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여위열기자용 (女爲悅己者容) =========================
긴 소매가 펄럭인다. 소매의 규격은 엄격한 법도에 따라서 정해져 있었고 가장 웅장한 황금색 용포를 펄럭이면서 들어온 이 경의 얼굴은 면류관의 구슬로 엄히 가려져 있었다. 제왕이기에 신하들에게 감정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얼굴 위에 표정은 평소에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나 유난히 그 날에는 발걸음이 성큼거리고 얼굴에 냉기가 돌았다.
용봉이 그려진 옥좌에 소매를 떨치며 앉았을 때 일어 나서 황제의 입조를 배알했던 대신들이 한결같이 무릎을 꿇고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오직 황제만이 옥좌에 앉을 수가 있었고 죽방석 위에 앉은 대신들의 옷자락을 뒤에 있던 궁인들이 빠르게 가다듬어 바닥 위에 곧게 펼친다.
이 경이 옥좌 팔걸이의 용을 꽉 잡으면서 눈썹을 꿈틀 거린다. 얼굴은 가려져 있었으나 보폭에서 이 경의 심경이 드러났고 이 폭급한 황제의 성정을 알기에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경은 그러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그들을 비웃으면서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내려다보았고 결국 황제의 압력에 가장 지위가 높은 승상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폐하, 신 소 재도 말을 올리겠나이다."
그리고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 경이 조소한다. 면류관의 구슬이 자륵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올릴 것이 무어가 있나."
탕!!
당장에 팔걸이를 친 이 경이 노성을 지른다.
"보국 량천이 아비의 죽음을 슬퍼하여 흉심을 품어?! 감히 폐태자라고 하지만 짐이 보낸 인질을 죽이다니?"
그 순간 무언가 입이 근질거려 말을 하고 싶어하는 노신들이 많았으나 이 경이 워낙 흉흉하게 그들을 노려보아서 차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표정을 굳힌다. 이 경이 그 순간 분노하여 소리쳤다.
"조국왕가는 이제 시조의 피가 옅어져 용렬한 자들만이 태어나는구나!!"
그리고 이 경은 그들을 찬찬히 흝어보다가 이내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조께서도 유조를 남기실 때 조국왕의 후손이 차마 이런 역심을 가지게 될지 모르셨을 것이다."
조국왕가는 뿌리깊은 명문가라 그와 혈연과 깊은 친분으로 얽힌 몇몇의 몸이 움찔한다. 이 경이 그리고 쇄기를 박아 말했다.
"짐이 조국을 더 이상 봐주어야겠느냐?"
그제서야 참다 못한 친조국계의 신하 몇몇이 나선다. 그들이 황제 이 경에게 충성하기는 했으나 상황이 몹시 의뭉스럽기에 의리상 조국이 오명을 쓰는 것을 바라볼 수 없던 것이다. 원로 취급인지라 실권은 없지만 지위만큼은 신하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삼공 중 사도 윤 경이 소매를 모으면서 말했다.
"폐하! 아직 려 폐태자를 습격한 흉수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경은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눈짓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소 승상이 그를 보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국 땅에서, 조국의 화살에 맞아 황군이 다쳤는데 려 폐태자는 어디갔는지 소식도 없습니다. 윤 사도께서는 이것을 정녕 조국왕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그것은.."
"전 조국왕 보국 요리는 사촌 당왕이 폐태자 당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서 여러분 불손했지요."
그리고 그 말에 이 경이 차갑게 웃었다. 그것이 무언의 압박임을 안 윤 사도가 식겁해서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 경이 당왕 이 작교를 꺼려하는 것은 명백했고 또한 그 정통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보국 요리가 사촌 당왕을 불쌍하게 여긴 것을 모두 알고 있기에 그는 차마 역모에 얽힐까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었다.
그 때 헝부상서 운 덕건이 높고 진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폐하, 신 형부상서 운 덕건이 아룁니다. 비록 정황상 증거가 의뭉스럽지만 보국 량천은 부자간의 의리보다 군신간의 의리를 중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법도를 세우고 조국왕가를 위하여 크나큰 결심을 한 자인데 이제와서 그저 황태자도 아닌 려 폐태자를 살해하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운 덕건은 친 조국계도 아니었으니 사실 그처럼 생각하는 자가 많았다. 이 경이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아비를 잃은 슬픔이 그를 미치게 했음이 분명하지. 짐이 과연 아비를 죽이리라 예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허나.."
그 때 이부상서이자 아들 영 가도를 후궁으로 보낸 영 정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친다.
"조국에서 황군이 부상당하고 황실 핏줄이 사라졌으면 책임자가 당연히 조국왕이지 뭐가 그리 말이 많소? 정녕 흉수가 아니라도 범인을 찾지 못하면 죽을 사람이 필요하지!"
그 대놓고 주는 면박에 운 덕건이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는다. 이 경이 그제서야 소매를 떨치고 짤막하게 말했다.
"영 정도와 소 재도의 말이 옳다."
이 경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혐의를 벗을 수가 없고 서인 려 씨가 아무리 폐태자인이라고 하여도 내 피를 이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흉수가 아니라고도 못하고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서서히 목소리가 올라가고 그 말에 담긴 분노를 눈치챈 신하들이 고개를 조아린다. 이 경이 감정에 떨리는 목소리를 하더니 이윽고 분노하여 소리친다.
"보국 량천을 입조하게 하라!! 조정에서 그가 이 사태를 해명하도록 하라!!"
무어라 말을 하여 반발하려는 이들 앞에서 소 재도를 위시로 한 귀족들 여럿이 한목소리로 크게 말하여 말을 막았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강북귀족가들은 같은 귀족이라도 강남의 보국 가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다. 소 재도는 이미 혈연과 지연으로 굳건하게 묶인 귀족가와 입을 맞춘 상태로 당당하게 이 경의 말을 받들었다. 그들은 새로 등장한 유가의 무리나 신흥 무인들을 경계하였으나 그 이상으로 강북과 강남의 감정을 좋지 않았다. 차라리 병부와 손을 잡을 만큼 강북의 무리는 강남 귀족을 증오하였고 그 구심점인 조국을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이 경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들을 내려보고 소 재도는 이들을 선동하여 다른 이들의 입을 막았고 이미 끝난 상황에서 이 경의 성질을 알기에 다른 이들이 답답한 심정으로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소 재도가 눈치를 보다가 이윽고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말을 했다.
"신 소 재도, 말씀 올립니다."
이 경이 손을 들자 소 재도가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서인 려 씨가 정전에 병기를 들고 달려간 죄로 폐태자 되었으니 다시 동궁을 세우는 일을 논의되야 합니다. 후사의 문제는 어느 대사보다 중한 일입니다."
순식간에 이 경의 얼굴이 굳어진다. 소 재도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비 견 씨의 아들 한왕은 현재 장자(長子)이며 그 아비의 태생이 그 조상부터 황가와 얽힌 명문가였으며 지존의 고모이신 대장 공주의 손(孫)이니 혈통이 흠잡을 때가 없습니다. 또한 그 영민함이 그 스승인 거유(巨儒) 동악 선생이 감탄하여 칭찬하는 시문을 내릴 정도이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 재도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면서 울리는 목소리를 낸다.
쿵!
"폐하! 한왕을 황태자로 삼으십시오!"
그 다음에 귀족들 외에도 거의 조정 팔할의 신하들이 머리를 찧으면서 말을 했다.
쿵!!
"한왕을 황태자로 삼으십시오!!"
이 경은 잠시 그들을 바라본다. 바닥에 머리를 찧어 피가 나는 자도 있었으며 그들은 각각 지엄한 태도로 이 경에게 소청하고 있었다. 이 경은 잠시 차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사실상 이 경에게는 이 영오와 이 영연이 남았는데 이 영연이 실로 미진한 부분이 많으니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이 경은 금새 얼굴이 싹 변하여 노한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한다.
"짐이 건강에 문제가 있는가? 아니면 그대들이 정신이 나간 것인가?!"
쾅!!
이 경이 노발대발하여 발을 구르면서 분개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감히 짐의 후사의 일을 말하여 짐을 겁박하는 것이냐? 또한 민도공주(憫悼公主)가 죽은지 백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감히 짐에게 후사를 말해?!"
정전을 쩌렁하게 울리는 극노한 이 경의 목소리에 신하들이 당황하여서 고개를 들고 말을 한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신하들을 대표하여 소 재도가 말을 하자 이 경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을 한다.
"황후와 짐의 적녀가 흉수에게 죽었다! 추모를 해도 모자를 판국에 짐이 이제 적통을 낳지 못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냐?! 이런 개 같은 것들이 다 있나?!"
"폐하! 소신들이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쿵!
이 경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것에 그제서야 소 재도가 바닥에 다시 머리를 찧고 뒤이어서 편전 모든 신하들이 머리를 찧는다. 이 경이 한참을 욕지거리를 퍼붓고 눈을 이글거리면서 그들을 노려본다.
그제서야 몸을 떨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신하들이 몸을 한껏 웅크려 이 경에게서 시선을 피하고자 한다. 충혈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채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이 경이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짐의 후사는 짐이 알아서 결정한다. 짐이 원할 때에 다시 태자 문제를 꺼낼 것이니 더 이상 말을 하면 짐과 황후 내외에 대한 모욕이라 간주하겠다."
이 경이 날카롭게 소리친다.
"퇴청하라!"
탕!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오는 이 경의 발걸음이 몹시 빠르고 표홀하다.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는 편전 아래에서 각각의 사정을 가진 이들이 복잡한 표정을 하여 엎드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묵묵히 몸을 엎드리고 있던 소 재도가 눈을 감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민도공주라.'
이 경이 그 희 치와의 사이에서 기어코 자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소 재도가 얼마나 기겁을 했던가. 희 치의 능력과 그 미모를 경계하던 소 재도는 그 사산된 아이가 황녀라는 점에 안도하였으나 이 경이 결국 피임을 포기한 것을 깨닫고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또한 이 경이 죽은 황녀에게 법도를 어기고 슬퍼하고 애통한다는 의미의 시호, '민도'를 내리고 공주로 봉하였으니 그것이 준엄한 황실 법도에 크게 어긋나 말리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이 경은 그들을 극도로 미워하여 몇몇을 때려 죽임으로써 말을 막았다.
민도공주는 심지어 정식으로 이 희륭(梨喜隆)이란 이름을 받고 황실 족보에 올랐으며 이미 정해져서 건설중인 이 경의 황릉 옆에 묻혀져서 그 자리에 제희묘(帝姬墓)를 짓게 하였으니 모두가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 경이 그에 모잘라 사제희문(思帝姬文)을 짓게 하여 묘소에 바치게 하였고 황성 동궁 근처에 죽은 딸을 생각한다는 의미의 사녀궁(思女宮)을 짓게 하였으니 동궁은 태자궁이라 그 주변에 황손이 기거할 수 없었고 함부로 중축이 불가능한 곳이지만 이 경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곳에 사녀궁을 만들어 죽은 딸을 추모했다.
그러니 이 경이 적녀를 잃은 슬픔이 헤아릴 수 없이 깊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소 재도는 그에 크게 불안감을 느끼고 더 이상 이 경이 희 치를 사랑하기 전에 강북최고명문가의 자손인 위비 견 진의 자식 이 영오를 태자로 올리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경이 지금 거부하는 것이 소 재도는 왠지 모르게 자꾸 불안하였다. 민도공주가 죽은지 백일이 채 되지 않아 성급한 감도 있다는 것은 알지만 소 재도는 어쩐지 불안감을 가시지 못하였다. 이 경의 지금 반응은 그의 애통한 심정도 대변하지만 그 부친인 황후 희 치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도 되었으니까.
소 재도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빈 용상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쉰다.
'그나저나 이 작교는 이제 죽을 때가 되었나?'
문득 그 생각을 하던 소 재도가 조용히 그 주변에 앉아 있던 신하들을 둘러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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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당에 향이 뭉게 퍼진다.
황룡이 그려진 금호갑투를 손에 끼고 검은색 연미 비단을 입은 청년이 무릎 꿇어 앉아 있다. 눈이 감겨 있고 눈매는 날카롭게 그 끝을 올렸으며 주홍색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흑색 전자로 덮고 그 아래를 검은 면사로 가린다. 옷에는 금사로 화려한 황룡을 그리고 백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하였으니 그 차림은 몹시 화려하였으나 얼굴은 몹시 평온하고 단정했다.
청년은 호갑투를 낀 손을 모으고 불상 앞에 꿇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그리하고 있던 청년이 두 눈을 뜬다. 황갈색 묘안이 드러나고 잠시 불상을 바라보던 청년의 뒤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궁궐을 관리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이 경이 문에서 홀로 서서 그를 구경하다가 얘기를 한다. 청년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러나 이 경이 그에게로 다가가 그 옆에 앉아서 그를 강렬한 눈으로 응시했다.
청년이 고개를 돌려 이 경을 바라본다. 이 경이 슬픔에 가득찬 눈을 하여 그를 보다가 말한다.
"그러나 항상 이곳에 오면 애통하고 슬프다."
이 경이 눈을 꾹 감다가 말을 했다.
"희는 좋은 곳에 갔을 것이다."
영선이 대답을 하지 않고 손을 모은채 불상을 바라본다. 희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 영선은 이미 몸이 좋지 않은 희 치에게 내명부 관리권한을 넘겨받은 상태였다. 희 치는 황녀를 잃은 당일날 이성을 잃은 이 경이 던진 화병에 맞고 폭행당하여 갈비뼈가 부러져 내려앉았으며 중상을 입어 심각하게 앓았다. 그러나 그 몸의 부상보다 더 심각한 것은 충격에 어지러진 기혈이었고 진탕된 내부가 희 치를 갉아 먹어 그는 한동안 사경을 해매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영선이 그런 희 치에게 황후의 권한을 위임받았으나 영선 또한 불자로서 희의 명복을 빌고 애통함을 달래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기본적인 권한을 위비 견 진에게 위임하여 이 경이 지은 안녕사(安寧寺)에서 기도를 드리니 황실에서 믿는 종교가 도교고 이미 태진원이 황성에 있는데 불당을 짓는 것에 반발이 있었으나 이성을 잃은 이 경의 앞에서 감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이 안녕사는 최초의 황성에 지어진 절이었다.
이 경이 그 옆 방석에서 앉아서 가만히 불상을 바라본다. 온화한 그 미소를 바라보던 이 경이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 하지 않는다. 잠시 후에 쓸쓸한 목소리가 나왔다.
"극락왕생이라 하던가. 불교에서는?"
영선이 입을 열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하여 산 자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지요."
잠시 말이 없던 이 경이 그 옆에서 그 또한 손을 모아 기도를 한다. 두 사람이 안녕사의 불당에 나란히 앉아서 한참을 눈을 감고 희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불쌍하게 죽은 황녀가 두 사람에게 큰 슬픔이 되었으니 종교로 마음을 달래어 희가 극락으로 갔다고 믿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다. 이 경은 언젠가부터 영선의 옆에 앉아서 같이 기도를 드리는 일이 잦았다. 본디 독실한 불교 신자인 모후에게서 자랐으나 불심이 없던 이 경이었는데 안녕사를 지은 후로부턴 마음이 점차 온화해지고 가라앉아 크나큰 애통함을 달랠 수 있었다.
희 치가 생부였으나 그 두 사람은 마치 희의 육친인 마냥 나란히 앉아서 황녀를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다.
이 경은 아직도 희 치를 용서할 수가 없었고 음월전에도 가지 않았으며, 영선에게도 아직 때때로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엄연히 남의 자식인 희를 대하는 태도에 크게 감동을 받아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영선도 이 경도 아직은 황녀의 죽음과 그들 사이의 감정이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깊은 말을 주고 받고자 하지 않았다. 상처가 크기에 그 둘은 서로를 원망하지는 않으나 가까이 하지도 않은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타운 상처가 아물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를 믿었기에 확신한 일이었고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인내심을 가지고자 하는 일이었다.
오직 그 둘이 만나는 곳은 이곳 안녕사였다. 영선과 이 경은 한동안 안녕사에서 꿇어 앉아서 기도를 하다가 이 경이 조국에 관한 일이 바빠 먼저 자리를 떴다. 영선이 기도를 하던 도중에 눈을 스륵 뜨고 은은한 미소를 짓는 석가의 상을 바라보았다.
심유하게 가라앉은 두 호박색 눈이 불상을 담는다. 영선은 한참을 불상을 보다가 손에 든 염주를 굴리고 눈을 조용히 침잠한다.
영선도 안다.
이 경이 영경을 빼돌린 자신을 눈치챈 것을 안다. 그것은 영선이 굳이 숨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고 오 상환에게 언질했던 바이기도 했다.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던 오 상환을 기억한다. 자식을 직접 손으로 베어버린 비정한 아비는 차마 손자를 보호하는 귀비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영선은 오 약영이 죽기 전에 자식을 살려달라고 애원한 것을 기억했으며 핍박받을 어린 태자를 내버려두지 못했다. 그는 조국 땅에서 사람을 보내 황군을 습격하고 영경을 빼왔다. 영경은 지금 사가에서 보호받고 있었으니 광증이 들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영선이 잠시 영경의 얼굴을 생각한다. 이 경을 닮기보단 약영을 쏙 빼닮은 얼굴이지만 그는 어쨌거나 이 경의 자식이었다. 영선이 그를 빼온 것은 조국 땅에서 영경을 빼돌리는 것이 조국을 손보려는 이 경에게 유리한 명분이 될 것임을 계산한 까닭도 있었으나 그것이 사랑하는 그가 제 아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한 까닭이 컸다.
정치적 상황과 복잡한 마음이 맞물리니 이 경은 말을 하지 않았고 영선도 말을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영선은 말을 하지 않고 불상을 바라본다. 마음을 알았으니 말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천천히 상처가 낫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덧. 방금 전에 휴가에서 돌아오고 오늘은 쉬려는데 감동받아서 일찍 올립니다ㅠ.ㅠ 답변 크게 도움되었습니다!
휴가 다녀와서 84화에 달린 댓글들 모두 다 천천히 정독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동안 크게 고민한 것이 있는데 사실 제가 저 스스로 글이 너무 헤비해지는 것을 경계해서 피드백이나 반응에 기민하게 반응을 하긴 했습니다. 특히 이 경이를 수정을 많이 했어요ㅠ.ㅠ 이 경이가 원래 성격이 더 막무가내에 꼰대스럽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는데 반응을 보고 곰곰히 살펴보니(그저 독자분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반응을 보고 다시 생각해보고 글에 득이 되는 조언일지 따져봅니다!) 바람기는 잡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수정을 하였으나 너무 사랑꾼이 되어 버려서 캐릭터가 상당히 변화한 상태입니다ㅠㅠ 원래는 더 황썅...
그리고 지금 여위열기자용 파트를 고민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파트에서 모든 것이 터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쓰고 싶었던 파트이자 바로 작품 전체에 팍팍 뿌렸던 떡밥을 모두 다 회수하는 회차라 도원향가의 제일 하이라이트가 될 예정인데... 문제는 이 과정에 독자여러분들이 답답해하실 요소가 있어서 공지를 드렸습니다. 저는 황성이라 이 경이 후궁전 들락날락 하는 것을 쉽게 생각했으나 희 치 아이 가졌을 때도 이미 이 경에게 실망했다는 반응들이 많아서 이 챕터가 아마 크게 답답할 요소들이 중간에 있을 것 같아서요.
원래 스토리 라인대로 따라가는 것과 약간씩 수정을 가해서 유도리 있게 가는 것을 고민했는데 결심했습니다. 그저 원래 스토리로 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답답하지만 응원해주신다는 말을 들었으니 수정을 가하지 않고 원래대로 진행이 될 예정입니다.
중반에는 크게 충격을 받으실 수 있으나 후반에 사이다(?) 반전(?)이 그나마 있으니 답답하신 분들께서도 진행 중에 참아주시길 바라요. 댓글창에 얼마든지 욕을 써도 좋습니다만 독자분들이나 저를 겨냥하는 말을 삼가해주시길 바랍니다ㅠ.ㅠ 현대가 아니니 그 전도 감안을 해주시길 부탁드려요.
정성들인 답변들 너무 다 감사드려요! 정말 고맙습니다!
제게 있어서 꼭 필요한 반응이었는데 답변이 도움이 크게 되었어요!
여러분들 너무너무 사랑합니다!