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48)

00030 육궁분대무안색(六宮粉黛無顔色) =========================

 이 경이 무거운 마음으로 만화궁의 궁문 앞에 선다. 황제와 황후의 장남이자 여덟살 때 태자가 된 이후로 한번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이 경이다. 전장에서도 심지어 두려움을 느낀 적 없었던 이 경의 마음을 장식한 것은 공포였다.

 이 경이 그늘진 얼굴로 망설인다.

"햇빛이 셉니다."

 양산을 들고 있던 류 태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한다. 우회적으로 만화궁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말에 이 경이 치를 떠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너는 그것이 얼마나 드세고 독한 애인지 몰라서 그러느냐?"

"신귀비 마마는 솔직하신 분이시지요."

 류 태감이 얼버무리면서 외면한다. 아끼는 애첩이라 알뜰하게 이 경을 챙기더라도 조금만 수틀리면 살쾡이나 독사처럼 궁인이든 후궁이든 심지어 황제든 난장을 치는 신귀비를 떠올린 류 태감이 결국 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는다. 이 경이 어두운 표정으로 만화궁을 잠시 바라본다.

 독기가 가득 차서 반항어리게 이 경을 노려보던 영선을 떠올리면 화기가 치솟는다. 황제 중에서도 그 핏줄이 그냥 고귀한 것이 아닌 이 경이 어디 그런 대접을 받아 보았는가? 이 경의 친할머니는 정궁황후 출신에 친왕의 외손녀이고 아버지는 적통인데다가 어머니는 남경 최고 명문귀족가의 적녀다. 모후 인온황후의 이모할머니가 또 증조할아버지인 태조의 후궁이었고 왕을 둘 낳았으니 그 피도 황가에 섞였다. 부친이 고귀한 경우는 황가에 많았으나 이 경처럼 양친이 다 황실과 피가 섞인 경우는 없었다. 아예 진시황이 황제가 된 이후로 중화 천년 역사상 황제 중에서는 이 경만큼 고귀한 핏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경이 황제가 될 때 그의 황권을 위협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다만 모후인 인온황후가 거의 황제처럼 위세를 누려서 신료들이 무측천이 나오는 것이 아니냐 걱정했으나 지아비의 죽음에 슬퍼하던 인온황후는 부황을 따라가듯이 가버렸으니, 궁궐에 있던 모후가 부황 생전에 정치에 관여하기 위하여 부렸던 내관들만이 권세가 있어서 이 경이 걱정할 거리였다. 그들을 축출해낸 이후로 이 경은 희 치가 득세하기 전까지는 정통성에서 나오는 매우 강력한 황권을 누리고 있었고 희 치가 황후가 된 이후로는 조정에서는 감히 황실을 무서워하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이 경에게는 자신에게 아첨하고 져주는 이들만이 있었다. 무관 출신 후궁들도 감히 이 경에게 대들지 못했는데 영선은 한번도 지지 않고 바락바락 대들면서 자신을 도발한다. 그 앙칼진 모습이 신선하고 가식없게 느껴지더라도 가끔 선을 넘을 때면 이 경은 영선을 차라리 때려죽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 경이 손을 든 적은 별로 없었는데 왜냐면 영선이 갓 스무살이 되어 이 경 나이의 절반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인지라 차마 민망해서 손을 올릴 수 없었던 것이고 또 그 마른 몸을 보면 측은하기 그지 없어서 말로라도 겁박한 적이 없었다. 이 경이 영선을 몹시 사랑한지라 그를 보면 화가 녹았는데 저번에는 희 치의 일로 열이 받아서 때릴뻔한 것이다.

 사실 이 경은 희 치가 자신을 말려서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진짜 영선을 때렸으면 영선 성격상 자살하거나 사가에 내쳐달라고 난리를 쳤을 텐데 그 당시에는 손목을 잡고 말리던 희 치가 짜증났으나 지금은 심지어 고맙게 까지 여겨진다.

 영선은 잠자코 만화궁에 있었으나 이 경은 영선이 충격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서렸다. 이 경이 안그래도 사납게 생겼는데 주먹을 휘두르려했으니 무척 놀라고 경악했을 것으로 생각하니 달래주고 싶더라도 고분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골이 아파온다. 이 경이 한숨을 쉬고 땅을 박찼다.

"그래도 영선이 만한 애가 없다."

"신귀비 마마께서는 그래도 폐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냐?"

 이 경의 반색에 류 태감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면서 말을 한다.

"더벅머리 아이일 때 입궁하여 황실에 몸을 담은지 오십년이 되갑니다. 노비의 식견이 짧으나 신귀비 마마께서는 똑똑하시고 눈치가 빠르신 분이신데 황상을 계속 노엽게 만드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게지."

 이 경의 퉁명스러운 말에 류 태감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귀비 마마께서 요즘 신경이 날카롭다고 하십니다. 밥도 잘 드시지 않으신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수녀 선발 이후부터 있던 일이라 합니다."

 그 말에 이 경의 입이 딱 다물어진다. 만화궁을 잠시 바라보던 이 경이 한참 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들어가자. 미워도 내가 어떻게 영선이를 버리겠느냐.."

 이 경이 만화궁의 안으로 들어가자 계자와 다른 궁인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는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리고 이 경은 그들을 본채 만채하면서 만화궁의 문턱을 밟았다. 만화궁은 그 이름처럼 온갖 꽃들이 많아서 여름이면 울창한 여름꽃들이 무척 만개했는데 이 경은 그것을 볼 틈도 없이 만화궁의 안으로 들어가 영선을 황급히 찾았다.

 영선은 의자에 앉거나 창문 앞 긴 침상에 누워 있지도 않았다. 창문을 닫은 만화궁 안은 어두웠고 그것은 이 경에게 낯선 분위기였다. 촛불이 일렁거리고 이 경이 휘장 안에서 흔들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멈칫했다. 항상 관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창문 안 그림자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귀비."

 이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휘장의 그림자가 멈칫한다. 고개가 돌려진다. 이 경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단 생각을 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 경이 아득한 심정으로 그림자를 본다. 순간 분노는 잊혀지고 항상 밝고 화사했던 만화궁의 어두운 모습과 관마저 벗고 병자나 야인과도 같이 머리를 풀어 헤친 영선의 호리한 그림자가 몹시 불쌍하고 가련해보였다.

"날 보고 싶었소?"

 이 경이 자기도 모르게 침대로 가까이 간다. 그 때 희미한 목소리가 이 경의 발걸음을 막았다.

"오지 마십시오."

 순간 이 경이 섭섭하고 또 고집을 부리는가 싶어서 화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 건가?"

 그리고 휘장 안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이 경이 버럭 소리지르면서 말을 했다.

"그 꼬라지가 되고서도 자존심을 세우는거냐? 넌 대체 어떻게 된 애냐??"

 영선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락거리면서 대들줄 알았던 이 경이 더욱 더 애가 타서 침대로 다가가려는 것을 영선이 아까 전보다 조금 더 크지만 그래도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오지 마십시오."

 그 순간 이 경의 목이 꽉 맥힌다. 당돌하고 기세 등등했던 영선이 저렇게 피죽도 못쓰는 것이 화가 치밀고 또 이 상황이 싫고, 이 경 스스로도 후회가 되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경이 영선의 말을 무시하고 휘장을 젖히고 들어간다. 영선이 새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한다.

"황상께서는 또 제가 싫다는 짓을 저지르십니까!"

 이 경이 놀라서 주춤거리는 것을 틈타 영선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이 경이 앙상하게 마른 영선의 팔에 놀라서 더듬거렸다.

"이, 이게 무슨 꼴이냐."

 구 화 때도 과일을 못먹어 말랐었는데 영선의 팔은 이 경의 손에 한번에 들어갈 만큼 앙상하고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해골같이 삐쩍 마른 뼈다귀 같은 것에 이 경이 경악하면서 할 말을 잃은 채 영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영선이 힘없이 말을 했다.

"한 달 동안 첩신을 보지 않으려 하셨는데 이제 와서 찾으십니까."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아랫것들이 대체 윗전을 어떻게 모셨길래?!"

 버럭 소리지르는 이 경의 말에도 영선이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이 경이 뼈다귀가 보이는 영선의 몸에 아득함을 느끼고 영선의 팔을 잡다가 다시 놀랬다.

"이러다가 사람 죽겠다. 뭐 좀 먹자."

 영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경이 속이 다 타들어가서 소리 질렀다.

"너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세냐!!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했구나!"

 영선이 그 때 다시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푹 덮었다. 이 경이 아차해서 모질게 말을 한 것을 후회했으나 영선은 대답없이 몸을 틀어 이 경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 경이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다.

"얼, 얼굴 한번 보자.. 영선아."

 영선은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굳게 다문 영선이 벽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경이 애가 타서 억지로 영선의 몸을 돌리려고 팔뚝을 잡고 힘을 누르려다가 영선의 비명소리에 놀라서 손을 뗐다.

"아악!!"

 이 경이 놀라서 손을 떼다가 이내 화가 나서 소리질렀다.

"대체 내가 네가 뭘 어떻게 해야하느냐!"

"황제께서는 한 달간 저를 신경도 쓰지 않고 버려놓다가 마음이 내키면 찾으시고 제 마음마저 멋대로 하시려는 군요! 제가 고집이 세다고요? 괴롭히려고 작정을 했다고 하셨습니까?"

 영선이 속으로 울화를 삼켰다. 한 달 동안 영선은 치밀어 오르는 화기 때문에 식사도 거르고 억울함과 분노 때문에 앓아 산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경은 어디 하는 말이 말 같지도 않고 사람의 속을 터지게 만든다. 다시 또 힘으로 영선의 얼굴을 보려는 이 경의 행동에 영선이 치를 떨면서 말을 했다.

"명령을 하십시오. 그럼 황제 폐하를 다시 모시겠습니다."

"영선아."

"비단 옷을 입고 치장하고 폐하에게 상냥하게 대하겠습니다."

"영선아!"

 버럭 소리 지른 이 경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내가 그런 것을 원했다면 네 건방짐을 봐주고 널 아꼈겠느냐?"

"폐하는 나를 아끼고 사랑하지는 않으십니다."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사랑한다면 어찌 손을 대시려 합니까."

 영선의 말에 이 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영선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잠자코 있었다. 이 경이 그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한 눈으로 영선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여 봐주었구나."

 이 경이 치를 떨면서 영선의 뒤돌아 누은 모습을 바라본다.

"천자인 내가 이렇게 비는데도 이렇게 대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너를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다."

 영선이 그 때 말을 했다.

"그럼 저도 이렇게 죽겠습니다."

 이 경이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

 이 경이 순간 소름이 끼치고 몸이 시려서 멍하게 영선을 바라본다. 영선이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사랑을 받다가 버림받은 소실(小室)만큼 비참한 것이 어딨겠습니까. 구차하게 사느니 저는 오늘부로 음식을 들이지 않겠습니다."

 이 경이 그 독한 말에 몸을 부들거리면서 영선을 바라본다. 이불 밖으로 길게 늘여진 주홍색 머리카락이 보인다. 침대에 축 늘어져 있는 영선을 빤히 분노를 담아 이 경이 바라본다. 뻔뻔하게 죽겠다고 말을 한 영선이 이해가 되지 않고 증오스럽다. 화를 참느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이 경이 떨리는 손을 꽉 쥐면서 충혈된 눈으로 영선을 바라본다.

"어디 그러면 한 번 해보거라. 네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서려고 아주 작정을 했는데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 경이 비꼬듯이 말을 하면서 소매를 털며 궁 밖을 나간다.

"만화궁에 시체 하나가 나가겠구나."

 화가 나서 성큼거리면서 빠져나가는 이 경의 등을 이불 밖으로 영선이 빼꼼 두 눈을 빼고 빤히 바라본다. 영선이 이 경이 만화궁 밖을 빠져나가는 것을 고개를 살짝 들어서 확인하다가 화가 나서 류 태감을 닥달하는 목소리를 듣고 다시 고개를 베개에 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영선이 헛웃음을 터트리면서 빤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1. 이 경 VS 영선... 승자는?

2. 걱정해주셔서 다들 감사합니다 :) 코멘 다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마이너 취향이라서 자급자족하는 소설이라 동조하는 분들이 많아서 참 좋습니다. 이북 시장에 취향 소설들이 많이 나와서 텅장 좀 됐으면 하는 마음... ^P^ 덕질 하는데 쓸 돈은 아깝지 않아요ㅠㅠ 왜 없을까..

3. 역덕후 자까가 인용을 많이 하는데 이 인용들이 사실 다 중국 고사들이라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입니다. 첫챕터는 주석을 막 달았는데 육궁분대무안색에선 불편하실까봐 주석을 별로 넣지를 않았어요. 사실 첫챕터에서 복선을 인용을 많이 하였는데 생소하실 내용이 많을 것 같아서 주석으로 일일이 달았는데 첫챕터처럼 복선 넣고 주석을 넣는 것이 나을 까요? 아니면 그냥 둘째 챕터처럼 스무스하게 가는 것이 나을 까요? 자까 취향은 사실 인용을 하는 것...

4. 복선을 상당히 좋아해서 많이 넣고 있습니다. 영선이 정체도 많이 양념을 쳐놨지용 독자 분들이 많이 발견해주셨음 좋게따... 헤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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