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48)

00007 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 =========================

 제 옆에 앉는 구 미인에게 단 수의가 엄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보시게. 거기는 백 미인의 자리이네."

 단 수의가 눈치는 없어도 입궁을 이 경의 태자 시절부터 모신지라 존중 받는 이였으니 구 미인은 면박은 주지 않아도 웃으면서 대꾸한다.

"같은 5 품 미인인데 제가 여기 앉을 자격이 없습니까?"

 백 미인이 이것 봐라, 하는 심정으로 구 미인을 바라본다. 그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몇몇 후궁들이 당황해서 바라보나 서열이 낮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를 말릴 수 있는 황후는 잠자코 그것을 보고 있었고 다른 다섯 명의 서열 위 후궁들 또한 관조하고 있었다. 단 수의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고 한 충용과 탁 첩여는 애초에 입을 뗄 생각이 없었다. 총애 받지 않는 이들은 애초에 품계가 높다 하여도 총애 받는 후궁에게 이길 수가 없는 노릇.

 황자를 가져 몸을 사려야 하는 한비와 견 완용도 입을 다무니 그것은 오로지 백 미인과 구 미인의 몫이였다.

 백 미인이 평소와 다른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차갑고 빈정거리는 미소라 그것을 지켜보는 구 미인의 가슴이 섬칫해 진다.

"엄연히 같은 미인이여도 구 동생은 늦게 봉해졌으니 내 자리 아닌가?"

"구 동생?"

 구 미인이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한다.

"같은 입궁 동기에 엄연히 나는 백 동생보다 형인 것으로 아는데."

 그것도 여섯살이나 차이나는 것을 뻔뻔스럽게 동생이라고 칭하는 것에 구 미인이 진심으로 황당해하여 바라본다. 백 미인이 담담하게 말을 했다.

"그러나 구 동생이 일 년이 되도록 재인이었으나 나는 좀 다르지 아니한가."

 홀대 받던 시절 일은 구 미인에게도 역린과도 같은 기억이다. 구 미인이 진심으로 울컥해서 표정을 구기고 목소리를 높혔다.

"그러나 백 동생은 죄를 지은 몸인데 어째서 이 형과 우열을 가리려 하는가."

"내가 볼 때는 구 미인의 말도 옳습니다."

 한비가 그 때 끼어들어서 구 미인의 편을 들었다. 그는 곧은 사람이여서 당파를 떠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에만 목소리를 내었다.

"백 미인은 비록 귀비까지 올랐으나 큰 죄를 저질러 근신 중인데 구 미인의 지금 행동이 옳은 것은 아니라 하나 자리를 다투는 것은 보기 안 좋습니다."

 그리고 그 때였다. 백 미인이 웃으면서 가볍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 전에 출신부터 따져야 합니다."

"응?"

 황후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둘을 바라본다. 출신이라 말하면 백 미인은 가난한 집안 자제고 구 미인은 도타르 총독의 아들로 뒷배가 있다. 구 미인이 황당한 얼굴로 백 미인을 본다.

 구 미인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도올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주둥아리를 가졌다고 칭해지는 백 미인을 무시한 것이었다. 백 미인은 미소를 지으나 눈은 웃지 않은 채로 구 미인을 바라본다.

"구 미인의 어미는 엄연한 도타르 혼혈 천첩 노비로 알고 있는데 그 근원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새끼가!!!"

"저, 저런!!!"

"구 형, 그만!!"

 순간 진심으로 열받은 구 미인이 백 미인의 멱살을 잡아 채고 주먹을 치켜 올린다. 여기 저기서 비명이 쏟아져 나오나 멱살이 잡힌 백 미인의 얼굴은 태연하다. 그 얼굴을 본 구 미인이 치켜 올린 주먹을 부들거리면서 멈췄다. 구 미인이 이를 악물면서 간신히 화를 참아 누른다. 몸이 분기로 떨려 왔다.

'참아야 한다. 어쨌거나 비빈이다.'

 그래도 후궁인지라 때리면 구 미인의 입신양명도 물거품이 된다. 구 미인이 충혈된 눈으로 백 미인을 노려보았다. 백 미인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엄연한 명문가의 자식으로 아버지는 10 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관리이시고 어머니는 문인(文人) 양가의 자제로.."

"백 미인!!"

"세도가라 하나 천출 얼자와 적통 자제와의 차등을 두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뻔뻔스럽게 말을 마친다. 그 담력이나 말의 수위에 놀란 후궁들이 넋을 잃고 그들을 바라본다. 궁중의 용어가 직설적인 것을 기피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백 미인은 대놓고 네 어미가 천하다고 깔본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자 같은 명문가 출신이나 적자인 견 완용이 중재하여 백 미인의 손을 들었다. 어쨌거나 그 또한 적자였기에 말의 수위는 문제라 생각하나 공감하는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백 미인의 말도 틀리지 않아. 그가 근신을 한다 해도 그 전에 구 미인의 윗사람이었고 한순간에 서열을 바꾸는 것도 옳지 않으니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어떤가."

"견 형님께서 어찌.."

 구 미인이 이를 아득 갈면서 말을 하자 그제서야 흥미롭게 그것을 지켜보던 황후가 상황을 짧게 정리했다.

"구 미인이 양보하게."

 어찌 되었건 견 완용은 황자의 아비라 그 말은 존중받아야 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내명부를 장악한 황후의 말을 어길 수 없는 지라 구 미인은 충혈된 눈으로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자리에 일어난다.

"예, 폐하."

 모멸감에 몸을 떤 구 미인이 새파란 살기를 얼굴에 띤 채로 뒷자리로 물러나 앉는다. 문안 동안 구 미인이 수치심에 부들 떠는 것을 걱정하거나 혹은 힐끔거리는 후궁들이 있었으나 그것 마저 구 미인을 더욱 더 모멸감에 떨게 만들 뿐이었다.

 황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구 미인은 수치심에 떨다가 자리가 파하자 시선을 피해 누구보다 먼저 음월전을 빠져 나가 홍리당에 쳐박혔다.

'그 개잡놈의 주둥아리를 도려내서 씹어 먹겠다!!'

 단 한번도 천출이라 업신여긴 적 없었는데 심지어 총애를 잃은 후궁에게 모욕 당했다. 구 미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살기를 다졌다.

 이 경이 홍리당 문턱을 넘자마자 보이는 것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구 미인이었다. 소리 내지않고 우는 말없이 우는 구 미인을 처음엔 당황해서 바라보는 이 경이었으나 구 미인의 상궁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을 들은 이 경의 눈가가 점점 파르르 떨린다.

 한참을 침묵하던 이 경이 입을 열었다.

"또 재앙의 주둥아리인가."

 한탄하듯이 이 경이 말했다.

"그 혀놀림으로 화를 산게 언젠데 대체 그 주둥아리는 언제쯤 가만히 있지? 휴..."

 이 경이 골치 아픈 표정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경이 구 미인이 그를 따르지 않고 말없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침대에 걸터 앉아 바라본다. 그 제법 충격받은 모습에 이 경이 무언가 동병상련의 마음이 든다. 못생겼다 말하는 백 미인의 뻔뻔한 얼굴을 떠올린 이 경이 입가를 실룩거렸다.

'그래. 그 놈의 혀놀림이 좀 보통인가.'

 구 미인이 저렇게 충격받은 것도 당연하다. 이 경은 불쌍한 마음에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네가 옳다."

 구 미인이 말의 뜻을 알아채지 못해 반문했다.

"예?"

 이 경이 씩 웃으면서 손짓한다. 그에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침대로 다가가는 구 미인이 황제가 손을 뻗자 그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이 경이 미소를 지으면서 구 미인의 손을 잡아 펴고 그 위에 옳을 가 자를 쓴다.

"가미인(可美人)은 어떠냐?"

"폐하!"

 구 미인이 희색을 한 채 이 경을 바라본다. 원래 섬세하지 못한 이 경은 봉호(封呼)와 같은 것을 잘 지정하지 않았다. 대충 이름을 부르면 되었다 생각하는 까닭에 지금껏 봉호를 지어준 이는 한비와 화귀비 외에는 존재치 않았으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봉호에는 황제의 마음이 들었으니 승급보다 차라리 좋다. 승급을 해도 봉호를 얻지 못할 수도 있으니 구 미인, 아니 가미인으로선 뛸듯이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가미인이 바로 이 경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그를 넘어트린다. 이 경이 씩 웃으면서 가미인의 서투르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면이 있는 입맞춤을 즐겼다.

********************

"재미있게 되었군."

 견 완용이 작게 말하며 웃는다. 단 수의가 그에 말을 이었다.

"둘 다 나이가 어려 언행이 바르지 못합니다."

 견 완용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황자의 아비인지라 총애 받는 후궁의 뒷담화를 하는 것이 별로 현명한 행동이 아니라 여긴 것이었다. 단 수의가 그런 견 완용의 태도에 머슥하여 입을 다문다.

 가미인이 봉호를 받은 사실이 궁 안을 울린다. 봉호가 황제의 애정과 관심을 담은 것이었고 특히나 무신경한 이 경이 봉호를 잘 안 내리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가미인이 이 경의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 영선이 '화(華)' 자를 박탈 당한 이 때, 한비 외에 유일하게 봉호를 받은 이가 가미인이었다.

 그리고 후궁들이 기다렸던 그 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가 미인 드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백 미인과 가미인은 동시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나도 빨리 정리되었는데 후궁들은 그에 김이 새서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백 미인이 말없이 뒷자리에 앉는다. 가미인이 탁 첩여 옆에 앉아서 백 미인을 쳐다 보지도 않은 채 정면을 응시한다. 이 맥빠진 상황에 후궁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 상황에서 백 미인이 더 할 일 또한 없었다. 애초에 봉호를 받은 후궁이 더 높은 위계인 것을 어떻게 뒤집겠는가.

 그리고 꼬리 내린 백 미인을 기어코 쥐잡으려는 가미인이 문안이 끝나고 그의 이름을 무례하게 부른다.

"영선 동생."

 백 미인의 두 눈에 아주 잠시 섬광이 흐른다. 백 미인이 허탈하게 웃었다.

'쟤는 정말 속이 뻔히 보이는 구나.'

 오히려 계자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무리 윗분이셔도 이름을 부르다니요. 그것도 같은 후궁인데 무례하십니다."

"그만!"

 이 상황에서 옳고 그름이란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안다. 백 미인이 웃으면서 가미인을 바라본다. 어차피 계자가 윗사람들 말에 끼어들었다고 몰릴 것이 뻔한데 들어줄 필요도 없다. 백 미인이 시선은 가미인에 고정한 채로 엄한 목소리를 낸다.

"계자야. 나는 너한테 윗사람들 말에 끼라고 한 적이 없었다."

"송구합니다."

"사과 드려라."

 계자가 가미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가미인이 그것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주제 모르는 천 것이 윗전들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노비가 잘못했습니다."

 백 미인이 웃으면서 가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구 형님."

 가미인이 그 둘을 잠시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한다. 묵묵히 그 시선을 받는 둘의 자세가 고정되어 흐트러짐이 없다. 가미인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백 동생이 이제 주제를 아는 군."

 가미인이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백 미인을 내려다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 미인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는 모습을 보았으니 통쾌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부모욕을 들은 한이 서린다. 한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신경 쓴 적 없었던 출신에 대한 욕을 얻어 먹었으니 생전에 없었던 자격지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가미인이 조금 생각을 하다가 차갑게 웃으면서 백 미인을 내려다 보았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반성해야지."

"......"

"저 궁녀를 죽이기엔 좀 그렇고, 어디 본인에게 보내면 교육을 시켜서 돌려 보내지."

 백 미인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수족이 잘려나가는 것만큼 답답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어딨겠는가. 발을 묶고 기를 죽이려면 그 오른팔인 계자를 치는 것이 좋다. 가미인이 어딜 어떻게 하나 보자, 란 마음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계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 몸이 파들거리며 떨릴 때 백 미인이 그 때 버럭 소리질렀다.

"바쁘신 형님을 또 귀찮게 할 셈이냐!"

 그 때 계자가 파득 눈치를 채고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머리를 바닥에 쿵, 박는다. 가미인이 놀라서 계자를 바라보았다. 계자가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

'가미인 처소로 가면 죽어서 나온다.'

 쿵!!

 계자의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한 채로 계자가 소리친다.

"모든 것이 노비의 잘못입니다. 가미인을 귀찮게 만들었으니 여기서 죽겠습니다!"

 쿵!!

"여기는 폐하의 처소이네!"

 기웃거리는 황후의 궁인들이 보인다. 가미인이 소란이 일자 상황 파악을 위하여 뛰쳐나오는 궁인들을 발견하고 칫, 소리를 내며 그를 멈추게 한다. 그제서야 가미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그 년이 반성한듯 하지만 다음에 그러면 이 형이 아무리 바빠도 내 직접 기강을 잡지."

 백 미인이 말없이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숙인다. 가미인이 몸을 돌려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위풍당당한 모양새이다. 백 미인이 기묘하게 눈을 빛내며 가미인의 뒷모습을 본다. 입가에 웃음이 지어져 있다. 계자가 피를 흘린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그제서야 백 미인이 정신차려서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그녀를 부축하여 끌어 안았다.

"아이고 계자야!"

"미인 마마..."

"괜찮으냐? 계자야!"

 백 미인이 굳어진 얼굴로 제 소매로 피를 닦는다. 계자가 혼망스러운 와중에서도 손을 휘저어 그것을 막았다.

"더러워.. 집니다.. 마마."

"지금 그게 문제야!"

 버럭 소리지르는 백 미인이 곧 쓰러지는 계자의 허리를 잡아챈다. 혼절하여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계자를 끌어 안고 소리쳤다.

"여기 사람을 불러 오거라!"

 결국 사람들에게 실려나간 계자를 백 미인이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흰 옷을 입은 탓에 백 미인도 얼굴부터 옷가지가 피범벅의 끔찍한 몰골이다. 궁인들이 백 미인을 보면서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꺅!"

"미, 미인 마마.. 옷을 갈아 입으시지요."

 백 미인이 살벌하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저지했다.

 하얀 얼굴을 피로 물들인 채로 백 미인이 씩 웃는다. 그가 그 속을 알 수 없을만큼 깊은 시선으로 말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맹상군이 조나라에서 모욕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했던가.'

 백 미인이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차갑게 조소를 하곤 발걸음을 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