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
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가 나고 대청에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어둑한 밤에 별이 쏟아질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대나무 사이에 바람이 몰아친다. 이 경이 도원의 쪽방, 예불당 바닥에 머리를 괴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선이 그 옆에서 옷매무새를 만지면서 차림을 단정하게 한다. 이 경의 옷이 불상 위에 내팽겨쳐져 있었다. 쪽방이 더워서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이윽고 돌아본 영선이 웃으면서 마루에 누운 이 경에게 다가갔다. 팔에 대충 걸친 옷을 끌어 올리고 풀어진 옷고름을 닫아주면서 영선이 속삭였다.
"감기 들어요."
이 경이 가만히 영선을 내려다본다. 숱 많은 눈썹 위에 입을 맞춘 영선이 또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이 경이 굳은 입술을 열고 느릿하게 말을 했다.
"여기도 대나무가 많구나..."
이 경의 생각을 눈치채고 영선이 작게 말했다.
"음월전에도 대나무가 많았지요."
"그러나 느낌이.. 느낌이 많이 다르다."
"......"
"너는 황궁 밖이 몹시 더 잘 어울리는구나."
영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이 경은 새까만 눈동자로 영선을 바라보았다. 이 경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담겨 있었다.
"생기가 넘친다."
"그러나 내가 있어야할 곳은 당신의 옆입니다."
영선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이 경의 뺨을 쓴다. 이 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영선을 괴로움이 담긴 시선으로 본다. 영선이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았다.
"너를 위해서라면 널 놓아줘야겠지."
"......"
"재주 많고 바라게 자란 영준한 청년을 새장에 가둬놓지 말아야겠지."
이 경은 몸을 일으켜 앉았고 영선은 이 경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이 경의 입가에 쓴웃음이 담겼다. 열려진 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방래산의 밤하늘은 유독 하늘이 깨끗하여 별이 바다처럼 널려 있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는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영선이 살풋 웃었다. 이 경이 나직히 말한다.
"너를 놓아줄 수가 없구나."
영선의 팔을 잡은 후에 이 경이 정면을 응시하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를 궁에 들일 것이다."
"궁에 들여서요?"
"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금옥장교라."
영선이 짧게 말한다. 이 경이 얼굴을 찌부리며 영선의 어깨를 가볍게 잡는다.
"어찌 그런 불길한 말을 하느냐."
영선이 일그러진 이 경의 얼굴을 본다. 유심히 묘안석을 박아 넣은 듯한 두 눈으로 이 경을 바라본다. 찡그려진 콧등을 피식 웃으면서 손으로 튕기자 이 경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영선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객관적으로 진짜 못생기셨습니다."
울컥한 이 경이 말을 하기 전에 영선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는 보는 눈이 이상하여 강남제일기녀보다 폐하가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이 멍하게 그를 볼 때에 영선이 작게 웃었다. 이 경도 속으로 후궁에 더 아름답고 잘생긴 양인들이 널렸으나 너만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얼굴을 붉혔다. 영선이 그런 이 경을 바라본다. 바람에 흐트러진 주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니 어디서 저 같은 사람 구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폐하의 권세를 바라고 폐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선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뻐서 사귀는 것입니다."
이 경이 맥이 빠져서 말했다.
"그, 그러냐?"
"예."
영선이 잠시 말을 고르다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육궁에서 진심으로 폐하를 사랑하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그러니까 폐하는 저에게서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 그, 그럴까?"
"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확신을 담은 칼같은 목소리가 이 경의 귓가에 들려온다.
"저 외에 당신을 사랑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리고 이 경은 그 말을 할 때에 서늘한 영선의 얼굴을 보았다. 이 경은 자기도 모르게 말하고야 말았다.
"네 말이 틀릴 수도 있지 않느냐."
영선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그 때의 영선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 있어서 순간 놀란 이 경이 흠칫하여 그의 눈치를 본다. 영선은 이 경을 신경쓰지 않고 무언가 상념을 하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살벌하여 이 경마저 주눅이 들어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하지."
묵직한 저음에 오싹하기까지한 목소리에 이 경이 놀라서 영선을 본다. 영선이 그 때 이 경과 눈이 마주쳐서 작게 웃었다. 다시 풀어지는 분위기에 이 경이 눈치를 보다가 영선의 손을 만지작 거렸다. 영선이 그것을 잠시 바라보면서 다정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이 경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영선과 시선을 응시했다. 보기에 황홀한 호박색 눈동자를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가서 너를 반드시 정식으로 데려올 것이다.
영선의 손을 꽉 잡으면서 이 경이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를 빨리 보고 싶다."
영선이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이 경과 위비가 그 날 저녁 방래산을 떠나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
얼마지나지 않아 황성의 사자가 와서 이 경의 성지를 전달했으니 백가 영선의 거취를 황성 내부의 유일한 도원이자 황실 사원인 태진원으로 옮긴다는 황명이였다.
그러나 영선은 그 후 겨울이 지날 때까지 이 경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영선이 그에 별 반응없이 순순히 도원에 있었으나 이 경은 끝까지 영선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영선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쾅!!
문이 벌컥 열리고 병사들이 그 앞에 진열에 있다. 감히 황실 사원인 태진원에 발을 들이지 못하나 그 사열한 군인 사이로 비단옷을 입고 허리춤에 칼을 찬 중년인 하나가 들어온다.
꽤나 젊었을 때는 준수할 것으로 보이는 얼굴이지만 기백이 없어 보여 어쩐지 소심해보이는 인상이었다. 귀족의 티가 나는 중년인을 유심히 보던 영선이 그 앞에 멈추어서는 그를 본다. 중년인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이십니다."
"그래."
영선이 한쪽 입고리를 올리면서 웃는다.
"이제 그 검을 뽑아 목을 가져갈건가?"
중년 사내가 그를 빤하게 바라본다. 푸른색 옷 위에 금사로 새겨진 대호의 문양. 옥관을 차고 사슴의 뿔로 만든 허리띠를 패용하곤 그 허리춤에 찬 것은 보검이다. 영선이 그 검집을 유심히 본다. 그 검집을 장식한 보석은 분명 새것이고 빛났으나 검집 자체는 낡은 것이었다. 중년인이 검을 스릉 뽑고 시퍼런 칼날을 빛낸다. 영선은 칼날에 적혀진 군지단심 사검충신(君知丹心 謝劍忠臣)의 자를 본다.
영선이 입가를 비틀면서 말한다.
"소가는 도올 전 양가의 황제가 내린 검을 아직도 당당하게 들고 다니니 황가 위에 명문가라는 불충한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 재도의 몸이 움찔거렸다.
"어찌 그러신 말을..."
잠시 머뭇거린 소 재도가 칼을 들이대면서 말했다.
"유감은 없습니다. 또한.."
"누구의 명이요."
"당연히 존전이시지요."
그 둘러대는 말에 영선이 짜증을 내면서 날카로운 눈매로 소 재도를 노려본다.
"존전 중 누구냔 말이다."
소 재도가 굳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 뒤이은 말에 영선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황후 폐하의 명이십니다."
============================ 작품 후기 ============================
주석 1.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동복 누이인 관도공주 유표는 딸인 진교를 황후로 만들고 싶어서 그 당시 황제의 가장 사랑받는 애첩 율희의 아들에게 혼담을 넣었으나 율희는 황제에게 미인들을 바치는 관도공주가 싫어서 거절하였다. 화가 난 유표를 본 왕부인이 그를 알아채고 공주를 초대하고 달래는데 왕부인의 아들인 황자 유철이 똘똘하고 영민하였다. 관도공주 유표가 유철에게 만약 진교와 결혼을 하면 어떻게 할것이냐고 물었고 유철은 "금과 옥으로 만든 집에 아교(진교의 애칭)를 넣어 가둘 것이예요.(금옥장교)"라고 대답하였고 유표는 그에 유철과 진교를 혼인시키고 유철을 태자로 밀었다.
당시 황제인 경제는 애초에 똑똑한 유철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니 황제가 어렸을적 어머니인 두태후와 누나 관도공주의 정이 각별했으므로 관도공주를 존경하고 많이 따랐다. 율희는 얕은 꾀에 당하여 총애를 잃었는데 왕 부인은 율희가 질투심 많은 성격에 아들을 태자로 만들어달라고 경제를 닥달하는 것을 알고 율희가 초조할 시점에 조정 신하들에게 율희의 아들을 태자로 만들라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경제는 그 상소를 보고 격분하여 율희가 자식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서 술수를 부린다 의심하여 율희 자식과 율희에게 주었던 특권과 총애를 뺏는다. 낙심한 율희는 병에 걸리고 유철은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한무제이다.
한무제는 그러나 여자가 많아 위자부와 이부인(경국지색의 고사), 왕부인, 구익부인 등을 사랑하였고 위자부를 질투한 아교에 질린 한무제는 그를 장문궁에 가두고 황후의 예는 유지하나 정식 지위는 폐한다 명했다.
슬퍼한 아교가 사마상여를 고용하여 자신을 보아달라는 명시 장문부를 써서 보내나 한무제는 그럼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고 이번에는 위자부가 아닌 다른 후궁을 총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