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48)

00076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

"나의 피를 가진 아이라."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끔찍하군요."

 뭐?

 이 경의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아랫배가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경이 모락 김이 나는 찻잔을 바라본다.

"피임약을 드시지 않으셨다면 제가 탐일을 먹었을 겁니다."

 순간 이 경의 안에서는 수천가지의 생각이 교차하였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차를 입에 털었다. 그것이 몹시 뜨거운지라 이 경은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그에 동요하는 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희 치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 경의 손에서 찻잔을 앗아가 그에게 턱을 잡았다.

"대체 잘 마시더니 오늘은 이렇게 성격이 급합니까?"

 그렇게 말하지만 희 치는 다정하게 이 경의 상처를 살폈다. 그 손길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희 치가 두 손가락으로 이 경의 벌건 혀를 집는다. 이 경이 눈을 도륵 굴리면서 시선을 피했다. 행인을 닮은 두 눈이 이 경의 혀를 신중히 살폈다.

"씁."

 타액이 떨어져 이 경이 희 치를 밀치고 소매로 입을 가렸다. 희 치는 그것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가리려는줄 알고 피식 웃었으나 소매에 가려진 이 경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드물게 희 치는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 경은 이 아이의 일에서 희 치가 그 목소리를 낼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기에 크나큰 두려움을 삼켰다.

 감정을 감추는 방법을 별로 알지 못했던 이 경은 그 순간만큼은 그 스스로도 놀랄정도로 태연하게 희 치의 주의를 돌렸다.

"신경쓰지 마라."

 이 경은 아침까지 아이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수만번도 했다. 배가 부른 꼴을 본 영선이 그를 증오하여 더 이상 예뻐하지 않을 것을 울면서 걱정하였고 병부를 옭아맨 희 치의 아이를 가졌으니 혹여 황자라도 태어나면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양인의 각인이 희 치를 개로 만들었으나 그건 다르게 말하면 희 치가 위험을 무릎쓰고 각인을 파기시킬 시도를 할 만큼 불공정한 계약이란 것이었다.

"그럼 앞으로 네가 탐일을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 나는 이제 귀찮다."

 이 경은 희 치의 아이가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기에 두려움을 느껴서 벌벌 떨었고 곧 태진원으로 돌아올 영선에게 제 부른 배를 보여주기 싫어서 하루종일 울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희 치의 냄새가 너무 좋고 그에게서 떨어지길 불안했는데 일주일 전에 오 상환을 스쳐지나가면서 그 체취가 너무 역겹고 불안한 것이 그에게 익숙한 기억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이 경은 자신의 태내에 아이가 자란 것을 알아채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건 희 치의 아이였다.

"아, 아니다. 내가 그냥 먹지."

"그냥 제가 먹겠습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희 치는 그 말에 작게 웃었고 이 경은 평소처럼 불퉁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으나 그 무릎 위에 손은 미친 듯이 떨고 있었다.

 태양전으로 돌아온 이 경은 침대에 쳐박혀서 달달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해!'

 이 경이 눈물을 꾹 참고 엉망진창이 된 속에 울컥인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이 경이 숨을 죽이면서 배를 만지고 이불 안으로 기어 들어가서 머리를 덮었다. 이 경이 임신을 한 것을 아무도 몰랐고 알아서도 안되었다.

 매번 피임탕을 먹었다.

 희 치의 아이는 이미 태자마저 정해진 이상 이 경에게 정치적으로 크나큰 부담이었고 또 곧 올 영선이에게도 큰 충격을 줄 씨앗이었다. 그러니 이 경은 절대로 희 치의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아니했다.

 피임탕을 그리하여 희 치와 관계 후에 매번 먹었고 희 치도 그것을 알았는데 단 한번 거른적이 있었다.

'폐하..'

 희 치의 건조한 입술이 목을 꾹 누르고 이 경은 어쩐지 희 치가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 뜯을 것만 같은 착각에 헐떡거렸다. 희 치는 상냥하게 이 경의 머리를 쓸어 주었고 계속해서 살갖에 입술을 내려 찍으면서 그의 것임을 확인하려 했었다. 이 경은 정사에 몸이 늘어져 있었고 어쩐지 희 치의 팔에 휘감겨서 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 경의 덩치가 커서 한번도 품에서 안락한 적이 없었는데 희 치의 품이 너르고 단단해서 이 경은 근육의 긴장을 풀고 희 치에게 칭얼거렸다.

 그리고 이 경은 희 치의 소매에서 나는 정향이 섞인 찻내에 멍하게 생각했다.

'아이를 갖고 싶어.'

 몸이 나른해진다. 이 경에게서 이성이 서서히 사라지고 졸음이 찾아온다. 희미한 시야 속에서 이 경은 본능이 그를 장악하는 것을 느꼈고 배 속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헐떡거리면서 이 경이 희 치의 팔에서 더욱 늘어졌고 희 치가 이 경의 진해지는 향에 의문을 품고 이 경의 목덜미를 결국 꾹 물었다.

"아아!"

 이 경이 탄식하더니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극양인과 오랫동안 동침한 몸이 씨앗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 경이 아랫도리가 젖어 오고 근육이 풀리는 느낌에 눈매를 풀고 물기 젖은 눈으로 희 치를 바라본다.

 여인의 아름다움과 사내의 준걸함을 다 갖춘 헌양한 절세미남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희 치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갈때 이 경은 참지 못하고 희 치의 목에 손을 감고야 말았다.

"희 치, 나를!"

 아이를 가지고 싶다. 씨를 받고 싶다. 이 훌륭한 사내의 자식을 낳고 싶다. 정사 중에서 이 경이 계속 생각하던 것이었다. 교성을 내지르면서 희락기와 비슷할 만큼 달아오른 이 경은 그 날은 정사가 끝나서도 강한 충동에 고민해야 했다.

'아이를.. 아이를.."

 눈이 몽롱하고 몸에 힘이 없었다. 아랫배가 당겨오고 묵직하다. 이 경은 희 치가 극양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토록 자신의 몸에 영향을 줄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배를 문대면서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루만.. 딱 하루만...'

 근육이 이완되고 단단한 몸이 흐물하게 풀린다. 초점이 없고 구멍이 다물어지지 않아 계속 양인의 것을 원했다. 이 경의 몸이 회임을 원하는 것이 그 스스로에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맹세코 회임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하루는 처음으로 충동을 느낀 탓에 경황이 없었고 임신하고자 하는 본능이 그를 지배하여 기진맥진한 이 경이 피임탕을 먹는 것을 하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그것이 이렇게 될 줄이야. 이리도 비참한 결말을 불러 일으킬 줄이야.

 이 경의 눈에 눈물이 팽 돈다. 이불 안에서 이 경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 경이 어느 순간 음월전이 너무 좋아지고 향기가 좋아져서 어쩔줄 몰랐다. 희 치의 살내음, 체취, 향기가 너무 좋아서 이불에 뒹굴거리고 살을 앙 물고 그에게 달라 붙었다. 그러다가 결국 다른 양인의 미미한 체취에도 경기를 일으키니 이 경은 이것이 회임의 징조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러나 이 불쌍한 적자를 임신하고도 이 경은 불안해하고 초조해했고 또 두려워했다. 복합적인 이유로 극심한 마음의 고통에 휩싸이던 이 경은 희 치에게 내가 피임탕을 먹는 것이 꺼려지지 않는지 물었다가 이런 답변은 얻은 것이다.

 얄궂게도 그 말을 들은 순간 이 경은 이 아이를 낳아야겠다는 생각을 결심했다. 희 치가 섬뜩한 목소리로 그 진심을 내보인 순간 이 경은 이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희 치에 대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희 치는 진심이었다.

 이 경은 확신한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희 치는 정말로 이 경의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경도 희 치의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든 순간 이 경은 이 아이가 너무 가엾고 불쌍해서 참을 수 없었다. 부모 중에서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불쌍한 아이를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이 경이 관저궁에서 빠져 나와 아침에 태양전에 홀로 남아 헐떡인다. 이불 속으로 필사적으로 기어 들어가는 이 경이 관저궁의 여지냄새가 밴 옷을 벗고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을 참았다.

"흑.. 윽..."

 이제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배는 다행히 티가 나지 않아서 헐렁한 황룡포에 가려지지만 영선이 몸을 만지려 시도할 때마다 이 경은 경계심이 들고 그리고 그 때마다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 그가 환궁하여 잠자리를 가지는 것도 거부하고 만지는 것도 거부하니 영선의 얼굴이 굳어질 때마다 이 경은 미안하고 또 슬퍼서 눈물이 나왔다.

 임신 초기에 배우자의 향도 못맡고 버틴 이 경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항상 불안감에 차있었고 그 좋아하던 영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적개심이 들고 배에 손이 갔다. 그는 항상 저녁마다 희 치를 그리워하였으나 혹시라도 희 치가 임신 사실을 알아채고 안좋은 마음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그를 피했다.

 영선이가 차라리 태진원에 계속 있었으면 괜찮았을텐데 이 경은 차마 궁에서 영선이 눈에 밟혀 떼어낼 수가 없어서 그와 항상 곁에 있었다. 영선의 옆에서 그 시원한 남만의 과일냄새를 맡으면서도 이 경이 항상 그리워한 것은 음월전의 정갈한 향이었다.

 이 경이 서러워서 눈물을 뚜둑 흘린다.

'희야, 희야.. 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무에게도 기쁨을 주지 못했던 아이이기에 기쁠 희(喜)라 태명을 짓고 안녕을 간절히 바라는 이 경이다. 그럼에도 이 경은 차마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이 태양전 이불 안에서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명부는 희 치와 영선이 양분하고 있었는데 둘다 이 경의 임신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 희 치와 영선과 식사를 하였는데 하는 중에 대화가 이 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황후 마마, 만약 제 자식이 든다면 폐하께서 대부가 되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 경이 젓가락을 멈추고 희 치가 오묘한 눈으로 영선을 바라본다. 영선은 웃고 있었으나 눈에는 의미심장한 빛이 가득했다. 탁, 젓가락을 내려놓은 희 치가 그를 바라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번에 너에게 했던 말은 다 거짓이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지.'

 희 치가 이 경을 잠시 바라보고 이 경이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린 희 치가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들끓는 성정과 불안정한 마음을 잘 알지 않는가. 신귀비. 나는 네 아이를 누구보다 아껴줄거야. 난 자식을 가지고 싶지 않아. 정말로.'

'그렇다면 폐하, 폐하는 자식을 가질 생각을 끝까지 하지 마시고 제 아이를 아껴주세요.'

 영선이 씩 웃으면서 이 경을 바라볼 때 이 경은 얼굴을 굳히고 시선을 피했으나 그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그런 줄을 알고 무시하였으나 이 경은 영선의 말에 담긴 소유욕이나 희 치의 진심어린 말에 충격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백 영선 하나만으로도 매우 똑똑하고 심계가 깊으니 이 경은 차마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거기다가 희 치가 합세하면, 이 경은 황제라도 고립된 상태였다. 이 경이 스스로 자초하였으나 너무 한심하고 애가 타는 상황에 엉엉 울면서 희 치를 찾고, 찾으면서도 볼 수가 없어서 태양전에 웅크려서 배를 감싸고 양인의 향을 찾는다.

"희야.. 희야.."

 이 경이 끅끅 울면서 배를 잡다가 잠시 망설였다. 이제 배가 불러올텐데 그러면 이제 복대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중반쯤 되면 숨길 수도 없고 이 경이 더 괴로울텐데 그러면 눈치가 빠른 둘 중 하나는 그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차라리 하나라도 자신의 편이었으면 괜찮을텐데 이 경은 절망 속에서도 이젠 태명을 붙인 아이에게 너무 정이 들어서 떼지도 못하고 속으로 도망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경은 다시 *순어를 갈 생각이었다. 궁 밖에서 낳은 자식이 정통성은 떨어져도 사실 태자가 있으니 이 경은 그를 도원에 맡겨서 범인으로 키우게 한 뒤에 얼마 지나면 영선에게 그 아이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나마 영선은 아이를 사랑하니 이 경의 말에도 화를 내겠으나 지켜줄 것이고 희 치도 다 성장한 아이를 차마 건들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은 하겠으나 이 경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단단히 결심한 이 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은땀을 닦으면서 이 경이 배를 어루어만졌다.

'희야, 내가 꼭 세상 빛을 보게 해주겠다!'

 이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관저궁의 냄새가 밴 옷이 아닌 깨끗하게 다려진 황룡포의 소매에 팔을 끼웠다.

============================ 작품 후기 ============================

주석 1. 순행, 천자가 황궁 밖에서 영토를 떠도는 것.

여러분들 댓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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