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48)

00049 장상사 최심간(長相思 摧心肝) =========================

 이 경이 말없이 운다. 화를 내지 않고 축 늘어져서 침대에 박혀 있었다. 평소에 신귀비와 싸울 때는 많았으나 이토록 영혼 없는 사람처럼 늘어진 모습을 본적이 없어 류 태감이 크게 당황하여 서성였다.

 죄(罪)자 사내, 고 운정이 멍하게 말했다.

"나 그래서 그냥 가면..."

 류 태감이 조용히 말했다.

"오 호위님."

 오 상환이 스겅 검을 빼내 고 운정의 목에 칼을 겨눈다. 고 운정이 꼬리를 내리고 주눅들어 말했다.

"뭐, 뭐 어쩌라는 겁니까."

 류 태감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고 운정이 젠장, 소리를 내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알겠다고요..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이 경의 몸이 축 늘어져 있고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채 벽을 보면서 누워 있었다. 고 운정이 조심스럽게 그 방 안을 들어온다.

 이 경이 고 운정을 데리고 원양행궁으로 돌어왔을 때 고 운정은 멍하게 있을뿐 그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 경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 환관처럼 생긴 늙은이에게 명령을 했을 때도 고 운정은 그가 황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선이 물에 빠져서 주홍색 머리를 들어내고 달려왔을 때, 이 경이 환궁을 하자며 명령하자 궁인들이 바쁘게 움직였을 때, 또 고 운정이 뭐 후궁이라며 채비를 하라고 닦달을 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는 그제서야 진짜 이 경이 황제고 고 운정의 인생이 막장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쉬벌탱..'

 고 운정은 바로 욕지기를 내뱉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 경의 몸이 자꾸 생각나고 그 얼굴이 뭐 처음 본 것과 다르게 예뻐보여서 어른거린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사태가 너무 심각하고 엄정하여 고 운정은 공황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 운정은 목숨이 걸렸기에 어쩔 수 없이 속으로만 욕을 하여 이 경에게 다가갔다.

"저기, 저 폐하?"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호칭을 부른다. 이 경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바라본 고 운정이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이 경의 등을 조심스럽게 스다듬었다.

"괜찮, 으악!"

 그리고 이 경이 바로 운정의 손가락을 잡아 꺾었다. 운정이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고 할 처지도 아니라 몸을 발발 떨었고 이 경이 더러운 것을 떨궈내듯이 그 손가락을 던지듯이 놓는다. 운정이 눈물을 매달면서 이 경을 자신도 모르게 노려보았다.

"왜 이럽니까!"

 돌아선 이 경이 하물며 불량배마저 노려보는 것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너 *백 씨가 그리도 교만하고 방자하니 그리 건방진 것이냐? 너 따위 불량배도 이젠 날 이리도 무시한다."

"아니, 저 그런 것이 아니라."

 금방 꼬리 내리고 주눅이든 고 운정에게 이 경은 봐주지 않았다. 이 경이 류 태감을 바라보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놈의 두 다리를 당장 잘라라. 짐을 시중드는데 다리는 필요가 없다."

 고 운정이 그 때 기겁을 해서 이 경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잘못했습니다!"

"예, 폐하."

 류 태감이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시위를 부르려하자 운정이 더 경악해서 이 경에게 추하게 매달린다.

"폐하, 잠시만, 폐하!! 제가 더 잘 모시겠습니다!"

 고 운정이 애원을 하면서 울고불면서 매달리고 이 경이 그것을 침상 위에서 머리를 손으로 받친 채로 잠자코 구경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차갑고 정이 없었기에 운정이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 경의 변한 모습에 공황에 빠진다. 그러나 운정이 다음의 말을 했을 때 이 경의 몸이 움찔거렸다.

"제가 반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첫눈에 반했다고, 잊지 못했다고.. 부인으로 삼겠다고 말했잖습니까!!"

"...네 지금 뭐라."

 이 경이 흔들거리는 것을 눈치챈 운정이 그 동앗줄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이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에 걸터앉는다. 운정이 교활하여 이 경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기어가 이 경의 발에 입을 맞췄다. 이 경이 몸을 움찔거리고 눈에 노기가 풀려 복잡한 시선으로 운정을 보았다. 운정의 골격은 영선과 많이 다르지만 눈매나 말투가 몹시 비슷했다.

"정말 연모할 수 있습니다."

"......"

"아니 연모합니다."

 운정이 결심하여 이 경을 노려보면서 말한다. 이 경이 그 건방짐에도 무례를 탓하지 않고 그 활활 타오르는 두 눈을 잠시 응시한다. 이 경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투기를 하기보단 사랑을 하겠습니다."

"......"

"연모하는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폐하를 사모합니다."

 이 경이 그 때 운정의 턱을 잡아 올리면서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운정이 침을 삼켰다.

"건방지지 마라."

"...예."

"운(雲)자는 재수가 좋지 않다. 아정(娥靜)으로 바꾸자."

 순식간에 구름에서 예쁜이 자를 얻어버린 운정이 속으로 여인네 같은 이름에 욕을 내뱉었으나 얼굴에는 감격을 드러내면서 순아하게 말했다.

"폐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 경이 그리고 아정의 머리에 천천히 발을 올린다. 아정이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순순히 응하여 이 경의 발에 맞춰서 바닥에 이마를 댔다. 아정의 머리에 발을 올려놓은 이 경이 서서히 발에 힘을 주면서 그 머리를 짓밟는다. 아정이 몸을 떨면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정아."

"예, 예.. 폐하."

"네가 이토록 순종적이니 짐이 기쁘구나."

 아정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더, 더..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 경의 입술이 비틀린다.

"그래, 짐은 원래 문란하여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 말에 아정이 몸을 굳혔다. 이 경이 발을 아정의 머리에서 뗀 후에 아정의 턱을 발끝으로 올린다. 아정이 그에 따라 고개를 들었지만 표정은 과히 좋지가 않았다. 이 경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너가 불량배여도 짐을 기쁘게 한다면 백 씨 이상으로 널 사랑해주마."

"......"

"황자도 낳아줄 수 있다."

"......"

"그러면 너는 황자의 아비가 되는 것이고 짐의 총비가 되는 것이다."

"...폐하."

"백 씨가 어떻게 권세를 누렸는지는 들어 보았겠지?"

 아정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아정이 그 때 멍하게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갑자기 변한 아정의 모습에 의문을 가져 그를 내려다본다. 아정이 이 경의 발을 품에 껴안으면서 그를 두려운 눈으로 올려다본다. 아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지금 폐하를 안을 수 없습니다."

 이 경이 그 말에 침묵했다. 잠시 아정을 바라보다가 하, 소리를 내면서 조소한다. 이 경이 상처받은 얼굴로 아정을 노려보았다.. 이 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도 짐이 더러워서 안기 싫은 것이지."

"폐하."

"하.. 하하."

"폐하."

"하하하하하! 크하하하! 그래 짐이 황제여도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인데 어쩌겠느냐!"

"폐, 폐하.."

"하물며 노리잡배도 창부는 더러운 법을 아는 법이지!! 하하하! 짐이 잘못했다. 짐이 잘못했어. 네가 아무리 불량배 따위여도 창부 계집보다 더러운 몸을 안으라고 하다니.. 짐이 잘못했다."

 아정이 참지 못하고 경악하여 소리쳤다.

"폐하!!"

 아정이 그 때 이 경의 어깨를 잡아채 시선을 마주한다. 이 경의 눈이 차갑다. 아정이 경악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저를 정말 믿지 않으시는군요."

 이 경이 시선을 피하고 조용히 말했다.

"믿지 않는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

"폐하를 사모한다고 말했습니다.

"짐이 황제가 아니어도 사모하겠느냐. 이 나를 누가 좋아하겠느냐."

 아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폐하를 납치해서 가지려고 했습니다."

 이 경이 숨을 헐떡인다. 감정이 거칠어져 이 경이 침대위로 올라가 몸을 웅크려 그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얼굴을 가려서 아정이 얼굴을 볼 수 없게 했다. 그것이 상처받은 짐승같아서 아정이 측은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정이 침대에 얼굴을 묻고 몸을 웅크린 이 경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폐하는 더럽지 않습니다."

"......"

"그리고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이 열릴 때까지."

 이 경이 대꾸를 하지 않았고 몸을 떨었다. 아정이 느릿하게 등을 쓸어내렸고 이 경이 헐떡거리면서 그 손길에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아정이 몇 번이고 목숨이 오갔던 상황에 심장을 쿵쾅인다. 아정이 속으로 이 이름도 바뀌고 후궁으로 끌려가게된 사정에 욕을 하면서도 이 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달랬다.

'이 미친 고 운정 네가 진짜 제대로 엿됐구나!'

 그 때 객잔에서 눈치채고 물러갔어야 했다. 용서를 한다고 말했을 때 그저 이 마을을 떴어야 하는데 미련이 남아서 물러가지 못했으나 아정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이 경을 욕했다.

'그래도 기왕 들어갈 거면..'

 아정은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눈치빠른 아정이라 지금 영선의 일로 상처받은 이 경을 안으면 이 경이 더욱 더 상처받을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러면 아정은 한 때의 여흥이 되어 저 구중궁궐에 쳐박혀서 버려지는 독수공방 서러운 첩실신세가 되는 것이다.

 속으로 욕을 퍼붓던 아정이 이를 으득 갈면서 생각했다.

'형씨 말마따나 도올달기 만화궁 신귀비 정도의 권세는 누리고 덤으로 황자황녀 아버지로 호사를 누려 떵떵거려야 좀 안 억울하지 않겠어?'

 이 경이 마음에 들고 한 때 정실로 맞는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자유를 앗아간 이 경이고 그의 두려운 모습을 충분히 맛보았기에 아정은 그 때의 무언가 마음이 갔던 남음으로서 이 경을 볼 수가 없었다. 이 경이 다리를 잘라버린다고 할 때 그가 황제임을 충분히 인지했다.

 아정이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서 이 경을 잘 달래고 그에게 성욕을 드러내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정은 이 경이 영선을 행궁에 내버려두고 성도로 귀환하는 길에 달라붙어 그를 위로하면서도, 이 경의 마음을 달래지 못해 당혹감을 느꼈다.

 이 경이 정말 상처받은 짐승처럼 웅크린채 아무도 보려하지 않은 것이다.

'씨, 씨부랄..'

 아정이 식겁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린다. 이렇게 되면 권세는 커녕 사랑싸움에 희생되서 황궁에 갇혀서 외롭게 늙어죽을 박복한 신세가 되는데 이건 완전 나가리아닌가. 아정은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궁인들이 속삭이는 것을 듣고서 더욱 더 식겁할 수 밖에 없었다. 신귀비가 어떻게 총애를 받고 어떤 특혜를 받았는지, 둘이 싸우고도 어떻게 화해했는지 듣는 순간 아정은 황제가 신귀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초조해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지들끼리 싸우고 말지 왜 하필이면 나를?!'

 아정이 마음에 문을 닫아 기력을 잃은 이 경에게서 재롱을 떨고 뒤에서는 술을 마시면서 넋을 놓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이 경이 저리 풀이 죽었으니 행렬도 흐지부지 느려져서 결국엔 앓는 이 경이 가는 곳곳마다 시간을 끄는 상황이 되었다. 류 태감도 오 상환도 고 아정도 그것이 이 경이 가기 싫어서 병이 남을 알았지만 입 밖에 차마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경이 워낙에 날이 서있어서 입을 열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아정으로서는 이도저도 못하는 암담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이 바뀐 것은 성도에서 소식을 듣고 단숨에 말을 타고 달려온 소 재도(昭材導)의 등장이었다.

 소 재도는 이 나라의 승상으로 십삼년 동안 이 경을 보필해온 이로 강북 귀족 명문 소가 출신이었다. 그리하여 뿌리 깊은 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해 등용된 희 치의 등장에 이 경과 손잡고 그를 견제한 이였으며 그를 위해 최종적으로 처조카까지 후궁으로 보낸 뼛속까지 귀족 출신의 권세가였다.

 소 승상은 그의 아비인 이 금을 모셨기에 이 경이 이 금과 닮은 구석이 있는 줄 잘 알았다. 이 금도, 이 경도 한번 사랑하면 마음에 둔 사람에게 끊임없이 집착하고 놓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버리고자 몇번이나 마음을 먹고 증오하지만 다시 사랑을 할 사람이다. 이 금도 같이 동침한 궁인을 때려죽인 인온황후에게 충격을 크게 먹었지만 결국엔 그녀를 버리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궁궐에 돌아가서 다시 신귀비를 불러올텐데 그러면 황실의 명예가 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려고..'

 더군다나 희 치가 내명부를 장악해서 털이 쭈뻣 서게 소름끼치는데 영선은 희 치의 권한을 총애를 배경으로 나눠가졌으면서도 행실이 도를 넘지 않으니 소 승상은 영선이 차라리 존재하는 것이 편했다. 그리하여 처조카인 유 도림에게 그에게 대들지 말라고 몇번이고 충고하였지 않는다.

'게다가 그 얼굴..'

 가장 충격적인 가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희 치의 자태에 이 경이 증오를 버리고 그를 총애하는 것. 그러면 소 승상이 지금껏 지켜온 귀족사회의 이익에 크나큰 손실이 온다.

 소 승상이 칼을 뽑아 아정에게 겨누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소리쳤다.

"설득하겠느냐? 안하겠느냐!"

 아정이 식겁해서 말했다.

"나, 나는 후궁.."

"아직 성지도 못받은 불량배 따위가 무슨 후궁!!"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소 승상 옆에 시립한 류 태감이 조용히 말했다.

"고 재인. 고 재인도 알다시피 황제께서는 신귀비 없이는 살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생기없으신 모습을 지켜볼 예정입니다."

 고 아정이 겁을 먹어서 두 권력자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두려움에 몸을 떠는 고 아정을 소 승상이 노려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황실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결단하시오."

"그, 그게.."

"허허."

 소 승상의 얼굴에 살벌한 기운이 돌자 고 아정이 잽싸게 말을 했다.

"합니다! 해요! 합니다!!"

"그럼 같이 가세."

 소 승상이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류 태감이 한숨을 쉰다. 맥이 풀린 고 아정이 멍하게 그 둘을 보다가 재촉하는 둘의 뒤를 따라서 이 경이 머무는 처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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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운화는 이혼하고 가족이 없었다.

 부모가 그녀를 팔았으니 영선이 대신 돈을 주어 장례를 치뤄주었다. 상주를 맡았고 돈을 주어 곡하는 여인을 고용하여 심운화가 가는 길을 배웅했다.

 심운화는 이 경이 황제임을 알고 영선이 오해를 받은 것을 깨닫자 충격을 받고 크게 탄식했다. 그녀는 스승을 위해 망설임없이 목숨을 끊었다.

 영선이 그녀의 뼈가 뿌려지는 백수를 바라본다. 영선이 물 위에 손을 대자 손에 든 뼛가루가 스륵 녹아 사라졌다. 마음이 지끈거렸다. 심장이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영선이 이 경을 생각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심운화가 영선에게 말한다.

'저는 정말 사랑하는 것을 몰랐기에 결혼을 했으나 제가 사랑하는 것이 자유임을 알았습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선이 그 때 자문한다.

'나는 정말 이 경을 사랑하는 걸까?'

 묻어두었던 질문을 수면 위로 꺼낸다. 영선이 절망감에 빠져든다. 이 경이 운다. 이 경이 상처받는다. 영선이 상처받아서 독하게 말을 하고 그 스스로를 상처냈다. 영선이 이 경을 증오하고 동시에 그 이상으로 그리워했다.

 잠을 자지 못하고 이 경과의 나날을 생각한다. 이 경의 부드럽고 작은 입술이 그립고 온기가 그립다. 이 경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오르고 이 경의 체취가 그립다.

 이 경. 이 경. 이 경.

 머릿 속을 온통 채운 생각에 영선이 헛웃었다.

'내가 이 경에게 그렇게 말할 처지가 되지 못하지.'

 상처입은 이 경. 그리고 상처를 준 자신.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 경에게 상처주었는가. 영선이 조소한다. 애초에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것은 자신이였다. 그런 주제에 질투나 하고.. 그렇게 더러운 말을 내뱉고. 자신이 혐오스러워 영선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경이 미운 자신이 싫었다.

 영선이 그제서야 자신을 인정했다. 한번도 약속을 깬적이 없는 이 백 영선이 그 희 치와의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이렇게 절망하고 있다. 탄식하고 또 탄식하며 영선이 몸을 웅크린다.

 차라리 잘된 것이다.

 이 경은 황제이니 다른 남자와 관계할테고 영선은 그것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이 경이 다른 남자 아래에서 헐떡이는 것이 보기 힘들었다. 고 운정 그 놈도 찢어죽이고 싶었는데 또 이 경이 그러지 않으리란 장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결혼식 하나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경이 웃으면서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한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좋은 추억으로 남아서, 이렇게 이정도 선에서 끝내고 잊으려고 했다.

 그리고 영선은 단기필마로 헐레벌떡 달려온 류 태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공손히 말했다.

"어전태감을 뵙습니다."

"아니, 마마! 마마께서 어찌.."

 황송하여 어쩔줄 몰라하는 류 태감이 영선의 앞에서 같이 무릎을 꿇는다.

"이러지 마십시오. 아직 마마께서는 귀비이십니다."

"이제 곧 심운화의 장례가 끝나니 바로 근처 백수사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마마께서는 폐하를 모시고 후궁전의 기강을 잡는 막중한 임무가 있사온데 어찌 가시려합니까."

"폐하의 무사안녕을 빌고 도올의 중흥을 빌겠습니다. 개가를 하여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류 태감이 영선의 고집을 알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영선은 묵묵히 꿇어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류 태감이 물러나지 않고 품에 소중히 가지고 있던 상자를 무릎 꿇어 공손하게 위로 올려 그에게 바쳤다.

"이게 무슨?"

 영선이 의문에 찬 목소리로 말을 하나 류 태감은 묵묵히 그것을 들고 있을 다름이었다. 영선이 류 태감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결국 상자를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상자를 엶과 동시에 영선이 괴성을 질렀다.

"뜨아아앏!"

 소스라치게 놀란 영선이 핏기가 싹 가셔서 경악한다. 얼굴을 부여잡고 충격에 빠져서 그것을 노려보면서 비명을 지른다.

"끄아아아아! 뜨앏!"

 얼굴을 쥐어 뜯으면서 여기에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그것'을 보면서 미친듯이 소리질렀다.

"끄아아아아!"

 못볼 것을 본 사람처럼 벌벌 떨던 영선이 순간 분노해서 류 태감에게 시선을 향한다. 이 사태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영선이 이 경에 대한 미움이고 사랑이고 둘째치고 머릿 속이 새하얘지고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 어전태감이란게!!!!"

 류 태감이 이 경을 오래 모셔 영선에게도 존중을 받았으나 이 때에는 류 태감도 죄가 있어서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침중한 심정으로 말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영선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것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뭘 어쩌긴 어째!!! 내가 어쩔 수가 있어?!!"

 영선이 순간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주섬거리면서 그것을 소중하게 품에 앉는다. 영선이 울먹거리면서 말한다.

"아, 미치겠네 진짜!!"

 류 태감이 영선을 안내하고 영선이 핏발 선 눈으로 한시도 잠을 자지 않으면서 그를 따라 이 경의 행렬을 따라잡았다.

============================ 작품 후기 ============================

주석 1. 이름을 부르기 싫어 혐오감을 나타낸 상태. 성씨로 호칭하는 것이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을 뜻할 때가 있다.

아직 장상사 최심간 챕터의 하이라이트는 오지 않았습니다ㅇㅂㅇ.

조금 유치한 설문조사를 하는데 이 경이와 영선이의 평판 조사입니다. 생각보다 압도적으로 영선이가 우세하네요.

 계속 얘네들 싸우는 것이 언제까지 이어지냐면.. 장상사 최심간 챕터는 챕터 전체가 이름대로 박터지게 싸울 것 같네요. 조금 늘어지는 편수인게.. 이 편에서 영선이가 마음을 다잡고 이 경에게 진심이 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삼챕이 마무리가 되면 그 이후는 이제 이 경이는 배가 계속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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