실을 나서던 앤드류 맥카디는 전화를 받았다. 수신자는 에이드리언 그렌트였다.
- 축하합니다. 미스터 맥카디. 해내셨네요.
“고마워요. 미스터 그렌트. 못 오게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거금을 투자했는데. 아쉽네요.”
귓가를 녹이듯 나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앤드류 맥카디는 침을 삼켰다. 파인더를 통해 보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얼마나 끝내줄지 생각만 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속내는 싹 감춘 채 전화에 집중했다.
- 저도 역시 정말 안타깝지만 급하게 출장이 잡혀서요.
“영화는 봤나요?”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매끄럽게 웃었다. 앤드류 맥카디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안 본 게 분명했다. 오만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영화를 만들라 명령하던 남자답지 않았다.
“…같이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문득 이전에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잘 안 된 모양이었다. 안타까워라. 앤드류 맥카디는 입 속으로 혀를 찼다. 그렇게 잘난 남자라도 안 되는 게 사람 마음이겠지.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게 만든 그 전화 때도 목소리가 운 것처럼 처져 있었는데. 그러다 앤드류 맥카디가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촬영 내내 분석은 수도 없이 했다. 오늘은 그냥 즐기는 날이어야 했다.
“…고마워요.”
그래서 진심으로 말했다.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정말이었다. 독선적이라 느꼈던 고집이 다시 한번 저를 카메라 앞으로 이끌었다. 전화 너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야말로요. 미스터 맥카디. 좋은 영화 감사합니다.
대화는 끝이었다. 다음에 보자는 뻔한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앤드류 맥카디는 핸드폰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스테이지로 향할수록 환호성이 더 커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벅찬 감정이 일렁였다.
“선생님, 지금 나가시면 됩니다.”
애제자인 마리 테사가 꼭 운 것처럼 젖은 눈으로 앤드류 맥카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앤드류 맥카디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마리 테사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여튼 단단해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물러서 촬영장은 어떻게 버텨.”
“제 별명이 미친개라는 건 선생님만 몰라주세요.”
“정말 안 믿기는 별명이구나.”
앞으로도 믿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으르렁거리며 사납게 짖어도 앤드류 맥카디에게 마리 테사는 가장 아끼는 제자였고 동시에 질투할 만한 후배였다. 그런 후배가 제게 오늘은 당신의 날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앤드류 맥카디는 빙그레 웃으며 무대로 나섰다.
뜨거운 조명과 열기를 더하는 환호성이 쏟아졌다. 무대 위로 붉은 장미꽃들이 수없이 쏟아졌다. 먼저 스테이지에 나가 있던 배우들과 메인 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앤드류 맥카디를 향해 박수쳤다. 우레 같은 소리에 앤드류 맥카디는 잠시 울컥했다. 이상했다. 이런 열기와 아주 가까웠는데, 이제야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중앙의 제자리로 갔을 때, 앤드류 맥카디는 팔을 넓게 벌렸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하듯 모든 자리의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VVIP 석을 바라보았다. 대투자자를 위한 가장 안락하고 값비싼 자리, 그 두 자리가 나란히 비어 있었다.
* * *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피땀을 흘린 배우들과 제작진의 이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투자자와 도움을 주신 분들의 이름까지 다 나온 뒤, 마지막으로 한 문장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 니콜라스 오브라이언을 기리며.’
그제야 관객들이 다시 한번 박수를 쳤다. 그중의 한 명이던 크리스가 제 옆에 있던 조슈아를 향해 중얼거렸다.
“와. 정말 기대했는데. 기대 이상이었어요. 조슈아는요?”
“저…도요.”
조슈아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려고 애썼다. 제 웃음이 어색하게 보일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크리스는 영화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까만 스크린을 주시했다. 조슈아는 몸의 힘을 최대한 뺐다. 어느 순간부터 꽉 다물고 있던 턱이 얼얼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깨물었던 입 안쪽 살에서는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상영관 내의 조명이 켜졌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서로의 소감을 나누었다. 넥스트 유어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흥분 상태였다. 물론 가장 흥분한 사람은 케일럽이었다.
“진짜 내 인생 최고의 영화가 갈아치워진 순간이에요. 물론 2위도 맥카디 감독 <호텔 707>이었는데.”
“진짜 왜 다들 맥카디 맥카디 하는 줄은 알겠더라.”
“그렇죠!”
상영관을 나가는 통로까지 모두가 흥분 상태였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며 모두가 맥주를 부르짖었다. 그 모습을 보던 크리스가 조슈아를 향해 슬쩍 중얼거렸다.
“조슈아. 어떻게 알았어요? 다들 잔디밭 나들이에는 관심 없는 거.”
함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일광욕을 하고, 주문한 피자와 콜라를 마시고 이른 저녁으로 펍에 가자는 크리스의 건전한 의견에 조슈아는 아주 사소한 조언만 얹었을 뿐이었다. 물론 여태까지의 회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조언이었긴 했다.
“사실 보스도 잔디밭 나들이보다는 맥주를 더 좋아하시잖아요.”
“…들켰네요.”
부끄럽다는 듯 크리스가 멋쩍게 웃었다.
예약해 둔 펍은 영화관에서 단 5분 거리였다. 여름에 접어들어 해도 길건만, 해가 가장 높이 뜬 시점부터 광란의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낮부터 들이닥친 예약 손님 수에 깜짝 놀라던 주방장은 화덕의 불을 가장 세게 지폈고, 끊임없이 구운 소시지와 피자를 내놓았다. 바쁜 와중에도 허허허 웃는 얼굴이 최고조에 오른 기분을 말해 주었다.
기분 좋기는 넥스트 유어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자, 이번에는 우리 보스 크리스 밀러를 위하여!”
“위하여!”
“아까 하지 않았어?”
“에이, 또 하면 되지.”
왁자지껄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슈아가 입매 끝으로 웃음을 빼었다. 아무래도 다 취한 게 틀림없었다. 이 소란함이 좋았다. 계속 시끄러웠으면 좋겠다.
중심축이 되는 엘과 미카엘라 그리고 피터는 이미 소시지 접시를 다섯 개는 쌓아 두었다. 계속 맥주를 주문하는 터에 주인이 병맥주를 얼음 바스켓에서 담아 줄 정도였다. 엘이 눈을 반짝거리며 조슈아를 향해 웃었다. 그러더니 병따개로 맥주 캡을 땄다. 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병 주둥이에서 서늘한 김이 올라왔다. 자연스럽게 조슈아가 병을 받아 들었다. 오. 엘이 감탄했다.
“조슈아. 어쩐 일이에요. 왜 이렇게 잘 마시지?”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죠. 마침 내일은 토요일인데.”
조슈아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뺨과 목덜미가 후끈거렸지만 상관없었다. 병맥주를 얼음 가득한 잔에 따르고 다시 잔을 들고 그것을 반복했다. 짠- 찰랑이는 맥주들이 테이블에 조금씩 넘치고 브루노가 질색하며 소리치고, 그 모든 게 웃겼다. 어느새 다가온 크리스가 조슈아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슬쩍 이야기했다.
“조슈아. 무리하지 말고요.”
“감사해요.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크리스는 입 속으로 뒷말을 삼켰다. 술을 그리 잘 마시지도 않는 사람이 벌써 몇 잔째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크리스는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조슈아가 슬쩍 크리스의 등을 밀었다.
“저기 지금 보스 찾는 사람들 엄청 많거든요? 저 진짜 조절해서 잘 마실 테니 걱정 말고 빨리 가세요.”
머뭇대던 크리스를 미는 사람은 조슈아뿐이 아니었다.
“크리스! 우리 같이 짠해요!”
“빨리 빨리요!”
“뭐야. 크리스 저쪽으로 가는 거예요?”
엘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크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흡사 기차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는 엘에게 밀려 크리스가 걸음을 옮겼다. 걱정 어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아도 조슈아는 그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맥주잔을 가볍게 흔들자 황금빛 밀 맥주의 거품이 토독거리며 올라왔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게 참 좋은데… 정작 조슈아 자신은 이 분위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계속 영화의 장면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연이어 올라오는 기억은 다시 에이드리언 그렌트와 이어져서.
그래서 조슈아는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목을 타고 터지는 탄산이 시원하다 못해 따끔거렸다. 술기운 탓에 계속 웃음만 나왔다. 어느새 제 테이블까지 온 케일럽이 맥카디 감독의 수작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찰나였다.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우웅- 진동했다. 혹시나 회사 관련 일인가 핸드폰을 열어 본 조슈아가 흐릿하게 웃었다.
[미스터 베넷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 미스터 그렌트가 방문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 마크 웹디즈드]
되게 오랜만이었다. 바로 위에 있는 메시지가 일주일도 더 된 걸 치면 정말로 오랜만이라서 조슈아는 잠시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장이라도 찍듯 매일 오던 남자가 시사회 당일을 기점으로 며칠째 오지 않았는데. 우연처럼 오늘이라니. 하필 제가 영화를 본 날이라니.
조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안 된다. 오늘만큼은 저 남자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보면 정말로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슈아는 간략하게 메시지를 썼다. 하도 마신 술 때문에 눈앞이 가물가물해지고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하도 오타가 나는 터에 핸드폰을 코에 바짝 들이대고 하나하나 타자를 칠 정도였다.
[안 괜찮습니다.]
조슈아가 전송을 눌렀다. 혹시나 매달리는 연락이라도 올까 무음 모드로 바꾸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덕분에 새로이 깜빡이는 알림이 왔다는 건 알 길이 없었다.
[메시지가 송신되지 않았습니다. 재송신하시겠습니까?]
버스에서 내린 조슈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속이 울렁거리는 터에 한 정거장이나 빠르게 내렸다. 무리해서 마시는 게 아니냐고 염려하던 크리스 말이 맞았다. 오늘은 정말 주량 초과다. 그것도 엄청나게.
실없는 웃음이 계속해서 나왔다. 지나가는 여자가 힐끗 보고 빙그레 따라 웃을 정도로 무해한 웃음이었다. 적당히 더운 바람이었지만 화끈거리는 뺨을 식히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아까 데려다주겠다는 크리스의 권유를 물린 게 다행이었다. 오늘은 그냥, 혼자 걷는 게 좋았다.
스튜디오가 있는 골목으로 빠지자 몇 없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어둑하게 깔린 어둠, 환하게 밤거리를 비추는 노란색 가로등 불빛까지 평소에 늘 보던 풍경이었는데 오늘따라 예뻐 보였다. 조슈아는 폴짝폴짝 뛰어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안 그래도 비틀거리는데 뛰어가다가는 다칠 수도 있다는 이성이 삐죽삐죽 돋아났다. 멍하고 이상하고 유쾌했다. 조슈아는 생각나는 음률을 그대로 허밍했다. 마치 영화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어?”
뒤늦게 조슈아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없어야 할 남자가 가로등 아래에 있었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분명히 메시지도 보냈었다. 그러니 눈치를 보며 제 말이라고는 철썩 같이 듣던 남자가 이곳에 왔을 리가 없다. 지난번만 해도 후다닥 뛰어가는 뒷모습에 웃음이 나왔는걸. 그러니까 저건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아닐 거다. 제 술기운이 불러낸 헛것일 거다.
조슈아가 푸스스 웃었다. 그리고 제 눈앞에서 짝- 박수를 쳤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하지만 다시 손바닥을 벌렸을 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사라지는 대신 저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조슈아는 아주 조금 비틀거렸다. 금방이라도 제 팔을 잡을 듯 다가오던 에이드리언은 머뭇대다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그리고 조슈아를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
“술 마셨어요? 내가, 부축해 줘도 괜찮을까요? 넘어질 것 같아서.”
조슈아는 빤히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분명 환영일 텐데. 빌어먹게도 제 기억 속의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참 예뻤다. 영화에서 본 주인공도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로 예쁜 얼굴이 조슈아를 향해 기울어졌다. 그래서 조슈아가 옅게 웃었다. 할 말을 잃은 듯 에이드리언의 붉은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조….”
“오늘 영화를 봤어. 당신이 주었던 티켓, 그 영화.”
“…….”
“영화가 정말 재미있더라구. 내가 책을 다 안 봐서 그런가?”
“…같이 보고 싶었는데.”
에이드리언이 어설프게 웃었다. 문득 옛날이 떠올랐다. 영화가 나오면 같이 보자던 그 얼굴이. 그 화사한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에이드리언이 해사하게 웃는 건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아득해서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꼭 저런 표정만 짓는 것 같았다. 애처롭고 애틋하고 어쩐지 어설픈 얼굴.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술에 전 혀가 어눌하게 돌아갔다.
“같이 안 보길 잘했어요. 왜냐하면 영화가 너무 절절하거든요.”
“…….”
“저 남자는 저렇게 절절해서 시간을 돌렸을까?”
“…….”
“그래서 그토록 후회한 그 시간에 갔구나.”
조슈아는 빙그레 웃었다.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아주 조금 흐릿해졌다. 다행이었다. 오늘 에이드리언 그렌트에게 오지 말라고 해서. 이제 점점 사라져 가는 저 환영에게 화풀이라도 할 수 있어서. 취한 기분에 내뱉는 말이라도 누군가는 들어 주었으면 했던 모양이었다. 조슈아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쪽은 안 왔는데.”
“…….”
에이드리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피식 웃었다. 모든 게 다 붕붕 뜨는 것 같았다. 딱 하나 제 앞의 저 남자만 빼고 말이다.
“절절하지가 않아서일까?”
“…조,”
에이드리언은 제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자꾸만 입술을 깨물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저를 바라보았다. 상처 받은 기색이 선연한 얼굴이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 연약한 모습을 보자 속내 깊숙한 곳에 있던 말이 무심코 나왔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
“당신을 용서하고,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
“그러면 우리는 무슨 관계가 될까?”
아니, 관계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이상하게 겁이 났다. 무언가 잘못 삼킨 것처럼 목 안쪽이 텁텁하고 시큰거렸다. 제게 떨어진 질문 탓일까. 고개를 든 에이드리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눈가가 붉어지고 계속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가 결국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조….”
“내가 누구야?”
“…….”
“어라. 대답 안 하네.”
조슈아는 농담이라도 하듯 유쾌하게 웃었다. 이제 술기운이 끝나기라도 하는 걸까. 점점 눈앞이 또렷해지는데 이상하게도 제 앞의 남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보였다. 에이드리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슈아 베넷.”
여름의 바람을 타고 귓가에 안착한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잘게 떨리는 음성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아서. 조슈아는 마치 물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한 번, 두 번. 조슈아가 눈을 깜빡이다 중얼거렸다.
“하여튼. 정말. ……좆 같은 에이드리언 그렌트.”
“…….”
“왜 안 와서. 왜 이제 와서야 겨우. 나한테 왜 이래서.”
횡설수설한 말에도 에이드리언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가만히 에이드리언에게로 걸어갔다. 에이드리언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조슈아는 손을 뻗어 에이드리언의 소매를 잡았다. 당황한 듯 에이드리언의 시선이 떨려서 조슈아는 체중을 싣고 에이드리언 가슴팍을 머리로 박았다. 제법 세게 박았는데도 탄탄한 가슴은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다. 조슈아는 입술을 비죽이다 고개를 들었다.
조슈아는 꿈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조슈아가 느릿하게 말했다.
“…이건 내 술기운일 거예요. 그렇죠?”
“…네.”
“나는 들어가서 푹 잘 거고. 당신은, 음. 푹 자지 마요.”
“…그럴게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조슈아는 아주 조금 비틀대면서 다시 스튜디오 입구로 걸어갔다. 보안 패드에 카드를 대고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푹 자야 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잠을 설칠 저 남자와 달리 개운하게 내일 일어나야 했다. 조슈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날 조슈아 베넷은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조슈아는 정말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그날 밤 영화를 보지도 못하고 하염없이 어두운 스크린만 응시했다는 것은 그저 그런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