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9 장상사 최심간(長相思 摧心肝) =========================
한귀빈 오 약영은 아비인 오 상환의 뒤를 이어 황실호위대에 입영했고 출신과 그 바른 성품을 바탕으로 측근호위가 되었다. 그쯤엔 오 약영이 무척 준걸하고 과묵한 사내라 이 경이 그를 많이 부렸는데 하는 일마다 고분하고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모습에 많은 호감을 느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이 경은 그 당시 전장에만 관심이 있던터라 후궁이 별로 없었다. 당시 이 경은 상당히 외로운 상태였고 그 주변에 과묵하고 잘생긴 오 약영이 항상 맴돌고 있었다. 이 경이 어느날 밤 충동적으로 색향을 풀고 오 약영이 그 아비처럼 괴로워하면서 거부하다가 결국 이 경과 밤을 보냈을 때, 이 경은 정말 아무런 생각없이 한 일이었으나 그 다음날에 오 약영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약혼녀가 있던 오 약영은 파혼을 하였고 이 경은 생각과 다르게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오 약영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오 약영은 여전히 충실한 이 경의 신하였고 이 경은 미안하여 초췌해져가는 오 약영의 아비인 오 상환에게 작위를 내리려고 했으나 오 약영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거기서 끝냈으면 오 약영은 그래도 어느 순간 제정신을 차렸을지도 몰랐다. 이 경도 오 약영에게서 다시는 손을 대지 않고 반듯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로 되돌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은 회임을 하였고 오 약영이 아닌 다른 양인들의 체취나 향, 그리고 기척을 무척 경계했다. 이 경은 첫회임이었으나 단숨에 아비가 오 약영임을 깨닫고 황망해했다.
그러나 이 경에게서 그 말을 들은 오 약영만큼은 아니었다.
오 약영은 두려움, 공포, 절망과 자괴감, 경악에 휩싸여 있었고 오 상환은 죽여달라면서 계단에 머리를 박았다. 이 경은 오 약영을 은퇴시키고 후궁에 들였으니 그에게 미안한 것이 많아 관평공주와 오왕에게 자식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들이고 식읍을 주었고 오 약영을 동육궁에 들여 백 영선이 오기 전까지 최고의 직위를 주었다.
무신경한 이 경이 고심하여 직접 봉호를 지은 것도 오 약영이 처음이었다. 영선을 아끼는 이 경이지만 오 약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서 그에게는 항상 신경을 쓰고 져주려고 했다.
"경아!!"
오 약영이 평소의 엄정한 얼굴을 져버리고 흐트러진 차림으로 단숨에 뛰쳐 나온다. 경악한 오 약영이 창백한 얼굴에 파르스름한 입술을 떨고 있는 자식을 보며 태의에게 버럭 소리질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경아가 왜 일어나지 못하는 게냐?!"
이 경이 그 옆에서 영경의 작은 손을 잡고 있었으며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영선이 호갑투를 쥔 손을 말아쥐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태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달려온 희 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영경이 빠진 장소와 가장 가까운 궁인지라 처소를 내어준 위비 견진이 자리를 서성이고 있다.
태의가 엎드린 상태에서 공손히 말했다.
"물을 너무 많이 드셔서 놀라셨으나 빨리 궁인들이 발견하여 조치를 취한지라 곧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제서야 한귀빈이 안심하여 비틀거리면서 쓰러지려 한다. 그 옆에 앉아 있던 희 치가 한귀빈의 팔뚝을 쥐어잡아 그를 지탱해준다. 한귀빈이 묵묵히 자신을 도와준 희 치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황후에게는 무례한 인사였으나 같은 무관출신인지라 오 약영이 이 경이 견제한다 할지라도 희 치를 존경하는 것은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라 흠을 잡는 이는 없었다.
한귀빈이 몸을 벌벌 떨면서 말한다.
"왜, 왜.. 이 아이가 수회지에 빠진 것이냐."
왜, 라고 물으면 거기서부턴 깊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황자의 사고의 이유를 조사하면 거기서부터는 피를 뿌릴 일이었다. 가만히 석상처럼 앉아 있던 이 경이 그제서야 입을 열어서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경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있었다.
"어린 아이가 무슨 이유가 있겠느냐. 술래잡기하다가 미끄러진 모양인데 궁인들이 어린 오왕을 혼자 놓아두었으니 죽이라고 명했다."
"예?"
한귀빈이 굳은 표정으로 이 경을 본다. 이 경은 한귀빈을 보지 않고 오직 영경만을 보고 있었다. 영선은 아무 말도 없었고 그저 가만히 자리하고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한귀빈이 이내 영경에게 다가간다.
창백하게 질린 뺨을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쓰다듬는 것을 이 경이 본다. 덜덜 떨리는 손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가 있어서 이 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평생의 꿈이자 목표였던 이 경의 호위무사를 그만두고 후궁에 갇힌 한귀빈에게 남은 것은 오직 두 아이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턱을 매만지던 한귀빈의 손길이 멈춘다. 무언가를 발견한 한귀빈의 눈이 크게 떠지고 턱으로 아들의 작은 턱을 돌려서 뒷목을 살폈다. 한귀빈이 떨리는 손으로 뒷목에 찍힌 자국을 매만졌다.
"이, 이것은..."
그리고 그제서야 방 안에 어두운 기운이 깔린다. 한귀빈은 방 안에 모든 이들이 그 상처를 알고 있음을 깨달았고 그들이 의식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한귀빈이 몸을 떨면서 서서히 몸을 돌린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이 경과 영선을 바라보았다. 이 경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영선은 창백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경악에 가득찬 시선으로 영선을 본 한귀빈이 더듬거리면서 말한다. 차마 믿기 어렵고 두려워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호, 호갑투의 자국이 아닙니까."
만화궁 신귀비는 말이 없었다. 궁 내에서 호갑투를 착용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였다.
한귀빈이 영선의 오른손 검지에 잘린 마디를 덮은 홍옥 자귀꽃으로 장식된 은호갑투를 본다.
"파, 파였습니다. 호갑투가 맞습니다."
한귀빈이 그 때 대답이 없는 방 안 사람들의 반응에 이성을 잃고 노성을 질렀다.
"오왕을 일찍 구해낸 궁인들은 대체 왜 죽이셨습니까?!"
전각을 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다. 다른 이라면 영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죽이고 넘어갈 이 경이지만 상대가 부채감을 가지고 있던 오 약영인지라 이 경은 그저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희 치가 그저 한귀빈에게 손을 까딱하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하거라. 너는 이성을 잃은 자가 좋은 꼴을 보는 것을 보았느냐."
한귀빈이 희 치를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희 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어느정도 진정된 한귀빈이 헐떡인다. 후궁들이 모두 남양이고 오직 강 채요만이 여양이나 강 채요는 신분이 높지 않아 호갑투를 착용하지 않는다. 궁 안에서 오직 백 영선만이 다른 것은 몰라도 호갑투를 즐겨 착용하였는데 그것은 분명 패인 자국이며 상처의 깊이며 날카롭고 휘어진 갈고리와 보석이 긁혀진 자국이었다.
그러나 이 경과 희 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귀빈이 그제서야 그 둘이 신귀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문다.
가장 권력자인 둘이 나서지 않고 있다. 궁인들은 죽었다. 한귀빈은 이 결말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가만히 이 경을 바라고보고 있었다.
그 자국을 발견했을 무렵부터 이 경은 그저 침묵하여 앉아 있었다. 영선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그 옆에 창백한 낯을 한채로 있을 뿐이었다.
한귀빈이 영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닮아 까마귀 깃처럼 검푸른 머리카락과 이 경을 닮은 시원한 이목구비의 미남. 이 경과 다르게 체구가 크지는 않았지만 단단하고 건강한 몸을 가졌고 영특하고 총명하여 약영도 이 경도 그를 사랑하였다.
사랑하는 딸이 하가했으니 오 약영에게 남은 것은 아들 뿐이었다.
잠시 영경을 바라보던 한귀빈이 그 때 이 경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이 경이 그것을 가만히 응시한다.
필사적인 목소리로, 감정을 누르면서 한귀빈이 묵혀 놓았던 절절한 한을 쏟아낸다. 누구보다 이 경에게 충성을 다했던 한귀빈이 이 경에게 소청했다.
"폐하께서 제게 미아를 주시고 영경을 주신 은혜는 잊을 수가 없나이다. 사랑하는 두 자식이 제 전부였습니다. 후궁이 되어 폐하를 검과 무예로 모실 수는 없었지만 두 자식들이 제게 그 모든 것을 후회하지 않게 했나이다."
이 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때 한귀빈이 가슴이 찢어질듯한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냈다. 충혈된 눈을 하곤 몸을 웅크린다.
"저는 자식들이 있어서 폐하와 보낸 칠석 때의 밤을 잊지 못합니다. 폐하."
이 경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오 약영을 불렀던 밤을 생각한다. 그날따라 유독 비가 추적였고 이 경은 시골현에 허름한 처소가 몸에 맞지 않아 짜증이 나있었고 오 약영은 그 때 달빛 아래에 유독 영준하게 빛났던 청년이었다. 칠석이었다. 오 약영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검집을 든 손을 부들거리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었다. 이 경은 그가 어떻게 나오나 관찰했다. 짐이 원한다, 그 소리에 오 약영은 문고리에 손을 대지 못하고 벌벌 떨다가 침상으로 성큼거리며 다가와 이 경에게 입을 맞췄다. 아직도 기억하는 뜨겁고 축축하고 애가 타는 입맞춤.
그 밤은 오 약영의 인생이 달라진 밤이었다. 이 경이 후회했던 날이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 날을 거론하는 한귀빈은 이 경을 압박한 것이다. 이 경의 눈이 일렁거렸고 눈에 괴로움이 스친다.
이 경이 딸을 둔데다 출신성분도 견 진에 비하면 손색이 있던 오 약영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렸었던 까닭은 그것이 오 약영의 인생을 크게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이 오 약영을 건드렸기에 오 약영은 이십년간 잡았던 검과 창을 놓고 후궁에 들어와서 허황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 경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나 이 경은 절대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약영의 한을 풀어주자면 영선이 피해를 입는다.
그것도 그냥 피해가 아니라 영선은 황자를 살해를 꾀한 죗값을 치루게 된다. 그냥 사형으로 끝나지 않고 혹형이 가해질 것이다.
그러한데 어떻게 이 경이 한귀빈의 소청을 들어줄까.
그러나 이 경의 마음 속에는 의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려 반시진이나 자신을 떠나서 배회하던 영선을 발견했다고 하는 한귀빈의 궁인들을 죽인 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사고 장소 근처에서 영선을 보았다고 했었다.
영선이 그 날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 경에게 화를 내었을 때, 그는 다른 자식을 품에 안았을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아냐면서 노성을 토했었다. 이 경은 아이를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던 영선의 아픔을 똑똑히 들었었다.
더군다나 이상한 문답들. 아직도 의미가 파악되지 않으나 어떻게 끼어 맞추거나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다면 얼마든지 곡해할 수도 있었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영선은 그 때 충분히 동요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영선은 그런 애가 아니야.'
이 경도 영선이 정이 많고 따스한 사람인 것을 안다. 그리하여 완전히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탁 빈의 경우에도 그는 혹형을 피하고 황자의 아비라 그를 살려주었는데 수회지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충동이 들어 황자를 시해하려했다?
앞 뒤가 안 맞는 발언이다. 더군다나 치밀한 영선이 호갑투의 흔적을 남겼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 경이 죄책감을 참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경에게 영선 없는 황성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귀비가 갑작스럽게 황자를 시해하려했겠는가."
"불임이란 소문이 났습니다!"
한귀빈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무리 아이를 아껴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안 부모의 심정이란 천자라도 진단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심정을 어찌 압니까!"
이 경의 표정이 딱딱히 굳어진다. 이 경이 영선이 불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절망감을 생각한다. 이 경에게 다른 자식이 있었어도 그는 세상이 깜깜하고 시야가 흐려지는 착각을 느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끼고 공허하였다.
영선은 더했으리라. 이 경의 표정이 굳어지고 한귀빈이 나직한 목소리로, 똑똑히 말한다.
"폐하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공론화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이 경이 그 때 차가운 얼굴을 한다. 그래도 영선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영선이 실제로 오왕을 죽이려고 했다쳐도 이 경은 오왕보다 영선이 중요했다. 오 약영에게는 미칠듯이 미안하고 오 상환을 볼 낯이 없으나, 그 부자에게 백배 사죄해도 모자랄 일이지만 이 경은 그 순간 한귀빈을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수십년 부자의 신의를 저버리기로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영선이 입을 열었다.
"저는 불임이 아닙니다."
이 경의 시간이 그 순간 멈춘다. 심장이 내려앉고 호흡이 정지한다. 벼락이 그를 뚫고 지나갔고 이 경이 그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서야 핏기가 가신 얼굴로 영선을 응시했다.
영선이 차분한 눈을 한 채로 무릎 위에 손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