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날, 성 아녜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정문을 넘어왔다. 에이드리언은 굳은 얼굴로 성 아녜스의 정문을 응시했다. 벌써 여섯 번째인데 이 앞에만 서면 괜히 숨을 고르는 척 시간을 끄는 습관이 생겼다. 닫힌 문 때문인가. 공연히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이 된 기분에 에이드리언은 침을 삼켰다. 어딜 가든 환영받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에이드리언이 쓰게 웃으며 차임벨을 눌렀다. 네- 하는 대답과 함께 나오던 원장 수녀가 에이드리언을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세월에 든 주름이 자연스레 접혔다.
“성실하네요. 미스터 그렌트.”
“감사합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꾸준히 올 줄은 몰랐는데. 일부러 힘든 일만 맡긴 건 알죠?”
에이드리언이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빈말이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변이 묻은 천 기저귀를 빨고, 수도 없이 쌓이는 설거지를 하고, 아무리 해도 티 한 점 안 나는 청소를 도맡아 했다. 어려서부터 모든 걸 다 잘한다 칭송을 받았는데, 애석하게도 집안일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모양이었다. 508호에서는 제 한 몸 살기에 어려운 건 없었지만 아녜스에서는 “이건 이렇게 하는 거예요.”라는 소리만 수도 없이 들었다.
“알겠지만 나는 미스터 그렌트가 탐탁지 않아요.”
처음 왔을 때부터 그래 보였다. 하지만 그래 보인다고 어림짐작하는 것과 직접 입으로 듣는 건 달랐다. 원장 수녀가 조슈아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 그랬다. 에이드리언은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원장 수녀는 에이드리언을 응시했다. 분명히 조슈아와 같이 왔던 크리스마스 때는 저 남자도 조슈아도 둘 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보였는데. 지금 이 잘난 남자는 속이 텅 빈 것처럼 웃었다.
“…조슈아가. 그 애가 밉다고 한 사람이 처음이라서. 미스터 그렌트가 계속 이렇게 나와도 나는 도무지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요.”
“그런 의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상관없습니다.”
“왜…냐고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그냥. 계속 미움 받아도 괜찮을 것 같거든요.”
남자가 흐릿하게 웃었다. 원장 수녀는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았다. 엉덩이라도 한 번 걷어차 줄 요량이었는데 묽은 옥수수 수프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어린애를 건드는 건 사양이었다. 뺨이 홀쭉한 것을 보던 원장 수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좀 힘들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매번 힘들었는데요, 뭘.”
원장 수녀가 짓궂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난히’라는 말인데. 오늘은 애들과 함께 놀아요.”
아. 에이드리언이 신음을 삼켰다. 원장 수녀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스무 명 남짓한 어린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중 또랑또랑한 양 갈래머리 여자 아이가 에이드리언을 가리키며 외쳤다.
“울보 아저씨 또 왔다!”
에이드리언은 반사적으로 원장 수녀를 바라보았다. 설거지도 좋고 빨래도 좋고 다 좋은데. 저렇게 어린아이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는 건 어쩐지 불안했다. 에이드리언은 원장 수녀를 응시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이건 아니다. 아닌 건 어떻게든 아니었다. 하지만 원장 수녀가 인자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오늘 함께 놀아 주실 선생님이셔.”
“와! 울보 아저씨가 우리 놀아 준다!”
“아저씨! 나랑 놀아요!”
“나랑도요!”
명랑한 목소리가 쨍하게 울려 퍼졌다. 금세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을 보며 에이드리언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크리스마스 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분명히 조슈아는 꼬마 천사들이라고 했는데. 이것만큼은 거짓말이 틀림없었다. 입매가 딱딱하게 굳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은 흡,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 꼬마 천사들이에요.”
조슈아가 예뻐하는 꼬마 천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국 에이드리언이 어설프게 웃었다.
그리고 오늘. 조슈아가 성 아녜스를 찾은 건 맹세코 우연이었다. 어젯밤 느지막이 본 TV에서 햄버거 광고가 나왔고, 햄버거 가게에 갔을 때 와르르 어린아이들을 보았다. 성 아녜스의 아이들이 떠오른 건 정말 우연이었다. 이 개연성 없는 수순 때문에 조슈아는 연락 없이 바리바리 햄버거를 사 들고 아녜스로 향했다.
그러니 에이드리언 그렌트가 여기 성 아녜스에 있는 것도 결코 저를 보기 위한 술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방문한 조슈아가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왔을 때,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아이들 사이에서 놀림을 받고 있었다. 흰색 셔츠와 검은 정장 차림에 병아리색 앞치마라는 언밸런스한 복장을 한 채 이도저도 못하고 쩔쩔 매고 있었다.
조슈아는 눈만 동그랗게 떴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눈을 깜빡였는데도 에이드리언은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며 악동들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생경했다. 생경해도 너무 생경했다.
빌 스웰딘과 함께 있으면 나긋하게 웃으며 입에 칼 문 개자식처럼 구는 주제에 앞니 빠진 어린아이들 스무 명에게 말리고 있었다. 아. 미운 일곱 살 스무 명이라면 에이드리언 그렌트라도 무리일 것 같기도 했다.
“어쩐 일이야. 이렇게 연락도 없이.”
조슈아를 발견한 수녀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아직 정신없이 노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휘말린 에이드리언은 조슈아가 온 것도 모르는 듯했다. 에이드리언의 반이나 될까 싶은 어린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조슈아가 말했다.
“다 같이 햄버거나 먹으려고 했거든요.”
조슈아는 양손 가득 든 햄버거 봉투를 들어 보였다. 무거웠겠네. 수녀들이 봉투 하나씩 받아 들었다. 팔이 늘어날 것처럼 무거웠던 봉투들이 떨어지자 살 것 같았다. 조슈아는 팔을 탁탁 털었다. 반팔 아래 훤히 드러난 팔뚝에 봉투 끈 자국이 벌겋게 드러났다. 조슈아는 무심코 팔에 난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원장 수녀님.”
“응?”
“왜 저기 있어요?”
제 목소리가 부디 떨리지 않았으면 했다. 눈치 빠른 원장 수녀님한테 제가 미워하는 사람까지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 미스터 그렌트. 원장 수녀가 에이드리언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왜. 아니 그걸 떠나 왜 아이들을. 목이 콱 막혔다.
원장 수녀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다. 수녀들을 비롯해 규칙적으로 오는 봉사자 선생님들이나 아이들을 케어할 수 있었다. 오지 않으면 상처를 받는 건 다 아이들 몫이라서.
원장 수녀가 잔잔하게 웃었다.
“좌천이야. 빨래는 아주 못하더라구.”
“네?”
“몇 주 되었어. 매주 토요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쭉 있다 가. 애들도 이제 별명으로 불러.”
“무슨….”
“울보 아저씨.”
꼬마 지미가 이야기해 줬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구. 원장 수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 조슈아다!”
“조슈아?”
아이들 중 한 명이 조슈아의 이름을 불렀을 때, 에이드리언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보았다. 분명 오늘 온다는 연락이 없었다고 원장 수녀가 그랬는데. 저 앞에 있는 사람이 조슈아가 맞아서, 녹갈색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가서 햄버거 먹어.”
와아- 하고 달려드는 매기를 능숙하게 껴안으며 조슈아가 웃었다. “왜 이르케 오랜만에 와.” 볼멘소리를 하며 조슈아의 뺨을 콕콕 찌른 매기가 조슈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조슈아는 “미안 미안.” 웃음 섞인 사과를 하며 덧붙였다.
“근데 햄버거 안 먹어? 치즈 스틱은….”
“따끈할 때 먹어야지. 내려 줘.”
하여튼 똑 부러진다. 꼬마 지미가 손가락만 배배 꼬며 할 말을 삼키던 제 어린 시절을 닮았다면 매기는 정말 유일무이한 아이였다. 조슈아가 내려 주자마자 미련 없다는 듯 매기가 안으로 들어갔다.
조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다 들어갔고, 마당에 남은 사람은 조슈아와 에이드리언 둘이었다. 조슈아는 벤치로 걸어갔다. 벤치 위에 있는 봉투에는 점점 식어 가는 햄버거와 불투명한 일회용 테이크아웃 잔이 들어 있었다. 그 봉투를 들고 에이드리언 쪽으로 걸어갔다.
“조슈…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에이드리언이 깜빡였다. 그 순진한 표정이 웃겨서 조슈아는 부러 단단한 얼굴로 봉투를 내밀었다.
“일했으니까요.”
“아, 저.”
에이드리언이 잠시 우물쭈물했다.
“…모자라지 않아요?”
“넉넉히 사 왔어요. 안 먹어요?”
“먹어요.”
혹시나 빼앗아 갈까, 에이드리언이 황급히 대답했다. 봉투를 받아드는 손이 조금 떨렸다. 에이드리언이 봉투를 열다가 조슈아를 보고 물었다.
“안 먹어요?”
“먹었어요.”
대화가 끝났다. 풀 죽은 기색이 언뜻 스치더니 이내 에이드리언이 햄버거를 꺼냈다. 그리고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치즈버거네요.”
치즈버거에 애틋한 눈길이라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햄버거가 아니라 소중한 기념품인 줄 알겠다.
“가장 저렴하거든요.”
괜한 의미 부여하지 말라는 듯 선을 긋는 말투에 에이드리언이 푹 고개를 수그렸다. 모르는 척 조슈아는 무심한 얼굴로 에이드리언이 햄버거 포장지를 벗기는 것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 그렌트는 햄버거 하나도 우아하게 먹었다. 문득 처음 같이 치즈버거를 먹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양상추며 고기 패티 한 조각도 흘리지 않고 먹었다. 그래서 조슈아가 여상하게 물었다.
“애들 앞에서 울었어요?”
큽,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이드리언이 입술을 꾹 다물고 가슴 부근을 탁탁 두드렸다. 마실게 필요했는지 에이드리언이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는 빨대를 물었다.
“아, 그거.”
콜라인데. 조슈아가 말할 새도 없이 빨대를 빤 에이드리언의 눈이 붉어졌다. 으. 조슈아는 괜히 제 목이 다 따가운 느낌이었다. 잔기침을 한 에이드리언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네. 아, 그리고. 안 울었어요. 여기서 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별명이 왜 그래요?”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그래도 별명 지어 준 친구한테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왜요?”
“조…슈아랑 이렇게 오래 이야기한 거. 진짜 너무 좋아서요.”
에이드리언이 화사하게 웃었다.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고 그린 듯 깊은 눈매가 사르르 접히며 녹갈색 눈동자가 달큼하게 번졌다. 조슈아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올렸다.
후에 생각해 봐도 절대 다른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가상하다든지, 힘내라든지 그런 것보다는 그냥, 한번 툭 치고 싶었다. 그래서 조슈아가 저도 모르게 에이드리언의 등을 한 번 툭 쳤다. 그 순간, 에이드리언의 몸이 조슈아 반대 방향으로 쑥 빠졌다. 녹갈색 눈동자가 커다래지고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에이드리언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마치 치한이라도 만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에이드리언의 예상 반응이 수십 개는 떠올랐는데 그중에 이런 반응은 없었다. 조슈아의 눈이 냉랭해졌다.
“…뭐예요? 치한이라도 만난 것처럼?”
“안, 그게, 아니고….”
말이 엉켰다. 에이드리언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더 격렬하게 아니라고, 진짜 놀라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데 손에 들린 반쯤 먹은 햄버거와 테이크아웃 잔 때문에 손동작이 소극적으로 까딱였다. 등에 닿은 손이 마치 불덩이처럼 느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정작 입은 고장 난 로봇처럼 띄엄띄엄한 단어만 내뱉었다. 이미 빈정이 상한 듯 조슈아의 눈매가 쌀쌀맞게 치켜 올라갔다.
“너무, 너무 놀라서요.”
에이드리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슈아에게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조차 모를 만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정말 너무 놀라서 그랬는데. 아무래도 저는 오늘 세상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별똥별처럼 떨어진 기회를 놓쳤다. 이 순간이 너무 허망했다. 제발 딱 1분만 시간이 거슬러 가면 좋을 텐데. 화 많이 났을까. 에이드리언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다 멈춰 버렸다.
저를 바라보는 눈매가 느슨하게 휘어지더니 조슈아가 웃었다. 정말 웃긴다는 듯 눈꼬리가 가늘게 접힌 채 입꼬리가 올라간 웃음은 마치 하늘 어딘가에 뜬 하얀 낮달을 닮아 있었다. 너무 예뻐서, 에이드리언이 따라 웃었다.
저렇게 예쁜 웃음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에이드리언은 아쉽고 안타깝고 동시에 조슈아가 아주 많이 고팠다. 그냥 계속 조슈아가 웃었으면 좋겠어서, 에이드리언의 웃음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그 얼굴이 꼭 우는 것 같아서 조슈아는 울보라고 놀리려다 참았다. 그리고 조슈아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달았다. 길고 길던 여름 해가 느리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발 아래로 난 그림자가 점점 늘어지더니 아주 조금, 겹쳐졌다.
<당신의 거짓된 다정에 반하여 –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