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4 장상사 최심간(長相思 摧心肝) =========================
희 치가 잠시 엎어진 장기판을 내려본다. 손에 든 돌을 내려놓으면서 희 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경이 씩씩 거리면서 저기 저 침대 구석에 박혀 있었는데 다섯판을 내리진 이 경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장기판을 엎고 저기 저 침대에 다시 꾸물거리면서 기어들어갔으니 희 치는 이 경의 빼꼼 나온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잘했는데... 이건 무효야... 어떻게 이럴수가..."
이 경의 한탄 소리가 정말 억울한듯하여 희 치는 그냥 져줄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 장기판을 치운다. 희 치도 이 경도 번국 반란 때 상당히 이름을 날리던 무장이었으니 장기가 전쟁터의 축소판 이라면서 이 경이 먼저 장기를 두자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지고 나선 삐져 있으니 희 치는 그 모습에 입에 호선을 그리면서도 침대 위에 앉아 이 경의 팔을 건드렸다.
"폐하."
"......"
"폐하.. 음."
이 경이 입을 획일자로 다문 것을 확인한 희 치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서 침대 밖으로 나간다. 이 경의 귀가 쫑긋거맀다. 음월전이 닫히는 소리에 이 경이 벌떡 일어나서 눈매를 날카롭게 뜬다.
"뭐야?! 가?!"
평소라면 한시진이고 달래줄 희 치가 매정하게 가버린 것이 믿기지가 않아 이 경은 한참동안 멍하게 그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이 경이 분하고 억울해서 침대를 퍽퍽치면서 소리쳤다.
"가?! 다섯판이나 이겨놓고 가?!"
사실 이 경도 평소라면 이렇게 유치하게 굴지는 않았으나 희 치의 앞에서 유독 어리광을 부리고 감정이 동요하곤 했다. 다섯살 어린아이도 안 할 만큼 떼를 쓰는 자신을 알면서도 이 경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희 치에게 소심하게 화를 내곤 했다.
그게 근데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고칠 수가 없었다. 이 경이 이내 달아오른 주먹을 내리고 제 손목에 짤랑이는 사슬을 가만히 바라본다.
"개자식."
주먹을 쥔 이 경의 얼굴이 복잡했다. 보름이 남았다. 그것은 희 치와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보름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보름 동안 희 치는 누구보다도 다정하게 이 경을 대했다. 장부를 처리하는 것도 옆에서 하고 이 경이 눈치를 보면서 혼자 자길 싫어하자 꼭 성교를 하지 않더라도 침대 밑에 앉아서 그가 잘 때까지 말벗을 해주거나 밥을 먹는 것도 같이 해주었다. 전장 얘기도 몇번 해주고, 술은 치료 때문에 안된다고 하지만 차도 같이 마시고 다과도 주곤 했다.
희 치가 이 경을 대하는 방식은 지극히 정성스러웠고 섬세했다. 이 경은 그런 희 치의 손길에 문득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가 있었으나 애써 도리질을 하고 지워버리곤 했었다.
"뭐야?"
갑자기 열리는 문에 이 경이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다가 희 치가 들고온 판 위에 것을 보고 울컥해서 소리쳤다.
"내가 애냐?! 먹을 거로 달래지게?!"
그리고 이 경이 달달한 인삼 정과와 다과들을 맛있게 우물거렸다. 희 치가 그런 이 경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이 경이 태연하게 손을 뻗어서 밤을 으깬 경단을 입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은근한 시선으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던 희 치가 입을 열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 저녁 풀어드리겠습니다."
이 경의 표정이 굳고 손길이 멈춘다.
"도올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군신관계를 맺어 남아 있는 번국 8개 중에서 요 근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아르싱이 사절을 보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르싱이 도올에서 대역죄를 저지른 장수 하나의 망명을 받았는데 그가 화약을 다룰 수가 있어서 갑작스럽게 성장했었지요. 아르싱 영토에 화약을 쓰는데 필요한 초산과 유황을 채취할 수 있는 곳이 많아 군사력이 급증하고 도올과의 거래 또한 활발하였는데 근 삼년간 분위기가 건방지다가 이번에 사절이 아르싱 번왕과 관평공주와의 혼인동맹을 원한다 하더이다."
다과를 내려놓은 이 경이 묵묵히 차를 마셨다. 희 치가 이 경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고 열쇠로 수갑을 풀어 이 경을 해방시켜주었다. 달아오른 손목을 주무르던 이 경이 짧게 말했다.
"조정 분위기는 어떠냐."
희 치가 잠시 이 경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전쟁을 주창합니다."
"그래, 정신은 박혀 있군."
순간 희 치가 이 경의 손목을 꾹 잡는다. 이 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희 치를 바라본다. 희 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싱은 역사가 깊고 민족이 같아서 여덟 번국 중에서 큰형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건방지다고 하지만 분명 조공도 꼬박 바치고 있는 나라를 칠 수는 없습니다. 관평공주의 일도 혼인을 이미 치른 것을 몰라서.."
"오랑캐의 모욕을 듣고 가만히 있겠다고?!"
이 경이 싸늘하게 대꾸한다.
"감히 공주를 달라니?! 종실의 딸도 아니라 황제의 유일한 공주를?! 이것이 미쳤구나!"
"폐하."
희 치가 그 때 이 경을 강렬히 응시하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한다. 이 경의 몸이 움질거렸다.
"전쟁은 신중해야합니다."
이 경이 그 때 잠시 입을 다물고 상념하다가 이내 조소하면서 말했다.
"전신(戰神)의 입에서 차마 듣기 어려운 말이구나."
"전쟁은,"
희 치의 눈이 깔리고 그가 아득한 과거를 상상한다.
"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희 치가 그리고 눈을 꾹 감고 차를 매만졌다. 한참 후에 눈을 뜬 희 치가 고요한 눈으로 이 경을 응시했다. 흑벽의 눈이 이 경을 그 안에 담았다.
"이 말은 오늘 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사실 전쟁을 너무 유흥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뭐라?!"
"번국 반란을 제압하여 도올에서 가장 큰 영토를 확보하고 북적과 동이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재정이 지금 간당한 것을 아십니까? 다행히 소 승상이 능력이 있어서 세제를 정비하는 것에 성공하여 세수를 확보하였다만 흉년이나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끝입니다. 사실 이 정도로 영토를 넓히는 것도 땅이 흉악하고 강수가 좋지 않아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민족 또한 다스리기 힘드니 무리인 일이었습니다."
"나는..?!"
"폐하 대에는 아마 도올은 빛날 것이나 계속 영토를 넓히다간 후대에 이르러서 휘청일 것입니다."
이 경이 희 치를 죽일듯이 응시한다. 희 치는 덤덤하게 그 시선을 받았으나 이윽고 이 경의 이어진 웃음에 그의 눈을 응시한다.
이 경이 시원하게 웃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넌 역시 죽이기 아깝구나."
그리고 이어진 말에 희 치가 그를 빤하게 바라보았다.
"너 나에게 각인할 수 있겠느냐?"
희 치는 차를 들어 그 향을 맡고 한모금 입에 머금어 목 뒤로 넘겼다. 담아한 향이 마음을 가라앉힌다. 희 치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경이 희 치에게서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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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도사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방래원의 최고 도사인 노인이 신음하면서 말했다.
"아무리 퇴궁 당했어도 황실 사람이었으니 어찌 하겠느냐.."
한숨을 쉬면서 노인이 말했다.
"원시천존께서도 이해하실게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넋을 잃으면서 그 방 한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 불경을 외고 있었다. 나무로 만든 작은 불상과 탱화가 그려진 쪽방은 분명 도교 사원에는 맞지 않는 광경이었으나 청년은 뻔뻔하게도 자신은 부처를 믿는 다면서 이 방을 만들고 뻔하게 불경을 외고 있는 것이다.
방래원에 홀홀단신으로 온 영선은 호들갑을 떨면서 이렇게 혼자서만 왔냐고 물어보는 이들의 말에 대답을 주지 않았다. 행장을 풀고 가만히 앉아 있던 영선은 무언가 영선에게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이들에게 질려서 결국 불상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것이다.
영선이 눈을 뜨고 손바닥에 있는 불경을 읽는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그리고 결국 보다가 질린 도사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사라지고 인기척이 끊겼을 때쯤 영선이 목탁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팔자에도 없는.."
영선이 불교도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가끔씩 절을 찾는 것이지 예배를 드린 적도 최근에는 없었는데 사람들을 쫒아 내려고 뻔뻔스럽게 도교 사원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다.
잠시 온화한 부처 목상의 얼굴을 뚱하게 바라보던 영선이 손을 만지작거린다.
"고 아정 이 씹새끼가..."
순간 얼굴에 시퍼런 살기가 스친다. 영선이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아..."
몇달이 지났다고 그 얼굴이 아직도 떠오르는가. 자신만 보면 헬렐레 웃음을 터뜨렸던 그 얼굴이 아직도 선연했다. 영선이 잠시 상념에 잠긴다. 상처받은 이 경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아이를 피임했다고 할 때 이 경이 절망하여 배신감을 절절히 느끼던 것이 눈에 선연했다.
영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운 사람이 서울에 있고, 가을 귀뚜라미 우물가에서 울고, 살며시 내리는 서리에 대자리 차가울때, 외로운 등불 그리움 끊어질듯 솟구치거늘.. 휘장을 걷고 달을 보니 그대는 꽃처럼 구름 끝에 걸렸네.."
슬퍼하지 않으려고 해도 간간히 이 경이 생각났다. 기다리겠다고 말했고 영선은 수십년이고 기다릴 자신이 있었지만 숨이 막히고 가슴이 저려왔다.
"위로는 푸르고 아득한 하늘, 아래로는 넘실거리는 파란 물결.. 아스라이 하늘 끝 먼 길 저편.. 내 넋 오락가락하나 끝내 저 관산 넘지 못하는 구나."
영선이 눈을 감고 탄식했다.
"끝없는 그리움에 정녕 내 심장과 간장이 끊어지는가.."
============================ 작품 후기 ============================
장상사 최심간 끝났습니다!!!!!!!!!! 너무 심기소모가 커서 다시는 장편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챕터.. 이제 반이 왔고 나누자면 1부가 끝난 셈이군요. 고 운정아정영정이 외전이랑 오 약영 외전도 빨리빨리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