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 =========================
그런 이 경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일은 벌어졌다. 백 미인을 재인으로 강등시키고 마음이 좋지 않은 이 경이 그 다음 날은 홍리당에 가지 않고 혼자서 밤을 보냈다. 이 경은 정말로 기분이 안좋을 때는 백 재인에게 갔었으나 그와 싸운 상태여서 홀로 태양전에서 시간을 죽였던 것이다.
사건은 바로 그 다음 날에 터졌다. 이 경이 싸늘한 표정으로 편전에 머리가 헝크러진 채로 엎드린 백 재인을 내려다본다. 가미인이 그 옆에서 울면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폐하! 차라리 저를 내쳐주시옵소서! 화를 당할 바에야 차라리 냉궁으로 가겠나이다."
이 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의 손에는 그가 가미인에게 하사한 백금 비녀가 부러진 채로 있었다.
"백 재인. 할 말이 있느냐?"
백 재인이 아무말 없이 초라한 차림새로 고개를 숙인다. 입궁 후로 항상 화려했던 백 재인의 차림도 황룡을 떼고 옷이 헝크러져 수수하다. 그 불쌍해 보이는 모양새에도 이 경이 속에 화가 부글 끓어 그를 냉정하게 노려보았다.
"하사품을 망가트리는 것은 대역죄에 속한다. 백 재인!"
사건은 그 날 아침부터 시작된다. 백 재인은 과일마저 수급받지 못해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더 말라갔으며 얼굴은 쾡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계자가 몰래 버찌를 따다가 주는데 백 재인이 시다면서 도리질을 쳤다. 결국 계자가 울면서 말했다.
"이게 무슨 꼴이십니까? 답응까지 내려가시렵니까?"
백 재인이 힘없이 웃으면서 계자를 바라보고 계자가 엉엉 울면서 말을 이었다.
"빨리 가서 폐하가 숙이고 들어가서 사과를 하세요. 폐하께서는 용서해주실겁니다."
"죽느니 질 것 같으냐.."
힘 없이 말하는 백 재인의 얼굴이 야위었다. 계자가 황당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하고 그 앞에서 훌쩍거리면서 우는 것을 백 재인이 은은한 미소를 띠면서 바라보았다.
결국 백 재인은 계자의 말을 듣지 않았고 말없이 자리에 앉아서 마당에 있는 계수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오후에 그가 황후의 부름을 받고 음월전으로 향했다.
가구가 극히 없고 정갈한 목단의 향만이 감도는 방. 백 재인은 장부를 정리하는 황후의 앞에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 흰 피부와 흑색 비단같은 머리카락에는 무척 윤기가 돈다. 두 눈매는 그린 듯이 아름답고 각도에 따라서 고압적으로도 보이고 순박하게 보이고, 또 매혹적으로도 보이고 천진난만하게도 보인다. 크고 오똑한 콧대가 조각처럼 아름다웠고 그 얼굴은 팔방의 아름다움을 흘리고 있었다.
백 재인이 궁인도 없이 홀로 앉아 있는 황후의 앞에 털썩 앉고 무례히 말한다.
"왜요?"
"......"
황후가 아무 말도 없이 장부만 들여다본다. 백 재인이 얼굴을 구기고 말을 했다.
"아 또 사람 불렀으면 말을 하셔야,"
"약속과 다르잖나."
황후가 불연듯 말한다. 백 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후가 그 때 장부에서 시선을 떼고 백 재인을 바라본다. 어린 나이에 반백살의 장군들을 호령했던 그 서슬퍼런 눈으로 백 재인을 응시한다. 살기 하나 없음에도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위압감이 돈다.
"언제까지 놀고 먹을 거지?"
백 재인이 그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황후 마마."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복위할 계획은 다 짜놓았습니다. 헌데.."
백 재인의 말에 황후가 다시 장부를 본다. 백 재인의 말에 황후의 몸이 굳었다.
"폐하 답지 않게 성급하시군요."
"......"
"나는 평생동안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말이 많구나."
"이 경이 걱정됩니까?"
황후의 몸이 우뚝 멈추어선다. 황후가 묵묵히 장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나 누가 보아도 집중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백 영선이 그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때의 말을 언제든지 물려도 됩니다."
"......"
"치아(雉娥)야. 위현을 아직..!!!!"
그 때 황후가 영선이 인식하지 못할만큼 빠르게 그의 목을 큰 손으로 잡아챘다. 동공이 수축되고 진정으로 살기가 흐른다. 아무런 표정이 없어지고 그 때까지 기품있고 온화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마치 맹수처럼 위험하고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방 안을 진동한다. 황후에 눈에 감정이 사라진다. 마치 인형과도 같은 무감각한 눈으로 영선을 내려다본다. 영선이 제 목을 믿기 힘들 정도의 악력으로 쥔 황후의 손에 컥컥대면서 그 손을 잡는다. 그럼에도 영선의 입가에는 미소가 있었다.
희 치의 입이 열린다. 그 말에 소름이 쭈뻣 솟을 만큼의 강렬한 살기가 깔려있다.
"다시 한번 위현의 이름을 담으면.."
"크..크큭...커헉...!"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아. 두 번은 없다."
도올제일무인이었던 희 치의 말이다. 영선의 목을 쥔 손의 악력이 그 말의 진심을 전하고 있다. 영선이 그러나 비웃듯이 희 치를 바라보고 희 치는 차가운 얼굴로 벌레를 떼듯이 손을 떨구었다.
영선이 퍼렇게 변한 목을 잡고 웃었다.
"크크크.."
"입조심을 해라. 제발 더 그 입으로 화를 부르지마."
영선이 목을 주무르면서 씩 웃는다. 그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왜 거짓말을 해. 너는 날 죽이지 못하잖아."
"......"
희 치가 말을 하지 않고 한숨을 쉰다. 영선이 목을 쓰다듬으면서 황후를 웃으며 바라본다.
"내가 너를 잘 알지. 이 세상 누구보다 너를 더 잘 아니까. 또 너도 나를 잘 알 거야."
"......"
"사실 아까 전에는 친구로서 하는 말이었고 지금은 후궁으로서 황후에게 하는 말입니다."
영선의 표정에 진지함이 담겼다.
"황후 마마와의 약속 잘 지키고 따릅니다. 폐하도 아시다시피 저는 약속은 그 어느 일이 있어도 지킵니다. 그러니 황후 마마도 제발 처음 말을 견지하여 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
"또다시 그 비틀린 사랑을 시작하려는 마음은 꿈도 꾸지 마시란겁니다. 이 경에게 폐하의 독 같은 사랑을 줄 생각은 하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문사복으로 그 몸을 가두고 평화롭게 사세요. 항상 바랐던 일 아닙니까? 이런 평화, 이런 생활이야 말로 황후 마마가 바랐던 일인데 또 욕심을 부리십니까."
영선의 목소리가 차갑다. 희 치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없다."
"생각은 없어도 마음은 끌릴걸?"
영선의 비웃음에 희 치의 눈이 가라앉았다.
"맹세하마."
그제서야 영선이 만족하여 손을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희 치가 그를 되돌아보지 않고 장부를 다시 정리했다. 영선이 고개를 다시 숙이고 그의 처소를 나왔다. 문득 희 치의 힘 빠진 목소리가 영선의 등 뒤에서 들려온다.
"목을 조른 것은 사과하지."
영선은 대답하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그는 곧 뒤를 보지 않고 걸아 나갈 뿐이었다. 음월전의 문턱에서 한 번 멈춰선 영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웅장한 문을 바라본다.
'너에겐 슬픔이겠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두려움이다.'
기분이 좋지 않은 영선이 그 자리에서 발코로 땅을 파다가 견 완용의 처소로 향했다. 딱히 매우 친한 사람은 없는 영선이지만 견 완용과는 그래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초야를 견 완용의 처소에서 치른지라 견 완용은 머쓱해하면서도 새로운 세계를 영접시켜준 영선을 동생처럼 귀여워했고 영선도 그런 견 완용을 잘 따랐다.
그 날 이후로 영선이 총애를 독차지하여 견 완용에게 이 경이 오는 횟수가 적었는데 그 수는 적어졌어도 성생활은 더욱 더 만족하니 바라는 것이 별로 없는 견 완용은 오히려 더 그게 기쁘고 좋았다.
더군다나 견 완용의 올해 열두살 된 자식인 한왕(漢王) 이 영오가 견 완용의 종수궁(從壽宮)에 살았는데 영선은 아이를 상상을 초월할정도로 귀여워하여 그를 껴안고 업고 난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선이 온다는 소식에 이 영오가 종수궁 문 앞에서 종종 거리면서 달려 나와 그의 품에 안겼다.
"화귀비 마마!"
영선이 씩 웃으면서 영오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젠 그리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이젠 백 재인에 불과합니다."
"부황 폐하와 아직도 화해하지 않으신 건가요?"
영선이 웃으면서 영오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곧 화해할 예정이랍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살이 쩠을까요?"
"아앙~"
영오가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한다.
"그런데 마마 왜 이 더운날에 목도리를 하셨어요?"
영선이 목을 감싼 천을 매만지며 말했다.
"목감기가 걸렸어요. 여름 감기가 더 독합니다."
"앗? 괜찮으세요?"
"지금 거의 다 나아가요."
까탈스러운 백 재인 답지 않게 무척이나 상냥한 태도로 영오를 안아 올린다. 영선이 종수궁 안으로 들어가 영오를 무릎 위에 놓고 견 완용이 내어준 그 놈의 자두를 까먹고 견 완용과 담소를 한다. 일이 벌어진 것은 영오가 요즘 영화원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견 완용을 조른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견 완용이 가미인이 영화원의 편액을 떼고 화화원으로 바꾸었다며 속이 좁다고 화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잠자코 있던 백 재인은 결국 영오의 조름에 그를 품에 안고 화화원으로 갔는데 견 완용은 더위를 많이 타서 가지 않았다.
그 곳에서 화화원의 편액을 갈아끼우고 그 안을 정비하는 것을 감독하던 가미인과 마주친 것이었다. 영선이 당황해서 영오를 안은 채 위세등등한 가미인을 바라본다. 시퍼렇게 독이 오른 가미인의 눈이 번뜩였다. 영선이 먼저 인사하여 분란을 피하려는 것을 먼저 가미인이 성큼 걸으며 그에게 다가와 영선의 품에서 이 영오를 뺏어 들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길에 영오가 비명을 지르고 영선의 눈에 살기가 아주 잠깐 감돌았다.
계자가 경악 어린 눈으로 그것을 본다. 백 재인은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단 한가지 용서를 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의 앞에서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런 백 재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뺏어갔으니 사단이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니였다. 계자의 얼굴에 두려움이 물들었다.
"아, 아파!"
"백면서생 출신이 몰골도 파리하면서 감히 한왕 전하를 끌어 안다니. 다치신다면 어찌 책임질 것인가!"
백 재인이 말없이 창백한 낮으로 가미인을 바라본다. 기를 죽여 놓았으니 제정신을 차릴 것이라 여겼는데 아직도 주둥아리가 나불거린다. 백 재인이 인형같이 감정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 맹상군이다. 맹상군..'
삭초제근을 중얼거리던 백 재인을 보며 가미인이 살기 어린 웃음을 짓는다. 어렴풋이 그가 생각하던 것이 있었는데 우연찮게 만난 백 재인은 거기다가 신빙성이 높은 좋은 증인마저 데리고 있었다. 가미인이 그 때 더위에 창백하게 질린 백 재인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몸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더위를 많이 먹은 모양이군. 내 그리 허약한 인상을 보니 한왕 전하가 걱정해서 그런 것이네. 고깝게 생각하지 말게나."
"어찌 곡해하겠습니다."
"전하, 죄송합니다. 제 처소에도 사철 매화가 예쁘게 폈는데 구경가시겠습니까? 여기는 지금 공사 중이라 번잡합니다."
이 영오가 눈치를 보지만 눈이 번쩍하다. 백 재인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고 가미인이 웃으면서 쇄기를 박았다.
"백 재인도 저리 땀을 흘리는데 차라리 제 처소에 앉아서 시원하게 구경하시지요."
"으응.."
백 재인을 보면서 머뭇거리는 이 영오를 차마 무시 못하고 백 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홍리당에 오순도순히 온 백 재인과 가미인, 이 영오였다. 이 영오가 가미인 말처럼 환하게 핀 매화에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달려나가서 정신없이 구경을 했다. 백 재인이 멀뚱하게 서있으려니 가미인이 웃으면서 백 재인에게 손짓했다.
'귀계가 있는줄 알면서도 손을 못 쓰겠군.'
백 재인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하다. 인간적으로 너무 더운 날씨에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 차는데 얼음 공급마저 중단되니 백 재인이 죽어나는 것이 당연했다. 백 재인의 생각이 정지되고 음모며 귀계니 다 내팽겨치고 가미인의 손짓에 그늘로 향했다.
꽤나 아늑하면서도 정갈한 처소다. 투박한 무인을 연기하는 가미인이지만 한 번 쓱 흝어본 백 재인이 빠르게 견적을 쟀다.
'경이가 꽤나 열 받았나 보네.'
호화로운 흑산옥이며 산호요, 소주 비단이니 절경 24도 병풍이니 온갖 귀중품들을 깔아 놓았다. 백 재인이 뚱하게 앉아 있을 때 가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잠시 한왕과 얘기하고 오겠습니다."
어린 아이와 무슨 얘기? 그러나 백 재인은 의문에도 너무 더워서 대꾸할 힘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가미인이 잠시 자리를 나라고 문득 백 재인은 계자의 부채질을 받으며 한가로히 방 안 호사품들의 견적을 내던 도중에 자신의 앞에 놓여진 탁상에 반짝이는 물체를 바라보았다.
은색의 파도와 같은 물결을 타고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은 용이 새겨져 있다. 용의 아가리에는 파란색 청옥이 여의주처럼 물려져 있었다. 한 눈에 봐도 귀물이고 걸출한 것이다. 그 발톱은 세개인 삼조룡(三爪龍)으로 격이 낮은 것이지만 그래도 후궁이 용장식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하사받은 것이라는 증거이다. 그리고 백 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들어온 가미인이 무서운 얼굴로 백 재인에게 소리쳤다.
"백 재인, 이게 뭣하는 짓인가!!"
백 재인이 입을 다물었다. 비녀가 부러져 있으니 암계임을 눈치챈 백 재인의 입이 다물리나 계자가 오히려 더 당황하여 변명한다.
"마마, 이것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백 재인이 속으로 한숨을 쉰다.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계자야.'
여기엔 증인이 없으니 차라리 실수로 부러트렀다고 말하는 것이 나았을 것을 이제는 몰리는 일만 남았으니 백 재인이 혈압이 올라 의자 손잡이를 잡고 묵묵히 정면을 응시했다.
가미인이 독사 같은 눈으로 백 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 재인이 기어코 사단을 일으켰으니 내가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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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과거사는 좀 나중에 나올 것 같네영. 외전으로 짤막하게 나올 것 같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