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48)

00061 장상사 최심간(長相思 摧心肝) =========================

 그 총애가 대단하여 권세가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신귀비가 궁을 떠났다. 황제와 황후가 엄하게 말을 단속했으나 그것이 기군망상과 관련된 죄라는 것이 암암리에 퍼졌고 평소와 다르게 칠천리 떨어진 방래원으로 그를 보내었다는 것이 그 완전한 몰락을 증거했다. 신귀비는 홀로 먼 방래산까지 내쫒겼고 수행인을 두는 것도 재물을 가는 것도 허용받지 못한채 백의만을 입어 두 발로 칠천리를 걷게 되었다.

 또 하나 달라진 점은 모후의 기억 탓에 후궁에 별로 관심이 없고 오직 만화궁과 간간히 한귀빈과 위비만을 찾았던 이 경이 후궁에 거의 쳐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색(色)에 크게 빠진 이 경은 하루종일 육궁미인들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시거나 희희낙락 거렸고 권력욕이 있어서 정사에 소홀히 하지 않았던 전과 다르게 거의 대부분을 육궁에서 지냈다.

 특히 이 경은 전번에 원양행궁에서 데려온 고 아정을 영정(英靜)이란 이름을 바꾸고 미인으로 올려 크게 총애하였고 강 채요 또한 강 첩여로 봉하여 그 둘을 만화궁에 함께 기거하게 하였다.

 그 둘이 바로 이 경의 총애를 받았으나 독차지 하지는 못했는데 소 승상의 처조카인 유 도림이 그나마 출신이 무시하지 못할만큼 고귀하지만 성품이 청렴하고 온화하여 이 경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유 도림을 총애한 이 경은 그를 맑을 담(淡)자를 주어 담빈에 올렸는데 그를 자주 찾앗는데 담빈은 성격이 극히 온화하고 따뜻하여 이 경은 그나마 담빈과 같이 있을 때에 국사에 신경을 쓰고 이성을 되찾아 허튼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런 담빈의 득세에 보림으로 떨어져서 유폐당했던 영 가도가 그와 동기였고 명문가라는 동질감을 느끼고 있어 찾아가서 그와 의형제를 맺고 싶다고 말했다. 분명 그것은 담빈의 권세를 이용하려 한 것이었고 그것을 눈치챈 담빈이 덤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귀비마저 당파를 만들지 않았는데 총애를 받고 있다고 사사로운 권세에 집착하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네."

 돌려서 말했지만 명백한 거절의 말엔 꾸중마저 있었고 영 가도는 웃으면서 돌아왔으나 극히 분노하여 동기의 정을 져버린 담빈에게 보복의 마음을 품었다.

 어느날 담빈이 떡을 먹던 중에 목에 걸려 숨을 쉬지 못했는데 태의가 조치를 잘못하여 어이없게도 급사하고 말았다. 그것을 안 이 경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노엽기도 해서 태의를 때려 죽였는데 그 태의의 제자가 울면서 억울함을 고변했다.

"담빈 마마께서는 분명 독살당하신 것입니다. 스승께서는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이 경이 놀라서 알아보니 실제로 담빈의 몸에는 푸른 반점이 있었다. 극노한 이 경이 궁인들을 고신하여 알아보니 그것이 연자당(聯慈堂)에서 흘러나온 것을 알았다.

 영 보림이 그 때 같이 처소를 쓰는 한 충용을 고발하니 그 증거가 확실하였고 한 충용의 궁인들이 그를 인정하여 탄원했다. 담빈이 승상의 처조카로 황실의 인척인데다가 강북최고명문가의 자제이니 이 경은 그를 아끼는 것도 아끼는 것이지만 소 승상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관련된 모든 자를 죽였다.

 한 충용이 그저 홀로 죽는 것이 억울하여 후궁들을 또 끌어들였는데 황자의 아비나 지위가 높은 자들은 무사하였으나 아래의 무수히 많은 후궁들과 궁인들이 거열을 당하거나 억울하게 죽임당했다.

 결국 이 경이 영 보림을 미인으로 다시 복위시키고 한 충용을 참형에 처한 뒤에 그 외의 서비 여섯과 측비 열둘을 혹형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가 되었으니 특히 지위가 낮은 상재와 답응들은 거열을 면하지 못했으니 육궁에 연류된 자가 삼천명에 육박했고 고신을 당해 죽거나 사형에 처해진 자가 구백명에 달하여 사람들이 이를 연자안(聯慈安)이라고 하였다.

 그나마 올바르게 이 경을 지탱해주던 담빈이 죽고 난 후 이 경은 더욱 더 색에 빠졌는데 도사 청수(淸水)를 신임하여 그의 말을 많이 들었다. 청수가 이 경에게 오석산이란 비약을 처방해주니 종유석, 유황, 백성영, 자석영, 적석지의 다섯가지 돌로 만든 가루약이었고 이것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고 피부가 민감해져 최음의 효과가 있었다.

 오석산을 복용하면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몸을 따뜻하게 하지 않으면 목숨에 위험이 있었다. 이 경이 오석산을 먹고 육궁에서 색(色)을 즐기니 정식으로 간택한 후궁이 아닌 각지에서 미인을 진상하게 하여 그와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고 미인이 그 와중에 이 경에게 총애를 받아 부정부패를 저질렀는데 이 경은 매관매직을 눈감아 주었고 고 미인의 만화궁에서 강 첩여와 고 미인을 껴안고 하루 대부분을 보냈다. 고 미인은 영악하여 총애를 유지하기 위하여 육궁미남들을 이 경의 처소에 넣었는데 중간에는 이 경이 여양인 강 첩여를 좋아하는 것을 의식하여 여양 둘을 구하여 이 경의 침실에 넣어주었다. 그 중 하나는 유부녀로 남편이 있었으나 억지로 이혼당하여 재인으로 이 경의 침실에 들어갔으니 이 경은 천하에 일곱밖에 없는 여양 중에서 셋을 차지하였다.

 그러니 바야흐로 육궁의 기강이 문란하였으나 희 치는 이 경의 분노를 사서 관리권을 빼앗긴 참이라 아무것도 손을 쓰지 못했다. 이 경은 희 치에게 올리던 문안도 취소시켰으며 모든 후궁들이 그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도에 어긋난 말을 분노에 차서 입 밖에 내뱉었다.

 고 미인과 강 첩여가 색으로 이 경의 눈을 가리고 이 경이 오석산을 복용하여 그에 중독되었다. 수십명이 되는 후궁들과 난교를 버리고 대낮에 음란한 짓거리를 저지르는 이 경의 소식이 음월전으로도 흘러들어왔다.

 한참을 음월전에서 나오지 않던 희 치는 도 요소의 보고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차를 내려놓았다. 도 요소가 고개를 살짝 들자 희 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가자."

 꽃이 만발해서 만화궁이라 명명하여 그 정원은 가을바람에 단풍이 화사하게 떨어지는 아름다운 궁이었다. 여전히 귀한 나무들은 무성하고 그 정원이 아름다웠으나 만화궁의 기풍은 상당히 달랐다. 희 치는 그 사이에 느껴지는 요사한 기운을 느꼈고 문 앞에 섰다.

"빨리 문을 열어라."

 황후의 모습에 우물쭈물하던 궁인이 도 요소의 재촉에 문을 열고 희 치는 코를 찌르는 독한 향을 느끼고 눈가를 찌부린다. 차라리 피부가 깨끗하고 영준한 육궁의 일원들을 끼고 술을 마시거나 했으면 동요하지 않았을 텐데 이 경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심했다.

"힘, 힘듭니다. 더 참기가.."

 어린 연동이 울먹이면서 말을 하고 침대 앞에 방석을 깔고 향을 피우고 있는 사십대의 중년남자가 고개를 젓는다.

"아직 부족합니다. 더 기를 모아 정을 한번에 쏟아내야 합니다. 참으십시오."

"흣.."

"폐하...헉..."

"아흐, 폐하, 조이지 마십시오.."

"핫.. 너무 좋습니다.. 입이 너무 좋습니다.."

 요염한 인상의 모란을 닮은 미인 강 채요가 이 경의 팔을 베고 그의 몸을 핥고 있다. 성기로 그 몸을 부비고 이 경의 귀를 붉은 혀로 애무했다. 얼굴에 죄(罪)자를 새긴 사내가 이 경의 오른발을 핥고 있었으며 그 옆에 삼십대의 무척 가슴이 크고 피부가 희고 야들한 여양인 하나가 이 경의 밀부의 삽입을 하여 색향에 혼이 뺐겨 미친듯이 추삽질을 하고 있었다.

"헉.. 허억... 폐하, 전.."

 열서넛살로 보이는 어린 미소년 두명이 조막만한 손과 혀로 이 경의 몸에 달라붙어서 애무하고 있었고 몸이 탄탄하고 거근을 가진 미청년 하나가 이 경의 입에 성기를 물리고 있었다. 다른 청년 둘이 이 경의 양물을 핥고 이 경의 손과 몸을 이용하여 자위하고 있었고 나머지 여양 하나가 이 경의 벌려진 입술 사이를 핥고 있었다.

"아흑!!"

 참지 못한 소년 하나가 이 경의 얼굴에 사출한다 그 순간 청수의 눈이 매서워지고 궁인이 그것을 눈치채고 회초리로 어린 소년의 등을 쳤다. 비명을 지르는 소년이 피를 흘리며 나가 떨어지는 것도 모른채 이 경이 헐떡거리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핥는다. 곧 소년의 빈 자리를 다른 이들이 채워 이 경은 누가 사라졌는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이 경이 아주 가는 신음을 내뱉는다.

"흐........ 헉......."

 이 경은 오석산을 복용하여 몸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없어진 후라 헐떡거리면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고 뜨거운 숨을 내뱉고 교성을 내뱉는다. 정신없이 몸이 흔들거릴 때마다 이 경은 색향을 흘렸고 붉어진 눈매에 눈물을 매달고 다리를 벌렸다. 작게 열린 입술 사이에 들어온 거근이 달고 맛있다는 듯이 황홀한 표정으로 핥고 있었으며 가끔씩 도사 청수가 하는 말에 따라서 사정을 참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잘하셨습니다. 폐하. 몹시도 잘 하고 계십니다."

 희 치가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이 경은 방중술에 빠져 있었다. 청수는 이 경과 그를 모시는 이들에게 여러 지시를 하고 있었고 가끔 도경을 외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 요소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희 치가 잠시 그를 응시한다. 낡은 도복을 입고 생긴 것은 도력이 높은 도인같은 외견의 청수는 이 경에게 공손한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폐하, 이제 반시진동안 모은 동량들의 정과 기를 흡수하십시오."

"아, 아.. 헉...!"

"이제 모든 것이 끝.. 응?"

 그리고 청수는 자신의 뒷목을 감싸는 크고 차가운 무언가에 의문에 찬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몹시도 고아한 외모를 가진 사내가 홀로 서있었다. 그리고 청수는 그가 누군지 알기도 전에 격통을 느끼고 눈을 부릅떠야 했다.

"꺄아아아악!!!!"

 순식간에 만화궁에 비명이 가득찬다. 찰나에 목을 부러뜨린 희 치가 덤덤하게 손을 거뒀고 청수가 풀썩 쓰러져 바닥에 엎어졌다. 반항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깔끔한 손길이었고 희 치가 침대를 묵묵히 응시하다가 발걸음을 뗐다.

"살려줘!!!"

"꺄아아악, 꺄아아악!"

"으아아악!"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이 만화궁 밖을 뛰쳐 나간다. 뜨거웠던 공기가 식고 이 경이 들리는 비명소리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에 초점이 돌어오는 순간에 희 치가 침대 앞에 섰다.

"헉, 허억? 씨, 씨발?!"

 고 영정이 놀라서 벌벌 떨다가 이 경의 뒤로 숨고 강 채요가 비명을 지르면서 이 경의 팔에 매달렸다. 이 경이 그 때까지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하고 몸을 비틀거렸다.

"폐하, 폐하..!!"

 그리고 희 치는 그를 바라보면서 짧게 말했다.

"나가라."

 고 영정과 강 채요는 차마 그것을 어길 수가 없었다. 희 치는 살기를 내지 않고 그저 평소와 같이 고요한 눈으로 응시했으나 그 둘은 호랑이 앞에 선 토끼처럼 벌벌 떨며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강 채요가 몸을 떨다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빠져 나간다. 그런 강 채요의 뒤를 고 영정이 다급하게 따랐다.

"씨, 씨발!"

 고 영정이 이를 악물면서 문을 팍 열어재키고 고장난 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이 경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희 치를 올려다본다. 나신에 붉게 달궈진 몸을 한채 침상에 몸을 기대고 희 치를 빤히 바라본다. 아직도 오석산의 약효에서 벗어나지 못해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고 몸이 그 때마다 수축되고 이완하고 있었다. 온 몸에 하얗고 끈적한 것들로 가득하고 다리 사이는 그야말로 처참하게 헤집어져 있었다. 붉게 달궈진 입술은 투명한 액체로 번들거리고 있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이 경이 차가운 눈으로 희 치를 올려다본다.

 희 치는 이 경과 다르게 예의 그 흰색 문사복을 입고 있었고 그 수수한 옷에도 그 아름다움과 도올제인인의 몸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은은한 흑발이 흰색 옷 위과 살 위에 흐드러진다. 짙고 휘어진 눈썹과 하얀색의 매끄러운 피부, 은은한 눈매와 높고 귀족적인 콧대. 부드럽게 휘어진 입술. 한결의 흠없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고귀한 귀공자같아 보였고 어떻게 보면 차가워보이는 비인간적인 모습이었고 어떻게 보면 사람을 유혹에 빠트리는 듯한 모습에는 고아함이 숨겨져있다. 몹시나 기품있고 그 체격에서 나오는 은은한 위압감이 있었다.

 외견 자체로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희 치의 앞에서는 그 어느 사람이건간에 그 외견에 일단 꼬리를 말았고 그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경은 사뭇 달랐다. 유일하게 희 치를 증오하고도 함부로하는 작자였고 두려움을 보이지 않고 희 치를 업신여기는 이였다. 이 경이 벌거벗은 데다가 엉망인 몸에도 수치심이란 없는지 희 치에게 비꼬듯이 말한다.

"이제 네 마음 속 흑심을 드러내느냐."

 이 경이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조소한다.

"죽일테면 죽여라."

 그렇게 말하곤 붉어진 눈으로 희 치를 노려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희 치가 손을 들어 이 경의 가슴에 손을 댄다. 이 경의 몸이 움찔했다. 무얼 하느냐는 듯이 희 치를 노려보는 시선이 더욱 거세진다.

 오석산의 약효가 이 경의 몸을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만든 것이 느껴졌다. 색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뜨거운 이 경의 몸에 희 치가 손을 잠시 대다가 떼곤 그를 내려보았다. 이 경을 잠시 응시하던 희 치가 겉옷을 벗어 이 경의 위에 두른다. 희 치가 이 경의 무릎 아래에 손을 대고 등을 잡아 가뿐히 들었다.

 이 경이 갑자기 자신을 들어올리는 희 치의 행동에 버럭 소리질렀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희 치는 대꾸하지 않고 이 경을 자신의 품에 안는다. 이 경이 한번도 그런 식으로 들어올려진 적이 없어서 기겁하여 버둥거렸는데 희 치는 미동도 하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이 경을 안아들어 걸었다. 그리고 이 경은 반항이 의미가 없는 것을 알고 몸을 늘어트리고 그를 죽여버릴 듯한 살의를 담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희 치가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한다. 이 경을 겉옷으로 둘둘 말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품 안에 가두고 그를 안아 걷고 있었다. 이 경이 그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몰라 그저 속이 터져서 버럭 소리질렀다.

"네 놈을 죽이겠다!! 결국 짐을, 짐을.. 네, 네놈이 무시하고..!"

 그리고 이 경이 대답없는 희 치의 모습에 그간의 분노와 불안감이 폭발하여 노성을 지른다.

"네가 짐을 죽이거나 아니면 짐이 널 죽일거다!!! 감히 나를....!!!!"

 희 치가 그 때 입을 열었다.

"죽여."

 이 경이 창백한 얼굴로 희 치를 바라본다. 못들은 것을 들은 사람처럼 핏기가 가셔서 멍하게 그를 본다.

"뭐?"

 희 치가 담담히 말을 뒤이었다.

"죽이라고."

 이 경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머릿 속이 새하얘져 넋을 잃는다. 이 경에게 보이는 것이 희 치의 턱선과 언틋 보이는 평소와도 같은 두 고요한 눈인데 그 말이 너무나 상식 밖이여서 그 모든 것이 희 치가 아니어 보였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이 경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너, 너 지금.. 내게 반말을.."

 그리고 음월전의 문이 열리고 이 경의 콧가에 깨끗한 소나무향이 난다. 숲 한가운데에 있는 듯이 맑은 공기가 그 안에 차있었고 소박한 가구들에게선 차향이 배어 있었다. 희 치가 침상위로 성큼거리면서 걸어가 이 경을 침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 경이 희 치의 품에서 벗어나자 마자 그를 노려보며 버럭거렸다.

"너 이 새끼!"

 그리고 이 경은 자신의 몸을 올라타서 그 팔을 붙잡는 희 치에 행동에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잠시 그를 죽일듯이 노려보던 이 경이 차갑게 웃었다.

"그게 목적이냐."

"날 도발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이 경이 희 치의 음산한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경도 살짝 겁을 먹을 만큼 희 치의 목소리는 공포스러웠고 낮게 깔려 있었다. 이 경이 가만히 희 치를 응시하자 희 치가 묵묵히 이 경의 한쪽 손목을 침상 위에 묶고 궁인들에게 무어라 명령한다. 도 요소가 고개를 숙이고 바삐 움직이는 음월전의 궁인들이 그 안을 빠져나갔다.

 희 치가 의자를 빼내 침상 앞에 내려놓고 그 앞에 앉았다. 한참을 이 경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이 경은 그 시선을 잠자코 피하고 있었고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희 치가 이 경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입을 뗀다.

"체내에 그 오석산 부스러기가 다 빠져나갈 때까지 음월전에서 생활하실겁니다."

"누구 맘대로?!"

"그리고 내명부 통솔 권한은 다시 내가 가집니다."

 울컥한 이 경이 소리친다.

"그저 네가 다 해먹어라! 너가 내명부를 장악했으니 짐을 언제든지 죽여도 되겠구나!"

 희 치는 그런 이 경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본다. 희 치가 굳게 다문 입술을 열고 짤막하게 말했다.

"모든게 정상으로 환원되면 날 마음대로 하십시오."

"...뭐?"

"아끼는 도사를 죽인 죄, 감금한 죄, 황명을 거역한 죄.. 다 받을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희 치가 느릿하게 말을 한다. 이 경이 순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반문했으나 희 치는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한참을 맑은 흑벽(黑璧)같은 눈으로 이 경을 응시한다. 이 경의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하곤 숨을 거칠게 내쉰다. 가만히 희 치를 노려보던 이 경이 이내 눈매를 풀고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굳게 입을 다물고 꿍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벽을 향해 몸을 웅크린 이 경이 몸에 둘러진 희 치의 겉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있는 희 치의 옷은 이 경에게도 무척 크고 널널했다.

'다향(茶香)...'

 소나무와 엇비슷한 냄새가 나고 대나무의 은은한 향이 난다. 무슨 차인지 무척 담아한 향이 배어 있었고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 경은 순간 분노가 풀려서 잠시 눈알을 굴리면서 조용히 생각했다.

'쟨 왜?'

 희 치가 그런 이 경을 잠자코 응시한다. 이 경은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몸을 벽으로 돌린채 미동도 하지 않은채 옷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희 치가 궁인들이 달여온 탕약을 저은 뒤에 이 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경이 그 인기척을 느끼고도 몸을 돌리지 않고 있었으나 희 치는 묵묵히 이 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경이 병을 보면서 꿍하게 있다가 그 무언의 압박에 몸을 돌리고 버럭 소리질렀다.

"아, 알았으니 그렇게 보지마!"

 희 치가 수저로 저어 식힌 탕약을 아기새처럼 받아먹으며 이 경은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난교장면을 원수로 생각하던 희 치에게 보인 것이 부끄러워 이 경이 시선을 피하고 얌전히 탕약을 받아 먹는다. 뜨거운 탕약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곤 희 치가 이 경이 탕약을 삼키는 것을 살피고 입가에 탕약이 흐르자 흰수건을 접은 뒤에 조심히 닦아주었다.

 어쩐지 몹시 부끄러워 이 경이 탕약을 먹고 고개를 푹 숙이고 희 치가 탕약 옆에 놓여진 다과 하나를 들어 이 경의 입가 근처에 가져다 댄다. 팔괘가 그려진 갈색의 다과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나고 있었다. 이 경이 은근히 쓴 것을 싫어하여 머뭇거리다가 다과를 입에 앙 물었다.

 입 안에서 꿀 저민 냄새와 깨 냄새가 난다. 톡 터지는 고소한 견과류의 향이 과하지 않게

 은은했다. 그것이 생각보다, 아니 꽤나 맛있어서 우물거리던 이 경의 표정이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희 치가 그것을 보고 아주 미미하게 웃더니 이내 다시 감정없는 얼굴을 하곤 말을 했다.

"오석산이 체내에 배출되기 까지는 세달이 걸립니다. 중독 증세가 다 나으려면 적어도 백일은 걸리니 그동안은 여기에 계실겁니다."

"...어차피 내 의사는 상관 없잖아."

"희락기는... 저번처럼 보내도 됩니다."

 이 경이 그 말에 무언가 울컥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이 경조차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막히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희 치가 작게 말했다.

"쉬십시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희 치가 몸을 돌려 음월전에서 빠져 나간다. 이 경은 그것이 자신을 증오하는 이 경을 배려한 것임을 깨닫고 복잡한 시선을 했다. 백일동안 그러면 희 치는 음월전을 내주면 태양전에서 머물기라도 할 것인가? 평소라면 이죽일법도 했지만 이 경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 경도 지난바 희 치를 알아 그 말이 가당치도 않은 것을 알았다. 아마 이 경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머물 것이다. 황후이니 후궁의 처소에 머물 수가 없으니 아마 음월전에 딸린 도 요소나 다른 궁인의 처소에 머물겠지. 음월전의 궁인 처소가 가장 깨끗하고 가구가 좋았으나 그럼에도 궁인의 처소는 기본적으로 작고 좁았다. 이 경이 가슴이 무언가 울렁거려서 형용할 수 없는 심정으로 그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희 치가 문 밖으로 나가고 문사복에 갇혀진 너른 등을 보인다.  이 경이 문이 탁 닫힐 때까지 그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누웠다. 눈가를 팔로 가리고 이 경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

 가슴이 오르내리고 숨이 거칠다. 천장을 바라보던 이 경의 얼굴이 오석산으로 인한 열기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번편 너무 길어져서 쓰다 죽는줄 헉헉.. 아직 두편 남았는데 장상사 최심간 파트 분량 실화입니까ㄷㄷ

덧. 희 치 루트 해감되었습니다!

덧덧. 브릴리안테님 천번째 댓글 축하드립니다. 배후는 외전에서 암시될듯 합니당.

덧덧덧. 고 운정 이름 수난사.. 고 운정 -> 심운화랑 운학루 사건때문에 불길하다고 예쁠 아자 써서 고 아정으로 개명-> 영선의 영자 따서 고 영정으로 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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