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48)

00060 장상사 최심간(長相思 摧心肝) =========================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심지어 한귀빈마저 그저 영선이 담담하게 말을 하는 것을 방관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방 안 후궁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그 말의 심각성에 차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 경의 얼굴이 새하얬다.

"저는 탐일(貪逸)을 짓이겨 즙을 내어 탕약에 넣어 꾸준히 복용하였습니다. 탐일을 먹으면 그 씨를 아무리 내어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희 치는 그저 그것을 미동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위비가 입을 가리고 그를 바라본다. 영선이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를 임신시키지 않으려 피임하였습니다."

 넋을 잃은 이 경의 귓가로 잔인한 말이 이어졌다. 이 경은 크고 둥그런 눈으로 영선을 말없이 응시했고 그가 아니라고 말하기를 빌면서 몸을 떨고 있었다. 이 경의 눈에 겁이 서려있었고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상처받은 이 경의 두 눈에 영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히 그를 본다.

"거짓을 말했습니다."

 영선이 상황에 몸을 굳히던 한귀빈을 바라보며 단호한 음성을 낸다.

"그리하여 나는 오왕을 죽일 이유가 없네. 나는 영경이를 친아들처럼 사랑했으니까."

"......"

"오왕은 피임을 한 내게 있어서 언제나 가질 수 있었으나 결국 가지기를 포기했던 황손을 떠올리게 만들었었지. 너무 영특하고 사랑스러웠으니까. 그러니 내가 어찌 오왕을 죽이겠는가. 오히려 그가 위험에 처한다면 나는 오왕을 대신하여 죽을 수가 있어. 폐하의 자식이니까."

"...네가..."

 충격을 받은 이 경의 입에서 잔뜩 쉰 목소리가 나올 무렵이었다. 한귀빈이 그 때 차가운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그런 말을 믿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영선이 말없이 그를 본다. 한귀빈이 분노를 삼키면서 영선에게 강하게 말했다.

"귀비 마마의 말을 증언할 이가 있습니까? 그럼 믿겠습니다."

"아니 없지. 그건 나 홀로 행한 것이니까."

 그제서야 이 경이 희망을 품는다. 영선이 자신을 위해서, 혹은 변호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마음을 품고 영선을 보나 그는 유독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포기한 사람인것마냥 앉아 있다.

 이 경은 간절히 그가 거짓을 말했기를 바랐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영선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영선과 함께한 세월이 그에게 일러주었으니까.

 영선이 지금 맨낯을 보이고 있다고,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라고.

 쓰고도 목이 아린 과일.

 그제서야 이 경은 문답의 의미를 깨닫고 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위비가 한귀빈에게 조용히 말했다.

"허나 아니라고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불임 사실은 약을 중단하고 태의에게 진단하게 하면 그 결과가 나올 일입니다."

"그 태의마저 어떻게 믿는가! 궁 안이 온통 귀비의 세력인데!"

 분통이 터진 한귀빈이 소리치고 그 때 영선이 입을 연다.

"존전께서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그 말이 꺼내지기 무섭게 모두가 숨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희 치를 보았다. 희 치가 그 자리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희 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 경이 숨을 멈춘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실을 들은 이 경의 시야가 흐릿해진다. 초점을 잃어 멍해진 눈을 하곤 입을 떼지 못한다.

"황후 마마와 저는 절친한 벗으로 저를 불러 입궁을 부탁했습니다. 황후 마마께서는 폐하의 사랑을 못 받으실 것을 아시고, 또한 그를 위해 다투지 않겠다 하시며 저에게 분란이 있을 육궁을 다스리고 폐하의 사랑을 얻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영선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리하여 황후 마마에게 피임과 또 마마의 아군이 될 것을 약속했으며 그를 위하여 폐하의 총애를 입고도 탐일을 꾸준히 복용해 왔습니다."

 창백한 낯의 이 경을 바라보던 영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 경이 영선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영선이 조용히 이 경의 무릎을 잡고 그를 응시했다.

 영선의 눈과 마주한 이 경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처참한 음성이 잇새로 나온다.

"너는.. 다 거짓이었구나."

 영선이 그 때 이 경을 흔들리지 않는 두 눈으로 응시하였다.

"다시 돌아오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네 모든 것이 다 거짓이였어... 다 너와 황후가 의도한 것이었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영선이 이 경의 손을 잡으려고 했고 이 경이 거세게 그 손을 뿌리치고 충혈된 눈을 한채 그를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화병을 벽에 던져 산산조각 낸다. 이 경이 격정에 휩싸여 소리지른다.

"다 거짓이었어!!!!"

 영선이 그러나 다시 이 경의 손을 꽉 붙들고 그를 올려다본다. 붉어진 눈으로 이 경을 응시하고 이 경은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진정시키지 못하여 그를 노려보았다.

"너가, 너가, 어떻게 그런 말을!!"

"잇새로 나오는 그 모든 말이 내가 만든 폐하의 상처이겠지요."

"너가!!!!"

 이 경이 좌절하여 영선의 어깨를 꽉 붙들고 흔든다. 영선이 무기력하게 흔들리면서 허망한 미소를 지었다. 이 경이 그를 원망하여 흐느끼는 목소리로, 증오를 담아서 소리쳤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짐의 생각을 다 알았음에도...!"

"기다리겠습니다."

 영선이 이 경을 보며 필사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 경이 손을 펴서 영선의 어깨를 놓는다. 떨리는 손을 허공에서 꽉 움켜쥐면서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본다. 이 경의 몸이 요동하고 있었고 이 경은 분노에 차서 영선을 원수를 보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사랑에 배신당한 황제가 치를 떨면서 사랑하던 귀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정녕 짐의 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뻔뻔히 말할 수가 없다."

"죽는 날까지 폐하를 기다리겠습니다."

"너는 정말, 나에게 잔인했다.."

 영선이 그 때 이 경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사랑합니다."

 이 경의 몸이 굳어진다. 이 경은 영선을 응시했고 영선은 동요하지 않고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영선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호박색 눈동자는 흔들림없이 이 경을 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을 모르는 듯 고요한 수면과도 같은 눈으로 이 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영선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 경이 몸을 떨고 말을 잇지 못한다. 부들거리는 손을 주먹을 쥐며 핏대가 서고 근육이 팽팽해진다. 한참을 격정에 치를 떨던 이 경이 간신히 말을 뒤이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영선은 답을 하지 않았고 이 경은 그런 영선을 미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저 사람이란 먼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의 배신에 상처 입는 법이다. 사랑한 만큼 증오가 되어 돌아온다. 연인의 거짓을 안 사내의 얼굴이 차가워진다.

 분노가 극에 이른 이 경의 얼굴이 가라앉는다. 이성을 되찾은 이 경이 차분하게 영선을 바라보았다.

"너는 기다리겠다고 하지만 모르겠구나."

 이 경은 영선을 무표정하게 보면서 말했다.

"나는 네 얼굴이 보기 싫다. 추억마저 도려내고 싶다. 화로를 가져 오너라."

 이 경이 궁인들이 가져온 화로를 보자마자 한 것은 허리춤에 달린 장미 꽃잎을 넣은 주머니를 던진 것이었다. 영선이 그 타닥이는 비단 주머니를 말없이 바라보았고 이 경이 그것을 바라보면서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형을 내리지 않은 까닭은 네가 마지막 말한 그 말 때문이다."

"기다리겠습니다."

 이 경이 웃었다.

"대단하구나."

 조소한 후에 이 경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신귀비는 들어라."

 영선이 소매를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이 경이 잠시 입을 다물다가 그를 응시하던 중에 입을 열었다.

"방래산에 도원이 있다. 중화 최초의 도원이니 명성이 높지."

 영선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방래원(傍崍園)이란 황성에서 칠천리가 떨어진 곳에 있는 도원이니 이 경은 영선에게 기대를 품지 말라 말을 하고 있었다.

"황실에서 대대로 *노장을 숭앙했으니 가거라."

 이 경이 눈을 감는다. 주먹을 꾹 말아쥐면서 느릿하게 말을 한다.

"네 새로운 인생이다. 짐이 아끼고 사랑했던 신귀비는 이제 죽은 것이다."

 영선이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일어서서 그의 앞에서 공손히 절을 했다. 호갑투에 바닥이 긁혀지고 비녀가 흐트러진다. 이 경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영선이 궁 밖을 나갈 때 이 경이 크게 고민하다가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아주 멀리서 그를 보았다.

 허름한 백의를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영선의 모습은 너무나도 홀가분해보였고 초라해보였으나 자유로워 보였다. 이 경은 문득 영선이 궁 밖에 있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새처럼 자유롭고 아름답다. 화려한 패옥과 구슬로 장식을 하지 않아도 더욱 더 빛나고 있었다.

 햇빛이 잘게 주홍색 머리카락 위에서 부스라지니 그게 머리장식이였고 바람에 휘날리는 옷자락이 하늘거린다. 영선은 말없이 이 경을 응시하였고 따뜻한 눈을 했다. 이 경은 그것이 괴로워서 시선을 피하고 입을 다물었다.

 큰 다리가 있었으며 이 경이 그 끝에서 서있었고 궁인과 황후, 후궁을 거느리는 위세를 보이며 그저 면류관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영선이 그 너머에 홀로 초라하게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영선이 잠시 고민하더니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을 보였다.

"저는 낙교 북쪽에 살았는데, 당신은 낙교 남쪽에 살았었군요."

 이 경의 숨이 멈춘다. 영선이 소매 밖에 나온 눈을 은은하게 빛내면서 나직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분명히 말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이 경이 울컥인다.

"열여덟 나이에 서로 알게 되어 금년에 스물하나가 되었어요."

 백수 근처를 걸었었고 이 경은 영선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헤벌쭉 웃었었다. 조심해라, 헤엄도 못친다. 그렇게 말하는 이 경이야 말로 앞도 보지 않고 땅도 보지 않고 영선만을 보고 있었다.

"마치 담쟁이 넝굴처럼 되어 소나무에 기대어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 경은 이어지는 말에 결국 눈물을 흘렸다.

"줄기는 짧고, 가지는 높아 오르기 힘들어 아무리 타고 오르려 해도 오를 수 없답니다."

 영선이 소매를 천천히 내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매의 곡선이 유려하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나풀거리면서 날아갈 것만 같아, 호리한 영선은 칼바람 사이에서 홀로 서서 이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었구나.'

 이 경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돌아가자."

 이 경이 등을 돌려 사라지고 후궁들이 갈팡질팡하다가 이 경의 뒤를 따른다. 희 치가 잠시 영선을 보다가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쉬었고 영선이 잠시 이 경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까딱였다.

 화려한 황성, 웅장한 건물들을 뒤로 하고 영선이 황궁의 문턱을 밟았다.

============================ 작품 후기 ============================

주석 1. 도교를 의미함.

1. 댓글 좋아용ㅎㅎㅎ  외전은 아마 고 재인+ 오 약영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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