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48)

00069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

 이 경 스스로도 놀랄 만큼 둘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굴었다. 일년이 아닌 하루 뒤에 만난 사람처럼 이 경과 영선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 굳어있는 이 경에게 영선이 말없이 웃었고 이 경이 무슨 반응을 해야될지 갈피를 못찾고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치는 목소리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잘 지냈느냐."

 이 경이 조심스럽게 얘기하곤 그에게 자박 다가간다.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나고 이 경은 가까이에서 영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우상의 작은 얼굴과 섬세한 이목구비가 보이고 쾌활해보이는 입매와 자신감이 넘는 듯한 그 눈가가 여전했다. 그러나 무언가 영선은 더욱 성숙해보였는데 사람이 깊어 보였고 단정하게 백의를 입고 숲길 한가운데 서있는 모습은 이 경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고고해보였다. 궁 안에서는 연결짓지는 못했으나 이 경은 그가 백인일수이자 문인들의 신임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영선에게서는 지금 향보다 먹물이 날 것 같았고 이 경은 침묵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바람이 치솟자 영선의 볼에 붉은 낙엽이 묻는다. 새빨간 낙엽이 볼에 달라붙으니 안그래도 흰 피부가 더욱 새하얗게 보였다. 이 경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낙엽을 치워주었다. 영선이 다가오는 이 경의 손에 눈을 슬쩍 감다가 떠서 싱긋 웃었다.

 묘안석을 가공한듯한 짙은 호박색의 두 눈이 떠지자 이 경은 숨이 잠시 멈춘다. 영선이 눈매를 휘곤 다정하게 말했다.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이 경이 그 말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뺨에 살이 오른 것을 보니 잘 지낸 것 같더만."

"저는 심란한 마음의 고통을 다잡으러 도원에서 예불 드리는 정성을 바쳤으나 폐하께서는 굉장히 잘 지내셨나봅니다."

 영선이 이 경의 뱃살을 가볍게 잡으면서 웃었다.

"이게 뭡니까. 살이 또 쪘습니다."

 이 경이 얼굴을 붉히면서 벌컥 화를 낸다.

"살 안 쪘다!"

"세상에 이제 승마도 안합니까. 아 참. 승마할 사람이 없으시지요?"

"아니야! 육궁에 얼마나.."

 이 경이 말을 멈추고 머뭇거린다. 침묵하던 이 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살쪘냐?"

"승마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영선이 혀를 차자 이 경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우울해진 이 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영선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제가 같이 말을 타드리겠습니다."

 이 경의 몸이 굳어진다.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 경에게 영선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제가 폐하 옆에서 말을 몰고 같이 말을 타겠습니다."

"......"

"제가 죽을 때까지 폐하께서 살이 찌지 않도록 같이 말을 타고 달리겠습니다."

 영선의 말에 이 경은 그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며 한참을 말이 없었다. 이 경의 눈이 흔들리고 있다. 영선은 그를 인내심을 가진 채 바라보았고 이 경은 끝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너는 너무 멀쩡하구나."

 영선이 말없이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끝내 울먹이면서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

"난, 나는.. 정말 힘들었다."

"......"

"네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이 경이 눈물을 참으면서 영선을 바라본다. 붉어진 눈매를 다정하게 쓸곤 영선이 그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이 또 꿈만 같아서 이 경은 눈물을 뚜둑 흘리고 눈을 감았다. 그를 보기가 버거워서 이 경은 주먹을 쥐고 몸을 떨면서 한참을 격정에서 벗어나오지 못했다.

 잠시 후에 눈을 뜬 이 경이 영선을 빤히 바라본다. 영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폐하와 키가 비슷한 것이 다행입니다."

"...왜?"

"시선을 이리 마주하니 좋잖습니까."

 이 경이 그 때 울컥하여 말했다.

"시선을 마주해도 너랑 나는 이제 칠천리 먼 곳에 있는데 어찌하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이 경의 건조한 입술 위에 가볍게 입술 도장을 찍는다. 이 경이 움찔하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않았고 영선이 다정하게 이 경의 뺨을 쓸었다. 이 경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그 손길이 기분이 좋아 이 경은 곧 졸음이 올 것만 같았다. 영선의 손은 부드럽지 않고 손마디와 손바닥까지 굳은살이 간간히 박혀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느껴지는 살이 말랑했으며 무엇보다 그 손길엔 따뜻하고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영선이 손바닥에 느껴지는 이 경의 맨살을 느낀다. 영선이 이 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폐하."

"잠시만."

 이 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잠시만 이렇게 있자."

 영선이 그에 손을 떼지 않았으나 다른 한손으로 이 경의 허리를 잡아 끌어 안았다. 이 경이 순순히 영선에게 안긴다. 영선이 그를 끌어안고 이 경에게서 나는 살풋한 도화향을 맡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저를 보기 아프시다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

 이 경의 몸이 움찔거린다. 눈을 뜬 이 경이 영선을 굳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선은 잠시 이 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면 나를 놓고 가세요."

"너..."

 이 경은 어쩐지 그 말이 너무 서운해서 충동적으로 말하고야 말았다.

"내가 궁으로 부르면.."

"지금은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단호한 말과 영선의 곧은 시선에 이 경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본다. 이 경이 손을 떨구고 영선의 어깨를 밀치면서 소리쳤다.

"넌 결국 이토록 나를 싫어한다!"

"싫어하다니,"

 영선이 순간 기가 차서 혀를 찼으나 이 경은 그를 듣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치고야 말았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이 경은 한눈에 보아도 몹시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영선이 빤히 바라본다. 동요하지 않는 그 모습이 너무 싫어서 이 경은 버럭 소리지르고야 말았다.

"그렇게 네가 원한다면 나는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곤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려던 이 경이 그 순간 손목이 잡혀서 몸을 휘청거린다. 이 경이 순간 놀라서 뒤를 보고 다급하게 이 경의 손목과 옷자락을 잡은 영선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사실입니까?"

 이 경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

 영선이 웃지 않고 이 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경이 무언가 불안하여 멍한 눈으로 영선을 본다. 영선이 이 경의 옷자락을 서서히 놓았다.

 그러나 이 경은 도망가지 못하고 멍하게 영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선이 잠시 이 경을 보다가 한번 웃어 보인다. 깃털같이 가볍고 환한 웃음이었다.

"그렇다면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이 경은 크게 충격받아서 영선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본다. 영선이 소매를 모아서 절을 하는 것까지 차마 제지를 하지 못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는 이 경은 생각을 차마 하지 못하고 영선이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몸을 떨고 있었다.

 한참 후에서야 이 경이 갈라지고 낮은 목소리를 낸다.

"기다리지 않겠.."

 그리고 이 경이 잔뜩 상처받은 듯한 예기서린 웃음을 흘렸다.

"하."

 영선이 말없이 그 이 경을 응시하였고 이 경이 그를 붉어진 눈으로 노려본다. 평온한 얼굴의 영선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이 경이 감정을 애써 억누름에도 삐져나온 편린을 담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네가 결국 나를.. 버리겠다는 거냐."

 영선이 웃었다.

"폐하는 아직 저를 모르시는군요."

 이 경은 한참을 그 태연한 얼굴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물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나도 너를 잊겠다."

 그러나 영선은 너무나도 쉽게 단언했다.

"폐하는 다혈질이라 심하게 말을 하시더라도 곧 그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자주 허언을 하시지요."

 이 경이 그 말에 화를 낼까 했으나 몸을 돌리고 이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 경이 몹시 화가 나고 속이 들끓어서 이를 악물고 주먹을 말아쥔다. 마음이 찢어지듯이 아파오고 슬펐다. 이 경이 정말 숨조차 쉬기 힘들만큼 노여워서 어쩔줄 몰라하다가 결국 치솟는 분기에 머리가 어지러워 근처의 건물 기둥에 손을 대고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균형잡았다.

 고개를 푹 숙인 이 경의 발치의 흙이 검어진다.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매정하다. 매정하다.. 너는..'

 이 경이 영선을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으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태연하게..'

 그러다가 이 경은 불연듯 어떤 생각에 얼어 붙고야 말았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이 경이 멍하게 자신이 오던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어떤 생각에 이른 이 경이 불연듯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폐하? 폐하?!"

 소란에 놀란 도사들이 멍하게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그 때 화를 내면서 버럭 소리질렀다.

"너, 너, 너..!"

 이 경이 숨이 차서 헐떡거리다가 소리쳤다.

"영선이 처소?!"

"예?!"

"빨리 말하지 못할까?!"

 불호령에 도사가 얼굴이 창백하게 만들곤 황급히 말했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쭉 가면 암자가 있사온데.."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달린 이 경의 얼굴이 몹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경이 불안함에 떨면서 자신의 예상이 틀리길 빈다.

 암자에 도착한 이 경이 헉헉 거리면서 소리친다.

"영선아!"

 인기척이 없는 암자를 이 경이 기어코 문을 부수고 들어가 빈 것을 확인하고 뛰쳐 나갔다. 이 경의 손이 떨려온다.

'설마, 설마... 그 애가...'

 영선이 하물며 사랑이 없다곤 하여도 그간 정을 잊을만큼 의리가 없는 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이 경이 초조함에 기둥을 발로 차면서 숨을 몰아쉰다.

"제기랄!"

 그렇다면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영선이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이 경을 빤히 응시한다. 그 상황에서는 그저 그를 잊고 살아가겠다는 말로 생각했는데 그 뒤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면서 영선이 말한 것이 떠올랐다.

'아니 내가 너를 잘 알지, 잘 알아!'

 한탄하면서 이 경이 다시 도사를 잡아서 소리쳤다.

"영선이가 갈만한 곳, 아니.."

 이 경이 그 때 스쳐지나가던 말을 떠올리고 험악한 얼굴을 한채 소리쳤다.

"예불당이 어디있느냐?!"

 도사의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나가는 이 경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도원에서 보기 힘든 향내가 나는 작은 쪽방의 문을 부수듯이 열고 안에 들어간 이 경이 그 안에 단정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채 앉아 있는 영선을 보면서 기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탄식했다.

"아 영선아.."

 처마 밑에 풍경이 흔들린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은은한 향내가 났다. 부처의 앞에서 옷자락을 구기지 않고 단정하게 펼친채 무릎을 꿇은 청년이 있다.

 이 경은 영선이 작게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흰 옷을 입은 영선의 앞에는 지필묵이 있었고 먹이 마르지 않은 종이에는 무언가 글씨가 남겨져 있었다. 정갈한 차림을 한 영선은 흐트러짐없는 자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릎 위에는 단도가 얹혀져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있었을 참상에 경악하여서 당장 단도를 던져버리고 울면서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으면서 울었다. 손을 다잡아 하물며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여 울었다.

"너 대체 이 젊은 나이에 그리 모질어서는 어쩌자는거냐.."

 심장이 떨어질 것 같고 너무나도 충격이 컸다. 이 경에겐 영선이 죽는 것이 정말 끔찍한 일이었고 생각할 수가 없는 고통이었다. 이 경이 힘이 빠져서 영선을 꽉 부여잡은채 흐느꼈다.

"네가 내 앞에서 죽는 것이 어떻게 비정한 일인지 네가 정녕 모르느냐.."

 눈물에 무릎이 젖는다. 그 때 영선이 이 경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경의 머리 위에서 그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너무나도 몰라서 내 마음을 의심하십니까."

 이 경의 몸이 굳어졌다. 그 때 엄정한 목소리가 이 경에게 들려왔다.

"저는 폐하가 저를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폐하를 생각합니다"

 이 경의 몸이 미미하게 떨려온다. 무릎에 얼굴을 묻으면서 이 경은 차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영선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당신을 위해 살기로 마음 먹으며 일생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마음이 당신의 것이고 생각하는 마음을 끊지 못했으나 믿었기에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잘 알고 사랑을 확신했기에 나는 오직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이 경은 답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꾸지람을 하는 듯한 굳은 목소리였고 영선은 이 경의 웅크린 등에 손바닥을 얹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래도 제가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사랑은 모양이 다를 뿐입니다."

 이 경은 그 말에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오직 얼굴을 묻은 상태에서 영선의 옷자락을 꾹 잡았다. 이 경의 몸이 충격으로 떨렸다. 영선이 천천히 이 경의 등을 토닥인다. 이 경이 말없이 영선의 옷자락을 쥔 손을 움츠렸다.

 한참을 불당에 앉아 영선이 엎드린 이 경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 작교는 1챕 마지막화랑 외전에서 등장시작해서 꾸준히 등장했습니다. ㅠ.ㅠ

태자 아직 죽지 않았으나 혼수상태... 오타 지적한 것은 빠르게 고치겠습니다.

나머지 질문은 진행상 노코멘트!

덧. 희 치는 건들지만 않으면 방임합니다. 후궁 애들 조지려면 조질 수 있는데 이 경 자극하기 싫고 + 평화 즐기고 휴식하려는 목적 + 가소로운 애들 굳이 건들기 싫어서 방관. 아직까지는 후궁들이 희 치 기준으로 크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암투야 그럴 수 있지. 매관매직도 중요 관직은 하지 않았고.. 고발도 없었는데 몰래 뒷돈 꿍치는거 굳이 들춰서 처벌할 필요는 없지..외척들에게 권력을 이양하자 꼬신 것도 아니고 토목 건설을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공적으로 태자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뒤가 구리게 그를 죽인 것 까지 손을 대야하나?? 흠..'

 이런 상태. 기본적으로 지금도 내명부는 황후 손 안에 있어서 다들 거스르지 못하니 무관심한 희 치는 그저 황후 일만을 충실히 합니다. 내명부 외에도 외명부 관활이나 제사나 황후로서의 인가를 내는 일들을 맡고 있는데 희 치는 공적인 일은 깔끔히 해도 이런 물 밑 소동은 눈 감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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