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장상사 최심간(長相思 摧心肝) =========================
영선은 미아의 일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나하면 희 치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희 치.
희 치가 가지고 있는 그 과거에 대한 기이한 집착을 생각했을 때 희 치야말로누구보다 이 일을 열정적이게 해결할 사람이었다. 그리고 영선의 짐작대로 희 치는 너무나도 손쉽게 일을 처리했다.
공정군주 이 효는 이 경의 바로 아랫 남동생인 월왕 이 구의 고명딸이었기에 아버지인 월왕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하여 집안도 명문가고 이 경이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잘생기고 준걸한 평인 사내와 결혼하였으나 불행히도 작년에 남편이 급체를 하여 사망하였다.
기가 막히고 황당할 일이니 이 효도 이 효이지만 이 구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어져서 딸의 신세를 한탄했는데 그 당년에 사십구일재가 끝나기도 전에 재가를 말했다가 이 경에게 체통도 의리도 없다하여 욕을 먹고 입을 다문 적이 있었다.
한 일년간은 눈치가 보여서 이 효의 재가를 알아보지 않았으니 아무리 공주의 재가가 지탄받지 않는 일이라지만 딸을 아끼는 마음에 이 경의 심기를 거슬른 것이 잘못이었다.
이 경도 분노는 풀렸지만 재가를 허가 할 수 없었다. 유학자들이 과거를 통해 신진세력으로 등장한 상태고 이 경이 소 승상으로 대변되는 강북귀족과 희 치로 대변되는 병부의 신진세력들을 견제하려고 유학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상태인데 명문귀족가와 얽힌 이 구가 눈치도 없이 유학자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불의의 말을 하니 차마 동생의 고명딸이라도 시집을 보낼 수가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효는 몹시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다. 올해 스물넷이니 꽃다운 나이에 인온황후의 아름답고 형형한 피부를 닮아 피부가 눈처럼 새하얗기로 유명한 황실제일의 미녀였는데 독수공방을 하니 그녀도 서러워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사십대의 소 재도에게 재가할 생각이 없냐는 소리에 화를 버럭 냈던 이 구지만 주선자가 희 치라는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희 치는 황후로서도 대단한 영향을 가졌지만 그 이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위치를 가진 이였고 소 재도는 그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도 요소 상궁이 직접 나서는 일이니 이 구도 얌전하게 그 말을 끝까지 들었고 정치 상황을 꼼꼼히 설명해주고, 그러니 지금 일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강북최고명문가인 소 승상과 재혼하는 길밖에 없다고 조곤하고 설명하는 말에 고민을 했다.
그래도 거의 스무살 차이에다가 아비보다 나이가 많은 소 재도 아닌가. 그리고 병풍 뒤에 있던 이 효가 이 구의 고민에 기침을 했고 이 구가 그 뜻을 알아채고 바로 승낙을 했다.
소 승상이 비록 나이가 많아도 성품이 온화하고 금을 타는 것을 좋아하는 섬세한 사람이니 이 효는 소 재도가 나쁘지 않았다. 말마따나 이 구가 이 작교 만큼 고난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많은 이 경의 견제에 실권도 없는 처지인데 이 경이 죽을 때까지 독수공방하란 말인가? 더군다나 황백부는 너무나도 건강하여 앞으로도 삼십년은 더 살수 있을 것 같이 보였다.
차라리 소 재도와 결혼하면 복잡한 이 효의 정치적인 처지도 이제 나아지는 상황이니 소 재도가 죽으면 삼혼을 가면 될것이고 소 재도 자체도 준수하고 사내자식이 없으니 이 효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효가 이 구를 은근히 압박하고 이 구의 허가 하에 일이 이루어졌다.
도교를 믿는 강북귀족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희 치가 궁궐 내 도교 사원인 태진사에 예배를 허락하고 소 재도가 희희낙락하여 태진사에 들렸을 때 소 재도는 매미깃털같이 얇은 비단을 열두겹을 걸쳐 선녀옷처럼 펄럭거리는 옷을 입은 이 효를 마주쳤다.
이 효는 몹시 하늘하고 눈매가 요염한 미녀였고 흐트러진 듯한 타마계의 머리를 하고 더운 숨을 내쉬면서 나무 아래서 가만히 소 재도를 보고 있으니 소 재도가 한눈에 반해 어쩔 줄 몰라했다.
소 재도가 어쩔줄 몰라하는 것을 아예 작심한 이 효가 수작을 부려 더욱 더 그를 옭아맸고 소 재도는 결국 희 치에게 부탁하여 이 효와의 혼사를 주선했다.
그리고 끙끙앓던 소 재도가 이 효와 혼인하고 싶다고 이 경에게 빌자, 이 경은 떨떠름해하면서도 혼사를 수락했다.
이 효와 소 재도의 일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으니, 유 여와 이 미아의 일만 남았는데 이 경은 무언가가 개입한 듯한 인위적인 상황을 단숨에 알아채고 반발심을 느끼고 분노하였다. 황실의 일에 개입한 무리를 굳이 찾으려 하지는 않았지만 더욱 더 단단한 마음으로 이 미아의 혼사를 반대하였는데 영선은 그런 이 경에게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마음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유 여와 이 미아의 혼인은 이 미아가 이 경 뺨치는 고집을 드러내면서 해결되었는데 이 미아는 울면서 황궁 담장을 넘어서 유 여에게 달려갔고 기겁한 이 경이 미아를 가두었다가 희 치가 공식적으로 공주를 옹호하고 이 경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을 하여 부글거리는 속내를 참고 미아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희 치가 이 경의 심사가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계속 이 경에게 청했고 영선도 그 때쯤이면 은근히 이 경에게 말을 넣었다.
이 경이 결국 사랑하는 딸을 이길 수가 없어 유 여와 이 미아의 혼인을 허락하였으니 영선은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 경의 무언가 굳어진 표정을 눈치채고 그를 달래주려 생각을 하였다.
혼사를 결정한 날 밤.
만화궁에 찾아온 이 경이 묵묵히 앉아 있었고 평소와 다르게 그 얼굴에는 그늘이 져있었다. 영선이 그것을 눈치채고 이 경에게 아양을 버리는 것을 포기하고 이 경에게 다가가 그 뒤에서 어깨를 잡아 주었다. 순간 이 경의 눈이 일렁거린다. 동경에 비친 이 경의 동요하는 얼굴을 스쳐본 영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아의 혼사가 아직도 신경이 쓰이나요."
"......"
"폐하가 저를 사랑하듯이 미아도 유 *사마(司馬)를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그 마음을 어찌 막겠습니까."
이 경이 그 말에 조금 기분이 풀린 듯이 영선의 손을 잡는다. 영선의 손을 꽉 잡고 가만히 있던 이 경이 문득 말한다.
"영선아. 나는 희 치가 무섭다."
지엄한 지존이 황후를 무섭다고 말한다. 영선의 표정이 얼어붙고 이 경이 그 손을 잡은채로, 영선을 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면서 덤덤히 말했다.
"희 치가 내명부를 장악하여 나에게 손을 쓸 수 있는 것에 후회하고 그의 존재 자체가 내겐 너무나도 큰 부담이다."
"폐..하."
이 경이 영선의 말을 끊고 말했다. 이 경의 표정이 어두웠다.
"네게 묻지 않으마. 넌 그래도 내게 해를 끼칠 아이는 아니니까."
"......"
"속사정이 어떻다 하더라도."
영선이 충격에 휩싸여 그 잘난 혀를 놀리지도 못하고 이 경을 멍하게 바라본다. 이 경은 영선의 손을 놓아주곤 잠자코 있다가 곧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우리 아이..."
이 경이 한숨을 쉬고 말한다.
"뭐가 문제일까... 영선아.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 태의에게 관리를 받는 것이 어떠하냐?"
이 경은 아예 오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영선이 그 말에도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이 경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 경이 자식을 문제없이 낳았고 희락기 전후에도 영선과 계속 밤을 보낸는데 회임이 되지 않으니 이 경으로선 영선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영선이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 멍하게 있으려니 이 경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물론 아이는, 아이는 중요하지 않지... 황자 문제도 복잡해지고.. 내가 나이가 많으니 내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만은.. 나는 남음이라 가임기가 없이 회임할 수 있다."
그러니 영선은 애써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죄.. 송합니다."
"아니다. 죄송한게 아니라.."
이 경이 한숨을 쉬고 영선의 허리를 끌어 안는다. 순순히 끌려온 영선이 이 경을 꼭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영선이 몸을 잘게 떨면서 이 경의 어깨에 얼굴을 가렸다. 이 경이 그런 영선을 토닥이면서 말했다.
"그냥.. 네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그냥 널 닮고.. 날 닮은 아이. 공주라면 더 좋겠지.. 미아가 이제 시집을 가면 황궁에 공주가 없으니까."
"폐하, 폐하..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이 경이 영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가 아이를 못가지는 몸이라고 할지라도 내게 후계가 있으니 무리는 없다. 그냥 내 소망일 뿐이다."
그러나 영선은 고개를 떼지 못하고 몸을 잘게 떨뿐이었다.
'저도 아이를 가지고.. 싶습니다.'
그 날 영선이 너무나도 우울해해서 이 경은 영선과 동침하지 못했다. 이 경도 속엣말을 너무나도 깊게 해버린 것을 후회하고 그 날 영선을 보듬어주면서 같이 잤는데 영선은 이 경의 품에 안겨서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상념했다.
누구보다 아이를 좋아하는 영선이다. 영선이 이 경을 보면서 몇번이라도 그를 닮은 자식을 생각하는지, 또 미아와 영오, 영연, 영경 같은 이 경이 낳은 남의 자식을 안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경은 모를 것이다.
얼마나.. 비참한지.
그러나 영선은 눈을 질끈 감는다. 아무리 그래도 이 경에게 희 치의 자식을 낳게 할 수는 없었다. 영선은 희 치가 얼마나 비틀린 사랑을 하는지 않다. 사랑에 빠진 희 치가 얼마나 맹목적인지 않다. 차라리 그것은 독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오보진사독에 비견할 수 없는 맹독.
영선의 자식을 낳기 전에 희 치의 자식을 낳는다. 그것은 이 경이 지옥으로 가는 길인데 어떻게 영선이 그 길을 보겠는가. 그렇다고 희 치의 말을 무시했다가는...
'그게 지옥의 시작이겠지.'
그건 영선이 친구에 대한 의리를 명분을 들먹이며 쳐놓은 희 치의 빗장이 풀린다는 얘기고 희 치의 손길에 닿는 것은 영선이 아니라 이 경일 것이다. 영선은 희 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희 치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을 내버려둘 영선도 아니고 오히려 희 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의 약점과 정신머리를 잘 알고 있는 영선이기에 그는 희 치를 누구보다 쉽게 흔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
이 경이 걸렸기에.. 영선이 머리가 지끈거려 눈가를 찌부린다. 영선은 동침 전에 먹는 탕약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이 경이 말없이 자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영선이 희 치가 두렵다고 말한 이 경의 말을 떠올리면서 깊은 고통과 번민에 휩싸였다.
영선이 이 경의 옷자락을 꾹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너를...'
다시 영선이 돌아왔을 때 영선은 애초에 꼬인 관계를 다시 바로잡기 위해서 왔다. 각오했던 일이 아닌가. 이 경이 전국옥새를 보냈을 때 영선은 이 경을 놓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경이 몸을 벌벌 떨면서 영선이 자신을 저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을 때 깨달았다.
이것은 가벼운 마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영선은 이 경에게 돌아왔다. 영원을 위하여 이별을 각오하여 왔다.
그러나 영선은 어쩐지 두려워지고 슬퍼져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경 내가 너와 함께 할 생각을 품고 너와 헤어지기 위해 여기 왔어..'
그러나 두려움에 영선은 그 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주석 1. 별군사마의 줄임
1. 이제 좀 실마리가 보이죠.. 장상사 최심간 챕터가 이제 한 오륙편이면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