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48)

00016 강반독보심화(江畔獨步尋花) =========================

 정말 가난했다.

 백 영선이 제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이 경을 묵묵히 바라본다.

 경박하지 않은 백 영선의 얼굴은 그 나이 대의 청년과 같지 않았고 종사(宗士)의 기품이 있었다. 백 영선은 촛불의 일렁거리는 그림자가 이 경의 얼굴을 스치는 것을 본다. 은은한 등불 아래서 이 경은 정말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구 화에게 영화원을 흘리고 계속해서 그에게 들먹였다. 귀한 집 자제인 구 화가 영화원에서 손을 쓸 것으로 예상했고 그것은 말 하나로 이 경과 구 화가 같이 평원을 달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확신했다. 영선이 이 경과 말 하나를 같이 탔다고 전에 말하자 구 화가 그에 자존심이 상해 기어코 전에 영선과 이 경의 행적을 모방한 것이니, 그 자존심이 대단한 것이 자명하다. 곧 영화원도 손을 쓸 것이 분명했다.

 영화원은 백 영선이 익숙한 곳이다. 황궁에서 만화궁과 태양전 다음으로 익숙한 곳이고 그 구조나 특징 같은 것도 잘 안다. 영선의 손바닥 안에 있는 곳이며 이 경과 그의 추억이 녹아난 곳이다.

 일부러 장미가 피던 시기에 영화원에서의 추억이 담긴 시를 이 경에게 흘리고, 계자에게 장미를 꺾으라고 말을 해 이 경을 불러왔다. 이 경이 뻔히 있는줄 알면서 구 화를 살살 도발해서 무도한 말을 내뱉게 유도했다.

 하지만ㅡ

 백 영선이 눈을 감고 주먹을 쥔다. 등을 곧게 피고 눈을 감아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렇게 저열한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이 경에게 그렇게 상처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영선은 원래대로라면 그 말을 막으면 안되었는데 막아 버렸다. 진심으로 그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영선이 숨을 고른다.

 그 말만 나오지 않았어도, 이 경에게 그렇게 잔혹하게 말만 하지 않았어도 구 화는 냉궁에 유폐되거나 강등당하는 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영선은 적들을 봐주지 않지만 사람을 막 죽이는 잔혹한 성품이 아니었고 구 화의 목숨을 충분히 보존시키려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을 처리하려고, 음해하고 어쩌면 냉궁으로 보내거나 죽이려는 생각을 품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구 화는 이십대 앞 길이 창창하고 어린 청년 아닌가. 육궁은 원래 그런 곳이다.

 그러나 이 경에게 그리 말한 순간 이성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손에 칼만 쥐어져 있었더라면 단숨에 양단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몸을 회쳐서 갈아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영선이 묵묵하게 이 경의 얼굴을 본다. 이게 대체 뭐라고.

 백 영선은 과거를 회상한다.

 장강 남쪽에, 춘추시대부터 내려온 명문가가 있었다.

 백 영선은 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누나가 있고, 남동생이 있으나 남동생과의 터울이 크고 본디 쥐뿔도 없으면서 뼈대있다고 말하는 명문가가 그렇듯이 집안을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가장의 몫이었다.

 백 영선은 거의 가장이었다. 아버지가 정말 호인(好人)이라 다 나눠줬으니까. 많이 속고 가산을 탕진했으니까.

 그러니까 백 영선은 정말 거지보다 더 거지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았으나 백 영선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백 명의 문인(文人)안에 들 정도로 천재적인 문재(文材)를 가지고 있었고 비파도 잘 뜯고 피리도 잘 불고 가무(歌舞)에도 가견이 있었다.

 기루에서 기녀들을 가르치면서 입에 풀칠을 했었다.

 백 영선은 옛날 제자들의 하늘하고 하얀 살결을 생각하고 이 경의 거칠고 두꺼운 피부가죽을 조심스레 매만진다. 이 경의 피부는 정말 질기다. 물어도 잇자국이 잘 나지도 않고 손톱으로도 잘 긁히지 않았다. 백 영선이 이 경의 팔뚝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우음.."

 이 경이 몸을 웅크리면서 웅얼거리는 것에 백 영선이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뗀다. 백 영선이 상념한다.

 북방에서 번국을 정복하던 희 치.

 강남에서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백 영선.

 중화의 극과 극에 위치한 그 둘이 만나서 교분을 맺은 것은 얽힌 인연이었다. 백 영선이 그 때의 희 치를 생각한다.

 흰 목이 드러나도록 짧게 자른 머리가 귀를 이따금 보이며 찰랑거린다. 어이보면 천진한 소년이요, 어이보면 마치 존엄한 불존같은 부드러운 위엄. 순백의 어린아이와 굽어보는 보살이다. 단발이 보보(步步)할때마다 흔들거렸고 그럴 때마다 어린아이같이 순백한 모습이 휘장 밖으로 드러난다. 그 모습은 마치 때가 타지 않은 아름다운 소년. 그리고 암자에서 속세와 연을 끊고 산 승 하나가 갓 머리를 기른 모습.

 그러나 그 얼굴은 자세히 보면 크나큰 슬픔에 잠겨 있다. 애통함에 절여져 죽어가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하고 뼈가 다 보이도록 말랐다. 그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슬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죽음이 그 얼굴에 맞닿아 있다. 고통과 망혼(亡魂)이 그에 서려있다.

 희 치가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을 열어 느릿하게 말을 한다.

'나는 이 경의 총애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백 영선은 강남의 내로라 하는 기녀들의 구애를 받아 왔었다. 그는 섬세하고, 유려했으며, 다정했고, 또 여러 분야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던 대가였다. 눈치가 빠르고 교활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에서는 진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경박스러운 사내처럼 보이다가도 음악과 가무를 가르칠 때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엄격하다. 입에서 흘러나온 미사여구보다는 사람의 본성을 투과하는 것에 가깝다. 사람을 많이 접대해오던 기녀들이 미공자(美公子)나 황금 천냥을 들고 오는 거부들을 마다하고 가난한 백 영선에게 매달린 것은 그 진심어린 면모를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희 치는 그렇기에 부탁했다.

'너는 이 경의 사랑을 얻어 후궁전을 장악하여 나를 도와주거라.'

 영선은 말없이 희 치를 바라본다. 희 치의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퀭했다. 영선은 그를 한참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영선도 몰랐다. 천하제일미녀들을 거부하던 그가 이 경에게 흔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얗고 낭창한 허리를 가진 무희들이 벌거벗고 달려들어도 하하하 웃던 영선이었는데 저 투박한 사내가 귀여워 미칠 줄은 몰랐다. 저 거친 살결에 뺨을 비비고 커다란 몸뚱이를 만지는 게 그렇게 좋을지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희 치의 약속은 뒷전이 되고 영선은 이 경에게 흠뻑 빠져서 그의 생각만을 했다. 귀엽고 너무 사랑스러웠다. 영선은 실실 웃으면서 이 경을 끌어 안고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행복했다. 영선은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했으나 그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희 치의 약속을 지키려면 이 경의 환심을 사야하고 거짓을 속삭여야 한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의 마음을 옭아 매야한다. 하지만 영선은 처음 그를 보자마자 얼떨결에 취중진담을 했고 그 후에도 계속 진심만을 말했다. 어떻게 아부하고 거짓된 사랑을 속삭일 염두가 나지 않았다.

 귀비에서 강등 되었을 때도 잘만 속이고 달래면 이 경과 화해할 수 있을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게 명백한 희 치와의 약속 위반임을 알았음에도 고집을 피우고 이 경에게 뻣댔다. 그게 이상한 것임을 분명히 안다. 본인이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을 분명히 안다.

 백 영선이 참담하기도 하고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어서 허망하게 이 경의 새근거리면서 자는 모습을 바라본다.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편하게 자고 있는 이 경의 목에 울혈이 나있다. 이 경은 잠을 잘 때는 정말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얌전하게 잤다.

 그게 또 귀여워 미칠 것만 같은 영선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이거 진짜, 치아에게 뭐라고.."

 영선이 흔들리는 것을 친구인 희 치가 모를 리가 없다. 그리고 흔들리는 영선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희 치 또한 이상해져 갔다. 영선은 그것을 눈치채고 기겁해서 희 치에게 꿈도 꾸지 말라고 쏘아 붙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희 치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죽음으로써 말려야 하는 일이다. 영선은 그 날 희 치에게 맹세를 받고 안도했다.

 이 경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영선이 중얼거린다.

'그래, 지켜주마. 이 못난아.'

 영선이 헛웃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자고 있는 이 경은 모를 것이다. 영선이 얼마나 큰 손해를 감수하고 그런 말을 했는지. 이 경이 지금 천만금을 주어도 사지 못할 큰 은혜를 입은 것을 모르고 있다. 영선은 이 경의 까슬한 볼에 입을 맞췄다.

 이 경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고 밤을 샌 영선이 침대 옆 탁상에 팔을 괸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음, 일찍 깼어?"

 이 경이 부스스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이 경이 창문 밖을 힐끔 거리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것을 보고 말한다.

"더 자지.."

 아침 잠이 없는 이 경보다 일찍 일어나는 영선의 모습에 걱정한다. 영선이 말없이 정리해놓은 옷을 이 경에게 입혀준다. 이 경이 순순히 팔을 들어 영선이 옷을 입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영선이 마지막으로 이 경의 입술을 혀로 핥는다. 이 경이 졸린 눈으로 영선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복위하는 거..."

"이제 다시 화귀비예요?"

 영선의 장난기 어린 말에 이 경이 도리질을 친 다음에 말한다. 잠이 아직 덜 깨어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영선은 이 경을 또 울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꾹 참아야했다.

"황후랑 싸웠어.. 너가 황손없이 귀비까지 빠른 시일에 오른 것도 이례적인건데 많은 반대를 꺾고 올랐음에도 분란이 많았다고..."

 이 경의 표정이 뚱하다.

"귀비로 복위는 체면 깎기는 짓이라고.."

"어, 저는 괜찮아요."

 영선이 깔끔하게 말한다. 애초에 영선이 하는 일에 지위란 별로 상관도 없다. 그가 생각해도 애초에 귀비란 자리는 오히려 무리가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황손도 없는 그가 황자황녀의 아비들 위에 서는 것도 생각해보면 꽤나 민망한 일이었으니.

 그러나 그런 영선의 말에 이 경이 더 발끈해서 말했다.

"왜 괜찮아. 또 구 화 같은 잡 것들에게 맞고 다니게?"

"구 화한테 힘 팍팍 실어준게 누구였더라?"

"흠흠."

 이 경이 고개를 돌리고 영선이 씩 웃었다. 이 경이 조심스럽게 영선의 허리를 끌어 안는다. 자연스럽게 이 경의 무릎 위에 앉은 영선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반짝이는 눈으로 이 경을 보았다. 가벼워 보임에도 영선은 키가 커서 은근히 무게가 나갔다. 영선의 호리한 허리를 쓰다듬으면서 이 경이 말했다.

"이품 비(妃)로 하기로 했다."

"어, 괜찮네요."

"잠깐만."

 대충 말하고 입을 맞추려는 영선을 막고 이 경이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비(宸妃)로 하기로 했다."

 쿨럭, 컥! 영선이 순간 사레가 걸려 켁켁 거리고 이 경을 멍하게 바라본다. 이 경이 입술을 꾹 다물고 정면을 응시한다.

"아니, 잠시만 폐,"

"몰라, 몰라! 됐어, 됐어!"

 이 경이 뭐라 말을 하려는 영선을 손으로 허우적거리면서 막는다. 영선이 당황해서 이 경의 단단한 팔뚝을 잡으려는 것을 이 경이 고개를 도리질을 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칙령 내렸고 넌 신비야."

"잠시만, 폐하, 신 자는 이게 그냥이 아니라?"

 글자에도 격이 있으니 신(宸)자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글자다. 옛날 무측천도 신비의 자리를 원했으나 조정의 반대로 얻지 못했던 격이 높은 호칭이다. 황제의 글자만을 신필이라고 하며 그 격은 황(皇)과 제(帝)에 버금갔으니 차라리 화귀비로 복위 시키는 것이 더 반발이 적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 황후랑 치고 박고 싸웠겠지.

 영선이 진심으로 당황해서 이 경을 추궁하려 하지만 이 경이 고개를 홱 돌리고 영선을 외면한다.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처럼 입술이 굳고 얼굴에는 고집이 서렸다.

 이 경이 모든 말을 귀에 담지 않겠다는 것을 천명하듯이 자기 할 말만 다박다박 빠르게 말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저녁에 당왕(唐王)이 오기로 했는데 와서 황후 옆에 앉아 있어."

"폐하, 폐하?"

 아예 총애받는 후궁이라는 것을 단단히 못박아 두려는 듯 외관(外官)의 연회에 부르는 이 경이다. 성큼거리면서 걸어 나가는 이 경의 등을 영선이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 애새... '

 순간 불경스러운 말을 생각하던 영선이 고개를 흔들며 이 경이 나간 곳을 바라본다. 자기 멋대로로 행동하는 이 경은 분명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부끄러운듯 귓가를 붉히던 이 경을 생각하던 영선이 속으로 혀를 차며 중얼거린다.

"아침이나 챙겨 먹지...쯧..."

 그 말을 하는 영선의 입가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1. 내일 자정에 올리겠으나 분량이 적을 예정!

2. 황후 루트를 많이 원하시는군요// 도원향가가 겉으로는 다공일수이고 속으로 일공일수같지만 실제로는 이공일수입니다... 메인공은 영선이지만 황후끼면 충분히 황후가 서브공 역할을 해줄 것...!

3. 도원향가는 월수금 자정 연재지만 올리고 싶을 때면 다른 날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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