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48)

00066 협객행(狹客行) =========================

"이런.."

 칼날이 시퍼렇게 빛나고 피가 뚝뚝이면서 흐르고 있었다. 운정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가 곤란한듯이 시선을 돌려 피웅덩이 속에 운정을 바라본다. 운정이 사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흑립을 쓴 사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탄식하면서 말하는 사내가 뒤이어 말했다.

"네 아비냐."

 운정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사내가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네 아비를 죽였으니 언제든지 복수하러 와도 좋다. 나는 남준을 따르는 석 형일이라고 한다."

 검집에 검을 꽂곤 등을 보인다. 그리고 운정이 그 등을 보면서 말했다.

"아비가 어미와 저를 때려서 모자가 도망가려했습니다."

 사내가 우뚝 멈춰선다. 열두살인 운정의 눈은 열두살의 것이 아니었다.

"술에 취한 아비가 분노하여 어미를 때려 죽여 지금 저 마당에 파묻혔습니다."

 마당에는 삽이 있었고 사내는 어째서인지 헉헉 거리면서 얼굴이 달아 올라 있었던 그 남자의 얼굴을 생각하곤 표정을 굳혔다.

"제가 저 삽으로 아비를 죽이거나 제가 죽으려고 했는데 기꺼이 죽여주셨으니 은혜를 갚으러 갈 것입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저 너도 사람을 돕거라. 도움을 받았으니 도우면서 살거라."

"도우시려 죽이신 겁니까."

"...네 아비는 악인이었다."

"누구십니까."

 사내가 한참 후에 말을 했다.

"남준은 협사지."

 그렇게 말하곤 사내는 발걸음을 뗐고 운정은 그 사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보았다.

 운정은 커서 남준의 소식을 찾았다. 강북의 북걸, 강남의 남준. 운정은 자신을 나락에서 구원해준 남준을 따르기 위해 강남을 뒤졌으나 강남의 명성 높은 협객들이 그를 직접 따랐고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 하나 남준을 아는 유협 하나가 운정을 보면서 딱하다는 듯이 말했는데 운정은 그 말에 충격을 받고야 말았다.

"협사가 언제까지 협사일줄 아느냐? 남준은 죽은지 한달이 넘었는데 그 소식도 모르더냐."

 운정이 멍하여 있다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어, 어째서 남준이 죽은 것입니까."

"착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협사는 입을 열지 않았고 운정은 씁쓸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운정은 유협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 비슷한 왈패는 되었는데 다만 어렸을 적에 도움받은 석씨 사내의 말이 신경쓰여 선을 넘어 선인이나 여자, 아이, 노인을 건드리는 행위를 금했으며 인신매매나 살인과 강간을 금했다.

 그리하여 자리세를 걷고 시장을 관리하였으며 그 대가로 다른 위험에서 보호해주었다. 왈패라면 왈패였지만 운정은 나름 막나가지 않았고 협객은 아니었으나 그들에게서도 인맥이 어느정도 있었다.

 평범하면서도 나름 만족했던 나날들이었고 운정은 그저 그런 사내로서 소소하게 살았으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백수 근처 행궁에 황제가 행차한단 소식은 있었으나 정말로 그를 보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눈매가 치켜떠진 무언가 싸한 인상의 청년이 자신을 흝어볼때 두려움을 느꼈으나 그가 그 유명한 귀비인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운정은 사랑싸움에 울며 겨자먹기로 강제로 입궁하였고 입궁 뒤에는 독수공방에 갇혀져서 홀대당하다가 신귀비가 나간 이후에 다시 이 경의 부름을 받았다.

"그걸로는 부족하지."

 운정은 두 눈으로 똑똑히 이 경이 얼마나 영선을 사랑하는지 지켜보았었다. 그리하기에 운정은 원래 알고 있던 협사 중 몇몇에게 얘기를 꺼냈는데 그들 중에서 질색을 하면서도 돈이 궁한 이가 몇몇 있었다.

 빠른 단검술로 유명한 사내가 하나 있었는데 딸을 시집보낼 혼수가 없어서 딸이 노처녀가 되어간다고 했다. 소리장도라고 불렸던 유명한 협사가 곤란해하는 것을 안 운정은 돈을 주고 그 사내를 사서 자객으로 불렸다.

 그리고 그 사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 분노했을 운정은 천천히 생각해보니 황후가 그와 결탁한 것과 아직도 황제가 영선을 사랑함을 알고 자신의 충동적인 결정을 반성했는데 칠천리 먼 방래산으로 가는 도중에 아무리 죄인이라도 황궁사람에게 호위를 붙이지 않을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 경은 운정을 영선과 닮아서 총애를 했다.

 이 경은 그의 눈매를 유심히 바라보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를 영선의 '영'자를 따서 영정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불길하다 하여 아정으로 개명당하다가 다시 영정으로 개명당한 그는 속으로는 치를 떨었으나 차마 대꾸를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눈치가 빠른 운정은 그가 자신을 귀비와 겹쳐보는 것을 알고 일부러 격의가 없거나 향수가 나게 행동을 했고 이 경이 잠시 기분이 나쁠 때에는 몸을 바짝 엎드려 그가 노하지 않게 기분을 맞추었다.

 그런 노력의 대가로 운정은 미인에 올라서 무려 귀비의 궁에 거주했다. 범법자이긴 했으나 선을 지켰던 운정은 판이 주어지자 야망을 터뜨렸다. 출신이 좋은 후궁들이 그에게 절을 하고 뇌물을 준다. 심지어 승상의 처조카마저 그에게 진귀한 패옥을 선물하니 고 운정은 무려 바람이 들고야 말았다.

 다만 고 운정은 눈치가 빨라서 이 경이 유 도림을 몹시 신뢰하는 것을 알기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연자안이 터진 즉시 고 운정은 영 가도가 한 충용을 고발하는 것에 즉시 도움을 주어서 몸을 빼내고 이 경에게 가서 납짝 엎드려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연자안으로 다른 후궁들이 죽임을 당하는 동안 고 운정은 당당히 살아남아 미인의 지위에 올랐고 더욱 총애를 받았으니 오직 운정이 두려워하는 것은 음월전의 황후밖에 없었다.

 그 기세나 위압감. 그 위치나 배경도 그렇지만 그가 어렸을 적에 도움을 받았던 협사가 남준을 따랐으니 그와 같이 쌍으로 묶였던 북걸이 바로 황후인지라 운정은 차마 그를 거역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적 일은 운정에게 이미 단단히 각인되어서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운정은 황후의 눈치를 보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는데 바로 강 채요가 미인을 바쳐서 이 경을 꾀니 식겁한 운정은 그 또한 사람을 찾아 이 경을 홀린 이를 뽑았다.

 그 쯤 이 경이 도사 청수에 의하여 이상한 연단술과 비술에 빠졌는데 청수가 방중술의 조건으로 여양을 찾는다는 것을 깨달은 운정은 천하의 여양을 뒤져서 외모가 아름다운 이들을 꼽았다.

 운정이 데려올 수 있는 여양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처녀였으니 데려올 수가 있었으나 하나는 유부녀라 가지 않으려고 했다. 촉 땅의 비단장수의 아내인 여선아가 울면서 자식을 껴안으면서 빌었다. 그리고 운정은 한마디 말로 여선아의 고집을 꺾어 버렸다.

"음 그럼 네 남편과 아들을 죽여 널 홀몸으로 만든 다음 입궁시키면 되겠구나."

 할 말을 잃은 여선아가 그 얼굴을 멍하게 본다. 운정은 평온한 얼굴로 여선아를 보았고 창백하게 질린 여선아가 고개를 끄덕여 그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운정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누렸다. 심지어 매관매직에도 손을 댄 운정이지만 교활하게도 중앙 관직은 매매 않고 지방의 현령이나 낮은 관직을 팔았는데 그 정도는 경미하여 이 경도 눈을 감아 주었고 운정은 돈을 얻은 것으로 수하의 환심을 사서 세력을 구축했다.

 그리고 운정이 내명부에서 거의 손을 댈 사람이 없이 승승장구할 때, 어느날 태자가 그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되는 날에 너희 같은 요들을 당장 치워버릴 것이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뿐인데 악담을 들은 운정이 멍하게 그를 바라본다. 뭐라고 대꾸하였을 운정의 측근들도 태자는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성역이라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그를 방관했다. 운정이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다.

"아니, 왜.. 어, 어째서.."

 그러나 태자는 무척이나 화가 나서 씩씩 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그것을 황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운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날 이후 태자가 부황을 홀리는 강 채요와 운정의 무리들을 증오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던 와중에 강 채요가 그를 찾아왔다.

"황제가 되면 우리를 다 죽여버리겠답니다."

 소근거리면서 강 채요가 운정에게 은근히 말을 흘렸다. 운정은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채요의 말을 다 받았고 채요에게 걱정말라는 말을 하면서 그를 배웅하였으나 그녀가 나가고 나서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저 썅년이 뭐라는 거야."

 채요가 운정과 총애를 나누는 사이이니 속으론 감정이 좋지 않는데 부채질을 하는 것이 뻔하다. 사실 채요도 알고 운정도 알고 있는 일이니 속으론 서로의 속내가 뻔하지만 태자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공감하고 있는지라 채요가 아니꼬워도 태자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운정은 손에 든 채요의 노리개를 굴리면서 싱긋 웃었다.

"슬프게도 나는 이런 더러운 일에 능해서.."

 운정이 궁 내 수하들을 넘치는 돈으로 만들었으므로 태자를 회유하였고 영화원의 담월지에 빠트리려고 했다. 태자가 미리 칠해놓은 기름을 발라 미끄러졌고 놀란 태자의 머리를 물에 박게 하려고 손을 뻗던 운정이 순간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얼굴을 창백하게 했다.

'너도 사람을 돕거라. 도움을 받았으니 도우면서 살거라'

"씨.. 씨발."

 운정의 목이 순간 타올랐다. 태자가 공황에 빠져서 손발을 미친듯이 허우적거리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운정의 이마에 땀이 고였다.

"하, 하필 이 순간에.."

'남준은 협사지.'

"난 협사도 못했다고.. 씨댕..."

 이가 아득 간다. 운정이 속으로 생각한다.

'착해서 뒤진거지. 착해서 뒤진거래매..'

 운정은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물 속에서 태자를 품에 안고 복잡한 심정으로 그 어린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정이 한숨을 쉬고 담월지에서 빠져 나왔다.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이 흥건하다. 운정이 무거운 얼굴로 잠시 손에 들린 태자의 얼굴을 보다가 황귀빈의 궁으로 향했다.

 절대로 착하게 살지 않으려고 했다. 협객이 되고 싶었으나 될 수도 없었다. 그저 불량배였고 이제는 삿되고 불량한 후궁으로서 매관매직이나 하는 것인데 뭘 믿고 이런 짓을 저버렸는지. 착한 것은 바로 강자의 여유인데 운정은 한번도 강자인적이 없었다.

 한황귀빈에게 원래 담월지에 빠트릴려고 했던 노리개를 건냈고 운정이 능글맞고 여유로운 태세를 유지했으나 이어지는 황귀빈의 말에 속으로 기겁하여 당황함을 보이고야 말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한 운정이 속으로 강 채요에게 오만가지 욕을 했다.

'저 년이 태자를 죽이고 입막음을 하려고 나를!'

 그러니 죽였으면 엄한 운정만 엮어 들어갔을뻔 했다. 그리고 황귀빈이 태자가 채요와 마주친적이 있었고 그 때 얼굴이 새하얘졌다는 궁인들의 보고가 있었다고 하며 신귀비의 출궁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태자가 채요에게 범인을 알고 있다는 티를 내었는지도 모른다고 얘기를 했다.

 공손하게 얘기를 듣고 그의 비위를 맞추던 운정이 만화궁으로 돌아와 상념했다.

'강 채요. 그 년은 언젠가 죽여야 한다.'

 어여쁘고 깜찍하게 생겨서는 배짱이 운정도 깜짝 놀랄만큼 세고 그 잔인함도 도를 지나쳤다. 운정도 속아 넘어가게 만들만큼 교활하기까지 했으니 시급하게 죽여야할 것이 바로 채요였다. 운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일단 태자가 저렇게 되었으니 황귀빈과는 사이를 유지해도 위비랑도 친하게 지내야겠다.'

 태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황귀빈은 채요에 대한 증오를 삭히고 삭혀 독으로 만들고 있었다. 언젠가 그것이 터질 것을 아는 운정이기에 한숨을 쉬면서도 머리를 굴려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잠시 창 밖을 바라보던 운정이 피식 웃었다.

"그게 이렇게 득이 될 줄은 몰랐군."

 그저 단 한번의 정이었는데, 석씨 사내의 말이 귀에 울려서 자신도 모르게 구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명할 줄은 몰랐다. 아주 어린 시절에 있지 못했던 그 기억을 잠시 회고하던 운정이 이내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지만."

 그리고 운정은 석 형일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된다.

============================ 작품 후기 ============================

1.자탄은 재능을 펴지 못해서 산골에서 썩어간다는 한탄의 내용을 담은 시이고 협객행은 말타고 꽃밭 달리는 호남아를 노래한 시입니다.

2. 이제 드디어 반이 왔나요ㅠㅠ 텍본 긁어보니 약 책 세권 분량을 썼더군요 크흐 텍본으로 다시 보는데 상당히 막드삘이 납니다 머 궁중암투물이 다 그렇겠져ㅎㅎ.... 쥬륵....

3. 정치 얘기를 빼고 쓰려고 해서 이 경이가 너무 무능해보이는데 이 경이는 딱 한무제 st입니다. 그 업적은 화려하지만 업적만큼 그림자도 있는.. 한무재도 인재복이 있었는데 무려 동시대에 곽거병, 위청, 사마천, 이릉 등등.. 경이도 진짜 복이 타고났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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