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6 장상사 최심간(長相思 摧心肝) =========================
"이젠 나 줄 밥도 없느냐?"
이 경을 배웅하려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몸을 멈칫한다. 항상 제일 새벽에 만화궁으로 달려가거나 태양전으로 돌아가던 이 경이다. 평소처럼 그저 돌아갈줄 알았던 이 경은 오늘따라 늦게 일어나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밥을 달라 말했다. 이 경이 짜증난 얼굴로 탁상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것을 바라보던 희 치가 입을 열었다.
"도 요소."
"예."
"평소랑 다르게 올려라."
그 말의 뜻을 알아챈 도 요소가 고개를 숙이려는 것을 이 경이 뚱한 목소리로 가로채서 손을 저으면서 말았다.
"그냥 줘."
"예?"
당황한 도 요소가 반문하자 참을성 없는 이 경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안그래도 황후와 관련된 것을 싫어하는 이 경이 언성을 높혔다.
"그냥 내와라!"
이 경의 노성에 도 요소가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예, 폐하."
희 치의 음월전에서 처음으로 아침을 먹는다. 이 경이 묵묵히 상을 내오길 기다렸고 희 치 또한 말이 없는 성품이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 경은 초야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 붉은 면사를 얼굴에 쓰고 화려한 붉은 구슬을 매단 희 치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웠다. 붉은 소매가 넓은 비단 옷을 입고 눈가에는 빨간 염을 칠한다. 두 볼에 주사로 점을 찍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경은 술을 진탕먹고 새벽이 되어서야 동방으로 들어가 벌컥 화를 냈다.
희 치는 무릎을 꿇고 묵묵히 이 경의 화를 흘렸다. 이 경은 별 쓸모없는 것에도 화를 내며 희 치의 잘못이라 했고 바닥에 무릎을 꿇으라 명한 뒤에 침대 위에서 잠을 잤다.
잠에서 깬 이 경은 아침이 되도록 면사를 벗지 못하고 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희 치에게 미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들었으나 그저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차가운 말을 끝으로 방을 빠져 나왔다.
'초야 땐데... 그 때는 좀 심했지.'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 경은 무언가 싱숭생숭하여 복잡한 표정을 한다. 도 요소가 내온 상을 본 이 경은 경악하여서 반문했다.
"이게 무슨 풀떼기이냐?"
나물 삼첩에 잡곡밥, 생선 하나가 전부이다. 초라한 정도가 아니라 궁중에서 본 적이 없는 빈궁함에 이 경이 놀라서 도 요소를 바라본다. 도 요소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침을 가볍게 드십니다."
"너.."
이 경이 그 때 눈을 매섭게 뜨고 희 치를 노려본다. 희 치가 밥을 먹다가 시선을 느끼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네가 이렇게 청빈한척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아닙니다."
"가식적이게 굴지 마라! 차라리 솔직한 것이 낫지."
이 경의 말에 희 치가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먹는 것을 싫어해서 그렇습니다. 사치를 숨기려고한 것이 아닙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비단은 가장 고급을 쓰며 희 치는 또한 차값에 많은 돈을 지출합니다."
그 말에 이 경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면박을 준다.
"음월전에 돈이 많아서 사치품에 그리도 신경을 쓰는 거냐?"
"송구합니다."
희 치가 짧게 대답한다.
"앞으로 차를 들이지 않겠습니다."
"...그래."
이 경이 그제서야 화가 풀리고, 그제서야 희 치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이 경이 순간 정신이 들자 이럴려고 밥을 먹자고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민망해져 시선을 회피한다. 이 경이 아무리 뻔뻔하고 자기 중심적이어도 그간 희 치에게 한 일은 돌이켜보면 정말 너무한 일이여서 묵묵히 잘 씹히지도 않는 잡곡밥알을 씹는다. 이 경이 어금니로 꾹꾹 밥알을 으깨다가 조용히 말했다.
"넌 왜 먹는 것을 싫어하냐."
희 치가 그 말에 젓가락을 멈치고 가만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먹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이 경이 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혀를 찼다.
"불쌍하구나."
희 치는 대답하지 않았고 이 경은 초라한 밥상에 먹는둥 마는둥 몇번 젓가락질을 대충 하였으나 일어서지는 않고 묵묵히 식사를 끝냈다.
그 불안한 식사자리가 끝나고 희 치에게서 차까지 받아먹은 이 경은 돈이 얼마나 깨졌을지 짐작이 간다느니, 사치도 정도가 있지 황제보다 더하냐느니, 계속 면박을 주면서도 마지막에는 가볍게 말을 하고 음월전을 나섰다.
"차를 안 들일 필요는 없다."
이 경이 눈살을 찌부린다. 머뭇거리던 이 경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너가 다른 건 다 사치를 하지 않으니 좋아하는 것이라도 해라."
"감사드립니다."
"음월전에 쳐박혀서.. 하는 것도 없는데."
이 경이 음월전을 나서고 희 치는 무릎을 꿇어 그를 배웅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희 치는 이 경이 점이 될 쯤에서야 고개를 들어 잠시 그를 보았다. 희 치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영선이 이 경을 달래려고 하다가 이 경의 표정이 예전과는 같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존전(尊殿)과 동침을 하지 않으신겁니까?"
"응? 아아."
이 경이 정신이 어딘가 팔려있다가 이내 손을 내저으곤 가볍게 말한다.
"아니, 그게.."
이 경이 머뭇거리다가 결국 어제의 희 치의 일을 실토했다. 그것을 잠자코 듣고 있던 영선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것을 눈치챈 이 경이 그제서야 다급하게 변명했다.
"나는 아직 희 치를 증오한다. 다만, 다만..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고 지금까지 너무 잔혹하게 굴어서.. 그럴 필요가 있나..."
그리고 이 경은 어느 생각에 다다라서 표정을 굳히고 이내 몸에 힘을 뺐다. 영선이 놀라서 이 경을 바라보았을 때 이 경은 정말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와 잠을 잤다."
"폐하."
이 경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궁과는 동침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황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영선이 그제서야 이 경이 과거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을 느끼고 경악하여 이 경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말했다.
"폐하! 저는 정말 실언을 했었습니다."
이 경은 그러나 이미 눈에 슬픔을 가득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영선 전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없었던 이 경은 울먹거리면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 경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다.. 내가..."
"폐하.."
영선이 넋을 잃고 중얼거린다. 이 경은 결국 꾹 입술을 닫고 침대로 꾸물거리면서 기어가 이불을 콕 덮었다.
영선이 멍하게 이 경의 웅크린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 경은 환궁한 이후로 다른 후궁들에게 일절 가지 않고 어미 따르는 오리 새끼처럼 영선에게만 붙어 있었는데 불안해하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생각보다 이 경의 상처가 깊어 보여서 영선은 그 말실수를 후회하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강 재인 얘기를 하려 해는데...'
거의 몇개월 째 이 경의 얼굴도 보지 못한 강 채요의 소문이 이상하게 나고 있었다. 후궁 안팍으로 소문이 무성하니 영선도 그제서야 동정이 들어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이 경이 저렇게 우울해하니 입 밖에 낼 수도 없다. 음울해보이는 이 경의 뒷모습에 영선이 말없이 침대 위로 올라가 이 경의 허리를 끌어 안고 그의 귓가에 조곤히 말했다.
"정말 더럽지 않습니다."
이 경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미미하게 떨리는 몸을 쓰다듬으면서 영선이 다정하게 이어 말했다.
"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깨끗합니다."
이름을 부르는 말에 이 경이 무언가 울컥하여 눈물을 참으면서 꾹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이 경을 영선이 말없이 끌어 안으면서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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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이 경의 마음을 나누고 싶지 않았고 이 경이 다른 사람과 자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첫째로 희 치와의 약속이 있었고 둘째로 강 채요에 대한 소문이 거세져가는 것이 부담이었고 결정적으로 탁 빈의 부탁이 있었다.
'지난번 일은 모두 무식한 이 천출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영선은 할 말을 잃고 편지를 바라본다. 한동안 아파서 요양을 했다는 탁 빈은 구구절절하게, 정말 진심을 다해서 영선에게 그간의 잘못을 빌고 신귀비를 경계한 것, 함부로 대든 것을 사죄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리 써있었다.
'같이 기거하는 강 재인이 아직도 초야를 못치루고 있습니다. 물론 신귀비 마마께서 바쁘시거나 혹은 생각이 있어서 신경을 쓰지 못하고 계시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서방의 얼굴도 보지 못하니 저렇게 불쌍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선의 표정이 굳어진다. 자신 앞가림도 잘 못하는 것이 착해빠져가지곤 같은 궁에 사는 강 채요를 위해 빈다. 영선이 한숨을 쉬고 편지를 내려놓았다.
'폐하께서 신귀비 마마를 존중하시여 강 재인을 꺼려하시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초야는 치룰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부탁드립니다. 강 재인이 무척 절망하여 가슴을 앓습니다..'
"궁에 잘못 왔구나."
영선이 어두운 얼굴을 한채 탁 빈을 평한다. 친척이나 오래 본 벗도 아니고 그저 몇개월을 기거한 후궁이 낭군과 잠자리를 하도록 빈다?
생불(生佛)이 따로 있겠는가. 헛웃음을 흘리면서 영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탁 빈의 절망에 찬 얼굴을 떠올린다.
탁 빈은 어떻게 보면 영선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 배신당하여 굳건히 마음을 닫은, 그 눈을 잊을 수가 없다. 그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영선은 잠자코 그의 눈을 생각했다. 너무나 진솔된 사람. 단지 하룻밤의 일로 이 황궁이란 감옥에 불운하게 얽힌..
영선이 한숨을 쉰다.
'하다못해 위비라 할지라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련만...'
하루종일 멍하게 있던 영선은 결국 이 경에게 강 채요의 일을 꺼냈다.
영선의 폭언 이후로 다른 후궁에게 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던 이 경은 영선이의 말에 그가 그를 져버리는 줄 알고 처음엔 겁을 먹었다. 이 경이 손을 벌벌 떨면서 묻는다.
"황, 황후와.. 자서 그러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영선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이면서 말하는 이 경에게 황급히 말했다.
"그저, 그저.. 소문이 너무 안좋습니다."
하나둘 조곤하게 설명해주는 영선의 말에도 이 경이 꼼짝도 하지 않고 싫어하는 기색을 내보인다. 이 경이 영선을 끌어안으면서 서운해하여 말했다.
"너는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려고 하니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느냐."
거의 반쯤 울먹거리면서 말하는 이 경은, 그러나 영선의 얼굴을 마주보곤 표정을 굳히고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영선은 붉어진 눈으로 이 경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 이 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선이 조용히 말했다.
"정말 제 마음은 아픕니다."
"......"
"그러니 돌아와주십시오."
영선은 그 말을 끝으로 이 경의 무릎팍에 얼굴을 묻었고 이 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떨리는 손으로 영선의 머리를 쓰다듬은 이 경이 조용히 말했다.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이 경은 그 날 자철궁으로 갔다. 불이 꺼진 탁 빈의 처소를 잠시 응시한 이 경이 강 채요의 방문을 열었다.
곱게 머리를 늘어트린 여인이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앉아 있다.
부드러운 살결, 섬섬옥수인 분홍빛 손톱이 인상적인 희고 가느다란 손. 눈은 봉황의 눈처럼 크고 곡선이 아름다운 인상적인 눈이었고 눈초리가 날카롭고 힐게 뜨는 인상이다. 먹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이 길고 진한 머리카락과 키는 조금 작으나 살집이 적당히 붙어 있는 모란꽃 같은 자태가 꽃처럼 피어난다.
콧망울이 사랑스럽고 그 옆에 애교점이 몹시 아양을 떠는 인상을 주었다. 하얀 뺨에는 분홍 홍조가 돌고 있었고 귓볼은 앙증맞고 귀여웠다. 가슴이 풍만하고 허리가 여리하여 엉덩이와 골반의 앉아있는 자태가 미려하였으니 강 채요는 후궁 중에서도 상당히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이 경은 그러나 영선의 충혈된 눈에 착잡함을 느끼고 침대에 다가가 앉았다.
강 채요가 이 경의 명령이 없자 당황하여 움찔거렸고 이 경이 그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짐이 네게 무심해서 미안했다."
강 채요가 이어지는 말이 없어서 일어 설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이 경이 강 채요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말을 툭 내뱉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미안할 일이 많을 것이다. 미리 사과하마."
이 경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일어나서 침대로 올라와라."
============================ 작품 후기 ============================
다음편이 드디어 후타나리 떡씬... 장상사 최심간이 전환 챕터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루즈할 수도 있으나 조금만 지나면 터닝포인트가 있으니 견뎌주시길ㅠㅠㅠ
덧. 격정 맞습니다!
덧덧. 아직 희 치는 이 경에게 흥미와 관심을 크게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사랑은 ㄴㄴ해요. 흥미와 관심을 왜 가지고 있냐면 일단 초반에는 다들 희 치를 사랑하고 존경하는데 이 경만 희 치를 싫어하고 험하게 굴린 것에 흥미를 느꼈고 이 경이 어느정도 희 치의 본면모를 꿰뚫어본 것을 눈치채서 이 경 관찰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