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망중요고번혹희(忙中要顧煩或喜) =========================
"부황? 뭐하세요?"
붓을 잡는 것을 본적이 없어 영선 전에는 시마저 외지도 못했던 이 경이 조용히 묵을 갈더니 무언가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이 신기해서 영경이 태양전 한켠에서 숙제로 내어준 사기를 읽다가 다가와서 옷자락을 붙잡는다. 이 경이 붓을 놓고 영경의 또랑한 눈을 잠시 바라본다. 이 태자는 자신을 닮지 않고 약영을 닮아서 무척 신중하고 침착했다.
이 경이 하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을 내려본다.
- 곁에 있음에도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이 몹시 괴롭다. 얼굴이 그리워서 나는 빨리 시간이 지나서 너와 같이 기뻐하고(喜) 싶다. 너가 방래산에서 있을 때는 칠천리 먼곳이라 갈 수 없다지만 방래산에서 너를 데려왔는데도 나는 너를 만나지 못하니 그것이 네가 혹시 마음이 다칠까봐 두렵다.
이중적인 의미가 담긴 시를 보던 이 경이 조용히 답했다.
"신귀비는 내게 시를 쓰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지."
"아바마마께서는 신귀비 마마께서 몹시 뛰어난 시인이라 했어요."
"그래."
이 경은 은은하게 웃으며 영경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영경은 자식 중에서도 눈치가 빨라서 이 경의 심기를 어지럽힌적이 없었다. 양인의 향을 역겨워하는 이 경은 자주 영경을 불러서 그를 쓰다듬고 끌어 안아서 마음을 다독였다. 회임중이여서 그런가 이 경은 영경에게 몹시 너그러워졌고 그와 함께 있을 때 안정을 찾았다.
"이 중화 역사상 백명의 시인 중 하나이고 이 아비가 볼 때에는 그 중에서도 제일이다."
"우와!"
"마음이 가는대로 일단 글을 적으라고 했어."
이 경이 침묵하여 글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본다.
"그것이 마음의 기록이고 진짜 시(詩)라고..."
투박한 글이나마 이 경은 진심을 썼고 그는 잠시 그것을 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영경이 조심스럽게 이 경의 기색을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부황은 신귀비 마마를 보고 싶은 거예요?"
이 경은 그늘진 얼굴을 한다. 쿵쿵, 심장 소리가 들린다. 희의 소리였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이 경을 짓눌렀다. 이 경이 날카로롭게 조소했다.
"그래."
괴로운 표정을 하며 이 경은 입 안을 짓이기면서 말한다.
"그는 나를 무정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결국 이 경은 종이를 손에 우그러트리곤 웃었다. 영경이 격한 이 경의 모습에 놀라서 그를 바라본다.
"부황."
"나는 그 앞에서 죄인이지!"
"부, 부황."
"감히 내가 황제임에도, 나는 항상 죄인이야."
이 경은 자신의 상황에 분노하였고 그럼에도 영선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를 가여워하는 마음, 미안한 마음과 황제임에도 수세에 몰려서 겁에 질려 떠는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 스스로를 자조했다. 영경이 울상을 지으며 이 경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다독이려했다.
"부황, 참으세요."
"......"
이 경이 거친 숨을 내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한다. 이 경이 그제서야 태내에 아기를 생각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희는 정말이지 고생을 많이 했고 이 경은 네 번의 회임보다 훨씬 고되고 힘든 임부생활을 했다. 이 경은 그리하여 그 전과는 달리 희가 불쌍하고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였다.
태어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아들이면 조국이 이제 허수아비니 그곳의 영지를 내려 친왕이 아닌 번왕으로 삼을 생각이었고 공주라면 가장 고귀하고 영준한 청년에게 시집을 보내고 혼수로 넓은 영지를 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고생하는 자식에 대한 이 경의 보상이자 마음이었다.
'희(喜)야. 조금만 참아라.'
이 경이 한숨을 쉬면서 영경을 도닥였다.
"아비가 미안하다."
"신귀비 마마와 다투신건가요?"
"아니, 그저 국정이 바쁘고 일이 복잡하여... 나를 귀비와 만나게 하지 못한다."
얼버무리는 이 경을 잠시 바라보던 영경이 중얼거렸다.
"생각해도 얻지 못하니 자나깨나 생각하네."
이 경이 그 말에 멈칫하다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 못 이루지."
이 경이 영경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관저(關雎)구나."
"올망졸망 마른풀을 이리저리 가려내고 얌전하고 아리따운 님과 금슬 좋게 사귀네!"
그렇게 말한 영경이 이 경의 무릎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려가고 다시 탁상 위에 앉아서 사기를 읽었다. 영경의 또랑한 눈을 잠시 바라본 이 경이 깊은 그리움에 휩싸여서 어두운 눈을 했다.
"관저라."
크고 작은 노랑어리 연꽃을 이리저리 따담고, 그윽히 아름다운 사람을 거문고와 비파로 벗삼을까.
이 경이 허탈하게 웃고 창 밖 관저궁이 있는 방향을 잠시 본다.
"너는 어찌하고 지낼까?"
배가 나와서 이제 복대를 하고 헐렁한 옷을 입어도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눈치가 빠른 영선이기에 이 경은 이제 곧 순어를 나가서 오개월간 그를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를 멀리할 생각이었으나 어쩐지 미친듯이 그리울까.
이제 오개월동안 보지 못하면 그 아이가 마음이 아파할텐데. 이 경이 고민이 가득하여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이 경이 고민 끝에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가 참 어울리긴 하구나."
이 경이 힘없이 웃으면서 중얼거린다.
"그 아이가 비파를 참 잘 타지."
관저궁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오직 그를 기다리던 청년은 하얀 냉기가 서린 옥비파를 받고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비파군요."
석 형일이 말한다.
"굉장히 좋습니다."
그 하얗고 매끄려운 표면과 은은한 광채에 감탄한 계자가 영선을 바라본다.
"아마 천하귀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궁중에서도 이런 것은 처음 봅니다!"
영선이 그것을 품에 안더니 무릎 위에 놓고 그것을 꼼꼼히 살핀다. 표면을 호갑투를 낀 손으로 쓰다듬고 영선은 속삭인다.
"한산지옥이다."
냉기를 뿜고 있으니 이것은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귀한 옥을 통채로 깎은 것이다. 그리고 영선은 호갑투를 끼지 않은 약지로 그것을 쓰다듬고 예기가 어린 날카로운 비파줄을 잠시 살피고 말한다.
"적철에 유리 녹인 것을 먹여 가늘게 뽑은 것이다. 웬만한 달인(達人)이 아니면 손가락이 잘린다."
계자가 그에 얼굴이 급속도록 창백해져 다급히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귀물.."
퉁!
그리고 계자는 맑고 깊게 울리는 샘물같은 소리에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검지로 그것을 튕긴 뒤에 영선은 웃으면서 계자를 보며 말했다.
"나는 '웬만한 달인'이 아니다."
계자가 그에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이윽고 고개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마마. 제가 마마의 능력을 알고도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마는 중화제일의 예인이시자 모든 음악인의 스승이십니다."
영선을 굳이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파를 품에 고쳐 안는다. 영선의 눈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고 눈에는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사근하게 풀려있었다. 속삭이듯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한다.
"가자... 그립다."
그 목소리에 석 형일과 계자는 할 말을 잃고 영선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애틋한 얼굴을 한 영선이 소중하게 한기가 나는 비파를 품에 넣고 양털을 덧댄 갖옷을 겉에 입는다.
그 재촉이 너무 간절해서 그들은 묵묵히 영선을 따를 뿐이었다.
태양전의 문을 열자 이 경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정무를 보고 있었다. 산처럼 쌓인 상소들과 그 옆엔 영선이 예전에 받아서 기겁했던 전국옥새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상소를 처리할 때 쓰이는 옥새가 따로 있었다. 영선이 잠시 그를 본다.
이 경이 기척을 느끼곤 붓을 내려놓고 문가를 바라본다. 이 경의 얼굴에 뼈가 도드라지고 눈이 움푹 파였으니 마른 것이 틀림없다. 황색 옷에 짙은 황사로 용 다섯마리가 꼬아져있는 황룡포를 입고 화려한 금관을 쓰고 있었으나 병색이 짙어서 영선은 차마 원망이나 그리움도 토해내지 못하고 악, 소리를 내면서 그에게 뛰쳐나갔다.
"왜 이래요?"
이 경이 자신의 뺨을 감싸쥐고 경악하여 말하는 영선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 경이 느릿하게 팔을 움직여서 손을 떨구었으나 영선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 경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 경은 그 전에 비해서도 몹시 마르고 초췌해보였다.
이 경이 그를 바라보다가 힘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영선아."
그 다정한 목소리에 영선의 몸이 멈칫한다. 이 경이 새까맣고 둥근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준 빙장음(氷長音)으로 비파행(琵琶行)을 치겠느냐."
잠시 이 경을 응시하던 영선이 이윽고 상냥한 목소리를 하며 이 경의 손을 붙잡았다.
"언제든지 비파를 타준다고 했잖아요."
영선이 다리를 꼬고 비파를 조율할 때에 이 경은 참 그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영선은 진지한 표정으로 몇번 날카로운 비파줄을 튕기더니 이내 긴 호갑투를 벗고 오직 오른손 검지에만 짧은 호갑투를 끼곤 비파행을 켜기 시작했다.
비파행은 운치가 있으면서 애처로운 소리가 난다. 꽉 차있는 소리가 아닌 힘을 빼어 쓸쓸한 단풍잎과 갈대꽃을 연상시키게 만들고 귀양한 백거이와 슬퍼하는 퇴기의 심정을 노래하여 그 속은 몹시 비어있으면서도 여백이 마음으로 채워져 있다.
음률 중에서 허툴게 빈곳이 없었고 음률 중에서 쓸데없이 찬곳이 없었다. 유려하게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배 위에 두 남녀가 떠오르고 쓸쓸한 비파소리에는 회한이 담긴다.
영선은 이 경을 보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묵묵히 비파행에 집중한다. 그것을 귀기울여 듣던 이 경이 끝을 마치는 순간에도 헤어나오지 못할만큼 그 음률에 집중했다가 한참 후에 탄식하면서 말했다.
"보물이 주인을 만났구나."
영선이 꼰 다리를 풀고 손에 있던 빙장음을 매만졌다.
"저는 보물보다 폐하가 보고 싶어요."
영선의 당돌한 말에 이 경의 몸이 잠시 뻣뻣하게 굳었다가 허탈하게 웃는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지칠 때 와서 비파를 탈 수 있니?"
영선이 쌓여있는 조정의 상소들을 보고 이해를 하여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부드럽게 웃던 영선이 속삭인다.
"저는 언제든지 폐하를 믿고 기다릴게요. 우리는 방래산에서 마음을 확인했잖아요. 사랑해요."
이 경은 굳어져서 대답하지 아니했고 영선은 그에게 다가가 그 뺨을 쓰다듬으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지 마세요."
이 경은 그 말에 감동을 받은듯 오랫동안 말없이 몸을 떨다가 물기가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말했다.
"부르겠다."
영선은 이 경을 그윽한 눈으로 보더니 몸을 숙여 절을 하고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이 경을 붓을 다시 쥐어 상소를 처리하려고 했으나 손이 떨려서 몇번이나 그를 놓치고 결국 붓을 벼루에 던진 후에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희야!"
이 경이 울먹이더니 배를 감싼다.
"너 어떻게 하면 좋니."
가끔씩 희에게 드는 원망을 감추지 못한다. 이 경은 영선을 사랑하는 마음에 희를 미워하다가도 그가 불쌍해서 울고야 말았다. 이 경은 심장이 콩콩 뛰는 소리와 묵직한 아랫배에 다시 희를 생각하고 괴로워서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너가 왜 하필 황후의 자식이냐.."
영선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예쁨받고 모두의 사랑을 받을 자식인데 이 경은 안심을 하지 못하고 온 세상을 적으로 두고 있다. 이 경은 갑자기 너무 속이 상하고 울화가 치밀어서 탁상을 잡고 한참을 격정에 떨다가 이내 붓을 집어 들고 이를 악물며 상소를 보고야 말았다. 이 경이 허탈하게 웃는다.
"내가 이러다가 성군이 되고야 말지."
그러나 이 경은 비파행이 자꾸 귀에 맴돌아 그를 부르다 못해 결국 관저궁을 찾아갔다. 눈치가 빠른 영선에게 들키지 않게 노력했으나 눈썰미가 좋은 영선은 이 경을 가느다란 눈으로 보더니 씩 웃으면서 이 경의 팔뚝을 잡으면서 말했다.
"살이 찌셨군요. 폐하!"
이 경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대충 소매를 휘저으곤 자리에 앉는다. 이 경의 가슴은 무거워져 있었다. 영선은 이 경의 뱃살을 잡고 잘 놀렸는데 오늘은 팔뚝을 잡았었다. 이 경이 눈을 질끈 감고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가 이내 빙그레 웃곤 빙장음을 꺼내어서 봉구황을 연주한다.
소리가 맑고 경쾌하면서도 인륜지대사를 원하는 봉의 심정이 절절하다. 이 경이 비파행과는 다르게 애절한 음률에 잠시 눈을 감고 감상하다가 음이 다 끝날때 조용하게 말한다.
"봉구황은 좋지만 그 결말이 너무 좋지 않잖느냐."
이 경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시인 사마 상여가 탁 문군에게 봉구황으로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으나 부친이 가난한 사마 상여를 싫어하여 내외는 도피하여 술집을 하여 살았다. 그러나 훗날 사마 상여가 성공하고 아내 탁 문군을 버리고 첩을 사랑했으니 이 경은 그것이 입 안이 쓰고 신경이 쓰였다. 영선이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파경중원(破鏡重圓)이 좋겠군요."
낙창공주가 서 덕언과 혼인하여 거울을 깨트려 그것은 혼인의 증표로 삼으니 훗날 나라가 멸망하고 낙창공주가 새황제의 후비가 되었으나 깨진 거울로 다시 서 덕언을 찾았다. 새황제가 낙창공주와 서 덕언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를 놔주었으니 곡은 밝고 경쾌했으며 희망이 차있고 아름다웠다. 여인의 흐느낌이 들리다가도 위로하는 음성이 있었고 곡 전체에 새가 조잘거리는 듯한 산뜻함이 있었으니 이 경이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져 그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파경중원의 연주를 끝낸 영선이 이 경을 응시한다. 영선이 이 경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말을 하지 않고 이 경을 본다. 이 경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휼륭하다."
영선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음률이라곤 한음도 모르셨던 폐하께서 이제 제 지음(知音)이시군요."
"그래."
이 경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음률이라곤 질색하면서 무시했던 나를 바꾸었다."
영선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제 지음은 심운화였습니다."
그 말에 움찔거린 이 경이 한참을 말하지 않다가 작게 말한다.
"나는 너를 이제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이 경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영선을 본다. 이 경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다만..."
그리고 영선이 뛰쳐 나가 이 경의 손을 꾹 잡고 그를 응시한다. 이 경이 죄책감에 시선을 피하다가 붉어진 눈을 하여 작게 말한다.
"내가 너에게 무얼 해줄까?"
"폐하."
영선이 크게 동요하다가 이 경의 손을 꽉 쥔채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지 마십시오."
"......"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이 너무 서글펐다. 영선이 자상하게 바라보는 것에 이 경이 잠시 격정에 휩싸여 있다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한다.
"언제든지.."
영선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제가 보고싶을 때에 관저궁으로 오세요."
이 경이 그 호박색의 묘안을 보면서 울컥한다.
"제가 한결같이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이 경은 잠시 입을 다물고 감정을 가다듬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결국 마음을 꺾을 수가 없었다.
아이와 연인 사이에서 어느 것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 경은 사무치는 그리움에 관저궁으로 향했고 정무가 끝나고 그에게서 비파를 듣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단 한시진의 만남이었으나 이 경은 생리적인 역겨움이나 경계심을 넘어서서 비파 소리에 안정을 찾았고 영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경을 대했다.
이 경이 부담감을 벗고 영선에게 웃으면서 대하고 이젠 거의 사이가 다정해져서 마음을 놓을 무렵이었다.
이 경이 영선이 가져다 놓은 다과를 입에 우물거리면서 작게 말했다.
"관저궁 다식은 참 달다."
영선은 다른 것은 몰라도 간식은 좋아했기에 씩 웃으면서 이 경에게 말했다.
"녹차 정빙(蒸餠)을 제가 만들었어요. 맵쌀로 밥을 지어 반죽해서 녹차 가루를 섞었어요."
이 경이 즐겁게 동글하게 찐 떡을 입에 넣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차는 음월전의 금훤이 최고지."
그 말을 하고 자신도 모르게 굳은 이 경이 시선을 피하면서 떡을 먹는다. 어두어진 얼굴을 한 채 목이 막혀서 맛도 모르게 턱을 움직이는 이 경을 바라보면서 영선이 말했다.
"음월전 정과도 참 맛있죠?"
"응? 으응."
"인삼을 꿀에 조리는 정과는 제가 알려준 거예요."
이 경이 그제서야 맛이 비슷한 것을 깨닫고 탄식했다.
"아, 어쩐지."
말을 돌리는 영선이 이 경의 옷매무새를 만지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잘 챙기시는 건가요?"
이 경이 다과를 향하던 손을 멈칫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밥은 잘 먹으세요?"
"응.."
영선이 웃었다.
"다행이네요."
이 경이 무언가 울컥하여 말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린다. 이 경이 볼 낮이 없어서 멍하게 관저궁의 가구들만을 바라본다. 소박하디 소박하고 화려하디 화려하다. 마음을 담아 관저, 부부 한쌍을 다짐하면서 영선을 방래산에서 불러왔다. 이 경은 정말 영선을 떠나기 싫었다. 그러나 곧 희가 몸에 받지 않아하여 영선을 꺼려하고 싫어했다.
속으로 이 경이 희에 대한 원망을 억누르려했다. 이 경이 소매를 떨치면서 자리에 일어나 떨리는 음성을 삼키며 말했다.
"맛있게 잘 먹었다."
이 경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더 싸줄 수 있겠느냐? 이거 맛있구나."
영선이 웃더니 말했다.
"당연합니다."
호갑투를 빼고 영선이 맨손으로 이 경의 뺨을 만진다. 이 경이 자신의 눈가를 스치는 부드러운 입술에 눈매를 풀고 그를 사랑을 담은 시선으로 보았다. 영선이 아득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몸 조심하세요."
몸은 태양전에 있더라도 항상 마음은 관저궁에 있다. 이 경은 관저궁에 마음을 놓고 나왔으며 그는 녹차 정빙을 야금거리면서 먹으면서도 관저궁을 바라보았다. 문득 배가 아플 때 이 경은 아랫배를 만지작 거리면서 아이를 낳으면 영선이 이 아이를 사랑해주길 하는 바람을 하곤 했다. 희는 분명 아름답고 착할 것이 뻔했다. 어쩐지 이 경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부모 중에 그 누구도 닮지 않는 순한 아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을 꿨다.
머리가 새까만 계집아이는 어릿하여 다섯살쯤 되어 보였다. 그 아이는 앙증맞게 두갈래로 나뉘어진 머리를 틀어 올렸는데 행인을 닮은 두 눈이 몹시 크고 또랑하여서 희 치의 눈과 비슷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흑벽의 두 눈에는 애교가 담겨 있었고 희고 깨끗한 피부는 눈과 같이 형형한 빛을 내었으나 희 치와 다르게 장미빛의 혈색이 돌았다.
이 경이 그 순간 그 아이가 누군지를 깨닫고 감격하여 중얼거렸다.
"희야."
아이가 웃더니 이 경에게 쪼르르 달려와 그 옷깃을 잡아 매달렸다. 이 경이 그 아이를 끌어 안아 멍하게 그 얼굴을 본다. 꿈결같을 정도록 아름다운 외모를 하여 헤헤 웃고 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순한 두 눈매가 너무나도 예쁜 아이였다. 이 경이 자신도 모르게 연신 입을 맞추면서 중얼거렸다.
"희야. 내가 너한테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영화를 안겨주마."
희가 자그마한 손으로 이 경을 붙잡는다. 희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이 경은 아이의 아주 실낱같이 자그마한 속삭임을 들었다.
"함께해서 기뻤어요."
사랑해요. 아빠.
이 경은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으나 그는 꿈에서 깨어나고야 말았다. 천장을 잠시 바라보던 이 경은 귓가에서 어른거리는 희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또 자신의 눈가에 눈물자국이 서려있는 것을 느꼈다. 이 경이 눈물을 닦고 중얼거린다.
"희?"
아쉬움이 그를 잠식한다. 슬프고 아련해서 미칠듯이 희를 보고 싶었다. 이 경이 넋을 잃고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을 때 이 경은 순간 자신의 배 아래가 당겨오는 느낌을 받고 얼굴을 창백하게 질렸다.
"희, 희야?"
불안감이 가득한 목소리를 낸다. 이 경이 그 꿈이 남긴 잔상에 퍼득 떨다가 이윽고 자신을 장악하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악!"
이 경이 고통 속에서, 흐릿한 시야 속에서 희의 얼굴을 본다. 이 경이 고통에 신음하다가 이윽고 허우적거린 자신의 손에 묻어난 피를 보면서 충격을 받아서 몸을 퍼득 떤다. 이 경이 공황에 빠져서 자신의 수족을 불렀다.
"류 사자!!! 류 사자!!! 아악!!"
황급히 달려온 류 태감이 피투성이가 된 침대를 보고 경악하여서 시종을 부른다. 이 경이 쓰러지면서 그 찰나의 순간에 희의 얼굴을 기억해내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런 거였니.'
태몽 따위는 꾼적도 없으면서 어쩐지 자신을 방문한 딸이 속삭였다. 이 경은 미칠듯한 그리움과 애통함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희는 너무나 예쁘고 착했다. 이 경은 절망을 느꼈고 영혼이 끊기는 듯한 격통에 휘말려 헐떡였다.
"희, 희를 살려줘..."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누군가의 옷자락을 꽉 잡고 이 경이 간절히 애원한다. 그가 누군지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이 경은 진심으로 애원을 하곤 곧 힘이 빠져서 손을 놓고야 만다. 스륵 옷자락이 손에서 빠져 나간다.
그리고 곧 이 경은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 작품 후기 ============================
전편 주석은 수정했습니다. 챕터 완결까지 두세편 남았네요! 도원향가는 육챕터 완결입니다.ㅇㅂㅇ. 물론 외전이 한권 분량이 더 있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