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육궁분대무안색(六宮粉黛無顔色) =========================
이 경이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황금색 묘안석 같은 두 눈이었다. 고양이같이 동공이 날렵하고 옅은 갈색 눈은 각도에 따라서 붉은색이 반짝이기도, 혹은 황색 빛이 감돌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저게 사람 눈깔이냐, 요사스럽다 생각했었는데 이 경은 시간이 지나고 그 두 눈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경의 표정이 유하게 풀리는 것을 발견한 만화궁 신비가 쾡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깼으면 일어나시는게...?"
이 경이 그제서야 잠을 못 잔듯 엉망인 영선의 얼굴을 보고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선이 상당히 예민하다는 것을 상기시킨 이 경이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영선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같이 밥먹자."
영선이 하품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선이 느물거리면서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서 옷을 대충 챙겨입고 졸린 눈으로 말했다.
"아침 해드릴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고즈넉한 멋이 풍기는 정자에 시비들이 옮겨놓은 음식들을 앞에 놓고, 옆에는 졸졸거리는 개울과 산들거리는 풀바람 내,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은은하게 부는 풍경(風磬) 소리가 더할 나위없이 좋았고 흰 목련꽃이 활짝 피어 은근한 향취가 콧가에 맴도는 곳이었다.
영선은 음식을 맛있게 했다. 할줄아는 가짓수가 많은 것은 아니고 기교를 부리는 것은 아닌데 깊고 손맛이 들어간, 어딘가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음식을 잘했다. 그래서 이 경은 청년의 음식이 좋았다. 영선은 이 경이 좋아하는 완자탕으로 소주(蘇州)의 관해어원(灌蟹魚圓)을, 자기가 좋아하는 후식으로 원소병(元宵餠)을 만들었었다.
이 경은 완자탕을 좋아했다. 그래서 영선은 완자탕을 잘 만들었는데 특히 담백하고 시원한 국물에 사각거리는 신선한 채소가 담긴 관해어원은 청년도 좋아하고 이 경도 좋아하는 것이어서 자주 즐겼었다.
지금 둘은 후원의 뜰에 앉아 더할 나위없이 호사스러운, 적어도 둘에게 만큼은 그 어떤 궁중에서보다 더한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 경이 말없이 음식을 먹었고 깔끔하게 그릇을 비우자 영선이 말했다.
"더 줘요?"
"아니..."
영선이 무언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이 경의 얼굴을 본다. 천으로 입을 닦은 이 경이 손에 그 천을 꾹 쥐고 한숨을 쉬었다. 영선이 혀를 쯧 차면서 이 경의 손목을 잡고 당겼다. 이 경이 순순히 영선 쪽으로 다가갔다.
영선이 이 경의 볼을 만지작 거리면서 말했다.
"오늘 하루도 힘내고..."
"응..."
하품을 다시 하는 이 경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영선이 작게 한숨을 쉰다.
"화내지도 마세요."
이 경은 아무말도 없이 영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만화궁의 문전까지 그를 배웅했고 이 경의 지친 등을 보고 눈살을 찌부렸다. 영선이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있던 계자에게 조용히 말을 했다.
"궁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지금 신비 마마에 대한 욕이 장난이 아닙니다..."
계자가 울상이 되어서 웅얼거린다. 순간 머리가 돈 영선이 만화궁 대문 기둥을 주먹으로 퍽 치면서 이를 악문다. 영선이 열이 잔뜩 받아 짧게 숨을 내쉬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계자가 비명을 지르며 영선의 손을 감쌌다.
"마마! 손이 상하십니다!"
"으으으, 저 얼굴에 뭐라 할 수도 없고..!"
영선이 손가락을 웅크리면서 어쩔 줄 몰라 화를 삭혔다. 도올달기니 궁중 요호니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놀다가도 정무 생기면 빠릿하게 이 경을 보냈던 영선이다. 그런데 이 경이 황후랑 희락기를 보내다가 만화궁으로 뛰쳐 나왔으니 나름 평판을 관리하는 것에 신경썼던 영선인데 한순간에 나가리 되게 생겼다.
법도에도 어긋나, 명분도 딸려, 심지어 황후는 현숙하고 온화하기로 소문이 나있었고 이 경의 냉대에 동정표를 받는 입장이었으니 영선이 완전 천하요부로 욕을 처먹을 상황이 아닌가. 심지어 황후도 체면이 무척 깎인 일이고, 이건 국가대사인 후계자 생산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니 조정도 개입할 수 있는 일이다.
화를 내려고 말을 해도 이 경이 자신의 가슴 위에 머리를 올려 놓고 있는 것이 처연하기도 하고, 정말 싫어보여서 동정표가 가기도 하고, 뚱한 표정도 싫고... 영선은 도통 화를 내지 못하고 이 경을 보냈다. 결국 영선은 다시 발로 기둥을 차면서 분노를 풀었다.
"좆됐잖아, 씨발!!"
"마마, 욕설을..!"
울상이 된 계자가 영선을 막으려고 하는 것을 영선이 분노하여 시뻘게진 얼굴로 다시 토로하려 한다. 그러나 그 때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하나가 영선과 계자를 가로막았다.
"신비 마마를 뵙습니다."
영선이 기둥을 치려 올리던 손을 내리고 씩씩 거리던 숨을 진정시킨다. 심호흡을 하던 영선이 법도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작은 절을 하고 있던 궁인을 바라보고 짤막하게 말했다.
"음월전에서 나오지 않던 도 요소 상궁이 예까지 왔다면 황후께서도 많이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희 치의 오른팔이자 궁중 상궁 중 이인자. 그보다 높은 서열인 이 경의 상궁이 네 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태자 때부터 모신 것이 아닌 여러번 궁중의 권력다툼과 정세에 따라 변경 되었다는 것과 궁중 안을 다스리는 것이 희 치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도 요소는 영향력이나 권세는 가장 큰 상궁이였다.
그 주인인 희 치를 따라 음월전에서 나오지도 않고 은거 수준으로 얼굴을 보이지 않던 도 요소이다. 창백한 얼굴과 어딘가 음침해보이지만 예법을 준수함에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몸가짐을 한 삼십대의 여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노비는 감히 주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영선이 코웃음을 치고 빠르게 말했다.
"용건이나 말하시게."
"황후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영선이 한숨을 쉬고 계자를 보았고 계자가 불안한 눈으로 주인을 보았다. 영선이 손을 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희 치는 오래간만에 창문을 활짝 열고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영선은 음침했던 음월전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그 햇빛을 쬐고 있는 아름다운 사내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우수한 눈과 높은 콧대에 햇빛이 짜르르 쏟아지고 감돈다. 흰 피부가 마치 반짝이면서 빛나는 것만 같았고 턱을 괸 채 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속세의 것이 타지 않은 신성한 아름다움마저 감돈다.
영선이 조용히 희 치의 앞에 앉아 그를 본다. 희 치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영선도 입을 다물고 희 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밖을 바라보던 희 치가 문득 입을 연다.
"이 경은 처소에서 잘 잤나?"
"날 베개로 삼고.. 잤지."
"......"
희 치가 그 때 고개를 돌려 영선을 바라본다. 영선은 텅 빈 유리알 같은 희 치의 눈을 봤다. 희 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훗,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날 그렇게 싫어할 줄이야."
영선이가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경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네가 아니라면 죽였을 것이다."
영선의 얼굴이 싹 변했다. 순간 차가운 얼굴을 한 채로 희 치의 무덤덤한 얼굴을 노려본다. 영선이 고저없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치아. 너 분명 내게 뭐라 했었지."
"글쎄, 나도 내가 뭔지 모르겠군."
희 치가 입술을 비틀었다.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말고 표정 풀어."
영선은 그럼에도 희 치를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희 치는 그 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수녀 선발을 할 것이다."
희 치는 굳어지는 영선의 표정에도 단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후궁의 수가 적고 이번 사건으로 조정의 지탄을 피할 수 없어. 나는 수녀 선발을 찬성할 것이다."
"폐하, 지금.."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희 치의 말에 영선이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소매를 모으고 머리를 공손하게 조아린 뒤 말을 했다.
"아닙니다. 항상 황후께서는 옳으셨습니다."
영선은 그 말을 하고 작은절을 하고 소매를 펄럭이며 뒤를 돌아 음월전을 빠져나왔다. 영선의 그런 뒷모습을 희 치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희 치가 손에 든 찻잔을 손에 굴렸다가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찻물을 쏟아 버린다. 한 잔에 금 한냥짜리의 귀한 찻물을 버린 희 치의 표정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죽여버리고 싶었지.'
희 치가 어젯밤을 상기시킨다. 이 경이 희 치를 뿌리치고 음월전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희 치는 돌아버리는 머리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목을 조르려는 것을 참고, 참아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고 이 경의 뒷모습을 망연히 보았다. 음월전을 뛰쳐나가는 이 경은 다른 이의 처소에서 잠을 잤다.
희 치가 비어진 찻잔을 말없이 응시한다.
'위현, 날 비웃으십시오.'
음월전 밖에 나간 영선이 입술을 비틀면서 음울한 표정을 짓는다.
'현덕숙량한 양처 노릇은 물건너 갔으니, 오냐, 너희가 후궁전으로 한번 와보거라.'
영선이 살기 어리게 웃으며 조정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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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는 희 황후, 밖으로는 소 승상을 머리로 한 조정 전반.
후계자도 있는데 무슨 후궁을 더 들이냐고 역정을 내는 이 경은 결국 밀리고야 말았다. 사실 뽑고 나서 정을 주지 않으면 된다고 달래는 영선의 말도 있었고 이 경은 영선의 눈치를 보면서 확언했다.
"이번 입궁하는 애들에겐 정말 한 푼의 정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냥 입궐하는 것도 아니고 이 경의 의사에 반하여 수녀 선발이 이뤄지는 것이니 이 경은 못마땅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번에 들어오는 후궁들은 모두 조정 대신들의 딸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속내가 뻔하다. 영선이 빈정거리면서 말을 했다.
"첩신이 입궁했을 때 수녀 선발도 탐탁찮게 여기셨다가 첩을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을...!"
이 경이 표정을 일그러트리면서 영선을 본다. 말주변이 없어서 말을 삼키는데 정말 역정이 난 얼굴이라 영선은 속으로 씩 웃곤 이어말했다.
"저도 입궁 동기들과 선배들에게는 미안하여 까부는 것도 심히 봐줬으나 이젠 후궁전 선배가 되었으니 윗전 노릇을 단단히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영선이 문득 이 경의 뺨이 통통하게 오른 것을 보고 장난기가 돌아 능글맞게 웃으면서 손을 뻗어 이 경의 뱃살을 꼬집는다.
"황상, 근데 살이 많이 찌셨습니다."
깜짝 놀란 이경이 손을 쳐내면서 버럭 소리질렀다.
"뭐, 뭐하는 거냐?!"
"어쩐지 황상을 껴안을 때 푹신해서 기분이 좋.."
"이, 이익!!"
이 경이 새빨게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영선이 느물하게 웃는다. 이 경은 영선과 화해하고 기분이 좋은지 만화궁에 죽치고 앉아 단과일이며 밥이며 입 속에 털어 넣었는데 섬세한 영선은 이 경이 살이 찐 것을 단숨에 알아챈다. 이 경이 부끄러워서 배를 매만지고 영선을 쏘아보고 영선이 실실 웃으면서 다시 손을 뻗으려는 것을 역성을 지르면서 말린다.
"감촉이 생각보다 좋.."
"만지자 마라! 어명, 어명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점화선을 올린 것은 이 경이 영선의 위를 타고 오른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경이 헉헉 거리면서 허리를 움직였고 영선은 반쯤 기대서 이 경의 허리를 잡아 그를 돕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경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추삽질을 돕던 영선이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핼쓱한 표정으로 입 밖에 그 말을 내뱉고야만 것이었다.
"무, 무거워.."
이 경의 몸이 우뚝 섰다. 영선이 아차해서 이 경을 보았을 때 이 경은 얼굴이 창백해진채로 영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식은 분위기에 정신을 차린 영선이 당황해서 이 경의 허리를 꽉 잡았으나 이 경이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짐이.. 정말 살이 많이 불었느냐?"
영선은 이 경의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그렁한 눈망울을 보고 아주 심각한 내적 갈등에 이르렀다. 영선은 이 경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엉엉 우는 것을 보고 싶다는 강렬하고 사악한 충동과 이젠 조금 참기로 했었던 과거의 다짐 사이에서 갈팡지팡했다. 영선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결국 영선은 타협을 선택했다.
영선은 이 경의 뱃살을 꽉 쥐고 싱긋 웃으면서 이 경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 경이 동그란 눈으로 영선을 본다.
"하하, 괜찮습니다! 폐하! 폐하는 돼지여도 예쁘고 귀엽습니다! 귀여운 아기돼지 같..."
그리고 영선의 현명하지 못한 선택에 이 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콧등이 찡그려지고 순식간에 분노로 가득차서 눈물을 그렁거리는 얼굴을 본 영선이 어어, 소리를 내면서 손을 휘저었다. 영선이 이 경의 얼굴이 새빨게지면서 그가 주먹을 치켜드는 것을 핼쓱한 표정으로 봤다.
"잠, 잠만..!"
"개자식!!!"
퍽!! 순간 영선이 놀라 몸을 움츠렸으나 이 경의 주먹은 영선 바로 옆 침상에 내리쳐졌다. 영선이 침을 삼키고 파르르 떤다. 나무로 된 침상이 부서져 있었으니 이 경이 얼마나 화났는지 짐작이 갔다. 영선이 결국 분기에 눈물을 뚜둑 흘리는 이 경이 뛰쳐나가는 것에 놀라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황상, 잠, 잠시만...?"
"흐어엉! 개자시익!!!"
이 경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처소를 뛰쳐 나간다. 순간 그 앞에서 잠을 자던 류태감이 깜짝 놀라 일어나서 상황파악을 하다가 영선을 가는 눈으로 노려본다. 놀라서 뛰어온 계자가 황망한 눈으로 영선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정말로 구제불능이시군요, 라는 말을 하고 있어서 영선이 저도 모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는 진짜로..."
순간 영선이 억울해져서 변명하려다가 엉망이 된 얼굴로 통곡하며 저 멀리 사라지는 이 경의 뒷모습에 헉, 소리를 내면서 우두커니 바라보고야 말았다. 어찌나 빨리 도망치는지 점이 되어서 사라지고 궁인들과 태감이 황급히 따라 붙고 있었다.
영선이 새하얘진 얼굴로 입을 가린다. 이 경의 우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내리고 그제서야 핏기가 가신 얼굴로 중얼거렸다.
"좆됐다."
============================ 작품 후기 ============================
후궁 이만명은 궁녀까지 합해서 과장한 것이고 원래 후궁들 수는 121명~127명으로 고정되었다고 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오바였다고 하니 몇백명이라고 예상합니다... 그 쪼오오기 고대쪽 위진남북조나 당, 한 때로 가면 한번에 후궁을 이천명을 선발했다, 오천명을 선발했다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오므로 현대로 가까이 갈수록 후궁의 수가 적어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청나라는 후궁이 별로 없어서 암투도 별로 없었다는 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