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 =========================
황후가 기거하는 처소를 음월전(陰月殿)이라 하여 황제의 처소인 태양전(太陽殿)과 쌍으로 취급했다.
음월전이야 당연하게 육궁(六宮)의 주인의 처소니 가장 크고 그 규모가 위용이 있었지만 황후의 사치를 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 탓에 그 흔한 벽화나 도자기, 보석이 없었고 휘장마저 비단이 아닌 흰 천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국색인 황후가 있는 것만으로도 그 빛을 발하고 있었고 황후의 존재감이 그 넓은 궁에 장신구 하나 없어도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황후 희 치를 말하자면 궁중의 사람이라기보단 꼿꼿한 선비, 혹은 대쪽같은 무장에 가까웠다. 희 치는 가끔 음월전 구석에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는 대나무숲에서 명상을 하곤 했으니 그 자태 또한 고고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푸르고 곧은 대나무가 무성한 후정의 숲. 간간한 바람이 휘날릴 때 그 가운데에 앉아 있는 허리가 곧은 사내. 수수한 옷을 입었으나 오히려 선비와 같이 묵향이 나고 마음은 대나무보다 곧다. 단호한 눈매는 대잎보다 결연하고 높고 칼날같은 코는 성품과도 같았다. 멸국의 맥수지탄(麥水之嘆) 속에서도 붉은 마음(丹心)을 지켰던 그 옛날의 굴원같이 꼿꼿한 모습이다.
소성황후나 인온황후를 모시던 이들도 인정하기를 현 황후의 외모는 남녀와 시대를 초월한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황후를 모시는 이들이 그가 총애를 받지 않음을 탄식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희 치는 일말 동요도 하지 않았고 오직 음월전에서 칩거하는 삶을 유지했다. 그저 내명부를 장악하였고 황후로서 책무만을 그저 다한다. 희 치가 황후 궁에서 한가로히 내명부의 장부를 들여다 보다가 문득 일어난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희 치, 네 이놈!!"
희 치가 속으로 생각한다. 결혼을 한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 경은 무례하게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크나큰 무례라 친구 사이에도 호휘하지 않는 것이 도리 아닌가. 대대로 황제 황후가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경은 황후를 사랑은 커녕 존중조차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리라.
"왜 그러십니까."
덤덤하게 말하는 희 치가 문을 부수듯이 열어 젖힌 사내의 얼굴을 빤히 본다. 씩씩 화를 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벌겋다. 사내가 버럭 소리지르면서 옆에 있던 탁자를 손과 발로 부수었다. 궁인들이 비명을 지르자 희 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황후가 어찌 투기를 하여 후궁의 팔을 부러트린단 말이냐!"
"꺄아악!"
"고정하십시오, 폐하! 옥체가 상하십니다."
탁. 희 치가 손에서 장부를 내려 놓는다. 황제를 호위하는 호위대장 오 상환의 얼굴이 퍼렇다. 이미 말리다가 얻어 맞은 것이겠지. 희 치가 겁을 먹은 궁인들과 어떻게 퍼렇게 변한 그 뒤 태감과 궁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가라앉은 눈을 했다.
"백 미인이 황제께 퉁퉁 불은,"
"그만!!"
안 그래도 고금제일미남으로 칭송받는 황후에게 그 말을 들었다간 정말 훼까닥 할 것만 같은 이 경이 버럭 소리질러 그 말을 막는다. 영선의 팔이 부러졌다는 소식에 치솟던 연민과 분노, 걱정이 순간 사그라들고 이 경의 마음 안에서 다시 영선에 대한 화가 울컥 지솟았다. 정신을 차린 이 경이 황후를 매섭게 쏘아 보곤 그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 경의 몸이 파들거리면서 떨린다. 이 경은 씩씩 거리면서 숨을 몰아쉬고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황후가 이 경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이 경은 그러나 이어진 황후의 말에 또 버럭 화를 내고야 말았다.
"처분은 그럼 어떻게 거세시킬까요?"
"뭐라?!"
이 경이 충격받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후를 본다. 희 치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두 번이나 불경한 말을 했으니 그 처벌은 사형에 준하지만 후궁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요. 대개 여성은 자결로 끝냈으나 남성은 자궁(自宮)으로.."
"이런 제기랄! 그런 말 하지도 말게!"
이 경이 진심으로 질색해서 빠르게 면박을 준다. 희 치가 은은한 미소를 입에 띤다. 이 경이 도리질을 하면서 황후를 매섭게 노려 본다. 이 경이 그를 죽일 수 없는 것을 알고 저리 말을 하는 것을 안다. 이 경이 그것이 얄밉고 괘씸하여 이를 아득아득 간다.
영선의 주둥아리가 자유분방한 것은 이 경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영선도 지엄한 황궁 법도에 입조심을 하고 있었는데 간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결국 사태를 초래한 것이었다.
이 경이 이를 아득 간다. 이 경이 그 말을 들은 것은 무려 잠자리를 하던 도중이었다.
영선이 열심히 이 경 위에서 밤일을 하고 있었고 이 경도 열심히 헉헉 거리면서 그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땀을 흘리던 영선이 이 경을 내려보다가 기어이 그 자유분방한 주둥아리를 놀리고야 말았다.
'진짜 못생겼습니다.'
이 경이 온 몸을 들쑤시는 쾌락을 느끼는 와중에 들은 벼락같은 개소리에 충격 받아 눈을 크게 뜬다. 영선이 멋쩍게 웃고 있으니 이 경이 울화를 내면서 주먹으로 영선을 친다. 그리고 영선은 웃으면서 이 경이 말을 더 이상 못하게 더욱 거칠게 그를 몰아 세웠다.
'퉁퉁 불은 만두 같이 생겼습니다.'
이 경은 그 말을 듣고 울고 불면서 도리질을 치며 몸을 허우적 거렸고 영선이 아차 싶어서 이 경을 살살 달래고 성감을 자극하여 겨우 정사를 끝내었다. 이 경이 서러워서 화내어 울며 돌아간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돌아온 이 경은 그 날 태양전 침대에 엎드려서 계속 엉엉 울었고 황후가 달래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로 분노하여 마구 소리질렀다.
'백 씨를 죽이겠다! 죽여 버리겠다!'
그리고 그 말이 무색하게 지금 이 경이 황후에게 씩씩 거리고 있다.
이 경이 백 미인이 태형을 당해 팔이 부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방금이었다. 밤새 울면서 잠을 설치고 밥을 먹는둥 마는둥 깨작거리던 이 경이 그 소식을 듣자 마자 뛰쳐와 황후에게 노하여 소리치니 이 경도 스스로가 한심했으나 애써 무시했다. 어쨌거나 백 미인은 팔이 부러졌다. 이 경이 노기가 등등하여 희 치에게 화를 낸다.
황후도 이 경도 사실 이 사건이 더 이어지면 백 미인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은 둘 다 원치 않는 일이었다.
결국 이 경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앞으로 백 미인을 처벌할 때 태형은 금하오."
"송구하나 그것은 내명부의 일. 황제께서도 존중하셔야 합니다."
이 경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나 희 치는 태연하게 그를 바라본다. 이 경이 주먹을 부들 떨면서 희 치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때리고 싶어하는 티가 났으니 희 치는 그런 이 경을 응시할 뿐이다. 사실 희 치는 항상 옳은 말을 했고 이 경은 그것을 알기에 억울하면서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더 분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황후는 내명부의 주인이니까.
이 경이 희 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황후의 처분이 심히 옳으니 그것으로 끝내지."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퍽이나!
이 경이 빈정거리는 것을 희 치는 모른 척한다. 그들에겐 이젠 너무나도 익숙한 일 아닌가. 이 경이 황후를 증오하고 괄시하는 것은.
황제는 황후를 몹시도 싫어한다. 그 감정은 희 치가 내명부를 장악하고 나서 더 심해졌다. 그 전까지 한비가 담당하던 내명부였으나 수장으로서 관리한 것이 아니기에 황제는 황궁을 완전히 장악했었다. 허나 희 치가 황후가 된 이후로 황제는 황궁의 일은 희 치에게 양보를 해야 했다. 그게 원래 정해진 법도였으나 이 경은 오히려 희 치를 심하게 경계하고 미워했다.
그건 이 경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희 치는 그냥 황후도 아니라 백성만민이 사랑하던 영웅 출신이었고 황제를 위협하는 권세가였던 자였다. 황제는 언제라도 희 치가 자신을 칠까 경계하였기에 희 치의 그 발빠른 처신을 안 좋게 여겼다.
이 경은 더 이상 황후의 얼굴을 보기 싫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무례하게 방을 나선다. 이 경의 화가 난 뒷모습을 황후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뿔 난 어린애 같군.'
나이도 적지 않은 양반이 어찌 저리 하는 행동이 어릴까. 황후가 무심코 웃다가 아차 싶어서 다시 표정을 고요하게 바꾼다. 이 경이 언제 또 백 미인과 화해할지 황후가 속으로 점쳤다. 아마 말의 수위가 조금 셌으니 보름은 갈 것이다, 아마 한 달은 가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또 화해하고 또 저리 싸우겠지? 언제 또 백 미인의 주둥아리가 나불거릴까.
그렇게 생각하던 황후의 예상이 빗나간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다. 이 경이 백 미인 대신에 다른 후궁을 총애하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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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화는 백 영선과 같이 입궁한 후궁이다.
그의 아버지는 도올 서쪽의 번국들을 총괄하는 도타르 총독이었으나 그의 어머니는 혼혈인 천첩이였다. 즉 구 화는 천출 서자이었으나 다행히 극양인이고 더욱이 사내 아이인지라 차별을 심하게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입궁을 하고 나서는 그의 인생은 매우 불행하였는데 첫날밤에 황제와 초야를 치루고 난 후 일년이 넘도록 독수공방을 하여 총애를 받지 못한 탓이었다.
그것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로 구 화가 처음 이 경을 안을 때 탐탁치 않아 하는 티를 냈던 것이다. 구 화는 상류층 사람이라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였지 음인이라도 사내를 안기를 꺼려했다. 대개 도올인들은 남녀로 신분을 구분하고 양음으로 부부의 인연을 가름하였는데 구 화는 특이하게도 여성 음인만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구 화가 초반에는 뻣뻣하였으며 이 경의 향을 맡고 나서는 허우적 거리면서 서툴게 그를 안아 이 경의 짜증을 샀다. 이 경은 구 화와의 초야를 별로 즐기지 못하고 그를 버려둔 것이었다.
구 화는 그 때의 일을 몹시도 후회했다.
'싫어도 좋다, 좋은 척이 아니라 진정으로 좋아해야 하는 것이 이 궁궐에서 살아 남는 법인데 내가 어리석었다.'
구 화가 보기 힘든 극양인이므로 총애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은데 이토록 일이 난잡하게 진행되었으니 구 화는 한탄하고 한탄할 다름이었다. 다시 일을 되돌리고 싶어도 구 화는 그러지 못했다. 두번째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 경을 독차지 하고 있는 백 영선 때문이었다.
구 화와 다르게 합방을 하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응에서 귀비까지 껑충 뛰어오른 백 영선. 그만한 출세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고 심지어 황손도 보지 않고 뒷배도 없는 것이 총애로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구 화는 백 영선의 출세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백 영선은 가난한 집안이었으나 그의 출세로 아버지는 숙릉군(淑綾君)으로 책봉되고 집안 전체가 영화를 이루었다. 영선은 이제 온갖 보석과 비단들로 자신의 궁과 몸을 꾸몄고 그는 사냥을 가고 온갖 매를 수집하여 아껴 길렀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저 것이 구 화가 나아갔어야 하는 길이다. 저 것이 초야에서 구 화가 외면한 길이었다. 한탄하고 또 한탄했다. 궁궐에서 부귀영화와 존귀는 모두 황제의 총애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구 화는 그를 보고 깨달은 바가 컸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노력하는 자에게 하늘이 복을 내린다고 했던가.
그의 복은 넝쿨채 들어왔는데 첫째로 백 영선이 그 전설에 가까운 혀놀림으로 총애를 잃고 미인으로 강등되었고 둘째로 동시에 짜증이 난 이 경이 차마 영선을 다시 가까이 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탄 것이다. 셋째로 이 경의 환관인 류 태감이 외로움을 달래줄 새로운 환관을 모색했으며 넷째로 도타르 총독 휘하의 관리 출신인 아비를 둔 궁녀가 그 주위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 궁녀는 똑같은 도타르 출신에 똑같은 서출이여서 구 화에게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꼈으며 구 화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궁녀가 슬며시 구 화의 이름을 흘렸고 류 태감은 극양인에 출신이 좋은 구 화를 황제에게 추천하였다.
구 화는 벼르고 있었고 준비를 차곡히 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으니 구 화는 소문을 모으고 이 경의 취향을 연구하여 이미 전략을 짜는 둥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대망의 밤.
이 경은 후궁에 가길 귀찮아 하여 구 화를 불렀고 구 화는 꾸미지 아니하고 감정의 동요를 내보이지 않은 채 복도를 걸었다.
"구 재인 드옵니다."
고 태감의 말과 함께 열린 문 안은 넓고 화려했다. 구 화는 연기가 뭉게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부린다.
'수면향.'
마음을 진정시키는 향이라지만 향 같은 사치품이 귀한 도타르 출신인 구 화는 별로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매캐한 것이 차라리 꽃을 놓을 것이지 왜 탄연기를 마시는 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경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서 앉아 있었고 구 화는 성큼거리고 걸어가 향을 손으로 비벼 껐다.
이 경이 버럭 소리질렀다.
"뭐하는 짓이냐!!"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이 경의 호통에 구 화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이 경을 바라본다. 기가 죽지 않은 구 화의 모습에 이 경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 봐라.'
흥미를 가진 이 경이 구 화를 바라본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구 화는 선이 굵고 영걸한 미남이었다. 그러나 몸은 그 인세의 어느 것보다 완벽한 무인의 것이요, 얼굴은 경국인 희 치와는 다르게 어찌보면 수수하기까지하다. 그런 딱히 이 육궁에서 특별할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하게 잘생긴 사내일 뿐이다. 그러나 이 경은 구 화에게 곧 흥미를 느꼈다.
구 화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향을 마시면 먼지를 흡결하여 몸이 상합니다."
"네 놈이 알 바는 아니지."
"알 바입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구 화의 눈매가 굳다. 이 경이 침묵하여 구 화를 바라본다. 구 화가 당당하게 그 시선을 마주하면서 생각했다.
이미 구 화가 초야에서 황제에게 서툴고 무뚝뚝하게 대했다. 그러므로 다시 친한 척 하거나 사랑하는 척 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차라리 이 경은 무관(武官)의 습성에 익숙하기에 그를 연기하기로 택한 것이다. 구 화는 자신을 서툴고 무뚝뚝하지만 진정성 있는 사내로 포장하기로 결심하여 미리 준비한 상태였다.
이 경이 구 화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올라 와라."
============================ 작품 후기 ============================
1. 다음편 또 노블이얔ㅋㅋㅋㅋㅋ 이렇게 떡씬을 많이 쓰려고 한 것은 아닌데ㅠㅠㅠ
2. 궁중암투물 개좋아영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