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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48)

00009 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 =========================

 가미인이 홍리당으로 왔을 때 그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궁인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쓰러지듯이 자리에 앉는다. 가미인의 얼굴은 백짓장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마.. 마마!"

 궁녀들의 호들갑에도 파리한 입술을 떨면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떤다. 귓가에서 귀신 눈깔떡이니 사람 돼지니 하는 소리가 웅웅거렸다. 얼자긴 하나 정식 교육을 같이 받은 가미인이 그 고사를 모를 이가 없다. 그리고 그 순간 가미인을 장악한 것은 두려움과 후회였다. 지금 그 순간 가미인에게 백 미인이 실총했단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히려 그 독사같은 인간을 적으로 맞이 했다는 사실에 절망할 다름이었다.

 거친 도타르에서 자란 가미인이 두려움에 떨만큼 백 미인의 기세는 강렬했으며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가미인이 울지도 못하고 몸을 떨면서 탁자를 잡고 있다. 그 초점이 흐릿하고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초라하게 몸을 움츠린다. 말을 타고 놀아 무관의 행세는 하고 있지만 가미인은 사람을 죽인 적도 없는 그저 귀공자였다.

 가미인의 어지러운 심기는 진정되지 않아 이 경이 홍리당으로 찾아올 저녁까지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 날 따라 이 경은 복잡한 마음이었는데 날씨가 더워서 짜증나기도 하고 또 장미가 피었다는 류 태감의 호들갑에 기분이 급속도록 나빠졌던 것이다. 장미, 라는 말에 유독 꽃을 좋아하던 주홍머리 청년의 얼굴을 떠올린 이 경의 표정이 우중충해진다. 말 수가 유독 적어지고 얼굴에 그늘이 진 이 경은 그 날 조회에서 사사건건 호통을 치고 신하들에게 면박을 주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으며 돌아 와서도 무서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우중충하게 비가 오는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이 굳은 표정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류 태감이 그것을 보고 생각한다.

'백 미인을 생각 중이시군.'

 이 경이 바라보는 방향이 영화원 방향이었다. 이 경은 섬세하지 못하고 풍류를 모르는 성격이라 백 미인의 일이 아니면 꽃을 즐기지 않았다. 백 미인은 사내임에도 꽃을 좋아해서 처소의 이름도 만화궁이었다. 그런 백 미인이 총애의 절정을 달리던 화귀비였을 때 제일 처음 하사받은 것이 원래 황실의 작은 호수인 담월지(淡月池)를 개조한 화원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원이었고 그 곳에서 이 경과 백 영선은 정말 눈치보지 않고 재미있고 음란하게 놀았었다.

 류 태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가 그치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이 경이 입가를 파르르 떤다. 한참을 굳게 입을 다물며 침묵하던 이 경이 입을 열었다.

"홍리당."

 류 태감이 속으로 걱정했으나 이 경의 말을 따른다. 비가 서서히 그치고 부슬비가 내릴 때 이 경의 가마가 홍리당으로 향한다. 가마 위에 있던 이 경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이 경이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기분으로 홍리당의 문턱을 밟았을 때 보이는 것은 이 경에 준할만큼 어두운 표정을 한 궁인과 환관들, 그리고 병자처럼 질린 표정을 하고 몸을 떨고 있는 가미인이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가미인의 모습에 이 경이 놀라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가미인이 이 경의 말에 대답도 못하고 말없이 식은땀만을 죽죽 흘린다. 평소라면 달래줬을 이 경도 그 날 따라 심기가 불편하여 눈썹을 꿈틀거리고 언성을 높혔다.

"무슨 일이래도?"

 가미인이 그제서야 창백해진 낮을 한 채로 이 경을 올려다 본다.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닌 듯한 모습에 초점이 흐릿하다. 이 경이 뭐라 더 말을 하려고 할 때 주인을 걱정한 궁녀가 가미인 대신에 말을 했다.

"오후에 만화궁으로 가셨는데 다녀 오신 이후부터 이러십니다."

 만화궁. 이 경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 경이 한숨을 쉬고 가미인의 손을 잡아서 꽉 잡아준다. 가미인이 그제서야 굳은 목을 움직여서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단호한 얼굴로 가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미인이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백 미인이 또 무슨 말을 했느냐."

"......"

"왜 그렇게 두려워 하느냐. 날 봐라."

"......"

"이 궁 안에서 나보다 더 네가 두려워할 것이 있느냐."

 가미인이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의 담담한 모습은 원래의 풍채와 어우러져서 믿음직스럽게 보였고 의지할 만한 이로 보이게 만든다. 그가 황제이고 가미인이 자신이 총비라는 것을 깨닫고는 서서히 정신을 차린다. 두려움이 조금 가시자 온 것은 서러움이었다. 가미인이 움직이지 않은 입술을 달싹인다.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연기가 조금 섞였으나 진실로 눈물이 나왔다.

 이 경이 한숨을 쉬고 가미인의 눈물을 닦았다. 가미인이 더듬거리면서 말을 한다.

"백, 백 미인이.."

"......"

"*귀목종(鬼目棕)과 *인체(人?) 얘기를... 꺼내서..."

 이 경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 경이 가미인의 손을 꽉 잡는다. 가미인이 아픈 와중에 얼굴을 새하얗게 질린 채로 이 경을 바라본다. 그것이 겁을 몹시 집어먹은 사람의 표정이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황룡패용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화원도 주지 않, 않았다고..."

 이 경이 가미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 경의 표정이 무서울리 만큼 굳어져 있었다. 애초에 험악한 인상인 이 경이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상념에 빠지니 황제를 우습게 보았던 가미인이 더 공포에 질려 치대거나 부추기지도 못하고 있었다.

 가미인의 고변이 끝나자 이 경이 말한다.

"황룡패용은..."

 이 경이 눈을 감고 말을 했다.

"애초에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네게 허용해줄 수 없다. 애초에 황후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화귀비에게 특혜를 주었을 때도 말이 많았지."

 순간 가미인의 얼굴에 억울함이 담겼으나 이어진 말에 다시 희색이 돈다.

"하물며 지금 한낮 서비(庶妃)인 백 미인에게는 맞지 않는 물건이다. 백 미인에게 황룡을 소지할 수 없게 하겠다."

"......"

 가미인의 몸의 떨림이 차차 잦아든다. 이 경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화원은 후궁 예산이 부족하고 부지도 없어 증축하여 네게 주지 못한다.

 이 경은 예산을 내려면 개인 재산으로 화원 수백개는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후궁 인원이 많지 않아 버려 놓은 땅이 제법 있다는 사실을 속으로 외면한다. 실망한 가미인에게 이 경이 말했다.

"그러나 영화원을 네게 주마."

"정말이옵니까?!"

 가미인이 순간 얼굴이 태양처럼 밝아져서 생기가 돈다. 이 경에게 환한 얼굴로 바라보는 가미인의 모습에 이 경도 조금 기분이 풀려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헌데.. 그러면 이름은.."

 가미인이 말을 흐린다. 백 영선(白英善)의 영(英)자를 따서 영화원(英花園)으로 명명한 것이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똥을 뿌린 것 같은 느낌에 기뻐하다가도 가미인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가미인의 모습에 이 경이 쓴웃음을 짓는다.

"화화원.."

 이 경은 말을 바로 끝맺지 않고 뒤를 흐렸다. 잠시 이 경의 표정의 그늘이 졌다. 그것을 가미인이 눈치채고 애써 재촉하지 않고 이 경의 말이 끝맺기를 기다렸다. 이 경은 잠시간 말을 하지 않다가 결국엔 무거운 얼굴로 말을 했다.

"화화원(和花園)으로 하자."

"폐하!"

"으읍?"

 자신의 이름을 따서 결국 화화원으로 명명하겠다는 말에 가미인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이 경의 입술을 먹는다. 놀란 표정으로 가미인의 손에 밀려 침대에 순순히 쓰러져 주는 이 경이다. 이 경의 작은 입술을 농밀하게 애무하는 가미인의 눈매가 일그러졌으나 이 경은 알아채지 못하고 입천장을 쓰는 혀에 몸을 파르르 떨고 가미인의 어깨를 애처롭게 잡았다.

'아직도 폐하는 그 놈을..'

 그 정도로 잘못했으면 진작에 죽었어도 열두번은 더 죽었을 놈인데 아직도 그 화원의 이름 하나 바꾸기를 머뭇거린다. 가미인은 이 경의 옷을 벗기면서도 냉철하게 머리를 굴렸다.

'완전히 꺾어야 한다. 없애야 돼. 안 그러면 분명히 그 새끼는 복귀하고 난 죽는다."

"가미인, 잠시만? 으읏!"

 제 엉덩이를 꽉 쥐고 씩 웃는 가미인의 얼굴에 이 경의 몸이 달아올랐다. 어느새 자신감을 찾은 가미인이 이 경의 위에서 미소를 짓는다.

"폐하. 감사합니다. 이 은혜의 천분지일도 갚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당, 당연하.. 흐아아?"

"하지만 이 가미인 노력하겠습니다."

 가미인이 이 경의 귀에 속삭인다. 이 경의 얼굴이 벌게져서 가미인의 어깨를 밀치려고 하나 가미인이 이 경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이 경이 자신의 편을 들자 가미인이 기뻐하며 이 경을 격렬하게 안았다. 이 경이 정신없이 가미인의 뜨거운 입술과 정열적인 애무를 받아들이면서 쾌락에 휩싸여 머리를 도리질을 했다.

"응.. 좀만 천천히... 아아.."

"그럼 편액도 바꾸는 것이지요?"

"응응.. 당연히.."

"폐하. 백 미인은 벌주시지 않을 것입니까?"

 이 경이 눈매를 떨며 자신의 도톰한 가슴을 핥는 가미인의 머리를 꽉 잡는다. 이 경이 쾌락 속에서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다.

"재, 재인으로.."

 냉궁에도 보내지 않고 오직 한 계급만 강등시킨다는 이 경의 말이지만 가미인은 애써 재촉하지 않는다. 굳이 달아오른 분위기를 식힐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황상에게 막말을 했음에도 백 미인은 강등당하지 않았던 위인이다. 강등시켰다는 것에만 의의를 갖기로 한 가미인이 이 경의 넓은 유륜을 어린 아이처럼 쪽쪽 핥고 주물렀다.

 이 경의 눈매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꼬리에 눈물이 매달렸다. 가미인이 제법 기분이 좋아 이 경의 가슴을 쭙쭙 거리며 빤다. 이 경이 가미인의 숱많은 머리카락을 붙잡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흐아아.."

 그 날 황제와의 격렬했던 정사가 끝나고 이 경이 지쳐서 널부러져 있었고 가미인이 그런 이 경에게 팔베개를 해주면서 가슴을 도닥였다. 부드럽고 애정이 담긴 손길에 이 경이 색색거리면서 곤히 잠에 든다. 그러나 가미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 주홍머리..'

 아무리 생각해도 내버려두면 복위할 가능성이 무척 크다. 이 경이 지금은 가미인의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지만 내일이라도 그 개잡놈에게 가서 안긴다면 가미인은 그 말마따나 귀목종이나 인체 꼴을 면하지 못하리라. 가미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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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리당에서 아침 일찍 태양전으로 돌아온 이 경이 공무를 보던 도중에 상소를 내려놓고 류 태감에게 은근히 말을 한다. 류 태감이 그 '안 그런척 하면서 매우 신경쓰고 있는 목소리'에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다.

"그런데 가미인이 왜 만화궁에 간 거지? 혹시.."

 백 재인을 괴롭히는 것이 아느냐는 듯한 의심과 염려가 섞인 말에 류 태감이 대답했다.

"백 재인 마마께서 가미인 마마 처소로 갈 자두마저 가져가셨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노하신 가미인 마마가.."

"끙.."

 말을 끊고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성을 낸다. 혹시라도 실총했다고 괴롭힌 당하는 건 아닌지 염려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이 경이 제 머리를 꾹꾹 누른다.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그 안하무인 백 재인이 반성하고 얌전히 있을 리가 없다. 주눅들기는 커녕 사사건건 살쾡이 마냥 제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가미인을 사사건건 괴롭히고 있으니 이 경은 황당할 뿐이었다. 대체 어떤 후궁이 이렇게까지 안하무인이었나. 사서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없을 일이다.

 그러나 이 경은 잠시 굳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백 재인의 짧은 입을 아는 이 경이 류 태감에게 나직히 물었다.

"백 재인이 식사는 어떻게 하지?"

"거의 다 물린다고 하였습니다."

"......"

 이 경이 상소를 구기고 정면을 말없이 노려본다. 그에 류 태감의 허리가 더 숙여지고 옆에 있던 궁인들도 몸을 조아린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이 경이 한숨을 쉬며 말을 했다.

"과일.. 일은.. 죄를 묻지 말게."

"예, 폐하. 그러면 백 재인의 처소로 과일을 납품할까요?"

 이 말은 정해진 분량 외에 것을 가져다 줄지를 묻는 말이다. 그러나 이 경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머뭇거리다가 눈을 감고 짧게 말했다.

"죄를 지은 후궁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송구합니다. 폐하."

"근신하라 했는데도 자두 내놔라 안하무인인데 배려를 하면 얼마나 또..."

 다른 후궁들은 총애하나 받겠다고 얼마나 아양을 떨고 황제를 어루어주는데 백 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태연하고 제멋대로이다. 그런 가식없는 면모가 신선하고 또 귀여워서 그를 좋아했지만 도를 넘는 행각에 이 경은 너무 괘씸했고 또 백 재인이 원망스러웠다.

'찾아 와서 미안하다고 무릎 꿇고 빌면 어련히 자두 산을 쌓아주지 않을까..'

 속이 상해 중얼거린 이 경이 고개를 흔들고 손에 든 상소문을 다시 눈에 담았다.

============================ 작품 후기 ============================

1. 저도 사랑합니다!

2. 도원향가는 월수금 자정 연재가 될 것 같습니다! 이번 편은 비축분이고 또 써서 오늘 자정에 올릴게영!

주석 1. 귀신 눈깔 떡= 유자업이 작은 할아버지의 눈을 뽑아서 만든 떡

주석 2. 인간 돼지= 척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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