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48)

00074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

"고 재인을 불러와라."

 이 경이 그런 강 채요를 잠시 바라본다. 영선이 이 경의 팔을 잡고 그 뒤에 숨어서 빼꼼 거리며 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이 경은 가끔씩 다정하게 영선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상황이 어색한 것은 이 경도 잘 알았다. 영선이 이 경에게 만화궁을 오랜만에 구경하고 싶다고 재촉한 것과 지금 이 상황이 무관하지 않은 것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 경은 영선이 음모를 꾸밀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다. 영선은 성품이 적이나 악인에게는 독사같이 악랄하고 잔악하지만 기본적인 성품은 착하고 예의 바른 이들에게는 다정다감하고 순했다.

 여선아의 사건도 그러하다. 영선이 화낸 것은 질투 때문이 아니라 남편이 있는 처자를 거둔 이 경에 대한 실망과 분노였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강 채요를 바라본다. 그것을 알기에 영선도 이 경이 이 상황이 작위적임을 안 것을 눈치챘음에도 그를 믿었고 이 경도 영선에 말에 순순히 따랐다. 더군다나 태자가 물에 빠진 상황이 작위적인 것은 알았으나 증거도 증인도 없었기에 그저 내버려둔 일이었으니 강 채요가 고발당한 것에 이 경이 동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이 경은 온전히 영선의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했다.

"너가."

 이 경이 긴 소매를 떨치며 강 채요를 천천히 가르킨다. 바닥에 쓰러진 강 채요의 가는 발목이 언뜻 드러나고 강 채요의 눈가가 분홍색으로 눈가에 물기를 머금었으나 경화수월의 미인임에도 이 경은 그저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강 채요의 얼굴이 살짝 얼어붙는다. 강 채요가 몹시 뛰어난 우물이기에 이 경이 그녀를 총애하여 어여쁘게 여겼지만 영선이 있는 지금에는 이 경에게 강 채요는 안중에도 없었다.

"영 미인과 서로를 연자안의 범인으로 지목하였으니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강 채요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 경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한 태자부의 일에 조금이라도 얽힌다면 넌 삼족을 멸한다."

 그 말에 강 채요의 눈에 독기가 감돈다. 그것을 눈치챈 영선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 봐라?'

 그리고 옆에 있던 영 미인의 눈에도 불길이 치솟았다. 영선이 그 때 이 경의 뒤에 숨은 자세에서 조용히 말했다.

"둘 중 하나는 그럼 결백하군요."

 영 미인과 강 채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은 단 한사람을 구하겠다는 표시였으니 두 사람 모두가 각자 억울한 죄를 하나씩 얻게 되었으나 이 자리에서 벗어나면 결백이 입증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황제가 지금 몹시 쓰다듬는 신귀비를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둘은 충분히 똑똑한 인물들이었고 충분히 교활한 이들이었다.

 강 채요의 눈에 섬광이 이는 것을 눈치챈 영 미인이 영선을 고변하거나 결백을 주장할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적을 끌어내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이부상서이신 아버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합니다."

 강 채요의 표정이 굳어진다. 강북귀족 중에서도 무시못할 영씨세가를 들먹인 영 미인의 얼굴이 결연해졌다.

"아까전에 폐하께서도 들었다시피 태자 전하 시해사건은 강 채요도 시인한 일입니다."

"그것은 흥분하여 비꼰 말입니다."

 영선이 끼어들어서 말을 슬그머니 흘린다.

"황족의 일을 함부로 담다니 원래 소녀같은 강 동생의 성정과는 참으로 다른 얘기구나.."

"너는 아무리 흥분해도 황자를 입에 담아선 아니된다."

 이 경이 눈가를 찌부리며 말한다.

"원래 내 앞에서 사람들이 그 속내와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너는 아까전에는 참으로 독하고 싸늘하게 말하더구나."

 강 채요가 이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나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영선이 이 경의 팔뚝을 꽉 잡고 살짝 웃는다. 이 경이 냉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간에 말하는 *말희가 육궁에 있었나 생각했었다."

"폐하, 그것은..!"

"강 채요는 폐하의 사랑을 받는 담빈을 증오하였습니다. 제가 탁 빈 마마를 고변하였으나 사실 착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강 채요의 일이었습니다."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은 격인가. 강 채요의 눈이 순간 흔들린다. 영 미인이 그를 삿대질을 하면서 말한다.

"호갑투도 원래 강 채요의 신분상 착용할 수 없는 물건이지만 그녀는 궁에 반입하였습니다. 그것은 궁을 뒤져보시면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처소를 압수수색 하십시오."

 강 채요가 당황해서 뭐라고 할 때 이 경이 크게 소리쳤다.

"당장 수색하라!"

 그리고 그 순간 강 채요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영 미인도 되는대로 말을 하는 것이지만 그 넘겨 집는 것중에서 사실인 부분도 많았기에 오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궁에는 아직 처분하지 않은 증좌들이 있었다.

 그리고 환관들이 호갑투와 주홍색 머리터럭을 가져왔을 때 이 경의 얼굴이 분노에 휩싸였다. 노기가 치밀어오른 이 경이 옆에 있던 차그릇을 강 채요에게 던진다. 비명을 지르는 강 채요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폐하, 폐하! 호갑투는 제가 분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겁이 나서 숨긴 것이니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머리터럭은 제가 탁 빈 마마의 처소에서 주운 것인데 세간에 머리카락과 손발톱은 함부로 처분할 것 못되는 것이라 어찌할바를 몰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너가 신귀비를 위험에 빠트리려.."

 차마 말도 잇지 못하는 이 경이 분노에 차서 강 채요의 머리채를 잡는다. 꺅, 거리면서 끌려나가는 강 채요를 본 영선이 황급히 이 경의 손을 잡아서 말린다.

"저는 폭력을 싫어합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손을 놓아 버린 이 경의 표정이 구겨져 있다. 아리따운 얼굴은 어디갔는지 처참한 몰골인 강 채요의 뺨이 깨진 자기로 긁혀 있었으나 울음을 터트리기도 전에 필사적으로 고변한다.

"담빈의 궁인들에게 물어보세요. 영 미인이 담빈에게 의형제를 맺고자 한 것을 거절당했다 하였습니다. 그 후에 영 미인이 증오를 담아 그를 보았으니 필히 이상함을 느끼던 이들이 있을겁니다. 저는 담빈께 매번 차를 얻어 먹는 친한 사이였는데 어찌 그러겠습니다. 궁인들에게 물어 보세요."

"이 년은 뒤로 호박씨를 까는 물건입니다!"

 영 미인이 삿대질을 하고 강 채요가 분기에 그를 쏘아보았다.

"너는 뒤로 독살을 하는 위인이잖아!"

 그 개판에 이 경의 머리가 지끈거린다. 영선이 그런 이 경의 옆에서 팔을 더듬고 은근히 몸을 붙히면서 귀여운 척을 하니 이 경이 그제서야 화가 좀 풀려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고문을 하는 수밖에 없던가."

 그 말에 영선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그리고 그 때 낮고 진지한 목소리 하나가 그들 사이로 들려왔다.

"재인 고 아정입니다. 부르셨습니까?"

 들어 오는 고 아정을 잠시 바라보던 영선이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보니 진짜 나를 닮았군.'

 당당한 풍채라던가 얼굴이 남자답게 선이 굵다는 점을 제외하면 눈이 특히 닮았고 분위기 또한 판박이었다. 묘하게 건들거리면서도 진지할 때는 싹 분위기가 변하고 연기도 저렇게 잘하니 영선은 왜 이 경이 저 치에게 영정이라 불리면서 총애를 주었는지 알 것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언가 그 이상의 껄끄러움에 입맛이 쓰다.

 고 아정은 눈치가 빠르고 강자에 영합하여 다루기 쉬웠으니 영선은 그를 잘 다루었으나 그가 출궁했을 때처럼 주인이 없다면 크게 화를 부를 위인이었다. 그저 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영선의 성정으론 그를 적당히 제어하면서 놔둘 것이지만 그가 없을 때 아정은 이미 선을 넘은 짓을 해버렸다. 그럼에도 죽이지 못한 것은 아정이 결국 영경을 구했기 때문이고 또..

 영선의 상념이 멈춘다.

 강 채요가 아정을 바라보면서 똑똑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께서 첫째로 사고를 당하셨을 때 우리는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치요?"

"뭐?"

 아정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의문할 때 강 채요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그리고 몸을 굳히고 강 채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패물을 주고 받았지요. 고 재인은 저의 나비 비녀를 가져갔고 저는 그 때 무엇을 받았더라.. 글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찾아보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나비 비녀.

 고 아정이 그가 훔쳐서 한황귀빈에게 주었던 귀물을 기억하고 얼굴이 싹 굳어 강 채요를 노려보았다. 강 채요가 눈을 번뜩이면서 고 아정을 응시한다.

"제 결백을 증명해주세요."

 영선이 이상한 점을 느끼고 그 둘을 묵묵히 바라본다. 고 아정이 한참을 강 채요를 바라보다가 손을 떤다.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달싹거리던 고 아정이 조용히 말했다.

"그 날 같이 있었습니다."

"폐하!!"

"제 결백이 증명되었군요."

"담빈의 궁인들을 고문하세요!"

 영 미인이 강 채요를 삿대질하고 강 채요가 바락이면서 이 경에게 소리친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 경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가고 그들이 필사적으로 서로를 고변한다.

"폐하! 결백합니다!!!"

"궁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증좌가 있는데도!!!"

"그만ㅡ!!!!!!"

 이 경이 탁자가 부서지도록 세게 주먹을 내리치면서 소리친다. 와그작 부서진 나무 탁자에 강 채요가 겁을 먹어서 입을 다물고 영 미인이 그의 눈치를 살살 본다. 순간 정적이 흐른 방 안에서 영선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고 고 아정이 영선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이 경이 한참 후에 입을 달싹인다.

"상황은 분명 이상하지만 증좌가 충분치 않다."

"폐하.."

"닥쳐!!!"

 영 미인이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이 경이 분기탱천한 얼굴로 소리친다. 영 미인이 곧 입을 닫고 화가 난 이 경이 한참을 숨을 거칠게 쉬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강 채요가 궁에서 이 증거들이 나왔으니 의심을 피할 길이 없다. 영항으로 보내겠다."

"폐하!"

"영 미인은!"

 이 경이 눈을 감으면서 숨을 고른다. 영 가도가 입궁한 이유가 정치적인 목적이니 이 경은 강 채요를 내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하다. 어쨌거나 영 가도는 명문가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좋게 봐주어도 한 충용을 거짓으로 고발했으니 넌 답응으로 강등 후에 유폐다."

"폐, 폐하.."

 그러나 강 채요만큼 처절한 결과는 아닌지라 영 미인은 상대적으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강 채요가 비틀거리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것을 잠시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영선이 입을 열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폐하, 그간 궁이 시끄러웠는데 더 일을 벌이면 불만을 가질 신료들이 많습니다. 소 승상은.."

"알고 있다."

 처조카의 죽음이 미심쩍은 것을 알고 있는 승상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자식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안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까? 그 파장이 조정을 어지럽히면 곤란한 것은 일을 벌인 이 경인지라 그가 인상을 찌부리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충용에게 편안할 안(安)자와 맑을 숙(淑)자를 내리고 안숙귀비로 추서하자."

 이 경의 얼굴에 그늘이 져있었다.

"그리고 일단 너희들 궁인들은 다 죽이고.."

"측근들만 죽이고 나머지는 영항으로 보내 벌하시지요."

"그래, 네 뜻대로.. 후.."

 죄책감에 사로잡힌 이 경이 머리를 부여잡는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이 경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비에게 제후 작위를 내려서 위로하지. 그러면 그도 자식을 잃은 한을 달랠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은 사고로 담빈이 죽은 것을 저 둘이 이용해먹었다고 하자."

 이 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죽은 이들의 명예 회복을 또 어떻게 시켜줄지 고민이구나."

 이 경이 소매를 떨치고 자리를 나간다. 죄책감에 차마 이들을 보고 있기가 괴로웠기 때문이다. 영선이 파르르 떨고 있는 그들을 잠시 내려보다 옆에 있던 태감에게 명령했다.

"측근 궁인들은 다 죽이고 너가 볼 때에 신입이나 급이 낮아 무고해보이는 이들은 두고 보아 관리를 하여 한직에 놓아 쓰고 나머지는 십년동안 영항에 보낸 후에 다시 풀어주거라."

"예, 마마."

"그리고 얘네는.."

 영선이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그 시선이 맞닿은 강 채요의 몸이 움찔한다. 그제서야 두려운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강 채요에게 영선이 살기어린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들이 괴로워했으면 좋겠네. 이해하나?"

 그 말에 태감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 궁에서 신귀비 마마의 뜻을 받들지 않는 노비들이 어디있겠습니까?"

 영선이 그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주석 1. 하나라를 멸망시킨 요부의 대명사

이 편이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61편 65편 66편을 봐주세요! 강 채요가 하는 말은 네가 내 패물을 훔쳐가서 나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는데 나라고 증거가 없을 것 같냐? 나 죽으면 너도 같이 뒤진다? 라는 요지의 협박입니다.

영선이는 고문을 싫어해서 일을 마무리 시켰구요.

탁빈= 황자부, 한충용=연자안 희생자 담빈=유도림, 소승상의 조카

덧. 작품설정에는 차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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