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7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
'희야.. 희야.'
환하게 웃는 어린 계집애가 손을 뻗는다. 눈이 축 쳐지고 피부가 보드라운 어린아이는 씨를 닮아 눈이 크고 흑백이 뚜렷했고 속눈썹이 무척 고아했다. 이 경은 그를 보면서 행복해 죽으려는 마음을 품으면서 그녀를 끌어 안았다.
'부황!'
희가 이 경의 목을 끌어 안으면서 애교있는 웃음을 흘렸다.
이 경에겐 역경을 딛고 태어난 이 아이가 너무나도 소중했다. 이 경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쁨에 휩싸여 있었다. 관평공주가 시집을 간 이후로 태어난 공주에다가 그 전 아이들과는 다른 출생과정이 너무나도 불쌍하여 정이 든 공주다. 생긴것도 옛 황성제일미녀였던 이 효와는 비교가 안되게 아름다운 딸을 품에 안으면서 이 경이 속삭였다.
"희야.."
그리고 이 경의 귓가에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희(喜)'입니까?"
이 경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깜빡 오수(午睡)에 든 이 경이 잠이 덜 깨서 멍한 눈으로 그 형체를 바라본다. 천천히 드러난 그 모습은 마치 행인같이 유려하고 큰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절세의 미남자였다. 이 경이 화들짝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배에 가려는 손을 내리고 뒤로 물러난다. 이 경이 주춤거리면서 황후를 바라보았다.
희 치는 평소와 다르게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가 넓은 붉은 옷에는 황금색 모란이 새겨져 있었고 그 머리는 옥관으로 튼 뒤에 진주술이 달린 동곳을 끼고 있었다. 그러하니 희 치가 있는 자리야말로 이 경이 본 어느 절경보다 더 화려했고 그 자태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과도 같았다. 희 치는 그러나 그런 이 경을 기분 좋은듯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 경이 자신이 '희야'라며 희 치의 성을 말한 것을 깨닫고 아차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희 치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희는 황후의 성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착각을 준 것 같았으니 희 치는 짧게 웃으면서 탁상 위 화병에 꽂혀진 피상화를 손에 들고 굴렸다.
잠시 향기를 맡던 희 치는 조용히 말한다.
"피상화는 향기가 옅지."
그러곤 다시 화병에 꽂고 이 경을 바라본다. 그 정갈한 흰색 복장이나 수수한 옷이 아닌 귀족 공자같은 옷차림을 한 희 치는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원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 경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이 오랜만에 맞는 아릿한 향에 몸이 무너질 것 같아 의자의 손잡이를 꾹 잡는다.
"폐하. 오랜만이군요."
"응?"
그리고 이 경은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눈 위에 입을 맞추는 것에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멍하게 희 치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희 치의 우묵한 눈에 그림자가 그리고 높은 콧대가 더할 나위없이 수려하다. 그림자가 뚜렷한 얼굴은 어떻게 보면 쓸쓸해보이고 어떻게 보면 화려한 양면이 있었다. 그 미모엔 사연이 느껴졌다.
이 경은 그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는 것에 이를 악물었다. 본능이 희 치의 품에 안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거부하려 이 경은 시선을 돌리면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이제 오직 신귀비만을 총애하기로 마음 먹었다."
희 치는 그런 이 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 경은 그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썼으나 형체도 있을리 만무한 아이가 아비를 찾는 것인지 희 치에게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아파왔다. 따금거리는 가슴에 이를 악물면서 이 경이 주먹을 쥐었다.
"그대를 앞으로도 그 전처럼 홀대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이 경을 잠시 바라보던 희 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려고 그를 들인겁니다."
이 경의 가슴이 내려앉는다. 이 경이 주먹쥔 손을 움찔하자 희 치가 이 경에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고 한다. 이 경이 눈을 질끔 감자 희 치의 손이 멈췄다. 허공에서 주먹을 쥐고 손을 거둔 희 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 아시잖습니까. 연기인거."
이 경의 숨이 멈췄다. 희 치는 희미하게 웃더니 이 경에게 말을 했다. 이 경은 정면에서 희 치의 독과 같은 외모를 보았다. 숨마저 향이 날 것 같은 아름다운 피조물을 본다. 극단적으로 흰 살결에는 핏기가 없다. 아니 희다기보단 시체같이 창백한 색. 생기하나 없는 그 살결은 상처 하나, 티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매끄러웠다. 적어도 드러난 부분은 그랬다. 희 치의 얼굴은 비인간적이었고 심지어 감정변화가 없었다.
그림이나 조각과도 같았다. 다소 날카롭고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매서운 눈매도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오히려 어울리다면 어울렸다. 가끔 그 크고 매서운 눈은 위압감을 주는가하면 엄숙했고 그런가 하면 고귀함이 서려 있었다. 또한 저 헝클어지지 않은 채로 길게 늘어트린 검은 머리카락은 반사하는 빛마저 검을 만큼 음영이 짙고 매끄러워보였다. 잔머리 하나없이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장발이면서도 보기 드물게 단정하다.
높은 콧대와 음영이 진 두 눈.
이 경은 숨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뒤에 숙였다.
희 치가 동굴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한다.
"피상화는 꽃내음이 옅으니 온실에 가겠습니까?"
이 경이 눈을 꾹 감는다. '희'가 여자였으면 좋겠다. '희'가 영선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경이 황제라도 이룰 수 없는 일은 있었고 이 경은 이를 악물다가 결국 희 치에게서 손을 뻗고 옷자락을 잡고야 말았다.
희 치가 순순히 팔을 뻗는다. 이 경이 희 치에게 몸을 기울이고 손목 안쪽의 체취를 맡았다. 항상 그렇듯이 씁쓸하면서도 정앙한 향이 났다.
이 경이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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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이 다리 난간에 손을 대고 온실의 연못을 내려다본다. 다리 위에 이 경의 얼굴이 넘실거리면서 비춰지고 있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면서 연밥을 구경하던 이 경이 연못에 비춰진 또다른 남성을 본다. 이 경보다 머리 두 개는 큰 남성이 마찬가지로 다리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껸채 이 경을 보고 있었다.
이 경은 연못을 통해서 희 치가 오직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에 잠시 생각하던 이 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새 꿈을 꾼다."
희 치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이 경이 조용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짐이 너를 싫어하지만 또 좋아하고 이젠 미움을 풀려고 하고 있으나 상황이 그렇게 너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말에 희 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경은 눈을 꾹 감고 난간을 잡은 손을 파들 떨었다. 연꽃 냄새에 희 치의 단아한 향이 섞여 있다. 이 경이 안정을 되찾아 안색을 편안하게 하더니 이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널 드문하게 볼 것이다. 나는 영선이를 더 이상 상처주기 싫어."
"......"
"너도 영선이를 알거야 그 아이는 좋은 아이고 자상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야. 나에게 얽매여서 그 아이는 좋은 꼴을 보지 못했지. 하지만 난 그 아이를 놓아주지 못했어. 나는 아마 심지어 내가 죽을 지라도 그 아이를 끌고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 마지막 말을 할 때 이 경은 잠시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다. 황후에게 이런 말을 하면 곤란하겠군."
그에 묵묵하게 그 말을 듣고 있던 희 치가 짤막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그 말을 하셔도 저는 그를 순장하지 않을겁니다."
"왜?"
"유언을 남겨도 하지 않을겁니다."
이 경이 난간에 기댄 몸을 바로하고 새까만 눈으로 그를 본다. 희 치가 그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째서? 아무리 벗이라도 그는 내 사랑도, 네 권한도 앗아간 정적인데?"
"제가 원한겁니다."
"어째서?"
집요하게 물어보던 이 경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한다.
"납득이 가지 않아."
"......"
"너희 두 사람."
그리고 희 치는 아주 긴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 경은 우울함과 애도, 그리고 죽음의 향수가 서린 얼굴을 보았다. 침묵은 아주 서늘했고 희 치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상념이 서리고 있었다. 희 치의 심유한 검은 눈은 과거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고 그는 곧 이 경이 떨만큼 음산한 목소리를 냈다.
"아주 오랜 과거에."
이 경이 긴장하고 그 목소리를 듣는다.
"지옥에서 그가 나를 그나마 구원하려 노력했었지."
"......"
"아무도 노력하지 않았건만..."
"......"
"백 영선 그 하나만이 날 동정하고 구하려고 발악했었어."
희 치가 우울한 미소를 짓는다.
"결국 실패했지만."
이 경은 그제서야 그 사람 사이에 곧 깊은 비사가 숨겨져있음을 깨달았으나 희 치의 그 위험한 분위기에 차마 말을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피했다. 희 치는 아주 오랜 과거를 헤매고 있었고 그 눈에는 슬쩍 위험한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서릴 때 그것은 태양전에서 '희'를 거론했을 때의 미소에는 없었던 광기가 스치고 있었다.
"넌.. 날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이 경이 충동적으로 말을 한다. 그 때 희 치가 고개를 돌려 이 경을 마주한다. 이 경이 그제서야 희 치의 날것 그대로인 감정에 노출되어서 맹수 앞에 사냥감처럼 몸을 오들 떤다. 희 치의 붉은 기운이 일렁거리는 두 눈에 웃음기가 담긴다.
"당신은 참 위험한 일에 스스로를 몰아 넣어."
이 경이 침을 삼키면서 희 치를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희 치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했다.
"크크크, 대체 얼마나 용감한건지... 내 인내심을 끊는 발언을 이리도 많이 할까."
"뭐.. 가."
이 경이 침을 삼키면서 간신히 입을 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희 치는 그에게 가까워져서 이 경은 자신의 바로 앞에 희 치의 턱이 보이는 것을 깨닫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희 치가 이 경을 쓰다듬으면서 귀여워하는 듯한 음성을 낸다. 자상한 목소리에는 자기 자신마저 주체할 수 없어하는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그저 적당히 모른척 하려면 되려만."
희 치의 이상한 상태, 그리고 낮은 웃음소리와 자신을 쓰다듬는 희 치의 손길에 이 경이 두려움을 느끼고 그를 빤히 바라본다. 이 경이 침을 삼키나 피하지 않고 희 치를 노려보았다. 이 경이 이를 악물고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대체ㅡ!!!!!"
기염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 경이 놀라서 옆을 바라볼때 흉신악살같이 얼굴을 일그러트린 주홍발의 청년이 그 둘을 노려보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경악한 얼굴로 미친듯이 달려온 청년이 희 치를 밀치고 이 경을 자신의 뒤에 숨긴다. 희 치의 몸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고 놀란 이 경이 청년의 옷자락을 쥐었다.
영선이 이 경을 등 뒤에 숨기고 희 치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희 치를 밀치는 영선이 격노하여 소리친다.
"너 이 새끼!!!"
희 치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직, 아무 짓도..."
그를 끓어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 영선이 이윽고 이 경의 손목을 잡고 거칠게 그를 이끌었다. 이 경이 넋을 잃고 그를 따라가다가 이내 손을 떨치고 소리쳤다.
"왜 이러느냐!"
그리고 이 경의 몸이 비틀거렸다. 영선이 그를 노려보더니 어깨를 잡고 근처 나무에 밀친다. 이 경이 마음이 크게 불안정하여서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다. 영선이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언제부터야."
"뭐라고?"
영선이 나무를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언제부터냐고?! 황후랑 단 둘이 있을 정도로 친해진게?!"
이 경이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본다. 영선이 보기 드물게 분노해서 이 경에게 이성을 잃고 달려들고 있었다. 이 경이 아까의 일도 있었고 심기가 어지럽고 가슴이 많이 놀라여 자신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다가 떼었다. 아직 임신 초기라 마음이 다급해진 이 경이 얼굴을 구기고 시선을 회피했다.
"너 가고.. 하지만 이젠 멀리 할테니 그만해라! 난 이젠.."
"황후는!!!!"
영선이 회피하려는 이 경의 어깨를 부여잡고 시선을 마주하려고 한다. 이 경이 그 때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제 시선을 피하고 소리쳤다.
"비켜라!"
영선의 손을 떨구고 휘청거리면서 자리에서 벗어난 이 경을 영선이 죽일듯이 노려본다. 이 경이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영선의 체취가, 그 존재가 이 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숨마저 쉬기가 힘들고 아팠다. 이 경이 몸을 벌벌 떨면서 시선을 돌린다. 최대한 본능을 죽이려고 마음 먹었을 때 영선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황후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되도 황후는 안돼."
"안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쟤가 저 지랄이야!!!!"
영선이 분노에 차서 나무를 발로 차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 경이 그 상식을 뛰어넘는 발언에 멍하게 영선을 바라본다. 영선이 분기를 참지 못해서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 미친 사람처럼 이 경에게 소리지르고 있었다. 이 경이 주춤거리면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난다.
너무나도 많이 이 경이 영선에게서 권위를 내세웠다가 피를 보았다. 그리고 이 경은 영선을 놓지 못했고 종국엔 황제로서의 자신을 죽이고서 영선을 사랑하고자 했다. 그래서 영선이 온 지금 희 치마저 내버려놓고 후궁마저 버려놓고 신의마저 버려놓고자 했다.
그러나, 저건, 저건..
차마 말을 못잇고 멍하게 바라보던 이 경이 이를 악물었다. 더 나아가면 성질머리에 그에게 함부로 할 것 같으니 이 경이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을 꾹 감고 주먹을 쥐고 떨었다.
서러웠다. 이 경이 눈물을 참고 조용히 말했다.
"안할테니 너도 말을 조심하거라."
영선이 그 말에 진정을 하고 간신히 정신을 차려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눈물을 참으면서 영선을 상처받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정신을 차린 영선이 상황을 깨닫고 멍하게 이 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이 경이 소매를 휘저어 그의 말을 막은 뒤에 등을 보이고 떠난다. 조용히 걸어 나가는 이 경은 평소와 똑같아 보였으나 영선은 그의 마음이 무척 상처받은 것을 깨닫고 허망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폐하, 폐하!"
이 경은 그 말에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내딛였다. 영선이 미칠 것 같은 심정에 머리를 부여잡고 멍하게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
"그게 아니라!"
답답한 심정에 소리친 영선의 말을 뒤로 하고 이 경이 눈물을 꾹 참고 몸을 돌리지 않는다. 영선이 할말을 잃고 이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느껴진 이 경이 모든 것이 서러워서 결국 등을 돌리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욕하면서 보는 맛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설문은 약 2:1의 비율로 영선이를 옹호하시는 독자분이 많은 것으로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