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
관저궁의 대리석 다리를 밟는다. 늦겨울 옅은 얼음장 아래에 물결이 세밀하게 보이고 서서히 눈이 녹아 수위가 높아지는 것이 보였다. 신귀비가 다리를 밟을 때마다 짤랑, 맑은 소리가 울렸다. 관저궁은 대단히 섬세하여 그 모든 것이 만화궁 때보다 더 진귀하고 아름다웠다.
신귀비가 관저궁의 흑목으로 만든 문 앞에 서고 궁인들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린다. 문이 열리자 이 경이 탁상에 누워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신귀비의 눈썹이 꿈틀 거린다. 이 경의 표정이 괴로운듯 일그러져 있어서 매우 아파보였다.
다급하게 탁상으로 다가간 신귀비가 이 경의 볼을 잡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초점없는 눈과 흘리는 식은땀에 놀란 그가 금사로 짠 수건을 품에 꺼내어 땀을 닦아준다.
"폐하. 왜 이러십니까?"
그제서야 초점이 돌아온 이 경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흐른다.
"으음.. 귀비.'
이 경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일그러진 신귀비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소매를 떨쳐 그 손을 놓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한발자국 물러난 신귀비에 이 경이 한숨을 쉬면서 수건으로 땀을 닦고 말한다.
"조정의 업무가 복잡한 일이 많은데 연자안 사건이 혹여 영향을 줄까봐 마음 고생을 좀 하였소."
"조정이라면?"
연자안 사건이 육궁에 있는 많은 공신의 자제들의 죽음을 일으켰으니 충보다는 혈연을 중시하는 귀족가에서 반발이 클 일이다. 그러나 이 경의 황권이 단단하여 걱정할 수준은 아닌데 이리 고심하는 것은 보지를 못했던 영선이다. 잠시 생각하던 영선이 탁상 앞에 앉아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당왕 전하이신가요."
이 경의 표정이 순간 싸늘해진다.
"그렇다."
한참을 음울한 얼굴로 말이 없던 이 경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왕형(王兄)이 아무리 욕심이 없는 귀족가의 풍류인이라고 하지만 그 모후인 소성황후는 견씨 세가보다 대단한 왕가의 딸이었지."
"*이성왕부(異姓王府).."
영선이 침음성을 낸다. 이 경의 얼굴이 유래없이 싸늘해져갔다.
"*황고(皇高)의 첫 정궁이었던 소성황후는 조국공주(趙國公主)였지. 조나라가 다른 번국과는 다르게 우리와 같은 민족이 세운 나라이고 그 가문의 시조는 도올의 *고황제(高皇帝)의 맹우이자 가장 큰 공신이었으니 황족이 아닌 가문 중에서는 유일하게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심지어 황족마저 *번왕이 아닌 *친왕으로 임명되어 영지가 없는데 오직 조나라 왕작만이 세습이 가능했지. 그건 분명 특혜다."
"......"
"하지만 고황제의 유언이 조국의 왕통을 보전하는 것이니 아무도 그를 건들 수가 없었다."
이 경의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싸늘했다. 영선이 묵묵히 이 경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당왕이 그의 유일한 자식이니 아무리 내게 몸을 조아려도 조국을 근거지로 한 충심어린 조국 신하들이나 그 패거리들이 나에게 대든다. 내가 직접 손을 대려고 해도 고황제의 유언이 지엄하니 건들 수가 없었고 또 당왕은 결백하여 나는 둘째형을 잃은 그가 불쌍하여 놔주었는데 항상 그가 걸렸지.. 조나라는 여기서 머니 그곳을 쓸지 않는 이상은 왕형은 내게 불안한 존재야."
그 때 영선의 머릿 속에서 그날 연회장에서 맡았던 백단향이 떠올랐다. 그리고 종수궁에서 항상 맡았던 백단향을 떠올린 영선이 불길함에 이 경의 손을 잡고 다정스럽게 말했다.
"폐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왕은 유약하고 폐하는 강북최고귀족인 소 승상과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병부에 아직도 영향력을 가진 황후가 있습니다."
이 경이 짤막한 한숨을 쉰다. 영선이 그의 기분을 풀려고 샐샐 웃으면서 일어서서 이 경의 허리띠를 잡아 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이 경이 픽 웃으면서 순순히 끌려가 침대에 앉았다.
영선이 그 이 경의 무릎 위에 앉으면서 새침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폐하는 제가 술수를 부리신 것을 눈치채신 모양입니다?"
"그래, 이 녀석아."
영선의 귀를 깨물면서 이 경이 다정스럽게 말했다.
"언질을 해주지 놀랐잖느냐."
다정스럽게 영선을 쓰다듬는 모습에 영선이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멍청하신줄 알았지요. 속아 넘어갈줄 알았는데 불행히도 알아채시더군요?"
"멍청하다니?"
"멍청하지 않다면 저를 잃은 슬픔에 그동안 망가지신 거겠지요."
그 말에 담긴 뼈에 이 경이 한참을 침묵한다. 영선이 그제서야 웃지 않고 이 경의 품에서 굳은 표정을 했다. 강 채요와 영 가도, 고 아정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아프고 그들의 독니에 뚝뚝 떨어지는 악기가 구역질이 나는데 그것이 이 경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이 더 충격이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영선에게 이 경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난 너에게 배반당했다는 충격에 살기 싫었다."
그리고 영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짧게 웃은 영선이 말했다.
"그것이 우리 둘이 사랑하는 방식의 차이인거겠지요."
"너는 그럼 어떻게 나를 마음에 그렸느냐."
"우리가 다시 만나서 더욱 예쁘고 그림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살아가려했습니다."
이 경은 그 말을 듣고 깊게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옳다."
영선이 그 말에 작게 웃다가 그 자리에서 몸을 비틀고 이 경을 올려다 보았다. 영선이 특유의 반짝 빛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면서 바라보니 그 애교에 이 경의 입가가 움찔거린다. 영선이 손을 뻗어서 이 경의 가슴을 쓸고 그러자 화들짝 놀란 이 경이 손을 잡고 말했다.
"왜 이러느냐."
그 말에 영선이 더 놀라서 이 경을 잠시 바라본다. 이 경이 시선을 피하고 손을 놓고 조용히 말했다.
"피곤하다."
"폐하 요즘 저와 동침하기를 거부하시는군요?"
이 경은 대답을 하지 않았고 영선이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곤 이 경의 볼을 검지로 밀어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이 경이 그제서야 영선을 마주하곤 작게 말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폐하."
영선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이 경이 움찔 거린다. 영선이 손을 이 경의 아랫배에 가져다 올린 까닭이었다. 영선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상처가 아물었다면 전 우리 아이를 가지고 싶습니다."
"......"
"더 시간이 늦어져 폐하가 출산하기 어려움을 겪기 전에 빨리.. 우리 아이를 보고 싶어요."
영선이 웃으면서 이 경을 보았고 그러나 이 경은 답이 없었다. 눈을 꾹 감고 말을 주지 않는 이 경을 잠시 보던 영선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마음이 아물지 못했습니까?"
"...미안하다."
이 경이 한참 후에 말했다.
"네가 황손을 낳으면... 나는 그 아이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지 다 할텐데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평온해지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영선도 동의하여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던 영선이지만 이내 쾌활하게 웃으면서 이 경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폐하, 저는 괜찮습니다!"
"...동침은 정말 피곤해서 못하겠구나."
영선이 이 경의 땀이 송글 맺은 이마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서 이 경을 눕히고 옷을 벗겨준 영선이 다정스레 이 경의 가슴을 토닥인다. 이 경이 영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선이 은은한 미소를 짓곤 말했다.
"그러면 폐하가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게 제가 이렇게 있을게요. 폐하가 관저궁에서만큼은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게."
이 경은 힘겹게 미소를 지으면서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영선은 의문점이 많았으나 분명 이 경의 눈에 사랑이 가득 차있어서 대꾸를 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할뿐이었다.
'경이가 나를 설마 사랑한다면서 다른 속내를 가질까.'
그저 사랑을 하는 것을 확신하니 영선은 조용히 이 경이 잠들 때까지 도닥일 뿐이었다. 이 경은 눈을 스륵 감고 곧 미동을 하지 않았으나 영선은 그것에 손을 멈추었으나 오히려 굳어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 경의 얼굴의 땀을 바라보던 영선이 한참을 이 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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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벼락같은 충격이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관통한다. 비틀거리던 고 아정이 간신히 벽에 몸을 지탱하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치 숨을 쉴 수도 없고 방법도 잊어버린 백치가 되어서 헐떡거리던 고 아정이 울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어찌, 어찌.. 당신이 여기에.."
고 아정이 알던 것과는 다르게 죽립이 아닌 대나무로 만든 죽관을 쓰고 머리 한올 흐트러짐없이 정돈한 차림의 사내가 그를 응시한다. 입가에는 주름이 있었고 하얀 머리가 드문하게 보이지만 그 눈은 올곧게 빛나고 있다. 주황색 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아 있던 사내가 굳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운정아."
그가 잃어버렸던 이름이다. 아정이 결국 쓰러져서 허망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몸을 부들 떨었다. 독사와 승냥이 같던 고 아정, 고 재인은 어디에도 없고 아정은 그를 충격을 받은 눈으로 보면서 한참을 말이 없었다. 고 재인이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본다.
"당신... 당신께서... 이제와서 어떻게 여기에 계신가요."
"얘기를 들었다."
석 형일이 한숨을 쉬고 아정의 옆에 앉는다. 격의 없이 그저 바닥에 앉는 행위에 아정의 몸이 움찔거린다.
"네가.. 나를 동경하여 협객이 되려 하여 내 흔적을 쫒았더구나."
"......"
"내 형제들을 찾는데까지 성공하였다지. 하지만... 그들 중에서 몇몇은 과격한 아이들이 있었고 사실 남준은 그들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형제의 정때문에 그저 나에게 맡길 분이었지."
아정의 눈에 순간 살벌함이 담긴다. 석 형일이 한숨을 쉰다.
"모두가 내 잘못이다. 남준의 죽음 이후로 비뚤어진 이들이 너무 많았다. 원래도 과격한 아이들이었으나 더욱 더 엇나갔지. 나는 남준 다음으로 높은 이로서 그들을 다잡지 못했으니 내 잘못이다."
"협객은 위상 좋은 쓰레기들이지."
독기찬 말에 석 형일이 순순히 응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당신을 따라서 협객이 되고자 남준의 무리들을 만났어. 그들은 나를 계획에 합류시켰고 나는 그들의 명령에 남준의 복수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장원 하나를 불태웠지. 하지만 그들은... 너무 잔인하게 그들을 죽였고 증오에 차있었지. 내게 기억나는 것은 힘없는 아녀자와 아이들과 노인의 비명과 피비린내다."
아정이 분기에 차서 소리쳤다.
"애초에 그 장원은 남준을 죽인 것도 아니야! 그저 생전에 국명을 받아 남준을 추포하는 직위를 맡은 관리의 장원이었고!! 그들은 그저 죄없는 관리들을 분풀이로 학살한 것이다!"
아정이 치를 떤다. 그 이후로 아정은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 파락호가 되었다. 모든 꿈이 무너지고 아정이 본 것은 그저 협객이라 불리던 범법자들의 더러운 민낯이었고 현실이었다. 형일이 그 분노를 묵묵히 듣고 있다. 아정이 비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언젠가 좋은 협객이 되어 당신처럼 나와 같이 어리고 약한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말을 가슴 속에 담고 있었다만 지금 나는 재인이고 이미 많은 죄를 저질렀으니 당신의 뜻과는 달라졌어. 이젠 끝이야. 나는 더 이상 돌아갈 수도 없고 당신은 헛수고를 한 것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아정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그리 말을 해도 격정을 숨길 수가 없어서 아정의 몸이 떨려왔다. 그 순간 석 형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을 했다.
"그들은 내가 죽였어."
"......"
아정의 몸이 멈추어졌다. 석 형일이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네가 신귀비 마마에게 보낸 암살자도 내가 처리했지. 이제 그런 살인에만 미친 자들은 중원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처리했으니까."
"그걸 어떻게 믿어."
"난 지금 신귀비 마마를 모신다."
크게 놀란 아정이 뒤를 돌아볼 때 석 형일이 그를 단단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기녀와 칼잡이는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지. 아정아. 네가 상처를 받고 실망했으나 백인일수가 너를 달랠 수 있었으면 하구나."
씁쓸하게 말을 한 석 형일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는 관저궁의 특별호위 석 형일입니다."
그런 그를 한참을 노려보던 고 아정이 문을 열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석 형일이 한참을 그 자세에서 부동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면서 얼굴을 손에 묻었다.
============================ 작품 후기 ============================
주석 1. 원래 한나라 부터 왕은 황족출신만이 원칙적으로 임명 가능하나 공신들 중에서는 황가의 성과 다른 성을 가진 왕이 있었다. 그를 부르는 말이다.
주석 2. 황제가 죽은 아버지이자 선황을 부르는 말.
주석 3. 도올의 시조황제
주석 4, 5 번왕은 영지가 있었고 친왕은 영지가 없었다. 번왕이 친왕보다 높다.
석형일이 누군지 모르시면 협객행 외전을 보아주세요!
영항은 궁녀들이 곡식을 빻는 곳으로 몹시 고되어서 노역장으로도 사용하는 곳이었습니다! 즉 냉궁+노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